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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마음의 고향

제21집 무아(無我)

마음의 고향 제21집


Ⅰ. 무아(無我)


 

* 불교 TV 무상사(無相寺) 개원식(2003년 4월 22일) 초청법회에서

청화(淸華) 큰스님께서 설법하신 법어입니다.


이러한 장엄 법당에서 여러 불자님들과 만난 인연에 대해서 대단히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무상사(無相寺)  낙경(樂境) 개원에 대해서 진심으로 봉축의 합장을 드립니다. 무상사가 개원 하도록 까지 성우 화상을 비롯해서 여러 동참하신 불자님들께 진심으로 치하와 감사의 합장을 올려 드립니다. 

 여러분들께서도 아시는 바와 같이 부처님 법은 망상이나, 또는 허상이나, 그러한 잘못된 상이 있으면 범부고 외도입니다. 

 그러한 허망상이 없이 참다운 실상(實相)을 깨달으면 이른바 성인이고  부처고 그러는 것입니다. 범부와 성인과의 차이는 아주 그야말로 참 부처님 사자후 같이 결정적으로 명확합니다.

그러나 본래면목 자리에서는, 본래 실상자리에서는 모두가 다 하나의 완전무결(完全無缺)한  성품의 생명뿐입니다.

그러기에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의 말씀에도‘심진여자((心眞如者) 즉시일법계(卽是一法界)  대총상법문체(大總相法門體)’라. 무슨 말인고 하면  우리 마음의 본래면목(本來面目)자리, 우리 마음의 본래면목자리는 우주의 근본 실상자리입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는 바와 같이 부처님 가르침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아니겠습니까?

 모두가 다 사실은 마음뿐이란 말입니다. 더구나 세상이 이 유물주의 풍조, 내 몸뚱이도  물질이고, 또는 우리주변에  대상적으로 보이는 모두가 다 물질뿐 아닙니까.

그 물질 때문에 싸우고 죽고 여러 가지 갈등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실은 그 물질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불자님들 그것을 명백히 느끼시기 바랍니다. 물질은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째서 존재하지 않는가. 부처님 가르침은 이유가 없이, 논리적인 철학적인 그러한 이유가 없이 그냥 덮어놓고서 이것이다 저것이 다고는 말씀을 안 하십니다. 

부처님 결정설(決定設) 이기 때문에 꼭  사실을 사실대로 그때그때 말씀을 하십니다. 

그 말씀이, 방금 제가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물질은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이와 같이 존재하고 주변이 다 물질뿐인데 왜 존재 하지 않을 것인가. 당연히 그런 의심을 품을 수가 있겠지요. 그러나 나라는 것 자체가 인연 따라서 잠시간 우리가 잘 못 느껴서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것이지 나라는 것 자체가 사실은 없는 거란 말입니다. 나라는 것을 긍정해 버리면 부처님 가르침이 못 됩니다.

외도와 부처님 가르침과의 차이도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 인고 하면 우선 나라는 것이 없다는, 없을 무(無)자 나 아(我)자, 무아(無我)로 부터 출발한다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자기평생 나(我)라는 그런 관념, 나(我) 라는 짐 때문에 끙끙 앓고 있습니다. 내가 있기 때문에 내 남편도 있고, 아내도 있고, 자식도 있고, 또는 내 재산도 있고,  모두가 나라는 관념 때문에  우리가 웃고 울고 그때그때 인제 분노로 싸우지 않습니까.

그런데 나(我) 라는 것이  잠시간 인연이 화합돼서 잠시간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것이지 실지로는 있지가 않습니다. 이른바 무아(無我)란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께서 무아라는 그런 관념에 대해서 그냥 쉽게 납득이 안 가시더라도 무아가 부처님 말씀이고 내가 있다는 것은 이것은 하나의 망념에 불과하다. 이렇게 생각하시고서 두고두고  무아에 대해서 아주  깊이 천착 하고 연구를 하셔서 정말로 무아가, 정말로 내가 없다고 생각할 때는 만사가 태평입니다.

저는 지리산  한 토굴에서 한철을 겨울에 지냈어요. 이것저것 다 뿌리치고, 남 좋아하고 싫어하는 생각 다 뿌리치고 오로지 공부만 하겠다는 그런 셈 치고, 이렇게 쌀을 물에 담가서 먹고 지내지 않았습니까마는 그러는 가운데서도, 그렇게  제 나름대로는 고행(苦行)을  했던 것인데 그런 가운데도 무아라는 관념이 사라지지가 않아요.

 좋은 사람 좋게 생각되고 싫은 사람 싫게 생각되고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냥   미친 듯이 붓으로 벽에다가 벽이 다 검을 정도로 무아 무아 무아 무아 ... 하여튼 수수 수 만 번 썼습니다.

그래도 그 아(我)라는 관념이 사라지지가 않아요. 그런다고 업장(業障)이 있는데 사라지겠습니까.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아(我)라는 생각을 떨쳐 버리지 못 하면 이것은 범부 외도입니다. 범부 외도를 여의고 무아(無我)라는 관념을 우리가 확실히 명신불지(明信佛智)라, 확실히 새기고  느끼고 또 몸으로 구현해야 그래야 참다운 참 불자입니다.

어째서 무아인가 하면 아까도 얼핏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각 인연(因緣)이 잠시간 합해져서 있는 것 같단 말입니다. 그러나 제행(諸行)이 무상(無常)이라, 재행이 무상이라는 말은 이것은 그냥 모두가 섭섭하다 슬프다 그런 감성적인 말이 아니라, 투철한 과학적이고도 철학적인 논리입니다.

제행이 무상이라, 모두가  그때그때 변화해서 마지않는단 말입니다. 똑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느 순간도 일초의 몇 천분지 일순간도 우리 세포는 그때그때 신진대사해서 그냥 변화하고 있습니다. 일초전과 일초후의 우리세포가 지금 똑 같은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느끼지 못 할 뿐입니다. 변화를 느끼지 못할 뿐인 것이지 어떤 존재나 우리가 금쪽같이 아끼는 우리 몸뚱이나 대상화 시키는 모든 존재가 다 그렇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라는 것만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 눈에 보이는 대상 모두가 너도 없고 산도 없고 물도 없고 모두가 다  바로 보면 없습니다.

그러기에  제법공(諸法空) 아닙니까. 색즉공(色卽空)이라. 색은 물질을 말하지 않습니까.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가 다 물질 아닙니까. 그러는 것이 모두가 본래 공이라 말입니다.

잘 생각을 못한 사람들은 원자로 우리가 분석하고 보다 더 미세한 소립자로 분석하고 그러면 종당에는  공이 되지 않는가. 이렇게 해서 공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분석해서 쪼개고 쪼개서 나중에 공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당체(當體)가 즉공(卽空)이라, 그대로 바로 공이란 말입니다.

우리 중생의 까막눈으로 보니까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것이지 바른 정견(正見)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당체가 즉 공이라, 색즉공이라. 색즉공은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분석해서 종당에 공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물질 그대로 공이란 말입니다.

 다만 우리중생의 지각능력(知覺能力), 우리 중생의 지각능력이 바로 보지 못해서 그럴 뿐인데....... 아까 말씀 마따나 어째서 그런가 하면 제행(諸行)이 무상(無常)이라, 모든 존재가 그때그때 변화무상한 것이고 어느 순간도 머무름이 없기 때문에 공간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제법이 공이란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아까도 말씀드린바와 같이 부처님 가르침은 철두철미 과학적이고 철학적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그쳐버리면 또 참다운 불법이 못 됩니다. 열반적정(涅槃寂靜)이라, 공이 아닌 참다운 실상세계(實相世界), 이 무상사(無相寺) 이름같이 모든 상은 다 허망한 것인데 참말로 허망하다는 것을 깨달아 버리면  그때는 그 알맹이는 중도실상(中道實相)이라. 아까 제가 기신론을 언급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그 허망상(虛妄相), 가상만 떠나버리면  결국은 그야말로 진여라 말입니다. 진여불성(眞如佛性)입니다.

우리가 허망하다는 생각만 가지고서 거기에 집착하면 그때는 불교가 허무주의가  되겠지요. 그러나 우리 부처님 사상은 가장 행복스럽고 가장 충만하고 불가사의한 그러한 가르침이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참말로 있는 것은, 우리중생이 보는 것이 허망한 것이지, 성자가 깨달아서 보는 그러한 안목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부처님뿐이란 말입니다. 중생은 가상(假相)에서 보고 깨달은 분들은 실상에서 봅니다. 우리 중생은 상만 보고, 상을 떠난 그러한 성자의 안목에서는 영원적인 생명에 충만해 있는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모두가 다 진여불성이란 말입니다.

불교만 그런 것이 아니라 과거의 성자는 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기독교를 생각할 때는    하나님이 창조하고, 아담과 이브를 흙을 주물러서 하나님이 만들고, 이렇게 했다고 생각할 때는  창조한 하나님과 창조를 당한 자연과 이렇게 두 갈래로 나누어지지 않습니까. 두 갈래로 나누어지는 이원적(二元的)인 사고(사고)는 굉장히 불행한 사고입니다.

우리 개인의 마음도 항시 불안스럽고, 또는 그런 사고로 해서는 불교에서 말하는 모두가 다 평등무차별(平等無差別)이라, 그런 논리가 나올 수가 없어요.

생각해 보십시오, 창조한 하나님 따로 있고, 창조된 자연계 따로 있고, 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까. 부처님 가르침은 허망상을 떠나서 참다운 실상, 중도(中道)의 실상을 우리가 깨닫는데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위해서는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공부방식인가 또 이런 것이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부처님 가르침은 꼭 논리적으로,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논리를 먼저 다 밝힙니다. 사제법문(四諦法門)이나 팔정도(八正道)를 보나 다 그렇습니다. 어떤 면으로 보나 조금도 모순이 없는 그러한 부처님 가르침 인지라, 과거 뿐 만아니라 지금 현재나 미래나, 세계 모든 문제를  원만히 해결하는 데도 부처님가르침 아니고서는 도저히 해결할 방도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선 인식론적으로 천지우주가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이다. 그런 도리를 알아야 한단 말입니다. 그걸 가리켜서 불교에서 해오(解悟)라, 해오는 풀 해(解)자, 깨달을 오(悟)자, 해오라, 이론적인 차원에서는 조금도 막힘이 없이 어느 것은 체(體)고, 어느 것은 용(用)이고, 이른바 체용성상(體用性相)을 깨닫는단 말입니다.

이렇게 돼야 우선 우리 마음이 안심(安心)이 됩니다. 우리마음의 불안의식을 해소시킬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걸로 해서 참다운 깨달음은 되질 못 하니까 참다운 자리, 진여불성 자리 상 (相)이 없는 자리를 우리가 깨닫기 위해서, 상이 없는 자리와 하나가 되기 위해서 그때는 이른바 증오(證俉)라, 증명할 증(證)자, 깨달을 오(悟)자 말입니다.

천지가 진여불성 같으면 우리 스스로가 진여불성이 돼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 증오를 하기 위해서는 그냥 그렁저렁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금생도 업(業)을 많이 짓고 또는 금생에 우리가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과거 숙세에도 무수 생 동안에 나고 죽고 나고 죽고 이렇게 윤회(輪廻)를 합니다.

그런 가운데서 지은 업장(業障)이 굉장히 많습니다. 업장이 일조일석에 다 해소가 안 됩니다. 두고두고 차근차근 닦아나가야 되고 다만 업장이 무거운 분들은 좀 더딜 것이고 업장이 가벼운 분들은 좀 쉽게 업장을 없애고 그러시겠지요.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논리적으로 논리정연하게 현대의 모든 학문체계와  조금도 대치가 안 되면서 그것을 도리어 지도하는 그런 입장에서.......

아까 제가 말씀드린 해오(解悟)라 풀 해(解)자, 깨달을 오(悟)자, 이치로는 먼저 알아야 한다 말입니다. 그렇게 해 놓고서 우리가  참말로 바른 우리 생명의 본 고향자리, 그 자리에 가기위해서는 두고두고 공부를 해야 할 것인데, 그런 공부도 물론 사람에 따라서 빠르고 더딘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어떤 공부가 가장 하기 쉽고 제일 빠를 것인가,  그것을 우리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상(相)을 떠나 버린 위대한 분상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다 똑 같습니다. 똑 같으나 우리 중생들은 상 속에, 이 상이라는,  허상 속에 살고 있어놔서 상을 여의기 위해서는  자기한테 맞는 방법이 필요하고, 그래서 부처님께서나  위대한 그런 선지식(善知識)들이 그때그때 중생의 근기(根機) 따라서 여러 가지 방편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용수보살(龍樹菩薩 150~250년경)이란 분은 ‘제2의 석가’라고 할 정도로 위대한 분 아닙니까. 대승불교는 마명대사(馬鳴大師)가 대승불교의 할아버지고, 용수보살이 대승불교의 아버지라는 그런 말이 있을 정도로  대승불교는 용수보살 때 대체로 체계가 많이 세워졌습니다. 용수보살이 지으신 책 가운데서 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이라는 책이 있어요.

그 책의 이행품(易行品)이라, 이행품은 쉬울 이(易)자, 행할 행(行)자, 기왕이면 우리 중생이 누구나 다, 아주 고도한 업장이 가벼운 사람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나가 다  공부하고 쉽게 통 할 수 있는 그런 법이 없을 것인가,

이래서 용수보살이 그 선택한 법문이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십주비바사론 가운데 이행품(易行品)이라, 쉬울 이(易)자, 행할 행(行)자, 그런 즉 말하자면 하나의 법문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공부 할 때는 과거세 우리가 어떻게 공부했던가, 과거세에 우리 업장이 어느 정도인가, 또는 지금 현재 인연은 어떠한 것인가 이런 것을 감안해서 공부를 우리가 선택해야 되겠지요. 그래서 이 선택이 되어서 공부가 순탄하게 잘 되실 분들은 용수보살께서 말씀하신  이행품, 쉽게 행하는 그런 법문을 참고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상을 떠나면  그 자리에서는 쉽고, 쉽지 않고 그런 차별이 없단 말입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독실하게 믿고 천지우주가 하나님뿐이고 나도 본래는 하나님이다. 이럴 정도로  이론적으로 굳게 믿는 사람들은 그때는 하나님을 하시면 좋습니다.

또 화두공안(話頭公案)을 들어서 화두공안에 마음이 온전히 통일되고 다른 잡념 없이 공부가 잘 되는 분들은 무(무)자 화두나 이뭐꼬(是甚麽) 화두나 그렇게 들고 하셔도 좋습니다. 본래는 다 하나의 자리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차원에서는 역시 보통 보편적으로 좀 쉬운 법이 있고 어려운 법이 있단 말입니다.  그것이 용수보살의 십주비바사론의 이행품인데, 그건 어떤 것인가 하면 부처님을 생명(生命)으로 우리가 수용한단 말입니다. 부처님만 생명이 아니라 사실은 불교에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천지우주가 모두가 다 생명뿐입니다.

유정무정(有情無情) 모두가 다 생명 아님이 없습니다. 천지우주는 불교식으로 말하면 부처님생명으로,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하나님생명으로 충만해있다 말입니다.  천지우주는 모두가 다  진여불성뿐인 것이고, 또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천지우주가 모두가 다 하나님뿐이란 말입니다.

지금 현대란 사회는 우리가 함부로 다른 그런 성인들 가르침을 비방한다거나 또는 섣부른 비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다행히 모두를 다 하나의 진리로 수용할 수 있는 부처님가르침을 지금 배우고 있어놔서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든지 우리가 배우는 부처님 가르침은 원만스럽게 모두가 다 하나의 진리로 봅니다. 하나의 생명으로 봅니다.

따라서 부처님은 바로 우주 생명입니다. 모두가 다 부처님 아님이 없다, 모두가 다 신(神)이 아님이 없다. 이런 것이 이른바 철학적으로 말하면 범신론(汎神論pantheism) 아닙니까. 넓을 범(汎)자, 귀신 신(神)자, 범신론이라.

우리 불자님들께서 조금 어려우셔도 기본적인 논리나 철학은 가지셔야 됩니다. 지금 세상이 모두  철학의 빈곤이라,  철학의 부재라, 그런 말  쓰지 않습니까. 관리나 누구나 대통령이나 어느 사람이나 기본적인 철학이 필요합니다. 철학이 무엇인가 모든 존재의 근원을 의미한단 말입니다. 

천지우주(天地宇宙)는 진여불성(眞如佛性)뿐인데 잘나거나 못나거나 도둑놈이거나 어느 사람이나 결국은 우리가 본래 성품을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다 진여불성이란 말입니다. 다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고서 정치도하고 법을 집행해서 남한테 벌을 주고 하는 사람도 본래 하나의 생명이란 것을 알고 해야 그래야 그때그때 오류를 안 범합니다. 소중한 사람의 그런 존엄인데, 인간이 존엄스럽다는 것은 무엇 인고 하면 우리 인간자체의 생명이 어느 누구나 다 개개원성(箇箇圓成)이라 모두가 다 모두가 다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어느 죄인을 심판할 때도 우리는 “저 사람은 죄를 지었으니까 마땅히 거기에 상응되는 벌을 받고서 고생을 해야 된다” 이러면 그것은 철학이 없는 그런 소리입니다.

어떤 사람도 그 본래마음은 부처입니다. 인연 따라서, 악연(惡緣)을 만나서 과거 숙세에 무수 생(無數生) 동안에 자기 지은 바 업장 따라서 금생에 나쁜 짓하는 것 같이 보이는 것이지 실상은 모두가 다 부처님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알아야 실상(實相)을 알아야 그래야  이른바 철학을 안다고 할 수 있지요. 그래서 어느 것을 하든지 간에 다른 사람의 아버지가 되나 또는 어머니가 되나 어느 입장에서이든지 간에 꼭 그렇게 알고 하시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고 자기 인생을 행복으로 유도 하는 그런 길입니다.

우리가 농사를 짓는다 하더라도 그래요. 한 포기의 벼, 또는 사과 한 개 모두가 다 그냥 그것이 물질이 아닙니다. 모두가 다 우주 생명의 한 뭉치라 말입니다. 

우리가 부처님법이 연기법(緣起法)이라, 이렇게 말씀을 하지 않습니까. 인연 따라서 잠시간 이루어진 법이다. 연기법이란 것은 그냥 보통 이것과 저것과 인(因)과 연(緣)이 합해져서  이루어졌으니까 고유한 것이 없다. 이런 정도가 아니라. 연기법의 가장 시초원인이 무엇인가. 연기법의 줄거리를 이렇게 더듬어 올라가면 차근차근 올라가면 끄트머리는 무엇이 돼 버리는 것인가. 그것이 바로 진여법성(眞如法性)입니다.

 어떠한 것이나  그 본래적인 자리는 다 진여법성입니다. 진여불성입니다. 따라서 육조단경(六祖壇經)이나, 참선하는 법문도 그래요. 그 본래면목(本來面目)자리,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를 안 여의여야  참다운 공부가 됩니다.

우리가 가령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덮어놓고 애쓰고 외워도 물론 공부가 되고 가피(痂皮)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그냥 외면 그것은 하나의 염불(念佛)은 돼도 참선(參禪)은 못 됩니다.

 어째서 그런 고 하면 참선이란 것은 본래의 자리, 본래면목자리, 즉 진여불성자리를 여의지 않아야 참선이란 말입니다. 가령 이뭐꼬 이뭐꼬 하고, 무무(無無) 하고 우리가 화두공안선을 한다 하더라도 본래면목자리 진여불성자리를 안 여의야 참선이 되는 것이지, 그냥 공안을 그대로 상대적인 마음 가지고 해서는 그것은 참선이 못 됩니다.

그와 똑 같이 염불도 그래요. 부처님이 저 저만치 대상으로 계시다가 우리가 열심히 하면  우리를 그때는 가피하는 타력적(他力的)인 그러한 우리를 가호(加護)하는 그런 분이다.

이래서는 참다운 염불도 못되고 또한 동시에 염불참선이 못 돼요. 우리 불자님들이 기왕이면은 그냥 염불이 아니라  염불참선이 되고  싶어 하시겠지요. 염불인 동시에 참선이 되면 얼마나 좋으시겠습니까.

그러나 사실은 참다운 염불은 바로 그것이 염불 참선이어요. 그건 어떠한 것 인고 하면   우리마음이 본래의 자리, 그 진여불성이라는 실상자리를 안 여의면 그때는 같은 염불도 염불인 동시에 염불참선이 됩니다.

다른 것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외고 싶어서 하나님을 그렇게 염송하신 분도 그래요. 하나님이란 것이 어느 구분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우주 진리다, 이렇게 보편적으로 인식을 하고서 동시에 그런 자리, 천지우주가 하나님 아님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고서 오! 주여 하면 그때는 그것도 하나의 훌륭한 참선이 됩니다. 그 본래면목자리 본래 고향자리를 안 떠나면 다 참선입니다.

아까 제가 말씀을 몇 번 더 했습니다마는 용수보살 이행품, 쉬운 것이 무엇 인고 하면

그냥  다른 공부도 다 중요하지만 우리 일반적인 우리 바쁜 생활을 지내는 우리중생들을 위해서는 부처님을 생명으로 받아들이고 부처님을 인격적으로, 천지우주가 모두가 다 부처님생명뿐이다 부처님뿐이다.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도 시방여래(十方如來)는 법계신(法界身)이라, 모든 부처님은 모든 부처님은 우주를 몸으로 한단 말입니다.

우주가 바로 부처님입니다. 우주를 몸으로 했기 때문에 어느 누구나가  모두가 다 부처님을 이렇게 나누어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가지고 있습니다. 물질은 분할 할 수 있지만 그 보이지 않는 생명자체는 분할이나 구분 할 수 없단 말입니다.

모두가 다 온전히 천지우주가 부처님뿐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해서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서 염불을 하신다고 생각할 때는 바로 참다운 염불인 동시에 바로 염불참선입니다.

그렇게 부처님 명호(名號)를 외는 것이 어째서 빠른가. 그것은 그 사람의 근기라든가 여러 가지로 작용이 되겠지만 천지우주가 바로 부처님의 생명뿐이기 때문에 우주자체가 바로 생명자체기 때문에 우리가 부처님을 하나의 자기생명과 공통됨과 동시에 똑 같은 절대적인 생명이다, 이렇게 우리가 느끼면서 부처님이름을 외는 그것은 우리마음을 가장 편안히 하고 동시에 모든 가피를 우리가 거기서 받들고 거기서 가피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우리 중생계(衆生界)는 사람이 있고, 사람의 눈에 안 보이는 신장(神將)이나  그러한 존재는 보통은 무시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실은 우리 사람 외에도 모든 그런 신장도 있고  또는 금생에 살다 간 영가(靈駕)도 있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 영가들이나 선신들이나 또는 더러 악신도 있고 합니다.

그런 존재들이 부처님의 이름, 부처님의 명호는 만덕장엄불(萬德莊嚴佛) 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이름 자체에 가서 모든 불가사의(不可思議)한 능력(能力)이라든가 또는 행복(幸福)이라든가 또는 모든 복덕(福德)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부처님 이름은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을 영원적인 의미에서는 무량수불(無量壽佛)이라 목숨 수(壽)자, 한도 끝도 없는 생명이라 그래서 무량수불이라.......

또는 부처님의 지혜광명(智慧光明)은 우주의 어느 때나 빛나고 있다 그래서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 빛 광(光)자, 무량광불이라.

우리는 광명(光明)이란 것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천지우주는 사실은 지금 광명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지금 현대 물리학자도 역시 모든 물질, 모든 물질을 이른바 쪼개 들어가서 소립자나 그런 단계, 그런 단계에 이르면 일체존재가 모두가 다 전자기장(電磁氣場)광명이라, 방사광명(放射光明)이라, 이 우주의 근본은 그런 전자기장, 방사광선으로 충만하여 항시 빛나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중생들은 기술에 따라서 그런 것을 볼 수가 있을 뿐인 것이지 우리 육안으로는 그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과학이 다 증명하는 것이고, 또는 우리 스스로 공부를 깊게 한다고 생각할 때는 과학자가 아닌 어느 누구도 우리 마음의 정화(淨化)에 따라서  광명을 느끼고 감득(感得)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능엄경(楞嚴經)에서 억불염불(憶佛念佛) 이라, 부처님을 생각하고 부처님 이름을 외면, 현전당래(現前當來) 필정견불(必定見佛)이라, 금생에든지 내생에든지 틀림없이 우리가 부처님을 만나고 부처님과 하나가 된단 말입니다.

부자간이나 모자간이나 부부간에도 역시 금생에 서로 그리워서 인제 살다가 헤어지면 내생에 가서 꼭 다시 만납니다. 똑 같은 처지로는 안 만나도 꼭 다시 만납니다. 그와 똑같이 우리 중생은 부처님하고 본래가 둘이 아니기 때문에 억불염불이라, 우리가 부처님을 그리워하고 또는 부처님의 그러한 이름을 외운다고 생각할 때는 현전당래 필정견불이라. 현생이나 또는 내생이나 틀림없이 부처님을 만나 뵌단 말입니다.

만나 뵈옵는 경로는 다르겠지요. 훤히 빛나는 광명으로 만나 뵈올 수도 있고 더러는 사람 몸 같이 된 그러한 상징적인 광명상으로 우리한테 나투기도 하시고 그러시겠지요. 그와 같이 다른 것도 또 거기에 부수가 되어서, 악신도 선신도 모든 신장도 많이 있는 것인데 그런 것이 어떤 존재나 근본자리는 부처님인지라 우리가 근본자리인 부처님을 생각하고 부처님을 찬탄(讚嘆)한다고 생각할 때 그 나쁜 신들은 그때는 우리를 두려워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선신들은 그때는 좋아서 그냥 환희심(歡喜心)으로 우리를 지키고 한단 말입니다. 그런 것이 꼭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진리(眞理)에 따라서 진리에 수순(隨順)해서 산다고 생각할 때는 무량의 공덕이 거기에 다 따릅니다. 다른 사람들도 역시 우리가 참말로 바르게 공부 하면 어떤 식으로 하든지 간에 부처님 공부를 한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근본자리, 진여불성자리를 여의지 않는 공부니까요.

그렇게 한다고 생각할 때는 어느 것이나 우리를 다 숭상(崇尙)합니다. 자기는 몰라도 자기 몸에서는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부처님의 향기가 풍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집안에서  아버지나 어머니 노릇을 한다하더라도 부모님이 함부로 자시지 않고 함부로 행동하지 않고 정말로 부처님 신앙에 사무친다고 생각할 때는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숭배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생활이 어느 면으로 보나, 직장생활을 하나 어떤 생활을 하나 가장 효과적이고 가장 행복스런 생활입니다.

이 세상에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부처님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가상을 떠나서 상을 떠나서 우리가 실상으로 부처님을 우리가 받아들이는 그러한  바른 참 신앙입니다.

여러분들이 하시는 공부에다가 여러분들이 그런 것을 생각을  허셔서 아까 용수보살이 말씀했다는 이행품, 쉬운 공부, 쉬운 공부라는 것은 무엇 인고 하면 천지우주가 생긴 대로 천지우주가 부처님뿐이니까 부처님은 바로 우주생명이니까 그런 자리를 우리가 알고서 거기에다가 그 자리에다가 마음을 두어야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육조단경에도 이러한 중요한 법문이 있어요. 수지일체만법(須知一切萬法) 자성기용(自性起用)이라. 모름지기 알지니 일체만법은 자성 진여불성에서 인연 따라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진여연기(眞如緣起)에 대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진여연기란 것은 무엇 인고 하면 모든 것이 다 진여라는 진여불성에서 왔다는 그런 연기법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인연법(因緣法) 하면 그냥 쉽게 이것과 저것이 합했다는 그런 간단한 것을 생각할 수가 있지만 참다운 인연법은 근본이 모두가 다 진여불성이라, 그래서 이것이나 저것이나 나나 누구나 모두가 다 진여불성 아님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참다운 인연법의 해석입니다.

이렇게 한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가 비록 여러 가지 다른 환경에 처한다 하더라도 거기에 물들지 않는단 말입니다. 우리는 좋은 생각을 했다가도 그냥  환경이 바꾸어지면 거기에 마음이 끌리고 물들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 생각이 항시 생각이 기본이 일체만유의 기본자리, 일체만유의 성품자리인  진여불성에다가 마음을 둔다고 생각할 때는 어떠한 환경에도 우리가 물들지 않고 그러면서 심자재(心自在)라 우리마음이 자유스럽고 구속되지 않는단 말입니다.

이 생각을 깊이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현실에서 그렁저렁 우리마음을 그대로 방하(放下)시키지 말고서 우리마음을 항시 다 잡아서 우리마음의 근본고향자리, 우리생명의 근원자리에다가 우리마음을 딱 거기에 머물게 한단 말입니다. 그 자리에서 비춰 본단 말입니다. 이렇게 한다고 생각할 때 최상의 행복을 기리고, 또는 우리 건강을 위해서도 최상의 건강법입니다.  

무량무수의 선신들이 우리를 항시 지키면서 우리의 공부도 도와주고 또는 사업도 도와주고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무상사 같은 이러한 훌륭한 그러한 부처님 전당을 만드신 것도 계행(戒行)이 부실하면 절대로 안 됩니다. 계행이 청정한 분들은 부당한 것을 부당한 것을 발원도 않습니다. 계행이 청정한 분들은 청정한 마음 때문에 꼭 정당한 것을 발원합니다. 그 정당한 것을 발원하기 때문에  삼세제불(三世諸佛)이 다 돕는 것이고, 무수한 신장이 다 돕는 것입니다. 세속 일을 하나 어떤 일을 하나 다 그렇습니다.

따라서 우리 불자님들께서는 이러한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선  도덕적으로 계행을 잘 지키고, 그렇게 하면서 바른 정당한 것을 우리가 구한다고 생각할 때에는 실패할 것이 절대로 없습니다.

부처님도 돕고 무수한 신장이 다 돕고 다른 사람들도 계행을 잘 지키면 그때는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향기가 풍긴다 말입니다. 그러니까 누구든지 다 좋아하고 따르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하셔서 한없는 행복을 누리시기를 간절히 빌어 마지않습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시아본사석가모니불!




마음의 고향 제 21 집


Ⅱ.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성륜사(聖輪寺) 정기법회(2003년 5월 4일)에서 청화(淸華)큰스님께서

제방스님과 재가불자들에게 설하신 법문입니다.


부처님 말씀은 금구직설(金口直說)입니다.

금구직설이란 것은 무슨 말인고 하면 다시 변동할 수 없는 결정적인 말씀이란 그런 뜻입니다.

세속적인 논리 전개라든가 이론 같은 것은 그때그때 변할 수도 있지만 부처님 말씀 또는 성자님 말씀은 변동이 없습니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성자는 항시 사실을 사실대로 말씀하십니다.

가령 무아(無我)라, 무아는 여러분들 잘 아시는 없을 무(無)자, 나 아(我)자, 무아(無我)아니겠습니까.

불자님들이 그때그때 무아를 극복 못하면 참다운 불자가 될 수가 없습니다.

사실은 무아가 되어야 불법(佛法)인 것이고 무아가 못되면 불법이 못됩니다.

내 존재란 것이 지금 내 몸뚱이 이대로 존재하고 내 생각은 나대로 생각이 있고, 이렇게 분명히 있는데 왜 이것이 무아가 될 것인가, 이렇게 의단을 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나(我)라고 하는 것은 이것은 잘못보고서 착각하고서 나(我)라고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 못합니다.

모든 인연(因緣)이 화합되어서 잠시간 나라는 것이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것이지 실존적으로 어제나 또는 오늘이나 내일이나 변함없이 존재하는 나(我)는 없습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나라하는 아(我)를 집착하면 그때는 아집(我執) 그래서 우리 범부(凡夫)가 부처님 법을 그릇 해석하는 망집(妄執)이 됩니다. 망상(妄想)이 됩니다.

부처님 법은 아집이라 하는, 나(我)라 하는 주관적인 집착과 또는 대상적인 우리 눈앞에 전개되는 모든 것은 실제로 존재한다는 대상적인 존재에 집착하면 법집(法執)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주관적인 집착인 아집과 객관적인 집착인 법집을 떠나야 그래야 불법이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대승경전을 설하실 때는 천고자연명(天鼓自然鳴)이요, 천우만다화(天雨曼陀華)라,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법화경에도 있고 다른 대승경전을 설할 때도 그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건 무엇 인고 하면 천고자연명이라, 하늘 천(天)자, 북 고(鼓)자, 하늘의 북이 자연명(自然鳴)이라, 하늘의 북이 저절로 울린단 말입니다.

우리 인간은 우리 인간의 인식되는 범위만이 전부이고 다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단순한 소박한 생각을 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인간의 눈에는 안 보인다 하더라도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세계가 한도 끝도 없이 많습니다.

가령 천상(天上)도, 현실적인 것만 집착하는 사람들은 천상도 긍정하지 않을 수 있지요.

그러나 욕계(欲界)천상만 해도욕계 6천이라, 색계(色界)천상은 18천이라, 무색계(無色界)천상은 4천이라, 욕계ㆍ색계ㆍ무색계 해서 28천의 하늘이 있단 말입니다.

우리 인간이 인간정도의 업장(業障)을 지어서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지 인간이 최상의 그러한 복지(福祉)는 절대로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조금만 우리 공부가 되어서 익어진다거나 또는 대승경전에 대해 신비로운 황홀경에 젖으면 그냥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천고자연명이라, 하늘의 북소리가 어디서 난데도 없이 항시 우리한테 울려온단 말입니다.

천우만다화! 하늘 천(天)자, 비 우(雨)자, 또 하늘에서는 만다라화(曼茶羅華) 마하만다라화(摩訶曼茶羅華)! 만주사화(曼珠沙華) 마하만주사화(摩訶曼珠沙華)!

하늘의 꽃이 그때그때 항시 비가 내리듯이 대승경전을 축복하고 우리 중생의 마음이 그만치 맑아지면 우리 업장이 녹아진다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그런 만다라화 마하만다라화! 만주사화 마하만주사화! 이런 꽃비가 우리를 감싸고 그러는 것입니다.

법화경에도 법화경을 설할 때는, 대승무량경(大乘無量經)을 설하십니다. 대승무량경을 설하실 때 부처님께서 상서로운 모습을 우리한테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이 맑아지고 우리 공부가 익어지면, 우리가 공부할 때 어느 때는 싫증도 나고 그럴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난데없이 청정미묘한 북소리가 울려오고 또는 찬란한 꽃비가 내리는 것을 우리가 스스로 봤을 때는 그때는 우리 피로라든가 싫증이 가신데 없이 몽땅 다 가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극락(極樂)이라, 극락 그러면 부처님께서 우리한테 방편으로 인생고(人生苦)가 하도 많으니까 마음을 편하게 가지라고 해서 사무칠 극(極)자, 즐거울 락(樂)자, 아주 행복한 극락세계가 있다.

이와 같이 우리한테 이상(理想)을 제시하는 것이지 실제로 극락은 있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보통은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극락세계를 말씀한 대무량수경(大無量壽經)이나 아미타경(阿彌陀經)이나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이 거짓말이 되겠지요.

우리는 항시 우리 중생의 지금 알고 있는 인식범위(認識範圍)가 얼마만치 좁은 것인가 이걸 느껴야 한단 말입니다.

철학의 아버지라 하는 소크라테스(Socrates B.C 469-399), 여러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레스폰 신전의 주랑에 가서 “먼저 그대 스스로를 알라” 그런 말이 기둥에 새겨져 있단 말입니다.

단순히 자기반성을 하고 함부로 경망한 짓을 하지 말라는 그런 경고적인 표현이 되겠습니다만, 소크라테스 같은 진지한 분, 정말로 내 스스로가 무엇인가. 내 자아(自我)가 무엇인가, 이렇게 자기를 천착(穿鑿)하고 파고들어 가는 그런 철학적인 인간으로 해서는 보통 말이 아니란 말입니다.

정말로 진정으로 나(我)라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소크라테스는 그걸 파고 들어가고 또 더욱더 깊이 천착하고, 그래서 드디어는 엑스터시(Ecstasy), 이른바 망아(忘我)로 든 게 아니에요.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자기 한계를 넘어서는 깊은 이른바 삼매(三昧)에 들었단 말입니다.

삼매란 것은 우리 마음을 하나로 집중해서 다른 산란스런 마음이 나지 않는 것이 이른바 삼매의 소박한 풀이 아닙니까.

헌데 소크라테스는 정말로 자기탐구를 하던 끝에, 그때 기록을 좀 보면 소크라테스가 어느 날에는 길을 가다가 갑자기 멈춰서가지고서 한일동안 한발도 옮기지 않고서 그 자리에서 명상에 잠겼다고 그래요.

사람들이 구경 와서, 더러는 하도 자리를 안 떠나니까 이불을 가지고와서 이불을 깔고서 거기서 자면서 소크라테스가 어느 때나 떠나는가 보려고 했다고 그래요.

그럴 정도로 지독한 집념이 강한 그런 걸로 해서 이른바 망아라, 황홀한 자기 존재의 실상을 깨닫는 엑스터시의 그런 경지에 몰입했습니다. 그래서 참다운 자기를 깨달았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나중에는 자신을 가지고 아테네의 이 거리 저 거리를 다니면서 청년들을 지도하고, 또 나중에는 청년들을 타락시킨다는 고발을 당해서 옥중가서도 아무런 두려움 없이 독배(毒盃)를 마시면서 그야말로 태연자약(泰然自若)하게 자기 생을 마친 분이 이른바 철학의 아버지라는 소크라테스 아닙니까.

우리는 종교철학에 있어서 아주 깊이 기억해 둘 또 위대한 철학자가 있습니다.

누군가 하면 서기 3세기 전에 나온 플로티노스(Plotinus B.C 269-205), 이집트 태생인데 로마에 나와서 많은 사람을 지도한 분입니다.

플로티노스는 우리 종교철학을 하는 사람들이 꼭 두고두고 기억하면서 귀감 삼을 만한 위대한 분입니다.

우리 불교인이사 부처님 가르침을 다 포함하고도 남지만은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일반적인 말씀을 저는 하는 것입니다.

플로티노스 철학은 주로 어떠한 것인가 하면, 여러 가지로 우리가 참으로 주목할 만한 그런 것이 되기 때문에 제가 말씀을 드리는데, 그 일자(一者, nous, the one)라, 한 일(一)자, 놈 자(者)자, 일자의 철학이란 말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에서 나와서 다시 하나로 돌아간단 말입니다.

어떠한 것도 하나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고 어떠한 것도 하나에서 나와 가지고 다시 하나로 본래 돌아가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이런 도리야 우리 불교에서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도리 아니겠습니까.

플로티노스가 한말 가운데서 중요한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우리 영식(靈識)이 우리 마음이 맑아지면 차근차근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그 일자라는 본래 근본자리로 가까워진단 말입니다. 그래서 맑고 맑아지면 드디어는 그때는 하나로 딱 일치가 돼버린단 말입니다.

이른바 하나라는 근원적인 도리하고 신비적합일(神秘的合一)이라, 그것보고 신비적 합일이라 그래요. 직관적(直觀的) 하나가 된다는 그런 뜻이겠지요.

그리고 플로티노스를 중요시하는 것이 무엇 인고 하면, 사실은 플로티노스가 이른바 자기 스스로 모두를 다 독창적으로 얘기한 것은 아닙니다.

플라톤(Platon B.C 427-347), 플라톤주의에 근원을 두고 있단 말입니다. 플로티노스 학파를 가리켜서 신플라톤주의 그래요. 신플라톤주의라.......

그런데 사실은 서구 서양철학을, 저는 불교인이라 아직도 제가 철학서를 깊이 연구한 것도 아닙니다. 다만 상식적으로 어디 가서 말하려고 하니까 그때그때 봐야겠지요. 그런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서양의 위대한 철학자는 대체로 신플라톤주의를 표방을 했어요.

가사 기독교인(基督敎人)도 위대한 신학자(神學者)가 많이 있습니다.

맨 처음 초기에 4세기경에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 그분도 위대한 교부(敎父)철학의 완성자인데 그 분도 위대한 분인데 그분 철학에도 플라톤주의가 있습니다.

그분 철학에도 이른바 플로티노스의 철학이 거기에 상당한 분야를 차지한 단 말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교로 부터서 기독교로 온전히 개종할 때는 신플라톤주의를 영향을 대단히 받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9세기에 스코투스 에리우게나(Johannes Scottus Eriugena, A.D 810-877), 이분도 위대한 신학자입니다. 에리우게나 이분도 역시 신플라톤주의영향을 받았습니다.

또 그 뒤에 13세기에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A.D 1225-1274), 이분은 신플라톤주의를 비판하면서도 역시 신플라톤주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15세기에 유명한 신비철학자인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A.D 1260-1327), 또는 15세기에 니콜라우스 쿠사누스(Nicolaus Cusanus, A.D 1401-1464) 이분은 추기경입니다. 니콜라우스 쿠사누스도 굉장히 위대한 추기경입니다. 이분도 역시 신플라톤주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신플라톤주의를 한마디로 하면 어떠한 것인가. 제가 주로 말씀하고자하는 것은 신플라톤주의가 의지하는 사상적 핵심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른바 범신론(汎神論)입니다. 범신론(pantheism)이라.......

우리가 현대를 철학의 빈곤 철학의 부재(不在)라 이런 말씀을 하지 않습니까. 알기는 많이 아는데 그 본질적인 문제는 사람들이 잘 모른단 말입니다.

본질적인 문제를 잘 모르는 그것이 이른바 철학의 빈곤 철학의 부재라고 그러는 것입니다.

본질적인 문제를 알아야 참다운 세계관 인생관이 되어서 자기도 바르게 지도하고, 또는 가족문제라든가 모든 인간의 갈등문제를 풀 수 있을 것인데, 그 본질적인 문제를 모르면 그때는 역시 똑같이 혼란한 가운데 혼란한 지식정보 가운데 우리가 파묻히고 맙니다.

범신론(汎神論)은 무엇 인고 하면 천지우주, 자연계가 바로 신이 아님이 없다, 이런 사상이란 말입니다.

범신론을 우리 불자님들은 잘 모르는 분들은 잘 외어두십시오. 사상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그러한 하나의 주장이고 진리의 중요한 지침이 되는 것입니다.

천지우주가 바로 신이 아님이 없고, 천지우주가 바로 신이 아님이 없다는 것은 천지우주가 하나님이 아님이 없고, 또는 천지우주가 우리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부처님이 아님이 없다는 뜻입니다.

불교가 내내 모두가 다 부처님이 아님이 없다는 뜻 아닙니까.

따라서 그 범신론 넓을 범(汎)자, 귀신 신(神)자, 범신론입니다.

따라서 범신론을 가지면 기독교나 불교나 이슬람교나 모두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자연계 모두가 다 신이 아님이 없으니까 말입니다.

얼마나 편리한 사상입니까.

그래서 자고로 위대한 분들은 대체로 적고 많고 차이는 있다하더라도 범신론적 요소를 다 갖추고 있습니다.

우리 불교인이사 모두가 다 부처인지라 새삼스럽게 범신론을 들먹일 필요는 없겠지요.

그러나 기독교인이나, 또는 이슬람 인이나, 그런 분들은 그 중세기에서는 범신론을 제일 두려워했습니다.

어째 그런가 하면 범신론을 긍정한다고 생각할 때는,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고 자연을 창조하고, 자연을 창조했으면 자연이 종말이 있어야겠지요. 종말에는 이른바 최후의 심판도 있어야 되고 누가 구제를 해야겠지요.

모두가 다 똑같이 신이 아님이 없다 그래버리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할 아무런 이유도 없고 겨를도 없단 말입니다.

중세기 이른바 기독교 철학이 스콜라 철학(Scholasticism)아닙니까.

중세 스콜라 철학이라든가 기독교 제도권의 기독교에서는 범신론을 제일 두려워했습니다.

여러분께서 한 분 위대한 분을 기억하시라고 제가 말씀드립니다마는 17세기 브르노(Giorda Bruno, 1548-1600), 브르노란 분은 이태리분인데 그 분은 도미니크라는 기독교 수도단체에서 아주 유력한 인물입니다, 그런 단체가 두 가지가 있어요. 한 가지는 도미니크회(Dominican Order)가 있고 하나는 프란치스코회(Franciscan Order)가 있고 합니다.

그런데 아주 진지한 수행단체입니다. 될수록 어디에 구속받지 않고 제도권의 기독교에서도 될수록 간섭받지 않고, 아주 순수하게 검소하게 그야말로 청빈하게 수도만 주로 하는 기독교의 자유스러운 단체입니다.

그런데 브르노란 분은 도미니크회의 수사란 말입니다. 수도인 입니다.

수도인 인데 아까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15세기에 나온 니콜라우스 쿠사누스(Nicolaus Cusanus, 1401-1464), 이 사람이 굉장히 위대한 분입니다.

이 분이 이른바 범신론적 사상을 가지고서 자기가 기독교 추기경인데도 조금도 치우침이 없이 진리를 제약 없이 그만치 아주 자기 소신대로 밝히신 분입니다.

그런데 브루노는 그러한 니콜라우스 쿠사누스(Nicolaus Cusanus)의 직접 제자는 아니지만 영향을 많이 받았단 말입니다.

그래서 범신론을 신봉하니까 제도권 기독교인으로서 범신론을 신봉하니까 그때는 그야말로 하나님의 창조를 믿을 수도 없는 것이고 말입니다.

또는 지동설, 천동설 그래서 기독교사회에서는 천동설이라,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고 태양은 지구의 주변을 돈다는 그런 것이 이른바 제도권 기독교의 하나의 신조란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만약 지금 현대같이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태양이 중심이라는 태양중심설을 누가 밝힌다고 생각할 때는, 이른바 지동설이라, 그때는 대단히 기독교를 반역하는 사람으로 해서 무거운 이단으로 몰아붙인단 말입니다.

브르노는 그와 같이 이른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기독교에서 그야말로 대단히 원수같이 그렇게 생각하는 범신론을 숭앙했단 말입니다.

니콜라우스 쿠사누스의 가르침을 따라서, 그래가지고서 이른바 그 당시로 말하면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의 천동설, 천동설에 대해서 반기를 들고 했기 때문에 그런 거 저런 거로 해서 그분이 로마 교황청에서 반역죄로 해서 체포를 당했어요.

그래가지고 자기 학설을 폐지하라고 교황청으로부터 여러 차례 권유가 있었으나 끝끝내 자기주장을 안 버렸습니다. 7년간이나 옥중에서 살다가 1600년 2월 달인가 로마의 화형장에서 불에 태워져서 화형을 당했어요. 그런 분입니다.

그런 분이 이른바 브르노인데, 그런 소신에 가득찬 분이 있을 정도로 이른바 범신론이라 하는 것은, 기독교인에 대해서도 참말로 하느님을 옳게 믿는 사람들은 범신론을 신봉하고, 참으로 옳게 믿지 않고서 그냥 제도권의 권위에 따라서 믿는 사람들은 이른바 범신론을 따르지 않고 그랬단 말입니다.

그래서 스콜라철학 중세철학에 있어서는 기독교사회에서 범신론을 제일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아무튼 그건 그렇고 우리 불교에서는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아(我)가 있고 나라는 아집(我執)이 있으면 이것은 불교가 아니고, 아집이 없어야 비로소 불교란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인간이 생각할 때는 굉장히 허망하단 말입니다. 현재 자기 지위(地位)라든가 자기 명망(名望)이라든가 자기 재산(財産)이라든가 이른바 자아(自我)가 있다고 생각할 때는 분명히 자기 소유가 있어야 되고 거기에 따른 모든 것에 자기 권한이 있어야 되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것이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것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허망함을 느낀단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 아(我)라는 것은 없습니다. 아라는 것은 결코 없습니다.

그러면 불교에서 우리가 느끼는 물질은 있다고 보는 것인가. 부처님 사상에는 물질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대체로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일체(一切)가 유심조(唯心造)아닙니까. 모두가 다 마음뿐이란 말입니다.

유물론자(唯物論者)는 모두가 다 기본적인 것은 물질뿐이다, 그런데서 이루어진 체제가 유물론 아닙니까.

막스엥겔스의 막스주의라든가, 또는 레닌주의라든가 말입니다. 또는 사회주의 사회에서 기본적인 철학도 내내야 이른바 유물주의(唯物主義)란 말입니다.

따라서 물질이 없다고 그러면 사실은 막스엥겔스라든가 또는 레닌주의라든가 그런 사회주의적인 원칙이 설래야 설 수가 없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이런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지금 현재  중공사회(中共社會)도 있지 않습니까. 또는 소비에트가 붕괴가 되었다 하더라도 지금도 역시 사회주의 사회인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사회주의 사회가 설려고 하면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물질이란 것이 실존적으로 우리가 지각(知覺)하듯이 우리 감각을 통해서 있는 대상이 확실히 존재한다고 이렇게 이해되어야 물질이 서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불교에서는 물질을 부정해 버립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물질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도 좀 서운하게 생각되시지요. 금 쪽같이 아끼는 자기 몸뚱이, 요새 사람들은 유난히도 몸뚱이를 아끼지 않습니까.

손도 그냥 반들반들하고 포동포동하게 잘 가꾸려고 하고 손이 시리지도 않는데 장갑도 끼고 여러 가지로 하여튼 자기 몸뚱이 금 쪽같이 아낍니다.

그런 분들한테 당신 몸이 헛것이다. 허망한 것이고 아무것도 아니고 그야말로 본래 없는 것이다. 이래 놓으면 굉장히 섭섭할 것입니다.

그러나 섭섭하다는 것은 아까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더 높은 행복이나 더 높은 기쁨을 몰라서 그럽니다.

우리 중생들이 마음이 정화가 되어서 우리가 보다 높은 고차원의 세계로 올라갈수록 우리 행복감과 우리 환희심(歡喜心)은 더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아주 극도의 최상의 행복이 이른바 극락(極樂) 아닙니까. 극락세계라 하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이니까 극락이라고 그래요.

내가 없다는 것에 대해서 그 아무리 말씀을 해도 납득이 가지 않는 것 같이 보이니까 제가 다시 또 말씀을 드립니다.

나라는 것은 있을래야 있을 수가 없습니다. 나라는 것은 본래 이것은 다 빈 것입니다. 우리 중생이 잘 못 봐서 투철하게 보지 못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은 결정설(決定說)입니다. 부처님 말씀은 변동할 수 없이 사실을 사실대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째서 내가 없는가 하면....... 

이 나(我)라는 것은 이것을 우리가 우선 분석적으로 봅시다. 지금 원소, 지수화풍(地水火風) 현대말로 산소, 수소, 탄소, 질소 그런 원소가 그때그때 우리 업장에 따라서 잠시간 이 모양같이 보이지 않습니까. 잠시간 모양같이 보이면서 순간순간 찰나찰나 변화해서 마지않습니다.

이른바 사대오온(四大五蘊)이 가화합이라. 지수화풍 사대와 거기에 우리 업장이 달라붙어서 이것이 내 것이다, 이렇게 집착하는 그것이 즉 말하자면 나(我)라는 실체란 말입니다.

아무리 아껴봐도, 아무리 소중히 여겨도 나(我)라는 것은 결국은 갈 때는 소식도 없이 제 멋대로 가버립니다.

어느 순간도 그때그때 변화무상한 나(我)라는 집합체는 그대로 가만히 있지가 않습니다.

찰나, 찰나 순간순간 변화무상하니까 순간순간 변화무상한 것은 변화하여 마지않는단 말입니다.

따라서 앞서 내 몸을 구성한 세포 덩어리나, 또 뒤에 다시 신진대사해서 구성된 세포 덩어리나, 똑같지가 않단 말입니다.

어느 때나 언제나 우리 잘 때나 어느 때나 그 신진대사는 멈추지 않습니다. 멈추면 그때는 금생의 목숨은 그만 아닙니까.

이렇게 변화해 마지않는 것을 우리 중생들은 지속적으로 하나라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변화해서 마지않는 것은 사실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참말로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렇게 허망하다고 생각할 때는 인생이 살 필요 없지 않은가, 그리고 참말로 있는 것은 없는가.......

참말로 있는 것이 있습니다.

참말로 있는 것이 바로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진여불성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영원히 존재한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을 파고들어가서 우리 마음의 심리(心裏)를 파고들어가서 우리가 찾아본다고 생각할 때 우리 마음보다 더 잠재적인 깊은 마음을 아뢰야식이라고 그래요.

아뢰야식(vijnana)이라. 또 아뢰야식은 그러면 근본이 무엇인가 그렇게 들어가서 보면 그때는 여래장(如來藏)이라. 여래장 이것은 부처님이란 뜻 아닙니까.

우리 마음을 파고들어가서 보면 지금 현재에서 이 제한된 마음이 전부가 아니라 종당에는 부처님이 거기에 꽉 들어있는 거기에 도달하고 만다는 말입니다.

여래장은 바로 법신(法身)이라 말하기도 하고, 또는 진여(眞如)라고 참 진(眞)자, 같을 여(如)자, 진여라고 말도 하고, 또는 법계(法界)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는 원성실성(圓成實性)이라는 말도 하고, 또는 실제(實際)라고 말하기도 하고 그럽니다. 잘 기억해 두십시오.

방금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리 마음을 파고들어가서 파고 들어가면 종당에는 아무것도 없어지는 허무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진여불성이 나온단 말입니다. 

진여불성 이것은 우주의 참 생명입니다. 우주의 참 생명이 진여불성입니다.

다른 것은 모두가 다 그때그때 변화무상한 것이지만 진여불성은 바로 여래(如來) 부처 또는 법성(法性), 법계(法界) 다 같은 뜻입니다.

모두가 다. 그래서 이 진여불성은 그때는 불생불멸(不生不滅)하여 나지 않고 죽지 않고 더하지 않고 덜하지 않고 영원히 존재하는 우리 생명의 본바탕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주란 것은 진여불성이 근본 성질입니다.

우리가 가령 참선(參禪)을 한다하더라도 그냥 이것이 무엇인가 저것이 무엇인가 덮어놓고 의심한다고 참선이 되겠습니까.

우리가 염불(念佛)한다하더라도 부처님은 우리가 애쓰고 부처님을 외면 우리한테 가피(加被)를 주시겠지, 이러면 참다운 염불이 되시겠습니까.

우주의 실체가 우주의 실상이 바로 진여불성인지라. 우리가 염불을 하든, 화두공안을 참구하든 또는 잠자코 명상을 하든, 우리 마음자리가 항시 진여불성이라는 본래의 자리를 안 떠나야 됩니다.

본래면목(本來面目)자리가 진여불성인데, 진여불성을 떠나서 아주 의심한다고 그래서 참선이 되겠습니까?

참선이란 것은 우리 본래면목을 찾는 것인데 말입니다.

염불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란 것은 무엇인가. 부처란 말이나 본래면목이란 말이나 똑같은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본래면목을 안 떠나야 그래야 참다운 참선이 되고 참다운 염불이 됩니다.

가령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우리가 한다 하더라도 아미타불을 열심히 부르면 아미타불의 가피가 나한테 와서 나한테 무량복덕(無量福德)을 주겠지, 이것은 방편염불에 지나지 않습니다.

참다운 염불은 아미타불이 바로 내 본래면목이고, 우주가 아미타불 아닌 것은 하나도 없이 모두가 다 부처님뿐이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아미타불을 왼다고 생각할 때는 자성미타(自性彌陀) 유심정토(唯心淨土)라!

그렇게 되면 바로 참다운 염불인 동시에 염불참선(念佛參禪)이란 말입니다.

불자님들은 기왕이면 단순한 염불뿐만 아니라 염불참선을 하시고 싶겠지요. 염불참선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본래면목자리, 우리 생명의 당체, 생명의 본질자리인 진여불성자리, 불성자리를 놓치지 않고 하면 그것이 바로 참다운 염불인 동시에 염불참선이 됩니다.

우리가 화두공안(話頭公案)을 의심한다하더라도 덮어놓고 무슨 문제를 의심만 죽자고 한다고 해서 참선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면목자리, 본래 진여불성자리.......

일체존재의 근본자리를 놓치지 않고서 그 자리에다 항시 마음을 두고 우리가 화두를 의심하고 그래야 이제 참다운 참선이 됩니다.

묵조선(黙照禪)에서 명상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공부나 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경을 욀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우리 마음을 생명의 실상인 그 자리에다 우리 마음을 두고서 공부한다고 생각할 때는 참다운 간경(看經)인 동시에 참선이고 모두가 그 가운데 다 포섭이 됩니다.

이렇게 하셔서 아까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선은 우리가 철학적으로 범신론을, 사상으로  투철하게 이른바 우리 사색을 그쪽으로 포괄을 다 시켜야 됩니다.

모두가 다 부처 아님이 없고 모두가 다 하나님 아님이 없다. 이렇게 돼 가면 그때는, 기독교나 불교나 이슬람교나 사실은 원래 진리가 둘이 아니고 셋이 아닌지라 모두가 똑같은 진리, 하나의 그야말로 참 아름다운 진리의 전당이 안 될 수가 없습니다.

이럴 때 지금 제일 두려운 것이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념적인 대립, 이념적인 대립이 제일 무서운 것인데, 이념적인 대립은 사실은 대립할 건더기도 없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잘못 봐서 우리 중생의 분별시비로 해서 이렇게 저렇게 억지로 대립을 하는 것이지 본래 진리의 자리는 대립이 없습니다.

본래가 다 하나고 또 위대한 선각자들은 다 그런 도리를 말씀을 했습니다.

그래서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3세기 때 나온 이집트 태생의 로마의 철학자 플로티노스(Plotinos)는 아주 모범적인 분이고, 서양철학의 어떠한 위대한 신학자들은 대체로 플로티노스의 사상을 섭렵하고 연구하지 않은 분이 없습니다.

우리 불자들, 우리 불교가운데는 그런 저런 모든 교설이 다 들어있고, 그보다도 플로티노스가 말한 일자(一者)보다도 훨썩 더 근원적인 즉 말하자면 본래 불성자리, 본래 불성자리는 이것은 꼭 불교만의 불성이 아니라, 불교에서 보면 불성(佛性)이고 기독교에서 보면 그때는 신성(神聖)이고 말입니다. 이슬람교에서 보면 그때는 알라의 그런 하나의 근원적인 생명체가 되겠지요.

이렇게 하셔서 우리가 사상적으로 조금도 마음에 갈등이 없이 부처님의 결정설을 공부하셔서 우리 마음이 항시 인심입명(安心立命)과 평화스러운 기분으로 행복스럽게 공부해 나아가시도록 하십시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시아본사석가모니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