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염불은 모든 법문을 뛰어 넘는다
어찌 참선과 염불이 다르겠는가. 석가세존의 한평생 교화의 도道가 염불이라는 한 법문을 벗어나지 않는다. 또 염불은 한량없이 광대하여 모든 근기를 다 거두어들이므로 밖이 없다. 어찌 어리석은 자와 지혜로운 자 사이에 차이가 있겠는가. 받들어 권하노니 후현後賢들이여, 정토법문에서 다른 견해를 내지 말라.
-묘협妙叶대사 〈보왕삼매염불직지寶王三昧念佛直指〉
* 중국 근대의 고승인 허운대사는 「선(禪)의 목적은 마음을 밝히고 자성(自性)을 보는데 있다. 마음의 오염이 없어지면 진실로 자성(自性 : 자기의 본래 성품)의 참 모습을 보게 된다. 오염이란 바로 망상과 집착이고 자성(自性)이란 곧 여래의 지혜와 덕상(德相)이다. 여래의 지혜와 덕상은 모든 부처님과 중생이 다같이 갖추고 있으며 둘이 아니고 차별도 없다. 참선이란 마음을 밝히고 자성(自性)을 보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참구하여 뚫는 것이니, 이른바 ‘밝게 자기의 마음을 깨닫고 환하게 본래의 성품을 본다.’ 는 이 법의 문(門)은 부처님께서 연꽃을 드신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선종(禪宗)은 달마조사께서 중국에 전래함으로써 시작되었으며 육조(六祖) 혜능선사 이후 선풍(禪風)이 널리 퍼져 고금에 떨쳤다. 달마스님이 중국에 오셔서 ‘사람의 마음을 바로 가리켜 성품을 보고 부처를 이룬다.’ 고 하심은 대지의 모든 중생이 다 부처라는 명백한 가르침이다. 일체 중생이 만일 오랜 세월 동안 사생(四生)과 육도(六道)에 윤회하며 길이 괴로움의 바다에 빠지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열반의 경지인 부처가 되기를 원한다면 진실로 부처님과 조사의 정성스런 말씀을 믿어야 한다. 일체를 놓고 선도 악도 모두 사량(思量)하지 않는다면 모든 사람이 그 자리에서 부처를 이룰 것이다.
그래서 헛된 발원이 아니며 헛된 말씀이 아니다. 위에서 설한 바처럼 법은 이와 같고 또한 부처님과 조사께서 거듭거듭 밝혀 간곡히 부촉하신 진실한 말씀에도 터럭만큼의 헛됨과 거짓이 없다. 일체 중생은 어쩔 수 없이 한없는 세월을 나고 죽는 고통의 바다에 빠져 나왔다가 들어갔다가 하면서, 윤회를 그치지 않고 미혹하여 뒤집히고 깨달음을 등지고 티끌과 합했다.[背覺合塵] 이것은 마치 순금이 똥구덩이에 빠진 것과 같아서 사용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그 더러움은 감당하기 어렵다.」 라고 하였다.
* 남회근 선생은 「중국의 불법(佛法)에서 선종의 가장 고면한 한 글자는 ‘참(參)’ 자(字)입니다. ‘참(參)’이란 참고함이요 사유함 · 의심 · 연구 · 파고들어감 · 탐구함 등 많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선종의 한 글자인 참(參)자는 곧 ‘정사유(正思惟)’ 라는 의미로서 문제를 연구해야 합니다. 참(參)자에 불법의 정신이 있고 오직 선종에만 있습니다. 일체를 부정하고 참구합니다. 당신이 참구하여 뚫어내지 못한 채 믿는다면 온전히 미신이 됩니다. 불법은 미신을 반대합니다.」 라고 하였다.
* 달마대사는 〈혈맥론(血脈論)〉에서 「만약 자성(自性 : 본래성품)을 보지 못한다며, 선지식이라고 할 수가 없다. 만약 이와 같지 못하면, 비록 십이부경을 설명할 수 있더라도 역시 생사윤회를 면하지 못할 것이고, 삼계에서 받는 고통을 벗어날 기약이 없을 것이다. 옛날 선성(善星)이 이미 그와 같았는데, 오늘날 사람들이 서너 권의 경론(經論)을 강의 할 수 있는 것으로 불법이라고 여긴다면, 어리석은 사람이다.」 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억 만의 재물과 보배를 가지고 널리 여러 보살과 중생들에게 보시하면 그 복덕이 비록 크기는 하지만, 다른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한 번 아미타불을 부르게 한 공덕보다는 못하다.
-《대방등대집경大方等大集經》
* 역시 《대방등집현호경》에 「“가령, 어떤 사람이 일곱 가지 보배로 시방의 헤아릴 수 없는 삼천대천세계를 가득 채워서 보시하고, 또 다시 의복과 음식 등 가지가지 일을 모든 중생에게 공양하여 모두 아라한과에 이르도록 한다면 그 복이 많겠느냐.” 현호보살이 세존께 말씀드렸다. “그 복이 매우 많습니다.” 부처님께서 현호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한 번 아미타불을 염하여 부르도록 권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그 공덕은 앞에서 말한 공덕을 능가하니 다른 사람에게 권하는 것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자신이 염하며 부르는 경우이겠는가. 또 한 번 염하여 부르는 것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여러 번 칭념하는 것이겠는가.”」 라는 말씀이 있다.
* 《다라니집경》에 「가령 전륜왕이 십 만세 동안 사천하(四天下)를 일곱 가지 보배로 가득 채우고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는 것보다, 어떤 사람이 손가락 한번 튕기는 동안에 평등심으로 좌선하여 모든 중생을 가엽게 여겨 아미타불을 염하여 부르는 것이 더 수승하다. 이 공덕으로 저 아미타부처님 국토에 태어나 아난의 입이 불에 타는 것을 구제한다.」 라고 하였다.
* 남회근 선생은 「여러분들이 병도 적고 고통이 적으려면 금생에 남에게 약(藥)을 많이 보시해야 합니다. 그러면 미래 생에 질병이 적고 고통도 적을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을 위해서 타산(打算)하여 모든 일에 자기만 좋기를 바란다면, 아마 금생에서조차 당신을 상대해 주는 사람이 없을 텐데 하물며 미래 생에서 이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 밀라레빠의 〈십만송(十萬頌)〉에 「가난한 자에게 자비심으로 보시함은 삼세제불(삼세제불)에게 공양함이요, 일체 중생은 부모 같나니 차별하면 무지하고 해로운 일이네. 자기가 지닌 행복은 실은 타인으로부터 가져온 것, 남에게 도움을 베풀면 그 보답으로 행복을 가져다주네. 남에게 해로운 행위는 다만 그대 자신을 해칠 뿐이네.」 라고 하였다.
* 내(我)가 있는 마음, 상(相)이 있는 마음으로 짓는 것이 복덕(福德)이고, 내가 없는 마음, 상(相)이 없는 마음으로 지은 것이 공덕(公德)이다. 달리 말하면, 삼업(三業)을 깨끗이 하고 복을 지으면 공덕이라 하고, 삼업을 깨끗이 하지 못하고 지은 것을 복덕이라 한다.
* 안으로 망념(妄念)을 극복하는 수행을 공(功)이라 하고, 밖으로 다툼이 없는 인격을 베푸는 것을 덕(德)이라 한다. 달리 말하면, 자성(自性)을 보는 것[見性]을 공(功)이라 하고, 지혜의 묘(妙)한 작용을 덕(德)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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