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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마음의 고향

제19집 오종선(五種禪)

마음의 고향 제19집


* 1995년 1월 미국 삼보사(三寶寺)에서 동안거 중에 청화 큰스님께서 7일간 사부대중을 위해 순선안심탁마법회(純禪安心琢磨法會)를 펴셨습니다 그때 설하신 법문 태이프 가운데 1-7번까지는 이미 “마음의 고향” 제16집과 17집,18집으로 편집해서 출간한바 있고 나머지 8-10번까지를 큰스님 미국 순선안심탁마법회 완결편으로 “마음의 고향” 제19집으로 채록 편집 합니다


Ⅰ. 오종선(五種禪)

   선(禪)의 방법(方法)

   사선근(四善根)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참선 공부는 오랜 기다림과 끈기가 필요합니다.

단박에 무엇이 이루어지고 무슨 공덕이 나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속적으로 공을 들여서 몇 년이고 꾸준히 정진하다 보면 어느 땐가는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공(功)이 성숙되고 마치 씨앗을 뿌리면 그 종자가 땅 속에서 싹이 나고 꽃이 핀 다음에 비로소 열매를 맺듯이 우리 참선 공부도 그렇게 공을 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종자를 뿌리고 싹이 트고 자라고 익어지고 그래서 여물어진다는 말입니다. 저 같은 경우도 승려가 되어서 줄곧 참선만 했고, 참선에 가히 미쳤다고 하는 사람인데도 역시 한 사십이 넘어서니까 비로소 조금 트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것도 무슨 견성오도(見性悟道) 한 것이 아니라, 이른바 인후개통 획감로미(咽喉開通 獲甘露味)라, 목구멍이 툭 틔어서 감로 맛을 안다는 말입니다.

처음에 참선하는 사람들은 항시 목구멍이 칼칼하고 머리가 근질거리고 몸이 무겁고 그럽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애쓰고 하다보면 미련한 사람도 차근차근 맑아져 옵니다. 그러다가 어느 때 가서는 이 몸뚱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를 정도로 가볍고, 걸을 때도 공중으로 걷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때가옵니다. 오랫동안 참는 것이 그래서 필요합니다. 따라서 참선은 오랫동안 참는 것입니다. 참고 하다보면 어느 때에 가서 문득 별보고 깨닫고, 바람소리에 깨닫고, 깨닫는 순간은 그야말로 순간인 것입니다.

 그런데 보통은 참지 못하고 중간에 그르쳐 버립니다. 그래버리면 그저 참선했다는 것뿐이지, 그 동안의 공은 다 허물어지겠지요. 그러고서 다시 새판을 잡으려면 곤란스러운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평상시에 차근차근 책을 보거나, 누구와 대화를 하거나, 항시 진여불성의 본체를 안 여의면 손해가 없습니다.

 오종선이라, 참선이라는 것이 순수한 선 하나뿐인 것이지만 중생들의 마음과 정신을 통일하는 쪽에다 관심을 두고 조사 스님들이 풀이한 것이 있으니까 소개를 해드립니다.

 오종선, 이것은 도서(都序)에 있는 종밀선사(宗密禪師)의 풀이를 옮긴 것입니다. 오종선이라, 다섯 종류의 선이란 말입니다.

 외도(外道)가 하는 외도선(外道禪), 또는 범부 중생이 하는 범부선(凡夫禪), 또 소승이 하는 소승선(小乘禪), 최상승선(最上升禪), 이것을 오종선이라 합니다.


오종선(五種禪) 

1. 외도선(外道禪):인과(因果)를 불신(不信)하고, 유루공덕(有漏功德)을 위하여

                  닦음.

2. 범부선(凡夫禪):인과(因果)를 신(信)하고, 유루공덕(有漏功德)을 위하여

                  닦음.

3. 소승선(小乘禪):아공(我空)을 신(信)하고, 해탈(解脫)을 위하여 닦음.

4. 대승선(大乘禪):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을 신(信)하고, 해탈(解脫)을 위하

                  여 닦음.

5. 최상승선(最上升禪):여래선(如來禪)과 조사선(祖師禪), 본래 바로 부처로서

                      일체무루공덕(一切無漏功德)을 원만히 구족(具足)함을 신해

                      (信解)하고 닦는 선(禪).


 외도선은 불도가 아닌 외도들이 호흡법이나 마인드 컨트롤 등 요새 별스러운 것들이 다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은 모두 다 외도선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인과(因果)도 믿지 않고 그냥 참선을 하면 몸도 가볍고 건강도 도모하고 스테미너를 증진시키는 따위의 공덕을 바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텔레파시로 사람들의 생각도 알아맞히고 하는 그런 유위공덕(有爲功德), 인과를 믿지 않는 단계에서 하는 선을 외도선(外道禪)이라 합니다. 유루공덕(有漏功德), 이것은 때 묻은 공덕입니다. 말하자면 상(相)을 떠나지 못한, 자기라는 관념(觀念)을 떠나지 못한 공덕은 다 때 묻은 공덕입니다. 자기라는 상을 떠나버린 공덕이 되어야 무루공덕(無漏功德)이라, 때 묻지 않은 공덕입니다. 그러나 외도인들은 무아(無我)라는 관념이 없으니까 항시 자기를 중심으로 하는 때묻은 공덕 밖에는 모르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범부선(凡夫禪)이라, 범부선 이것은 비록 상(相)을 떠나버리지는 못했더라도 외도꾼 같이 때묻은 공덕은 아닙니다. 요익중생(饒益衆生)이라, 자기도 좋고 남도 좋은 일반중생의 공덕을 위해서 하는 선이 범부선(凡夫禪)입니다. 인과를 믿는다는 것은 선(善)을 행하면 반드시 안락(安樂)의 과보(果報)가 있고 악(惡)을 행하면 또 그 원인으로 인해서 고통의 보(報)가 따른다는 게 인과의 법칙입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정도로 소박하게 인과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외도꾼들은 인과를 믿지 않으니까 함부로 사기도 치고 뇌물도 먹고 하겠지요. 그러나 인과를 믿는 사람들은 그렇게 못합니다. 자기가 사기를 치고 뇌물을 먹고 나쁜 짓을 하면은 반드시 그에 따르는 업보를 받으니까 그렇게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불교인들이 혹시 나쁜 짓을 했다고 생각할 때는 그 사람은 인과를 믿지 않은 것입니다. 인과를 믿으면 부도덕한 행동을 할래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그 악보(惡報)를 받아 인생의 고과(苦果)가 따르니까 말입니다.

 그 다음에는 소승선(小乘禪)이라, 소승선 이것은 범부선보다는 좀 더 높아서 아공(我空)이라, 본래 나(我)라는 것은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 사대(四大)가 잠시간 모인 것에 불과하고 우리 마음이라는 것도 역시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이라, 감수하고 분별하고 느끼고 하는 그런 것들이 잠시간 모여 있을 뿐이지 실지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잠시간 모여서 무상(無常)한 것이 우리 범부인 아(我)란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我)라는 것은 본래 비었다고(空) 생각하고 이른바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 여기서의 아공(我空)은 오온개공(五蘊皆空) 까지는 미처 못 간 것입니다.

 그냥 나타나는 이 몸뚱이라는 것은 원소가 모여서 잠시간 된 것이고 내 마음도 역시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이라, 분별하고 느끼고 감수하는 그런 것들이 잠시 모여서 되었기 때문에 마음이라는 것도 역시 본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아공(我空)을 믿고 해탈을 위해서 닦는 선, 이것이 소승선(小乘禪)입니다.

 따라서 자기 몸뚱이에 대한 관념을 무상으로 분명히 느껴야 이른바 소승선도 됩니다.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제일 질긴 것이 자기(自己)라는 관념(觀念)입니다. 자기 몸뚱이, 또는 자기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고집 말입니다.

넷째로 대승선(大乘禪)은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이라, 자기도 비어 있지만 일체존재(一切存在)가 다 비어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관념이나 개념도 그 자체가 본래 있는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따라서 일체의 개념이나 자기라는 존재가 다 비었다고 믿고서 해탈(解脫)의 법을 닦는 것이 대승선(大乘禪)입니다. 여기까지 되면 그야말로 상당히 온 것이지요.

우리가 앉아서 망상도 하고 분별시비도 하는 것은 아공, 법공을 믿지 못하니까 그러는 것입니다. 남에게 좀 섭섭한 일을 당하면 그걸 가지고 마음고생을 하고, 배고프면 고프다고 생각하고, 추우면 춥다고 생각하고, 이런 것들이 다 허망무상(虛妄無常)한 것인데 이런 것들 때문에 자꾸만 망상이 생기고 진여불성 자리로 우리가 굳게 못 나간단 말입니다. 따라서 이런 것은 본래 자취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충분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일체법은 연기법(緣起法)입니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움직여 가는 것이지 실지로 고유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 육조단경의 혜능스님께서 말씀하신 본래 한 물건도 없다는 말입니다. ‘본래 아무 자취가 없는 것이니 어느 곳에 가서 티끌인들 있을 것인가?’ 이렇게 마음을 다 열어 버려야 됩니다. 그런데 다만 존재하는 것은 진여불성(眞如佛性)인 이 순수 생명자리 이것만 결국은 상주불멸(常住不滅)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공(空)에만 치우쳐 버려도 이것은 허무가 됩니다. 우리가 아공(我空), 법공(法空)을 그냥 말로만 느끼면 허무주의가 됩니다. 그러나 실지로 닦은 사람들은 그렇게 안 되는 것입니다.

 내가 공(空)해지고 모두 텅 비어지면 그와 더불어서 진여불성의 광명이 비춰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空)을 느껴도 닦아서 느끼는 사람은 공(空)에 떨어지지 않지만 말로만 또는 생각으로만 느끼면 공에 떨어지고 맙니다.

 다섯 번째 최상승선(最上乘禪)이라, 우리가 지금 문제시 하는 것은 최상승선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중국, 일본, 한국 등 동양의 대승권에서 하는 참선이 최상승선이지요. 여래선(如來禪)과 조사선(祖師禪)이 그것입니다. 여래선과 조사선의 싸움도 아주 치열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회통불교(會通佛敎)를 지향한다면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일본의 도원선사 같은 분도 이런 문제를 아주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원래 부처님 당시에는 여래선, 조사선이란 말도 없었던 것이고 달마에서 육조까지도 그런 말은 없었는데, 후대 중생들의 근기가 약해지니까 괜히 분별시비가 나와 가지고 여래선, 조사선을 서로 만들었다고 주장하며 싸우니 참으로 가련한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런 것 때문에 싸울 이유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하신 공부가 조사선이고 여래선이고 그런 것이지, 그것은 바로 일체방편을 떠나서 본래시불(本來是佛)이라, 내 마음이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그 마음 가운데는 무루지성품(無漏知性品)이 구족(具足)이라, 우리 마음이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 가운데는 일체의 공덕이 원만히 갖춰져 있다는 말입니다. 그 자리를 놓치지 않고 닦아야 참다운 여래선이고 조사선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최상승선(最上乘禪) 즉, 외도선이나 범부선, 소승선, 대승선 등을 훌쩍 뛰어 넘어서 최고의 정상인 최상승선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내 마음이 바로 부처고 내 마음 가운데는 모든 무량공덕이 다 들어있으며, 그 마음을 놓치지 않고 참구하는 선이 되어야 이른바 가장 고도한 참선인 최상승선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께서도 꼭 그렇게 하셔야 부처님 뜻을 따르는 것이고 또, 달마에서 육조까지의 순수한 순선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이른바 안심 법문(安心法門)이라, 우리 마음이 항시 편안합니다.

 내가 지금 못 나고 못 배웠다고 주눅들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부처님 공덕이 원만히 갖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도인은 무식해도 될 수가 있는 것이고 마음자리만 바로 찾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학문적으로 팔만대장경을 다 독파했다 하더라도 그런 것을 문제 삼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성자 마음이나 내 마음이나 하나의 마음인 것이고, 불성 가운데는 때 묻지 않은 일체공덕이 다 갖춰져 있고, 때 묻지 않은 무루공덕이 본래 갖춰져 있다는 사실을 오로지 믿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믿고 그 자리를 놓치지 않고 공부하는 것이 참다운 신앙이요, 참선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화두를 들어도 좋고 들지 않아도 무방한 것입니다.

참선공부는 여러분들께서 평생을 해야 할 공부입니다. 평생 동안 해야 할 가장 절실한 공부가 바로 불도(佛道)의 정문(正門)인 참선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정말로 우리가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됩니다. 허튼 짓을 하면은 절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미워해도, 너무 욕심을 부려도 참선에 장애가 됩니다.

왜 그런고 하면 나와 남이 본래 둘이 아니고, 어느 존재나 다 진여 연기법으로 해서 부처님의 화신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누구를 특별히 미워하고, 좋아하고, 욕심내고, 집단 이기심이나 개인 이기심을 낼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어야 진여불성 자리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모양은 참선 모양을 내면서 마음은 탐욕과 어리석은 그대로 있으면 참선과는 멀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몸으로 나타내는 행동과 입으로 하는 말과 생각하는 뜻이 모두 다 진리에 맞게 나아가야 참다운 참선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되풀이 합니다. 최상승선이라, 이것은 본래 바로 부처로서 일체무루공덕(一切無漏功德)을 원만히 구족(具足)함을 신해(信解)하고 닦는 선(禪)을 최상승선이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처럼 고도한 최상승선의 참선법은 먼저 이치를 알아야 됩니다. 이치를 모르고 덮어놓고 하면은 최고의 선이 될 수가 없습니다.

달마스님께서도 이입사행(二入四行)이라, 이치로(理入과 行入) 먼저 들어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달마선이란 이치로 먼저 들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래 부처라, 이 말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재가 불자님들은 본래 부처라는 이 말을 잘 새기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닦은 뒤에 부처가 아니라, 본래 처음부터서 부처란 말입니다.

그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은 나한테는 잘나나 못나나, 늙으나, 젊으나 누구나가 다 법신부처님의 무량공덕이 갖춰져 있다는 말입니다. 지혜나, 자비나, 원력이나, 다 원만히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분명히 믿어야 본래 부처라는 의미가 됩니다. 믿어도 그냥 무턱대고 믿는 것이 아니라 신해(信解)라, 믿어 의심치 않고 이치적 체계를 세워야 신해(信解)가 됩니다. 덮어놓고 믿으면 해(解)는 못되고 가까스로 신(信)만 되겠지요.

부처님 법문은 조금도 빠뜨림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 가르침이 소중한 것입니다. 더러는 ‘경(經)은 필요 없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것은 경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부처님께서 필요 없는 말씀을 하셨을 리가 만무할 것이고 필요 없는 것을 우리가 무엇 때문에 이천 오백년 동안을 소중하게 가꾸고 보존해 왔겠습니까? 다 우리 마음의 때를 없애고 우리를 부처님 자리로 돌아가게 하는 그런 법문입니다. 최상승선, 잘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절대로 자기 비하를 말으십시오. 우리는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천상천하에 누구에게도 꿀릴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석가모니만이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 아니라 사실로 들어가면 어느 누구나가 다 천상천하에서 자기가 제일입니다. 그렇게 생각해 버려야 매사에 자신이 생깁니다. 사업을 하나, 시험공부를 하나, 그런 자신을 가지고 하면 훨씬 더 사업도, 공부도 빠르게 됩니다. 제가 항시 비판을 듣는 문제는 어려운 법문을 하고 생활 법문을 잘 못한다는 것입니다. 생활이란 것이 무엇을 따로 두고 생활이라 하는지 모르겠지만 가장 좋은 생활이란, 바로 우주의 법도를 따르는 생활이 가장 좋은 생활입니다. 아무렇게나 먹고 마시고, 돈 벌고 하는 것이 좋은 생활이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마땅히 좀 어렵더라도 부처님 법에 따르는 생활이 참다운 생활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불교를 세속화 시켜 일반 대중들을 안일하게 만들고 종교를 재미로 하게 만들면 되겠습니까? 따라서 우리들은 고도한 법문을 대중 누구나가 다 알아듣게 이해를 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일반 불자님들이 공부를 좀 하셔야 합니다. 사제법문(四諦法門)이나 십이인연법문(十二因緣法門)을 보면 다 기가 막힌 법문들입니다. 모두 피가 되고 살이 되고 생명이 되는 진리들입니다. 공덕뿐만이 아니라, 당장 금생에 바로 행복이 오는 그런 법문이란 말입니다.

부처님 법대로 따르면 남편과 싸울 수도 없고 아내에게 무례하게 대할 수도 없으며, 자식에게 불신 받는 부모가 될 리가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스승에게 불손하게 대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대학에서나 사회에서나 젊은 사람들이 어른을 불신하는 것은 모두 부모가 부모답지 않고, 스승이 스승답지 않다는 말입니다. 도덕적으로 바르고 진리를 바르게 안다고 생각할 때는 가사, 기독교나 불교에 대해서 질문할 때 그것에 대해서 다른 점과 좋은 점들을 갖추어서 가르쳐 줄 수 있다면 그냥 다 승복할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믿는 것은 좋고 다른 종교는 아무 가치가 없는 것으로 말해버리면 젊은 사람들이 믿고 따르겠습니까?

 지금 젊은 사람들은 대체로 다 높은 교육들을 받았기 때문에 모두 총명한 사람들인데 우리가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설득을 시켜야지 덮어놓고 주장하고 강요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부모님들이 공부를 하셔야 됩니다. 불교를 어렵다고만 생각하지 말으십시오. 원리 몇 가지만 알아버리면 참 쉬운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본래불성, 이것은 우리 눈에는 안보이지만 분명히 우주에 영생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에너지가 흐르듯이…. 에너지 불멸 법칙이라, 다만 우리 중생들은 겉만 보니까 좋게 보이는 것은 긍정하고 그렇지 않으면 부정하지요. 그러나 우리가 근본 성품을 본다고 생각할 때는 겉에 좋은 것도 나쁠 수가 있고 겉에 나쁜 것도 좋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 가르침이나 성자의 가르침은 모두를 다 근본도리에서 봅니다. 하나님이나 아멘(Amen)이나 그것도 역시 근본 도리에서 보라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Aurelius)는 말했습니다. ‘참다운 주제는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에 의해서만이 있을 뿐이다.’ 이 말을 우리 불교식으로 해석하면, 우리가 불심을 떠나지 않고 우리 본 성품을 떠나지 않으면 된다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이제 선을 닦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1. 공안선(公案禪)ː 간화선(看話禪)이라고 하며 화두(話頭)에 대한 의단(疑團)을 참구(參                      究) 하는 선(禪).                    

2. 묵조선(黙照禪)ː 화두(話頭)없이 자성불심(自性佛心)을 묵조(黙照)하며 닦는 선(禪).

3. 염불선(念佛禪)ː 자심(自心)을 비롯한 일체존재(一切存在)가 본래로 부처요, 우주의 실                    상 (實相)이 바로 정토(淨土)임을 관념(觀念)하며 닦는 선(禪).



 선(禪)의 방법(方法)


선의 방법은 먼저, 화두를 참구하는 화두선(話頭禪) 즉, 공안선(公案禪)이 있고 또는 잠자코 참선하는 묵조선(黙照禪)이 있고 또 부처님 생각을 여의지 않고 닦는 염불선(念佛禪), 이렇게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다르게 말할 수도 있으나 편의적으로 이렇게 나누어 놓았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공안선, 이것은 간화선(看話禪)이라, 화두를 드는 선입니다.

공안(公案) 이것은 보통사람들이 함부로 할 수 없는 즉, 관청에서 나오는 공문서는 하나의 법규니까 일반 사람들이 함부로 할 수 없지 않습니까. 따라서 공안은 도인 즉, 성인들이 우리 중생에게 공부하게 하는 하나의 문구 즉, 상대를 떠나버린 절대적인 훌륭한 문구를 공안이라 합니다. 따라서 그런 성인들이 우리에게 분별시비를 없애고 우리를 성불로 인도하는 방법으로 상식을 떠나버린 짤막한 문제를 내주면 그것을 우리가 문제시 해 가지고 우리 마음을 불심(佛心)으로 접근시킨다는 말입니다. 공안이나 화두는 같은 뜻입니다. 화두에 대한 의단, 이것은 의심을 참구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냥 보통으로 하는 의심은 화두가 못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본래 면목자리, 본래 근본자리, 나의 본질은 무엇인가? 내 생명은 무엇인가? 또는 진여불성은 무엇인가? 달마스님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은 무엇인가?

달마스님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은 우리 중생의 미정(迷情)을 헤치고서 참다운 깨달음을 증(證)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모두가 다 진여불성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화두는 천 칠백 공안 모두가 본래 면목을 말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본래면목을 분명히 들어야만 이 화두가 됩니다. 그걸 들지 않고 의심만 하게 되면 기가 올라와서(上氣) 참선이 어렵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대중 안거를 하다보면 그런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언제 한번은 법랍도 많은 어떤 스님이 태안사에서 삼년결사 땐데 정진을 하면서 항시 머리를 만지며 안절부절 하다가 한 시간 정도 지나면 곧 죽을 것처럼 괴로워하곤 했습니다. 그렇게 한 일 년 반 정도를 가까스로 견디더니 나중에는 도저히 못 버티고 포기해 버리는 것을 봤습니다. 그 외에도 참선 중에 상기(上氣)되어 주저앉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것은 왜 그런가 하면 내 마음이 바로 부처이고, 내 마음자리는 무한무량의 공덕을 갖추고 있다하고 자기 마음에 들어있는 무량공덕을 분명히 믿지 못하니까 생기는 병통입니다. 사실 의심이란 것은 괴로운 작업입니다. 사람끼리도 못 믿고 의심하면 괴롭지 않습니까. 따라서 상대적인 의심은 화두가 아닙니다. 그래서 무자(無字) 화두나 이뭣꼬(是甚麽) 화두나 다 진여불성 자리를 제시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고 또 화두를 빨리 타파하라는 것이지 언제까지 화두를 붙들고 있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자나 깨나 의심을 위한 의심을 하고 있단 말입니다. 저 같은 사람도 몇 년 동안 잘못해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참선하는 분들은 누구나가 겪는 일입니다.

따라서 화두를 들 때는 이른바 그 시심마(是甚麽), 중국말로는 시삼마라 하고 우리식으로 하면 시심마가 됩니다. 그 뜻은 ‘이뭣꼬’인데 그냥 이것이 무엇인가? 저것이 무엇인가? 하는 그런 정도가 아니라 한 물건 자리, 이른바 자기 불성자리를 뜻합니다. 그 자리를 분명히 들어야 화두라 할 수 있습니다. 공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다음은 묵조선(黙照禪)이라, 지금 한국에는 묵조선이 별로 없으나 일본 선방에서는 화두를 드는 임제종과 또는 화두 없이 잠자코 명상식으로 비추어 보는 묵조선을 합니다. 일본 사람들은 양쪽을 대등하게 하고 있으며 또 황벽종은 주로 염불(念佛)을 화두(話頭)로 합니다. 일본은 지금 선이 세 종파가 있습니다. 묵조선은 화두 없이 자성불성(自性佛性)을 묵조(黙照)하며 닦는 선입니다. 중국 동산 양개스님 같은 분도 말하길, 분명히 자성불성을 비춰 보라고 했는데 지금 일본사람들이 하는 묵조는 묵묵부답하니 무념무상으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혼침도 많이 나오고 자기가 어디까지 간 줄도 모르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일본에서 나오는 책들을 참고로 보는데 너무나 따분하고 생기가 빠져있단 말입니다. 그걸 보면 그들은 자기들이 본래 묵조선의 조사(祖師)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임제스님이 화두 하셨다는 말은 없습니다. 한참을 내려오다가 대혜(大慧)스님 때 가서 화두가 정착됩니다. 따라서 그런 조사스님들은 어디에도 집착이 없습니다.

후대인들이 괜히 정형화 시켜가지고 무엇은 되고 무엇은 안 된다, 이렇게 분별시비를 일으켜 놓은 것입니다. 그래 놓으면 그에 속한 사람들은 다 따라가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에서는 그 당시 중국 선을 좋다고 다 따라가지 않았습니까? 보조 국사는 위대한 스님입니다. 그렇게 위대한 스님이지만 중국에 들어가 인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선 좋아하는 사람들이 인정을 안 해준단 말입니다.

지금은 그런 때가 아닙니다. 세계가 그야말로 하나로 뭉쳐야 하는 때입니다. 우리 불교가 하나가 되어 다른 민족과 대화를 해야 하는 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불교를 믿는다 하더라도 절대로 치우치게 믿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자기도 망치고 남도 망치고 아무에게도 도움이 안 됩니다. 지금도 아랍계들 싸우는 것 보십시오.

근본주의나 교조주의 같은 것은 결국 법집(法執)에 불과합니다. 법집이 되면 불교가 아닙니다.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로 그것은 참다운 진리가 아닙니다. 따라서 근본주의나 교조주의 그런 것들은 우리가 배제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꼭 자기 식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화두 하는 사람은 화두가 아니면 선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 것입니까? 석가모니나 달마스님이 그러셨겠습니까?

여기 계신 스님들이나 여러분들은 모두 엘리트들입니다. 대부분이 대학, 대학원에서 석사, 박사과정을 밟고 계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여러분들은 많은 사람들을 제도하실 분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절대로 치우치지 않고 공정하게 세계종교를 우리 품안에 안을 수 있는 그런 포용력으로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묵조선도 자성불심(自性佛心)을, 본래면목을 비춰봐야 참된 참선이 되겠지요. 자기 면목을 떠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참선이라는 것은 진여불성을 즉, 본체를 여의지 않는 것입니다. 진여불성의 본체를 여의지 않으면 아미타불을 부르나, 하느님을 부르나 상관없이 다 참선인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비로소 참다운 선(禪)이 됩니다.

 염불선(念佛禪), 이것은 자심(自心)을 비롯한 일체존재(一切存在)가 본래부처(本來佛)요, 또 우주의 실상이 바로 정토 극락세계임을 관념하며 닦는 선이 염불선입니다. 우리 마음이 오염되면 바로 지옥이 되고 악이 됩니다. 지옥이라 할 때는 두 차원으로 생각해야 됩니다. 마음만 따지는 사람들은 마음이 어두우면 지옥이지, 별도로 지옥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실존적인 지옥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우리 인간의 가상계(假相界)가 있고, 개나 소나 돼지들의 축생계가 있듯이 지옥도 역시 우리 인간의 눈에는 안보여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하나의 영적세계로 해서 고통 받는 세계가 있습니다. 그러면 극락세계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삼천대천  세계가 화장세계라, 사실 우리 중생이 몰라서 그렇지 성자가 본다고 생각할 때는 이대로가 바로 극락세계요, 화장세계인 것입니다. 중생의 어두운 삼독심(三毒心)으로 보니까  안 보이는 것이지요. 그러면 극락은 어디 따로 있는 것인가? 극락이란 지역적으로 따로 어디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성자들 사는 경계가 있습니다. 이른바 불교에서 말하는 색계천(色界天)에 있는 정거천(淨居天)이 바로 성자들이 사는 하늘입니다. 우주란 것은 무량무변(無量無邊)하기 때문에 이 법계(法界)는 한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무량무변한 세계에 있어서 성자는 어디에 있으나 극락을 수용합니다. 그런 성자만 사는 정거천(淨居天)이 이른바 극락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극락은 우리 마음의 번뇌를 떠나버리고 마음의 때를 다 벗어버려야 비로소 갈 수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염불을 한다하더라도 부처님은 저 극락세계에 계시고 내 몸 밖에 따로 어디 계신다. 이렇게 생각하면 그것은 참선이 못되는 것입니다.

 자성불(自性佛)이라, 부처님은 어디 안 계시는 곳이 없다(無所不在). 이렇게 생각하면서 부처를 찾아야 진정한 염불선인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은 선(禪)이란 개념 자체가 본래 성품을 떠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래성품을 떠나버리면 화두를 드나 무엇을 하나 그것은 참선이 아니란 말입니다. 지금 공부하시는 젊은 분들은 몇 마디만 하면 다 알 수 있는 문제인데 우리 같은 한문 세대들은 사고하는 것이 합리적이지 못하니까 꼭 자기가 하는 것만 옳다고 고집해 버립니다. 그래서 지금 종단의 종헌을 보면 원효스님이나 의상스님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없습니다. 다만 도일(道一) 스님이나 태고(太古) 스님 정도로 밖에 언급이 없단 말입니다. 원효대사가 도(道)가 더 높은지 도의스님이 더 높은지 누가 알겠습니까? 도인이 되었다고 생각할 때는 다 참선을 통했다고 봐야지요. 우리는 지금 그러한 형식 논리에 취할 때가 아닙니다.

 그러다가는 결국은 자기 마음도 좁아지고 우리 종단도 자꾸 풍파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수많은 종파가 생기고 하겠지요. 부처님 한 분을 우리 종주로 모시고 원효나 의상이나 도일 스님 등을 우리 선배로 모시면 되는 것이지 무슨 이유로 꼭 종파를 갈라서 따로 종교를 세울 필요가 있겠습니까?

 저는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가슴이 터질 지경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문제로 그렇게들 싸운단 말입니다. 이와 같이 공안선, 화두를 의심하는 선이나, 또는 화두 없이 그냥 명상적으로 잠자코 부처님을 무념무상(無念無想)으로 비춰보는 묵조선(黙照禪)이나, 또는 화두(話頭) 대신에 부처님을 확신하는 염불선(念佛禪)은, 일체가 부처임을 확신하고 믿는 선입니다. 내 마음이나 우주만유의 본래면목이 바로 부처님이다, 그 부처님의 대명사가 바로 아미타불이요, 관세음보살입니다. 저는 항시 드리는 말씀이지만 부처님 이름에 대해서도 우리는 회통을 시켜야 됩니다. 불교를 믿는 분들은 대개 부처님 명호에 대해서 관점이 산만합니다.

 지장보살을 부르는 분들은 지장보살의 공덕이 더 높다, 어느 선방에서는 지장보살을 만 불로 모신다는 소문도 들었습니다. 그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분들은 아마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 아미타불이 다 따로따로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지요.

부처님자리가 따로 있겠습니까? 오직 하나의 진여불성자리, 그 공덕이 무량무변하기 때문에 하나의 개념으로는 표현을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비론(慈悲論)적으로 봐서는 관세음보살, 또는 지혜로운 면으로 봐서는 문수보살, 우리 중생의 영혼을 인도하는 쪽으로는 지장보살, 그러고 총대명사로는 아미타불이란 말입니다. 만일, 부처님이 각기 따로 있다면 불교는 별로 좋은 종교가 못됩니다. 우리는 부처님 이름부터 회통을 시켜야 됩니다.

 부처님은 무량공덕이기 때문에 보살이나 부처님 이름이 제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결국은 부처님 공덕 가운데서 그 공덕 따라 붙은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 중생의 병고를 다스리는 쪽에서는 약사여래, 하늘에 있는 별을 떠올리면 칠성광여래(七星光如來)입니다.

 부처님의 진여불성이 산에 있으면 산신(山神)이고 물에 있으면 용왕(龍王)입니다. 불교는 모든 것을 하나로 합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일원주의라, 이렇게 되어야 비로소 안심법문입니다. 달마에서 육조까지 다 그런 법문입니다. 공안선이나 묵조선, 염불선 등은 모두 다 최상승선이기 때문에 어느 것이나 다 좋습니다.

 이행문(易行門)이라, 용수보살의 십주비파사론(十住毘婆沙論)에 보면 난행문(難行門), 이행문(易行門)이 나옵니다. ‘나는 부처니까 내 힘만 믿고 가면 부처가 된다.’ 자기 힘만 믿고 가는 것이 난행문이라, 어려울 난(難), 아주 힘들게 가는 방법입니다. 부처님의 공덕을 믿고 ‘나도 본래 부처다.’ 하고 그 공덕에 의지해서 가는 것을 쉬울 이(易)자, 이행문(易行門)이라, 이렇게 두 문을 나누어서 말했습니다.

 우리는 부처님을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믿는 그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 감성이란 것이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인간의 감성은 마음을 비약시킵니다. 우리가 객지에 나가서 고향에 대한 향수에 젖어보십시오. 부모님을 그리워하고 고향을 그리는 그 향수는 얼마나 맑고 순수합니까. 그렇듯이 우리 마음의 고향이 부처님인데 부처님은 하나의 이치가 아니라 바로 생명이라 내 생명의 고향이 바로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그 자리를 간절히 흠모하는 그것이 바로 우리 마음을 비약시킵니다.

법화경에서도 심회연모갈앙어불(心懷戀慕渴仰於佛)이라, 마음으로 부처님을 심회연모(心懷戀慕)라. 간절하게 갈앙하고 연모하는 그 마음이 우리 선근을 증장을 시키고 우리 마음을 비약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심오한 뜻이 있는 것이고 또 아미타경에 보면 일념왕생(一念往生)이라, 부처님을 그리워하는 순수한 그 한 생각이 극락왕생을 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생전에는 한 생각으로 해서 무엇이 이루어지기가 어렵겠지만, 새도 죽을 때는 가장 아름답고 슬픈 소리로 운다고 합니다. 나쁜 짓을 많이 한 사람도 죽을 때가 되면 마음이 선해집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은 본래가 선량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죽을 때 좋은 스승을 만나서 그 가르침 따라 부처님은 분명히 계시고 극락세계도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고서 일심(一心)으로 나무아미타불을 염(念)하면 그 마음으로 극락을 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경전에 나와 있는 말이니까 거짓말이 아니지요. 그렇게 우리 감성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감성을 소외시키고 내가 부처니까 내 힘으로만 성불한다고 생각하면 참으로 팍팍하고 힘이 듭니다. 기독교의 좋은 점이 그런 데에 있습니다. 지금 세계 인구의 17억이나 믿는 만큼 그 마음들이 소중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와 같은 강렬한 신앙이 나오겠지요. 너무 맹목적인 점들이 문제이기는 하지만 분명히 이치를 알고 믿으면 참 좋은 것입니다.




사선근(四善根) 


다음에 사선근(四善根)이라,

사선근(四善根):난법(煖法), 정법(頂法), 인법(忍法), 세제일법(世第一法)

 1. 난법(煖法):명득정(明得定)

 2. 정법(頂法):명증정(明增定)

 3. 인법(忍法):인순정(印順定)

 4. 세제일법(世第一法):구사론(俱舍論), 유식론(唯識論)

※사선근(四善根)은 견도전(見道前)의 가행정진(加行精進)이므로 사가행(四加行)이라고도 함,



 이 사선근 법문도 역시 능엄경과 구사론, 유식론 등에 있는 법문입니다. 일반 조사론에는 그냥 단박에(頓悟頓修) 되어 버린다는 쪽으로 주로 하기 때문에 이런 전문성 있는 법문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공부하는 사람들이나 재가 불자님들이 알아두시면 자기 점검을 하실 때에 필요합니다.

사선근, 이것은 우리가 견성오도 하기 전에 우리 선근을 더욱 증가시켜야 하는 네 가지를 말합니다. 난법, 정법, 인법, 세제일법상, 이것은 우리가 견성오도 하기 전에 즉 견도직전(見道直前)의 수행계위(修行階位)를 말합니다. 견성오도를 해야 참다운 자유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견성오도 하기 전에는 가짜 자유입니다. 따라서 미처 성자가 못 된다 하더라도 그 과정은  좀 알아야지 그걸 모르고 가다보면 여려 경계가 많이 있는 법인데 자기 공부가 얼마만치 되어 있는지 짐작을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선근 법문, 특히 능엄경 같은 경에는 우리가 점차로 올라가는데 대해서 아주 세밀하게 말씀해 놓았습니다. 또 구사론 같은데도 역시 공부하는 과정에 대해서 아주 자세하게 밝혀 놓았습니다.

이 사선근 가운데 난법(煖法) 이것은 명득정(明得定)이라, 불교는 주로 한문 문화권을 거쳐 온 지라 한문을 알면은 참 쉽습니다. 밝을 명(明)자 얻을 득(得)자, 우리 마음이 항시 어둡고 무겁다가 훤하게 밝아온다는 것입니다. 광명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시원해 오는 경계를 말합니다.

 맨 처음에 들어앉으면 마음이 답답하고 괴롭습니다. 그러나 참선을 꾸준히 하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마치 구름이 개이듯이 마음이 개운해 옵니다. 그래서 몸이 마치 전류에 감전 된 것처럼 찌릿찌릿해지기도 하고 머리에서 발끝까지 아주 시원스럽게 개어오는 것입니다. 이런 때가 난법(煖法)상, 이른바 명득정(明得定) 밝음을 얻었다는 경계입니다. 그만치 우리 인간이 선량해졌다는 증거가 되겠지요.

그러나 그 명득정, 맑음을 얻었어도 말 많이 하고 남하고 싸우고 함부로 행동하면 그것이 간 곳 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공부를 해서 명득정이라는 밝음을 얻었으면 그 자리를 행여 놓칠세라 소중하게 아끼면서 보다 더 깊이 공부해 들어가야 더 정화가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제 이는 정법(頂法)이라, 정법은 명증정(明增定)이라 밝은 기운이 들어온다는 말입니다. 밝을 명(明)자, 더할 증(增)자, 밝은 기운이 더 증가해서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밝은 기운이 희미했다가 공부를 더 하면 그때는 그 밝은 기운이 온 전신을 엄습한단 말입니다. 이런 때 기분 좋은 것은 다른 즐거움에 비교 할 수 없습니다. 그 어떤 세속적인 재미도 이것에 비할 바는 아닌 것입니다. 부처님 공부는 우리 건강을 도모함에 있어서도 비교급이 없습니다. 가사, 우리가 공부해서 몸도 시원하고 마음도 시원해지면 잔병치레 같은 것은 붙지 못하는 것입니다. 힌두교에서는 이른바 신비의학이라는 것이 있는데 정신수양으로 해서 병을 고친다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들이 아니기 때문에 몸이 정화되면 마음도 정화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 명증정은 우리 마음이 그만치 시원스럽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이 시원스러우면 자연히 혈액 순환이 왕성해지고 머리도 눈도 시원해지는 것입니다. 참선을 경험하신 분들은 다 아시지만 몇 시간을 눈을 뜨고 있어도 조금도 피로하지 않는 것입니다.

 공부하는 학생들이 그런 상태로 독서도 하고 공부를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따라서 명증정이라 밝은 기운이 우리 몸과 마음 전체로 들어와서 머리도, 눈도, 가슴도 훤히 트여 시원하고 다리도, 허리도 저리고 아프던 것이 다 풀려 개운하고 그러다가 제 삼에 인법(忍法)이라, 인법은 인순정(印順定)이라. 인법은 밝은 기운이 이제 후퇴하지 않음을 말합니다. 그 기운이 몸에 완전히 관성으로 배어서 후퇴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이 나쁜 짓을 못하게 되고, 욕심도 미운 생각도 사라지게 되며, 그것들이 다 허망한 줄을 알게 됩니다.

그러다가 거기에서 더욱더 공부를 정진해서 그 다음이 세제일법(世第一法)이라, 세제일법은 문자 그대로 세상에서 제일가는 법이란 뜻입니다. 견성이 아니기 때문에 아직 성자의 법은 못 되어도 세간적인 범부에서는 제일가는 법이 세제일법입니다.

이때에는 우리 마음이 맑아져서 그 가운데 훤한 광명이 비추는 이른바 심월(心月)이라, 마음 달이 비춰 온다는 것입니다. 심월이 비춰오면 그때는 공부가 후퇴하지 않는 법입니다. 그러나 심월까지 비처와도 도인의 경계가 아니기 때문에 함부로 해버리면 또 간 곳이 없게 됩니다. 따라서 경망한 사람들은 그 명득정, 몸이 좀 시원하고 알음알이도 좀 생기고 판단이 좀 잘되면 그만 공부가 다 되었다고 뛰어나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는 평생 거짓말쟁이가 되고 남도 어두운 길로 빠뜨리고 말겠지요. 따라서 이 사선근, 즉 명득정, 명증정, 인순정, 세제일법, 이런 경계에서 가짜 도인이 많이 나옵니다.

우리는 참으로 경계를 해야 됩니다. 이 사선근 법에 관해서 깊이 음미를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는 사선근 법은 일본 사람이 쓴 불교 책에도 잘 안 나온 것 같습니다. 더구나 우리 한국 선에서는 그저 단박에 되어버린다 하는(頓悟頓修)  화두 일변도로 나가기 때문에 이런 법문 체계가 나올 리 만무합니다. 그러나 능엄경이나 구사론 또는 유식론 등에는 이렇게 점차로 공부하는 법을 아주 착실하게 밝혀 놓았으니까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사실 공부할 때는 이런 경계를 꼭 거치는 것입니다. 다만 좀 빠르고 더딘 차이는 있겠지만…

 여러분들이 차근차근 공부를 하시다 보면 다 짐작이 되실 것입니다. 더러는 이런 경계를 한 번에 다 초월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개는 점차로 닦아서 서서히 가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다 개인의 품성이나 용맹정진의 힘 따라서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분명히 이것은 우리 범부가 거치는 선근이고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과정인지라 참고로 하시면 그때그때 우리 공부를 점검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위(位)를 몰라버리면 조금 기분이 좋고 밝아진 것 같으면 견성오도 한 것으로 알고 함부로 행동하고 묘각(妙覺)이라는 것도 함부로 생각해 버리는 우(遇)를 범하게 됩니다. 묘각(妙覺)이란 초지보살의 환희지(歡喜地)를 성취한 뒤에도 십지(十地)까지 올라가서 부처(佛界)를 성취해야 묘각인데 그걸 모른단 말입니다. 우리는 조사어록이나 불경을 보면서 한없이 겸허해야 됩니다. 겸손하게 조그만 자기 알음알이를 배제해야 교만심과 증상만을 피할 수 있습니다.

증상만(增上慢) 이것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못 깨닫고 깨달았다 하고 못 증하고 증했다고 거짓말 하는 것입니다. 이래 버리면 우리 수행자로서는 가장 큰 병입니다. 우리 승려는 그러면은 결국 승적을 박탈당하고 쫓겨나가는 것입니다. 도인 아니면서 도인인 척 하는 그것이 가장 무서운 병 아니겠습니까?

내 공부가 지금 어느 정도 이르렀는가? 이것을 훌륭한 스승이 곁에 있어서 점검을 해주면 좋지만 그런 스승이 없으면 자기 나름대로 한계를 몰라서 기분이 좀 좋으면 그만 공부가 다 되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이 사선근을 돌아가셔서 잘 보시고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난법(煖法), 이것은 밝음을 얻는 때고 정법은 더욱더 정화가 되고 맑음이 증가되어서 몸도 마음도 가슴도 시원하고 피가 맑아져서 순환도 잘 되고 그래서 자연히 건강도 좋아집니다. 선방 가서 보면 모두 약봉지들을 다 갖고 있어요. 그러면 공부를 잘 못했구나 하고 반성해야 합니다. 정말로 우리가 공부를 바로 하고 청정하게 생활할 때는 웬만한 병 같은 것은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명증정이라, 우리 몸도 마음도 가슴도 시원하다 생각할 때는 병균도 침범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 맑은 피가 흐르고 있는데 어떻게 에이즈나 암 따위가 침범 하겠습니까? 이렇게 하셔서 금생에 재가 불자님들도 도통은 못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세제일법(世第一法)이라, 세간에서 제일가는 이 법을 애쓰고 닦아 가노라면 언젠가는 견성오도 하시는 날이 올 것입니다. 모두 부지런히 닦아 가시기 바랍니다.

마음의 고향 제19집



 Ⅱ. 삼종사선(三種邪禪)

    선의 삼종병(三種病)과 팔재환(八災患)

    선정십종공덕(禪定十種功德)

우리는 지금 가장 큰 일을 위해서 모였습니다. 불교 말로 하면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이라, 이 세상만사 중대한 일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이른바 불교에서 말하는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입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생사해탈(生死解脫)의 공부가 가장 중요한 일대사(一大事), 즉 가장 큰일입니다.

우리는 보통 초상을 당한다던지 기타 관혼상제(冠婚喪祭)가 있으면 그런 일을 큰일이라고 합니다마는 그것은 세간적(世間的)인 큰일인 것이고 정작 큰일은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생사해탈의 문제입니다. 비단 지금 금생뿐이 아니라 영생불멸 하는 문제,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윤회를 벗어나는 문제, 우리 인간이 번뇌에 따라서 업을 짓고 업을 지으면 그것에 상응하는 과보를 받고 그리하여 뱅뱅 도는 그런 지겨운 윤회를 떠나서 해탈의 길로 가는 이 일이야말로 어느 누구한테나 가장 중요한 대사(大事)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모인 것은 그 대사를 위해서 모인 것입니다. 그럼 대사를 어떻게 치러야 할 것인가? 일대사인연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간단명료한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개시오입(開示悟入)이라, 열 개(開)자, 부처님 법문을 열어서 보인다는 말입니다. 불경이나 조사어록들은 모두 부처님 가르침을 우리에게 열어서 보이신 것입니다. 개시(開示)는 진리를 열어서 보이시는 것이고 그 다음에 오입(悟入)이라, 깨달을 오(悟)자, 들 입(入)자입니다. 우리 중생으로 하여금 가장 중요한 생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 인간성이 무엇인가?, 우리 자아 문제는 또 무엇인가? 사람들이 흔히 자아의 상실이라는 말들을 합니다마는 사실로 보면 성자 이외에는 모두가 다 자아를 상실해 있습니다. 성자만이 우주의 도리인 참다운 자아를 발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의 일대사는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중생들에게 생사해탈을 열어서 보이고 동시에 깨달아서 그 속에 들게 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깨달아서 우리 스스로 증명을 한단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그와 같이 철저합니다. 그냥 교리적인 이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개념적인 이해도 알아야 되겠지만 그와 아울러서 꼭 증명해 들어가야 생사해탈이라는 불교의 구경(究竟) 목적을 달성 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지도 할 때도 역시 꼭 그 사람에게 부처님 법을 여실하게 진리에 어긋나지 않게 가르쳐야 할 것이고 그와 동시에 깨달아서 자기 스스로 증명하도록 까지 해야 합니다. 그런데 깨닫는 법문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이 먼저 번 시간에 공개했던 참선입니다. “선(禪)”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사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하고 비중을 갖는 문제입니다. 어느 누구나가 다 참선을 해야 합니다. 자기를 찾는 공부 가운데서 가장 고도한 수행법이 참선인데, 모르면 할 수 없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안 다음에는 꼭 참선을 해야 합니다. 참선 그러면 아주 고도한 사람이나 하는 것이지 세간적인 사람은 엄두도 못내는 어려운 것이라 생각들을 합니다마는 참선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제일 쉬운 것입니다. 제가 결코 과장해서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참선이 왜 제일 쉬운 것인가, 참선은 조금도 무리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우리 몸에도 제일 편한 자세가 바로 가부좌한 자세입니다. 반듯하게 가부좌한 자세가 소화도 제일 잘되고 피도 가장 맑게 하는 것입니다. 용수 보살의 지도론에도 보면 “시가부좌좌 최안온불피극”(是跏趺坐坐 最安穩不疲極)이라, 가부좌 한 자세가 가장 편안하고 피로를 없앤다는 말입니다. 자세가 좋은 사람들은 건강도 좋습니다. 어디 앉더라도 삐뚤게 앉고 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소화도 잘 안되고 병도 오기 쉽습니다. 너무 긴장하지 않고 단정하고 꼿꼿하게 앉는 자세를 취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사상도 건전하고 건강도 그에 따라서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의 형태 구도 중에서도 정삼각형 같이 안정된 모습이 없지 않습니까. 피라미드를 보십시오. 이집트의 피라미드 그것도 역시 심심 미묘한 기하학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삼각주의 중심에다가 무엇을 두면 썩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모습이 바로 가부좌한 모습입니다. 따라서 우리 모습 가운데 가장 안정된 모습인 동시에 제이 석가라고 불리는 용수보살, 그 분 말씀에 “마왕견지 기심수포”(魔王見之 其心愁怖)라, 마왕들이 이 모습만 봐도 두려워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들의 사상이 확실하고 자세가 단정할 때는 그 어떤 삿된 기운도 우리를 침범하지 못합니다. 비스듬히 드러눕거나 엎드리거나 하는 자세 가운데 망상도 생기고 하는 것이지 우리가 바른 사색을 하고 바른 생각을 하고 바른 자세를 취한다고 할 때는 나쁜 기운이 근접을 못하는 것입니다. 남하고 대화를 할 때도 똑바로 단정하게 앉아서 정식으로 하게 되면 그 사람은 권위가 섭니다. 절대로 남이 섣불리 못하게 됩니다. 부처님 제자는 부처님 뜻에 따릅니다.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은 어떤 면에서나 가장 좋은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몸도 건강하고 마음도 편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끼치고, 따라서 우선 가부좌한 모습 자체가 그와 같이 훌륭한 것이고, 우리 마음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참선할 때는 가부좌하는 것이 원칙입니다마는 우리 마음 자세가 더 중요합니다. 설사 모양은 태산같이 든든하게 앉아있다 하더라도 마음으로 남을 미워하고 욕심내고 해서는 참선이 못 됩니다. 참선은 꼭 가부좌만 틀고 앉아서 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주인공은 역시 마음인지라 육조단경에 보면 “내 법은 본체를 여의지 않는다.” 성자의 법이란 어느 때나 본체를 떠나지 않습니다. 본체란 것은 근본 성품을 떠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절대적인 근본본체를 떠나서 자기 배운 대로 느끼고 현상만 보고 상식적으로 따집니다.

우리 상식이란 것은 위험천만한 것입니다. 우리가 금생에 나와서 보고 듣고 배운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따라서 십인십색(十人十色)이, 갑은 갑대로 느끼고 을은 을대로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사상이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겠지요. 배운 대로 느낀 대로 따지기 때문에 기성세대와 새로운 세대가 서로 뜻이 충돌하고 노동자나 사용자도 역시 자기 배운 대로 느낀 대로 주장하기 때문에 싸울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나 본체에 있어서는 모든 것이 다 동일한 본체입니다. 불교의 위대한 점은 하나의 진리로 해서 귀결을 시키는데 있습니다. 마음의 근원으로 귀결시키는 것이 성자들의 가르침의 특징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설사 우리가 어디 공장에 가서 일을 한다하더라도 할 일이 생기면 마땅히 해야겠지요. 부처님 법은 절대로 인연을 소홀히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무엇이든지 자기 인연 따라서 최선을 다하고 남보다 훨씬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상황에 임해야 합니다.

 일본사람들이 지금과 같은 풍요로운 기술문명을 열 수 있었던 것은 부처님 사상으로 무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네들은 불교가 아주 체질화가 되어 있어요. 저번에 고베의 대지진때 신문을 보니까 그 고도에서 사람들이 굉장히 침착하고 질서 있게 남보다 앞서 구출되려고 서두르지 않는 모습을 보고 미국 사람들이 아주 찬탄을 하고 박수를 보냈다는 소식을 신문에서 봤습니다마는 그 사람들은 불교가 몸에 배어 있어서 남이 보나 안 보나 매사에 성심을 다합니다. 그것은 부처님이라 하는 진리의 실체를 그들이 여의지 않고 산다는 증거입니다.

기독교를 잘 믿는 분들도 역시 하느님을 항시 여의지 않고 삽니다. 하나님이 바로 우주의 실체 아닙니까. 우리가 불교도라 해서 기독교의 하나님에 대해서 거부반응을 가질 이유가 조금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無所不在)하고 무소불능(無所不能)이라”. 어디에나 안 계시는 데가 없고 또는 능하지 않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진리인 동시에 우주의 실상입니다. 따라서 우선 그 개념으로 본다 하더라도 부처님의 법신이라, 석가모니가 나오고 안 나오고 관계없이 진리 자체인 부처님은 바로 우주의 생명 그 자체입니다.

 석가모니는 인간으로 해서 진리를 깨달았을 뿐인 것입니다. 예수도 사람으로서 우주의 진리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우주의 도리를 깨달으면 곧 우주와 하나가 됩니다. 따라서 그 때는 하나님이라 부르나 무엇이라고 부르나 상관이 없겠지요. 지금은 세계화 시대라고들 말합니다. 그리고 경제는 벌써 세계화가 되어 있지 않습니까, 다국적 기업 같은 것은 우리가 싫으나 좋으나 세계화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서로 사상적으로 교류하지 않을 수가 없고 인간적으로 교섭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다종교ㆍ다민족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지금은 사상의 혼란기입니다. 사상이 혼란스러우면 도덕도 혼란스럽게 됩니다. 이런 가운데에서는 모든 것을 하나로 합치는 통일원리가 필요합니다. 그 지도 원리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 21세기의 지도 원리는 어디에 있을 것인가?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 그 원리가 있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시대를 건설하고 이끌어간다고 할 때는 그것에 맞는 철학이 우리 불교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느끼면서 참선 문제도 생각해야 됩니다. 참선은 그러한 우주의 참다운 진리를 순간도 떠나지 않고서 공부하는 게 참선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진리란 것이, 없는 것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면 어려운 것이겠지만 본래시불(本來是佛)이라, 우리 마음이 본래 부처기 때문에 그저 마음의 도리에 따르면 되는 것입니다. 마치 기차가 레일을 바로 따라가야 궤도를 이탈하지 않고 전복되지 않듯이....... 우주의 도리에 따르면 되는 것입니다.

 성자의 진리란 것은 우주의 궤도(軌道)입니다. 우리가 성자의 길을 따르지 않는 것은 우주의 길에서 탈선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주의 도리에 따라서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가을이 가면 겨울이 오듯이 우리도 역시 우주의 도리에 따라야 살기가 편한 것입니다. 인간도 하나의 자연이니까. 우주의 도리란 무엇인가? 바로 우주는 하나의 생명이고 하나의 동일체입니다. 천지우주는 나와 더불어서 한 뿌리이기 때문에 살아있는 우리들도 모두 하나인 것입니다. 이러한 도리에 따르는 것이 참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 가르침은 중생의 그릇 따라서 하신 방편법문도 있지만 참선만큼은 바로 직설(直說)로 그대 마음이 바로 부처다, 즉심시불(卽心是佛) 일체종지(一切宗旨)의 근본성품(根本性品)이 부처다, 따라서 모든 여러 가지 사설을 다 배제하고서 그냥 바로 직통으로 우주의 핵심 진리로 들어간 것이 참선 공부입니다. 그래서 여러 방법으로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가사 외도인 들이 하는 그것은 모양은 가부좌도 하고 그럴듯하지만은 그들은 인과도 믿지 않고 또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이유도 모르면서 덮어놓고 합니다. 명상을 하고, 참선을 하면 기분도 좋아지고 힘도 나고 건강에도 좋다하는 정도로 하나의 유위공덕, 자기 이익을 위해서 계산부터 하는 그런 선은 진정한 참선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참선 공부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나한테 복이 온다거나 재물이 온다는 따위는 생각조차 없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가 부처가 되어야 한다는 일념(一念), 부처가 되면 그 어떤 복락도 그것에 다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냥 가볍게 생각할 때는 지금은 현대화 시대니까 생활불교를 해야 할 것인데 생활은 어떻게 하고 참선만 할 수 있겠는가, 하고 의문을 품을 수도 있겠지만 참선을 하는 것이 생활불교의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참선이라는 것은 근본도리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근본도리에만 따라 살면 남하고도 틀릴 일이 없고 집안도 화목하게 되고 또는 국가 간이나 민족 간에도 화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동일한 생명이라, 이렇게 생각하고 참선공부를 한다면 자기 몸이 어디에 있으나 무슨 일을 하던지 어떤 상황에 처해 있건 간에 모두가 다 참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증도가(證道歌)에 보면 그냥 가부좌 틀고 앉는 것만 참선이 아니라 행주좌와(行住坐臥)라, 앉으나 서나 모두 참선이란 말입니다. 이것은 본체를 여의지 않아야 그렇게 됩니다. 가사 우리가 밤에 잘 때도 삿된 생각이나 하고 텔레비전 같은 것에 정신을 팔고 잠이 들면 잠 잘 동안에 별별 꿈을 다 꾸게 됩니다. 그러면 결국에 몇 시간을 자도 몸만 피곤하고 휴식은 얻지 못합니다. 그러나 자는 순간에 마음을 정리하고 우리 생명의 고향이요 일체 진리의 고향인 부처님을 생각하고 잠이 든다고 생각 할 때는 잠자는 그 순간에 우리 마음은 부처님 쪽으로 지향을 합니다. 마치 시골들에서 논에 물꼬를 낼 때에 물꼬를 내는 대로 물이 흘러가듯이 그와 똑같이 우리가 자는 그 순간에 마음의 코스를 부처님한테로 고정 시키고 잔다면 우리 의식은 잠들어도 잠재의식은 부처님 쪽으로 끊임없이 공부를 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쁜 꿈도 꾸지 않고 몸도 개운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 법은 모든 면에서 다 편안한 것입니다. 이 참선 공부도 동양권의 대승불교에서(중국, 일본, 한국 등) 하는 참선법이 최상승법입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 이 말은 석가모니만이 천상천하에 제일 높다는 말이 아닙니다. 어느 누구나가 다 본래에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천상천하유아독존인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부처님이고 하느님입니다. 다만 자기가 번뇌에 가려서 모르고 있을 뿐이지요. 그렇게 느끼고 공부를 해야 이른바 최상승선(最上乘禪)이라, 가장 높은 최고의 참선이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삼종사선(三種邪禪)이라, 삿될 사(邪)자, 고요할 선(禪)자입니다. 참선을 해 가는 데는 장애가 많이 있습니다. 그 장애를 어떻게 없앨 것인가, 또 어떤 것이 나쁜 방법인가, 이런 것도 알아 두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까 말씀 드린 대로 참선은 선방에서 앉아서 하는 것만이 참선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무슨 일을 하던지 간에 우리 마음이 진리의 고향인 부처님한테 가 있을 때는 참선인 것입니다. 선방에 있다 하더라도 마음이 부질없는 망상만 하고 있다면 그것은 참선이 못됩니다. 꼭 부처님만 부르고 ‘이뭣꼬?’ 화두만 든다고 참선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설사 하느님을 부른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이 생명의 실상이요 우주만유의 본체인 진여불성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하나님을 부르나 ‘이뭣꼬’를 하나 ‘옴마니 반메훔’을 외우나 다 참선인 것입니다. 참선은 좁은 의미가 아니라 훌훌 털어 버리는 넓은 의미입니다. 참선은 부처에도 착(着)하지 않고 조사에도 착(着)하지 않습니다. 오직 진리에 따를 뿐입니다. 삼종사선(三種邪禪)이라, 세 가지 삿된 참선을 말하는 것인데 그 하나가 암증선(暗證禪)이요, 그리고 문자선(文字禪)이라. 오직 문자나 이론적인 개념으로만 따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야호선(野狐禪)이라, 들 야(野)자, 여우 호(狐)자. 여우란 놈은 재주와 꾀가 있어서 자기가 필요할 때는 세 개의 구멍을 판다고 합니다. 구멍을 한 개 파놓으면 적들이 침범하면 바로 잡히니까 세 개를 파놓고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면서 피한다고 합니다. 그와 같이 여우 모양으로 잔꾀를 부려 미처 못 통하고 통했다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재주가 좀 있고 위풍도 좀 갖추고 큰 소리 치면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도인처럼 보이기도 하겠지요. 못 통했으면서 통했다고 하고 증명하지 못했으면서 증명했다고 거짓말 하는 것이 야호선, 즉 여우같이 삿되게 하는 참선입니다. 먼저 암증선은, 부처님 가르침이나 조사 스님들 가르침에는 참선하는 방법과 진여불성 자리를 증명해 가는 과정을 우리에게 극명하게 밝혀 놓았는데도 게으른 사람들은 책도 보기 싫어하고 더구나 불경이 한문으로 되어 있는지라 보기가 좀 어렵고 하니까 그저 화두만 들고 다른 것은 다 무시를 해 버립니다. 우리 선방에서도 전혀 경을 못 보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불립문자(不立文字)라 해서, 물론 정진 할 때 경을 보면 방해가 되는 수가 있지만 그것은 특별한 경우입니다. 부처님 경전은 소중한 생명의 글입니다. 다 우리를 깨달음으로 이끄는 금옥 같은 글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경서나 훌륭한 선지식들의 말씀을 의지하지 않고서 덮어놓고 하는 참선을 암증선이라 합니다.

그렇게 암증선을 하면 자기 공부가 얼마나 진전 되었는지 스스로 점검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 놓으면 섣부른 걸 가지고 다 되었다고 교만심을 부리기도 하겠지요. 선지식들의 말씀도 곧이듣지 않고 남의 충고도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멋대로 행동할 때는 틀림없이 아만심(我慢心)에 빠지고 맙니다. 우리는 겸허하게 앞서간 선배들, 선지식들, 부처님 경전들을 충분히 참고로 해서 공부해 나가야 합니다.

그 말씀들은 모든 중생들이 성불에까지 이르는 길을 명료하고 소상하게 밝혀 놓은 길잡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길을 게으름 부리고 업장이 많으면 더디게 갈 것이고 부지런하고 업장이 가벼우면 훌쩍 뛰어 빨리 갈 수도 있겠지요. 우리가 그런 길을 무시하고 외면할 필요는  절대로 없습니다. 따라서 암증선을 피하기 위해서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 경전도 많이 보시고 특히 참선에 관한 여러 가지 책들도 보고 선배들에게 묻기도 하고 그렇게 해서 암중모색하는, 모르면서 헤매는 암증선을 피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문자선(文字禪)이라, 참선이라 하는 것은 실제로 마음을 닦아야 하는 것인데 경만 많이 보고 이론적인 쪽으로 너무 치우쳐서 실지로 참선을 않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불교인들은 아무리 바빠도 조석으로 한 삼십분 정도는 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죽어서 갈 때는 자기 몸뚱이마저 버리고 가지만 오직 생전에 닦은 법력만은 가지고 갑니다. 이것이 우리한테는 가장 큰 재산입니다. 따라서 평소에 조석으로 삼십분이면 하루 한 시간, 한 시간 정도면 그렁저렁 헛생각도 하고 그냥 지나가 버리는 그런 시간입니다. 여기 젊은 스님들도 있지만 이 분들은 하루에 다섯 시간도 못 잡니다. 재가 불자들도 하루 다섯 시간 정도 자면 충분합니다. 공부를 많이 하신 스님들은 안자고 몇 달이고 몇 년도 배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은 우리한테 갖추고 있는 진여불성, 우리 본성이 바로 부처기 때문에 우리가 정작 의지를 가지고 한다면 능히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바구라(Vakkula)존자라, 바구라존자는 부처님 십대 제자 중의 한 분입니다. 그 분은 140세를 사신 분인데 장수 제일 바구라라, 그 분은 자기 평생에 한 번도 누운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른바 장좌불와(長坐不臥)라, 항시 앉아서 생활했다고 합니다. 요새 장좌불와 하는 사람들을 보면 벽에 기대기도 하고 합니다마는 그 분은 한 번도 벽에 기대지도 않고 오로지 앉아서만 지냈다고 합니다. 장수제일(長壽第一)의 바구라존자는 음식도 하루 한 끼만 먹었다고 합니다. 그 분은 또 무병제일(無病第一)이라, 승려가 되어서 140세까지 살면서 한 번도 앓아누운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 할 때는 그렇게 무리를 하면 몸이 어떻게 당해 낼 것인가, 신경통도 생기고 영양실조로 쇠약해져서 쓰러지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 할 수도 있겠지만 무병제일(無病第一), 장수제일(長壽第一)의 바구라 존자, 그 분은 그와 같이 평생을 앉아서 하루 한 끼만 먹고도 무병하게 장수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한테 들어있는 부처님 기운, 우주의 정기 에너지는 무한한 힘이 있는 것입니다. 원자력 같은 것은 광파(光波)의 속도로 초속이 30만km나 되지 않습니까, 그것보다 훨씬 더 고성능의 기운이 우리에게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불성에 들어있는 그 기운을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대승신앙은 우리한테 들어있는 무한의 공덕을 믿는 것입니다.

불경(佛經)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들어있는 그 무한의 공덕을 믿으면 바로 “즉시입필정(卽時入必定)”이라, 그 믿음으로 바로 선정에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나한테 있는 무한력을 믿으면 즉시에 삼매에 들어간다는 것인 데도 못 믿으니 못 들어가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것은 성자의 말씀을 확신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땅히 문자도 많이 배우고 불경도 많이 봐야 되겠지만 참선을 해서 우리 마음을 자꾸 맑혀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경험하신 것처럼 반야심경 한 편을 보더라도 참선 한 철하고 볼 때와 두 철하고 볼 때와는 해석이 다릅니다. 똑같은 법문이지만 성자의 법문은 우주의 본질을 말한 법문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이 정화가 되면 정화된 만치 해석을 달리 합니다.

참선을 오랫동안 하고서 경을 보면 “그렇구나, 그렇구나” 하고 평소에 풀리지 않던 까다로운 문제가 자면서 꿈속에서도 문득 풀려 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무엇이든 일구월심으로 생각하면 우리 마음이란 것이 원래 뿌리가 부처이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풀리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저도 젊었을 한 번은 꿈을 꾸었는데, 도륜 스님이라는 도반하고 꿈에 어디를 가는데 아주 장엄한 궁전이 나왔어요. 그 궁전 앞에 문지기가 지키고 있었는데 그 문지기가 문 앞을 가로 막고 서서 자기가 묻는 말에 답을 못하면 못 들어간다고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물어보라고 하니까 저한테 먼저 묻기를 “지옥이 어디 있는가?”하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평소에 저한테 그런 질문을 했더라면 그때 당시는 삼십대도 미처 못된 나이라 선명한 답을 못했겠지요. 그런데 꿈에서는 아주 명쾌하니 “혜안관시지옥공(慧眼觀時 地獄空)”. 이렇게 대답이 나온단 말입니다. 혜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지옥은 공(空)이다. 평소 같았으면 그런 질문에 그 대답이 나오기가 어려웠을 텐데 꿈에서는 아주 명쾌하게 대답을 한 것입니다.

투철하게 혜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 지옥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혜안관시지옥공(慧眼觀時地獄空)”이라, 지옥이라는 것이 우리 중생의 어두운 눈으로 봐야 있는 것이지 정말로 맑고 투철한 마음으로 보면 지옥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상시에 무던하게 부처님 생각하고 정진하다보면 이런 때 신기하게 꿈에도 나올 수 있는 것이구나 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불교를 안 믿는 분도 고도의 수학문제 같은 것을 골똘하게 생각하다 보면 꿈에 그 문제가 풀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 정신이라는 것은 그렇게 소중한 것입니다. 그렇게 무한의 힘이 있는데도 우리는 아주 조금밖에 못 쓰고 사는 것입니다. 인간의 뇌 세포가 백억 개가 넘는다고 하지마는 결국은 십분의 일도 못 쓰고 산다고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 사상은 뇌 세포 문제가 아니라 무한의 능력을 내포해 있는 것이고 꼭 인간의 뇌에만 그것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처님 정기는 우주에 충만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성자들은 꼭 뇌 속에 들어있는 뇌세포만 가지고 이래저래 쓰는 것이 아니라 우주 에너지를 그대로 끌어다 쓰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부할 때는 허상(虛相)과 법상(法相)이 나옵니다. 허상 이것은 부질없는 상을 말합니다. 그런데 공부를 않고 한계를 모르는 사람들은 허상(虛相)과 법상(法相)을 구분 못합니다. 법상은 차근차근 챙기고 허상은 그냥 부정을 해 버리면 되는 것인데, 그 구분을 못하면 이래저래 손해를 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이나 선지식들 말씀을 참고로 해서 암중모색하는 그런 선은 피해야 합니다. 그리고 문자만 따지고 실수(實修)하지 않는 그런 문자선도 경계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경전을 대할 때도 적어도 그 경을 보기 전에 다만 몇 분이라도 고요히 마음을 가다듬고 참선을 하고 봐야 경전의 뜻과 내용의 갈래가 잡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경장과 논장을 다 외운다 해도 그것이 갈래가 안 잡히고 통일이 안 되면 자기 것이 못 됩니다. 이른바 문리(文理)를 알아야 할 것인데 문리를 모르면 가닥을 못 잡습니다. 참선과 더불어 해야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하나하나 가닥이 잡히는 것입니다.

더구나 야호선(野狐禪)이라, 여우같이 교만한 짓은 정말로 우리가 피해야 됩니다. 기독교 사회나 불교 사회나 여우같은 무리들이 없지 않습니다. 그래 놓으면 자기도 망치고 남도 망칩니다. 한 소경이 무수 소경을 인도하다가 수렁으로 몰아놓는 것이나 똑같은 것입니다.

불경에도 그런 구절이 있습니다. 일맹인중맹(一盲引衆盲)이라, 한 소경이 많은 소경을 데려다가 한 함정에 빠져 죽는다는 얘기지요. 그것은 잘못된 스승이 이끌면 그리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남을 지도 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렵고 두려운 문제입니다. 그래서 잘못 지도한 사람은 불교 말로 병도사(病導師)라 그럽니다. 우리 중생을 병들게 만든다는 말입니다. 부처님 법대로 여실하게 말하고 증명하지 않고서 꼭 자기 의견을 보태서 함부로 말한단 말입니다. 우리는 남을 지도할 때 병도사(病導師)를 피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처님 법을 말할 때 자기가 잘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는 꼭 그대로 옮겨주고 자기가 정리한 것만 남한테 밝혀야 하는 것입니다.


                  

 선(禪)의 삼종병(三種病) 



o 선(禪)의 삼종병(三種病):미도주작(未到走作), 이도주착(已到住着), 투탈무의(透脫無依)

o 선(禪)의 팔재환(八災患):우(憂), 희(喜), 고(苦), 락(樂), 심(尋), 사(伺), 입식(入息), 출식                              (出息)

그 다음에 선(禪)의 삼종병(三種病)이라, 선에는 세 가지 병이 있습니다.

그 한 가지는 미도주작(未到走作)이라, 미처 이루지 못하고 이럴까 저럴까 방황하고 헤매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력을 다하고 부지런히 노력해서 하루 빨리 부처가 되어야겠다는 분신(奮迅)은 좋습니다마는 그렇게 공부는 별로 않고 기분만 앞서서 빨리 도인 행세하고 싶고 남 앞에 나서고 싶어서 서둘러서 가는 것을 미도주작이라 합니다. 이렇게 되면 마음만 바쁩니다. 참선할 때 마음이 차분해야 호흡도 조용해집니다. 호흡과 참선은 중요한 상관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호흡법도 중요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에도 초기에는 중생을 제도 할 때에 부정관(不淨觀)이라, 우리 몸뚱이는 모두가 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부정하고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다. 어머니 뱃속에서 나올 때부터 죽을 때까지 죽으면 썩어서 문드러지고 처음부터 끝까지 더러운 것뿐이다. 우리가 죄업을 짓는 원인은 대체로 자기 몸뚱이를 금 쪽같이 아끼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것인데, 이렇게 부정하고 더러운 몸뚱이를 아끼고 말고 할 것이 없다라고 관찰하는 것이 부정관입니다. 그런 관법(灌法)이 있고 또 한 가지는 호흡관(呼吸觀)이 있습니다. 호흡수를 헤아리기도 하고 멈추기도 하고 그렇게 해가면서 참선을 하는 것인데 호흡법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인도의 요가수트라 같은 것은 주로 호흡법을 수행으로 하는 방법인데, 결국 참선하는 자세를 올곧게 만드는 행법들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마는 마음이 산란스러워서 참선이 잘 안 되는 사람들은 참선하기 전에 얼마 동안이라도 호흡을 고르게 하는 것은 참 좋은 것입니다. 호흡을 고르게 하려면  되도록 숨을 느리게 쉬고 들숨과 날숨을 조절해서 될수록 들숨보다 날숨을 길게 쉬어야 합니다. 또는 유식(遊息)이라 해서 호흡을 오래 멈추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호흡이 저 아래 단전까지 쑥 들어가서 마음이 차분해지고 호흡도 점점 느려져서 차근차근 참선이 익어지면 그때는 자기가 숨을 쉬고 있는지 없는지도 느끼지 못하는 단계가 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호흡이 딱 끊어져 버립니다. 참선하는 사람들은 자기 호흡이 끊어질 정도로 숨결의 고요함을 느껴야 됩니다. 그러면 지식(止息)이라, 지식(止息)이 되어야 참다운 삼매에 들어갑니다. 그와 같이 호흡은 우리 마음의 상황 따라서 그것에 상응된 문제이기 때문에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부처님 법은 화두나 염불이나 주문이나 자기 인연 따라서 해야 되지만 잘 안 되는 경우는 처음 몇 분 동안을 자기 호흡을 다스리고 몸과 마음을 추스르는 것이 하나의 방편으로 중요합니다. 따라서 너무 서두르지 말고 해야 합니다.

다음이 이도주착(已到走着)이라, 공부가 무던히 되어서 재미가 붙는다는 말입니다. 몸과 마음이 텅 비어 오고 지적인 면에서도 그 전보다 훨씬 명석해지고 그 만족감에 이만하면 되었다 싶어 그 자리에 머물러 버린단 말입니다. 그것이 도인의 경지가 아닌데 몸과 마음이 좀 개운해지면 그만 그 자리에 집착을 해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공부는 더 이상 진전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이도주착(已到走着)이라 합니다. 이미 어느 경계에 이르러 그것에 머물러 버린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는 투탈무의(透脫無依)라, 투탈무의는 아무 것에도 의지 할 바 없이 모두가 다 허망무상(虛妄無常)하고 텅텅 비어있다 이렇게 너무나 공(空)사상에 젖어서 공에만 치우치고 다른 것에는 조금도 의지를 두지 않는 것이 투탈무의입니다. 따라서 이런 세 가지 참선병을 치유하셔야 합니다.

또 참선에 있어서 팔재환(八災患)이라, 여덟 가지 장애가 있습니다. 참선하다 보면 쑥쑥 잘 나가는 것이 아니라 환경도 좋고 신심도 있고 또 방법도 잘 알지만은 그렇다고 그냥 잘 나가지만은 않습니다. 우리가 전생에 지은 번뇌도 있고 금생에 잘 못보고 배운 습들도 있어서 그런 것들이 걸려서 장애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런 때는 이것이 바로 장애들이구나 하고 바로 알고 극복을 하셔야 됩니다.

팔재환은 어떤 것이고 하면 우(憂)라, 우리는 지금 닥치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공연히 지어 근심을 합니다. 가까운 인연이 죽지나 않을까, 사업이 망하지 않을까, 내 자식들이 잘못되지 않을까 등등으로 필요 없는 걱정을 자꾸 많이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 자체가 그러한 분별시비를 끊임없이 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사회활동을 하다보면 자연히 부질없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고 그런가 하면 또 남이 나를 칭찬할 것인가, 큰 상을 받을 것인가, 이런 생각도 합니다. 이것은 기쁠 희(喜)자, 희(喜)라. 그 다음은 고(苦)라, 여러 환경적인 요소가 춥고 덥고 또 너무 편해도 혼침이 와서 괴롭고 따뜻하고 안락하면 혼침이 더 빨리 옵니다. 추우면 추워서 따뜻한 것을 바라는 망상이 나오고 이런 것들이 다 고(苦)에 해당됩니다.

그 다음은 찾을 심(尋)자, 심(尋) 이것은 거치러 운 분별을 심으로 표현하고 살필 사(伺)자, 이것은 조금 더 미세한 분별을 말합니다. 우리가 성자가 되어서 우주를 통관하는 하나의 진리, 그 자리를 보기 전에는 항시 망상이 나옵니다. 인생과 우주의 근본자리인 진여불성을 견성해 버려야 망상이 끝나지 그전에는 공부를 좀 했다하더라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항시 다소간의 망상이 나옵니다.

따라서 거치러 운 분별인 심(尋) 또는 미세한 분별인 사(伺), 여기에서 거친 분별은 바로 근래에 당한 분별이고 미세한 분별은 과거 어렸을 때 또는 아주 오래 전에 있었던 그런 일들이 자꾸 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평소에는 잊고 있었던 것들도 가만히 앉아 있으면 마치 연기처럼 망상이 피어나옵니다.

우리가 생활 하면서 세속적인 탁류에 휩싸여 같이 흘러 버리면 모르는데 세속적인 버릇들과 대항해서 성불의 길로 갈려고 생각할 때는 마치 시냇물로 비유하면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꾸만 장애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리저리 걸리기도 하고 부딪치기도 하면서….

 이와 같이 분별시비가 걸리고 몸이 피로하면 또 혼침이 오고…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께서 나중에 참선을 오래 하시게 되면 가급적으로 활동도 좀 줄이고 말도 줄여서 에너지 소모를 막아야 합니다. 에너지를 너무 소모하면 머리도 흐릿해지고 잠도 더 빨리 오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선할 때는 될수록 불교 전문술어로 말하면 신구의삼함(身口意三緘)이라, 석 삼(三)자, 봉할 함(緘)자. 될 수록 활동을 적게 하고 말도 적게 하고 뜻으로 헤아리지 않고 이 셋(신ㆍ구ㆍ의)을 닫아버리면 참선하기가 쉬운데, 그렇게 못하면 어렵습니다.

저도 옛날에 혼자 공부하다가 장작을 패보기도 하고 지개 지고 나무도 해보고 그러다가 너무 과로해서 도리어 공부에 장애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와 같이 너무 피로하게 일을 해도 참선 공부에는 손해가 되니까 참선 할 때는 모든 생활을 너무 긴장되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긴장하면 그만치 에너지 소모가 많이 되니까 몸과 마음을 느긋하게 조절해야 됩니다.

앞서도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일거일동(一擧一動)이 사급취완(捨急取緩)이라, 하나하나의 행동을 느긋하게 할 것이지 급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분별 시비를 여의고, 그 다음에는 입식(入息)이라, 우리가 들이마시는 숨입니다. 출식(出息)은 내쉬는 숨이고, 참선을 오래 하신 분들은 짐작을 하시겠습니다마는 호흡이 장애가 됩니다. 호흡이 잘 안되어서 공부가 잘 못나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무던하게 오래 하다 보면 어느 땐가는 자기 호흡을 스스로 느끼지 못할 정도로 고요해지는 경계가 옵니다. 목과 머리가 툭 틔어서 온몸이 어느 한 곳 막힘없이 시원한 때가 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상당히 오랫동안 수련을 해야 되겠지요. 그러나 초기에는 숨 쉬는 호흡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방이 따뜻하면 한 대로 코가 막히고 추우면 또 감기 같은 질환이 공부를 방해합니다. 축농증이 있는 사람들은 다 고쳐 가지고 참선을 해야지 그냥 앉아 버티면 어려움이 많습니다. 따라서 호흡 즉 들숨, 날숨 이런 숨들이 자기가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까 말한 사선정(四禪定)에서는 호흡이 딱 끊어지는 것입니다. 호흡이 끊어지면 그 때는 통신호흡(通身呼吸)이라, 우리의 생명 파장이 법계로 들어가서 우주의 순수 에너지와 만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성자의 경지입니다. 호흡은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번뇌가 많으면 많을수록 거칠고, 번뇌가 적으면 적을수록 호흡이 고요해서 공부도 그것에 정비례해져 가다가 나중에는 딱 정지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복식호흡, 아랫배 단전으로 하는 호흡에서 더 나아가서 통신호흡(通身呼吸)이라, 스스로는 느낄 수 없으나 몸 전체가 호흡을 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우주호흡, 법계호흡이라. 그 때는 우주의 파장과 맞아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조금도 자기 몸에 대해서 부담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런 단계가 되면 삼매에 들어 신통 자재할 수가 있겠지요.

요가수트라에 보면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우리가 한 시간 동안 호흡을 멈추고 있다고 생각할 때는 손가락 하나 위에다가도 자기 몸을 세울 수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 인간의 정신이라는 것은 훈련하기 따라서 아주 기기묘묘한 것입니다. 서커스 같은 것도 보십시오. 훈련에 의해서 그런 고난도의 재주를 다 부리는데 하물며, 성자의 길에서 우리 마음을 수련시켜 무한의 공덕이 있는 불성까지 도달한다고 생각할 때는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아무튼 우리가 부질없이 근심하고 지나치게 기뻐할 것이 없습니다. 젊었을 때는 참선하다가도 큰 소리로 웃기도 하고 그럽니다마는 그러는 것은 참선이 깊어지지 않아서 그럽니다. 그러는 동안에 참선 기운이 도망가고 맙니다. 될수록 고요한 기운이 세지 않도록 잘 지켜야 합니다. 이른바 보임수행(保任修行)이라, 이렇게 해야 우리 공부가 차근차근 익어집니다.



  선정십종공덕(禪定十種功德)




 o선정십종공덕(禪定十種功德):1. 안주의식(安住儀式) 2. 행자경계(行慈境界) 3. 무번뇌                                  (無煩惱) 4.수호제근(守護諸根) 5.무식희락(無食喜樂)                                   6. 원리애욕(遠離愛慾) 7. 수선불공(修禪不空) 8. 해탈마견                                 (解脫魔羂) 9. 안주불경(安住佛境) 10. 해탈성숙(解脫成熟)


그 다음에는 선정십종공덕(禪定十種功德)이라, 경에 보면 참선을 하면 많은 공덕이 있다고 나와 있습니다. 무량공덕이 있으나 간추려서 열 가지로 정리합니다.

제일의 안주의식(安住儀式)이라, 이것은 우리가 참선을 하면 항시 점잖은 행동을 취한다는 말입니다. 거친 말과 행동이 가라앉고 남에게 나쁜 말도 하지 않게 되며, 오직 우주의 도리, 참다운 진여불성에 따르게 됩니다. 따라서 그것에 가까워지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몸도 마음도 안정이 취해지고 또는 부당한 일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생활을 위해서 장사를 하더라도 그것이 나와 남을 위해서 유익한 것인가, 설사 돈을 많이 번다하더라도 자기와 남에게 유익하지 않으면 하지 않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정당한 행동을 취하게 되는 이것이 안주의식입니다.

그 다음 두 번째는 행자경계(行慈境界)라, 이것은 자비심이 절로 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자비심을 안 나오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나와 남은 다르다고 생각하는 이기심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본래 한 생명에서 나온 한 몸이요, 우주는 결국 동일률(同一律)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생각하고 공부를 해 나간다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자비심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은 자비스러우며 용서도 잘 하는 것입니다.

제 삼에는 무 번뇌(無煩惱)라, 번뇌가 없다는 말입니다. 쓸데없는 생각이 번뇌 아닙니까, 진리에 입각해서 항시 진리만 생각하고 진리에 따라서 정화가 되고 하는 사람들은 번뇌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참선공덕을 무 번뇌라 하고,

제 사에는 수호제근(守護諸根)이라, 이것은 눈ㆍ코ㆍ입, 우리가 보는 시각ㆍ청각ㆍ후각 등은 몸에 문제가 생기면 온전치 못하게 됩니다. 물론 병적인 것도 있겠지마는 참선을 하면 이런 것이 다 풀리는 것입니다. 눈이 나쁜 사람들도 참선을 많이 하면 시력과 청각이 밝아집니다. 따라서 칠, 팔십이 되도록 끝끝내 참선한 사람들은 늙어도 노소를 별로 타지 않습니다.

수호제근(守護諸根), 이것은 시각ㆍ청각ㆍ후각ㆍ미각 등 이런 것들이 온전하게 보호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큰스님들은 중생제도 때문에 항시 무리를 많이 합니다. 힘든 데를 가시기도 하고 묵언하고 싶어도 말을 해야 하고, 할 수 없이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니까 무리를 해서 몸을 상하게도 되지요. 그렇지 않고 선방에서 공부만 하고 지낼 수 있다면 항시 병 없이 건강하게 지낼 수 있는 것입니다.

제 오에는 무식희락(無食喜樂)이라, 먹지 않아도 기쁨을 느낀다는 말입니다. 일반 사람들이야 만반진숙에 맛있는 음식으로 기쁨을 느끼겠지만, 공부하는 사람들은 참선하는 맛이 음식에서 느끼는 맛과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 몸과 마음도 개운하고 평소에 몰랐던 것도 다 알아지고 항시 컨디션이 가볍고 좋은데 무슨 음식에 마음이 가겠습니까. 많이 먹으면 먹은 만큼 부담스럽고 몸도 무거운 것입니다. 음식은 적게 먹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따라서 부처님 식으로 먹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삼세제불일종(三世諸佛日種)이라, 삼세제불은 다 하루 한 끼만 자시는 것입니다. 원래 선방도 백장청규에서 보면 아침에 죽 조금 먹고 낮에 한 끼 먹고 오후에는 불식(不食)을 다 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세상이 변하고 너무나 환경도 오염 되고 해서 건강을 유지하기가 어려우니까 조금씩 먹는 것은 무방하겠습니다마는 가급적이면 적게 먹는 것이 우선 비만증을 방지하고 소식(小食)을 하면 소화도 잘되고 또 피도 맑아지며 머리도 훨씬 더 총명해 집니다.

저번에 신문을 보니까 텍사스 주립 대학에 있는 교수가 한국 사람인데 올해 64세가 된 사람입니다. 그이가 노화방지 위원장인데 그분은 일반 교수인데도 하루 한 끼만 먹는다고 했어요. 오후 두시에 한 끼만 먹는데도 몇 십 년을 한 번도 아파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장수의 비결은 결국 소식(小食)이라, 적게 먹는데서 장수의 비결이 있다는 것입니다. 학자들이 정확한 실험과 데이터를 낸 것이니까 거짓말이 아니겠지요. 그런 것은 참고로 해야 할 문제입니다. 나이 많은 분들도 억지로 배고프게 할 필요는 없다하더라도 가급적이면 미식을 마십시오. 고기나 기름기 많은 음식들은 문명병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 현대 병리학자들이 다 밝히고 있지 않습니까.

그 다음 육에는 원리애욕(遠離愛慾)이라, 이성간의 욕심이 애욕 아닙니까. 공부하는 분들이 가장 깨기 어려운 것이 역시 이성간의 애욕입니다. 우리 스님이라 해서 애욕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건강한 사람일수록 애욕 때문에 고민을 많이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간 주의하고 조심하며 공부를 해야 이루는 것이지 그렇지 못하고 어떤 상황을 함부로 취하고 조금만 방심하면 걸려 들어가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보리수하에서 성불하실 적에 마지막 순간까지 삼천녀(三天女)라, 삼천녀가 나와서 방해를 합니다. 삼천녀는 결국 우리 마음의 애욕의 상징이 되겠지요. 그와 같이 욕계 중생은 몸을 받은 이상 그런 욕심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남ㆍ여 이성간의 욕심, 음식 욕심, 또는 잠 욕심, 이것이 욕계의 세 가지 큰 욕심이고 그 나머지의 부수적인 욕심은 한도 끝도 없는 데 가장 큰 것이 이성욕(異性慾)ㆍ수면욕(睡眠慾)ㆍ식욕(食慾)입니다. 그러나 다른 천상에는 이런 욕심이 없습니다. 우리 욕계에만 있는 것입니다. 욕계를 떠나 버리면 그런 욕심은 없어집니다. 따라서 색계(色界)라, 눈에 보이는 세계만 따지는 분들은 색계나 무색계를 다 무시 합니다. 그런 것은 마음에 있는 것이지 어디 실지로 있을 것인가. 이렇게 생각합니다마는 그러는 우리 인간도 제법공도리(諸法空道理)에서 보면 인간 세상도 없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인간은 지금 가상(假相)으로 꿈같이 존재하는 것이지 실존적으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불공을 모실 때에 수월도량(水月道場)이라, 수월이란 물 수(水)자, 달 월(月)자, 물속에 있는 달은 실재가 아니라 달그림자에 불과한 것이 듯이 우리가 불공을 모시는 절이나 모든 도량이 물속에 달그림자처럼 사실로 있지가 않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인간도 달 속에 비친 그림자 같이 또는 허깨비같이 가상(假相)으로 존재(存在)하는 것을 우리는 잘 모르고서 곧이곧대로 참말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른바 인간은 실존(實存)이 아닙니다.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 soren Aabye 1813-1855)같은 사람도 아주 훌륭한 실존주의 철학자이기 때문에 굉장히 좋은 말을 많이 했습니다. “참다운 실존은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찾을 수 있다.” 영원적인 차원에서 참다운 실존이 있는 것이지 다른 모든 것들은 항시 무상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도 달 속에 비친 그림자와 마찬가지고 또 색계나 무색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만 있기는 있습니다. 결코 허무가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 인간도 허망(虛妄)한 것이지만 이와 같이 있지 않습니까. 내일 죽을지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이렇게 있는 것입니다. 한시도 멈춤 없이 변화무상하고 허망하지만 이렇게 인간이 존재하듯이 색계도 존재합니다. 색계에 올라가면 남녀 이성은 없습니다. 우리 사람 같은 존재만이 남녀가 결합을 합니다. 우리는 그걸 알아야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성한 종교를 따르는 사람들은 신부나 수녀, 비구ㆍ비구니처럼 독신을 합니다. 그러나 누구나 다 결혼을 하지 말라는 말은 절대로 아닙니다. 다만 오로지 본래의 자기, 신성한 본래의 생명을 찾는다고 할 때는 가정을 가져 놓으면 분명히 장애가 됩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 자기의 아들이나 딸도 참다운 종교를 만나고 친척이나 가까운 인연들도 참된 종교생활을 하고 또 열심히 일해서 좋은 일도 많이 하고 그렇게 하면 공덕이 되겠지요.

원리애욕(遠離愛慾)이라, 우리가 참선을 하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차근차근 애욕이 희박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차츰 희박해지다가 우리가 불성광명(佛性光明)의 참다운 진리를 체험한 뒤에는 완전히 애욕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 다음 제 칠에 가서 수선불공(修禪不空)이라, 우리가 제법(諸法)이 공(空)이다, 오온개공(五蘊皆空)이다, 물질도 공이고 모두가 공이다, 이렇게 공 도리를 말로 너무 많이 들어 놓으면 마음이 허무해져서 허무주의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말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참선을 해보면 마음은 비어 가지만 그냥 빈 공간이 아니라 그 속에는 무량공덕으로 환희심이 충만해 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몸과 마음이 텅 비어오면 거기에 정비례해서 환희심이 더욱 더 증가가 되어옵니다.

따라서 수선불공(修禪不空), 참선을 닦으면 허무주의적인 그런 공(空)은 느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환희심과 공덕이 충만하기 때문이지요. 이론적으로 공을 느끼면 허무주의로 빠지기 쉽지만 참선을 한 사람들은 공에 안 떨어지는 것입니다.

제 팔에 가서 해탈마견(解脫魔羂)이라, 우리가 살다보면 남한테 원망 될 일을 하기도 합니다. 과거 전생에 남을 핍박한 일도 있었을 것이고, 금생에도 어쩌다 더러 섭섭하게 한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이 모두가 다 우리 운명에 장애가 됩니다. 금생에 자기는 무던히 잘 하고 사는데도 어려움을 당하고 더러는 배신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는 경우는 과거 전생에 우리가 지은 업장이 장애가 되어 나타나는 현상인 것입니다. 그런 것도 우리가 참선을 하면 그 원인들을 차근차근 풀어갈 수 있겠지요.

 업장을 많이 지어놓으면 정업불멸(定業不滅)이라, 그 업을 참선으로 다 풀어 버릴 수는 없다 하더라도 웬만한 것은 다 풀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은 참선하는 그 마음은 바로 생명의 실상인 부처를 생각하는 마음이기 때문에, 그런 마음은 자기를 정화시키고 우주를 정화시키고 다른 사람을 정화시키기 때문이지요. 가사 자기를 미워하고 원망하는 사람이 있는데 참회는커녕 더 욕심을 부리고 이기심을 버리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더욱 더 미워하고 원망이 깊어지겠지요. 그러나 그 사람이 정말로 인간적으로 충실하고 도덕적으로 바른 행동을 취하고 참선도 하고 염불도 한다고 생각할 때는 그 훈기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를 미워하고 원망하는 그 사람에게 옮겨가는 것입니다. 남을 미워하면 그 순간에 우리 몸의 산소는 더욱 더 치성(熾盛)해지고 욕심을 부리면 우리 몸에 있는 수소는 더욱 치열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대 물리학자가 말한 것입니다. 우리 생각 하나하나가 다 물질로 화(化)하는 것입니다. 에너지라는 것이 결국은 물질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남을 지독하게 미워하면 그 미워하는 것이 쌓이고 쌓여 암이 되고 병이 되고 한다는 것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따라서 동성애라든가, 너무 애욕적으로 나간다든가, 우주의 도리를 벗어나면 그것이 에이즈 균이 되고 천재지변이 되어서 돌아오는 것입니다. 에이즈 균 같은 것은 정말 무서운 것 아닙니까. 물론 앞으로 백신을 발명할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것은 불확실한 것이고, 가장 근원적인 문제는 우리가 도덕적으로 바로 사는 것입니다.

제 구에 가서 안주불경(安住佛境)이라, 즉 부처님의 경계, 천지우주가 하나라는 영생불멸한 공덕 가운데서 항시 편안하게 머문다는 말입니다.

열 번째가 해탈성숙(解脫成熟)이라, 이렇게 차근차근 부처가 되어 가니까 모든 걸림으로부터 차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참다운 자유는 성자만이 누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자유를 부르짖는 민주주의도 역시 우리 정신적인 수양과 더불어서 해야지 도덕은 제쳐 두고서 우선 제도적인 자유 그것만 위해 싸운다면 그야말로 백년하청(百年河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문제는 항시 도덕이 앞서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열 가지 참선공덕을 항시 생각을 하십시오. 그러면 더욱 더 참선이 하고 싶어질 것입니다. 우선 내 행동이 점잖고 품위가 있어지고 평소에 독한 사람도 악심이 없어지고 부드러워져서 유연선심이 되고 또 번뇌가 줄어지고 귀도 눈도 밝아지고 이런 것만 되어도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리고 무식희락(無食喜樂)이라, 우리가 고기 먹고 술 마시지 않아도 항상 기쁘고, 술을 싫어하는 사람에게 억지로 술을 먹이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우리 스님 네가 고기를 먹으면 입이 다 부르틉니다.

우리 불자님들! 재가 불자님들도 되도록 고기를 드시지 마십시오. 이것은 우리한테 별로 이익 될 것이 없습니다. 항시 말씀드리지만 돼지나 소나 그런 축생들은 사람보다 훨씬 더 업장이 무거운 것인데, 업장이 무거운 세포가 사람한테 들어오면 그만치 우리가 오염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비심을 손상시킵니다. 우리는 몰라도 귀신들은 다 봅니다. 선신들은 고기 많이 먹는 사람을 무서워서 피합니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닌데, 그것은 사람만 국한시킨 것이 아닙니다. 개와 나도 둘이 아닙니다. 둘이 아니라고 생각할 때에 그네들의 고기를 어떻게 먹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런 것 안 먹어도 우리가 살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 한국만 하더라도 그 전에 우리가 클 때는 일 년 내내 가야 돼지나 소고기를 한번이나 먹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농가에서도 한 달에 몇 번씩 먹는다고 해요. 그렇게 외국에서 수입해서까지 외화를 낭비할 필요도 없는 것이고 그렇다고 더 건강한 것도 아닌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만 생명을 다 동일하게 보기 때문에 육식을 하게 되면 우리 자비심을 손상시키고 또 악신(惡神)은 그 냄새 맡고 가까이 붙고 훌륭한 선신들은 냄새 맡고 도망가고 또는 우리 마음 닦는 공부도 잘 안되고 죽어서는 악도에 떨어지기 쉽다고 불경에 그와 같이 명문으로 나와 있습니다. 금생에 깨끗이 한 세상 지내다가 가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 내외간에 화목하고 하루세끼 먹을 것을 한 끼 먹는 이웃과 나누고 그러면 살기가 참 편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노사분쟁 같은 것이 있을 수 없겠지요. 이것이 도리에 따르는 것이고 참다운 자연법입니다.

그 다음에 삼명육통(三明六通)이라, 제가 삼명육통이란 말을 자주하는 편인데 더러는 삼명육통은 외도꾼들이 하는 것인데… 하며, 뒤에서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도 더러 있는 줄 압니다. 우리가 신통을 하려고 일부러 애 쓸 필요는 없지만 부처님 말씀에, 공부가 되면 저절로 신통이 나온다고 했단 말입니다. 그 말씀을 어떻게 무시할 것입니까.

실지로 무수한 성자가 다 증명을 했고 지금 종교인들이 불신 받는 세상에 삼명육통을 하는 도인이 있다고 생각을 해본다면 집단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제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컴퓨터 문화가 기기묘묘한 재주를 다 냅니다마는 우리 불성은 그런 류가 아닌 것입니다. 컴퓨터는 인간이 입력을 시켜야 나오지만 그 보다도 훨씬 더 무한성능이 우리 불성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불성을 개발하면 그런 컴퓨터는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그 무한 능력 중의 하나가 삼명육통입니다. 

o삼명육통(三明六通):아라한도(阿羅漢道)를 성취한 성자(聖者)에게 갖추어 있는 자재하고                        미묘한 작용

1. 삼명(三明):숙명통(宿命通), 천안통(天眼通), 누진통(漏盡通)

2. 육통(六通):육신통(六神通)이라고도 함. ①천안통(天眼通) ②천이통(天耳通) ③타심통(他                 心通) ④숙명통(宿命通)  ⑤신여의통(身如意通), 신족통(神足通) ⑥누진통(漏                 盡通)

o해탈(解脫) : 지혜해탈(智慧解脫)과 선정해탈(禪定解脫)의 이해탈(二解脫)이 있음.


삼명은 무엇인가? 과거에 통달무애라, 과거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고, 여러분들도 더러 점쟁이한테 점을 쳐 본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저도 어렸을 때 구경해 본 기억이 있습니다마는 그런 귀신들도 과거를 조금은 봅니다. 더러는 미래를 예언하기도 하고, 사람이 몸뚱이를 가지고 있으면 본래의 영명함이 많이 가려집니다.

살면서 세속적인 여러 가지를 배우면서 분별시비가 잔뜩 쌓여서 영명한 본래 생명이 흐려집니다. 그러나 어린 사람들을 보면 더러는 이상하리만치 영특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놀라울 정도로 천재적인 꼬마들이 간혹 있지 않습니까. 하물며 분별시비와 삼독심을 다 떠난 도인들은 그것에 비할 바가 아니겠지요.

우리 마음을 가장 중독 시키는 것이 삼독심입니다. 탐욕심과 성내는 마음과 어리석은 마음이 삼독심 아닙니까. 그것이 제일 무서운 독입니다. 자기도 오염시키고 남도 독스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모든 병이 과거 전생부터 묻어 온 업병도 있지만 금생에는 이 삼독심 때문에 우리 몸과 마음이 중독을 일으킨다고 봅니다. 삼독심만 떠나버리면 그때는 설사 독을 마신다 해도 그 독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달마대사를 죽이려고 광통 법사나 그런 사람들이 여섯 번이나 독을 드려도 그 독이 받지를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곱 번째 가서는 달마 대사께서 금생 인연이 다한 고로 스스로 가셨단 말입니다. 그와 같이 청정한 사람들은 독도 침범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독심으로 오염되어 우리 내장이 청정하지 못한 고로 온갖 병고에 시달리는 것입니다. 우리 생리가 그만치 오염돼 있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음식을 주의하고 육식과 과식을 피한다면 그만큼 침해를 덜 받습니다. 그것은 생리학자나 병리학자들이 다 증명을 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삼명(三明), 이것은 과거에 막힘이 없고 또는 미래에 막힘이 없고 또 우주를 모두 본다는 말입니다. 부처님 지혜를 가리킬 때 일체종지(一切種智)라, 부처님의 지혜는 일체종지입니다. 그 말은 작은 것 큰 것 할 것 없이 우주의 모두를 다 안다는 말입니다. 그냥 본질적인 것만 아는 것이 아니라 세세한 것까지 다 안다는 말입니다.

가사 정감록의 비기(秘記)들을 보십시오. 물론 비기에도 틀리는 것이 있지만 더러는 아주 신통하게 맞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 것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 마음이라는 것이 계발하면 할수록 그렇게 위대한 힘을 내는 것입니다. 과거를 다 내다보고 미래를 보고 우주를 본단 말입니다. 이런 지혜가 우리한테 본래로 있습니다.

정감록에만 있고 도인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한테나 다 있는 것인데 우리가 계발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계발하는 작업이 바로 참선이고 그 참선법이 가장 훌륭하고 지름길로 가는 방법입니다.

참선이야말로 우리가 본래 갖추고 있는 무한공덕을 자아내는데 있어서 가장 좋은 지름길입니다. 그러면 참선을 어떻게 할 것인가? 아까도 말씀 드린바와 같이 우리 행동을 주의해서 도덕적인 생활을 하고 우리 마음을 항시 본체인 부처님한테다가 머무르게 하는 것입니다.

남과 얘기를 하거나 책을 볼 때나 일을 할 때나 항시 그 곳에 마음이 머물러 있으면 차근차근 걸음걸음 그것에 접근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소중한 일은 없습니다. 과거에 통달하고 미래에 통달하고 동시에 자기 번뇌를 완전히 녹여 버리고.......

불교말로 하면 숙명통(宿命通), 천안통(天眼通), 누진통(漏盡通)이라, 과거에 통달무애 하는 것이 숙명통이고 또는 미래에 통달무애하고 우주를 모두 내다보는 것이 천안통입니다.

그 다음 누진통은 샐 누(漏)자, 번뇌를 다 떼어 버린다는 말입니다. 번뇌를 다 떼어 버리면 성인이 되겠지요. 과거에는 미개한 때라서 특수한 사람들만 성인이었지만 앞으로는 집단적으로 성인이 나올 때입니다. 지금 사람들은 굉장히 영리하니까, 사상적으로도 그 많은 전쟁과 반목을 통해 많은 경험을 다 했지 않습니까.

그런 것은 모두가 다 성자의 길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전쟁을 방지하고 사람으로 인한 인재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성자의 길을 따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정보화 시대에서 정보가 교환되면 될수록 성자의 길은 더욱 더 빛날 것입니다. 그 길 밖에 다른 길은 없으니까요.

그 다음은 육통(六通, 六神通)이라, 이 육신통은 아까 말한 삼통에 다 같이 거두어져 있습니다. 천안통(天眼通)은 우주를 다 내다보는 것이고, 천이통 이것은 하늘 천(天)자, 귀 이(耳)자, 우주의 음성을 다 듣는다는 말입니다. 저 같은 사람은 재주가 없어서 영어도 잘 못하고 영어하는 사람들 말을 잘 못 알아듣습니다마는 만약 천이통(天耳通)을 했다면 영어를 안 배워도 다 알아 듣는 것입니다. 천이통이란 그와 같이 개가 짖으면 축생의 말을 알아듣고 하는 것입니다.

타심통(他心通)이라, 이것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입니다. 참선하는 사람들은 타심통을 다는 못해도 사람을 척 보면 대강 그 사람을 짐작은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인격도 있으니 함부로 지적은 않지만….

그리고 숙명통은 과거를 다 아는 지혜고 다섯 번째는 신여의통(身如意通) 즉 신족통(神足通)이라, 이것은 자기 몸을 자기 마음대로 합니다. 자기 몸을 마음대로 할 수 있으면 기적을 부릴 수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정통법을 받은 분이 마하가섭이고, 그 다음 분이 아난존자인데 아난존자가 열반 드실 때에 그 열반상은 우리에게 굉장히 신심을 느끼게 합니다. 그 분은 신통을 여실하게 증명을 다 했습니다. 부처님께서도 부처님의 금관을 역사들이 횃불로 불을 붙였지만 붙지를 않았습니다. 아무리 기름을 붓고 해도 불이 안 붙으니까 부처님의 자비심으로 해서 화광삼매(火光三昧)라, 자기 몸에서 불을 내어 스스로 금관을 태우고 몸을 태워 사리를 만든 것입니다.

우리의 불성 가운데는 땅기운, 물 기운, 불기운이 다 들어 있습니다. 인간이란 정말 기묘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 즉 우리 불성을 가리켜 마니보주(摩尼寶珠)라, 여의주라, 온갖 것이 다 나오는 보물구슬이라고 합니다. 그런 위대한 마음을 두고서도 모르니까 우리 인간을 가리켜서 금(金)을 가지고서 얻어먹는 거지라고 그럽니다. 그런 값진 보배를 가지고도 가진 줄을 모르고 하찮은 일에 생명을 낭비한단 말입니다. 금을 잔뜩 곳집에 넣어 놓고 거지 행세를 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무한공덕장인 우리 마음을 캐내는 작업을 하면서 사업도 하고 사회 일도 하면 훨씬 잘 될 것입니다. 우리 몸 가운데는 물과 불이 다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불만 생각하면 불이 되고, 물을 생각하면 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 안에 삼명육통이 다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석가모니한테 꿀릴 필요도 없고 예수한테 주눅들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본래 부처고 하나님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에게도 열등감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게을러서 그렇게 못할 뿐입니다.

아함경에서 하신 부처님 말씀 중에 “영생불멸하는 영생의 길은 분명히 있는데 우리 중생이 가고 안가고 하느니라.” 영생의 길은 분명히 있는데 중생이 게을러서 가고 안가고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신여의통은 자기 몸을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고, 불경을 보면 부처님께서 그렇게 하신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지금 원자력이 무시무시한 힘을 내지만 그 보다도 훨씬 더 무한 성능이 불성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짐작을 해 보면 압니다.

다음에 누진통(漏盡通), 이것은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번뇌를 모조리 다 떼어버리는 그런 신통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해탈(解脫)이라, 우리는 한사코 해탈을 해야 됩니다. 해탈(解脫)을 해야 만이 우리 삶은 완성이 됩니다. 우리 삶의 보람은 우리 스스로 해탈의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모두가 다 허망한 것이고 가짜입니다.

우리 생명이라 하는 것은 무상한 것이어서 어느 때 갈지 모르는 것 아닙니까. 병들어 죽을지 사고를 당할지 또는 천재지변으로 갈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무상한 인생에 있어서 가장 급박한 것이 무엇인가? 가장 절박한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를 찾는 일입니다. 참다운 자기는 바로 부처입니다. 따라서 부처가 되는 것이 우리들의 지상과업인 것입니다.

모든 번뇌의 구속을 다 끊어버리고 해탈의 길로 가야합니다. 우리는 지금 구속을 받고 삽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마르크스주의, 공산주의 때문에 얼마나 구속을 많이 받았습니까. 또 김일성주의 때문에 우리 북녘 동포들이 얼마나 처절한 구속 속에서 고생을 합니까. 불교는 그런 구속을 다 푸는 것입니다.

관념적인 구속, 제도적인 구속을 다 풀어서 성불하기 좋은 제도로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불하기 제일 좋은 제도가 바로 승가의 법인데, 진정한 승가의 법은 감투나 놓고 싸우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해탈이라, 해탈에는 지혜해탈(智慧解脫)과 선정해탈(禪定解脫)이 있습니다. 지혜해탈은 먼저 이론적으로 막힘이 없게 됩니다. 우리는 이치로 해서 먼저 부처님의 경전 말씀과 선지식들이나 조사 스님들의 가르침 따라서 기본적인 길을 알고 가야합니다. 불교 공부는 그래서 하는 것입니다.

이번 법회도 성불하는 길목만은 바로 알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지혜해탈이라, 먼저 이론적으로 막히는 것을 배우고 그러나 그것만으로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학자들은 보통 이론적인 체계만 서면 공부를 다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불교의 세계에서 보면 그것은 지혜해탈에도 미처 못 간 것인데 참다운 해탈은 어림없는 것입니다. 참다운 해탈은 선정이라, 참선을 해서 우리 생리와 심리가 아울러 맑아지고 이른바 환골탈태(換骨奪胎)라, 우리 몸뚱이도 역시 정화가 되어서 나쁜 짓을 할래야 할 수 없이 돼 버려야 합니다.

공자가 칠십이 되어서 말한 “내 마음대로 행해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다.” 이런 정도가 되어야 선정해탈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해도 우주의 도리에 어긋남이 없는 정도가 되려면 평소에 우리 행동을 도덕적으로 훈련을 시켜야 하고 그와 동시에 우리 마음이 우주의 근본진리인 부처님을 여의지 않아야 합니다.

부처님이라 하는 본질을 떠나지 않는 공부가 참선 공부입니다. 화두나 염불이나 주문이나 무엇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그것이 우주의 본바탕을 의미하는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저 하늘 어디에 따로 있고 부처님은 극락세계에 계신다, 이렇게 생각하면 참선이 못되는 것입니다. 내 안에나 밖에나 어디에나 다 존재하는 하나님, 부처님 이렇게 생각할 때만이 참다운 참선공부가 됩니다. 이렇게 부지런히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의 고향 제19집


Ⅲ. 염불(念佛)

    아미타불


이번 법회의 제목이 순선안심법회(純禪安心法會)라, 순선이라는 말이 처음 듣는 사람들은 좀 생소하실 것입니다. 참선에 무슨 순수한 참선이 따로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드실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참선이 너무 흐트러져 있습니다. 종파적인 참선, 자기들 식만 옳다고 고집하는 그런 참선, 그렇게 되면 참선법도 법집(法執)이 되고 맙니다. 성자들의 분상에서 법집(法執)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법집이란 자기만 옳다는 주장입니다. 특히 아집(我執), 이른바 개인적인 이기심이라든가 자기가 속한 단체에 따른 집단적 이기심 이런 것들이 모두가 다 아집(我執)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불교 자체가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자기라는 것이 본래 없는 것입니다.

무아(無我)라는 개념은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교리입니다. 어째서 내가 없는가? 그것은 인연법(因緣法)이라, 나라는 것은 인연 따라서 잠시간 거짓 모양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 무아(無我)에 대해서 우리 불교인들이 처음에는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인연법을 생각해보면 그냥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사람 같은 모양, 동물 같은 모양, 식물 같은 모양을 나툰 것이지 실존적인 고유한 나(我)가 있지가 않습니다.


사실은 무아(無我)를 알면 불교의 전부를 알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 인간은 본질을 보지 못하고 상(相)만 보기 때문에 내가 있다고 고집하는 것이지 본 성품, 본래 바탕을 본다고 생각할 때는 나라는 존재가 물에 비친 달그림자 같은 것이지 실존적인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시초의 본 성품은 무엇인가?

 소승에서는 본 성품 자리를 제대로 말을 못합니다. 그러나 대승에서는 분명하게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 또는 법성(法性)이라, 중도실상(中道實相)이라. 이렇게 성품자리를 말씀했습니다.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영생불멸하는 생명 자체, 이 자리에서 잠시간 인연 따라서 천지만물이 상(相)을 나타낸 것입니다.

여러분들께서 많이 들으신 법문 중에 상(相)을 떠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보시를 하더라도 상을 떠난 무주상보시라, 좋은 일을 하더라도 상을 떠나지 않으면 위선의 찌꺼기만 남습니다. 그런데 중생들은 상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런가? 중생들은 근본 성품을 못보고 겉에 나타난 상만 보기 때문이지요. 좋고, 싫고 하는 상을 떠나지 못하고 아상(我相), 또 내 생명이 얼마나 길 것인가 하는 수자상(壽者相), 나는 사람이고 개나 소는 짐승이다, 라는 인상(人相)등, 중생들은 이런 수많은 상 때문에 여기서 못 벗어납니다. 아무리 상을 빼고 보라고 해도 중생차원에서 그것은 무리입니다.

그러나 성자의 입장은 다릅니다. 성자는 항시 근본 성품을 직관하기 때문에 성자가 보는 이 세상의 삶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명예나 감투나 부귀영화 같은 것들이 한낱 무상한 허깨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성자도 현상적인 문제에 관해서는 다 꿈같이 봅니다. 꿈같이 보니까 집착을 안 하게 되겠지요.

따라서 원효스님이나 의상스님, 또 고려 초기의 대각국사, 나옹스님, 태고대사, 보조국사,  이조 때 와서 벽송지엄 스님, 서산대사, 사명대사, 이런 위대한 분들의 책을 보면 조금도 옹색한 데가 없단 말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 분들은 상을 떠나있으니까 이른바 법집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꼭 내가 하는 식만 옳다라고 하는 고집이 그분들에겐 없습니다. 따라서 그분들은 모두 원통불교(圓通佛敎)입니다. 특별히 통불교(通佛敎)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불법 자체가 원융무이(圓融無二)한 원통불교(圓通佛敎)인 것입니다. 종파에 치우치거나 교에 치우치거나 또는 참선에만 치우치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어느 해에 해남 대흥사에서 4, 5년 동안 지낸 경험이 있습니다마는 그곳에서 다행히 『초의선사 문집』을 봤습니다. 그 전에는 본 일이 없었는데 그때 처음 읽었습니다. 대흥사는 우리 스님 네들은 다 잘 아십니다마는 신라불교는 경주를 중심으로 해서 빛난 것이고, 고려불교는 송광사로 꽃 피었고, 이조불교는 대흥사로 해서 빛났습니다.

대흥사에서 13대 종사, 강사가 나왔는데 그 가운데서 초의선사는 12대 종사입니다. 그 분은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다도(茶道)의 할아버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초의스님이 계셨던 일지암에서 일년에 한 번씩 모여서 다신제(茶神祭)라 해서 잔치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차 마시는 한 가지 예식만 치르지 초의 스님의 핵심인, 즉 말하자면 『초의선사 문집』 가운데에서 『사변만어(四辨漫語)41)』라, 『사변만어』는 굉장히 중요한 책입니다.

*『사변만어(四辨漫語)』1권, 초의의순(草衣 意恂)이 저술한 것으로 백파(白坡)의 『선문수경(禪文手鏡)』을 반박한 글.

그래서 제가 그 때 번역을 하려고 주지스님께 사정을 해서 원고를 가져다가 지금도 간직하고 있는데 그런 저런 사정으로 번역을 못해서 지금도 아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마는 제가

생각할 때는 서산대사의 『선가귀감』 다음으로는 이조 불교사에서 그렇게 좋은 책은 처음 보았습니다. 『사변만어』가 그렇게 좋은 책입니다. 여러분들께서도 기회가 있으시면 구해서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그걸 보면 조금도 막힘이 없단 말입니다. 그 문집은, 이조 말엽에 한국 불교를 대변하다시피 한 백파 스님을 비판해서 낸 글입니다.

초의스님은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추사 선생과 절친한 도반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산 정약용 선생과도 절친했습니다. 문장도 당대 버금가게 유려하고 그 내용이 아주 훌륭한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내용이 좋다는 것은 아집과 법집이 없다는 말입니다.

초의스님이 봤을 때 백파스님이 분명히 오류를 범했는데, 오류를 범했다 함은 과거 선지식들의 말씀에서 빗나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자기 실력이 부족하니까 섣불리 반박 할 수가 없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일지암에서 사십 년 동안 공부를 해서 나중에 『사변만어』라는 책을 내어 백파 스님을 비판했습니다. 나중에 추사 선생을 비판한 글도 있습니다마는 제가 굳이 이런 말씀을 하는 까닭은 적어도 정통 조사라고 하는 분들이나 도인들은 남을 함부로 비난하지 못하고 또 자기만 옳다고 내 세울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결국 나도 없는 것이고 본질적으로 생각할 때 개념 같은 것도 다 허망한 것인데 이른바 법집이나 아집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천지우주를 오직 하나의 진리, 통달 무이한 하나의 진리로 보는 분상에서 어떻게 핏대를 세워 옳다 그르다 시비를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일본에서도 화두만 하는 임제종과 묵조만 하는 조동종, 또는 염불을 화두로 하는 황벽종이 있습니다. 또 대만에는 주로 염불을 화두로 합니다. 따라서 황벽종에서는 자기들 방법만 옳다고 하고 임제파에서는 화두 없이 꾸벅꾸벅 졸아 버리는 묵조사선(黙照邪禪)이라, 삿된 참선이라 매도를 하는가 하면 또 묵조선에서는 화두 하는 임제파에게 본래가 부처인데 무슨 필요로 이것인가 저것인가 의심할 것인가? 이렇게들 서로 주장들을 합니다.

우리 한국도 가만히 보면 참선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화두선만 참선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다른 방법들은 다 부정해 버리겠지요.

원효스님의 위대함을 세계가 다 아는데도 화두로 안 했다고 그 분을 부정해 버립니다. 하물며 기독교 같은 다른 종교에 대해서는 편협하기 짝이 없겠지요. 그것이 외도인 것 같으면 2천년 동안이나 순교자도 나오고 지금까지 발전해 오겠습니까. 이렇게 개명 천지에서 17억 인구가 믿고 있는 것인데 그네들을 아무 필요 없는 외도라고 간주해 버리면 결국은 싸움밖에 일어날 게 없습니다.

정보화 시대란 것은 온갖 정보와 가치가 뒤섞이고 교류가 되기 때문에 자기 것, 자기들 문화권만 옳다고 주장할 때는 결국 싸움밖에 더 나올 것이 없습니다. 옛날에는 교류를 자주 못하니까 내 것, 네 것을 성을 쌓고 살았지만 정보화 시대에는 세상 사람들과 매일매일 교류가 되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에도 구십육 종 외도라, 불교 아닌 가르침이 구십육 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원효 스님 계실 때도 여러 가지 종파로 화엄경 좋아하는 사람은 화엄경이 옳다 하고, 각기 다르게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십종십문화쟁론(十種十門和諍論)이라, 모든 종파를 하나로 회통(會通)시킨 것입니다. 어떤 도인들이나 그 분들의 행적을 보면 당대 일어난 문화현상을 하나의 도리로 회통시킵니다.

보조국사도 역시 염불이나 참선, 교리 등을 하나로 회통시켰습니다. 태고 스님도 마찬가지고 위대한 도인들은 하나같이 다 회통불교를 지향했던 것입니다.

중국도 원나라 때 중봉 명본 스님(中峰 明本 1263-1323), 그 분은 원나라 고봉 원묘(高峰 原妙)의 제자인데 아주 훌륭한 선사입니다. 당대 원나라 임제종에서 나왔는데도 교(敎)와 선(禪)과 염불(念佛)을 하나로 체계를 세웠습니다. 이조 때 서산 대사도 참선하는 사람들은 선가귀감(禪家龜鑑)이라, 도교(道敎)에는 도가귀감(道家龜鑑), 유교에는 유가귀감(儒家龜鑑)이라, 이렇게 하나로 통일을 시키려고 무진 애를 다 썼습니다.

아까 제가 말한 초의 스님의 위대한 점은 그 분이 아무리 명석하게 불교진리를 말했더라도 집착을 가졌다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겠지요. 설사 유교를 말하나 도교를 설하더라도 집착을 떠나면 그것은 다 도(道)인 것입니다. 그렇게 시원스럽게 툭 터져야 합니다.

그래서 순선(純禪)이라, 부처님께서 하셨고 달마에서 육조 혜능까지 정통조사들은 어디에도 걸림이 없습니다. 후대 그 자손들이 남종이니 북종이니, 돈오다 점수다 하면서 문제를 만든 것이지 정작 그 당시 육조 스님이나 신수 대사 같은 분들은 아무 문제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조 홍인(五祖 弘忍) 스님 회상에서 칠백 대중이 공부하는데 그 칠백 대중의 상수(上首) 제자가 신수 스님입니다. 그런데 오조 스님께 도를 받은 사람이 열 분이 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각기 성격상 개인적으로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그분들이 도가 아닌 엉뚱한 말을 했다고 볼 수는 없는 문제 아닙니까.

신수 대사도 나중에는 육조 스님의 제자들은 점수파라 틀렸다고 비판을 했습니다마는 칠백 대중의 우두머리 되는 스님이 도를 모르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 당시는 아무 것도 아니었지만 나중에 피차 정통 종파를 세우려고 그렇게 시비들을 했던 것입니다.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내세우면 될 일이지 도인들이 무슨 이유로 종파를 세우고 분파를 일으키겠습니까.

후대인들이 자기들 동아리에 권위를 세우려는 불순한 마음 때문에 종파를 내세운 것입니다. 그래서 특히 달마스님 때부터 육조 스님 때까지의 선을 가리켜서 순선(純禪)이라고 합니다. 아무 종파도 없고 또는 어떤 행법만 옳다는 주장도 없는 그야말로 상을 떠나버린 그런 선(禪)이기 때문에 순선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안심(安心)은 무엇인가?

부처님 법문은 본래가 안락 법문입니다. 부처님 법을 들으면 항시 마음이 편안스러우니까 안심(安心)입니다. 누가 옳고 그르고 따지고 해야 마음이 불안스러운 것이지 부처님 법은 툭 틔어서 어디에도 막힘이 없단 말입니다. 아까 말씀 드렸듯이 전문술어로 아집과 법집이 없다는 뜻입니다. 아집과 법집을 떠나버리면 마음이 편안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또 참선 자체가 안심법문입니다. 참선이 아닌 다른 공부는 방편설도 많고 여러 가지 사설이 많아서 이렇게 저렇게 분별하고 따지고 합니다마는 참선이라는 것은 간단명료합니다.

본래시불(本來是佛)이라, 본래 바로 부처라. 본래 부처란 것은 내 마음만 본래 부처가 아니라 일체만물의 그 당체는 즉불(當體卽佛)이라, 처음에는 좀 어렵습니다. 가사 앞에 꽃병이 있다고 한다면 그 꽃병의 본질은 무엇인가? 꽃병도 그 당체는 곧 부처입니다.

어느 날 내가 아는 어느 대학교수 한 분이 와서 “저는 이제 반야심경을 통달하게 되었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참으로 공부를 잘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통달을 하셨느냐고 물었더니, 답하기를, 반야심경의 내용은 바로 색즉공(色卽空)인데, 색은 바로 물질을 말하는 것이고 공은 에너지를 말하는 것인데, 물질을 분석하면 결국은 에너지가 되는 것이 아닌가?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觸法)이라, 물질ㆍ소리ㆍ향기ㆍ맛ㆍ감촉 등도 분석해 놓고 보면 결국은 다 공이 아닌가? 이렇게 알면 반야심경을 다 안 것이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그렇게 아는 것도 참 중요합니다마는 색즉공(色卽空)은 그렇게 분석한 뒤에 공(空)이라는 것이 아니라 색즉공(色卽空)이라, 물질이 바로 공이라, 당체즉공(當體卽空)이라, 사람은 사람 바로 공이고 금은 금 즉 공(卽空)이란 말입니다.

물리학을 좀 배운 사람들은 물질은 결국 원소의 결합에 불과한 것이니까 그런 식으로는 다 짐작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반야심경의 공은 그런 공이 아닙니다. 따라서 공을 그런 식으로 알면 불교를 바로 아는 것이 못됩니다. 그것을 보고 분석할 석(析)자, 석공(析空)이라 합니다. 즉 공(卽空)이라, 금 쪽같이 아끼는 내 몸 이대로 바로 공이란 말입니다.

어떤 분들은 저의 법문이 굉장히 어렵다고들 그럽니다마는 물론 일반 세상 사람들이 알아듣기는 어렵겠지요. 그러나 일반 사람들이 알아듣기 어렵다고 해서 아까 말했듯이 석공(析空)식으로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불교는 형이하학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을 다 통달한 종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중생의 삼독심에 가려진 눈에 안 보인다고 해서 이것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 법문은 부사의 해탈법문(不思議 解脫法門)입니다. 소승에서는 부사의 할 것이 없으나 대승에서는 부사의 해탈법문입니다.

화엄경 초기경전에 보면 아부타 달마(阿浮陀 達磨), 즉 미증유(未曾有)라, 십이부경(十二部經) 가운데 한 부분인 아부타 달마는 우리말로 풀이하면 아주 부사의한 경이란 뜻입니다. 우리 중생의 차원에서는 알 수 없는 그런 경이란 말입니다. 거기에 보면 그 당시에 부처님이나 도인들이 하신 삼명육통이나 신통 자재한 법문들이 다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런 것은 종교라면 응당 어느 것에나 들어있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당체(當體)가 바로 공(空)이라, 제가 며칠 동안 그런 저런 말씀을 많이 했어도 당체가 바로 공(空)이라는 소식을 여러분들이 이해를 못하시면 제가 헛말을 한 것이 됩니다. 어째서 당체가 바로 공인가? 모든 것이 인연법을 따르기에, 연기법(緣起法)은 우주의 대법(大法)입니다. 우리 중생은 연기법을 모르지만 성자는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석가모니께서도 “연기법을 보는 사람은 진리를 보고 따라서 나(如來)를 안다.” 라고 하셨습니다. 연기법을 모르면 불교를 모르는 것입니다. 연기법도 단순하게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그런 식으로만 알면 소승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요즘 불교신문이나 교양지 같은 데 보면 그렇게 단순하게 연기법을 강설해 놓은 걸 봤습니다마는 그런 식은 아주 기초적인 차원이라 아주 틀린 것은 아니지만, 마땅히 그 다음에 진여불성이 연(緣)따라서 잠시간 나툰 것이 일반 세상의 현상임을 잘 밝혀 놓아야 합니다. 진여불성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상(相)도 없고 모양도 없는 것은 바로 우주에 충만하다는 뜻입니다.

이사무애(理事無碍)라, 잠시간 모양을 나투었지만 본래 성품은 진여불성으로 똑같은 부처라, 여기서 어려운 것은 인연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갖가지 모양으로 사람도 되고 축생도 되고 했으니 분명히 다른 것이 아닌가. 하지만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해해야 연기법을 압니다.

부처님께서는 비유로 가사 물이 바다에 있다고 생각할 때 바람 따라서 천파만파 파도가 치고 거품이 일어나지만 파도나 거품도 결국은 똑같은 물이듯이 그와 같이 인연 따라서 진여불성이 산이 되고 물이 되고 사람 되고, 바람 되고 하지만 결국 진여불성에서 파생된 파도와 거품에 불과한 것입니다. 진여불성은 하나의 같은 성품인 것입니다. 도둑이나 강도도 진여불성 차원에서 연기법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바로 부처님이고 잘나고 똑똑해도 결국은 다 똑같은 성품의 부처님입니다.

석가모니께서 보리수하에서 대각을 성취해서 깨달은 뒤에 보니까 나만 부처가 된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일체가 다 부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참다운 연기법이 되고 비로소 참다운 도덕률도 확립이 됩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하고 자기 명예를 높이기 위해서 남에게 베풀고 하는 것은 위선이지 도덕이 못됩니다. 자기 자발적으로 심오한 철학적 근거를 가지고 상(相)이 없이 베풀고 기쁘게 행(行)을 해야 참다운 도덕이 되는 것입니다.


 현대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장사를 잘하고 물건을 많이 만들고 하는 기능인을 만드는 것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도덕적으로 하자가 없고, 또는 스스로 자기가 무엇인가 하는 본질적인 자기를 깨닫고 많은 사람들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그런 사람을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육의 참 가치입니다. 참사람을 만드는 것이 이른바 전인교육(全人敎育)이라, 기능면이나 지혜나 어느 것에나 치우침이 없는 그런 사람을 만들어야 할 것인데 지금의 교육은 기능적인 교육입니다.

무얼 많이만 외우고 기능적으로 컴퓨터나 무슨 조작 같은 것만 잘하면 우수한 사람인줄 압니다마는 그런 것은 아주 작은 부수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제 아무리 인류가 외적인 발달을 이루었더라도 바른 인간상을 구현하지 못한다면 참다운 평화는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분야에서나 어떤 경우에나 연기법을 적용해야 합니다.

여러 불자님들 어느 누구를 보더라도 연기법을 적용해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자식이나 부부간에나 또 남에게도 연기법을 적용해서 보아야 오류를 안 범합니다. 연기법은 바로 우주의 대법이기 때문에 그 법에 따라야 우리 마음도 편안하고 동시에 부처님께 보다 가까워집니다. 그래서 안심법문은 부처님의 진여연기(眞如緣起), 법계연기(法界緣起), 우주의 대법의 다른 이름인 것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불경을 다 외우고 통달했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완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닌 바로 한 몸이요 하나라는 각성은, 상을 온전히 떠나야 가능한 것입니다.

 요새 김지하 시인을 비롯해서 여러 사람들이 “생명운동”이라는 걸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역시 머리가 좋은 사람들은 참 다르구나하고 생각을 했습니다마는 그네들이 하는 생명운동의 이론을 들어보니 사람의 생명이 중요하니까 자연의 생명도 중요하다는 차원의 개념인 것 같았습니다.

우리 부처님같이 “모두가 다 일미 평등한 진여불성이다” 이렇게 투철하게 알고 그 운동을 하면 훨씬 더 신념과 열성이 나올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우리 스님 네들이 그 분들에게 기본적인 지도 원리를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사, 음악을 창조한다고 하더라도 영원적인 생명자체의 도리를 알고 할 때는 훨씬 더 위대한 음악이 나올 것입니다. 베토벤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는 말년에 음악가에게는 생명과 같은 청각을 잃고 치명적인 불구가 되었지만 그는 바로 그때 가장 위대한 음악을 작곡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그것은 현상적인 육신의 귀로는 미처 못 듣는 영원적인 순수 멜로디를 들은 것입니다. 위대한 클래식 음악은 다 그런 것입니다. 일반 중생들은 들을 수 없는 신묘한 우주의 음을 듣는 것입니다.

아미타경이나 관무량수경에 보면 극락세계의 장엄한 모양이 나와 있습니다. 극락세계의 모양을 보면 무정설법(無情說法)이라, 극락세계의 나무나 숲이나 새나 모두가 다 염불ㆍ염법ㆍ염승이라, 부처님의 무량법문을 항시 노래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 중생들은 말로 해야 법문이 되지만 영원적인 실상세계, 참다운 성품세계에서는 새는 새 대로, 나무는 나무대로, 흙은 흙대로 다 우주의 진리를 그대로 설법하는 것입니다.

한 알의 모래, 한 송이 장미꽃 가운데서도 우주의 신비와 진리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위대한 사람들은 비단 불경이 아니더라도 그렇게 우주를 하나의 생명으로 봅니다. 그렇게 해서 ‘순선안심’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제가 여러 가지 말씀을 드린다 하더라도 뜻은 오직 그것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것을 보다 더 탁마(琢磨)해서 서로 토론도 하고 질문도 하면서 부처님 법의 핵심인 아집과 법집을 떠난 참다운 불자가 되어서 금생에 사람 몸 받았을 때에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철저하게 탐구를 하시기 바랍니다. 톨스토이는 그렇게 대단한 작가이고 백작이었지만 팔십이 넘어 집과 재산과 가족을 다 버리고 승려가 만행 하듯이 괴나리봇짐 하나 지고 천하를 떠돌았습니다. 일대사인연, 생사해탈의 인연이라는 것은 그렇게 소중한 것입니다. 청춘의 쾌락 같은 것은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안중에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재가 불자님들이 그렇게 하시라는 말은 절대로 아닙니다. 다만 그런 셈치고 기업을 하던지 장사를 하던지 최선을 다 하면서 마음으로는 집착을 떠나야 합니다.

 저는 많은 기업가를 만나기도 하고 또 그분들에게 시주를 받은 적도 있습니다마는 대 기업가들을 보면 역시 보통사람들 하고는 좀 틀립니다. 남모르는 가운데 굉장히 공부도 많이 하고 노력을 많이 합니다. 제가 아는 어느 기업가의 말이 “스님, 이것은 모두 제 것이 아닙니다. 제 마음 같아서는 다 털어버리고 승려가 되면 좋겠는데 제가 맡고 있는 사람들이 몇 만 명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관리로 있습니다.” 라는 말을 했습니다. 사람이 그래야 되는 것입니다. 오억이나 십억을 시주하는 일이 쉬운 일이겠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단돈 몇 백 만원 때문에 남의 목숨도 뺏고 부모를 죽이는 패륜을 우리는 봅니다. 자기 부모도 형제도 아닌 일개 스님한테 몇 억이나 되는 돈을 조건 없이 내준단 말입니다. 저의 집안은 복이 없어서 몇 천 만원 시주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 걸 생각하면 몇 억이나 되는 기금을 부처님께 바치는 분들을 보면 정말 눈물겹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튼 본래무아(本來無我)라, 자기가 없는 것이고, 자기 집도 재산도 본래 내 것이 아닙니다.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불이 나서 타 버릴 수도 있고 누가 몽땅 털어서 가버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죽을 때는 자기 몸뚱이도 못 가져가는데 금은 패물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어차피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갑니다. 우리 목숨은 그야말로 바람 앞에 등불이란 말입니다. 언제 꺼질지 모릅니다. 따라서 부처님 법이 아니면 우리는 한시도 안심하고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말씀드릴 이 법문도 역시 안심법문을 중점적으로 하면서 될수록 정통 도인들 말씀을 함께 인용하겠습니다. 따라서 불교의 회통적인 면에서의 불타관(佛陀觀), 즉 우리가 부처님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를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소승에서는 석가모니만 부처님으로 봅니다. 그러나 대승에서의 참다운 부처님은 바로 부처님이 하신 말씀대로 석가모니가 세상에 나오고 안 나오고 상관없이 영원히 우주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법신 부처님(法身佛) 말입니다. 법신부처님을 깨닫게 되면 누구나 다 산 부처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달마 스님이나 원효 스님, 서산 스님 등 수 많은 선지식들은 다 산 부처님들입니다. 기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 경전인 마태복음이나 요한복음서에 보면 “그대들은 나를 따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에 따르라. 그러면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이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기독교가 소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당시에 유대민족들은 갈릴리 해안에서 고기 잡는 어부였던 베드로를 비롯해서 대중들의 지적 수준이 고등법문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허심탄회하게 요한복음이나 마태복음서의 중요한 대목을 보면  똑같은 것입니다.

요한복음 12장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자들은 어둠이 너희를 덮치지 못하리라.” 이렇게 대중에게 이르니 그 소리를 들은 바리세인들이 “당신은 그렇게 말하지만 그 말을 어떻게 알 수가 있습니까?” 이와 같이 반문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나는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분명히 알지만, 그대들은 그대 자신들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줄을 모르지 않는가. 내가 하는 말은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말씀하시는 주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불교식으로 해석하자면 위대한 사람들은 그냥 자기 마음대로 자기 개념대로 말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부처님 법인 진여불성(眞如佛性), 생명의 실상에 어긋남 없이 그것에 준해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그 자리를 체험하지 못했으니까 부처님 말씀대로 그 자리에서 빗나가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고 성자는 바로 그 자리와 하나가 되었으니 자기 마음대로 말하고 행동해도 우주의 도리에 어긋남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불타관(佛陀觀)을 바로 세우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석가모니만 부처님이고 다른 부처님은 없는 줄 아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미국에 있으면 큰스님들의 법문이나 교리를 쉽게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으니까 더 그런 것 같습니다. 그리고 불교란 것이 하도 방대해서 말로나 글로만 되는 것이 아니고 기도나 참선으로 꾸준히 오랜 시간 몸에 배어야 합니다. 반야심경 한 편을 보더라도 한 철 참선하고 보는 것과 두 철 참선하고 보는 것은 그 해석이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같이 공부하고 토론도 해서 제가 잘못 말하면 지적도 해주시고 그래서 탁마(琢磨:옥석을 쪼고 가는 것같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하자는 뜻에서 이번 법회를 마련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른 불타관을 정립하는 동시에,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서도 잠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기독교 교리의 핵심강령은 삼위일체입니다. 서기 325년에 니케아 공의회에서 통과가 되었지요. 그 당시에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아니냐를 가지고 논란이 많았는데 그런 논란들을 제치고 하나님 즉, 천지 우주의 본성인 성부와 그 기운인 성신과, 그리고 화신인 예수(聖者)가 바로 셋인, 즉 하나다, 삼위가 한 몸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법신, 보신, 화신이 본래 하나다라고 했듯이, 제가 생각하기에는 틀림없이 그때 문화가 교류되어서 불교의 법신ㆍ보신ㆍ화신(三身一佛)사상이 기독교로 흘러갔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 전에는 삼위일체라는 말 자체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서기 325년에 가서야 그 당시 주교나 신부, 신학자들이 모여서 니케아 회의를 통해 삼위일체설(說)을 통과시킨 것입니다. 그러니까 삼위일체를 모르면 기독교가 성립될 수 없겠지요.

우상숭배 같은 것도 본래 있었던 게 아닙니다. 그것도 787년 두 번째 로마 공의회 때 비로소 우상숭배를 배제한다는 것으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다시 근래에 와서 로마의 바티칸 궁에서 열린 1962년에 2차 공의회에서 종교의 자유, 신앙의 자유문제가 나왔습니다.

신앙의 자유란 것은 바꿔서 말하면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 완고한 가톨릭에서도 지금 벽을 무너뜨리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 전에 중세기 때는 자기들 교리에 위배 되었다고 그 많은 사람들을 불태워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런 기독교가 근래에 와서 그야말로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라고 종교의 자유를 용인한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를(新ㆍ舊敎) 하나로 합해야 된다고 논의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불교는 지금에 와서도 종파가 분열하고 같은 종파끼리도 서로 반목하는 걸 보면 기가 막히는 일입니다.

지금 한국의 불교 종파가 약 50여 개가 난립하고 있고 지금도 자꾸만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법왕이라고 떠들고 다니기도 하고, 감투 쓰기 좋아하는 사람 중에 우리 한국 사람보다 더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총무원에 한 번 들어갔다 하면 몇 십 년이고 끝끝내 거기서 버티려고 한단 말입니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닌데 그까짓 감투 남이 쓰면 어떻고 내가 아니면 어떻습니까. 따라서 종교인만큼은 그런 허명(虛名) 문제에 선거 같은 것도 다 던져버리고 서로 추대해서 앙금이 없이 올려놔야 서로 존경도 받고 종교인답지 않겠습니까. 꼭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어야 비로소 모두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제 염불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선 아래 염불에 대한 개요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o염불(念佛) : 본래시불(本來是佛)이니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을 염(念)함을 의미함. 일                    체만유(一切萬有)가 부처요, 둘이 아닌 불이불(不二佛)이기 때문에 언제                    나 부처를 여의지 않는 불리불(不離佛)이다.


  o염불(念佛)의 방법(方法)

   1. 칭명염불(稱名念佛) ; 부처를 생각하며 입으로 불명(佛名)을 칭(稱)함.

   2. 관상염불(觀想念佛) : 정좌(靜座)하고 불(佛)의 상호공덕(相好功德)을 관념(觀念)함.

   3. 실상염불(實相念佛) : 불(佛)의 법신(法身)이 무량무변(無量無邊)하고 만공덕(萬功德)을                            갖춘 중도실상(中道實相)의 리(理)를 관조(觀照)함.


 o 염불삼매(念佛三昧) : 인행삼매(因行三昧)와 과성삼매(果成三昧)의 이종(二種)이 유(有)                           함.

   1. 인행삼매(因行三昧) : 일심(一心)으로 불명(佛名)을 칭(稱)하든지 또는 일심 (一心)으로                            불(佛)의 상호(相好)를 관(觀)하든지 또는 일심(一心)으로 법신                             (法身)의 실상(實相)을 관조(觀照)하는 수행법(修行法)을 인행(因                            行)의 염불삼매라 함.

   2. 과성삼매(果成三昧) : 인행(因行)의 염불삼매가 성숙(成熟)되면 마음이 선정(禪定)에                              들어가고 혹은 시방불(十方佛)이 현전(現前)하며 혹은 법신(法                             身)의 실상(實相)에 계합(契合)되는데 이를 과성(果成)의 염불                             삼매라 함.


염불(念佛)이라는 대문(大門)이 있습니다. 특히 미국에 계시는 분들은 한문을 잘 모르시기 때문에 한글로 다 달았으니 읽기는 쉬울 것입니다. 염불이라는 것이 부처를 우리 마음 밖에다 두고 할 때는 방편염불에 그치고 맙니다.

부처님은 저 멀리 극락세계에 계신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방편이 되겠지요. 기독교도 역시 본래의 뜻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無所不在)라, 안 계시는 곳 없이 다 계시니까 내 마음속에나 공기 속에나 다 계신다고 봐야지요. 따라서 불교도 마찬가지로 이른바 부처님은 우주의 생명으로 계신다, 우주에 두루 계신다, 이렇게 생각해야 참다운 부처님이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순선법문 맨 처음에도 시방여래(十方如來)는 법계신(法界身)이라, 부처란 결국 우주를 몸으로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주 어디에나 안 들어 있는 곳이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부처님을 생각하면 우리 마음 그대로 부처님의 무량공덕을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4조 도신(道信) 스님도 “부처를 생각하면 우리가 바로 부처고, 분별시비하면 중생이다.” 라고 했습니다.

염불이란, 본래시불(本來是佛)이니 닦은 뒤에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본래 부처인데 부처인줄을 모를 뿐입니다. ‘중생이 본래 부처다’ 라는 말을 듣고서도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완전히 믿지를 못하니까 우리에게서 아무런 힘도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부처라는 사실을 완전히 믿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순식간에 우리한테서도 위대한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온전하게 믿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신앙이란 의심 없이 온전히 믿는 것, 믿어야 부처님 공덕이 갖추어지는 것입니다.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우리 마음이 본래는 청정심입니다. 우리가 설사 나쁜 생각을 하고 남을 미워도 하지만 우리 본마음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오염을 시킬 수가 없습니다.

흔히 우리가 생각 할 때는 나쁜 짓을 많이 하고 나쁜 생각도 많이 하면 우리 마음이 오염되어 나쁜 사람이 되지 않겠는가? 라고 생각 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근본성품에서 볼 때는 오염이 된다거나 크고 작고 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나쁜 짓을 많이 했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 자체, 성품으로 볼 때는 조금도 오염이 안 되는 청정심인 것입니다.

본래시불(本來是佛)이니,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을 염(念)하는 것이 참다운 염불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 부처님을 저 밖에다 두고, 부르고 외우면 복을 주고 도움도 준다는 식으로 염불을 합니다. 이런 것은 참선이 못 됩니다. 오로지 내 마음이 바로 부처님이요, 우주가 부처 아님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고 해야 진정한 염불선(念佛禪)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오! 주여”를 외친다 해도 역시 하나님은 저 하늘 위에 계신다, 이렇게 소박하게 믿어버리면 참선은커녕 참다운 신앙도 못되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내 마음 속에나 우주 어디에나 두루 계신다, 이렇게 믿으면 그 때는 오! 주여! 를 해도 참선이 되는 것입니다. 본래의 본바탕 본 성품을 여의지 않으면 무엇을 해도 참선이 되는 것이고 근본성품, 근본바탕을 떠나면 무엇을 하든지 간에 참선이 못 되는 것입니다.

일체만유(一切萬有)가 부처와 다르지 않는 불이불(不二佛)이라. 우리 중생들이 잘못 생각해서 부처는 부처고, 나는 나다 이렇게 불신하는 마음이 있으니까 부처로 환원하기 위해서 염불을 하는 것입니다. 다른 주문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사, 티벳에서 하는 “옴 마니 반메 훔”도 실제의 주문 뜻을 그대로 풀이 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영생불멸하는 진리의 보배’라는 뜻입니다. 그네들은 다른 것 없이 ‘옴 마니 반메 훔’만 합니다. 그것도 ‘옴 마니 반메 훔’이란 ‘옴’ 자체가 영생불멸한 믿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심으로 하다보면 본래 성품인 부처님께로 가까워지겠지요.

염불의 방법에는 칭명염불(稱名念佛)이라, 부처를 생각하며 입으로 명호를 외운다는 말입니다. 부처님 이름을 부르는 것도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이나 한 가지로만 통일되어 있으면 간단하고 좋을 텐데 불명(佛名)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여러 부처님 명호를 두고 저한테 와서 그 어려움을 호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절대로 이름에 걸리지 마십시오. 부처님 명호는 다 그 공덕 따라서 다를 뿐입니다. 항시 제가 그때그때 말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자꾸 그 이름에 걸리니까 복잡해지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만약에 내 부처님, 네 부처님이 따로 있고 이름 따라 다 뿔뿔이 열이고 백이고 따로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부처님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부처님의 공덕이 하도 많으니까 자비도, 지혜도 다 원만해서 하나의 개념으로는 다 표현을 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따라서 무량공덕을 갖춘 부처님을 자비로운 쪽에서 보면 관세음보살, 지혜로운 쪽으로 봐서는 문수보살, 대세지보살, 또는 그 원력으로 해서 중생을 제도하는 쪽으로는 보현보살, 우리 중생의 영혼을 극락세계나 천상이나 인도환생으로 인도하는 면에서는 지장보살입니다.

그 다음에 관상염불(觀想念佛)이라, 이것은 볼 관(觀)자, 생각할 상(想)자, 우리가 가만히 앉아서 부처님의 원만덕상을 생각하거나 부처님의 공덕을 생각하는 염불입니다. 따라서 꼭 이름만 외우는 것이 염불은 아닌 것입니다. 염불 소리를 안내더라도 부처님의 모양만 바라보고서도 부처님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부처님을 닮아가야 됩니다. 부처님 상호라는 것은 삼십이상(三十二相)이라, 만덕(萬德)을 갖추면 부처님 같은 상호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얼굴 잘난 사람들은 그냥 어디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전생에 그만치 공덕을 세운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금생에 타고난 얼굴이야 어쩔 수 없다하더라도 부처님을 닮아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따라서 부처님의 눈은 모든 중생을 다 제도하고 수용하고 포섭하는 그런 눈빛입니다. 그렇게 부처님을 닮아가는 그런 염불이 관상염불입니다.

실상염불(實相念佛)은 모든 상을 떠나서 부처님의 진리, 중도실상(中道實相)이라, 이른바 우주에 두루해 있는 부처님의 참다운 생명의 실상, 그 자리를 생각하고 하는 염불입니다. 따라서 실상염불이 되면 그 때는 바로 염불참선이 됩니다. 실상염불은 염불선과 둘이 아닙니다. 실상염불은 부처님의 법신(法身)이 무량무변(無量無邊)하고 만 공덕(萬功德)을 갖춘 중도실상(中道實相)의 원리(原理)를 관조하는 것입니다.

염불삼매라, 삼매란 것은 어느 한 곳으로 몰두하는 것이 삼매 아니겠습니까. 인행삼매(因行三昧)와 과성삼매(果成三昧)가 있는데, 인행삼매(因行三昧) 이것은 처음에 일심(一心)으로 부처님 이름을 외운다던지 또는 일심으로 부처님의 상호를 관찰한다던지 또는 일심으로 법신불(法身佛)을 실상으로 관조하는 것을 말하고, 과성삼매(果成三昧)는 그렇게 일심으로 함으로 해서 마음이 선정에 든다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 마음은 항시 산란스러워서 선정에 들기가 어렵습니다. 삼매에 들어가야 우리의 근본번뇌를 없앨 수 있는 것인데, 따라서 삼매에 들려면 오로지 지속을 시켜야 됩니다. 화두나 염불이나 주문을 지속시켜야 마음이 한 곳으로 모아지고 그래야 선정에 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삼매에 들어가면 우리 업장이 녹아져서 부처님의 광명이 자기 앞을 훤히 비추고 동시에 부처님의 실상에 계합(契合)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과성삼매라, 인행삼매가 근본이 되어 그 결과로 열매가 맺어서 염불삼매를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공부하실 때 여러분들은 어느 것이나 좋습니다. 화두를 드나 또는 티벳의 불교처럼 ‘옴 마니 반메 훔’을 외우나 염불을 하나 어느 것이나 다 무방하고 도는 간경자혜안통도(看經者慧眼通途)라, 부처님 경만 읽어도 됩니다.

불경도 모두가 다 부처님의 근본성품을 말한 것이기 때문에 경만 읽어도 마음을 본체에서 안 여의면 성불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 좋지만, 본 성품을 관조하는 그 마음을 지속시켜야 됩니다. 염불도 계속하다 보면 나중에는 가만히 있어도 자기 몸 전체가 염불이 되는 경지가 옵니다. 바람 불면 바람소리가 염불로 들리고, 물소리도 부처님 음성으로 들리게 됩니다. 화두도 무(無)라 무(無)라 하다 보면 바람소리도 무자 화두로 들린단 말입니다.

선방에서 대중이 다 자는데 가만히 들으면 화두 하는 사람은 잠자면서도 “무(無)라 무(無)라”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도록 까지 해야 됩니다. 그렇게 익어지면 놓아버려도 놓아지지가 않고 뗄래야 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염불이나 화두를 오래 일심으로 한 사람들은 안  할래야 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밥을 먹으나 길을 가나 항시 염불, 화두가 떨어지지 않고 그렇게 이어지면 기분이 굉장히 좋아집니다. 그렇게 되도록 까지 해야 삼매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삼매에 들어가야 온전히 증명을 할 수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꼭 삼매에 들어가도록 까지 공부를 하셔야 합니다.

과거 우리네 할머니나 어머니들은 천 팔십 개로 꿰인 염주를 들고 몇 시간이고 헤아리면서 염불을 합니다.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뭘 저렇게 미련하게 할 필요가 있을 것인가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 할머니나 어머니들의 얼굴을 보면 자비심이 가득히 넘칩니다. 왜 그럴 것인가? 오직 일심으로 염불을 하니 삼매가 가까워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속을 시키는 공부가 필요합니다. 저는 한국에서나 여기서나 여러분들에게 염주를 많이 드립니다. 처음 올 때 오백 개를 가지고 와서 다 드리고 나중에도 더 가지고 와서 대원사에다 풀어놓았습니다. 염주를 드리는 것은 그냥 팔목에 감고 다니라고 드리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하는 부처님 공부는 자기한테 가장 손해가 안 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차피 성불을 해야 됩니다. 본래 부처거니 부처가 돼 버려야지, 부처가 될 바에는 다툼도 많고 전쟁도 많은 이 불안스러운 금생에 되어야 너도나도 인간계의 여러 재앙을 막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런 일을 하시라고 염주를 드리는 겁니다.



아미타불(Amita Buddha)


다음은 아미타불 편을 보시겠습니다.

아미타불(Amita Buddha)은 무량수(無量壽:Amita yus, 영생의 생명) 즉, 부처님의 목숨은 한량이 없다는 뜻입니다. 부처님 생명이 어느 한 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나 현재, 미래, 영원히 존재한다고 해서 아미타 부처님을 무량수불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지혜광명이 우주에 끝도 갓도 없이 충만하다고 해서 무량광(無量光)이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행복이나 모든 좋은 것을 원만하게 갖추고 있다고 해서 감로왕이라, 제일 맛있는 것이 감로 아닙니까, 모든 행복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는 뜻입니다.

또 아미타불은 법신ㆍ보신ㆍ화신 삼신일불(三神一佛)이라, 삼신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아(阿)는 화신을 의미하고 미(彌)는 보신을 의미하며 타(陀)는 법신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아미타불은 이렇게 무량공덕을 갖춘 부처님의 생생한 명체불(名體佛)이라, 이름과 체가 둘이 아닌 그런 이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명호부사의(名號不思議)라, 우리 사람 이름은 자기 부모나 작명가가 짓지만 부처님의 명호(名號)는 그 명호 자체에 진리가 다 깃들어 있습니다.

쉬운 말로 하면 진리가 다 묻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번 외우면 외운 만치 공덕이 묻어나오고 우리 마음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미타불을 또 십이광불(十二光佛)이라, 어느 하나로 표현 할 수 없단 말입니다.

부처님 이름이 이렇게 많은 이유를 아셔야 합니다. 광명으로 보나 생명으로 보나 행복으로 보나 어느 하나의 개념으로 해서는 다 표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름이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십이광불(十二光佛)은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 그 광명이 헤아릴 수 없고 무변광불(無邊光佛)이라, 부처님의 광명은 거리낌이 없지만 태양 광선은 가림이 있지요. 벽 같은 것은 못 뚫고 가지 않습니까. 그러나 부처님 광명은 벽이고 땅 속이고 다 뚫고 나갑니다.

무애광불(無碍光佛)은 거리낌이 없는 광명이요, 또는 무대광불(無對光佛)이라, 상대가 없다는 말입니다. 또 염왕광불(焰王光佛), 항시 빛나 있는 광명 부처님이요, 청정광불(淸淨光佛)이라, 조금도 오염이 없는 부처님이요, 환희광불(歡喜光佛)이라, 항시 행복이 충만한 부처님이요, 지혜광불(智慧光佛)이라, 지혜가 빛나는 부처님이요, 부단광불(不斷光佛)이라, 광명이 끊임이 없는 부처님이요, 난사광불(難思光佛)이라, 부사의 해서 우리 중생이 헤아릴 수 없는 부처님이요, 또 무칭광불(無稱光佛)이요, 어떻게 말로 감히 칭할 수 없는 부처님이요, 초일월광불(超日月光佛)이라, 해나 달이나 별보다 훨씬 더 밝은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부처님의 방편력은 참 교묘하기도 합니다. 이렇게까지 우리한테 고구정녕으로 말씀했건마는 우리 중생들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일축해 버리고 맙니다.

 다음은 아유월지(阿惟越地)라, 이것은 공부해서 얻은 불퇴지라, 지아유월지자(至阿惟越地者) 행제난행(行諸難行) 구내가득(久乃可得) 다시 후퇴가 없는 자리입니다. 법성을 증명해야 후퇴가 없겠지요. 이 아유월지에 이른 사람들은 난행문(難行門)과 쉬운 문(易行門)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공부하는 사람 중에는 자기 힘만 믿고 어렵게 나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도 물론 필요하겠지만 부처님한테는 본원(本願)이라, 근본 부처님께 깃들어 있는 만 중생을 성불케 하는 원(願)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그 본원이라는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우주에는 인력(引力)이 있지 않습니까. 그 인력도 역시 부처님한테 들어있는 공덕인 것입니다. 인력 그것은 모든 중생을 근본으로 이끄는 힘인 것입니다. 그냥 보통 물리학적인 의미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생명으로 생각할 때는 모든 중생을 중심으로 이끄는 부처님의 원력인 것입니다. 이른바 우주의 목적입니다.

따라서 부처님을 간절히 생각하고 흠모하며 부처님 이름을 외운다고 생각할 때는 우주에 본래 있는 인력에 우리가 편승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자기만 믿고 고생스럽게 가는 것 보다는 그 힘을 동경하고 따른다면 우리는 그 힘에 편승이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공부도 빨라지고 불안한 마음도 해소가 되는 것입니다.

인능염시불 무량력공덕 즉시입필정(人能念時佛 無量力功德 卽時入必定)이라, 우리가 능히 부처님의 무량의 공덕, 무량의 힘을 분명히 믿을 때는 그 즉시에 삼매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역시 용수보살이 지은 『십주비파사론』에 있는 법문입니다.

그 다음에 부처님에 대한 일념신해공덕(一念信解功德)은 부처님에 대한 한 생각, 바로 믿는 공덕은 오바라밀(五波羅密), 즉 보시를 하고 계행을 지키고 인욕을 하고 선정을 하는 등등의 오바라밀보다도 훨씬 수승하다.

약유중생 개불수명장원(若有衆生 開佛壽命長遠) 만약 중생이 부처님은 수명장원이라 부처님의 생명이 금생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생불멸의 존재다.

여시내지 능생일념(如是乃至 能生一念) 신해소득 공덕무유한량(信解所得 功德無有限量) 이렇게 능히 한 생각을 낸다고 생각할 때는 그렇게 믿는 공덕이 한량이 없어서,

약유선남자선여인(若有善男子善女人) 위아뇩다라삼먁삼보리(爲阿耨多羅三藐三菩提) 만약 선남자 선여인, 즉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아뇩다라 삼먁삼보리, 무상대도, 위없는 대도를 위해서,

고어팔십만억 나유타겁(故於八十萬億 那由多劫) 행오바라밀(行五波羅密) 팔십 억겁 동안, 즉 오랜 세월 동안 오바라밀을 닦는다고 할 때,

단바라밀(檀波羅密) 사라바라밀(巳羅波羅密)…’ 그 공덕도 많겠지만 부처님의 영생불멸 하는 이 공덕을 비교해 본다면 상대도 안 된다는 그런 뜻입니다.

이것은 법화경 분별 공덕품에 있습니다. 제가 한 말씀 더 드립니다. 부처님의 무량공덕을 온전히 믿는 그 힘이 우리가 육바라밀 가운데서 보시도 하고 계행도 지키고 인욕도 참선도 하는 이런 등등의 공덕, 다만 반야바라밀을 떠나서 오바라밀을 지키는 공덕을 수억 년을 한다 하더라도 그런 공덕은 부처님의 무량공덕을 한 생각 분명하게 믿는 그 공덕에 미치지 못한다는 법문입니다.

부처님이 과장을 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 마음이 바로 부처니까 마음으로 바로 믿어버리면 순식간에 우리 공덕도 그렇게 갖추어진다는 그런 뜻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대일여래(大日如來:Mahavairocana)라, 대일여래는 인도말로 비로자나불인데, 무슨 뜻인가 하면 광명변조(光明邊照)라, 우주에 두루해 있는 광명의 생명이란 뜻입니다. 그렇게 광명이란 말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다음은 염불 공덕편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o염불공극 어일일시시 일체처아미타불 (念佛功極 於日日時時 一切處阿彌陀佛)

진체명현기 전임명종시영입 구품연대 상품왕생 (眞體冥現基 前臨命終時迎入 九品蓮臺 上品往生)…   <보조지눌 선사>

염불공극이라 염불의 공덕이 지극해지면 나날이 어느 때든지 아미타불의 진체(眞體)가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아미타불의 광명이 은은하게 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우리가 임종할 때는 모든 성인들이 우리를 맞이하러 와서 극락세계 중에서도 제일 높은 극락세계(구품연대) 조금도 오염이 없는 성자들만 계시는 그곳에 태어난다, 이런 뜻입니다. 이것은 보조국사 염불요문에 있는 법문입니다. 그 다음에는


o아미타불 정묘법신 편재일체중생심지 (阿彌陀佛 淨妙法身 遍在一切衆生心地)

고운심불중생 시삼무차별 (故云心佛衆生 是三無差別)

역운심즉불 불즉심 (亦云心卽佛 佛卽心)…

아미타불명 심심상속 염념불매 (阿彌陀佛名 心心相續 念念不昧)…

구구성공 즉 홀이지간 (久久成功 則 忽爾之間)

심념단절 아미타불 진체탁이현전 (心念斷絶 阿彌陀佛 眞體卓爾現前)…  <태고보우 선사 >

아미타불의 청정하고 묘한 법신, 이것은 한계가 있는 몸이 아닙니다. 우주에 가득한 생명의 실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미타불의 법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일체 모든 중생의 마음에 두루해 있는 고로 마음이나 중생이나 부처가 차별이 없다. 부처님의 참다운 광명이 우주에 가득 차 있거니, 부처님과 나와 또는 중생이 어떻게 차이가 있겠습니까.

부처님은 언제 어디에나 두루해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아미타불의 이름을 우리 마음에 두고서 염념상속이라, 생각 생각에 끊임없이 외운다고 생각할 때는 구구성공(久久成功)이라, 오랫동안 하면 잠깐 동안에 분별시비 하는 마음이 딱 끊어져서 아미타불의 참다운 몸이 훤히 나타난다 이런 뜻입니다. 이것은 태고 보우 선사 염불법문입니다. 그 다음에


o심즉연불경계(心則緣佛境界)요 억지불망(憶持不忘)이라.

구즉칭명불호(口則稱名佛號)라.  분명불란 여시심구(分明不亂 如是心口)

상응일념일성즉 능멸팔십억겁(相應一念一聲則 能滅八十億劫)

생사지죄 성취팔십억겁(生死之罪 成就八十億劫)

수승공덕(殊勝功德)이라.    <서산대사 >

우리 마음은 부처의 경계를 인연하여 잠시도 부처님을 잊지 않고 우리 입으로는 부처님 이름을 항시 외워서 마음을 어둡지 않게 하고 이와 같이 마음으로나 입으로나 서로 상응해서 오로지 순수한 한 생각으로 한 소리로 한 번 염불을 하면 팔십 억겁 무수 세월 동안에 지은 죄를 다 없애고 동시에 무수 억겁 동안에 지을 수 있는 수승한 공덕을 성취한다. 이것은 서산 스님의 법문입니다. 다음에는 대무량수경에 있는 법문인데 우리중생에게 당부하신 말씀입니다.


o설만세계화 필과요문법(設滿世界火 必過要聞法)

요당성불도 광제생사류(要堂成佛道 廣濟生死流)

설만세계화(設滿世界火) 설사 온 세계가 지진이 나고 불바다가 될지라도 필과요문법(必過要聞法)이라, 반드시 그 불바다를 뚫고 나가서 부처님 법을 들어라, 요(要)자 이것은 ‘꼭’이라는 뜻입니다. 꼭 부처님 법을 들을지니 요당성불도(要堂成佛道)하고 한사코 불도를 성취해서 우리가 살면서 장사를 할 수도 있고 무슨 일을 할 수도 있으나 꼭 한사코 불도를 성취해야 함은 우리의 지상명령입니다. 광제생사류(廣濟生死流)라, 널리 중생을 제도하라. 온 세계가 불바다로 휩싸이더라도 반드시 뚫고 나가서 우리 생명의 근원인 불법을 들을 것이며, 한사코 불도를 성취해서 만 중생을 제도하라, 이것이 우리 인간이 할 일입니다.

 이것으로써 이번 순선 법회를 마감하겠습니다. 모두 바쁜 생활 가운데서 이렇게 몇 시간씩 시간을 내기가 어려우실 것인데 모두 열심히 나와서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한국이 비록 약소국이지만 부처님 가르침만은 우리 한국 불교가 제일 앞서 있습니다. 원효 스님을 비록해서 의상, 보조, 대각 국사, 서산 스님 등등, 기라성 같은 대 선사들의 가르침은 부처님 가르침 그대로입니다. 조금도 찌꺼기가 없습니다.

이런 불법을 가지고 우리가 세계로 나아간다고 생각할 때, 미국이나 일본 불교 등은 그들 나라 힘은 강하지만 그 종파성도 굉장히 강합니다. 그러니까 불법이 우선 하나가 되기 위해서 한국불법이 중심이 돼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선 한국불법을 믿는 우리 불교인이 하나가 되어야 하고 우리 한국불교의 순수하고 원통 무애한 불법을 바르게 알아야 되겠지요.

그렇게 해서 우선 불법으로 하나가 되고 그 다음에는 세계 종파가 하나가 되고, 불법만이 다른 종교를 다 포섭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공부해 나가면서 생업에도 종사하시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