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필독!경전,법문자료/4. 인광대사의 가언록

화두 놓고 염불하세(19)

   

 

印光大師 嘉言錄(인광대사 가언록)

                                                                                   옮긴이 김지수(寶積)

 

 

 

그런데 선도 화상을 스승으로 삼은 사람도 그 말씀을 따르지 않을 줄 누가 알았겠소? 그러니 그 가르침에 따른 사람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구료. 그리하여 이치에도 가장 부합하고 근기에도 딱 들어맞는 최상의 법문을, 눈앞에 보고도 그냥 지나치기 일쑤요. 결국 참선도 없고 정토도 없는 아득한 업식(業識)으로, 의지할 근본 바탕도 없이 윤회 고해를 혜매고 있으니, 이 어찌 숙세의 악업 때문이 아니겠소? 정말 슬프기 짝이 없소.

 

정토 법문을 수행하는 사람은, 결코 의심하지 않는 이치를 지녀야 하오. 하필 다른 사람들의 효험을 물어보려고 한단 말이오? 설령 온 세상사람들이 죄다 효험이 없다고 증언하여도, 한 생각의 의심이라도 내어서는 안 되오. 부처님과 역대 조사들의 성실한 말씀이 믿고 의지할 만하기 때문이오. 만약 다른 사람의 효험을 묻는다면, 이는 부처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지극하지 못한 때문이오. 엿보고 기웃거리는 요행심으로는, 어떤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소. 영웅과 대장부라면, 결코 부처님 말씀을 내버리며 사람들 말을 믿고 따르지는 않을 것이오. 자기 마음 한가운데에 주인이 없이 오로지 사람들의 말을 효험 삼아 앞길을 나아가는 스승으로 삼는다면 어찌 슬프지 않겠소?

 

중생들의 습관 기질은 각자 편협한 데가 있기 마련이오. 어리석은 자는 용렬(庸劣)함에 치우치고, 지혜로운 이는 고상(高尙)함에 치우치오. 만약 어리석은 자가 다른 마음을 섞어 쓰지 아니하고 오로지 정토수행에만 전념한다면, 금생에 결정코 극락왕생할 것이오. 이것은 (공자가) 이른바 “(그 지혜로움은 남들이 미칠 수 있지만), 그 어리석음은 미칠(따를) 수 없다(其愚不可及也).”는 뜻이라오.

 

그리고 지헤로운 이가 자기 지혜를 믿고 뽐내는 일 없이, 그래도 부처님 자비 가피력에 의지해 정토에 왕생하는 법문 수행에 종사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정말 대지혜요. 그러나 혹시라도 자기 견해를 믿고 정토를 무시한다면, 미래 겁이 다하도록 육도 윤회 고해에 빠져 허우적거리면서, 금생에 비웃던 어리석은 범부를 뒤늦게나마 따라가려 해도 결코 안 될 것이오.

 

법성종(法性宗)이네 법상종(法相宗)이네 선종이네 교종이네 하는 법문 수행에 심오하게 통달한 사람들은, 나도 진실로 경애하고 흠모하오. 그러나 그들을 감히 따라갈 생각은 없소. 왜냐하면 줄이 짧은 두레박으로는 깊은 샘물을 길어 올릴 수 없고, 보자기로는 큰 물건을 쌀 수 없기 때문이오.

 

물론 모든 사람이 죄다, 내가 하는 대로 본받아 따라오라는 말은 아니오. 그러나 나와 같이 비천하고 열등한 사람이, 깊이 통달한 대가의 행위를 배워, 곧장 자기 마음을 미묘하게 깨닫고 가르침의 바다를 이리저리 뒤적이고 싶지는 않소. 만약 그렇게 한다면, 내 생각에는 아마도 통달한 대가는 되지 못하고, 도리어 그저 진실한 염불로 극락왕생하는 어리석은 범부나 아낙들의 동정과 연민이나 받지 않을까 두렵소. 이 어찌 이른바 잔재주 부리다가 크게 볼품없어지고, 허공을 뛰어오르다가 깊은 연못에 추락하는 꼴이 아니겠소? 요컨대 한 마디로 말하자면, 자신의 근기를 스스로 살펴 헤아리자는 것이오.

 

사람이 세상살이(處世) 해 나감에는, 모름지기 하나하나 자신의 본분에 합당하게 처신해야 하며, 분에 넘치는 허튼 생각이나 계획은 함부로 내서는 안 되오. (공자가) 이른바 군자는 자기 지위(신분)를 벗어나지 않으려고 생각한다(君子思不出其位).”는 말이오. 군자는 평소 자기 지위에 맞춰 행동한다(君子素其位而行).”는 말도 있지 않소?

 

보통 사람들은 설사 정토법문에 대한 신심을 강하게 낸다 할지라도, 여전히 고생한 것을 좋아하고 특별한 것에 힘쓰려는 염두는 놓아버리지 못하오. 더구나 평범한 지아비나 아낙들처럼 어리숙하기는 몹시 싫어하오. 그러나 생사윤회를 끝마치는 일은, 어리숙한 지아비나 아낙들이 훨씬 쉽다는 사실을 반드시 알아야 하오. 그들은 마음에 다른 생각이 없어 전념할 수 있기 때문이오.

 

만약 선종과 교법에 통달한 사람이 온 몸을 놓아버리고, 평범한 지아비나 아낙들처럼 어리숙한 염불 공부에 전념할 수 있다면, 역시 아주 쉽게 되오. 그렇지 못한다면, 선종과 교법에 통달한 고상한 사람이, 도리어 업장을 짊어진 채 극락왕생하는 평범한 아낙들만 못하게 되오. 정토 법문은 극락왕생이 주요 핵심이오. 인연에 따라 자기 분수껏 힘닿는 대로 그 뜻을 오롯이 일념에 집중시킨다면, 부처님이 사람을 속이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오. 그렇지 않고 특별히 높이 올라가려다가 도리어 추락하고 말면, 이는 스스로 잘못 망친 것이므로, 결코 부처님께 허물을 탓할 수는 없소.

 

라대산(羅臺山)이 극락왕생하지 못하고 복락을 누리는 곳으로 떨어지고 만 것은, 문자(文字)의 기질과 업습이 너무 무겁기 때문이오. 문자의 업습이 너무 무거우면, 비록 염불한다고 말할지라도, 실제로는 문자 속의 공부에 맴돌 뿐이오. 염불공부는 단지 문 앞 체면만 겨우 지탱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오. 이는 라대산 한 사람뿐만 아니라, 문인(文人)들에게 공통되는 일반 병폐라오. 세간의 지혜와 변론 · 총명을, 부처님께서 팔난(八難)가운데 하나로 손꼽으신 까닭도, 바로 이 때문이오.

 

정토법문에 믿음을 아예 내지 못하거나, 믿음을 내더라도 진실하고 간절하지 못한 것은, 업장이 너무도 깊고 두텁기 때문이오. 이런 사람은 생사고해를 해탈하고 성현의 경지에 들어갈 자격이 없어서, 영원토록 이 사바세계에서 벗어날 기약 없이, 늘 육도 윤회를 반복할 수밖에 없소. 설령 인간이나 천상에 생겨나더라도, 그 시간은 마치 나그네가 여관에 잠시 묵는 것처럼 아주 짧다오. 그러다가 한번 삼악도에 떨어지면, 그 기간은 마치 고향 집에 안주하는 것처럼 몹시 길게 지속되오. 이런 사실까지 생각이 미칠 때면, 매양 마음이 섬뜩 놀라고 머리카락이 쭈뼛이 서는 듯하오. 그러기에 쓴 입맛을 아끼지 않고, 듣기 싫어할 이야기를 같은 수행인들에게 간절히 알려 주는 거라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