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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마음의 고향

마음의 고향 27집(2)


 

< 1985년8월1일 태안사 하계용맹정진 2일째>

 

<좌선(坐禪)과 삼매(三昧)>

 

우리는 좌선(坐禪)이라든가 삼매(三昧)라든가 그런 용어 때문에 다소 혼동을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선 용어상 문제를 대강 말씀을 드립니다.

과연 삼매(三昧)는 무엇이고, 또는 선(禪)은 무엇인가? 그런 것에 관해서 여기 보면 저렇게 말하고, 저기 보면 이렇게 말하는 것이니까 더러 혼동을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다. 헌데 우리가 대국적으로 생각할 때에 삼매(三昧)나 선정(禪定)은 똑같은 의미로 풀이가 됩니다. 물론 분석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때그때 복잡하게 풀이를 합니다만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선정이나 삼매나 똑같은 의미가 됩니다.

 

즉, 삼마발제(三摩跋提)라는 것이 인도말로 하면 삼마지(三摩地)인데, 중국으로 건너오면서 부터 삼매(三昧)라 합니다. 삼매가 무엇인가? 우리가 어떤 것이나 하나의 것에 몰두하는 것을 보고 삼매라고 말합니다. 가령 책에 몰두하면 독서삼매(讀書三昧)라 하듯이 어떤 것에 몰두하는 것을 가리켜서 삼매라 합니다.

 

따라서 비단 우리 불교뿐만 아니라 어떤 것이나 간에 자기 하고 싶은 것에다 자기 전 심력(心力)을 다 경주해서 몰두하는 그것을 삼매라 합니다. 헌데 그러한 마음을 하나로 통일 시키는 삼매, 이러한 가운데서 우리 불교의 삼매가 가장 통일 되고, 가장 고차원의 정신을 집중하는 법입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도교 계통의 그러한 정신을 통일하는 삼매법도 있습니다. 또는 기독교의 기도 모시는 그러한 걸로 해서 마음을 하나로 통일 시키는 법도 있습니다.

 

또는 요새 마인드콘트롤(Mind-Control)이나 그런 것도 역시 마음을 통일하는 삼매법의 하나입니다. 아무튼 하나의 경지(境地)에다 마음을 머물게 해서 집중하는 그것을 보고, 삼매라 하는 것입니다. 헌데 저번 시간에도 말씀을 했습니다만 불교의 참선은 그런 보통 삼매와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하면은, 불교의 수행법은 선오후수(先悟後修)라 하는, 먼저 우리가 비록 체험은 못했다 하더라도 부처의 경계, 우리의 목적경계, 소위 말하는 목적의식을 확립시킵니다. 이런데 가서 불교 참선과 다른 것과 차이가 있습니다.

 

비록 내가 아직 성불을 못했다 할지라도 부처가 된 셈 치고서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 자세가 부처가 된 셈 치고 하는, 그런데 불심을 떠나 버리면 그때는 참다운 참선은 못 됩니다. 비록 지금 자기가 제아무리 미혹(迷惑) 되어 있다 하더라도, 자기 심리 상태는 ‘내 본 성품(性品)이 부처구나’ ‘나한테는 무량(無量)의 공덕(功德)이 있구나’ 그것을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다른 것도 그렇지만, 우리 참선은 특히 아주 고행적(苦行的)인 그런 우리 행동을 요하기 때문에, 생각해 보십시요만 며칠이나, 몇 달이나, 몇 년이나 앉아서 우리가 배길 수가 있습니까? 강열한 희망이 없으면 그땐 못 배깁니다. 따라서 그렇게 하려면 먼저 자기한테 갖추고 있는 무량한 공덕(功德), 자기 본성이 갖추고 있는 그런 행복스러운 그런 여러 가지 가능성(可能性), 그것을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신(信)이 앞서야만이 우리가 참선(參禪)을 배겨낼 수가 있습니다. 자기 청춘도, 자기 가정도, 모두 뿌리 치고서 결연(結緣)해야 하고, 어떤 경우에는 대사일번(大死一番)이라, 자기 생명(生命)도 버려야 한다 말입니다.

우리는 듣건데 달마대사(達磨大師)의 9년 면벽(面壁)이라, 9년 동안도 소림사(少林寺) 석굴(石窟)에서 벽을 바라보고서 지냈다 말입니다.

 

남전보원(南泉普願) 스님은 30년 동안 한 처소에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남양혜충(南陽慧忠)국사 역시 40년 동안 남양 백애산에서 움직이지 않고서 산에서 지냈다 말입니다. 이와 같은 이런 기운이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역시 자기 자성(自性). 내가 비록 못 깨달아서 모른다 하더라도 나한테는 무량(無量)의 공덕(功德)이 있다. 무량의 행복스런 그런 내 본 성품(性品)이 있다.

 

내가 깨달으면 영생(永生)한다. 하는 그런 불같은 신조(信條)가 먼저 앞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그런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재주도 없고 또는 못 생기고 했다 하더라도 내 자성, 내 본 성품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억지로 가져야 합니다. 억지로 갖는다 하더라도 역시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그것이 억지로 안 들어갑니다.

 

 

<지관타좌(只管打坐)하면, 심신탈락(心身脫落)이라!>

 

옛 선(禪)의 말씀에 [지관타좌(只管打坐) 심신탈락(心身脫落)]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지관은 다만 지(只)자, 대롱 관(管)자, 이것이 지관인데 이것은 한문인데, 우리말로 풀이하면, 오로지란 뜻입니다. 타좌(打坐)라 때릴 타(打)자, 앉을 좌(坐)자, 앉아라! 오로지 앉아라!

 

영리한 사람은 편한 것을 좋아해서 오로지 않기를 싫어합니다. 그냥 머리로만 생각해서 머리로만 다 해버리려고 합니다. 그래서는 참선은 못 합니다. 바보같이 앉는 끈기가 필요합니다. 오로지 앉아라. 지관타좌(只管打坐)하면 심신탈락(心身脫落)이라, 몸신(身)자, 마음심(心)자, 벗을 탈(脫)자, 떨어질 락(落)자, 그렇게 해야만이 우리 몸에 배여 있는 번뇌(煩惱)의 습기(習氣). 우리 마음에 훈습(熏習) 돼 있는 마음의 훈기(薰氣)로 해서 차곡차곡 거기 흔적(痕迹)을 두는 그런 번뇌(煩惱) 이것이 떨어집니다.

 

앉다 보면 차근차근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자기 번뇌가 떨어집니다. 오로지 앉아라. 그러면 그대 몸에 있는 그런 습기. 그대 마음에 있는 번뇌가 떨어집니다. 따라서 좌선(坐禪)하는 분들은 먼저 무서운 신심(信心), 그 다음에는 오로지 앉아야 한다는 끈기가 필요합니다. 끈기 없이는 좌선을 못 합니다.

 

앞서 말씀처럼 달마대사(達磨大師)의 9년 면벽(面壁). 비록 우리가 9년 동안 석굴(石窟)에서 배길 정도로 못 지낸다 할지라도 적어도 역시 우리가 몇 년 간은 배긴다는 그런 기백(氣魄)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만이 좌선해서 명색이 육근청정(六根淸淨)이라, 우리 육근은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 즉, 우리 눈, 귀, 코, 입, 촉감 모두가 다 오염돼 있지 않습니까? 오염된 것이 우리의 눈, 코, 귀, 입, 촉감 이런 것인데, 이런 것이 청정하게 되어서 깨달음에 이르려면 그때는 오로지 앉아야 합니다.

 

<자정작용(自淨作用)>

자기도 모르게 차근차근 앙금이 가라앉습니다. 흐린 탁수(濁水)를 가만 두면 그때는 이제 시간이 경과 하면 앙금이 가라앉고 바닥이 훤히 보이죠.

부처님 당시에 어느 왕의 공주(公主)가 못가에서 놀다가 금패물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따라 온 종들이 그것을 건져내려고 못을 아무리 휘저어 봐도 그것이 안 나온다 말입니다. 그러니 이제 어디로 가버렸구나 하고, 이렇게 생각하고 그만두고서 모두가 들어와 버렸습니다.

 

나중에 종 하나가 어슬렁어슬렁 못 가에 가서 보니까 그때는 흐림이 앙금이 가라앉고서 맑은 바닥에 패물이 보인다 말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은 가만두면 가라앉습니다. 분별시비가. 내내야 우리 마음의 바닥은 부처입니다. 바닥이 나와야 쓸 것인데, 바닥이 안 나오는 것은 자꾸 분별시비하고, 나다 너다 하는 이런 여러 가지 차별 때문에 안 나옵니다.

 

그런데서 아까 말 한 바와 같이 지관타좌(只管打坐) 오로지 앉아라! 그러면은 심신탈락(心身脫落)이라, 그대 몸과 마음이 오염된 것이 가라앉고서, 그때는 참다운 우리 마음 저 변에 있는 불성(佛性)이 보입니다.

<불교의 유심론(唯心論)>

 

우리가 불교(佛敎) 심리학(心理學)에서 본다하더라도 우리 마음의 의식의 뿌리에는 말나식(末那識)이라.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 6의식(六意識), 우리 중생은 보통 6의식으로 쓰지 않습니까. 그 밑에 가서는 제7말나식(第七末那識)이 있습니다. 내내야 지금 심리학이 말하는 잠재의식(潛在意識)이 되겠지요. 불교에서 말할 때 말나식(末那識)까지는 오염이 되어 있습니다.

 

그다음 제8아뢰야식(第八阿賴耶識)이라, 아뢰야식은 불교 심리학에서는 정분(淨分), 염분(染分)이라, 청정한 부분, 또는 염분이라, 물들어서 오염된 부분, 이와 같이 나누어 보는 것인데, 제9암마라식(第九唵滅識)>이라, 제9암마라식은 청정(淸淨)해서 조금도 오염(汚染)되지 않았다 말입니다. 그러한 청정(淸淨)한 의식(意識), 그 진성(眞性)이 진여식(眞如識)이라, 부처란 말입니다.

 

따라서 어떤 누구나 간에 우리 마음 저변에는 부처가 있습니다. 그것이 여러 가지 인과(因果)에 따라서 차근차근 오염(汚染)되어서 사람만치, 제9암마라식도 못 쓰고, 제8아뢰야식도 못 쓰고, 제 7말나식도 못 쓰고, 6식만 쓰는 사람의 존재인 것입니다. 천상(天上)이나, 지옥(地獄)이나, 아귀(餓鬼)나, 그런 모든 것이 다 의식(意識)의 수준(水準)입니다. 마음이라는 의식이 5식도 미처 못 쓰면 저런 식물(植物)이 되겠지요.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이라, 5식만 쓰면 사람 아닌 동물(動物)이 되겠지요.

사람은 더욱 진화(進化) 되어 6의식 까지 씁니다. 신중(神衆)들은, 사람과 같은 그런 오염(汚染)된 몸을 갖지 않은, 조금 나은 몸을 가진 신중들은 더욱 깊은 식을 씁니다. 부처는 다 써서 그때는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말나식(末那識), 또는 아뢰야식(阿賴耶識), 암마라식(唵滅識), 불식(佛識)까지 다 씁니다. 따라서 일체존재(一切存在)는 모두가 의식(意識)의 차원(次元)의 차이(差異)입니다.

 

의식을 보다 더 잘 쓰면, 원래 가지고 있는 의식을 깊이까지 다 쓰면 그때는 부처고, 조금 덜 쓰면 보살(菩薩), 연각(緣覺), 성문(聲聞) 그런다 말입니다. 이런 것은 불교(佛敎)에서는 명료(明了)하니, 불교의 유식론(唯識論)에서, 불교심리학은 유식론이라. 오직 유(唯)자. 알 식(識)자. 유식론인데, 유식론에서 말씀해 있습니다만, 현대 심리학에서도 역시 심층(深層) 심리학(心理學)에서는, [프로이드]는 조금만 말 했으나, [융] 같은 분은 상당히 깊이 말했습니다. 그 분은 불교를 공부 했으니까 말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좌선(坐禪) 이것이 심전(心田) 개발(開發)이라. 우리 마음 밭을 개발하고 개발해서 우리 마음의 저 밑창을 캐내는 작업입니다. 이런 가운데서 선(禪)이 최상(最上)의 길인데, 선(禪) 이라는 것은 아까도 말씀한바 우리 마음이 부처님의 영상(映像)을 떠나지 않아야 한다 말입니다. 따라서 부처님의 영상만 안 떠나면 불심(佛心)만 여의지 않으면 그때는 앉으나 서서나 누워서나 다 선(禪) 입니다. 다 참선(參禪)입니다. 앉아서나 누워서나 또는 길을 가며서나 다 참선입니다.

 

<상행삼매(常行三昧)>

따라서 상행삼매(常行三昧)라, 항상 걸으면서 하는 그런 삼매도 있습니다. 또는 상좌삼매(常坐三昧)라, 또는 항시 앉아서만 하는 좌선(坐禪)도 있습니다. 또는 반좌반행삼매(半坐半行三昧)라, 앉아서 반, 서서 반, 그렇게 하는 참선도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좌선(坐禪)하는 법이 제일 좋습니다. 좌선하는 법이 일체행법 가운데서 가장 안정(安定)된 법입니다. 따라서 불교 뿐 아니라 앞서 말한바와 같이 딴 종교 역시 안정된 모습을 취할 때는 이렇게 앉아서 하는 식으로 합니다.

 

<가부좌(跏趺坐)는 일체여래지인(一切如來智印)>

 

가부좌(跏趺坐)해서, 바로 앉는 이것이 가부좌 아닙니까. 불교에서 하는 좌선법이 가부좌인데, 가부좌해서 앉으면 그 모양이 정삼각형 모양이라, 물론 삼각형(三角形)의 각 변은 같지 않지만 하여간 이변(二邊)은 같습니다. 저변(低邊)만 다르고서, 하여간 정삼각형 비슷한 것인데, 이것보고 불교에서 일체여래지인(一切如來智印)이라 합니다.

 

불교는 상징(象徵)을 중요시 합니다. 정사각형(正四角形)을 그려놓고 그것을 지(地)라 합니다. 원형(圓形)을 동그랗게 그려놓고 수(水)라 합니다. 삼각형(三角形)을 화(火)라 합니다. 반원(半圓)을 보고는 풍(風)이라 합니다. 불교는 상징을 중요시 합니다. 굉장히 상징적인 것이 뜻이 깊습니다.

 

헌데 이와 같이 삼각형 이것은 불교에서 일체여래지인(一切如來智印)이라. 일체여래의 지혜(智慧)의 인(印)이라 말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정삼각형 모양 취하는 것이 우리한테 갖고 있는 불성(佛性)이 개발(開發)하기 가장 쉬운 법(法)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좌선하는 법이 일체 수행법(修行法) 가운데서 가장 안정되고 불성이 개발하기 쉬운 법이니까 이제 좌선(坐禪)을 주로 합니다.

 

그래서 용수보살(龍樹菩薩) 같은 제2의 석가(釋迦)라 할 정도로 위대한 분도 차가부좌자(此跏趺坐者:是跏趺坐者)라, 가부좌 이것은 무엇인가 하면은 최안은불피극(最安隱不疲極), 가장 안은스럽고 피로(疲勞)를 모른다 말입니다.

 

처음에 앉아 보면 그때는 조금 거북하지만 익숙해지면 가부좌법 같이 좋은 법이 없습니다. 이렇게 다 누워서는 하루 동안 못 베깁니다. 허나 가부좌 행습(行習)을 하면 앉아서는 하루나 이틀이나 베기는 것입니다. 훈련을 하면 모르겠습니다만 방금 말씀처럼 어떤 것도, 가사 우리가 걸어서 왔다 갔다 하는 법도 역시 그도 그걸로 만은 못 베깁니다. 그러나 이렇게 앉아서 하는 가부좌는 베길 수가 있습니다.

 

‘최안은불피극(最安隱不疲極)’이라, 가장 안은스럽고 피로를 모른다 말입니다. 따라서 ‘마왕견지(魔王見之) 기심우포(其心憂怖)’라, 마왕(魔王)이라는 것은 악마(惡魔)의 왕(王) 아닙니까.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는 분별시비(分別是非)나, 여러 가지 망상(妄想)도 이것이 마왕입니다. ‘마왕견지’마왕이 있어서 우리를 본다 할 때에 가부좌하는 모습을 보면 ‘기심우포’라. 그 마음이 두렵다 말입니다.

 

*問曰 : 多有坐法, 佛何以故唯用結跏趺坐

*答曰 : 諸坐法中結跏趺坐最安隱, 不疲極; 此是坐禪人坐法, 攝持手足, 心亦不散. 又於一切四種身儀中, 最安隱. 此是禪坐取道法坐, 魔王見之, 其心憂怖. 如是坐者, 出家人法, 在林樹下結跏趺坐, 衆人見之皆大歡喜, 知此道人必當取道.

「“대지도론(大智度論) 제7권”」

우리는 과거세(過去世)에 좌선(坐禪)을 많이 안 해 본 분들이 있습니다. 과거세에 공부를 많이 한 분들은 금생에 척 들어앉으면 그냥 쭉 펴서 공부가 잘 돼지만, 과거에 참선을 익히지 않은 분은 앉으려면 굉장히 고역을 치룹니다. 허나 어거지로 꼭 해야 합니다. 어째 그런고 하면 아까 말씀마따나 ‘최안은불피극’인 동시에 며칠이고, 몇 년이고 앉을 수 있는 방법은 이 법뿐이니까 말입니다. 이렇게 해야 만이 우리가 오랫동안, 달마스님같이 오랫동안 공부를 할 수가 있다 말입니다.

<구생기번뇌(俱生起煩惱)>

 

물론 오랫동안 하지 않고서 잠시간만 한다하더라도 그 효험(效驗)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역시 오fot동안 해야만이 우리의 과거번뇌 금생번뇌가 녹아나 집니다. 우리는 ‘구생기번뇌(俱生起煩惱)’라, 함께 구(俱), 날생(生)자, 일어날기(起)자, 우리 생과 더불어서 과거로부터 지어온 번뇌가 있다 말입니다. 우리의 몸으로 행동하고, 우리 입으로 말하고. 우리 뜻으로 분별하고. 이런 것은 그때하면 그것이 순간 사라지지만은 흔적(痕迹)은 사라지지가 않습니다. 우리 마음 식(識)에다가 인상(印像)을 둔다 말입니다.

 

담배 피우는 사람은 자기 몸에다가 담배를 부벼서 피는 것은 아니지만은 자기 몸에서 담배냄새가 나는 것을 보십시오. 자기 호주머니에다 향(香)을 담았던 사람은 자기 몸에 향을 바르지 않지만은 향기(香氣)가 풍깁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느 한마디의 말. 또는 행동 하나. 생각 하나를 한다 하면은 그냥 그런 것은 사라진다 하더라도 흔적(痕迹)은 안 사라집니다. 흔적 그것은 종자(種子)가 되어서 우리 의식에다가 흔적을 인상을 둔단 말입니다.

 

그것이 쌓이고 쌓여서 그때는 그것이 우리의 업장(業障)이 된다 말씀입니다. 우리 의식(意識)에는 어느 누구나가 다 같이 몇 만생 동안 쌓이고 쌓인 그런 훈습(熏習)된 업장이 있습니다. 인상을 둔 우리의 흔적이 있습니다. 따라서 금생(今生)에 태어난다 하더라도 그런 업장 때문에 금생에 우리 행동이 제한을 받습니다. 우리 타고나온 본 소질(素質)이나 그런 것은 모두가 다 훈습된 업장 때문에 그럽니다.

<분별기번뇌(分別起煩惱)>

 

금생에도 나와서 잘 못 배우고, 잘 못 듣고, 잘 못 생각하고, 이것이 또 흔적을 둔다 말입니다. 과거세(過去世)에 이러한 흔적(痕迹)을 둔 이것이 구생기번뇌(俱生起煩惱)라, 그 위에다가 금생(今生)에 이루어진 번뇌, 이것이 분별기번뇌(分別起煩惱)라.

 

우리는 이와 같이 과거세에 우리가 생과 더불어서 가지고 온 번뇌, 금생에 새삼스럽게 새로 지은 번뇌, 이런 번뇌를 다 떼야 만이 우리 마음의 본 바닥을 보는 것입니다. 헌데 우리가 금생에 지은 번뇌는 그냥 떼기가 쉬워도, 마치 하나의 억센 잡초가 있으면 잡초 우듬지는 베기가 쉽지만, 뿌리는 좀처럼 뽑기가 어렵듯이, 우리 번뇌 역시 금생에 배운 것은 조금만, 가사 나쁜 책을 많이 보았으면 딴 책을 보면 되겠지요. 소설을 많이 봐서 그에 따르는 번뇌가 많으면 철학서나 종교서적을 많이 읽으면 되겠지요.

 

이와 같이 금생에 지은 번뇌는 딴 행동이나 딴 것을 취하면 달리 바꿀 수가 있지만, 전생(前生)의 번뇌(煩惱), 우리 의식(意識)의 저 밑에 까지 깔려있는 구생기번뇌(俱生起煩惱) 깊은 번뇌는 좀처럼 안 됩니다. 견성(見性) 오도(悟道)한 도인(道人)도 차근차근 점차로 떼는 것이지 갑자기는 못 뗀다고 합니다.

 

마치 불교에서 표현할 때 ‘견도여파석(見道如破石)’이요, 금생에 지은 번뇌는 최파(摧破)할 때에, 끊어 버릴 때에 마치 돌을 탁치면 순간에 금이 가듯이, 금생에 지은 번뇌는 우리가 법성(法性)을 보면 즉시에 끊어지지만, 구생기번뇌(俱生起煩惱)라, 생과 더불어서 온 번뇌는 그냥 두고두고 마치 ‘수도여우사(修道如藕絲)’라, 마치 연뿌리를 떼려면 잘 안 떼어지지요 질겨서 말입니다. 연뿌리를 떼는 것과 마찬가지로 전생에 지은 번뇌는 떼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불성(佛性)에 사무칠라면 정작 우리가 앞서 말한 참다운 자유인(自由人)이 되고, 참다운 해탈(解脫)의 성자(聖者)가 되기 위해서는 싫으나 좋으나 간에 아무 때고 그런 번뇌는 떼야 합니다. 못 떼면 우리가 윤회(輪廻) 바퀴에 짓눌려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적(日常的)으로 공부를 해야 합니다. 우리 스님들만 공부할 것이 아니라 재가(在家) 불자(佛子)들도 마땅히 공부를 해야 합니다. 허나 아무리 선량한 불자라 할지라도 집안에서 일상적인 생활을 못 벗어나면 윤회를 벗어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몇 십만 생을 지나도 윤회를 벗어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여러분이 공부하시면 직감(直感)하실 것입니다. 윤회 벗어나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싫으나 좋으나 간에 우리는 꼭 아까 말한바와 같이 금생에 지은 분별기번뇌, 과거 무량생에 지어온 구생기번뇌. 이 번뇌를 우리가 끊어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큰일이고 대사(大事)입니다. 중생(衆生)들은 이러한 것을 너무나 소홀히 하고 외면합니다.

 

<좌체우용(左體右用)의 조신법(調身法)>

 

너무 또 그냥 관념적인 말에 치우쳐 갑니다만, 그러면 이러한 제일 소중한 공부하기에 피로(疲勞)도 모르고 또는 하기 쉬운 좌선(坐禪)은 어떻게 할 것인가 말입니다. 먼저 앉는 것이죠. 다리 모양은 좌체우용(左體右用)이라. 좌측은 근본 체에 해당하고, 오른 편은 쓸용(用)자, 우용(右用)이라, 우측은 용에 해당한다 말입니다. 즉, 좌측은 가만있고 오른 편은 활동한단 말입니다.

 

따라서 좌선(坐禪)은 가만히 있어야 하기 때문에, 활동(活動)을 금지(禁止)하고 조용히 있어야 하기 때문에, 먼저 움직이지 않는 왼쪽으로, 움직이고자 하는 오른쪽을 딱 누른다 말입니다. 이것이 쉽습니다. 이것이 불교말로 길상좌(吉祥坐)라. 상서롭고 좋다는 것이 길상 아닙니까? 이렇게 하는 것은 보통 쉽습니다.

 

또한 항마좌(降魔坐)라, 마치 마구니를 최파(摧破)한 자세란 말입니다. 항마좌라, 왼발로 오른발을 딱 누르는 것은 고요한 정(靜)을 가지고 동(動)을 누르는 것이니 항마좌입니다. 우리 참선(參禪)할 때는 활동(活動)을 하는 것을 보고 마(魔)라 합니다. 활동해서는 그때는 안 되니까 말입니다. 금생에 너무 분별(分別)시비(是非)하고 활동(活動)을 너무 많이 해서 우리 번뇌(煩惱)가 많은 것인데, 우리는 근본으로 회귀(回歸)하는 내내야 근본(根本) 고향(故鄕)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에 동하지 않은 정(靜)으로, 고요한 것으로 해서 동(動)을 딱 누른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항마좌라. 이것은 쉽습니다만 원래의 근본적인 가부좌(跏趺坐)는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결가부좌(結跏趺坐)는>

 

좀 복잡합니다만 오른발을 왼쪽 허벅지에 딱 누릅니다. 그리고 반대로 왼발을 오른쪽에 딱 누릅니다. 항시 이렇게 하면 굉장히 좋은 것입니다. 이렇게만 앉으면 척추(脊椎)가 절로 펴지고 참 좋은 것이지만, 대체로 한국인(韓國人)들은 다리가 짧아서 이렇게 하기가 어렵습니다. 너무 아프면 싫증나서 안 되니까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억지로 할 필요는 없고, 아까 제가 말한 쉬운 방법으로 마군(魔軍)을 조복(調伏)시키는 ‘항마좌(降魔坐)’ 항복할 항(降)자, 마구니 마(魔)자, 앉을 좌(坐)자, 이렇게 해서 고요한 체(體)로 해서 움직이는 마(魔), 즉 동(動)을 딱 누른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주: 큰스님이 직접 시범을 보이시면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글만 가지고는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

 

이것도 역시 너무 고집 피울 것 없이 다리가 아프면 바꾸어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는 오른편의 다리를 왼쪽 고요한 것으로 해서 딱 눌러 버립니다. 활동(活動)을 못하게 말입니다.

 

손도 역시 왼손을 오른쪽 위에 놓습니다. 엄지손가락은 가만히 타원형(橢圓形)으로 합니다. 너무 꽉 하면 긴장 되서 안 됩니다. 이렇게 하는 동정(動靜)이 하나로 합쳐져서 음양(陰陽)이 조화(調和)가 됩니다. 그러나 너무 더운 때는 답답하니까 이렇게 해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원칙만은 우리가 알아두어야 합니다.

 

< 법계정인(法界定印)>

이것이 ‘법계정인(法界定印)’이라, 법계(法界)라는 것은 불교에서 우주(宇宙) 전체(全體)를 말합니다. 우주전체의 삼매(三昧)<주 : 우주와 하나가 되는 삼매>에 드는 상징(象徵) 이것이 법계정인입니다. 부처님 불상(佛像)을 보면 인계(印契), 즉, 여러 가지상징(象徵)이 있습니다만, 이것은 무외시인(無畏施印)이라, 없을 무(無)자, 두려울 외(畏)자, 배풀 시(施)자, 우리 중생의 두려움을 없게 하는 보시(布施)의 상징입니다.

 

이 손은 항마인(降魔印)입니다. 석굴암(石窟庵) 부처님이나, 석가모니(釋迦牟尼)께서 보리수하(菩提樹下)에서 성도(成道)하실 때는 성도인(成道印)이라, 손을 이렇게 해서 합니다. 이것은 마구니를 항복(降伏)시키는 상징입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 모양하나하나가 상징적인 깊은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까 가부좌하는 좌선 모습으로 해서 법계정인(法界定印)이라, 법계는 우주를 말하는 것인데, 우주를 관조(觀照)하는 상징적인 것이 이것입니다.

따라서 우주(宇宙)를 관조(觀照)하는데 있어서 가장 알맞은 모습이 이 모습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음양이 잘 조화가 되고, 또 좌선할 때에 제일 빠르게 우리 불성(佛性)을 계발(啓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앉도록 하고, 그 다음에는 허리를 쭉 펴야합니다. 너무 펴면 또 긴장이 되어서 안 되는 것이니까. 너무 펴지 말고, 어깨의 힘을 풀고, 가만히 무리 없게 허리를 펴야 합니다. 요는 우리 호흡이 조금도 무리 없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너무 긴장하면 호흡이 무리 없이 안 됩니다. 따라서 무리 없이 하기 위하여 허리를 너무 펴도 못쓰고, 앞으로 너무 숙여도 못씁니다. 허나 약간 앞으로 숙일 정도로 허리를 편단 말입니다. 그래야 만이 상하(上下) 호흡(呼吸)이 잘 상통(相通)합니다.

 

그리고 우리 목은 백회(百會) 정수리로 해서 하늘을 찌를 만치 쭉 세웁니다. 지금 아까 좌선하는 분들을 보니까, 고개를 숙이고 꾸벅 꾸벅 조시는 분도 많이 계십니다만 실은 아까 시간이 가장 졸리기가 쉬운 때입니다. 공양(供養)을 하신 후이고, 배는 좀 부르고 말입니다. 그렇더라도 고개는 쭉 펴야 합니다. 고개를 쭉 펴서 반드시 보고 해야 만이 혼침이 덜합니다.

이렇게 숙이고 하면 아무리 배길려고 해도 못 버티고 꾸벅 꾸벅하기가 쉽습니다. 대개 혼침 많으신 분을 보면 아래로 숙이는 버릇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고개를 아래로 숙이는 버릇은 안 붙여야 합니다. 그래야 혼침(惛沈)이 덜 온단 말입니다.

<2대원수 혼침(惛沈)과 도거(掉擧)>

 

흐리멍덩하게 혼침하는, 우리 좌선의 원수가 무엇인가 하면, 2대 원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분별시비하고, 또 하나는 꾸벅 꾸벅하는 혼침입니다. 이것을 조복(調伏)해야만 우리는 우리 자성(自性), 본래 불성(佛性) 한데로 간다 말입니다.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못가는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꾸벅 꾸벅하는 졸음과 분별시비 하면서 갔다 왔다하는 생각을 우리가 없애야 한다 말입니다. 눈 모습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눈은 너무 많이 뜨면 시계가 넓어서 많은 것이 보여서 분별이 오기 쉽습니다. 너무 뜨지도 말고, 절에 가서 부처님 불상을 보면 실눈으로 해서 감은 듯 뜨는 듯 하게 봅니다.

 

불교용어로 하면 반폐반개(半閉半開)라 합니다. 반은 감은 듯 반은 뜬 듯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고,

 

입은 어떻게 할 것인가? 어금니는 딱 다물고서 입은 다물어야 합니다. 어금니를 다무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초보일 때는 선율(禪律), 선의 리듬이 아직 오르지 않을 때는 몰라도, 선이 상당히 오를 때는 전류(電流)가 몸에 쩌르르 흐릅니다.

 

우리가 보통 막 시작할 때는 오염이 깊어 놔서 전류를 미쳐 못 느낍니다만 깊어지면 전율(戰慄)을 느낍니다. 그때 그것이 지나치면 몸이 떨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때는 어금니를 안 다물면 자칫하면 이가 틀어지기도 하고 입이 틀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좌선법(坐禪法)을 잘 몰라서 병신(病身)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대비해서 우리가 어금니를 딱 무는 것입니다. 몸이 떨린다 해도 동요가 없게 말입니다. 그리고 혓바닥은 윗잇몸에 딱 붙입니다. 그래야 마음도 긴장이 되고, 또는 침도 함부로 왔다 갔다 하지 않습니다. 입은 다물어서 어금니를 딱 물고 또 우리 혀는 혀끝을 입천장에 붙입니다.

 

 

이렇게 해서 자세를 잡는데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호흡(呼吸)문제입니다. 앞서 지난시간에 말씀한 이것은 조심법(調心法)으로 우리 마음 자세를 영원(永遠)의 이미지, 영원의 영상을 지녀야 한다고 주로 말했는데, 참선 이것은 구별해 보면 3단계가 있습니다. 몸을 다스리는 조신법(調身法)이라, 우리 몸을 조화시키는 조신법이란 말입니다. 고르 조(調)자, 몸신 신(身)자, 법 법(法)자, 방금 제가 말한 것은 주로 우리 몸을 다스리는 법입니다.

 

<조식법(調息法)>

 

그 다음 문제는 조식법(調息法)이라, 숨쉴 식(息)자 말입니다. 우리 호흡 조절 문제란 말입니다. 호흡 문제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부처님 초기 경전을 보면 수행자(修行者)의 2대 행법으로 부정관(不淨觀)과 호흡관(呼吸觀). 이렇게 2 가지가 있습니다. 부처님 근본 불교에서 여러 가지 행법이 많이 있습니다만 수행자의 2대 행법은 부정관과 호흡법이란 말씀입니다.

 

호흡관(呼吸觀)은 수식관(數息觀)과 같은 뜻인데, 부정관(不淨觀)은 아니 불(不)자. 맑은 정(淨)자, 자기 몸이 더럽다고 하는, 자기 몸이 좋지 않다고 느끼는, 그러한 행법(行法)이 바로 부정관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내 몸이 중요하다는 것에서 부터 번뇌(煩惱)가 나옵니다. ‘나’라는 생각, ‘나’라는 아상(我相)은 내가 중요하다 그 마음이나 똑 같습니다.

 

<부정관(不淨觀)>

 

그러나 내 몸은 좋은 것이 별로 아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부모님과 만나기전에 과거 무명(無明)의 업(業)입니다. 부모와 만나기 전은 하나의 혈육(血肉)이라 그때는 무명의 번뇌 뭉치입니다. 번뇌 뭉치가 파장(波長)이 맞아서 어쩌다 부모와 만났다 말입니다.

 

중음계(中陰界)에서 헤매는 하나의 무명심(無明心)이 부모의 연(緣)을 만나서 이 세상에 왔습니다. 그래서 어머니 배속에서는 참말로 그 몸속이 얼마나 더러운 것 입니까? 무명의 뭉치가 파장이 맞아서 어머니 배속에 들어가서 10개월 동안 더러운 곳에서 산다 말입니다.

 

우리 몸을 한번 해부(解剖)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똥. 오줌, 침, 또는 고름, 피, 얼마나 더러운 것입니까? 다만 그게 껍질로 입혔으니까 예쁘다 밉다 합니다. 냉정히 본다고 할 것 같으면 사람 몸이라고 하는 것은 부정(不淨)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결국 모두가 더러운 것뿐입니다.

 

 

단 몇 칠만 목욕 안 해 보십시오. 냄새가 얼마나 풍기는가. 따라서 부처님법문은 자칫하면 염세관(厭世觀)도 같지만, 그렇다고 염세관은 아닙니다. 아무튼 사람 몸을 정직하게 우리가 본다면 사실은 무척 더러운 것입니다. 물론 과거세(過去世)의 우리 업식(業識), 업 덩어리, 그 근본은 똑같이 불성(佛性)이겠지요. 가장 근본은 불성 일망정, 그런 불성이 차근차근 헤매는 가운데서 그때는 업(業)을 지었다는 말입니다. 그런 업이 부모 연(緣)을 만나서 태어난다는 말입니다.

 

어머니 배속이 더럽고, 나서도 피. 고름. 오줌. 똥. 또는 모두가 해부해 놓고 보면 더러운 것뿐입니다. 이런 것이 모여서 사람 몸이 됐습니다. 좋다고 뽐낼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것을 냉정하게 사실 그대로 보는 것이 부정관(不淨觀)입니다. 중생(衆生)의 죄악(罪惡)은 보통은 다 내 몸이 중요하다. 내 것이 제일이다. 이 몸이 아까운데서 보통 죄악이 싹터 옵니다. 따라서 우선 그것을 부정(不正)하기 위해서 부정관(不淨觀)을 합니다.

<호흡관(呼吸觀)>

호흡(呼吸)과 우리 마음은 상응(相應)합니다. 마음이 거칠면 호흡도 거칠고, 호흡이 고요하면 마음도 고요합니다. 본래 주인(主人)은 마음이지만은 호흡은 거기에 같이 상응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마음 다스리기는 어렵지만 호흡은 약간 해보면 되는 것 인지라, 마음 다스리기 어려운 분들은 호흡으로 해서 마음을 다스려갑니다. 호흡을 고요하게고요하게 다스리는 게 조식법입니다.

호흡법만 가지고서 하나의 경전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호흡법을 중요시 합니다. 혜명경(慧命經)이라는 경전을 보면 혜명경이 아주 복잡한데 호흡법만 주로 말씀이 있습니다. 또는 우리 스님들 가운데서 호흡법만해서 불교의 정통이 여기가 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그 정도로 호흡법은 중요한 것입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 마음 다스리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허나 우리 호흡은 약간만 하면 할 수가 있으니까 그것으로 해서 간단 말입니다.

<외도(外道)와 정도(正道)>

 

따라서 역시 주인은 우리 마음입니다. 외도(外道)와 정도(正道)의 차이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외도는 삿된 견해를 갖습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이 주가 아니라 모양을 주로 합니다. 외도는 항상 마음을 주로 않고서 바로 보면 일체는 마음이 근원인데, 마음이 주인인데, 외도는 마음을 주로 않고서 모양을 주로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불도(佛道)는 마음을 주로 합니다.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단좌정심(端坐淨心:身端攝心)하면 기식조화(氣息調和)라. 단정히 앉아서 바른 마음 하면 자연적으로 우리 호흡은 조화된다는 말입니다. 바로 앉고서 마음 바르게 하면 절로 호흡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잘 안되니까 쉽게 하기위해 호흡을 가미하면 좋겠지요. 허나 외도 모양으로 그냥 마음은 저만치 하고서 호흡만 주로 하려하면 그때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현대는 복잡하고 병고도 심하고 또는 여러 가지 부자연스러운 일들이 많아서 이런 때는 호흡을 가미하면 좋습니다.

어찌 그런고 하면 우리 생리(生理)가 보통은 조화스럽게 못돼 있고, 우리 생리가 굉장히 어긋나기도 하고 말입니다. 더러는 이상생리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때는 우리 생리를 바로 잡음으로 해서 우리 마음도 따라서 병행해서 바로 잡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현대와 같은 이런 때는 호흡법의 훈련이 상당히 필요한 것입니다.

 

가사 우리가 어떤 사람의 음성을 들어보면 음성이 가슴 위에서 짹짹 나오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은 아랫배에 가서 힘이 없습니다. 아래하체에 힘이 없으면 오랫동안 앉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또 공부를 해도 근기가 없어서 오랫동안 배겨내지를 못합니다.

 

<수승화강(水昇火降)>

 

이런 분도 오랫동안 좌선(坐禪)하고 바른 마음을 먹으면 아랫배에 힘이 가겠지만은 이런 힘을 보다 더 가속도(加速度)로 빨리 가게하기 위해서는 호흡법을 가미(加味)합니다. 그러면 굉장히 좋은 것입니다. 역시 우리는 우리의 혈액순환(血液循環)이 완전히 조화가 되어야 하는데, 조화가 되기 위해서는 아래에 힘이 충만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수승화강(水昇火降)’이라, 우리 몸에 있는 서늘한 기운은 위로 올라가고, 뜨거운 기운은 아래로 내려가야 합니다. 아무리 좌선을 많이 했다하더라도 열기가 올라가서 눈이 뻘겋거나, 이런 데가 아파서 상기(上氣)가 된 분들은 참선을 잘못한 분입니다. 착 들어앉으면 가슴도 시원하고 눈도 머리도 시원스러워야 합니다.

 

그때는 꾸벅꾸벅한 혼침도 올레야 올수가 없고, 또한 동시에 분별 시비도, 마음이 상쾌하지 않으니까 분별 시비가 나오는 것입니다. 마음이 개운해 보십시오. 그때는 그것이 재미있어 분별 시비가 안 나오는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 마음이, 우리 몸이 수기(水氣)가 올라가서 개운하고, 화기(火氣)가 내려가서 아래에 힘이 딱 차고, 이러면 그런 쾌적한 기분 때문에, 그런 하나의 경안(輕安)이라,

 

<경안(輕安)과 희락(喜樂)이 와야 바른 참선>

 

우리 공부 하는 분들은 외워 두십시오. 자기 몸과 마음도 가뿐한 것이 경안이란 말입니다. 가벼울 경(輕)자. 편안할 안(安)자, 경안이 되어야 공부를 좀 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몸도 마음도 그 때는 가뿐하다는 말씀입니다. 자기 몸도 마음도 이젠 부담이 없다는 말입니다. 경안이라, 공부를 바로하면 경안이 분명히 옵니다. 경안이 안 오면 그때는 어딘가는 공부를 잘못한 것입니다.

 

마치 자기 몸이 이렇게 한 터럭 위에 서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자기 몸이 아무런 부담이 없다는 것입니다. 경안 다음에는 ‘희락(喜樂)’이라, 경안이 온 다음은 영원의 기쁨이 오는 것입니다.

아무튼 그 호흡법(呼吸法)을 꼭 해야 하는 것인데, 호흡법 하는 것은 상하(上下)의 조화(調和), 음양(陰陽)의 조화(調和), 자기 호흡에 대해서 아무런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 말입니다. 그래야만 그때는 몸도 개운하고, 마음도 개운하고 또한 동시에 공부가 진전되어 간단 말입니다.

불경(佛經)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인후개통(咽喉開通) 획감로미(獲甘露味)’라. 목구멍이 툭 틔어서, 획감로미(獲甘露味)라, 그때는 감로(甘露)의 맛을 맛본다는 뜻입니다. 목이 툭 튀어야 합니다. 그때는 자기 호흡이 전신(全身)을 뱅뱅 돌아서 아무 무리가 없어야 합니다. 그런 후에 드디어는 자기 호흡을 자기가 못 느껴야 합니다. 자기 호흡을 자기가 못 느끼는 정도가 되어야 자기가 자기 몸에 대해서 부담이 없단 말입니다.

 

어떤 경우도 내 몸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자부심(自負心)이 생깁니다. 사실은 그것이 어렵겠습니다만 아무튼 자부심이 발동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 마음 자세, 마음 자세로서 화두(話頭)나 염불(念佛)이나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그렇게 하나의 문제를 들지만은 그와 동시에 호흡법도 가미하면 좋습니다.

 

<심장세균(深長細均)>

 

가미하는 방법은 어떻게 하는가?

이것은 여러 가지 기술이 필요합니다만 우선 간단하고 쉬운 방법은 호흡을 깊게 숨을 쉬고, 또는 길게 쉬고, 또는 가늘고 고르게, 그것만 주의를 하면 그때는 절로 호흡이 잘 되어 갑니다. 한문투로는 ‘심장세균(深長細均)’이란 말입니다. 깊을 심(深)자 호흡은 깊게, 길 장(長)자 호흡을 길게 말입니다. 가늘 세(細)자 호흡을 가늘게, 고를 균(均)자 호흡을 고르게, 이와 같이 깊고, 길고, 가늘고, 고르게 호흡을 하면 절로 아랫배에 힘이 찹니다.

 

이렇게 하는 데 있어서는, 화두를 드는 분들은 화두하는, 의심하는 그것과 호흡을 맞추면 되겠지요. 염불하면 염불하는 그 음조(音調)와 호흡을 맞추면 되겠죠. 억지로 맞추려 할 때 거북하면 그때는 안 맞추면 되고 말입니다. 아무튼 공부를 오랫동안 해보면 자기한테 맞는 요령이 딱 생깁니다.

 

어느 분들은 우선 말로만 다하려고 합니다만 그것은 안 됩니다. 갑은 갑대로 박가는 박가대로 오랫동안 공부해보면 자기한테 맞는 방법이 생겨납니다. 자기한테 맞는 방법을 자기가 공부해서 자기 스스로 얻어야 합니다. 남들은 그 사람한데 맞는 법을 다 말을 못합니다. 우리는 그런 의미에서 아까 서두에 말한 것과 같이 지관타좌(只管打坐), 오로지 앉아라. 그러면 심신탈락(心身脫落)한다 말입니다. 몸과 마음의 오염(汚染)이 딱 빠져서 참다운 자성(自性) 기운이 차근차근 빛나옵니다.

 

좌선하는 이상적(理想的)인 모양은 ‘정소슬로(頂巢膝蘆)’라, 이마 정(頂)자, 집 소(巢)자, 무릎 슬(膝)자, 갈대 로(蘆)자, 이마 위의 새집이 정소(頂巢), 아래 땅에서 솟아올라 무릎을 뚫어 오르는 갈대, 이것이 슬로(膝蘆)입니다. 숲속에서 공부 할 때, 좌선 할 때, 앉는 그 모습이 하도 고요해서 움직이지 않으니까 까치가 잘못 알고 머리에다 집을 짓습니다. 그런 정도로 오랫동안 참고 고요하게 앉아야 하고, 또는 아래서 솟아오르는 갈대가 자기 허벅지를 뚫더라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럴 정도로 좌선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좌선의 만상이라, 이것이 이상형(理想型)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과거에 공부할 때는 그와 같이 했다는 것입니다. 정소슬로(頂巢膝蘆)라, 새가 머리에 집을 짓고, 갈대가 솟아 올라와 무릎을 뚫는 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보통은 너무나 안이(安易)하게 도(道)를 구하려고 합니다. 요샛말로 안락의자(安樂椅子)에 앉아서 도를 구하려고 합니다. 이래서는 구(求)할 수가 없습니다.

 

<조식(調食)>

 

역시 우리는 오욕(五欲)을 어느 정도는 억제해야 하기 때문에 꼭 고행(苦行)이 필요합니다. 음식 함부로 먹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가령 참선(參禪)할 때 고기를 많이 먹어보십시오. 느끼한 언짢은 기분 때문에 좀처럼 호흡도 바로 안 되고 마음도 맑아지지 않습니다. 지방분(脂肪分)이 많은 사람들은 참선을 잘 못합니다.

 

우리는 좌선할 때에는 꼭 음식을 주의해서 너무 많이 먹지 말고, 너무 배고프지 말고, 그러나 될 수 있으면 약간 배고플 정도로 먹어야만이 우리 호흡이 조화가 잘 되서 수기(水氣)가 올라오고 화기(火氣)가 내려갑니다. 많이 먹어보십시오. 아래 기운(氣運)이 위로 못가고, 위 기운이 아래로 못갑니다. 그러면 숨만 헐떡거립니다. 좌선할 때 음식을 함부로 먹으면 그때는 원수(怨讐)입니다. 따라서 성불(成佛)의 가장 지름길이 참선(參禪)이고, 참선하는 제일 좋은 모습이 좌선(坐禪)인데, 좌선할 때는 그와 같이 여러 가지 금지(禁止) 사항이 붙습니다. 음식을 바로 먹어야 쓰고,

 

<오행(五行)>

 

또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중국(中國)의 천태지의(天台智顗)선사 그분이 공부하는 25방편을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맨 첨에 오행(五行)이라, 하나의 지계청정(持戒淸淨)이라. 계행이 안 바르면 좌선을 바로 깊이 못 들어갑니다. 밖에 나가서 함부로 싸움하고 좌선이 되겠습니까? 음탕한 짓, 욕설, 술, 그런 행동을 해서는 좌선에 못 들어갑니다. 자기 마음에 꺼림이 없어야만 좌선에 들어갑니다. 따라서 먼저 계행이 앞서야 합니다.

 

지계청정(持戒淸淨)이라 이것이 처음이고, 그 다음은 한거정처(閑居靜處)라 고요한 곳에 앉아야 합니다. 물론 시중(市中)가서도 해야 하고 조용한 곳을 골라가도 해야 하지만은, 기왕이면 고요한 곳에서 해야 능률이 잘 오릅니다. 한거정처(閑居靜處)는 한가할 한(閑)자, 살 거(居)자, 고요할 정(靜)자, 곳 처(處)자입니다.

 

그 다음은 의식구족(衣食具足)이라. 우리가 너무나 옷이나 음식이 없어서도 안 되겠지요. 의식이 자기 먹을 만치 있어야 합니다. 마치 우리 하나의 선방(禪房)을 꾸민다고 하더라도 선방에서 불안스러우면 참선을 하겠습니까? 그와 같이 최저한도로 의식을 갖추어야 합니다. 의식구족이라.

 

그 다음은 외식제연(外息諸緣:息諸緣務)이라. 밖 외(外)자, 쉴 식(息)자, 뭇 제(諸)자. 연 연(緣)자, 밖으로 모든 인연(因緣)을 피한다는 말입니다. 친구를 사귀는 것도 좋고 여러 가지 팔방미인(八方美人)도 좋습니다만 이렇게 저렇게 복잡한 연(緣)으로는 참선은 못합니다. 역시 외로워야 합니다. [니체] 같은 사람도 역시 ‘외로운 가운데 그대의 길을 가라’는 말을 했듯이, 위대한 사람은 보통 고독(孤獨)을 좋아합니다. 고독해야 만이 우리 마음이 깊이 심화(深化)됩니다.

 

특히 참선은 역시 고독해야 만이 됩니다. 사람 좋아해 보십시오. 일 좋아해 보십시오. 외식제연(外息諸緣)이라. 모든 인연(因緣)을 피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가정적(家庭的)인 여러 의무(義務)를 망각(忘却)하는 그런 의미는 아니지만, 될 수 있는 대로 우리가 번다한 연(緣)을 피해야 만이 좌선에 들어가집니다.

그 다음에는 근선지식(近善知識)이라. 가까울 근(近)자, 선지식은 착한 스승입니다. 착한 스승 착한 벗이 선지식입니다. 역시 자기 길을 인도(引導)하고 우리 공부를 이렇게 점검(點檢)하고 권유(勸諭)하고 격려(激勵)하는 벗이 필요합니다. 선지식이 항시 근처(近處)에 있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오행(五行)이라, 지계청정(持戒淸淨), 한거정처(閑居靜處), 의식구족(衣食具足), 외식제연(外息諸緣), 근선지식(近善知識)이라, 이와 같이 해야만 참선의 바른 길로 빨리 갈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좌선을 해서 꼭 이번에 설사 우리가 게으름을 피우고 우리 마음이 분별시비라든가 여러 가지 혼침 때문에 견성오도(見性悟道)까지는 미처 못 간다 하더라도, 아까 제가 말씀드린 경안(輕安)이라, 자기 몸도 마음도 부담이 없는 아주 시원스런, 마치 하늘로 올라가 버릴 것 같은 쾌적(快適)한 그런 기분까지는 꼭 얻으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말씀 마칩니다.

나무아미타불!

 

* 19850801-태안사 하계용맹정진중 두 번째 법문

<설법 무주당 청화(淸華)대종사>

* 19850801-카셋 녹음 태안사 방송실 스님

* 카셋 테이프 보급: 정훈스님

* 펜글씨 녹취 취합 : 태호스님

* 20160211- 워드작업: 금강화, 금란

* 20160216- 워드정리: 본정(本淨)

* 20161016- 재교정: 이지현 외

<큰스님 구어체 그대로 정리했습니다.>

 

 

* 外於一切境界上 念佛起爲坐 內見本性 不亂爲禪

외어일체경계상 염불기위좌 내견본성 불란위선

何名爲禪定 外離相曰禪 內不亂曰定 “壇經” *

하명위선정 외리상왈선 내불란왈정 단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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