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3.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마음의 고향

제25집 마음의 고향.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

 

 

 

 

십이인연(十二因緣)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수행법(修行法)이 많이 있으나 세 차원(次元)으로 나누어서 말할 수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사제법문(四諦法問)입니다. 사제법문은 성문승(聲聞乘)인데 소리 성(聲)자, 들은 문(聞)자, 부처님의 법문(法問)을 듣고서 겨우 알 수 있는 정도가 성문승입니다. 성문승에 대해서 하는 법문이 사제법문입니다.

 

 

그 다음에는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입니다. 근기로 봐서는 조금 더 나아져서 부처님 말씀도 안 듣고 또는 다른 어느 성자(聖者)의 말씀을 안 듣는다 하더라도 스스로 사색(思索)도 하고 스스로 판단해서 이치를 아는 사색적인 사람들이 하는 수행법이 십이인연법입니다..

 

그리고 육바라밀(六波羅密)이 있습니다. 보다 더 나은 수승한 분들, 그 분들은 명색이 보살(菩薩)들인데 보살의 근기는 스스로 사색도 하지만 또한 동시에 주로 모든 중생(衆生)을 제도 하겠다는 그런 서원(誓願)이 있습니다.

 

 

성문승(聲聞乘)이나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을 연구하는 연각승(緣覺承)은 모든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그런 넓은 서원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서원을 세운 분들, 즉 보살근기는 육바라밀로 공부합니다. 부처님 경론(經論)의 일대시교(一代時敎)를 한말로 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부처님이나 선지식(善知識)들의 말씀을 듣고 공부하는 성문승이 있습니다. 성문승은 남의 말을 듣고서 공부하는 것입니다. 성문승은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제법문으로 공부를 합니다.

 

그보다 좀 더 나은 근기가 십이인연법인데, 이것은 연각승, 인연 연(緣)자, 깨달을 각(覺)자 , 탈 승(承)자입니다. 인연 따라서 깨닫는단 말입니다. 누구한테 별로 말도 안 듣지만 과거전생(前生)에 자기 선근(善根) 으로 인해 생각을 많이 해서 사색하고 스스로 참구(參究)해서 깨닫는 그러한 근기가 닦는 법이 십이인연법입니다.

 

 

그리고 육바라밀이 있습니다. 이것이 부처님 일대시교의 세 가지 공부하는 법의 대요(大要)입니다. 사제법문(四諦法問),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 육바라밀(六波羅密)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런 기초법문을 몇 가지만 외워 버리면 무슨 경(經)을 본다 하더라도 별로 막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기초 법문을 들어 놓지 않으면 그때그때 무슨 말이 나오면 무슨 말인지 모릅니다. 즉 말하자면 불교(佛敎)술어 때문에 자꾸만 막힙니다. 그러므로 불교 공부를 하려면, 먼저 기본적인 불교술어를 이해하여야 합니다. 특히 십이인연법이 중요한 것은, 부처님께서 깨달으실 때에 몸소 하신 수행법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내 생명(生命)이 무엇인가?’하고 부처님께서 자기 생명의 근원(根源)을 탐구(探究)하신 법이 십이인연법입니다. ‘내가 지금 존재(存在)하지만은 과거(過去)에 나는 무엇이었을까?’ 그와 같이 거슬러 올라가서 자기 생명의 근원을 탐구하셨습니다. 또한 ‘나는 죽어서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고 자기 미래(未來)를 사색하고 그와 같이 과거(過去), 현재(現在), 미래(未來)를 사색을 하면서 자기 생명의 소재를, ‘내 생명은 대체로 근원이 무엇인가?’ 하는 생명의 소재를 탐구한 법이기 때문에 십이인연법은 중요합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보리수아래서 성불(成佛)하실 때에 다른 공부도 물론 탐구 하셨지만 특히 십이인엽법을 탐구해서 깨달으셨습니다. (그리고 학인(學人)들이 한문(漢文)실력을 기르기 위해, 그때그때 말이 좀 어색하지만 한문을 많이 넣었습니다.)

 

 

◎十二因緣法..... 이는 壁支佛의 灌法으로서 新譯으로는 十二緣氣요 旧譯으로 十二因緣이며, 또는 因緣觀이나 支佛觀이라고도 한다. 此는 衆生이 三世에 涉하여 六途에 輪回하는 次第緣起를 設하심.

 

 

 

열 십(十), 두 이(二), 인연 인(因), 이것은 원인이란 인(因)입니다. 인연 연(緣), 법 법(法) 치우칠 벽(辟), 또는 물리칠 벽(壁), 지탱할 지(支), 부처 불(佛), 볼 관(觀), 법 법(法), 새로울 신(新), 풀 역(譯), 번역한다는 뜻의 풀 역(譯)자입니다. 열 십(十), 두 이(二), 인연 연(緣), 일어날 기(起), 예 구(舊) - ‘신구(新舊)라 할 때의 구(舊)자의 약자입니다. 새로운 것은 신(新)이라 쓰고 낡은 것은 구(舊)라 하지 않습니까.

 

 

예 구(旧)자, 풀 역(譯), 열 십(十), 두 이(二), 인연 연(緣), 인연관(因緣觀), 지탱할 지(支), 부처 불(佛), 볼 관(觀), 지불관(支佛觀), 이 차(此), 무리 중(衆), 날 생(生), 석 삼(三), 인간 세(世), 건널 섭(涉)자, 간섭(干涉)한다고 할 때에 이 한자를 씁니다. 또한 섭렵(涉獵)이라는 것은 책이나 이것저것 모든 학문(學文)도 많이 공부하고 또는 경험(經驗)도 많이 하는 것이지요. 길 도(途), 이 자는 길 도(道)자와 같이 쓰입니다. 같이 쓰이나 진리(眞理)라고 말할 때는 길 도(道)자를 쓰는 것이고, 또는 진리 외에 무슨 방도나 무슨 방법이나 그런 때는 이자를 쓰는 것입니다.

 

 

같은 '길 도'라고 말하지만은 진리를 말할 때는 즉 보리(菩提)나 또는 진리(眞理)나 그렇게 말할 때는 길 도(道)를 쓰는 것이고, 그 외에 가사 육도윤회(六途輪廻)한다.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 수라(修羅), 인간(人間), 천상(天上) 이와 같이 육도윤회 한다. 그런 때 육도는 이런 도(途)자를 쓰는 것입니다. 바퀴 륜(輪), 돌 회(廻), 윤회(輪廻)란 빙빙 돈단 말입니다. 즉 말하자면 끝도 갓도 없이 개미 쳇바퀴 모양으로 빙빙 돈단 말입니다. 버금 차(次), 차례 제(第), 인연 연(緣), 일어날 기(起), 말씀 설(說), 십이인연법이란 무엇 인고 하면, 벽지불의 관법(觀法)입니다. 벽지불은 어떤 것 인고 하면은, 성자(聖者)를 성인(聖人)을 불교(佛敎)에서 세 차원(次元)으로 구분합니다. 부처(佛)가 있고, 또는 그다음에 보살(菩薩), 연각(緣覺), 성문(聲聞)인데 부처를 제외한 성자는 세 등급으로 구분합니다.

 

 

즉 말하자면은 가장 높은 성자가 보살 아닙니까. 그다음에 벽지불입니다. 벽지불이고, 그다음에가 아까 말한 성문입니다. 성문은 아라한(阿羅漢)이라고도 합니다. 부처와 성자를 합치면 네 속성으로 구분하지만은 부처를 Ep어 놓으면 성인들을 세 차원으로 구분합니다. 부처 다음에는 보살, 벽지불, 벽지불보고 연각 그래요. 그다음에는 아라한(阿羅漢)이 있습니다. 아라한은 나한(羅漢)이지요.

 

 

이것은 도(道)가 얼마나 높은가에 따라서 구분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도(道)를 성취(成就)해서 중생(衆生)을 제도하는 정도는 보살인 것이고, 자기만 닦아서 겨우 자기 생명의 근원을 아는 정도는 벽지불이란 말입니다. 또한 성문은 남의 말을 듣고서 깨달은 즉 말하자면 아라한이 성문법에 해당하는 셈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벽지불, 아라한과 그 위에 있는 보살 합해서 3성인입니다. 부처와 합치면 그때는 4성인이 되겠지요.

 

그런데 불교법문에는 이것이 다 통용(通用)이 됩니다. 통용이 되나 특별히 어떤 성품(性品)은 어떤 공부를 한다. 그런 특별 한 것이 없잖아 있습니다.

 

앞서 말씀한 바와 같이 근기가 낮은 사람들은 사제법문(四諦法問)으로 해서 공부하고 말입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꼭 그 사람들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일체불교에 다 통해있단 말입니다.

 

십이인연법, 이것도 역시 주로 벽지불, 즉 말하자면 자기만 탐구하는 분들이 주로 공부하지만은 또 역시 불교를 전부다 통관 하는 법문인 것입니다.

부처님 법문이라는 것이 아무리 쉬운 법문도 역시 근원을 꿰뚫어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이 어렵다면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교자체가 이것이 원래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인생(人生)과 우주(宇宙)의 근본원리(根本原理)를 탐구(探究)하는 가장 고도한 철학(哲學)이기 때문에 사실 아무리 쉽게 해도 역시 하다보면 결국 어렵게 안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주를 통관해서 관찰하니까 말입니다.

 

이것도 내내야 ‘인간은 무엇인가?’를 관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먹고사는 경제(經濟)문제 생각하고 정치(政治)하고 그런 것만 생각하면 쉽습니다만 인간(人間)생명의 근본(根本)을 생각 할 때는 그때는 역시 문제가 어렵단 말입니다. 인류역사의 오랜 동안 개벽(開闢)이래 그야말로 몇 만 년 동안이나 되는 것이고 역사시대 만 두고 보더라도 벌써 몇 천년동안인데 말입니다. 그런 동안에 ‘사람이 무엇인가? 인간성이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탐구해 봤지만은 딴 것으로는 확연히 해답을 못 내린단 말입니다. 그런 오랜 동안에 우리 인류(人類)가 탐구하고 탐구해서 해답을 못 내린 그런 문제기 때문에 지금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학인들도 역시 그런 것을 생각해서 공부를 해야지 까다롭다고만 하면 불교는 공부할 수가 없지요. 이와 같이 교리(敎理)로 해서는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란 결국 마음 깨닫는 길입니다. 교리만 따지고 있으면 자기 평생을 다해도 할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참선은 불립문자(不立文字)라 하여, 문자를 떠나서 오직 마음만 닦는 것입니다.

 

불교라는 것이 어려운 것이지만 ‘마음이 무엇인가? 마음 깨닫는 하나의 방편(方便)에 불과하기 때문에 문자(文字)를 떠나서 마음만 닦으면 된다’고 해서 염불(念佛)이나 참선(參禪)이 있는 셈 아닙니까. 그러므로 교리는 아무것도 안 배운다 하더라도 내 마음이 부처인 줄을 믿고서 닦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란 사회가 하도 복잡하고 갈래가 많고 불교도 여러 가지 복잡해놔서 어느 정도 체계가 안서면 확신(確信)이 안 선단 말입니다. 체계가 딱 서야만 다른 삿된 것하고 구분해서 알 수 있고 확신이 서게 됩니다. 같은 불교도 18종파가 있어, 종파들마다 각기 자기 종파가 옳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어느 체계가 서 있지 않으면 무엇이 무엇인가 한계를 몰라버립니다. 과연 어느 것이 좋은지, 어느 것이 그른지 한계를 모른단 말입니다.

 

 

불교가 어렵지만 여러분들은 대체로 고등학교 이상은 나왔으니 충분히 인생철학(人生哲學)을 공부 할 수 있는 시기입니다. 먼저 부처님 당시에 말씀하신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제법문(四諦法問)을 배워야합니다. 인생고(人生苦), 인생고의 원인인 집(集), 인생고를 떠나서 참다운 영생(永生)의 행복인 멸(滅), 또는 영생의 행복에 이르는 방법인 도(道), 도(道)는 팔정도(八正道) 말입니다. 그러한 사제법문과 십이인연법과 앞으로 배울 보살의 육바라밀법 정도는 우리가 명확히 명념(銘念)을 해야 합니다.

 

 

‘이는 벽지불의’ 벽지불이란 자기만 주로 공부하는 그러한 근기의 ‘관법(觀法)으로서’ - 관조(觀照)하는 법으로서 - 불교의 수행법(修行法)은 따지고 보면 모두가 다 관법(觀法)입니다. 관조(觀照)한다는 뜻입니다. 우리 중생(衆生)이 지금 보이는 것이 아니니까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네가 있다 내가 있다’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것 밖에는 못 보는 것인지라 우리는 바로 못 보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그런 정법(正法), 바른 식견(識見)을 보기 위해서는 우리가 오랫동안 관조(觀照), 관찰(觀察)함으로 해서 번뇌(煩惱)를 맑히고 진리(眞理)를 보아야합니다.

 

부처님의 수행법(修行法)은 모두가 사실은 한말로 말하면 관법(觀法)이지요. 모두가 다, 어떻게 관(觀)하라, 어떻게 관조(觀照)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우리 중생 업(業)으로 진리(眞理)가 안보이지만 결국은 진리를 관조함으로써 차근차근 진리와 하나가 되어간단 말입니다.

 

‘신역(新譯)으로는’ 중국(中國)에서의 경전 번역도 신역, 구역이 있습니다. 구역(舊譯)은 구마라집(鳩摩羅什)이란 분이 한 번역입니다. 그러니까 신역보다 연대(年代)가 위에지요. 신역(新譯)은 현장법사(玄獎法師)가 한 번역입니다. 현장법사는 여러분들이 잘 아시지요. 손오공(孫悟空) 데리고 인도(印度)에 가서 법(法)을 구한 현장법사, 현장법사 이후에 한 번역이 신역입니다. 즉 말하자면 연대가 뒤인 새로운 번역이란 말입니다. 허나 그와 같이 새롭고 구역이고 하는 것도 역시 그 당시에 말 한 것이고 사실은 현장법사도 벌써 지나간 지가 천년세월 넘습니다.

 

 

‘신역(新譯)으로는 십이연기(十二緣起)요, 구역(舊譯)으로 십이인연(十二因緣)이며’ 그러니까 열두 가지 속성으로 해서 인생(人生)의 나고 죽고 하는 그런 문제를 풀이했단 말입니다. 인생의 나고 죽고 하는 문제가 십이인연법에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아까 말마따나 석가모니(釋迦牟尼)께서 ‘내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이와 같은 사색(思索)으로 해서 공부하셨습니다. 즉 이와 같은 관법(觀法)으로 공부했단 말입니다.

 

 

‘또는 인연관(因緣觀)이라’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법(因緣法)이라는 말입니다. 인엽법이라는 것도 역시 이런데서 근원(根源)을 둡니다. 모두가 인연이다, 좋으나 궂으나 인연이다. 그와 같이 쉽게 말 하지만은 인연이라는 것이 따지고 보면 불교(佛敎) 전부를 다 포섭한 심심미묘(深深微妙)한 법문(法門)인 것입니다.

 

원인(原因)이 있으면 연(緣)이 있고, 연(緣)이 있으면 과(果)가 있고 말입니다. 인과(因果)라 할 때는 인(因)·연(緣)․과(果) 가운데서 연(緣)을 빼버리고 간단히 인과(因果)라고 하지요. 그러나 보다 구체적으로 말 하면은 인연과(因緣果)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인(因)과 연(緣)과 과(果)말입니다.

 

원래 종자(種子)인, 가사 우리가 종자를 둔다고 하면 종자는 인(因)에 해당하고, 종자를 움트게 하는 땅이나 일광(日光)이나 수분(水分)이나 비료나 이런 것은 연(緣)에 해당합니다. 그것이 성장해서 열매를 맺는 그것은 과(果)에 해당하는 셈 안 되겠습니까. 그와 같이 모든 것은 인연과(因緣果)로 해서 생성(生成)하고 소멸(消滅)해 갑니다. ‘인연관(因緣觀)이나 지불관이라고도 한다.’ ‘벽지불’을 ‘벽’자를 빼버리고서 그냥 ‘지불’이라고도 간단히 말합니다.

 

 

‘차(此)는 중생(衆生)이 삼세(三世)에’

우리 중생(衆生)이 과거, 현재, 미래(未來)를 통해서 육도(六道)에 생사윤회(生死輪廻)하는, 중생이 죽고살고 갔다 왔다 하는 경계(境界)가 육도(六道)안 되겠습니까. 가장 나쁜 갈래는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 입니다. 이러한 갈래 는 나쁘니까. 삼악도(三惡道)그러지요. 세 가지 악도(惡道)라 그래서 삼악도입니다. 그 외에 수라(修羅), 인간(人間), 천상(天上), 아수라(阿修羅)도 역시 우리 인간의 눈에는 안 보이는 것입니다. 안 보이는 아수라도 역시 아주 힘이 굳센 귀신(鬼神)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공부방식도 모르고 산에 가서 공부하면 더러는 아수라(阿修羅)가 씌워 가지고서 굉장히 힘도 내고 아는 척도 많이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눈에는 안보이지만은 깊은 산중에나 바다 가운데 존재하는 대력신(大力神) - 큰 힘을 가진 신(神)이 아수라 신인데 아수라하고 인간하고 천상은 좋은 데라고 해서 삼선도(三善道)라고 합니다. 물론 극락(極樂) 같은 곳은 못 되겠지만, 하여튼 악도에 비해서는 좋다고 해서 삼선도(三善道) - 착할 선(善)자, 삼선도라고 합니다. 그래서 지옥 아귀 축생을 삼악도(三惡道) 하고, 아수라 인간 천상등 삼선도(三善道)를 합해서 육도(六道)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육도에 우리 중생은 갔다 왔다, 갔다 왔다 합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가 업(業)을 지으면 인간보다 못하게 태어나고 말입니다. 가사 금생(今生)에 요새 사람들처럼 잘 싸우면 죽고 나서 아수라(阿修羅)로 태어나 싸움을 좋아하고 말입니다. 우리가 함부로 남을 많이 죽이면 지옥(地獄)으로 가는 것이고 말입니다.

 

그러나 십선업(十善業)을 닦아서 말조심하고 행동주의하고 마음으로 항시 맑은 마음 가지시면 천상(天上)가서 태어나고 말입니다. 또는 그런 죄악의 씨앗을 다 없애고서 완전무결하면 그때는 극락(極樂) 가서 태어나는 것이고, 그와 같이 우리가 태어나는 것인데, 극락(極樂)은 성자(聖者)만 가는 곳인지라, 일반 중생한테는 아까 말한바와 같이 삼악도(三惡道), 삼선도(三善道)란 말입니다.

 

지옥, 아귀, 축생 등 삼악도와 싸움을 좋아하는 아수라와 인간과 천상등 삼선도란 말입니다. 이런 ‘육도(六道)에 윤회(輪廻)하는’ 뱅뱅 돈단 말입니다. 뱅뱅 도는 ‘차제(次第)연기(緣起)를’ 인과가 차례로 일어나고 없어지고 하는 것을 말씀한 이것이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그야말로 우리 생명(生命)에 가장 접근된 가장 밀접한 법문인 것입니다. 과연 내가 어떻게 해서 나왔습니까? 왕자고 누구고 아무리 잘났다 하더라도 결국은 십이인연법의 범주(範疇)내에서 윤회(輪廻)하는 가운데서 인간으로 잠깐 나왔을 뿐입니다.

 

 

죽으면 어디로 갈 것인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업(業)따라서. 자기가 지은 행위(行爲) 따라서 내세(來世)에 가서 과보(果報)를 받을 뿐이라 놔서 우리 중생은 내세가 안보이니까 알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우리 중생은 그야말로 참 캄캄한 것입니다. 내가 과거(過去)에 어디서 왔는가, 또한 죽으면 어디로 갈 것인가 모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재(齋)모실 때에 항시 듣는 생종하처래(生從何處來)하고 사향하처거(死向何處去)라, 우리 생(生)이란 대체 어디서 왔는가? 죽으면 어디로 갈 것인가?

 

 

이런 문제를 천박(淺薄)한 사람들은 그냥 보아 넘깁니다만, 깊은 사람들은 이런 생명(生命)의 본질(本質)문제를 그냥 보아 넘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는 나이가 많아지면 자연적(自然的)으로 그런 문제를 생각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죽음이 임박하니까 말입니다.

 

 

1.무명(無明)

 

일(一)에 가서 ‘무명(無明)’이라, 무명은 무지(無智)와 같습니다. 즉 말하자면 진리(眞理)를 모른단 말입니다. 명(明)은 진리와 같은 뜻입니다. 따라서 무명은 진리에 어둡단 말입니다. 그래서 무지무명(無智無明)이라, 이와 같이 겹쳐 말해도 무지(無智)와 같습니다. 무명은 무엇인가? ‘과거세(過去世)의 무시번뇌(無始煩惱)’라, 과거세에 처음이 없는 번뇌(煩惱)란 말입니다. 우리가 과거에 한 생(生)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몇 만생, 몇 천생 되풀이해서 온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번뇌(煩惱)역시 한도 끝도 없단 말입니다. 즉 말하자면 몇 만생 내 생명이 지나갔는가 알 수가 없습니다.

 

헌데 그 원인은 무엇인가 하면 결국은 번뇌, 번뇌나 무명은 같은 뜻입니다. 진리를 모르니까 번뇌가 나오는 것이고 또 바로 그것이 무명무지 아닙니까.

 

 

무명을 다시 풀이해서 말하면, 내 본질(本質)과 우주(宇宙)의 본질을 모른단 말입니다. 가령 김 아무개 같으면 김 아무개라는 것만 아는 것이지 내생명의 본질을 모릅니다. 그것이 무명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중생(衆生)은 현상적(現象的)인 것만 좀 알뿐이지 근원(根源)을 전혀 도시 모릅니다. 따라서 제아무리 학식(學識)이 많다고 해도 결국은 무명(無明)을 못 벗어나지요. 무명이 있기 때문에 결국 우리가 몸을 받는단 말입니다.

 

 

우리가 죽으면 육체(肉體)는 화장(火葬)하면 재가 되는 것이고 땅에 파묻으면 흙 되어 버리지요. 벌레가 다 먹어버립니다. 그때는 아무것도 안 남습니다. 아무리 잘났더라도 결국은 죽으면 이 몸은 흔적도 없는 것입니다. 다시 이런 몸으로 태어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 몸으로는 결국 한번 살다 갈뿐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죽으면 그와 같이 몸을 버리되 우리 생명은 죽지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생명은 금생(今生)에 지은 업(業)이 거기에 묻어서 업의 기운(氣運)때문에 업(業)따라서 갑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가령 살생(殺生)을 많이 하면은 살생이라는 업, 죽였다는 업 때문에 업이 우리 마음에 묻어서 업 그놈의 무게 때문에 지옥으로 스스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누가 잡아당기지 않아도 말입니다. 그런 것이 마치 저승사자가 끌고 간 것이나 같은 기분이기 때문에 사자가 데려간다고 하는 것이지 사실은 자기 업 기운 때문에 끌려가는 것입니다. 또한 탐욕(貪慾)이 많고 애욕(愛慾)도 많고 욕심(慾心)많으면 아귀(餓鬼)입니다. 보통 우리가 속가에서 ‘허천아귀’라, ‘걸신(乞神)들렸다’고 하는 말과 같이 먹어도 먹어도 조금도 양이 안 차고 말입니다.

 

 

욕심이 끝도 갓도 없고, 식욕(食慾)뿐만 아니라, 애욕(愛慾)이나 명예욕(名譽慾)이나, 그런 욕심이 소위 오욕(五慾)인데, 재(財)․색(色)․명(名)․식(食)․수(睡)라, 재물(財物)또는 명예욕, 애욕(愛慾), 또는 식욕(食慾), 잠욕 같은 것이 끝도 갓도 없는 욕심이 더욱 많은 존재가 아귀(餓鬼)아닙니까. 아귀 말입니다. 주릴 아(餓)자, 귀신 귀(鬼)자, 항시 욕심이 많아서 채워짐이 없단 말입니다.

 

분수를 알고 만족해야만 채워지는 것이지 만족 못하면 그때는 한도 끝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수미산, 히말라야 산 같이, 히말라야 산 덩어리 같은 금덩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중생은 만족을 못 채운단 말입니다. 이러한 끝도 갓도 없는 과거전생(過去前生)이 있습니다. 전생도 더 올라가 보면 결국은 끝도 갓도 없는 것이고, 이와 같이 무시(無始) -시작도 없고 끝도 갓도 없는 번뇌(煩惱)가 곧 무명(無明)입니다. 우리가 죽으면 이런 번뇌가 - 번뇌를 벗어버리고 업(業)이 없어지면 모르지만 업이 있는 한에는 역시 업 따라서 갑니다.

 

 

살생(殺生)도 좀 덜하고 오계를 지키면 사람으로 인도환생(引導還生)하는 것이고, 조금 더 낫게 십선업(十善業)을 지키면 그때는 천상(天上)가는 것이고 말입니다. 수행(修行)을 많이 해서 마음이 청정(淸淨)하여 업장(業障)이 없으면 극락(極樂)으로 죽자마자 바로 올라가버립니다. 그러나 그렇게 업(業)이 많고 무명(無明)이 있으면, 죽은 뒤에 다시 무명 따라서 즉 말하자면 업 따라서 육도(六道)로 간단 말입니다.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 천상으로 갑니다. 업장이 없어야만 극락 가는 것이고, 업장이 있는 한 결국은 육도가운데서 항시 뱅뱅 윤회를 한다 말입니다.

 

 

 

2. 행(行)

 

행(行)이라, ‘과거세(過去世)의 번뇌(煩惱)에 의(依)하여 작(作)한 선악(善惡)의 행업(行業)’ 즉 말하자면 업(業)이란 말입니다.

 

업에는 선(善)도 있고 악(惡)도 있는 것 아닙니까? 악업(惡業)만 업이라고 하지를 않습니다. 선업(善業)도 업입니다. 우리가 죽으면 몸은 사라지고 우리 영혼(靈魂)이 헤매다가 부모의 연(緣)을 만나는 것입니다. 부모란 남녀 간에도 업장(業障)이 없으면 결합(結合)이 안 되는 것인데, 그 남녀 간도 따지고 보면 아무리 화목(和睦)한 부부라 하더라도 역시 깊은 의미에서는 하나의 업장 때문에 또는 애욕(愛慾) 때문에 같이 뭉치는 것입니다. 애욕이 없으면 남녀 간에 결합이 안 되는 것입니다. 즉 무명 때문에 남녀가 결합이 됩니다. 결합이 되어서, 결합되는 그 기운(氣運)을 결국은 헤매는 영혼이 본단 말입니다. 영혼이 그것을 보고내외간 결합된 그런 기운과 영혼의 염파(念波) -파동(波動)이 딱 들어맞으면 그 영혼이 거기 가서 딱 들어붙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자기 어머니 태(胎)에 탁태(托胎)한단 말입니다.

 

 

지금 우리 공간 내에는 굉장히 많은 영(靈)들이 있습니다. 아까 말한대로 영혼(靈魂)의 파동(波動) - 영혼의 힘과 내외간의 결합하는 힘, 부모의 연이 같은 범위에 있을 때 영혼이 딱 들어선단 말입니다. 보다 세밀한 설명도 있습니다만 그런 것까지 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무튼 이와 같이 자기 부모의 연을 만나 태중(胎中)에서 자란 뒤 나중에 태어나게 됩니다.

 

그와 같은 경로로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으로 설명이 되었는데, 아까 말한대로 우리가 죽어서 헤매는 무명(無明) 영혼 때 - 무지를 못 벗어난 업장(業障)이 묻은 영혼(靈魂)때, 그것이 무명(無明)에 해당합니다. 우리도 무명으로 있다가, 즉 말하자면 업장이 묻어있고 업장에 속박되어있는 영혼으로 있다가 부모 연(緣)을 만나서 온 것입니다. 어느 누구나 왕자나 누구나 그야말로 금생(今生)에 어떤 위대한 분이나 모두가 다 무지무명의 업으로 있다가 - 업(業)의 영(靈)으로 있다가 - 부모의 연(緣) 만나서 태어났단 말입니다.

 

 

즉 ‘과거세의 번뇌 즉 무명에 의하여 지은 선악(善惡)의 업(業)’ 그러니까 내외간에 같이 지내는 것도 업 아니겠습니까? 또한 그 영혼이 업이 없으면, 내외간이 결합 했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붙어오지 않을 텐데, 그것이 같은 동의(同意)의 업(業)때문에 결국은 그 부모한테 오는 것입니다. 가령 부모하고 결합할 힘이 5라 한다면 결국은 영혼의 힘이 5일 때 같이 상합되어서 온단 말입니다.

 

 

 

3. 식(識)

 

식(識)이라, 제삼(第三) 식이라, 알 식(識)자 말입니다. ‘과거세(過去世)의 업(業)에 의(依)하여 수(受)한 - 받은바 - 현재(現在) 수태(受胎) 일념(一念)’이라 알 식(識), 지날 과(過), 갈 거(去), 인간 세(世), 업 업(業), 의지할 의(依), 받을 수(受), 나타날 현(現), 있을 재(在), 받을 수(受), 태 태(胎), 부모의 태, 한 일(一), 생각 념(念), 내가 지금 엄마 뱃속에 탁태(托胎)했다. - 내가 엄마한테 들어왔다 하는 그때 즉 말하자면 영혼이 부모님 연 만나 어머니 태에 딱 들어붙는 그때가 식(識)입니다. 그때는 식뿐이란 말입니다. 그때는 몸뚱이는 없습니다. 과거세에 몸뚱이가 있다가 금생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영혼이라 하는 마음으로 존재하다가, 영혼에 맞는 부모님을 만나서 어머니 태안에 딱 들어왔단 말입니다. 그때는 식뿐인 것입니다. 즉 말하자면 물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뿐입니다.

 

 

수태일념(受胎一念)이라, - 태에 들어가는 한 생각, ‘내가 지금 어머니 태안에 들어왔구나.’ 이와 같이 한 생각이 나올 때입니다. 그러나 딱 들어앉아 커지면 그때는 그런 생각은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물질이 커져버려서 물질에 가려서 말입니다.

 

 

4. 명색(名色)

 

넷째, 명색(名色)이라,

 

이것은 이름 명(名), 빛 색(色), 태 태(胎), 가운데 중(中), 마음 심(心), 몸 신(身), 펼 발(發), 기를 육(育), 자리 위(位), 이를 운(云), 이름 명(名), 마음 심(心), 법 법(法), 몸 체(體), 나타날 현(現), 보일 시(視), 이름 명(名), 나타낼 표(表), 나타날 현(現), 눈 안(眼), 무리 등(等), 몸 신(身)

 

‘명색(名色)은 태중(胎中)에서 심신(心身)이 발육(發育)하는 위(位)를 운(云)함이니’ 이것은 우리 생명(生命)이 태어날 때, 하나의 위상인데 엄마 태안에서 마음과 몸이 발육(發育)하는 자리를 말하는 것이니, ‘명(名)이란 곧 심법(心法)으로서’ - 마음 법으로서, ‘심법(心法)이란 체(體)로서 표시(表示)하기 어렵고 다만 명(名)으로써 표현(表現)할 수 있으므로 명(名)이라 하고’- 심법이란 몸으로 표시할 수가 없기 때문에 어렵고 다만 이름으로서만 표현 할 수 있기 때문에 명이라 이름하고 말입니다.

 

 

‘색(色)이란 곧 안(眼) 등(等)의 신(身)임’ - 색(色)이란 눈이나 코나 입과 같이 우리 몸을 말한 것이죠. 그러기 때문에 우리 몸이 아직은 완전히는 다 발육되어 있지 못하더라도 하여튼 마음은 그 안에 식인 것이고 말입니다.

식 따라서 이루어진 우리 몸뚱이 - 우리는 태어나서 어느 정도 인간적인 몸뚱이가 생겨납니다. ‘안(眼) 등(等)이’- 눈이나 코나 입이나 그런 것이 몸이라는 말입니다.

 

 

5. 육처(六處)

 

육처(六處), 제오(第五)에 ‘육처(六處)는 바로 육근(六根)이니, 육근(六根)이 구족(具足)하여 장차(將次) 출태(出胎)코자 하는 위(位)를 운(云)함.’ 여섯 육(六)자, 곧 처(處)자, 여섯 육(六), 뿌리 근(根), 갖출 구(具), 다할 족(足), 장차 장(將), 버금 차(次), 날 출(出), 태 태(胎), 자리 위(位)입니다. 앞서 명색(名色)은 무엇 인고 하면 엄마의 배안에서 몸과 마음이 구분되어서 - 물론 하나로 합해있지만 결국은 그와 같이 차별이 생겨가지고 커나가는 때란 말입니다.

 

 

그러나 육처 이것은 보다 더 성장이 되어서 바로 육근(六根)이 -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 - 즉 말하자면 눈 또는 귀, 코, 입, 우리 몸의 사대육신(四大六身)이 어느 정도 그때는 갖추어져 있는 때가 육처입니다. 육근이 안․이․비․설․신․의 - 눈 안(眼)자, 귀 이(耳)자, 코 비(鼻)자, 혀 설(舌)자, 몸 신(身)자, 그와 같이 육신이 갖출 때란 말입니다. 육신이 갖추어질 때가 육근이니, 육근이 다 갖추어져서 장차 앞으로 얼마 안가서 출태(出胎) - 태에서 나온단 말입니다. 즉 말하자면 어머니한테서 출산(出産)해서 곧 나올 때란 말입니다. 어머니 배에서 만삭이 되어서 나올 때가 이것이 육처(六處)입니다.

 

어떤 누구나가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 나온 사람은 한사람도 없다는 것을 우리가 다 아는 셈 아닙니까.

 

 

6. 촉(觸)

 

그다음은 6에 가서는 ‘촉(觸)이라, 이(二), 삼(三)세(歲)때 사물(事物)에 대(對)하여 아직 고락(苦樂)을 식별(識別)할 수는 없고 다만 사물(事物)에 접촉(接觸)하고자 하는 위(位)임’ 접촉할 촉(觸)자, 2-3세, 여기서는 이미 출산되어서 사람 몸을 받았지요.

 

2, 3세 때에는 사물(事物)에 대하여 주위에 있는 모든 물건에 대해서 아직 고락(苦樂)의 괴롭고 즐거운 것을 식별(識別)할 수가 없습니다. 어린애가 어떻게 괴롭다, 좋다, 그렇게 알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다만 사물에 대하여 접촉(接觸)을 하고 싶단 말입니다.

 

어린애가 이것저것 만지고 싶고 그렇게 하는 것이 스스로 성장하고자 하는 몸부림 아닙니까. 이때는 아직은 고락의 괴롭고 즐겁고 하는 것을 모릅니다. 분별(分別)도 하지 못합니다. 이와 같은 때가 십이연기(十二緣起) 가운데 여섯 번째 촉에 해당합니다. 즉 말하자면 접촉만 하고 싶을 때, 어려서 물정(物情)을 모르면서 말입니다.

 

 

 

7. 수(受)

 

그다음에 일곱 번째는 ‘수(受)라, 육(六),칠(七)세(歲) 이후(以後)에 사물(事物)에 대(對)하여 고락(苦樂)을 식별(識別)하고 차(此)를 감수(感受)하는 위(位)임’ 받을 수(受)자입니다. 6, 7세 이후에는 더 성장해서 사물에 대하여 자기 주변에 있는 여러 가지 물건에 대하여서 고락을 식별합니다. 그때는 괴롭고 즐거움을 좀 안단 말입니다. 어린애가 처음에는 불이 있어도 불인지를 모르고 가지만 나중에는 경험도 하니까 불은 ‘뜨겁다’ 하고 싫어하는 것과 같습니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조금 알 때가 육 칠세 이후입니다. 이후에 사물에 대하여 고락을 식별하고 감수(感受)하여 좋고 나쁜 것을 안단 말입니다. 따라서 좋은 것은 더 취하려 하고 그른 것은 피하려 하는 것이 육 칠세 이후에 어린애들 심리(心理)현상 아닙니까?

 

 

8. 애(愛)

 

그다음에 여덟 번째 ‘애(愛)라, 십사오세(十四,五歲) 이후(以後)에 종종(種種)의 강성(强盛)한 애욕(愛慾)을 생(生)하는 위(位)를 말함.’ 사랑 애(愛)자입니다. 십사오세 이후에는 더 성장해서 가지가지 강성한 강(强)하고 성(盛)한 애욕(愛慾)을 생하는 그런 때입니다. 그때는 춘기(春氣)가 발동해서 그야말로 사춘기(思春期)가 되어 누구나 십사오세 이후에는 이성(異姓)에 대해서 강성한 애욕을 느낍니다.

 

 

9. 취(取)

 

아홉 번째 ‘취(取)라, 성인(成人) 이후(以後)에 애욕(愛慾)이 우성(尤盛)함에 따라 제경(諸境)에 치구(馳驅)하여 소욕(所欲)을 취구(取求)하는 위(位)를 말함.’

 

십사오세도 넘어가서 성인기 이후에는 어른스러운 때가 되어가는 셈 아닙니까. 십사오세 이후, 성인이후에 애욕이 더욱 - 더욱 우(尤)자, 성할 성(盛)자 - 성함에 따라 제경에 모든 경계(境界)에 치구라, 이것은 달릴 치(馳), 몰 구(驅)자, 즉 말하자면 왔다 갔다 싸다닙니다. 그렇게 분별없이 싸다니는 것을 ‘치구’라고 합니다.

 

 

물정(物情)을 잘 모르고 선악(善惡)분별을 잘 모르는 것이니까 그때는 그야말로 애욕만 생겨가지고 턱없이 모든 경계에서 갔다 왔다 하면서 함부로 날뛴단 말입니다. 그렇게 실패도 많이 하고 여러 가지로 유혹도 받고 하는 셈 아닙니까? 하여튼 소욕(所欲)을 하고자 하는 바를 다만 구하려고 애쓰는 그런 때가 취입니다. 여기에서 ‘욕’자는 마음 심(心)이 없으면 ‘하고자할 욕(欲)’자이고 마음 심(心)이 있으면 ‘욕심 욕(慾)’자입니다.

 

취(取)는 아까 말한 바와 같이 다 어른스럽게, 즉 말하자면 성인이 되어 애욕이 더욱더 성해가지고, 성하면 따라서 그것을 취하려고 하니까 여러 경계에 왔다 갔다 하는 것과 같이 자기스스로 싸대고 덤벙댑니다. 제경(諸境)에, 여러 가지 경계에 싸대면서 하고자 하는 바를 취하려 한단 말입니다.

 

 

10. 유(有)

 

유(有)라, 그다음은 십(十)에 ‘유(有)라, 애(愛)·취(取)의 번뇌(煩惱)에 의(依)하여 종종(種種)의 업(業)을 지어 당래(當來)의 과(果)를 정(定)하는 위(位)니 유(有)란 곧 업(業)으로서, 업(業)이 능(能)히 당래(當來)의 과(果)를 함유(含有)하므로 유(有)라 명(名)함.’

 

여덟 번째 애와 또 아홉 번째 취, 애·취의 그런 번뇌(煩惱), 갖고자 하는 욕심(慾心)부리는 것도 결국은 한 가지 번뇌 아니겠습니까? 번뇌라는 것은, 뭣을 모르는 것도 번뇌이지만은 가지려고 애쓰고 욕망(慾望)을 내는 것도 역시 번뇌에 해당합니다. 애·취의 그런 번뇌에 의하여, 사랑도 번뇌요. 또는 미움도 번뇌입니다.

 

 

‘애취의 번뇌에 의하여 종종(種種)의 업(業)을 지어’ 역시 미워하고 사랑하고 또 여러 가지 욕구가 있는 것이니까 따라서 반드시 거기에 따른 행동이 있겠지요. 그와 같이 번뇌에 의해서 가지가지 업을 짓습니다. 그런 행위를, 나쁜 행동 좋은 행동 행위를 짓는단 말입니다.

 

행위를 지어서 ‘당래의’ 장차 돌아오는 미래(未來)에, 과거(過去)에 행위를 지어 놓으면 금생에 받듯이 금생에 행위를 지으면 그때는 또 역시 미래(未來)에 받습니다. 장차 돌아오는 미래의 과(果)를, 과를 정하는 위(位)란 말입니다. 금생에 우리가 애욕 또는 욕구를 내 가지고 그러한 애취에 의해서 우리가 행동하면은 그것이 업이 되어 장차 우리가 받습니다. 당래의 장차 오는 미래의 결과를 우리가 받는단 말입니다. 그러한 업으로서, 업이 능히 당래 장차 미래의 과를, 결과를 포함해 있으므로 유(有)라고 말합니다.

 

 

어째서 십(十)을 유(有)라고 말 하는고 하면은 금생에 하는 행동이, 금생에 해놓은 모든 행동이 과거의 업의 결과이지만 또한 동시에 미래의 결과를 포함해 있단 말입니다. 미래의 결과를 포함해 있기 때문에 결국은 ‘유’라고 하는 것입니다.

 

 

11. 생(生)

 

십일(十一)에 가서 ‘생(生)은 현재(現在)의 업(業)[유(有)]에 의(依)하여 미래(未來)의 생(生)을 수(受)하는 위(位)를 말함.’ 생(生)이라, 낳는다는 말입니다. 현재의 업 즉 유(有)란 말입니다. 현재의 업에 의하여 미래의 생을 받는 유를 말합니다. 금생에 업이 없으면 그때는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람으로 태어난 자체가, 사람으로 태어날 정도로 업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업이 더 가벼우면 천상으로 올라가는 것이고, 업이 없으면 극락으로 갈 것인데, 극락 갈만큼 업장이 없는 그런 정도가 못되고 또 천상 갈만큼 가벼운 업도 못되기 때문에 사람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불교를 아시는 분들은 섣불리 우리 인간을 만물(萬物)의 영장(靈長)이라고 하는 말을 못쓰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런고 하면, 인간보다도 훨씬 더 높은 단계의 것이 많이 있으니까요. 인간은 어중쭝한 것밖에 못되는 것인데 인간이 어떻게 만물의 영장이 되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인간을 만물의영장이라고 하는 말을 못쓰는 것입니다.

 

 

인간이 살생(殺生)하지 않고, 투도(偸盜)하지 않고, 사음(邪淫)하지 않고, 거짓말, 욕설(辱說), 이간(離間)하는 말 하지 않고, 술 먹지 않는 등의 오계를 지켜야 만 사람이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인도환생(引導還生)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오계도 정도의 차이가 있습니다만, 이와 같이 현재에 지은 여러 가지 번뇌나 업에 의해서 내세(來世)에 생을 받습니다.

 

 

12. 노사(老死)

 

십이(十二)에 ‘노사(老死)는 내세(來歲)에서 노사(老死)하는 위(位)임.’ 노사(老死)란, 늙어서 죽는다는 말입니다. 내세에 또 우리가 태어나면 그때는 반드시 늙고, 병들고 또 죽어야 하겠지요. 이와 같이 열두 가지의 속성으로 해서 우리가 과거(過去)에 무명(無明)을 지어서 마침내 늙고 죽습니다.

 

조금 복잡하나 아까 말한대로 사제법문(四諦法問),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 육바라밀(六波羅密)은 우리가 몇 십번 보고 외워두면 굉장히 필요합니다. 그래야 딴 경전(經典)을 볼 때에 그때그때 아, 그렇구나. 하고 납득이 잘 갑니다. 이런 개념을 모르면 그때그때 막혀가지고서 참 곤란한 것입니다.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

 

우리중생이 과거부터 현재를 통해서 미래까지 나아가는 생사윤회(生死輪廻)를 간단히 풀이한 것이 십이인연법입니다. 이 가운데 무명은 과거세 헤매던 우리의 번뇌입니다. 물론 지금의 번뇌도 무명이라 할 수가 있지만, 십이인연법에서 말하는 무명은 과거세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무명입니다. 이런 무명 때문에 부부간에도 행동할 수가 있는 것이고, 영혼도 역시 그런 부모한테 딱 들어선단 말입니다. 무명이 없으면 가령 부모의 연이 있더라도 영혼이 들어서지 않습니다. 그때는 사람으로 태어날 필요가 없지요. 아까 말한 대로 천상이나 극락으로 가 버리지, 사람으로 올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명 때문에, 무명의 무게 때문에 그에 알맞은 부모를 만나게 됩니다. 그것이 무명이고 무명 때문에 결국은 그와 같이 부모 만나서 - 이것이 행(行)이라 - 내가 부모한테 태어나야 하겠구나합니다. 식(識)은 어머님의 태안에 막 들어 올 때의 한 생각입니다. 수태일념(受胎一念)이라, 태에 들어가는 한 생각이 식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무명과 행은 과거(過去)에 해당하고, 식(識), 명색(名色), 육처(六處), 촉(觸), 수(受) 등 다섯은 현재(現在)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가령 금생에 받은 일념(一念)이 식(識)이고, 태안에서 몸과 마음이 자라는 것, 즉 말하자면 겨우 몸과 마음이 구분 되는 것이 명색(名色)입니다. 또한 몸과 마음이 더욱 자라서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 즉 눈,코,입이 다 붙어서 제대로 사람 몸을 갖춘 태아(胎兒) 때가 육처(六處)고 말입니다.

 

 

두 살 세 살때 멋모르고 사물에 접촉하는 것이 촉(觸)이고 육칠세 이후에 사물에 대하여 고락(苦樂)을 느끼는 것이 수(受)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과거는 무명(無明)과 행(行) 둘에 해당하고, 현재에 식(識)을 받아서 - 마음 받아서 엄마의 태(胎)를 통해서 태어날 때가 현재에 해당합니다.

 

즉 말하자면 식, 또는 태안에 자라는 마음과 몸, 또 마음과 몸이 자라서 눈과 코가 다 생기고 육신(肉身)이 제대로 갖추어 지는 이것이 육처(六處), 금생(今生)에 나와서 어릴 때 사물을 접촉하는 것이 촉(觸), 더 자라서 육칠세 이후에 사물에 대하여 고락(苦樂)을 느끼는 것이 수(受)인데, 이와 같이 식(識), 명색(名色), 육처(六處), 촉(觸), 수(受)는 현재에 해당합니다.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몸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애욕(愛慾)을 느끼고 또 갖고 싶어서 우리가 욕구하는 것은 현재에 다시 짓는 업에 해당합니다. 현재 애욕을 느끼고 다시 갖고 싶어 하는 취(取)와 있을 유(有)는 현재 짓는 우리의 업(業)에 해당합니다. 이런 업에 따라서 미래에도 다시 태어나는 생(生)과 늙고 죽는 노사(老死)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은 과거(過去)나 현재(現在)나 미래(未來)를 통틀어 우리 중생이 태어나고 늘고 죽는 여러 가지 관계를 말씀하셨습니다.

 

 

이상 십이인연 중에서 ‘무명(無明)과 행(行)의 이(二)는’- 무명과 행, 둘은 곧 혹업(惑業)입니다. 미혹할 혹(惑)은 이것은 번뇌(煩惱)와 똑 같은 뜻입니다. 맨 처음에 있는 무명과 행, 둘은 곧 혹업, 즉 번뇌와업입니다. 무명은 번뇌고 행은 업입니다. 둘은 ‘곧 혹(惑)업(業)의 이(二)로서’ 즉 번뇌와 업의 둘로서 ‘과거세(過去世)의 원인(因)에 속하고’ 또한, 여기 있는 식(識)은 엄마의 태안에 막 붙어서 들어오는 식입니다. 그 다음에 엄마의 태안에서 몸과 마음이 갈라져서 구분 될 수 있는 그때가 명색(名色)입니다.

 

 

명색과 육처(六處) - 눈, 코, 입과 같이 육신이 구분 지을 때 육신이 구분 될 만큼 자랄 때가 육처입니다.

 

 

촉(觸) 이것은 태어나서 2, 3세 동안에 사물에 대하여 접촉하는 그때가 촉이고, 수(受)는 더 자라서 육칠세 이후에 사물에 대해서 고락(苦樂)을 느낄 때입니다. 이와 같이 ‘식(識)·명색(名色)·육처(六處)·촉(觸)·수(受)의 5(五)는 과거(過去)의 혹(惑)·업(業)에’ 과거의 번뇌(煩惱)와 업(業)에 ‘인(因)에 연(緣)하여 수(受)한 - 금생(今生)에 받을 - 현재(現在)의 과(果)에 속(屬)하니’ ‘차(此)는 과현일중인과(過現一重因果)’ 입니다. 과거와 현재와 일중의 즉 말하자면 한 가닥의 인과에 속한단 말입니다.

 

‘또한 애(愛)·취(取)의 이(二)는 현재(現在)의 혹(惑)이요’- 이것이 애취입니다. 14~15세 이후에 강성한 애욕을 청하는 애와 또 보다 성인이 된 후에 그때는 보다 더 애욕이 성해서, 제경에 - 여러 가지 경계에 - 추구해서 꼭 내가 취해야 하겠구나 하는 즉 말하자면 그와 같은 강성한때, 이런 애(愛)·취(取)가 현재(現在)의 번뇌(煩惱)입니다. 현재의 번뇌요. 즉 혹(惑)이요.

‘유(有)란 현재의 업이며’ - 여기 있는 유(有)란 말입니다.

 

 

애(愛)·취(取) 번뇌에 의해서 종종의 업을 지어서 당래(當來)의 과(果)를 정하는 위니 유(有)란 곧 업으로서, 이런 유란 현재의 업입니다. 현재의 우리는 애욕 때문에 여러 가지 하찮은 욕구 때문에 업을 짓습니다. ‘혹(惑)업(業)의 현재(現在) 인(因)에 연(緣)하여 미래(未來)의 생(生)과’ 또 미래에서 추구하는 ‘노사(老死)의 과(果)를 감(感)할새’ -늙고 죽는 과(果)를 느낄새- ‘차는 현미일중인과(現未一重因果)이다.’ 이것은 현재(現在)와 미래(未來)의 한 가닥 일중의 인과(因果)이다.

 

‘위의 과현일중(過現一重)과 현미일중(現未一重)을 합칭(合稱)하여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라 한단 말입니다. 과거와 현재의 인과와 현재와 미래의 인과를 이와 같이 양인과를 합하면 이것이 삼세양중의 인과입니다. ‘차(此) 양중(兩重)의 인과(因果)에 의(依)하여 윤회(輪廻)가 무궁(無窮)함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에 의하여 윤회(輪廻)가 아까 말한바와 같이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 수라(修羅), 인간(人間), 천상(天上) 등 육도(六途)에 뱅뱅 도는 윤회가 무궁함을 - 다함이 없음을 -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무명(無明)을 못 끊으면 즉 번뇌(煩惱)를 못 끊으면 우리 생명(生命) 은 몇 천생, 몇 만생도 윤회하고 마는 것입니다. 시초에 내가 나올 때도 역시 무명 때문이었습니다. 무지 때문입니다. 무지는 무엇인가? 아까도 말했습니다만 내생명의 본바탕을 모른단 말입니다. 즉 우주의 본질을 모르는 것이지요.

 

 

‘나’라는 것은 사실은 원래 없는 것인데, 단지 진리(眞理)를 모르기 때문에 ‘나’라고 고집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나라고 고집하는 것이지 사실 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나를 고집하는 무명, 천지우주(天地宇宙)의 본바탕을 모르는 무명, 그런 무명 때문에 행(行)이 있고 부모님 연(緣)만나서 우리가 사람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무명을 끊어버리지 못 하면 결국은 죽은 후에도 다시 똑같은 업(業)을 지어서 뱅뱅 돈단 말입니다. 몇 만생 되어도 무명을 끊지 못 하면 인간의 윤회는 끊을 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결국은 무명을 끊는, 무지를 끊는 그것, 즉 우리가 수행하는 문제입니다. 이와 같이 생사(生死) 거듭하는 몇 만생 동안 죽고살고 또한 전쟁이 있고 무엇이 있고 해서 여러 가지 참화를 겪습니다. 인간의 역사(歷史)만 본다고 하더라도 그런 유구한 세월동안에 겪은 인생의 고난(苦難)은 모두가 다 이와 같이 무지 때문이고 결국은 무지를 못 끊어서 윤회하는데서 발생합니다.

 

열반(涅槃)은 무엇인가?

 

무명(無明)을 끊어서 영생(永生)의 자리에 들어가는 것이 열반입니다. 성불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자(聖者)란 것은 이와 같이 인생고(人生苦)의 원인을 확실히 알고 무명을 끊어 열반에 드는 사람입니다.

 

 

* 이상의 법문은 청화 큰 스님께서 태안사 3년 결제 중 회해당에서 하신 법문입니다. 행자님들을 위해 설법을 시작 하셨는데, 둘째 날부터 선방 스님 몇 분과 신도 몇 분이 참여 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첫째 날 삼보에 대한 법문은 녹음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