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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마음의 고향

마음의 고향 27집

 

 

 

 

우주는 영원한 생명의 빛


분명히 만리 이역의 미국 유타입니다마는 오늘 분위기가 고향의 고국의 어느 모임 같은 아늑하고 친밀한 감을 느끼게 돼서 대단히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여러분들께서는 참 축복받은 분들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한국에서 그냥 그렁저렁한 분들 같으면 미국까지 오실 수가 없는 것인데, 희망이라든가 또는 포부라든가 또는 능력이 출중하셔서 미국까지 오셨습니다. 같은 미국도 유타주 저는 이번에 와서야 처음 알았습니다마는 국토도 아름답고 뿐만이 아니라 여기 사시는 분들도 모두가 선량하고 수준도 높다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런데 오셔서 계신다고 생각할 적에 참 축복 받은 어른들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제가 이와 같이 높은 자리에 앉아서 말씀을 드리게 돼서 대단히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불교의 하나의 의식이기 때문에 아마 이와 같이 마련을 해주신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이렇게 높은 데서 말씀드리는 것을 보고 불교말로하면 상단법문(上壇法門) 그럽니다. 상단법문. 그래서 상단법문은 무슨 뜻인가 하면 그냥 그렁저렁한 개인의 사견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진리 말씀에 한 말씀도 어긋남이 없는 책임 있는 말씀을 해야 한다는 그런 하나의 의미에서 상단법문 그럽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성자(聖者)의 말 또는 부처님의 말 그러한 말씀만 하는 것이지 그냥 개인적으로 그렁저렁한 세속적인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는 그런 뜻으로 상단법문 그럽니다. 그래서 상단법문은 사실은 많은 말을 필요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단법문은 그냥 누구나가 하도록은 안 되어있고, 불교의 강사 그래서 경을 많이 공부도 하고 경을 풀이하는 강사가 있습니다. 또는 불경을 여러 가지로 많이 외워서 법을 설하는 법사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강사도 법사도 아닙니다. 저는 참선(參禪)하는 선사(禪師)입니다. 선사라는 것은 불교말로 해서 불립문자(不立文字)라 될수록 문자나 잡다한 말을 떠나서 오로지 마음을 맑힌다는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 그래서 오직 마음을 밝혀서 마음의 본바탕인 부처가 된다. 그런 뜻으로 공부하는 그러한 승려가 이른바 선사인데 선사가 되지 못하면 상단법문은 원칙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은 상단법문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여기 모이신 분들이 여러모로 교육수준도 높고 또 불교신자만 되는 것도 아니시기 때문에 제가 느끼는 바를 몇 말씀 드리고자 생각합니다.


노자(老子)의 말씀에 ‘우리 인생은 영원한 나그네다’ 그 나그네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갈 것인가? 이것도 알 수가 없이 그냥 나그네 길에서 살다가는 것이 우리 인생이다.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물론 노자의 본뜻은 보다 깊은 뜻이 있겠습니다마는 보통 일반 사람들 수준을 본다고 생각할 때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갈 것인가 이것도 모르면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교 인연법(因緣法)에서는 한 자리에 앉아서 이렇게 마주대해서 같이 얘기도 하고 마주 보고 하는 인연이 오백생(五百生) 인연이라, 이 자리에 계시는 분들 가운데서는 불교의 윤회(輪廻) 법을 믿지 않으시는 분도 계시겠지요. 인정 안하시는 분도 계십니다마는 불교의 윤회 법, 이것은 비단 석가모니만 말씀을 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의 피타고라스나 또는 엠페도클레스나 또는 플라톤이나 또는 아리스토텔레스나 그런 분들도 윤회설(輪回說)을 인정을 했습니다.


윤회설은 무엇인가 하면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습니다만 우리가 낳고 죽고 하는 것이 금생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 전생도, 불교말로해서 무시이래(無始以來)라 끝도 갓도 없는 과거로부터서 몇 천 생 몇 만생을 낳고 죽고 그렇게 되풀이 해왔다는 것입니다. 또한 미래 역시 두고두고 몇 천생 몇 만생 끝도 갓도 없이 무종(無終)이라 없을 무(無)자 마칠 종(終)자 끝이 없이 다시 또 연장돼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는데 그렇게 많은 생을 되풀이 하면서 금생에 한 번 슬쩍 이렇게 만나서 얘기하는 것도 역시 오백생 동안 다시 생을 되풀이해서 만나는 것이지 그냥 우연히 만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길을 가다가 잠시간 스쳐가는 것도 역시 삼세인연(三世因緣)이라 세 번 낳고 죽고 하는 인연이 그것이 상합(相合)이 돼서 인연이 합해져서 금생에 잠시간 스쳐가는 인연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만나는 우리 인연도 더구나 만리타향에서 만나는 우리 인연은 그야말로 오백생의 인연이 훨썩 더 넘는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대단히 참 여러분들에 대해서 저는 친밀한 동포애를 한결 더 깊게 느끼게 됩니다.


저는 이와 같이 승려(僧侶)의 복색(服色)을 하고 있습니다만 제 마음은 불교라 하는 테두리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특히 참선하는 사람들은 참선 공부는 참선하는 선방에 가서 보면 불상도 안 모십니다. 불상도 안모시고서 달마(達磨)스님이라든가 어느 성자의 초상화만 모시고서 우리 마음을 그렇게 절제하는, 마음을 다스리는 상징적인 것으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이지 어느 불상을 모셔놓고 그 앞에다 뭣을 붙이고 또는 절도 하고 그렇게는 않습니다. 그건 왜 그런가 하면 진리라 하는 것이 어느 부분적으로 어디에만 있는 것이 아닌 것이고, 진리라 하는 것이 석가모니(釋迦牟尼)한테만 있는 것도 아닌 것이고, 불교 인생관에서는 바로 우주자체를 하나의 유기적인 생명체(生命體)로 봅니다. 따라서 불교는 인본주의라 인간만이 최고다 하는 인본주의는 지양(止揚)을 합니다. 우리 인간을 비롯한 다른 동물이라든가 또는 식물이라든가 또는 이러한 지구라든가 하늘에 있는 성조라든가 태양이나 달이나 또는 은하계나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불교의 인생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 전문적인 술어로 말하면 ‘우주가 바로 부처의 몸이다’ 법계신(法界身)이다. 우주가 바로 부처의 몸이다. 이와 같이 말씀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를 우리가 이해할 때는, 불교말씀만 해서 대단히 죄송합니다마는 제가 아는 것이 그것밖에 없어서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불교에서 부처님을 얘기할 때는 부처님이라 하는 개념에 대해서 명확한 지식이 없으면 상당히 오해를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불교에서 말하는 부처님 은 석가모니만을 부처님이라고 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주를 바로 우주 전체를 바로 끝도 갓도 없고 또는 영생불멸(永生不滅)한 우주를 바로 부처님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석가모니는 하나의 사람으로 해서 우주의 생명체, 우주의 생명자체와 같이 하나가 되었단 말입니다. 번뇌를 녹이고 인간의 여러 가지 죄악을 없애고서 청정무비(淸淨無非)한 그러한 마음자리가 돼서 우주의 진리와 하나가 된 분이 석가모니고 또는 석가모니뿐만이 아니라 그 뒤에 달마스님이라든가, 또는 한국의 원효(元曉)대사라든가, 또는 서산(西山)대사 그분들도 똑같이 마음을 깨달아서 인간성의 본질을 깨달아서 부처가 됐다 말입니다. 따라서 석가모니나 또는 달마스님, 서산스님 그 분들도 다 깨달아서 부처가 된 분인 것이고 그러면 우리 일반 중생들은 어떠할 것인가, 성자가 못 된 우리 중생들도 깨닫지 못해 있을 뿐인 것이지 본래 우주생명자리인 부처를 갖추고 있는 것은 똑같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말로 하면 ‘일체중생(一切衆生) 개유불성(皆有佛性)’이라 모든 중생이 다 부처가 될 수 있는 성품을 갖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생 그러면 비단 우리 사람만이 중생이 아니라 앞서도 말씀드린바와 같이 다른 동물이나 식물이나 무생물이나 하여튼 유상, 무상, 유정, 무정 모든 존재가 다 중생이라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존재에나 다 부처가 될 수 있는 성불(成佛)할 수 있는 능력이 다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자가 된 분들은 이미 다 부처가 됐고, 우리 중생들은 본래는 다 부처지만 본래는 부처가 될 만한 능력은 갖추고 있지마는 아직 부처가 안 돼있다는 그런 차이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처라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불교라 하는 것이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가장 간단합니다. 그건 왜 그런가 하면 앞서도 말씀드린바와 같이 부처가 어디에나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고 또는 무엇이나 다 부처로 돼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마치 바다가 있다고 생각할 적에 바람 불면 바람 따라서 이 파도, 저 파도 천파만파 파도가 일어나겠지요. 또는 거품도 몇 수억의 거품이 일어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우주라 하는 것이 부처라 하는 부처라 안 해도 그때는 좋습니다. 유교(儒敎)식으로 하면 태극(太極)이라든가 또는 우주의 정기(精氣)라든가 또는 이기(理氣)라든가, 원리라는 리(理)자, 기운 기(氣)자, 이기라든가 이렇게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아무튼 우주의 정기, 우주의 정기를 바로 부처라고도 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주의 정기가 그때그때 인과(因果)의 법칙 따라서 만유(萬有)가 되듯이 앞서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바다가 바람 따라서 천파만파 일어나고 또는 무수의 거품이 일어나듯이 우리 중생도 똑같이 부처라 하는 우주의 생명체로 부터서 인과의 법칙 따라서 이렇게 되고 사람이 되고, 다른 동물이 되고, 우주엔 천체가 되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에는 불교의 인생관에서는 우주를 하나의 생명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처의 자리는 어떠한 능력이 있는 것인가?


이것도 불교에서 말할 때는 그 부처자리, 우주의 본래 생명자리 이 자리는 무한공덕(無限功德)이라 한도 끝도 없는 그런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능력을 우선 간추려서 四공덕, 열반사덕(涅槃四德)으로 간추려서 말씀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를 믿는 사람이라든가 또는 불교를 안 믿는다 하더라도 철학적으로 인생과 우주의 본체가 무엇인가? 그러신 분들은 관심을 가지고서 제 말씀을 들으시면 도움이 되실 런지 모르겠습니다.


네 가지 속성으로 우주의 본래생명자리를 불교에서 얘기합니다.


하나는 영생불멸(永生不滅)하는 생명(生命), 인생과 우주의 본래의 부처자리 그 자리가 영생불멸하는 생명자리라는 것입니다.<상덕(常德)>


또 한 가지는 행복(幸福)이 완벽한 자리, 행복이 완벽한 자리라는 것입니다.<낙덕(樂德)>


우리의 몸이라든가 또는 현상계라 하는 것은 생사가 있고 또는 생주이멸(生住異滅)이 있어서 소멸이 있다고 봅니다마는 본질적인 그 자리는 생사도 없고 죽고 또는 낳는 것도 없이 항시 그대로 영생불멸하는 것이고 또는 그 뿐만 아니라 완벽한 행복을 갖추고 있다 말입니다. 조금도 고통도 없고 번뇌도 없고 모든 그런 행복 안락을 갖추고 있다는 그런 것이 역시 하나의 영생불멸한 우리 인생과 우주의 본래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신통자재(神通自在)라, 지금 분들은 신통이란 그런 말씀 하면 신통은 우리 중생들이 알 수 없는 기적적인 것이 신통 아니겠습니까. 신통 말하면 신통은 신화(神話)에나 있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들 하십니다마는 불교에서는 그렇게 안 봅니다. 우리 인간성이나 우주성 자체, 우주의 본래성품 자체에 있어서 기적적인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고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아덕(我德)>


또 한 가지는 청정무애(淸淨無碍)라 조금도 더러운 것 없고, 또는 번뇌도 없이 아주 맑기가 한도 끝도 없이 청정한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정덕(淨德)>


이와 같이 영생불멸하고 또는 완벽한 행복을 갖추고 있고 또는 신통묘용(神通妙用)이라, 무한기적을 다 갖추고 있다 말입니다. 또는 청정무비해서 조금도 번뇌라든가 또는 찌꺼기라든가 그런 흐림이 없다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성의 본질인 동시에 우주의 본성인 바로 부처의 속성입니다. 따라서 이 불교인들이 수행을 하고, 염불(念佛)해서 부처의 이름도 외우고, 또는 명상(冥想)해서 참선(參禪)도 하고, 그렇게 하는 것은 그 뜻이 어디에 있는가 하면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 하면 그와 같이 우리 인간이 본래 갖추고 있고, 일체 존재가 본래로 갖추고 있는 그런 자리, 영생불멸하고 또는 완벽한 행복을 갖추고 있고 또는 일체 존재를 다 알고도 할 수가 있고 그와 동시에 청정무비해서 조금도 번뇌나 또는 흐림이나 그런 찌꺼기가 없는 그런 경계 이것이 우주의 본체의 갖추고 있는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능력을 갖춘 분은 성자이고, 바로 부처인 것이고, 능력을 갖추지 못한 분은 우리 범부(凡夫)고, 중생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비단 석가모니뿐만 아니라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불교내의 각 도인들도 마찬가지이고 또는 예수님이나 또는 공자님이나 또는 노자님이나 그런 분도 똑같이 인생과 우주의 본래자리를 깨달아서 우주의 본 성품과 하나가 되는 성자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분들이 온전한 성자라고 하면 그때는 응당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몸은 이것은 몸은 하나의 물질이기 때문에 몸은 그때그때 인연 따라서 소멸되고 한다 하더라도 마음은 영생불멸하고 또는 동시에 행복도 완벽하고 말입니다.


성자의 행복은 눈에 보이는 세계의 행복이 아닙니다. 물질이라든가 또는 하나의 지위라든가 또는 자기 권속을 잘 만나고 못 만나고 했다는 그런 저런 문제가 아닙니다. 성자의 행복은 얼마만치 영생, 영생의 그러한 본질적인 것을 자기가 누리고 있는가. 거기에 성자의 행복이 있습니다.


또는 일반 중생들이 얼마만치 영생불멸한 그런 자리로 갈 수 가 있는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불교 인생관에서 본다고 생각할 적에 나나 너나 그런 것이 절대로 차이 있고 또는 둘로 안 보는 것입니다. 일체 존재의 생명이 바로 부처라 하는, 부처라 하는 그런 자리이기 때문에, 말씀이 좀 난해하게 됩니다마는, 부처님 그러면 우주의 본체를 인격적으로 표현해서 부처님 그럽니다. 마치 하나님 하듯이 말입니다. 우주의 하나의 도리, 천지 우주가 다 순수한 정기, 순수한 에너지 그자리가 바로 부처인데 그 자리는 생명이기 때문에 인격적으로 표현해서 부처님 그러는 것입니다. 또는 그 자리는 우리 마음의 본체이기 때문에 마음 심(心)자를 보태서 그때는 불심(佛心) 그러는 것입니다. 그 자리는 인생을 비롯해서 일체존재의 근본성품이기 때문에 근본 실상이기 때문에 그때는 불성 그러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이라고 하든 또는 마음 심자를 보태서 부처 불(佛)자 마음 심(心)자 불심(佛心)이라고 하든 또는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불성(佛性)이라고 하든 똑같은 뜻입니다. 그러면 불성 그것은 우선 우리가 시각적으로는 볼 수가 있는가? 없는가? 그것은 때 묻은 우리 중생은 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번뇌에 때 묻은 중생은, 어떻게 때가 묻었기에 볼 수가 없는 것인가? 우리 중생들은 자기 몸뚱이를 자기 소유(所有)라고 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에는 자기 몸뚱이가 자기 소유라고 안 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인연생(因緣生)이라 인(因)과 연(緣) 따라서 잠시간 잠시간 이와 같은 모양으로 보이는 것이지 이것이 자기의 소유가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 몸이라는 것은 내내야 산소나 수소나 탄소나 질소나 그런 것들이 그때그때 인연 따라서 모여진 세포의 모양 아닙니까 세포의 덩어리라 말입니다. 이와 같이 각 세포가 잠시간 인연 따라서 모여서 이렇게 하나의 모양이 이루어졌지마는 이 모양이 순간순간 신진대사(新陳代謝)해서 변화해서 마지않는단 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오전에 자기 몸뚱이와 오후에 자기 몸뚱이가 같은 몸뚱이가 아닙니다. 이건 물리학(物理學)적으로 우리가 다 알 수 있는 문제 아닙니까. 또는 보다 시간을 줄여서 한 시간 전과 한 시간 후의 몸뚱이가 같은 몸뚱이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만치 우리 몸뚱이가 우리세포가 변화가 되고 있습니다. 더 줄여서 일초 전과 일초 후의 몸뚱이가 같은 몸뚱이가 아니란 말입니다. 더 줄여서 일초의 몇 억분의 일 동안도 같은 몸뚱이가 될 수가 없습니다.


비단 사람 몸뚱이뿐만 아니라 어떤 존재나 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건 물리학적인 하나의 원리 아니겠습니까. 어느 순간도 존재로 이루어진 하나의 물질이라는 것은 어느 순간도 같은 모습으로 같은 공간(空間)을 차지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이런 문제는 여러분들께서는 현대 공부를 많이 하셔서 충분히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인과 연 따라서 조건부(條件附)로 해서 모아진 것은 사람 몸을 비롯해서 일체존재가 다이아몬드라든가 또는 금이라든가 그런 것도 역시 다이아몬드 안에는 탄소가 그때그때 움직이고 있습니다. 금도 역시 금 원소가 움직이고 있다 말입니다. 또는 금 원소를 구성한 전자나 중성자나 그런 것들이 지금 가만있지를 않는 것입니다. 순간 찰나도 머무르지 않고 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어떠한 순간찰나, 어떠한 짧은 시간도, 어느 존재도 같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하이데거 같은 실존철학가도 일체존재는 ‘무(無)’라 무철학(無哲學)이다. 엄격히 본다고 생각할 때에는 우리가 소중히 아끼는 자기 몸뚱이를 위시해서 자기 아내 몸 자기 남편 몸 또는 우리가 굉장히 아끼는 귀금속이라든가 자기 집이라든가 어떠한 것이나 그것이 항상된 모습으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항상된 모습으로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은 만법유전(萬法流轉)이라 항시 움직이고 있단 말입니다.


다만 우리 인간이 무지(無智) 때문에 실존적인 그런 지식이 없이 무지 때문에 이 몸뚱이 이것은 어제나 오늘이나 또는 젊어서나 지금이나 똑같다 앞으로도 같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서 자기 몸뚱이를 금쪽같이 아끼지 않습니까.


사람 번뇌(煩惱)라는 것은 어디에 있는가 하면은 아(我)라 하는 이 몸뚱이 내 것이라 하는데서 우리 번뇌가 있습니다. 내 몸뚱이가 좀 좋은 것은 그때는 욕심을 내겠지요. 자기 몸뚱이에 대해서 좀 해치면은 우리가 성내고, 손해보면 진심(瞋心)을 성내는 분노심을 품겠지요.


따라서 불교에서는 근본무명(根本無明),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원죄(原罪)라, 원죄라 원죄. 근본무명 때문에, 근본무지 때문에 자기를 잘 못 봅니다. 또는 사태를 우리가 바로 못 봅니다. 내 몸뚱이 이것이 순간 찰나도 같은 몸일 수가 없는 것이고, 또는 금생에 이생에 이런 몸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할지라도 과거 전생에는 무엇일 것인가. 과거 전생에는 그때 대로해서 몸을 받아서 어느 몸이 되었겠지요. 또는 미래 내생에는 이런 몸이 있을 것인가. 미래 내생에는 한 번 죽어지면 이 몸뚱이는 내내야 산소나 수소나 질소나 그런 것으로 해서 다 분해가 되어버리겠지요.


그래서 우리가 지은 생명체, 우리 의식(意識)에 묻어있는 이른바 카르마, 불교말로 하면 업(業)이라 말입니다. 우리 의식에 묻어있는 즉 말하자면 그런 번뇌, 그런 번뇌에 걸 맞는 생을 또 내세에 받는 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몸뚱이는 금생만 존재합니다. 아무리 아껴보고 금반지를 몇 개나 끼고 팔찌를 팔에다 두르고 귀걸이를 한다 하더라도 이 몸뚱이는 결국은 종당(終當)에 자기 것이 못 되어 버린다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들은 그것을 모르고서 이 몸뚱이 이것이 내 것이다 이렇게 하는데서 지나친 욕심(欲心)이 생기고 또는 자기를 누가 헤치려고 하면은 또는 손해 보면 그때는 역정을 내고 인상을 굳히고 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인간사회의 자기 번뇌를 비롯해서 가족적인 불화(不和)라든가 또는 단체 간의 반목(反目)이라든가 또는 국제간의 여러 가지 분쟁(分爭)이라든가 모든 것이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자기라는 존재, 자기라는 존재를 우리가 파악을 잘 못한단 말입니다. 자기 실존(實存)을 우리가 몰라서 그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은 무엇인가? 우리 마음은 무엇인가 우리마음은 내내야 우리가 금생에 태어나서 우리 소질, 과거 전생부터 지어내려온 자기 소질위에다가 금생에 듣고, 배우고, 느끼고, 생각하고 그런 것이 자기 마음 아닙니까. 내가 잘났다 내가 박사다 내가 무엇이다 하지마는 내내야 따지고 보면 금생에 인간으로 태어나서 자기 소질위에다 이것 배우고 저것 배우고 듣고 생각하고 그 집합체가 자기라는 마음이라 말입니다.


달마(達磨)스님이 소림사(少林寺), 중국 소림산 석굴에서 9년 동안 벽만 바라보고 참선을 할 때입니다. 그때 혜가(慧可) 스님이라 하는 그 분은 노자 도덕경(道德經)도 공부를 많이 하신 분이고 유교도 공부를 많이 하신 분인데, 나이가 40을 넘은 분인데, 그 당시의 중국의 학문으로 해서는 거의 최고봉까지 공부를 하셨단 말입니다.


혜가스님이란 그분이 그러나 내가 무엇인가 내 실존이 무엇인가 내 인간성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걸 알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렇게 공부를 많이 했지마는 마음은 항시 불안스럽단 말입니다. 나는 대체로 어디서 온 것이며 내가 죽어서는 어디로 갈 것인가 그걸 알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달마스님께서 인도에서 그 소림 석굴에 와서 공부한다는 말씀을 듣고서 거길 찾아갔단 말입니다.


찾아가서 스승이시여 제 마음은 불안스럽습니다. 제 마음을 편안하게 안온(安穩)하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간청을 드렸단 말입니다. 그래도 달마스님은 그 소림산 석굴에 앉아서 그때 눈은 폭설로 쏟아지는데 그런 가운데서 꿈쩍도 않고 뒤돌아보지도 않았습니다. 제삼 그 눈 속에서 그 폭풍이 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다시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애원(哀願)을 했지마는 달마스님께서 마지막으로 끝에 하신 말씀이 ‘사소한 마음으로 사소한 마음으로는 진리를 구할 수 없느니라’ 그러니까 그때 혜가 스님이 자기 허리춤에 차고 있던 단도를 끄집어내서 자기 왼쪽 팔을 끊었습니다. 팔을 끊어서 선지피가 뚝뚝 흐르는 자기 팔을 들고서 스님이시여 제 마음이 불안스럽습니다. 제 마음의 불안을 가시게 해 주십시오. 재차 간청했단 말입니다. 그때사 달마스님이 돌아보면서 ‘그대 그 불안한 마음을 내나봐라 그대 불안한 마음을 이리 내나봐라’ 그래서 혜가 스님이 자기 마음을 내나보라 했는데 마음이라는 것이 무슨 모양이 있습니까 자취가 있습니까 마음을 내 놓을 길이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달마스님한테 가서 하는 말이 ‘아무리 찾아봐도 제 마음은 자취가 없고 흔적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달마스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러면 나는 이미 너의 마음을 편안케 했느니라. 그대 불안한 마음이 자취도 없고 흔적도 없으면 그대는 공연스레 괜스레 있지도 않은 마음을 가지고서 괴롭다 슬프다 그러는 것인데 그대가 그대 마음이 자취도 없고 흔적도 없고 아무 모양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으면 이미 그대는 벌써 안온한 마음이 됐느니라.’ 생각해보니까 그렇거든요 그것이. 마음이 무슨 좋다, 궂다, 희다, 검다 그러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괜스레 자기 스스로 지어서 자승자박(自繩自縛)이라 마음을 구속한단 말입니다. 자기 번뇌로 자기를 구속합니다.


우리는 남을 밉다하면 남을 미워하는 마음이 어디에 흔적이 있습니까. 남을 사랑한다 하면 사랑하는 마음이 어디에 흔적이 있습니까. 이 몸뚱이를 근거로 해서 이 몸뚱이가 내 것이다. 나는 남자다 그러니까 여자를 좋아하고, 나는 여인이다 하니까 남자를 그리워하고 그럴 수가 있겠지요. 그러나 내 몸뚱이 이것이 남자 여자도 아닌 것이고 더 나아가서 따지고 보면 이것 내 것도 아니지 않는가. 다만 인과의 법칙 따라서 잠시간 각 세포가 이렇게 모여 있단 말입니다.


우리는 실존적(實存的)으로 자기 몸뚱이를 관찰(觀察)하고 우리 마음을 관찰하는 이것이 하나의 불교의 참선법(參禪法)의 기초(基礎)가 돼있습니다. 그러면 그대 몸뚱이는 그와 같이 허망한 것이고 각 세포가 모여서 잠시간 이루어져서 순간도 그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서 변화무상(變化無常)한 것이 자기 몸뚱이고 그대 마음도 역시 고유한 어떤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이것저것 금생에 보고 느끼고 배우고 그런 것이 그대 마음이라 하면 그대라는 것은 허망하지 않겠는가. 몸도 허망하고 마음도 허망하지 않겠는가. 허망한 것을 아는 것 보고 ‘무상(無常)’ 그럽니다.


무상이라 없을 무(無)자 항상 상(常)자 내 몸뚱이도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일초 전과 일초 후의 이 몸이 같지 않단 말입니다. 내 마음도 역시 이것저것 주워 모은 것이 마음이기 때문에 마음도 역시 그때그때 순간순간 변화무상해서 조금도 항상스러운 것이 없습니다. 덧이 없는, 항상이 없는 그것 보고 무상이라 말입니다. 다른 것은 무상하지 않을 것인가. 존재하는 일체존재는 모두가 다 무상합니다. 항상이 없다 말입니다.


산도 어제 산 오늘 산과 우리 중생들은 정확히 분석해서 모르는 것이니까 같다고 생각합니다만 적어도 물리적으로 물리학적으로 생각해보면 어제 산 오늘 산이 같지가 않다 말입니다. 일체존재가 다 그렇습니다.


아침에 저 솔트레이크에 이 박사님하고 제자분과 갔었습니다만 지리학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에 우리가 의식적으로는 못 느껴도 이 땅도 조금씩 조금씩 높아지는 데도 있고 또는 조금씩 조금씩 침하(沈下)해 들어가는 그런 것도 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마는 매사가 다 그렇습니다. 다 변화무상해 마지않습니다. 다만 우리 인간이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니까 우리가 미처 못 느낀단 말입니다.


종교라는 것은 상식을 떠나는 것입니다. 상식을 떠나야 종교가 됩니다. 더구나 현대같이 과학만능시대고 이렇게 기술만능시대에 있어서는 상식적인 것으로 해서는 문제의 어려운 점을 풀어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과학적으로는 풀 수가 있을 것인가. 과학적으로도 풀 수 가 없으니까 선진사회에서도 여러 가지 사회적인 문제가 있는 것이고 병폐가 있지 않겠습니까. 과학적으로도 못 풀어갑니다. 왜 그런가 하면 과학도 역시 인생과 우주의 실존을 모른단 말입니다.


이 가운데는 물리학자도 계시고 여러 그런 방면에 조회가 깊으신 어른들이 다 계실 것입니다마는 저는 상식적으로만 알 정도밖에 안됩니다만 그렇더라도 가사 하나의 산소(酸素)를 두고 생각해봅시다. 산소 역시 원자핵(原子核)을 중심으로 해서 전자(電子)가 여덟 개가 도는 것이 산소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원자핵을 구성한 중성자(中性子)나 양성자(陽性子)나 중간자(中間子)나 또는 원자핵의 중심에 도는 원자나 그런 것은 어떤 존재인가 그런 존재에 대해서는 지금 확실히 현대물리학도 모르는 것입니다. 다만 에너지의 파동이라 알 수 없는 에너지가 파동(波動) 쳐서 진동(振動)해서 마이너스 전하를 띠고 있으면 그때는 전자고, 플러스 전하(電荷)를 띠고 있으면 그때는 양성자고 하는 것이지 그 본질은 지금 현대물리학도 모른단 말입니다. 다만 그런 것은 에너지의 시간성(時間性) 공간성(空間性)이 없는 에너지의 파동에 불과하다 이렇게 물리학에서는 지금 결론 내리고 있지 않습니까.


따라서 전자가 진동하고 있고 양성자가 진동한다 하더라도 그 본래는 에너지기 때문에 에너지는 물질이 아닌 다시 말씀드리면 시간성, 공간성이 없기 때문에 에너지 아닙니까. 시간성 공간성이 없다는 것은 벌써 물질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정기(精氣) 즉 에너지만 존재한다 말입니다. 전자야 전자 같은 그런 소립자는 물리학 책을 보면 제가 잘못 기억하고 있는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백만분의 일초, 백만분의 일초 동안도 같은 모습으로 있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전자나 양성자 그런 것이 말입니다. 그런 것들이 이렇게 모여서 산소가 되고 수소가 되고 또는 그것들이 모여서 분자 구조로 해서 우리 세포를 구성한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몸 가운데는 지금 그런 것들이 수도 끝도 없이, 세포만 하더라도 60조 60조 이상 세포가 우리 인체에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더구나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산소나 수소나 전자나 그런 것들은 더욱더 헤아릴 수가 없겠지요.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모두가 다 따지고 보면 일체존재는 에너지의 형상화(形象化)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가 좋다고 하고 싫다고 하고 그것 때문에 싸우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고 죽기도 하고 그런 것들이 모두가 다 사실은 있다고 볼 수없는 하나의 상(相)에 불과하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자의 위치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성자의 안목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인간이 보는 것은 모두가 다 가상에 불과합니다. 실상이 못 되는 것입니다 가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실존이 못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무상이다 항상이 없다 무상한 것은 항상이 없다는 것은 따지고 보면 공간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공(空)이란 말입니다. 조금도 쉬지 않고 변화무상한 무상한 것이니까 필연적으로 그때는 공간성이 없겠지요. 무상하고 공간성이 없는 것을 나라고 할 수도 없으니까 그때는 무아(無我)라 말입니다. 없을 무(無)자 나 아(我)자 ‘나’라는 것이 원래 없단 말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원수(怨讐)를 사랑하라’는 그런 귀중한 말씀도 있지 않습니까마는 예수님의 눈으로 봐서는 원수가 있을 턱이 없습니다. 우리 중생이 봐서 원수가 있고 미운 사람이 있는 것이지 예수님 같으신 우주의 생명과 하나가 된 그런 분 눈으로 봐서는 원수가 있고 밉고 사랑하는 것이 있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런 경계가 돼야 자기를 핍박한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경계가 돼야 원수를 사랑할 수가 있단 말입니다.


우리는 종교를 생각할 때 보다 깊이 본질적으로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기 실존을 모르고서 금생을 지내고 맙니다. 그것 보고 불교말로는 취생몽사(醉生夢死)라, 개념지식(槪念知識)만 많이 쌓고 그 가운데서 취(醉)한, 개념(槪念)에 취해서 한 세상 살다가만단 말입니다.


있는 것은 우리 눈에 보이는 이것은 실상(實相)이 아니라 실존(實存)이 아니라 가상(假相)에 불과합니다. 가상 때문에 울고 웃고 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가상이기 때문에 결국은 공(空)인 것이고 허무(虛無)하단 말입니다. 허무한 것입니다. 그러면 불교는 허무주의(虛無主義)가 아닌가? 여기까지만 불교라고 하면 불교는 허무주의가 흔연히 되고 맙니다. 그러나 불교나 기독교나 이슬람교나 도교나 유교나 절대로 허무주의는 아닙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가 보는 것은 가상인데, 실상 참말로 실존이 있단 말입니다. 그 실존이 바로 하나님이요 바로 부처님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가 이런 말씀 드리면 기독교를 신봉하시는 분들은 저 중이 기독교를 뭐 안다고 외람되게 말하는가 하지마는 저는 신념이 있습니다. 저도 기독교를 젊어서는 공부를 제 나름대로 좀 했습니다. 이슬람도 하고 도교 유교를 제 나름대로 했기 때문에 저는 모든 종교가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인간이 보는 것은 우리 인간의 시각이 짧아서 번뇌에 가려서 실상을 못 보지만 성자가 본다고 생각할 때는 성자는 우리가 보는 가상은 밉다 좋다 또는 나다 너다 내 것이다 네 것이다 이런 것을 모두가 다 허망무상하게 본다 말입니다. 그와 동시에 참말로 실상, 죽지 않고 낳지 않고 더하지 않고 덜하지 않고 영생불멸하는 실상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요 그것이 부처님입니다. 그 자리는 영생히 변치 않습니다. 그 자리가 아까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영생불멸하고....<테이프 잠깐 끊김>


바이블에서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저는 무슨 복음서인가 아직 까지 기억은 잘 없습니다마는 마리아 막달라마리아가 신부님께서는 제가 잘못 말씀드리면 고쳐주십시오. 예수님한테 나자로라는 제 동생이 죽었습니다. 주여 제 동생을 살려주십시오. 이렇게 간청을 드렸단 말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동생 되는 나자로는 죽어서 베로 손발도 꽁꽁 묶고 말입니다. 수건으로 얼굴을 가려서 묘지에다 파묻어놨단 말입니다. 그런 동생을 살려달라고 예수님한테 간청을 드리니 참 딱한 일 아닙니까. 현대 과학적으로 보나 현대 상식으로 해서는 도저히 살릴 길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나자로가 묻혀있는 그 묘지 앞에 가서 그 장엄스러운 때 묻지 않은 장엄스러운 영생하고 하나가 되어있는 그 음성으로 “나자로야 나오너라” 그렇게 큰 소리로 외친다 말입니다. 그러니까 나자로가 묶인 채로 묘지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온다 말입니다. 걸어 나온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 손발을 묶인 베라든가 얼굴을 가린 수건을 베끼게 해갖고서 그대 그럼 갈 곳으로 가라고 한 바이블 구절을 봤습니다만 그런 것은 저는 충분히 가능이라고 생각합니다. 절대로 불가능이 아닙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영원성(永遠性) 영원의 불성자리 영원의 그 본질자리 그 자리는 순수 에너지 자리입니다. 그 자리와 우리가 하나가 됐다고 생각할 때에는 초인적(超人的)인 힘이 분명히 나오는 것입니다. 그 자리는 바로 광명(光明)자리입니다. 그 자리는 그냥 물질자리가 아니라 순수 광명이 빛나는 자리입니다. 요한복음서에도 있는 구절입니다마는 ‘나는 진리요, 나는 빛이요, 나는 생명이다’ 이런 구절이 있지 않습니까. 불경에도 ‘불신충만어법계(佛身充滿於法界)’라, ‘부처님 광명이 우주에 가득 차 있다’ 이런 말씀이 있단 말입니다. 영원의 진리라는 것은 광명 빛으로 해서 빛으로 충만한 것입니다.


성자라 하는 것은 어떤 누구나 다 공자나 노자나 석가나 또는 예수님이나 다 나는 진리요 나는 빛이요 또는 나는 생명이요 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 자리가 여러분도 똑같이 갖추고 있습니다.


다만 어째서 우리 중생들은 그 자리를 못 가는 것인가 그것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가상에 실상이 아닌 가상에 구속되어 있단 말입니다. 허망한 이 몸뚱이 때문에 우리가 몸뚱이의 노예가 돼있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성자가 아닌 한에는 사실은 어느 누구나가 다 죄송스러운 말씀입니다만 성자가 미처 못 됐을 바에는 어느 누구나가 다 우리 몸의 노예입니다. 제아무리 정직한 분도 역시 제아무리 정직하고 양심적인 분도 역시 위선(僞善)을 면치 못합니다. 제가 너무나 말씀이 길어지는 것 같습니다마는 될수록 간추리고 간추려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영생불멸한 그 자리는 다만 표현만 다를 뿐이지 이스라엘 성자, 또는 인도의 성자, 중국의 성자, 또는 한국의 성자 그런 표현만 다를 뿐이지 내용 알맹이는 똑같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또는 앞으로 그렇게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도적인 무슨 종교가 생기고 종파가 생기고 이렇기 때문에 굉장히 문제가 크단 말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중세기에 십자군 이백년 십자군전쟁을 보십시오.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가 그때 싸움으로 해서 얻은 것이 무엇입니까. 무수한 사람들이 많이 죽었단 말입니다. 또는 근자에 와서 영국의 에이레(?)사태 구교와 신교와의 싸움 또는 이란과 이라크관계 이슬람교도들의 싸움, 이란과 이라크와의 7년 전쟁 거기에서 얻음이 무엇이 있고 거기에서 얻어진 것이 과연 이슬람교에 그것이 필요할 것인가. 우리 인류에 그것이 필요할 것인가. 그럴 바에는 차라리 종교가 없는 것만 같지 못하단 말입니다. 종파성(宗派性) 때문에 또는 하나의 파벌 때문에 종교가 시야비야(是也非也)하고 등을 돌리면 사실은 종교무용론을 우리가 부르짖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진리는 분명히 하나입니다. 도본무이(道本無二)라, 진리는 본래 하나고, 성인무이심(聖人無二心)이라 성자의 마음은 본래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진리를 모르고 성자라 하겠습니까.


공자(孔子)님이 말씀하신 논어 같은 것을 본다 하더라도 그 바이블의 구절이나 불경에 있는 구절이나 다 비슷비슷합니다. 조금 뉘앙스의 차이뿐입니다. 제가 논어(論語)에 있는 몇 구절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소인(小人)은 구제인(求諸人)하고, 소인은 즉 말하자면 마음이 협소하고 마음이 폐쇄되어서 마음이 열리지 못했단 말입니다. 그런 소인들은 구제인이라 구할 구(求)자 모두 제(諸)자 사람 인(人)자 모든 것을 남한테만 추궁한단 말입니다. 군자(君子)는 대인보고 군자라 그럽니다. 진리를 깨달은 군자들은 구제기(求諸己)라 군자는 자기한테 허물을 돌린다 말입니다.


대인은 군자(君子)는 성인지미(成人之美)하고, 군자는 모든 사람들이 행복 되기를 바란다 말입니다. 군자는 자기를 떠난 사람들이기 때문에 군자는 성인지미라, 모든 사람들의 아름다움과 모든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서 봉사한단 말입니다. 소인(小人)들은 반시(反是)라, 그 반대란 말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리 범부중생들은 자기 노예가 돼서 탐욕심(貪欲心)을 지나치게 내고 또는 부질없는 분노(憤怒)하는 그런 마음 때문에 마음이 흐리멍덩해서 실상을 못 봅니다. 사태를 바르게 못 봅니다. 항시 왜곡시켜서 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도 ‘자기 무지를 알라’ 우리는 상대(相對) 유한적(有限的)인 자기 무지를 먼저 알아야 영원적인 지혜(智慧)를 얻는 것입니다. 자기 한계를 몰라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무지를 몰라서는 항시 교만심(憍慢心)을 면치 못합니다.


나는 대학을 나왔거니, 나는 무엇이거니, 나는 나이도 많이 먹어서 경험이 많거니 내내야 제 아무리 많고 제 아무리 많이 배웠다하더라도 사실은 우리가 아직 성자가 못됐을 바에는 상대유한적인 지식밖엔 안 됩니다. 가정(假定)밖엔 안 됩니다.


아인슈타인 같은 분도 통일장이론(統一場理論)이라 우주가 우주의 본체가 무엇인가. 그렇게 연구하고 탐구했지마는 우주의 본체를 알 수 없었단 말입니다. 다만 에너지가 파동 쳐서 전자가 되고 뭣이 되고 한다는 그런 정도뿐인 것이지 물(物) 자체 물 자체를 아인슈타인도 몰랐단 말입니다. 그러니 일반사람들이 알 수가 있겠습니까. 성자만이 물 자체를 아는 것입니다. 성자의 눈으로 본다고 할 때에는 영생의 광명이 우주에 충만해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인이 보면 다 성자같이 보이고 우리 중생이 보면 다 중생으로 보인다 말입니다. 이른바 부처가 보면 부처로 보이고 개가 보면 개로 보인다는 그런 여러 가지 재미스러운 말도 있습니다마는 아무튼 성자들이 본다고 생각할 때는 성자는 겉만 안봅니다. 성자는 겉은 허망한 것이고 겉은 실존(實存)이 아니니까 말입니다. 성자가 본다고 생각할 때는 잘나나 못나나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다이아몬드나 금이나 하나의 움직이고 있는 가상인 것이지 실지로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현대물리학도 증명했습니다마는 사실은 물질이 있지가 않다 말입니다. 공간성도 시간성도 물질도 사실은 현대 물리학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에는 실존이 있지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이 몰라서 있다고 본다 말입니다.


공산주의 사회가 붕괴가 된 것은 가장 큰 허물이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인간을 물질로 봤단 말입니다. 물질로 보기 때문에 그냥 물질이 평등분배(平等分配)만 하면 된다. 물질이 생산만 많으면 된다. 소중한 영생불멸한 생명자체가 우리 마음인데 그것이 우리 인생 주인공(主人公)인데 그걸 모르고서 이 몸뚱이만 보고 인간은 물질이다 이런데서 인간을 함부로 했다 말입니다. 마음대로 압제(壓制)한다 하더라도 물질이 평등만 하면 된다. 따라서 진리를 벗어난 어느 이론이나 필연적으로 붕괴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사 자본주의 사회도 물질만능(物質萬能)시대가 되고 이른바 물신주의(物信主義)라 물질을 너무 숭배한다고 생각할 때에는 그도 역시 오래 안가서 파멸되는 것입니다. 과감한 수술을 해가지고서 영원한 바이블 위치에 또는 불경위치에 성자의 지혜(智慧)로 해서 취사선택을 해야지 그냥 이대로 간다고 생각할 때는 역시 낭떠러지에 떨어지고 맙니다.


앞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리 인생의 본질은 영생불멸한 생명입니다. 우리가 하나의 풀포기를 본다 하더라도 풀포기란 푸르고 또는 그 꽃이 피어서 붉은 꽃을 피우고 그런 것은 가상인 것이지 그것도 역시 본바탕은 영생불멸한 생명입니다. 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본다 생각할 때 흙은 그냥 흙으로 보겠지요. 질소 성분과 수소 그런 것들이 적당히 응고가 돼서 흙이라 봅니다. 그러나 물리학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렇게 보시지 않지 않습니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영생불멸한 그 자리를 바로 볼 수 있는 성자의 눈으로 본다고 생각 할 때 흙도 역시 하나의 생명체(生命體)로서 숨 쉬고 있다 말입니다.


자연공해(自然公害)는 어떻게 해서 발생하는 것인가? 데카르트나 뉴턴이나 그분들 이후로 해서 한 300년 동안에 그야말로 참 인류의 과학만능시대가 현란하게 꽃이 피었습니다마는 데카르트나 뉴턴이후에 이른바 근대적 사고라 하는 것은 물질(物質)과 정신(精神)은 둘로 본다 말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을 둘로 본다 말입니다. 그런 이분법(二分法)으로 해서는 자연공해를 우리가 극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주를 하나의 생명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땅도 살아있고 물도 살아있고 다 살아있습니다. 남한테 함부로 한다고 생각할 때에 남과 나와 본 생명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남을 헤치면 자기도 헤침을 받는다 말입니다. 남이 불행하면 자기도 불행한 것입니다. 우리가 흙을, 대지(大地)를 함부로 하면 거기에 보복을 받는다 말입니다. 따라서 ‘일체 우주가 하나의 생명으로 구성돼있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는 자연을 함부로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주(모두가 한생명인 진리)를 벗어난..., 인과(因果)의 법으로 본다고 생각 할 때에 나와 남도 인과의 도리로 같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고 저 한국에 있는 어느 거지 한 사람도 나와 생명적으로 같이 연결돼있습니다. 소말리아에서 하루에 몇 백 명씩 아사해 죽는 셈인데, 그 사람들과 소말리아에서 아사 하는 그 사람들과 우리가 절대로 무관하지 않다 말입니다. 우리 종교인들은 종교를 안 믿는다 하더라도 우리 인간들은 본질적으로 문제를 생각해야 합니다. 소말리아에서 지금 쓰러지고 있는 그 분들과 나와 둘이 아니다 같은 생명이 연결돼있다 이렇게 생각을 할 때에 우리가 함부로 먹고 함부로 춤추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저는 토인비의 말을 기억합니다. 토인비가 원자력(原子力)시대에 있어서 우리 인류가 대량적으로 집단자살(集團自殺)을 피하기 위해서는 우리 인간들이 누구나가 다 석가나 예수나 공자나 그 분들이 도달한 인생관까지 우리 수준을 높여야지 그러지 않고서는 이대로 가다가는 원자력시대에 있어서 우리 인간들이 집단자살을 면치 못한다.


나 따로 있고 너 따로 있고 이렇게 생각할 때에는 아무리 선량한 분이라 하더라도 역시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먼저 자기의 큰일을 도모하겠지요. 또는 어려운 고비에 있어서는 자기만을 생각 아니 할 수도 없습니다. 그와 같이 성자가 아닌 우리 중생이 이 몸뚱이보고 나라고 생각하고 이 몸뚱이가 내 소유라고 생각하고 이런 한에서는 위선적인 행동을 피할라야 피할 수가 없습니다. 석가의 정도 예수의 정도 또는 세인트프란시스나 또는 아우구스티누스나 그런 정도가 돼야 비로소 위선을 떠난다 말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는 엄격하게 자기를 반성해야 되는 것입니다. 성자의 차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는 모두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원죄(原罪)를 짊어지고 있다 말입니다.


불교말로 하면 근본무명(根本無明) 근본무지(根本無智)를 못 떠나고 있습니다. 근본무명 무지는 무엇인가 그것은 나의 실존도 미처 못 보고 우주의 실상도 못 보고 있단 말입니다. 가상만 보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실상을 볼 것인가 어떻게 해야 성자가 될 것인가.


따라서 성자가 되지 않은 한에는 내 생명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갈 것인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바로 살기 위해서는 참다운 어버이가 되고 참다운 스승이 되고 참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누구나가 다 성자가 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만이 불교인만이 수도(修道)하고 마음을 닦고 행위를 바로 잡아야 되는 것이 아니라 누구다가 다 그래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자기가 자기 자신을 모르고 사니까 말입니다. 어떻게 해야 자기 스스로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자리, 우주의 본질인 영원한 그 자리를 알 것인가?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기도(祈禱)를 모시고 바이블을 외고 불경(佛經)을 외고 염불(念佛)을 하고 참선(參禪)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름으로 아멘을 하고 그렇게 하는 것도 역시 하나님 자리를 순간도 떠나지 않기 위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불교인의 참선도 역시 왜 하는 것인가. 인생과 우주의 본래면목자리, 본래 고향자리 그 자리가 바로 불심(佛心)이고 부처님인데 그 자리를 떠나지 않기 위해서 우리 마음을 그 자리에다 머물게 하기위해서 이렇게 참선한단 말입니다. 염불은 무엇 때문에 하는 것인가.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나 아미타불(阿彌陀佛)이나 모두가 다 영생불멸(永生不滅)한 그 자리의 이름을 부르면서 영생불멸한 생명자체의 대명사를 외면서 그 자리에다 우리 마음을 두기위해서 순간찰나도 우리 마음을 떠나지 않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수와 적과 싸운다고 생각할 때는 싸우다 말다 싸우다 말다 하면 다시 원수 적군이 자기 세력을 만회해가지고 공격을 하겠지요. 따라서 적을 공격할 때는 적이 숨 내킬 겨를도 안 주고서 공격을 집중해야 적을 정복을 할 수 있단 말입니다. 그와 똑같이 우리 종교인들은 우리 번뇌 마음의 번뇌를 가장 큰 원수로 봅니다. 자기 몸뚱이만 생각하고 또는 자기 소유만 생각하고 진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에는 무아(無我) 무소유(無所有)이라 사실은 자기 몸뚱이도 내 것이 아니거든 따지고 본다고 생각할 때는 내 집이요, 내 것이요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번 과거 전생을 돌이켜 본다고 생각 할 때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금생만 몇 십 년 동안 국한된 금생만 이 몸이 있는 것이지 과거 전생에도 없었고 또는 죽은 뒤에 어디 가서 이 몸이 있을 것입니까 흔적도 없단 말입니다. 내생 가서는 우리가 지은대로 우리 번뇌 따라 다시 몸을 받는단 말입니다. 우리 몸을 제아무리 잘 먹이고 잘 입히고 곱게 꾸민다 하더라도 죽을 때는 이 몸뚱이는 간다는 말도 없습니다. 가장 잔인한 배신자(背信者)가 우리 몸이란 말입니다.


앞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영생불멸한 부처님자리, 하나님 자리, 우주의 진리 자리, 진리나 부처님이나 하느님이나 또는 광명(光明)이나 똑같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참선을 하고 기도를 많이 모신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기가 정화(淨化)가 된 만치 광명(光明)을 체험(體驗)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 보고 광촉(光觸)이라 빛 광(光)자 접촉할 촉(觸)자 광촉이란 말입니다. 기도나 참선이나 염불이나 또는 바이블이나 성자의 가르침을 받들고서 우리 마음을 거기에 의지해서 오로지 닦아나간다고 생각할 때 틀림없이 자기라는 관념을 차근차근 떠나고 맙니다.


일체중생(一切衆生)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모든 걸 다 바쳐야 되겠다. 이런 마음이 강할수록 우리한테 광명(光明)이 더욱 더 강렬한 치열한 빛으로 비쳐옵니다.


기독교 가르침이나 불교 가르침이나 제가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제가 생각할 때는 영생불멸한 그 자리, 생명자체의 자리에다가 우리 마음을 항시 머물게 하고 그와 동시에 모든 이웃들 사람뿐만이 아니라 개나 소나 돼지나 또는 식물이나 자연의 물이나 흙이나 모두를 다 자기 몸같이 사랑한단 말입니다.


본래가 둘이 아니기 때문에 동일철학(同一哲學)이라 동일률(同一律)이란 말입니다. 스피노자 철학이나 또는 하이데거 철학이나 또는 키에르케고오르 철학이나 모든 위대한 철인들은 동일률이라, 우주를 하나의 생명으로 봅니다. 그렇게 돼야 사람끼리도 참답게 화합할 수가 있고 자연도 훼손을 함부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고서 뉴턴 식으로 또는 데카르트 식으로 자연은 자연이다 우리가 아무렇게나 이용해도 무방하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는 우리 인간만의 행복을 위해서 수탈과 약탈과 파괴를 함부로 한단 말입니다. 절대로 둘이 아닙니다. 하나의 생명이란 말입니다. 하나의 생명이 끈으로 해서 이어져 있습니다.


또는 잘 모르는 분들은 그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하나님과 나와는 둘이 아닌가. 따로따로 별도가 아닌가. 부처와 나는 다르지 않는가. 불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나 그리스 철인들이나 또는 현대 철인들이 본다고 생각할 때에는 둘로 안 봅니다. 하나님과 나도 둘도 아니고 부처와 나도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다만 우리 중생은 원죄에 가리어서 원죄를 극복하지 못하고서 우리 무지를 조복을 받지 못하고서 우리가 범부 중생으로 있기 때문에 둘인 것이지 우리 마음이 본질을 떠나서, 우리 마음이 이른바 명경지수(明鏡止水)라 조금도 때가 없는 거울같이 고요한 물같이 마음에 탐욕심에 파동이 안치고 또는 분노하는 마음에 파동이 안치고 이런다고 생각할 때는 영원자와 나와 하나가 돼버린다 말입니다.


달라이라마가 있는 티베트라든가 인도의 요가라든가 모두가 다 따지고 보면 다 같은 추이입니다. 같은 길입니다. 라마 크리슈티나도 한 말이 불이일원론(不二一元論)이라 둘이 아니고 결국은 하나의 주의란 말입니다. 따라서 모든 종교는 목표는 다 같단 말입니다. 현대는 그런 때입니다. 현대는 각 제도적인 종파간에 종교간에 벽을 무너뜨리는 때입니다. 무너뜨리지 못하면 결국은 자기도 죄를 범하고 사회에도 참다운 도움을 못 주는 것입니다. 우리 불교도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한국에서 얼마나 추태를 많이 보입니까?


현대문명은 현대물리학은 옛날 성자들이 밝힌 것을 말은 같지 않다 하더라도 차근차근 지금 껍데기를 벗기고 있습니다. 일체존재가 허망무상한 것을 현대물리학은 증명 합니다. 본래로 공간성이 없고 시간성이 없고 본래로 물질은 없는 것이다. 다만 에너지만 존재한다. 에너지 불변의 법칙이란 말입니다. 에너지가 그때그때 인과의 법칙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물질적으로 물질화 된 것이지 본래적인, 변치 않는 일정불변(一定不變)한 물질은 본래 없다. 그건 여러분들께서 다 아시지 않습니까. 다만 현대물리학이 모르는 것은 순수 에너지 자체(自體)가 무엇인가? 그건 모른단 말입니다 그것은 성자밖에는 모릅니다. 왜 모르는가 하면 때 묻은 중생의 눈, 원죄에 가리고 무지에 가린 중생의 눈으로는 공간성이 없는 세계를 볼 수가 없습니다. 체험(體驗)를 못하는 것입니다. 공간성이 없는 생명자체는 청정한 성자의 안목에서만 체험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적어도 내가 내 생명의 본질을 안다. 이렇다고 생각할 때는 꼭 그 자리를 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린바와 같이 참다운 어버이가 되기 위해서도 내가 무엇인가 또는 그대가 무엇인가 알아야 됩니다. 모르고서는 참다운 어버이가 못되지 않습니까. 남을 가르친다 하더라도 자기 전공이 어떤 분야이든 간에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야 참다운 스승이 되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어떤 누구도 의무적으로 영생불멸한 성자의 길을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영생불멸한 그 자리는 완벽한 행복자리입니다. 어떤 것도 다 갖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불행을 느꼈습니까?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불행을 느낀 분이 아니란 말입니다. 몸뚱이 그것은 죽이나 죽임을 받으나 또는 어디가 아프나 그런 것은 아무 문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왜 그런가하면 비록 몸뚱이는 그대로 두고 간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생명은 영생의 나라에 다시 돌아간다 말입니다.


요새 시한부 종말론으로 해서 모두 이상한 말을 많이 했지요. 예수님의 재림(再臨)은 몇 년 뒤에 어느 날 갑자기 오신 것은 아닙니다. 우리 마음이 청정(淸淨)해야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것이지 어두운 중생들의 마음은 예수님이 천만번 나오고 석가(釋迦)가 천만번 나온다 하더라도 알 턱이 없습니다.


우리는 바이블이나 불경이나 고도한 성자만이 알 수 있는 그런 도리는 상징과 비유로 돼 있기 때문에 우리 중생들은 제대로 잘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닦여져서 우리 마음이 광명(光明)을 스스로 체험을 해놔야 아~ 그렇구나, 그렇구나! 이런 말은 이런 도리구나 알맹이는 이런 것이구나, 짐작을 한다 말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마음이 청정하면 기도를 한 시간 모시면 모신만치 우리 마음은 영생으로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몸도 마음도 더욱 더 광명으로 빛나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몸과 마음은 다르지 않나 하지만 우리 마음이 가장 안온하고 행복스럽고 건강할 때 우리 몸도 가장 건강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하고 부처님을 생각하고 영생의 자리를 우리 마음에 둔다고 생각할 때 우리 몸도 제일 좋은 것입니다.


따라서 정말로 순수하게 우리마음을 영생의 자리에 두고서 영생의 광명을 훤히 생각만 한다 하더라도 우리한테 있는 나쁜 병소(病所) 가사 에이즈라든가 암이라든가 그런 것은 우리가 사무친다고 생각할 때는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니라고 저는 확신을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영생불멸의 자리는 무한의 가능의 자리입니다. 에이즈 병 하나 고치고 암균 하나 죽이는 것은 아무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사무치게 그렇게 못 된다 말입니다. 자꾸만 모양에 걸립니다. 허망한 자기 몸뚱이의 노예가 됩니다.


자기를 가장 사랑하는 길은 역시 영생불멸한 그 자리로 우리 마음이 한 걸음씩 가는 것입니다. 자기 아내나 남편을 사랑하는 가장 좋은 길도 같이 더불어서 영생의 길로 한 걸음씩 나가는 것입니다 누구한테나 다 그렇습니다. 친구한테나 누구한테나 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돼야만 아까 말씀드린 인종적인 문제 자연공해문제 또는 단체의 여러 가지 반목 문제 국제간의 문제 이런 문제가 홍로일점설(紅爐一點雪)이라 마치 뜨거운 화로에 한 점 눈이 들어가면 금시 녹아버리듯이 어떠한 번뇌나 우리마음을 영생에다 두고서 영생을 흠모하고 영생의 고향을 추구한다고 생각할 때는 어려운 문제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 광촉(光觸) 빛날 광(光)자 접촉할 촉(觸)자 광촉을 잘 기억해두십시오. 우리 마음이 정화가 되면 꼭 광명을 체험을 합니다. 그 광명은 훤히 빛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정화되면 정화된 거기에 정비례해서 더욱 더 빛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나 석가 그분들은 천지우주가 광명세계(光明世界) 광명뿐이다. 그 세계가 바로 극락세계(極樂世界)입니다. 광명정토(光明淨土)라 광명세계란 말입니다.


광명세계를 우리가 체험할 때는 자기도 모르는 영원의 멜로디가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들려온다 말입니다. 우리는 그냥 좋은 오르간 좋은 음악 이런 것만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보다도 훨썩 훌륭한 멜로디가 우리 귀에 들려옵니다. 다만 우리 마음이 거칠어서 못 듣는 것입니다. 이 표현을 불경에 보면 화명애아(和鳴哀雅)라, 평화로울 화(和) 울릴 명(鳴) 슬플 애(哀) 맑을 아(雅), 평화스럽고 애절하고 영원스러운 맑은 멜로디가 우리한테 항시 들려온다 말입니다. 그런 소리를 들을 때는 설사 애매하게 누가 자기 목에다 칼을 꽂는다 할지라도 두렵지 않다 말입니다. 누가 나를 죽인다 할지라도 그대가 나를 왜 죽여 그런 말이 나오지 않는다 말입니다. 이렇게 살면 되는 것입니다. 꼭 그렇게 하셔서 이 자리에 축복(祝福)된 여러분들 대단히 참 유타까지 오셔서 복스러운 분들이십니다. 우리 신부님도 아까 만나 뵀습니다만 얼굴이 굉장히 미남이시기도 하고 참 덕 있는 분이십니다. 이런 분도 만나 뵙고서 행복스럽게 생각합니다. 더욱 분발하셔서 절대로 종교의 벽을 너무 두지 마십시오. 인연 따라서 자기가 절에 가든 또는 교회 가든 말입니다. 또는 몰몬교를 믿든 그런 것은 좋습니다. 그건 인연이니까 좋으나 그렇더라도 다른 종교와 본래가 하나다 성자의 길은 둘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셔야 죄를 범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야 우리가 오는 참다운 시대 이른바 냉전시대가 끝나는 참다운 세계에 있어서 참다운 정말 하나의 종교가 됩니다.


꼭 하나의 종교를 위해서 우리가 노력하고 분투를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종교를 위해서 분투하시기 위해서는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인생과 우주의 본래 생명자리 그 광명자리 행복과 영생과 모든 능력을 다 갖춘 그 자리<상락아정(常樂我淨)의 자리>를 항시 생각하시면서 그 자리를 가까이 하셔서 꼭 광촉, 광명을 접촉하시기 바랍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19921000-미주 유타법문-청화(淸華)큰스님

19921000-녹음-정훈스님

20020310-DB(wav,mp3)구축-본정

20130421-??보살 녹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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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촬영하신 분이 있으시면 연락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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