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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마음의 고향

마음의 고향 23집『반야심경(般若心經)』 설법(2)

『반야심경(般若心經)』 설법(2)


<다음날 법문>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 정신과 물질이 아닙니까. 빛 색(色)자, 색(色) 이것은 물질에 해당하고, 수상행식(受想行識) 이것은 정신에 해당합니다. 즉 우리의 감각(感覺), 상상(想像), 의욕(意慾), 분별시비(分別是非)하는 식(識)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불교에서는 ‘오온법(五蘊法)’ 그러면 우주만유의 법을 총망라해서 ‘오온법’ 그럽니다. ‘오온’이라 방금 말씀마따나 정신과 물질을 한꺼번에 포함했단 말입니다.

 따라서 중생들은 모두가 다 오온법으로 해서 구성되어 있습니다. 헌데 우리 눈앞에 분명히 있게 보이는 - 내가 있고 네가 있고 분명히 있게 보이는 - 그 오온법이 다 비었다고 본단 말입니다. 어제도 말씀한 바와 같이 부처님의 법문 차원이라는 것이 3차원으로 구분하는 것인데, 그 맨 처음에는 낮은 차원의 중생에 맞추어서 모든 것이 선도 있고 악도 있고 너도 있고 나도 있고 말입니다. 이런 저급한 차원에 맞추어서 하는 법문 이것이 유교라, 있을 유(有)자, 유교란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바로 보면 그것은 있지가 않다 말입니다. 그림자 같고 또는 허깨비 같고 말입니다. 수중월(水中月)이라. 물속에 비친 달 같고 그런 것이지 우리가 보듯이 꼭 내가 있고 네가 있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분명히 그걸 느껴야 씁니다.

 몽환포영(夢幻泡影)이라 - 꿈 몽(夢)자, 허깨비 환(幻)자, 거품 포(泡)자, 그림자 영(影)자 - 몽환포영 같이 우리 현실을 못 보면 그때는 불교를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 불교는 인생고를 제도하는 - 인생고를 떠나는 가르침인데, 인생고를 떠나려고 하면 방금 말씀과 같이 일체 만유가 우리가 보는 실존적인 것이 사실은 실존이 아니라 이것이 몽환포영이란 말입니다.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요 또는 물속에 비친 달이요 그와 같이 봐야하는 것입니다. 사실이 그런 것이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당시 지금과 같은 과학도 무엇도 없고 문맹만 충만해 있는, 지금부터 2500년 전 이상 되는 인도사회에서 부처님께서 ‘모두가 비었다’ 하시면 그런 말을 알 수가 있겠습니까? 지금 사람들도 잘 모르는데 말입니다.

 다 알 수가 없으니까 초기에는 부처님께서 ‘있다 없다.’ ‘선도 있다 악도 있다’ ‘네가 있다 내가 있다’ 그와 같이 중생 차원에서 말씀하셨단 말입니다. 허나 중생들의 근기가 좀 익어져서 수련을 거친 다음에는 비었단 말입니다. 반야심경은 그와 같이 비었다 하는 그런 정도에 맞추어서 말씀하신 법문입니다.

 그러나 다만 비어있으면 그것이 허무(虛無)가 되어서 니힐리즘(nihilism) 같은 것이 되어 버리지요, 다만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빈 실상(實相)이 그때는 중도(中道)란 말입니다.

 

 부처님 법문은 맨 처음에 있을 유(有)자 유교(有敎), 그 다음에는 빌 공(空)자 공교(空敎), 그 다음에는 부처님께서 꼭 하시고 싶은 말씀, 실상 그대로하신 말씀이 중도(中道)란 말입니다.

 따라서 반야심경(般若心經)은 비었다 하는 그런 가르침과 중도를 아울러서 합한 가르침입니다.

 그러기에 어제 말한 바와 같이, 공이 즉 색이요 색이 즉 공이란 말입니다. 색 이것은 물질을 말한 것이요 공 이것은 정신을 말한단 말입니다. 즉 물질이 곧 마음이요 마음이 곧 물질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은 마음이 안 보인단 말입니다. 중생과 성자의 차이가 무엇인가 하면, 일반 중생은 마음은 못 보고 그냥 형체만 본단 말입니다.  도인들은 형체를 봄과 동시에 형체의 근원인, 형체를 이룩한 순수한 그런 힘 순수한 에너지를 본단 말입니다.

 그것이 마음인데, 따라서 성인들은 근원적인 순수한 마음을 보고서 마음에 비춰서 물질을 다루기 때문에 오류가 없단 말입니다. 그러나 중생은 겉만 보고서 피상적으로, 즉 말하자면 수박 겉핥기식으로 알맹이는 모르고서 겉만 봅니다. 겉만 보니까 사물을 바로 못 보는 것입니다.


 인간(人間)이 무엇인가? 인간이 이렇게 코가 있고 눈이 있고, 형체만 인간은 본단 말입니다. 사실은 알맹이는 우리 마음이 아닙니까. 내내야 마음이 나단 말입니다.

 내 마음이 나인 것을 우리 중생은 ‘몸뚱아리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내 몸이다’ 해서 집착을 합니다. 중생과 성인의 차이는 거기가 있습니다. 성자는 근원을 보고서 마음을 본체로 해가지고서 마음에 입각(立脚)해 버리는 것인데, 우리 중생은 그냥 마음이 안 보이는 것이니까, 겉만 보고 따지니까 사람 사람끼리 분열이 생기고 불화가 생기고 싸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반야심경에서 그 인생고(人生苦), 생(生)이요, 사(死)요, 또 헤어지는 고통, 또는 보기 싫은 사람과 만나는 고통, 이런 고통들을 이기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쓸 것인가?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이라, 즉 오온 - 물질과 정신이 우리 중생이 보는 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그림자 같이 허망하다. 이와 같이 비었다고 비추어 봄으로써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이라, 일체 고액을 없앤단 말입니다.


어제는 이 대목까지 했습니다. 오늘 한 시간 동안에 이걸 다 하기가 어려운 것이니까.


무수상행식(無受想行識)이라, 즉 공에서 본다 하면, 모든 것이 텅 비었다고 하는 관점에서 보면, 수(受)라, 이것은 우리가 감수(感受)하는 우리감각 (感覺)을 말합니다. 상(想) 이것은 헤아리는 상상(想像)인 것이고, 행(行) 이것은 천류(遷流)라고도 말하고 의욕적인 의식을 또 말합니다. 의지를 말하는 것이고, 식(識) 이것은 분별(分別)하는 우리 식을 말하고 우리 마음 작용을 ‘수상행식’ 그렇게 말합니다.

 성자가 바로 보는 그런 공 가운데는 아까 말씀마따나 성인들은 공을 보고 우리 범부들은 공을 못 봅니다. 공 그것이 사실은 실체의 근원입니다.  그런 공 가운데는 공중무색(空中無色)이라, 그런 색(色) 즉 물질이 없단 말입니다. 우리 같은 우리가 보는 물질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 학승들한테는 그런 말을 안 했지만 저 위에 있는 분들에게는 그런 말씀을 가끔 했습니다.

 현미경(顯微鏡)을 쓰고 본다고 하면 그야말로 참 이렇게 안 보인단 말입니다.  이런 것을 전자현미경을 쓰고 본다면 이렇게 보일 수가 없습니다. 마치 누런 안경을 쓰고 보면 밖이 다 누렇게 보이고, 푸른 안경을 쓰고 보면 푸르게 보이듯이 우리 중생은 중생의 업(業)으로 중생의 업을 쓰고 보니까 너요 나요 좋다 궂다 하는 것이지, 중생의 업을 떠나 버리면 그렇게 안 보는 것입니다.


일체만유(一切萬有)의 실상(實相) 일체만유의 본 모습, 본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는 도인이 본다고 하면 텅 비어있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공중무색(空中無色)이라, 도인이 보는 공 가운데는 색 즉 물질도 없고 또 무수상행식(無受想行識) 이라, 우리가 감수하는 아프다 또는 좋다 하는 그런 촉감도 없고 말입니다. 또는 상상하는 것도 그것도 중생의 망상에서 오는 것이고, 우리가 하고 싶다 하는 그런 의욕적인 것도 없는 것이고 말입니다.  우리가 분별 시비하는 것도 없는 것이고 이와 같이 그런 마음 작용도 없고,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라, 따라서 눈으로 보는 시각(視覺), 귀로 듣는 청각(聽覺), 코로 냄새 맡고 있는 우리 후각(嗅覺), 혀로 우리가 맛을 보는 미각(味覺) 말입니다. 몸으로 느끼는 촉각(觸覺)말입니다. 또 우리 의식(意識)으로 분별하는 우리 식활동(識活動) 이런 것도 결국은 없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허깨비 보고서 있다고 그럽니다. 허깨비 보고서, 또한 동시에


무색성향미촉법(無色性香味觸法)이란 말입니다. 또한 우리가 눈으로 보는 색, 주위환경 여러 가지 물질도 없고, 또한 들리는 소리도 없고, 후각(嗅覺)으로 느끼는 향기도 없고, 미각(味覺)으로 오는 맛도 없고, 또는 촉각(觸覺) 몸으로 느끼는 촉감(觸感)도 없고, 또 우리 의식(意識)으로 분별(分別)하는 일체 좋다 궂다 하는 어떠한 법(法)도 없단 말입니다.

 법 이것은 우리 법률이란 법이 아니라, 우리 의식으로 판단하는 모든 의식작용(意識作用) 모든 시비분별 이것이 여기 있는 법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바로 본다면 - 우리는 바로 못 보는 것이지만 - 바로 본다면 사실은 이런 것이 없는 것입니다.

 또한 그와 같이 없기 때문에


무안계내지(無眼界乃至)라, 우리 눈으로 보는 색(色)이라는 것은 본래 없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 업(業)으로 해서 만들어서 그와 같이 보인 것이지 원래 없는 것입니다. 시각이라는 것이,

 ‘내지(乃至)’는 ‘......에서 .......까지’ 그 말입니다. 이 말은 앞뒤 사이 중간을 생략하고 이어갈 때 쓰입니다. 무안계내지(無眼界乃至), 눈으로 보는 세계도 없고, 무이식계(無耳識界), 무비식계(無鼻識界), 무설식계(無舌識界), 무신식계(無身識界),


무의식계(無意識界)라, 우리 의식으로 판단하는 그런 경계도 없단 말입니다. 또


무무명(無無明)이라, 무명도 없다 말입니다. 무명(無明)이라는 것은, 진리를 모르는 것이 무명 아닙니까. 무지(無知)나 무명(無明)이나 같은 뜻입니다. 바로 보면 없으니까 내내야 무지나 같지요.

 공(空)에서 본다면 그때는 무지도 없단 말입니다. 무지라는 것은 내내야 우리가 이것저것을 판단을 잘못하는 것이고 또는 실상을 몰라서 무지라 하는 것인데 실상을 다 봐버린 도인(道人)들의 안목에서 무지가 텅 비어서 청정무구(淸淨無垢)한 그런 불성(佛性)밖에 없는 그 자리를 봐버린 사람들이 무슨 무명이 있겠습니까.

 그와 같이 본 근원을 못 본데에 가서 무지 즉 무명이 있는 것이지, 텅 비어서 일체 것을 다 떠나버린 훤히 비춰보는 마음자리에서는 무지나 무명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무지도 없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중생경계에서 무지야 지혜(智慧)야 하는 것이지 지혜고 무지고 다 털어버리고 그야말로 참, 본 근본을 딱 읽어버린 그런 경지에서 무슨 무지가 있겠습니까. 무명도 없고.


역무무명진(亦無無明盡)이라, 무명이 없기 때문에 무명을 없애는 것도 없단 말입니다. 무명을 다 없애는 것도 없단 말입니다. 즉 말하자면, 무명이 있다고 하는 데에서 상대법에서 무명이 있다고 하니까 무명을 떼어내려고 애쓰는 것이지 아! 무명이 원래 없는데 어떻게 무명을 없앨 필요가 있겠습니까. 무명을 다해버리는, 무명을 없애버리는 것도 없단 말입니다. (12인연법을 별도로 설하셨기에 여기서는 생략됨 : 정리자 주)


내지무노사(乃至無老死)라, 또한 동시에 우리가 늙고 병들고 죽는 것도 없단 말입니다. 생사(生死)를 초월(超越)해 버리는 즉 말하자면 생(生)이 있고 사(死)가 있고 그와 같이 상대유한적(相對有限的)인 모양의 세계에 가서 죽음과 생이 있는 것이지, 모양 떠나버리면 순수한 에너지의 세계, 순수한 생명의 세계에는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즉 불생불멸(不生不滅)한,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그런 세계에서 무슨 늙고 병들고 하는 것이 있겠습니까. 이런 늙고 죽는 것이 없단 말입니다. 따라서


역무노사진(亦無老死盡)이라, 따라서 늙음과 죽음을 다 없애버리는 것도 없단 말입니다. 생사(生死)라는 것이 인생고(人生苦)에서 제일 무서운 고생 아닙니까.

 권력이 좋다 무엇이 좋다 하지만 우리가 구해서 얻지 못하는 것도 고통이란 말입니다.

 가장 큰 고통은 무엇인가 하면, 역시 우리 목숨이 죽는다하는 죽음의 공포 같이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벌써 죽음을 떠나버린, 생사를 떠나버린데 가서 무슨 죽음의 공포가 있겠습니까. 역시 그때는 늙어서 죽는다는 것을 없앤다는 것도 없는 것입니다.

 또한 동시에 부처님 법문 가운데서


무고집멸도(無苦集滅道)라, 고집멸도(苦集滅道) 이것은 사제법문(四諦法門)인데 부처님 일대 가르침을 가장 체계 있게 말씀하신 가르침 이것이 이제 고집멸도입니다. 사제법문 아닙니까.

 아시는 분들은 다 외워가지고 있는 법문 아닙니까. 사제법문 말입니다. 고집멸도라, 고(苦) 이것은 인생고입니다. 즉 생로병사(生老病死), 인생고 가운데서 가장 무서운 것은 생로병사 아닙니까. 나고 늙고 병들고 죽고 말입니다. 태어났다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통, 미운 사람과 만나는 고통, 구해서 얻지 못하는 고통, 이런 등등의 것이 인생고인데, 우리가 바로 보면 사실은 고통뿐인 것입니다. 안 늙는 사람 누가 있고 또 평생 한 번도 안 아픈 사람 누가 있습니까. 따지고 보면 결국은 고통뿐이다 말입니다.

 고통뿐인데 사람들은 ‘고통이 아니라 안락이다, 안락이다’ 이와 같이 생각하니까 그때는 조금만 고통스러우면 그냥 고생스럽다고 생각하고 짜증을 내곤 한단 말입니다. 따지고 보면 삶 이것은 사실은 고통뿐인 것입니다.


인생은 고다. 인생은 고다. 이것이 고집멸도의 이제 맨 처음입니다. 허나 인생이 고면 고의 원인은 무엇인가? 우리가 어디가 아프면 아픈 근원이 있겠지요. 고(苦)의 원인(原因) 이것이 집(集)입니다.

 집(集)의 내용은 무엇인가? 이것은 탐(貪) 진(嗔) 치(痴) 삼독심(三毒心)과 우리의 행위(行爲; 業)란 말입니다. 우리가 탐심(貪心) 부리고 우리가 성내고 우리가 사물을 바로 못 보고 그런 어리석음 때문에 우리가 행하는 행동 그것이 여기 집(集)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인간(人間)이 어리석음이 없고, 탐욕심도 없고, 분노가 없다고 그러면 고(苦)도 없단 말입니다.

 인간으로 우리가 어찌 태어났는가? 우리가 정말로 번뇌가 없다고 그러면 사람으로 태어날 수가 그때는 없는 것입니다. 극락(極樂)에 올라가서 그야말로 영생(永生)해 버린다 말입니다. 또는 그렇게는 못 된다 하더라도 천상 가서 안락스럽단 말입니다.

 허나 사람 정도의 탐욕심과 사람 정도의 분노심과 사람 정도의 무명이 있단 말입니다. 사람 정도의 그 어리석음, 탐욕심 또는 분노 이런 것이 아직 있기 때문에 이런 업에 끌려서 그때는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부모한테 우리 영혼(靈魂)이 - 업식(業識)이 - 즉 말하자면, 업에 가린 그런 우리 영혼이 부동(浮動)하다가 거기에 알맞은 부모를 만나가지고 딱 거기에 엄마 태 안에 들어가서 그때는 잉태한단 말입니다.

 이와 같은 업이 없으면 극락으로 가서 영생하는 것이고, 또는 천상으로 가서 안락스러울 것인데, 업이 무거워서 탐심도 많고 또 성내는 마음, 바로 못 보는 어리석은 마음, 이런 업이 무겁기 때문에 인간 정도로 무겁기 때문에 결국은 인간 정도에 맞는, 그 정도에 맞는 부모 만나가지고 그때는 딱 거기에 붙어가지고 인간으로 태어난단 말입니다.

 우리 불교는 여실(如實)하게 그것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지금 현대 생리학보다 훨썩 더 세밀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즉 이와 같이 인생고라고 하지만 고는 그냥 우연한 고가 아니라 아까 말씀마따나 인간의 탐심, 진심, 그리고 어리석은 마음 즉 치심 아닙니까. 이것과 여기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행동 이것이 즉 말하자면 집(集), 고를 모으는 원인이단 말입니다.

 불교는 이와 같이 인과(因果)가 분명합니다. 고(苦)라는 과(果)가 있으면 반드시 그 원인(原因)이 있단 말입니다. 원인을 집(集)이라 하는 것이고, 그러나 인생이 고와 집만 있다고 하면 인생이라는 것은 결국은 바로 죽음만 같지 못합니다. 안 태어난 것만 같지 못하고 말입니다.

 허나 불교에서는 이와 같이 인생이 고가 있고, 고를 모으는 여러 가지 삼독심 같은 번뇌나 우리 행위 업이 있지만 또한 동시에 영생하는 - 고를 떠나서 영생하는 행복이 있단 말입니다. 영원히 안락스런 행복, 이것이 멸(滅)입니다. 즉 말하자면 번뇌를 다 멸해버린 형태란 말입니다.

 탐욕이나 진심, 아까 말한 분노하는 마음이나 또는 어리석은 마음이나 이런 것을 다 없애버리고서 안락스러운 그런 경계가 이것이 멸입니다. 멸이 없다고 하면 불교는 의의(意義)가 없지요. 따라서 멸 이것은 불교의 이상향(理想鄕)입니다.

 불교의 이상향 이것은 멸입니다. 허나 다만 멸이 있다 거기에 그쳐버리면 불교는 그때는 불교가 못된단 말입니다. 멸(滅)에 이르는 영생의 극락 영생의 행복에 이르는 방법 수단, 이것이 도(道)란 말입니다. 멸에 이르는 길 이것이 도입니다.

 도(道) 이것은 여러분들이 대체로 들어서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삼학도(三學道)란 말입니다. 우리가 계율(戒律)을 지키고, 마음을 모아서 통일 시키고 말입니다. 또는 지혜(智慧)를 닦는 것이고 말입니다.


이와 같이 계(戒)‧ 정(定)‧ 혜(慧)라, 계율 닦고 또는 마음 통일 시키고 또는 지혜를 닦고 말입니다. 삼학도! 더 부연시키면 팔정도(八正道), 이것이 멸에 이르는 행복스런 영생에 이르는 길입니다. 삼학도 또는 팔정도 말입니다.

 지금 이와 같이 우리 인생고와 인생고의 원인과 또는 인생고를 떠나버린 영생 안락의 그런 세계와 거기에 이르는 그런 방법을 말씀하신 것. 이것이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제법문(四諦法門)이라, 넉 사(四)자, 진실한 체(諦)자, 그래서 ‘사제’라고도 하고 ‘사체’라고도 합니다.

 따라서 불교는 대승(大乘), 소승(小乘), 밀교(密敎), 현교(顯敎) 여러 가지 갈래가 많이 있으나, 따지고 보면 내내야 결국은 사제법문의 뜻을 이렇게 저렇게 풀이한 것에 불과합니다.

 여러분들이 사제법문을 잘 외워두면 무슨 법문을 보나 ‘아! 이것은 어디에 해당하구나’ 이렇게 알 수가 있습니다.

 인생고(苦)와 또 인생고의 원인인 집(集)과 영생의 행복인 멸(滅)과 또는 영생의 행복인 그런 해탈의 길, 인생고를 멸해버리는 길 이것이 도(道)고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느껴야 할 것은, 멸을 분명히 보고, 인생은 고라는 것을 인식하고서 그러나 인생의 참다운 목적은 멸이다 영생의 행복이다 이것을 분명히 우리가 느끼고서 멸에 이르기 위한 그런 흠모추구(欽慕追求)하는, 멸을 그리워하는 마음 밑에서 도를 행해야 씁니다.

 계율 지키고, 도덕적인 행을 안 취하면 멸에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술 많이 먹고 싸우기 좋아하고 음탕하고 말입니다. 아무렇게나 그런 문란한 행동을 취하면 멸에 이르지를 못합니다. 역시 철저한 도덕적 행동 밑에서 우리가 생활을 해야만 마음이 맑아온단 말입니다. 함부로 행동하면 그때는 정신이 통일이 안 되는 것입니다.

 

정신을 딱 모아서 통일을 시켜야만 그때는 그야말로 참 우리 마음의 본 뿌리가 부처인지라 말입니다. 우리 마음의 본 뿌리가 멸(滅)을 증(證)하는, 멸과 상응된 영생극락이 그 자리인지라, 우리 마음을 딱 모아가지고서 자꾸만 마음 뿌리로 가야 씁니다. 마음 저변으로 가야 씁니다.

 우리 중생들은 마음의 겉만 가지고 삽니다. 마음 뿌리는 부처고, 마음 겉에는 우리 같이 이와 같이 아까 말한 삼독심(三毒心) 부리는 마음인 것인데 말입니다. 따라서 삼독심 부리는 탐심 부리고 진심 부리는 그 마음을 자꾸만 억제하고 누르는 것이 행습(行習)이 되면 그것이 도덕적인 행위다 말입니다. 즉 계율을 지키는 것입니다.

 오로지 부처님을 흠모하는 한마음, 화두(話頭)나 염불(念佛)이나 주문(呪文)을 외는....... 자꾸만 우리 마음의 저변으로 가야 쓴단 말입니다.

 그 저변은 내내야 부처란 말입니다. 불성(佛性)을 인격화(人格化)시키면 부처님인 것이고 말입니다. 성품으로 보면 불성인 것이고 말입니다. 이와 같이(녹음 일부 손실)

  

분별시비(分別是非)해서 체계를 세운 것은 일반 지식인 것이고, 참다운 영원 해탈의 길, 해탈의 슬기는 그때는 반야인데, 지혜와 지식을 구분해서 일반중생이 알아서 분별해서 아는 것은 지식에 해당하는 것이고, 참다운 해탈의 슬기 이것은 지혜인데 불교 말로 하면 반야란 말입니다. 반야심경은 내내야 해탈의 지혜란 말입니다.

 헌데 이와 같이 아까 말씀한 바와 같이 지금 쭉 여러분들이 제법공(諸法空)이라는 것을 전제를 두어야 합니다.

 제법공 밑에서는 이와 같은 것이 모다 없는 것입니다. 잊어버리면 그때는 안 됩니다. 제법공(諸法空) 안에서는 그야말로 참 이런 것이 모두 없고 또한 동시에


무지(無智)라, 지식(知識)도 없는 것입니다. 중생이 따지고 분별하는 일반적인 지식도 없단 말입니다.

 또 역시 


역무득(亦無得)이라, 얻음도 없단 말입니다. 얻음 이것은 참다운 지혜, 반야의 영생의 지혜의 얻음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보통 불교말로 하면 유위법(有爲法)이라, 또는 유루법(有漏法)이라 우리 중생이 보는 가사 권력이 좋아지고 돈이 많아지고 말입니다. 또 몸이 건강해지고 한다는 그런 상대유한적인 얻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적인 것을 구하는 사람들인데 그런 것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비록 생활에는 필요가 있다 하더라도 마음 닦는 그 자리에서는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법공(諸法空)한 자리에는, 모든 법이 다 비어 있다는 그런 실상의 지혜로 본다고 할 때는, 아까 말마따나 고집멸도(苦集滅道)란 그것도 사실은 번뇌가 있다고 했을 때에 고가 있고 무엇이 있는 것이지, 번뇌가 다 없어져 가지고 텅 비어가지고 청정무비(淸淨無比)한 세계에 무슨 고가 있고 고의 원인이 있고 또 무슨 도(道)가 있고 그렇게 할 수가 없지요.

 따라서 우리가 안다는 것도 필요가 없는 것이고, 또한 동시에 상대유한적인 그런 어떤 얻음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무소득고(以無所得故), 이와 같이 소득의 얻은 바가 없기 때문에 - 이것은 옛 고(故)자, 연고 고(故)자, 까닭 고(故)자 - 이와 같이 상대유한적인 얻음이 없단 말입니다.

 오직 순수한 지혜만 더 빛나고 할 뿐이지, 상대유한적인 얻음이 없기 때문에,


보리살타(菩提薩埵), 보살 보(菩)자, 이끌 제(提)자, 보살 살(薩)자, 강할 타(埵)자, 이것은 보살이라는 뜻입니다. 인도말로 하면‘보디삿트    바’(bodhi-sattva)인데, 한문자 음역으로 해서 ‘보리살타’라 하는 것입니다. 인도 말을 제대로 옮기지는 못했지만, 보살은 이와 같이 - 이런 것이 모두가 다 - 아까도 말한 바와 같이 제법공(諸法空)의 지혜를 여러분들이 염두에 딱 두어야 씁니다. 모든 법이 상대유한적인 법이 텅 비었다고 하는 그 자리를 본다고 하면 아까 말씀마따나 안계(眼界) 눈으로 보는 것도 없는 것이고, 고집멸도도 없고 일반적인 지식도 없고, 이와 같은 것들이 다 없기 때문에 따라서 다 몰아서 우리가 얻은 것은 그런 상대유한적인 유루법(有漏法)의 - 유루법, 이것은 우리 중생이 느끼는 세계의 모든 법이 유루법입니다. 또는 유위법(有爲法)이고 말입니다.

 이런 것이 없기 때문에 이런 소득(所得)이 이런 얻은 바가 없기 때문에 보리살타 보살은


의반야바라밀다고(依般若波羅密多故),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한 고로’ 그렇게 됩니다.

 어제 배운 바와 같이 반야바라밀다는 도피안(到彼岸)의 지혜, 피안(彼岸)이라는 것은 해탈의 저 언덕이란 말입니다. 차안(此岸)은 우리가 사는 이런 생사(生死)하는, 즉 죽고 살고 또는 죄도 짓고 하는 세계가 이 차(此)자, 언덕 안(岸)자, 이쪽이고 피안(彼岸)은 저 피(彼)자, 저쪽 언덕이라, 인생고해(人生苦海)를 떠나서 저쪽 즉 말하자면 영생(永生)의 안락(安樂)스러운 경계(境界)가 피안이란 말입니다. 헌데 이 풀이는 피안에 이르는 다시 말하면 영생해탈(永生解脫)에 이르는 다시 바꿔 말하면 성불(成佛)하는 지혜(智慧), 성불하는 지혜 이것이 반야바라밀입니다.


 반야(般若)는 참다운 지혜 아닙니까. 바라밀다(波羅密多)는 도피안(到彼岸), 피안에 이른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성불을 성취하는 지혜’ 이것이 반야바라밀의 뜻입니다.

 이와 같이 이런 것들이 다 허무하기 때문에 보살이 어떻게 했는가 하면, 보살은 다만 이런 상대유한적인 지식은 다 떠나버려서 그런 것은 관심도 없이

다만 이와 같이 성불하는 ‘피안에 이르는 지혜에 의지하는 고로’


심무괘애(心無罫碍)라, 거리낄 괘(罫)자. 거리낄 애(碍)자, 이런 한자는 어렵지만 불교를 공부할 때 자주 나오니까 외워두면 좋습니다. 거리낄 괘(罫)자 - 마음에 거리낌이 없단 말입니다. ‘무괘애’라는 것은 거리낌이 없는 것입니다.

 즉 말하자면, 좋다 궂다 또는 마음이 껄끄럽고 막힌단 말입니다. 이와 같은 괘애(罫碍)가 없고, 


무괘애고(無罫碍故) - 이런 마음에 거리낌이 없기 때문에


무유공포(無有恐怖) - 공포가 없단 말입니다.

 마음이 툭 틔어서 천지우주와 나하고 하나가 되었는데 어디 가서 무서움이 있겠습니까.

 ‘저 사람이 나를 해친다, 상대가 있고 또 귀신도 있어 가지고서 나를 해코지 한다.’ 이와 같이 둘로 보고 셋으로 보고 이렇게 보는데서 우리 마음이 두려운 것이지 생사(生死)를 떠나버린 사람, 내 몸뚱아리는 원래 허망한 하나의 거품으로 보거니 이걸 누가 칼로 찌른들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와 같이 제법공(諸法空)에서 천지우주의 유위법은 다 비었다는 것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공포가 없단 말입니다. 마음이 거리낌이 없고, 마음이 거리낌이 있어야 공포가 있는 것인데 말입니다.

 너다 나다 좋다 궂다 또는 산다 안 산다 아프다 안 아프다 그런 마음 때문에, 그런 괘애 때문에 공포가 있는 것이지, 괘애가 없기 때문에 마음에 공포가 없다는 것입니다.

 공포가 없는 지라,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하고, 멀 원(遠)자, 떠날 리(離)자, 자빠질 전(顚)자, 넘어질 도(倒), 꿈 몽(夢), 생각 상(想) 말입니다.

 전도몽상 - 거꾸로 된 꿈같은 생각을 멀리 떼어버린단 말입니다. 멀리 여읜다는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지금 거꾸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바로 못 보고 있는 것입니다. 거꾸로 보면서 거꾸로 보는지를 모른단 말입니다.

 현명한 사람들은 ‘내가 지금 거꾸로 보는 구나’ 이것 정도는 느껴야 하는 것인데 우리 중생은 그것도 못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꾸로 보는 것입니다. 바로 못 보고서.........

 이와 같이 이런 마음의 공포가 없어지면 그때는 마음이 툭 틔어서, 마음이 열려서 우리가 평소에 거꾸로 보는 꿈같은 생각을 그야말로 참 멀리 여읜다는 말입니다. 멀리 떠나버리고서........

 우리가 꿈을 꿀 때는 꿈속에서 보는 것이 다 사실 같습니다. 싸우고 미워하고 먹고 하는 것이 참말로 생각 되지만 꿈 깨고 나면 무엇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지요. 그와 똑같은 것입니다.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입니다.

 꿈인 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불교를 바로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결국은 꿈을 꾸고 있는 것입니다. 거꾸로 본단 말입니다. 이와 같이 거꾸로 보는 생각을 멀리 여의고서,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이라, 거꾸로 보는 꿈같은 생각을 멀리 여의고서


구경열반(究竟涅槃)이라, 구경(究竟)은 이것은 궁구할 구(究)자, 마칠 경(竟)자, 열반을 우리가 성취한단 말입니다. 열반에 이른단 말입니다.

 열반은 무엇인가? 열반은 이것은 이상향(理想鄕), 극락(極樂), 진리(眞理), 도(道), 부처경계, 불교의 이상적인 경계, 이것이 열반입니다.

 열(涅)자, 이것은 해감(앙금흙) 날(涅), 극락갈 녈(涅), 보통은 ‘날’자로 쓰나 불교적일 때는 극락갈 열(涅)로 씁니다.

 반(槃)자, 이것은 즐길 반(槃)자, 또는 소반 반(槃)자,

 열반, 이것은 극락세계란 말입니다. 아까 말씀마따나 진리(眞理)나 또는 도(道)나 또는 법성(法性)이나 부처나 이와 같이 통용하는 말인 것입니다. 하여튼 불교 이상향(理想鄕) 말입니다. 열반에 이른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전도몽상(顚倒夢想) 때문에 꿈같은 거꾸로 보는 생각 때문에 결국은 열반에 못 가는 것입니다.

 허나 우리가 모두를 텅 비었다고 보면서 우리 업장이 녹아지면 여러 가지 그런 꿈같은 전도몽상 - 거꾸로 보는 뒤바뀐 생각을 떠나서 열반을 성취한단 말입니다. 즉 말하자면 극락을 성취한단 말입니다. 부처를 우리가 이룬단 말입니다. 열반을 성취하나니

  


삼세제불(三世諸佛)도,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뿐만 아니라 과거(過去) 부처님이나 또는 현재(現在)나 미래(未來)나 모든 부처님이 삼세제불 아닙니까. 삼세 모든 부처님도 역시 - 다만 아까 말한 보살뿐만 아니라 - 이와 같이 피안에 이르는 영생에 이르는 지혜인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했다는 것입니다.

 삼세 부처님도 또한 똑같이,


의반야바라밀다(依般若波羅密多)고로, 역시 피안에 이르는 영생에 이르는 반야에 의지한단 말입니다. 우리가 반야(般若)에 의지해야 씁니다. 반야가 무엇인가? 반야는 지금까지 말한 바와 같이 해탈의 지혜, 모든 것을 바로 보는 지혜란 말입니다. 바로 보는 지혜 이것이 반야입니다. 또한 바꿔서 말하면, 모두 텅 비어서 우리가 보는 이러한 현상들이 다 비었다고 보는 지혜란 말입니다. 바로 보면 다 비었다고 보는 것이니까.

 마치 전자현미경을 쓰고 보면 전부 전자로만 보이듯이 부처님의 안목, 부처님의 눈으로 본다면 우주가 텅 비어서 부처님의 광명만 가득 찬 것입니다. 그렇게 보는 것이 참답게 옳은 것입니다.


전자현미경을 쓰고 보면 전자나 원자로만 보이듯이 번뇌가 떠나버린 부처님의 청정한 안목으로 본다면 천지우주가 부처님의 청정미묘한 광명으로만 가득 차 있단 말입니다. 그렇게 보는 것이 참답게 바로 보는 것입니다.

 삼세(三世) 모든 부처님도 역시 아까 보살과 마찬가지로 반야바라밀 즉 말하자면 영생에 이르는 피안에 이르는 그러한 반야에 즉 지혜에 의지한 고로,


고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故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 아름다울 아(阿)자, 클 아(阿)자, 김맬 누(耨), ‘누’자인데 지금 모다 ‘아뇩다라’ 합니다만 사실 이 발음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원래는 ‘누’ 자입니다. 인도 음도 역시 ‘누(nu)'  그래서 누인데, 아름다울 누(耨), 많을 다(多), 비단 라(羅), 석 삼(三), 이것도 아름다울 막(藐), 석 삼(三), 또 보살 보(菩), 이끌 제(提), 이것이 이끌 제인데 인도의 '보디(bodhi)', 인도 말로 해서 ‘보디’라고 하는데 부르기 사나우니까 ‘보리’라고 발음합니다만, 역시 한문으로 본음은 ‘제(提)’ 자입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이것은 무슨 뜻인고 하면 무상정편지(無上正遍智)· 무상정진도(無上正眞道)라, 없을 무(無)자, 윗 상(上)자, 위없는(최상의, 비할바 없는) 정편(正遍)이라, 바를 정(正), 두루 편(遍), 지혜 지(智), 위가 없이 바르고 보편적인 그러한 지혜, 따라서 부처님의 참다운 지혜, 다시 위없는 - 다시 비교할 수 없는 또는 모든 지혜가 다 포함된 지혜가 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입니다.

 따라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완전히 증득(證得)하면 부처 아닙니까. 성인(聖人)이고 말입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와 같이 얻는다.


삼세제불도 반야바라밀다 즉 피안에 이르는 영생에 이르는 지혜에 의지하는 고(故)로, 그 지혜가 무엇인가? 아까 말한 제법(諸法)이 공(空)한 오온(五蘊)이 다 공(空)한 지혜란 말입니다.

 하여튼 이것을 머리에 딱 두어야 한단 말입니다. 그래야 혼미가 안 온단 말입니다. 제법이 공한 지혜, 제법이 공한 실상, 그것으로 본다면 아까 말과 같이 보살도 그런 지혜에 의지한 것이고 삼세제불도 역시 그와 같은 제법이 공한 지혜를 의지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무상도(無上道)를 성취한단 말입니다.


고지(故知)라, 고로 알아라, 고로 알지라. 이와 같이 보살이나 부처나 제법이 공한 지혜에 의지해서 무상(無上) 도리(道理)를 성취했으니까 그대들은 알아라.

 어제도 말한 바, 이것은 부처님께서 지혜제일(智慧第一) 지혜가 수승한 사리불(舍利弗)한테 말한 법문입니다.

 지혜가 수승한, 같은 제자도 아무리 신통은 많이 하지만 지혜가 수승하지 못하면 이런 법문은 알아먹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지혜가 제일 수승한 사리불 존자한테 이런 법문을 했단 말입니다.

 고로 알아라.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密多), 이와 같이 피안에 이르는, 해탈에 이르는, 성불하는 지혜는 이것은


시대신주(是大神呪)요, 이것이 바로 큰 신통스런 하나의 주문(呪文)이란 말입니다.

 주문이라는 것은, 가사 ‘옴마니반메훔’도 주문 아닙니까. 하여튼 우리 인간의 말로 해서 표현할 수 없는 신비(神秘) 부사의(不思議)한 뜻을 갖춘 짤막한 글, 이것이 주문입니다.

 보통 말로 해서 뜻을 표현한 것이 아니단 말입니다. 하나의 리듬이나 음으로 해서 심수오묘(深邃奧妙)한 무량의 뜻을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문인데, 반야심경 즉 말하자면 이와 같이 제법이 공한 자리를 볼 수 있는 이런 지혜가 바로 큰 그런 모든 신통을 다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의 주문이고,


시대명주(是大明呪)요, 이것이 모든 지혜를 밝힌 하나의 주문이며, 명주(明呪)며,


시무상주(是無上呪)요, 이것이 또한 위가 없는 주문이란 말입니다. 그야말로 참 다라니가 많이 있고 여러 가지 별별 복잡한 주문이 많이 있지만 그런 주문 가운데서 ‘제법(諸法)이 공(空)했다’ 하는, ‘오온(五蘊)이 공(空)했다’ 하는 좋은 주문은 없단 말입니다. 이것은 위없는 주문이며


시무등등주(是無等等呪)며, 이것이 무등등(無等等)이라, 없을 무(無), 같을 등(等), 그럽니다. 같음이 없는 주문이란 말입니다. 동등한 것이 없단 말입니다. 이것이 최상이기 때문에 이와 버금할 수 있는, 이와 맞먹는 주문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등등은 동등한 주문이 없단 말입니다.


능제일체고(能除一切故)라, 능할 능(能), 제할 제(除), 한 일(一), 끊을 체(切), 괴로울 고(故), 일체의 고통을 다 제거한단 말입니다.

 ‘내 몸이 귀중하다’, ‘네가 귀중하다’, ‘내 자식이다’, ‘누구다’,  ‘모두 재산이 좋다’, 이런 것 때문에 고통이 있는 것인데, 이 몸뚱아리 이것이 다 비었다고 생각할 때는 고통이 있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사실은 그런 것이 없는 것이고 우리 중생은 거꾸로 보는 것입니다. 전도몽상(顚倒夢想)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능히 일체의 인생고를 다 제거하는지라, 따라서


진실불허(眞實不虛)라, 진실로 참되고 헛되지 않는단 말입니다.

 오온(五蘊)이 개공(皆空)한 지혜(智慧)가 참되고 헛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참다운 지혜입니다. 진실불허라,


고설반야바라밀다주(故說般若波羅密多呪), 고로 반야바라밀다 즉 말하면 피안에 이르는 성불하는 지혜의 주문을, 주문을 압축해서 이렇게 지금 까지 말한다고 하면 그 뜻입니다. 즉 말하자면 지금까지 배워 온 반야심경의 진리를 말입니다. 하나로 딱 뭉쳐서 주문으로 표현한단 말입니다.

 반야심경의 그런 이와 같이 많은 진리를 다 모아서 하나의 주문으로 압축해서 표현한다고 하면,


즉설주왈(卽說呪曰), 곧 지금 말하는데, 곧 주문으로 말하면,


아제아제(揭帝揭帝) 바라아제(波羅揭帝) 바라승아제(波羅僧揭帝) 보디사바하(菩提娑婆訶)라,

 이것은 들 게(揭)자인데, 들 ‘걸’이라고도 합니다. 이것도 역시 인도 말을 그대로 음역하기 위해서 이런 한문자로 한 것이고, 같은 음도 한문 투로 하는 것과 우리가 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와 같이 모두 딱 안 맞아버렸지만 하여튼 지금 우리가 여기서 들먹이면.......

 아제아제(揭帝揭帝) 바라아제(波羅揭帝) 바라승아제(波羅僧揭帝) 보디사바하(菩提娑婆訶)라, 들 게(揭), 임금 제(帝), 할미 파(婆), 이것은 ‘파’인데 ‘바’라고 발음합니다. 반야바라밀도 역시 ‘파’자인데 음편(音便)되어서 ‘바’라고 발음합니다.

 그 다음 비단 라(羅), 중 승(僧), 보리 보(菩), 끌 제(帝), 세상 사(娑), 할미 파(婆), 꾸짖을 가(訶), ‘사바세계’라고 할 때는 우리가 사는 번뇌에 때 묻은 세계를 사바세계라고 합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보디사바하! 반야심경의 전부 뜻을 하나의 주문으로 압축하면 결국은 이렇게 표현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불교에서 오종불번(五種不飜) 그래서 짤막한 말에 의미가 함축성이 많아가지고 다섯 가지 종류는 번역하지 말라는 법칙이 있습니다.

 가사 인도에만 있고 중국에는 없는 것이라든가 또 이와 같이 아주 심수오묘해서 간단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주문은 번역하지 말라는 법칙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번역을 아니 하지만 사람들이 하도 호기심이 있어놔서 번역을 억지로 시도를 많이 했단 말입니다. 어떻든 여러 가지 한 경우가 있으나, ‘아제아제’는 ‘돌아가세 돌아가세’, - 돌아간다는 것은 내내야 진리의 바다 진리의 고향이 되겠지요. ‘바라아제’는 어디로 가는가 하면 ‘영생의 고향으로 가세’, ‘바라승아제’ 이것은 ‘모두 다 함께 영생의 고향으로 가세’, ‘보디’ 이것은 ‘진리’ 아닙니까. ‘사바하’는 어떤 주문에나 보통 붙어 있습니다. ‘도를 성취한다.’

 다시 정리하면 ‘돌아가세 돌아가세, 영생의 고향으로 가세, 모두 함께 가세.’ 그렇게 해서 무상대도(無上大道)를 무상대도가 사바하인데, ‘사바하’고 ‘보리’인데, ‘무상대도인 보리를 성취하세.’ 이렇게 풀이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저는 이것저것 많이 보고서 그 가운데서 제가 느껴서 내일 좋은 대문(大文)으로 한 것이니까 꼭 이것이 옳은 것은 아닙니다만, 참고로 하시기 바랍니다.

 ‘돌아가세 돌아가세, 영생의 고향으로 돌아가세, 다 함께 가세, 위없는 진리를 성취하세!’ 이렇게 되겠습니다.


 여러분들, 공양시간이 되어서 공양 들어야지요.


반야의 지혜, 앞서 말한 오온개공(五蘊皆空)의 지혜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거꾸로 보는 것입니다. 참다운 지혜 이것은 오온(五蘊)이 비어있는, 오온은 정신과 물질 아닙니까.

 정신과 물질은 다 비어 있는 것입니다. 참말로 있는 것은 무엇인가?

 비어있지만 다만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청정미묘(淸淨微妙)한 자비(慈悲)나 지혜(智慧)나 행복(幸福)이나 그런 것이 가득 찬, 온전히 가득 찬 그 자리가 즉 말하자면 불성(佛性)이란 말입니다. 텅 비어 있지만 사실은 불성이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우주(宇宙)에는 불성뿐만 있는 것입니다. 중생(衆生)은 그걸 못 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것을 많이 외운다 하더라도 그냥 외우기만 해서는 별로 공덕이 없습니다.


 우리 관념상(觀念上) 천지우주는 텅 비어 있는데 다만 불성만이 충만(充滿)해 있구나! 이와 같이 느끼면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님이나 아미타불(阿彌陀佛)이나 외셔야 씁니다.


 참말로 있는 실상(實相)은 방금 말마따나 텅 비어서, 우리가 보는 것은 비어 있는 것인데 다만 허무(虛無)하게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비어 있는 실상 그것은 청정미묘(淸淨微妙)한 부처님의 광명(光明)이란 말입니다.

 그런 우주에 충만한, 내 몸 가운데나 어디에나 우주에는 충만한 부처님의 미묘한 광명, 그 가운데는 지혜도 행복도 다 들어 있습니다. 그 무한의 광명을 이렇게 이미지(image)로 생각하면서 부처님의 명호(名號)나 또는 화두도 하고 염불도 하고 주문도 외운단 말입니다.

 이렇게 해야만이 그때는, 참말로 우리가 그런 광명, 부처님의 불성과 하나가 된단 말입니다. 부처님의 불성 광명과 하나가 된단 말입니다.

 이것이 가장 속 빠른 공부 방법인 것이고, 그렇게 한다면 그때는 자기 스스로 머리도 맑아지고, 몸도 가벼워지고 더 예뻐지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본사아미타불!


(본 법문은 큰 스님의 깊은 뜻을 그르치지 않도록 사투리 포함해 구어체 그대로 받아쓴 글로 어색한 부분도 있음을 감안하시기 바랍니다. - 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