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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마음의 고향

마음의 고향 제26집(1) 귀명삼보

 

 

마음의 고향 제26집(1)                                      


귀명삼보(歸命三寶)


지금 세상도 거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마는 부처님 당시에도 역시 거친 대중(大衆)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육군비구(六群比丘)라, 비구승(比丘僧) 가운데도 육군비구는 굉장히 거칠고 요새 말로 하면 깡패 중인 셈이지요. 비구승뿐만 아니라 비구니(比丘尼) 가운데도 육군비구니(六群比丘尼)라 왈패 같은 비구니가 있어서 큰스님들한테도 행패를 부리고는 했습니다.


그런 깡패 중 가운데도 차익비구(車匿比丘) 같은 비구가 가장 거친 사람이었겠지요. 누구 충고도 안 듣고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涅槃)에 드실 때에 아난(阿難)존자가 부처님한테 말씀드리기를 “차익비구 같은 그런 사람들이 행패를 부릴 때에 어떻게 제도 합니까? 어떻게 다스려야 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범단(梵檀)지법[묵빈(黙擯)·범법(梵法)]으로 다스려라.”


범단지법은 무엇인가하면 범천(梵天)사람들이, 범천은 색계(色界)에 있습니다. 우리는 욕계(欲界)에 사는데 색계에 범천이 있습니다. 색계는 욕계의 욕심(慾心)을 떠난 경계(境界)란 말씀입니다. 색계는 사람 같은 몸이 있는 것이 아니라 광명신(光明身)이라, 몸이 광명으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 사람들은 말을 하려고 생각만 하고 있으면, 생각하는 그것이 광명 따라서 그 사람한테로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통해집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다고 하면 입을 열지 않더라도 뜻이, 말이 통해집니다. 따라서 범단지법으로 다스리라는 말은, 말하지 않고서 무언(無言)중에 대치(對治)하라는 것입니다. 즉 다시 말씀드리면 상대(相對)를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공부할 때에 묵언(黙言)이 참 굉장히 중요합니다. 잡다한 말보다는 가만히 있으면 권위(權威)가 섭니다. 우리가 이런 회의(會議)를 집행할 때도 잘 모르면 가만히 절만 몇 번 하면 됩니다. 억지로 하려고 하면 좀 잘못되고 그러는 것이지요. 그렇기 그러면 위신(威信)도 서고 동시에 보다 더 우리 마음으로 깊이 느끼는 점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참선(參禪)공부를 해왔는데, 참선 공부 이것은 불법(佛法)의 정수(精髓)인 동시에 지름길인지라, 생략 생략해서 자꾸만 건너뛰어서 공부를 했습니다. 따라서 기본적인 공부를 별로 안했습니다.


본래 참선이라 하는 것은 사교입선(捨敎入禪)이라, 교(敎)를 배운 다음에, 길목을 안 다음에 한다는 것인데, 길목도 미처 모르는데 참선하는 공부만 역설(力說)을 해놓으니까, 더러 붕 뜨는 기분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가장 기본적인 문제, 가장 기본적인 문제는 언제나 필요합니다. 물론 사제법문(四諦法門),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 그런 법문이야 불교(佛敎)에 막 들어가면 다 아는 법문인데 새삼스럽게 뭘 하려고 하는가? 그러실는지 모르지만 부처님 법문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법화경(法華經)이나 무슨 경전이나 어려운 경전을 말씀할 때마다 이런 가장 쉬운 법문(法門)을 곁들여서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적어도 불자(佛子)라 하면 지금 말씀드리고자 하는 이런 기본적인 법문은 꼭 외워두어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 만이 그때그때 번뇌망상(煩惱妄想)이 나올 때 번뇌(煩惱)를 대치(對治)해 간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 불교가 중국(中國)을 거쳐 와서 중국물이 많이 들어 버렸습니다. 인도(印度)의 부처님당시에 순수(純粹)한 불법(佛法)이 그마만치 많이 흐려져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불교(佛敎)학자 분들은 근본불교(根本佛敎)가 무엇인가? 부처님 당시에 불법은 어떻게 돼있는 것인가? 이런 것을 상당히 연구를 많이 합니다. 특히 우리 한국은 중국 것이라고 하면 덮어놓고 좋다고 하는 사대근성 때문에, 원래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중국을 대국으로 섬기고 한국은 속국으로 주변국으로 자처해 와서, 그러한 우리 사대근성 때문에 중국에서 하는 식을 그대로 모방(模倣)해버렸던 것입니다.


이러한 데서 더러는 좋은 것들이 있으나 더러는 부처님 당시의 소중한 순수한 불법을 많이 흐리는 감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런 점을 생각해서, 부처님 당시는 어떠한 법을 주로 했던가를 알아야 되겠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나온 법은 모두가 굉장히 합리적입니다. 따라서 그런 점에서 순수 (純粹)한 불법, 부처님께서 직접 하신 불법, 부처님의 육성 그대로의 불법이 어떠한 것인가? 하는 것을 재확인하기 위해서 이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원래 포살일(布薩日)은 대체로 계행(戒行)을 주로 어떻게 지켜야 한다는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만, 계행이야 여러분들은 청정(淸淨)한 분들이니까 잘 지키실 것이고, 이런 것이 보다 더 나을 것 같아서 이 시간을 이렇게 했습니다.


※ 삼보: 불(佛)·법(法)·승(僧)


삼보(三寶)라,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이 보배 아닙니까. 보배 가운데서 제일 좋은 보배가 소위 셋입니다. 삼보 이것은 부처 불(佛)자, 보배 보(寶)자, 불보(佛寶)와, 법 법(法)자, 보배 보(寶)자, 법보(法寶)와, 또 중 승(僧)자, 보배 보(寶)자 승보(僧寶)와 세 가지가 가장 위대한 보배입니다.


금은보화나 그런 것은 유한 상대(有限相對)의 있다가 없어지는 무상(無常)한 것이고, 영생불멸(永生不滅)한 참다운 보배는, 부처라는 보배, 또는 부처의 법이라는 보배, 부처의 법을 그대로 실천하는 중, 중은 우리 출가한 분이나 부처님 법을 믿는 분들은 다 중입니다. 집안에 계시는 부처님 제자는 재가승(在家僧)이요, 우리 같은 출가한 스님들은 출가승(出家僧)입니다. 차이 뿐인 것이지 다 똑같은 중입니다. 아무튼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보배가 삼보라, 세 가지 보배인데 부처라는 보배, 부처의 법이라는 보배, 부처의 법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중, 승보 이것이 삼보입니다.


1.불보(佛寶)

[법신(法身)·보신(報身)·화신(化身)]


맨 처음에 부처라는 보배 이것은 어떠한 것인가?

이것은 법신(法身)·보신(報身)·화신(化身)입니다. 이런 것도 쉬운 것 같지만 굉장히 논의가 분분한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가장 간략하고 골수(骨髓)적인 것만 뽑았습니다. 물론 부처라는 보배, 이것이 앞으로 우리가 생명을 다해서 거기에 나아가고자 하는 부처님인지라 부처님에 대한 인식을 그르쳐 버리면 우리 공부도 막대한 손해를 봅니다. 우리는 부처님에 대한 견해(見解), 인식(認識)을 바로 해야 합니다.


대체로 부처란 무엇인가? 우리는 부처가 되기 위해서 신명(身命)을 바치고 있는 셈입니다만 부처가 무엇인가? 이 문제만 바르게 알면 공부도 순탄하고 나아갈 길도 평탄한 길로 나아갈 수가 있단 말씀입니다. 부처란 오직 말로도 표현도 못하고 글자로도 표현도 못하고 우리 생각으로 헤아리지도 못하고 말입니다. 어떻게도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인 것입니다. 그 무엇을 중생(衆生)이 잘 모르니까 이렇게 저렇게 말씀을 붙인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 중생이라는 것은 아는 것이 제한되어 있어서 별것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한되지 않은 절대적(絶對的)인 영원적(永遠的)인 것은 도저히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1)법신(法身)


따라서 무제한적(無制限的)인 영원적인 것, 언제나 변치 않는 부처님을 그때그때 중생이 알기 쉽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저렇게 말을 붙였단 말입니다. 그러한 부처님의 속성 가운데서 부처님의 본체(本體), 본모습보고 법신 (法身)그럽니다.


2)보신(報身)


부처님의 본체 본모습 가운데 들어있는 모든 공덕(功德)말입니다. 자비(慈悲)나 지혜(知慧)나 능력(能力)이나 안락스러운 행복(幸福)이나, 부처님의 법신(法身) 가운데 몸 가운데 들어있는 모든 공덕(功德) 보고 보신(報身) 그럽니다.


3)화신(化身)


거기에서 이루어지는 일체현상, 부처님께서 우리 중생을 제도하고자 해서 더러는 사람모양도 나타낼 수가 있는 것이고 더러는 짐승모양도 나타내게 할 수가 있는 것이고 말입니다. 그러한 것을 비롯해서 일체(一切) 현상계(現象界)가 화신(化身)인 것입니다.


* 아미타불(阿彌陀佛)


우리는 부처님을 생각할 때에 나의 밖에 나라는 것에 상대해서 부처가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와 너와 모두를 다 포함해서 천지우주(天地宇宙)가 바로 부처님입니다. 이것을 똑바로 우리가 알아야 만이 거기에서 혼돈(混沌)을 느끼지 않습니다. 나와 너를 포함해서 천지우주가 바로 부처님의 하나의 덩어리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부처님인데, 부처님의 몸, 부처님의 전체 몸 이것 보고 법신(法身)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부처님 가운데 들어있는 모든 공덕, 모든 기능(機能)이나 자비(慈悲)나 지혜(智慧)나 그러한 것보고 보신(報身) 그러는 것이고, 거기에서 이루어지는 나나 너나 천지(天地) 일체만물을 가리켜서 화신(化身)은 따로 있는 것인가? 따로 있지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몸인 것입니다. 법신 가운데 보신·화신이 포함되어 있고, 또한 동시에 화신 가운데 법신·보신이 들어 있는 것이고, 보신 가운데 법신·화신이 들어 있고, 이것이 하나입니다.


다만 아까 말씀처럼 전체를 한 번에 표현 할 때는 법신 그러는 것이고, 부처님 가운데 들어있는 공덕을 의미할 때는 보신 그러는 것이고, 현상적(現象的)으로 우주만유(宇宙萬有)를 나투고 일체모두를 생성하는 그런 면에서는 화신 그러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법신은 체(體)라고 말하고, 보신은 상(相)이라고 말하고, 즉 말하자면 일체 공덕상을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또 화신은 용(用), 활용(活用) 이것은 활동한단 말입니다.


이러한 것이 둘이 아니고 셋이 아니니까 합해서 말할 때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비단 아미타불이라고 하는 부처님뿐만 아니라 어떤 부처님이나 삼신(三身)을 겸해 있습니다. 그러면 가령 컵 이것은 무엇인가?  천지우주(天地宇宙)가 바로 부처일 바에는 컵도 부처 가운데 들어 있어야 합니다.  강도나 누구나 티끌 하나도 부처 가운데 안 들어 있으면 참다운 부처가 못됩니다.  한 물건도 버릴 것도 없고 한 물건도 취할 것도 없습니다.  컵 이것도 모양은 컵이지만은 저 깊이 들어가면 끄트머리는 보신·법신이 나옵니다.  화신에 있어서 컵이요, 마이크요 뭣이요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내용에 있어서는 똑같이 보신·법신입니다.  개미 한 마리나 독사 한 마리나, 독사도 역시 파 들어가면 그 본질(本質)은 역시 보신·법신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문제가 근본적(根本的)으로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불타관(佛陀觀)


따라서 우리는 불타관(佛陀觀),부처가 무엇인가? 불관(佛觀)하는 이와 같이 우리 영상에다가 못 박아 두어야 합니다. 나까지 포함해서 너까지 포함해서 천지우주가 바로 부처란 말입니다.  부처의 몸을 한 번에 말할 때 법신인 것이고 법신 가운데 들어있는 모든 공덕이 보신인 것이고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일체 현상이 화신이란 말입니다.


2.법보(法寶)

〔사제법(四諦法)·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 육바라밀법(六波羅密法)〕


법보(法寶)라, 부처님의 법이 소중하다 하더라도 부처님 법을 어떻게 깨달아야 할 것인가? 부처를 찾는 가르침이 법보입니다.  어떻게 부처를 찾아야 할 것인가?  내가 원래 부처고 천지우주의 본바탕이 원래 부처라 하더라도 부처를 못 찾으면 결국은 큰 가치(價値)가 없습니다. 우리 중생(衆生)은 이러한 화신(化身)경계에서 굳어버렸으니까, 우리는 굳어 있습니다.   마치 얼음처럼 굳어버렸단 말입니다.  우리는 번뇌(煩惱)에 경직되어서 굳어 버렸습니다.  따라서 녹여서 부처가 되어야 할 것인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부처님의 법보, 법이 필요합니다.


부처님 법은 우리는 다 들어서 아는 바와 같이 팔만사천법문(八萬四千法門)이 있어서 끝도 갓도 없이 굉장히 복잡한 법문입니다만 이러한 법을 간추려서 이야기할 때는 사제(四諦)법문, 십이인연(十二因緣)법문, 육바라밀(六波羅密)법문 그럽니다. 물론 이외에도 말을 많이 하고 있으나 대체로는 세 가지 범주 가운데에 부처님 법은 거의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제법문(四諦法門)이라, 이것은 성문승(聲聞乘)이라 하는, 성문승은 가르침을 따라서 마치 망아지가 워낭소리를 듣고 가듯이 말입니다.  남의 말 따라서 공부하는 그러한 근기가 성문승인 것이고, 그 다음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이것은 연각승(緣覺乘)이라, 자기 스스로 연구(硏究)해서 닦는 근기가 연각(緣覺)이란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십이인연법이란 법을 닦아서 공부를 하고, 육바라밀(六波羅密)이라, 육도(六度)라고도 말합니다만 보살(菩薩)근기, 자기도 닦고 남도 해탈(解脫)시키고자 하는 대근기(大根機)가 닦는 법이 육바라밀인 셈이지요.  그러나 이것은 일차 구분했을 뿐이고 절절히 한계가 지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보살도 역시 사제법문이 필요하고, 십이인연법도 필요하고, 성문도 역시 육바라밀법이 필요하고, 이와 같이 원융(圓融)한 것입니다.


일차 우선 구분한 것이자 원칙은 그와 같이 한계가 있어서 너는 뭘 해라 너는 뭐다 그와 같이 할 것은 아닙니다. 다 필요한 것인데 사제법문은 남의 말 듣고서 겨우 알 수 있는 그릇,그런 그릇이 사제법문(四諦法門)을 하는 것이고, 사색적(思索的)으로 자기 연구를 많이 하는 그릇은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을 연구하고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는 것입니다.


1)사제법문

〔고(苦)·집(集)·멸(滅)·도(道)〕


그런데 우선 사제법문이라, 사제법문 이것은 불교의 총강령(總綱領) 같은 법입니다.  사제법문은 어떠한 경전(經典)을 보든지 간에 사제법문의 골자(骨子)가 다 숨어 있습니다.  뚜렷이 사제법문인 고(苦)요, 집(集)이요 ,멸(滅)이요, 도(道)요, 이런 말을 않는다 하더라도 내용줄거리는 사제법문의 내용이 다 스며들어 있습니다. 어째 그런가 하면은 사제법문은 우리 사바세계(娑婆世界)의 중생계(衆生界)의 모든고난 (苦難)을 바로 인식하고 또한 동시에 그런 고난을 해탈(解脫)하기 위해서 고난을 벗어나기 위해서 가지가지의 행동이나 도를 닦는단 말입니다.


중생계의 고난을 떠나서 이고득락(離苦得樂)이라, 참다운 행복(幸福)을 구하는 길잡이를 말하는 법문이기 때문에 어떠한 무슨 경(經)이나 가사 〔법화경(法華經)〕, 〔화엄경(華嚴經)은 부처님 말씀가운데 결론(結論)같은 법문이지만 그런 법문 가운데도 역시 줄거리는 골격은 모두가 사제법문이 들어있단 말입니다. 사제법문은 고(苦)와 집(集)과 멸(滅)과 도(道)를 말합니다.  이것은 사체(四諦)·사제(四諦) 두 가지로 발음을 합니다.  글자 본뜻은 진실할 체(諦)자, 사체라고 합니다만 보통 음편으로 해서 사제라고하나 지금 사전에는 사체라고 나왔으니까 우리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지요.  사제·사체 이것은 똑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아무튼 고·집·멸·도 네 가지가 변동할 수가 없는 진리(眞理)기 때문에 우리 중생이 아무렇게나 만든 것이 아니라 성자(聖者)가 만든 변동할 수 없는 진리기 때문에 사제법문(四諦法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고제(苦諦)



그러면 고(苦)는 무엇인가?

이것은 미(迷)의, 우리가 번뇌(煩惱)에 때 묻은 미혹(迷惑)된 미(迷)의 결과로서 육도(六道),육도 이것은 지옥(地獄)·아귀(餓鬼)·축생(畜生)·수라(修羅)·인간(人間)·천상(天上),우리 범부(凡夫)가 윤회(輪回)하는 곳이 육도(六道) 아닙니까. 육도의 고보(苦報)란 말입니다. 고(苦)·집(集)·멸(滅)·도(道)·의 고(苦) 이것은 고제(苦諦)라, 우리가 번뇌를 많이 지어서 번뇌(煩惱) 때문에 나쁜 행동을 많이 해가지고서 번뇌의 과보(果報)로 해서 받는 지옥(地獄)·아귀(餓鬼)·축생(畜生)·수라(修羅)·인간(人間)·천상(天上),육도의 과보(果報)가 소위 고(苦)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도 역시 육도 가운데 하나가 되어 있는 관계상, 인간도 따지고 보면 고가 충만해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생개고(人生皆苦)라, 인생은 개고(皆苦)라, 다 개(皆)자,고통 고(苦)자, 인생은 모두가 다 고통(苦痛)이란 말입니다. 이런 말을 지금 젊은 사람들은 하도 살기가 편리하니까 실감 있게 안 느낍니다만 따지고 보면 인생(人生)은 바로 고통뿐인 것입니다.


우선 병들고 늙고 죽는 것을 우리가 면치 못합니다.  날 때 또한 낳는 고통 역시 면치 못합니다.  낳고 병들고 늙고 죽고 하는 그런 고생 말고도 구해서 얻지 못하는 고생이 얼마나 많습니까. 욕심은 많은데 구해서 얻지를 못한단 말입니다. 또는 보기 싫은 사람과 만나는 고통도 있는 것이고 말입니다.  아무리 친한 분도 종국은 헤어져야하는 것이고, 우리 몸뚱이는 지(地)·수(水)·화(火)·풍(風) 사대(四大)의 각 원소(元素)가 모여 놔서 사대가 조금만 조화(調和)가 안 되면 그때는 아프단 말입니다.


따지고 보면 행복(幸福)스럽다고 하는 것은 잘 못 봐서 그러는 것이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인생은 결국 고통뿐이란 말입니다.  인생을 고통뿐이라고 생각해서 살면 별로 큰 고난을 안 받지만, 인생은 안락(安樂)한 것이다. 이렇게 느끼고 살려고 하면 그때는 고통이 앞으로 중첩(重疊)해 온단 말입니다. 성자(聖者)가 보는 바른 견해(見解)는 인생은 고다, 인생은 괴로움이다. 이것이란 말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생로병사(生老病死)를 주로 한 낳고, 늙고, 병들고, 죽고 하는 그러한 고통, 구해서 얻지 못하는 고통, 만나고 싶은 사람과 못 만나는 고통, 보기 싫은 사람과 만나는 고통, 자기 몸뚱이를 구성한 여러 가지 요소가 치성(熾盛)해서 몸이 괴로운 고통, 이런 등등의 고통이 한도 끝도 없이 많습니다.


*집제(집제)


이러한 것은 원인이 어디가 있는가 하면 미(迷)의 과보(果報)라, 우리가 진리(眞理)를 몰라서 미혹(迷惑)된 결과로 해서 받는단 말입니다. 지옥이나 아귀나 축생이나 아수라나 인간이나 천상이나 모두가 다 우리가 애초에 미혹되어서 진리를 몰라서 헤매기 때문에 거기에서 오는 과보로 해서 고통을 받는단 말입니다. 이러한 고통의 원인이 집(集)입니다.  모을 집(集)자 말입니다.  고보(苦報)를 짓게 하는 우리 중생(衆生)의 괴로운 보(報)를 모아서 일으키게 하는 원인으로서 탐(貪)·진(嗔)·치(癡) 등의 번뇌(煩惱)및 선악(善惡)의 죄업(罪業)이란 말입니다.


우리 인생은 고통뿐인데 고통의 원인이 집인데, 집 이것은 무엇인가 하면은 우리의 탐(貪)·진(嗔)·치(癡)〈탐심(貪心),진심(嗔心),치심(癡心)〉이나, 거기에서 일어나는 선(善)이나 악(惡)이나 그런 행동이란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 고통의 원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 사회가 혼란스러운 것이 여러 가지 이유를, 요즘 신문들 보면 여당에서는 야당만 여러모로 질타하고 비방하고, 또 야당 그 분들 말씀 들어보면 여당 가운데는 좋은 사람들이 한사람도 없어 보입니다.  인생의 모든 혼란(混亂)이나 원인들이 상대편(相對便)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원인이 모두가 탐(貪)·진(嗔)·치(癡) 삼독심(三毒心)에 있습니다.


인간의 탐심(貪心),진심(嗔心),치심(癡心) 이것이 인생고(人生苦)의 원인입니다.  바로 원수지요.  인생고(人生苦)나 모든 사회혼란(社會混亂)의 원인이 어디가 있는가 하면은 우리 인생 스스로의 탐심이나 진심이나 치심이나 또는 여기에서 일어나는 선악의 행위가 인생고나 사회혼란의 원인이란 말입니다. 우리 불교(佛敎)인들은 명확히 느껴야 합니다.  불교인인 정치인도 이상한 소리를 합니다만 그건 잘 모르는 소리입니다.  뭐라 해도 역시 부처님 법도로 해서 이와 같이 인생고의 원인을 똑바로 봐야 합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내 개인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일체(一切) 사회현상(社會現象)의 모든 고(苦)의 원인(原因), 이것은 역시 인간의 근본번뇌(根本煩惱)인 탐심, 진심, 치심과 거기에서 일어나는 선악(善惡)의 행위(行爲)란 말입니다.


*멸제(멸제)


만약 우리 인간이 이와 같이 고통과 고통의 원인인 집만 있다고 하면 인생은 참 각박하고 살기가 팍팍할 것입니다.  인생은 차라리 살 필요가 그때는 없습니다.  다행히도 인간은 고생만 연속하는 고제만 있는 것이 아니라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을 떠나 버리면 참다운 영생(永生)의 행복이 있단 말입니다. 영원히 행복한 자리 이것이 멸(滅)이란 말입니다.


불교(佛敎)가 불교인 점은, 불교가 다른 가르침이나 다른 과학(科學)이나 그런 것하고 다른 점은 무엇인가 하면은 다른 과학이나 그런 것은 뱅뱅 도는 윤회 밖에는 없습니다만 불교는 다 떠나버려서 영생(永生)의 행복(幸福)인 소위 멸(滅)이 있단 말입니다. 멸(滅)을 딱 잡아야만 비로소 하나의 수행자(修行者)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멸 이것은 오(悟) 깨달음의 결과입니다.


혹업(惑業)을 혹(惑)이것은 미혹할 혹(惑)자 번뇌(煩惱)를 말합니다.  업(業) 이것은 번뇌(煩惱)에 따라서 행동하는 행위(行爲)를 말한 것입니다.  번뇌와 행위를 다 멸하고서 생사(生死)를 초월(超越)한 즉 다시 말하면 육도(六道)라 지옥,아귀,축생,수라,인간,천상,그와 같이 뱅뱅 도는 생사(生死)를 초월(超越)한단 말입니다. 초월해버리면 열반(涅槃)의 경계(境界)에 드는 것이지요.  열반 이것은 영생을 말합니다. 영원히 죽지 않고 항시 행복(幸福)한 경계가 열반이고 열반 이것이 바로 멸(滅)입니다.


*도제(道諦)〔팔정도(八正道)〕


우리 불교(佛敎)는 대승(大乘)이나 소승(小乘)이나 모두가 다 멸(滅)로 가는, 멸을 증명(證明)하는 것이 우리 불교(佛敎)입니다. 그래서 멸을 증명하는 길, 영생으로 가는 길 이것이 길 도(道)자, 도란 말입니다. 깨달음의 원인으로서 열반에 통하는 도를 팔정도(八正道)라 합니다. 팔정도는 합리적(合理的)이고, 체계적(體系的)이고 어느 때나 우리가 언급〔음미]해야 하는 소중한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지금 더러는 팔정도를 무시하고서 엉뚱하게 공부하는 분도 더러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배반한 셈이고 공부가 될래야 될 수가 없습니다.


정견(정견)


팔정도는 무엇인가? 정견(正見)이라, 바른 견해(見解)란 말입니다. 바른 견해는 무엇인가하면은 인생을 고(苦)와 집(集)과 멸(滅)과 도(道)와 이와 같이 본단 말입니다. 우리가 고생 하는 것은 고와 집 때문에, 탐·진·치 삼독심(三毒心)과 거기에서 일어나는 행동 때문에 고통을 받는단 말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분명히 느끼고 또한 동시에 벗어나기 위해서는 영생(永生)의 행복(幸福)으로 가는 멸(滅)을 증해야 할 것인데, 가기 위해서는 도를 즉 말하자면 팔정도를 닦아야 합니다.


무슨 수련법이나 팔정도 정신이 들어 있어야 비로소 정도(正道)입니다. 그러기에 팔정도 아닙니까. 팔정도 정신이 안 들어 있으면 정도가 못됩니다. 팔정도는 무엇인가? 이것은 바른 견해(見解),바른 견해는 이와 같이 우리 고생(苦生)의 원인은 집(集)이요. 또한 우리 인간에게는 반드시 영생으로 가는 행복이 있는데 영생의 행복으로 가는 길이 도(道)요. 이와 같이 느끼는 견해 이것이 정견(正見)입니다.


정사유(正思惟)


이렇게 느꼈다 하더라도 우리 중생은 바쁘고 업장(業障)이 무거워서 그냥 망각해 버립니다. 그냥 망각해 버리니까 자꾸만 그때그때 생각해서, 생각하고 생각해서 사제법문(四諦法門)을 인생 깊게 가슴에 못 박아 둔단 말입니다. 이것이 정사유(正思惟)라, 생각한단 말입니다.  깊이, 우리가 사제법문을 뚜렷이 안다고 할 때는 함부로 남을 비방(誹謗)도 못합니다.  내내야 나쁜 것이나 괴로운 것은 탐(貪)·진(嗔)·치(癡) 삼독심(三毒心)이지 딴 원수가 아니니까 말입니다.


우리가 다 아는 문제입니다만 가장 불행한 사람은 남의 좋은 점을 못 봅니다.  남의 나쁜 점은 안보고 남의 좋은 점만 봅니다. 그래서 공자님 말씀도 군자(君子)는 구제기(求諸己)하고 소인(小人)은 구제인(求諸人)이라, 군자는 모든 허물을 자기한테로 돌리고 소인은 모든 허물을 남한테만 추궁합니다.  이것에 소인과 군자의 차이가 있습니다.


정어(正語)


우리는 사회나 자기 개인 가정이나 모든 괴로움의 원인을 모두를 다 자기의 삼독심(三毒心)으로 봐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런다고 생각할 때는 바른말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바른말을 말입니다. 맨 남만 추궁하고 남 험담만 하는 것은 바른말이 못 되겠지요. 사회비평(社會批評) 할 때도 사회비평의 근저를 항시 고집멸도(苦集滅道)에다 둔다고 하면은 바른 비평을 할 수가 있겠지요.


정업(正業)


정업(정업)이라, 이것은 바른 행위란 말입니다.

바른 생각하고 바른 말하고 우리 몸으로 바른 행동하고 이것이 정업입니다.


정명(正命)


그 다음에 정명(正命)이라, 바른 생활입니다. 만부득이 할 때는 모르거니와 고기잡이나 도한(屠漢)이나 남의 생명을 잡는 그러한 직업은 안해야 합니다. 또 가능하면 술파는 것도 될 수 있는 대로 안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바른생활, 바른 생활을 해야 한단 말입니다. 이것이 정명입니다.


정정진(正精進)


그다음은 정정진(正精進)이라, 이와 같이 바른 생활을, 바른 참선(參禪)이나 바른 말이나 이런 것을 쉬지 않고 애쓰고 한단 말입니다. 이것이 정정진입니다. 즉 앞에 있는 정견(正見),정사유(正思惟),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 이러한 것과 뒤에 있는 정념(正念),정정(正定)을 애쓰고 하는 것이 정정진입니다.


정념(正念)

그 다음에 정념(正念)이라, 이것도 역시 참다운 진리(眞理)만 생각하고 다른 생각을 않는단 말입니다.



정정(正定)


그다음은 정정(正定)이라, 이것도 역시 그냥 외도(外道)나 하는 참선모양으로 어떤 신통(神通)이나 하려고 애쓰고 또는 무슨 재주나 부리려 하고 이와 같은 목적으로 하는 참선은 정정이 못되는 것입니다. 해탈(解脫)하기 위해서 영생열반(永生涅盤)하기 위해서 하는 참선만이 참다운 참선인 것입니다.

이것이 정정이지요. 이상 든 것이 사제법문(四諦法門)입니다.


*초전법륜(初轉法輪)


부처님께서 보리수하(菩提樹下)에서 성도(成道)하신 뒤에 맨 처음에 녹야원(鹿野苑)가셔서 다섯 비구(比丘)한테 최초에 설한 법문, 부처님께서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 맨 처음에 중생(衆生)을 위해서 나투신 법문(法門) 이것이 사제법문(四諦法門)입니다. 그때 상황을 그린 경(經)을 보면 부처님께서 다섯 비구한테 하신 말씀이 ‘그대들 내 말 들어라! 내 이제 그대들에게 불사(不死)의 길을, 죽지 않는 영생(永生)의 길을 설하노라!’ 영원히 죽지 않는 영생을 훤히 내다보는 부처님께서 얼마나 자신 있는 태도로 해서 과거에 자기하고 같이 공부했던 도반들한테 자신 있게 말할 것입니까.


아직 35세 밖에 안 되는 젊은이가 말입니다.  부처님이 그때 35세 밖에 안 됩니다.  ‘그대들 내말을 들어라! 내 이제 그대들한테 영생의 길을 말하노라!

영생의 길을 말한 것이 사제법문입니다.  우리는 영생의 길을 분명히 느끼고서 이러한 팔정도(八正道)로 해서 영생(永生)의 행복(幸福), 멸(滅)을 증명(證明)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더디 가고 빨리 가는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기어코 가야 하는 것입니다.


2)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


그 다음은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이라 아까 말씀드린 대로 연각승(緣覺乘), 즉 말하자면 사색(思索)을 많이 하는 연각승(緣覺乘)들이 닦는 법이 십이인연법이란 말입니다. 허나 이것은 그런 사람들뿐만 아니라 부처님께서 보리수하(菩提樹下)에서 공부하실 때에 말씀하신 골수(骨髓)법문이 십이인연법입니다.  그와 같이 이것이 중요한 법입니다.


그런 법인데도 그런 법을 저만치 밑에 두는 것이 애석한 상황입니다만 우리는 재인식을 해야 합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부처님께서 보리수하에서 공부하실 때에 하신 법문이 십이인연법입니다.  요즘 나온 책들을 보면 십이인연법을 자기 나름대로 아무렇게나 풀이한 것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무책임한 것입니다.


역시 부처님법문이라는 것은 정통조사(正統祖師)가 ‘이렇게 풀이하라’ 이런 표준(標準)이 있습니다. 그런데 보기 싫으니까 자기 나름대로 아무렇게나 풀이한단 말입니다. 우리는 그런 점을 주의해서, 지금 여기 있는 법문을 제가 많이 안다는 것이 아니라 정통적으로 승가(僧家)에서 우리 불가(佛家)에서 내려오는 정통법문 가운데서 그때그때 따온 것이라서 다른 오류는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열두 가지로 해서 인연(因緣) 따라서 태어나고 죽어가고 하는 법문인지라, 딴 말로 하면은 십이연기(十二緣起)라, 또는 인연관(因緣觀)이라, 지불관(支佛觀)이라, 이렇게도 말들 합니다. 세밀한 풀이는 전문적인 것인지라 생략하겠습니다. 다만 아무튼 우리 중생이 낳고 죽고 하는 인연을 이렇게 저렇게 말씀했단 말입니다. 따라서 이것만 가지고도 성불(成佛)이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하실 정도니까 말입니다.


*무명(無明)


맨 처음에 무명(無明)이라, 십이인연법에서 시초(始初)가 무명이란 말입니다. 이것은 없을 무(無)자, 밝을 명(明)자, 진리(眞理)를 모른단 말입니다. 무지(無智)를 말한 것이지요. 무지나 무명이나 똑같은 뜻입니다. 무지란 말입니다. 인생고(人生苦)라는 것은 무지에서 옵니다. 무지해서 고(苦)의 원인도 모른단 말입니다. 이것이 무명인데, 무영은 과거세(過去世)의 무시번뇌(無始煩惱)란 말입니다.  과거세에 처음도 없는, 비롯이 없는 번뇌란 말입니다.


어째서 천지우주(天地宇宙)가 부처뿐인데 번뇌(煩惱)가 왜 생기는가?  이런 의심이 납니다. 허나 본래가 부처이건만 천체(天體)가 바꾸어질 때에 <주:성(成)·주(住)·괴(壞)·공(空)>,하나의 존재(存在)가 생기면 ‘훤히 밝은 광명체(光明體)인 마음’을 가린단 말입니다. 마음을 가리면 전체(全體)를 못 본단 말입니다. 전체를 못 보면 생각이 나오지요. 분별심(分別心)이 말입니다.


전체가 다 부처가 되어버리고 전체가 다 부처님임을 알 때는 분별심을 낼 수가 없습니다. 허나 천체(天體)가 순환(循環)할 때에 딱 무엇이 가려버리면 그때는 전체를 바로 못 본단 말입니다. 전체를 바로 못 보니까 시야비야 좋다 궂다 분별심(分別心)을 내거든요.  그것이 무명(無明)의 시초(始初)입니다.


지금 우리가 비록 성불(成佛)은 미처 못 한다 하더라도 저 색계(色界)에 올라가서 2선천 이상 올라가면 신일상일(身一想一)이라, 몸도 똑같고 마음도 똑같습니다.  즉 말하자면 이념(理念)도 똑같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몸도 각각이고 마음도 각각이니까 서로 다투고 합니다만 저 위에 올라가면 몸은 다 광명(光明)의 몸이요. 마음도 역시 이념(理念)도 똑같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서는 싸울 필요가 없단 말입니다.


더 올라가면 더 올라갈수록 천지(天地)는 하나로 해서 다 통일이 되어버린단 말입니다. 허나 앞서 말씀과 같이 순환과정(循環過程)에서 인과과정(因果過程)에서 하나의 존재가 무엇이 가려지면 그때는 바로 못 보니까 거기에서 무엇인가 좋다 궂다 무엇이다, 이렇게 나올 때에 이것이 무명(無明)이라, 이것이 소위 무지(無智)란 말입니다.<주:이 부분은 큰스님 육성을 직접 들어 보시고 다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기신론(起信論)에서는 이렇게 말씀되어 있습니다. 부달일법계고(不達一法界故),아니불(不)자, 달할달(達)자 말입니다. 청정미묘(淸淨微妙)한 천지우주(天地宇宙)가 하나의 법계(法界)임을 달하지 못하지 때문에 홀연염기몀위무명(忽然念起名爲無明)이라, 문득 일어나는 생각이 무명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천지우주가 하나의 부처세계임을 알아버리면 무명이 나올 수가 없지요.  그러나 천지우주가 하나의 부처세계임을 모른단 말입니다.


부달일법계고(不達一法界故)! 천지우주가 하나의 법계임을 미처 달(達)하지 못하기 때문에 홀연염기(忽然念起)라. 문득 일어나는 생각 이것이 무명(無明)이란 말입니다. 너무나 근본적인데 천착(穿鑿)하면 복잡하니까 설렁설렁 넘어갑니다만 진리(眞理)를 바로 못 보는 무지(無智)가 무명(無明)이란 말입니다.


소위 과거세의 무시이래(無始以來)의, 과거 전생(前生)뿐만 아니라 몇 생, 명 만생 전까지 소급해 올라가서 시초(始初)부터서 내려온 한 생각, 진리(眞理)를 모르는 번뇌(煩惱)를 말하는 것이지요.


*행(행)


이러므로 해서 행(行)이 있습니다. 무명이 없으면 행이 있을 리가 없을 것인데 무명 따라서 옳지 못한 행이 있단 말입니다. 과거세의 번뇌에 의하여 작(作)한, 지은 선악(善惡)의 행업(行業)이란 말입니다. 가령 우리가 죽어서 영혼(靈魂)으로 있을 때에 영혼이 총명해서 진리를 안다고 그러면 어느 부모의 연(緣) 만난다고 하더라도 부모의 연(緣) 따라서 갈수가 없단 말입니다.


갑이라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갑이라는 사람이 태어날 때는 마땅히 부모의 연 따라서 태어났겠지요. 그런데 갑이라는 사람의 영혼이 헤매다가 부모의 연 만날 때에 영혼의 무영이, 무지가 아니면 자기 부모의 연 따라서 갈 수가 없단 말입니다. 불경(佛經)에서 보면 영혼이 헤매다가 부모의 연 따라서 가는 그 대목 같은 것이 아주 미묘하니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우리 불교(佛敎)는 그와 같이 섬세하고 소중한 법문이 있단 말입니다. 아무튼 그런 무명이, 무영은 과거세부터서 끝도 갓도 없이 이어 내려온 번뇌(煩惱)아닙니까만 우리가 몇 만생 중생으로 헤맬 때는 마땅히 몇 만생동안 무명을 지니고 왔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무명으로 해서 행위가 있습니다. 이것은 과거세의 번뇌에 의해서 현재에 작한 선악의 행업이란 말입니다.


*식(識)


식(識)이라, 이것은 알 식(識)자 식 아닙니까. 과거세(過去世)의 업(業)에 의하여 받은 현세(現世)의 수태일념(受胎一念)이라, 이 법문은 우리가 부모의 연 따라서 어머니 태(胎)에 들어가는 한 순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명으로, 진리를 모르는 영혼으로 헤매다가 부모의 연 따라서 오는 그때가 행(行)인 것이고, 부모의 연 따라서 어머니한테 딱 붙어서 태 안에 들어오는 그때가 식이란 말입니다. 태 안에 딱 들어오는 일념(一念), 과거세의 업에 의해서 받은 현세 수태의, 현세(現世) 태(胎)로 받는 한 생각 이것이 맨 처음에 어머니한테 들어오는 이때는 태몽(胎夢)이나 그런 것이 있겠지요. 아마, 어머니 태에 막 들어오는 그 순간 이것이 식에 해당합니다.


우리는 누구나가 다 이 과정을 거쳐 왔습니다. 무명에 있다가 무영으로 해서 ‘자기의 어두운 무명’ ‘부모의 어두운 무명’ 이것이 연 따라서 합해져서 행으로 해서 하나의 생명체(生命體)인 식이 어머니의 태 안에 들어왔단 말입니다.


*명색(名色)

그다음에 명색(名色)이라, 날이 가고 달이 가면 태 안에서 자라겠지요. 태중에서 점차로 몸과 마음이 발육하는 자리로서, 명(名)은 바로 마음 법을 말하는 것이고, 색(色) 이것은 우리 눈이나 코나 육체적인 것을 말한단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태안에서 처음에는 식이라는 한 생각뿐이던 것인데 차근차근 그것이 자라서 마음이 생기고 마음이라는 것이 구분되고 눈이나 코나 윤곽을 잡는단 말입니다. 이것이 명색입니다. 명은 마음에 해당하고 색은 육체라.


*육처(六處)


육처(六處)는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눈·귀·코·입·몸·뜻, 이것은 육근을 말하는 것인데 육근이 다 갖추어져서 차차 태 안에서 나오고자 하는 그런 자리가 육처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만삭이 되어서 태 안에서 태어날 순간까지 왔단 말입니다. 이것이 육처(六處)에 해당합니다.



*촉(觸)


그다음은 촉(觸)이라, 이제는 태어나서 두 살 세 살 때 사물(事物)을 대하여, 아직 고락(苦樂) 괴롭고 즐겁다는 것을 식별(識別)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여러 가지 물질을 대하여 다만 만지고 싶어 한단 말입니다. 꼬마들이 이것저것 만지고 싶어 하지요. 뜨거움이나 뭣이나 모르면서 말입니다. 촉 이것은 태어나서 두 살이나 세 살이나 이것저것 만지고자 하는 어린애 단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수(受)


그 다음은 수(受)라, 육 칠세 이후 사물에 대하여 고락(고락)을, 괴로움과 즐거움을 느낀단 말입니다. 고락을 식별(識別)하고 감수(感受)하는 그런 때가 수(受)란 말씀입니다.


*애(愛)


그다음은 애(愛)라, 사랑 애(愛)자 말입니다. 이제는 더 자라서 나이가 십사오세가 되면 강성한 애욕(愛慾)을 느낀단 말입니다. 십사오세 이후에 강성한 애욕을 느끼는 그때가 애에 해당합니다.


*취(取)


애욕 때문에 성인 이후에 애욕이 치성해서 여러 경계에서 나아가서 취하려고 합니다. 물건도 자기소유로 만들려고 하고 이성간도 마찬가지고 말입니다. 이것이 취(取)에 해당합니다.


*유(有)


이렇게 함으로 해서 제십(第十) 유(有)라, 애·취의 그러한 애욕이나 우리 것을 만들고 싶다는 취(取)의, 하나의 번뇌[혹(惑)]에 따라서 여러 가지 업(業)을 짓고 당래(當來)의 결과를 받는 업[유(有)]을 만들어 버린단 말입니다. 따라서 유(有) 이것은 애나 취나 애욕이나 욕구심이나 이런 걸로 해서 업을 많이 지어서, 업을 많이 지으면 미래에 과보(果報)를 받겠지요. 이러한 업을 많이 지어서 미래에 다시 받는 원인되는 업 이것이 유에 해당 합니다.


*생(生)


그다음에 생(生)이라, 현재의 업에 따라서 미래의 생을 받는 자리란 말입니다.


*노사(老死)


노사(老死)라, 미래에 늙어서 죽는 그 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본다고 할 때에 아까 말한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을 잘 외워서, 나라는 존재가 대체 어디에서 왔는가?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허망(虛妄)한 것인가?  내 몸이 과연 과거(過去)나 미래(未來)나 항시 있는 것인가? 이런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법문인 것입니다.


죽고 태어나고 하는 것은 식·명색·육처·촉·수, 과거세(過去世)의 지은 무명(無明)과 업(業) 따라서 금생(今生)에 받는 하나의 결과(結果)를 말합니다. 또한 애욕(愛慾)과 취(取)와 유(有) 이것은 현재 받은 몸으로 해서 번뇌(煩惱)를 일으키고 업(業)을 지어서 다시 미래에 받을 원인을 만듭니다. 이와 같이 해서 다시 미래에 생(生)과 죽고 사는 과보를 낳는단 말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과거(過去)·현재(現在)·미래(未來), 삼세(三世)를 통한 법문인 것입니다. 지금 나라고 하더라도 나라는 것이 항시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무명 중생이 어쩌다가 업 따라서 연 따라서 비로소 엄마의 태내에 딱 붙어 왔단 말입니다. 과거의 몸이나 지금 몸이 똑같지가 않습니다. 무지한 사람들은 죽어도 역시 지금 몸이 그대로 태어난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생명이 미래에 죽지는 않지만 미래에 그대로 연장은 되지만 이와 같은 몸으로는 연장이 안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 법문 가운데서 변견(邊見) 가운데서 단견(斷見)이라, 내가 죽어지면 내 생명은 이것뿐이다. 내가 죽어도 이 모양대로 태어난다. 이것보고 상견(常見)그럽니다. 우리는 이런 법문으로 해서 내 생명이 이것뿐이다. 또한 동시에 내 생명이 죽어도 이와 같이 태어난다. 그런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이것을 추구할 때 과거에 비롯이 없고 미래에 끄트머리가 없는 생사(生死)를 유랑(流浪)한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이와 같이 뱅뱅 도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제법문(四諦法門)에서 배운 팔정도(八正道)를 영생(永生)을 위해서 행동으로 닦지 않으면 언제나 이와 같이 뱅뱅 도는 것입니다. 이러한 무명(無明)을 건지기 위해서 영혼(靈魂)도 천도(薦度)하는 것이지요. 다 벗어버리고 극락세계(極樂世界)로 가라고 말입니다. 사제법문, 십이인연법 꼭 명심을 해서 외워두고서 그때그때 우리 공부에 유용하게 활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중간 녹음 소실>


3)육바라밀(六波羅密)


상구보리(上求報提)하고 하화중생(下化衆生)이라, 자기도 닦고 남도 닦게 해서 성불(成佛)의 길로 나아가게 하는 육도(六度).계(戒)로써 마음을 산란스럽게 하지 않는 것이 바른 지혜(智慧)말입니다. 참다운 지혜는 모든 것을 다 알아버린단 말입니다.  이것보고 어려운 말로해서 일체종지(一切種智)라, 이렇게 말씀도 합니다.


*보시(布施)바라밀


아무튼 이것도 베푸는 보시(布施)입니다. 재물로 베푸는 재시(財施)가 있고 법문으로 베푸는 법시(法施)가 있고 그 다음은 무외시(無畏施)라, 무외시는 중생의 두려움을 없앤단 말입니다. 어느 스님법문에 이런 말씀을 들었습니다. ‘두려움 없이 베푼다’ 그렇게 말씀한 대목이 있습니다만 그 말씀은 조금 잘못 해석을 하신 것입니다. 두려움 없이 베푸는 것이 아니라 중생의 두려움을 없앤단 말입니다. 이것은 한계를 구분해서 알아두셔야 됩니다. 나중에 어느 큰스님 법문을 보신다고 할 때에 잘못 생각 할까봐서 말씀드리는 것인데 방금 말씀처럼 중생의 두려움을 없앤단 말입니다. 가사 어느 험난한 길에 다리가 없으면 다리도 놔주고 병원이 없으면 병원도 세워주고 이와 같이 중생의 두려움을 없앤단 말입니다. 이것이 무외시입니다.


관음보살(觀音菩薩)이나 부처님께서 손을 들어서 하는 것은 무외시인(無畏施印)입니다. 저희들한테 모두를 다 베푼단 말입니다. 조금도 숨김없이 중생들한테 베푸는 그 모습 그것이 무외시인입니다. 우리는 재물로 베푸는 것도 베푸는 것입니다만 법시, 무외시 역시 크게 베푸는 것이니까 그때그때 보시에 소홀함이 없도록 해야 씁니다. 가사 비단 다리를 놓고 병원을 짓고 하는 것만이 무외시 보시가 아니라 우리 표정보시 말입니다. 얼굴 찌푸리고 험상스럽게 생긴 사람 보면 우리 마음도 두렵습니다. 저놈이 자칫하면 내가 한마디만 비위 거슬리게 하면 나한테 덤비겠구나, 이것도 역시 무외시에 반하는 것입니다. 좋은 표정 말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나를 해치지 않는다. 어떠한 경우에도 내가 그대를 해치지 않는단 말입니다. 설사 그대가 애매하니 내 목에다 칼을 겨눈다 하더라도 내가 해치지 않는다.  이런 정도의 자비(慈悲)스러운 표정, 이것도 역시 무외시입니다. 우리는 법문을 잘 몰라서 법시를 잘 못하고 재물이 부족해서 재시를 못할망정 무외시는 누구나가 다 할 수 있습니다. 표정보시라는 말입니다. 자비스럽고 미소 띤 얼굴이라는 것이 금전(金錢)에 비길 것입니까 무엇에 비길 것입니까?  부처님의 그런 자비상호, 부처님의 모양은 다 무외시입니다. 가장 최상의 무외시 법문이 부처님의 모습입니다. 특히 우리 보살님들께서는 무외시 보시로 해서 우리 집안을 항시 평화스러운 집안으로 가꾸셔야 씁니다.


*지계(持戒)바라밀


지계(持戒)라, 이것은 계(戒)를 지킨단 말입니다.  재가(在家)·출가(出家)·대승(大乘)·소승(小乘)의 일체 계행(戒行)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러한 산업주의라는 것은 물질이 군림하니까 물질을 위주로 하고서 자칫하면 우리 정신을 소홀히 합니다. 그런데서 계율(戒律)을 무시합니다만 이런 때일수록 우리가 영생(永生)의 길을 즉 말하자면 멸(滅)의 길을 해탈(解脫)의 길을 갈려고 마음먹으면 계행을 꼭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때 일수록 계율의 필요성은 더욱 중요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생리(生理)와 심리(心理)가 정화(淨化)가 되는 것입니다.


*인욕(忍辱)바라밀


인욕(忍辱) 이것은 유정(有情)의 즉 말하자면 사람이나 개나 동물이 우리를 모욕(侮辱)도 하고 또는 때리고 치고 하는 그런 것과 또는 비정(非情)을 생명이 없는 바람이나 추위나 눈이나 차고 덥고 목마르고 하는 그런 정도의 것을 우리는 참는 것입니다.


*정진(精進)바라밀

 

그다음은 정진(精進)이라, 앞서 말씀드렸습니다만 이것은 우리 몸과 마음을 애쓰고 별일이 생기지 않게끔 해가지고서 앞에 뒤에 있는 모든 것을 닦는 것입니다.


*선정(禪定)바라밀


선정(禪定)이라, 진리(眞理)를 사유하고서 원래 참선(參禪)이라는 것은 순간 찰나도 진리를 안 떠나야 합니다.  순간 찰나도 진리를 안 떠나야 참선 인 것입니다. ‘이뭣고’를 하나, 무자(無字)를 하나, 하나님을 부르나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마음이 순간 찰나도 진리를 안 떠나면 그때는 참선인 것입니다.


진리를 생각하고서 산란심(散亂心)을 정지하는 요법(要法)으로서 구태여 구분하면 사성제(四聖諦)·팔정도(八正道),백팔삼매(百八三昧)등 이런 것이 있습니다. 이런 것을 다 알 필요는 없습니다만 아무튼 우리는 어떻게 되나 우리 마음에서 진리를 안 떠나면 됩니다. 진리라는 것이 무엇인가? 진리는 바로 부처님 아닙니까.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부르고 관세음보살을 딱 마음에다 안주(安住)시키면 그것이 참선(參禪)인 것입니다. 화두(話頭)도 마찬가지고 말입니다.


*지혜(智慧)바라밀


지혜(智慧)라, 이것은 제법(諸法)에 모든 현상적(現象的)인 법(法)에 통달(通達)하는 것이 지(智)요. 또 단혹증리(斷惑證理)의 원리(原理)를 통달하는 것을 혜(惠)라고 합니다. 물론 지혜(智慧)가 원래 구분해서 딱 잘라서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구분해 본다고 하면 현상적인 것을 아는 것은 지(智)에 해당하고 원리를 아는 것은 혜(慧)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3.승보(僧寶)


승보(僧寶)라, 아까 세 가지 보배 가운데서 불보(佛寶)·법보(法寶)를 말했습니다만 나머지 중 보배, 승보란 말입니다. 이것은 부처님 법(法)을 조금도 어김이 없이 닦는 사람이 승보 아닙니까. 이것은 재가승(在家僧)이라, 집안에서 닦는 사부대중(四部大衆)인 보살님들이나 처사님들이 재가승인 것이고, 우리 같은 사람들인 비구(比丘),비구니(比丘尼)가 출가승(出家僧)이란 말입니다. 재가승은 우바새(優婆塞) 청신남(淸信男) 선남(善男)이라고도 하고 우바이(優婆夷) 청신녀(淸信女) 선녀(善女)라고도 합니다.


우리 얼마 안남은 결제(結制)동안 다만 한 시간도 헛됨이 없이 공부하셔서 기어코 멸(滅)을 성취(成就)하시기 바라마지 않습니다.

나무아미타불!


어떻게 깨달을 것인가?


부처님 법문은 어느 좁은 시야라든가 제한된 그런 자리에서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항시 전체를 보셔서 전체적인 자리에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에 각기 여러 가지로 장애(障碍)도 있고 또는 불리한 불행(不幸)도 있으시겠습니다. 어떤 누구나가 한 세상 살다 보면 또는 우리 인간 존재가 원래 제한된 존재기 때문에 과거(過去) 우리가 전생(前生)에 지은 바 업장(業障) 따라서 금생(今生)에 꼭 그대로 받습니다.


선근(善根)을 많이 닦았다고 생각할 때는 금생에 복도 많아서 복을 많이 수용하지만 선근이 어느 정도 밖에 안 되면 그 정도에 맞춰서 금생에 생(生)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인간 존재 뿐만이 아니라 사람의 안목으로 해서는 볼 수 없는 그런 천상존재(天上存在), 천상존재도 분명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제법공(諸法空)


모든 존재의 바탕에서 볼 때는 사실은 이것은 제법(諸法)이 공(空)이라, 제법공(諸法空)이라. 존재성이 본래 없는 것입니다. 우리 불교(佛敎)에서 부처님 공부를 할 때에 가장 우리가 그때그때 허무감을 느끼고 저항을 느끼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은 자기가 지극히 소중한데 금쪽 같이 소중한 자기도 원래 없다고 한단 말입니다. 명명백백히 있는 것을 없다고 합니다.


영가현각(永嘉玄覺) 선사의 증도가(證道歌), 현각선사 이 분도 위대한 조사(祖師)입니다. 조사란 것은 무엇인가 하면은 부처님 법을 흠절이 없이 그대로 계승 발전시키는 스승이 조사입니다. 그런데 이 어른께서 증도가라, 도(道)를 조금도 흠축이 없이 깨닫고서 그때에 하신 게송(偈頌)이 증도가 입니다.  증할 증(證)자, 길 도(道)자, 도를 증해 가지고서 하신 법문입니다.


그 법문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몽리명명유육취(夢裏明明有六趣)하니, 꿈몽(夢)자 속리(裏)자입니다. 꿈속에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명명유육취라. 명백하니 지옥(地獄)이나 아귀(餓鬼)나 축생(畜生)이나 또는 아수라(阿修羅)나 인간(人間)이나 천상(天上)이나 이러한 중생계(衆生界)가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다고 생각할 때 분명히 나도 있고 너도 있고 사람도 있고 각 동물도 있지 않습니까. 이와 같이 꿈속에, 우리 중생은 사실은 우리가 생각할 때에 나는 무던히 공부도 했는데 내가 무슨 꿈속에 있을 것인가. 이렇게 느끼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사실은 우리 중생은 누구나가 다 꿈속에 있는 것입니다. 꿈속에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중생이 바로 보지를 못하고 꿈속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명명유육취(明明有六趣)라, 육취는 우리 중생이 생사윤회(生死輪回)하는 육도중생(六道衆生)이 육취입니다.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 천상이 육취란 말입니다. 이러한 구분이 분명히 있지만 각후공공무대천(覺後空空無大千)이라, 깨달을 각(覺)자, 뒤 후(後)자, 깨닫고 보니까 공공무대천이라 다 텅텅 비어서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가 아무런 존재성(存在性)이 없단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얼마나 허망하겠습니까? 나도 있고 사랑하는 자기 자녀간도 있고 내외간도 있는 것인데 그런 것은 고사하고 모두가 다 아무것도 없다고 했으니 얼마나 허무한 말씀입니까.


우리 불자님들, 불교(佛敎)를 공부할 때는 아주 더러는 냉철한 판단을 하셔야 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인간의 상식으로 해서는 알 수 없는 그런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현재 내가 아주 많이 불행하다. 불행하니까 불행하다고 생각을 하시겠지요. 그러나 차원(次元)을 좀 달리해서 천상사람들이 본다고 생각할 때는 내가 지금 느끼는 불행과 똑같이 볼 것인가? 또는 보살(菩薩)들이 본다고 생각할 때는 내 불행을 어떻게 느낄 것인가? 차원 따라서 차이가 있습니다. 똑같지가 않단 말입니다.  하물며 가장 차원 높은 부처님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어떻게 볼 것인가? 부처님 눈으로 보시는 것이 사실을 사실대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사실을 왜곡시켜서 보는 것입니다. 사람만치, 사람의 업(業)만치 가리워진 견해(見解)로 보니까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좋다 궂다 하는 것이지 차원을 좀 달리해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사람이 보는 그대로 똑같이 보이지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중생들은 어느 누구나가 다 좋은 일이나 괴로운 일이나 지금 당한 대로 우리가 느끼는 대로 그것이 사실이 아니란 것입니다. 사실이 아닌 것이니까 우리가 좋다 그래서 너무 좋아할 것도 아닌 것이고 뭣이 잘못된다고 그래서 너무 싫어할 것도 아닙니다. 싫어하고 좋아할 것이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우리가 해야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