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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4. 금강륜

* 1985년7월31일 태안사 하계용맹정진 입제법문(10)

 


* 1985년8월4일 태안사 하계용맹정진 5일째 법문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

 

직지인심(直指人心)이라,(곧직(直)자 가리킬지(指)자 사람인(人)자 마음심(心)자) 사람 마음 딱 짚어서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 그 마음 그 본성(本性)을 딱 끄집어 내어 부처를 만든다 말입니다. 이렇게 할라니까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 이런 것은 불경에도 없다.

 

사람 마음을 해설하는 불경이 있다 하더라도 사람 마음 그대로를 불경에서 우수한 도인(道人)도 바로는 못 보입니다. 따라서 교외별전이라, 결국은 8만4천의 교외(敎外)에가 있는 것이다.

불립문자(不立文字)라, 8만 법문이나 제아무리 많은 법문 가지고도 이것은 문자로도 표현 못하고 말로도 표현 못합니다. 어떻게 우리 마음을 말로 표현할 것입니까. 다만 이런 것이다. 이와 같이 방불하게만 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참선 이것은 문자도 배제하고 마음 그놈 딱 집어 깨닫게 합니다. 따라서 선방에서는 실은 부처님 경전(經典)도 못 보게 합니다. 그런 소중한 경도 선방에서는 못 보게 합니다. 따라서 우리 불자님께서는 참선할 때는 이것저것 보실 필요가 없습니다.

 

내 마음이 바로 부처임을 지금 이 마음 밖에 부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마음의 본성 비록 제 아무리 못났다 하더라도 마음 겉에는 못 났다하더라도 마음의 저변, 마음의 실상(實相) 마음의 근원 이것은 부처님입니다. 부처 가운데는 무한한 가능(可能)과 공덕(功德)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믿어야 씁니다.

 

박사만이 성불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불의 길은 학문은 별로 필요가 없습니다. 도리어 많이 배우면 자꾸만 따지고만 있습니다. 우리는 참선 이 길은 오직 이 마음이 부처님을 딱 느끼고서 그 마음 가운데 무한의 공덕(功德) 무한의 행복(幸福)이 있음을 느껴야 씁니다.

 

앞에 말씀하신 거사님들도 말씀하셨습니다마는 우리는 자기 불성에 대해 간절히 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간절히 구하는 마음을 서산대사(西山大師) 게송(偈頌)에도 말씀하셨습니다. 병자구의(病者求醫)지요, 병자가 의사를 구하는 것 같이 간절한 마음, 영아앙모심(嬰兒仰母心)이라, 어린애가 어머니를 구하는 마음같이 간절한 마음이라, 이런 마음이 있어야 성불을 할려고 애쓰기도 하고 또는 수행을 하기도 합니다.

 

갑자기 여기 오셔서 몇 시간 동안이나 앉아 있으면 굉장히 괴로우시죠. 나쁜 버릇을 교정할 라면 고생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선(禪)을 풀이하는 말 가운데서 어떤 말이 있는고 하면 조직정(調直定)이라, 고를조(調)자, 바를직(直)자, 바를정(定)자 말입니다. 우리 마음을 조화(調和)키고 비뚤어진 우리 마음을 이렇게 딱 바르게 하는 것이 참선(參禪)입니다.

또는 현법락주(現法樂住)라. 우리의 안락(安樂)에는 속락(俗樂)과 법락(法樂)이 있습니다. 속락 이것은 세속(世俗)에서의 재산, 명예, 이성, 식욕, 잠, 이런 것의 안락은 속락입니다. 세속이란 속(俗)자 말입니다. 이런 것에 얽매인 한에 있어서는 우리는 참다운 영생(永生)의 법락(法樂)을 맛볼 수 없습니다. 이런 속락을, 속가적인 오욕락 이런 것에서 멀어져 가면 갈수록 영원적인 행복은 비례해서 옵니다.

 

오욕이 줄어갈수록 반비례해서 영원적인 행복은 우리한테 더욱더 가증되어 옵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영원적인 행복의 맛을 못 보니까 안 믿습니다. 안 믿으니까 세상이 혼란스럽고 생활이 각박합니다. 공부를 나중에 하셔서 자기 마음속에 있는 무한의 기운을 다소나마 맛보면 한없이 환희심(歡喜心)에 날뜁니다.

 

척 들어앉아서 자기 망상(妄想)이 끊어지고 자기 호흡(呼吸)이 정지되는 정도가 되면 난데없는 심심미묘(甚深微妙)한 음향(音響)이 들려옵니다. 그런 묘음(妙音)이 들려오면 딴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자기 몸이나 자기 마음이나 아무런 부담이 없는 것입니다. 나라는 관념도 없는 것입니다. 다시 표현하면 저 영원에서 오는 맑은 물결이 자기를 꽉 감싸는 기분이란 말입니다.

 

이런 기분이 되어서 그림도 그리고 시도 쓰고 음악도 해야만 ‘참다운 입신(入神)의 묘(妙)라’ 참다운 걸작이 나온다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훌륭한 문학 걸작을 낸 훌륭한 문호들은 대체로 이런 것을 조금씩은 다 음미(吟味)를 했다고 봅니다. 여러분들이 [헤르만 헷세]나 [톨스토이]나, 그런 작품을 보세요. 맑은 시냇물이 흘러가듯이 맑은 표현들을 보세요.

 

너무 말이 빗나갑니다만 참선은 이것을 쉽다하면 제일로 쉽습니다. 복잡한 학문도 거치지 않고 과학적인 변증(辨證)도 필요 없습니다. 다만 내 마음이 부처임을 딱 믿어버린다 말입니다.

 

그러기에 주리반특가(周利槃特迦), 그는 일자무식 아닙니까? 굉장히 미련한 사람이어서 무슨 법문도 못 욉니다. 한 마디 부처님한테 말씀을 듣고서 ‘빗자루로 쓸어라’ 뭘 쓸 것인가? 빗자루로 쓸어라. 그 말도 앞 말을 외면 뒷말을 잊어버립니다. 그 정도로 미련한 사람인데도 역시 ‘쓸어라, 쓸어라’ 결국 쓴다는 것이 정말 내 번뇌(煩惱)를 쓸어야 쓰겠구나.

 

이와 같이 차근차근 마음이 모아지니까, 마음이 모아지면 우리 불심(佛心)으로 마음이 가까워집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잘 명심(銘心)해야 합니다. 비록 미련하다 할지라도 마음만 모아지면 모아지는 힘으로 해서 불성(佛性)에 가까워집니다.

 

어째서 판데기이빨(판치생모(板齒生毛)이라 했는고? 이와 같이 하다 보면, 하다 보면 마음이 모아지면 그 때는 저절로 부처한테로 접근합니다. 어떤 공부나 간에 내가 본래 부처임을 믿고서 그리고 부처 가운데는 무한의 공덕이 있다 이렇게 믿고 나간다고 한다면 ‘똥마른 막대기<간시궐(乾屎橛)>’라 하나 ‘하느님’이라 하나 그 때는 별 상관이 없습니다.

 

마음만 모아지면 아까 말씀마따나 불성에 가까워집니다. 그때는 절로 통하는 것입니다. 통달보리심(通達菩提心)이라, 모르는 법문도 안다 말입니다. 부처 가운데는 일체가 다 있으니까. 영혼 천도할 때 우리는 한문(漢文), 어려운 한문구로 말을 합니다. ‘불심 충만의 법계’라 그런 말을 안 들은 귀신한테도 합니다. 귀신이 어떻게 들을 것이며 어떻게 귀신이 한문도 안 배운 귀신이 어떻게 법문 어렵게 하면 어떻게 들을 것인가? 이렇게 의심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이놈의 몸뚱아리! 몸뚱아리를 성인(聖人)들은 원적(怨賊)이라(원수원(怨)자, 도적적(賊)자), 이 몸뚱아리를, 이놈의 몸뚱아리라는 껍질에 가려서 못 알아먹습니다. 요즘 컴퓨터를 보면 대강 짐작할 수 있죠. 원래 우리 정식(淨識)은 맑은 식은 말입니다. 다 알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서양말, 무슨 말, 다 안 배웠다 하더라도 다 아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는 것인데 이놈의 몸뚱이 껍데기 때문에 딱 가려버리면 애쓰고 배운 것 밖에 모릅니다.

 

귀신은 비록 업장이 별로 가벼운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몸뚱아리가 미세하니까, 아주 순수한 영체(靈體)가 아니라 하더라도 영체는 영체니까 말입니다. 한문을 안 배웠어도 아는 것입니다.

 

마음의 신비로운 것을 느끼셔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의 신비로운 것을 느끼셔야 합니다. 우리 마음은 다 알 수가 있고 분명이 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부처님 법문 따라서 직접 말로 해도 잘 믿습니다. 허나 진정으로 우리 마음은 모두를 알 수가 있고 다 할 수가 있습니다.

 

다만 어제도 우리 거사님께서 말씀을 하셨지만 그놈의 노망된 망령된 의식활동(意識活動) 때문에 고정관념 때문에 발랄하고 모두를 다 알 수 있는 힘이 발동을 못한다 말입니다.

 

우리의 그런 그릇된 생각을 놓기 위해서 ‘도방하(都放下)라’ 모두도(都)자, 놓을방(放)자, 아래하(下)자 모든 것을 다 놓아 버려라. 이것저것 분별해 싸면 분별한 만치 우리 의식은 거기에서 활동합니다. 의식이 활동하는 한에는 우리 의식이 저 밑에 깔려있는 참다운 불성, 영원적인 행복과 자비와 지혜와 공덕을 갖춘 그 마음이 발휘를 못합니다.

 

말씀은 저번에도 많이 해놔서 참선에 관해서 여러 말씀은 안 드리겠습니다. 역시 뭐라 해도 영원의 이미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가장 요긴한 뜻 그 뜻을 우리가 간직하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즉 말하자면 불심(佛心)을 간직해야 만이 불심이라 하는 요긴한 뜻을 간직해야 만이 비로소 참선이 되는 것인데 말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오정심관(五停心觀)이나 그런 것은 참선이 못됩니다. 또는 여러분이 ‘부처님은 저만치 멀리 계신다’ ‘나는 여기 있다’ 이와 같이 마음에서 안구하고서 저만치서 구하는 그런 방식도 역시 염불을 많이 해도 참선은 미쳐 못됩니다. 물론 많이 하다 보면 삼매(三昧)가 되어서 참선이 되겠지요. 종국에 마음이 딱 모아서 일심지(一心支)라, 하나만 되면 참선이 되겠지만 처음에는 참선이 못됩니다.

 

허나 처음부터 참선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때는 우리 마음이 불심에서 안 떠나야 합니다. 불심에서 안 떠나기만 하면 다 참선입니다. 염불, 참선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비록 우리가 관세음보살을 소리 내어서 왼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 자세가 우리 마음의 현 위치가 불심을 딱 간직하면 그때는 그것이 참선입니다.

 

부처님의 진여법(眞如法)

 

그러면 어떻게 간직할 것인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부처가 보이면 좋은데 우리가 어떻게 부처가 보입니까? 업장(業障)에 가리운 우리는 부처님의 경계. 불심을 상상하기가 참 곤란합니다. 따라서 이런 때는 부처님의 진여법(眞如法)을, 진여라는 것은 참진(眞)자, 같을여(如)자, 진리(眞理)가 진여(眞如) 아닙니까.

 

부처님의 진리를 진여라고 하는데 진여 가운데는 『리언진여(離言眞如)』라, 떠날리(離)자, 말씀언(言)자, 말을 떠난 그런 진리가 있고 말입니다. 또는 『의언진여(依言眞如)』라, 의지할의(依)자, 말씀언(言)자, 말씀에 의지한 진여가 있습니다.

 

부처님 법문도 방편(方便)과 진실(眞實)이 있습니다. 비록 그런 진실한 부처님 법문 이것이, 문자를 떠난 참다운 진리의 생명은 아닙니다만은 사람의 지혜에 의지한 그런 사람의 방편에 의지한 그런 문자에 의지한 말에 의지해 있다 말입니다. 말에 의지해 있는 정도로는 그때는 방편이 아니라 부처님의 진리를 그대로 방불하게 말로 표현해 있다 말입니다.

 

그런 것에 우리가 의지해서 불심을 심어야 하겠습니다. <주 : 참다운 진여는 말을 떠나고 문자를 떠나 실지로 직접 닦아서 체험해야 되지만, 아직 체험하지 못한 우리들이 닦고자 할 때는 의언진여(依言眞如)에 의지해야한다는 것이다. 성자나 부처님이 말씀하신 의언진여는 아무리 방편이라 하더라도 부처님의 진리를 그대로 방불하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에 의지해서 불심을 심어야한다고 강조하시고 계십니다. 금구성언(金口聖言)의 의언진여(依言眞如)로 선오후수(先悟後修)로 닦는 것이 정수법문(正修法門)임을 강조하시고 계십니다.>

 

[반야심경(般若心經)]에 조견(照見)오온개공(五蘊皆空)하여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이라, 오온이 다 비여 있음을 비추어 봐 가지고서 일체고액을 제도한다 이런 말씀이 있지요. [반야심경]을 외이면 외인만큼 공덕(功德)은 있습니다만 그 뜻을 새기면 훨씬 공덕이 더 많습니다. 그 뜻을 잘 못 새깁니다. 오온이 다 비어 있음을 비추어 봐야 만이 인생고(人生苦)를 제도합니다.

 

부처님 8만4천 경전 가운데서 어떤 법문이 가장 많은가 하면은 모두가 다 공(空)이다 모두가 다 허무다 공을 말씀하신 법문이 제일 많습니다.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이라 이 경은 600부라 600부입니다. 권수야 몇 천권이죠. 공을 주로 말씀하신 경전이 [금강반야바라밀경]인데 이 경은 600부인데 그것은 모두가 공을 주로 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제법(諸法)이 공이라. 모든 법이 다 공이라. 부처님께서 제법하신 것은 우주(宇宙) 만유(萬有)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제법은 우주 만유를 다 지칭(指稱)한 것입니다. 우주 만유가 다 공이다 말입니다.

 

석공(析空)과 체공(體空)

 

이것은 납득하기가 일반 사람들은 어렵습니다. 그러기에 같은 공(空)도 『석공(析空)』과 『체공(體空)』으로 구분합니다. 우리 불자님은 어렵지만 이것은 우리가 불교를 공부하는 한은 꼭 알아두셔야 합니다.

 

천지 우주가 다 비었다. 텅텅 비었다. 이렇게 말을 많이 듣지만 정말 그런가? 우리가 납득할 수 없다 말입니다. 납득하게 시리 석공과 체공으로 구분합니다. 석공은 분석할석(析)자, 빌공(空)자, 석공입니다. 분자로 분석하고 원자로 분석하고 이렇게 분석하다 보면 마치 양파껍질 같이 하나 벗기고 둘 벗기고 하다보면 나중에는 텅 비어 버리죠.

 

그와 마찬가지로 분석을 하다보면 결국은 나중에는 다 비어 버린다 말입니다. 전자(電子) 역시 순수한 하나의 텅 빈 에너지가 움직이는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양자(陽子) 역시 하나의 텅 빈 순수한 에너지가 움직이는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남는 것은 결국 에너지만 남습니다. 질료 아닌 에너지만 남습니다.

 

이와 같이 분석하고 분석해서 종국에 가면 텅 비어 버린다. 이렇게 아는 것은 겨우 분석을 통해 아는 사람들의 지혜란 말입니다. 즉 다시 말하면 현대 과학도라 하는 분은 이렇게 알겠죠. 또는 형체만 많이 배우고 형체 있는 유한 상대적인 지식만 배운 사람들은 주로 이와 같이 분석하는 석공, 분석하는 공을 이해 할 수밖에 없습니다.

 

체공(體空)이라. 체공은 무엇인가? 몸체(體)자, 빌공(空)자 말입니다. 당체(當體)가 즉공(卽空)이라. 나무가 있으면 바로 나무가 공이다. 사람이 있으면 사람 당체가 그대로 바로 공이다. 이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이해를 잘 못합니다. 이렇게 소중한 내가 어째서 공이야 말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남을 죽여야 하는 소중한 내가 어째서 공이야? 이렇게 우리는 항변 합니다마는 실은 내 몸 이대로 공인 것입니다.

 

훌륭한 수행자(修行者)와 업장이 가볍고 공부를 많이 한 성문(聲聞)이나 보살(菩薩)이나 성자(聖者)들은 모두가 다 이대로 공인 줄을 느낍니다. 불안(佛眼) 청정(淸淨)한 부처님의 안목으로 보면 다 텅 비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안 보이는 것입니다.

 

어느 사람이 밉다 하면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는 밉게 안 볼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주관(主觀) 따라서 중생의 업력 따라서 업력에 가리운 안경으로 보니까 이렇게 저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원자나 원소나 그것도 역시 사람의 경계로 봐서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상주 부동한 언제나 그대로 있는 원자가 따로 있고 원소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 사람의 지혜로 해서 그와 같은 규정을 내 세웠을 뿐입니다.

 

하나의 순환하는 하나의 진동하는 무엇인가에 대해 우리가 규정을 세워서 거기에 이름을 붙였을 뿐입니다. 일체 만유를 구성한 원자가 벌써 비어 있고 말입니다. 그 원자를 구성한 양성자와 그 주위를 돌고 있는 전자가 분명히 비어있는데 우리는 그렇게 안 보인다 말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불을 붙인 횃불을 빙빙 돌리면 불 바퀴로 보입니다. 사실은 이것을 돌려도 불 바퀴는 아닌데 돌리면 불 바퀴로 보인단 말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중생의 시력(視力)은 파장이 어느 정도까지 밖에는 보지 못합니다. 지금 물리학에서는 400~700nm 까지 밖에는 사람의 시력은 못 보는 것입니다. 파장이 너무 길어도 못 보고 너무 짧아도 못 보는 것입니다.

 

라디오 파장이 분명히 있으나 우리가 보입니까? x-레이 파장이 우리가 보입니까? 우리 중생의 시계는 한정되어 있습니다. 중생의 의식 역시 모두를 아는데 한정되어 있습니다. 한정된 것으로 보니까 내 몸이 이렇게 내 코가 이쁘고 내 입이 이쁘다 그럽니다.

 

전자현미경 쓰고 보면 제아무리 미인(美人)도 숭숭 뚫려 보이는 것입니다. 더 미세한 중성미자(中性微子)나 또는 질량도 전하도 없는 것으로 본다고 그러면 우주는 텅 비어 보이는 것입니다.

 

불성광명이 충만한 우주는 행복만이 가득합니다.

 

부처님의 청정(淸淨) 안목(眼目)으로 바로 보면 천지 우주는 불성(佛性)의 광명(光明)뿐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의 눈으로 보면 이와 같이 보이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보이는 것은 다 비어 버리고서 있는 것은 다만 찬란스러운 광명만 보이는 것입니다. 다만 공이 아니라 부처님의 무량광명(無量光明), 무량광명만 우주에 층만해서 찬란스러운 광명만 행복에 충만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미타불(阿彌陀佛)이 무엇인가? 아미타불을 풀이하면 우리말로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 또는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 무엇인가? 풀이하면 광명변조(光明遍照)라, 광명이 우주에 두루해 있다. 이것이 비로자나불입니다.

또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 무엇인가? 이것은 광세음보살(光世音菩薩)이라, 우주에 충만된 광명을 활용할 때에 모든 중생을 다 가운데로 이끌어 올 때에 그러한 이끄는 자비(慈悲), 이것이 관세음보살입니다.

 

우리는 비록 지금 안 보인다 하더라도 부처님의 이미지, 부처님의 영상(映像)을 딱 두어야만이 참선입니다. 그러지 않고서 그냥 건성으로 이것 의심하고 저것 의심하면, 그런 식은 참선이 못됩니다.

 

비록 내가 범부(凡夫)라 하더라도 천지 우주가 분명히 바로 모두가 다 평등무차별(平等無差別)의 차별 없은 부처구나, 영생(永生)하고 또 안락(安樂)하고, 또는 행복(幸福)이 충만하고, 또는 모두를 할 수 있고, 알 수 있고, 이러한 부처구나! 이와 같이 딱 느껴야 이것이 부처의 이미지요 영상입니다. 이렇게 부처의 영상을 지녀야 참선입니다.

 

비록 관음보살(觀音菩薩)을 부르나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부르나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부르든지 간에 그런 불성 이미지, 그 이미지를 딱 심고서 그 이미지를 안 떠나야 합니다.

 

허나 중생(衆生)은 업장(業障)이 무거워서 그냥 이미지를 심으려 해도 순간은 모르거니와 그냥 사라지고 맙니다.

 

여러분들이 앉아 보시면 생각이 되겠지요. 그냥 딴 생각 때문에 그 소중한 부처의 영상은 그냥 없어지고 맙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거지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잘 안 되면 부처님 이름을 천만번 외는 것입니다. 하루에 만 번 관음보살해라. 하루에 십만 번 해라.

 

명호부사의(名號不思議)

 

부처님의 그런 이름은 다만 이름이 아니라, 명호부사의(名號不思議)라, 명호 자체에 부사의한 힘이 묻어 있습니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은 그 음성, 이름 가운데 가서 부처님의 공덕이 묻어 있습니다. 관음보살(觀音菩薩)은 관음보살 이름에 가서 영원한 부처님의 자비가 묻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름을 부르면 부른 만치 그때는 우리 생명이 정화되어 갑니다. 우리 주변이 정화되어 갑니다. 또한 동시에 나쁜 삿된 기운이 우리한테 침범을 못합니다. 무량 선신(善神)은 부르면 부른 만치 우리를 옹호(擁護)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중생은 안 보입니다. 한 번 척 부르면 부른 만치 선신들은 우루루 따라 오지만 우리 중생은 안보입니다. 우리가 부처님의 그런 이미지, 영생의 불심의 이미지, 그것을 딱 심어지면은 그때는 아무 것도 필요 없습니다만 우리가 그렇게 안 되니까 우리가 부처님의 이름을 더욱더 외운다 말입니다. 다 되어 버리면 우리가 부처와 하나가 되어 버리는데 무슨 염불이 필요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