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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4. 금강륜

충무미래사법문(2001년4월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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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427-충무미래사법문-DA-청화큰스님설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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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yWord : 정견(正見),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제법개공(諸法皆空), 열반적정(涅槃寂靜), 상대적인 우주(宇宙)는 에너지 장()의 활동(活動) 양상(樣相)인 가상(假相)이다. 모든 존재의 근본 생명자리가 바로 우리 마음입니다. 바로 우주란 것은 마음뿐이다. 일진법계(一眞法界), 인간이 왜 괴로운 것인가? 즉견여래(卽見如來), 선오후수(先悟後修), 관심일법(觀心一法), 이행문(易行門), 본원(本願), 염불수행(念佛修行), 염불삼매(念佛三昧), <본래부처가 부처[참나]를 생각하는 것이 염불(念佛)이다>, 흠모추구(欽慕追求)[심회연모(心懷戀慕) 갈앙어불(渴仰於佛)], 부처님은 오직 한분인데 공덕(功德) 따라서 여러 명호(名號)가 붙는다. 염불선(念佛禪), 본래면목(本來面目)자리 본래주인공(主人公)자리를 여의지 않으면 다 참선(參禪)이다. 진리 안에서만 참다운 자유와 행복이 보장된다. 입불이법문(入不二法門), 한마음 한생명자리을 체험하기 위해서 참선·염불이 있다.> 한생명자리가 무량수불(無量壽佛) 무량광불(無量光佛)입니다. <다만 본체(本體)를 안 여의면 모두가 참다운 참선이고 참다운 염불이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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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견(正見)>

 

참으로 아늑한 숲속의 도량(道場)입니다. 산방야화(山房夜話)라고 그래서 그 산중 절에서 노변에 앉아서 오순도순 부처님 말씀을 하는 그러한 법문이 산방야화입니다. 오늘 밤도 역시 산방야화 같은 그러한 분위기가 연상되어서 참 다시 없이 그 고인들의 귀중한 법문이 회상이 됩니다.

 

오늘 오신 분들 가운데는 늦어서 내의 단속 안하신 분들도 계실 것이기 때문에 제 말씀을 길게 않고서 될수록 짧게 마무리하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지금 부처님 오신 날 며칠 안 남게 다가와 있습니다. 부처님 오신 날 우리가 어떠한 자세로 자기 스스로를 점검해야 할 것인가? 그런 것을 맘에 두고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부처님 가르침과 다른 가르침이 어떤 차이가 있는가? 이런 것을 우리는 항시 염두에 두고서 우리 스스로 신앙을 부처님 뜻에 따르는 바른 신앙인가? 그렇지 못하는가? 그런 것을 깊이 성찰 하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바른 정견(正見)을 항시 앞세웁니다. 여러분들도 대체로 아시는 봐와 같이 부처님이 되는 길은 역시 바른 정견이 전제가 되어야 부처님 공부를 바르게 해 나가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팔정도(八正道) 가운데도 정견이 화두에 나와 있고 또는 그때그때 소승·대승 또는 밀교·현교 여러 가지 갈래가 많이 있지만 그 어느 불교 그 종파마다 또는 부처님 가르침마다 모두가 바른 정견을 허두에 앞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못 생각하면 소승적인 그런 정견 또는 대승적인 그런 정견을 우리가 혼동할 수가 있다 말입니다. 소승적인 그런 가르침도 참고는 되지만, 부처님의 그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부처님께서 나오셔서 성도(成道) 하신 뒤에 우리한테 꼭 하시고 싶은 가장 정당한 조금도 흠집이 없는 그런 법문이 대승(大乘)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대승의 정견을 우리가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제행무상(諸行無常)>

 

그래서 보통 불교와 다른 종교의 차이는 이른바 세 차원으로 구분해서 말씀 합니다. 하나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불교인들이 제행무상을 모르는 분은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제행무상 가운데 들어 있는 신심 미묘한 뜻을 잘 알고서 닦는 분들은 또 귀합니다.

 

제행무상이란 그 말 가운데 불교의 기본적인 도리가 다 들어 있고 현재 정밀과학도 역시 그 속에 다 포함 되어 있습니다. 제행무상이라, 어째서 제행무상인가?

 

인연생(因緣生)이기 때문에 모든 존재가 인연 따라서 잠시간 잠시 이루어져서 그대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시시각각으로 변화 전변(轉變)해서 마지않습니다. 어느 것도 그대로 어느 순간도 그대로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제행무상 가운데는 시간성 공간성을 초월하고 인과율(因果律)을 초월하는 그런 법문이 다 들어 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모든 존재가 인연 따라서 잠시간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어느 짧은 시간도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 몸을 구성한 세포를 두고 본다하더라도 몇 시간 전과 또는 현재와 앞으로 몇 시간 후가 그것은 같은 자리가 아니라 말입니다. 일초의 몇 천분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그와 같이 엄밀하게 본다고 생각할 적에 과학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이것은 무상이라 그것은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말과 똑같습니다.

 

우리 중생들이 무상을 잘 모르고서 내 몸뚱이는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 똑같은 몸이 아닌가? 자기 가족들의 그러한 관계있어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것도 존재하는 것은 인연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은 모두가 다 이것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어느 시간도 고정적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 없고 어느 공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것을 우리 중생들은 깊이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이른바 과학적으로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라는 것은 항상 그대로 있고 라는 것도 마찬가지고, 이른바 자기 존재에 대해서 실존을 못 느끼고 가상만 느낀다 말입니다. 하나의 가상(假相)에 불과한 것인데 다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이 유위법(有爲法)이라 하는 것은 아까도 말씀드린 봐와 같이 인연 따라 이루어지는 것은 다 이것은 실체(實體)가 없는 것입니다.

 

<제법무아(諸法無我)>

 

제행무상이기 때문에 제법무아(諸法無我). 무상(無常)이기 때문에 나라는 고집도 없고 너라는 고집 부릴 것도 하나도 없다. 이른바 아()라는 것은 아집(我執)이라, 나라는 고집도 없고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나란 존재가 사실은 지금 변화하는 하나의 과제인 것이지 고유한 것이 없다고 생각할 적에 우리가 그런 것에 집착해서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자기 재산이나 또는 아까 말씀드린 봐와 같이 자기 권속들의 관계라던가 모두가 다 변화하는 과정이지 고유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제법개공(諸法皆空)>

 

그래서 제행무상(諸行無常)한 것은 바로 제법무아(諸法無我), 바로 나라는 것은 없는 것이고, 무상(無常)하고 무아(無我)이기 때문에 결국은 제법개공(諸法皆空)이라 말입니다. 고유하게 고정적으로 어느 순간적으로 시간 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은 공()이 되지 않겠습니까? 무상이고 무아이기 때문에 제법이 공인 것입니다.

 

그러면 다만 공[단공(但空)]이면 불교는 하나의 허무주의(虛無主義)가 되고 말겠지요.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다만 공이 아니란 말입니다.

 

<열반적정(涅槃寂靜)>

 

열반적정(涅槃寂靜)이라. 우리가 공부를 해서 정말로 초월적으로 비약해서 깨닫고 보면 그 때는 그 공이 다만 공이 아니라 변화가 없는 영원한 생명체이고 영원생명자리 바로 이 자리가 열반(涅槃)입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하고, 불구부정(不垢不淨)하고, 그런 자리가 바로 열반인데 다시 바꾸어서 말하면 그 열반자리가 부처 불()자 성품 성()자 불성(佛性)인 것이고, 또는 법성(法性)인 것이고, 또는 진여(眞如)인 것이고, 그 가지가지로 부처님께서 그때그때 경우에 따라서 말씀하셨지만 다 똑같은 뜻입니다.

 

진여(眞如). 불성(佛性). 또는 법성(法性). 실체(實體). 주인공(主人公). 여러분들도 대체로 아시는 봐와 같이 육조단경(六祖壇經)은 참선의 교과서 같은 그러한 경전 아니겠습니까.

 

육조단경(六祖壇經)을 세밀히 보면 부처 불()자 성품 성()자 불성(佛性). 자성(自性)이란 말이 100군데가 넘어요. 참선의 그, 달마스님을 참선의 아버지라 하면 육조혜능 스님도 그 가르침을 그대로 받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 분이 내신 육조단경가운데서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자성. 불성이란 개념이 100군데가 넘습니다. 얼마만치 거기다가 역점을 두셔서 그렇게 되었는가?

 

우리는 부처님 공부를 누구나 열심히 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까?

부처님 공부 한다는 것은 우리 불성을 깨닫기 위해서 하는 것인데 불성은 아까도 말씀 드렸지만 무상(無常)하고 또는 무아(無我)고 모두가 다 과학적으로 본다고 생각하면 공()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상대적인 우주(宇宙)는 에너지 장()

활동(活動) 양상(樣相)인 가상(假相)이다.>

 

현대물리학도 분석하고 분석해 들어가면 나중에는 물질이 아니고 공이 돼 버린다 말입니다. 우주란 것은 에너지의 상호작용으로 해서 이루어지는 가상(假相)이지 실상(實相)이 아닙니다. 이 가운데는 현대적으로 공부 많이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다 아시다시피 현대물리학이란 것은 지금 그 우주란 것은 이른바 장() 에너지라, 에너지가 충만히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오스트발트 독일 물리학자는 에너지 일원론(一元論)이라, 에너지 일원론을 주장해서 그것 가지고 노벨 물리학상을 받고 그러했습니다. 사실은 우주라는 것은 그 장 에너지라, 전자기장(電磁氣場) 또는 중력장(重力場) 또는 약력장(弱力場) 또는 강력장(强力場) 그런 장 에너지가 어떻게 결합하게 되었는가. 어떻게 운영하는가. 그런 것 따라서 그때그때 물질이라는 가상을 낸다 말입니다. 물질은 하나의 에너지의 파동(波動)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에너지의 실체, 에너지를 구성하는 근본 존재는 무엇인가? 이런 것은 현대 물리학에서 알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 물리학이라는 것은 물질이 돼야 시간 공간성이 무엇인가가 그것이 그 엉터리가 있어야 그래야 알 수가 있는 것인데, 물질이 아닌 것은 과학은 알 수가 없는 문제 아니겠습니까?

 

부처님 가르침은 인간의 그런 지혜로서 알 수 없는 그 자리, 생명의 그 본질자리, 우주 생명자리, 그 자리를 부처님께서는 밝히신 것입니다. 그 자리가 바로 아까 누누이 말씀드린 봐와 같이 부처 불()자 성품 성()자 불성(佛性)이고 또는 진여(眞如)고 열반(涅槃)이고 그런단 말입니다.

 

<모든 존재의 근본 생명자리가

바로 우리 마음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의 정견(正見)도 상대 유한적인 그런 자리에서 보면 무상하고 또는 무아고 공이고 하지만 깨달아서 깨달은 안목으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그 다만 공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의 우주 생명이란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마음입니다.

 

우리 마음이란 것은 불생불멸하고 불구부정하고 모든 존재의 근본 생명자리가 바로 우리 마음입니다.

 

<바로 우주란 것은 마음뿐이다>

 

그래서 아까도 말씀드린 봐와 같이 참선의 아버지 할아버지 같은 그런 달마스님께서도 그 마음이란 그 마음만 가지고서 맘을 어떻게 깨달을 것인가? 맘이 왜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가? 이런 문제를 제기해서 말씀하신 것인데 그러기에 그 자리가 바로 이른바 불립문자(不立文字) 그 자리 아니겠습니까? 그 문자로도 표현도 못하고 오직 그것이 생명체인 동시에 또는 바로 우주란 것은 마음뿐이다 말입니다.

 

<일진법계(一眞法界)>

 

화엄경(華嚴經)이나, 또는 법화경(法華經)이나, 대승경전은 다 그렇습니다. 일진법계(一眞法界), 우주가 오직 하나의 진리세계란 말입니다. 하나의 진리세계라는 것은 바로 마음으로 이루어진 세계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두가 마음으로 돼 있다 말입니다. 일체유심조도 믿지 않으면 그때는 불자가 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일체유심조라는 것은 물질은 결국 없다는 말과 똑같습니다. 우리가 소박하니 상식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자기 몸도 물질이고 모두가 다 물질뿐 아닙니까. 대상적으로 다 물질입니다.

 

<인간이 왜 괴로운 것인가?>

 

인간이 왜 괴로운 것인가? 물질 이것이 사실 하나의 가상(假相)에 불과한 것인데 물질을 실상(實相)으로 본다 말입니다. 유물론자(唯物論者)는 물질을 실상으로 보기 때문에 유물론을 주장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르크스레린 이른바 변증법(辨證法)도 역시 소박한 유물론에 근거해 있습니다. 물질로 본다 말입니다. 물질이 다 라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인간의 정신이라는 것은 하나의 물질의 반영(反影)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인생고(人生苦)나 또는 사회고(社會苦)나 국제간의 여러 가지 갈등이나 모두가 다 물질이 실질적으로 실제로 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봐와 같이 제행무상(諸行無常)입니다. 무상한 것은 사실은 공간성을 어느 순간도 점유할 수가 없습니다. 무상이기 때문에 무아(無我)라 말입니다. 결국 무아이기 때문에 공()이다 말입니다.

 

현대적인 모든 병폐(病廢)나 그런 것의 원인이 어디가 있는가?

물질이 그것이 실제 있는 것이 아닌 것인데, 하나의 가상에 불과한 것인데, 그러기에 금강경(金剛經)에서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 그 이루어진 우리 눈앞에 보이는 대상적인 것은 모두가 이것은 몽환포영(夢幻泡影)이라, 꿈이요 그림자요 허깨비에 불과하다 말입니다.

 

<즉견여래(卽見如來)>

 

우리 불교인들은 그렇게 뚜렷이 봐져야 됩니다. 모든 유위법(有爲法) 이것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제법공(諸法空)이라, 공이라 봐져야 그래야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즉견여래(卽見如來), 그러야 여래(如來)를 본다 말입니다.

 

여래(如來)란 것은 바로 불성(佛性)이고, 부처님이고 그러지 않습니까.

없는 것을 없는 것으로 우리가 바로 봐져야만 그러야 참말로 존재하는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참말로 존재하는 것은 낳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죽음도 없습니다.

 

그 불생불멸(不生不滅) 또는 불구부정(不垢不淨)이라든가 그런 것은 그냥 듣기 좋으라고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사실로 본다고 생각할 적에 우리 생명 그 자체는 죽음이 없습니다.

 

열반(涅槃)이란 것은 또는 법성(法性)이라 하는 것도 진여(眞如)라 하는 것은 그것은 변동(變動)이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생명의 자체 자리라 말입니다.

 

<선오후수(先悟後修)>

 

참선(參禪)은 그 바로 그 자리를 바로 문제시 합니다. 그 자리를 바로 인정하고 그 자리를 깨달아야 이른바 돈오(頓悟)라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론적으로 과학적으로 제행이 무상이고 제법이 무아고 또는 모든 존재가 본래 허망하다 공이다 이렇게 느꼈다 하더라도 불생불멸한 열반자리 진여불성자리는 그냥 얻을 수가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이론적(理論的)으로 그와 같이 과학적(科學的)으로 모두가 다 공()이다. 무상(無上)하고 또는 다 무아(無我)고 다 공이다. 이렇게 느꼈다 하더라도 우리가 비약(飛躍)을 해야 초월(超越)해야 그러야 열반(涅槃)의 자리, 해탈(解脫)의 자리, 참다운 부처님 자리를 얻을 수가 있다 말입니다. 그런데서 우리가 참선(參禪) 염불(念佛)하고 명상(冥想)도 하고 여러 가지 수행(修行)이 필요해지지 않겠습니까.

 

<관심일법(觀心一法)>

 

그 우리 수행은 어떻게 할 것인가? 참선하는 법도 여러 가지가 있지 않습니까? 부처님 당시에는 주로 관법(觀法)으로 했습니다. 관조(觀照)하는 관법을 하고, 달마(達磨)스님도 마찬가지고, 육조혜능(六祖慧能)까지도 관심일법(觀心一法) 총섭제행(總攝諸行)이라, 관법을 주로 했다 말입니다.

 

그러나 그 뒤에 송나라 때 와서 불교가 선종(禪宗)이 특히 종파가 많이 분열되었다 말입니다. 종파가 분열 되었다고 생각할 때는 각기 의견이 달라서 분열이 되지 않겠습니까? 다 똑같은 성자(聖者)가 된다고 생각할 때는 분열이 될 수가 없습니다. 똑같은 성자가 되지 못하고 무엇인가 깨달음에 가서 좀 문제가 생기니까 인제 각기 의견이 달라 분열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송나라 때 와서 여러 가지로 참선하는 것은 그냥 묵조(黙照)하는 잠자코 비추어 보는 그런 법도 생기고, 화두공안(話頭公案)을 내세워 가지고 공안을 의심하는 그런 법도 생기고 그랬다 말입니다.

 

그러나 달마스님 때부터 육조혜능까지는 그런 법이 없었습니다. 그때는 오로지 아까 말씀드린 봐와 같이 그런 우리 마음이 바로 부처님이니까 우리 마음부처 그 자리를 바로 깨달아 들어가는 그러한 법으로 지도를 하는 관법(觀法)을 주로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들이 과거전생부터 금생까지 버릇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인간이라 하는 것은 비단 금생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무수생 동안에 이른바 무시이래(無始以來)로 그때그때 낳고죽고 낳고죽고 하면서 그때그때 지은 그런 업()이 많이 있습니다. 따라서 그런 업이 하나의 무거운 이른바 업장이란 것이 우리 마음, 순수한 우리 생명체인 마음을 덥혀 가려 있기 때문에 우리가 공부하는데 그 업장(業障)을 녹이지 않고서는 공부가 진척이 안 됩니다.

 

<이행문(易行門)>

 

그래서 그 용수보살(龍樹菩薩)은 여러분들이 다 아시는 봐와 같이 제2의 석가(釋迦)란 그런 훌륭한 조사(祖師)가 아니겠습니까. 용수보살은 공부하는 법에 있어서 중생들의 근기(根機)를 살펴서 난행문(難行門)과 이행문(易行門)이라. 어려운 공부 방법과 또 쉬운 공부 방법을 말씀했다 말입니다.

 

그래서 어려운 문은 그것은 참선(參禪)으로 해서 그냥 바로 마음을 깨달은 그런 쪽으로 말씀을 하시고, 또는 이행문(易行門)이라 한 것은 쉬울 이()자 행할 행()자 쉬운 문이라 말입니다. 쉬운 문은 무슨 문인가 하면 이것은 우리 중생들의 자기 몸을 헤아려 본다고 생각할 적에 그 업장(業障)이 무거우면 이것은 공부하기가 장애도 많고 또는 빨리 진척이 안 되니까 기왕이면 좀 쉬운 문으로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생각하는 분이 많이 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용수보살께서 그와 같이 쉬운 쪽으로 수행을 쉽게 하게시리 하시기 위해서 이행문을 냈다 말입니다.

 

이행문은 어떤 것인가? 하면 이것은 타력적(他力的)으로 불성이라 하는 것은 부처 불()자 성품 성()자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는 것이 이것이 어디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그 언제 어디에나 충만해 있는 하나의 생명자체이기 때문에, 또는 그 자리는 이른바 모든 그런 공능(功能)을 갖춘 그런 자리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자리를 바로 이것은 모든 중생들은 다 성불(成佛)의 길을 인도해야 되겠다는 그런 기운(氣運)이 원래 갖추고 있다 말입니다. 이것을 불교 전문적인 술어로 하면 본원(本願)이라, 근본 본(), 원할 원()자 본원이라 그럽니다.

 

<본원(本願)>

 

그런데 본원이 원래 우주에는 갖추어져 있다 말입니다. 그래서 그 본원은 바로 부처님께서 모든 중생을 부처가 되게 시리 하는 원래 부처란 것이 우주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에 모든 중생들은 다 본래부처의 자리 본래생명의 고향자리로 인도하는 그런 원력이 원래 갖추어 있다 말입니다.

 

따라서 그 본원을 믿고서 본원을 믿지 않으면 그때는 이른바 이행문이라 하는 쉬운 쪽으로 가는 공부는 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가 비록 안 보인다 해도 그 우주 자체에 가서 벌써 모든 중생을 영원해탈로 인도하는 본원이 있다 말입니다. 본원(本願)을 믿고서 부처님을 하나의 생명적으로 인격적으로 받아드리는 그런데 이른바 타력적인 그것이 하나의 수행법이 돼서 그것이 이행문이라 말입니다.

 

허나 그것도 역시 우리 중생의 업장이 무거우니까. 그냥 말로만 해서는 우리가 납득이 잘 안 갑니다. 그 부처님의 생명을 인격적으로 표현해서 이른바 부처님의 명호(名號)란 말입니다.

 

부처님이 다만 어떤 그야말로 생명이 아닌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이기 때문에 우주 생명이기 때문에 부처님 그 명호를 부쳐서 부처님 이름이 명호입니다.

 

<염불수행(念佛修行)>

 

지장보살(地藏菩薩)이나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나 그런 것이 부처님 명호라 말입니다. 그런 명호를 부름으로 해서 우리 맘을 본래 부처자리로 인도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가르침 이른바 아까 말씀드린 봐와 같이 쉬운 문 이행문이라 말입니다. 다시 바꾸어 말하면 그 자리가 타력문(他力門)입니다. 부처님 힘에 의지해서 공부한다 말입니다.

 

부처님 힘이라는 것이 본래로 우주에는 충만하게 있기 때문에 그런 힘에 의지해서 공부하면 우리 같이 업장이 무거운 사람들이 그때는 부처님 힘 따라서 부처님 힘에 편승(便乘)해서 공부를 해나간다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염불수행(念佛修行)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자기의 마음이 본래 부처다. 그래서 마음자리를 깨닫는 문으로 해서 관조(觀照)하는 그런 문이 있고, 또는 잠자코 우리 마음을 비춰보는 그런 명상적인 잠잘 묵()자 비출 조()묵조선(黙照禪)이 있고, 그런가 하면 화두(話頭)를 내서 우리 맘을 그대로 가만히 있으면 자꾸만 그런 업장 때문에 망상(妄想)이 끝도 갓도 없이 많이 나는 것이니까 그런 명상으로 제거를 방편으로 화두를 내서 화두를 의심하므로 해서 우리 마음의 번뇌를 없애는 그러한 간화선(看話禪)이라, 이른바 화두선이 있다 말입니다.

 

<염불삼매(念佛三昧)>

 

이러한 세 가지 법이 있습니다. 있는데 아까 말씀드린 봐와 같이 일반인 특히 생활인으로 해서 불교를 믿는다고 생각할 때에는 이론적으로 아까 말씀드린 봐와 같이 제행무상도 알고 제법무아도 알고 또는 열반적정이라, 영생불멸의 자리를 이론적으로 느낀다 하더라도 그 자리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공부가 필요한데 우리 마음이 바꿔져야 한다 말입니다. 변화가 되어야 한다 말입니다. 변화가 되려면 하나의 방법으로 해서 오랫동안 거기에 잠겨야한다 말입니다.

 

우리 부처님 제자에 있어서 대체로 이론적인데 그쳐버리고서 증명(證明)을 못하면 우리가 힘이 나올 수 없습니다. 범부가 성인이 될 수 없다 말입니다. 특히 현대에 있어서 여러 가지로 바쁘고 또는 여러 가지 그런 조건이 갖춰 있지 않기 때문에 보통은 그냥 말로는 어느 정도 체계가 섰다 하더라도 정말로 우리 스스로 체험이 없다고 생각할 때는 자기 스스로 환희심(歡喜心)도 안 나오는 것이고 자기 행동도 부처님 가르침에 따라서 여법(如法)이 할 수가 없다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우리 스스로 변화가 되어야 하는데 범부(凡夫)가 성자(聖者)가 되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되기 위해서 오랜 동안 하나의 그런 수행법 따라서 거기다가 우리가 전심전력(全心全力)을 다 경주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시기 위해서는 아까도 말씀드린 봐 참선 하는 법이 몇 가지가 있고, 또 쉬운 문으로 해서 염불문이 있는 것인데, 염불문은 이것도 누구든지 하기는 쉽습니다. 하기는 쉽다 하더라도 이것도 역시 염불을 해서 우리 마음이 상속(相續)이 돼야 합니다. 앞생각 뒷생각 가운데 잡념이 끼지 않고서 오로지 공부해 갈 수 있는 그런 겨를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맘이 이른바 염불삼매(念佛三昧)에 잠긴다 말입니다.

 

요새 명상법이 유행이 되지 않습니까? 그런 것은 대단히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러나 다른 명상법은 이것은 유위법(有爲法)입니다. 해탈(解脫)로 인도하는 법이 아닙니다. 생사(生死)를 떠나는 법이 아닙니다. 다만 그런 공리적으로 명상 좀 함으로 해서 몸도 가벼워지고 또는 두뇌도 좀 명석해지고 또는 어떤 면으로는 이득도 있어지고 공리적인 면에서 가치가 있다 하더라도 이런 유위법은 아까도 말씀드린 봐와 같이 생사를 초월하는 법이 아닙니다. 따라서 한계에 부딪치고 만다 말입니다. 이른바 상대적인 한계를 초월을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고를 떠나는 것이 불교의 근본 목적인데 인생고를 떠날 수가 없습니다. 인생고를 떠난다는 것은 이것은 생로병사(生老病死)를 초월한다는 그런 의미가 되지 않겠습니까? 헌데 그러한 세간적인 명상법은 그러한 생로병사를 초월할 수가 없습니다.

 

<본래부처가 부처[참나]

생각하는 것이 염불(念佛)이다>

 

그래서 명상 가운데 가장 궁극적인 명상 가장 올바른 명상 이것은 부처님 가르침으로 해서 아까 말씀드린 봐와 같이 참선하는 법과 염불하는 그런 법이 있다 말입니다.

 

참선하는 법과 염불하는 법도 절련(絶戀)이 둘로 갈라서만 볼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어찌 그런고 하면 내내야 어느 것이나 모두가 다 부처를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탈을 구한다말입니다.

 

그래서 그 잘 모르는 분들은 참선만 주장하는 사람들은 염불하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염불은 방편적인 공부가 아닌가? 그것은 근기(根機)가 낮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쉽게 취급한다 말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염불이란 것도 역시 부처가 본래부처가 부처를 생각하는 것이 생각 염(), 부처 불(), 염불 아닙니까. 화두를 드나 또는 그냥 묵조선을 하나 관조를 하는 그런 선법을 취하나 그 부처님을 생각하는 - 부처님은 하나의 자기 생명의 근본인 동시에 바로 우주의 본 바탕인데 우주의 대생명인데 따라서 염불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실은 공부 진도가 올라가지 않는 것입니다. 본래부처가 부처를 생각하는 것이 염불이라 말입니다. 우리가 본래 부처인데 내 생명의 근본인 동시에 우주생명의 근본이 부처라서 그 자리 그 부처가 부처를 생각하는 그걸 떠나서는 공부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흠모추구(欽慕追求)[심회연모(心懷戀慕) 갈앙어불(渴仰於佛)]>

 

따라서 어떻게 공부를 하든지 간에 화두공안을 드나 그냥 묵조선을 하나 또는 관찰하는 관심법을 취하나 모두가 그 부처를 생각하는 부처를 흠모(欽慕)하고 부처를 추구(追求)하고 간절히 구하는 그런 맘이 항상 마음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한다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령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라는 것도 그냥 보통 방편적으로 생각할 때는 아미타불은 극락세계에나 계시고 -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은 저 하늘 어디에 계시고서 우리가 기도 모시면 우리한테 구원을 주신다. 그런 식으로 생각해선 안 됩니다.

 

부처님이란 것은 불신충만어법계(佛身充滿於法界), 이 우주가 바로 사실은 부처님 생명이란 말입니다. 우주가 다른 것은 없습니다. 일원적(一元的)으로 부처님 세계란 말입니다.<: 불신충만어법계-부처님 몸은 우주법계에 충만하시다. 즉 우주는 진리이신 부처님 생명으로 가득 차있다.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우주는 성령으로만 가득 차있다.>

 

<부처님은 오직 한분인데

공덕(功德) 따라서

여러 명호(名號)가 붙는다.>

 

따라서 그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나 지장보살(地藏菩薩)이나 무슨 보살(菩薩)이나 모두가 다 이름은 많이 있지만 그 본체는 다 똑같습니다. 지장보살 따로 있고 아미타불 따로 있고 그런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 부처님 자리란 것이 만덕(萬德)의 자리이기 때문에 많은 공덕(功德)의 자리이기 때문에 하나의 개념으로 표현을 못한다 말입니다.

 

자비(慈悲)도 원만하고 지혜(智慧)도 원만하고 능력(能力)도 원만하고 모두가 다 완벽한 만덕 공덕장(功德藏)이라 공덕의 곳집이나 같은 그런 자리가 바로 부처님 자리이기 때문에 하나의 개념으로는 그런 공덕을 표현 못하니까,

 

영생불멸한 우리가 생명 차원에서 본다고 할 때는 그때는 아미타불(阿彌陀佛) 나무아미타불인 것이고, 또는 부처님의 한도 끝도 없는 그런 대자대비(大慈大悲) 자비로운 쪽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인 것이고, 또는 원력(願力) 차원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보현보살(普賢菩薩)이고, 또는 우리 중생들의 영혼(靈魂)을 그런 중음(中陰) 세계에서 구제(救濟)해서 천상(天上)이나 또는 극락세계(極樂世界)로 인도하는 그런 면에서는 지장보살(地藏菩薩)이고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이름은 그렇게 다르다 하더라도 내내야 그 자리는 상()을 떠난 자리이기 때문에 똑같은 자리라 말입니다. 이 부처 저 부처 이 보살 저 보살 따로따로 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까도 말씀드린 봐와 같이 하나의 생명이기 때문에 만덕의 자리인데 그런 공덕으로 다 하나의 개념으로 다 표현 못하기 때문에 그와 같이 이름이 달리 많은 것이다.

 

그래서 설사 지장보살(地藏菩薩) 외운다 하더라도 다른 부처님이라든가 다른 보살하고 그런 자리하고 같다고 생각하고 하셔야지 자기가 지장보살이나 그런 보살을 평소에 많이 염하고 공부했다고 그랬다고 해서 다른 것은 하지 말라든가 또는 다른 것은 별로 공()이 없다든가 이렇게 해서는 부처님 뜻과 그것은 맞지 않은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것을 깊이 생각 하셔서 아까도 말씀드린 봐와 같이 우리가 번뇌 많은 중생이 그냥 참선으로 해서 자기가 자력적(自力的)으로 가기가 어려운 것이니까 염불을 해서 간다 하더라도 역시 그 염불 자체를 하도 그 여러 가지로 해서 부처님이 명호가 많다고 해서 꼭 한 가지만 옳다고 고집해서는 이것은 하나의 법집(法執)에 불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자기가 인연 따라서 무슨 보살 어느 부처님을 선택했다 하더라도 다 하나라는 자리, 다 하나라고 생각하면서 자기 인연으로 선택할 뿐이다. 이렇게 생각해야 그래야 되는 것이고,

 

<염불선(念佛禪)>

 

또 같은 염불(念佛)이라 한다 하더라도 그 부처님을 자기 맘 밖에서 구하는 그런 염불, 부처님을 자기 맘 밖에서 타력(他力)적으로만 구하는 그런 염불, 그런 염불은 참선(參禪)하고 같이 직결(直結)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가령 우리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외운다 하더라도 자기 마음에 부처님의 만공덕(萬功德)이 다 그대로 충만(充滿)해 있다. 이렇게 생각 하면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외운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그 본체성(本體性)을 본래 자리를 떠나지 않기 때문에 그때는 염불선(念佛禪)이 되는 것입니다.

 

<본래면목(本來面目)자리

본래주인공(主人公)자리를

여의지 않으면 다 참선(參禪)이다.>

 

염불(念佛)을 한다고 하면서 나는 방편 공부를 한다.’ ‘나는 지금 참선 공부와는 훨썩 동떨어진 공부를 한다.’ 이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아까도 말씀드린 봐와 같이 참선(參禪)이라는 것은 본래면목(本來面目) 자리 본래 주인공(主人公) 자리를 여의지 않으면 다 참선이란 말입니다.

 

꼭 화두를 해야만 참선인 것이고, 또 묵조만 하는 것이 참선인 것이고, 그런 것이 아니다 말입니다. 우리 마음이 그 본체 그 주인공 자리를 떠나는가? 안 떠나는가?

 

가령 우리가 관법(觀法)을 취한다 하더라도, 달마(達磨)스님께 하신 육조(六祖)가 하신 그런 관법을 취한다 하더라도, 그렇다 하더라도 역시 우리 마음이 형식은 관법을 취해도 우리의 마음이 주인공 자리 본래의 부처의 자리를 떠나버리면 그때는 참선이 못되는 것입니다.

 

화두(話頭)를 제아무리 열심히 의단을 품고 한다하더라도 주인공 자리를 분명히 안 떠나고, 바꿔서 말하면 본체를 안 여의고, 공부를 해야 그래야 참선입니다.

 

우리가 주문(呪文)을 외우나 또는 불경을 우리가 그대로 독송(讀誦)을 하나 어떻게 하시든지 간에, 형식은 어떻게 하던지 간에, 우리 마음이 본래면목자리 불심자리를 안 떠나면 모두가 다 그때는 가림 없이 다 참선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부처님 자리, 우리 마음 밖에서 부처님 구하지 않고 모두가 다 마음 안에서 구하는 그런 염불 한다고 생각할 때는 아까도 말씀드린 봐와 같이 바로 그것이 염불참선(念佛參禪)이 됩니다.

 

<진리 안에서만 참다운 자유와 행복이 보장된다.>

 

우리 불자님들 산방야화(山房夜話)란 말씀을 했습니다만 정말 이렇게 밤이 시간이 좀 길어지니까 훨씬 더 정숙하고 더욱 더 아늑해 집니다.

우리가 부처님 가르침을 금생에 만나는 것은 얼마나 행복스러운지 모릅니다. 바른 인생관(人生觀) 바른 가치관(價値觀) 이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좋은 어머니가 되고 좋은 아버지가 되고 좋은 친구가 되고 어떤 입장에 있든지 간에 좋은 국민 되고 또는 좋은 지도자가 되고 어떤 입장에 있든지 간에 바른 가치관 바른 인생관은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부처님 가르침 아까도 제가 말씀드린 봐와 같이 제행이 무상이라, 그 무상이라는 것은 분명히 안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가 어머니 자리 아버지 자리 어느 자리에 있든지 간에 소월한 자리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교단(敎壇)에 서서 남을 가르치는 입장도 그렇습니다. 진리(眞理)를 따르지 않으면 진리를 떠나버리면 남을 가르치는 아무런 그 때는 보람이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 진정으로 진리를 구하는 그런 구도인(求道人)의 자세가 돼야 남을 가르치는 비로소 남을 가르치는 자격이 있다 말입니다.

 

우리 보살님들도 누구나 다 좋은 아내가 되고 싶고 좋은 어머니가 되고 싶어 하시겠지요. 금생에 나와서 짧은 동안에 현모양처가 되고 싶은 그런 맘이 없는 분이 누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냥 될 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른 가치관 바른 세계관이 돼야 한다 말입니다.

 

<입불이법문(入不二法門)>

 

천지우주란 것은 아까도 말씀드린 봐와 같이 그 부처님이라는 진여불성만 우주에는 충만히 있습니다. 입불이법문(入不二法門)이라. 다른 둘이고 셋이 다른 것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진리만 존재한다 말입니다.

내 마음 머리카락부터서 내 발가락 모두가 다 부처님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다른 물질은 이것은 허망한 것입니다. 물질은 몽환포영 말입니다.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 중생이 없는 것을 있다고 생각하니까 인생고(人生苦)가 생긴다 말입니다. 어느 것도 모양이 있는 것은 집착할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인연(因緣) 따라서 무슨 지위에 오르고 또는 무슨 사업을 하고 그런 것은 다 좋습니다. 그러나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나와 남이 결코 둘이 아닙니다. 천지가 다 뿌리가 같기 때문에 천지가 하나의 불성이기 때문에 나와 남도 역시 똑같은 부처님입니다.

 

여기 계신 불자님들이 지금 각기 다 달리 보이지만 사실은 그 불성이라는 진여불성이라 하는 우주 에너지로는 다 붙어 있는 것입니다. 우주에는 어느 것도 고유한 것이 없다 말입니다. 어느 것도 따로 분리하는 것이 없습니다.

 

인연으로 해서 다 종()으로 횡()으로 중중무진(重重無盡)으로 해서 종으로 횡으로 다 같이 인연으로 해서 연결이 됐다 말입니다. 연결고리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존재를 못합니다.

 

부처님의 정견(正見)을 다시 깊이 생각하셔서 꼭 그 우리의 앞으로 나아갈 길에 부처님의 정견 - 부처님의 정견은 오직 일원적으로 하나의 부처님뿐이다. 다른 것은 있을 수 없다.

 

<한마음 한생명자리을

체험하기 위해서 참선 염불이 있다.>

 

분할(分割)이라는 것은 이것은 우리 중생견해(衆生見解)에서 나누어 보는 것이지 진리(眞理)에서 볼 적에는 우주 전체가 모두 다 하나의 생명인 것이다. 하나의 생명자리를 놓치지 않고 그 자리를 체험을 위해서 참선 염불이 있다 말입니다.

 

<한생명자리가 무량수불 무량광불입니다.>

 

불자님들 그런 정도에 맞추어서 가장 자기한테 하시기 쉬운 관세음보살을 부르나 또는 화두공안을 의심하나 또는 아미타불을 부르나 -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이나 모두가 우주생명이란 뜻입니다. 아미타불 역시 우리말로 뜻을 쉽게 풀이하면 무량수불(無量壽佛)이라, 무량수불이란 영원한 생명이란 뜻입니다.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 우주에 가득 차 있는 하나의 생명의 빛이란 뜻입니다.

 

현대물리학에서는 우주의 가장 근원적인 밑에 가서는 방사능 같은 광명이 있다 말입니다. 하나의 빛이라 말입니다. 우주 끄트머리는 모두가 다 가장 기본적인 하나의 빛입니다. 빛이란 그 위에서 적당히 결합이 되고 또는 하나의 진동이 되고 그래서 이런 물질적인 모양이 있는 것이 보인다 말입니다. 눈에 보이는 물질을 사실 있다고 생각 한다면 그때는 불교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다만 본체(本體)를 안 여의면

모두가 참다운 참선이고

참다운 염불이란 말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린 봐와 같이 화엄경(華嚴經), 법화경(法華經), 능엄경(楞嚴經), 열반경(涅槃經)모두가 다 물질은 사실은 이것은 다 있지 않다. 이와 같이 우리 불교는 하나의 생명주의(生命主義)입니다. 하나의 생명이 바로 진여불성(眞如佛性)의 자리 아니겠습니까.

 

꼭 자기한테 맞는 수행법 참선할 것인가? 또는 염불할 것인가? 또는 다 한 번에 하는 그런 의미가 될 수가 있는 것이고, 사실은 진여불성만 여의지 않으면 아까도 말씀드린 봐와 같이 경을 보나 또는 우리가 사경(寫經)을 하나 또는 입으로 염불을 하나 또는 소리를 안내서 속으로 하나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본체(本體)를 안 여의면 모두가 참다운 참선이고 참다운 염불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하셔서 부처님의 정견 밑에서 다시없는 그런 여법한 불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해서 마지않습니다.

 

오늘 이러한 자리를 준비해주신 주지스님에 대해서 진심어린 사의를 표합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본사아미타불!

 

20010427-충무미래사법문-DA-청화큰스님설법

20010427-삼영불교 학무거사 녹음

19980416-DA- 삼영불교 학무거사 DA녹음

20140827-mp3 변환 : 본정

20180214-펜글씨녹취 : 일주심

20180218-워드작업 : 금란

20180302-1차교정 : 본정

 

본 법문은 큰스님 육성 그대로 받아쓴 구어체(口語體)입니다. 음성녹음을 들으시면서 보시면 좋습니다.

 

 


20010427-충무미래사법문-DA-청화큰스님-일심주-금란-본정.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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