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3.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마음의 고향

마음의 고향 23집『반야심경(般若心經)』 설법(1)

 

 

   『반야심경(般若心經)』 설법(1)




반야(般若)란 무엇인가?


반야(般若) 이것은 참 지혜(智慧)입니다. 우리 인간이 축적한 지식이 아니라, 깨달아서 번뇌를 떠나버린 성자의 참다운 마음에서 우러나온 지혜가 반야입니다.

따라서 일반 중생한테는 사실은 반야는 없고 성자한테만 반야가 있습니다. 반야바라밀(般若波羅密)이 있습니다.

반야(般若)는 인도 말로 하면 '프라즈냐(prajna)' 그래서 인도 말을 따서 한자로 일반 반(般)자, 같을 야(若)자, 이것은 원래 인도 음인데 한문자로 해서

‘반야’라고 합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참 지혜’, ‘해탈의 지혜’라고 합니다.


마하(摩河: maha, 대大, 다多, 승勝, 묘妙) 이것은 위대하다 거룩하다는 뜻입니다. 위대하고 거룩하단 말입니다. 따라서 마하반야(摩何般若) 이것은 거룩한 지혜입니다. 바라밀(波羅密)이라는 것은 이것도 역시 불교에서 많이 씁니다만 ‘도피안(到彼岸)’이라, 이를 도(到)자, 이쪽은 차안(此岸)이고 저쪽은 피안(彼岸)아닙니까. 가사 강이나 바다가 있으면 바다 건너 저쪽이 피안입니다. 반대로 이쪽은 차안이라 하고 다시 풀이해서 말씀하면 우리 중생이 사는 - 번뇌에 쌓인 중생이 사는 세계는 차안에 해당하고, 중생이 고해(苦海)를 건너서 저쪽 언덕 이것은 피안 즉 해탈(解脫)의 경계, 극락세계(極樂世界) 이것이 피안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바라밀이라는 것은 ‘도피안’이라, ‘피안에 이른다’는 뜻입니다. 피안에 도달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何般若波羅密多心經) 한꺼번에 풀이를 말씀드리면 ‘피안에 이르는 거룩한 지혜의 가장 골수인 경’이란 말입니다.


심경(心經) 이것은 경 가운데서 제일 골수(骨髓) 제일 중심(中心)이 되는, 즉 말하자면 정수(精髓)가 되는 경을 심경이라고 합니다. 피안에 이르는, 즉 말하자면 ‘영생의 해탈에 이르는 거룩한 지혜의 가장 귀중한 경’ 이것이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何般若波羅密多心經)입니다.


부처님 경전은 무슨 경(經)이든 소중하지 않은 경이 있으리요만 반야심경(般若心經)은 가장 짧은 동시에 불교의 모든 철학을 거기에 함장을 시켜있단 말입니다. 이 짧은 시간에 반야심경(般若心經)을 전부 다 풀이할 수는 없습니다만, 여기에 써 놓은 이것만 풀이하면 나중에는 그냥 술술 자기 스스로 풀이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반야의 골수이기 때문입니다. 내용 풀이를 합시다.

앞서 말씀과 같이 피안에 이르는 - 영생의 해탈에 이르는, 우리 중생은 지금 죽고 살고 헤매고 번뇌를 일으키고 하는 차안에 있는데, 중생의 그런 고생스런 고생바다를 건너서 영생의 저 언덕, 영생의 피안에 이르는 거룩한 경이 즉 말하자면 가장 귀중한 경이란 뜻입니다.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이라, 관자재보살은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나 똑 같습니다. 그러나 관세음보살을 보다 더 의미로 깊이 새길 때 관자재보살이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중생이나 성자나 우주만유를 모든 것을 자재롭게 조금도 막힘없이 원만무결(圓滿無缺)하게 관찰(觀察)할 수 있는 보살(菩薩)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볼 때 따지고 분별하지만 막히곤 합니다. 우리가 안다는 것은 상대유한적(相對有限的)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이 막히지 않고서 상대유한적이지 않고서 절대적이고 말입니다.


부처님 같이 모든 것을 다 할 수가 있고 다 알 수가 있고 천지우주를 다 통달하는 - 일체를 다 아는 자재(自在)로운 지혜 또는 자재롭게 모두를 다 관찰(觀察)하는 보살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도인(道人)이 아니면 할 수가 없지요. 그래서 원칙은 관세음보살은 우리 중생을 구제(救濟)한다는 자비로운 보살이라는 거기에만 국한이 안 되고, 일체만유(一切萬有)를 다 알아서 일체 모든 것을 다 알고 생사를 초월(超越)할 수 있는 지혜를 알아가지고서 일반 중생을 영원의 저 언덕으로 인도하는 그런 보살 이것이 관세음보살입니다.


앞서 말씀과 같이 관세음보살은 중생의 모든 고난소리를 다 들어서 말입니다. 고난소리를 듣고서 그대로 알맞게끔 제도하는 보살이 관세음보살인데, 우리가 의미로 풀이 할 때는 일대사를 자유롭게 조금도 막힘이 없이 통달무애(通達無礙)하는 그러한 지혜를 갖춘 보살이, 위대한 도인이 그 말과 같습니다. 모든 것을 다 깨달은 도인이


행심반야바라밀다시(行深般若波羅密多時)에 깊은, 깊을 심(深)자, ‘아주 깊은 피안에 이르는 지혜를 행할 때’ 말입니다. 반야 이것은 지혜입니다. 중생이 따지는 그런 지식이 아니라 참다운 해탈(解脫)의 지혜, 이것이 반야입니다. 반야하고 지식과는 구분해야 합니다.

 앞서 말씀과 같이 일반 중생이 축적한 여러 가지 알고 모르는 이것은 지식에 불과한 것이고, 반야는 참다운 영생(永生)의 지혜입니다.

 위대한 도인이 맨 처음에 이와 같이 영생의 피안에 이르는 영생의 지혜를 닦을 때 행할 때에 관자재보살이 깊고 깊은 영생에 이르는, 즉 우리 중생의 고난을 떠나서 해탈에 이르는, 다시 바꿔서 말하면 성불하는 지혜를 닦을 때에 어떻게 했는고 하면,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이라, 비출 조(照)자, 볼 견(見)자, 다섯 오(五)자, 쌓는다는 뜻의 쌓을 온(蘊)자, 다 개(皆)자, 빌 공(空)자, 오온(五蘊)이, 다섯 가지 쌓여있는 것이 다 비어 있음을 비추어 본단 말입니다. 오온이 다 비어 있음을  비추어 본단 말입니다.

 오온(五蘊)은 무엇인가? 오온 이것은 불교 말로 하면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입니다.

색(色)은 빛 색(色)자, 이것은 물질(物質)을 의미합니다. 수(受)는 받을 수(受)자, 우리 감각(感覺)을 말합니다. 상(想)은 생각할 상(想)자, 이것은 우리 상상(想像)을 이르는 말입니다. 행(行)은 우리 의욕(意慾)하는 힘 의지(意志)를 말하는 것이고, 식(識)은 우리 의식(意識)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시 말씀드리면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이 오온인데, 색은 물질에 해당하고, 수상행식은 정신(精神)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물질과 정신을 한 번에 말할 때 ‘오온(五蘊)’ 그러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천지 우주의 모든 것을 우리 중생이랑 통틀어서 유상(有相), 무상(無相), 유정(有情) 무정(無情) 다 통틀어서 한꺼번에 말할 때에 ‘오온’ 그럽니다.


인간의 눈에 보이는 것, 안 보이는 것 하여튼 다 통틀어서 말할 때에 ‘오온’ 그런단 말입니다. 그런데 관세음보살 같은 위대한 도인들이 영생에 이르는 지혜를 닦을 때에 맨 먼저 정신과 물질이 다 비어 있음을 비춰 본단 말입니다.

 불교라는 것은 언제나 ‘내가 없다’ 또는 ‘물질이 공이다’ 하는 공(空) 지혜를 떠나서는 불교가 성립이 안 됩니다.

좋다 궂다 또는 너다 나다 하는 그런 것이 있을 때는 불교는 깊은 의미를 우리가 음미할 수 가 없는 것입니다.

 비록 내 앞에 네가 있고 내가 있고 또 선(善)이 있고 악(惡)이 있고 하더라도 그런 것은 중생 차원에서 보는 것이지 사실은 관세음보살이나 도인들이 볼 때는 텅 비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걸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중생의 업장(業障) 정도로나 중생의 업장 정도로 보니까 지금 밉다 곱다 귀엽다 하는 것이지, 정다웁게 청정한 안목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런 것이 없단 말입니다. 여기 까지 못 느끼면 불교를 알 수가 없습니다.

 즉, 우리가 보는 것은 결국은 다 비었다고 봐야합니다.


 생각을 해 보십시오. 우리가 가사 이렇게 분자(分子)를 볼 수 있는 현미경(顯微鏡)을 쓰고 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분자를 볼 수 있는 현미경을 쓰고 본다면 천지우주는 다 분자로만 보입니다. 원자(原子)를 볼 수 있는 현미경을 쓰고 본다면 천지우주는 그때는 원자로만 보입니다.

부처님 같은 불안(佛眼)이라 - 부처 불(佛)자, 눈 안(眼)자 - 부처님의 안목(眼目)은 천지우주를 광명(光明)으로 보는 것입니다. 천지우주의 근본 근원은 어떠한 물질이나 무엇이나 다 순수한 광명 에너지가 꽉 차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은 현미경으로 알 수 있는, 현미경을 이용하지 않으면 전자(電子)도 못 보고 분자(分子)도 못 본단 말입니다.

 우리가 쓰는 안목은 아시는 바와 같이 불교에서 말하는 삼독심(三毒心)- 탐욕(貪慾)이나 또는 성내는 불룩거리는 마음이나 또는 어리석은 마음이나 이런 독심(毒心)에 가려서 바로 못 본단 말입니다.

 바로 못 보기 때문에 꼭 ‘나와 같은 존재가 있다, 네가 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벽을 세워 버립니다. 그런 경계에서 보는 것이니까 자꾸만 시비(是非)가 생기고 여러 가지 견해가 생긴단 말입니다.

 헌데 참다운 진리를, 아까 말씀마따나 영생의 해탈에 이르는 성불하는 그런 반야지혜를 우리가 얻을라고 생각할 때는 맨 먼저 무엇이 중요한가? 아무리 내가 귀엽지만은 결국은 나를 비롯해서 천지우주가 다 비어 있다는 것을 비춰 봐야 쓴단 말입니다. 그렇게 해야만이,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이라, 인생고(人生苦)의 생로병사(生老病死)나 일체의 고액을 다 면할 수가 있다 말입니다.

 다 비어 있다고 못 보는 한에는 절대로 인생고해를 못 면합니다. 권력이나 또는 지위나 어떤 그야말로 참 특수한 물질이나 이런 걸로 해서는 인생고해(人生苦海)를 면치 못하는 것입니다. 다만 상대적으로 순간순간 조금 마음만 있을 뿐인 것이지 근본적인 해결은 못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참다운 영생의 해탈을 얻기 위해서는, 또는 인생고해를 떠나기 위해서는 먼저 오온이 - 오온 이것은 색수상행식 즉 정신과 물질을 말합니다. - 정신과 물질이 다 비어 있다는 것을 비춰 봄으로써 비로소 일체 고액을 제도 할 수 있고 우리가 떠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리자(舍利子)야 - 부처님 제자 가운데서 ‘지혜 제일 사리자’ 지혜가 제일 수승한 제자 아닙니까. 인도 히말라야 산에서는 사리조(舍利鳥)라는 새가 있는데 그 새는 굉장히 눈이 아름답고 영롱한 새인데 사리자 어머니가 눈이 영롱하고 미인인데 말입니다. 사리조 눈 같이 어여쁜 어머니한테서 나왔다고 해서 그 아들을 사리자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부처님 제자 가운데서 지혜가 제일 수승한 분인데 어머니가 사리조 눈 같이 아름다운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들을 사리자라고 부르는데, ‘사리자야!’ 그러니까 반야심경 이것은 부처님께서 어떤 경전이나 누구한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는가 그런 연기 유서가 있습니다.

 반야심경은 부처님께서 직접으로 그냥 일반 사람한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일반 사람한테는 그냥 저급한 법문도 말할 수가 있지만 이러한 고도한 종교 철학이 들어있는 가장 중요한 법문은 역시 무어라 해도 지혜 제일, 지혜가 제일 수승한 사리불(舍利弗)만이 알 수가 있는 것이니까 사리불한테 하신 법문입니다. 사리자야, 잘 들어라!


색불이공(色不異空)이요. 색 이것은 물질 아닙니까. 물질이 공과 다름이 없고 말입니다.

 공(空) 이것은 마음(心)이라 해도 무방합니다. 공이나 마음은 불교에서는 같이 쓰입니다. 물질이 마음과 다름이 없고, 물질이 공과 다름이 없고, 내내야 마음이라는 것은 형체가 없는 것이니까 공이나 마찬가지이지요. 물질이 공과 다름이 없고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정신 따로 몸 따로 합니다. 우리 범부(凡夫)는 몸 따로 마음 따로 합니다. 허나 사실은 둘이 아닌 것입니다.

 물질이 마음과 다름이 없고, 물질이 공과 허공(虛空)과 다름이 없고, 또한 동시에 그 반대로


공불이색(空不異色)이라, 마음이 공이 물질과 다름이 없으며 따라서


색즉시공(色卽是空)이요. 물질이 곧 바로 이 시(是)자, - 빛 색(色)자, 곧 즉(卽)자, 이 시(是)자, 빌 공(空)자 - 이 시(是)자 이것은 ‘바로’라고 합니다. 바로 공인 것입니다.

 따라서 물질이 곧 바로 공이란 말입니다. 이원적(二元的)으로 구분(區分)한 것이 아니라 물질 그대로 바로 마음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아까도 말씀마따나 물질 따로 마음 따로 합니다. 보통은 다 물질이라는 것은 물질인 것이고 물질 이것은 무생물이고, 마음은 하나의 생명체고, 그와 같이 구분합니다. 허나 사실은 불교에서는 그렇게 안 보는 것입니다. 어떠한 미세한 물질도 역시 그 본질은 마음입니다.

 지금 물리학에서는 분석하고 분석해서 다 들어가면 저 물질 끄트머리는 내내야 소립자(素粒子) 아닙니까. 소립자 그것이 물질이 아니라 다만 에너지(energy)의 하나의 형태로 보는 것입니다. 물질이라는 것은 결국은 질량(質量)이 있는 물질은 없어지고 저 끝에 가서는 하나의 에너지 형태에 불과하단 말입니다.

에너지의 작용 때문에 결국은 소립자가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 물리학은 물질이 본래 공인 것을 거의 증명을 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보다 앞서서 어떠한 물질이나 아까 말씀마따나 원자나 또는 분자나 모두가 다 근본 요소는 결국은 다 마음이란 것입니다.

 이런데서 불교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모두가 마음뿐이라는 결국 불교 철학이 성립된단 말입니다. 모두가 사실은 마음뿐인 것입니다.

 마음이라는 순수 에너지 위에서 마음 작용 따라서 물질로 보인단 말입니다. 물질이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는 물질이 별도로 있다는 잘못된 관념을 부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관념을 못 부수면 ‘일체유심조라, 모두가 성불한다.’ 그런 말은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천지우주는 마음뿐인 것인데 마음위에서 마음의 힘이 적당히 이렇게 모이고 저렇게 모이고 말입니다.

 또는 마음을 가진 중생들이 마음 쓰는 그런 힘 따라서 물질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지금 이해하시기가 곤란스럽지만 사실은 그런 것입니다.


저는 가끔 예를 듭니다만, 가사 화분이 두 개가 있어서 양쪽에다 똑 같은 조건으로 화분을 가꿉니다. 가꿀 때에 이쪽 화분한테는 좀 소홀하게 생각하고 저쪽 화분에 대해서는 관심을 더 준단 말입니다. 하면은 관심을 더 둔 쪽의 화분이 훨썩 더 성장이 빠르다는 것입니다. 식물도 역시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개인들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부모님한테 탁태<잉태>하기 전에 우리 존재가 무엇입니까? 형체가 없단 말입니다. 식(識)이라는 마음이 결국은 부동(浮動)하다가 -영혼(靈魂)이 부동하다가 부모님 연(緣) 따라서 엄마의 태에 들어가서 사람으로 커 나간단 말입니다. 이와 같은 몸이 원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원천은 하나의 식(識), 불교에서 말하는 의식 말입니다.

 사람이 죽어지면, 몸은 화장하면 재가 되고 파묻으면 흙 되고 하겠지요. 없어지지만은 우리 마음 쓰는 식(識)은 없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식이 부동하다가 그 식의 파장(波長)과 맞는 부모를 만나면 엄마의 태에 수태한단 말입니다. 그때까지는 물질이 아니지요. 탁태한 뒤에는 엄마의 배 안에서 엄마 자양분(滋養分)을 받아서 성장함으로 해서 비로소 인간 형태로 나온단 말입니다.


 태초(太初)에 인간도 역시 물질이 아니었습니다. 불교에서는 『기세경(起世經)』이라 - 일어날 기(起)자, 인간 세(世)자 - 태초에 인간이 나오는 것을 굉장히 상세히 풀이했습니다.

 그런 것이 어려우니까 지금 사람들은 간과(看過: 대충 보기만 하고 버려둠)해서 잘 안 봅니다만, 아무튼 우리가 중요한 것은 무엇인고 하면 일체가 마음뿐이라는 것입니다. 물질은 흔적도 없는 것입니다.


 다만 중생이 물질의 저 본질, 물질의 끄트머리가 마음인 줄을 못 볼 따름입니다.

 항시 예를 듭니다만, 일수사견(一水四見)이라, 똑같이 마시는 하나의 물인데도 우리 인간이 볼 때는 그것이 물인 것이고, 귀신이 볼 때는 물을 물로 안 보는 것입니다. 귀신은 물을 불로 보는 것이고, 또 천상사람도 있는 것인데 천상인간은 물을 유리로 보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어떻게 볼 것인가? 부처님은 물을 청정미묘(淸淨微妙)한 감로수(甘露水)로 보는 것입니다. 광명(光明)으로 빛나는 감로수로 본단 말입니다.


그와 같이 같은 물이지만 우리 식의 정도, 우리 식이 얼마만치 정화(淨化)가 됐는가에 따라서 달리 본단 말입니다.

 사람이 보면, 사람만치 업장(業障)이 무거우면 물로 보는 것이고, 거기에 사는 고기는 자기 집으로 보는 것이고, 헤엄치는 고기들이사 집으로 보겠지요. 귀신은 불로 보고, 천상인간은 유리로 보고, 부처님은 청정미묘한 하나의 광명, 광명이 충만한 감로수로 본단 말입니다.


이와 같은 물이지만 시각 따라서 달리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걸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보는 것만이 절대로 옳습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가상(假像)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런 법문 이것은 부처님께서 보신 그대로 말씀했기 때문에 우리 중생은 납득하기 곤란스러우나 여기에서 우리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다행히도 현대 물리학은 방금 말씀마따나 물질의 근원에 가서 텅 비었다는 것을 증명한단 말입니다. 다만 그 비어있는 알맹이가 무엇인가? 그것만 지금 현대 물리학은 모릅니다. 부처님은 다 알고 있었지만, 물질이 곧 바로 마음이요 또한 마음의 작용 따라서 그때는 물질이 되기 때문에, 또한 동시에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 마음이 곧 바로 물질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둘이 아닌 것입니다.

 마음밖에 어떤 물질이 안 된다고 하면 그때는 안 되겠지만은(마음[공]이 마음[공]으로만 존재하고 어떤 물질[색]이 안 된다고 하면 그때는 공즉시색 (空卽是色)이 성립이 안 되겠지만 -정리자주석), 우리 중생이 보면 마음이 물질화가 될망정 결국은 내내야 둘이 아닙니다.(우리 중생이 보면 마음[공]이 물질[색]로 보일망정 결국은 둘이 아니다. 비공비색(非空非色)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중도실상(中道實相)을 드러내고자 하심-정리자 주석)


수상행식(受想行識) 역부여시(亦復如是)라, 우리 감수(感受)하는 감각(感覺)이나 상상(想像)하는 우리 감정(感情)이나 또는 우리가 의욕(意慾)하는 행(行)이나 또 우리가 분별(分別)하는 식(識)이나 이런 것도 역시 또한 이와 같도다. 그와 똑같이 역시 물질이 마음이요 마음이 물질이란 말입니다.


 사리자(舍利子)야! 잘 들어라.


시제법공상(是諸法空相), 이와 같은 -그러니까 같은 ‘이 시(是)’자 이지만 아까는 ‘바로’라고 풀이했던 것을 ‘이것이’라고 지정명사로 풀이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시제법공상, 이와 같은 모든 법이 -제법(諸法) 이것은 일체 우주의 만법을 이야기합니다. 제한 된 것이 아니라 일체 우주 만법을 ‘제법(諸法)’ 그럽니다. ‘이와 같은 모든 만법(萬法)이 다 비어있는 상(相)에서 본다고 할 때는’ 그 말입니다.

 제법공상(諸法空相) 이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반야심경을 천만 번 외워도, 앞서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이나 이런 중요한 대목을 놓치면 별로 의의가 없습니다.

 인생고를 떠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오온이 - 정신과 물질이 다 비어있음을 비춰봐야 쓴다.

 이와 같은 중요한 대목과 또한 동시에 모든 법이 즉 앞에서 말한 모든 법이 다 비어 있다는 그런 실존(實存) 실상(實相)에서 본다면, 우리 중생은 실상은 못 보고 실존을 못 보고 가상(假相)만 봅니다.

 이와 같은 모든 법이 다 비어 있는 그 실상에서 본다면,


불생불멸(不生不滅)이요, 생도 없고 멸도 없단 말입니다. 어째서 그런고 하면 그때는 영생하니까, 가상을 본다고 할 때, 우리는 상대적인 것만 본다고 할 때는 -생(生)이 있고 사(死)가 있고 모두 분별이 있지만,

 우리가 물질이라는 것은 결국은 우리가 봐서 물질인데, 물질도 내내야 결국은 마음이니까, 모든 법이 상대유한적인 그런 것들이 다 비어버려서 -다 비어버린 실다운 모습 - 참다운 실상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야말로 참 생(生)도 없고 멸(滅)도 없단 말입니다.

 이것은 영생(永生)과 똑 같습니다. 영생하는 가운데서 무슨 생(生)이 있고 멸(滅)이 있겠습니까.

 사람 몸뚱아리 몇 천 번 나고 죽는다고 하더라도 역시 생명은 죽지 않고 낳지 않습니다.

 인연 따라서 몸뚱아리만 낳고 죽고 하는 것이지 생명자체는 생도 없고 멸도 없습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 이와 같이 남도 없고 - 원래 생겨남이 없으니 멸도 없습니다.

 우리 중생은 근원을 못 보고서 그냥 겉만 본단 말입니다. 겉만 보기 때문에 부모님한테 의지해서 나오면 나온다 하고, 모양이 없어지면 그때는 죽었다고 합니다.

 사실은 생명은 죽음이 없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공부를 많이 해서 공부가 툭 틔어서 본질을 보면 그때는 격세즉망(隔世卽忘)이라, 한번 생을 바꿔도 바뀜이 없단 말입니다. 수원수생(隨願受生)이라, 자기 원하는 데 가서 자기 멋대로 태어난단 말입니다. 천상에 올라가려면 올라가는 것이고 인간으로 오려면 인간 세상에 오는 것이고 말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육근청정(六根淸淨)이라, 우리 눈을 비롯해서 우리 몸을 구성하는 요소가 청정해야지요. 청정하려면 오랫동안 삼매(三昧)에 잠겨야 합니다. 오랫동안 삼매에 잠기지 않으면 우리한테 있는 찌꺼기가 안 녹습니다.

 찌꺼기가 녹아버려야 앞서 말씀한 탐심 진심도 안 일어나고 동시에 나(我)라는 생각도 없고 동시에 우리 몸뚱아리나 물질을 떠나서, 몸뚱아리나 물질을 구성한 근본요소를 우리가 알 수가 있단 말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법이 텅 비어있는 모든 법이 공했다는 실상(實相)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생도 없고 멸도 없고 또한 동시에


불구부정(不垢不淨)이란 말입니다. 아니 불(不)자, 때 구(垢)자, 아니 불(不)자, 맑을 정(淨)자, 더러움도 없고 맑음도 없단 말입니다. 상대를 떠나 버려서 오직 영원히 청정한 것만 있다는 것입니다. 불구부정이란 말입니다. 또는


부증불감(不增不感)이라, 아니 불(不)자, 더할 증(增)자, 아니 불(不)자, 감할 감(感)자, 말입니다. 더함도 없고 또 감하는 것도 없단 말입니다.

 우리가 흔히 모든 중생이 다 불성(佛性)이 있다고 합니다만, 잘못 생각하면 석가모니한테는 불성이 많이 있고, 우리한테는 불성이 적게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만 사실은 석가모니한테나 우리한테나 누구한테나 불성은 똑같이 있습니다.

 다만 발견하는 정도가 얼마만치 더 많이 발견했는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천지우주에 충만한 불성을 다 발견한 분이고, 우리 중생은 아직 다 발견을 못했단 말입니다. 그것뿐인 것이지 불성자체에서는 석가모니한테나 독사한테나 강도한테나 있는 불성은 다 똑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불성은 사람하나 죽는다고 해서 불성이 줄어드는 것도 아닌 것이고, 또한 석가모니가 열반(涅槃)에 든다고 해서 불성이 안 줄어듭니다. 천지 우주가 다 파괴된다고 해도 불성은 안 줄어듭니다.


 원자폭탄 핵무기가 우주를 진멸시킨다 하더라도 불성은 조금도 더함도 덜함도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거품 같은 물질만 변동하는 것이지 순수에너지인 생명자체 불성은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더함도 없고 감함도 없단 말입니다.


시고(是故)로 공중무색(空中無色)이라, 이런 고로 모든 법이 다 비어있는 것을 비추어 보는 그런 안목에서는 무색(無色)이라, 물질이 없단 말입니다.


 반야심경이 지금 들어보시니까 상당히 의미심장(意味深長)한 법문 아닙니까.

 이렇게 좋으니까 매일매일 외곤 하는 것입니다. 특히 신중불공(神衆佛供) 모실 때 중단에서 많이 하는 것인데, 반야심경 외면 저급한 신들은 못 알아먹으나 고급 신들은 알아먹고서 굉장히 환희심(歡喜心)을 내고서 신들이 상(相)을 터는 것입니다. 이것저것 모두가 다 공(空)이라 했으니까 상을 안 털 수가 있습니까.

 따라서 신들이 상을 털어 버리면 그와 동시에 상을 턴 - 그 상이 없는 자비심(慈悲心) 때문에 - 자비심으로 해서 우리 중생(衆生)을 굽어보고서 중생을 가호(加護)한단 말입니다.

 또는 어떤 우리 환경이 약간 기분이 사나울 때, 암울할 때는 반드시 우리 분위기가 오염되어 있습니다. 우리 분위기를 구성한 순수에너지가 그만치 조건이 안 맞아서 오염되어 있어서 이런 때에 반야심경을 외우면 효험(効驗)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선 생명을 구성한 자기 가슴이 청정하게 되는 것이고 또한 동시에 우리 주변을 정화 하는 것입니다. 불교 법문은 모두가 다 우선 나를 정화하고 남을 정화하는 것입니다.


 선과 악의 구분은 어디가 있는 것인가? 악은 이것은 우선 자기를 훼손(毁損)하고 남을 훼손한단 말입니다. 선은 그 반대로 자기를 우선 정화시키고 남을 정화시킵니다.

 반야심경이 길고 시간이 제한되어 놔서 제가 허두만 썼는데 여러분들이 가셔서 잘 읽고, 반야심경 번역본이나 주석본이 굉장히 많이 나와 있습니다.

<녹음 앞면 끝>


불교는 법문 심도를 3단계로 구분합니다. 맨 처음에는 있을 유(有)자, 가르칠 교(敎)자, 유교(有敎)라, 유교입니다.

 그러니까 반야심경 같은 이런 법문은 상당히 마음이 세련되어서 마음이 정화가 되어야 아는 것이지 무식한 사람들은 잘 못 알아먹습니다. 그러니까 무식 대중한테는 이런 법문을 않고서 그냥 유교라, 있을 유(有)자 유교는 무엇인고 하면, 선도 있고 악도 있고 너도 있고 나도 따로 있고 이와 같이 자타(自他) 시비(是非)를 구분한 법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초기 법문은 모두가 있다 하는 일반 중생차원에서 하신 법문입니다.

 지금도 역시 이런 법문이 어려운데 하물며 부처님께서 가신지가 2500년 이상, 그 당시 사회는 보다 무식했겠지요. 그런 때는 이런 고도한 법문을 알아먹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초기에는 그냥 있다 없다하는 우리 중생차원에서, 네가 있고 내가 있고 선도 있고 악도 있고 그와 같이 그런 차원에서 인과(因果) 정도는 믿고서 악을 행하면 그때는 죄를 받는 것이고 선을 행하면 그때는 복을 받는 것이고, 그와 같이 선악 인과를 따져서 하는 그런 법문 이것이 유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일반 세간에서 하는 유위교(有爲敎), 일반 도덕이라는 것은 유교(有敎)에 해당합니다. 기독교나 유교(儒敎)는 보통은 유교(有敎)범주에 들어갑니다.

 내가 있고 네가 있고 또 물질도 있고 보석도 있고 그와 같이 그런 것이 유교이고, 허나 유교 이것은 실상(實相)을 바로 못 본단 말입니다. 가상(假相)만을 볼 수 있는 중생 차원에서 마친 교이기 때문에 이것은 참다운 것은 못됩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참다운 가르침을 설하기 위해서는, 그때는 지금까지 말씀한 유교는 이것은 참이 아니다. 일체정신과 물질은 비어있다. 그와 같은 법문 이것이 반야심경 같은 공교(空敎)라, 빌 공(空)자, 가르칠 교(敎)자, 공교란 말입니다.

 허나 텅 비어 있다는 공교밖에 모르면 그때는 불교를 바로 또 안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텅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비어 있다 하더라도 텅 비어 있는 내용은 이것은 허무가 아니단 말입니다. 만약 불교가 텅 비어 있다는 그것밖에 몰라 버리면 허무주의(虛無主義)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불교를 믿는 분들이 더 깊이 못 들어가면 반야심경 정도에서 딱 그쳐버리면 자칫하면 허무주의에 빠져버린단 말입니다.

 헌데 텅 비어 있는 그것이 아주 비어 있는 허무가 아니다 말입니다. 텅 비어있는 그 가운데는 일체공덕(功德)이 다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자비(慈悲)나 지혜(智慧)나 행복(幸福)이나 또는 기능(技能)이나 모두 다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그런 공덕이 하도 많으니까 일일이 다 우리가 열거할 수 없다 하더라도 간추리면 4가지 범주로 말합니다.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 항상 상(常)자, 일체 부처님의 지혜, 공지혜(空智慧), 공(空)에 들어 있는 생명이 그때는 영생한단 말입니다. 영생하는 그런 의미를 상(常)이라 합니다. 즉 말하자면 상주부동(常住不動)이라, 영생하는 그런 생명이 있다는 것이 상(常)인 것이고,

 또는 락(樂)이라, 안락할 락(樂)자, 그 불성 가운데는 부처님 지혜 가운데는 일체 모든 행복(幸福)이 다 들어 있단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가치관(價値觀)의 전도(顚倒) 때문에 상대유한적인 물질 가운데 행복이 있다고 어거지를 씁니다만 사실 그 가운데는 없습니다. 순간순간 우리 정신의 혼미(昏迷)뿐입니다.

 역시 참다운 행복은 불성 가운데 있는 -우리 마음 가운데 있는 - 영원성밖에는 없습니다. 그야말로 불변하는 불멸의 행복이 있단 말입니다. 불변의 행복 그것이 안락 락(樂)자, 낙(樂)입니다.

 

또는 나 아(我)자, 아(我)라, 아(我) 이것은 그냥 우리 같은 작은 상대적인 아(我)가 아니란 말입니다. 일체 것을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我)란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재주나 지혜나 기능을 부리는 아(我)란 말입니다. 불교 말로 하면 신통(神通)도 하고 기적도 부리고 말입니다. 그와 같이 신통 기적을 다 부릴 수 있는 그런 모든 재주를 다 부리는 것이 아란 말입니다. 나 아(我)자,

 또는 맑을 정(淨)자, 정(淨)이라, 이것은 조금도 번뇌가 없는, 흐림이나 또는 어떤 마음의 어둠도 없고서 조금도 번뇌의 흔적이 없는, 본래 청정한 그런 마음이란 말입니다.

 이와 같이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 영생하는 상(常)과 또는 행복이 다 갖추고 있는 락(樂)과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고 알 수 있는 아(我)와 또는 조금도 번뇌가 없는 청정무구(淸淨無垢)한 그런 청정한 정(淨)과 이와 같은 이것이 불성 가운데 텅 빈 마음 가운데 꽉 차 있는 것입니다.

 

 천지우주는 다만 텅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이 모든 것이 꽉 차 있단 말입니다. 앞서 말씀과 같이 영생하고 또는 행복을 다 갖추고 있고 또 일체 것을 할 수가 있고 알 수가 있고 말입니다. 청정하고 이렇게 갖추고 있는 이것이 순수한 우리 마음자리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마음을 닦으면 원래 갖추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차근차근 그때는 이러한 것에 접근되어 가는 것입니다.


 석가모니나 자고(自古)로 위대한 도인들은 이러한 사덕(四德)을 - 상락아정(常樂我淨)을 다들 증득(證得)한 분들이고, 중생은 아직 증득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항시 불안스러운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권력, 지위, 이성, 이것저것 갖추어진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속에 원래 갖추고 있는 역량이 방금 말씀한 상락아정이기 때문에 -영생과 영생의 행복과 또는 일체 신통과 청정한 것이 원래 우리 마음의 본성이기 때문에 여기 까지 못가면 우리는 항시 불안스러운 것입니다. 세상을 다 주어도 불안스러운 것입니다. 지구가 다 자기 것이 되어도 불안스러운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원래는 부처인 것입니다. 원래 모두를 갖춘 원만한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원만한 부처가 못 되는 한에는 항시 불안한 것입니다. 따라서 불안스러울 때의 행복은 행복이 아니지요.

 따라서 성자만이, 저번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요한복음서에도 예수님이 ‘진리만이 그대를 자유롭게 하나니’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사실 진리만이 우리를 행복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영생의 행복 또는 영생의 지혜 이런 것을 갖춘 것은 결국 우리 본성(本性) 불성뿐이다 말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은 불성에 가고자 하는 하나의 교언(巧言)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보는 것이 항시 상대유한적(相對有限的)인 허망한 것이다. 가상(假象)임을 분명히 인식해야 하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보는 견해가 가상임을 바로 인식을 못하면 그때는 반성(反省) 못하는 것이고 참회(懺悔)도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느끼고 보는 것이 허망무상한 - 불교말로 해서 몽환포영(夢幻泡影)이라 -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요 이걸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중생은 그림자를  쫓고 허망한 것을 쫓아서 생명을 낭비를 합니다. 우리 눈으로 보는 것도 허망함을 느껴가지고서, 허망한 것이 아닌 - 아닌 것은 아까 제가 말씀마따나 영생하는 상(常), 안락(安樂), 신통자재하는 아(我), 청정무비한 정(淨), 상락아정 이것이 실존이고 영생의 지혜고 행복인 것입니다.

 우리 본성이 바로 불성이고 지금 못 났다 하더라도 우리 본성은 석가모니와 똑같은 불성입니다. 그 가운데는 앞서 말한 상락아정을 다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상락아정의 영생의 행복 지혜를 얻기 위해서 부지런히 공부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