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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4. 금강륜

* 1985년7월31일 태안사 하계용맹정진 입제법문(9)


* 1985년8월4일 태안사 하계용맹정진 5일째 법문

 

참선(參禪)은 안락법문(安樂法門)

 

본래 우주는 영원한 행복이 충만한 불성광명체이다.

 

다시 새삼스럽게 말씀드릴 필요도 없이 이번 우리 용맹정진(勇猛精進)의 대명제는 참선(參禪)입니다. 즉 선(禪)입니다. 어떻게 선을 해야 할 것인가?

이 문제는 저나 또는 저의 말씀을 보다 더 부연 설명도 하시고 보충도 하시고 여러 가지로 체계를 세워서 말씀해 주신 거사님들 말씀이나 다 선을 중심으로 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선(禪) 이것을 다시 말할 것도 없이 불도(佛道)의 대결론입니다. 우리가 공부를 어떻게 하든지 간에 불교를 할 때에는 꼭 선을 통과해야 합니다.

 

불도가 아니라도 공부가 성취되는 마당에서는 무슨 공부나, 기독교의 성자(聖者)나 또는 유교의 성자나, 성자라고 할 수 있을 바에는 마땅히 선 같은 그런 마음자세를 통과해야 합니다.

 

선은 우리가 얼핏 생각할 때는 굉장히 어렵게 생각합니다마는 제가 몇 번 말씀 하였습니다만 인류문화사의 가장 끄트머리, 인류문화의 정화(精華), 이것이 선이기 때문에, 아주 고도의 수행법(修行法)이기 때문에 이것이 참 어렵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또는 선에 관한 여러 가지 문헌(文獻)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선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말씀을 많이 해 놔서, 또는 그 문헌들이 하도 복잡해 놔서, 요령 있게 알기가 참 어렵습니다.

 

허나 선 이것은 『안락법문(安樂法門)』이라, 실은 쉽다고 하면 제일 쉽습니다. 어째서 쉬운고 하면은 우주(宇宙)의 대법칙(大法則)에 따르는 몸가짐, 우주의 질서에 따르는 말, 바로 우주의지를 내 의지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쉬운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가장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천지우주(天地宇宙)의 규범(規範)을 바로 내 모양으로 하고, 천지우주의 질서에 따르는 말을 내 말로 하고, 천지 우주의 의지(意志)를 내 의지로 하는 이것이 참선(參禪)입니다. 우리가 그런 천지(天地) 자연 질서에 어긋나기 때문에 복잡한 것입니다. 성자라는 것은 조금도 무리가 없습니다.

 

공자(孔子)님 말씀에도 내가 15세 정도로나 나이가 되어서 비로소 학문(學文)에 뜻을 두고,<십오이지학(十五而志學)>

 

30세에 입지(立志)하고, 삼십에 그때는 결정적으로 내가 이렇게 해야 하겠구나 하고 각오를 세웁니다. <삼십이립(三十而立)>

 

40세에 불혹(不惑)하고,(아니불(不)자, 미혹할혹(惑)자). 사십에는 미혹되지 않는다 말입니다. 결정신심(決定信心)이 생겨서 그때는 그냥 무슨 유혹이나 그런 것에 유혹되지 않고, 마음이 환경에 끄달리지 않는다 말입니다. 사십에 불혹이라, 40세에는 자기 인생관(人生觀)을 완전히 확립을 시켰습니다. <사십이불혹(四十而不惑)>

 

오십(五十)에 지천명(知天命)이라,(알지(知)자, 하늘천(天)자, 목숨명(命)자). 오십(五十)에 그때는 하늘에 명령 하늘의 질서를 안다 말입니다. 불교로 말한다며는 초견성(初見性)이나 그렇게 했겠지요. 하늘의 질서를 안다 말입니다.<오십이지천명(五十而知天命)>

 

육십(六十)에 이순이라,(귀이(耳)자, 순할순(順)자). 자기에게 들어오는 것에 대해 조금도 막힘이 없단 말입니다. 무애(無礙) 지혜(智慧)라 거리낌 없는 지혜를 알 때가 그때가 육십이다 말입니다. <육십이이순(六十而耳順)>

 

칠십(七十)에는 종심소욕(從心所欲)하여 내 마음대로 행(行)하여도 그때는 불유거(不踰矩)라, 조금도 법도(法道)를 넘지 않는다 말입니다. 그렇게 행해도 그때는 우주질서를 넘지 않는다 말입니다.<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성자들은 천지우주의 질서를 따른다.

이와 같이 성자(聖者)란 비록 자기 사는 역사적 환경은 다르다 하더라도 마음 자세는 그와 같이 우주 천지에 그런 질서를 따르는 것입니다. 또는 원래 업장(業障)이 가벼운 사람들은 비록 그 사람이 어느 지위에 있다하더라도 천지 우주 질서를 따르기 위해서 애쓰는 것입니다.

 

여기 스님네가 지금 계시지만 누가 억지로 중되라고 해서 되겠습니까? 자기 마음속으로 업장이 가볍기 때문에 과거 전생부터서 천지우주 질서를 따르는 그런 행습 때문에 그때는 누가 말려도 할 수 없이 중이 되는 것입니다.

 

천군만마(千軍萬馬)가 가로 막아도 그렇게 안 될 수가 없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백만장애(百萬障碍)를 물리치고 출가입산(出家入山)했습니다. 왕자(王子)의 지위를 그만 두고, 또는 그런 자기 부왕인 정반왕(淨飯王)이 그렇게 말렸어도 그때는 중이 된다 말입니다.

 

이와 같이 천지우주의 질서를 따르는 즉 말하면 구도심(求道心)이 불타있는 그때는 막을래야 막을 수가 없습니다. 헌데 이러한 천지우주의 질서를 가장 따르기 쉬운 방법, 바로 따르는 그 방법 그것이 바로 참선입니다. 그래서 참선을 안락법문(安樂法門)이라.

요즘 어떤 분분들은 계행(戒行)지키기가 굉장히 어렵다. 계행지키면 까깝하다 이런 말을 합니다. 허나 업장이 가벼운 분들은 계율(戒律) 지키기가 가장 쉬운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술 먹기보다 안 먹기가 더 쉽습니다. 싸움하기보다 안하기가 더 쉽습니다. 음탕한 짓 안하기가 하기보다 더 쉽습니다. 가장 편하고 쉬운 행동 이것이 계율입니다.

 

그런데 나뿐 버릇을 잘 못 붙인 사람들은 그것이 쉽지 않다 말입니다. 고기 먹지 말라. 평소 고기를 먹어서 맛을 들인 사람들은 그것을 참을라면 어렵겠지요. 허나 맑은 사람들은 먹을래야 먹을 수가 없습니다. 고기 한 점 들어가도 그냥 비위가 상합니다.

 

우리들은 태초(太初)에 인간이 어떻게 나왔는가? 그것을 생각하면은 그런 음식에 대해서도 그냥 알 수 있습니다. 태초에 인간이 우주가 텅 빈 허공 가운데서 형체가 생겨서, 불교말로 하며는 공겁(空劫) 가운데서 성겁(成劫)이라, 우주가 이루어진다 말입니다.

우리 앞서 거서님들이 과학적으로 또는 철학적으로 불교를 증명도 하시고 모두 하셨습니다마는 불교는 과학적인 동시에 철학이오, 철학인 동시에 종교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과학은 비록 세밀한 변증(辨證)은 미처 안 되어있다 하더라도 원리는 굉장히 심수오묘(深邃奧妙)한 원리를 밝히고 있습니다. 천지 우주의 시초도 역시 다시 말하자면 천지개벽(天地開闢)론, 천지창조(天地創造)론 이것도 역시 불교와 같이 심수오묘한 가르침이 없습니다.

 

중생의 공업력(共業力)으로 우주가 이루어진다.

 

텅 빈 허공 가운데 우주가 이루어질 때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것은 우주가 텅 비어 버려도 파괴 안 될 정도의, 영향을 받지 않을 정도의 맑은 의식수준(意識水準)의 존재가 많이 있습니다. 즉 말하자면 저 무색계(無色界)에 있는 중생, 색계(色界)에 있는 중생도 광명(光明)만을 몸으로 하는 중생, 그런 중생들은 우주가 파괴되어버려도 파괴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중생은 존재합니다.

욕계(欲界)에 있는 이와 같은 거치로운 질료(質料), 거치러운 물질로 몸을 한 그런 중생들은 다 파괴되고 맙니다마는 업장(業障)이 가벼워서 광명(光明)을 몸으로 한 중생들은 천지우주가 파괴되어도 그때에는 파괴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그런 중생들이 생각을 하면은 생각하는 그것이 쌓이고 쌓여서 우주를 구성합니다. 어제 우리 거사님도 말씀하셨습니다마는 우리 말 한 마디, 우리 생각 하나 하나가 창조하는 힘이 있습니다. 생각 한 번 딱하면 생각하는 그것이 이제 전자(電子)로 움직이고 양자(陽子)로 움직입니다.

 

맑은 한 생각이 우주를 정화시킨다.

 

우리는 흔히 진묵대사(震黙大師)와 서산대사(西山大師)를 비교해서, 서산대사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나와서 의병을 모집해가지고서는 국가를 위해서 싸웠으니까 이 분은 훌륭하고, 진묵스님은 한 번도 안 나와서 이 임란을 보고서 그냥 산중에가 있었으니까 이 분은 별로 국가에 대한 애국심이 없다. 이와 같이 흔히들 말합나다마는 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비록 세속(世俗)에서는 한 번도 안 나왔다하더라도 도인(道人)들이 산중에서 이렇게 가만히 참선하고 있는 그것, 그 맑은 마음, 그 맑음 염력(念力), 그것이 우리 주변을 정화(淨化)시키고 우주를 정화시키는 것입니다. 적군(敵軍)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은 마가타(摩伽陀)국으로 이렇게 오시면 마가타국으로 많은 선신(善神)들이 이렇게 몰려옵니다. 그리고 마가타국에 붙어있는 악신(惡神)들은 무서워서 다 도망가 버립니다. 다른 나라에 가면 다른 나라 역시 그런 호법선신들 그런 좋은 신장(神將)들은 따라서 줄줄이 갑니다. 그와 동시에 그 나라에 병고(病苦)도 일으키게 만들고 하는 그런 나쁜 신들은 다른 데로 도망가고 맙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한 번 생각하면 그 한번 생각하는 힘이 즉시에 바로 자기 마음뿐만 아니라 우주를 정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또 나뿐 생각을 하면 즉시에 자기를 오염(汚染)시키고 우주를 오염시킵니다.

 

무색계나 색계의 좋은 데에 있는 중생들이 생각하는 그 생각 생각들이 쌓이고 쌓여서 전자를 만들고 또는 양자를 만들고 각 원자를 만들어서 천지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 어떻게 불경(佛經)에는 표현 되어 있는고 하면은 중생의 공업력(共業力)으로 우주를 만들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한가지공(共)자, 업업(業)자, 한 두 사람이 생각하는 힘만 가지고는 우주를 구성 할 수가 없습니다. 천지가 파괴가 되어서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보아서는 텅텅 비어 버렸지만은 순수한 에너지는 그대로 있습니다. 불성(佛性)은 그 대로 충만해 있습니다.

 

그런 불성(佛性) 기운(氣運)이, 아직 몸이 파괴 안 된 중생들이 생각하는 생각, 그 생각들이 모여서 우주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중생들의 생각의 집합체가 바로 우주이다. 우주는 중생들의 생각하는 힘 에너지 덩어리이다. 중생들의 생각하는 힘은 본래 불생불멸의 불성기운이다. 따라서 우주는 불성뿐이다. 중생도 역시 불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스의 위대한 철학자 가운데서 한 분인 엠페도클레스(Empedocles) 서기 한 500년 전에 나오신 분입니다. 이분도 역시 우리 불교와 마찬가지로 우주를 구성한 요소가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라고 말씀 했습니다. 땅기운, 물기운, 불기운, 바람기운 말입니다.

헌데 그러면 어떤 것이 시초의 동력이 되어서 바람기운 만들고, 땅기운 만들고, 불기운 만들었는가? 어떻게 설명되었는가 하면은 ‘사랑과 미움’이 땅기운, 바람기운 등을 만들고 해서 우주를 구성 했다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가 욕구하면은 욕구하는 그 마음이 천지우주의 순수에너지인 불성을 좌(左)로 선회(旋回)를 시킵니다. 좌로 진동(振動)을 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싫어하는 그 마음은 척력(斥力)이 되어서 순수한 에너지를 그때에는 우(右)로 진동시키는 것입니다.

 

순수한 에너지 우리 불성을 좌(左)로 선회(旋回)시키는 것은 인력(引力)이 되어서 자기화(磁氣化)됩니다. 자력(磁力:자계(磁界))이 되고, 또 싫어하는 마음 그것은 순수한 에너지를 우(右)로 진동(振動)시켜가지고 그때에 전기(電氣:전계(電界))가 됩니다. 이러한 것이 이렇게 모이고 저렇게 모여서 그래가지고 차근차근 우주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불경의 표현으로 하며는 앞서 말씀마따나 중생의 공업력(共業力)으로, 많은 중생의 공동(共同)의 업력(業力)으로 그때는 우주가 구성되어 있다 말입니다. 우주도 구성하는 것인데 우리의 몸 하나, 우리 주변 하나 정화(淨化)시키고, 또는 나쁜 방향으로 오염(汚染)시킬 수 없겠습니까?

 

우리가 철갑으로 몇 겁으로 둘러쌓인 그런 밀실에서 혼자 나쁜 생각하면, 아무도 못 보죠, 허나 천안통(天眼通)을 통한 사람들은 다 보는 것입니다. 또한 동시에 나쁜 생각이 또 역시 우주를 바로 오염시킵니다. 자기 몸도 자기 마음도 오염시키고 말입니다.

 

우리 심화(心火)가 끓으면 그냥 병(病)이 되는 것 보십시오. 남을 굉장히 미워하면 진심(瞋心) 때문에 병 되는 것 보십시오. 욕심(慾心)이 많으면 욕심 때문에 병이 됩니다. 사람들은 우리 병이 꼭 생리적인 외형적으로 바깥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허나 대부분의 병은 마음에서 옵니다.

 

자기 운명(運命)은 자기가 만듭니다.

분명히 자기 운명(運命)은 자기가 만듭니다. 인과(因果)는 자기가 지어서 자기가 분명히 받습니다. 지금은 현대과학은 이러한 것은 차근차근 다 증명해 나갑니다. 인간이 미처 몰라서 증명 못하는 것이지, 원래는 모두가 다 합리적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참선하는 법을 말하는 가운데 너무나 말이 빗나갔습니다만 우리들은 이번 여기서 공부하고 가시면은 참선이 얼만치 진전되었는가? 거기 까지는 못 이른다 할지라도 어디 가서든지 혼자 참선할 수가 있다. 참선하는 방법만은 요령만은 알으셔야 여기 오신 보람이 있습니다.

 

일반 공부는 여러 가지 그런 방법도 많고 그것이 번쇄(煩瑣)합니다. 부처님 당시에 수행하는 공부를 본다고 한다면 우리 중생을 좋은 방향으로 즉 말하자면 성불로 인도 할 때 말입니다.

 

오정심관(五停心觀)

 

보통은 『오정심관(五停心觀)』이라, 5정심관이란 그런 관법(觀法)으로, 관조(觀照)하는 법으로 인도(引導)했다 말입니다.

그것은 어떤 것인가 하면 부정관(不淨觀)이라, 욕심이 많은 사람은 우선 욕심을 털어야 쓰는 것이니까, 욕심이 많아서 욕심에 마음이 가려지면은 마음이 덮여진 사람들은 무슨 말을 못 알아듣습니다. 같은 법문도 우리가 한 철 공부할 때와 두 철 공부할 때는 우리 스스로가 납득하는 정도가 차이가 있습니다.

 

업장이 가벼운 사람들은 같은 법문도 척척 그냥 잘 알아듣습니다. 무거운 사람은 잘 못 알아듣습니다. 따라서 탐심으로 마음이 옹졸하게 된 사람들은 어려운 법문으로 해서는 잘 안 됩니다.

 

따라서 탐심을 그것을 줄이기 위해서 부정관(不淨觀)이라, 그대 몸은 다 더러운 것이다. 그대 몸 안에 있는 모두는 다 악취를 풍기는 것이다. 우리 몸은 36물이라, 36물의 더러움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와 같이 우리 몸뚱아리를 더럽게끔 생각하는 관법으로 관조하는 방법으로 욕심을 줄게 한다 말입니다.

 

또 진심(瞋心)이 많은 사람 불뚝불뚝 성내기 쉬운 사람은 그때는 자비관(慈悲觀)이라, 자비관은 우선 자기 가까운 사람들 아내를 사랑하고 자기 어버이를 사랑하고 하는 것이니 그의 가까운 사람들에 대해서 연민(憐愍)의 정, 불쌍한 정을 일으키게 만드는 그런 관조의 법이 있습니다. 우리가 갑자기 미운 사람 사랑할 수 없죠. 그러니까 인연 가까운 사람들부터 차근차근 불쌍히 생각하는 법으로 이것이 자비관입니다.

 

미련한 사람은 한계를 잘 모릅니다. 가사 자기 몸뚱아리에 대해서 애착(愛着)을 붙이지 말라, 그렇게 말을 많이 듣지만 그래도 역시 자기 몸의 구성을 잘 모르면 애착이 붙습니다. 허나 이 몸은 이것은 각 원소가 이렇게 임시적으로 모여 있다.

불교 말로 하면 인연생(因緣生)이라, 인(因)과 연(緣) 따라 우리 몸이 잠시간 모여 있다. 내가 쓰는 마음도 역시 그때그때 우리가 감수(感受)하는 것, 또는 상상(想像)하는 것, 또는 분별(分別)하는 것, 의욕(意慾)하는 것, 이것이 모여서 우리 마음이 되었다.

 

[원각경(圓覺經)]에 보면 범부미도(凡夫迷倒)라, 우리 범부라 하는 것은 거꾸로 봐서, 바로 못 보기 때문에 사대위신(四大爲身)이요, 하위(爲)자, 몸신(身)자, 4대 위신(爲身)이요. 지수화풍(地水火風) 4대의 구성요소를 내 몸이라 하고, 『망상위심(妄想爲心)』이라, 결국은 이렇게 잘 못 배우고, 잘 못 듣고, 잘 못 생각하고, 이런 것이 모인 것을 내 마음이라 합니다.

 

우리 범부는 누구나 그렇습니다. 조금 더 많이 알고 또는 적게 알고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우리 범부가 생각하는 생각은 바로 못 보고 합니다. <一切眾生從無始來種種顛倒,猶如迷人四方易處,妄認四大為自身相,六塵緣影為自心相;譬彼病目見空中花及第二月>

 

따라서 우리 중생들은 그저 임시간 업(業)을 중심으로 해서 각 원소가 모여서 하나의 업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우리 몸은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우리 업이 주위에서 세포가 빙빙 돌고 있습니다. 그것뿐입니다. 따지고 보면 그것뿐입니다.

 

이와 같은 것은 생각하고 생각하다 보면 우리 몸은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때든지 인연만 분산하면 우리 몸은 소멸되고 만단 말입니다.

 

저 넓은 들에다 우리가 나무를 베어서 집을 짓습니다. 집을 지으면 없는 집이 생겨납니다. 그러나 연(緣)이 다해서 집을 해체해 버리면 아무것도 없죠.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인연이 닿아서 각 원소를 모아서 이와 같이 이런 집을 이런 껍데기를 지었을 뿐입니다. 아까 말씀마따나 우리의 업력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이런 것을 가르치는 것이 계분별관(界分別觀)이라, (경계로울계(界)자, 나눌분(分)자, 다를별(別)자) 한계를 가려서 이것은 이렇고, 우리 몸은 지수화풍(地水火風) 4대가 모여 있다. 이와 같이 각각 분석과 종합과 이와 같이 가려서 가르침 이것이 계분별관입니다.

 

이와 같이 관조하는 법, 관찰하는 법으로 해서 우리의 여러 가지 어리석은 무지(無智)를 없앤다 말입니다. 무지한 사람을 즉 치심(癡心)이 많은 사람들 무명(無明)으로 덥힌 사람들은 그와 같이 분석과 종합으로 마음을 틔게 만듭니다.

 

또는 산란심(散亂心)이 많은 사람들, 분별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그때는 수식관(數息觀)이라, 호흡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요새말로 하면 호흡법이죠. 호흡법으로 다스리는 그런 법이 있고,

 

업장(業障) 많은 사람은 그 때는 관불관(觀佛觀)이라 부처님의 잘 생기고 원만한 상호를 관찰한다 말입니다. 임신부(姙娠婦)의 방에다 부처님의 상호(相好)를 동(東)이나 서(西)나 붙여 놓으면 거기서 태어나는 아기는 아주 얼굴이 부처님 닮아서 나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물론 정도의 문제이겠습니다만 아무튼 우리는 부처님을 보려고 애쓰고 부처님의 원만 상호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우리 마음도 몸도 부처님을 닮아져 갑니다. 그런데서 업장중생 관불관이라. 업장 많은 중생은 그 때 부처님을 관조 합니다. 우리가 법당에서 불상에 대해 참배하는 것도 역시 여러 가지 심심미묘한 뜻이 있습니다만, 저번에 거사님들께서 말씀하신 심심미묘한 뜻이 있습니다만 우선 가깝게 쉽게 알 수 있는 뜻만 본다 하더라도 가깝게 부처님을 봐싸면 그때는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업장이 녹아지고 우리도 닮아져 갑니다.

 

이러한 다섯 가지 법(法)이 오정심관(五停心觀)이라, 다섯오(五)자, 머무를정(停)자, 마음심(心)자, 볼관(觀)자 말입니다. 탐심 탐욕이 많은 마음, 성내는 마음 또는 어리석은 마음, 업장이 무거운 마음, 산란스런 마음, 그런 마음을 그때는 딱 정지를 시킨다 말입니다.

 

이렇게 부처님께서는 그 사람한테 맞는 행법(行法)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당시나 그 뒤에는 이런 오정심관 행법으로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그렇게 해가지고 업장 많은 사람은 업장을 조금 누그러뜨리고, 탐심 많은 사람은 탐심도 조금 누그러뜨리고, 진심 많은 사람은 진심도 좀 누그러뜨리고서,

 

사념처관(四念處觀)

 

그 다음에야 고·공·무상·무아(苦·空·無常·無我)라, 『사념처관(四念處觀)』을 딱 주셨습니다. 일체(一切) 법(法)은 결국은 고(苦)요, 인생은 다 고생뿐이요. 무상(無常)하고 말입니다. 모든 법은 인연 따라서 잠시간 머물려 있을 뿐이니 무상하고, 또 허무하고 말입니다. 또 원래 나라고 할 것이 없는 무아고 말입니다. 이와 같이 그런 어려운 법문(法門)을 주십니다.

 

보통 업장(業障)이 많은 사람은 인생(人生)은 다 고(苦)라, 인생은 무상(無常)하다, 인생은 허무(虛無)하다, 원래 내가 없다 이렇게 말을 해도 못 알아듣습니다. 허나 탐심이 좀 줄어지고 또 진심이 줄어지고 또는 종합과 분석과 모든 법의 분석적인 지식을 아는 사람은 그 때는 참으로 무상 하구나, 인연 따라서 잠시간 잠시간 합한 몸, 무량 세월 비추면 우리가 사는 60년 70년 얼마나 순간입니까?

 

그 동안에도 어느 날 어느 시기에 우리 죽음이 올련지 모릅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우리는 무상하기 그지없습니다. 따라서 업장이 가벼운 사람들은 그냥 그런 깊은 것을 아는 것인데, 업장이 무거우면 눈앞에 보이는 물질로만 만족한다 말입니다. 그러기에 깊은 법문을 이해를 못합니다.

 

허나 다행히도 현대는 굉장히 참 총명한 시대입니다. 과학의 발달로 해서 아주 분석적인 것을 알아서 이놈의 몸뚱아리 결국은 내내야 끄트머리는 원자로 되고 더 끄트머리는 결국은 비어 버린다. 여기까지는 알았다 말입니다.

 

이런 때는 부처님 때 같이 오정심관(五停心觀) 그런 하급적(下級的)인 법문(法門)은 별로 할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맨 처음부터 그냥 가장 고급적인 중도실상(中道實相)이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최상법문(最上法門)을 딱 집어넣는다 말입니다. 참선(參禪) 이것은 최상법문입니다.

 

돌아서 안 가고서 어느 한계를 안 거치고 그냥 직지인심(直指人心)이라, 바로 사람 마음 딱 짚어서 ‘그대 맘이 부처다’ 깨달아라! 이렇게 해서 막 나가는 것입니다. 참선은 별로 순서를 거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비록 자리가 조잡하지만 부처님의 법문 가운데 최상 법문을 공부하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