印光大師 嘉言錄(인광대사 가언록)
옮긴이 김지수(寶積)
2. 극락왕생은 믿음과 발원 지닌 염불 수행으로(5)
보통 사람들의 불교에 대한 온갖 시비 논쟁을 가만히 살펴 보면, 한마디로 범부중생의 지식 견해로 부처님의 지혜를 추측하는 망상일 따름이라고 하겠소. 우리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안으로는 몸과 마음에서부터, 밖으로는 사물 경계에 이르기까지, 도대체 그 어느 것 하나라도 왜 그러한지 이유를 알 수 있겠소? 경험 지식이 쌓이면서부터 앞 사람들이 행하는 바를 보고, 자기 또한 따라 행하여 몸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려가며, 몸과 마음이 편안하게 즐거움을 누리는 것 아니겠소? 그렇게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자유자재로이 활동하면서 그 이익을 받아 쓰는 것일 게요. 그런데 여래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부처가 부처인 까닭과 정토가 존재하고 설법되는 이유조차 알지 못하면서도, 부처님과 조사들의 성실한 말씀을 믿으려고도 하지 않는구료.
예컨대, 우리가 하루종일 밥 먹어 굶주림을 채우고 옷 입어 추위를 막는 일상생활의 근본 이유를 알겠소? 모르겠소? 만약 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거들랑, 아는 자가 과연 누구인지 정확히 끄집어 말해 보시오. 딱히 이렇다고 말할 수 없으면서도, 여전히 앞 사람들이 해온 대로 옷 입고 밥 먹는 것 아니오? 그런데 왜 생사해탈을 인도하는 최고 제일의 미묘 법문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 이유를 먼저 안 다음에 믿음을 내겠다고 고집부리오?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간절하고 성실한 말씀만 듣고는 결코 믿음을 가질 수 없단 말이오?
또 사람들이 병에 걸려 약을 먹어야 하는 경우, 먼저 스스로 본초강목이나 진맥비결같은 의약 서적을 두루 뒤적여, 약의 성질과 병의 원인을 직접 확인한 다음에, 비로소 처방전을 쓰고 약을 지어 먹겠소? 만약 곧장 의사 처방대로 약을 먹는다면, 질병 치료와 (생사 해탈을 위한) 불교 수행이 서로 어긋나게 될 것이오.
설령 자신이 본초강목이나 진맥비결 같은 의약 서적을 두루 펼쳐 보고, 약의 성질과 병의 원인을 알아낸다고 할지라도, 이 또한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려는 수행과는 서로 다르게 되오. 왜냐하면 자신이 몸소 보고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오. 지금 사람들은 굶주림을 채우고 추위를 막으며 병을 치료하는 근본 원리를 직접 보지 못하면서도, 누구나 밥 먹고 옷 입으며 약을 복용하고 있소. 그런데 부처가 되고 정토에 왕생하는 근본 원리만큼은, 자신이 몸소 보지 못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설령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성실한 가르침이라도 죄다 믿지 않으려고 고집불통을 부리고 있으니, 이는 도대체 무슨 까닭이겠소?
이는 다른 게 아니오. 전자는 목숨과 직접 관련도기 때문에, 비록 모르더라도 감히 그대로 따라 행하지 않을 수 없소. 반면, 후자는 생명과 직접 관련이 없어 보이므로, 스스로 고명(高明)하다고 뻐기면서 반드시 그 법문을 철저히 보고 안 다음에, 비로소 수행하겠다는 차이뿐이오. 예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수많은 천재와 영웅호걸들이 이러한 지식 견해 때문에 평생토록 부처님 정법의 실익을 얻지 못한 줄 아시오?
그들이 어리석은 지아비와 아낙이라고 비웃던 사람들도, 처음에는 역시 아무것도 모른 채, 단지 앞사람들이 하던 대로 따라 염불 수행을 믿고 받아들여 행하다 보니, 점차 부처님의 지혜와 은밀히 통하고 오묘한 도에 부지불식간에 합치하게 되어, 마침내 업장을 짊어진 채 극락왕생 하였다오. 그 가운데 더러 미혹과 번뇌를 다 끊고 왕생한 사람은, 모두 부처님의 과위를 곧 증득하게 될 것이오.
반면, 스스로 대단한 인물이라고 뻐기는 자들은, 의심 때문에 비방까지 서슴치 않아 영겁토록 삼악도에 떨어지는 것이오. 그래서 그들이 어리숙하다고 비웃었던 평범한 지아비와 아낙들이 염불 수행으로 극락왕생하여, 도리어 그들을 동정하고 연민하여 구원해 주고 싶어도, 어쩔 수 없는 지경이 된다오. 왜냐하면 전생에 믿지 않고 비방한 죄악의 업장이 그들을 뒤덮고 있기 때문이오. 그런데도 세간의 총명한 재주꾼들은, 마치 마야(莫邪)와 같은 훌륭한 보검(寶劍)을 가지고 진흙 덩어리나 자르는데 쓰듯, 자신들의 고귀한 지혜를 자 활용하지 못하는구려. 보검으로 진흙을 발라 보았자, 진흙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으면서, 괜히 칼날만 손상될 것이 불보듯 뻔하니, 어찌 슬프지 않으리오?
부처님의 법은 마음의 법으로, 세간의 어떠한 법으로도 비유할 수가 없소. 부득이 비유를 쓰는 것은, 사람들에게 그 의리(이치, 뜻)를 알아차리도록 전함이오. 그런데 어떻게 구체적 비유 사실에 집착하여, 틀에 박힌 듯이 추상적인 본체를 논할 수 있단 말이오? 부채를 들어 달을 가리키면 반드시 부채 위에 광명을 쳐다보고, 나뭇가지 흔들림으로 바람을 비유하면 나뭇가지 위의 공기 흐름을 알아차리는 것도, 지혜라고 부를 수 있겠소?
꿈속의 경계(夢境)는 가짜이고 인과(因果)는 진짜인데, 꿈속의 경계로 인과를 비유하여 본체와 서로 부합시키는 것도 상관없소. 왜냐하면 허망한 마음이 원인이고, 꿈속의 경계가 결과로 나타나기 때문이오. 만약 허망한 마음이 없다면, 꿈속의 경계도 결코 없을 것이오. 이는 만고불변의 확정된 이론이오. 선악이나 수행하는 마음 같은 사실은 원인이고 선악과 수행의 과보를 얻는 것이 결과인 줄을 그대는 믿겠소? 못 믿겠소?
허망한 마음이 꿈의 원인이 되어, 그 결과로 꿈속의 경계를 얻게 되오. 마찬가지로 염불을 하는 마음이 결국 부처의 도를 원만히 성취하는 과보를 얻을 것이라고 말한다면, 과연 그대의 의심을 더욱 키우겠소? 아니면 그대의 믿음을 일으키겠소?
부처가 궁극의 존재인지 여부는 우선 접어두고, 사람들이 반드시 먼저 부처의 존재 여부 자체를 따지려고 하는 점부터 봅시다. 과연 우리들 자신이 궁극에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자문해 봅시다. 만약 없다고 한다면, 바로 그 판단은 누가 말하고 기술하는 것이오? 또 만약 있다고 한다면, 그렇게 말하고 기술하는 자(주체)를 한번 정확히 끄집어내 보시오. 말(언어)이란 목구멍과 혀가 의식 및 마음과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소리로 나타나는 것이오. 글(문자)도 단지 손과 붓의 움직임을 통해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이오. 말과 글 이 두 가지는 모두 색(色) · 수(受) · 상(想) · 행(行) · 식(識)의 오온(五蘊)일 뿐, 어느 것도 우리들 자신은 결코 아니오. 이 다섯 가지 법을 떠나 뭔가 끄집어 낼 수 있다면, 부처가 과연 존재하는지 여부를 따지는 것은 정말 대지혜의 질문이 될 것이오. 그렇지 않고 자신의 존재 여부조차 딱히 끄집어낼 수 없으면서, 먼저 부처가 존재하는 여부를 따지겠다면, 이는 헛되고 쓸데없는 미치광이 질문일 뿐, 결코 자신에게 절실하거나 진리를 궁구하는 질문은 아닐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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