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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마음의 고향

마음의 고향 24집 사성제. 팔정도

 

마음의 고향 24집


사성제(四聖諦) · 팔정도(八正道)


중도(中道)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깊고 얕은 것이 있습니다. 초기에 말씀하신 법문은 일반 중생의 근기(根機)에 맞추어서 ‘있다 없다’하는 우리 중생의 범부(凡夫)소견에 맞추어서 “선(善)도 있고 악(惡)도 있고 천상(天上)도 있다”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서 하는 유교(有敎)의 입장에서 가르침을 전개한 것도 있지만, 나중에 중생의 근기가 익은 다음에는 “이러한 것은 모두 몽환포영(夢幻泡影)이다. 여환즉공(如幻卽空)이다” 라고 말합니다. 같을 여(如)자, 허깨비 환(幻)자, 곧 즉(卽)자, 빌 공(空)자 - 여환즉공(如幻卽空)입니다. “일반 중생이 보는 것은 마치 허깨비 같이 텅 비어 있다”라는 말씀으로 참다운 부처님의 실상세계(實相世界)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진의(眞儀)는 그냥 다 비어있다는 것이 아니라 참다운 진리 즉 중도(中道)에 있습니다.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비어있고 허망하다 하더라도 본래 빈자리는 허무(虛無)가 아니라 심심미묘(甚深微妙)한 무량지혜(無量知慧), 무량공덕(無量功德)을 갖추고 있다는 가르침이 중도입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가르침은 초기에 ‘있다 없다’ 하는 중생근기에 맞추어서 말씀하신 유교(有敎), 그 다음에 중생이 보는 여러 가지 현상계는 허망하고 무상(無常)하다는 공교(空敎), 그러나 다만 공이 아니고 중도실상(中道實相)이라고 하는 중도교(中道敎)로 전개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무슨 법문을 생각할 때, ‘이것이 유교인가? 공교인가? 중도교인가?’ 판단할 수 있어야 오류를 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경전들은 부처님께서 한꺼번에 체계 있게 말씀하신 법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현대와 같이 과학적인 지식을 일반대중에게 가르치기 위해서 애써 교안을 짜가지고 하신 것이 아니라, 부처님께서 그때그때 갑(甲)한테는 갑대로, 을(乙)한테는 을대로, 김가한테는 김가대로, 박가한테는 박가대로 근기에 맞추어서 말씀하신 법문을 나중에 주워 모은 것이 경전입니다. 물론 부처님 말씀을 잘 기억한 것도 있고 잘못 기억한 것도 있겠지요. 그렇게 기억한 것들을 주워 모아서 만든 것이므로, 경전에서 하신 말씀들이 똑같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는 공(空)사상을 말씀하셨고, 어떤 대목에서는 유교(有敎)를 말씀하셨고, 어떤 때는 중도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까 말한 것과 같이 세 가지 견해 - 공이라는 개념, 중생 근기에 맞추어서 ‘있다’는 개념, 다만 있는 것도 아니고 다만 빈 것도 아니라 실상은 여러 가지 공덕을 갖추고 있다는 중도의 개념 - 이 세 가지 개념을 놓고 봐야지, 그렇지 않으면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따라서 불법은 아무리 쉬운 법문이라 하더라도 항시  부처님의 진리가 거기에 담겨 있어 함부로 말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실은 초심문(初心文: 初發心自警文) 같은 것도 원래는 깨달은 사람이 해야만 바른 강의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사제법문(四諦法門)이나 삼보(三寶)같은 법문은 언제 들어도 새로운 것입니다. 우리가 깨닫기 전에는 다 미혹한 것이니까요. 불법승(佛法僧)삼보를 안다고 하지만 결국은 알쏭달쏭한 것이지 참답게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부처님 법문은 수십 번 들어도, 누가 말해도 항시 새로운 것입니다. 그런 점을 염두에 두고서 불경(佛經)을 들을 때는 해태심(懈怠心)이 없이 잘 들어야 합니다. 삼보(三寶)는 모두 아는 바와 같이 불보(佛寶), 법보(法寶), 승보(僧寶) 아닙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보배가 삼보인데, 그 가운데서 법보를 얘기하고자 합니다.



법보는 사제(四諦), 팔정도(八正道), 12인연법(十二因緣法), 육바라밀(六波羅密) 법문을 위주로 해서 일체 경전의 법문을 망라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불교인들은 비록 어려운 것은 좀 모른다 하더라도 - 물론 쉬운 것 가운데도 어려운 것이 들어 있지만 - 우선 사제, 팔정도, 12인연법은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불교 서적을 보면, 가령 팔정도 풀이만 보더라도 무책임한 풀이가 많이 있습니다. 사제 법문에 대하여 훌륭한 강사들이 번역한 것도 보고 여러 가지 보았는데, 첫째 사제 법문의 ‘고집멸도(苦集滅道)’ 가운데 ‘멸(滅)’에 대한 풀이에서 굉장히 큰 오류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아무튼 사제는 넉 사(四)자, 진실한 체(諦)자인데 ‘체’자의 음 그대로 해서 ‘사체’라고 발음하기도 합니다만 어느 것이 옳다 그르다 할 필요는 없고, 일반적으로 ‘사제’라 합니다.


사성제(四聖諦)


사제(四諦)를 사성제(四聖諦), 사진제(四眞諦)라고도 운(云)하며, 성자(聖者) 소견(所見)의 진리(眞理)이다.


말이 어색한 부분도 있지만 여러분들한테 한문자를 습득시키기 위해서 짐짓 한문자를 되도록 많이 넣은 글을 인용합니다. 이를 운(云)자는 ‘무엇 무엇이라 말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사제를 사성제 또는 사진제라고도 말하며’, ‘성자(聖者) 소견(所見)의 진리이다.’ 성자나 성인이나 같은 뜻입니다. ‘성자가 보는 바의 진리이다.’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사제입니다.  


일반 범부는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외도(外道)와 정도(正道)를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여러 가지 구분이 많이 있으나 외도는 사성제 풀이를 하지 못하고, 정도 즉 우리 부처님 가르침만이 사성제를 그대로 진리라고 칭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성제를 모르면 불교인이라고 할 수가 없지요. 인생고(人生苦)가 무엇인가? 사회고(社會苦)가 무엇인가? 예컨대 어느 경제인이 잘못 해서 굉장히 사회혼란을 야기 시켰을 때, 여러 가지 사회적 모순을 말하며 그 원인을 해부하지요. 개인적인 인생고나 사회고나 또는 이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는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그 원인은 불교에서 말하는 이 사성제 가운데 고(苦)의 원인인 집(集)에 있습니다.


사성제는 고제(苦諦), 집제(集諦), 멸제(滅諦), 도제(道諦)입니다. 괴로울 고(苦)자, 진실할 제(諦)자, 고제(苦諦), 모을 집(集)자, 진실할 제(諦)자, 집제(集諦) 멸할 멸(滅)자, 진실할 제(諦)자, 멸제(滅諦) 그 다음에 길 도(道)자, 진실할 제(諦)자, 도제(道諦)입니다.



1. 고제(苦諦)


고제(苦諦)란 삼계(三界) 육취(六趣)의 고보(苦報)니 미()의 과()요,


나아갈 취(趣)자, 육취(六趣)나 육도(六道)나 똑같은 것입니다. 삼계육도, 삼계육취의 고보(苦報)란, 고의 과보(果報)를 결과로 받는, 하나의 보답으로서 받는 미혹(迷惑)의 과보란 말입니다. 진리를 모르는 미혹의 결과입니다.

중생고(衆生苦)의 원인은 무엇인가? 이것은 집제(集諦)입니다.


우리 중생을 어떻게 볼 것인가? 중생은 안락한 것인가? 우리 중생은 역시 무어라 해도 어떻게 해부해 보나 결국은 다 고공(苦空)이라, 고(苦) 뿐입니다. 중생의 낙(樂)이라는 것은 사실은 흔적도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생로병사(生老病死)란 말입니다. 날 때의 고통, 살려는 고통, 또는 늙어서 고통, 병들어 고통, 결국은 수명이 다해서 죽는 고통, 그 외에도 헤어지는 고통, 미운사람 만나는 고통, 또는 구해서 얻지 못하는 고통, 이 몸뚱이 원수가 장기(臟器)가 가득해 있기 때문에 완전히 조화로운 상태는 없는 것입니다.


불교 용어로 말하면 사사일협(四蛇一匧)이라 - 넉 사(四)자, 뱀 사(蛇)자, 한 일(一)자, 상자 협(匧)자, - 네 마리 독사가 한 상자에 모여 있는 것이 우리 몸이나 같다는 말입니다. 지(地)와 수(水)와 화(火)와 풍(風)이란 말입니다. 바람 기운, 물 기운, 불기운, 또는 땅 기운 -  이런 것들이 한꺼번에 모여서 잠시 동안 조화를 이룬 것이기 때문에 완전무결한 때는 없는 것입니다. 음식을 더 먹으면 더 먹은 대로, 덜 먹으면 덜 먹은 대로, 추우면 추운대로 말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몸이라는 것은 우리 업(業) 따라서, 업을 긁어모아서 잠시 동안 그와 같이 각 원소가 합하여 있는 지라 우리 몸이 완전무결할 때가 없습니다. 따라서 몸 자체로 보아도, 이것이 모두 괴로움뿐입니다.



생각은 무엇인가? 우리 범부(凡夫)의 생각은 모든 것을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바로 보지 못하니까 바로 생각하지도 못합니다. 바로 생각하지도 못하고 바로 보지도 못하는 사람이 마음의 안심입명(安心立命) - 마음이 편안할 수가 있습니까? 몸도 편안하지 못하고 맘도 편안하지 못하고, 끝내는 한계상황에서 오는 여러 가지 핍박만 있습니다. 따라서 생각을 깊이 하지 못한 사람들이 ‘인생은 안락이다’고 생각하다 취생몽사(醉生夢死)해서 죽고 마는 것입니다. 바로 보면 인생은 고(苦)뿐입니다. 따라서 고를 피하기 위해, 고를 이기기 위해 불교가 있습니다.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라고 하지만, 다른 종교는 고의 원인을 확실히 모릅니다.


우리는 우선 ‘인생이라는 것이 고다. 일체개고(一切皆苦)다. 인생고해 (人生苦海)다. 다시 말해 인생은 고생바다’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자가 깨달아서 - 우주를 다 통달해서 항시 불성(佛性)을 보는 경지 같으면 모르거니와 그렇지 않은 한, 우리 중생의 견해로는 아무리 따져 봐도 고(苦)뿐입니다. 고를 분명히 느껴야만 참다운 수행자입니다. 고를 느끼기 때문에 스님들도 출가 수행자가 된 것입니다. 삼계(三界)는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 아닙니까. 중생이 생사윤회(生死輪回)해서 왔다갔다 개미 쳇바퀴 돌 듯 하는 것이 삼계윤회입니다.


욕계란, 욕심을 미처 못 떠난 경계입니다. 음욕(淫慾), 식욕(食慾), 수면욕(睡眠慾), 또는 가지가지 욕심을 못 떠난 경계가 욕계입니다. 우리는 지금 욕계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 함부로 탐심을 내고 아만심(我慢心)을 냅니다만, 사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 못 되는 것입니다. 다만 욕계의 저 밑바닥 남섬부주(南贍部洲)에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이지, 욕계 내에도 사람보다 더 훌륭한 욕계천(欲界天)이 있습니다. 올라가면 또 색계가 있고 무색계가 있는데 어떻게 우리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되겠습니까?


따라서 인간은 더 겸허해야 합니다. 욕계도 꼭대기가 아니라 욕계내의 저 밑에 인간이 존재합니다. 물론 그 보다 저 밑에는 지옥도 있고 하겠지만, 인간은 어정쩡한 존재이기 때문에 만물의 영장은 못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욕계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윤회하는 곳은 욕계보다 더 높은 색계도 있고 무색계도 있습니다.


육도(六道)는 욕계내의 여섯 갈래입니다.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 수라(修羅), 인간(人間), 천상(天上) 말입니다. 삼악도(三惡道), 삼선도(三善道)라, 나쁜 갈래는 지옥, 아귀, 축생이고, 육도 가운데서도 좀 좋은 갈래는 아수라, 인간, 천상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욕계에 해당합니다. 이와 같이 삼계육도에서 받는 그런 괴로운 과보가 고제입니다. 결국은 미혹해서 진리를 모르는 결과란 말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알았다면 욕계에 태어날 리가 만무합니다.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결국은 업에 칭칭 묶여서 이렇게 욕계에 온 것입니다. 부모님의 인연을 만나 우리가 태어날 때도, 역시 업장(業障)이 가볍고 저 천상이나 극락에 가 버리면 사람으로 올 수가 없습니다. 어정쩡하게 헤매다가 부모님 인연 만나서 이렇게 욕계로 덜컥 온 것입니다. 이것이 욕계 중생입니다.


2. 집제(集諦)


집제(集諦)란 탐(貪)‧진(瞋)‧치(痴)등의 번뇌(煩惱)와 선악(善惡)의 제업(諸業)으로서 차이(此二)가 능(能)히 삼계육취(三界六趣)의 고보(苦報)를 집기(集起)함으로 미(迷)의 인(因)이다.



번뇌라는 것은 무량무수의 번뇌이지만, 간추리면 탐심(貪心), 진심(嗔心), 치심(癡心) 아닙니까? 다 아는 바와 같이 3독심(三毒心) 아닙니까? 이러한 3독심 등의 번뇌와 선악의 제업으로서, 업(業)이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할 때에 악업도 있지만 선업도 있지 않겠습니까? 남한테 보시도 하고, 잘되기 바라고, 또 중생을 위해서 애도 쓰고 하는 것이 선업 아닙니까? 업의 종류는 악업(惡業)과 선업(善業)과 도업(道業)등 세 가지로 구분됩니다.


악업은 자기와 남을 해롭게 하는 것이고, 선업은 자기와 남을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선업 역시 비록 보시도 하고 여러 가지를 베풀지라도 자기라는 상(相), 남이라는 상, 그런 상을 못 떠나면 그때는 선업에 머무는 것일 뿐, 참다운 성불(成佛)의 도업(道業)은 못 됩니다. 따라서 업에는 악업과 선업이 있고, ‘나’라는 상과 ‘너’라는 상을 떠나서 참다운 해탈에 이르는 도업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불교인들은 도업을 지어야 합니다. 선업을 짓는 것은 악업보다는 낫지만, 상에 매여 있으면 해탈의 원인은 되지 못합니다.


아무튼 이와 같이 탐심이나 진심이나 치심이나 이런 번뇌가 있으니까 입으로 행하면 나쁜 말도 나오고 좋은 말도 나오겠지요. 그리고 몸으로 행하면 살생 등 여러 가지 업을 짓습니다. 이런 번뇌가 있으면 자연히 이것이 우리 몸이나 입이나 뜻으로 발동(發動)할 때는 업이 되어 버립니다. 이런 모든 업으로서 ‘차이(此二)가’ - 이와 같은 번뇌와 제업(諸業), 이 둘이 능히 삼계육취의 괴로운 과보를 모아 일으키는 집기(集起)라, 결국은 집기란 미혹의 인(因)이 된단 말입니다.


아까도 말했습니다만 인생고의 원인은 집기(集起)입니다. 다시 말하면 탐진치 삼독심에서 우러나온 여러 가지 선악의 업이 인간의 여러 가지 번뇌나 고생의 원인입니다. 사회나 가정이나 개인이나 모두가 다 따지고 보면 결국은 이와 같이 삼독심이나 거기에서 우러나온 선악 행위의 과보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분명히 느껴야 합니다. 인간 번뇌, 인생고, 사회혼란은 그 원인이 무엇인가? 가장 근원은 결국 삼독심입니다.


따라서 사회 정화나 자기 마음의 안정을 얻으려면 먼저 삼독심을 맑혀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떠나서 겉만 들어 사회운동을 하려고 하면 사회 정화도 못 되고 더럽히고 업을 짓고 마는 것입니다. 마땅히 우리 불교인들은 근원적인 문제 - 일체 인간의 여러 가지 모순, 인간의 고생은 모두 다 원인이 삼독심에서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삼독심을 제거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결국 참선염불(參禪念佛)아닙니까? 어느 산중에서 가만히 있다 하더라도 참선염불을 하고 있으면 삼독심을 제거하는 것이니까 악의 뿌리를 뽑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가 속해 있는 좁은 범위 내에서 악의 뿌리를 뽑는 데만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은 우주에 상통합니다. 가령 여기서 얼른 한 생각을 일으키면, 우리 생각의 형상은 없어진다 하더라도 염파(念波)는 소멸이 안 되고 그냥 천지 우주의 불성에 파동을 일으킵니다.


따라서 도인들은 여기서 한 생각을 일으키면 저 미국에 가서 직통으로 느낍니다. 전파이상으로 빠릅니다. 한번 생각을 일으키고 한번 행동하고 하는 것이 모두 다 천지우주에 영향을 줍니다. 그러므로 아까 말한 바와 같이, 우리가 이렇게 앉아서 사회 참여를 하지 않고 데모도 하지 않고 있다 하더라도 공부를 바로 하고 마음을 맑히면 내 스스로의 마음을 맑힘과 동시에 그 주변도 맑힐 수 있습니다. 또한 동시에 우주의 그런 성력(聖力) 즉 말하자면 우주의 성스러운 힘에 더 플러스(plus)하는 위대한 힘을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 생각 자체가 그대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마음 정화가 우리 주변 정화이며 또한 동시에 우주 정화입니다. 그러므로 꼭 현상적인 사회참여만을 권고할 필요는 없습니다.


3. 멸제(滅諦)


멸제(滅諦)라, 멸할 멸(滅)자, 진실할 제(諦)자, 멸제는 열반(涅槃)을 말합니다. 멸제나 열반이나 같은 뜻으로 쓰입니다. 열반을 바로 풀이하면 영생(永生)입니다. 멸(滅)을 단순히 번뇌를 멸한다는 정도로만 생각해서는 너무나 소극적입니다. 따라서 사제(四諦)를 풀이 할 때에 멸제는 그냥 번뇌만 멸한다는 정도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체 공덕을 갖춘 영생, 영생의 지혜, 영생의 생명입니다.


아까도 얘기했습니다만, 일반 외도(外道)는 결국 멸을 모릅니다. 멸은 정도(正道) 밖에 모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가령 산중에 가서 공부한다 하더라도 멸(滅)을 구하고 멸을 목적으로 해야지, 멸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어정쩡한 것을 목적으로 하면 그때는 그냥 상(相)에 걸리고 맙니다. 구경(究竟) 목적 - 일체 번뇌를 멸하고서 영생하는 불생불멸(不生不滅)하고 불구부정(不垢不淨)한 구경적인 끄트머리 목적인 멸을 구해야만 참다운 공부입니다.


나중에 공부를 하겠지만, 비록 사선정(四禪定) 법(法)을 닦는다고 하더라도 역시 멸을 구하지 않으면 그때는 외도에 그칩니다. 멸을 목적으로 해서 멸을 구하면 그것이 정도입니다. 우리가 똑같은 보시를 한다 하더라도 멸(滅)을 구하면 아까 말한 바와 같이 그것이 도업(道業)이고, 멸을 구하지 아니하고 나중에 칭찬의 말이나 듣고 보답이나 받고자 선업(善業)에만 그쳐서는 멸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해탈(解脫)하고는 관계가 없습니다.


같은 행(行)도 멸을 구해서 해탈을 구하면 정도이고, 해탈을 구하지 않으면, 유위적(有爲的)이고 상대유한적(相對有限的)인 어떠한 공리(功利)를 구하면 그때는 정도가 못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구분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기독교에서는 순교를 많이 했는데, 순교를 한다 하더라도 역시 아까 말한 바와 같이 해탈을 구하고 순교하면 정도입니다. 해탈을 구하지 않고 다만 ‘인류를 위해서 한다’고 하면, 속인(俗人)과 범부(凡夫)들이 하는 제한된 것 밖에는 못됩니다.


멸제(滅諦)란 곧 열반(涅槃)으로서, 열반(涅槃)이란 혹업(惑業)을 멸()하고 생사(生死)의 고()를 출리(出離)한 진공적멸(眞空寂滅)의 경계(境界)니, 오()의 과()다.


혹(惑)은 미혹할 혹(惑)자입니다. 혹은 번뇌와 똑같은 뜻입니다. 혹업(惑業)은 미혹할 혹(惑)자, 업 업(業)자입니다. 다시 말하면, 탐진치(貪瞋痴)가 혹(惑)입니다. ‘혹업(惑業)을 멸(滅)하고’ - 이것은 ‘혹업을 없애고’라는 뜻입니다.


본래 혹이 없는 것을, 번뇌에 따라서 행동하는 선악(善惡)의 제업(諸業)이 업(業)입니다. 따라서 탐진치(貪瞋痴)와 선악의 제업을 한꺼번에 말할 때 혹업(惑業)이라 합니다. 멸(滅)이란, 번뇌와 여러 가지 업을 멸하고 태어났다 죽었다 하는 삼계윤회(三界輪回)하는 생사고(生死苦)를 출리(出離)하여 - 날 출(出)자, 떠날 리(離)자 - 여의고 떠나서 진공적멸(眞空寂滅)의 경계(境界)입니다.


우리는 진공(眞空)과 단공(但空)과 구분해서 알아야 합니다. 잘 모르면 굉장히 심오하기 때문에 자칫 개념이나 술어를 잘 모르면 오류를 범합니다. 일반 공(空) - 다 비었다 하는 허무(虛無)의 공은 단공(但空)이라 합니다. 다만 단(但)자, 빌 공(空)자, 단공(但空)입니다. 다만 비지 않고서 공 가운데 그야말로 신비하고 불가사의(不可思議)하고 무량무변(無量無邊)의 공덕이 충만해 있다는 것이 진공(眞空)입니다.


소승(小乘)은 단공만 알고 진공은 모릅니다. 진공은 반드시 묘유(妙有)와 같이 있어야 하는 것인데, 일반 소승은 단공만 생각하기 때문에 너무나 허무에 빠져 중생제도는 하지 못하고 자기만 편하고 맙니다. 진공적멸 - 고요할 적(寂)자, 멸할 멸(滅)자 - 적멸도 그냥 가만히 있어서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 번뇌가 발동하지 않고 영원히 안락한 경계가 적멸입니다.


멸(滅)은 아까 말한 바와 같이 모두를 멸하는, 즉 말하자면 번뇌를 멸해버려 영원히 안락하고 영원히 안온(安穩)한 경계를 말하기 때문에 바로 영생입니다. 따라서 열반이나 적멸이나 그냥 멸(滅)이라고 하나, 이것은 똑같은 뜻입니다. 다만 표현만 달리 했을 뿐입니다. 멸(滅)은 ‘오(悟)의 과(果)다.’ 깨달음의 결과란 말입니다.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이 부처님 가르침은 굉장히 체계적입니다. 조금도 합리적인 뜻에 어긋남이 없습니다.


먼저 중생의 경계(境界)를 봅시다. 결국 우리 중생이 받는 것은 고(苦) 아닙니까? 고(苦) 아님이 없습니다. 아까도 말한 바와 같이, 다른 고(苦)는 그만 두고라도 인간의 한계 상황인 생로병사(生老病死) - 업이 있으면 결국은 태어나야 하는 것이고, 태어나면 늙어야 하는 것이고, 아파야 하는 것이고, 결국은 죽어야 하는 한계 상황이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에는 고(苦)가 있는 것인데, 그 고의 원인은 무엇인가? 고가 많이 있지만, 하여튼 모든 고의 원인은 번뇌와 번뇌에 따라서 행동하는 행(行)입니다. 다시 말하면, 집(集)입니다.

 

우리 인생고가 있고, 인생고의 원인인 집(集)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에 인생고만 있고 또 고(苦)의 원인인 번뇌만 있다고 하면 그야말로 살 필요가 없지요. 우리 인생에 이런 고(苦)와 집(集)밖에 없다면 그때는 자살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어디 갈 곳도 없고 우리가 나아갈 필요도 없으니까 말입니다. 지금 노이로제나 사회적인 여러 가지 번뇌 때문에 이상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그래도 제법 판단은 하기 때문에 인생고는 볼 수 있습니다. 인생고도 보고 또 인생고의 원인인 집(集)도 대강은 봅니다.


하지만 인생고의 원인인 집(集)을 우리가 떠날 길이 없습니다. 사실은 못 떠나는 것입니다. 불교 아니면 결국은 떠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불교라야 인생고를 떠나 영생의 안락세계로 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멸(滅)이 있어야만 비로소 우리 숨통이 트입니다. 멸이 없으면 숨통이 트이지 못 하는 것입니다.


고를 짓고, 고의 원인을 짓고서 우리가 고를 받는 것이고, 이와 같이 윤회 가운데서 고를 짓고 받고 또 고를 짓고, 또 윤회하고 그런 가운데 뱅뱅 개미 쳇바퀴 돌듯이 돌고만 있습니다. 다행이 석가모니 가르침 또는 성인들의 가르침으로 인해서 고(苦)를 떠나고 집(集)을 벗어버리고 해탈의 멸이 있습니다. 멸이 있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다른 것은 모른다 하더라도, 그야말로 우리가 가야할 해탈의 길, 해방되어 갈 길을 안다는 것만 두고 보더라도 이것이 굉장히 중요하고 우리한테는 큰 도움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고의 원인을 지어서 우리가 고를 받는 것이고, 그 반대로 해탈 즉 말하자면 영생의 멸이 있습니다. 또 멸에 이르려면 그냥 무조건 가는 것이 아니라, 고(苦)와 집(集)을 없애는 도(道)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집(集)을 지어서 고(苦)를 받으므로, 멸(滅)에 가려면 고와 집을 멸해야 쓰겠지요. 그것이 순리(順理)입니다. 고와 집을 멸하는 것이 여기 있는 도(道)입니다. 다시 말해 도제(道諦), 팔정도(八正道)입니다. 물론 여러 가지 수행법이 많이 있지만 간추리면 여덟 가지 바른 길입니다.


4.도제(道諦)


도제(道諦)란 곧 팔정도(八正道)로서 능(能)히 열반(涅槃)에 통()하는 도()이니 오()의 인()이니라.


도제는 능히 열반에 통하므로 ‘도’라 이름하며 바로 깨달음의 원인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현대인들은 어느 정도 고의 원인을 좀 안다 하더라도, 고의 원인을 제거하는 팔정도를 제대로 지키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팔정도에서 오는 멸(滅)의 그런 해탈의 행복은 우리가 얻을 수 없습니다.


사제법문(四諦法門)은 그야말로 참 불교의 대(大)·소(小) 또는 현(顯)‧밀(密) - 대승(大乘), 소승(小乘), 밀교(密敎)등 모든 불교를 관통해 있는 하나의 대 진리입니다. 어떤 가르침이든 불교 가운데 이와 같이 사제법문이 안 들어 있는 데가 없습니다. 어디에 조금 더 역점을 두는가 그런 차이는 좀 있지만, 사성제가 들어 있으면 불법(佛法)의 참다운 정도이고, 들어 있지 않으면 참다운 불법이 못 됩니다.


초전법륜(初轉法輪)


차(此) 중(中) 초이(初二)는 유전(流轉)의 인과(因果)이니 곧 세간(世間)의 인과(因果)요, 후이(後二)는 환멸(幻滅)의 인과(因果)니 곧 출세간(出世間)의 인과(因果)로서 사(四)를 모두 제(諦)라 함은 그 진리(眞理)가 실지(實至) 극(極)함으로 써요, 이자(二者) 공(共)히 과위(果位)를 앞세우고 인위(因位)를 뒤에 둠은 과(果)는 보기가 쉽고 인(因)은 알기 어려움으로 고과(苦果)를 먼저 보여 이를 염리(厭離)케 한 후 기(其) 인(因)을 단멸(斷滅)케 하며 우(又)는 열반(涅槃)의 묘과(妙果)를 먼저 들어 원락(願樂)케 한 후 기(其 )도(道)를 수행(修行)케 하심이니 불(佛)께서 보리수하(菩提樹下)를 기(起)하사 녹야원(鹿野苑)에 도(到)하시고 오비구(五比丘)를 위(爲)하야 이 법(法)을 여설(如說)하셨음으로 불전법륜(佛轉法輪)의 초(初)라 위(謂)하나니 수자(修者)는 의차수도(依此修道)하야 수의증멸(隨宜證滅)할지니라.


이 가운데 초이(初二) - 맨 앞의 둘은 고제(苦諦)와 집제(集諦)입니다. 우리가 탐(貪)‧진(瞋)‧치(痴)나 또는 선악의 업에 따라서 집제를 범하면 마땅히 그 과보로 삼계육취(三界六趣)의 생사고(生死苦)를 - 고(苦)의 과보를 받게 됩니다. 따라서 이것은 유전(流轉)의 - 해탈이 아니라 - 삼계인 욕계나 색계나 무색계에 갔다 왔다 하는 중생 경계에서 헤매는 것입니다 이런 삼계육도에서 유랑(流浪)하는, 즉 헤매는 인과로서 즉 세간의 인과요, 세간을 못 떠난 범부의 인과라고도 합니다. 후이(後二)는 - 뒤의 둘은 멸제(滅諦)와 도제(道諦)입니다. 후이는 환멸(還滅)의 - 돌아올 환(還)자, 멸할 멸(滅)자, - 즉 말하자면, 멸에 돌아오는 인과입니다. 멸은 아까 말씀과 같이 영생 아닙니까. 결국 영생에 돌아오는 인과입니다.


앞에 말한 것은 우리가 삼계육도에서 헤매는 유전(流轉)의 방황하는 인과 (因果)고, 후이(後二)는 그것을 떠나서 멸에 가는, 해탈로 가는, 극락으로 가는 인과로서, 즉 말하면 윤회하는 세간을 떠나 출세간의 -세간을 초월한 인과입니다. 따라서 세간을 떠난 출세간의 인과라고 합니다.


우리 불교는 제 아무리 난해하고 심수오묘(心髓奧妙)한 교리가 있다 하더라도, 유전하는 인과, 삼계육도에서 헤매는 유랑하는 인과, 또는 삼계육도를 떠나서 참다운 해탈로 가는 출세간의 인과, 이것으로 불교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사제법문의 개념에 관해서 명확히 명심을 해야 합니다.


세존(世尊: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서 무상대각(無上大覺)을 성취하셨지 않습니까. 보리수를 막 떠나서 녹야원(鹿野苑)으로 가셨지요. 녹야원은 그 당시에 부처님과 다섯 비구 - 부처님 도반 다섯 비구가 같이 공부했던 성지(聖地)입니다. 그때 상황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6년 고행을 하실 때에 여러 사람들을 많이 방문하기도 하고 법을 물었지만 대체로 가장 중요한 분이 세 분입니다.


맨 처음 분은 발가바(跋伽婆 : Bhᾱrgava) 선인(仙人)인데, 이 분은 고행을 주로 했던 외도(外道)입니다. 하루에 한 끼도 먹을 둥 말 둥 하고 며칠 굶기도 하고, 또는 자기 몸을 아주 괴롭혔습니다. 이와 같이 고행으로써 인간의 욕심을 없애야겠다고 했지요.


보통 외도라는 것은 안락한 범천(梵天)에 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런데 범천이란 청정한 하늘이기 때문에 욕계를 못 떠나면 범천에 못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외도는 자기 몸뚱이나 자기 생각에 따르는 욕망을 떼기 위해 고행을 합니다. 발가바 선인도 고행 외도라, 욕계를 떠나 범천의 안락한 곳을 가고자 고행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의 고행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그런 고행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굉장히 지나친 고행입니다.


부처님께서 발가바 선인에게 가셔서, “그렇게 고행을 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발가바 선인은 “욕계를 떠나서 범천에 태어나기 위해서요.” 그런단 말입니다. “그러면 범천 그것은 다시 후퇴가 없습니까?” 하고 부처님께서 물으시니, 발가바 선인은 “비록 범천에 태어나기는 하더라도 오랜 세월이 흐르면 다시 범천으로부터 후퇴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범천이 비록 안락하고 좋다하더라도 영생의 처소는 못됩니다. 해탈의 경계는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내가 바라는 것은 해탈이기 때문에 나는 범천에 머물 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도 발가바 선인 같이 고행으로 해서 삼매(三昧)에 들어서 범천에 올라가는 법은 벌써 다 터득하셨습니다. 그러나 발가바 선인은 그 이상은 못 가는지라, 즉 말하면 해탈의 법이 아닌지라 부처님께서는 거기서 떠나셨습니다. 그래서 아라라가란(阿羅邏迦蘭 : Ᾱlᾱra-kalᾱma)이란 성자를 찾아갔습니다. 아라라가란에게 가서, “당신이 공부하는 법은 어떤 것입니까?” 하니까, 아라라가란은 “내가 공부하는 법은 무소유처(無所有處)까지 올라가는 법”이라 했습니다. 무소유처는 욕계와 색계를 떠나서 무색계의 셋째 하늘입니다. 무색계는 공무변처(空無邊處), 식무변처(識無邊處), 무소유처(無所有處),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등 네 가지 하늘이 있는데 그 가운데 셋째 하늘이 무소유처입니다.


아라라가란이 “내가 공부하는 것은 번뇌를 다 없애고 욕계나 색계를 넘어서 무색계의 무소유처에 올라가는 법”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무소유처 까지 올라가면 다시는 후퇴가 없냐고 물어보셨습니다. 아라라가란은 무소유처가 좋은 곳은 좋은 곳인데 오랜 세월 동안 장수(長壽)는 하지만 이것도 역시 나중에 복력(福力)이 다하면 - 즉 말하자면 복분(福分)이, 지은 복이 다하면 다시 추락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내가 바라는 것은 해탈인데 여기서 머물 수가 없다”고 하면서 떠나셨습니다. 그곳을 떠나면서 “그러면 어디로 가야만이 당신보다 더 낫고 수승한 스승에게 갈 수 있습니까?”하고 물어 보셨다. 아라라가란은 자기 아들 우다카(Udraka)가 자기보다 공부가 더 수승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우다카에게 가셨습니다.


부처님은 우다카에게 “당신이 공부하는 것은 어디만큼 어떻게 공부하는 것입니까?” 하고 물으셨다. 그러자 우다카가 말했다. “내가 공부하는 것은 삼계의 가장 꼭대기 하늘인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까지 가기 위한 공부입니다. 무소유처 다음이 비상비비상처인데, 욕계, 색계, 무색계, 우리 중생이 윤회하는 곳에서는 제일 꼭대기 하늘, 제일 좋은 하늘이 비상비비상처입니다.”

부처님께서 “그 공부가 이루어지면 이제 다시 후퇴가 없고 다시 생사(生死)가 없습니까?” 하고 물어보시자, 우다카는 “비록 그곳이 수승(殊勝)하기는 수승하고 좋은 데지만, 팔만대겁(八萬大劫)동안 살면 다시 생사가 있어서 후퇴가 있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삼매에 들어서 그냥 우다카가 올라간 정도는 올라가셨지만, 그러한 말을 듣고 또 환멸을 느껴, “내가 바라는 것은 해탈이기 때문에 여기 머물 수가 없습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존(世尊)의 성도(成道)


그래서 마지막으로 보리수 아래로 가셔서, ‘이제는 스승이 필요 없다. 내가 삼매법(三昧法)은 대략 공부했으니까, 이제는 내 스스로 해탈의 공부를 해야겠구나.’ 이렇게 스스로 느끼시고, 자기의 맑은 영식(靈識)으로 느끼셨습니다.

삼세제불(三世諸佛), 우주는 본래 부처님입니다. 우주는 본래 모든 공능(功能)을 갖춘 부처님이기 때문에 우리가 정말로 맑으면 그때는 부처님이 감응하시는 것입니다. 비록 그때 스승은 없지만 그런 삼매 기운으로 해서 부처님의 청정한 마음, 즉 영생을 구하는 그 마음이 삼세(三世) 부처님 즉 우주의 본래 부처님과 감응(感應)이 되어 삼세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고 보리수 아래서 무상대각(無上大覺)을 성취했습니다.


이와 같은 내용이 부처님 성도기에 나와 있습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대도(大道)를 성취했지만 내가 이런 무상대도를 먼저 누구한테 말할 것인가?’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가르침을 받은 우다카, 아라라가란, 발가바 선인들을 찾아가려고 마음먹었습니다. 무어라 해도 이 분들은 딴 분들보다 훨씬 높으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천안통(天眼通)으로 보시니, 전에 떠나왔던 스승인 발가바 선인이나 아라라가란, 우다카는 벌써 세상을 떠나고 없었습니다. 이 분들이 있다면 그냥 한 마디에 알아차릴 것인데 벌써 다 세상을 떠나버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차선책으로, 먼저 같이 공부했던 도반인 다섯 비구가 있는 녹야원으로 제일 먼저 가셨습니다.


녹야원의 다섯 비구는 전에 부처님과 같이 공부할 때 부처님께서 나중에 고행을 중지하시고 어느 정도 자기 몸을 보양하시는 것을 보고서 환멸을 느끼셨습니다. 그래서 ‘저 사람과 우리는 도반(道伴)이 아니다’고 여겼습니다. 부처님에 대해서 다섯 비구는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부처님께서 녹야원으로 오셨지만 마중도 하지 않으려고 마음먹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오시는 것을 보고 ‘저 사람이 오면 가만히 있어야겠다 마중도 하지 않아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나 통달무애(通達無礙)한 세존이 되신 부처님의 장엄한 모습을 정작 뵙자, 저절로 자기도 모르게 앞에 가서 오체투지(五體投地)를 하고 경배를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다섯 비구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대들은 귀가 있으면 들어라. 내가 이제 불사(不死)의 길 , 죽지 않는 길을 말하리라.” 부처님께서 하신 최초의 설법이 이것입니다. 불교는 불사(不死)의 길입니다. 생사(生死)를 떠나는 길이란 말입니다. “내가 이제 죽지 않는 길을 말하리라.” 이것이 부처님의 최초의 설법입니다.


그래서 하신 법문이 여기 있는 사제법문입니다. 불교는 불사의 길입니다. 아까 말한 바와 같이 번뇌를 멸하고, 우리가 삼계윤회(三界輪回)하는 인생고를 멸하고 해탈의 길, 영생의 길, 생사를 떠나는 길을 가르치는 것이 불교입니다. 녹야원에 이르러 다섯 비구를 위하여 처음으로 사제법문을 설하셨으므로, 이것을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 맨 처음 진리의 바퀴를 굴렸다고 합니다. 진리를 가리켜서 ‘법’이라 합니다. 법륜(法輪)말입니다. 법륜을 맨 처음에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섯 비구를 위해 처음으로 법륜을 굴려, 아까 말한 불사의 길, 불사의 법문을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아함경(阿含經)」에 있습니다. 아함경은 네 가지가 있습니다만 「중아함경(中阿含經)」의 분별성제품(分別聖諦品)에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나중에 강원(講院) 가실 분도 있을 것이지만, 지금 강원이나 일반 승가에서는 보통 부처님 시초 설법인 「아함경」을 무시합니다. 그러나 「아함경」은 부처님께서 최초로 설법하신 것을 담은 것이라 마치 부처님의 육성과 같은 경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간단명료하면서도 불교의 요체(要諦)를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누구한테 배우지 못한다 하더라도 「아함경」은 여러분이 꼭 섭렵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부처님의 간명하고도 심수오묘(心髓奧妙)한 그런 법문을 알 수 있습니다.


아석여여등(我昔與汝等), 불견사진제(不見四眞諦),

시고구류전(是故久流轉), 생사대고해(生死大苦海),

약능견사진제(若能見四眞諦), 즉득단생사(卽得斷生死).


[나 아(我)자, 옛 석(昔)자, 더불 여(與)자, 너 여(汝), 무리 등(等), 아니 불(不), 볼 견(見), 넉 사(四), 참 진(眞), 진실할 체(諦), 이 시(是), 연고 (故), 오래 구(久), 흐를 류(流), 구를 전(轉), 날 생(生), 죽을 사(死), 큰 대(大), 괴로울 고(苦), 바다 해(海), 같을 약(若) 능할 능(能), 볼 견(見), 넉 사(四), 참 진(眞), 진실할 체(諦), 곧 즉(卽), 얻을 득(得), 끊을 단(斷), 날 생(生), 죽을 사(死)]


아석여여등(我昔與汝等)

내가 옛적에, 내가 일찍이 그대들과 더불어


‘~과’ 할 때에 ‘더불어 여(與)’자를 씁니다. ‘~와 함께’ 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내가 일찍이 그대들과 더불어’ 라는 말입니다.


불견사진제(不見四眞諦)

네 가지 진제(眞諦), 아까 말한 고집멸도(苦集滅道) 진제를 볼 수 없기 때문에


시고(是故)로

이와 같이 네 가지 고집멸도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구류전생사대고해(久流轉生死大苦海)

오랫동안 생사대고해(生死大苦海)에 - 죽고 살고 하는 인생 고해에서 우리가 유전(流轉)해서 방황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사진제(四眞諦)를 미처 보지 못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생사고해에서 방황을 했지만 이제는


약능견진제(若能見眞諦)

즉득단생사(卽得斷生死)

만약 능히 이렇게 사제법문을 본다면 곧 생사의 고(苦)를 능히 다 끊어 버리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사제법문은 중요한 것입니다.

사실, 다른 것은 모르고 이것만 안다 하더라도 신심만 있으면 성불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몇 마디 깨달아버리면 별로 할 것이 없습니다. 방법상의 문제가 여러 가지로 많이 있는 것이지요.


이것은 「열반경(涅槃經)」에 있습니다. 「열반경」은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실 때 하신 법문입니다. ‘열반(涅槃)’이라는 글자는 여러분들이 외우셔야 할 것입니다. 수백 번 수천 번 나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냥 일반적으로는 ‘앙금흙  날(涅)’자로 읽습니다. 우리가 흐레를 가만히 두면 앙금이 가라앉겠지요. 그러나 이 글자를 불교에서 통용할 때는 ‘죽을 열(涅)’, ‘극락갈 열(涅)자’입니다. 다른 글자 뒤에 있으면 한글 맞춤법으로 해서 ‘녈’이라고 읽겠지요. 본음은 ‘녈’자입니다. ‘죽을 녈(涅)’, ‘극락갈 녈(涅)’자 말입니다. 그러나 ‘열반’이라 할 때는 ‘앙금 흙 날(涅)’자의 뜻이 아니라 ‘극락갈 녈(涅)’자로 풀이해야겠지요.


그 다음에 열반이라는 반(槃)자는 쟁반 반(槃), 소반 반(槃)자인데 이것은 일반적인 뜻이고, ‘열반’이라는 뜻으로 쓸 때는 즐거운 반(槃)자입니다. 극락가서 즐거울 것이니까 열반이라는 것이 영생이 되겠지요.


사종사제(四種四諦)


불교가 어려운 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냥 단조롭지 않고 여러 가지 중생의 근기에 따라 그때그때 설하신 법문이 참 오묘합니다. 부처님께서 중생 근기에 따라 설하신 낮은 법문, 어려운 법문이 섞여 있기 때문에 어려운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갈래를 알게 하기위해, 같은 사제법문도 가르침의 깊고 얕은 정도에 따라 네 가지로 구분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사제법(四諦法)은 처음에는’

우리 근기로 해서 성문(聲聞),연각(緣覺), 보살(菩薩) 이렇게 안되겠습니까?

‘성문승(聲聞乘) 등(等) 소승천근(小乘淺近)의’ - 얕을 천(淺)자, 가까울 근(近)자 - 소승의 얕은 ‘기류(機類)에 대한 법문(法門)이나’- 중생에 대한 법문이나, ‘기(基) 리(理)는 대소승(大小乘) 일체불법(一切佛法)에 통한다.’

아까 말한 바와 같이 사제법문은 어느 불법에나 통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사제법문이 들어가지 않으면 사실은 불법이 아니니까 말입니다.


‘따라서 천태대사(天台大師)는 열반경(涅槃經) 성행품(聖行品)의 소설(所說)에 의하여’

불교철학의 체계를 가장 잘 세우신 분이 부처님 뒤에 천태대사 아닙니까. 그 분은 1300년 전 분입니다. 천태대사는 열반경 성행품 가운데서 ‘소설(所說)에’ - 설하는 바에 의하여 ‘사종사제(四種四諦)를’ - 네 가지 차원의 사제를 ‘안립(安立)하고 차(此)를 장(藏)‧통(通)‧별(別)‧원(圓)의 사교(四敎)에 배당(配當)했다.’

규정이나 체계를 세워 하나의 논(論)으로 작정(作定)하는 것을 안립(安立)이라 합니다. ‘안립’이란 말은 불교 외에는 잘 안 씁니다.


‘차(此)를 장(藏)‧통(通)‧별(別)‧원(圓)의 사교(四敎)에 배당(配當)했다.’

감출 장(藏)자, 통할 통(通)자, 나눌 별(別)자, 둥글 원(圓)자 - 장(藏)통(通)별(別)원(圓)이라,

좀 복잡하지만 상식적인 의미에서 필요한 것은 그때그때 설명하겠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아까도 말했지만 깊고 얕음에 따라 장교(藏敎), 통교(通敎), 별교(別敎), 원교(圓敎) 등 사교(四敎)로 구별합니다.


아까 말한 「아함경」과 같이 우리 중생의 경계에서 ‘있다, 없다’ 하는 선(善)도 있고 악(惡)도 있고 시(是)도 있고 비(非)도 있고 그와 같이 선악시비(善惡是非)를 논하는, 즉 말하자면 상대유한적(相對有限的)인 중생 차원에 맞추어 말씀하신 가르침이 장교(藏敎)입니다. 삼장교(三藏敎)라고도 합니다. 경(經)과 논(論)과 율(律) 즉 경논, 경장논장율장, 이렇게 3장이 겸해 있는, 일반중생의 차원에 맞춘 가르침이 장교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중생 그릇이 익은 다음에는, 그런 것은 다 허망하고 무상(無常)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가르침이 통교(通敎)입니다. 따라서 반야심경(般若心經)이나 금강경(金剛經) 같이 공(空) 사상을 주로 말씀하신 가르침은 통교에 해당합니다. 우리가 계행(戒行)을 지키고, 무어라고 시비(是非)하는 것은 보통 장교에 해당합니다.


 “모든 것이 허망무상하다. 오온(五蘊)이 다 개공(皆空)이라, 일체 만법(萬法)은 다 비어있다. 나도 비어있고 아까 말한 사제법문도 비어있다”고 말씀하신 것은 통교에 해당합니다. “일체 아공(我空) 법공(法空)이다. 나도 비어있고 일체법이 다 비어있다.” 이와 같이 가르치신 법문이 통교입니다.


그 다음에는 별교(別敎)입니다. 장교와 통교 가운데 삼계(三界)내에서 비록 통교가 약간 높다 하더라도 이것 역시 삼계를 벗어난 법문이 아니라 삼계 내에서 하신 법문입니다. 그러나 별교는 삼계를 초월해서 말씀하신 가르침입니다. 삼계를 넘어 일체만법의 본체를 들어서 하신 법문입니다.

그 다음 원교(圓敎)는 일체만법 - 장교나 별교나 통교나 원래 둘이 아니니 모두를 합해서 원융무애(圓融無礙)한 가르침입니다. 아주 원만무결(圓滿無缺)한 법문이 원교입니다. 따라서 부처님 가르침은 이와 같이 장교, 통교, 별교, 원교등 네 가지 범주로 구분해서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풀이할 적에 역시 어떤 범주에서 하는 것인가? 어떤 규범에서 하는 것인가? 규범에 따라 풀이가 달라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의 소중한 사제법문도 장교에서 보는 견해, 통교에서 보는 견해, 이와 같이 각각의 교(敎)에서 보는 견해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같은 법문이지만 우리는 기왕이면 원교에서 보는 견해를 우리 것으로 삼아야 합니다.



이것이 생멸사제(生滅四諦)라, 또 무생사제(無生四諦)라, 무량사제(無量四諦)라, 무작사제(無作四諦)라, 좀 어려우나 중요한 것이므로 여기에 인용을 했습니다. 여러분이 나중에 경(經)도 보고 아까 말한 바와 같이 판단의 기준을 어디에 둘 것인가? 판단의 기준을 정확히 하기 위해 이것은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어렵지만 이렇게 인용한 것입니다.


1. 생멸사제(生滅四諦)


5비구에게 말씀하신 네 가지 진리 즉 사제가 있는데 여기에 4종의 사제가 있습니다.

첫째, ‘생멸사제(生滅四諦)는 범부지(凡夫智)의 실생실멸(實生實滅)의 위에 입(入)한 사제(四諦)이다. 이것은 소승교(小乘敎) 즉 삼장교(三藏敎)의 소설(所說)이다.’


삼장교는 앞에서도 말했지만 경과 율과 논이 모두가 원융무애(圓融無礙)한 것이 아니라 뿔뿔이 있는 경‧율‧논을 구분해서 가르친 법문입니다.

그 다음은

‘무생사제(無生四諦)라,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인과당체(因果當體)가 즉공(卽空)임을 료해(了解)하여 생멸(生滅)을 불견(不見)하는 사제(四諦)로서통교 (通敎)의 소설(所說)이다.’

그 다음은

‘무량사제(無量四諦)라, 고제(苦諦)에 있어서 무량(無量)의 상(相)이 있고 내지(乃至) 도제(道諦)에 있어서 무진(無盡)의 차별(差別)이 있는, 대보살(大菩薩)이 수(修)하는 바로 별교(別敎)의 설(說)이다.’

그 다음은

‘무작사제(無作四諦)라, 번뇌(煩惱) 즉(卽) 보리(菩提)요 생사(生死) 즉(卽) 열반(涅槃)의 도리(道理)에 입각(立脚)하여 단증(斷證)의 조작(造作)을 리(離)한 사제(四諦)이므로 무작사제(無作四諦)라 하며, 이는 원교(圓敎)의 사제(四諦)이다.’


우리가 가장 참고할 것은 역시 맨 나중에 있는 무작사제(無作四諦) 즉 말하자면 범부의 헤아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작(無作)이라 - 범부(凡夫)라는 헤아림이 없는, 범부라는 번뇌를 짓지 않는, 부처님 진리의 원융무애한 도리 그대로 한 사제가 무작사제입니다.

따라서 무작사제가 부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신 참다운 사제입니다. 다만 중생이 어두우니까 여기 있는 바와 같이 생멸(生滅), 무생(無生), 무량(無量) 사제를 말씀하시지만 결국 목적은 무량사제를 초월해서 무작사제 - 범부의 조작이나 헤아림을 떠난, 하나의 상이 없는 사제입니다. 이것이 무작사제인데, 이것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신 사제의 근본 목적입니다.

이것에 관해서는 다음에 조금 더 말하겠습니다.


사종사제(四種四諦), 이 법문이 가장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앞으로 여러분들이 두고두고 음미를 해보시면 압니다. 지금은 잘 모르지만 우리가 생각할 때는 보통은 다 생멸사제(生滅四諦)만 압니다. 고(苦)가 있고, 고의 원인으로 해서 집(集)이 있고, 그 반대로 해서 인간의 근본 목적지인 멸(滅)이 있고, 멸에 이르기 위한 방법적인 도(道)가 있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삼장교(三藏敎)는 소승교(小乘敎)를 말하는 것인데, 보통은 소승교의 차원에서만 사제법문을 해석합니다. 그렇게 하면 사제법문의 보다 심오한 뜻을 제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시각을 보다 더 넓혀서 생멸사제(生滅四諦)도 있고, 또는 제법공(諸法空)이라 하는 입장에서 생사를 떠난 무생사제(無生四諦)가 있습니다. 그러나 보통 무생사제까지는 욕계, 색계, 무색계 - 삼계(三界) 내에 해당합니다.


우리 법문을 보면 보통 계내(界內) 계외(界外)라, 경계 계(界)자, 안 내(內)자 계내는 삼계내에 있는 법문이란 말입니다. 계외는 경계 계(界)자, 밖 외(外)자, 이것은 삼계 밖이란 말입니다. 어제도 말했습니다만 사제법문만 우리가 뚜렷이 안다 하더라도 불교의 한 체계는 세웠다고 볼 수 있습니다.


2. 무생사제(無生四諦)


무생사제(無生四諦)란 불생불멸(不生不滅)의 경계에서 말한 사제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불생불멸의 경계에 선다고 생각하면 새삼스럽게 닦네 안닦네 또는 선이네 악이네 구분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일체만법(一切萬法)이 원래 나지 않는 불생(不生), 생사를 떠나버린 경계에서야 그 무슨 ‘닦네 안닦네’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제법문은 보통 생멸사제 할 때에 닦음이 있고 무엇이 있고 하는 것이지, 불생불멸의 경계에 서면 그런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고집멸도(苦集滅道)도, 고는 곧 인생고이고 집은 인생고의 원인이며, 도는 인생고를 떠나기 위한 열반에 이르기 위한 한 방법입니다.


그런데 불생불멸의 경계에 서면 고집멸도가 바로 공입니다. 고집멸도 당체(當體)가 바로 공입니다. 또한, 멸은 본래 공이라 새삼스럽게 공이란 말도 할 필요도 없이 바로 공입니다. 고집도(古集道)도 공이요, 멸도 공이니까 그때는 다 공이 되어서 이와 같이 다 공이지만 또 역시 현상적인 의미에서는 당연히 고(苦)가 있고 낙(樂)이 있습니다.


따라서 무생사제(無生四諦)는, 우리가 사제법문을 닦는다 하더라도 그냥 빡빡하게 고(苦)가 분명히 다 있고, 고의 원인 즉 집(集)은 무엇이고 그런 헤아림을 떠나서 우리가 수행을 한다 하더라도 그냥 ‘제법공(諸法空)이다. 당체공(當體空)이다.’ 하고 공을 느끼고서 자유스런 마음으로 닦는 것입니다. 그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공을 알 때와 공을 모를 때와는 수행이 굉장히 차이가 있습니다. 공을 모를 때는 그냥 그 빡빡하고 또 무슨 파계(破戒)라도 좀 하면 그 때문에 고(苦)가 되고 짐이 되어서 인생 살기가 이따금 싫을 때도 있고, 자결도 합니다. 자살을 하는 사람들이 공을 안다면 절대로 자살을 하지 못합니다.


당체가 즉공(卽空)이라, 인생고 모두가 바로 공이고, 또 인생고를 일으킨 집(集) 즉 탐진치(貪瞋痴) 삼독심이나 삼독심(三毒心)에서 우러나온 선악의 행위가 모두가 다 당체 공인지라, 사실은 우리가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아까 말한 바와 같이, 공은 공이로되 현상계에서는 분명히 나가 있고 네가 있습니다. 선악도 현상의 차원에서는 있는 것입니다. 상대유한의 세계에서는 선악이 있는 것이니까요. 그 때는 닦기는 애쓰고 닦습니다. 최선을 다 하고 닦되, 아까 말마따나 우리가 그때는 집착이 없습니다. 이것이 생멸사제입니다.


3. 무량사제(無量四諦)


무량사제(無量四諦)는 ‘고제(苦諦)에 있어서 무량(無量)의 상(相)이 있고 내지 도제(道諦)에 있어서 무진(無盡)의 차별(差別)이 있는 대보살(大菩薩)이 수(修)하는 바로 별교(別敎)의 설(說)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아까도 대부분 말을 다 했지만 그냥 무생사제(無生四諦)는 공(空)에만 너무 치우쳐서 현상적인 수행 같은 것을 무시한 것이지만, 무량사제(無量四諦)는 이것은 비록 공이라고 할망정 분명히 우리 중생 견해에서는 삼계가 있으니까, 삼계에도 역시 우리가 닦는데 있어서 여러 가지 현상이 많이 있으니까 우리 닦는 수법(修法)도 역시 무량(無量)의 상(相)이 있습니다. 사성제가 있고, 12인연법이 있고, 육바라밀이 있고, 기타 계행(戒行)도 오죽 많이 있습니까? 그와 같이 본래 당체는 공이로되 현상적이고 상대유한적인 경계에서는 그와 같이 상이 많단 말입니다.  무량의 상이 있습니다.


또한 동시에 무량의 상이 있으니까 닦는 도제(道諦), 집제(集諦), 우리 번뇌-이것은 상이 아닙니까. 집제는 고의 원인이니까요. 도제는 이것은 닦는 우리 수행의 상이고, 우리 번뇌의 집제도 역시 사실 따지고 보면 그와 같이 무량의 상입니다.


탐진치(貪瞋痴), 108번뇌, 팔만사천 번뇌 등 번뇌가 오죽 많습니까. 그와 같이 번뇌가 많기 때문에 번뇌를 우리가 단진(斷盡)하는 - 떼어버리는 차별(差別)도 역시 많습니다. 번뇌에 따라 번뇌를 없애기 위한 수법(修法)이 있기 때문에 수법도 한도 끝도 없이 많습니다. 무진(無盡)의 차별이 있습니다. 따라서 대보살은 이와 같은 것을 다 닦습니다.


일반 소원 중생은 그냥 조금 닦고, 공에 집착한 사람들은 허무만 있고 계행도 필요 없다. 자칫하면 아까 말한 무생사제의 범주 내에서는 자기 행동을 아무렇게나 하며, ‘아, 뭐 당체(當體)가 공인데 무엇이 필요가 있으랴’ 이와 같이 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공은 공이로되, 아까 말마따나 우리 번뇌도 역시 끝도 갓도 없이 무량의 상이 있고, 또한 번뇌를 녹이는 것이 수행이기 때문에 수행인 도제 역시 무진의 차별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다 공이지만 닦아야 합니다. 닦지 못한다면 우리한테 있는 소중한 무량공덕(無量功德)을 갖추고 있는 불성(佛性)을 우리가 계발(啓發)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많은 금광석(金鑛石)이 있다 하더라도 제련을 하지 않으면 순금이 나오지 않듯이, 불성이 소중하지만 닦지 않으면 우리가 불성을 계발하지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마땅히 공은 공이지만 우리가 아직 공을 본 것도 아니고 도인이 공이라 하니까 ‘그런가 보다’ 하는 것이지 우리가 지금 공을 느낍니까? 못 느끼기 때문에 역시 참답게 공을 느끼고서 체험하려면, 그때는 여기 있는 바와 같이 무량의 수행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분명한 구분이 있어야 합니다.


4. 무작사제(無作四諦)


무작사제(無作四諦)라, 번뇌(煩惱) 즉(卽) 보리(菩提)요 생사(生死) 즉(卽) 열반(涅槃)의 도리(道理)에 입각(立脚)하여 단증(斷證: 끊고 증하는)의 조작(造作: 마음으로 헤아리는 범부의 짓)을 리(離)한 사제(四諦)이므로 무작사제(無作四諦)라 하며, 이는 원교(圓敎)의 사제(四諦)이다.


도인들은 법이자연(法爾自然)이라 - 조금도 조작이 없이, 지음이 없이 바로 행하지만, 일반 범부는 ‘내가 해야겠구나’하고 억지로 행합니다.

마음으로 상(相)이 있게 하는 것은 조작이고, 마음으로 상이 없이 하는 행동은 무상(無相)의 무위법(無爲法)입니다. 번뇌가 즉 보리라 - 이런 것도 우리가 알기가 좀 어렵지요. 우리가 소중한 것은 결국 보리인데, 보리라는 것은 참다운 진리 아닙니까. 참다운 진리야말로 우리가 닦아야 할 것이고 우리가 성취할 목적인데, ‘번뇌가 바로 보리다.’라고 하면 너무나 허망한 감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때에 해석을 잘 해야 합니다.


현상적 의미에서 본다면 분명히 번뇌와 보리, 둘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번뇌를 버리고 보리를 닦지요. 그러나 근원에서 볼 때는 - 상(相)에서 보지 않고 체(體)에서 볼 때는 번뇌나 보리나, 선이나 악이나 둘이 아닙니다. 항시 말한 바와 같이 일미평등(一味平等)한 불성(佛性)뿐입니다.

일체 만상(萬象)을 근본에서 바로 보는 그런 안목에서 볼 때는 일미평등한 불성입니다. 불성 가운데서 무슨 보리가 있고 또는 번뇌가 있고, 두 가지 세 가지가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현상적인 상대유한의 중생 차원에서 보니까 보리가 있고 도가 있는 것이지, ‘모두가 다 부처’라는 청정한 안목에서 보면 번뇌가 흔적도 없지요.

따라서 이런 ‘무작사제’ 법문은 중생의 경계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체에서, 근원에서 보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청정미묘한 부처의 눈에서 본다고 할 때는, 번뇌가 즉 보리요 생사가 즉 열반입니다. 열반은 영생을 말하는 것이고, 생사는 죽고 살고 하는 중생 경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이 아까 말마따나 근원에서 보면 번뇌가 바로 진리의 가장 순수한 진리인 보리요, 또는 죽고 살고 하는 생로병사(生老病死)나 인간세상의 상대유한의 그런 것이 바로 고생 바다가 아니라 청정미묘한 행복을 맛보는 극락세계입니다. 열반이란 극락이나 불타(佛陀)와 같은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공부할 때는 ‘있다 없다’ ‘좋다 궂다’ 하는 그런 관념을 항시 두면 아까 말마따나 같은 공부를 해도 마음이 괴롭고, 유위법(有爲法)이라 자꾸만 걸려버립니다. 우리가 행(行)은 다 하고 하지만 결국 우리 마음자리는 역시 깨달은 도인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한단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근본 체(體)를 우리가 떠나지 않습니다.


우리 불교 수행자는 근본 체를 떠나지 않아야 합니다. 상에 얽매이지 않아야 합니다. 상에 얽매이면 결국은 마음이 괴롭고 몸도 거북합니다. 몸과 마음이 원래 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몸과 마음은 분명히 둘이 아닙니다. 꼭 지금 사람들은 제아무리 말을 해도 몸과 마음을 둘로만 생각하니까 문제가 큽니다. 몸과 마음은 절대 둘이 아닙니다.


마음의 당체, 마음의 본질은 부처 아닙니까. 부처에게는 모든 공덕이 다 들어 있습니다. 부처는 물질이 아닙니다. 순수한 정신입니다. 순수한 정신이 어떻게 운동하는가? 순수한 정신이 운동하는 그런 법칙이나 운동하는 상황 따라서 물질이 보입니다. 우리 중생에게 물질이 보이는 것이지 원래 물질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점차로 분자로 분석하고 원자로 분석하고 원자를 다시 소립자로 분석하고 들어가면, 물질의 가장 미세한 것인 중성미자(中性微子)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질량도 열량도 없습니다. 질량과 열량이 다 제로입니다. 그것은 물질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물질이 아닌 순수한 에너지만 우주에 충만한 것입니다. 그런 물질이 아닌 것들이, 에너지가 어떻게 모아지는가와 어떻게 운동하는가에 따라서 원자가 생기고 무엇이 생기고 합니다.


물리학(物理學)을 공부한 사람들은 물질의 끄트머리가 텅 빈 것을 압니다. 단지 텅 빈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만 모르는 것이지 비었다는 것은 압니다. 분석하면 결국 제로가 되니 말입니다. 순수 에너지 장(場: energy field)만, 순수에너지인 전자기장(電磁氣場)만 우주에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그 장(場)의 실체가 불교에서 말하는 불성입니다.


따라서 순수 에너지의 장, 순수 에너지의 당체 그것이 불성인지라, 불성은 우주에 충만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범부라 하더라도 그것에 입각해서 사물을 봐야 합니다. 가장 근원에서 사물을 봐야 합니다. 그렇게 볼 때, 물질은 없습니다. 내 몸도 결국은 물질이 아닌 순수한 불성 기운이 이렇게 저렇게 뭉쳐서 운동하고 빙빙 돌아서 내 몸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염파(念波), 식(識)의 파동, 마음의 파동이 결국은 물질이 된 것입니다. 이런 말들은 여러분들이 잘 새기고, 나중에 물리학을 다시 보고 음미해 보십시오. 생각의 파동, 마음 파동이 이렇게 저렇게 되어서 무엇이 되고 무엇이 되고 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때는 이런 몸이란 당체는 사실은 없단 말입니다. 따라서 병(病)도 없습니다. 병도 분명히 없는 것입니다. 콜레라 병균 자체도 결국은 불성입니다. 지금 저 에이즈(AIDS) - 후천성면역결핍증이라는 무서운 병도 결국은 따지고 보면, 바이러스를 구성한 것은 순수한 불성입니다. 불성으로 그런 무서운 바이러스가 되었으니, 우리 생각만 불성에다 안주 시키면 그런 바이러스를 소멸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위대한 도인들은 신통(神通)을 다 합니다. 위대한 도인들은 하늘로 올라가고 별별 신통도 다 하는데 그런 바이러스나 병균 같은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흔히들 삿되게 믿습니다. ‘물질이 있다.’ ‘내 몸이 이와 같이 있다.’라는 고정 관념이 딱 박혀있어 정신의 힘을 쓰지 못합니다. 정신의 힘은 팔이 하나 어긋나고 다리가 어긋나고 한 그런 정도로는 우리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원칙은 말입니다. 지난번에 신문을 보니까 어느 목사 한 분이 양팔이 없고 양다리가 없는데 공부해서 목사가 되었다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물질은 없는 것입니다.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이나 실상관(實相觀) 같은 관법(灌法)은 이와 같이 보리와 번뇌가 둘이 아님을 보는 관법입니다.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닌 그 자리, 아까 말한 바와 같이 천지 우주가 일미평등(一味平等)한 불성자리를 놓치지 않고 공부하는 것입니다. 자리에다 마음을 두어서 그 자리를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 것이 공부인 것이지, 놓쳐버리고 둘로 구분하고 셋으로 구분하고 그러면 그것은 체를 떠난 공부입니다. 체를 떠나지 않아야 참선(參禪)인 동시에 참다운 공부입니다.


참선은 무엇인가? 선시불심(禪是佛心)이요 교시불어(敎示佛語)라 합니다. 선시불심 - “선은 바로 부처의 마음”이라 하듯이 우리 마음이 그러한 일미평등(一味平等)한 불심(佛心)에서 떠나지 않아야 선(禪)입니다. ‘이 뭣고’나 ‘무(無)’자를 제 아무리 외운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이 불심에서 떠나 버리면 선이 못 되는 것입니다. 아미타불을 부르고 무엇을 부른다 하더라도 역시 우리 마음이 불심을 떠나버리면 그때는 선도 못되고 참다운 염불도 못됩니다. 순간 찰나도 불심에서 떠나지 않아야 합니다.


‘번뇌가 즉 보리요, 생사 즉 열반’이라는 말은 구분이 없는 하나의 진리를 뜻합니다. 중생의 그릇 따라 저 지옥 중생은 이 하나의 진리를 제일 모르는 중생이고, 차근차근 올라와서 아귀는 더 알고, 축생은 더 알고, 사람은 좀 더 알고, 천상은 더욱 더 알고, 극락가면 천지우주가 불성임을 확연히 다 알아버립니다. 그와 같이 일미평등(一味平等)한 우주가 그야말로 참 청정미묘한 불타(佛陀)뿐인데 그 불타를 어떻게 아느냐에 따라서 그와 같이 구분이 생깁니다. 다 알아버리면 그때는 천지 우주가 내가 되고 내가 천지 우주가 되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겠지요. 번뇌가 즉 보리요 생사가 즉 열반이라는 도리에 입각해야 합니다. 그래야 참다운 수법(修法)입니다.


여러분들이 아까 말한 ‘생멸사제(生滅四諦)’나 ‘무생사제(無生四諦)’ 같은 사제(四諦)를 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일차 아는 것이지, 우리가 입각할 데는 역시 마지막 판에 있는 무작사제(無作四諦) 즉 말하자면 범부의 헤아림이 없는 사제입니다. 이런 자리에 입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보통 나와 있는 사제법문 풀이를 보면, 제일 밑에 있는 생멸사제(生滅四諦)만 겨우 풀이해 놓았을 뿐입니다. 가장 소중한 부처님의 참 뜻인 무량사제(無量四諦)나 무작사제(無作四諦)를 하지 않으면 곤란합니다. 그러면 근원을 모르고, 줄거리는 모르고서 이파리만 집착하는 격입니다.


입각(立脚)하여 단증(斷證)의 - 끊고(斷) 증(證)하는 - 조작(造作)을 떠나버려야 합니다. 번뇌가 원래 없는데 어디서 무엇을 끊으며, 생사가 본래 없는데 무얼 떠나서 열반으로 간단 말입니까? 그러나 우리 범부지(凡夫智)에서는 역시 습기(習氣)가 있는지라 ‘있다 없다’ ‘나다 너다’ 구분하는 나쁜 버릇, 못된 버릇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습기를 떼어내지 않으면 본래 있는 공덕을 발휘하지 못하고, 본래 있는 공덕을 수용해 쓰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상(相)을 내면 - 상을 두고 공부를 하면 - 공부가 잘 통하지 않습니다. 상에 머물러버리기 때문에 아무리 애쓰고 계행을 지키고 참선을 한다 하더라도 공부가 되지 않습니다. 그때는 ‘내가 범부다’ ‘내가 죄가 있다’ 그런 마음을 아예 갖지 말아야 합니다.


참회할 때는 ‘짐짓 상을 내서 내가 정말로 죄를 많이 지었구나.’ 이와 같이 한다 하더라도, 역시 우리 공부하는 분상에서는 아까 말한 바와 같이 탕탕무애(蕩蕩無礙)란 말입니다. ‘다 비어서 천지우주가 오직 불성뿐이다’ 하는 거기에다 마음을 딱 두어 버려야 공부가 빠릅니다. ‘내가 죄가 있다’ ‘죄가 있다’하면서 참회하고 눈물을 흘리고 하는데, 그것도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일차적으로 아까 말한 바와 같이 생멸사제 정도에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참회해도 상을 두는 참회입니다.


상을 두지 않는 참회는 그러한 것을 떠나서 ‘번뇌가 즉 보리요, 생사가 열반’이라는 불타의 체에 입각해서 참회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참회를 해야만 참다운 참회입니다. 그래야만 죄의 근원이 끊어집니다.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제 가운데서 중요한 것은 무어라 해도 도제(道諦) 즉 말하면 도(道)입니다. 이것이 멸(滅)에 이르는 길 아닙니까. 본래 생사가 없다 하더라도 역시 우리는 번뇌의 습기(習氣)가 있는지라 마땅히 우리는 도를 닦아야만 비로소 열반에 이르는 것입니다. 닦되 역시 아까 말한 바와 같이 상을 두고 닦을 것이 아니라, 상을 두지 않고 무위법(無爲法)으로 닦아야 합니다. 우리가 상을 두면 무위법이라 할 수 없습니다.


계행(戒行)을 지킨다 하더라도 상을 두면 유위법(有爲法)이고 상을 두지 않으면 무위법입니다. 물론 우리는 저절로 상이 안 나올 수 없습니다만, 상이 없다는 확신을 자꾸만 가져야 합니다.


팔정도(八正道)


팔정도(八正道)라, ‘정(正)은 성(聖)이다. 기도편사(其道偏邪)를 리(離)하므로 정도(正道)라 운(云)하고, 또한 성자(聖者)의 도(道)이므로 성도(聖道)라 한다.’


정(正)이나 성(聖)은 같은 뜻입니다. 성스럽다 하는 것도 역시 발라야 성스럽겠지요. 그러므로 정도(正道)나 성도(聖道)는 같은 뜻입니다. ‘기(其) 도(道)’ - 그 닦는 길이란 말입니다. ‘도’에도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진리 자체를 도라 하기도 하고, 진리에 가는 길을 도라 하기도 합니다. 그와 같이 바로 당체를 도라고 하지만 우리가 생각할 때는 거기에 가는 길도 역시 도입니다.


‘편사(偏邪)를 리(離)하므로 정도(正道)라 운(云)하고’ - 치우칠 편(偏)자, 삿될 사(邪)자. 떠날 리(離)자, - 치우치고 삿됨을 떠나므로 정도라 말합니다. 그 길이 치우치거나 삿되면 정도라 할 수 없겠지요. ‘또한 성자(聖者)의 도(道)이므로 성도(聖道)라 한다.’

여기에 여덟 가지 법문이 있지 않습니까.


1. 정견(正見)


일(一)은 ‘정견(正見)이라,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제(四諦)의 리(理)를 분명(分明)히 견(見)함을 운(云)하며, 팔정도(八正道)의 주체(主體)이다.’


여러분들이 다 배워서 알겠습니다만, 부처님 법문은 누가 말하나 항시 새로운 것입니다.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제(四諦) 의 리(理)를 분명(分明)히 견(見)함을 운(云)하며’ - 고집멸도 사제의 이치를 분명히 보지 못하면 정견(正見)이라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정견을 꼭 세워야 합니다. 정견을 세우지 못하기 때문에 함부로 망동(妄動)을 합니다.


바른 견해, 바른 인생관, 바른 가치관이 정견입니다. 그러면 바른 인생관은 무엇인가? 역시 ‘우리 인생은 고(苦)다.’ 라고 분명히 느껴야 합니다. 물론 근원적인 의미에서는 아까 말마따나 고(苦)나 집(集)이나 멸(滅)을 다 떠나 버렸지만, 현상적으로 볼 때는 인생은 고(苦)입니다.

그래서 우리수행자는 항시 현상적인 것을 몽환포영(夢幻泡影)으로 보고 (苦‧空‧無常‧無我), 실상적인 것 - 생사(生死)가 없고 번뇌가 없는 실상(常‧樂‧我‧淨)을 참으로 봐야 합니다. 그와 같이 항시 대비(對比)해서 봐야 합니다.


정견은 고집멸도 사제의 그런 이치를 분명히 봄을 말하며, 이것이 팔정도(八正道)의 주체(主體)입니다. 다음에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등이 있지만, 바른 가치관 - 정견이 항시 주체입니다. 생활도 마찬가지로 바른 가치관이 있어야만 바른 생활을 할 수가 있듯이 수행도 역시 바른 정견이 앞섭니다.


인생고는 생로병사나 여러 가지 고에 해당하고, 고의 원인은 탐진치(貪瞋痴) 삼독심(三毒心)에서 일어나는 선악의 행위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다 떠나버린 참다운 행복의 경계가 멸(滅)이고, 멸에 이르기 위한 길이 팔정도라고 하는 사제법문의 도리를 분명히 아는 것이 바른 견해입니다.


2. 정사유(正思惟)


이(二)는 ‘정사유(正思惟)라, 이미 사제(四諦)의 리(理)를 견(見)하고 더욱 사유주량(思惟籌量)하여 진지(眞智)를 증장(增長)함을 운(云)함.’


사유(思惟)란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미 사제(四諦)의 리(理)를 견(見)하고’ - 먼저 사제의 이치를 분명히 알고, ‘더욱 사유주량(思惟籌量)하여 진지(眞智)를 증장(增長)함을 운(云)함.’ - 더욱 사유주량하여 참다운 지혜를 증장(增長)한다는 말입니다. 길이나 폭을 늘리는 것이 증장입니다. 즉 말하자면, 참다운 지혜를 더 늘리는 것이 증장입니다.


3. 정어(正語)


삼(三)은 ‘정어(正語)라, 진지(眞智)로써 구업(口業)을 수(修)하여 일체(一切) 비리(非理)의 어(語)를 작(作)하지 않음을 운(云)함.’


정어(正語)란, 진지로써 - 참다운 지혜로써 구업(口業)을 닦는다는 말입니다. 구업은 곧 입으로 짓는 업 아닙니까. 일체 비리(非理)의 - 이치에 어긋나는, 이치가 아닌 말을 짓지 않음을 말한다는 뜻입니다.

이때도 앞서 든 생멸사제 같은 관념도 필요하지만 역시 근원은 아까 말한 무량사제입니다. 또는 무작사제처럼 상이 없는 사제를 근본에다 딱 두고서 말을 해야 합니다.

구업은 아시는 바와 같이 욕설, 이간하는 말, 거친 말, 꾸며서 하는 말 따위입니다.


4. 정업(正業) 


사(四)는 ‘정업(正業)이라, 진지(眞智)로써 신(身)의 일체(一切) 사업(邪業)을 제(除)하고 청정(淸淨)의 신업(身業)에 주(住)함을 운(云)함.’


정업(正業)이란, 진지로써 - 바른 지혜로써 몸의 일체 삿된 업을 다 없애고 청정한 신업(身業)에 머무름을 말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것은 우리가 다 아는 것 아닙니까. 하여튼 살생하지 않고, 훔치지 않고, 그릇된 음행을 하지 않고, 술 먹지 않는 것이 청정한 몸의 업 - 신업입니다. 그런 몸으로 청정한 계율을 지키는 것, 몸으로 나쁜 업을 떠나는 것입니다.


5. 정명(正命)


오(五)는 ‘정명(正命)이라,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을 청정(淸淨)히 하여 정법(正法)에 따라 활명(活命)하며, 오종(五種)의 사활명(邪活命)을 리(離)함을 운(云)함.’ [*오사명(五邪命) ; 천문(天文), 지리(地理), 사주(四柱), 상(相), 점(占)등]


정명(正命)이란, 신구의(身口意) 삼업 - 몸으로 짓고, 입으로 짓고, 뜻으로 짓는 삼업(三業)을 청정히 하여, 정법(正法) 즉 부처님의 참다운 진리에 따라서 활명(活命) 즉 생활을 하며, 다섯 종류의 사활명(邪活命) 즉 삿된 생활을 떠남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오사(五邪)는 무엇인가? 천문(天文)을 보는 것, 하늘의 별이나 보고서 점만 치고 사는 것이 천문입니다. 지리(地理)를 보는 것. 풍수지리학을 보고 도참설(圖讖說)로 이상한 말을 하는 것입니다. 사주(四柱)를 보는 것. 즉 생년(生年)‧월(月)‧일(日)‧시(時)를 따져 사람의 운명을 감정해서 뭐라고 헛된 말을 하는 것입니다. 또 상(相)을 보고서 점(占)을 하는 것 등이 사명(邪命)입니다. 이런 것은 모두가 삿되게 생활 하는 것입니다.

삿된 생활을 떠나 청정한 신구의(身口意)로 우리가 생활해야 합니다. 따라서 직업도 바른 직업을 가져야 합니다. 바른 생활, 바른 직업을 갖는 것이 정명입니다.


6. 정정진(正精進)


육(六)은 ‘정정진(正精進)이라, 진지(眞智)를 발용(發用)하여 강인(强靭)하게 열반(涅槃)의 도(道)를 수(修)함을 운(云)함.’


정정진(正精進)이란, 진지를 - 참다운 지혜를 일으켜서 강인하게, 어떤 경우든 조금도 꺾이지 않고 강인하게 열반의 길 - 열반은 해탈, 극락, 영생과 같은 뜻입니다. - 영생의 길을 닦는다는 뜻입니다.

비록 이런 것을 다 안다 하더라도 게으름을 부리면 갈 수가 없습니다. 쉬지 않고 애써야 합니다.


7. 정념(正念)


칠(七)은 ‘정념(正念)이라, 진지(眞智)로써 정도(正道)를 억념(憶念)하고 사념(邪念)이 무(無)함을 운(云)함,’


정념(正念)이란, 참다운 지혜로써 정도를 억념(憶念) 하는 것 - 억념은 마음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깊이 깊이 말입니다. 정견(正見)은 우리불교에서 말하는 문사수(聞思修)라, 그냥 귀로 들어서 ‘아, 그렇구나.’ 이렇게 아는 것이지만, 정사유(正思惟)는 생각을 더 깊이 하고, 정념(正念)은 더 깊이 해서 확신을 가지는 것입니다. 억념은 마음 깊이 기억해서 잊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정견, 정사유, 정념은 그러한 정도의 차이입니다. 정견을 더 깊이 하면 정사유이고, 보다 더 깊이하면 정념입니다. 마음으로 기억해서 잊지 아니하여 사념(邪念)이 떠나면 그때는 삿된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8. 정정(正定)


팔(八)은 ‘정정(正定)이라, 진지(眞智)로써 무루청정(無漏淸淨)한 선정(禪定)에 입(入)함을 운(云)함.’


정정(正定)이란, 참다운 지혜로써 무루청청한 선정에 들어감을 말한다는 말입니다. 무루청정(無漏淸淨)은 무엇인가? 루(漏)는, ‘셀 루(漏)자’입니다. 번뇌를 ‘루’라 합니다. 물이 새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번뇌가 있는 법은 유루법(有漏法)이고, 번뇌가 없는 법은 무루법(無漏法)입니다. 마음이 쓸데없는 곳으로 새버려서 온전치 못한 것이 루(漏)입니다. 번뇌가 있으면 마음이 쓸데없는 곳으로 새서 유루(有漏)고, 번뇌가 없으면 무루(無漏)입니다.


무루청정한 수행은 어떤 것인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원래 번뇌가 없고 본래무번뇌(本來無煩惱),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란 말입니다. 본래 물질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직 부처님만 계시고, 오직 마음만 있음을 보는 수행이 무루청정한 수행입니다. 우리는 꼭 무루청정한 수행을 해야 합니다.


기독교와 불교의 여러 가지 차이점을 많이 거론하지만 기독교는 결국 하나님 따로 나 따로 입니다. 하나님과 나를 하나로 보는 기독교 교리는 별로 없습니다. 물론 마태복음서나 요한복음서의 어느 수승한 대목에 가서 우리가 깊이 생각하면 그렇게 합리화시킬 수는 있다 하더라도, 우선 표현된 것으로 보면 기독교는 하나님 따로 나 따로 입니다.


어떠한 종교에도 불교처럼 ‘부처님과 나는 둘이 아니다’ ‘천지 우주는 부처님뿐이다’고 하는 그런 수승한 진리는 없습니다. 그런 진리를 알아야만 참다운 우리 마음의 해방이 있고 참다운 자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창조를 당해서 얽매여 있다면 우리에게 자유가 없습니다. 참다운 자유, 참다운 인간의 존엄성은 불교 밖에는 없습니다. 억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불교는 그야말로 가장 수승한 것이 바로 내 마음이라고 하니까 말입니다. 또한 일체 중생에게 그런 마음이 다 들어 있으므로 다 평등한 것이라고 불교는 가르칩니다. 따라서 참다운 평등, 참다운 자유, 참다운 존엄은 불교밖에는 없습니다. 천지우주가 오직 청정미묘한 불성(佛性)뿐입니다. ‘청정미묘한 불성뿐’이라는 참 지혜에 입각해서 참선도 하고 염불도 해야 참다운 선정입니다.



억지로 싫은 것을 의심하고 따지고 하는 것은, 사실은 무루청정한 참선이 못됩니다. 세상에 더러운 것은 아무것도 없고, 의심할 것도 없습니다. 의심할 여지도, 차별할 만한 어떤 엉터리도 없습니다. 아까 말한 바와 같이 청정미묘한 불성에 입각한 수행이 되어야만 무루청정한 참선이고 염불입니다.

우리가 불공(佛供)을 모신다 하더라도, 또는 영가(靈駕)를 천도(遷度)한다 하더라도 이와 같이 무루청정한 마음에 입각하면 훨씬 더 천도가 빠릅니다.


팔정도(八正道) 중(中),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의 삼지(三支)는 계품(戒品), 정념(正念) 정정(正定)의 이지(二支)는 정품(定品),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정진(正定進)의 삼지(三支)는 혜품(慧品).


팔정도 가운데, 정어는 참다운 말을 뜻합니다. 사제의 진리를 다 알고서 참다운 지혜에 입각해서 말을 하는 것입니다. 정업도 역시 참다운 지혜에 입각해서 몸으로 하는 행동입니다. 정명도 참다운 지혜에 입각해서 생활하는 것입니다. 참다운 진리가 앞서지 않으면 정업도 정명도 못되는 것입니다.


꼭 참다운 지혜가 앞서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참다운 가치관이 앞서야만 바른 말, 바른 업, 바른 생활이 됩니다. 같은 말도 알쏭달쏭하게 억지로 하면 위선(僞善)에 불과합니다. 도리에 입각해서 말해야 합니다. 도리를 억념해 가지고서, 도리에 입각해서 우리가 바른 말을 하고, 바른 업을 짓고, 바른 생활을 해야만 그것이 무루청정한 삼업(三業)입니다.


팔정도 가운데 정어, 정업, 정명의 삼지(三支) - 세 가지는 계품(戒品) 즉 계행, 계율에 해당하고, 또 정념, 정정은 정품(正品) 즉 선정에 해당합니다. 또 정견, 정사유, 정정진 등 세 가지는 혜품(慧品)에 해당합니다.


부처님의 여러 가지 수행법(修行法)을 간추리면 계(戒)와 정(定)과 혜(慧) 아닙니까. 즉 삼학도(三學道) - 석 삼(三)자, 배울 학(學)자, 길 도(道)자 - 이것이 가장 간추린 수행 방법인데, 좀 부연하면 이와 같은 팔정도(八正道)입니다. 더 부연하면 무량의 수행법이 있겠지요.


팔정도를 더욱 줄이면 방금 말한 바와 같이 정어, 정업, 정명등 세 가지는 계품 즉 계행에 해당하고, 정념, 정정 등 두 가지는 정품 즉 선정에 해당하고, 정견, 정사유, 정정진 등 세 가지는 혜품 즉 지혜에 해당합니다. 요컨대 계정혜(戒定慧) 삼학도(三學道)라 할 수 있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본사아미타불!


-1987년 3월 6일, 태안사에서 설법하심.

(본 법문은 큰 스님의 깊은 뜻을 그르치지 않도록 사투리를 포함해 구어체 그대로 받아쓴 글로, 어색한 부분도 있음을 감안하시기 바랍니다. - 편집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