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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마음의 고향

마음의 고향 28집(1)



 

19850802-태안사 하계용맹정진 3일째 법문

 

‘참선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올바른 참선 입니까?’

 

1. 불성(佛性) 하나로 돌아가야 참선이 된다.

 

<만법귀일(萬法歸一),타성일편(打成一片)>

인류역사(人類歷史)가 이룩된 이후에 작고 크고 중요한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 문제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몇 가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류의 의지(意志)로도 해결 못한 그러한 문제들입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인간(人間)이 무엇인가 하는 그 문제, 인간성(人間性) 문제라 하는 것은 우리가 지금 배우고자 하는 불교 외에는 해결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본성(本性)은 무엇인가? 인간은 대체로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갈 것인가? 이런 문제를 불교(佛敎) 외에는 해결 못하고 있습니다. 또는 우리 대상이 되는 물질세계(物質世界), 그 복잡다단한 물질세계, 물질의 근본은 무엇인가? 이 문제 역시 해결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 인간성과 아울러 물질과의 관계성(關係性). 인간성과 물질은 어떠한 관계가 있는 것인가? 이것도 역시 아직 해결을 못해 있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불교뿐입니다. 비록 우리 불법(佛法)에서 이것이 해결되어 있다 하더라도 잘못 배우면 이것을 모르고 지나갑니다. 헌데 이런 문제를 떠나서 우리 현대 인간의 불안의식(不安意識)을 해소 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성(人間性)의 본 바탕도 불성(佛性)이다.>

가사 우리가 교육자(敎育者)가 되어서 교육을 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인간성(人間性)이 무엇인가 하는 인간성의 문제를 몰라가지고서 참다운 교육이 되겠습니까?

바람직한 인간상(人間像). 이것을 만들어야 할 것인데. 따라서 교육자도 마찬가지고, 또는 법조인(法曹人)도 참다운 인간 사회를 구성 할 수 있는 그런 규범(規範), 이런 규범을 세우려면 인간의 성능(性能)을 알아야 됩니다.

 

어떤 분야이던 간에 참다운 생활. 참다운 기구, 참다운 단체. 이러한 것을 구성하려면 인간성 문제가 앞서야 되겠습니다. 인간성 문제가 모호해서는 항상 불안스러워서, 항상 의심 때문에 안심입명(安心立命)을 취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안심인명을 못하면 우리 행복(幸福)을 바랄 수가 없습니다.

 

‘인간성(人間性)은 대체로 무엇인가’ 하는 이 문제는 그전에 우리 인간이 미개(未開)할 때는 일반사람들은 그때는 몰라도 무방하다 하고 성자(聖者)나 철학자(哲學者)나 그런 사람한테만 맡겨 버렸습니다.

 

허나 현대(現代)는 복잡(複雜) 다기(多岐) 합니다. 종교도 다종교시대라, 불교(佛敎), 기독교(基督敎), 이슬람교, 각종교가 이렇게 착종(錯綜)해 있습니다. 또는 각 주의(主義), 사상(思想) 역시 범람해 있습니다. 그런 때는 우리 인간 자체의 문제 해결이 없이는 갈래의 가닥을 못 잡습니다. 가닥을 못 잡으면 따라서 불안스럽고, 자기 개인도 불안스럽지만 자기 가정도 불안스럽고, 인간이 구성한 사회도 불안스럽습니다.

 

우리 국가(國家)가 지금 혼란스러운 것이 원인(原因)이 어디에 있습니까? 물량(物量)이 부족해서 혼란스럽습니까? 물량이 부족한 것도 아닌 것이고 인구수가 부족한 것도 아닙니다. 오직 문제는 바른 사상(思想), 바른 견해(見解)가 없어서 그럽니다.

 

가령 우리가 지금 피차 옥신각신 싸우고 있는 여당 야당 보십시오. 다 대학을 나오고 박사도 있고 훌륭한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야당을 구성하는 분들이 바른 견해가 있고, 또는 여당을 구성하는 분들이 바른 견해가 있다고 하면은 바른 견해끼리는 서로 싸울 수가 없습니다. 무엇인가 그분들이 바른 견해가 아니란 말입니다. 바른 견해 비슷한 것 같지만 실은 참다운 바른 견해가 아니기 때문에 서로 옥신각신합니다.

<참다운 인간상>

이것은 한 말로 표현하면은 참다운 인간상,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 인간상인가? 이것을 잘 몰라서 그러합니다.

 

이러한 것을 명쾌히 해결한 가르침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인간의 본바탕은 부처입니다.

 

<물질(物質)은 무엇인가?>

그럼 물질은 무엇인가? 저번 시간에도 언급을 했습니다만 물질은 분석하고 분석하고 쭉 들어가 보면 결국은 물질이 안 되어버립니다. 이것은 현대물리학(現代物理學)에서 증명하고 있습니다. 가사 성분(成分)을 분자(分子)로 분석하고, 분자를 또 역시 원자(原子)로 분석하고, 이렇게 들어가 보면 원자는 무엇인가?

 

원자라는 것은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양자(陽性子)를 중심으로 해서 전자(電子)가 빙빙 도는 것이 원자 아닙니까? 산소는 8개의 양성자와 8개의 중성자로 구성된 핵을 중심으로 해서 8개의 전자가 돌고 있습니다. 원자핵을 중심으로 해서 몇 개의 전자가 도는가에 따라서 각 원소의 구분이 있습니다.

 

그러면 원자핵을 이루는 양자는 무엇인가? 이것은 하나의 광명(光明)의 파도(波濤)뿐입니다. 전자 역시 광명의 파동(波動)뿐입니다. 이것은 에너지의 그림자에 불과하지 실존(實存)이 아닙니다.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부처님 [금강경(金剛經)] 말씀에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 있는 것, 우리 눈에 보이는 것, 모든 것은 다 몽환포영이라.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요. 거품에 불과합니다. 이런 말이 그냥 비유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거품이요. 그림자요. 꿈이요. 허깨비에 불과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의 어두운 지혜, 탐심(貪心)이나 진심(瞋心)이나 어리석은 치심(癡心)이나, 이러한 삼독심(三毒心)이 가리워서 우리는 바로 못 보는 것입니다. 바로 본 분이 부처님의 혜안(慧眼)이요. 부처님의 불안(佛眼)입니다.

<무한(無限) 공능(功能)의 장(場)>

물질이라 하는 것은 저 구경적인 끝에 가서는 하나의 장(場)만, 알 수 없는 장만 남을 뿐입니다. 순수에너지의 장만 남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허무한 장이 아니라, 거기에는 모든 공능(功能)을 다 갖춘 광명(光明)의 장(場)입니다. 일체 인과율(因果律)이 거기에 다 포함 되어 있고, 양전하 음전하 그런 전하 들이 발생할 수 있는 에너지가 충만 되어있는 그런 장입니다. 일체 만유가 생성 소멸할 수 있는 그런 장입니다. 이런 장에서 무슨 힘의 동력(動力)을 받아서 양자(陽子)가 생기고 전자(電子)가 생깁니다.

 

순수(純粹)한 장이 순수한 광명(光明)의 그런 장(場)이 어떻게 도는가, 어떻게 진동하는가, 거기에 따라서 양자가 생기고 전자가 생깁니다. 그런 것이 이렇게 모이고 저렇게 모여서 분자가 되고 이렇게 세포(細胞)가 됩니다.

 

<사대(四大) 오온(五蘊)은 공취(空聚)>

부처님 말씀에 사람 몸을 가리켜서 공취(空聚)라, 빌 공(空)자, 모을 취(聚)자, 공(空)이 모아진 것이, 텅 빈 공간성(空間性)이 모아진 것이 몸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사람의 몸은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라. 현대적인 원소론으로 말하면 산소(酸素), 수소(水素), 질소(窒素). 탄소(炭素) 이것들을 중심으로 하는 각 원소가 모아진 세포(細胞)가 우리 몸입니다.

앞서 제가 말씀하는 바와 같이 일체 물질 근원이 원자데, 원자 그것이 그림자 같이 별것이 아닌지라, 원자 그것이 이렇게 모이고 저렇게 모여서 세포가 이루어진 우리 몸은 이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내 마음은 무엇인가? 내 마음 이것은 금생에 배우고 느끼고 생각하고 이것이 우리마음이 되었습니다.

이렇게만 생각할 때는 인간은 참으로 허무하기 짝이 없습니다. 내 몸뚱아리는 각 원소가 모아서 순간도 그치지 않고 변화무상(變化無常)한 하나의 세포에 불과하고, 내 마음 역시 금생에 나와서 배우고 느끼고 생각하고 이것이 모아서 내 마음이란 말입니다. 이렇게만 생각할 때는 인간은 허무하기 짝이 없습니다.

 

<상락아정(常樂我淨)>

허나 그런 마음의 본바탕 본 근원 그것이 부처입니다. 부처 가운데는 어제 말씀한 것과 같이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 영생(永生)하고 일체 행복(幸福)을 다 갖추고 있고, 모두를 다 알 수가 있고 할 수가 있고, 또는 청정(淸淨)하고, 이런 것이 우리 불성(佛性)의 부처의 속성입니다.

 

이런 가르침이 불교 이외는 없습니다. 기독교의 인간관(人間觀)을 보십시오. 예수는 다 알았겠지마는, 아무튼 기독교 교리로 해서는 사람은 무엇인가 하면은 이것은 하나님이 아담과 이브를 만들었다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거기에다 생기(生氣)를 불어넣어 주었다. 이런 식으로 유도가 되는 가르침을 전개하는 그러한 인간 존재론은 이것은 현대 진화론(進化論)을 이길 레야 이길 수가 없습니다.

 

공자(孔子)님의 가르침도 훌륭하고 또는 공자님 역시 인간의 생사를 다 알았겠지요. 그러나 이것이 체계로 나와 있는 것은 인간의 전생도 모르고 내생도 모릅니다. 사람이 대체로 어디서 왔는가? 죽어서 어디로 갈 것인가? 논어(論語)나 맹자(孟子)나 주역(周易)은 제아무리 봐도 이런 가르침이 안 나옵니다.

오직 부처님의 가르침만이 인간성이 무엇인가, 내가 무엇인가, 이 문제 또는 물질의 문제, 물질도 조금 전에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물리학에서는 저 끝으로 가서는 결국은 물질이 안 되어버린다 말입니다. 안 된 그것. 그 무엇. 우주가 이런 것이 다 텅 비어서 하나의 장만 남는데 장 그것이 우리불교에서 말하는 이것이 소위 불성(佛性)입니다. 물질이 아닌 저 근원의 근본 순수에너지, 이것이 불성입니다.

<만법귀일(萬法歸一)타성일편(打成一片)>

따라서 마음의 근원도 불성. 일체 물질의 근원도 역시 불성입니다. 똑같은 불성이거니 마음과 물질의 관계 역시 같은 불성 하나로 딱 귀일(歸一)되버립니다. 불교(佛敎)에서 공부할 때에 타성일편(打成一片)이다. 때릴 타(打)자, 이룰 성(成)자, 한 일(一)자, 조각 편(片)자, 이것이 무엇이고 하면 우주(宇宙)전부를 하나로 모아버린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어야 우리 정신(精神)이 하나로 모아져서 의심(疑心)없이 공부가 됩니다. 이럴까 저럴까 물질의 근원은 무엇인가? 사람이 무엇인가? 이와 같이 의단(疑團)만 품어서는 마음이 분열(分裂)되어 갑니다. 하나로 타성일편(打成一片)이라. 우주를 통 모아서 하나로 만들어 버린다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불성 하나로 우주를 하나로 만들어 버린다 말입니다.

개(犬)가 있건 소(牛)가 있건 또는 강도(强盜)가 있건 누가 있건 내내야 근본(根本). 근원(根源)은 불성뿐입니다. 천지(天地) 우주(宇宙)는 오직 부처뿐입니다. 다만 중생(衆生)이 어두워서 그 부처를 못 볼 뿐입니다.

 

<염불선(念佛禪)>

이렇게 알고서 불성(佛性) 거기에서 한걸음도 안 나서고, 불성 그 경계(境界)를 딱 집중(集中)하는 그것을 유지하는 그것이 참선(參禪)입니다. 우리가 같은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님을 외운다 하더라도 관세음보실님은 저만큼 내 밖에 계신다. 우리가 기도(祈禱)를 모시면 우리가 부르면 관세음보살님은 우리에게 도움을 준다. 우리 고난(苦難)을 구제한다. 이것은 방편적인 신앙(信仰)입니다. 이것은 참선이 못됩니다.

 

허나 관세음보살님은 우리 인간을 비롯해서 모든 중생의 근원적인 생명, 모든 생명의 대명사가 관세음보살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닦으면 그때는 그것이 선이 됩니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라, 아미타불 역시 아미타불은 극락세계에 계신다. 우리가 기원 드리면 그때 우리를 구제한다. 이런 식의 신앙 이것은 방편적인 신앙입니다.

 

<내 본 생명이 부처다. 선오(先悟)을 하고 닦는다.>

그러나 내 이름, 내 생명의 참 이름, 우주의 이름 이것이 아미타불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아미타불을 부르면 바로 선이 됩니다. 따라서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은 어제 말씀한 것처럼 이것은 불도(佛道)의 정문(正門)입니다. 불도의 첩경(捷徑)입니다. 불도의 지름길 불도의 정문 이것이 참선인데, 비록 지금 내가 범부일망정 이론적으로는 우리가 부처가 되어버린단 말입니다.

부처가 먼저 딱 되어버리고서 되버린 기분으로 닦아야 만이 이것이 참선입니다. 부처가 저기에 있고 내가 여기에 있다 이래버리면 참선은 못 되는 겁니다. 내가 지금 탐심(貪心)도 많이 있고 진심(瞋心)도 많이 있고 내 마음이 어리석어서 분별시비(分別是非)도 많이 하고 그렇더라도 ‘내 본 생명 이것은 부처다.’

또는 지금 인간이 봐서 내가 범부(凡夫)인거지 부처가 보면 역시 나도 부처다. 이같이 부처가 돼 버린 경계, 그런 자부심(自負心)에서 즉 말하자면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 ‘천상천하에서 제일 높은 내가 부처다.’

이와 같이 되고서 관음보살(觀音菩薩)이나 화두(話頭)나 주문(呪文)이나 이렇게 외우면 이것이 참선입니다.

 

허나 비록 이뭣고<시심마(是甚麽))>를 하고 또는 판때기이빨<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를 든다 해도 역시 내가 본래 부처인지를 모르고서 바른 정견(正見)이 없으면 그때는 참선은 못됩니다. 우리는 인류문화, 이렇게 복잡한 문화. 이렇게 우리의 긴장을 고조시키는 문화. 이런 문화 가운데서 내 인간성 모르면 바로 못살아갑니다. 불안스러워서 못삽니다.

우선 도시(都市)에 계시는 분들 여기에 대부분입니다마는 도시 그야말로 고층건물에 한번 들어 앉아보십시오. 얼마나 우리 인간이 외소 하는가 말입니다. 그 복잡한 기계문명, 우리가 전기(電氣)를 몰라보십시오. 얼마나 불안스러운가. 또 입법기구, 사법기구, 행정기구, 그런 기구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기구에 따른 우리의 압박감(壓迫感) 이런 사회에서 우리가 인간성을 모르고서는 바로 못살아갑니다. 안심하고 못살아갑니다.

<내 인간성은 모두를 초월해 있다.>

따라서 비록 우리는 그러한 것에 대해서 우리가 압박을 느낀다 하더라도 ‘내 인간성은 모두를 초월해 있다’ 분명히 사람마음은 초월(超越)해 있습니다. 공간(空間) 시간(時間)도 초월해 있고, 또는 인과율(因果律)도 초월해 있습니다.

 

조금 전에 제가 말씀한 것처럼 일체물질이 원자 아닌 것이 있습니까? 우리 인간성의 본바탕이 불성인지라 불성은 그런 원자도 초월해 있습니다. 원자로 구성해있는 순수 에너지 이것이 인간성입니다. 우리가 지금 남도 미워하고 남을 사랑도 하고 그 마음의 근본마음 이것이 불성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불성만 딱 파악하면 그때는 모두를 초월해 있습니다.

우리는 비록 우리가 그런 불성은 증명(證明)하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수행(修行)이 필요할망정 먼저 우리는 그런 불성을 인증(認證)을 해야 합니다. 인정하고서 불성에 안주(安住)해서 염불(念佛)도 하고, 주문도 외우고, 화두도 외우고, 그래야만이 이들이 참선이 됩니다.

 

<삼생성불(三生成佛)>

어제 좌선(坐禪)하는 실습을 설명하다가 다 못한 점을 더 말씀 곁들이겠습니다. 우리가 역시 이론적으로는 제아무리 정밀한 세밀한 체계가 선다 하더라도 실질 면에서 우리가 수행을 못하면 증명(證明)을 못합니다. [화엄경(華嚴經)]을 보면은 공부하는 과정을 이렇게 3단계로 구분해 있습니다.

 

맨 처음에는 견문생(見聞生)이라, (볼견(見)자 들을 문(聞)자 날생(生)자) 우리가 법문을 들어서 영생의 성불의 세계를 안다 말입니다. 견문생이라. 아직은 수행도 못하고 귀로만 듣고 구이학(口耳學)이란 입으로만 말한 것을 우리가 듣는다 말입니다. 이것이 견문생이다. 그 다음엔 해행생(解行生)이라. (풀해(解)자 행할 행(行)자) 조금 자기가 공부를 해서 그때는 자기가 해석을 한다 말입니다. 그렇구나 이렇게 하면 쓰겠구나 이와 같이 납득을 합니다.

 

허나 납득한 그것으로 해서는 생사해탈(生死解脫)을 못합니다. 과거도 못보고 미래도 못 봅니다. 따라서 공간성은 못 넘어섭니다. 우리는 아무리 입으로 많이 안다 하더라도 또 아무리 해석을 잘한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해서는 생사를 초월 못합니다. 그것으로 해서는 참다운 힘이 못나옵니다.

그 다음엔 증입생(證入生)이라. (증명할 증(證)자 들 입(入)자) 자기 체험으로 해서 그때는 스스로 느낍니다. 증입생 되어야만 비로소 그때는 참다웁게, 아! 그렇구나! 이것이 옳구나! 이렇게 되어야지 환경의 여러 가지 유혹(誘惑)에 끌리지 않습니다. 또 애증(愛憎)이라, 사랑과 미움에 끌리지가 않습니다.

 

<구두선(口頭禪)으로는 해탈(解脫)을 못한다.>

그래서 우리 참선도 구두선(口頭禪)이라. 입으로는 별 말을 다합니다. (입 구(口)자 머리 두(頭)자) 구두선이라, 그러나 구두선 그것으로 해서는 해탈(解脫)을 못합니다. 그것으로 해선 자기 마음의 불안(不安)을 불식을 못시킵니다.

 

거기에서 제가 조금 전에 말씀한 것처럼 견문생(見聞生), 다음에 있는 해행생(解行生)이라 해석을 깊이하고, 실제 우리가 행동한다 말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증입생(證入生)이라, 증명해서 우리가 들어갑니다. 증입생 되어야 만이 생사해탈(生死解脫)이라 하는 그러한 참다운 영생의 행복(幸福)을 맛보는 것입니다. 참선 이것은 증입생 되기 위해서 증명하기 위해서 참선하는 것입니다.

 

<심리와 생리가 같이 맑아야 불성을 느낀다.>

비록 우리 심리(心理)가 맑아서 아! 그렇구나! 한다 하더라도 우리 생리(生理)가 맑지 않으면 참선은 하지 못합니다. 어제 제가 말씀드릴 때에 음식을 주의하십시오. 고기를 먹으면 안 됩니다. 그런 말씀 드렸습니다. 물론 고기를 먹고 참선을 지도하는 분도 계십니다만 이것은 하나의 방편에 불과한 것이지 사실 안 먹어야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개고기를 먹으면 개의 세포가 우리의 몸을 오염(汚染)시킵니다. 돼지고기를 먹으면 돼지세포가 우리 몸을 오염시킵니다.

 

여러분도 한번 드시고 해보십시오. 청정(淸淨)해야만 맑아야만 그때는 맑은 물이, 중천(中天)에 달이 밝다 하더라도 물이 잔잔하고 맑지 않으면 비칠 수가 없듯이 우리마음은 거울같이 맑아야 합니다. 그런데 개나 소나 돼지와 같은 고기로 오염시켜보십시오. 내 가슴에는 지금 한 오라기도 오염된 것이 없다. 이와 같이 명쾌한 마음이 되어야지 도(道:진리)는 가까이 옵니다.

부처님 계율(戒律)은 그래서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말씀은 다 옳습니다. 우리가 섣부른 범부지(凡夫知)로 해서 옥신각신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부처님의 지혜는 과거나 현재나 미래를 다 보신 분입니다. 우리 생리(生理)나 심리(心理)를 다 보신 분입니다. 섣부른 범부지로 우리가 비판(批判)해서는 안 됩니다. 해보면은 다 옳습니다.

 

저번에 미국 무슨 의학지(醫學誌)을 보았는데 거기에 보면 심장병(心臟病) 환자의 반수 이상이 고기를 먹어서 그런다고 합니다. 조금 전에 제가 말씀한 것처럼 개나 소나 돼지나 그런 세포가 우리 몸에 들어와서 좋을 리가 만무합니다. 생리 면으로나 심리 면으로나 좋지가 않습니다. 따라서 참선이라 하는 성불(成佛)의 첩경(捷徑), 가장 압축된 성불의 지름길, 이런 길을 가기 위해서 비장(悲壯)한 각오(覺悟)를 하신 분들이 하찮은 그런 것 때문에 방해를 받으면 되겠습니까? 음식은 참 주의하여야 합니다.

 

마늘과 파나 그런 오신채(五辛菜:부추,파,마늘,흥거,달래)도 먹지 말라는 그런 말이 있습니다. 이것도 율본(律本)에 계율책에 엄격히 금지가 됩니다. 지금은 더러는 어느 절에선 마늘과 파를 함부로 먹는 절도 있습니다. 허나 부처님 계율에는 그것을 먹으면 생담발음증애(生膽發淫增啀)라, (낳을 생(生)자 담 담(膽)자) 담도 생하고, 발음(發淫)이라 (발 발(發)자 음탕할 음(淫)자) 음심이 더 발동하고, 물론 스태미나는 더 낫겠지요. 또 증애(增啀)라, (더할 증(增)자 성낼 애(嘊)자) 우리 진심(瞋心)이 더 성내는 마음이 발동한다. 이런 말씀은 명문(銘文)으로 다 계율(戒律)에 있습니다.

그리고 냄새가 얼마나 징그럽습니까? 안 먹는 사람이 파, 마늘 먹는 사람 옆에 가서 맡아보면 굉장히 싫은 것입니다. 헌데 우리 주변에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무수히 신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 신들은 후각(嗅覺)이 사람들보다도 훨씬 예민합니다. 그런 신들이 그런 냄새를 맡을 때는 좋은 신은 그런 악취(惡臭) 때문에 우리 주변에 올 수가 없습니다. 무수한 신들이, 앞서 말한 것처럼 좋은 향을 피우면 향훈(香薰)을 맞고서 우리 주변에 오고, 나쁜 신들은 좋은 향을 싫어합니다.

꽃도 부처님 앞에 올리면 꽃 냄새는 그런 부처님, 우주에 변만(遍滿)된, 우주에 충만 된 부처님의 기운이나 좋은 신들은 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귀신들이나 악귀들은 꽃 냄새를 싫어합니다. 꽃을 받치는 것도 그런 심심미묘(甚深微妙)한 뜻이 있습니다.

 

우리는 꼭 성불해야 될, 금생에 못하면 몇 생후라도 꼭 성불해야 될 우리는 충실한 불자입니다. 따라서 앞서 말한 것처럼 부처님께서 성불하기 위해서 우리한테 제정한 계율은 지켜야 합니다.

 

<수행삼법(修行三法) : 조신(調身), 조식(調息), 조심(調心)>

헌데 어제 제가 참선이라 하는 것은 조신법(調身法)이라, (고를 조(調)자 몸 신(身)자) 몸을 고르게 해야 한다. 조식법(調息法)이라, (숨쉴 식(息)자) 호흡을 고르게 해야 한다. 또 그 위에다 조심법(調心法)이라, 우리마음을 바로 한다. 마음을 바로 하는 그 문제는 제가 서두에서 말씀 드렸습니다.

 

<조심법(調心法) : 영원의 영상>

우리 마음이 순간 찰나도 떠남이 없이 영원의 IMAGE. 영원한 영상을 우리가 지닌다 말입니다. 조금 전에 말씀한 것처럼 불심(佛心)이라 하는 그런 영원한 영상 그것에다 마음을 안주(安住)해야만이 참선입니다.

 

 

<조신법(調身法) : 법계정인(法界定印)>

헌데 우선 몸 모양을 가부좌(跏趺坐) 이것이 가장 편한 모양, 또는 가장 도업(道業)을 성취하기 쉬운 모양입니다. 어제 말씀한 것처럼 정삼각형 이것은 일체여래지인(一切如來智印)이라, (지혜 지(智)자 도장 인(印)자), 여래(如來)는 부처가 아닙니다.

부처님의 그런 무량한 지혜 완벽한 지혜가 제일 개발하기 쉬운 모양이 법계정인(法界定印)입니다. 우주의 모양, 우주의 생명을 상징한 모양이 법계정인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앉으면 이것이 벌써 우주를 내가 다 가슴에 안은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우주의 모양입니다. 법계정인(法界定印)라, 법계(法界)라는 것은 우주라는 뜻입니다. 정인(定印)이라 법계의 모든 기운이 거기에 딱 담아 있는 결국 상징적인 모양이라는 것입니다.

가부좌하는 우리 몸자세. 좌선하는 자세 이것은 법계정인입니다. 가장 지혜(智慧)가 발동하기 쉽고 또는 우주의 정력기운을 우주 정기(精氣)를 이렇게 다 모아 놓은 이것은 하나의 상징적인 모양입니다. 따라서 모양은 부처같이 법당(法堂)에 부처님은 다 이렇게 하고 계시지오.

 

<화안애어(和顔愛語)>

우리 모양은 부처님 같이, 우리말은 바른말, 남의 속상하지 않고 자기 마음 편하고, 업장 무거운 사람들은 말만 내면 남 속상하게 하고 자기 마음도 괴롭힙니다. 자손손타(自損損他)라, (스스로 자(自)자, 손해볼 손(損)자, 또 손해볼 손(損)자, 다를 타(他)자) 나쁜 말들은 자기 가슴 해치고 남 가슴 해칩니다. 업장 (業障)만 자기 가슴에 심습니다.

그러게 부처님 말씀으로 화안애어(和顔愛語)라, (평화로운화(和)자, 얼굴 안(顔)자) 밝은 표정, 애어(愛語)라, (사랑 애(愛)자, 말씀 어(語)자) 불자(佛子)는 마땅히 의무적으로 우리가 꼭 화안애어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이 우리 가슴이 맑아지고 남의 가슴도 광명을 줍니다. 화안애어라, 밝은 표정 또는 부드러운 유연스러운 말,

<우주의 존재 목적의식이 48원이다.>

우리가 왜정(倭政) 때 살았던 분들은 아시겠지만 목포(木浦) 광주(光州) 서울 같은 데는 본원사(本願寺)란 절이 굉장히 많이 있었습니다. 일본(日本)에서 나온 절인데 본원사라, (근본 본(本)자 원할 원(願)자) 이것이 본원(本願)이란 뜻은 근본서원(根本誓願)이라, (맹세할 서(誓)자 원할 원(願)자) 무슨 근본서원인고 하면은 우주가 본래 갖춘 하나의 서원입니다.

 

우주(宇宙)는 하나의 생명체(生命體)이다. 우주가 바로 부처님입니다. 따라서 우주도 하나의 서원이 있습니다. 우주의 바로 목적이 있습니다. 우주의 목적의식(目的意識) 그것이 본원입니다. 우리는 무슨 법회(法會) 끝에나 반드시 발사홍서원(發四弘誓願)이라, 사홍서원(四弘誓願)을 부르는데 사홍서원 이것이 바로 본원입니다.

부처님의 4가지 서원이라, 이것이 모든 중생을 다 제도해야 되겠다. 무량법문으로 배워야 되겠다. 또는 무상불도(無上佛道)를 위없는 불도를 성취해야 되겠다. 이런 것이 부처님의 우주의 서원입니다. 이것이 본원입니다. 헌데 그런 본원을 좀 더 부연시켜서 말한 것이 [대무량수경(大無量壽經)]의 48원입니다. 48가지로 우주의 서원 우주의 목적을 풀이했습니다.

 

<광촉유연원(光觸柔軟願)>

그런 가운데서 33번째 가서 광촉유연원(光觸柔軟願)이라, 광촉은 빛 광(光)자, 접촉할 촉(觸)자. 광명에 접촉해서 유연(柔軟)이라, 부드러울 유(柔)자, 연할 연(軟)자, 그래서 유연원이라 말입니다. 광촉유연원이라, 우주의 원래(元來) 원이 있다 말입니다. 부처님의 원래 원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면은 우주의 본래(本來) 광명(光明). 부처님의 별명(別名)은 많이 있으나 부처님의 총대명사(總代名詞)는 아미타불(阿彌陀佛)입니다. 비록 부처님의 명호(名號)와 이름이 많이 있다 하더라도 총대명사는 아미타불인데 아미타불 풀이가 이것이 무량광불(無量光佛)입니다. 아미타불을 우리말로 풀이하면 무량광불입니다. 광명이 우주에 가득 차있는 생명(生命)이라는 뜻입니다.

 

마음이 불룩불룩하고 흥분하기 쉽고 거친 사람들은 그런 광명과 거리가 보다 멉니다. 우주의 본 생명인 부처님의 생명의 광명과 거리가 멉니다. 마음이 유연스럽고 상냥한 사람들은 우주의 광명과 더 가깝습니다. 따라서 그 광명의 정작 접촉(接觸)한 사람들은 그때는 보살(菩薩)입니다.

 

남의 듣기 싫은 말, 남을 성내게 하는 말, 남을 이간(離間)하는 말, 이런 말을 잘한 사람들은 우주의 광명과 거리가 멉니다. 우리가 멀어서는 되겠습니까?

그래서 유연선심(柔軟善心)에서 그냥 대비심(大悲心)이 발동해서 천지우주가 모두가 불쌍한 중생뿐이란 말입니다. 또 그냥 감사하고 고마움뿐이다 말입니다.

 

그리고 모든 가난한 사람들이나 또는 모든 병고(病苦)에 시달린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내가 구제해야 되겠다. 그런 문제를 다 자기 몸같이 생각합니다.

그런 마음 때문에 그때는 눈물이 주룩주룩 나오는 것입니다.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부드러운 마음 가운데서 눈물이 주룩주룩 나온다 말입니다. 그 눈물은 맑은 눈물이 되겠지요. 이것은 조금 전에 말씀한 것처럼 광명에, 우주의 순수 에너지인 광명에 접촉한 사람들이 그럽니다.

그러기에 보살마음은 앞서 말씀한 것처럼 화안애어(和顔愛語)라, 항시 평화스럽고 항시 중생을 연민(憐愍)하는 마음이 있다 말입니다. 중생을 연민하는 마음에서 중생이 듣기 싫은 말을 하겠습니까? 또는 동사(同事)라. 중생과 더불어서 누가 고생하면 따라서 같이 위로해준다는 것입니다. 또는 이행(利行)이라. 중생을 이익 되게 항시 말해준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저 사람이 기분 나쁠 것인가? 이러한 것이 애쓰지 않는다 하더라도 참선(參禪) 많이 하고 염불(念佛) 많이 하면 저절로 그리 됩니다.

<견성오도(見性悟道)>

이것은 광명과 차근차근 접근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드디어 불성광명(佛性光明)과 하나가 딱 되면 그때가 견성오도(見性悟道)입니다. 우리는 우주의 순수한 광명. 그 아미타불(阿彌陀佛). 또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여기하고 하나가 되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입니다. 헌데 앞서 말씀한 것처럼 참선이라 하는 것은 한 말로 말하면 모양은 부처님 같고, 말은 부처님 같은 말, 그런 유연스러운 말, 우리 생각은 부처 같은 생각, 이것이 우리 참선의 가장 이상형(理想型)입니다.

모양<身>은 부처 같은 모양, 말<口>은 부처 같은 말, 생각<意>은 부처님 생각뿐, 이것이 참선의 가장 이상적인 모양입니다. 그럼 부처 같은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 나와 남의 구분이 없어서 우주를 하나의 부처덩어리로 본다 말입니다. 이것만이 바로 보는 것입니다.

 

<무아(無我)>

우리는 내가 없다. 또는 사대(四大)를 구성한 내 몸이 허망하다. 이런 말에 보통은 많이 저항을 느낍니다. 어째서 분명히 내가 있는데 왜 내가 없다는 말인가? 나와 남이 분명히 있는데 어째서 자타(自他)가 없다는 것인가? 이런 것을 도저히 잘못 느낍니다.

 

지금 이 가운데는 우리 사회의 지도적인 훌륭한 지성인들이 많이 계십니다. 따라서 좀 어려웁더라도 제가 말씀을 드립니다마는 [마하지관(摩訶止觀)]이란 논장(論藏)이 있습니다. 이것은 천태지의(天台智顗)스님이라, 불교를 석존(釋尊)이후에, 석가모니 부처님 이후에 가장 세밀하게 체계를 세우신 분이 천태지의스님입니다. 헌데 이분 가르침 가운데서 최고의 가르침 이것이 마하지관입니다.

 

여기에서 우리 인간을 해부할 때에 인간을 분석(分析)을 이렇게 했다 말입니다. 무지혜고(無智慧故)라, 지혜가 없기 때문에 (없을 무(無)자, 지혜 지(智)자, 슬기로울 혜(慧)자, 옛 고(故)자), 계언유아(計言有我)라, (혜아릴 계(計)자, 말씀 언(言)자, 있을 유(有)자, 나 아(我)자) 지혜가 없기 때문에 내가 있다고 고집한다는 것입니다.

 

허나 이혜관지(以慧觀之)라, (써 이(以)자, 지혜 혜(慧)자, 불 관(觀)자, 갈 지(之)자) 지혜로써 이 몸을 관찰해 본다고 할 때에, 두족지절(頭足支節)이라, (머리 두(頭)자) 우리 머리나 발이나 우리팔뚝이나 이런 사지(四支)를 다 검토해 본다 하더라도 실무유아(實無有我)라, (실다울 실(實)자 없을 무(無)자 있을 유(有)자 나 아(我)자) 참다운 내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 문제는 어려운 철학적인 문제이니까 두고두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내 머리는 내 머리이지 내가 아닙니다. 내발은 내발이지 내가 아닙니다. 손 이것은 손이지 내가 아닙니다. 내 몸 이것은 내 몸이지 내가 아닙니다. 나는 무엇인가? 어디도 없는, 내가 없단 말입니다. 내 머리에 내가 있는 것인가? 내 몸에 내가 있는 것인가 말입니다. 내 머리 이것은 내 머리지 나는 아닙니다. 내 발은 내 발이지 내가 아닙니다. 나는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하처유인급중생(何處有人及衆生)이라, 하처(何處)라 어느 곳에, 유인급중생(有人及衆生)이라, 어느 곳에 사람과 중생이 있는가 하면은, 중생업력(衆生業力) 가위공취(假爲空聚)라, 중생의 업력으로 무명(無明)으로 해서 말입니다.

 

<텅빈 업력기운(業力氣運)이 모여서 사람 몸이 된다.>

업(業)이란 것은 우리 인간의 번뇌(煩惱)와 번뇌에 따른 행동(行動)이 업(業)입니다. 우리 인간의 번뇌라 하는 것은 탐심(貪心), 진심(瞋心), 치심(癡心) 이런 것이 번뇌가 아니겠습니까. 그러한 삼독심(三毒心)에서 우리가 행위(行爲)한다 말입니다. 남을 미워하면 때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겠지요. 사랑하면 자기 걸로 만들려고 하겠지요.

 

이러한 탐심, 진심, 치심 이러한 것이 우리가 행위(行爲)로 옮아져서 그때는 우리 업(業)이 됩니다. 중생업력(衆生業力), 중생이 업으로 해서 가위공취(假爲空聚)라. 가짜로 잠시간 공(空)을 모아서, 산소, 질소, 원자도 다 공(空)입니다.

 

다만 무엇인가 모르는 하나의 생명체가 빙빙 돌아서 산소가 되고 무엇이 되고 했습니다. 원래는 텅 비어 있습니다. 이런 텅 빈 것들이 업력기운(業力氣運)들이 모여서 사람의 세포가 되고 결국은 하나의 몸뚱아리가 되었습니다.

중생업력(衆生業力) 가위공취(假爲空聚)라. (거짓 가(假)자 하 위(爲)자 빌 공(空)자 모을 취(聚)자 ) 중생이 업력이 공을 모아서 결국은 하나의 뭉치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중생의 몸입니다.

 

따라서 무유재주(無有宰主) 여숙공정(如宿空亭)이라, 저기 빈 정자에 주인이 없다 말입니다. 정자(亭子)를 세워 놓으면 그때그때 우리가 더울 때 이용도 하지만 정작 주인은 별도로 없습니다. 마치 그런 빈 정자같이 빈집같이 우리 몸도 역시 참다운 주인이 없습니다. 무유재주(無有宰主)라. 주지하는 주인이 없는 것이 마치 여숙공정(如宿空亭)이라. 같을 여(如)자, 잘 숙(宿)자, 빌 공(空)자, 정자 정(亭)자 마치 빈집에 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몸은 원래 주인이 없는 것인데 우리 망념(妄念)이 ‘나’라고 고집을 한다 말입니다.

<망념(妄念)이 공취(空聚)인 오온(五蘊)을 ‘나’라한다.>

우주의 실상(實相)을 바로 못 보는 가상(假相)밖에 못 보는 우리 망념(妄念)이 나다. 이렇게 고집(固執)을 합니다. 이것이 내 것이 아닌데 말입니다. 내 몸이 내 것이 아닌데 나가 어떻게 내 소유가 되겠습니까? 내 아내 내 남편 모두가 다 우리 중생이 잘못 봐서 그럽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연(因緣)은 분명히 있으니까 자기 아내가 소중하고 자기 남편이 소중합니다만은 사실로 봐서는 결국은 없습니다.

내 몸도 내 것이 아니거니 어느 무엇이 내 것이 될 수가 없습니다. 내 재산 내 자식도 결국은 내 것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의 존재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인연에 따라서 가까운 인연인 것이니까 우리가 거기에다 충실을 다 해야지요. 이렇게 생각할 때는 그때는 착심(着心)이 안 납니다. 헤어지면 헤어진다. 죽으면 죽는다. 이와 같이 인연생(因緣生)이라 개시(皆是) 일체만유(一切萬有)는 인(因)과 연(緣)을 따라서 잠시간 합했을 뿐입니다.

<조식법(調息法) : 심장세균(深長細均)>

우리가 어제 호흡(呼吸)을 해야 된다. 호흡은 보여야 된다고 했는데 호흡을 할 때 ‘내 몸이 실존(實存)한다’ 내 코, 내 입, 내 밝은 눈, 이와 같이 이런 것이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호흡이 맑아 안 옵니다. ‘내 몸이 텅 비었다’ ‘내 몸이 이렇게 공(空) 무더기다’ 내 몸이 하나의 거품 같은 세포에 불과하다 이렇게 생각할 때 호흡은 맑아집니다.

 

<통신호흡(通身呼吸)>

부처님 경전(經典) 가운데서 호흡만 말한 경이 [아나바나경(阿那波那經)]입니다. 이런 경 가운데는 자기 몸을 공관(空觀)이라, 자기 몸을 텅 비었다고 본다면 우리 몸이 털구멍마다 바람이 통한다는 것이다. 즉 말하자면 통신호흡(通身呼吸)이라. 우리 몸 전체로 호흡한다는 것입니다. 호흡을 많이 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가만 두고서 자기는 숨을 안 쉬지만 이상하게 호흡은 됩니다.

그전에 저는 요가수트라를 보고 ‘귀로 호흡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건 어떻게 귀로 호흡을 하는 것인고, 그러나 오랫동안 참선을 해보면 분명히 호흡은 딱 정지(靜止)가 됐는데 신묘(神妙)한 멜로디, 신묘한 음악소리가 귀에만 들려옵니다. 헌데 호흡이 정지가 안 되고 거칠면 신묘한 소리는 귀에 울려오지 않습니다.

분명히 호흡은 이렇게 숨 쉬지 않는데도, 자기 맥도 없는 것도 같고, 또 코를 이렇게 해봐도 무슨 숨소리도 없고, 자기 스스로 의식해 봐도 호흡은 분명히 없는데, 귀에만 신묘한 소리가 들려옵니다.

 

베토벤이나 슈베르트 같은 그런 분들은 분명히 영원의 소리를 다 들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런 굉장히 기가 막힌 우리 영혼을 맑히는 그런 명곡(名曲)이 나온 것입니다.

 

그때야 비로소 정말 귀로 호흡하구나! 하고 이렇게 우리가 알아진다 말입니다.

 

<법계호흡(法界呼吸)>

호흡법(呼吸法)의 요령은 호흡이 없어야 합니다. 삼매(三昧)도 처음에는 호흡이 거칠지만 나중에 깊이 들어갈수록 호흡이 차근차근 맑아집니다. 호흡이 없어서 결국은 호흡이 완전히 끊어질 단계, 호흡이 끊어져야만이 번뇌도 끊어집니다. 우리 번뇌와 호흡은 그때 같이 상응(相應)합니다. 마음이 거칠어지면 호흡도 거칠고 호흡 거칠어지면 마음도 거칠어집니다.

허나 우리는 마음을 완전히 분별 망상을 떠나기 어렵기 때문에 호흡을 짐짓고 우리가 해보는 것입니다. 허나 조도(助道)를 위해서 (도울 조(助)자 길 도(道)자) 호흡을 하는 것인데, 호흡은 어제도 말씀했는데 요령 이것은 심장세균(深長細均)이라, 호흡은 깊고 길고 가늘고 고르게 한단 말입니다.

또 그와 동시에 우리는 약간 무리를 해야 합니다. 무리를 안 하면 호흡이 길고 깊게 그렇게 안 됩니다. 어떻게 무리하느냐 하면은 이렇게 척 들어앉아서,

 

<쿰박 : 유식(留息),안전호흡>

요가수트라로 말하면은 쿰박이라. 우리 한문으로 하면 유식(留息)이라. (머물 유(留)자 숨쉴 식(息)자) 호흡을 딱 멈추어서 호흡을 딱 가둡니다. 이렇게 딱 숨을 오랫동안 가둡니다. 호흡을 가두면 절로 아랫배로 호흡이 쑥 들어갑니다.

 

요령은 어떻게 되냐 하면 표준을 말하면 가사 우리 들여 마시는, 우리 입식(入息)이라, 들이 마시는 숨이 2초라면, 호흡을 가두는 시간을 8초, 내쉬는 시간은 4초, 이와 같이 배씩 올라갑니다. 시간 비율이 우리가 숨을 들이 마시는 시간이 2초라고 하면, 앞서 말한 것처럼 내쉬는 시간은 4초, 숨을 가두어서 멈추는 시간은 8초, 이와 같이 처음에는 합니다.

이렇게 하면서 차근차근 가두는 시간을 늘여갑니다. 8초, 10초.... 이와 같이 늘여갑니다. 늘여가서 1시간 동안만 딱 가두어서 호흡이 정지되면 그때는 신통(神通)도 한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가두는 시간을 너무 무리하면 배도 아프고 머리도 아프고 곤란스럽습니다. 무리가 안 될 정도로 앞서 말한 것처럼 맨 처음에는 2초, 4초, 8초 가두는 시간 8초 정도 이런 비율 정도로 차근차근 늘여가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절로 앞에 말씀한 것처럼 호흡이 길고 깊고 가늘고 고르게 쉬어집니다. 그러면 거기에 따라서 우리 마음도 차근차근 고요히 맑아옵니다. 이렇게 호흡은 하시기 바랍니다.

 

<방선과 포행{행도(行道)}>

그리고 방선(放禪)할 때에, 방전은 참선을 쉬는 것입니다. 참선에 들어가면 입선(入禪)이라 들입(入)자, 그만 두는 것을 방선이라 놓을 방(放)자, 우리는 지금 방선하는 단계입니다만은 방선 할 때는 죽비(竹篦)를 딱 치면은 역시 합장(合掌)을 합니다. 우리는 도량(道場)에 대해서 감사를 느끼는 것입니다.

 

입선 할 때는 합장할 필요가 없습니다만 방선할 때는, 물론 합장 안 해도 무방합니다만, 보통 우리는 하도 고마우니까 영원으로 가는 길을 우리가 공부할 때 도량에 대해서 우리는 감사를 항시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는 같은 대중(大衆) 우리 법우(法友)에 대해서 우리가 감사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감사의 의미로 해서 방선을 할 때는 죽비를 치면 합장을 합니다.

 

합장하고 그때는 이제 가부좌(跏趺坐)를 풀고, 손도 긴장을 풀고, 몸도 흔들어서 몸의 거북한 불탁을 다 풀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요가법(yoga法)을 좀 해야 합니다. 요가라 하는 것은 근본은 이것이 우주의 본체 하나가 되는 것이지만은, 요가법은 3단계로 구분해서, 우리 몸의 긴장을 푸는 압감, 또 한 가지는 우리 호흡법(呼吸法), 한 가지는 이것은 우주와 하나가 되는 삼매(三昧). 이와 같이 구분하는 것인데,

 

이와 같이 방선 할 때 앞서 말한 것처럼 제가 앞서 말한 그러 자세로 해서 차근차근 몸을 풀어서 목운동. 어깨 운동, 다리운동, 등배 운동 가능하면 물구나무서기 이와 같이 해서 우리 몸을 풀어야 합니다. 그래야만이 좌선(坐禪)으로 해서 우리 몸이 거북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한 시간 동안하고 쉽니다만 앞으로 될수록 한 시간하고서 쉬는 시간에도 같이 돌면서 우리 몸을 푸는 행습(行習)을 하겠습니다. 원래 선방에서는 행도(行道) 그래서 포행이라 그래서 같이 모두 10분 동안 이렇게 빙빙 도는 것입니다.

 

그 동안 용변할 사람은 갔다 옵니다. 이렇게 돌면서 우리 몸의 거북한 점을 풀어야 합니다. 그래야 불탁이 풀어집니다.

 

<내가 본래 분명 부처구나! 하는 확신>

앞서 말한 것처럼 불교 이것은 인류문화(人類文化)에서 가장 앞선 가르침입니다. 인간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 물질의 근원 문제, 이런 문제 해결은 오직 하나의 소중한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불도(佛道)에 입문(入門)해 있습니다.

 

그러한 불법 가운데서 불법(佛法)을 알기 위해 제일가는 지름길 이것이 참선입니다. 참선 하는 법은 부처 같은 모양, 말, 마음씨, 이것이 참선하는 우리의 신구의(身口意)라, 몸과 입과 뜻의 3가지 이것이 하나의 형태입니다. 이렇게 해서 꼭, 이번에 공부하는 동안에 비록 증명은 다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증입생(證入生)은 못 된다 하더라도, 조금 전에 제가 말씀드린 견문생(見聞生)이라, 보고 듣는 것, 또는 해행생(解行生)이라, 해석하고 풀이 하는 것, 내가 부처임을 분명 느끼는 것, 해행생만은, 비록 내가 부처를 증명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내가 분명 부처구나’ 하는 확신만은 이 동안에 꼭 갖도록 하시기를 바라면서 말씀 마칩니다.

 

나무아미타불!

 

 

* 1985082-태안사 하계용맹정진 3번째일 법문 : 청화대종사 설법

*태안사 방송실 카셋 녹음

*녹음테이프 정훈스님 보급

*펜글씨 녹취 : 해인(海印),법륜행(法輪行), 외

*펜글씨 녹취 취합 태호스님

*20160200-워드작업 : 고은

*20160200-워드정리 : 본정

<큰스님 구어체 그대로 정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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