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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마음의 고향

제22집 2.금강심론 특별대법회 2부

 

 Ⅱ. 금강심론 특별대법회 2부



* 본 법어의 글은 동영상 자막 작업용으로 문자화했기 때문에 큰스님의 구어체(口語體) 말씀을 그대로 옮겼습니다. *


  금강심론(金剛心論)에 대해서는 그전에 태안사(泰安寺)에서 일주일동안 주야로 특별법회를 했습니다. 주야로 아침에는 좌선하고, 밤 두 시간까지 해서 하루에 오전 두 시간, 오후 두 시간. 그렇게 한 것을 그냥 주마간산(走馬看山) 격으로 이렇게 두 시간동안에 하려고 하니까 여러모로 아무래도 소홀 할 수밖에는 없고 중점적으로 인제 말씀드릴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께서 주의하셔야 할 것은 그 각 성인(聖人)들, 성인이라는 것은 내내야 우주의 본래면목(本來面目)자리, 자기 자성(自性), 불성(佛性) 자리를 깨달은 분이 성인 아닙니까.

 예수나 또는 마호멧이라든가 또는 소크라테스라든가, 그런 성인들 마음은 절대로 두 마음이 아닙니다.

 진리(眞理)를 똑같이 깨달았으니까 물론 깨닫는데 있어서 보다 더 깊고 옅은 것은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우주의 그 본래면목(本來面目)자리, 본래 진리자리 바꾸어서 말하면 우리 마음의 본성(本性)자리, 불성(佛性)을 깨달은 것은 결국은 똑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들이 그때그때 시대 상황 따라서 조금씩 차이 있게 표현했다 하더라도 그분들 그  기본적인 진리 내용은 조금도 차이가 없다는 것을 우리가 생각한다 할 때는 마땅히 종교적인, 오전에도 말한바와 같이 그런 국집주의(局執主義) 그 교조주의(敎條主義, dogmatism) 그런 집착은 안해야 됩니다.

 따라서 그 간디(Mohandas Gandhi:1896-1948)의 말마따나 참다운 기독교인은 동시에 참다운 힌두교인이 될 것이고 또는 불교인이 될 것이고, 또는 참다운 불교인은 동시에 참다운 기독교인이 되고 또 힌두교인이 된다고 우리가 봐야 됩니다.

 그런데서 저도 말씀을 할 것이고 여태까지 여러분들께서 그 집착(執着)을 한 그런 마음을 여인 정말로 우리 본래면목(本來面目)이 한도 끝도 없이 무량무변(無量無邊)한 것이니까 무량무변한 그 자리로 다 돌려서 열린 마음으로 지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부처님 눈으로 보는 바로 그 자리가 우주의 실상(實相)을 바로 봅니다. 우리 중생들이 보는 것은 하나의 사실은 사견(邪見)에 불과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 중생은 상대적인 견해를 면치를 못해요.

 모든 존재의 본래(本來) 성품(性品)자리를 봐야 바른 견해가 되는 것인데 우리 중생들은 성품을 보지 못하고 상(相)만 봅니다.

 그 상이란 것은 우선 나라는 상, 너라는 상입니다. 그 상은 원래 있는 것이 아니예요. 금강경에 있는 바와 같이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 꿈이 사실이 아니듯이 또는 거품이 사실이 아니듯이 우리가 느끼는 우리가 느끼는 나(我)라는 관념이라든가 또는 대상적으로 봐지는 너라는 것이라든가 좋다 궂다 예쁘다 밉다하는 그런 모든 것이 실은 사실이 아닙니다.

 부처님 말씀은 진어(眞語)라, 진리만을 말씀하시고 또는 여어(如語)라, 여법히 항시 법대로 말씀하신단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모두가 비었다 하면 사실이 빈 것입니다. 우리 중생이 집착이 많으니까 집착을 떼라고 해서 방편으로 비었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일체(一切)가 다 유심조(唯心造)라, 모두가 다 마음뿐인 것이지 물질이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중생의 가장 그 고약한 삿된 견해가 무엇인가 하면 물질이 우리 중생 느낀 그대로 사실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질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때는 일체유심조라는, 모두가 마음뿐이라는 그 말씀이 잘못된 것이 되겠지요.

 물질은 없는 것입니다. 물질이 없단 말입니다.

 현대 물리학이 나오지 않을 때는 물질이 없다는 소식을 어떻게 증명을 잘 못해요. 밖에 산이 있으면 산이 분명히 있고, 물이 있으면 물이 분명히 있고 이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한테,

 물리학적으로 분석하고, 분석해서 나가다 보면 결국은 모두가 비어버립니다.

 분석해나가다 보면 결국은 나중에는 원자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원자는 무엇인가? 원자는 원자핵을 중심으로 해서 그 주위를 전자가 빙빙 돌고 있단 말입니다.

 우리 지구가 태양을 도는 이치나 사람의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그런 전자가 원자핵을 도는 이치나 이치가 다 똑같습니다.

 그러면 물질의 가장 미세한 원자나 전자나 그런 것은 무엇인가?

 그런 것을 분석해놓은 것을 보면 결국은 소립자(素粒子)라, 온 우주에는 그 소립자라 하는 장에너지가 충만해 있습니다. 전자기장(電磁氣場, electromagnetic field) 또는 중력장(重力場, gravitational field) 강력장(强力場), 약력장(弱力場),

 그러면 그런 장場은 무엇인가? 장은 소립자를 말하는 것인데 소립자란 것은 다시 또 분석할 수 없는 가장 미세한 것입니다. 그런 것은 순간순간 일어났다 없어지고 일어났다 없어지고 서로 바꿔지고 그럽니다.

 그래서 하이젠베르크(Werner Karl Heisenberg 1901-1976)가 말한 바와 같이 불확정성 원리(不確定性原理)라, 끝에 가서는 결국은 무엇이 무엇인지 몰라 버린단 말입니다. 그 운동도 위치도 어떻게 측정할 수가 없습니다. 확정할 수가 없습니다.

 확정할 수가 없다는 것은 결국은 모두가 다 공(空)이라는 것이나 똑 같은 도리예요.

 그 현대 물리학이 우주란 것은, 물질이란 것은 결국은 그야말로 본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까지 어렴풋이 나와 있으나 그러면 물질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건 물리학은 모릅니다. 왜 모르는가 하면 물리학이란 것은 시간성 공간성이 좀 있어야 어떻게 무엇이라고 이름 지을 수가 있는 것인데 시간성도 공간성도 없으니까 이름 지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결국은 다 공(空)입니다. 물질은 원래 없는 거란 말입니다. 없는 것을 우리 중생이 착각(錯覺)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무것도 없는 것인가, 앞서 오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내 마음이 지금 아, 형체가 없지 않습니까. 없으나, 내가 생각하니까 내 마음이 분명히 있단 말입니다. 내 마음이 분명히 있듯이 물질도 무엇인가는 있는데 결국은 모양이 없단 말입니다.

 모양이 없이 참말로 있는, 시간 공간성으로 있지 않고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으로 참말로 있는 그것이  말하자면 불성(佛性)입니다. 그렇다고 생각할 때는 이 눈에 보이는 것 모든 것은 결국은 다 그와 같이 허망한 것이고, 본래 없는 것인데 참말로 있는 것으로 꽉 차있습니다.

 우주는 불성으로 꽉 차 있습니다. 다시 바꾸어서 말하면 우주는 부처님뿐입니다.

 너를 보나 나를 보나 자기 아내를 보나 자기 아들을 보나 뭘 보나 다 부처라고 봐야 비로소 바로 보는 것입니다.

 이런 도리가 불교적인 술어로 말하면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이어요.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이라. 불교 모두를 다 총합해서 하나의 진리로 포괄한 진리입니다.

 그래서 우리 불자님들이 다른 것은 좀 모른다 하더라도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을 알아버리면 항시 마음이 안심이 되고 편합니다. 우주는 사실 바로 보면 다른 것이 없이 모두가 다 부처님뿐입니다. 하나님 눈으로 보면 하나님 뿐이고…,

 부처님께서 보시는 것이 바로 보는 것인데, 부처님께서 보신다고 생각할 때 모두가 다 부처님뿐입니다.   누구를 미워하고 좋아하고 싫어하고 그럴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 중생의 지지리 잘 못난 사견 때문에, 삿되게 망상분별해서 스스로 괴로워한단 말입니다.

 금타선사님을 위대하다 하는 것은 그런 도리를 극명하게 잘 밝히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공부해나갈 것을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과거 숙세부터서 업(業)을 너무나 많이 지었습니다.

 남 좋아하는 업, 남 싫어하는 업, 그런 업을 잔뜩 지어 놓으니까 그런 업을 일조일석에 다 없앨 수가 없습니다. 오랫동안 닦아야 한단 말입니다.

 오랫동안 닦기 위해서는 깊은 삼매(三昧), 깊은 명상(瞑想)에 들어야 돼요, 그래야 찌꺼기가 녹아납니다. 그런데 깊은 명상에 들어가고자 하여도 누구나 저마다 다 드는 것이 아니어요.

 철저한 계율(戒律)이, 철저한 도덕률(道德律)이 있어야 됩니다. 아무렇게나 먹고 아무렇게나 이성관계해서 명상에 드는 것이 아니어요.

 그러기에 부처님 가르침은 어느 때나 계율(戒律)과 선정(禪定)과 지혜(智慧)의 계정혜(戒定慧) 삼학도가 항시 근본이 됩니다.

 우리는 지금 욕계(欲界)에 있습니다. 잘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아,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얼마나 전생에 우리가 좋은 일을 많이 해서 사람으로 태어나서 이와 같이 축복을 받고 살지 않는가? 그렇지만 사람 사는 지금의 우리 세계가 그렇게 높은 차원이 아니에요.

 욕계(欲界)가 있는가 하면은 보다 더 차원 높은 색계(色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보다 더 차원 높은 무색계(無色界)가 있습니다.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의 번뇌를 다 떼어버려야, 욕계(欲界) 번뇌, 색계(色界) 번뇌, 무색계(無色界) 번뇌를 다 떼버려야 우리 본성,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로 우리가 들어갑니다.

 따라서 싫든 좋든 간에 우리 본래의 자리, 본래 고향 자리는 부처의 자리 아닙니까. 우리 고향에 가려면 싫든 좋든 간에 우리가 그 지지리 못난 욕심(慾心)은 털어버려야 돼요.

 욕심가운데서 가장 무서운 것은 무엇인가? 먹는 욕심, 이성 욕심입니다. 식욕(食慾)과 남녀 이성간의  음욕(淫慾)이란 말입니다.

 그 고속버스 타고 다니면서 휴게소에서 보면 이십대 부부, 삼십대 부부, 사십대 부부 들을 많이 봅니다. 많이 보면서 그 별로 잘난 남편도 아닌데 그렇게 이쁜 아내도 아닌데 그들을 보면 그렇게도 서로 좋아하는 아 저런 사람들이 앞으로 어떻게 욕심을 털고서 공부를 할 것인가? 이렇게 생각해 본 적이 있어요.

 우리 재가 불자님들도 당연히 부부 내외관계가 되시겠지요. 그러나 서로를 꼭 도반으로 알으셔야 됩니다. 어느 때인가는 헤어질 것, 헤어질 때는 평소에 너무나 집착하게 되면 필요 없는 그야말로 이별에 있어서 슬픔도 더 깊어질 것이고 상처도 더 받을 것이고, 충격도 더 크게 느끼실 것입니다.

 최선으로 서로 피차 친절을 다하고 하나의 동지애로 해서 우리가 사귄다고 생각할 때는 어느 때 이별이 온다 하더라도 당연히 이별은 오고 마는 것이니까, 생이별도 오고 죽어서 이별도 오고, 의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오전에 제가 이른바 암중모색(暗中摸索)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한 중요한 가르침을 타일러 주신 분이 금타선사님의 가르침이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다 있는 것인데, 너무나 번쇄(繁衰)하니까 사람들이 별로 참고로 하지 않았지요.

 그러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우리가 공부해 나가는 그런 차서(次序)에 대해서 별로 사람들이 관심을 안두고 있어요. 안두고 있으니까 이제 자기가 지지리 공부하여도 더 나아 갈수가 없습니다.

 원래 법희선열(法喜禪悅)이라, 공부란 것은 틀림없이 그때그때 마음도 개운해지고 행복감도 느끼면서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공부는 그냥 아무런 공덕(功德)없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나가면 한 걸음 나간만큼 우리 행복이나 기쁨도 더해지는 것입니다. 이익 되고 기쁨이 동반되는 것입니다.

 그러는 것인데, 그와 같이 조금 기쁨이 오고 마음이 열리면 내가 지금 공부가 상당히 되고 있구나 이렇게 착각(錯覺)을 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어느 누구나 다 올 수가 있는 것이고, 그런 것이 한 번 두 번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그때그때 공부해나가는 그런 위차(位次)를 모르면 착각을 합니다.

 착각하면 교만심(驕慢心)이라든가 불교전문술어로 증상만(增上慢)이라, 미처 공부가 안되었는데 되었다 하는 것, 어느 경계에 이르지 못하고 이르렀다고 하는 것 보고 증상만이라고 그래요. 증상만(增上慢) 되면 그때는 공부가 다시 안 됩니다.

 그 아만(我慢)이라는 것은 굉장히 그것이 무서운 것이여요. 결국은 자기 스스로 무던히 공부가 되었다고 이러니까 이제 더 나갈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고 동시에 어느 누구나 다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꼭 호법선신(護法善神)이 딱 따릅니다. 출가한 사람들은 출가 하자마자 호법선신(護法善神)들이 지키고 있어요.

 그래서 열심히 공부할 때는 호법선신(護法善神)도 더불어서 우리하고 같이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교만심을 낸다든가, 이상한 야릇한 짓을 하면 그때는 호법선신(護法善神)이 떠나버립니다.

 그러니까 불자님들은 재가불자나 출가불자나 다 부처님을 독실히 믿고 계시니까. 나한테는 지금 호법선신(護法善神)이 지키시고, 내 행동을 지금 감시하고 있다, 이렇게 느끼셔야 되요. 분명히 그러하니까 말입니다.

 호법선신 뿐 아니라 무수한 귀신들이 이 공간 속에 꽉 차있습니다. 우리 행동을 다 감시하고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끄러운 짓을 하면 호법선신(護法善神)들이나 귀신들이 좋게 보겠습니까.

 금타선사(金陀禪師)님을 우리가 위대한 분이라고 보는 것은 분명히 견성오도(見性悟道)한 분이니까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어디에 있는가? 증거 없이는 누구든 믿을 수가 없겠지요. 자기 스승이라든가 자기 문중 어른들을 정도이상으로 우상시 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허나 금타선사님은 천안통(天眼通)을 분명히 하신 분이고 숙명통(宿命通)을 분명히 하신 분이고 누진통(漏盡通)을 분명히 하신 분입니다. 우선 숙명통 하신 것은 직접 제가 듣지는 않았지만 그 어른의 여러 가지 기록으로 해서 알 수가 있고, 또 천안통을 하신 것은 금강심론(金剛心論)에 의해서는 분명히 다 증명이 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천안통을 안했으면 우주를 하나의 체계로 아주 정밀하게 수치(數値)로 묶을 수가 없습니다.

 태양(太陽)의 내용은 어떻게 되고, 금성(金星)의 내용은 어떻게 되고, 또 우리 지구(地球)의 내용은 어떻게 되고, 그런 것을 모두 다 수치로 표현을 했어요.

 그리고 물질이란 것이 순수 생명으로부터 어떻게 해서 이루어지는가, 그런 것도 모두 다 수치로 표시를 하고,

 불교 우주관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인데, 삼천대천세계를 모두 수치화해서 증명했습니다.

 현대물리학이 미처 증명을 못하는 그런 분야까지도 다 했어요.

 전자(電子)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또는 원자핵(原子核)과 양자(陽子)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런 원자의 구성되는 이유도 다 말씀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요즈음 이른바 모든 장(場,field)에너지 아까 제가 소립자(素粒子,elementary particle)로 구성된 우주에는 말하자면 근본에 가서는 아주  순수한 물질 에너지가 충만해 있다는 말씀을 드렸지요.

 그런 모든 장에너지를 이 통일시키는, 아인슈타인같은 위대한 분들이 이른바 통일장(統一場)이라. 통일장을 찾으려고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찾을 수가 없어요.

 즉 그런 단계는 인간의 시간 공간 안에 있는 그런 견해로 해서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불교우주관의 술어로 해서 금진(金塵), 금륜(金輪)이란 술어가 있어요.

 금진 금륜 이것은 일반물리학에는 없습니다. 불경(佛經)에는 있어요.

 특히, 금타선사님께서는 그와 같은 금진 금륜도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것이 말하자면 모든 에너지의 장을 통괄하는 이른바 통일장(統一場)이라고 저는 생각을 헙니다.

 왜 그런가 하면 금진이나 금륜 이것은 물질이라고 할 수 없지만 모든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미세한 근거란 말입니다.

 따라서 금진이 어떻게 선회(旋回)하는가, 어떻게 도는가에 따라서 이른바 전기(電氣)가 되고 자기(磁氣)가 되고 합니다.

 금강심론(金剛心論)에 보면 좌선금진(左旋金塵)이 수진(水塵)이요, 우선금진(右旋金塵)이 화진(火塵) 이라, 그런데 수진(水塵)이란 이것은 원자 핵 체를 말하는 것이고 화진(火塵)이란 것은 전자(電子)를 말합니다.

 그리고 불교우주관이 삼천대천세계인데, 삼천대천세계는 현대적인 체계로 풀이한다고 생각할 때는 이른바 팔십억 우주에요.

 팔십억 우주라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이 태양계 같은 우주의 팔십억 배란 말입니다.

 우리가 이 태양계만 생각해도 상당히 놀랄 만큼의 크기가 아닙니까? 태양을 중심으로 해서 지구라든가 인제 각 달이라든가 각 위성이 이렇게 돌고 있는데,

 이런 태양계 같은 즉 말하자면 하나의 작은 우주가 팔십억 개가 있는데, 팔십억 우주가 그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 팔십억 우주가 무량무변(無量無邊)입니다. 천지 우주란 것은 그와 같이 한도 끝도 없습니다.

 그런 체계를 금타선사님께서 다 세우셔서 앞으로 두고두고 물리학적으로 연구를 하실 분들도 어렵다고  말으시고, 여기에 있는 수치는 이른바 불교말로 하면 이른바 태장계(胎藏界)수치라,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수치기 때문에 일반적인 그런 형이하학적인 그런 물리학적인 그런 수치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다르기 때문에 그렇게 알고 공부를 하시면 좀 난해한 것이 풀이가 됩니다.

 또 수묘게(數妙偈)라, 가사 수묘게란 것은 일부터 십까지의 그런 수치에 대해서 나온 하나의 원리를 풀이한 것입니다.

 가장 우리한테 우리 공부인들한테 중요한 것은 그런 수치적인 문제나 그런 것은 학자 분들이나 그런 쪽으로 관심이 계신 분들이나...

 현대가 이른바 산업사회시대이고 또 모든 물질과학이 발달되어 있어놔서 또 그런 분야를 생각할 때는 우주론적인 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얼핏 윤곽만 얘기했습니다마는.....

 역시 우리 공부인 들한테 있어서는 수행론(修行論) 문제가 가장 중요합니다. 내 스스로가 지금 현재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할 것인가?

 어떻게 공부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또는 성불할 수 있는 지름길이 될 것인가?

 보리방편문(菩堤方便門)은 육조단경(六祖壇經)의 수행론을 그대로 계승했습니다.

 10년 전 쯤, 제가 태안사에서 얘기할 때는 금타선사님의 그런 보리방편문(菩堤方便門)이 육조단경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라고 미처 몰랐어요. 몰랐는데 그 뒤에 여러 가지 경험이라든가 또는 나름대로 명상도 하고 해서 나중에 보리방편문(菩堤方便門)이 육조스님의 수행법을 그대로 말씀한 수행법이란 것을 알았습니다.

 육조 혜능스님께서 가신 지가 1300년의 세월이 경과가 됐는데 육조 혜능스님 법을 그대로 계승한 분이 역시 금타선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제 말씀을 들으시고 육조단경을 다시 보시고서 육조단경 가운데 귀의삼신불(歸依三身佛)이라는 대목과 금강심론(金剛心論)의 보리방편문(菩堤方便門) 대목을 대조해 보시면 과연 그렇구나, 생각이 되실 것입니다.

 금타선사님이 성자가 아니라고 생각해 버리면 그때는 할 수가 없지요. 믿음이란 것은 자유인 것이니까 할 수 없다 하더라도 분명히 천안통을 했다고 생각이 되고, 분명히 누진통을 했다고 생각이 되고, 또 맨 처음에 깨달을 때 나오는 숙명통을 했다고 생각한다면 분명히 도인이지요.

 도인의 증거가 삼명육통(三明六通)을 말씀 했지만 우선 삼명통은 꼭 해야 비로소 참다운 깨달음을 얻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삼명통은 아까도 말씀한바와 같이 숙명통은 과거 전생을 자기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까지도 포함해서, 다만 몇 생뿐만 아니라 무시이래(無始以來)의 무수만생동안의 과거를 다 아는 지혜입니다.

 천안통은 미래를 포함해 우주의 모든 존재를 그냥 투시해서 다 아는 것입니다. 미래를 다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천안통입니다.

 누진통은 우리 번뇌를 없애는 수행방법을 모두 다 통달한단 말입니다. 그것이 이른바 누진통입니다.

 따라서 어느 누구든지 깨달았다고 하면 틀림없이 그와 같이 숙명통이 나오고 또는 천안통이 나오고, 누진통이 나와야 이른바 참다운 이른바 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짓 도인은 어떻게 될 래야 될 수가 없습니다. 증거가 있으니까, 따라서 이런 것을 마음에 두고서 우리 스스로도 틀림없이,

 우리는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달마스님이나 육조 혜능스님이나 또는 금타선사님이나 모두 다 우리 마음이나 똑같습니다.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집착해서 미처 공부를 안 해서 깨닫지 못할 뿐이지 깨닫지 못한 단계에도 마음의 역량은, 성품은 똑같습니다. 결국 상(相)에 있어서만 우리가 미처 못 닦고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지금 닦아나가는 과정, 이른바 위차를 구체적으로 말하면 금강심론(金剛心論)에 있는 십육해탈지(十六解脫地)입니다.

 십육단계로 위차를 밟아서 가는 것인데, 십육해탈지 이것은 어느 한 가지 경론(經論)만 참고로 한 것이 아니라, 유심론 또는 화엄경, 대승, 소승, 밀교, 현교 모든 경론(經論)을 다 망라해서 십육단계로 우리 수행차서(修行次序)를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여러 가지 다른 유심론을 보나 무엇을 보나 그런 경론(經論)에는 경론대로 해서  수행하는 단계가 있어요. 그러나 이런 것을 다 망라했을 뿐만 아니라 인용하고 체계를 세워놨기 때문에  십육해탈지를 본다고 생각할 때는 결국은 다른 경론(經論)에 있는 수행론까지도 충분히 다 참고로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또 지금 일반 불교학자분들이 대체로 체계를 세워 놓은 것을 보면 존경스럽고 그 작업도 훌륭한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참선이라는 것은 실지로 닦아야 되는 것인데 마치 우리가 수영을 배울 때 물에 가서 배워야지 육지에서 수영을 배우면 제대로 배울 수가 없듯이 참선이라는 것은 스스로 참선을 많이 하고 또 하는 사람이 결국은 그야말로 그걸로 해서 자기가 느끼고 닦고 그래야 납득이 될 문제 아닙니까. 그런데 명상 가운데 최상의 명상이 참선 아닙니까. 참선에 들어가려고 하면 쉽지가 않아요.

 이른바 사선근(四善根)이라, 사선근을 다른 말로 하면 사가행(四加行)그래요. 사선근은 사선정(四禪定)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인제 닦는 것입니다.

 우리가 범부가 사선정에 그냥 비약적으로 막 들어가지는 못합니다. 점점 닦아가다가 어느 정도 기초가 되어야 사선정 들어갑니다.

 사실은 사선정(四禪定), 사공정(四空定), 멸진정(滅盡定) 이것을 구차제정(九次第定)이라, 이 아홉 단계의 선이라 그래서 이것을 기본선 또는 근본선 그러는 것인데,

 거 당장 여러분들이 그런 선을 닦아나가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그래도 하여튼 우리가 성불의 길이니까 여러분들이 신심이 사무치면 비약적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에머슨(Ralph W Emarson 1803-1882)의 말씀과 같이 우리 마음이라는 것은 언제나 비약할 수가 있어요. 우리 신심이 사무치면, 어느 순간에도 우리는 비약할 수가 있습니다. 바이블(Bible)을 보면 예수께서 이런 말씀을 했어요. 「그대들이 조금도 빈틈없는 신앙심이 있다고 생각할 때는 죽은 사람들한테 ‘그대, 꼭 살아나라’ 그러면 살아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사실 자기가 증명을 다 했어요. 「라자로」라고 「마리아」의 동생이 죽었는데, 죽어서 파묻어서 사흘이나 됐는데 예수님이 어디 갔다 오니까 마리아가 아주 간청을 해요. 주여, 제 동생이 죽었으니 꼭 살려달라고 말입니다.

 죽은 사람을 어떻게 살릴 것입니까마는 예수님은 그 무덤 앞에 가서 한참동안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것은 하나님하고 자기의 마음이 조금도 빈틈없게 밀착하는 그런 순수한 기도가 되었겠지요.

 그렇게 모셔가지고 장엄한 음성으로 라자로야, 일어나라 그렇게 몇 번 하니까 라자로가 정말로 몸이 묶인 채로 벌떡 일어났단 말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묶은 끈도 다 끊어져 걸어갔다는 것이 기록에 있습니다.

 일반사람들은 그런 것은 단순히 하나의 기적(奇蹟)으로 과시한 것이다. 이렇게 그냥 쉽게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가 참말로 신앙심이 있다고 생각할 때는, 조금도 빈틈없이 자기가 온전히 진여불성(眞如佛性)이 되었다고 생각할 때는 그런 기적을 충분히 부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 경전을 보면 부처님께서 행하신 신통묘지(神通妙智)가 얼마나 많습니까. 부처님께서 그냥 우리한테 방편으로 보이기 위해서 그렇다, 이렇게 간단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마는 그렇지가 않아요.

 우리의 본성품인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는 사실은 만능(萬能)의 자리입니다. 모두를 다 할 수 있고, 모두를 다 알 수가 있는 자리입니다.

 우리 마음은 그렁저렁한 것이 지금 아닙니다. 명문학교도 안나오고, 또 비록 깊은 명상을 안했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에 잠재해 있는 내재해 있는 능력은 결국은 석가모니나 예수나 똑같습니다.

 어느 순간도 우리는 비약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 제자 앙굴리마라는 구백구십구인이나 죽인 잔인무도한  사람입니다. 한 사람만 죽여도 그것이 무시무시한 업장인데, 구백구십구명이나 죽였어도 석가모니 부처님 만나가지고서 마음 돌이키니까 아라한(阿羅漢)과를 성취했습니다. 아라한과는 도인(道人)입니다.

 우리 불교라는 것은 그와 같이 어느 순간 비약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지지리도 못살았다 하더라도 지금 딱 마음을 바로 먹고서 스스로 지금 내 마음이 석가모니 마음이나 예수 마음이나 공자 마음이나 다 똑같은 마음이다, 진여불성(眞如佛性)이다, 청정 무비한 본래면목(本來面目)이다. 이렇게 온전히 100% 믿는다고 생각할 때는 무엇이든 다하는 것입니다. 신통도 부리고, 또는 모르는 것도 없고 말입니다.

 현대는 원자력시대 아닙니까. 원자력이 얼마나 무시무시합니까. 컴퓨터나 뭐나 참 기기묘묘한 재주를 다 부리지 않습니까. 그런 것도 모두가 다 따지고 보면 밑에 가서는 다 진여불성(眞如佛性)이에요.

 천지 우주는 진여불성이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 진여불성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지녀야 할 가장 바른 견해, 가장 행복스런 견해, 옳은 견해는 무엇인가 하면 어느 것도 모두가 다 부처로 봐야 된단 말입니다.

 자기 아내를 봐도 아내이기 이전에 다 부처님이고 말입니다. 부처님이 잠시간 그와 같이 인연 따라서 아내라는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친구를 보나 누구를 보나 아무리 미워하는 사람도 똑같이 결국은 조금도 어김없는 부처란 말입니다.

 그렇게 봐져야 참다운 정견(正見)입니다. 그렇게 보지를 못하는 것은 다 사견(邪見)이에요.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다 몽환포영(夢幻泡影)이라,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것 때문에 몽환포영 때문에 슬퍼하고 울고불고 인제 우리가 그때그때 자기 스스로 신세한탄하곤 한단 말입니다.

 부처님 법은 우리 마음을 편안히 하는 안심법문(安心法問)입니다. 부처님 법에는 조금도 우리를 그늘지게 하는 법문은 없습니다. 모두가 다 원만한 부처님 얼굴같이 원만한 법문입니다.

 이른바 참선해서 깨닫는 방법이, 기본적인 참선이 구차제정(九次第定)입니다. 아홉 차원인데 이른바 사선정(四禪定), 사공정(四空定), 멸진정(滅盡定) 그래요.

 사선정은 네 차원의 그런 선정에 드는 것이고, 사공정은 그 보다도 한 차원 더 높여서 무색계를 관조(觀照)하는 삼매(三昧)입니다.

 멸진정은 우리 범부중생의 번뇌를 모조리 다 없애는 그런 삼매가 멸진정입니다. 멸진정이 돼야 비로소 우리가 참다운 성자의 영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금생에 그렁저렁 하다 보면, 저와 같이 팔십 세가 되면 그야말로 처량하지요. 팔십이란 참 무서운 나이입니다. 무서운 나이지만 부처님께서 팔십에 가셨고, 제가 존중하는 그리스 철인인 플라톤도 그 나이에 갔어요.

 또 인광대사라고, 중국 대만의 위대한 분이 있습니다. 그분도 팔십세에 가셨고 해서 내가 그 분들 나이에 가게 되면 영광이지요.

 한편으론 내가 참회가 되겠구나, 그렇게 자기 위안도 합니다. 그런데 그 인광대사는 인격이 굉장히 고매하신 분입니다.

 그이는 계행도 아주 청정하고 모두를 다 중생을 위해서 회향하신 자기 이름을 상참괴승(常慙槐僧)이라, 그러니까 항시 자기를 부끄러워하고 뉘우치고 그런 중이란 뜻이지요.

 저 같은 사람도 삼년 결사도 몇 번하고 애쓰고 살았지만 지금 회고해 보면 ‘그때 좀 잘했으면 될 것을...’하고 뉘우칩니다. 부처님 법문은 누구나가 다 그대로만 닦으면 꼭 되는 것입니다. 제대로 닦지를 못하니까 지금까지도 확철대오(確澈大悟) 못하고 아직도 범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바로 사신분도 상참괴승이라, 항시 부끄러워하고 뉘우치는 중이란 뜻인데, 저 같은 사람들도 중생들한테, 중생들의 빚더미 속에 지금까지 살았단 말입니다.

 옷 입는 것이나 먹는 것이나 모두가 다 중생들을 위해서 크게 도움도 못되면서 아주 빚더미 위에서 살아놔서 그야말로 참 한도 끝도 없이 참괴를 느낍니다.

 여러분들은 저 같이 나중에 나이 들어서 후회를 안 하시도록, 후회를 않도록 사는 것은 간단명료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정견(正見) 그대로 살면 됩니다.

 기독교인들 같으면 마땅히 어느 것이나 모두가 다 하나님 아님이 없다는 그런 생각을 해야 할 것입니다.  바이블(Bible)에도 이런 대문이 있어요. 예수님께서 일반 신도들한테 ‘너희들은 저 하늘에 계시는 주님같이 온전한 사람이 되어라’고 말씀했습니다. 온전한 사람은 무엇인가, 진리에 맞는 진리 그대로 사는 사람이 온전한 사람입니다.

 공자의 논어에도 소중한 말씀이 굉장히 많지 않습니까. 성자의 말이란 것은 모두가 다 옳습니다.

 우리 중생의 쥐꼬리만한 지식 가지고서 그런 성자를 함부로 논해서는 안 됩니다.

 성자들은 우선 진리를 바로 깨달은 분들이니까 그때그때 사정 따라서 다르게 표현이 됐다하더라도 우선 저분들 말씀은 다 옳거니, 이렇게 전제를 해놓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 우리가 불교를 믿는다고 해서 불교만이 최상인 것이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면 이것도 한 가지 법집(法執)입니다.

 우리 수행법도 그래요. 염불(念佛)을 하는 사람들은 염불만 최고고 다른 것은 별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아요.

 부처님께서나 성인들, 조사스님들께서 말씀한 수행법은 다 옳습니다.

 화두공안을 의심하는 것이나 또는 묵조하는 것이나 염불이나 다 옳습니다. 다만 그 마음 태도가 문제입니다.

 어떻게 문제가 되는가 하면 가령 우리가 화두공안을 의심한다하더라도 화두공안이라는 것은 그 부처님 도리, 불성(佛性)을 떠나지 않아야 참다운 공안이란 말입니다.

 가령 ‘이뭐꼬’라든가 또는 ‘무(無)’자라든가 그 원리가 어디에 있는고 하면,

 그 부처님이 무엇인가? 부처님 도리에다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에다 우리 마음을 두고서 불성(佛性)을 찾는, 불성을 찾는 방편으로 해서 ‘이뭐꼬’가 생기고 ‘무’자가 생기고,

 불성(佛性)이 무엇인가? 그러니까 ‘이뭣고’라고 해야 되겠지요.

 모든 의단이나 모두가 다 진여불성을 찾기 위해서 그때그때 편의적으로 나온 것이지, 그것이 다른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가령 우리가 염불선(念佛禪)이다 하면 염불선을 잘 모른 사람들은 염불선을 갖다가 부처님 당시나 그 뒤에는 별로 없던 것을 청화(淸華)가 만들었다든가 그래버리면 그것이 큰 탈이지요. 저 같은 사람은 그런 무슨 한 선을 만들만큼 그렇게 출중한 사람이 아닙니다.

 염불선이란 것은 아까 말한 바와 같이 육조혜능스님 선법이 바로 염불선입니다.

 또 사조 도신스님 수행법이 바로 염불선입니다.

 우리 마음에서 진여불성(眞如佛性)을 안 떠나고 염불하면 다 염불선입니다.

 여러분이 지장보살을 외고, 또는 관세음보살을 염하시고 한다 하더라도 우리 생명의 본체, 우주의 본 바탕자리인 불성(佛性)을 떠나지 않고 하면 그것 모두가 참다운 염불선입니다.

 원래 참선이란, 묵조선 즉 말하자면 아무런 무슨 의단이 없이 잠자코 명상하는 묵조선이나 또는 화두공안을 의심하는 공안선이나 부처님 명호를 외는 염불선이나 모두가 다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를 떠나지 안해야 되요. 진여불성자리를 떠나면 참선이 아니어요.

 참선과 일반 공부와의 차이는 무엇인가 하면, 일반 공부도 근원은 똑 같지만은 화두를 하건 묵조를 하건 또는 염불을 하건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우리 생명의 본래면목(本來面目) 자리를 떠나지 않으면 다 참선입니다.

 설사 ‘이뭐꼬’ ‘이뭐꼬’ 애쓰고 땀을 흘리면서 선방에서 애쓴다 하더라도 진여불성(眞如佛性)을 떠나면 그때는 참선이 못돼요. 그렇게 되어야 쓰겠지요?

 당연히 본래의 자리를 안 떠나면 ‘똥막대기’를 부르나 뭘 부르나 그때는 모두가 다 참선이란 말입니다. 이름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마음이 존재의 실상(實相)자리를 안 떠나면 돼요. 제법(諸法)이 실상(實相)이라. 모두가 다 바로 보면 그때는 실상(實相)이 아님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참선 공덕(功德)은 참선하는 것은 그냥 애만 쓰고 아무런 소득도 없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깨달을 때에야 활연대오(豁然大梧)해서 다시없는 위없는 행복을 느끼겠습니다마는 깨달은 뒤에 뿐만 아니라 우리가 공부해 나갈 때도 한 걸음 가면 한 걸음 간만큼, 우리 마음이 조금씩 열려 가면 열려 간만큼 마음도 개운하고 몸도 훨씬 좋아집니다.

 사실 보통 명상공부를 한다 해도 잔병이 떨어지고 머리도 더 좋아지고 눈도 밝아진다고 하지 않습니까. 참선해서 약간 힘을 얻어 놓으면 밤새껏 눈을 뜨고 있어도 눈이 별로 피로한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라는 것은 원래 근원자리가 바로 불성(佛性)이기 때문에 불성(佛性)은 또 무한의 공덕자리, 무한의 가능성이 거기에 포괄되어 있는 자리기 때문에 우리가 불성(佛性)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진 만큼  행복감이라든가 재미라든가 건강이나 그런 모든 것이 거기에 상응됩니다.

 그래서 참선의 이름을 현법락주(現法樂住) 현공덕주(現功德主)라, 모든 공덕이 나타나는 그런 공부란 뜻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참선할 때 그냥 고통만 생각하고 아무런 거기서 얻는 것은 나중에 깨달 때 외에는 별로  없다. 그렇게 생각을 말으십시오.

 우리가 하루 닦으면 닦은 만치는 우리 마음이 불성(佛性)하고 가까워짐과 동시에 우리 행복감이나 건강이나 우리 재주나 모든 것이 거기에 따라간단 말입니다.

 이렇게 느끼고서 참선을 해야 될 것이고, 또 참선할 때는 꼭 기본적인 준비가 있어야 됩니다.

 누구나가 다 참선에 그냥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맨 처음부터 모든 준비를 다 갖추어야만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집안에서, 가령 밤에 염불도 하고 그러다가도 한 30분이나 한 시간 그렇게 앉는 버릇을 붙이면 그렇게 버릇이 차근차근 들어가면 나중에는 더 앉기도 훨썩 쉽고, 우리 마음도 그만큼 차근차근 정화되어 갑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평소에 습관성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때도 우리 마음 자세가 참선하는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참선하는 자세를 간단히 말하면 일상삼매(一相三昧), 일행삼매(一行三昧)입니다. 일상삼매란 것은 모든 것이 부처라는, 하나의 실상 외에는 없다. 천 번 만 번 되뇌어도 일체존재 모두가 다 우리 중생이 잘못 봐서 그러는 것이지 바른 정견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불성(佛性)뿐이다. 진여불성(眞如佛性)뿐이다.

 앞서도 얘기한 바와 같이 대총상법문이 그래야 됩니다. 다른 것은 없이 모두가 다 만능을 갖춘 만공덕을 갖춘 진여불성(眞如佛性)뿐이다. 이렇게 보는 것이 일상삼매고 또 그렇게 보는 것을 끊임이 없이 생각 생각에 계속해야 된단 말입니다.

 우리는 보통 그때그때 순간 생각은 더러 할 수 있지만 지속을 시키지 않지 않습니까. 기분이 좀 좋거나 환경이 개운할 때는 모르지만 시끄러운 데라든가 또는 기분이 언짢을 때는 그냥 그런 쪽으로 우리 마음이 달려가 버립니다.

 따라서 우리가 모두가 다 진여실상뿐이다. 불성(佛性)뿐이다, 하는 그런 일상삼매를 생각생각에 다른 생각이 없이 지속을 시키는 것이 일행삼매라. 그렇게 때문에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는 항시 달라붙어 있어야 되어요.

 육조 혜능스님이라든가 사조 도신스님이라든가 그런 도인들 스님 또는 이 금강심론(金剛心論)에 있는 이 금타선사님 가르침도 내내야 모두가 다 그런 쪽으로 포괄이 됩니다.

 육조단경에서 부촉품(付囑品)이라, 부촉품은 결론 같은 말씀입니다.

 부촉품에가서 ‘여러분들이 만약 부처님의 무량지혜를 알려고 하면 마땅히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공부할 지니라.’ 라고 했습니다.

 일상삼매는 천지우주가 모두가 다 진여불성 아님이 없다는 말입니다.

 진여란 것은 하나의 진리인 동시에 다른 것은 조금도 섞이지 않은 참다운 도리가 진여 아닙니까.

 그 진여라는 것은 우리 인생과 모든 참다운 진리가 진여입니다.

 또 그 자리는 하나의 도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기 때문에 불성(佛性)그래요. 불성(佛性)이란 말입니다.

 그런께 모든 그런 진리라는 것은 바로 진리만으로 해서 사변(思辨)적으로 이론에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이란 말입니다. 그런께 진여불성(眞如佛性)을 한뻔에 말합니다.

 그러므로 진여불성을 항시 놓치지 않아야 그래야 이른바 일상삼매고 일행삼매 입니다. 또는 그런 자리를 생각 생각에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자리에 이제 누울 때나 그 자리를 안 놓치면 그때는 꿈속에도 우리가 공부가 되어 갑니다.

 우리 꿈이라는 것이 과거 전생부터서 업장을 많이 지어놓으니까 우리 범부들은 별스런 꿈을 다 꾸지 않습니까. 금생에 경험도 안한 것들이 자꾸만 꿈속에 나온다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렇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잘 때까지 강인하게 우리 의지를 진여불성(眞如佛性)에다 딱 매어 놓고서 그래서 일상삼매를 하고, 또는 일행삼매로 해서 빈틈없이 우리가 저절로 자지면 잘망정 빈틈없이 하다보면 결국은 꿈속에서도 다른 꿈은 안 꾸고 부처님 공부 쪽으로 우리 진여불성(眞如佛性)이 차근차근 꿈속에 정화가 되어간단 말입니다.

 이 금강심론(金剛心論)은 장절마다 또는 구절마다 굉장히 소중한 법문입니다.

 여기에 또 그  한글 관음문자(觀音文字)란게 있어요. 관음문자란 무엇인가 하면 성자의 눈으로 봐서 모든 소리를 다 부처님 소리 부처님의 청정한 범성(凡聖)으로 봐가지고서, 모든 가사 사람 말소리라도 어떤 말소리를 하면 그 사람은 욕심(慾心)이 많고, 또 어떻게 말소리를 하면 그 사람은 진심(瞋心)이 많고 말입니다. 그 음성으로 사람의 성질을 간파할 수 있습니다. 그런 도리가 관음문자에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한글로 해서는 여러 가지로 모든 음을 다 표기하기가 어렵습니다. 어려우나 이 관음문자로 할 때는 모든 그 아주 괴상한 소리라든가 그런 한글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도 다 표현할 수 있는 관음문자의 구조가 돼 있으니까. 여러분들이 책을 받으신 뒤에 그런데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또 우리 불성(佛性)공덕이 얼마만치 위대한 것인가, 깨달은 분들이 우리가 진여불성(眞如佛性)을 우리가 견증하고 본다고 생각할 때 얼마만큼 위대한 것이 어떻게 빛나고 어떻게 위대하고 하는 것인가 하는 불성공덕을 간단히 다 여기에 말씀했습니다.

 또는 모든 것을 모든 물질을 이렇게 분석해 들어가서 나중에 진여불성(眞如佛性)까지 딱 도달하는 그런 경구도, 다만 그것이 하나의 참 불교의 도리뿐만이 아니라 다른 물리 화학적인 그런 도리와도 같이 절충을 시켰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현대적으로 따지기 좋아하고, 분석을 좋아하는 사람도 그걸 보고 있으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차근차근 불성(佛性) 쪽으로 자기가 다가서게 됩니다.

 ... 질문시간을 좀 줄려고 합니다마는 아, 시간이 많이 지났기 때문에.... 지금 책은 한 권씩 나누어 드리게 되어 있습니까?


 앞서 얘기한 바와 같이 같은 책도 깨달은 성자가 낸 책이 있고 또는 범부승들이 낸 책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보통 책을 내는 경우는 그야말로 참 그 이른바 결정설(決定說)이라, 조금도 오류가 없는 결정설을 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자가 내신 책은 결정설이라, 오류가 없단 말입니다.

 따라서 어느 구절을, 어느 장절을 펼치고 본다 하더라도 모두가 다 성불의 길로 우리 마음을 편달하는  귀중한 금옥 같은 법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다른 소설을 보듯이 일반 책 보듯이 그렇게 말으시고 그 장절마다 모두가 다  참고가 되는 것이고, 또 각 경론(經論)의 정수를 뽑아 있단 말입니다.

 가령 화엄경에서 정수는 어떤 것이고, 법화경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어떤 것이고, 또 능엄경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것이고, 그런 것을 다 여기에 중점적으로 뽑아 놓았습니다.

 또 뒤에 천문학도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이것은 도저히 천안통을 통하지 않은 사람은 어떻게 언급할 수가 없는 그런 소중한 법문입니다.

 현대는 그야말로 우주시대 아닙니까? 따라서 우주론적인 그런 문제에 있어서도 굉장히 중요한 문제예요.

 그러기 때문에 일반학자 분들이, 특히 불교학자분들이 꼭 이 금강심론(金剛心論)을 참고로 해서 자기들이 느끼고 있는 애매모호한 점이라든가 또는 수행론에 있어서 꼭 금강심론을 참고로 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반 학자 분들은 여러모로 논문 쓰기에 바쁘고, 학생들 가르치기에 바빠서 그럴 겨를이 없어서 유감스럽게 생각을 합니다.

 허나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역시 우리가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싫든 좋든 간에 꼭 삼매에 들어야 됩니다. 삼매(三昧)에 들지 않고는 부처가 될 길이 없단 말입니다.

 이치로 해서는 불성(佛性)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삼매(三昧)에 들어서 명상으로 해서 다 놓아버리고서 상당한 시일동안 물론 근기 따라서 더 빠르고 더딘 차이는 있겠습니다만 상당한 시일동안 삼매(三昧)에 들어야 됩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적어도 한 삼 년 동안은 그래도 삼매(三昧)에 들 수 있는 그런 매서운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여러분들께서도 금생에 내가 성불해야 되겠다. 그렇게 생각할 때는 가정에서 내외분 같이 지내는 경우에도 꼭 두 분이 상의해서 말입니다. 똑같이 앉아서 참선하면 그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게 동기를 삼아서 그렇게 하시고,

 또 출가한 우리 스님들도 역시 지금까지는 그렁저렁 지내왔다 하더라도, 우리 생명이란 것이 언제 갈지를 모릅니다. 저 같이 나이가 많다 그래서 빨리 가고 젊다고 해서 많은 시간이 있으리라고 장담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정말 어느새 가버립니다. 어느새 인지 모르게 가버립니다. 저 같은 사람도 그렁저렁 살았지만 그래도 함부로 먹지 않고 나름대로 함부로 살았지 않았기 때문에

 아, 지금도 허리도 꼿꼿하고 팽팽하지만 보통은 저만치도 못 산 사람들은 그렇게도 못 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께서도 주의하셔서 건전한 몸일 때에 가장 소중한일 가장 좋은 일이 우리 공부하는 일 아닙니까.

 그렇다고 해서 장사도 말고 사업도 말고 하라는 것이 아니라, 장사를 하더라도 고객도 부처로 보고, 하나의 물건을 팔드라도 다 부처로 보고 모두 다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이것보나 저것보나 모두가 부처 아님이 없다는 그런 관념으로 생활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셔서 오늘 나누어 드리는 이 책을 보고 또 보고 하십시오. 성불의 길에 있어서 순서로 해서는 지금 나온 책 가운데는 이런 책이 없습니다.

 부처님 말씀도 그래서 그 근본선을 사선정, 사공정, 멸진정인데, 이 아홉 단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사선근, 사가행지(四加行地)를 밟아야 돼요.

 그렇게 하는 것이 부처님께서 최제일(最第一) 최대(最大) 최상(最上) 최승(最勝) 최묘(最妙)라, 근본선을 닦아가는 것이 즉 말하자면 부처님 모든 팔만법문 가운데서 최제일(最第一) 최대(最大) 최상(最上)  최승(最勝) 최묘(最妙)라, 이렇게 부처님 스스로 찬탄을 하셨습니다. 제가 아함경에서 그걸, 아함경은 사아함경인데, 그런 대문을 조사해보니까 마흔 한 군데나 그런 대문이 있어요.

 얼마나 부처님께서 그와 같이 역설 강조를 하셨으면 마흔 한 군데나 그러한 법문을 되풀이 했을 것입니까.

 우리가 그걸 본다 하더라도 그런 것이 모두가 다 우리 행복과 직결됩니다. 몸도 건강해지고 호법선신(護法善神)들이 또한 더욱 더 환희심을 낼 것이고 말입니다.

 우리가 금생에 나온 것이 다만 한 발이라도 우리 본래 성품, 우리 본래 주인공 자리로 가까워지는 것이 우리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하셔서 꼭 여러분들 머리맡에 두시고서, 보고 또 보고 하십시오.

 저는 금타 선사님의 법문을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원고를 주어 모아서 정리해 한 책으로 냈습니다. 여러분들이 그와 같이 의미 있게 봐주셔야 여러분한테 좋고 그래야 저도 공덕이 되지 않겠습니까.

 꼭 금생에 대오철저大悟徹底를 하셔서 최상의 행복을 누리시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