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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마음의 고향

28집(2) 박피사경

    2. 박피사경(剝皮寫經)

2000년05월11일 성륜사 부처님 오신 날 봉축법회 *

언제 어디에나 일미평등(一味平等)한 진여불성(眞如佛性)은 충만해 있습니다.

      

녹음방초(綠陰芳草) 이 좋은 계절에 부처님 탄신(誕辰)의 축제가 있는 것을 여러 불자님과 더불어 봉축(奉祝)을 드립니다.

부처님 오신 날은 위없는 최상의 진리(眞理)의 날 입니다. 또한 동시에 부처님 오신 날은 영생해탈(永生解脫)의....... 우리 인간들은 누구나가 다 번뇌(煩惱)의 굴레 속에 얽매여있습니다. 이러한 굴레를 벗어나서 영생(永生)으로 영원히 해탈(解脫)할 수 있는 영원히 참다운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그러한 해탈의 날입니다.

또한 동시에 부처님 오신 날은 우리 중생(衆生)이 영원히 죽지 않는 영생(永生)의 날이기도 합니다.

왜 부처님 가르침이 참다운 위없는 진리(眞理)일 것인가? 이것은 대체로 우리가 알고는 있습니다만 그 참뜻은 잘 모르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만 하더라도 참다운 진리를 믿지 않는 외도 가르침이 96종외도(九十六種外道)라. 아흔여섯 가지 정도의 여러 가지 학설 또 주의주장 이런 것을 내세우는 잘못된 견해가 있었습니다.

오늘날은 96종이 아니라 몇 백종, 몇 천종의 주의 주장과 여러 가지 갈래의 사상계통이 있겠지요.

우리 인간은 어느 누구나가 다 정말로 영원히 행복(幸福)하고 싶고 또는 죽지도 않고 싶고 다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眞理)를 모르는 한에는 할 수 없이 인과(因果)의 굴레에 얽매여서 죽고 살고 또는 죽음과 동시에 삼계육도(三界六度)라 하는  한계 상황에서 부질없이 헤매고 마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헌데 부처님 가르침은 우리가 윤회(輪廻)한다고 하는, 업(業)을 짓고 조금 잘 지으면 좋은데 태어나고 또는 잘못 지으면 엉뚱한  악도(惡道)에가 태어나는 뱅뱅 도는 개미 쳇바퀴 모양으로 뱅뱅 도는 인생 고해(人生苦海)를 떠나지 못하는 것이 우리 중생(衆生)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은 그런 고해(苦海)를 떠나서 정말로 죽지 않는, 죽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잘 감이 안 잡히는 분들이 계시겠지만 이것은 우리 육체적(肉體的)인 죽음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 생명존재(生命存在) 생명자체가 죽음이 없다는 그런 뜻이 되는 것입니다.

왜 생명(生命)이 죽지 않는고 하면은 사실은 우리 중생(衆生)들은 상대유한적(相對有限的)인 세계(世界)밖에는 보지를 못 합니다. 그러나 진리(眞理)는 상대유한적(相對有限的)인 세계뿐만 아니라 이른바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세계 우리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그런 세계 까지도 부처님 가르침은 포괄해 있습니다.

따라서 부처님 가르침이 나오기 전에는 우리 인간들이 과연 어디로 갈 것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갈 것인가? 우리 생명존재(生命存在) 자체는 또 뭣일 것인가? 또는 우리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은 어떠한 것인가? 다른 동물과 또는 식물과 우리 인간의 관계는 어떠한 것인가? 이런 것을 확실히 몰랐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으로 해서 비로소 이러한 모든 존재, 모든 상황에 대해서 확실히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행복(幸福)은 뭣인가 얽매여 있으면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런 구속도 없고 어느 누구한테나 또는 어느 무엇에나 얽매임이 없어야 참다운 자유(自由)가 될 것인데 그런 자유를 어디서 얻을 것인가. 이것도 역시 참다운 자유와 행복이라는 것은 진리(眞理)를 떠나서는 얻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위없는 진리가 있으면 그때는 필연적으로 참다운 행복은 거기에 따라오게 마련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우리는 이러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금 받들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스스로도 어떻게 하면은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 것인가. 어떻게 하면은 부처님 가르침이 우리한테 제시한 바와 같이 참다운 영생(永生)의 길, 참다운 해탈(解脫)의 길, 참다운 자유(自由)의 길을 얻을 것인가 하는 것을 오늘 부처님 오신 날을 기해서 우리는 재삼 자기 성찰(省察)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는 소승(小乘)과 대승(大乘)이 있습니다. 소승(小乘) 이것은 차원 낮은 사람들을 위해서 인생(人生)이나 우주(宇宙)의 근원적인 도리를 아직은 탐구도 못하고 관심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가르친 가르침이 소승적인 가르침인 것이고 대승적인 가르침은 우리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인간은 대체로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갈 것인가? 이른바 생사관(生死觀) 문제라든가 또는 모든 존재(存在)의 근원적인 근본바탕 근본자리가 무엇인가? 이런 문제를 밝히는 가르침은 대승적인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 사회(社會)는 소승적인 가르침으로 해서는 우리의 모든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꼭 대승적인 가르침을 가져야 오늘날 우리가 봉착한 우리를 고해중생(苦海衆生)으로 몰아넣고 있는 그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은 대승적(大乘的)인 가르침의 가장 골수(骨髓)가 무엇인가? 대승적인 가르침은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조금 차원(次元)높은 그런 가르침이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을 깊이 골똘히 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대승적(大乘的)인 가르침은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 우리 인간이 대체로 이 존재(存在)가 무엇인가? 내 생명(生命)은 대체로 본바탕이 무엇이며 죽은 다음에는 내가 어떻게 될 것인가? 이런 것에 대한 가르침이 대승적(大乘的)인 가르침입니다.

사실 우리가 생각할 때에 금생(今生)의 생활도 그래저래 바쁘고 또는 각박한데 어떻게 내생(來生)문제까지 생각할 것인가. 그러나 내생(來生)문제 이것은 우리가 받아 놓고 있는 긴급적인 문제입니다.

우리 생명(生命)이 과연 얼마나 살 것인가? 정말로 사람의 생명(生命)이라 하는 것은 바람 앞에 등불이나 똑같습니다. 오늘 꺼질지 내일 꺼질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죽은 다음에는 어디로 갈지 망망한 길입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이 다른 동물에 비해서 가장 중요한 특징은 생각할 수 있는 동물이라는 것인데, 정말로 파스칼 말마따나 우리는 ‘생각하는 갈대’입니다. 이래저래 생각을 많이 합니다. 생각을 많이 한다는 것은 한 편은 좋은데 한 편은 우리 마음고생을 무던히 가져다줍니다.

따라서 그런 저런 복잡한 생각, 복잡한 생각 하다 보면은 한도 끝도 없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죽도록 까지 해도 끝나지가 않습니다. 다행히 이런 때 부처님께서 나오셔서 우리 생각을 다 정리를 하셨단 말입니다.

사람이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것은 데카르트의 말마따나 생각함으로 해서 비로소 내가 있다고 그렇게 확인이 되는 것입니다. 정말 생각하는 능력이 없다고 생각할 때 자기는 무엇인가, 또 자기는 어디서 왔을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생각함으로 해서 사유(思惟)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인간 존재를 스스로 확인할 수가 있는 것인데 즉 그렇다 하더라도 다만 생각만 하고 있어서는 우리 인생의 복잡한 문제, 가지가지의 고뇌(苦惱)나 그런 문제를 해결할 아무런 가망이 없습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님을 위시해서 모든 성자(聖者)의 가르침은 우리 인간(人間)의 여러 가지 고뇌(苦惱) 인생의 생활고(生活苦)도 중요하지만은 또는 인간의 사상고(思想苦)문제 우리 인간의 가지가지의 마음의 고생을 다 풀어 주는 것이 석가모니(釋迦牟尼)를 위시한 무수한 철인(哲人)이나 또는 성인(聖人)들 가르침입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다른 성인(聖人)들 가르침도 훌륭하지만은 그런 가르침은 소승적(小乘的)인 분야(分野)에서는 상당히 효험 있는 가르침이나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근원적(根源的)인 가르침 인간 존재(人間存在)가 대체로 무엇인가? 내 생명(生命)의 근본(根本)뿌리는 무엇인가? 이런 문제는 확실히 시원스러운 해답이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대승적(大乘的)인 가르침 가운데 가장 중요한 문제로 하면은 그 모든 인간 잘나고 못나고 여러 가지 종류의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근원적인 문제를 풀이한 가르침인데 그것은 우리 인간이 알고 모르고 상관이 없이 우주(宇宙)에는 항시 진리(眞理)가 충만(充滿)해 있단 말입니다.

훌륭한 학자라 하더라도 진리(眞理)를 부정한 분도 있습니다. 더러 물질적(物質的)인 우리 경험적인 그런 것을 치중한 사람들은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내내야 물질의 하나가 아닌가. 물질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죽어지면 다시 물질은 다 흩어지고 마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기 때문에 인간의 장래도 허망(虛妄)한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한 사람도 있고 더러는 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님이 그때 태어나실 당시 인도(印度)상황 모양으로 모든 사람들은 다 바라문신이 창조(創造)한 것이다. 사람도 그렇고 다른 것도 모두가 다 바라문신이 창조했기 때문에 우리가 바라문신한테 제사(祭祀)를 모시고 지성(至誠)을 들이면 우리가 행복스럽지 않겠는가. 얼핏보면은 지금 기독교(基督敎)와 좀 흡사한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예수님 가르침도 훌륭한 가르침이기 때문에 우리가 비난조로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런 바라문교 하고 흡사한 점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릴 뿐입니다.


아무튼 그런저런 사상(思想)과 잘못된 생각이 많은 가운데서 부처님 생각은 정말로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참다운 자유(自由)를 우리한테 보장한 가르침이고 동시에 영원한 영생(永生)할 수 있는 가르침을 주셨단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우리 인간이 금생(今生)에 50년이나 또는 80년이나 한동안 자기 수(壽)대로 자기 정명대로 살면 그는 응당 죽지가 않는가. 물론 육체적인 인간은 죽습니다. 그리고 다른 가르침이 없을 때는 인간은 그밖에는 아니다.

인간은 한동안 살다가 죽어지면 그걸로 해서 나중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 이른바 불교적(佛敎的)인 술어로 말하면 단견(斷見)이란 말입니다. 끊을 단(斷)자, 볼 견(見)자 단견이라. 단견(斷見)이라는 생각이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사람이 태어나서 살다가 죽어지면 그만이다. 이러한 것이 이른바 단견(斷見)이란 말입니다.

그런가 하면은 그 반대로 사람이 죽는다 하더라도 내생(來生)가서는 금생(今生)에 자기가 금쪽같이 아끼던 이와 같은 몸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렇게 생각한단 말입니다. 이런 것은 이른바 상견(常見)이라. 항상 상(常)자, 볼 견(見)자 상견(常見)이란 말입니다.

우리 인간이 갖는 잘못된 생각 가운데서 죽어지면 그냥 아무것도 없이 허무하게 돼버린다. 이런 단견(斷見)과 또 죽어진다 하더라도 이와 같은 몸으로 해서 다시 태어나서 또 금생(今生)같이 그런 멋있는 생활도 할 수가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이른바 항상 상(常)자, 볼 견(見)자 상견(常見)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을 극복해야 한단 말입니다. 극복하기 위해서도 위없는 진리(眞理)가 아니고서는 극복이 안 되는 것입니다.

지금 현대 위대한 가르침도 있고 다른 종교(宗敎)도 많이 있지만은 이러한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을 정말로 명확히 극복할 수 있는 길, 명확히 이기는 길은 부처님 가르침 밖에는 없습니다.

다른 종교(宗敎)의 가르침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으나 확실하게 우리한테 가르침을 주신 것은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우리 인간생명(人間生命)이 본래로 죽음이 없다. 본래로 죽음이 없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할아버지도 돌아가시고 부모님도 나이 많으신 분들은 돌아가시고 형제간도 더러는 젊어서 죽기도 했는데 한번 죽은 다음에는 다시 오지도 않는데 왜 본래로 죽음이 없다고 할 것인가?


불교(佛敎)에서는 본래(本來)로라는 말을 대승불교(大乘佛敎)에서 굉장히 많이 씁니다.

우리가 닦아서 난행고행(難行苦行)해가지고서 오랫동안 닦은 연후에 죽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본래 생겨난 그것이 본래 죽음이 없단 말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자기가 보는 그런 견해(見解)만 진리(眞理)고 자기가 안 보이는 것은 진리(眞理)가 아니라고 부인(否認)을 합니다. 이것은 할 수가 없습니다.

성인(聖人)들이 아니면 아까 말씀드린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문제 눈에 안 보이는 세계 (世界)를 긍정을 못합니다. 성자(聖者)라는 것은 우리 중생(衆生)들이 안 보이는 것도 보인단 말입니다.

우리가 안 보이는 여러 가지 사물도 현미경(顯微鏡)을 쓰면 분명히 평소에는 우리가 없다고 보는 것도 있다고 보이듯이 성자(聖者)들은 과거(過去)나 현재(現在)나 미래(未來)나 이른바 삼세(三世)에 통달(通達)해서 이것저것을 다 보신단 말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불교에서 말씀한 천안통(天眼通)입니다.


천안통(天眼通)이라, 하늘 천(天)자, 눈 안(眼)자, 통할 통(通)자 말입니다. 천안통(天眼通)은 비단 부처님뿐 만이 아니라 참선(參禪)을 많이 해서 이른바 명상수행(瞑想修行)을 많이 해서 마음이 통달(通達)해지면 성자(聖者)가 아니더라도 볼 수가 있단 말입니다.

헌데 우리 중생(衆生)들은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 타고 나온 대로 타고 나왔다는 것은 우리가 과거전생(過去前生)에 업(業)을 지어서 업(業)대로 지금 사람 몸을 받았단 말입니다.

다행히 업(業)을 그래도 좋은 쪽으로 많이 지어서 사람이 된 것이지 만일 나쁜 쪽으로 지었다 그러면 개나 소나 돼지나 동물도 될 수가 있고 또는 귀신(鬼神)도 될 수가 있고 그런단 말입니다.

다행히 우리 인간은 불교적(佛敎的)인 의미에서는 과거전생(過去前生)에 다섯 가지 계율(戒律), 다섯 가지 계율(戒律)이란 것은 죽이지 않고, 훔치지 않고, 음란한 행동도 그렇게 많이 않고, 나쁜 음식도 먹지 않고 말입니다. 또는 거짓말이나 욕설이나 그러한 헛튼 말도 많이 하지 않고 이런 것을 완벽하게는 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래도 어느 정도는 했기 때문에 금생(今生)에 사람 몸을 받은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래도 과거전생(過去前生)에 무던히 잘 살았단 말입니다. 그러나 금생(今生)에 사람 몸 받았지만은 아주 사람 세상이 혼란스럽단 말입니다. 여러 가지 학문이라든가 또는 사상(思想)주의라든가 이런 것 때문에 우리 마음이 진리(眞理)를 모르 면은 자칫 하면은 그런 것에 휩싸이고 맙니다.

다행히 성자(聖者)의 가르침 때문에 우리들은 휩싸이지 않고서 바로 살게 될 것을 희망(希望)하고 있는 것인데 그러는 가운데도 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대승적(大乘的)인 가르침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대승적(大乘的)인 가르침은 이것은 모두를 다 일체존재(一切存在)를 하나의 진리(眞理)로 봅니다.

하나의 진리를 우리가 인정하지 않으면 사실은 부처님 가르침을 믿는 귀중한 보배를 우리가 찾지 못 하고 그대로  넘기는 꼴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모두를 하나의 생명(生命)으로 보는 것은 이와 같이 몇 백 명의 우리 불자님들이 계신다 하더라도 하나의 생명(生命)이기 때문에 자기 옆에 사람이나 자기나 본래로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본래로 하나로 보기 때문에 본래로 둘이 아닙니다.

이런 것은 정말로 우리가 맑은 마음으로 해서 바로 믿어야 긍정이 됩니다. 나중에 증명(證明)하기 위해서는 증명을 위해서는 우리 불자님들이 염불(念佛)도 많이 하고 또는 참선(參禪)도 많이 해가지고서 우리 마음이 맑아져서 모든 것의 근본 바탕을 볼 때는 확실히 증명이 되겠지만 그렇게 미처 못 간다 하더라도 우리가 어느 정도만 공부해도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모든 존재가 근본적으로 하나란 말입니다.

본래로 하나란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란 뜻입니다. 또한 동시에 천지우주(天地宇宙)가 모두가 다 근본 뿌리가 똑같단 말입니다. 근본 뿌리가 똑같기 때문에 이 현상적인 것도 모두가 다 하나란 말입니다.

근본 뿌리도 똑같고 또는 현상도 별로 이것이 다름이 없고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의 대승적(大乘的)인 핵심은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일체존재(一切存在)가 근본적으로 하나의 생명(生命)이다. 이렇게 믿어져야 본인의 마음도 부질없는 생각으로 부터서 해방이 됩니다.

이것이 있고 저것이 있고 그 여러 가지로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만 우리가 생각할 때는 얼마나 복잡합니까. 미운 사람, 좋은 사람, 한도 끝도 없단 말입니다. 학문도 한도 끝도 없고 여러 가지 기계문명(機械文明)의 우리 생활 그런 용무도 한도 끝도 없단 말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됐든지 간에 현대과학(現代科學)에서 말하는 가사 우주(宇宙)란 것은 하나의 장 에너지다. 우주는 에너지로 다 귀일(歸一)된다.

이런 저런 그런 사상(思想)을 모두를 다 통틀어서 그런 것도 결국은 부처님 가르침으로 하면은 하나의 진리(眞理)로 다 귀일(歸一)이 된다.

물질(物質)이고 뭣이고 물질의 근본인 에너지란 것도 모두가 다 부처님 가르침으로 말하면 하나의 도리로 다 귀일(歸一)이 된다. 이렇게 알아야 그래야 대승적(大乘的)인 가르침이 됩니다.


불자님들 대체로 아시는 바와 같이 그 우주(宇宙)의 기(氣), 우주(宇宙)의 이른바 이기(理氣), 우주(宇宙)의 기(氣)인 다시 바꿔서 말하면 현대말로 하면은 우주(宇宙)에너지가 되겠지요. 우주(宇宙)에너지의 정체가 무엇인가? 이런 것을 현대과학(現代科學)으로서는 그렇게 지금 현대문명(現代文明)을 자랑하면서도 도저히 알 수가 없습니다.

왜 알 수가 없는고 하면은 사람의 안목(眼目)이라 하는 것은 우리 보통 범부중생(凡夫衆生)의 지견(知見)이라 하는 것은 이것은 상대유한적(相對有限的)인 세계(世界)밖에는 모른단 말입니다.

이른바 시간성(時間性)이나 공간성(空間性)이나 그런 범주 내에 있는 것만 아는 것이지 시간을 벗어나고 또는 공간을 벗어나면 그때는 모릅니다. 어떠한 정밀한 실험기구를 가지고도 역시 시간성(時間性) 공간성(空間性)을 떠나 버린 것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에너지가 무엇인가. 지금 현대인들은 에너지를 무시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우리는 지금 에너지 때문에 살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에너지의 그 정체가 무엇인가? 이런 것이 그 정밀(精密)을 자랑하는 현대물리학(現代物理學)이 모른단 말입니다. 이런 것을 부처님 가르침 밖에는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확실히 들으시기 바랍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현대적인 문명을 자랑하면서 그 물질을 쪼개고 쪼개가지고서 종당에는 다 하나의 우주(宇宙)의 기(氣)인 에너지만 남는 것인데 그 에너지의 참다움은 무엇인가. 참다운 정체는 무엇인가. 이것을 모르는데 부처님 가르침만이 참다운 모양을 안단 말입니다. 이른바 본체(本體)를 안단 말입니다.

에너지의 정체가 불교(佛敎)로 하면은 이것은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부처의 성품이란 말입니다.

대승불교(大乘佛敎)의 핵심은 진여불성(眞如佛性)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불성(佛性)이란 뜻이 대승불교(大乘佛敎)의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따라서 대승불교(大乘佛敎)를 말한 사람들이 남한테 보시(布施)하고 또는 사회사업을 하고 그런 것도 대승불교(大乘佛敎)의 실천 적인 행동의 하나는 되나 가장 근원적인 문제인 모든 존재(存在)가 근원적으로 진여불성(眞如佛性)이다. 이걸 모르면 대승불교(大乘佛敎)를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우리가 알고 모르고 상관이 없이 모든 존재(存在) 내 생명(生命)이나 니 생명(生命)이나 물질이나 뭣이나 모든 것이 근본 바탕이 이것이 이른바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불성(佛性)이란 말입니다.

우리 인간이나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모두가 다 진여불성(眞如佛性)에서 와서 진여불성(眞如佛性)으로 돌아갑니다. 우리가 어디가 아프나 또는 우리 몸에 있는 폐 균이나 말입니다. 모두가 다 이 폐 균이나 암 균이나 그런 것은 이 인간들이 인간들 두뇌로 해서 잠시간 좀  부조화(不調和)스러운 하나의 그런 상태가 무슨 암 균이요 또는 폐 균이요  하는 것이지 그런 것도 역시 그런 부정적인 것도 역시 근원은 똑같이 진여불성(眞如佛性)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우리가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그때그때 인연 따라서 공부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는 것은 이것은 우리 사람 눈에는 보이지가 않습니다. 다만 우주(宇宙)의 본질(本質)로 해서 언제 어디에나 하나의 가장 작은 알갱이라 하는 이른바 광자(光子) 빛 광(光)자, 아들 자(子)자, 광량자(光量子)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주 (宇宙)의 아주 그 작은 것 보고 소립자(素粒子)라 하지 않습니까. 소립자라. 그 소립자(素粒子)가운데서 또 가장 작은 것이 이른바 빛 광(光)자, 아들 자(子) 자, 광량자(光量子), 광자 그럽니다.

헌데 그런 광자를 볼 수 있는 것은 이것은 현대물리학(現代物理學)에서 볼 수가 있는 것인데 그 광자가 대체로 뭣인가? 이러한 것은 현대물리학(現代物理學)은 모릅니다.

왜 모른고 하면은 벌써 광자를 벗어난 저쪽 세계는 그것은 순수(純粹)한 생명세계(生命世界)란 말입니다. 생명세계(生命世界)입니다. 즉 다시 말하면 아까도 말씀드린바와 같이 진여불성(眞如佛性)의 세계란 말입니다.

진여불성(眞如佛性)의 세계는 이것은 생명(生命)의 세계기 때문에 물질적(物質的)인 그런 측정으로 해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이른바 인간의 상대유한적(相對有限的)인 경험을 초월(超越)한 세계란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는 것은 이것은 우주만유(宇宙萬有)의 우리 생명(生命)의 근본 바탕인 동시에 우주(宇宙)의 모든 존재(存在)의 근원(根源)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공부가 깊이 되면 깊이 될 수록 우리는 진여불성(眞如佛性)하고 차근차근 가까워집니다. 공부를 않고서 우리 마음이 흐리멍덩한 사람들은 진여불성(眞如佛性)하고 거리가 멉니다.

따라서 우리가 금생(今生)에 나와서 그 보람 있는 것은 무엇인고 하면은 부처님 가르침 따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해서 우리가 차근차근 생명(生命)의 근본(根本)자리인 진여불성(眞如佛性)과 접근하는 길입니다.


아무리 학문적으로 뭘 많이 한다 하더라도 또는 명상(瞑想)생활로 해서 제법 깊은 명상(瞑想)을 좀 했다 하더라도 진여불성(眞如佛性)을 모르고 하는 것과 알고 하는 것과는 천지(天地),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느 길을 간다 하더라도 길의 순서라든가 그 목적지를 분명히 알고서 목적지에 대한 그리움과 동경과 우리가 추구(追求)하는 마음이 있어가지고 길을 간다고 생각할 때는 훨썩 발걸음이 가벼울 것이지요. 그러나 목표의식(目標意識)도 별로 없이 덮어놓고 길을 간다고 생각할 때는 아, 팍팍하고 또는 길도 더디고 나중에 가다가 또 말아버린단 말입니다.

그와 똑같이 우리 인간도 역시 대승불교(大乘佛敎)의 가르침 따라서 우리 현재는 미처 안 보인다 하더라도 우리 근본 생명이 진여불성(眞如佛性)이다. 이렇게 알고서 인생을 산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인생은 정말로 축복된 인생이 됩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우리가 하루 살면 산만치 진여불성(眞如佛性)하고 가까이 간단 말입니다.

진여불성(眞如佛性)은 이것은 원래 모양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건 생명존재(生命存在)기 때문에 모양이 없습니다. 모양이 없기 때문에 이름도 없습니다. 이름도 없는 것을 부처님께서 그 진리(眞理) 이름에  진여불성(眞如佛性)에 알맞은 이름을 부처님께서 우리한테 가르쳐 주셨단 말입니다.

그 이름이  이른바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입니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만 해도 좋고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만 해도 좋고 다 좋습니다. 아무튼 우리 중생(衆生)들은 그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 하는 생명(生命)의 근본(根本)자리, 생명(生命)의 실상(實相)자리, 그런 자리를 우리가 알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또는 이름도 있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다만 우리 중생(衆生)을 구제(救濟)하는 부처님의 원력(願力)과 자비심(慈悲心)으로 해서 그 이름을 지어서 우리한테 주셨단 말입니다.

그것이 이른바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나무를 빼고 그냥 아미타불(阿彌陀佛)만 해도  좋습니다. 세상이 하도 바쁘니까 참선(參禪)을 좋아한 사람들은 귀의(歸依)한다는 나무를 빼고서 아미타불(阿彌陀佛)! 아미타불(阿彌陀佛)! 그렇게 불러도 상관이 없습니다.

어떻든 간에 그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 하는 우리 생명(生命)의 고향(故鄕)자리 이름이 아미타불(阿彌陀佛)!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나무아미타불 한 번 외이면 그냥 그것이 아무런 이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한테  막대한 이익을 준단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어느 때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서 깊은 내용과 깊은 즐거움과 말입니다. 동시에 깊은 이익을 우리한테  줍니다.

성자(聖者)의 가르침은 그와 같이 꼭 우리한테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성자(聖者)의 가르침이 그냥 보통 우리가 마음만 좋고 좋은 복이 좀 오고 그런 정도가 아니란 말입니다. 정말로 깊은 뜻과 깊은 행복감과 말입니다. 또는 우리한테 막대한 막중한 그런 이익을 줍니다.

참다운 신앙(信仰)은 꼭 그래야 됩니다. 우리한테 기쁨과 또는 행복 (幸福)과 이익(利益)을 준단 말입니다.

그 반대로 진리(眞理)가 못되는 것은 우리한테 가시 같고 또는 우리 살이 곪아서 터지는 종기나 같고 말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인생의 근본생명(根本生命)자리가 바로 진여불성(眞如佛性)인데 진여불성(眞如佛性)의 대명사(代名詞)가 아미타불(阿彌陀佛),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란 말입니다.

아미타불(阿彌陀佛)! 한 번 외이면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 눈에 보일 때는 그때는 별로 흔적이 없겠지요. 무슨 어떠한 증상이 안보이지만은 우리가 한 번 외이면 외인만치 우리 생명(生命)의 빛은 더욱더 빛나는 것입니다.

사람도 위대한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우리 제한된 사람의 눈에는 그렇게 별로 변함이 없지만은 한 번 좋은 생각하면은 ‘남을 내가 도와야 되겠다. 남한테 뭘 베풀어야 되겠다.’ 한 번 좋은 생각하면은 좋은 생각 한만치는 우리 몸이 더욱더 빛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도 더욱더 맑아지고,

그런데 하물며 부처님 이름인 그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아미타불(阿彌陀佛),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외이면 아미타불(阿彌陀佛)은 바로 내 생명(生命)의 근본인 동시에 우주생명(宇宙生命)의 근본인지라 한 번 외이면 외인만치 그만치 우리 몸이나 우리 마음이나 광명(光明)으로 빛난단 말입니다.

지금 나쁜 나찰귀신(鬼神)이 우리한테 와서 병도 줄라하고 우리를 또 나쁜 길로 인도 할라고 한다 합시다. 그러는 경우도 속으로 자기가 그냥 소리 내서 하기가 곤란스러우면 속으로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이렇게 지성(至誠)으로 외인다고 생각할 때는 그 광명(光明)에 눌려서 그 광명(光明)에 질려서 나쁜 존재가 우리한테 침범을 못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행복(幸福)은 먼 데가 있지가 않습니다.  간단한 가장 쉬운데가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도 부처님 가르침, 부처님 가르침은 아까 제 말씀마따나 그냥 보통 가르침이 아니라 우리한테 행복을 주고 기쁨을 주고 우리한테 이익을 준단 말입니다.


오늘 부처님오신 날 우리 불자님들 이렇게 참 좋은 계절에 얼마나 행복스럽습니까. 우리가 많은 종교(宗敎)가 있고 이 다종교사회(多宗敎社會), 다종교 사회는 참 살기가 어려운 사회 아닙니까.

한 가정도 기독교인, 불교인 모다 한 번에 모여서 살면서 서로 갈등을 일으키고 그런 사례도 많단 말입니다. 자기는 불교(佛敎) 믿는데 자기며느리가 또 기독교(基督敎) 믿는 집안에서 와 가지고서 한사코 그 쪽만 믿을라고 하는 집안도 있을 것이고 말입니다.

또 현실적으로 아내와 남편도 역시 종교(宗敎)가 다른 분도 많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나라 대통령(大統領)되신 분도 역시 아주 훌륭한 분인데 그 분은 가톨릭을 믿고 있고 아내는 또 개신교 믿는단 말입니다. 그런 집이 한 두 집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런 때는 꼭 모두를 다 포괄해서 하나의 진리(眞理)로 통합(統合)할 수 있는 그런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필요 한데 통합할 수 있는 그런 가르침은 부처님 가르침 외에는 없습니다. 제가 승려(僧侶)라 그래서 아전인수(我田引水)로 말씀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가사 하느님은 어떠한 것인가? 또 부처님은 어떠한 것인가? 그런 모든 어려운 개념(槪念)들, 그런 개념(槪念)들이 부처님 가르침에 의해서만이 풀린단 말입니다.

그 하나님이란 것도 우리가 생각할 때는 저 하늘에 계시는 어떤 창조주(創造主)다. 이렇게만 생각해 버리면 안 풀리지 않습니까.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하나님이나 부처님이나 누구나 똑같이 모두가 다 나무나 뭣이나 똑같이 진여불성(眞如佛性)으로 이루어졌다.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불성(佛性)으로 이루어졌다. 이것이 대승불교(大乘佛敎)의 핵심(核心)인데 이렇게 한다고 생각할 때는 그 표현은 좀 다르다 하더라도 부처님 가르침으로 하면 다 풀려간단 말입니다.

그것이 이른바 홍로일점설(紅爐一點雪)이라. 우리가 뜨거운 화롯불에다가 한 줌의 눈을 넣으면 그냥 녹아 버리겠지요.

그와 마찬가지로 부처님 가르침 속에다가 부처님 대승불교(大乘佛敎)의 가르침 속에다가 모두는 다 본래로 일미평등(一味平等)한 조금도 차별이 없는 진여불성(眞如佛性)이다. 이 가르침 속에다가 다른 것을 집어넣는다고 생각할 때는 다 그리 해소가 돼버립니다.

오늘날 이와 같이 여러 가지로 복잡한 때 있어서는 꼭 그런 가르침이 우리한테 주어져야 그래야 참다운 우리 두뇌위생, 정신적인 위생을 우리가 도모할 수가 있는 동시에 우리 마음의 갈등을 해소를 시킨단 말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을 스스로 깨닫는다는 문제는 쉽지가 않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 대명사(代名詞)가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인데 나무아미타불도 우리가 애쓰고 해야 한단 말입니다. 하다 말았다 하다 말았다 하면 우리한테 안한 것 보다는 좋아도 별로 큰 힘이 없습니다.

우리 마음이 부처님을 외이는 마음이 일념(一念)이 돼서 일념이 될라면 생각 생각에 끊임없이 해야 그래야 일념(一念)이 되겠지요. 일념(一念)이 돼야 이른바 깊은 명상(瞑想)에 깊은 삼매(三昧)에 들어가집니다. 깊은 삼매(三昧)에 들어가져야 그래야 우리 인생과 우주(宇宙)의 참다운 생명자리인 진여불성(眞如佛性)을 우리가 체험 한단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체험하는 가르침입니다. 체험하지 않으면 생사(生死)를 초월(超越)할 수가 없습니다. 인생의 가장 큰 문제가 죽고 살고 하는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인데 본래 죽음이 없는 그 자리, 본래 죽음이 없는 그 자리는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모든 생명(生命)의 근본자리인 진여불성(眞如佛性)을 깨닫는 자리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서 그런 자리에 가고자 해서 애쓰는 것도 중요하지만은 정작 우리가 체험하기는 그렇게 쉽지가 않단 말입니다. 생각 생각에 우리가 생각을 항시 하나로 통일을 시켜야 됩니다. 그래야 우리가 깊은 명상(瞑想)에 들어서 다른 번뇌(煩惱)를 녹일 수가 있는 것이지 그렇게 하나로 우리 마음을 통일을 시키지 못 하면은 좋은 생각 나쁜 생각 항시 오락가락하다가 끝나버리는 것입니다.

헌데 우리 불자님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가장 소중한 보배가 우리 생명의 근원자리를 깨닫는 것인데 그렇게 하기위해서는 굉장히 우리 스스로  노력 정진(精進)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정도로 해야  할 것인가? 제 말씀을 깊이 명심을 하시기 바랍니다. 박피사경(剝皮寫經)이라, 그 껍질을 베낀다는 베낄 박(剝)자, 또는 우리 피부란 가죽 피(皮)자 말입니다. 사경이라. 베낄 사(寫)자, 글을 베끼는 것을 말씀합니다. 베낄 사(寫)자 또는 경서, 불경이란 경서 경(經)자 말입니다. 우리 피부를 베껴서 부처님의 그 소중 한 말씀을 우리가 기록한단 말입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님 과거전생에 요법비구라. 진리(眞理)를 좋아하는 그런 비구가 돼서 공부를 하셨습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님 과거전생(過去前生)에 말씀입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님 같은 그런 위대한 분은 예수님이나 공자님이나 다 마찬가지입니다만 과거전생(過去前生)에 그런 분들은 다 무수 생(無數生)동안에 좋은 일을 많이 했단 말입니다.

그 몇 백번씩 넘게 자기 몸뚱이를 중생(衆生)을 위해서 바치기도 하고 말입니다. 그렇게 좋은 일을 하셨기에 금생(今生)에 석가모니(釋迦牟尼)가 되고 예수가 되고 공자가 되고 다 그랬던 것입니다.


헌데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정말로 생명의 본바탕인 우리 생명의 본 고향(故鄕)자리인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그 자리는 바로 진리기 때문에 진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그 자리가 우리 생명의 근원자리인데 그 자리를 우리가 깨닫게 하기 위해서는 방금 제가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박피사경(剝皮寫經)이라, 자기 피부를 베껴서 부처님의 소중한 말씀을 기록할 수가 있는 그런 신심(信心)이란 말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이 과거전생(過去前生)에 요법비구라. 진리를 좋아하는 비구가 돼서 공부할 때에 이렇게 둘러 봐도 자기를 지도할 만한 분이 안보인단 말입니다. 누구한테 꼭 진리(眞理)를 물어야 되겠는데 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님 같은 그런 위대한 분들은 과거전생(過去前生)에 진리를 찾고 헤매고 무진 고생을 많이 허셨습니다.

어떤 누구나 위대한 사람들은 금생(今生)뿐만이 아니라 꼭 과거전생(過去前生)에 진리를 찾고자 해서 그 무시무시한 그런 난행고행(難行苦行)을 다 감내를 하신 분입니다.

헌데 그 요법비구라. 진리를 좋아하는 그런 비구가 되어서 공부할 때에 스승을 구하나 스승이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나를 가르쳐 주는 스승만 있다고 생각할 때는 내 모든 것을 다 바칠 것인데 그런 스승이 없구나. 그래서 한탄할 때에 그 나쁜 마구니가 꼭 이 세상에나 또는 어디에나 우리 진리(眞理)를 방해하는 그런 존재가 있습니다. 그런 존재가 이른바 마구니 인데 말입니다. 한 마구니가 저 사람을 좀 골을 메겨 줘야 되겠구나. 이래서 마구니가 사람의 몸을 나투어서 요법 비구 옆으로 갔단 말입니다. 가서 그대가 정말로 진리(眞理)를 구하는가. 그러니까 진리(眞理)를 참, 구하다 마냐고? 내 모두를 다 바쳐서 내가 진리를 구할려고 한다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마구니가 하는 말이 그러면은 그대의 피부를 벗겨서 그대의 살가죽을 벗겨서 종이로 하고 그대의 뼈를 분질러서 그것을 붓으로 하고 그대의 피를 먹으로 해서 내 말씀을 내가 진리(眞理)를 알고 있는데 내 말씀을 적을 수가 있는가? 이렇게 다짐을 받았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요법비구가 내가 주저 없이 한시 회한도 없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 말 끝나기 전에 칼을 들어서 자기 피부를 베낀단 말입니다. 자기 피부를 벗기고 또 자기 뼈를 분질러서 붓을 만든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피는 자연적으로 선지피가 뚝뚝 떨어지겠지요. 자기 피부를 벗겨서 종이를 만들고 자기 뼈를 분질러서 붓을 만들고 자기 피를 뽑아서 먹을 만들고 말입니다.

이렇게 할려고 하니까 그 마구니가, 불경에 보면은 참 그야말로 아주 훌륭한 그런 표현이 있습니다. 마즉즉멸(摩卽卽滅) 이라. 마구니 마(魔)자, 곧 즉(卽)자, 멸할 멸(滅)자 말입니다.

마구니란 것은 우리가 시원찮을 때에 그렁저렁 헐 때에 우리를 시험하는 것이지 정말로 우리 생명을 바치고서 그 한시 일 초도 우리가 후회 없는 그런 정당한 일을 한다고 생각할 때는 마구니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그 요법비구가 방금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자기 피부를 벗기고 벗겨서 종이로 하고 또는 자기 뼈를 분질러서 붓으로 하고 자기 피를 먹으로 해서 그 말씀을 좋은 말, 진리(眞理)말씀을 베낄라고 하니까 그 순간 마(魔)는 그냥 어디로 가고 형체가 없단 말입니다. 마즉즉멸(摩卽卽滅)이라. 그 마(魔)가 곧 그냥 아주 멸실 돼 버렸단 말입니다.


우리 세상에 우리가 한동안 살 때에 진리(眞理)를 구하고 또는 다른 사업도 하고 여러 가지 도모할 일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런 때는 꼭 장애(障碍)가 있습니다. 장애(障碍)가 있는데, 정말로 그런 장애(障碍)가 있더라도 우리 정성이 정말로 사무치고 또는 진정으로 우리 생명을 바치고 아주 그야말로 참 다시없이 그런 정당한 마음을 가지고서 모든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할 때에 장애(障碍)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 법은 그렇게 신묘(神妙)한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자기 뼈를 붓으로 하고 자기 피부를 종이로 하고 말입니다. 또는 자기 피를 물로 먹으로 해서 불경(佛經)을 부처님 말씀을 베낀다고 생각할 때에 그런 각오가 정말로 서가지고서 실천에 옮길 수 있는 그런 정성이 사무칠 때는 다른 장 애(障碍)나 그런 것은 아무런 별문제가 없단 말입니다.

왜 그러는 것인가 하면은 설사 마구니라 하더라도 나쁜 마구니라 하더라도 다 모두가 본래는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진여불성(眞如佛性)이란 말입니다.

잘못 살아서 마구니가 된 것이지 마구니도 자기 본래의 근본생명(根本生命)은 또 진여불성(眞如佛性)입니다. 부처님 성품에 들어 있단 말입니다. 우주(宇宙)에 있는 어떠한 것도 부처님 성품이 안 들어 있는 것이 없습니다.

진리(眞理)란 것은 그와 같이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대승불교(大乘佛敎)는 일체 모두를 다 포괄해 있단 말입니다. 이것 보고 불교(佛敎)전문술어로 해서 일미평등(一味平等)이라. 일미평등(一味平等)의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한 일(一)자, 맛 미(味)자 오직 하나의 맛이란 말입니다. 오직 하나의 생명이고 또는 하나의 진리(眞理)기 때문에 평등무차별해서 일미평등 (一味平等)한 결국은 진여불성(眞如佛性)이란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오늘 부처님오신 날, 그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 대승불교(大乘佛敎)의 핵심인 일미평등(一味平等)한 진여불성(眞如佛性)이다. 이 말씀을 꼭 깊이 외두시기 바랍니다.

조금도 차별이 없는 언제 어디에나 일미평등(一味平等)한 진여불성(眞如佛性)은 충만해 있습니다. 이 법당 속에나 또는 형무소 속에 나 말입니다. 어디에나 다 그렇습니다. 화장실 속에나 언제 어디에나 부처님의 심심미묘(甚深微妙)한 대승불교(大乘佛敎)의 진리(眞理)의 핵심인 일미평등(一味平等)한 진여불성(眞如佛性)은 다 충만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존재가 행복(幸福)이고 보람 있는 생활인가? 이것은 일미평등(一味平等)한 진여불성(眞如佛性)에 우리가 얼마만치 가까이 갈 것인가. 우리가 성자(聖者)가 된다 고 생각할 때는 일미평등(一味平等)한 진여불성(眞如佛性)하고 온전히 하나 가 돼 버리는 것입니다.

성자가 미처 못 된다 하더라도 일미평등(一味平等) 한 진여불성(眞如佛性)하고 가까워지면 가까워진 만치 거기에 비례해서 우리 행복(幸福)도 더욱더 증장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어디 몸이 아프든 또는 사업으로 지금 곤경에 빠지건 정말로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런 자기 소신을 위해서 자기 믿는 바를 위해서 자기 피부를 벗기고 자기 뼈로 해서 붓을 만들고 자기 피로해서 먹이나 물을 만들고 이렇게 해서 나갈 수 있는 그런 용기와 정성이 있다고 생각할 때는 어려운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마치 마구니가 그냥 즉시에 사라져버리듯이 다른 장애(障碍)는 다 걷히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처님의 가피(加被)를 별로 안 믿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피(加被)는 도처에 있습니다. 도처에 있어서 정말로 자비심(慈悲心)이 충만 하면은 독으로 독살을 할라 해도 독이 안 받습니다. 달마스님 같은 분도 여섯 번이나 독살할라 그래서 독을 드렸단 말입니다. 그러나 다섯 번까지는 독이 전혀 안 받았습니다.

그러나 달마스님께서 인제는 지금 내가 갈 때가 왔구나. 갈 때가 온 것을  짐작하시고서 그래서 그때 스스로 독을 받아서 여섯 번째는 독을 받고 가셨단 말입니다.

이와 같이 정말로 자비심(慈悲心)이 사무친다거나 또는 진리(眞理)에 투철해서 진리 자체가 되어버린 성자(聖者)의 분상에서는 마음먹기에 매였습니다. 안 죽을 라면 안 죽고, 죽을 라면 죽고 다 그러는 것입니다.

진여불성(眞如佛性)은 만능의 자리입니다. 만능이란 것은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는 자리 아닙니까. 모두를 다 알 수가 있고 모두를 다 할 수가 있는 그런 자리입니다.


따라서 우리 불자님들 정말로 부처님오신날 대승불교(大乘佛敎)의 핵심인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일미평등(一味平等)한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이것이 내 생명의 진수다.

이래서 여기에 가기 위해서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의 대명사인 아미타불(阿彌陀佛)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끊임없이 하십시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도 똑 같습니다.

한 번 하면은 한 번 한만치 우리 마음도 광명(光明)으로 빛나고 우리 몸도 광명(光明)으로 빛나고 다른 삿된 것들이 우리를 침범을 못하는 것입니다.

꼭 그렇게 하셔서 위없는 행복(幸福)을 누리시기를 간절히 빌어마지 않습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시아본사석가모니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