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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마음의 고향

제25집 마음의 고향 2. 일승삼보(一乘三寶)

2. 일승삼보(一乘三寶)

 

삼보(三寶)를 우리 불자님들은 모르시는 분 없이 다 아십니다. 불보(佛寶), 법보(法寶), 승보(僧寶) 그 정도는 아십니다. 삼세제불(三世諸佛)이 바로 불보이고, 부처님께서 설하신 성불(成佛)의 법이 법보이고, 그에 따라서 실천하는 불자님들이 승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렇게 아는 것은, 이른바 한계가 있는 삼보(三寶)입니다.

 

삼보에도 삼승삼보(三乘三寶)가 있는데, 사성제(四聖諦)의 가르침을 들어 성불해 가는 불자님들이 성문승(聲聞乘)이고,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이나 우주의 도리를 탐구해서 성불해 가는 불자님들이 연각승(緣覺乘)입니다. 보살승(菩薩乘)은 우리가 한사코 성불(成佛)하고자 해서 무량중생(無量衆生)한테 베풀고 대자비심(大慈悲心)으로 실천행을 따라서 성불하는 그런 불자님들이 보살승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구분하는 삼보를 삼승삼보라 합니다. 삼승삼보란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과 같은 부류의 불자님들이 하는 정도의 삼보 해석입니다.

 

불교와 다른 종교와의 구분이라 하는 것은, 삼보가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서 구분되지 않겠습니까? 삼보가 있으면 불법(佛法)이고 삼보가 없으면 외도(外道)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상식적으로 보통 알고 있는 것은 삼승삼보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작 조금도 가림이 없이 무장무애(無障無礙)하게 거리낌 없이 성불하고자 할 때에는 일승삼보(一乘三寶)에 귀의해야 합니다.

참선법(參禪法)이라든가, 방편(方便)을 떠나버린 법들은 모두가 다 일승삼보에 해당하는 셈입니다.

 

그러면 일승삼보란 어떠한 것인가? 이것은 우리가 공경하는 불보와 법보와 승보가 셋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그런 뜻을 분명히 깊게 새겨야 합니다.

우리는 ‘부처’라 하면 우리 중생과 다르게 생각하고 또한 ‘부처님 법’이라 하면‘ 아직 미혹한 우리들은 법(法)과는 별로 상관이 없지 않은가? 우리가 애쓰고 공부하면 법을 좀 알 듯 말 듯하지 않은가?’ 이렇게만 생각합니다만, 그 존중하는 부처님 팔만법장(八萬法藏)을 위시해서 무량(無量)의 불법(佛法), 또는 삼승성자(三乘聖者)를 위시해서 자기에 이르기까지, 또는 우리 인간도 미처 미달된 아수라(阿修羅)세계라든가, 축생계(畜生界)나 아귀(餓鬼)나 지옥(地獄)세계나 이런 것도 모두가 다 일승삼보(一乘三寶)일 때에는 승보(僧寶)에 해당합니다. 다 중에 해당한단 말입니다.

 

어째서 꼭 그런 일승삼보, 이른바 불보나 법보나 승보나 제한 없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인가? 또는 모르면 어떨 것인가? 현대사회는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다 물질문명 속에 살고 있습니다. 과학과 기술 속에 가지가지 혜택을 보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체로 현대인들은 과학의 노예로 지금 전략되어 있습니다. 풍요한 물질이라는 것은 대부분 다 과학과 기술에서 나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과학이 불보나 법보나 승보나 나나 너나 이것이나 저것이나 갈라서 보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불보 따로 생각하고 법보 따로 생각하고 승보 따로 생각하고, 나와 남을 따로 생각하고, ‘나와 남은 절대로 다른 것이다. 물질과 정신은 절대로 한 가지 것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런 견해는 사실은 현대 물리학 만큼도 깊이가 있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현대물리학은 적어도 ‘물질은 모두가 하나로 돌아간다. 만법귀일(萬法歸一)이라, 만 가지 모든 법이 하나로 돌아간다.’ 이런 도리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만법으로 돌아가서 물질은 모두가 다 에너지로 귀일된다. 따라서 이것이나 저것이나 어떠한 것이나 에너지의 형상화가 아님이 없습니다. 달이나 해나 저 은하계나 우리 인간이나 모두가 다 에너지의 형상화가 아님이 없습니다.

우리가 소중히 아끼는 귀금속이나 무쇠나 흙덩어리나 모두가 다 겉만 차이가 있는 것이지 본질적으로 볼 때는 에너지의 화신입니다.

 

현대물리학은 이렇게 만법귀일이라, 모든 법이 하나로 돌아가는 것을 분명히 증명하고 있는데 우리가 부처님 법을 옛날식으로, 불보는 불보 따로 있고 법보는 법보 따로 있고 승보는 승보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면, 부처님 법을 믿는 태도가 너무나 시대에 뒤떨어진 신앙밖에는 안 됩니다.

과거 미개한 때는 방편(方便)이 필요했지만 현대에는 방편이나 상식으로 통하지 않습니다. 가령 우리가 기도를 모신다고 하더라도, ‘내가 잘 되고 사업도 잘되고 내 자녀들이 영달하기를’ 바라는 식으로 기도를 모신다고 하면, 이것도 역시 전근대적(前近代的)인, 과거의 방편적인 기도밖에는 안 됩니다.

 

그럼 현대적인 기도는 어떻게 모실 것인가? 본질적인 본 성품을 여의지 않아야 합니다. 본질적인 본 성품을 여의지 않아야 불교의 근본목적인 해탈(解脫)로 가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해탈로 가기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문제가 상(相)을 여의는 문제 아니겠습니까? 우선 ‘나’와 ‘남’을 딱 설정하고 ‘다른 사람은 실패하든 말든 나만 잘 되면 된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부처님 도리인 본 성품과 배치가 되는 것입니다. 본 성품으로 볼 때는 절대로 둘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가 기도를 모신다는 그런 문제를 위해서도 그렇고, 어떠한 문제를 위해서나 철학적인 기본 기조(基調), 철학적인 근거가 없으면 바른 것이 되지 못합니다. 철학적인 바른 기조란 무엇인가?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모든 것을 본질적으로 본다는 말입니다.

 

본질적으로, ‘내 성품은 무엇인가?’ 또는 ‘나와 상대적인 저 사람의 성품은 무엇인가?’ 또 ‘다른 나라, 다른 국민의 성품은 무엇인가? 다른 일체 동물의 성품은 무엇인가? 식물이나 기타 우주만유(宇宙萬有)에 있는 모든 본래적인 성품은 무엇인가?’ 이런 성품까지 알아야 이른바 현대적인 사고인 동시에 철학적인 사고란 말입니다. 따라서 현대는 꼭 철학적인 사고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이러다 보면 자칫 부처님 가르침이 너무나 바싹 말라 무미건조하게 됩니다만, 부처님 가르침은 그런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바로 생명자체란 말입니다. 따라서 아까 말씀드린 일승삼보란, 불보나 법보나 승보가 셋이 아니란 말입니다. 왜냐하면 천지우주(天地宇宙)는 오직 하나의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둘이나 셋으로 구분한 것은 우리 중생이 잘 알아먹지 못 하니까 그때그때 방편으로 구분을 했습니다만 법신여래(法身如來)란 말입니다.

 

또는 법성(法性)이나 불성(佛性)이나 같은 뜻이 되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모두가 다 조금도 한계가 없는 법신여래, 법신(法身)은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바로 생명이 안 되겠습니까.

이런 생명을 우리가 철학적으로 탐구한다 해서, 이것저것 다 부정해서 공(空)이 되고, 공을 통과해서 진공묘유(眞空妙有)가 되고, 이렇게 이론적으로만 따지다 보면 결국은 무미건조해 버립니다.

그러기에 참선을 하거나 기도를 모실 때는 복잡한 교리를 떠나서 오직 마음과 마음으로, 우리 마음의 깊이를 탐구해 들어가 공부하는 방식을 취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바로 생명입니다. 생명이기 때문에 이것이 종교입니다. 다만 무질서한 생명이 아니라, 우주의 본질적인 생명이기 때문에 바로 철학이란 말입니다.

오늘은 정기법회를 모처럼 하는 날이기 때문에 제가 무슨 말씀을 좀 많이 하려고 생각을 했었습니다만, 저 밖에서 의자에 미처 앉지도 못하고 서 계신 분들이 있기 때문에 송구스러워서 많은 말씀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주의 생명을 하나의 생명 자체적인 면에서 볼 때에는 부처 불(佛)자, 보배 보(寶)자, 바로 불보(佛寶)입니다. 모든 공덕과 일체지혜(一切智慧)와 자비공덕(慈悲功德)을 다 갖추고 있는 그런 도리가 가득 차 있는 면에서 볼 때에는 법보(法寶)입니다.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바로 생명자체, 우주 전체, 처음도 없고 끝도 없고 낳음도 없고 죽음도 없고 그런 무량무변(無量無邊)한 우주의 생명체, 그런 면에서 볼 때는 바로 불보인 것이고, 그 불보가 아무렇게나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일체 자비. 지혜, 능력, 행복, 다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무량의 보배를 다 갖추고 있는 그런 면에서 볼 때는 이른바 다보여래(多寶如來)입니다. 많을 다(多)자, 보배 보(寶)자, 한도 끝도 없는 보배가 갖추어 있단 말입니다.

또는 그 자리가 심심미묘(甚深微妙)하기 때문에 묘색신여래(妙色身如來)입니다. 그 자리는 바로 청정미묘(淸淨微妙)한 광명으로 충만되어 있기 때문에 묘색신여래라, 우리가 보는 그런 물질이 아니라 광명의 세계란 말입니다.

 

또는 그 자리는 일체 공포를 다 떠나 안락하고 그야말로 자유와 평등과 모두를 다 원만하게 갖추고 있기 때문에 ‘리포외(離怖畏)l라, 두려움을 떠나버렸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죽음 같은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본 성품을 몰라서 그럽니다. 본 성품 그 자리에서는 본래 죽음이 없어서 그 자리만 지향(志向)한다고 생각할 때, 그 자리와 하나가 된다고 생각할 때는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공포의 가장 극단적인 것이 죽음 아닙니까? 우리가 ‘두렵다, 무섭다’하지만 결국은 죽음을 전제로 하니까 두려운 것이지 죽음이 없다고 생각할 때는 공포가 생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와 같이 공포를 다 여의고 대자유, 대해탈, 그런 면으로 볼 때에 리포외 - 두려움을 떠나버린 부처님입니다.

 

또는 부처님 자리에서는 일체 행복을 다 갖추고 있기 때문에 안락무우(安樂無憂) - 안락하고 행복할 뿐입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는 감로왕여래(甘露王如來)입니다.

이렇게 그때그때 부처님 공덕을 따라서 그렇게 많은 찬탄을 하는 명호(名號)가 붙습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의 부처님입니다. 이런 모든 성공덕(性功德)을 갖춘 그 자리가 부처님의 법보입니다. 우주의 원리인 동시에 모든 성공덕을 갖춘 그 자리가 법보란 말입니다.

 

그러면 승보는 무엇인가?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불보와 법보를 따라서 성불하는 길을 가셔서 위대한 깨달음을 얻으신 과거 조사 스님들, 그런 도인들은 다시 말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직 도인이 못 된 우리 불자님들도 모두가 다 승보입니다. 그러면 우리 불자님들만 승보일 것인가? 광범위하게 생명자체로, 본질적으로 볼 때는, 기독교 믿으나 이슬람교 믿으나, 도교(道敎)나 유교(儒敎)를 믿으나 모두가 다 승보입니다. 그러면 사람만 승보일 것인가? 일승삼보(一乘三寶)란 차원에서 볼 때는 사람만 승보가 아닙니다. 다른 동물, 다른 식물, 우주에 있는 유정(有情), 무정(無情), 식(識)이 있는 것이나 없는 것이나 유상(有相), 무상(無相), 우리 중생(衆生)의 눈으로 보이는 것이나, 안 보이는 것이나 모두가 다 승보입니다. 중 승(僧)자, 보배 보(寶)자입니다.

 

다시 되풀이해서 말씀드리면 천지우주(天地宇宙)의 생명 자체가 바로 불보이고, 불보에 간직해 있는 무량(無量)의 성공덕이 법보이고, 일체존재가 승보입니다. 따라서 다시 바꾸어 말씀드리면 삼보(三寶)는 바로 법보화삼신(法寶化三身) -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 삼신이나 같이 배대해서 얘기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법보화삼신으로 해서 모두가 하나의 원융무애(圓融無碍)한 우주의 생명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아까 제가 말씀드린 일승삼보입니다.

삼승삼보(三乘三寶)는 방편삼보(方便三寶)이므로, 일승삼보가 되어야 방편을 떠나버린 진실삼보(眞實三寶)입니다. 진실삼보가 되어야 우리 마음에 갈등을 느끼지 않습니다. 부처님공부라는 것은 마음에 갈등을 느끼지 않고 항시 안락하게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리 하려면 적어도 철학적으로 공부해야 합니다. ‘철학적’이라는 말은 본질적이라는 뜻이 되겠지요. 철학적이라고 하면 굉장히 어렵게 생각되겠지만, 철학은 본질적인 뜻입니다. 인생과 우주의 본래적인 것을 우리가 철학적이라고 말합니다. 사실은 철학적으로, 본질적으로 종교를 갖지 않으면, 불교를 믿는다 하더라도 불교 믿는 혜택을 별로 못 입습니다. 과학은 과학대로 철학은 철학대로 또는 다른 것은 다른 것대로 빙빙 돈단 말입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불교를 믿는다고 생각할 때는 불교라는 것 가운데 모두가 다 들어가 버립니다.

 

그러면 삼보, 일승삼보와 우리 마음은 어떠한 관계가 있는 것인가? 우리 마음이 바로 삼보입니다. 우리 마음이 바로 일승삼보입니다. 우리 마음 가운데 불보나 법보나 승보가 다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부처님을 믿는다 해도 마음 깨달으면 성불(成佛)하지 않는가.’ 이런 말을 누구나 다 합니다만 자기 마음의 실상(實相), 이런 문제에 관해서 깊이 생각하지 못하는 분이 있습니다.

자기 마음은 국한된 자기 몸뚱이에 담겨있는 신령스러운 기운이라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내 마음은 내 몸에 들어 있는 영혼이 아닌가?’ 이렇게 보통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야말로 우리 불자로서는 큰 탈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한, 불교의 혜택을 절대로 입지 못하는 것이고, 불교에서 말씀하고 있는 화합이라는 큰 덕목(德目)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내 마음은 네 몸 안에 들어있고, 그대 마음은 그대 몸 안에 들어 있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조금 자기한테 기분 나쁘면 옆 사람하고 그냥 속상해 하고 비방도 하고 그렇게 불화하게 되지요. 그러나 우리 마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이 어디에 있습니까? 머리에 있습니까? 뇌에 있습니까? 가슴에 있습니까? 다리에 있습니까?

 

톨스토이가 자기 마음을 천착(穿鑿)한 그런 글을 좀 봤습니다만, 자기는 머리카락부터서 발끝까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마음이 들어있는 데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 문제를 나중에 부처님 가르침을 보고 비로소, ‘그럼 우리마음은 밖에 있는가? 어디에 있는가?’ 자기 안에 있지 않으면 밖에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정말로 마음만 정확하게 사무치게 깨달아 버리면 그 자리가 바로 성불의 자리입니다.

 

따라서 우리 불교를 심종(心宗)이라고 합니다. 마음 심(心)자, 마루 종(宗)자, 심종이라 합니다. 불교고 뭣이고 이름 많이 붙이고 합니다만, 다 몰아서 이야기하면 우리 불교는 ‘심종’입니다. 바로 마음의 종파란 말입니다. 그러면, 마음 밖에 물질이 분명히 있는데, 물질은 거기에 대립되는 무엇인가?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모두가 마음으로 됐기 때문에 사실은 마음뿐입니다.

 

적어도 불교 가르침을 공부하신 분들이 ‘일체유심조’란 도리를 모르는 분이 있겠습니까? 대부분 다 아신단 말입니다. 모두가 마음뿐이겠지, 옆 사람이 자기를 손톱으로 좀 할퀴면 - 마음뿐인데 - 아프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보통 사람들이 성내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 것은 모두가 다 우리 마음의 본체를 사무치게 알지 못해서 그럽니다.

이런 것을 분석적으로 아는 가르침이 불교에서 ‘석공관(析空觀)’이라, 분석할 석(析)자, 빌 공(空)자, 볼 관(觀)자, 석공관이라 합니다. 내 몸뚱이도 분석해서 ‘공’으로 돌립니다. 또 환경에 있는 대상적인 모든 것을 다 분석해서 공으로 돌리는 그런 공부하는 방법을 ‘석공관’이라 하지요. 분석할 석(析)자, 빌 공(空)자 말입니다.

 

석공관을 간단히 말씀드리면, 가령 사람 몸뚱이도 분석해놓고 본다면 각 세포 아니겠습니까? 세포가 모였단 말입니다. 세포는 무엇인가? 세포는 각 분자(分子) 구조로 해서 적당히 결합한 것입니다. 분자(分子)는 무엇인가? 각 원소(元素)의 인연 따라서 모아진 결합체가 분자 아니겠습니까? 각 원자(原子)는 무엇인가? 원자는 마이너스 플러스 전자(電子)와 그 반대되는 양성자(陽性子)와 또는 중간되는 중성자(中性子)와 이런 것들이 모아있는 이것이 원자란 말입니다. 원자는 무엇인가? 원자는 눈으로는 도저히 볼 수가 없고 이론적으로만 겨우 알 수 있는 소립자(素粒子)라는 알갱이가 어떻게 진동하는가. 진동 여하에 따라서 마이너스가 되고 플러스가 됩니다. 이런 것이 전자가 되고 뭣이 되고 합니다.

 

소립자는 무엇인가? 소립자라는 가장 작은 알맹이 이것은 중성미자(中性微子)같은 아주 제일 적은 것은 공간성이 없습니다. 공간성이 없고, 또한 그 자리는 마이너스 전기나 플러스 전기 - 이른바 전하(電荷)가 없단 말입니다. 따라서 결국은 텅텅 다 비어버립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석공관(析空觀)은 이렇게 현대 물리학적으로 분석하지 않습니다만, 극유진(隙遊塵), 우모진(牛毛塵), 양모진(羊毛塵), 토모진(兎毛塵), 수진(水塵), 금진(金塵), 그렇게 되어 갑니다. 저 끝에 가서는 금진이라, 쇠 금(金)자, 티끌 진(塵)자입니다. 금진의 다른 이름이 금강진(金剛塵), 또는 금륜(金輪)이라 하지요. 그래서 일체 존재는 분석하고 분석해서 끝에 가서는 모두가 다 하나의 금륜이 되어버립니다.

 

이 말은 바로 현대 과학적으로, 물리학적으로 말하면 일체존재는 분석해 들어가면 모두가다 에너지가 되어 버린다는 말이나 똑같습니다. 그러면 분석한 뒤에 에너지가 되고, 또는 분석한 뒤에 금륜이 되는가? 이런 도리에 대해서 우리 불자님들도 상당히 회의를 느끼고 방황도 많이 합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반야심경(般若心經), 금강경(金剛經)같은 도리에서 색즉공(色卽空)이라, 물질이 바로 공(空)이란 뜻 말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분석해서 종당(終當)에 다 공이 된다’는 도리와, ‘색즉공이라, 색은 바로 물질이니까 물질이 바로 공이라’는 도리는 굉장히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상식으로 해서는 ‘분석한 뒤에 공인 것이지, 나도 물질이고 다 물질인데 왜 그대로 공일 것인가?’ 이렇게 의문을 품습니다.

 

맹인에게 검은색을 말하고 또는 노란색을 말하고 푸른색을 말하면 맹인이 그것을 납득할 수 있겠습니까? 맹인은 모를 것입니다. 그와 똑같이 번뇌에 때 묻은 우리 중생들한테, ‘천지우주는 부처님 광명으로 충만해 있다.’라는 말을 해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로 공부를 해가지고서 우리 안목이, 우리 마음이 밝아져서 천안통(天眼通)을 통하고 법안(法眼)을 얻으면, 또는 혜안(慧眼)을 얻고 청정불안(淸淨佛眼)을 얻어 청정불안으로 본다면 우리가 보는 듯이 이 사바세계를 보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자기 안목을 반성해야 합니다. 가끔 말씀드립니다만 우리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고 하면 우리가 보는 산이나 도인들이 보는 산이나 똑같이 생각할 것입니다. 대상은 한 대상이겠지요. 그러나 같은 산을 보고 같은 물을 본다 하더라도 같이 보지를 않습니다.

소동파(蘇東坡)는 중국 당나라 때의 위대한 문인인 동시에 정치가 아닙니까? 소동파가 깨달아서 산을 볼 때는, 산을 부처님의 청정법신(淸淨法身)으로 볼 것입니다. 그럼 시내에 흘러가는 물은 어떻게 보는가? 소동파가 볼 때는 부처님의 장광설(長廣舌)이라, 부처님의 사자후(獅子吼)같은 설법으로 봅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우리 중생들이 보는 견해와 똑같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을 반성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고 하면 우리가 보는 물 그대로 사실로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것은 실존적(實存的)인 사실이 아닙니다. 참말로 있는 존재가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허상(虛像)만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불자님들 공부하는 마음 자세가 가장 중요한 것은 객진번뇌(客塵煩惱)라 - 손 객(客)자, 티끌 진(塵)자, 번뇌(煩惱)를 객진(客塵)이라 합니다. 객진이란, 손님같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닌 티끌이란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이나 또는 다른 사람 마음이나 천지우주의 마음은 본래 청정무구(淸淨無垢)하기 때문입니다.

 

어려우시더라도 꼭 본질적으로, 철학적으로 불교를 알아야 합니다. 본질적으로 말하면, 우리 마음은 바로 청정법신입니다. 바로 청정하단 말입니다. 청정한데 우리가 인과(因果)의 법칙 따라서 그때 잘못 보아 무명(無明)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럼, 청정법신은 어디에 따로 있는 것인가? 청정법신이라 하면 같은 뜻인데, 바로 우주가 청정법계(淸淨法界)인 동시에 청정법신이라, 따라서 내 스스로나 우리가 미워하는 사람이나 또는 다른 동물이나 모두가 다 청정법계에 청정법신입니다. 따라서 사실은 그것은 모두가 물질이 아니란 말입니다.

주문을 외우시든 화두(話頭)를 참구하시든, 어떻게 하시든 간에 아까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청정법신 자리, 우리 자성(自性)자리, 본래면목(本來面目)자리를 분명히 이해하고 우리마음을 그 자리에 못 박으면서 공부해야 참된 공부가 됩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견해에 따라서 좋고 궂게 또는 나쁘게 보고 그릇되게 보는 것이지, 본래 청정법신 자리는 - 불교의 도처에 있는 바와 같이 - 나지 않고 죽지 않고 더하지 않고 덜하지 않고 또는 더럽혀지지 않습니다. 오직 청정하고 앞서 법보에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일체 모든 공덕을 갖춘 그 자리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이 번뇌라는 것은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중생이 잘못 봐서 ‘이것이다, 저것이다, 좋다, 궂다’ 이것이 번뇌 아닙니까? 괜스레 그와 같이 우리 마음으로 지어서 만드는 그것이 번뇌입니다.

‘나’라 하는 것도 ‘나’가 독립되어 있습니까? 독립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중생이 상식으로 볼 때는 내 몸뚱이, 내 소유 이렇게 독립해 있다고 생각하는데, 우리는 독립해 있지 않습니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지금 우주 법계는 전자력(電磁力), 전기나 자기의 파동 (波動)이 충만해 있습니다. 물리학은 그것을 증명해 있습니다. 이 공간 속에나 별 속에나 사람 몸속에나 전기나 자기의 에너지가 충만해 있습니다. 따라서 그런 전자력 파동이 파동치고 있는 것인데, 전자력 파동은 나에게만 있고 너에게는 없겠습니까? 전자력 파동이란 차원에서 볼 때는 나와 남이 딱 닿아 있습니다. 그 징그러운 독사하고 나하고도 딱 닿아 있고, 지금 딱 닿아 있습니다. 독사가 앞에 있을 때 ‘저 놈하고 나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겠지’ 하지만 전자력 차원에서 볼 때는 딱 닿아 있단 말입니다.

 

그럼 불성(佛性)은 무엇인가? 불성은 전자력보다도 더 근원적인 본질입니다. 이른바 가장 근원적인 물자체(物自體), 어떤 것이나 다 불성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없고 불성은 어디에나 충만해 있습니다. 불성이 어디에나 충만해 있다고 생각할 때, 불성 그것은 물질이 아니고 공간성이나 그런 것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미운 사람과 자기 사이에도 불성이 거기에 충만해 있습니다. 이런 도리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미운 사람, 곧 때려 죽이고 싶은 사람, 그 사람이 자기하고도 불성으로 딱 닿아 있단 말입니다. 이런 도리를 안다면, 어떻게 자기 것이라고 고집하고, 자기가 국회의원 되고자 해서 다른 사람 비방하고 중상모략 하는 짓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따라서 무슨 생명운동, 무슨 운동, 여러 가지 운동이 많이 있습니다만, 그런 운동을 한다 하더라도 다 좋은 것이지만,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철학적이고 본질적인 운동을 해야 합니다. 어버이가 자식을 사랑해도 철학적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 말은 무엇인가 하면, 우리 마음을 본래 불성자리에다 두고 사랑해야한단 말입니다. 그러면 자기 아들한테나 딸한테만 집착할 수가 없습니다. 습기(習氣)가 있어서 단박에는 제대로 안되겠지만, 그래도 너무 지나친 집착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구나 하고 그냥 반성하게 됩니다.

옛날에 한 장자(長者)가 있었는데, 장자니까 부자 아니겠습니까? 부자인데 내외간에도 참 잘 만나서 부부간 금슬도 화락(和樂)하고 아들도 출중한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부자니까 자기가 데리고 있는 종이나 그런 사람들도 많이 있었겠지요.

 

그 사람이 너무 부자이니까 임금도 시기를 하고 대신들도 시기 질투를 했습니다. ‘저놈 재산을 어떻게든 몰수해야 할 것인데’ 하고 말입니다. 옛날에야 그냥 전제주의 시대인지라 그럴 수도 있었겠지요. 그래서 역모를 했다는 중상모략을 해가지고 무슨 올가미를 씌워서 잡아들였단 말입니다. 반역을 해가지고 역적질 했다는 것으로 해서 잡아들였는데 워낙 그런 근거가 없으니까 차마 죽이기가 곤란해서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를 제시했습니다.

임금님께서 장자를 불러놓고 하는 말이, “여기에서 한 천리쯤 가면 한 성(城)이 있는데, 그대가 이레 안에 여기까지 돌아온다면 그대와 그대 자식이나 종들이나 재산이나 모두를 다 그대로 돌려주고 용서하겠다고 분부했습니다. 천리 길을 도보로 이레 안에 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못 간다고 할 때는 자기도 죽고 자기 가족도 다 죽고 재산도 몽땅 빼앗기게 되겠지요. 그래서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해서 갔습니다.

 

우리는 우리 인간의 힘을 절대로 국한시켜서는 안 됩니다. ‘내 머리는 이 정도 밖에는 아니다.’라고 스스로 힘을 제한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의 힘이란, 본래가 부처이기 때문에 정말로 용쓰고 발휘하고 자기 스스로 편달(鞭撻)하면 부사의(不思議)한 힘을 꼭 내는 것입니다.

저도 6.25 전쟁 때 어떻게 이상한 일이 생겨 가지고 쫓겼습니다. 밤인데, 제 집에서 저 바닷가로 나가 배를 타고 도망갈 판인데, 제 집에서 바닷가로 가려면 한 사십 리나 됩니다. 그런 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배가 닿는 곳 까지 가는 길에는 언덕도 많이 있고 아주 험준한 데가 많이 있습니다. 평소 같으면 도저히 함부로 가지 못합니다. 그런데 사십 리 길을 그야말로 밤에 자빠지고 넘어지며 가도 어디 상처 하나도 나지 않고 갔습니다. 제가 보기엔 삼십분 안에 거기까지 가버렸습니다. 참 그걸 생각할 때에 죽을힘을 다하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부사의 한 힘을 냅니다.

 

그 장자도 그야말로 이레 안에 당도 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하룻밤 자고 다시 또 이레 만에 이쪽 임금님 있는 데로 왔습니다. 그러니까 임금님도 할 수 없이 그가 미웠지만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장자는 석방이 되었습니다. 이럴 때에 장자가 용쓴, 용맹 정진한 힘은 굉장히 가상한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불자님들이 부처님 법을 위해서 보살행을 한다고 생각할 때에 ‘내 몸뚱이 산다. 내 자식 살린다. 내 재산을 몽땅 그대로 보전한다.’ 그렇게 용쓰고 하는 것과 일반 중생들한테 베푸는 것 가운데 가장 좋은 베풂이 무엇인가? 그것은 본래 부처인 것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본래 부처인 것을 깨닫게 하는 공덕이 어째서 클 것인가? 이것은 우리가 다 아는 문제 아닙니까? 본래 부처인 것을 깨닫는다고 생각할 때는 금생(今生)에 함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우리 불자님들을 가끔 만날 때에 이따금은 제 마음으로 서글플 때가 있습니다. 어째 그런가 하면, 아무런 필요 없이 소모한단 말입니다. 아무런 필요 없이 자기 이웃을 미워하고 서로 불화스럽게 지낸단 말입니다. 자기를 위해서나 남을 위해서나 남하고 불화할 만한 아무런 까닭이 없습니다. 뭣 때문에 그러는 것인가?

우리 스님네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태안사에 살고 있다고 다른 스님네가 들어오면 “같이 사십시다. 제가 있는 것이 거북하면 저는 나가겠습니다.” 그러면 될 것을 남하고 다툴만한 아무런 까닭이 없습니다.

 

자기 집이나 자기 재산 남한테 다 줘버린다 하더라도 사실은 손해 볼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자기 공덕만 남습니다. 금생은 참 꿈 같이 허망합니다. 좋은 사람이나 궂은 사람이나 미운 사람이나 사랑하는 사람이나 모두가 다 얼마 가지 않아 흔적도 없이 갈 사람들입니다. 오늘 일을 모르고 내일 일을 모르는 것이 인생 아니겠습니까? 정말 허망한 것입니다. 그런 허망한 인생 가운데 남한테 좋은 공덕을 짓는 것은 죽어서도 공덕으로 남는 것입니다.

자기 아들이 학교에 못 들어간다 하더라도, 그것도 조금도 손해가 아닙니다. 지금은 못 들어갔기 때문에 그것이 인(因)이 되어서 더 잘 될 수가 있습니다. 지금 잘 된 것이 도리어 나중에 그것 때문에 잘못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인생만사(人生萬事) 새옹지마(塞翁之馬)라, 잘 된 것이 도리어 나중에 재앙의 근본이 될 수 있고, 잘못된 것이 전화위복(轉禍爲福)되어서 더 잘되고 하는 수가 얼마나 많습니까?

 

따라서 어떤 경우든지, 사업에 실패하거나 남이 배신하거나 자기 배우자가 지금 눈앞에서 곧 돌아가시거나 부처님 법으로,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철학적으로 보면 아무 손해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운문(雲門)선사가 말씀하신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이라 - 날마다 좋은 날이라, 이런 것은 그냥 아무렇게나 무엇이 잘 되어서 좋은 날이라는 말은 절대로 아니란 말입니다. 본바탕에서, 자기 본 성품자리에서 보면, 오늘이나 내일이나 금년이나 내년이나 모두가 다 좋은 날이요 좋은 해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이른바 참선 공부를 한다하더라도 무시선(無時禪)이라, 때 없이 참선이 됩니다. 선방(禪房) 죽치고 앉아서 참선이 되는 것이 아니라 행주좌와(行住坐臥)에 걸어가나 누우나 모두 선(禪)이란 말입니다.

 

우리 마음이 본 성품 자리에서 떠나지 않는다면 언제나 참선입니다. 그러나 선방에서 비록 위의(威儀)를 가지고 앉아 있다 하더라도, 화두(話頭)를 참구하고 염불(念佛)하고 한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이 본 성품을 여윈다면 참선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 마음이 생명이듯이 부처님은 바로 생명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공부할 때도, 특히 재가불자님들께서는 바쁜 몸이시고 복잡하고 인생고해(人生苦海)인지라 여러 가지로 고액(苦厄)이 많으므로 꼭 마음에 의지가 필요합니다. 부처님은 그래서 대의호(大依怙)라 - 의지할 의(依)자, 믿을 호(怙)자 - 우리가 믿고 의지할 데입니다. 사람 사람끼리야 기분 사납고 자기한테 해로우면 배신한다 하더라도 부처님이 배신하시겠습니까? 부처님은 분명히 필경의(畢竟依)입니다. 대의호라, 믿고 의지할 데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재가 불자님들은 바쁘고 여러 가지 고액(苦厄)이 많으시니까 생명을 생명으로 참구(參究)하는 그런 방법을 취하시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그 말씀은 어떤 말씀인가하면, 부처님을 그냥 부처님 이름으로 숭상(崇尙)한단 말입니다. 생명이기 때문에, 가령 부처님을 ‘무 무 무 무’하고 구하면, 생명을 생명으로 추구하는 그런 것은 가슴에 딱 안 나오지요.

 

그러나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이렇게 왼다면, ‘아! 부처님은 인격이구나, 부처님은 생명이구나.’ 하고 알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한테 이름이 붙어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부처님은 생명인지라 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님의무량신통묘지 (無量神通妙智)로 해 가지고서 그와 같이 부처님의 공덕에 알맞게 이름을 붙였습니다.

‘나무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은 우리 중생들이 아무렇게나 붙인 이름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생명에 걸맞게 석가모니 부처님 같으신 우리 교주님이 - 천지우주의 모든 도리를 성상체용(性相體用)을 통해서 다 아시는 부처님께서 거기에 걸맞게 붙인 부사의 한 이름이 ‘나무아미타불’이요, ‘관세음보살’이요, ‘지장보살’입니다.

 

따라서 그런 이름들은 부처님을 생명으로 숭앙(崇仰)하는 하나의 공부방식입니다. 고향같이 임같이 우리가 의지가 딱 되어버려야 힘이 생깁니다. 얼마나 사회가 복잡합니까? 그냥 심상(尋常)하고 평범한 방법으로 해서는 우리의 불안한 마음을 해소 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이시여! 부처님이시여!’ 부처님이 정말로 생명으로 해서 자기 고향으로, 자기 가슴에 딱 들어 있어 버려야 남들을 상대할 때도 조금 기분이 사납다 하더라도 상(相)도 안 내고 다투기도 안 한단 말입니다. 남하고 불화스럽게 지내려면 차라리 ‘불자(佛子)’라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화합을 깨뜨릴만한 이유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양보하면 양보한 만큼 자기에게 득이 됩니다. 자기가 몰라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양보하고 ‘아! 제가 잘못했습니다.’ 자기가 잘했더라도 그래 버리면, 그때 그것이 자기 득이 됩니다. 남하고 화합하기 참 쉬운 것입니다.

 

나도 부처고 너도 부처고 다 부처인 것인데 어디에다 대고 우리가 무슨 교만심을 낼 필요가 있습니까? 콧구멍이 자기입니까? 눈이 자기입니까? 부처님 법에서 볼 때는 자기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 오온의 구성은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 산소, 수소, 질소, 탄소로 결합된 이 몸뚱이, 결국은 비어있단 말입니다. 우리가 잘못 보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에너지의 파동, 불교식으로 하면 불성(佛性)의 진동, 불성의 파동입니다. 불성이 어떻게 진동하는가 따라서, 불성 차원에서는 모두가 하나입니다. 정말로 화합하셔야 합니다. 부부간에 화합하시고, 제일 사랑하는 부부간 또는 부녀간, 모녀간에 다 화합하셔야 합니다. 화합하지 못하면 금생에 사실은 살 가치가 없습니다. 화합하지 못하면 그때는 업(業)을 짓는 것입니다. 묵은 업을 지을 바에는 금생에 무슨 필요로 태어났습니까?

 

금생에 태어났다고 할 수 있는 가치는 무엇인가하면, 금생은 수련도장(修練道場)입니다. 성불하기 위한 도장입니다. 성불하기 위해서 상(相)을 하나둘씩 차근차근 모서리를 없애야 합니다. 그래서 적어도 임종(臨終)때는, 천지우주의 생명 자체인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 같은 보살님들이 분명히 우리를 마중하시는 것입니다. 영접을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모양으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광명의 몸으로 와서 하시는 것입니다.

‘나’라는 관념이 떠나고 남한테 베풀고 남한테 잘하고 자타(自他)의 관념이 희미할수록 그러한 성중(聖衆)들이 불보살(佛菩薩)의 광명의 몸으로 오셔서 우리를 인도하시어 그냥 즉시에 바로 금색연화대(金色蓮花臺)라, 광명의 연대에 타고서 극락세계로 가시는 것입니다. 극락세계는 무엇인가? 극락세계는 바로 우주의 실상세계(實相世界)입니다.

 

전수행자(專修行者) 천무일실(千無一失)이라, 오로지 사심 없이 수행한다고 생각할 때는 천무일실이라 - 일천 천(千)자, 없을 무(無)자, 한 일(一)자, 잃을 실(失)자 - 한 사람도 빠지지 않는단 말입니다. 사심 없이 진정으로 공부한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천무일실 - 천 사람도 빠짐없이 다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잡수행자(雜修行者) - 이것저것 뒤섞어서 수행을 했다 말았다 하는 그런 사람들은 천무일득(千無一得)이라, 한 사람도 얻지를 못하게 됩니다. ‘전수행자 천무일실’입니다.

 

꼭 금생에 우선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 자기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 또는 자기 마을을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인류를 위해서, 어떤 것을 위해서나 부처님한테 가는 길이 가장 최선의 길입니다. 이렇게 해서 위없는 행복을 누리시길 간절히 바라면서 법문을 마칩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 마하반야바라밀

*이상의 법문은 청화 큰스님께서 1992년 3월1일 태안사 정기법회에서 하신 법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