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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4. 금강륜

덕원암법문(1998년4월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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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0416-덕원암법문-DA-청화큰스님설법-보광선-금란-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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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yWord : 삼존불(三尊佛) 점안식(點眼式), 진여불성(眞如佛性)의 오직 하나의 부처님, 하나의 도리(道理), 일체중생(一切衆生) 개유불성(皆有佛性), 불신충만어법계(佛身充滿於法界), 입불이(入不二) 법문, 무아(無我), 연기법(緣起法)과 중론게(中論偈), 무명(無明), 무명은 모두가 진여불성 부처님뿐임을 모르는 것, 도업(道業)만이 성불(成佛)로 가는 길, 해탈(解脫)의 복(), 단공(但空)과 진공(眞空), 무생법인(無生法忍), 원만덕상(圓滿德相), <가장 큰 보시>,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요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 돈오(頓悟)와 점수(漸修), ()을 통과(通過)해야 중도(中道)가 보입니다. 천도법문(薦度法門), 참다운 행복(幸福), 신시보장제일법(信是寶藏第一法), 본원(本願), 우주는 바로 이대로 화장세계(華藏世界), 진아(眞我), <극락세계의 그 찬란한 광명세계 광명정토의 모습을 생각하십시오.>, <참다운 불교철학(佛敎哲學)이 참다운 실존철학(實存哲學)이고 참다운 형이상학(形而上學)입니다.> 상락아정(常樂我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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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존불(三尊佛) 점안식(點眼式)>

 

오늘 여기에 거룩한 청정도량(淸淨道場)에 성스러운 인연이 도래해서 대덕스님들을 위시해서 신심이 사무친 우리 사부대중이 이렇게 장엄스럽게 모이셨습니다. 오늘 법회는 주로 삼존불(三尊佛) 점안식(點眼式)과 또는 인연 있는 모든 영혼들의 천도식을 봉행하는 그러한 법회입니다.

 

오늘 모신 부처님은 가운데 계시는 주불은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이고 그리고 좌불 왼쪽에 계신 분은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님이시고 오른쪽은 지장보살(地藏菩薩)님입니다. 또는 그 외에는 조그마한 부처님이 많이 계십니다.

따라서 그렇게 여러 부처님들을 모시는 우리 불자님들은 잘못 생각하면 불교란 대체 어떻게 믿어야 할 것인가? 가운데 계신 석가모니 부처님 한분만 우리가 믿는다고 생각할 때는 양쪽에 계신 관세음보살님 또는 지장보살님 그 분들 한데 섭섭한 마음이 생길 것이고 또 큰 부처님만 숭상하며는 작은 부처님이 섭섭히 생각하실 것이고 이렇게 생각도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소박하니 현상적으로 우리 불교를 생각할 때는 불교는 다신교(多神敎)가 아닌가 말입니다.

 

<진여불성(眞如佛性)의 오직 하나의 부처님>

 

원시적인 그러한 종교 형태가 아닌가? 우리 마음은 대체로 어떻게 붙잡아야 할 것인가? 어떻게 귀의(歸依)해야 할 것인가? 이렇게 의단(疑團)을 품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그러한 다양한 이른바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이라, 그때그때 인연 따라서 많은 상()을 나투시지만 본 성품(性品)에 있어서는 동일한 진여불성(眞如佛性)의 오직 하나의 부처님입니다.

 

이 부처님만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천지 우주가 모두가 다 하나에 도리, 하나에 진리에서 그때그때 인연법 따라서, 대승적인 연기법으로 말하면 진여연기(眞如緣起)라 진여불성이라 하는 우주의 진리 이 세계에 모든 진리를 다 통합한 오직 일미평등(一味平等)한 진여불성 자리 그 자리에서 그대로 천차만별의 중생계(衆生界)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근본 자리에서는 하나라 하더라도 사람이 이루어지고 또는 이 천체(天體)가 이루어지고 각 지구라든가 또는 별이라든가 이러한 우주에 모든 현상이 이루어지고 나며는 그때는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절대로 아닙니다.

 

왜 그런가 하며는 부처님 자리 진여불성 자리는 이것은 물질이 아닙니다. 시간 공간이 있는 그러한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그 자리는 순수한 생명의 자리이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인연 따라서 형상화돼서 두두물물(頭頭物物)로 많은 존재가 이루어지더라도 이루어진 그것은 똑같이 진여불성(眞如佛性)으로 다 충만해 있습니다.

 

따라서 한 말로 말씀드리면 그 부처님자리 사람의 본심(本心)으로 말하면 부처불(), 마음심(), 불심(佛心)이라 하겠지요.

우주 만유에 본성(本性)으로 말하면 그 때는 부처불(), 성품성(), 불성(佛性)이란 말입니다. 어떻게 말하나 그 의미는 똑 같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린거와 같이 불성 부처님자리 이것은 조금도 변질이 안 됩니다.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오염도 안 됩니다. 또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이라 처음도 비롯이 없고 끝도 갓도 없이 과거로부터서 또는 미래 영구히 무시무종이라 끝이 없단 말입니다.

 

그러한 진여불성(眞如佛性)의 우주 대 생명이 사람한테 있으면 사람으로 형상화 되면 사람이 되겠지요. 우리 지구로 우리 지구 속에 그런 부처님의 에너지가 들어 있다고 생각할 때는 바로 지장보살(地藏菩薩)입니다. 부처님 기운이 태양에 들어 있는 부처님 기운은 일광보살(日光菩薩)입니다. 달에 들어 있는 부처님 기운은 월광보살(月光菩薩)입니다.

각 별에 들어 있는 부처님 기운은 묘광보살(妙光菩薩)입니다. 물에 들어 있는 세계 사대해라 모든 세계에 큰 바다라든가 또 냇 모든 수분에 들어 있는 부처님 기운은 용왕(龍王)입니다. 이 산이 뒷산이나 앞산이나 아주 수려한 산입니다만 산에 깃들어 있는 부처님 기운은 바로 산신(山神)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점안(點眼)을 모신 부처님도 지장보살 관세음보살 또는 석가모니부처님 이렇게 점안 되었습니다마는 석가모니 부처님도 역사적인 석가모니 부처님은 분명히 2500년 이상 전에 나오셔서 80세를 수명으로 해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에 눈에 비친 그런 화신(化身)에 불과한 것이지 어려운 말로 하며는 수원수생이라 본래의 모습에서 다만 자취만을 나타냈단 말입니다.

 

그런데서 석가모니 부처님은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지 사실은 부처님의 본지(本地)라 본 모습, 본 모습 그대로 본지라 합니다.

법화경(法華經)에는 본지수적(本地垂迹)이라 명백히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본래 모습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뿐만 아니라 모든 부처님 모든 존재 거기다가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런 자리는 영구히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의 도리(道理)>

 

그러면 이 초라한 우리 인간 같은 모양을 가지고 있는 거기에 담겨 있는 불심(佛心)은 어떤 것인가?

우리가 생각할 때는 좀 잘난 척하면 불심도 잘난 사람은 총명하고 못난 사람은 불심도 그만큼 상응해서 못났거니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불심이라 하는 것은 대소(大小) 크고 작고 또는 잘나고 못나고 고하(高下)를 다 떠나 있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불심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시공을 초월한 순수 생명이기 때문에 나한테 있는 불성이나 그대한테 있는 불성이나 똑같습니다. 도둑놈한테 있는 불성이나 또는 선량한 그런 도덕가(道德家)한테 있는 불성이나 또는 달마(達磨)스님 불성이나 다 똑같습니다.

 

불교와 다른 종교에 가장 기본적인 차이는 무엇인가 하며는 불교는 모두를 다 하나의 도리 하나에 도리로 해서 완전히 다 포섭해 있습니다.

다른 가르침은 세계적인 그런 종교라 하더라도 모두가 다 이원론(二元論) 또는 삼원론(三元論) 그와 같이 구분해 있단 말입니다.

 

가령 우리가 인도(印度) 힌두교를 두고 본다 하더라도 특히 비즈니신 또는 시바신, 세계를 주제하는 신을 그렇게 두 개나 셋으로 나누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에 근성에 따라서 본질을 훤히 보고 있는 성자의 분상에서는 구분이 생기지 않지마는 우리 분별시비를 하는 중생분상에서 본다면 똑같은 힌두교를 믿는다 하더라도 자기 나름대로 믿는다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도 여러 가지가 종파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 범부라 하는 것은 분별시비 하는 업()을 많이 지어나서 자기 업장대로 비추어 보니까 업장(業障)으로 여과시켜서 보는 것이니까 본질(本質)을 보지 못하고서 내가 생각한 것이 제일 좋다 이래서 자시비타(自是非他)를 합니다.

 

우리 불자님들 앞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리 불법은 정말로 생명(生命) 일원론(一元論)입니다. 다른 것은 절대로 없습니다. 불성이라 하는 것 이것은 모양도 없고 또는 이름도 본래가 없는 것입니다. 또는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어디에 제한된 장소에 국한되어 있지 않단 말입니다. 따라서 그렇기 때문에 우주(宇宙)에 충만(充滿)해 있습니다. 끝도 갓도 없이 무량무변(無量無邊)하게 우주에 충만해 있는 것이 불심(佛心)이고 우리에 마음입니다.

 

불교를 바로 믿는 것은 우리 마음과 석가모니 마음과 육조 혜능스님 마음과 달마스님 마음과 똑같다고 믿어야 됩니다. 사람 뿐 만 아니라 모든 존재가 다 그렇습니다.

식물이나 다른 동물이나 또는 무생물이나 하나의 미세한 그런 원자나 말입니다. 모두가 다 부처님이라 하는, 생명이니까 부처님이라 그러는 것입니다. 우주에 성품이니까 불성 그러는 것입니다.

 

내가 생명인데 내 생명의 근본자리가 생명 아니겠습니까. 우주(宇宙) 대생명(大生命)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그 자리는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대소(大小)가 없어서 또는 고하(高下)가 없어서 천지 우주에 충만해 있는 그런 부처님 기운과 내 마음에 있는 부처님 기운과 똑같습니다.

 

<일체중생(一切衆生) 개유불성(皆有佛性)>

 

화두(話頭)에서 어느 스님네가 조주(趙州)스님한테 개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그이가 아직은 성자가 못돼나서 개머리나 또는 개 심장에나 말입니다. 개 몸뚱이 속 어디 가서 불성이 있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렇게 물으니까 진리로 비추어 본다고 생각할 때는 가당이 없는 질문이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무()! 없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스님네가 생각하기를 부처님 말씀에 일체중생(一切衆生) 개유불성(皆有佛性)이라, 모든 중생이 다 부처님 성품이 있다고 했는데 어째서 조주스님은 불성이 없다고 하는가? 이렇게 의심을 품었다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의 중요한 화두법이 되었습니다만, 우리 불성이라 하는 것은 우리 심장이나 우리 머리나 그냥 부분적으로 어디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불신충만어법계(佛身充滿於法界)>

 

우리 혼신(魂神)이 우리 몸둥이 모두가 우리전체가 진여불성(眞如佛性)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머리카락부터 발끝까지 모두가 다 불성뿐입니다. 불성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기에 우주에 충만해 있단 말입니다. 불신충만어법계(佛身充滿於法界), 우리 부처님 몸이라 하는 것은 우주에 충만해 있습니다. 그래서 차별이나 고하나 시비 분별을 초월해 있단 말입니다.

 

부처님을 자비로운 쪽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관세음보살 되는 것이지 따로 따로 삼존불(三尊佛)이 있다고 해서 가운데 주제불 따로 있고 또한 양쪽에 계시는 석가모니 부처님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따로 있지 않단 말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바와 같이 우주에 그 물질이 아닌 비물질인 시간 공간성을 초월한 그러한 생명 자체가 이 지구상에 곁들여 있으면 그때는 지장보살이라는 말입니다.

 

<입불이(入不二) 법문>

 

그런 쪽으로 해석할 때는 우주가 하나의 도리임을 짐작이 되시겠지요. 하나의 도리, 일원론이란 말입니다. 또한 입불이(入不二) 법문이라 둘이 아닌 법문입니다. 대승법문은 모두가 둘이 아닌 법문입니다.

 

소승법문은 모두가 다 비었다하는 주로 네 몸둥이는 지풍 사대가 합해서 잠시간 세포가 이루어졌고 말입니다. 현대적인 말로 하며는 산소, 수소, 질소, 탄소 인제 그 외에 원소가 결합되어서 우리의 몸둥이가 되었겠지요.

우리 마음은 무엇인가? 우리 마음은 우리 나쁜 그런 버릇 때문에 무명(無明)에 가리어서 우리 중생은 무지(無智)에 가리어 있습니다. 무지에 가리어 있기 때문에 나라는 아()가 존재한단 말입니다.

 

<무아(無我)>

 

우리 불자님들 불교가 다른 종교의 차이는 이것은 불교는 나가 없습니다. 무아(無我)란 말입니다. 무아를 모르면 불법이 아닙니다. 무아인 것은 우리 중생이 욕심을 부리니까 욕심을 부리지 말라고 무아라고 그 당위적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본래로 무아입니다. 자연법적으로 우주법대로 본래 무아란 말입니다.

 

왜 무아(無我)인 것인가? 인연생(因緣生)이기 때문에 인연 따라서 잠시간 합해서 있어서 순간 찰나도 머무름이 없이 변화무상 하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무아입니다. 어느 순간도 일정한 모양이나 일정한 공간을 적용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없단 말입니다.

 

<연기법(緣起法)과 중론게(中論偈)>

 

인연소생법(因緣所生法) 아설즉시공(我說卽是) 역위시가명(亦爲是) 역시중도의(亦是道義).

용수보살(龍樹菩薩)이 말한 법문입니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모여 있는 그런 법은 이것은 본래가 바로 비어있단 말입니다. 성자(聖者)가 본다고 생각할 때는 바로 비어있는 것이고, 그러나 다만 빈 것이 아니라 비어있는 그 당체 이것이 바로 진여불성(眞如佛性)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부처님 법()은 세 차원으로 구분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중생 차원에서 내가 있고 니가 있고 선이 있고 악이 있고 이러한 현상적인 그런 차원에서 하는 중생의 근기(根機)에 맞추어서 알 수 있는 그런 법문 이것이 이른바 있을 유(), 유교(有敎)란 말입니다.

 

그러나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앞서 말씀 드린바와 같이 인연법으로 이루어진 법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은 다 인연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두가 한결같이 다 비었단 말입니다.

잠시간 이루어져서 그야말로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한 꿈이요 허개비요. 그림자요 아지랑이 같은 것인데, 우리 중생이 성품(性品)을 보지 못하는 것이니까 그와 같이 겉만 보고 좋다 그르다고 분별시비(分別是非)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꼭 모두가 다 본래 비어있다는 소식을 모르면 불법을 그냥 겉만 피상적으로 믿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한테 좋게 해라 봉사해야 한다. 부모한테 효도해야 한다. 이런 말은 유교(儒敎)나 기독교(基督敎)도 다 있습니다. 그런 도덕적인 차원 상대적인 차원에서는 다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가 불교인 점은 무엇인가 하며는 도덕적인 차원 상태적인 차원을 넘어서서 눈에 안 보이는 세계까지 어려운 말로 하며는 형이하학적(形而下學的)인 문제와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문제를 다 포함했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내가 없다는 무아(無我)를 모르면 불법이 아닙니다. 설사 절에다 시주(施主)도 많이 하고 또 남한테 좋게 하고 이렇게 한다 하더라도 이것은 세간적은 복()은 되어도 말입니다. 이른바 때 묻은 복은 되어도 참다운 해탈(解脫)의 복()은 못되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주의 법은 바로 연기법(緣起法)이라 인연법입니다. 인연법은 소승차원에서는 그냥 이것저것 조건으로 되어있다. 이것저것 인연 따라서 되었기 때문에 본래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럴 때는 모두가 다 텅 비어 버린 것이지 이른바 그 공에 당체 공에 알맹이 까지는 알 수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같은 공도 분석적으로 물리화학적으로 하는 그런 공은 석공(析空) 그래서 소승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불교도 그런 학설이 있는 것은 이것은 석공관(析空觀)이라, 이것은 분석할 석(), 빌 공()자 모두를 분석하고 들어가서 끄트머리 가서 다 비어 버린단 말입니다.

 

그러나 대승법(大乘法)에서 반야심경(般若心經)이나 금강경(金剛經)이나 그런 대승법에서 하는 공은 이것은 분석한 공이 아닙니다. 당체즉공(當體卽空)이라, 그 모양 그대로 바로 공, 즉공(卽空), 체공(體空)이란 말입니다.

 

다만 성자가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 모양 그대로 공인 동시에 바로 불성인데 우리 중생은 어두운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겉만 보기 때문에 과학적으로 분석이나 하면 모르거니와 공을 알 수가 없단 말입니다.

 

<무명(無明)>

 

우리 불자님들 지금 우리나라가 얼마나 혼란스러운 경제난이라든가 여러 가지 도덕적인 문란에 지금 고민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이 가장 큰 원인이 무엇인가? 우리가 탁류(濁流)를 정화(淨化)시키고자 하며는 상류 원류부터서 다스려야 합니다. 아무리 하류에서 제 아무리 물을 막아보고 또는 정화제를 갖다 뿌린다 하더라도 물은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그 탁류 때문에 절대로 절대로 맑아지지 않습니다.

 

마치 중국 황하(黃河) 모양으로 말입니다. 백년하청(百年河淸)이라, 천년이나 몇백년이 되어도 황하 하류에는 항시 물이 누렇게 됩니다. 그건 무엇인가 하며는 탁류 상류층에서 항시 황사가 내려온단 말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중생도 참다웁게 도덕이 확립이 되고 또는 나라에 경제가 바로 서고, 또 정치나 교육이나 모두가 다 바로서기 위해서는 꼭 근원적(根源的)인 근원적인 다스림이 있어야 됩니다.

 

인간성(人間性)이 무엇인가 하는 인간에 본질을 모르고서 참된 교육이 되겠습니까?

우리가 영원적인 차원에서 본래에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물질도 똑같이 다 불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물질에 근원을 모르고 말입니다. 또는 내 마음에 근원을 모르고 저 사람과 나에 관계도 모르고 말입니다. 그런 무명(無明) 차원에서는 앞서 말씀 드린바와 같이 진리를 바로 못 보는 안목은 다 무명입니다.

 

무명(無明) 번뇌란 말입니다. 무명 번뇌(煩惱) 차원에서는 그때는 필연적으로 나와 너에 구분이 있는 것이고 말입니다. 나와 너의 구분이 있다고 생각할 때는 나한테 좋은 것이 없으면 욕심(欲心)을 내는 것이고 나한테 싫은 것은 응당 그때는 진심(瞋心)을 내겠지요. 그러게 삼독심(三毒心) 아닙니까. 무명으로 잘 못 봐서 나가 있는 것이고 나가 있다고 생각할 때는 좋아서 탐심을 내고 싫어서 진심을 낸단 말입니다.

 

<무명은 모두가 진여불성

부처님뿐임을 모르는 것>

 

여러분들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은 다 대체로 아르시죠. 십이인연법에 맨 처음 허두가 무명 아닙니까?

무명 때문에 사고(思考)를 바르게 못하고 또 행동(行動)을 바르게 못합니다.

무명(無明)은 무엇인가?

앞서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주가 본래로 본래로 청정미묘(淸淨微妙)한 진여불성(眞如佛性)인데 우리 중생이 인연 따라서 잘못 본단 말입니다.

중생이 우주가 청정미묘한 하나의 도리인줄 잘 못 본단 말입니다. 그렇기에 무명이 발생합니다. 무명이 발생하면 그 때는 나가 있단 말입니다. 나가 있으면 내 소유도 있습니다. 따라서 부처님에 천연(天然)의 그런 도리에서 볼 때는 나도 없는 것이고 내 물건도 없습니다.

 

내 공장 내지 내 아내 내 남편 모두가 인연 따라서 잠시간 그림자 같이 모여 있는 것이지 실존적으로 있지 않단 말입니다. 우주에 실존은 이것은 진여불성 뿐입니다. 중도실상(中道實相)뿐입니다. 다른 것은 모두가 헛것입니다. 인간에 행복은 헛것에는 절대로 없습니다. 참다운 진여불성은 진여불성을 지향(指向)하지 않는 한 인간에 참다운 행복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따라서 경제문제를 경제(經濟)로만 푼다고 모다 하는데 그래서는 참다운 행복(幸福)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나라의 참다운 평화(平和)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기계론적(機械論的) 유물론(唯物論)에 입각한 맥스주의라든가 사회주의(社會主義) 역시 그런 걸로 해서는 인간에 참다운 복지(福祉)를 우리가 제대로 갈 수가 없습니다. 인간성(人間性)도 모르면서 말입니다.

 

물질(物質)이란 것은 허망한 아지랑이에 불과한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의지(意志)에 따라서 바로만 쓰면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바로 쓰는 것인가? 앞서 말씀 드린바와 같이 원래 내가 없고 내 것이 없단 말입니다. 내가 없고 내 것이 없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문제 아닙니까. 성자 같으면 여실(如實)하게 그대로 모두가 불성으로 보이는 것이니까 내가 없고 네가 없지마는 우리 범부 중생은 그렇게 보이질 않는단 말입니다.

 

그렇게 보이질 않는 한에서는 그때는 죽어서 태어나고 또 죽고 태어나고 해서 영원히 윤회(輪廻)에 길을 면치 못합니다. 삼계윤회(三界輪廻)를 벗어나야 비로소 참다운 해탈(解脫)에 자유 참다운 자유(自由) 참다운 정의(正義) 참다운 진리(眞理)가 돼야 비로소 영생불멸(永生不滅)한 행복(幸福)이 있을 것인데 참다운 자유가 없으면 그때는 우리 행복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참다운 자유는 어디가 있는 것인가?

참다운 자유는 진리만이 기독교 바이블도 있습니다만 그대가 자유롭고자 하면 먼저 진리를 믿어라. 먼저 하늘에 있는 하늘의 도리를 믿어라. 그래야 비로소 자유가 있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지금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종교도 그 무슨 종교 무슨 종교 하도 많으니까 또는 각기 자기 종교가 옳다고 다 주장들을 하는 것이고 말입니다. 기독교만 하더라도 세계적으로 20억 가까운 수가 지금 믿고 있습니다.

 

또는 한국도 우리 한국만 두고 본다 할 때에 명색이 인재란 분들은 기독교에 인재가 훨씬 많으니까 정부 요로에도 기독교인들이 많이 들어가고 불교인들이 별로 안 들어간다고 불평하지 않습니까. 그런 불평을 우리는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소인 근성을 벗어나서 들어가면 들어간 대로 말입니다. 우리가 보다 더 공부해서 불법을 빛내야 되는 것이지 인재를 기르지 못해 놓고서 그렇게 못해 놓고서 그런 불평을 한다면 한 가지 소인 근성입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 가르침 예수님 가르침 또는 공자(孔子) 가르침 노자(老子) 가르침 다 똑같은 가르침입니다. 다만 그 깊이가 심층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도업(道業)만이 성불(成佛)로 가는 길>

 

우주에 진리(眞理)를 모조리 구경지(究竟地)까지 다 마쳐서 우리한테 밝히신 가르침이 석가모니부처님 가르침인 것이고, 다른 분들의 가르침도 이른바 세계적인 종교는 성자의 길입니다. 사실은 모두가 다 성불로 가는 길입니다.

그러나 다른 종교로 해서는 구경지(究竟地)까지 가기가 어렵습니다. 도덕적으로 바로 살고 바른 말하고 남한테 베풀고 이런 정도는 된다 하더라도 이른바 무루법(無漏法)이라, 때 묻지 않은 도업(道業)이라. 우리 불자님들 우리 업 가운데는 세 가지 업이 있습니다. 꼭 기억해두시기 바랍니다.

 

한 가지는 우리 중생이 잘못 생각하고 잘못 행동해서 짓는 악업(惡業)이 있지 않습니까. 한 가지는 부처님 계율에 따라서 짓는 선업(善業)이 있습니다. 그러나 선업도 자타를 구분하고 상대적인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면 이것은 선업에 머무르는 것이지 해탈하곤 상관이 없습니다.

남한테 보시(布施)를 제 아무리 많이 한다 하더라도, 복은 받습니다만 인도환생(人道還生)이 되면 부자도 되고 또는 감투도 쓰고 합니다. 또는 천상(天上)에 올라가는 천상도 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천상복은 지은만치 복이 다하면 그때는 뚝 떨어집니다. 천상에 갔다가 지옥도 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은 해탈(解脫)의 복()이 아닙니다.

 

<해탈(解脫)의 복()>

 

해탈의 복 이것은 이른바 무루복(無漏福)이라, 무루복은 앞서 말씀 드린바와 같이 본래 내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주의 법, 부처님 법은 본래 내가 없는 법입니다. 우리 중생이 무명 때문에 내가 있다고 본단 말입니다. 따라서 자타시비가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시비를 떠나서 일미평등(一味平等)한 우주란 것은 진여불성(眞如佛性) 뿐이다. 이렇게 믿는 자리에서 비로소 보시도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 이른바 상을 여윈 보시란 말입니다. 이렇게 해야 해탈의 업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도업(道業)입니다.

 

여러분 행동하실 때는 내가 지금 행동하는 것이 악업(惡業)에 해당 하는가? 선업(善業)만이 해당 하는가? 또는 도업(道業)까지 미치는가? 한번 생각하여 가지고서 자기 행동을 규정하시길 바랍니다.

 

천지우주가 자타시비를 떠나버린 오직 진여불성 뿐이다. 진여불성이란 말은 소승에서는 말도 없습니다. 대승 들어와서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이라, 대승 들어와서 용수보살 세친보살 무착보살 또는 달마대사 또는 혜가 승찬 도신 홍인 또는 혜능대사, 이와 같이 그 대승법에 들어 와서 법화경(法華經)」 「화엄경(華嚴經)또는 능엄경(楞嚴經), 열반경(涅槃經)또는 대일경(大日經)그런 경들은 모두가 대승경전입니다.

 

<중략>

 

따라서 부처님 이름이 제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부처님 공덕이 한량이 없으니까. 하나의 개념으로 해서 부처님 공덕을 다 표현을 못하는 것이니까 이름이 많은 것이지 별도로 몸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을 꼭 하시기 바랍니다.

 

<단공(但空)과 즉공(卽空)>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몸 이대로 즉공(卽空)이라, 바로 비어 있다 말입니다. 다만 세포가 순간순간 찰나찰나 우리 중생이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지금 변화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포의 신진대사(新陳代謝)가 상속이 되니까 상속되는 그것만 보는 것이지 일반 중생은 그 모양만 보기 때문에 본래 없는 것을 모른다 말입니다. 일체 존재라 하는 것은 물질이 아닌 순수한 에너지의 당체가 바로 진여불성입니다. 순수한 에너지가 그때그때 운동하는 상황 진동하는 상황 따라서 모양을 나투면 우리 중생들은 그것보고 물질이라고 합니다.

그러기에 부처님의 경전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사실은 물질도 없는 것이고 공간도 시간도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굉장히 허망하게 생각이 되시겠지요. 우리 불자님들 허망하게 생각이 안 될 정도로 자기를 굳건히 지키십시오. 다만 공이 아니라 그렇게 빈자리를 분명히 느끼고 증명해 버리면 다만 단()단공(但空)이 아니라 바로 그때는 찬란한 일체성공덕(一切性功德)을 갖춘 진여불성(眞如佛性)이 앞에 나타난다 말입니다.

진여불성은 바로 만덕(萬德)을 갖춘 생명 자체입니다. 거기에 가까워지면 한걸음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우리는 행복스러운 것입니다. 마음도 편하고 몸도 편한 것입니다. 종당(終當)에는 누구나가 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무생법인(無生法忍)>

 

본래가 부처거니 부처가 안 되고 못 베기는 것입니다. 다만 게을러서 더디 가고 부지런히 닦아서 빨리 가고 할 뿐입니다. 우리가 다행히 사람이 되어서 망정이지 개나 소가 되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또는 우리가 잘못 살면 개나 소나 독사나 그렇게 될 확률도 많이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생사를 해탈하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본래 생사가 없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불성은 이것은 영생불멸(永生不滅)한 그런 생명 자체이기 때문에 불성의 차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낳는 것도 없고 그때는 죽음도 없습니다. 원래 낳지 않고 원래 낳지 않았으니 죽음도 없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무생법인(無生法忍)이라, 우리 스님들이 축원을 할 때 무생법인이라는 그런 말씀을 꼭 그렇게 하십니다. 그런데 무생법인은 무슨 말인가 하며는 본래 낳지 않고서 영생하는 법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비록 인연 따라서 우리 헛개비 같은 그림자 같은 몸은 바꿔진다 하더라도 우리 생명 자체는 절대로 변동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불교말로 상견(常見)이라, 상견은 지금 몸이 꼭 내세도 그대로 있다. 지금 나는 내세에 가서도 꼭 그대로 태어난다. 이렇게 느끼는 것이 이른바 항상 상()자 상견인데, 그것은 하나의 사견(邪見)에 불과합니다.

왜 그런가 하며는 비록 우리 생명 자체 불심 자체는 죽음이 없고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해서 영생불멸한다 하더라도 우리 업식(業識)은 무명(無明) 따라서 우리가 지은 그 업의 그림자는 좀처럼 떨어지지가 않는단 말입니다.

과거에 자기가 지금 태어난 이 몸만치 업을 지어서 금생에 꼭 그렇게 사람 되게 시리 태어나는 것입니다.

 

<원만덕상(圓滿德相)>

 

부처님께서는 3280종호라, 부처님께서는 만덕(萬德)을 갖춘 상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삼아승지겁(三阿僧祇劫)이라, 무수한 세월동안 닦으시고 그렇게 하신 다음에 그 눈이나 코나 입이나 모두가 원만덕상(圓滿德相)이란 말입니다. 원만덕상을 심기 위해서 백겁동안도 공부를 하셨단 말입니다. 백겁장엄(百劫莊嚴)이라,

 

따라서 우리 지금 모양은 금생에 잘살았으면 잘 산대로 그때는 우리 모양은 항시 미소를 띠우게 될 것이고 잘 못살면 그냥 그때는 미소를 띠운 얼굴도 얼마 안가서 또 칙칙 한단 말입니다.

매일 자기 얼굴을 보십시오. 내 얼굴이 부처님과 비교해서 얼마나 차이가 있나 말입니다. 모양이 부처님을 닮아지면 그 때는 마음도 닮아 집니다. 마음과 몸은 절대로 둘이 아닙니다.

 

어릴 때에 어린애들 그 눈을 보고 얼굴을 보십시오. 얼마나 맑은가, 저 같은 사람도 50대 까지는 얼굴에 가서 뭣이 안 나드니마는 이제 70이 넘어스니까 자꾸만 죽음꽃이 핀단 말입니다. 죽음꽃이 말입니다.

그도 공부가 많이 되었으면 그도 못 피게 할 것인데 공부가 부족하니까 할 수 없이 그대로 자기 공부에 대해서 한탄을 합니다. 이른바 검버섯이 자꾸만 생긴단 말입니다.

저도 삼년 전에 미국 들어갈 때는 그래도 그 다행히 전체 수염도 하얀 털이 하나도 없었는데 미국 들어가 3년 동안에 지낸다고 애쓰고 보니까 지금은 하얀 털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렇게 세월은 참 덧이 없고 참 무상합니다.

 

우리 불자님들 행복 되기가 제일 쉬운 것입니다. 남한테 욕을 하기 보다도 안하기가 쉽지 않겠습니까. 고기도 먹기보다 안 먹기가 훨씬 쉽습니다. 돈도 안 들고 몸도 가볍고 또 살생도 않고 말입니다. 사람들은 그 어려운 일만 모다 골라서 합니다. 부자가 되려면 물론 부자가 되지 말라는 법이 아니겠지마는 자기 이웃 사람들은 하루에 세기도 못 먹고 두 끼도 못 먹는데 자기만 세끼 먹고 거기다가 더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일년동안 세계에서 1600만이나 아사자(餓死者)가 나온다는 것인데 말입니다. 저는 법문할 때마다 제가 되 세깁니다만 일년에 아사해서 죽은 사람이 1600만이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육식을 하기 위해서 동물을 기르는 그 양곡(糧穀)이 말입니다. 2억톤인데 1600만명의 아사자를 구하려고 들면 500만톤만 있으면 충분하단 말입니다. 그렇게 통계가 말입니다. 그렇다고 생각할 때에 우리가 고기를 안 먹는다고 할 때는 한 2000만명도 결국은 더 구제할 수 있단 말입니다.

저 아프리카의 우간다나 그런 지방에서 굶주려 죽어가는 사람과 우리와 무관한 관계가 아닙니다. 불자님들 우리는 천지우주가 하나의 생명 위에서 중중무진(重重無盡)으로 같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같은 고리에 있습니다.

따라서 아프리카에서 죽어가는 그런 어린애들과 우리나 똑같은 한생명입니다. 간격이 있지 않습니다. 여기에 한 100명 가까이 서 가지고 계십니다마는 모두가 다 옆에 사람과 자기와 간격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원소 차원에서는 지금 꽉 차 있단 말입니다. 이 공간 속에 산소 수소가 없는 데가 있겠습니까? 어느 공간이나 산소나 수소나 원자가 다 있듯이 그렇듯이, 우주에는 산소나 수소나 그런 미세한 소립자보다도 더 근본적인 성품은 모두가 다 진여불성이기 때문에 진여불성 차원에서는 이른바 영성(靈性) 차원에서는 우주에 생명이 모두가 다 하나로 묶여 있습니다.

 

<가장 큰 보시(布施)>

 

따라서 아프리카에 있는 그런 굶어 죽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할 때는 그마만치 우리 생명이 세계생명이 그 만치 훼손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성불이 그 만치 더딘 것입니다. 눈에 안 보인다고 그래서 절대로 자기 이웃사람들이라든가 또는 먼 나라에서 고생한 그러한 민중들을 우리가 소홀히 한다면 안 됩니다.

 

부처님 사상은 절대로 평등한 사상입니다. 우리가 설령 자기 가정을 이루어서 사신다 하더라도 자기 남편이나 자기 아내에 대해서 최선을 응당 다해야 되겠지요. 자기 자식들을 위대한 사람으로 만들어야 되겠지요.

그러나 위대한 사람이 어떠한 사람인가? 이런 개념을 또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위대한 사람은 우주의 본성을 인간성의 본 바탕을 우주에 참 다운 가치를 바로 아는 사람이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자기 아들한테나 누구한테나 설사 자기보다 훨씬 더 어른인 할아버지한테나 말입니다. 할아버지한테 가장 큰 효성이 무엇인가 하며는 역시 할아버지로 하여금 부처님 품에 나아가시게 한단 말입니다.

 

자기 부모님을 그 물질로 해서 제아무리 호의호식(好衣好食)을 시키고 우리가 효도(孝道)를 많이 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유루법(有漏法)이라 때 묻은 효도에 불과합니다. 부모님으로 하여금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꼭 부처님 품으로 나가게 해드린다 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나 누구한테나 가장 큰 보시(布施)가 그 사람으로 하여금 꼭 영생불멸한 생명의 본 고향으로 가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이나 또는 자유세계는 그야말로 자유민주주의와 또는 자본주의 사회 아닙니까. 자본주의 사회나 자유민주주의 사회나 근본적인 철학이 없다고 생각할 때는 정말로 지독한 지독히 추악한 그 때는 천민주의(賤民主義)에 불과합니다.

 

현대사회는 진정한 의미에서는 부처님 가르침이 아니고서는 다 철학(哲學)이 없습니다. 하느님은 저 위에가 있고 우리가 밑에서 그냥 기도 모시면 그때는 우리한테 은총을 베푼다. 그런 식으로 해서는 철학이 못 되는 것입니다. 우주의 본질과 우리 인간의 본질, 모든 본질을 하나의 진리로 조금도 막힘없이 투철하게 우리가 통찰을 해야 비로소 참다운 철학이란 말입니다.

 

소크라테스나 또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나 또는 니체나 칸트나 또는 현대의 실존철학(實存哲學)이나 모두가 다 그런 쪽으로 지향 돼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부처님 가르침같이 증명(證明)을 못 했기 때문에 명명백백(明明白白)이 근거 있는 말씀을 못했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자기 행복을 느끼셔야 됩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꼭 부처님 가르침 그 대승의 가르침 일체 존재가 근본에는 다 진여불성이다. 또는 만상의 모습으로 모양을 냈다 하더라도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잘난 사람한테나 또는 다른 못난 그런 동물한테나 또는 맹수한테나 조금도 그때는 똑같이 불성은 그대로 있단 말입니다.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요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

 

그러게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가 오직 그야말로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이대로 바로 극락세계(極樂世界)입니다. 번뇌가 즉 보리고 또는 생사가 즉 열반이라, 성자의 견해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번뇌 있는 그대로, 번뇌를 저 멀리 보내고서가 아니라. 번뇌의 당체 번뇌의 본 모습이 바로 그때는 참다운 반야지혜(般若智慧)인 것이고, 또는 동시에 생사윤회(生死輪廻)하는 중생 그대로 못난 중생 그대로 본 모습에서는 본래로 다 부처란 말입니다. 그러게 본래성불(本來成佛)이라, 본래성불은 대승(大乘)의 말입니다.

 

여러분은 참선(參禪) 그러면 저 고도로 높은 공부라고 생각하고 묵조(黙照)나 염불(念佛)은 저 밑이라 생각합니다. 그것도 잘못 생각입니다. 일미평등(一味平等)한 진여불성 가운데서 고하(高下)가 없는데 하물며 부처님 법 가운데 무슨 높고 낮음이 있겠습니까.

 

다만 우리마음이 우리마음의 소재가 생명의 본체인 진여불성을 떠나지 않으면 그때는 다 참다운 염불이고 참다운 참선이고 그럽니다. 이런 도리를 분명히 알아두십시오. 그렇게 못하면 공연히 필요 없는 논쟁을 합니다.

 

<돈오(頓悟)와 점수(漸修)>

 

가령 돈오(頓悟)와 점수(漸修), 이 문제도 역시 돈오가 없으면 점수가 없는 것이고 점수가 없으면 또 돈오가 또 없습니다. 그러기에 육조단경(六祖壇經)에서는 육조스님께서는 분명히 본래 법에는 돈점(頓漸)이 없건마는 다만 사람이 어리석고 또는 영리함이 있기 때문에 사람 따라서 사람이 어리석고 둔함에 따라서 그와 같이 돈점이 있는 것이지 법에는 원래 돈점이 없단 말입니다.

돈점이 없는 그것을 꼭 내말이 옳다. 꼭 내 주장이 옳다. 그러니까 필요 없이 그 때문에 책도 필요 없는 논문(論文)도 많이 내고 논쟁(論爭)을 한단 말입니다.

 

부처님 법은 이 시대에 와서는, 이 무서운 정보시대(情報時代)에 와서는 꼭 회통적(會通的)으로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앞서 말씀 드린바와 같이 다른 종교도 역시 깊고 옅은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영원으로 지향하는 지향성은 똑같습니다. 바이블을 사대복음서를 바로 본다 생각할 때는 부처님 가르침하고 굉장히 다 유사합니다. 천박한 인연설은 불교에도 있습니다.

 

<()을 통과(通過)해야

중도(中道)가 보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이 꼭 대승법(大乘法)으로 모든 법은 공()을 통과해서 ()을 통과해야 그래야 인제 중도(中道)가 됩니다. 공이 없이 이대로 못난 이 대로는 그때는 중도까지 우리가 느낄 수가 없고 닦을 수가 없습니다. 모든 허망한 것을 다 부정 할 수가 있는 지혜(智慧)가 생겨야 비로소 중도실상(中道實相)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천도법문(薦度法門)>

 

오늘 천도(薦度)를 받으신 영가들이시여!

자세히 듣고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영가(靈駕)라는 것은 사람이 금생에 인연 따라 나와서 사람 몸 받아 살다가 죽어지면 누구나가 다 영가가 되는 것입니다.

 

아주 잘 살았으면[닦았으면] 그냥 극락으로 죽자마자 쉽게 갈 것입니다. 성자의 그런 각령(覺靈)은 성자의 영가 보고는 깨달을 각()자 각령이라고 해서 성자의 각령은 그냥 그대로 극락 갈려면 극락 가는 것이고, 중생이 불상 하니까 사람 몸으로 태어나서 다시 중생을 제도해야 되겠구나. 이렇게 할 때는 자유자제로 사람한테로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통 그런 아주 훌륭한 그런 영가들은 극락으로 직행합니다. 극락도 또 그냥 한차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지은 복 따라서 구품왕생(九品往生)이라 아홉 층계가 있단 말입니다. 아홉 층계가 있어가지고서 맨 처음에 하품하생(下品下生) 제일 낮은 그 층에 있다가도 우리 마음이 그 습기가 습관성이 녹아지면 녹아진만치 그때는 거기에 상응해서 올라간단 말입니다. 그래서 모든 습기(習氣)가 다 녹아졌다면 그 때는 상품상생(上品上生)이란 말입니다.

 

제 말씀을 듣고 오해를 하실가봐서 제가 몇 말씀을 드린다마는 본래 부처인데 좀 늦고 또 빠른 차이가 있을 뿐이지 다 부처가 될 것인데 애써 금생에 잘 먹고 잘 살 것이지 하필이면 고행(苦行)도 하고 또 참고 지낼 필요가 무엇인가? 이렇게 생각하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참다운 행복(幸福)>

 

 

그러나 앞서 말씀 드린바와 같이 참다운 행복(幸福) 마음이 행복하여야 마음이 개운하고 마음이 다른 사람한테 지적도 안당하고 승배를 받아야 그래야 행복스럽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냥 유한적인 모양 있는 것 가지고서 만족을 느낀다고 생각할 때는 물질이라는 것은 한계가 있단 말입니다. 내가 많이 쓰면 저 사람이 적게 써야 되겠지요. 내가 많이 먹으면 그때 누군가는 적게 먹어야 한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런 물질로 해서는 가급적이면 자기라는 존재 이 그림자 같은 자기 몸뚱이를 위해서는 최소한으로 생활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게 부처님께서나 예수님께서나 또는 공자님이나 아주 자기 생활에 위해서는 굉장히 검소(儉素)했단 말입니다. 검소한 것이 몸이나 마음에나 다 좋습니다.

 

검소한 것이 몸에도 좋다는 것은 지금 현대 생리학은 증명을 합니다. 장수에 비결이 무엇인가? 가급적이면 채식주의를 하고 말입니다. 적게 먹고 활동을 될수록 많이 하고 운동 많이 하고 말입니다. 또는 정념(正念)이라, 몸뚱이라 하는 것이 마음이라 하는 불성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바른 생각을 한다고 할 때는 우리 몸 세포도 거기에 상응해서 따라갑니다. 기분 상했을 때 얼마나 우리 몸이 괴롭습니까. 머리도 아프고 또는 가슴도 답답합니다. 이른바 스트레스라 그 모든 병에 원인이라 하지 않습니까.

 

그런 것이 모두가 마음에 자세에 따라서 사실은 우리 몸을 좌우 시킨 것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바와 같이 진여불성은 무한 힘이기 때문에 무한 힘이 우리 병균이나 우리 병 하나 다스리지 못하는 그런 힘이 아니란 말입니다.

 

<신시보장제일법(信是寶藏第一法)>

 

삼명육통(三明六通)을 다하고 우주 모든 것을 다 알고 모두를 다 할 수 있는 힘인 것인데 그 힘이 현대 에너지는 다 증명을 합니다. 원자력 같은 것은 얼마나 무시무시한 힘을 냅니까. 정말 컴퓨터는 신통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이 모두가 다 원자의 힘 입니다. 원자보다도 더 무한성능 - 원자는 그 유한성능인데 - 진여불성은 무한성능입니다. 무한성능인 것이 우리 마음이란 말입니다. 아무리 지금 못된 그런 별로 좋은 마음이 아니라고 한다 할지라도 우리 마음의 본체는 오염할래야 오염을 시킬 수가 없습니다. 마음만 돌이키면 신시보장제일법(信是寶藏第一法)이라, 정말로 바로 믿어버린다면 이 오염된 오염됐다고 생각하는 이 마음도 바로 불심(佛心)이 되는 것입니다.

 

<본원(本願)>

 

그러기에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서 일념왕생(一念往生)이라, 한 생각 사무치게 불심이라 하는 것은 원래 무한의 생명체고 불심은 본래 오염이 안 된다.” 이와 같이 정말로 사무치게 사무치게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외운다고 생각할 때는 그냥 순식간에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과 똑같은 그런 순수한 불성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일념왕생이라 한 생각에 극락세계에 간단 말입니다. 절대로 거짓말이 아닌 것입니다.

 

이것이 부처님에 본원(本願)입니다. 부처님 본원은 우주 바로 불성이 바로 부처님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본원은 모든 중생을 다 불성으로 이끌어 가는 그런 힘이 있단 말입니다. 모든 중생을 다 성불로 끌어들이는 힘이 본래 갖추고 있습니다.

 

천지우주가 성주괴공(成住壞空)이 되어서 그래서 우주 형체가 이루어지는 성겁(成劫), 또는 우리 생물이 사는 그런 주겁(住劫)이라, 그 다음에는 우주가 파괴가 되는 괴겁(壞劫)이란 말입니다. 그 다음에는 우주가 텅텅 비어서 공겁이라, 공겁(空劫)이 되도 그냥 텅텅 빈 공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또 역시 에너지의 그러한 여러 가지의 인연 관계를 해가지고 다시 역시 중생의 업력(業力)이 모아져서 다시 또 우주가 형성이 됩니다.

 

그러며는 천상에 있던 우주가 파괴 될 때도 파괴를 받지 않는 그러한 좋은 영혼들이 다시 태어난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선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기독교에서도 예수께서 최후의 심판을 말했지마는 지금 그 종말론(終末論) 같은 그러한 우리 중생이 그대로 있는 체로 기독교 믿는 사람들은 다 주로 해서 하늘로 끌어 올리고 말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같다가 있는 체로 지구가 파멸이 되고 그런 비극은 없습니다. 절대로 없습니다.

 

부처님 법은 본래로 영생(永生)의 법()이고 또는 이 우주가 파괴 될 때도 그냥 우리 중생들은 그대로 태운체로 좋은 사람만 먼저 올라가버리고 나쁜 사람들은 남아 있다가 나중에 지구가 파괴될 때 그대로 휩싸여서 비극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 법은 대자대비(大慈大悲)이기 때문에 부처님 법은 모든 중생이 다 잘 닦아서 말입니다. 모든 중생은 그런대로 다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쇼펜하우어 말마따나 인간은 다 영생(永生)을 구하고 무한(無限能力)을 구하는 마음이 본래로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에 종교심(宗敎心)입니다.

 

종교심은 원래 인간이 다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 천체가 우주가 파괴되기 전에 모두가 다 금생에는 설혹 좀 나쁜 일을 좀 한다 하더라도 내생가서 좋은데 잘 태어나서 말입니다. 그때는 좀 더 선을 많이 하고 악을 적게 한단 말입니다. 그렇게 몇 생을 닦다 보면 그때는 차근차근 선 쪽으로 다가간단 말입니다.

 

그러다가 모두가 다 모두가 지구상에는 우리 지구상에는 머물지 않을 정도로 물질의 세계에는 머물지 않을 정도로 천상에 올라간단 말입니다. 천상에 올라간 뒤에는 그 때는 천지우주가 파괴가 됩니다. 따라서 누구도 피해를 입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독교와 같은 그런 종말론 같은 그런 최후의 심판설은 절대로 믿어서는 안 됩니다. 그건 한 가지 무명에 불과합니다.

 

영가들이시여! 사람이 죽어지면 영가가 됩니다. 영가도 역시 나쁜 짓을 많이 했을 때는 꼭 지옥에 분명히 떨어지는 것입니다.

 

<우주는 바로 이대로 화장세계(華藏世界),>

 

현대 공부를 하신 분들은 눈에 보이는 세계만 긍정하기 때문에 극락도 더러는 부정하고 지옥도 다 부정을 합니다. 그러나 공()이라고 말하고 허망하다고 말 할 때는 우리 인간[세상]도 똑같습니다. 우리 인간도 없다하면 결국 없단 말입니다.

 

물질이 본래 없고 다만 이렇게 진동하는 거품 같은 그림자 같은 모양뿐인 것이지 상뿐인 것이지 상 떠나면 공이란 말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극락세계나 또는 지옥이나 모두가 다<: 본래는 다 극락인데> - 극락세계는 우주의 참다운 성품인 진여불성의 광명만 빛나는 세계인 것입니다. - 지옥세계도 역시 광명이 빛나 있지마는 자기들이 나쁘게 살아서 업을 많이 지어서 지옥에서 극락을 볼 수가 없단 말입니다.

 

우주는 바로 이대로 화장세계(華藏世界), 이대로 극락세계인데 우리 중생이 업장(業障) 따라서 사람만치 볼 때는 이렇게 우리가 보는 것이고 말입니다. []만치 볼 때는 그 밖에 못 보는 것이고, 마치 물에 사는 물고기는 물을 자기 집으로 그렇게 생각하듯이 우리 중생들은 자기 업장(業障)으로 삽니다.

 

그래서 업()을 지어 놓으면 그때는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 지옥중생은 스스로 어두어서 광명에 세계인데도 광명을 전혀 못 보고서 어둠만 본단 말입니다. 꼭 자업자득입니다. 꼭 자기가 지어서 자기가 받습니다.

 

 

영가들이시여!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잘못 살면 지옥(地獄)도 가는 것이고 분명히 축생(畜生)도 가는 것이고 또는 아귀(餓鬼) 귀신(鬼神)도 꼭 되는 것입니다.

 

또한 원망이 깊어서 원한(怨恨)이 사무친다거나 또는 애정이 깊어서 애착(愛着)에 심하다거나 그런 영혼도 갈 곳으로 못가고 오랫동안 저승에 헤매는 것입니다. 이것 보고 불교에서 중유(中有), 가운데 중()자 있을 유()자 중유입니다. 또는 가운데 중()자 그믐 음()자 중음(中陰)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아주 선량한 영혼들은 극락이나 천상으로 바로 가기 때문에 중음이 없습니다. 또는 아주 나쁜 영혼들은 지옥이나 그런대로 바로 가기 때문에 또 중음도 없단 말입니다.

 

그 어정쩡한 영혼들로 해서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애착(愛着)이 심하고 원한(怨恨)이 사무친 그런 영혼들은 오랫동안 헤맵니다.

 

전쟁(戰爭)에 가서 총 맞아 죽을 때 얼마나 원한을 품겠습니까. 그런 영혼들, 물에 갑자기 빠져서 죽은 영혼들, 교통사고 만나 갑자기 죽은 그런 영혼들, 그런 영혼들은 갑자기 죽기 때문에 미쳐 마음을 다스릴 수가 없단 말입니다. 죽는 순간 그 마음으로 내가 지금도 살아있거니 생각해서 이른바 저승에서 헤매단 말입니다. 저승에서 헤맬 때는 몇 십년 몇 백년도 헤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영가들이 갈 곳은 마지막 고향은 우리 생명의 마지막 고향은 바로 극락세계(極樂世界)입니다.

 

다만 조금 못가서 천상(天上)이고 더 못가서 사람이란 말입니다. 극락세계는 부처님 부처님의 그 무량광명(無量光明)으로 해서 충만한 광명정토(光明淨土)입니다. 극락세계는 성자(聖者)만 존재하는 그런 세계입니다.

 

따라서 범부(凡夫)와 더불어서 잡거(雜居)하는 더불어 사는 그런 세계는 우리 인간 세계입니다. 인간 세계는 그런저런 성자도 있고 아주 나쁜 사람도 있으니까 이렇게 잡거 하지마는, 극락세계는 그 때는 - 바로 보면 모두가 극락 아님이 없지마는 - 그렇더라도 그런 가운데서 성자만 있는 세계가 바로 극락세계란 말입니다.

 

영가들이시여! 극락세계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애착(愛着)이나 또는 원한(怨恨)을 다 풀어야 됩니다. 분별시비를 풀어야 됩니다. 이른바 나라는 상[아상(我相)], 너라는 상[인상(人相)] 또는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를 다 풀어야 합니다.

 

나는 사람이고 나는 죄가 만고 너는 죄가 없다. 어떠한 분별(分別)도 극락세계에 가는 길을 더디게 하는 것입니다. 극락세계는 성자가 가는 길이기 때문에 성자는 분별을 떠난 참다운 사람입니다.

 

<진아(眞我)>

 

성자만이 참다운 진아(眞我)고 참다운 인간입니다. 참다운 인간성(人間性)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스스로 잘못 살아서 잘못 생각해서 인간성을 바로 못 보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극락세계의 교주님은 바로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아미타불입니다. 천지우주의 그런 교주 역시 나무아미타불 또는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또는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부처님입니다. 우리 참다운 마음 역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또는 비로자나불입니다. 다 똑같은 하나의 생명체(生命體)입니다.

 

<극락세계의 그 찬란한 광명세계

광명정토의 모습을 생각하십시오.>

 

영가들이시여! 극락세계에 그 찬란한 그런 광명세계 광명정토의 모습을 생각하십시오. 조금도 불행은 없고 행복뿐만 있으니까 극락입니다. 또는 극락세계는 모두가 다 성자니까 차별이 없습니다. 모두다 몸이 광명(光明)으로 빛납니다. 극락세계는 욕계를 떠나버린지라 식욕도 없습니다. 따라서 남여가 없어나서 그때는 음욕도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오욕(五欲)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참다운 불교철학(佛敎哲學)

참다운 실존철학(實存哲學)이고

참다운 형이상학(形而上學)입니다.>

 

우리 한국의 이 불행한 사태나, 경제 환란을 우리가 구제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 아무리 경제학자가 달려들어도 안 됩니다. 제도란 것은 일시적인 이것은 하나에 그 시점에 불과한 것이지 근본적인 해결은 절대로 안 됩니다. 우선 정치인부터가 참다운 가치관(價値觀)을 가져야 합니다. 참다운 철학(哲學)을 가져야 합니다.

 

철학(哲學)의 빈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비록 지금 기독교를 믿는다 하더라도 불교(佛敎) 동양철학(東洋哲學) 신라(新羅) 때나 고려(高麗) 때나 또는 이조(李朝) 때나 우리 할애비들은 대부분 다 불교를 믿었지 않습니까. 불교를 꼭 믿어야 됩니다.

 

만약 한국(韓國)에서 태어나서 우리나라를 이끈다는 사람들이 불교를 모른다고 생각할 때는 참 커다란 수치입니다. 그분들이 기독교나 불교를 한번이나 비교를 해 봤든가? 적어도 비교종교학(比較宗敎學)적으로 비교도 안 해보고서, 우리 조상의 피가 되고 살이 된 또는 천지 우주의 도리(道理)인 부처님법을 어떻게 무시할 수가 있겠습니까.

 

부처님법을 믿는다고 생각할 때는 비록 정적(政敵)이라 하더라도 정적을 너무 지나치게 나무래서 그 사람들한테 서운한 마음을 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그 때는 인제 상대 야당(野堂)도 여당(與黨)한테 스스로 환심을 가지고 같이 협조하고 그렇겠지요.

 

자기들을 깎아 세우고 그래버리면 그런 경우에서는 협조할래야 협조할 마음이 돌아올 수가 없지 않습니까. 아무튼 꼭 우리는 지금 이 정보화시대를 해쳐 나가기 위해서는 생사에 바다를 건너서 영생의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꼭 기본적인 우주의 도리 참다운 철학이 있어야 합니다.

 

참다운 불교철학 이것이 참다운 실존철학이고 참다운 형이상학입니다. 다른 가르침인 형이상학도 그냥 표면적으로 우리 물질을 떠나서 무엇이 있다. 이 정도로 아는 것이지 말입니다.

또 하나님이 저 위에 계시다가 우리가 기도를 모시면 우리한테 은총을 베푼다. 이런 식으로 아는 것이지 그 형이상학적인 세계가 어떠한 세계인가? 우주에 본체가 어떠한 것인가? 확실히 모른단 말입니다.

 

<상락아정(常樂我淨)>

 

부처님 가르침은 그런 세계를 특히 열반경(涅槃經)에서 아주 그야말로 명백하니 밝히고 있습니다. 이른바 상락아정(常樂我淨)이란 말입니다. 상바라밀(常波羅蜜)이라 낙바라밀(樂波羅蜜) 아바라밀(我波羅蜜) 정바라밀(淨波羅蜜)이라, 가장 행복스럽고 모든 지혜 신통을 다 갖추고 있는 자리란 말입니다.

 

거기에 이르기 위해서 영가들이시여! 자기의 참다운 이름인 동시에 우주의 본이름 또는 극락세계의 교주님의 이름인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부처님 이름을 한시도 끊임없이 외우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므로 해서 우리가 다생으로 지은 업장이 싹트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극락세계 장엄스런 모양을 관찰하고 동시에 부처님의 모양은 자유자재(自由自在)인지라, 부처님 모양인 본체는 우주에 충만해 있고 말입니다. 더러는 무수히 화신(化身)을 나투어서 더러는 관음보살 문수보살(文殊菩薩)로 또는 때로는 우리의 지구 같은 모습으로 달 같은 모습으로 해 같은 모습으로 이와 같이 화신(化身)으로 나투신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도 똑같이 부처님의 화신입니다.

 

이렇게 하셔서 영가들이시여! 꼭 극락세계에 왕생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거기서 쉬시다가 다시 자기 자녀간들이나 인간 중생들이 불쌍하다고 느끼시면 사람으로 태어나셔서 또 중생구제(衆生救濟)에 온 힘을 다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모이신 불자님들이시여!

오늘 이 거룩한 불사(佛事)에 동참한 그런 수희공덕(隨喜功德)으로 꼭 금생에 정말로 불행한 길로 가지 마시고 우주에 본연의 길, 우주 그대로의 길, 제일 쉽고 종당에는 행복만 약속된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으셔서 영원한 위없는 행복을 금생에 누리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오늘 제 말씀을 마칩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시아본사석가모니불!

 

19980416-덕원암 삼존불점안식 법문 : 무주당청화대종사

19980416-DA 카셋녹음

20140827-mp3 변환 : 본정

20180215-펜글씨 녹취 : 보광선

20180217-워드작업 : 금란

20180228-1차교정 : 본정

 

본 법문은 큰스님 육성 그대로 받아쓴 구어체(口語體)입니다. 음성녹음을 들으시면서 보시면 좋습니다.

 


19980416-덕원암법문-DA-보광선-금란-본정.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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