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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마음의 고향

* 마음의 고향-미국3년 결사 회향법회(2)

2. 그러나 모두 허망하다고만 생각하면 그때는 참다운 반야가 못됩니다. 그러면 공도리만 아는 것이지 공이 아닌 진여불성은 모른단 말입니다. 공밖에 모르면 내내야 그때는 허무주의 적인 것밖에는 느끼지를 못합니다. 그러면 중생 제도(濟度)를 참다웁게 못합니다. 대비심(大慈悲心)이 아직 못나옵니다.

 마음자리에서는 절대로 나와 남이 둘이 아닙니다. 우리 중생의 흐리멍덩한 눈으로 봐서 현상적인 상으로 봐서 물적인 환경에 그런 자타가 있는 것이지 물질을 떠나버린 근본 성품자리 진여불성 자리에서는 그러한 상은 절대로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강경에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나라는상 너라는상 또 중생이라는상 목숨이 길다짧다하는상, 개나 소나 돼지도 역시 본래에서는 사람과 똑같은 진여불성입니다. 우리 목숨도 80년 70년 그런 장단이 없습니다. 원래 생명은 영생하는 것입니다. 예수만이 부활(復活)해서 영생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어떤 누구나 다 본래로 영생합니다. 죽음은 본래가 없습니다.

 담나 그 업식 때문에 삼계육도에서 윤회를 합니다. 우리 업식이 윤회 하니까 앞서 말씀드린 삿된 단견은 없습니다. 또 금생에 나쁜 짓을 많이 했다 하더라도 마지막 판에 바른 마음먹고 바로 행동하면 그냥 극락도 갈 수 있기 때문에 이른바 상견도 없단 말입니다. 업장대로 내생을 받으니까 상견이 아닙니다.


 우리 중생은 부처가 될 때까지 몇생도 헤맵니다.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우리 본 고향은 부처이기 때문에 부처가 되기 전까지는 몇생도 헤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영구윤회라고 하지 않습니다.

 금생에 잘 못 살면 잘 못 산만큼 고를 받고, 금생에 잘 살면 잘 산 만큼 천상에 태어나기도 하고, 금생에 잘 닦아서 육도윤회를 면하면 영생의 영역에 들어가기도 하겠지요. 영생의 영역은 삼명육통(三明六通)을 다 하고 만덕을 원만히 갖추어 놓아서, 그 자리에서는 우리 중생들의 삶이 불쌍하게 보이므로 그때는 수원수생(隨願受生)이라, 대비심으로 원력을 세워서 중생계로 다시 태어나고 지옥에도 태어나서 중생을 제도하는 것입니다.


 육조스님께서는 80생의 선지식(善知識)이라, 육조혜능(六祖慧能)스님께서는 80생 동안 태어나고 다시 태어나서 중생을 제도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 모이신 사부대중 우리 불자님들은 모두가 다 금생에만 태어난 불자님들이 아닙니다. 과거 전생에 무수생 동안에 닦아오신 분들입니다. 금생에 꼭 성불하실 분들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성불(成佛)의 길이 탄탄 대도(大道)로 지금 놓여져 있습니다. 우리 인간사회는 그 길 이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오직 외길 성불의길 하나의 길 뿐입니다. 다만 중생이 나쁜습관성에 젖어 빨리 못 가고 더디 갈 뿐입니다. 빨리 가면 가장 행복스러운 사람인 것이고, 우주의 궤도 우주의 정리에 따르는 것이 빨리 가는 길입니다. 우주의 도리에 따르는 것입니다.


 빨리 못 가는 것은 우주의 궤도에서 이탈된 것입니다. 그래서 궤도에 따르면 힘 안들이고 갈 수가 있습니다. 불교 술어로 임운등등(任運等等)이라. 저절로 그 궤도에서 성불로 지향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궤도에서 이탈해 놓으면 이제 애쓰고 다시 궤도에 진입해야 쓰겠지요.

 부처님께서 계행(戒行)을 지켜라. 참선 염불을 해라. 또는 반야의 지혜를 가져라. 반야의 지혜는 제법은 모두가 몽환포영(夢幻泡影)이라. 꿈이요 허깨비요 거품이요 그림자란 말입니다. 꿈이요 허깨비요 거품이요 그림자 같은 것이 아니라 사실 꿈이요 허깨비요 거품이요 그림자 인 것입니다.


 중생의 흐리멍덩한 눈으로 보니까 그림자가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것이지 성자가 본다고 생각할 때는 실체가 있지 않습니다. 허수아비를 쫓아서 우리가 갈 필요가 있겠습니까. 따라서 우선은 바른 이해를 갖추어야 바른 신앙이 나옵니다. 모든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 따라서 반야심경 금강경대로 제법은 허망 무상하단 말입니다.

 부처님이 되는 길이 절대로 어렵다고 생각을 마십시오. 저 같은 사람도 칠순이 넘었지만 지금도 행자 같은 비구 마음입니다. 제가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한번도 생각 못해봤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 부처님의 공덕 부처님의 그 무량 공덕을 제가 어떻게 얼마나 하는가. 부처님 경전 따라서 참선 좀 했다고 그래서 조금 아는 소리 할 뿐인 것입니다. 부처님의 그런 아(我)를 떠나서, 자기라는 모두를 다 떠나서 무량의 공덕을 갖추고 있는 공덕에 비추면 그야말로 태양과 반딧불의 비유입니다. 그런 처지에서 어떻게 공부를 좀 했다고 하겠습니까. 저는 그래도 다행히 부처님 덕으로 출가한지 올해로 꼭 50년입니다. 무던히 공밥 많이 먹었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만나면 저는 항시 마음이 부끄럽습니다.


 부처님 길이 절대로 먼길이 아닌 것이고, 도인들마다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라. 풀쩍 비약적으로 뛰어서 여래지에 갈 수가 있는 것이라고 말씀을 했고, 조금 더디게는 7일 동안만 불면불와(不眠不臥)를 해서 닦으면 꼭 견성오도(見性悟道)하다. 더 멀리는 90일 이라. 좀더 멀리는 100일이라. 3년이라. 몇 사람들은 변칙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절대로 저와 같이 게으름 피우지 않으실 것을 확신을 합니다. 여러분들께서 저한테 이렇게 풍기는 분위기나 기(氣)가 그렇게 느껴집니다. 제가 겸허하는 그런 의미에서는 절대로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꼭 부처님의 정법을 그대로 공부만 한다고 생각할 때는 참말로 별로 먼 길이 아닙니다. 저는 굉장히 헤맸습니다. 근본 불교라, 무슨 불교라 갔다 왔다, 또 무슨 철학이라, 하여튼 나름대로 피상적이나마 동서철학(東西哲學)은 다 섭렵했습니다. 신학(神學)도 중요한 것은 대체로 떠들어 봤습니다. 무엇 때문에 기독교를 저와 같이 17억이나 믿는가. 진리가 아니면 그렇게 믿을 것인가. 그러한 의심 밑에서 또 역시 봐진단 말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 석가모니 가르침하고 똑같습니다. 다만 깊이에 차이가 있습니다. 석가모니께서는 구경지(究竟地) 보살 10지를 성취하시고, 불지(佛地)까지 온전히 묘각(妙覺)을 다 성취하신 분이고, 조금도 흠절이 없이 확철대오하신 분입니다. 그런 것이지 예수께서도 우주의 본성을 꼭 봤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공자, 노자, 마호메트도 다 그렇습니다. 마호메트도 실라산에서 3년 동안이나 명상을 닦았습니다. 명상을 닦아서 우주의 기, 불성의 기를 맛보았기 때문에 그런 공적을 내세웠단 말입니다. 예수 역시 십자가에서 오히려 자기 이웃을 위해서 기도를 모시고 원수를 위해서 기도를 할 수 있는 그런 정도 같으면 원수가 원수로 보일 수가 없습니다. 무아를 성취한 사람들은 원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예수 같이 원수를 사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전에는 중생들은 항시 원수는 원수로 보이고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스러워 보이니까 차별 시비를 하고 행동이 다른 쪽으로 벗어나 우주의 참다운 궤도로 진입할 수가 없는 것이겠지요.

 정보화시대는 참 무서운 시대입니다. 여러분들이 충분히 지금 절감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별별스러운 정보, 정말로 정신이 어지러운 시대입니다. 요새 젊은이들 음악을 들어보십시오. 음악적인 세련미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저 악쓰고 관능적인 몸부림만 칩니다. 그런걸로는 우리 인간성에 아무런 도움이 안됩니다.


 가령 정치를 한다 하더라도 본래는 정적과 내가 둘이 아니다. 이럴 때는 견제 할 때는 한다 하더라도 같은 불자로서 사랑이 간단 말입니다. 철학적으로 종교적으로 바로 모르면 그 하찮은 이념 때문에 소중한 인간성을 자기도 훼손시키고 남도 훼손시킵니다. 자손손타(子孫損他)라. 자기 생명에도 손해보고 남도 손해를 끼칩니다.

 지금은 대승적으로 나서야 정보화 시대의 혼란의 물결을 다스릴 수가 있습니다. 모든 정보 가운데서 부처님 정보, 부처님 가르침이 가장 수승(殊勝)한 정보입니다. 부처님 정보는 모든 정보를 맑히고 통일시킬 수 있는 정보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이 아니고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형이하학적인 눈에 보이는 과학적인 세계나, 정치 경제 문화 기타 여러 가지 인류문제는 그 근본을 불교의 가르침에다 연원을 두어야 됩니다. 부처님 가르침이 우주의 근본이니까 말입니다.


 우주의 대본이 서야 우주의 근본 뿌리가 서야 이제 법학도 바른 법학이 되는 것이고 정치학도 바른 정치학이 됩니다. 경제도 마찬가지로 참다운 불성을 계발하는 불성만 계발하면 그때는 남을 사랑하지 말라해도 저절로 남을 사랑하게 됩니다.

 부처님은 지금 어디가 계씨는 것인가. 불자님들 부처님은 정말로 바이블(성경)에도 있습니다. 부처님은 우주의길 우주의 정의입니다. 부처님은 우주의 참다운 청정적광(淸淨寂光) 광명인 것입니다. 태양광선과 같은 그런 오염된 광명이 아니라 청정적광 비물질적인 참다운 순수 생명의 자비광명이 부처님의 광명입니다.

 그 환희로운 광명은 우리 몸에도 가득 차있고 우주에도 충만해 있습니다. 물질이라 하는 것은 청정적광 위에서 그때그때 업 따라서 결합되고 또는 움직이고 하는 그런 것들이 우리 눈에 물질로 착각되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공부를 어떻게 할 것인가. 아무리 고도한 이론 체계가 있다 하더라도 내 스스로 어떻게 공부를 할 것인가. 이 문제는 가장 절실한 문제입니다. 그 문제가 해결이 안되면 모두가 그야말로 하나의 이론에 그쳐버리는 공염불이 되기가 쉽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당장에 지금부터서 해야 할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이것은 부처가 되는 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부처가 되는 길 가운데 가장 합리적이고 가장 지름길인 것인가.


 저는 그런 문제에 관해서 근본불교도 저 나름대로 토굴에서 몇 년 동안이나 머리도 썩혀보고 또 달마부터서 육조까지도 그 문헌을 다 탐구해 봤습니다. 달마부터 육조까지 그분들끼리 내려오는 그 이른바 Identity 즉, 요지(要旨)가 무엇인가 말입니다. 이런 문제를 가지고서 이제 마음으로 굉장히 많이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정진력이 부족해서 공부를 잘은 못했습니다. 마치 회양목선(茴楊木禪)이라. 참선에도 회양목선이란 것이 있습니다. 회양목은 아주 더디게 크는 나무입니다. 3년 크다가 공달이 드는 해는 축소가 됩니다. 그러다 다시 자라므로 얼마나 모질게 큽니까. 그와 똑같이 참선에 별로 진전이 없는 참선보고서 이제 회양목 참선이라 합니다.


 저는 그런저런 근기라고 스스로를 느끼고 있는데 그래도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참선 공부하는 문제, 어떻게 하는 것이 달마 때부터서 육조혜능까지, 그것이 바로 부처님 때부터서 삽삼조사가 공부해놓은 핵심이 되겠지요.

 역시 달마 이전까지는 교학적으로 너무나 번쇄하게 중국에 유포가 됐기 때문에, 구사론(俱舍論) 유식론(唯識論) 그 오직히 번쇄합니까. 마치 중세 기독교의 스콜라 철학 모양으로 말입니다. 그런 번쇄철학 그렇게 되면 정다운길 마음 깨닫는 것은 뒤로 미루고 교리를 배우다가 판나 버린단 말입니다.

 그래도 다행히 달마스님 때부터서 육조스님까지는 그런 찌꺼기를 다 걸러 버리고서 오직 마음 닦는 순수한 쪽에다 역점을 두고서 체계를 세웠단 말입니다. 달마스님의 안심법문, 파사론(破邪論), 혈맥론(血脈論), 또는 승찬(僧燦)스님의 이른바 신심명(信心銘), 그리고 4조 도신(道信)스님의 어록이 제일 많습니다.


 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는 아주 귀중한 법문입니다. 그 법문은 돈황(敦煌)에서 비로소 발견됐기 때문에 20세기 초두에는 없었습니다. 20세기 중엽부터서 비로소 유포가 되었습니다. 내용은 주로 안심법문, 달마의 이입사행(二入四行), 일행삼매(一行三昧), 수일불이(守一不移)등이 설해져 있습니다. 특히 제 5 도신장을 보면 도신대사는 문수설반야경(文殊說般若經)과 입능가경(入楞伽經)을 주로 참고했단 말입니다. 그리고 5조 홍인(弘忍)스님 역시 그런 투로 계승했습니다.


 그리고 육조단경 역시 부촉품(付囑品)에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단경은 사실은 문제가 많습니다. 후래인(後來人)들이 깎고 보태고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육조스님께서 그 대범사(大梵寺) 법단에 올라가셔서 보살계(菩薩戒)를 설하신 법문은 육조스님이 직접 했다고 지금 불교학자들이 다 정평을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핵심이 삼보에 귀의 하고, 보살계를 지키고,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원만보신 노사나불,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 이 삼신일불(三身一佛)에 귀의란 말입니다. 육조스님께서 그대들이 나를 따라서 이렇게 세 번씩 외이라. 이렇게 말씀했단 말입니다. 그런 대문은 그야말로 금구직설(金口直說)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금구는 쇠금(金)자 입구(口)자, 성자의 청정한 입에서 나온 말씀을 금구라 합니다.


 금구직설로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대로 믿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또 그렇게 해보면 사실 제일 쉬운 것이고 말입니다. 또 한편 중국 불교사를 보아도 유조혜능까지는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 그대로 닦는 법이었습니다. 화엄이면 화엄 그대로 닦는 것 말입니다. 화엄, 법화, 열반경, 사상 그대로 닦으면 바로 선이 됩니다.

 

 지금도 중국의 송나라때 이루어진 화두 일변도의 설법 때문에 화두 아니면 선이 아니다. 그러니 그렇게는 안 되어 있습니다. 달마스님 때부터서 육조 혜능스님까지는 그런 말씀은 조금도 없습니다. 송나라 대혜(大慧)스님 대에 와서 비로소 화두 아니면 선이 아니다. 그런 것이 임제 일파에서 있었든 것이지, 그 당시 조동종에서도 없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정보화 시대에서는 역사적으로 공부를 해야 오류를 안 범합니다. 그래야 법집(法執)을 않습니다. 역사적인 그런 전개과정을 잘 모르면 꼭 자기식 또는 자기 은사가 하는식, 그것만이 옳다고 고집한단 말입니다. 이조 5백년동안에 얼마나 많이 벌집을 했습니까. 그때는 스님네들이 엘리트가 못되었습니다. 지금도 소중한 엘리트를 기독교한테 빼앗기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 스님네들은 항의할 것이 못됩니다. 우리가 그만치 공부를 안 했고 다른 종교를 이해 못했습니다. 다소곳이 자기반성을 하고 자기 스스로 인재가 되어야 할 것이고, 인재를 길러야 할 것이지, 그 속인들 모양으로 정부 요로에 기독교인들이 많다고 상관할 것이 못됩니다. 기독교인들은 앞으로 틀림없이 종당에는 불교 쪽으로 스스로 안 들어 올라야 아니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예수사상이 부처님사상과 똑같기 때문입니다.


 야훼가 우리마음 밖에 어디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 가운데나 언제 어디에나 계신다. 불신충만어법계(佛身充滿於法界)라 부처님의 몸이 언제 어디에나 계시듯이, 예수님 말씀도 다 그런 말씀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안셀무스 같은 중세 기독교 유수 신학자들도 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다만 현대에 와서, 인도 간디의 말마따나 ‘나는 예수를 좋아한다. 그러나 나는 크리스찬은 싫어한다.’ 왜냐하면 크리스찬들이 예수를 닮지 아니하므로 싫어한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도 부처님을 얼마나 지금 닮고 있습니까. 젊은 불자님들도 꽤 많이 여기 모여 계십니다. 정말로 계행 청정하십시오. 계행이 청정해야 그래야 삼매가 되어 갑니다. 삼매에 못 들면 연목구어(緣木求魚)라. 고기를 구하는데 산중에 들어가서 구하는 것이나 똑같습니다. 삼매가 발득이 안되면 우리 마음도 몸도 바뀌지 않습니다. 우리 생리가 바꿔지고 우리 마음이 바꿔져야 그래야 도를 통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본래 부처라 하더라도, 삼매에 들어야 됩니다.

 삼매라는 것은 다시 일반적인 술어로 하면 명상(冥想)아닙니까. 석가모니 6년 고행 달마 9년 면벽, 예수 같은 천재도 요단강 강하에서 40일 금식기도를 했단 말입니다. 그렇게 선근이 좋은 사람인지라 금식기도 할 때에 마음을 통했지요. 마호메트도 실라산 동굴에서 3년 동안 명상에 들어 그 때 역시 영원적인 영원상을 음미를 했겠지요.


 이 정보화시대는 앞서도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절대로 다른 종교를 적으로 몰아서는 아니 됩니다. 저네들이 우리 불교인보고 마귀라 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네들의 무지를 구하기 위해서 애써야지 마구 상대해서 대응할 필요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이 원래 부처인 것이고, 우리 마음 가운데는 행복도 자비도 지혜도 능력도 다 갖추고 있습니다. 무량공덕심(無量功德心)입니다. 석가모니만 삼명육통을 다 하신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 당시의 다라표 수좌는 16세에 아라한과를 성취해서 삼명육통을 다하신 분입니다.


 우리는 지금 자기 스스로 안 통하려고 애쓴단 말입니다. 본래 통해있는 우리가 부처인데 우리 스스로 장애하고 있습니다. 우리한테는 지금 석가모니 같은 그러한 슬기와 자비가 똑같이 원만구족 다 갖추고 있습니다. 내 스스로 그걸 지금 막고 있습니다. 행복 되기 참 쉬운 것입니다. 절로 행복의 길은 틔어있는 데도 우리 중생들이 그 길을 딱 틀어막고 있습니다. 마치 미련한 중이 바람 거슬러서 길을 가듯이 우리는 지금 바람을 거슬러서 가는 범선이나 새나 마찬가지입니다. 계행 지키는 것은 그렇게 거슬러 가는 것을 바른 쪽으로 회향을 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처거니 어떻게 하는 것이 제일 간단한 법인가. 앞서 말씀드린 4조 도신스님께서 문수 반야경, 입능가경을 인용해서 법계일상(法界一相)이라. 법계는 오직 부처님 하나의 실상(實相) 뿐 이단 말입니다. 법계에는 딴 무엇이 없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일상삼매(一相三昧)라. 염염 상속 법계일상 부처님 생각을 놓치지 아니하면 바로 일행삼매(一行三昧)가 되는 것입니다. 육조 단경에도 일상삼매 일행삼매가 다섯 군데나 있습니다. 저는 아함경(阿含經)도 다 떠들어 봐서 짐작을 합니다만 그 아함경에도 역시 41군데나 우리를 그렇게 편달하고 우리를 영원쪽으로 다스리는 그런 법문으로 일관되어 있단 말입니다. 이른바 명상하는 법이 말입니다.

 

 우리가 통하려면 틀림없이 아무리 재주가 좋다 하더라도 사선정(四禪定) 멸진정(滅盡定)을 거쳐야 됩니다. 우리 범부신을 성자의 청정신으로 이른바 육근을 청정하게 하는 삼매가 사선정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외도들도 사선정은 합니다. 멸진정은 우리 아상(我相)을 온전히 없애는 것이기 때문에 성자만이 합니다. 멸진정을 성취해서 우리 선정이 제대로 되어야 아(我)가 떨어집니다. 그러면 그때는 천지 우주가 무아요 대아요 진아요, 우주가 나가 되고 그야말로 내가 우주란 말입니다.


 이와 같이 우주를 하나의 생명 자체로 보는 이것이 일상 삼매입니다.

 단경의 부촉품에 가서, 부촉품은 경론의 결론 같은 품입니다. 육조스님께서 하신 말씀이 ‘그대들이 만약 여래의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얻으려면’ 그냥 좀 이론적으로 안다는 것이 아니라 실지로 우리 생리와 심리가 바꿔져서 증명한다는 말입니다. 불성을 증명하는 그 자리를 얻으려고 한다면 어떻게 하는고 하면은 ‘그대들이 먼저 마땅히 뻑뻑히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증할 지니라’ 일상삼매 이것은 모두가 진여불성 일원 뿐 이란 말입니다. 일행삼매는 일상삼매라는 그 경계를 일체 모두가 진여불성뿐이라는 그 자리를 놓치지 않고 생각이라는 생각에 상속을 시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행삼매입니다.

 일행삼매란 말이 앞서 말씀드린대로 단경에 다섯 군데나 있습니다.


 그래서 단경 부촉품에서 ‘그대들이 만약 여래의(부처의) 일체종지(모든 공덕을 갖춘 지혜)를 얻으려고 하면 마땅히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증할 지니라’ 그러면 마치 종자가 대지에 묻혀서 적당한 온도와 습기가 갖추어 지면 차근차근 싹이 터서 나무가 무성하고 꽃이 피고 또 열매를 맺듯이 우리 공부도 역시 원래 부처인지라. 그와 같이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하고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차근차근 업장이 녹아서 그때는 우리의 진성, 맑은 반야의 지혜는 점점 증장 되어가서 종당에는 해탈을 한다. 이런 법문이란 말입니다. 이걸로 해서 단경이 끝을 맺었습니다.


 화두나 염불이나 주문이나 절대로 둘로 생각을 마십시오. 부처님 법문은 아무리 쉬운 법문을 하더라도 꼭 대승법문이 끝에 가서 포함되어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글이 없어서 말로만 전수하기 때문에 제자 분들이 이해하는 것은 그대로 전수가 되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소론에서 따 들이고 그렇겠지요. 그래서 그런 것이지 부처님 법문은 소승법에도 대승이 다 들어 있고 대승법에도 소승의 점차로 올라가는 것이 다 들어 있습니다. 돈수 가운데 점수가 있고 점수 가운데도 돈수가 있습니다. 원래 둘이 아니단 말입니다. 돈수만 있고 점수는 없다고 생각할 때는 돈수라는 말도 나올 수가 없지요. 선이 있듯이 우리 상대법에서는 돈오돈수가 있으면 돈오점수가 있고 돈오점수가 있으면 돈오돈수가 있단 말입니다.


 부처님은 하나의 논리에 지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하나의 이론에 그치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내가 생명이듯이 나를 위시한 모든 생명의 근본 순수생명 자리인지라 부처님은 바로 생명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격입니다.

 우주가 하나의 인격이기 때문에 비로자나 부처님입니다. 청정광불이라 무량광불이라 무량수불이라. 부처라는 것은 각(覺)이라, 이른바 생명이 있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불이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바로 우주에 충만한 생명입니다. 그런 생명 가운데 내가 있고 네가 있는 것입니다. 생명 그것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나한테 있는 생명 남한테 있는 생명 똑같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를 잘 모르니까 무자 화두가 생기고, ‘개도 불성이 있다’ 개도 불성이 있다 하니까 잘 모르는 사람들은 개의 머리나 심장 어디에 불성이 있다고 생각했겠지요. 또 개가 불성이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우리 눈으로 봐도 불성이 안보이니까 말입니다. 없다고도 할 수가 있겠지요. 부처님 법은 그런 식이 아닙니다. 불성이 있다고 할 때는 어디 몸 한쪽 귀퉁이 뇌나 시각이나 그런데 가서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온몸 그대로 혼신 그대로 바로 불성이란 말입니다. 무량 무변의 우주 가운데는 불성이라 하는 순수생명 순수 에너지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성자가, 소크라테스나 또는 플라톤이나 그런 분들도 역시 훌륭한 철인들이기 때문에 그런 자리에다 자기 마음의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위대한 철인들은 다 그럽니다. 다만 그분들은 부처님 같이 온전하게 다 깨달은 분은 아니기 때문에 그 체계가 좀 모호하겠지요. 내 것 보다 못하다고 그래서 상대적으로 몰아서 우리가 대립적으로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모두가 끝끝내는 결국 우리 불교로 다 들어온단 말입니다.

 싸우고 다투고, 이슬람도 죽음을 무릅쓰고 순니파와 샤아파가 그렇게 싸우는 것을 보십시오. 또 앞으로도 많이 싸우겠지요. 여러분 십자군 원정 기억하시지요. 십자군 원정은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 200년 동안에 기독교인과 이슬람과의 싸움입니다. 한 4백만이 죽었다고 합니다. 십자군이 원정을 일곱 번이나 했단 말입니다. 그 목적이 무엇인가. 예수의 무덤이 있는 예루살렘 성지를 이슬람으로부터 빼앗아서 기독교의 영토로 하고자 해서 그와 같이 싸운 것입니다. 목적도 못 이루고 200년 동안이나 싸우고 지치고 4백만이 죽었습니다. 그 얼마나 큰 비극입니까. 종교의 이름 밑에서 말입니다. 종교라는 것이 법집을 하면 차라리 없는 것만도 못합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꼭 법집을 마십시오. 기독교 인구가 지금 17억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 많은 인구와 우리가 갈등을 한다고 생각하여 보십시오. 불성자리에서는 다 똑같습니다. 자기들도 역시 불성이 되고자 해서 자기들 마음 안에서는 몸부림칩니다.

 다만 그 법집 때문에, 하나님은 저 하늘위에 있다. 기도를 모시면 은총을 베풀어준다. 이런 식으로 믿으니까 그때는 안되지요.

 중생을 제도 할 때는 절대로 병도사라. 병을 주어서는 안됩니다. 정말로 회통한 부처님의 원융무애(圓融無碍)한 법을 우리가 모를 때는 공부를 부지런히 해야 됩니다. 그래서 참선을 우리가 하다보면 공부가 익어지면 몸도 자기 몸 같이 안 느껴지고, 우주가 하나로 두루 통한단 말입니다. 그러면 아! 이렇구나 이러니까 모두가 다 원융무애라 하는구나. 이렇게 느껴진단 말입니다.

 명상(瞑想)을 떠나서, 참선(參禪)을 떠나서 마음 구하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입니다. 절대로 안됩니다. 염불을 해서 염불삼매에 들든 상관이 없습니다.


 염불해서 삼매에 들면 염불삼매요, 주문해서 삼매에 들면 주문삼매가 되겠지요. 또 화두를 들어 삼매에 들 수 있는 것이고 말입니다. 다만 우리 마음이 상을 떠나서 오로지 청정무비한 영생불멸한 그 자리에다가 우리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그 자리가 바로 자성입니다. 자성이고 불성입니다. 진여청정성이라 자성이라 불성이라 모두가 다 같은 뜻입니다. 여래장, 법성, 도, 열반, 극락 모두가 같은 뜻입니다. 다 동일이명(同一異名)입니다. 이름만 다른 것이지 뜻은 똑같습니다.


 여러분들은 절대로 길 잃어버린 양을 찾는데 이길 저길 갈림길에서 헤매는 그런 모습을 보여서는 안됩니다. 그렇지 않기 위해서 앞서 말씀드린 바 달마스님이나 또는 육조스님같이 그런 모든 번쇄한 교법을 해치고 말입니다. 오직 순수하니 마음 깨달아서 가는 직지인심(直指人心)이라, 바로 우리 마음이 산 생명이거니 그 마음 자리를 바로 딱 집어서, 그 자리를 가리켜서 해탈의 법문을 주었단 말입니다.


 다만 우리가 마음 이외는 다른 것은 없다. 우주에는 진여불성 뿐이다. 이렇게 확실히 믿고, 그 마음을 앞생각 뒷생각에 딴 생각이 끼지 아니하도록까지 지속을 시킨단 말입니다. 그러면 하루 앉으면 앉은 만큼은 일좌자일좌불(一坐者一坐佛)이요 일일좌일일불(一日坐一日佛)이라. 하루 앉으면 앉은 만치 부처가 되어가고 또 이를 앉으면 이를 앉은 만큼 부처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대단히 감사합니다. 점심 공양시간이 너무 지연되고, 그렇지 않더라도 빚진 죄인 같은 신세인데, 더욱더 여러분들이 공복을 느끼시면 죄송한 마음 가중됩니다. 다만 제 말씀 이대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우리 마음이 근본 자성 진여불성을 여의지 않으면 다 선입니다. 묵조하시면 묵조선이고, 화두하시면 화두선이고, 염불하시면 염불선입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우리 마음이 화두를 애쓰고 그 머리 아프게 의심을 한다 하더라도 자성을 떠나 버리면 그때는 선이 못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부처님 명호로 어떻게 염불을 하든가, 어떤 화두를 들고 좌선을 하든 입선을 하든, 묵조를 하든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본체인 진여불성자리 우리 자성 자리를 떠나 있는가 안 떠나 있는가 하는 것이 참선이 되고 안되고 하는 것입니다.

 

 육조 단경에도 분명히 명문으로 ‘내 법은 본체를 여의지 않는다’ 단경을 한번 다시 보십시오. 내 법은 본체를 여의지 않는다. 진여불성을 여의지 않아야 비로소 참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 관세음보살을 외이시든, 부처님 명호 역시 그때그때 공덕 따라서 붙여진 공덕명입니다. 청정무비한 우주에 충만한 생명자체인 부처님을, 부처님의 공덕은 무한하기 때문에, 하나의 공덕뿐만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의 이름으로는 표현이 아니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비로운 쪽으로는 관세음보살, 지혜로운 쪽으로는 문수보살 대세지보살, 우리 지구에 들어있는 부처님의 공덕 에너지로 해서는 지장보살, 또는 태양에 들어있는 에너지로 해서는 일광보살이라, 전부다 통 털어서 합해서 총대명사가 나무아미타불입니다. 

 그러기에 중국 원, 명, 청나라 때, 그런 때는 그 당시를 주름 잡은 분들 이른바 운서주굉(雲棲袾宏 : 1536~1615), 중봉명본(中峰明本 : 1263~1323), 지욱우익(智旭藕益 : 1596~1655)이라, 그 당시에 불교를 주름잡은 분들이 다 이런 방법으로 공부를 했단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정말로 가장 행복스러운 길, 끝내 우리가 돌아가야 할 마음의 고향, 여기에 가는 길은 절대로 험난한 길이 아닙니다. 제일 쉬운 길입니다. 우주의 본연의 길, 순풍에 돛단배나 똑같습니다. 그런 길로 해서 꼭 금생에 성불하십시오 내생까지 절대로 미루지 마시고 꼭 위없는 대도를 성취하셔서 영생의 행복을 누리시기를 간절히 빌어마지 않습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시아본사석가모니불!


*이 법문은 청화(淸華) 큰스님께서 미국 팜스프링 금강선원에서 3년 결사를 마치시고 지난 4월12일 귀국 회향법회를 곡성 성륜사에서 베푸시면서 설하신 것을 채록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