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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마음의 고향

제 20 집 참선(參禪)의 바른길


마음의 고향 제 20 집


Ⅰ. 참선(參禪)의 바른길

 

*본 소참법문은 청화(淸華) 대종사께서 경주 고불선원(1992년4월19일) 초청으로 선원의 봉불식 법문을 마치시고 돌아오시는 길에 흥륜사에 들리시어 점심공양을 하시고 삼년결사 중이신 스님들을 대상으로 말씀하신 실참실구에 적절한 귀중한 법어입니다.


요심수도(了心修道)

밥만 좀 얻어먹고서 갈려고 맘먹은 것인데........

삼년결사(三年結社)를 하신 스님들이 계신다기에 감동한 나머지 말씀을 좀 드리고자 들어왔습니다. 저도 삼년결사를 몇 번이나 해 보았습니다.

태안사(泰安寺)에 들어와서 정식으로 대중과 더불어서 한 적도 있고, 그 전에는 혼자 묵언정진(黙言精進)을 여러 해를 했습니다.

더욱더 가깝고 친밀한 감동을 느낍니다. 달마(達磨)스님의 관심론(觀心論)에 보면, 지금은 돈황(敦煌) 문서들이 발견된 뒤로 달마스님이 쓰신 관심론이 아니라 신수(神秀)대사가 썼다는 설도 있습니다만, 관심론에 보면 약능요심수도(若能了心修道)면  즉생공이이성(則省功而易成)이요, 깨달을 요(了)자, 마음 심(心)자, 마음을 깨닫고 마음이 무엇인가를 알고 닦으면 생공이이성이요, 생략할 생(省)자, 공들일 공(功)자, 공을 별로 들이지 않고 이성이요, 쉬울 이(易)자 이룰 성(成)자, 쉽게 이룰 수가 있는 것이고, 그 반대로 약불요심수도(若不了心修道)면 내비공이무익(乃費功而無益)이라. 그 반대로 마음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닦으면 헛수고만 할 뿐 이익이 없느니라. 그런 법문이 달마스님 괸심론에 있습니다.

마음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닦으면 증사작반(烝砂作飯)이라. 마치 모래를 쪄서 밥을 짓는 것과 마찬가지로 밥이 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공부할 때는 꼭 요심수도 하는 그런 쪽으로 공부를 하여야 이제 공부도 더 쉽고 또 성취도 빠른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던지 간에 먼저 이론적인 체계가 서야 합니다.

그 「아인슈타인」이 자기 제자인 「하이젠베르그」에게 한 말도 실험을 하려고 하면 정확한 이론(理論)이 먼저 앞서야 실험이 제대로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을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참선(參禪) 공부, 우리 불도(佛道)를 찾는 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팔정도(八正道) 가운데 정견(正見)이 앞선단 말입니다. 정견이 먼저 앞서지 않으면 바른 공부가 못 되는 것입니다.

정견만 명확히 확립이 된다고 생각할 때는 자동적으로 말도 여법(如法)히 해지는 것이고 생각도 바르게 해지는 것입니다.

우리 불법(佛法)의 대요(大要)라는 것은 공부해 보면 팔정도(八正道) 가운데 다 들어 있습니다. 참선 공부하는 내용이 다 들어 있습니다. 정견 자리에 가서 우리 공부의 갈림길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근본불교(根本佛敎)쪽으로 정견을 생각할 때는, 정견을 그냥 사제법문(四諦法門)으로나 말하고 인생고(人生苦)의 원인과 또는 고의 소멸과 고를 해탈하는 방법이 팔정도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 근본불교 소승적인 팔정도의 해석이지만 대승불법(大乘佛法)으로 생각할 때는 차원이 그렇지가 않습니다.

정견 자리에서 본래시불(本來是佛)자리, 본래 바로 부처의 자리를 우리가 느껴야 합니다. 본래시불 자리, 본래 바로 부처라! 닦은 뒤에 부처가 아니라, 본래 바로 부처라! 이렇게 느껴버려야 이른바 참다운 대승적인 정견이 됩니다.

따라서 본래 부처니까, 무한의 불성공덕(佛性功德)을 우리가 다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자기한테 대한 자기의 공덕이, 가사 보조(普照) 어록대로 말하면 과불공덕(果佛功德)이 분호불수(分毫不殊)라. 과불공덕(果佛功德)이 분호불류(分毫不謬)란 말입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인가 하면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께서나 삼세제불(三世諸佛)이 성취하신 불과(佛果) 그런 공덕이 우리 중생과 더불어서 분호불수라, 조금도 차이가 없단 말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만 삼명육통(三明六通)을 다 하고 무량한 신통(神通)을 갖춘 것이 아니라, 우리한테도 호리불차(毫釐不差)라, 호리도 차이가 없이 갖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과불공덕이 분호불수라. 불과를 성취한 그런 공덕이 만중생(萬衆生)과 더불어서 조금도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알아버려야 응당 정신(正信)이라, 신심(信心)도 참다운 믿음이란 말입니다. <방성신야(方成信也)>

따라서 참다운 믿음도 바른 견해, 정견이 있어야 참다운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참선(參禪)할 때는 바른 믿음이 앞서야 하고, 또 용맹심(勇猛心)과 참구(參究)하는 마음이 곁들어야 하는 것인데, 바른 믿음이 전제가 되기 위해서는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바른 견해 바른 가치관 바른 철학이 앞서야 하는 것입니다.

바른 철학(哲學)이란 무엇인가?

앞서 언급한 본래시불 자리, 당래(當來)부처가 되는 당래성불(當來成佛)이 아니라, 본래 바로 부처가 되어 있다는 자리, 그 자리를 분명히 느껴버려야 이른바 돈오돈수(頓悟頓修)가 됩니다. 그 자리를 느끼지 못하면 돈오(頓悟)도 못되고 돈수(頓修)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특히 삼년동안이나 공부하시는 스님들은 그때그때 선지식(善知識)들 한데서 법문을 많이 들으시겠지만 그래도 자기 공부하는 길에 관해서 확연히 견해와 신(信)이 차있어야 합니다. 신해(信解)>

그래서 선행적으로 본래시불 자리를 느낀 다음에는 무엇이 필요할 것인가?

그 다음에는 우리 범부 중생이 본래 부처라 하더라도 자기 숙세 누겁(累劫)의 숙업(宿業) 때문에 습기(習氣)가 우리한테 끼어 있으니까 습기를 녹여서 성불(成佛)까지 가는 길목<修道의 位次>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길목을 잘 모르면 공부하는 경계가 많기 때문에 더러는 자기 몸뚱아리가 텅텅 비어 오기도 하고, 더러는 공중으로 떠올라가는 듯한 경쾌한 마음도 느끼는 것이고, 가지가지 경계가 많이 있습니다.

부처님 같은 모양이 나오기도 하고, 또는 빛이 훤히 이렇게 밝아서 나오기도 하고 방안도 훤하고, 벽을 뚫고서 저편도 보인단 말입니다. 그런 때가 있는 것인데 그런 때를 당할 때 기분이 나쁠 때는 모르거니와 쾌적하고 그렇게 상쾌하고 자기 몸에 부담을 느끼지 않고, 그런 때는 아! 견성오도(見性悟道)가 이런 자리가 아닌가? 이렇게 혼동(混同)을 느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공부 하는 경계에 대해서 분명히 알아야 이른바 암중모색(暗中摸索)이 안 되고 동시에 증상만(增上慢)이라, 못 통하고 통했다하고, 또 못 증(證)하고 증했다하는 그런 증상만을 안 내는 것입니다.

증상만을 한번 내버리면 공부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수도(修道)의 과정, 수도의 위차가 그것이 비록 한번 깨달으면 다 된다. 이렇게 하더라도 깨닫기 자체도, 앞서 말씀과 같이 깨닫는 과정에 경계가 많아서 참다운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점검하기가 쉬운 것도 아니고, 설사 초견성(初見性)을 했다 하더라도 성불까지 가는 길은 또 요원한 길입니다.

그러기에 본래시불 자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분명히 돈오(頓悟)이지만 우리가 부처까지 간다고 생각할 때는 습기를 녹이는 과정을 생각할 때는 또 역시 점수(漸修)란 말도 옳단 말입니다.

따라서 따지고 보면 돈오돈수(頓悟頓修)나 돈오점수(頓悟漸修)가 거리가 먼 것이 아닙니다.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라, 모든 중생들이 부처와 더불어서 본래로 성불되어 있다. 이런 자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분명히 돈오인데 그렇다고 그 자리를 분명히 좀 느끼고 안다고 해서 그것이 끝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른바 해오(解悟)라, 풀 해(解)자, 깨달을 오(悟)자, 해오로 해서는 이치로는 안다 하더라도, 자기가 정작 자기 자성(自性)을 증명 못한 경우에는 불공덕(佛功德)은 안 나오는 것입니다.

부처님 명호(名號) 가운데, 여래십호(如來十號) 가운데 명행족(明行足)이란 것이 있습니다.

밝을 명(明)자, 행할 행(行)자, 족할 족(足)자입니다.

이것은 무엇인가 하면 ‘밝음’ 이것은 바로 지혜(智慧)를 말합니다. 그런 지혜가 부분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완벽한 지혜를 다 갖추고 있다는 것 이것이 명행족입니다.

따라서 참말로 깨달으면 그때는 그런 모든 지혜를 완벽하게 갖추어야 합니다.

마음만 좀 개운하고 무엇에 막힘이 없고  그 정도가 참다운 깨달음이 아니라 명행족이 되어야 합니다. 삼명육통(三明六通)을 다 갖추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불하는 길이 본래의 자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한 걸음도 옮기지 않고 본래 부처가 되어 있지만 습기를 녹여서 간다고 생각할 때는 요원(遙遠)한 길입니다.

그러기에 십지명(十地名)에서 보살초지(菩薩初地), 이지(二地), 삼지(三地), 사지(四地), 그런 것이 있습니다.

그런 도리를 잘 모른 사람들은 그것은 교가 아닌가?

선법(禪法)에서는 그런 것이 필요 없지 않는가?

선(禪)과 교(敎)가 원래 둘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앞서 허두에서 말씀드린 요심수도, 마음이 무엇인가, 마음이 본래 부처인 것을 깨닫고 닦으면 생공이이성(省功而易成)이라, 본래 공(功)을 많이 안 드리고도 성불(成佛)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와 나와 나누어 생각하고, 마음 밖에서 도(道)를 구하고 진리(眞理)를 구하고 부처를 구한다고 생각하면 공부가 굉장히 더딘 것입니다.

그러기에 불요심수도(不了心修道)면 증사(蒸砂)가 작반(作飯)이라. 다만 자기 마음이 무엇인가를 모르고서 암중모색(暗中摸索)으로 애쓰고 닦는 것은 모래를 삶아서 밥을 짓는 것과 마찬가지로 밥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응당 본래시불 자리를 분명히 느끼고, 느꼈다고 생각하면 그 자리를 여의지  않고 공부를 지속적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참선 공부나 일반 공부나 한말로 하면, 육조단경(六祖壇經)의 맨 나중에가 있습니다만 무슨 경(經)이나 부촉품(咐囑品)이 경의 결론(結論)인데, 부촉품에 보면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그대들이 만약 여래(如來)의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성취하고자 하면 마땅히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를 증(證)할 지니라.

4조(四祖) 도신(道信)대사의 법문이나, 또는 5조 홍인(弘忍)대사의 법문이나, 6조혜능(六祖慧能)대사의 법문이나 그와 같이 일관되어 왔던 것입니다. 일상일행(一相一行)이란 말입니다.

일상삼매(一相三昧)는 무엇인가 하면 천지우주(天地宇宙) 모두를 진여불성(眞如佛性) 하나로 보는 것입니다. 천지우주에는 다른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불성 일원론(一元論)입니다.

물(物)과 신(神)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부처와 나와 따로 둘이 있는 것도 아닌 것이고, 천지 우주를 하나의 불성(佛性)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것보고 일상삼매라고하고, 그렇게 분명히 느끼는 것보고 해오(解悟)라고 하는 것입니다. 풀 해(解)자, 해오입니다.

그래가지고서 그런 자리 일체 존재가 다 진여불성 아님이 없다. 그런 자리를 놓치지 않고서 염념상속(念念相續)으로 공부를 이어 간단 말입니다. 그래야 참다운 참구(參究)가 됩니다.

그러기에 다들 아시는 바와 같이 남악회양(南嶽懷讓)선사, 6조 혜능대사의 정법을 받은 스님입니다.

남악회양선사 휘하에서 마조(馬祖)가 공부할 때에 마조가 팔척장신이고 장부다운 사람이라 공부도 열심히 하겠지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가부좌(跏趺坐)를 틀고 앉아만 있단 말입니다.

남악선사가 보아하니 그릇은 좋은데 법(法)의 한계를 잘 모른단 말입니다. 법을 잘 모르고 닦는다고 생각할 때에는, 다시 말하면 마음이 무엇인가? 마음과 일체 존재의 관계가 무엇인가? 이런 것을 모르고 닦는다고 생각할 때는 힘의 낭비를 많이 합니다.

따라서 저 사람의 마음을 이제 깨우쳐 주어야 되겠구나. 그래가지고 마조가 공부하는 방 앞에 가서 조사스님이 벽돌을 뜨르륵 뜨르륵 갈았단 말입니다. 벽돌을 가는 소리가 몇 시간 동안 계속된단 말입니다.

마조역시 공부하는 학인이지만 이상하기도 해서 은사스님께 물어 보았습니다. 대관절 무슨 필요로 그렇게 벽돌을 갈고 계십니까?

남악선사의 대답이 벽돌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려고 그런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마조가 웃으면서 노장님도 참 망령이 드셨습니다. 벽돌을 갈아서 어떻게 거울이 된다고 그렇게 갈고 계십니까.

그 말끝에 남악선사 답이 가부좌 틀고 앉아가지고서 무슨 놈의 부처가 될 것인가?

그렇게 말씀을 하시면서 지금 소가 끌고 가는 구름마<달구지, 수레>가 있다고 생각할 때에 구름마가 안가면 구름마를 때릴 것인가? 소를 때릴 것인가?

마땅히 채찍질을 소한테 해야 달구지가 잘 굴러 가겠지요.

그와 마찬가지로 마음이 주인공(主人公)인데 몸뚱이만 애쓰고 앉아본들 그걸로 해서는 큰 공덕이 없다는 것입니다.

먼저 주인공 자리를 분명히 느끼고 앞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인공인 마음이 앞선다고 생각할 때는 몸뚱이는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부처님 할 때는, 마음은 부처거니 하지만 몸뚱이는 부처라고 생각을 잘 안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이 몸뚱이나 일체존재, 일체물질 모두가 부처 아님이 없습니다.

내 몸뚱이까지도 물질이 아닌 바로 부처라고 불성이라고 생각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물질이 아니라서 불성(佛性)이 되겠지만, 내 몸은 물질이 아닌가? 하루에 몇 칼로리를 먹어야 하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할 때는 그 몸뚱이 건강하려고 굉장히 노력을 많이 합니다. 잘 먹여야 하고 잘 입혀야 하고, 그러나 이 몸뚱이가 존재가 아닌, 물질로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그림자 같은 것입니다.

그림자를 천만 개를 곱하고 보태고 한다 하더라도 그림자는 그림자 아닙니까.

제로를 역시 천만번 곱하고 보태도 제로는 제로입니다.

똑 같이 마음이라는 것은, 마음이 인연(因緣) 따라서 상(相)을 내서 사람 같은 상을 내고, 또는 해 같은 상을 내고, 달 같은 상을 낸다 하더라도 역시 그것은 상에 불과한 것이지 실지로 있지가 않습니다.

요즈음 철학에서 말하는 실존 분명히 이 몸도 그림자와 마찬가지입니다. 있지가 않는 것입니다. 허망한 상이 계속 되는 것이니까. 허망상이 계속 되는 그것 보고 우리가 잘못 생각해서 나라고 하고 너라고 하고 금(金)이라고 하고 다이아몬드라고 하는 것이지 그런 상이 실존이 아닌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느껴야 합니다.

이것만 잘 느껴버려도 이 몸뚱이가 항시 가볍단 말입니다.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 자도 그만 안자도 그만, 이 몸뚱이가 실존적으로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거기서 생기는 피해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고 누가 한번 때리면 금방 진심(嗔心)을 낸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아함경(阿含境)을 보면 그대가 공부할 때 양날톱으로 그대 목을 슬슬 자른다 하더라도 표정을 굳히면 불자가 아니다. 이런 말씀이 있단 말입니다.

내 것이 아닌 것이고, 네 것도 아닌 것인데 몸뚱이 누가 헤친다고 생각할 때 불법적(佛法的)으로 여법(如法)하게 생각할 때는 성낼 아무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앞서 말씀드린 대로 본래시불(本來是佛), 본래 바로 부처라고 생각할 때는 내 마음만 본래 부처가 아니라, 내 몸도 일체 존재, 일체 물질이 다 본래 부처란 것입니다. 삼천 대천세계 부처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부처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게 느껴서 마음을 먼저 열어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열고 닦아야 그래야 돈오돈수(頓悟頓修)입니다. 그래야 돈오점수(頓悟漸修)란 말입니다.

돈오돈수라 해서 금방 다 된 것이 아니라, 습기가 있어 놓아서, 금생에 지은 번뇌 금생에 나와서 잘 못 배우고, 잘 못 듣고, 잘 못 생각하고, 이런 번뇌가 우리 잠재의식에 꽉 끼어있고, 또 무수 생(生)동안 윤회(輪廻)의 과정에서 이루어진 우리 습관성(習慣性), 이런 것은 갑자기 녹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못 녹이면 마음이 좀 열렸다 하더라도 아무란 힘을 못 내는 것입니다.

석가모니와 더불어서, 원효(元曉)와 더불어서, 보조(普照)와 더불어서, 우리가 갖추고 있는 것도 원만구족(圓滿具足)이라 똑 같지만 다만 그 분들은 습관성을 녹여버렸기 때문에 명행족이라, 참다운 법력(法力)을 갖춘 도인(道人)이 되고, 우리는 그런가 보다 하는 것이지, 증명(證明)을 아직 못 한 것입니다.

증명(證明)을 제대로 했다고 한다면 분명히 삼명육통(三明六通)을 다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한테는 그러한 소중한 불성이 깃들어 있습니다. 요즈음 잘 못 생각한 사람들은 신통 그 것은 외도(外道)나 하는 것이 아닌가?

신통의 본 고장이 불가(佛家) 아닙니까. 외도는 기껏해야 5통 밖에는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 불자는 바르게 닦으면 반듯이 6통까지 나와야 합니다.

그러기에 불교가 위대한 것이고 불심(佛心)이 위대한 것입니다. 앞으로는 그렇게 위대한 도인들이 많이 나올 것이지만, 그렇게 나와 버려야 과학을 온전히 제어하고 과학을 굴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 불교인들이 항시 그 아는 것으로만 그쳐 버리면 과학을 우리가 굴릴 수가 없습니다. 현대 물리학(物理學)도 모두가 하나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물리학도 모두가 에너지뿐이다. 에너지라는 것은 물질이 아닙니다. 하나의 정기(精氣)란 말입니다.

<물리학적인 측면에서만 보더라도> 일체 존재는 물질이 아닌 우주에너지의 활동 형상화인 것입니다.

따라서 현대 물리학이 부처님 도리를 차근차근 밝히고 있습니다. 현대 물리학이 물질은 본래가 없는 것이고, 일체가 에너지뿐이다. 현대과학도 이렇게 증명을 하는 것인데 하물며 우리 불자들이 상(相)에 걸리고 물질에 걸린다고 생각할 때는 불교인이 아닌 것입니다.

물질은 하나도 없고, 눈곱만큼도 없고, 따라서 절대공간 절대시간이 원래 없는 것입니다. 절대물질(절대공간 절대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없는 것을 우리 중생이 삼독심(三毒心)에 가려서 있다고 잘 못 보는 것뿐입니다.<삼독심(무명심)즉 물질은 본래 없고 있는 것은 진여불성(眞如佛性)뿐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불자님들은 꼭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그런 바른 말씀을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불교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절대공간 절대시간(절대물질)은 절대로 없습니다. 있는 것은 불성(佛性)뿐인데, 우주에는 불성뿐인데, 우리 중생이 업에 가려서 잘 못 본다는 그런 차이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공부를 할 때는 내 몸도 공(空)이요, 모두가 공이요,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 제법공(諸法空)자리, 오온개공 자리를 느끼고 공부를 하여야 참선(參禪)이 되는 것입니다.

반야지혜(般若智慧)가 없으면 불법(佛法)이 되지를 않습니다. 반야지혜가 없이 남한테 베풀고 보시(布施)하고 하는 그런 것은 기독교나 다른 종교에도 다 있는 것입니다.

불교가 불교인 점은 무엇인가? 반야지혜가 전제가 되는 가운데서 불법이 불법다운 것입니다. 불교의 도리가 반야지혜에 있습니다. 반야지혜로 닦아야 참다운 공부가 되고 참다운 참선이 됩니다.

‘판치생모(板齒生毛)’ 를 많이 하고 ‘무(無)‘자 화두(話頭)나 ’이뭣고(是甚麽)‘를 많이 한다 하더라도 반야지혜(般若知慧)가 없이 할 때는 단순한 의심(疑心)인 것이지 참다운 참선이 못 되는 것입니다.

마땅히 체(體)와 더불어서, 용(用)을 거두어서, 상(相)을 거두어서 본 성품으로 가는 그런 자리에 참선이 있는 것입니다.

일반 방편공부는 현상적인 상에 걸려 있지만, 참선 공부는 우선 나라는 상을 걷어 쳐부수고, 무아(無我) 무소유(無所有)라. 삼천대천세계가 텅텅 비어서 공공무대천(空空無大天)이라. 모두가 텅텅 비어 있다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분명히 비어 있는 것이고, 공부를 많이 한 노장 스님들께서는 다 느끼셨을 것입니다만 공부를 하다보면 정말로 자기 몸뚱이고 무엇이고 다 비워져 버립니다.

그런 때는 정말로 이러니까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고 했겠구나. 그때야 공을 좀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 그걸 잘 못 느낀단 말입니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나, 「옴마니 반메흠」이나, 또는 화두나 애쓰고 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업장(業障)이 녹는 정도에 따라서 차근차근 비워옵니다. 욕심도 줄어들고 차근차근 비워온단 말입니다.

이 몸뚱이가 비워오는 것을 느껴버려야 정말로 ‘이러니까 무아(無我)라고 했구나.’ 이렇게 느끼는 것입니다.

다 알고 계시는 말씀이지만 삼년결사(三年結社)하는 참으로 거룩한 우리 스님 네들입니다. 삼년 세월이 절대로 쉬운 것이 아닙니다. 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릅니다.

사람을 피해서 산속에 가서 몇 년이나 있어 보면, 사람을 피해서 왔지만 사람들이 그립단 말입니다. 참선을 우리가 결사할 때는 될수록 신구의(身口意) 삼함(三緘)이라, 몸으로 될수록 활동을 삼가고, 입으로 말을 많이 않고, 뜻으로 헤아리지 않고, 삼함이라, 석 삼(三)자, 봉할 함(緘)자, 신구의 삼함을 해야 삼매(三昧)에 들어갑니다. 삼매에  들어가야 습기가 녹습니다.

우리 공부는 쉬운 대로만 그냥 편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당가에 <한가롭게> 앉아서 참선은 못 하지 않습니까. 참선은 무서운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자기 생명(생명)을 걸고 하는 공부입니다.

그러기에 대사일번(大死一番) 대활현전(大活現前)이라. 한번 크게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범부생(凡夫生)을 꼭 죽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신구의 삼함이라. 몸으로 망동, 몸을 될수록 차분히 하고, 말도 필요 없는 말은 절대로 않고, 말 한마디 하면 한마디 한 만큼 우리 마음이 무거워 오는 것입니다.

신구의 삼함을 명심코 하셔서 꼭 한사코 삼매에 드십시오. 삼매에 들어서 멸진정(滅盡定)을 통해야 이른바 아(我)가 녹는 것입니다.

멸진정을 못 통하면 아(我)라 하는, 원수 가운데 가장 원수가 아(我) 아닙니까. 아(我)가 녹니 못하면 범부입니다. 결국은 뭐~ 속한(俗漢)이란 말입니다.

금생에 못 녹이면, 몇 만생을 지나도 아(我)를 녹여 버려야지 윤회(輪廻)를 않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는 공부, 관음보살을 하면 관음보살을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그 한 생각 훤히 열려있는 그 자리 말입니다.

앞서도 말씀 드렸지만 마음을 열고 해야지 마음은 원래 열려 있는 것인데 우리가 스스로 마음을 꼭 붙잡고서 구속을 받는 것입니다. 나라는 것도 없고, 너라는 것도 없단 말입니다.

우주 끝까지 다 볼 수 있는 힘이 우리한테는 다 있습니다. 다만 그 번뇌(煩惱)에 가려서 못 한단 말입니다.

삼년결사 저도 성공한 사람이 아닙니다. 삼년을 제대로는 다 채웠습니다. 산문밖에는 한 발도 안 나갔습니다. 그렇게 형식은 다 취했다 하더라도 마음을 제대로 못 다스렸기에 아직도 공부를 다 마치려면 천리만리입니다.

이제 여러분들께서는 2년 동안 공부를 하셨습니다. 나머지 1년 동안에 꼭 앞서 말씀드린 습기를 녹여서 멸진정을 성취하시기를 바랍니다.

너무 말씀을 많이 드리면 밥값이 비싸지므로 이대로 끝내겠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마음의 고향 제20집


Ⅱ. 귀의 삼신불(歸依 三身佛)


*성륜사(聖輪寺) 법성당에서(2001년 11월29일) 청화(淸華)큰스님이

제방스님과 재가불자에게 설하신 동안거 결제 법어입니다.



먼저 이치로 들어가야


오늘 같이 이렇게 음산한 날씨에는 저희같이 고희(古稀)가 넘고 팔십이 가까운 사람들은 한결 심각하게 인생의 허무를 느낍니다.

부처님 공부는 조금도 무리한 공부가 아닙니다. 본래대로의 공부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본래대로 있는 참모습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번뇌 망상을 일으키고 거기에 따르는 업을 짓고, 인생고의 여러 가지 재난을 스스로 지어서 받게 되는 것입니다.

방금 여러분들이 들으신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은 육조단경(六祖壇經)에서 “귀의일체삼신자성불(歸依一體三身自性佛)”하라, 또는 “삼보(三寶)에 귀의(歸依)하고 반야바라밀(般若波羅密)을 깨닫고” 하는 그러한 가르침이 육조단경의 중심 사상입니다.

여러분도 대체로 아실 분은 아시겠습니다만 이 참선(參禪)은 달마스님 때부터서, 근본 가르침은 부처님 당시부터 있어 왔지마는, 적어도 문자(文字)를 배제(排除)하고 오직 마음만 닦아야 한자는 그런 가르침은 달마스님 때부터서 특히 역설 강조해 왔습니다.

달마스님 가르침의 핵심은 이입사행(二入四行)이라, 두 이(二)자, 들 입(入)자, 넉 사(四)자, 행할 행(行)자입니다. 먼저 이입(理入)이라는 것은 다스릴 이(理)자, 들 입(入)자, 이치로 먼저 들어가고, 다음에 행입(行入)이라, 행할 행(行)자, 들 입(入)자, 우리가 실천궁행(實踐躬行)으로 해서 이른바 행동에 옮긴단 말입니다.

이치(理致)로 들어간다고 하는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달마 스님께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면 “일체중생(一切衆生) 동일진성(同一眞性)이라” 일체 모든 중생이 다 한 가지의 성품(性品)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흔히 상식적으로 중생(衆生)이라 할 때는 사람만 중생이라 생각하고, 더 나아가서는 일반 동물만 중생이다. 이렇게 생각하기 쉽지마는 부처님 가르침은 그 보다 훨씬 더 광범위합니다.

중생 그러면 이것은 유정중생(有情衆生), 동물적인 유정중생은 다시 말할 것도 없고, 또는 무정중생(無情衆生)이라, 동물이 아닌 식물이나 그런 것이 모두가 다 중생 가운데 포함됩니다.

또는 무색중생(無色衆生)이라, 모양도 없지마는,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 관념(觀念)이라든가, 우리의 사고(思考), 이 모든 것도 역시 무색중생(無色衆生), 없을 무(無)자, 빛 색(色)자, 모양이 없는 중생에 해당됩니다.

따라서 중생 그러면 유정중생과 무정중생 또는 무색중생 다 포함해서 중생이라 합니다.

그래서 “일체중생(一切衆生) 동일진성(同一眞性)이라” 참 진(眞)자, 성품 성(性)자, 동일진성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가 하면 일체중생이 모두가 다 하나의 성품이란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현상적인 상(相)만 보기 때문에 우리 중생과 깨달은 분과의 차이는 무엇인가 하면, 우리 중생은 현상적인 상만 보는 것이고, 깨달은 분은 근본성품(根本性品)을 봅니다. 바다에 비교하면 바다 물결만 보는 것이 우리 중생인 것이고, 깨달은 분들은 그 물(水)자체(自體)를 봅니다. 그 성품(性品)을 봅니다.

앞서 말씀과 같이 중생 그러면 이것저것 다 포함 되는 것인데 다시 말씀 드리면 현상계(現象界) 모두가 다 중생에 포섭이 됩니다. “이런 중생이 동일진성이라” 하나의 참다운 성품이란 말입니다.

참 진(眞)자, 성품 성(性)자, 진성(眞性)이란 말에는 여러 가지 표현이 있습니다. 법성(法性), 법신(法身), 불성(佛性), 불심(佛心), 또는 자성(自性), 본래면목(本來面目) 등 이러한 것이 모두가 다 참다운 성품(性品)에 해당 합니다.

그때그때 조사(祖師)님들이 우리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서 말씀을 많이 하셨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표현이 되지마는 뜻은 똑 같고 표현만 다를 뿐입니다.

그래서 “일체중생 동일진성이라“는 달마 스님 말씀은 모든 것이 다 하나의 성품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범부들은 자꾸만 분할해서 갈라서 봅니다. 내가 있고 네가 있고, 미운 것이 있고 좋은 것이 있고, 이렇게 나누어 보는 것은 중생심으로 보는 것입니다. 성자는 그렇게 보지 않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본래대로 성품을 본다면 모두가 다 하나란 말입니다. 범부와 성자는 그러한 구분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삼동결제를 해서 공부를 하는 것도 우리가 잘못 보는 우리 범부중생(凡夫衆生)의 망념(妄念)을 떠나서 모든 생명의 본래자리, 우리가 실상 자리로 돌아가기 위한 공부입니다.

근래 중국에서 1959년에 돌아가신 허운(虛雲) 대사란 분이 계셨습니다. 빌 허(虛)자, 구름 운(雲)자, 허운 대사는 굉장히 위대한 대선지식(大善知識)입니다. 허운 대사는 120세까지 장수를 했습니다. 1959년이니까 얼마 안 되었습니다.

교학 적으로도 굉장히 공부를 많이 한 분인데 신심(信心)도 독실하셨습니다. 그분께서 보타산법화암(普陀山法華庵)에서 오대산(五臺山)까지 갈 때 삼년배행(三年拜行)을 하셨습니다. 절 배(拜)자, 행할 행(行)자, 삼보일배(三步一拜)라, 도보로 세 걸음 보행 후 땅에 오체투지(五體投地) 한 번씩 하는 것이 삼보일배 행입니다.

그 교만한 사람들은 “그렇게 애쓰고 그럴 필요가 있을 것인가” 그렇게 쉽게 생각할 수가 있겠지만 우리 범부 중생들은 얼마나 업장이 무거운가.

업장도 실상(實相)에서 본다면, 본래는 업장도 없습니다. 그러나 중생의 몸을 받아 나와서 욕계 색계 무색계를 윤회(輪廻)하는 중생 차원에서는 굉장히 업장이 무거운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 스스로에 대해서 깊이 참회하는 분 들은 삼보일배 하는 배행이 참으로 숭고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안 해도 되지만, 그것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허운 대사는 삼년 동안 한데서 자고 걸음 걸으면서 그때그때 조금씩 얻어먹고 하면서 세 걸음 떼고 또 한 번 땅에 대고 오체투지하며 오대산까지 가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다른 공부는 얼마만치 진실(眞實)하게 했는가를 미루어서 짐작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중국 당나라 때나 수나라 때, 중국에서 인도까지 가서 법을 구하는 스님들, 구법승(求法僧)을 알고 있습니다. 다행히도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쓰신 우리 한국의 혜초(慧超)대사도 구법승 가운데 한 분입니다.

그때 중국에서 인도까지 가려면 고비사막을 넘어야 되고, 또 히말라야 산맥의 파미르고원을 넘어야 됩니다. 그 파미르고원은 평균 오천 미터입니다.

그래서 도보로 가니까 꼬박 가는 데에만 3년 걸렸습니다. 3년 걸려 무난히 다 가는 것이 아니라, 국경을 몇 십 개나 넘어야 합니다.

‘십진구퇴(十進九退)라’ 열 사람쯤 가면 보통 아홉 사람은 물러나거나 죽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법을 구했습니다.

어째서 그와 같이 까다롭게 법을 구했는가 하면, 부처님 당시에 해놓으신 법문이라든가 그 뒤에 훌륭한 조사가 해놓은 법문들이 중국으로 한꺼번에 다 들어 온 것이 아닙니다.

이것 들어오고, 저것 들어오고 했기 때문에 무슨 경(經)을 보면, 그 경속에 여러 가지 다른 경 말씀이 많이 있는데, 어떻게 볼 라야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불경 속에 들어 있는 그 나머지 불경을 다 보기 위해서 인도에 가서 경을 다시 또 모셔 와야 했습니다.

꼬박 3년 걸리고, 또 인도 들어가서 그냥 말(語)이 안 통한단 말입니다. 외국어 실력 없이 외국에 갔다 온 사람들은 짐작이 되실 겁니다. 외국어 실력이 없으면 얼마나 불편한가를 말입니다. 인도에 가서도 역시 그쪽 말을 배워야 됩니다. 말을 배우고 또 애써 학문을 배우고,

물론 좌산도 하고 여러 가지 공부를 해야 되겠지요. 그것이 또 몇 년 세월 걸려 버린단 말입니다.

인도에서 중국으로 오려고 해도 그냥 빈 걸음으로 올 수가 없습니다. 불경(佛經)을 몇 십 권 짊어지고 와야 되지 않겠습니까.

갈 때도 3년 걸리고, 거기서 머물면서 공부도 하고 말도 배우고 하는데서 4,5년 걸려 버립니다. 그리고 올 때도 참 지루했겠지요. 갈 때 고생을 했으니 더욱더 오는 것에 대해서는 염려가 많겠지요. 또 3,4년 걸려 버린단 말입니다. 한번 갔다 오면 보통 20년 걸립니다.

이렇게 해서 부처님 경전(經典)을 중국으로 가져온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공부할 때 조금 무엇이 불편스럽다든지 또는 재가불자들이 집안에서 공부할 때도, 공부하지 않고 마음대로 먹고 마음대로 쉬면되지 않겠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게으른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성인이 되는 가르침입니다. 우리 범부가 성인이 되는 가르침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그냥 아무렇게나 살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반드시 부처가 되어야 한다는 사명을 타고 태어났습니다.

어째서 그런가하면, 달마 스님 말씀과 같이 “일체중생이 동일진성이라” 모든 중생이 다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꿔서 말하면 모든 중생이 본래 부처란 말입니다.

“금생에 그렁저렁 편히 살고 부처가 안 되면 그만 아닌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부처가 못 되면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의 삼계(三界)를 뱅뱅 윤회합니다. 윤회전생(輪廻轉生)이라.

우리 재가불자님들 깊이 느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본래 부처니까 부처가 안 되고 그렁저렁 살면 업(業)만 짓는 것입니다.

우리가 금생에 사람 몸 받은 것도 과거 전생에 사람 몸 받을 정도로 그래도 다섯 가지 계율(戒律) 정도는 닦았기에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십선계(十善戒)를 닦았으면 천상에 태어났겠지요. 눈에 보이는 세계만 긍정하는 사람들은 천상이라 하면 천상이 어디 있을 것인가? 그것은 “부처님께서 방편(方便)으로 말씀하셨겠지?” 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방편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이 허망무상(虛妄無常)하지만 이와 같이 이렇게 있듯이, 천상(天上)도 역시 허망무상 한 것이지만 천상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실상세계는 아닙니다.

사람이 죽으면 저승에서 헤매는 영가생활이 분명히 있습니다. 제가 너무 까다로운 말씀을 해서 여러분들이 긴장을 하시니까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마음을 푸셔서 부처님 공부는 한편으로 생각하면 한없이 어렵고 옹색한 것 같지만 사실은 제일 쉬운 공부입니다.

우리는 부처를 어디 다른데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 우리마음의 본 성품이 바로 부처입니다. 마음을 떠나서 참다운 법신(法身)부처가 없고 부처를 떠나서 우리 마음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말씀을 귀가 닳도록 자주 듣지만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틀림없이 석가모니 부처님한테, 도(道)를 완벽하니 깨달으신 석가모니 부처님한테 있는 불성이나, 달마 스님한테 있는 불성이나, 우리 불성이나 또는 개(犬)한테 있는 불성이나 다 똑같습니다.

천지우주는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사실은 모두가 다 불성뿐입니다. 그러기에 화엄경에서 “심불급중생(心佛及衆生) 시삼무차별(是三無差別)이라”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모두 다 차별이 없습니다.

우리 중생들은 자꾸만 갈라서 분할을 시킵니다. 분할시키는 것이 중생이고, 그 본래적인, 본래 근원적인 생명 자체를 깨달은 것이 이른바 성인(聖人)이고 부처란 말입니다.

성인이 되고 부처가 되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닌가.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제일 쉽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부처가 된 것은 아닙니다. 저도 애쓰고 지금 공부를 하는 중입니다.

어째서 쉬운 것인가 하면, 천지우주의 본래자리가, 본래면목이 바로 부처이기 때문에 본래면목을 따르는 것이 우리 건강으로 보나, 제일 편합니다.

가령 우리가 한 가정을 생각해 보면, 모두가 부처기 때문에, 남편도 아내를 부처같이 생각해야 되고, 아내도 남편을 부처같이 생각해야 되고, 부모도 아들과 딸들을 부처같이 생각해야 되겠지요. 그렇게 생각해야 그것이 바른 도리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그 가정이 불화스럽게 되겠습니까?

친구지간 사귈 때도 그 친구를 부처같이 봐져야 되겠지요. 성자가 아직은 못 되었는지라 짐짓코 애쓰고 부처같이 보려고 노력을 해야 되겠지요.

우리가 화두공안(話頭公案)을 참구(參究)하고 염불(念佛)하고 하는 것은 모두가 다, 일체중생이 부처인 것을 재확인 하기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번 며칠 동안에 불행한 분들을 많이 봤습니다. 불행한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나 같은 사람이 조금 더 법력(法力)이 있으면, 저런 분들을 다 구제해 줬으면 참 좋겠는데, 그런 법력이 없어 안타깝기만 했습니다.

하다못해 예수님 같은 법력만 있어도 만져서 낫기도 하고, 또 가만히 보고 있어도 낫기도 하고 그러겠지요. 그러나 그런 법력이 없으니까 여태까지 80 다 먹어 가면서 중생들한테 빚만 지고 참 게으름만 많이 피웠구나 하고 참회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부처님 공부를 하는 것은 우리가 본래 부처가 되기 위해서 하는 것인데, 이런 공부가 보통은 어렵다고 해서 일반 재가불자님들은 기피를 많이 하시는데, 그런데도 이번에는 후원에서도 재가불자님들이 20명 정도 결제(結制)를 하신다고 하니까 얼마나 반가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공부할 때 주의해야 할 사항


이렇게 공부하실 때에 꼭 주의해야 할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것은 암증선(暗證禪)이라는 것입니다. 어두울 암(暗)자, 증명할 증(證)자, 암증선입니다.

우리가 우리 공부를 스스로 점검을 못하고 어두운 가운데 암중모색(暗中摸索)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부처님 공부를 치우치게 해서, 공부 하는데도 여러 가지 차서(次序)가 있는 것인데, 가령 『수능엄경首楞嚴經』을 본다 하더라도,『수능엄경』은 이른바 선수(禪髓)라. 고요할 선(禪)자, 골수 수(髓)자, 참선(參禪)의 골수(骨髓)라 해서『수능엄경』을 선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수능엄경』에 보면, 그 차츰차츰 우리가 참선할 때는 어떤 것을 먼저 해야 되는가? 이런 법들이 다 들어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과거 전생에, 숙생(宿生)에 많이 닦아서 일언지하(一言之下)에, 한마디에 깨달아 버리면 좋을 텐데 보통차원(普通次元)에서는 그렇게 안 됩니다.

역시 분분단단(分分段段)으로 닦아서 올라가야 합니다. “모두가 부처 아님이 없다”는 그러한 것을 돈오(頓悟)한 다음에는, 그러한 것을 깨달은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 암중모색할 것이 아니라 공부해서 올라가는 차서를 알아야 합니다.

음식을 어떻게 먹어야 되고, 또는 우리 생활은 어떻게 해야 우리 공부가 빠를 것인가?

부처님 법대로 잘 따르면 몸도 편하고 마음도 편합니다. 앞서 말씀과 같이 암중모색할 것이 아니라. 오늘 같이 아침부터 안개가 끼어있으면 앞뒤가 잘 안 보입니다. 우리 공부도 똑같습니다. 부처님 가르침 따라서 앞뒤를 훤히 알고서 지금 내 공부가 얼마만큼 되어 있는가? 앞으로 어떤 지표에 따라서 공부할 것인가를 안다면 암중모색하지 않습니다.

암중모색하면 공연히 교만심(驕慢心)만 일어납니다. 가령 어느 경계에도 이르지 못해 가지고 무엇인가 한계(限界)를 모르니까, 좋은 것인가 궂은 것인가 한계를 모르니까 그때는 자기 공부가 웬만히 되었다고 교만심을 내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문자선(文字禪)이라

이것저것 불경(佛經)을 많이 봐 가지고서, 능엄경(楞嚴經)도 법화경(法華經)도 보고, 구사론(俱舍論)도 보고해서 공부하는 차서에 따라서 올라가는 한계는 안다고 하더라도 그 아는 것으로 해서 공부가 다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증명(證明)을 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을 닦아서 그 자리를 증명해야 참다웁게 아는 것인데, 그냥 이치로만 알고서 닦지를 않는단 말입니다.

이런 것은 불가(佛家)에서는 문자선이라, 또 구두선(口頭禪)이라 합니다. 입으로만 안단 말입니다. 문자선과 구두선을 안 해야 합니다.

또 한 가지는 야호선(野狐禪)이라.

야호는 들 여우입니다. 여우란 놈이 꾀가 많고 거짓이 많지 않습니까. 여우는 다른 짐승도 속이고, 우리 사람도 속이는 간교한 꾀가 있습니다.

그처럼 어떠한 경계를 증명하지 못하고, 어떠한 경계를 성취하지 못하고서도 공부를 다 했다고 한단 말입니다. 그러한 것이 이른바 야호선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공부할 때는 앞서 말씀과 같이 암중모색하는 암증선을 경계해야 하고, 문자만 알고 입으로만 알고서 실지로 닦지 않는 구두선 문자선을 경계해야 하고, 깨닫지 못하고서 깨달았다 하거나 또는 수승(殊勝)한 경계를 체험도 못하고도 체험했다하는 야호선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래서 꼭 이 3가지를 주의해서 공부하실 것이고,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앞서 허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모든 존재가 본래로 다른 것이 아닌 오직 하나의 진여불성(眞如佛性)이다” 이렇게 확실히 안 다음에는 ‘지계청정(持戒淸淨)이라’ 꼭 계율이 청정해야 됩니다.

어떤 분들은 마음만 닦으면 그만인 것이지, 계율이사 다 마음 따라 가는 것인데, 아무렇게나 살든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인가? 이렇게 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가 않습니다.

마음 닦는 공부는 여러 가지로 복합적(複合的)으로, 계행도 거기에 다 곁들어 있어야 되고, 지혜도 거기에 곁들어 있어야 되고, 모든 선공덕(善功德)도 다 복합적으로 합해져야 이른바 공부가 이루어집니다.

음식(飮食)만 함부로 먹어도 절대로 공부가 안 됩니다. 근대에 있어서 우리네 스님들이 더러는 음식을 함부로 먹는 분도 계셨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뜻이 아닙니다. 또 공부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또는 남녀 이성간(異性間)의 성적(性的)인 문제도 절대로 금해야 합니다.

『수능엄경』에 보면, “부단음심(不斷淫心)이라” 사람이 음심을 끊지 않으면, 남녀 이성간의 음탕한 마음을 끊지 않고서 선정에 들려고 한다면 “여증사작반(如蒸沙作飯)이라” 모래를 삶아서 밥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나 같다고 하였습니다.

모래를 삶으면 밥이 되겠습니까? 우리 재가불자님들 명심하셔야 됩니다.

제가 가끔 말씀드리는 바와 같이 육재일(六齋日) 계행 지키는 것을 말씀드렸지요.

재가불자라 하더라도 하다못해 육재일(음 8, 14, 15, 23, 29, 30일)만이라도 출가(出家)한 셈치고서 부처님 계율을 지켜야 됩니다. 중요한 것은 역시 식욕과 남녀 이성간의 욕심을 절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욕계에 살고 있습니다. 욕계라는 것은 색계만도 못하고 무색계만도 못합니다. 욕계, 색계, 무색계 삼계를 초월해야 참다운 해탈(解脫)을 하는 것입니다.

욕계의 특징이 무엇인가. 욕계의 두드러진 특징은 우리 식욕과 남녀 이성간의 음심이란 말입니다. 가정에서 지금 화목하게 가족생활을 하시는데 이런 말씀을 드리면 “아, 자기가 승려니까 우리네 사정을 전혀 모르고 하는 말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가정에 부부관계가 형성되면 그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냥 문란스럽게 서로 사는데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같이 법의 도반(道伴), 똑같이 법의 도반이 되어서 같이 성불(成佛)의 길로 나아가는 데서 중요합니다. 우리 불자님들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렇게나 그냥 문란하게 사는 것이 부부의 본질(本質)이 아닙니다. 금생에 부부가 된다는 것도 굉장히 소중한 인연 아니겠습니까. 과거 전생에도 부부간도 되고, 형제간도 되고, 그렇게 해서 금생에 부부간이 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 존재의 본래 사명자체(使命自體)가 성불입니다. 그러므로 꼭 성불하기 위해서는 모두를 거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따라서 내외간도 가급적이면 식욕문제라든가, 남녀이성문제는 가급적이면 절제하고 도반으로서 공부하는 분위기를 조성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내외간의 참다운 도리인 동시에 우리 불자들의 빼놓을 수없는 의무적인 보살행(菩薩行)이기도 합니다.

저는 조주(趙州)스님 이야기를 가끔 합니다. 조주스님도 앞서 서두에서 말씀 드린 중국에서 1959년에 열반 드신 허운 대사와 똑같이 120세를 사신 분입니다.

대체로 장수하신 분들을 보면, 덕(德)이 많습니다. 물론 전생에 자기 업 따라서 금생에 수명(壽命)을 받기는 하지만, 대체로 덕이 많은 분이 오래 사는 것 같아요.

그것은 왜 그러는가 하면, 우리가 산다는 것은 자기 혼자 사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남의 덕 때문에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옷을 입고 하루에 몇 번씩 공양을 먹는다 하더라도 우리가 다 벌어서 농사를 지어서, 길쌈을 해서 입고 먹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따지고 보면 남의 덕 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사는 집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절도 부처님 도량(道場)을 만들기 위해서 여러 불자들이 시주를 하고 목수가 고생하고, 여러 사람들이 공(功)을 들여서 이와 같이 절이 생기고 그래서 우리 불자들이 공부를 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우리가 산다는 것은 사실은 ‘살려 주는 것“이지 우리 스스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생명(生命)은 절대로 분할(分割)이 안 됩니다. 여기 몇 백 명 불자님이 계십니다마는, 우리가 뿔뿔이 김이라는 존자, 박이라는 존자가 각각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지금 모두가 다 붙어 있습니다. 하나의 생명으로 모두가 붙어 있습니다.

눈에 안 보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이나, 공기나, 나무나 다른 어떤 돌멩이나 모두가 우리 생명하고 별도로 끊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원소차원(元素次元), 원자차원(原子次元)에서는 모두가 다 붙어 있습니다.

생명은 따지고 보면, 근본 바탕에서ㅡ본다면,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입니다. 하나의 생명이기 때문에 다른 생명을 해코지 하면 자기 자신한테 그 앙화가 옵니다. 그 보복이 옵니다.

다른 생명을 우리가 존중하면 그냥 그 공덕(功德)이 바로 자기한테 옵니다.

우리가 이 삼동결제(三冬結制)하고 스님 네는 선방에서 오로지 좌선(坐禪) 공부를 하십니다. 하시는데 우리가 마땅히 사회에 참여해서 시회봉사도 하고 해야 할 것인데, 젊은 사람들이 선방에서 참선만 하고, 자기 좋다는 식으로 공부만 한다고 생각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저 산중에 가서 혼자 토굴에서 공부한다 하더라도 그 공부 하는 것이, 그 마음을 맑히는 그것이 벌써 우주를 맑히는 것입니다.

선방(禪房)에 있으나, 자기 방에 있으나, 어디에 가 있으나, 우리가 마음을 맑히는 공부를 하면 우리 생명 자체가 모두 다 같이 연결되어 있어서 자기 혼자 공부가 아니라 그것이 바로 우주 전체를 정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공부하는 법에는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 어느 것도 모두 다 본래 부처님 아닌 것이 없기 때문에 그런 큰 대도 라는 것은 일정하게 꼭 어느 식만 옳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좁은 공부라든가, 배타적인 공부는 그럴 수가 있겠지마는, 적어도 부처님 공부는 부처님이 어디에 별도로 게신 것이 아니라, 모두가 다 일미평등(一味平等)하게 부처 아님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화두를 참구하는 것도, 또는 염불을 하는 것도, 또는 주문을 외우는 것도, 모두가 다 본래의 자리, 본래면목자리를 안 여의고 한다면 다 옳은 공부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요즘 저 아프가니스탄사태를 대강 보시고 짐작이 되시겠지요. 저 같은 사람은 신문을 안 보는 주의니까 잘 모르지만, 이따금 조금씩 말을 듣기도 하고, 밖에 나가면 신문을 조금쯤 보고서 알기도 합니다마는, 그 사람들 싸움은 지금 주로 기독교, 유태교, 이슬람교 세 가지 종교의 싸움입니다. 이 세 가지는 어떤 것인가 따지고 보면 똑 같이 창조주 하느님이 있고, 모든 존재는 다 창조 받은 피조물입니다. 그와 같이 하느님과 중생 간을 나누어 봅니다. 그렇게 나누어 보는 특징을 지닌 세 종교들입니다.

제가 지금 비방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로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종교의 근거로 본다면 결국 셋이 똑같은 것입니다. 똑같은 것인데, 같은 것 가운데서도 꼭 자기 식으로 믿는 것만 옳고 자기 식으로 믿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이런 것을 가리켜서 철학적으로 근본주의(根本主義)라고 합니다. 또는 원리주의(原理主義)라고도 합니다.

우리 불교 용어로는 법집(法執)이라 하겠습니다. 화두를 공부한 사람들은 “꼭 화두만 의심해야 성불한다.” 또 염불하는 사람들은 “꼭 염불만 해야 된다” 이런 것도 결국 하나의 법집인 것입니다. <법상의 마이크 받침이 넘어질 뻔 했다.>

내가 말을 너무 크게 해서 그런 가 봅니다. <웃음>


열심히 정진하여 법희선열 얻기를


사실은 저도 말씀을 많이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여러분들께서 항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서울서도 오시고 부산서도 오시고 하셨는데, 제가 한 20분이나 말씀드리고 그만 둘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불교는 아시는 바와 같이 제일 쉽고 마음 편한 것입니다.

나한테 부처가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부처라는 것은 여래장(如來藏)이라, 여래라는 것 은 바로 부처님입니다. 여기서 장(藏)자는 감출 장(藏)자, 부처가 나한테 들어 있단 말입니다.

그러면 부처란 무엇인가? 부처란 만능(萬能)의 자리입니다. 만덕의 자리란 말은 지혜나 행복이나 자비나 능력이나 모두가 다 들어 있기 때문에 부처님을 여래장이라고 합니다. 여래장이 바로 우리 마음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확실히 알아두시기 바랍니다. 여래장이나 법성이나 법신이나 불성이나 다 같은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실 다른 공부는 아무 것도 안 했어도

“내 마음이 부처다” “일체 존재가 본래로 부처 아님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고 공부를 자기인연 따라서 화두를 의심하든지 염불을 하든지 주문을 하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삼동(三冬)에 그렇게 부담 없이 공부를 하시 면은, 그리고 음식을 주의해서, 함부로 고기 자시지 마시고, 또 많이 자시지 말고, 많이 먹는 것이 절대로 우리에게 좋은 것이 아닙니다.

또 그와 동시에 그 가족생활을 하신다 하더라도, 꼭 내외간에 동기가 되셔서 청정하게 적어도 삼동결제만은, 젊은 사람들도 선방에서 온전히 밤새 공부를 하는데, 우리라고 그렇게 못 할 것인가. 이렇게 생각을 하셔서 조금도 재가 불자님들도 손색이 없이 꼭 철저한 그런 절제생활을 하시면서 공부하시면 틀림없이 법희선열(法喜禪悅)을 맛보실 것입니다.

법희선열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불교 전문적인 술어로 말하면 ‘경안(輕安)이라’ 가벼울 경(輕)자, 편안 안(安)자, 몸도 마음도 가뿐하고 편안하다는 말입니다.

몸도 마음도 가뿐할 뿐만 아니라 가슴도 시원하고, 눈도 시원하고, 머리도 시원한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수명도 길어집니다. 자기 피가 청정해지니 다른 병이나 유행병(流行病)도 침범을 못하는 것입니다.

피가 오염될 때 몹쓸 병들이 생기는 것인데, 그 에이즈나 무슨 병이 생길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들이 문란하니까. 우리 피가 오염되어서 결국 병에 걸리는 것입니다. 암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우리가 주의해야 합니다.

부처님 법대로 살면 만사가 형통입니다. 그렇게 사시기 바랍니다.

욕심이 굉장히 우리한테 그 보다 더 큰 해독을 주는 것은 없습니다. 욕심 못 떼어서 지금도 사람으로 왔고, 또 그대로 살면 내생(來生)도 마찬가지입니다.

결단을 내서 꼭 부처님 말씀대로 실천 하시고, 부처님 말씀은 우리를 최상의 행복으로 인도하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공부를 하셔서 앞서 말씀과 같이 ‘법희선열이라“ 법에 따르는 기쁨이, 한도 끝도 없는 우리한테 그런 행복감이 엄습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공부를 하면 몇 십일 동안 공부를 해도 시간 가는 줄을 모릅니다.

건강에고 좋고 집안에도 좋고 다 좋습니다.

이렇게 하셔서 꼭 금생에 성불들 하시기를 간절히 빌어마지 않습니다.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