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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마음의 고향

마음의 고향 제 26집(2) 남방불교와 북방불교

마음의 고향 제 26집(2)


남방불교와 북방불교


제가 어느 스님을 한 칠·팔년 전에 서울 어디에서 만났습니다. 그래서 그 스님하고 같이 공부하는 얘기를 주고받고 했어요. 그런데 그 스님은 남방불교(南方佛敎)공부를 하신 분입니다. 남방불교 공부를 하셔서 상당히 자기 나름대로나 또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 분입니다. 따라서 그 분은 남방불교를 공부했으니까 이른바 비파사나 공부를 하셨던 것입니다.


지금 서울에도 비파사나 학원이 있고 가르치는 분도 있습니다. 그래서 비파사나 공부를 하신 분들은 대승불교(大乘佛敎),북방불교(北方佛敎)는 대승불교 아니겠습니까. 중국이나 또는 한국이나 일본이나 티베트나 그런 불교는 북방불교인데 이것은 주로 대승불교입니다. 따라서 그 스님은 처음에는 대승불교를 공부를 하신 분입니다. 한국 스님이니까 한국서 공부하고 강원(講院)도 나오고 선방(禪房)가셔서 한 십년 가까이나 선방을 다니신 분이지요.


그런데 그 분은 선방에 다녀 봐도 별로 재미를 못 봤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는 거기서 실망을 하고서 그래서 남방불교 버마나 태국이나 스리랑카나 저는 현지를 한 번도 순례를 못 했습니다만 다녀온 사람 말 들어보면 상당히 좋은 점이 많이 있는 모양 같아요. 형식적으로는 아주 우리가 따라 갈 수 없는 정도로 좋은 점이 있는 모양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 스님도 가서 꽤 지냈어요.  지내서 비파사나에 대해서 책이랑 그 분은 낼 정도니까 상당히 수준 있는 분 아닙니까.


근데 그 분은 달마스님이, 달마스님이란 분은 대체로 아시는 바와 같이 28대조사입니다. 28대조사, 부처님 때부터 정통조사(正統祖師)가 계시는데 물론 아주 훌륭한 분들이 많이 계시겠지만 주로 정평 있는 조사로 해서 33조사를 다 칩니다. 달마대사(達磨大師)는 28대고 육조혜능(六祖慧能)스님이 33대조사가 돼서 거기까지 정통조사라고 그렇게 우리가 정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헌데 비파사나를 하는 그 스님은 달마스님이 실존인물이 아니라고 부정한단 말입니다. 그렇다고 생각할 때는 대승불교 하시는 분들은 굉장히 화가 안 날 수가 없습니다. 달마스님께서 실존인물이라고 역사적(歷史的)인 사실도 있고 또 뿐만이 아니라 달마스님 가르침으로 해서 공부를 하고 있는 분야도 많은데 그런 훌륭한 조사스님을 실존인물이 아니라 하나의 허구로 조작했다고 그렇게 말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 말 듣고서 그냥 저는 웃어 버리고서 이분하고 오랫동안 얘기해 봐도 별로 소득이 없겠구나, 그래서 더 말 않고 말아 버렸습니다만 이렇게 자기가 어느 견해에서 볼 것인가. 따라서 같은 불교 내에도 상당히 거리가 있고 또는 집착하는 사람들끼리는 서로 통하지가 않는단 말입니다.


다종교사회(多宗敎社會)


그런데 하물며 다종교사회(多宗敎社會), 현대사회는 다종교사회 아닙니까.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이렇게 불자님들이 상당히 많이 모이시면 불교가 아주 굉장히 세계에서 수도 별로 손색이 없고 질적으로도 손색이 없다 생각 할 란가 모르겠지만 사실은 수(數)적으로 봐서는 아주 미미합니다. 기독교는 한 20억 쯤 된다고 생각할 때에 이슬람교도 한 10억 남짓 된다고 합니다.  우리 불교는 얼마나 될 것인가? 10억 반도 못 됩니다. 다행히 일본(日本)사람들이 많이 믿어주기 때문에, 일본이 작은 나라여도 꽤 인구가 많고 불교 인구가 상당수가 돼서, 거의 1억 가까운 수가 일본은 믿는단 말입니다. 그네들이 그렇게 수가 많으니까 그 덕을 봐서 우리 세계 불교 인구가 한 2억5천 쯤 된다 합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얼마나 서글픈 일입니까. 그런데 그 속에도 모두가 다 일미평등(一味平等)하게 똑같이 부처님 법을 믿는 것이 아니라 아까 말씀처럼 남방불교, 북방불교 그런 차이에서도 역시 옥신각신한단 말입니다.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을 지양(止揚)해야


참선(參禪)한 사람들은 참선만 꼭 해야 그래야 성불(成佛)을 한다. 또 경(經)을 많이 보는 사람들은 이론체계(理論體系)도 없이 참선만 했다가는 그때는 어두운 구렁에 빠진다. 이렇게 말도 하고 또 염불(念佛)한 분들은 우리가 부처님 명호, 부처님의 원력을 믿고서 부처님 명호를 부르면 금생에도 염불삼매에 들 수가 있고 또 내생(來生)가서는 극락세계(極樂世界)에 우리가 태어난다. 그보다도 더 좋은 길이 어디가 있겠는가. 이렇게 또 생각한단 말입니다.


오늘 제가 말씀 하고자 하는 것도 저는 이러한 이른바 법집(法執)이라, 어느 법만 옳다고 주장 하는 법집을 지양(止揚)을 시키기 위해서 제가 말씀을 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법집을 한다고 생각할 때는 우선은 우리마음이 열리지가 않습니다. 어째서 마음이 열리지가 않을 것인가. 우리 마음이란 것은 지금 현재는 별로 마음이 신통치 않는 마음일지 모르지만은 우리 마음이 근본성품(根本性品)은 한도 끝도 없는 시간적으로 헤아릴 수 없는 무량무변(無量無邊)한 생명(生命)자체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우리 마음이 얼마나 넓은가? 내 마음이 기껏해야 이 몸뚱이에 들어 있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한 사람도 있겠지요.


우리 마음이 바로 불심(佛心)입니다.


부처님 법은 마음을 깨닫는 법입니다. 우리 마음이란 것은 모양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양이 있는 것이 아닌 것은 이것은 우리가 어떻게 제한(制限)을 할 수가 없고 규정(規定)을 할 수가 없습니다. 내 몸에 있다든가 내 몸 밖에 무슨 몇 킬로라든가 어떤 범위가 있다든가 그런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허공(虛空)같이 끝도 갓도 없는 것이 우리 마음입니다. 따라서 우리 지구상뿐만 아니라 끝도 갓도 없는 생명자체이기 때문에 불교우주관(佛敎宇宙觀)은 삼천대천세계 아닙니까. 불교 우주관은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뿐만 아니라 삼천대천세계 같은 그런 세계가 또 한도 끝도 없이 우주에 펼쳐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은 그와 같이 모양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주의 끝도 갓도 없는 우주의 끝까지도 우리 마음은 다 그대로 미쳐있습니다. 따라서 무량무변의 허공 세계가 바로 우리 마음이다. 이렇게 생각해도 됩니다. 이와 같이 끝도 갓도 없이 넓은 마음인데 우리 중생들은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과거전생(過去前生)에 업을 짓고 금생에도 업을 지어서 우리 마음을 축소를 시켰단 말입니다. 내 마음은 이것은 몸뚱이에 든 것이 아닌가? 자기 마음이 자기 몸뚱이에 들었다고 생각하면 평생(平生)동안 자기 마음을 폐쇄(閉鎖)하고 자기 마음을 딱 가둬놓고서 해방(解放)을 못 시킨 사람입니다.


내 마음을 내 몸뚱이에 국한(局限)시킬 때는 그때는 자연적 (自然的)으로 욕심(慾心)이 나오고 진심(嗔心)이 나오고 치심(癡心)이 안 나올 수가 없습니다. 삼독심(三毒心)이라 하는 것은 이것은 모든 존재(存在)에 있어서 마음을 열어서 우주의 근본 생명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 뿐인 것이지 좋은 것에 대해서 욕심내는 탐욕심이나 또는 좋지 않은 것에 대해서 진심(嗔心)을 내는 성내는 마음이나 그래서 마음은 더욱 어두워지는 어리석은 마음을 제거 할 래야 할 수가 없습니다.


어리석은 마음은 어떤 것이 어리석은 마음인가? 우리 마음은 본래로 헤아릴 수 없이 끝도 갓도 없이 우주에 충만한 무량무변의 것인데 우리 마음은 제한 돼 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 마음이 바로 어리석은 마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무명심 (無明心)입니다. 무명심이라, 무지무명(無智無明)이라. 무지나 무명이나 똑같은 뜻입니다. 없을무(無)자 밝을명(明)자 밝지 않은 마음이란 말입니다. 우리 마음 본래로 밝아서 천지우주(天地宇宙)와 더불어서 조금도 차이가 없는데 그와 같이 끝도 갓도 없는 마음이 바로 부처 불(佛)자, 마음 심(心)자, 바로 불심(佛心)입니다. 불심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의 본래 성격은 바로 불심입니다. 부처의 마음이란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각 종교라는 것은 어째서 나오는 것인가? 우리 인간존재라 하는 것은 자연발생적으로는 한정돼 있으면서도 무한(無限)을 구한단 말입니다. 한도 끝도 없는 무한을 구합니다. 힘도 한정되고 아까 말씀처럼 우리가 아는 것도 한정되고 중생심(衆生心)이라는 것이 자기 몸에 갇혀 있다는 그런 좁은 맘을 가지면서도 또 마음 구석에서는 한도 끝도 없는 그런 세계를 동경도 하고 흠모하고 추구를 합니다.


본래가 한도 끝도 없는 마음이기 때문에 어떤 처지에 있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이 스스로 그때는 한도 끝도 없는 그런 것을 구한단 말입니다. 지혜(智慧)도 한도 끝도 없이 다 알고 싶고 자비(慈悲)도 그렇고 어떤 면으로 보나 우리 중생들은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모든 면에 있어서 한도 끝도 없이 다 알고 다 하고 싶고 이런 것입니다. 그래서 그와 같이 다 알고 하고 싶은 그 마음이 정답게 나가면 좋은데 그렇지 못하면 또 부작용이 생깁니다.


불성공덕(佛性功德)은 무한하다.


우리 마음이란 것이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무량무변한 허공 같은 것인데 다만 허공같이 텅 비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가운데는 한량없는 성품공덕(性品功德)이 가득 차 있단 말입니다. 지혜로운 면으로 보나 자비로운 면으로 보나 또는 능력 있는 면으로 보나 어떤 면으로 보나 무한의 가능성 무한의 에너지가 거기에는 충만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현대과학문명시대(現代科學文明時代)에 태어나서 그 조그마한 눈에도 안 보이는 미시적(微視的)인 소립자(素粒子), 전자(電子)나 양성자(陽性子)나 중성자(中性子)나 미시적인 그런 것 속에도 한도 끝도 없는 에너지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지금 알고 있습니다.


그 에너지, 우주의 기(氣), 우주의 기가 조그마한 눈곱만치도 못한 것 가운데 가서 무시무시한 힘이 있단 말입니다. 그 광자(光子)라 하는, 빛 광(光)자, 아들 자(子)자, 광자, 또는 광량자(光量子), 그 모든 존재를 쪼개고 쪼개 가지고서 분석한 뒤에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그런 것 가운데도 초속 30만 킬로미터라, 일초 동안에 30만 킬로미터를 갈 수 있는 에너지가 거기에 다 들어있단 말입니다. 우리는 무시무시한 원자폭탄(原子爆彈), 수소폭탄(水素爆彈) 들어서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경험은 못했어도. 저는 일본 나가사키에 가서 제 외가가 집단으로 살았는데, 일본 나가사키 원자폭탄 세례에 대부분 다 돌아가셨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한둘이겠습니까. 그렇게 원자폭탄 힘이 무시무시하단 말입니다.


그런 힘들이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조그마한 눈에도 보이지 않는 그 소립자 가운데도 들어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 가운데는 어떻겠습니까. 우리 마음 가운데도 역시 우리가 지금 현대 인간의 두뇌(頭腦)로 해서 원자폭탄이나 수소폭탄이나 그런 정도 밖에는 뽑아서 못 쓰지 만은 사실은 그보다도 훨씬 더 위대한 한량없는 힘이 우리 마음 가운데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런 것을 밝히신 분이 부처님입니다. 그런 것을 밝히신 분이 성인(聖人)이란 말입니다.


마음은 영생불멸(永生不滅)이다.


또한 한도 끝도 없는 그런 마음은, 한도 끝도 없기 때문에 어느 때 태어나고 어느 때 죽는다 하는 그런 것도 없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불교(佛敎)말로 해서 불생불명(不生不滅)입니다. 낳지 않고 죽지 않는단 말입니다. 낳지 않고 죽지 않는 것이 우리 마음입니다. 금생에 우리 몸뚱이를 쓰다가 그만 두고 간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은 절대로 눈곱만큼도 훼손이 안됩니다. 이런 도리를 분명히 안다고 생각할 때는 어느 큰일을 하다가 자기 몸뚱이 살피기 때문에 뒤에 보고 옆에 보고 하다가 우리가 용기를 못 내지는 않겠습니까.


정말로 내 마음, 내 마음이 우리 주인공(主人公)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마음을 참말로 안다고 생각 할 때는 세상에 무서울 것 아무것도 없습니다. 본래 죽지가 않으니까 말입니다. 불사신(不死身)이라. 죽지 않는단 말입니다. 마음은 이것은 과거에 태어난 것도 아닌 것이고 금생에 태어난 것도 아닌 것이고 무시무종(無始無終)으로 처음도 끝도 없이 항시 존재하는 생명자체인 것입니다. 또는 그 마음은 내 마음 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 마음이나 똑같습니다. 내 마음도 한도 끝도 없이 우주에 충만해 있고 또 김이라는 사람 마음도 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내 마음도 우주에 끝도 갓도 없이 널려 있고 저 사람마음도 그럴 것이고 모든 중생(衆生) 마음이 그렇다고 생각할 때는 서로 이렇게 충동하고 서로 갈등되지 않을 것인가. 이렇게 생각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모양이 없어놔서 갈등(葛藤)될 것이 없단 말입니다. 그러한 우리 마음의 근본 성품이 아까 말씀처럼 바로 부처 불(佛)자, 마음 심(心)자, 바로 불심(佛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는 정말로 조작도 되지 않고 조금도 흠도 없는 진실한 자리기 때문에 진여(眞如)라 참 진(眞)자, 같을 여(如)자, 진여(眞如) 그럽니다. 진여란 말입니다 진리란 뜻이나 똑같습니다.


그래서 부처 불(佛)자, 마음심(心)자, 불심이란 말이나 또는 진여라는 말이나 또는 법법(法)자, 성품 성(性)자, 법성(法性)이란 말이나 법법(法)자, 몸신(身)자, 법신(法身)이란 말이나 또는 참진(眞)자, 나아(我)자, 진아(眞我)라는 말이나 진아라. 참 나란 말입니다. 큰대(大)자, 나아(我)자, 대아(大我)라. 우리 중생들은 나를 ,자기 몸을 자기로 밖에는 모르는 정도니까 이것은 소아(小我)란 말입니다. 그러나 본래 참 나는, 큰대(大)자, 나아(我)자, 끝도 갓도 없이 우주(宇宙)에 충만해 있는 참나 이것은 대아(大我)란 말입니다. 이 자리가 바로 참 나기 때문에 참진(眞)자, 나아(我)자, 진아(眞我)그럽니다.


어떻게 깨달아야 할 것인가?


따라서 우리 불교는 진아를 깨닫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어떻게 깨달아야 할 것인가? 깨닫는 방법도 아까도 제가 허두에 말씀드렸습니다만 저 남방불교에서 배우는 분들은 비파사나 하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하지만 비파사나도 부처님께서 하신 법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절대로 진리(眞理)가 아닌 것이 아닙니다. 다만 부처님 법문은 대기설법(對機說法)이라. 그때그때 중생의 정도에 따라서 거기에 상응(相應)된 법문(法門)이기 때문에 차원이 좀 낮고 차원이 높고 한다는 그런 차이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 법문은 방편설(方便設)이 있어서 본래 생긴 대로 중생의 그릇이 더 확실하고 중생이 영명하고 또는 차원이 높은 사람한테는 조금도 에누리 없이 사실 그대로 말씀을 하시지만 중생의 차원이 낮으면 높은 고도한 법문을 해도 알 수가 없겠지요.


부처님께서 성도(成道)하신 다음에 맨 처음에는 [화엄경(華嚴經)] 말씀을 했습니다.  화엄경은 조금도 가감(加減)하지 않고서 사실을 사실대로 말씀한 법문이 화엄경입니다. 화엄경을 말씀하시니까 천상(天上)사람들이나 또는 제불보살(諸佛菩薩)이나 신장(神將)들은 다 알지만은 일반 중생은 알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한걸음 물러서서 [아함경(阿含經)]이라. 중생의 그릇에 맞게끔 말씀을 했습니다. 그래서 아까 제가 말씀드린 비파사나, 남방불교에서 하는 비사파나 이것은 정도가 낮은 중생한테 부처님께서 초기에 하신 그런 말씀입니다. 따라서 그 법문도 굉장히 위대한 법문입니다.


우리가 본래로 부처기 때문에 부처님 말씀, 부처님 말씀은 설사 쉬운 법문 말씀을 하신다 하더라도 그 가운데는 깊은 말씀도 다 함축이 돼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정말로 마음을 가다듬고 부처님을 신뢰하는 그러한 마음으로 해서 법문을 듣는다고 생각할 때는 차원이 낮은 법문을 듣고도 그냥 즉시에 깨달을 수가 있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법문을 좋다 궂다 함부로 절대로 시비할 것은 못됩니다. 그러나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기왕이면 전체적으로 부분적이 아니라 전체적인 그런 법문을 들으면 훨씬 더 이해도 하기가 쉽고 또는 더 빨리 마음을 통할 수가 있단 말입니다.


한국불교(韓國佛敎)는 본래(本來) 원통불교(圓通佛敎)다.


따라서 저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제한된 시간에 이런 말 저런 말 구구한 말씀을 다 드릴 수는 없는 것이고 가장 중요한 원통적(圓通的)으로 전부 다 합할 수 있는 그런 말씀만 드리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한국에서 우리 불자님들은 어느 누구나가 신라 때 원효스님이나 의상스님이나 고려 때 대각국사나 보조국사나 이런 분들을 다 숭앙(崇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분들을 우리가 왜 숭앙하는가? 이분들은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다 원만스러운 말씀을 했단 말입니다. 어디에 절대로 치우지지 않았습니다. 꼭 참선만 해야 된다. 그것은 안 된다. 꼭 염불만 해야 된다, 이렇게 한 가지를 치우치게 말씀을 안 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느 누구나가 언제 본다 하더라도 원효스님이나 의상스님이나 또는 대각국사나 보조국사나 서산스님이나 그런 분들은 다 훌륭하게 보인단 말입니다. 또 현대란 것이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다종교사회기 때문에 기독교 믿는 사람이 내 며느리가 될 수가 있고 말입니다. 또는 자기 친지도 될 수가 있고 지금 그런 때 아닙니까. 한국은 기독교인의 수가 훨씬 많지 않습니까. 따라서 그런 기독교에 대해서도 우리가 관용적으로 진리 면에서 그렇게 다 포용을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지금은 바로 살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부처님 공부를 해서 빨리 부처가 돼야 할 것인데 어떻게 하는 것이 빨리 될 수가 있는 것인가. 그리고 지금 여러 가지 복잡한 교리(敎理) 해설들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남방불교(南方佛敎)의 비파사나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로 책이 나와 있고 또는 염불(念佛)에 대해서도 염불도 가지가지로 자기 의견들을 많이 말씀을 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에 대한 체계(體系)가 잘 안서 놓으면 뭣이 옳은 것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염불은 그냥 소리만 내서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또는 잠자코 마음으로 그냥 관조(觀照)하는 부처님을 생각만으로 해서 하는 것이 또 옳은 것인가? 이렇게 여러 분들께서 주저를 하시겠지요.


참선(參禪)의 자세   


우선 참선하는 것에 대해서 몇 말씀을 드립니다.

보통은 참선은 조금 더 고도한 사람들, 차원이 높은 사람들이 참선하고 염불은 차원이 낮은 사람들이 염불한다. 이렇게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도 아닙니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은 참선 가운데도 염불이 들어있고 또 염불 가운데도 참선이 다 들어있단 말입니다.


우리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본래로 우리 근본 성품이 바로 부처기 때문에 불심(佛心)이나 또는 부처불(佛)자, 성품성(性)자, 불성(佛性)이나 또는 법법(法)자, 성품성(性)자, 법성(法性)이나 똑같은 뜻이라고 말씀을 드렸지요. 같은 뜻을 그때그때 중생의 그릇 따라서 시기상응(時期相應)한 법문을 하시기 때문에 표현만 다른 것이지 의미는 똑같습니다.  즉 그와 같이 참선(參禪) 한 법도 꼭 참선이 정도가 높은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누구나가 할 수가 있습니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은 나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나의 본래가 바로 부처기 때문에 본래의 부처자리, 모든 것은 근본성품이 있고 또 상이 있고 하지 않습니까. 모든 것은 근본본체(根本本體)가 있고 또는 활용할 용(用)이 있단 말입니다. 이른바 체용성상(體用性相)이라. 본체와 용이 있고 본체와 또는 근본성품과 그런 상이 있단 말입니다.  이와 같이 현상적(現象的)인 것은 하나의 상인 것이고 현상적으로는 안보이지만 현상의 근본적인 성품은 이것은 본체(本體)란 말입니다.


불심 자리를 놓치지 않으면 모두가 참선입이다.


따라서 우리 마음이 본래로 부처고 일체존재(一切存在)가 근원적인 자리에서는 부처 아님이 없습니다. 그런데 부처가 아님이 없다는 부처의 자리를 우리가 떠나지 않으면 모두가 다 참선입니다. 염불(念佛)을 하던 경(經)을 외우든 또는 가만히 명상을 하고 있든 우리 마음이 이것저것 산란스럽게 현상적인 것에 끌리지 않고서 우리 마음을 가다듬어서 꼭 그 불심(佛心)자리, 불심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참선(參禪)입니다.


참선하는 법이 큰스님들한테 화두(話頭)를 받아서 무슨 화두를 의심하고 그런 법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만이 참선이 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가령 우리가 화두해서 없을 무(無)자 무자화두가 보통은 가장 많습니다. 무자화두를 우리가 든다 하더라도 무자화두를 들면서 그 무(無)! 무! 무! 이렇게 무자화두를 들고만 있지 그 마음이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마음의 본래의 자리. 마음의 근본성품(根本性品) 자리를 떠나버리면 그때는 참선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른바 불심(佛心)을 떠나버리면 참선이 아닙니다.


불심을 떠나지 않고서 불심에 입각해야 그래야 참선이란 말입니다. 화두를 의심하지 않고 염불을 하든 또는 주문을 외든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 것은 하나의 상(相)이니까 말입니다. 문제는 그 성품을 떠나는가 안 떠나는가 그것에 매였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가령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염불(念佛)을 한다 합시다. 염불을 한다 하더라도 관세음보살 하면서 불심자리, 불성자리를 떠나지 않고서 마음을 불성자리에다 두고서 관세음보살 한다고 생각할 때는 바로 그때는 참선입니다. 염불참선(念佛參禪)이란 말입니다.


염불도 하다보면 싫증이 나서 하기 싫을 때도 있겠지요. 그런 때는 염불을 않고서 그냥 가만히 명상(瞑想)에 잠긴단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은 자기 마음으로 자기마음을 돌아보고서 자기한테 갖추고 있고 우주(宇宙)에 충만해 있는 불성자리를 생각하면서 가만히 명상해도 그때는 바로 참선입니다.


그런 증거로 일본은 지금 묵조참선(墨照參禪)이 있고 말입니다. 일본 사람들은. 묵조란 것은 잠자코 가만히 불성자리를 비춰본단 말입니다. 그런 참선하는 조동종, 묵조 하는 잠자코 비추어 보는 참선법이 있고 또 그런가 하면은 아까 말씀드린 대로 큰스님들한테 화두를 타가지고서 화두에다가 의심(疑心)을 품고 계속 의심하는 그런 법도 있습니다. 그것은 임제종(臨濟宗)이라 하는 종파(宗派)에서 하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종파는 화두를 의심하는 화두가 아니라 모두가 다 부처니까 차라리 염불화두라. 아미타불(阿彌陀佛)이나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나 염불을 화두로 해서 하면 좋지 않겠는가. 이렇게 해서 하는 황벽종(黃檗宗)이란 종파도 있단 말입니다.


화두(話頭)만이 참선(參禪)의 전부가 아니다.


그런데 우리한국은 그런저런 복잡한 것이 다 안 들어 왔단 말입니다. 고려(高麗)때 중국(中國)서 한동안 들어오고 이조(李朝)때는 중국하고 교류가 끊어져 버리니까 고려 때 들어온 화두 하는, 화두 의심하는 법, 그것만 딱 남아서 이조오백년 동안에 딱 화석(化石) 되어 버려서 굳어버렸단 말입니다.

지금 한국선방은 어디가나 화두를 의심하는 그런 선법만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참선법의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 불자님들, 우리는 세계적인 안목을 항시 가져야 됩니다. 또는 역사적인 의식이 있어야 됩니다. 역사의식이나 또는 세계적인 안목을 갖는다고 생각할 때에는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본래 참선은 어떠한 것인가? 본래 참선이란 것은 우리 마음의 본 성품을 여의지 않는 것이 이것이 참다운 참선이란 말입니다. 화두를 의심하든 또는 화두를 의심하지 않던 또는 염불을 하던 염불을 않던 그런 것은 그런 상은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 공부하는 마음자세가 불심 자리를 안 여의면 그 때는 다 참선이란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얼마나 마음이 자유스럽고 공부하기가 쉽겠습니까.


우리 인간의 대사(大事)라. 부처님께서 금생에 나오신 것은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이라. 가장 큰 일을 위해서 나오셨습니다. 가장 큰 일이란 것은 무엇인가. 가장 큰 일은 우리가 부처님이 되는 일입니다. 부처님의 견해를 우리 견해로 하는 것이 가장 큰 일입니다.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일대사불출세(一大事佛出世),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이라.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나오신 것은 무엇인가 하면 우리 중생들이 잘못 보고 무지무명에 가리어서 자기 스스로도 모르고 우주를 바로 볼 줄도 모른단 말입니다. 바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 때는 나라는 것이 원래 허망(虛妄)한 것인데 꼭 나만이 최고다. 그런 아상(我相)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 번뇌(煩惱) 가운데서 우리 무명 가운데서 무지무명 가운데서 가장 지독스러운 것이 무엇 인가 하면 나라는 것을 내 몸뚱이만을 나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면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즉시 나한테 좋은 것은 탐심(貪心)을 내고 나한테 싫은 것은 진심(嗔心)을 내고 삼독심(三毒心)을 낸단 말입니다. 삼독심을 못 끊으면 이것은 참다운 인간이 아닙니다. 과거 전생에 삼독심을 제대로 끊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가 인간 밖에는 못 됐습니다. 조금 많이 끊었더라면 천상(天上)으로 태어날 것이고 온전히 끊었으면 영생해탈(永生解脫)의 극락(極樂)에 태어날 것인데 우리가 조금 밖에 못 끊고 말아버렸단 말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참선이라는 것은 참 쉬운 것입니다. 생긴 대로 우리가 공부한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이 끝도 갓도 없이 광대무변(廣大無邊)하게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를 두루 해 있으니까 그렇게 마음을 관찰하면 되는 것이고 화두를 의심하고 싶으면 화두를 의심한다 하더라도 그냥 덮어 놓고 의심하면 그 때는 참선이 못 됩니다. 끝도 갓도 없는 마음의 본 바탕자리, 그 바탕자리에다가 마음을 두고 의심도 해야지 그냥 덮어놓고 의심하면 상기(上氣)만 되어 가지고서 마음이 혼란스럽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활짝 열어서 마음이 본래 열려 있는 것인데 우리가 지금 닫고 있단 말입니다. 마음은 본래 열린 것입니다.


용수보살(龍壽菩薩)의 이행문(易行門)


부처님공부 가운데서 제일 쉬운 공부를, 여러분도 기왕이면 제일 쉬운 방법으로 공부하고 싶으시겠지요. 용수보살(龍壽菩薩), 용수보살은 제2의 석가(釋迦)랄 정도로 위대한 분 아닙니까.  용수보살은 14대 조사입니다. 부처님 때부터서 정통(正統) 14대 조사입니다. 그러면서도 대승불교(大乘佛敎), 대승불교는 마명(馬鳴)대사, 마명대사는 12대조사인데 주로 마명대사하고 용수보살 때 대승불교의 체계가 확립이 됐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마명대사 용수보살을 정말로 제2의 부처님같이 숭상하는 것입니다.


그 용수보살이 성불(成佛)하기 제일 쉬운 것이 어떤 것인가. 성불하는 공부 가운데 어려운 면과 쉬운 면을 말씀하는데 용수보살이 내놓으신 책 가운데서 [대비바사론], [대비바사론] 가운데 다섯째품이 이행품(易行品)이라. 쉬울 이(易)자, 행할 행(行)자, 이행품(易行品)이란 말입니다. 이행품이라. 용수보살이 또 중생(衆生)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던가 말입니다. 가지가지로 난행고행(難行苦行)해 가지고서 도(道)를 성취한 뒤에 어떻게 중생들이 빠르게 성불할 것인가. 어느 누구나가 다 조금도 저항이 없이 무리 없이 쉽게 공부할 것인가. 그래서 쉬울 이(易)자, 행할 행(行)자 이행품(易行品)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대비바사론 이행품에 보면 부처님을 생각하고 부처님 명호(名號)를 외단 말입니다. 우리가 본래 부처라고 할지언정 너무나 업을 많이 지었단 말입니다. 전생에도 많이 짓고 금생에도 태어나서부터 별로 필요 없는 것을 많이 배우고 필요 있는 참다운 진리는 별로 배우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은 그런 업(業)의 습관성(習慣性)으로 해서 꽉 차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마음을 하나로 모아서 마음을 통일을 시켜라. 이렇게 해도 쉽지가 않습니다.


참선방에 앉아서 한 3개월 동안 또는 몇 년 동안 공부를 해본다 하더라도 그냥 쉽게 마음이 통일이 되고 마음이 이른바 정화(淨化)가 되고 이렇게 되기가 그렇게 어렵단 말입니다. 저 같은 사람은 3년 결사(結社)를 몇 번이나 했습니다. 몇 번 했어도 지금도 부처님 공부를 다 하려면 천리만리입니다. 그 회한(悔恨)과 한탄(恨歎)만 남습니다. 부처님 공부는 절대로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저는 어렵다고 생각한 적 한 번도 없습니다.  제일 재미지고 제일 쉬운 것인데 내 스스로가 제대로 부지런히 공부를 못했단 말입니다.


본래면목(本來面目)


가장 쉬운 것이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을 생각하고, 부처님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우리자신의 본래면목(本來面目), 우리자신의 주인공(主人公)을 생각한단 말입니다.  부처님과 우리자신과 불심(佛心)과 절대로 둘이 아니고 셋이 아닙니다. [화엄경(華嚴經)에 심불급중생시삼무차별(心佛及衆生是三無差別)이라. 우리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것이 셋이 조금도 차이가 없단 말입니다.


천지우주(天地宇宙)가 모두가 다 하나의 진리로 됐습니다. 그래놔서 어느 것이나 모두가 다 우리 중생이 잘못 봐서 그런 것이지 근본 성품을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다 하나의 생명이란 말입니다. 미운사람, 고운사람 다 그렇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공부하는, 공부 가운데 가장 쉬운 법이 무엇인가하면은 우리 생긴 대로 내 본래 주인공 자리인 부처를 생각하고 부처를 생각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하도 쓸데없는 것을 많이 배워놔서 마음을 통일을 시키기가 쉽지 않겠지요.


무생청정보주명호(無生淸淨寶珠名號)


그래서 부처님 명호(名號)을 외인다. 부처님 이름을 외입니다. 정토경(淨土經)에 보면은 부처님 이름을 무생청정보주명호(無生淸淨寶珠名號)라. 무생청정보주명호라,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은 부처님 이름은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나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 다 같은 뜻입니다. 같은 뜻인데 부처님 이름은 무생청정(無生淸淨)이라. 무생은 이것은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 낳지 않고 죽지 않고 그러면서 청정(淸淨)하고 또는 우주에 다시없는 보배란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무생청정보주명호라, 정말로 영원한, 그 빛나고 보배 같은 그런 이름이란 말입니다. 우리 인간 이름은 그때그때 부모라든가 작명가가 이름을 짓겠지요. 그러나 부처님 명호, 부처님 이름은 명호라고 합니다. 부처님 이름은 우리 사람이 아무렇게나 적당히 그때그때 지은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한도 끝도 없는 영생(永生)하고 영원히 모든 성품공덕(性品功德)을 다 갖춘 보배의 이름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그런 이름은 우리가 한 번 외우면 외운 만큼 우리 본래면목으로 들어갑니다. 무생청정보주명호라, 영생의 보배 같은 청정한 이름이란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본래로 부처가 아니면 모르거니와 본래가 부처인지라 본래 부처의 자리, 우주의 근본 생명자리, 그런 자리를 우리가 그런 이름을 외운다고 생각할 때는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우리 마음이 한 번 듣고서도 업장이 가벼우면 그냥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금생에 부처님 가르침을 믿는다 하더라도 그렁저렁 살다가 어언 간에 임종에 다다를 수가 있겠지요. 어언 간에 죽음이 온다, 죽음이라 하는 것은 언제 올지 모릅니다. 헌데 죽음에 다다라서 이래서는 안 되겠구나 정말로 지옥(地獄)이 있고 극락(極樂)이 있는가는 우리가 모르겠지만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이 거짓말이 아닌 바에는 틀림없이 극락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극락에 가야지 않겠는가. 이런 사무친 마음으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한 가지만 불러도 좋습니다. 그 사무친 마음으로 절실한 마음으로 외운다고 생각할 때는 한 생각, 한 생각으로 해서 능히 우리 모든 업장이 녹아져서 생명(生命)의 본고향(本故鄕) 극락세계(極樂世界)로 태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아까 용수보살, 제2의 석가란 용수보살이 말씀한 가장 쉬운 법문이 무엇인가. 가장 쉽고도 빨리 성불할 수 있는 그런 법이 무엇인가. 이것이 이른바 염불(念佛) 공부란 말입니다. 우리의 관념(觀念)이 잘못된 선입관념이 있습니다. 그래서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염불(念佛)은 정도가 늦은 하근 중생이 하는 것이고 참선은 고급, 보다 차원이 높은 고도한 분들이 하지 않는가.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용수보살이란 제2의 석가가 하필이면 그와 같이 차원 높고 분별 있는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생각을 해보더라도 본래가 부처기 때문에 우주자체가 부처 아님이 없기 때문에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보다 더 높고 깊고 더 행복스러운 방법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내가 나의 본 이름을 외운다. 내 생명의 본래 이름을 외우는 것이고 또는 우주의 이름이란 말입니다. 우주의, 또는 그 이름 자체가 모든 공덕을 다 원만히 갖추고 있습니다. 무생청정보주명호(無生淸淨寶珠名號)라.


따라서 우리 불자님들, 참선을 한다 하더라도 그 자리, 그 자리에서 우리 마음이 근본 성품을 안 여의면 염불을 해도 그것이 바로 참다운 염불참선(念佛參禪)입니다.  부처님은 저기에 있고 나는 여기에 있다.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부처와 나를 나누어 생각할 때는 염불참선이 못됩니다. 그냥 나무아미타불 부른다 그래서 염불참선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염불이 참선이 되기 위해서는 방금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내 마음의 근본성품이나 또는 저 사람마음의 근본성품이나 우주가 모두가 다 부처 아님이 없다. 이와 같이 우주의 실상(實相), 우주의 근본성품을 마음에다 두고 염불해야 비로소 염불참선입니다.


따라서 그냥 염불과 부처님은 저 대상에 있고 내가 부처님을 생각하면 나한테 와서 부처님이 도와준다. 이런 식의 것은 염불참선이 못됩니다. 또는 우리가 화두(話頭)를 의심한다 하더라도 내 마음이 원래 부처니까 어떤 의심을 하던지 간에 부처가 무엇인가. 부처님 자리를 우리가 찾고 참구(參究)하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그러기에 중국(中國)에서도 역시 송(宋)나라, 송나라 뒤에는 내내야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 아닙니까. 특히 명나라 때 불교가 또 굉장히 융성 했습니다만 그 명나라 때  4대 고승이 있어요. 운서주굉(雲棲株宏:1532~1612), 감산덕청(敢山德淸:1546~1623) 우익지욱(藕益智旭:1596~1655), 자백진가(紫栢眞可:1543~1603) 그 분들이 명나라 때 4대 고승입니다. 4대 고승인데 이 분들이 똑같이 한결같이 모두가 다 염불화두(念佛話頭)를 했단 말입니다. 염불화두를.


화두(話頭)란 것은 무엇인가?


이 화두란 것은 우리 마음이 성불(成佛)하기 위해서 임시로 우리 마음을 통일(統一)을 시키기 위해서 우리한테 제시된 하나의 방편(方便)이란 말입니다.

부처님 당시는 화두가 있지를 않았습니다. 중국 당(唐)나라 때 까지도 화두가 있지를 않았습니다. 참선(參禪)의 정통조사(正統祖師)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28대가 달마(達磨)스님이요. 33대가 육조혜능(六祖慧能)스님인데 그때까지는 화두란 말이 없었습니다.


중국 송(宋)나라 때 비로소 대혜 종고스님 그 어른께서 화두의 체계를 세웠단 말입니다. 세상이 하도 혼란스러운 것이니까 우리마음을 통일시키기 위해서 임시로 그렇게 세운 것이지 어떤 누구나가 꼭 화두를 들어야 한다. 이런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달마가 한 것도 아닌 것이고 육조혜능스님이 한 것도 아닌 것이고 부처님이 하신 것도 아닌 것이고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런 한계성을 알아야 됩니다.


아까 말씀처럼 시대에 따라서 잠정적으로 화두를 들어 라는 것이지, 우리 한국에 있어서는 중국 송나라 때가 우리 한국(韓國)의 고려(高麗)에 해당합니다. 그때 중국에서 화두법이 들어와서 이조(李朝) 오백년 동안에는 우리 불교(佛敎)가 중국(中國)과 교류(交流)를 못했어요. 교류를 못해 버렸기 때문에 화두가 들어온 채로 해서 딱 오백년 동안 굳어 버렸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한국, 이 선방 가나 저 선방 가나 화두만 합니다만 그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화두를 한다 하더라도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본래면목(本來面目)자리, 근본(根本)자리를 우리가 추구하는 근본자리를 참구하는 그런 태도가 아니면 참다운 화두가 못됩니다.


내 본래면목 자리, 언제 어디에나 존재(存在)하는 생명(生命)의 근본(根本)자리, 이런 자리에다가 우리 마음을 두고서 이것이 무엇인가? 그 자리를 참구(參究)하고 구해야 한단 말입니다.


그래야 참다운 참선(參禪)이 됩니다.


그래서 염불(念佛)한 분들은, 그 염불할 때 꼭 우리 불자님들이 외워 두셔야 할 것은 염불이라는 것이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가장 쉬운 문이기 때문에 집안에서 공부하시고 또는 재가(在家)불자님들에게 아주 알맞은 그런 수행법(修行法)이고 또는 출가(出家)불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왕이면은 쉬운 방법이 좋을 뿐만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원래 지성(知性)도 있고 감성(感性)도 있고 다 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공부가 지성에만 너무 치우치면 이론적(理論的)인 사람들은 무방할지 모르지만 감성적인 사람은 조금 마음이 흡족하지가 않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이란 것은 그 그리움이라 하는 동경과 그리움 말입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어린 나이에 객지(客地) 생활을 많이 한 분들은 느낍니다만, 객지에 가서 자기 고향(故鄕)을 그리워하고 부모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얼마나 참 순결합니까. 그런데 우리 인간 존재의 모든 존재의 근본 고향(故鄕) 자리가 바로 부처님이고 극락세계(極樂世界)란 말입니다. 극락세계는 이것은 없는 것을 부처님께서 우리를 위로를 시키기 위해서 가설(假設)로 만든 법문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극락세계란 것은 언제 어디에나 존재하는 우리 모든 존재의 근본 고향자리란 말입니다.


경(經)에 보면 극락세계는 여기에서부터 저 십만 억 국토 서쪽에 가야 있다.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런 말씀은 부처님께서 우리 중생(衆生)들이 잘 이해를 못할까봐서 염려해서 하신 말씀인 것이지 극락세계는 분명히 외시기 바랍니다. 극락세계는 이것은 바로 우리가 한 발도 옮기지 않고서 이 세계나 저 세계나 여기나 저기나 모두가 다 본래로 극락세계입니다. 우리 중생은 극락세계인데도 중생이 업장(業障)에 가리어서 보지 못 할 뿐입니다. 극락세계는 무량무변(無量無邊)합니다. 끝도 갓도 없습니다. 끝도 갓도 없는 가운데는 우리 지구(地球)도 다 포함돼 있습니다.


끝도 갓도 있어야 지구는 지구 따로 있고 극락세계는 극락세계가 따로 있겠습니다만 극락세계는 그러한 제한된 세계가 아닙니다. 천지우주(天地宇宙)가 사실은 부처님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이 세계(世界)가 그대로 극락세계(極樂世界)입니다.


이 세계(世界)가 바로 광명정토(光明淨土)입니다.


극락세계의 풀이 이름은 광명정토입니다. 광명으로 충만(充滿)된 세계란 말입니다.  이 세계가 바로 광명으로 충만된 세계입니다. 현대물리학(現代物理學)은 모든 존재의 근본이 하나의 방사광명(放射光明)같은 광선(光線)이라 그럽니다. 광자(光子)나 또는 양자(陽子)나 중성자(中性子)나 모두가 다 하나의 광명의 빛입니다. 현대물리학도 종당에는 모두가 다 광명뿐이다. 이렇게 말씀한단 말입니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은 무엇인가.


나무아미타불, 아미타불(阿彌陀佛)은 무엇인가. 아미타불은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 한도 끝도 없는 빛의 부처입니다. 청정광불(淸淨光佛)이라, 조금도 때가 없는 광명(光明)의 부처입니다. 모두가 다 옆에 있는 사람, 미운 사람, 도둑질을 하는 나쁜 사람도 그 몸이 지금 광명으로 됐습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이 정화가 되면 저 십만 억 국토밖에 가서 극락세계에 가서 우리가 부처님을 뵈올 것이 아니라 이대로 이 자리에서 염불삼매(念佛三昧)에 들어서 극락세계를 훤히 보는 것입니다.


삼매(三昧)가 무엇인가?


우리 불자님들, 삼매(三昧)란 말을 깊이 외시기 바랍니다. 삼매가 무엇인가? 삼매란 말은 우리 마음을 하나로 모아서 우리 마음이 부처님 쪽으로 통일이 된 상태, 우리 마음이 부처님 쪽으로 통일이 돼서 산란스러운 분별시비를 않는 상태가 이것이 삼매입니다. 따라서 삼매에 들어가야 성자(聖者)가 된단 말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본래의 인간성(人間性)을 회복하고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대아라, 큰대(大)자, 나아(我)자 큰 나라.  또는 참진(眞)자, 나아(我)자, 진아(眞我)란 말입니다. 부처님 되기가 저 같이 게으름 부려서 지금도 온전히 못 됐습니다만 부처님 되기가 저는 제일 쉽다고 생각합니다.


왜 쉬울 것인가? 어디서 꾸어서 부처님 되는 것도 아닌 것이고 본래 갖추고 있는 그래도 우리가 닦으면 된단 말입니다. 또는 우리가 부처가 안 될 것도 아닌 것이고 금생(今生)에 못되면 내생(來生)되고 내생 못되면 또 그 다음 되고 말입니다. 본래 부처기 때문에 헤매고 헤매다가 몇 만생 헤매더라도 다른 데로 갈 데가 없습니다. 다 부처가 꼭 되고 만단 말입니다.  그럴 바에는 우리가 금생에 돼서 금생에 영원히 행복스런 행복만이 존재하는 죽음이나 또는 여러 가지 고통이 많은 세계가 인간의 그야말로 괴로울 고(苦)자, 바다 해(海), 인생고해(人生苦海)아닙니까. 생사고해(生死苦海)라. 죽고살고, 나고 죽고 생사고해에 헤매지 않고서 우리가 영생(永生)의 안락(安樂)을 누리는 극락세계 가기 위해서는 금생에 닦으면 된단 말입니다.


제일 쉬운 삼매(三昧)가 염불삼매(念佛三昧)입니다.


금생에 닦아서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삼매라. 삼매 가운데도 제일 쉬운 삼매가 염불삼매(念佛三昧)입니다. 염불을 하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우리가 삼매에 들어가 버린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삼매에 한번 들어가 보십시오, 얼마나 좋은가 말입니다. 우리가 어디가 몸이 아프다고 합시다. 몸이 아프다가도 염불삼매에 척 들어서 우리마음이, 마음이나 몸이나 훨썩 더 가벼워지고 또는 앞에 부처님의 한도 끝도 없는 광명을 도인이 채 못 되어도 분명히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 광명을 본다고 생각할 때에 어디가 몸이 아프더라도 그냥 즉시에 나아 버립니다.


우리 중생은 부처님 법만 따르면 천하에 살기가 참 제일 쉬울 것인데 우리가 어째서 하필이면 부처님 법을 안 따르고 세속에서 조금 배운 것 가지고서 그것만 좋다고 따른단 말입니다. 기독교나 또는 다른 이슬람교나 그런 종교(宗敎)도 모두가 다 성자의 가르침입니다.  성자의 가르침이나, 같은 성자의 가르침도 성자의 개성 따라서 또는 그 시대에 따라서 표현을 달리하고 같은 성자라 하더라도 똑 같지가 않단 말입니다.


우리 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님 같이 원만하게 모두를 다 하나부터 이른바 일체종지(一切種智)라, 다 아신 분도 있고 또는 같은 우리 불교 성자라도 부처님 같이는 몰라도 조금 아신 성자도 있고 가지각색입니다. 우리 불교 [화엄경(華嚴經)]에서 보면 같은 성자도 열 층계가 있단 말입니다. 열 단계가 말입니다. 초환희지(初歡喜地)라. 맨 처음에 도를 깨달아서 아주 환희 충만한, 한도 끝도 없이 행복(幸福)을 느끼는 그런 데서 초환지라. 환희지입니다. 아무리 점잖은 사람도 환희지 들면 그때는 춤을 안 출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기쁘든가 말입니다.


마하가섭 같은 그런 분은 석가모니 부처님으로 부터서 정통 법을 받으신 어른 아닙니까만 그 분은 굉장히 근엄한 분인데 아, 그 분도 환희지를 성취할 때에 그냥 춤을 너울너울 추었단 말입니다. 일반 사람들이야 얼마나 좋겠습니까. 환희지까지 미처 못 간다 하더라도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환희지까지 가면 그때는 벌써 성인인데 성인데 미처 못 간다 하더라도 삼매에 들어가면 들어간 만큼 우리 행복도 차근차근 정도가 더한단 말입니다.


자성미타(自性彌陀) 유심정토(有心淨土)


그래서 여러분들께서 외 두실 것은 유심정토 자성미타(有心淨土 自性彌陀)라. 바꾸어서 자성미타유심정토라. 이렇게 해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꼭 그것은 오늘 외어 두셔야 합니다. 자성미타 유심정토라. 자성미타란 것은 자성은 스스로자(自), 성품 성(性)자 우리 본래성품(本來性品)이란 말입니다.


참선(參禪)의 교과서 같은 [육조단경(六祖壇經)]은 이것은 바로 자성(自性)을 깨닫는 견성오도(見性悟道)하는 내용을 말씀한 경전(經典)입니다. 육조단경이란 말입니다. 자성이란 것은 스스로자(自)자, 성품 성(性)자, 바로 우리 본성 불성이란 말이나 똑같습니다. 자성이라.


그래서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라. 자성은 바로 우리 불성인데 자성의 본래의 자리는 조금도 번뇌(煩惱)에 오염(汚染)되지 않았으니까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그럽니다. 그래서 자성을 깨닫는 것이 이른바 견성오도란 말입니다. 스스로자(自), 성품성(性)자, 자성을 깨닫는 것이 견성이라. 볼견(見)자, 성품성(性)자, 그 자성을 보고 깨닫는단 말입니다. 그래서 모든 참선은 한 말로 하면은 다 자성선(自性禪)입니다. 자성선이라, 육조단경 말씀은 자성선 자리를 고구정녕으로 이렇게 저렇게 말씀하신 내용으로 충만 돼있습니다.


그래서 자성미타(自性彌陀)라. 우리의 본래면목 자성이 바로 아미타불(阿彌陀佛)인 것이고 또는 유심정토(有心淨土)라. 마음이라는 것은 어디에가 국한된 한정이 없이 끝도 갓도 없이 우주에 충만해 있는 것인데 우리 마음이 열려지지 않고서 마음이 폐쇄가 되어서 제한돼 놓으면 안보이지만 마음을 열면 제 아무리 고통스러운 것도 고통이 아니라 모두가 다 그대로 극락세계란 말입니다.


그래서 유심정토라. 오직 유(唯)자, 마음심(心)자, 정토란 것은 극락세계란 말하고 똑같습니다. 맑을 정 조촐할 정(淨)자, 흙토(土)자 말입니다. 광명정토(光明淨土)나 또는 그냥 정토나 극락세계나 다 같은 뜻입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 대로 꼭 외어 두셔야 할 것은 가장 쉬운 공부를 두고서 우리가 어려운 공부를 할 필요는 없겠지요.


특히 재가 불자님들은 더욱 그렇지 않습니까. 하기 때문에 염불선(念佛禪)공부를 하되 염불선을 그냥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이 부처와 나와 둘이다. 이렇게 생각하면은 염불선 공부가 못됩니다. 부처와 나와, 모든 존재와 나와, 우주와 나와 절대로 둘이 아니다. 이렇게 해서 우주의 부처님 도리어 근본자리를 여의지 않고서, 바꿔서 말하면 본 성품을 여의지 않고서 우리가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하나 또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하나 또는 이름을 부르기가 싫어서 가만히 명상(瞑想)에 잠기나 그러면  바로 그때는 가장 좋은 참선법(參禪法)이란 말입니다.


화두를 드나 화두를 안 드나 그건 상관이 없습니다. 들고 싶으면 들고 또는 들기 싫으면 안 든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이 근본자리, 불성자리, 자성자리에 가 있으면 바로 참선이란 말입니다. 그렇다고 생각할 때는 일본(日本)사람들 선방(禪房)같이 염불(念佛)을 화두(話頭)로 하는 황벽종(黃檗宗)을 하든 또는 화두가 없이 그저 잠자코 비추어 보는 명상 선을 하는 묵조(墨照)를 하든 또는 화두를 참구하는 임제선을 하던 다 좋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뭣이 좋다. 궂다 할 것이 아니라 역시 참선법의 제일 좋은 것은 우리 불심 그대로 우리 자성 그대로 닦는 법인데 참선법은 근본 마음자리, 근본 불성자리만 우리가 떠나지 않으면 근본불성에다가 우리 마음을 둔다고 생각할 때는 염불을 하나 또는 화두를 하나 화두를 의심하지 않으나 모두가 다 참선법이란 말입니다.


가장 쉽고 행복(幸福)한 법(法)으로 성불(成佛)하시기를


이렇게 하셔서 제일 쉬운 참선법으로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자성미타유심정토(自性彌陀  有心淨土)라. 우리 자성이, 바로 자성이 이것이 그야말로 바로 아미타불(阿彌陀佛)이고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고 불심(佛心)이고 불성(佛性)이다. 또는 우리 마음이 청정하면 어디에 가서 극락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천지우주가 모두가 극락세계인데 우리 마음이 더러우니까 더럽게 보이는 것이지 우리 마음이 참말로 맑은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이 자리가 바로 극락세계(極樂世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할 일은 우리 마음을 정화할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이렇게 하셔서 꼭 다시없는 가장 쉽고도 가장 행복(幸福)한 그런 법으로 성불(成佛)하시기를 간절히 빌어마지 않습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시아본사석가모니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