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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마음의 고향

*마음의 고향 - 미국 3년 결사 회향법회

마음의 고향(1) - 미국 3년 결사 회향법회


 1.수승한 인연이 도래해서 오늘 이렇게 대덕 스님들을 위시하여 사부대중 여러 불자님들과 자리를 같이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의 합장을 드립니다.

 우리 고국 대한민국은 진정 아름답습니다. 바야흐로 진달래꽃 개나리꽃이 만발하고 만물이 생동하고 있습니다. 저도 미국에 있으면서 제일 먼저 무궁화꽃을 심고 또 진달래 개나리를 많이 심어서 지금 싹이 트고 있습니다.

 저는 속세에 닦은바 복이 부족해서 고향을 많이 떠나 있었습니다. 20대에는 일본 들어가서 한 6년 동안 공부를 한다고 고향 떠나 몹시 고향을 그리워했고, 또 나이 70이 넘어서 생각지 않게 미국에 들어가 다시금 고향을 그리워하는 그런 처지에 놓여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는 바와 같이 현대는 대단히 복잡다단한 그런 시대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 종교 어떠한 문화현상이든지 모두가 복잡해서 어떻게 갈피를 잡아야 할 것인가. 이러한 것들을 제대로 확립을 한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문제입니다. 이른바 정보의 홍수시대 아니겠습니까.

 이런 때는 마치 목자가 양떼를 잃어버렸는데, 그 갈림길이 많아서 어디로 가야 길 잃은 양을 잡을 것인가. 이른바 하나의 숙어로 다기망양(多岐亡羊)이라, 길이 많으면 양을 잡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와 같이 종교현상이나 모든 분야에서 하도 길이 많으므로, 특히 불교는 그런 가운데서도 아주 복잡한 종교 형태의 와중에 들어 있습니다. 가령 한국만 두고 본다 하더라도 50 종파 이상이 넘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또 미국 가서 좀 있어 보니까 미국은 종교 박람회 같이 세계종교가 다 밀집되어 있어 백가쟁명(百家爭鳴)이라 하듯이 자기 종교가 제일 수승(殊勝)한 종교다. 자기 종교에만 참다운 구제가 있다. 이런 걸로 해서 피차 각축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드릴 말씀도 그러한 것을 어떠한 슬기로 다 회통을 시키고 정말로 신앙에서 우리 소중한 생명의 손해가 없이 바른 지름길로 성불(成佛)할 것인가 그런 말씀을 주로 드리겠습니다.


 부처님의 법문 가운데 사견(邪見)이란 것이 있습니다.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이 있습니다. 그 해석이 구구해서 재차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단견은 끊을 단(斷)자 볼견(見)자 이것은 우리 인간 존재가 금생뿐인 것이지 과거에도 없었고 또 금생에 인연 따라서 얻어진 이 몸이 죽어지면 내생도 없는 것이다. 이런 견해가 단견입니다. 그리고 항상 상(常)자 볼견(見)자 상견 이것은 그 정반대로 내 생명은 과거에도 지금과 똑같이 존재했고, 몸도 지금과 같이 과거에도 있었고, 죽은 뒤에도 내 마음 그대로 태어나고, 내 몸 그대로 내생의 몸을 받는다. 이런 것이 이른바 상견입니다. 그래서 이 단견 상견을 못 끊으면 이른바 사견이라 불법이 못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불법은 어떻게 해석하는가. 요즈음 교학적으로 불교를 많이 하신 분들은 대체로 윤회전생(輪廻轉生)을 잘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 눈에 안 보이는 세계이므로 믿기가 어려운 것이 되겠지요. 또 인과응보(因果應報)도 역시, 가식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은 그렇거니 하지만 눈에 안 보이는 문제에 관해서는 인정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른바 매사가 실증주의, 경험주의 그런 범주 내에서만 긍정 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는 분명히 형이(形而) 상하(上下)를 총 망라해서 변증법(辨證法)적으로 통합된 그런 가르침입니다.

 정말로 우리 생명은 금생에만 존재하고 전생과 내생은 없을 것인가. 또는 그 반대로 이와 똑같은 몸과 마음이 과거 전생이나 미래 내생에도 그대로 연장이 될 것인가.


 이것은 그렇지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단견과 상견을 다 떠나서 중도실상(中道實相)의 견해에서 그런 문제를 해결하여야 합니다. 불교에서 생사문제(生死問題)는 매우 중대한 문제인데 그런 문제를 명확히 해결 못하면 자기 신심(信心)에 금이 가는 것입니다.

 거기에 곁들여서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누구든지 불법은 ‘인과법(因果法)이다. 연기법(緣起法)이다’이런 말씀을 합니다. 불교인치고서 다 아는 문제 아닙니까.

 이것저것 조건부로 해서 잠시간 존재되는 것이지 실존적인 고유한 것은 없다. 이것이 일반 상식적인 연기법의 해석이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걸로만 해서는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이런 식으로만 해서는 불법의 대승적(大乘的)확립이 못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읽으신 분들은 보셨겠지만 마명대사(馬鳴大師)의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기신론에서 보면 진여연기(眞如緣起)라, 우주는 우리 중생이 느끼고 안 느끼고 상관없이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는 청정무구(淸淨無垢)한 순수생명이 상주불멸(常住不滅)이라, 상주불멸의 진여불성은 대승에서만 말을 합니다. 소승에서는 그런 말이 없습니다. 대승기신론은 연기법의 마지막 근본 본체적인 해석입니다. 일반 사람들은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모두가 다 조건부이기 때문에, 개시(皆是) 인연법(因緣法)이기 때문에 고(苦)요, 공(空)이요, 무상(無常)이요, 무아(無我)라고 보통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런 범주만으로 이해하는 것은 소승법(小乘法)에 해당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오시고 안 나오시고 상관없이 영생불멸(永生不滅)한 진여불성은 항시 존재한단 말입니다. 화엄, 법화, 열반경이나 능엄, 유마경이나 그런 대승경전은 다 이런 사상을 말씀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그런 사상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대승이 못됩니다.

우리가 소승적인 한계로만 불법을 이해한다고 할 때는, 우리가 팔정도를 닦아서 번뇌가 멸하면 공이 아닌가. 종당에는 모두가 공으로 귀결된다. 우리 몸뚱이도 금생에 이대로 있다가 인연이 다하면 소멸되면 그뿐이 아닌가. 소승적인 그런 견해에서는 이것이 자칫하면 인과적인 우리 업(業)사상으로 해서 과거 전생, 금생, 내생에 삼세윤회(三世輪廻)하는 그런 사상마저 긍정하기가 곤란스럽습니다. 이런 것도 역시 소승적인 사상으로 해서는 논리체계를 세울 수가 없습니다.


 대승이 돼야 진여불성이라 하는, 우리 인생과 더불어서 우주 만유의 본체, 우리 사람의 본성일 뿐만 아니라 우주만유 두두물물의 본성을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되어 귀일(歸一)이 된단 말입니다. 이른바 일원적인 형이상하를 다 통달한 투철한 철학이 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 중생이 금생에 업을 많이 짓고, 전생부터 내려오는 숙업으로 해서, 숙업에다 금생 업을 보태서, 우리 행동이 규정 당하는 것이니까, 금생에도 더욱더 죽을때까지 복을 많이 짓지 않겠습니까. 그런 쪽으로만 본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인생은 참 답답합니다. 인생은 고해(苦海)뿐입니다.


 그러나 그런 번뇌(煩惱)의 본체는 무엇인가. 생명의 본체는 무엇인가. 이렇게 들어 갈 때는 번뇌, 비록 우리 인간의 가시적인 현상만 보는 중생의 눈에서는 번뇌이지만 본 성품을 보는 성자의 맑은 안목에서는 번뇌 그대로 바로 보리(菩提)입니다. 따라서 본 성품에서는 번뇌가 본래 없습니다. 현상적인 중생의 견해에서만 번뇌가 있고 보리가 있고 그런 구분이 있는 것이지 성자의 모두를 다 평등하니 모든 존재의 근본 성품을 뚜렷이 보는 성자의 분상에서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그렇게 봐져야 그대 맘과 내맘이 한맘이 아닌가. 따라서 마음에서 일어난 그런 몸뚱이도, 그저 내 몸뚱이 현상적인 상으로 서로 차이가 있는 것이지, 본래는 수파(水波)의 비유라, 물에서 일어나는 천파만파 파도가 모두 다 똑같이 물이듯이, 비록 두두물물이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근본적인 성품자리는 모두가 일여(一如)하게 진여불성이다. 진여불성으로 돌아가야 이른바 성불이 된단 말입니다.

 앞서 제가 말씀다린 바와 같이 소승에서는 진여불성이라는 말이 한마디도 없습니다.


 사람이 업을 지으면 업을 지은 만큼 고가 가중됩니다. 과거 전생부터서, 지금은 과거 전생 문제는 저명한 의사도 물리학자도 증명을 합니다. 심령과학적으로 증명하고, 또는 최면술로 우리 의식을 퇴행시켜서 증명을 합니다.

 우리가 쓰는 의식은 기껏해야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라, 육식(六識)의 범위 내에서만 씀이다. 그 육식의 뿌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제 7 말나식(末那識)에서 옵니다. 그러면 또 말나식은 어데서 오는가. 말나식은 제 8 아뢰야식(阿賴耶識)에서 옵니다. 아뢰야식은 또 어데서 오는가. 아뢰야식은 제 9 암마라식(菴摩羅識)이라, 암마라식은 청정식(淸淨識), 무구식(無垢識) 진여식(眞如識)이라, 제 9 암마라식은 바로 불식(佛識)입니다. 불심(佛心)이란 말입니다. 사람의 마음의 본심이기 때문에 불심인 것이고 우주 만유의 본성이기 때문에 불성입니다.


 따라서 심리학적으로 본다 하더라도, 지금 현대 심리학보다도 불교 심리학은 프로이드 또는 융이나 그런 분들의 심리학보다도 훨씬 더 심수오묘(深邃奧妙)한 심리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종단에는 심리학자가 틀림없이 불교심리학까지 들어와야 됩니다. 들어오기 위해서는 개념적인 그런 범주로 해서는 못 들어옵니다. 개념을 놓고 순수직관(純粹直觀)적인 그러한 공부를 해야 이른바 부처님 사상인 아뢰야식이나 암마라식인 그런 경계에 들어 올 수가 있습니다.

 진정으로 부처님 가르침은 가장 투철한 과학인 동시에 형이상하(形而上下)를 다 망라한 가장 철두철미한 철학입니다. 동시에 영생해탈(永生解脫)의 무량복락(無量福樂)을 누리는 그러한 종교는 불교밖에는 없습니다.

 우리 인간성(人間性)의 존엄은 무엇인가. 인간성이 존엄하려면 인간성보다 높은 것은 없어야 한단 말입니다. 다른 종교는 바라문신(婆羅門神)이나 또는 이른바 야훼(여호와)신이나 그런 신을 설정합니다. 그런 걸로 해서는 인간의 존엄을 확립을 시킬 수가 없습니다. 모두가 다 신의 밑이고 야훼의 밑이고 또 알라신의 밑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죽고 살고 하는 생사문제(生死問題)에 있어서도 허두에 말씀드린 단견 상견의 정확한 해설은 꼭 필요합니다. 우리 생명이라 하는 것이 어떻게 삼세 삼계를 윤회하는 것인가.


 금생에 우리가 지은 업장(業障). 업장이 가중되면 된 만치 우리 의식은 변화가 되어 갑니다. 설사 나쁜 사람으로 태어났다 하더라도 좋은 교육을 받고 좋은 훈도를 받으면 좋은 쪽으로, 우리 마음이 진여불성쪽으로 그만큼 접근 되는 것입니다. 또 금생 내내 박복해서 나쁜 짓만 하고, 나쁜 생각만 하고 그렇게 업을 많이 지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마지막 임종(臨終) 때 좋은 도반(道伴) 만나서 좋은 스승 만나서 한 생각 돌이키면 극락에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본성이 불성이므로 원래 부처이므로 또 부처는 물질이 아닌 순수 생명이므로, 물질 같으면 오염이 되었으면 닦아야 되고 또는 개혁이 필요하지만, 우리 마음은 설사 잘 못 살아서 마음에 때가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본래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때가 묻지를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본래 자성은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라, 지옥에 가서 있어도 우리 불성 자성은 조금도 때묻지 않고, 아귀에 나고, 개가되고, 소가 된다 하더라도 우리 청정 자성은 조금도 오염이 안됩니다.


 우리 중생의 견해에서 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분명히 오염이 돼서 잘 못 생각하고 잘 못 행동하고 나쁜 짓을 많이 하겠지만 마치 구름이 끼어서 지금 해가 가려져 있지만 해 자체의 광명은 조금도 훼손이 없고 이그러짐이 없듯이 우리 불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경우나 몇 천 번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우리 불성 자체는 오염이 없습니다.

 진여불성 이것은 하나의 생명자체이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그 가운데는 자비(慈悲) 지혜(知慧) 행복(幸福) 능력(能力) 모두를 원만히 다 갖추고 있습니다. 불교를 믿는 분이 특히 대승법을 믿는 분이 불성공덕(佛性功德)을 분명히 확신을 안 하면 참다운 신앙인(信仰人)이 못 됩니다.


 여러분 법화경을 보셔서 짐작이 되시겠습니다만 부처님의 생명이, 부처님의 생명이 내내야 우리 마음입니다. 모든 존재는 마음이라 하는 우주의 순수 에너지 그 위에서 이루어져 있단 말입니다. 부처님의 생명에 얼마만큼 공덕이 들어 있는가. 열반경에서는 그런 쪽에다 역점을 두고서 그런 것을 아주 정확히 간추려서 구체적으로 말씀을 많이 했습니다.

 간추려서 열반경 식으로 말씀드리면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 상바라밀, 낙바라밀, 아바라밀, 정바라밀이란 말입니다. 반야바라밀(般若婆羅密)이라는 것은 제법(諸法)이 다 공(空)이다. 공을 우리가 느끼고 상(想)이 없으면 피안(彼岸)에 가지 않는가. 해탈(解脫)이 되지 않겠는가. 이렇게만 간단히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무한의 공덕장(功德藏)이라. 곳집장(藏)자 말입니다. 무한의 공덕이 들어있는 곳집 이것이 결국 우리 마음의 본성입니다. 설사 우리가 금생에 못 산다 하더라도 그 만덕장(萬德藏), 영생불멸하는 생명 자체, 이것이 이른바 항상상(常)자 상바라밀이고, 또 낙바라밀은 안락무구(安樂無垢)해서 조금도 괴로움이 없단 말입니다. 즉 영원의 행복입니다. 영원의 행복이 원만히 갖춰진 그 자리가 이른바 즐거울락(樂)자 낙바라밀입니다. 그 다음은 나아(我)자 아바라밀이라, 이것은 우리 중생의 작은 소아(小我)가 아니라 무량의 덕성과 무량의 지혜와 자비를 갖춘 그런 자리입니다. 신통자재(新通自在)하는 그런 것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마음은 존엄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석가모니와 더불어서 우리가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달마의 마음, 석가의 마음, 우리마음 똑같은 마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들은 대체로 위대한 우리 마음을 스스로 딱 제한을 시켜서 못통하게 막아버린단 말입니다.

 공부할 때는 화두(話頭)를 참구하든, 염불(念佛)을 하든, 주문을 외이든 간에 마음을 열고 해야 됩니다. 이른바 반야바라밀을 분명히 느끼고 거기에 입각해서 공부를 해야 공부가 속빠른 것이고 또 공부에 재미가 나는 것이지 껌껌해도 다만 화두만 들면 된다. 염불만 하면 된다. 이런 식으로 해서는 대승적인 공부가 못됩니다. 환희심도 안 날 뿐만 아니라 또 다른 교리에 부딪히면 금방 마음이 퇴행이 됩니다.


 아바라밀은 삼명육통을 위시해서 만공덕을 갖춘 자리입니다. 열반경을 보면 팔대자재아(八大自在我)라. 본래 자기 진아(眞我)가 가지고 있는 공덕을 여덟 가지로 구분한 것이 있습니다. 자기 한 몸을 여러 몸으로 보이고, 마음대로 공중에도 날 수가 있고, 미진(微塵) 속에 자기 몸을 다 넣을 수도 있단 말입니다.

 유마경에 이런 법문이 있습니다. 삼천대천 세계를 겨자씨 한 알에 다 넣을 수가 있다. 왜 넣을 수가 있는 것인가. 본래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공간성(空間性)이 있고 시간성(時間性)이 있다고 했을 때는 큰것은 작은것 속에 못들어가겠지요. 그러나 부처님 법은 대소장단(大小長短)을 다 떠나 있습니다.


 우리가 보는 물질이라는 것도 중생의 눈으로 보아서 물질인 것이지 성자가 물질의 근본을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만법유심(萬法唯心)이라. 모두가 다 마음 식 뿐입니다.

 조금 이해를 못 하신다 하더라도 부처님 말씀이니까 믿으셔야 됩니다. 형이하학적인 문제는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니까 믿고 아니 믿고 하겠지만 형이상학적인 문제는 눈에 아니 보이므로 보통은 부정을 합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세계만 가지고 따지는 사람들은 경험론이나 실증론 그것만이 진리인 것이지 관념론은 진리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면 불교의 형이상학이 성립이 못되겠지요. 불교에는 경험론 관념론 다 들어 있습니다.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이 다 들어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불교는 가장 투철한 과학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현대 물리학은 물질의 저 끄트머리는 전자, 양자, 중성자라는 소립자 더 분석하면 쿼크라는 초소립자들 이라고 그렇게 생각을 하겠지요 그러면 그 초소립자들은 어떻게 태어나는 것일까. 


 사실 소립자 부터는 파동이다 입자다 하지 않습니까. 초소립자 저편은 사실은 물질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의 광명체(光明體)입니다. 그러한 물질이 아닌 에너지의 체가 어떻게 진동(振動)하는가. 진동여하에 따라서 전자가 되고 양성자가 되고 중성자가 되는 것입니다.

 물질이 아닌 상태, 생명의 순수한 상태, 순수 에너지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업의 동력 탐잔치 삼독심의 진동 여하에 따라서 물질의 근원인 이른바 초소립자인 쿼크들이 그리고 이들이 다시 한 차원 낮은 업 따라서 소립자인 전자, 양자, 중성자로 나온단 말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또 더 두터운 업식에 따라서 모인 것들이 산소, 수소, 탄소, 그러한 원소들이 되지 않겠습니까. 또 그것들이 적당히 인연 따라 모이면 성분이 되어서 이제 물질이 나온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불자님들 반야심경에서 말씀한 색즉공(色卽空)이라.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 이것은 과학자 같이 분석한 뒤에 저 끄트머리 가서 공이 되는 그런 공이 아닙니다. 색은 물질을 가리키는 말인데, 색즉공이라, 물질 그대로 공이란 말입니다.

 우리 범부가 보면 물질밖에는 못 보는 것이고, 성자가 본다고 생각할 때는 물질 그대로 공입니다. 본래 물질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만법 유식이요, 만법이 식뿐이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란 말입니다. 불교인으로 해서 일체유심조를 부인하면 그때는 대승이 못됩니다.


 다음에는 청정할정(淨)자 정바라밀입니다. 조금도 번뇌의 흔적이 없습니다. 육조단경을 보면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하니 하처야진애(何處惹塵埃)리요’라는 법문이 있지 않습니까. 본래무일물이라는 것은 물질은 하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오염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본래가 청정하단 말입니다.

 그것은 중생으로 보아서 청정한 것이 아니라, 본 성품자리를 볼 수 있는 성자의 안목으로 보아서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개가 보면 모두 개로만 보이고, 부처가 보면 다 부처같이 보인다는 말도 역시 그런데서 연유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죽을 때까지 나쁜 생각을 하고 나쁜 행동을 하고 나쁜 말만 해서 그 업으로 그야말로 구속된 그런 영혼이라 하더라도 그 마지막 임종 때 한 생각 바꿈으로 해서 극락세계도 왕생하는 것입니다. 불자님들 이렇게 말씀 드리면 미심쩍게 생각하시겠지요.


 그러나 우리 인간존재 이것도 역시 참 무상(無常)한 것입니다. 참말로 바로 본다면 원래 무아(無我)입니다. 원래 모든 상(想)은 개시허망(皆是虛妄)이라. 내가 살고있는 이 세계도 역시 허망한 것입니다. 그런 허망한 의미에서 지옥도 있고 아귀세계도 분명히 있습니다. 실존적인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중생세계가 허망ㅅ하듯이, 고,공,무상,무아 이듯이, 개의 세계도 그렇게 있는 것이요, 아귀의 세계도 분명히 그렇게 있습니다. 그러기에 불교의 육도 윤회는 절대로 거짓말이 아닙니다. 다만 중생이 보고 아니 보고 할 뿐입니다.

 그러면 극락세계는 무엇인가. 마음이 편하면 극락인 것이고, 마음이 찌뿌드드하고 마음이 어딘가 메인 데가 있고 또 남도 미워도 하고 그러면 지옥이 아닌가. 물론 그것도 그렇습니다. 일체가 유심조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이 안락하면 극락이지만, 그러나 그런류의 극락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맙니다.


 우리가 또 영가가 안 보이므로 없다고 생각하면 절에서 애쓰고 영가천도를 할 필요가 없겠지요. 그러나 영가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이른바 불교적인 술어로 하면 업식(業識)이란 말입니다. 죽은 뒤에도 업식은 존재합니다. 본래는 청정한 진여불성인데 우리가 업을 지어서 그 걸로 가려져 있단 말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허망한 모양을 가리켜서 나요 너요 내것이요 네것이요 합니다.

 우리 불자님들 금생에 사업도 하고 돈도 벌어야 되고 지위도 높아야 되고 꼭 해야 되겠지요. 그러나 그렇더라도 철학적으로 자기 인생관을 확립해야 그래야 너무 지나친 욕심을 낼 수도 없고 지나친 욕망을 가질 수도 없습니다.


 본래 나라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아는 불교에서 중생들이 욕심을 내지 말라고 방편으로 무아라고 하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하신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본래가 참말로 무아입니다. 어째서 무아인가. 모든 법이 인연 따라서 잠시간 화합되어서 순간 찰나도 머무름이 없이 변동무상하단 말입니다. 어느 한 순간도 어느 한 찰나도 똑같은 우리 존재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현상적인 문제는 절대로 실존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본 성품자리 들어가야 실존이고 실상이 있는 것이지 현상적인 문제는 모두가 다 무아고 무소유(無所有)입니다. 본래 무일물이고 물질은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로 따져도 시간과 공간이 없습니다. 과학자가 증명한 것도 시간도 공간도 없다는 것입니다. 시간도 공간도 없다고 생각할 때는 시간과 공간 속에 담겨져 있는 물질도 없습니다. 우리 중생이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꿈속에 세계가 있는 것 같지만 실재로는 분명히 없지 않습니까. 수중월(水中月)이라, 호수 속에 비친 훤한 달, 분명히 달은 보이는데 사실 호수 속에는 달이 있지 않듯이 말입니다.

 그와 똑같이 나요너요 내것이요 하는 것이 사실로 봐서는 없는 것입니다. 김아무개 박아무개 모두가 다 가상(假相) 가명(假名)인 것입니다. 모양이 없거니 이름도 역시 가짜에 불과 합니다.


 마치 개란 놈이 못(池) 가운데 비친 자기 그림자보고 짖어대고 앞발을 들어 발악을 하듯이 우리 중생들은 자기 번뇌(煩惱) 가지고 스스로 성내고 스스로 사랑하고 하는 것입니다.

 본래 내가 없거니 내가 없는 그 사실의 자리에서는 사람도 이름도 없습니다. 내 것도 내 몸뚱이도 없습니다. 이렇게 알고 사업도 하시고 공부도 하시고, 이렇게 알고 도(道)도 닦고 그래야 우리 부처님 공부가 빠르단 말입니다. 이렇게 아는 것이 이른바 반야바라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