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3.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마음의 고향

28집(1) 천상천하유아독존

 

 

 

 

1.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2002년 5월19일 부처님오신 날 봉축법어-성륜사


부처님 오신 날은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에 가장 축복스러운 봉축일(奉祝日)입니다.

부처님께서 탄생 하시자마자 바른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또는 왼손으로 땅을 가리키면서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 이와 같이 갈파(喝破)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을 단순히 훌륭한 금언(金言)이구나, 성인(聖人)들의 성언(聖言)이구나, 이렇게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에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존재(存在), 나라는 생명(生命)은 대체로 어떠한 것인가 하는 이른바 참자기, 참자기에 대한 문제가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우리 인생관(人生觀)문제란 말입니다.


우리가 불행(不幸)스럽고 또는 행복(幸福)스러운 것도 우리 인생이 무엇인가 하는 자기의 참다운 실상(實相)을 아는가 모르는가에 있습니다.


그리고 인생관을 확립을 해야 비로소 세계관(世界觀)도 거기에 따라서 확립이 되는 것입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이란 것은 ‘하늘위에나 하늘아래나 이 천지간에 나 홀로 존엄(尊嚴)하다’ 이렇게 해석(解釋)이 됩니다. 그러나 단순히 그러한 해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째서 나 홀로 천지(天地)간에 존엄스러운 것인가? 나라고 하는 문제 우리 중생(衆生)들은 나라는 것을, 나라는 본바탕, 나라는 실상, 나라는 실존을 잘 모릅니다.


우리 중생이 나라는 것은 불교적인 의미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에 모든 존재를 바로 본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중생이 보는 나라는 것은 사실은 가짜 나입니다 망령될 망(妄)자 나 아(我)자 이른바 망령된 나입니다.


어째서 그런고 하면은 모든 존재는 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서 중요한 가르침이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이런 가르침이 있지 않습니까.  모두 무상하단 말입니다. 무상하단 말은 그냥 덧이 없다, 슬프다, 그런 정도가 아니라 모든 존재는 변화해서 마지않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 몸을 구성한 세포를 위시해서 주관적(主觀的)으로 보나 또는 객관적(客觀的)으로 보나 모든 것은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그때그때 순간순간 변화해서 마지않는단 말입니다.


어째서 순간순간 변화해서 마지않는가 하면은 일체존재(一切存在)라는 것은 인연생(因緣生)이라, 인연 따라서 잠시간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것에 불과 합니다. 한순간도 머무름이 없이 변화무상(變化無常)한 것은 사실은 즉 다시 말씀드리면은 시간적(時間的)으로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은 그때는 공간적(空間的)으로도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제행이 무상이라, 모든 것은 그때그때 변화해서 마지않기 때문에 이런 것은 또 동시에 제법무아(諸法無我)라, 제법무아라. 그 독립적인 존재가치(存在價値)를 부여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모든 것은 변화해서 마지않는 제법무아라, 모든 것은 나라고 할 수 없는, 나라는 것은 본래 없는 무아(無我)란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지금 내 몸뚱이가 이렇게 있고 나는 지금 김아무개 박아무개인데 이런 것이 엄연히 내 존재가 아닌가. 이것은 우리 중생이 잘 보지를 못해서 그럽니다.


우리 중생은 왜 보지를 못하는가 하면은, 우리 중생들은 어느 누구나가 다 탐욕심(貪慾心)과 분노(憤怒)하는 마음과 또는 진리(眞理)를 바로 못 보는 어리석은 무명심(無明心) 이러한 마음이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이 없는 사람들은 성인(聖人)입니다.


이른바 삼독심(三毒心)이라, 욕탐 하는 욕탐심(慾貪心)이라, 분노하는 마음이라, 일체 존재를 바로 못 보는 무지한 마음, 무명(無明)한 마음, 이런 마음 때문에 우리 중생들은 자기 존재도 바로 못보고 또는 대상적인 객관세계도 바로 보지를 못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중생들이 가지고 있는 번뇌(煩惱)를 간단히 포괄해서 말씀을 드리면 아집이라. 나아(我)자, 집착할 집(執)자, 아집(我執)이라. 우리 중생은 나라는 것에 집착합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모든 존재는 나를 위시해서 제행이 무상이고 제법이 무아라, 나라는 존재는 사실은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이른바 유물주의자(唯物主義者)라. 특히 물질만능시대(物質萬能時代), 오늘같이 기계만능시대, 기술만능시대는 더구나 있는 것은 다 물질뿐이고 정신(精神)은 물질에 부수된, 사실 있지도 않는 이것은 거기에 따른 작용에 불과한 것이지 정신은 허무한 것이고 사실 있는 것은 물질 뿐이다. 이렇게 잘못된 가치관(價値觀) 때문에 세상은 자기도 불행하고, 가정도 불화스럽고, 사회도 항시 혼란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나라는 고집과, 또 법집(法執)이라. 법집이란 것은 어떠한 것이 존재하는 그러한 것은 법집인 것이고, 또는 나라는 고집은 이것은 나아(我)자 집착할 집(執)자 아집(我執)이란 말입니다.


우리 중생의 번뇌를 포괄해서 말씀드리면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나라는 집착, 나라는 것이 진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부처님 말씀은 진리 그대로 말씀입니다. 사실 그대로 말씀입니다. 사실이 아닌 것을 부처님께서 희망적(希望的)으로 이상적(理想的)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은 모두가 다 사실 그대로 말씀입니다.


사실 그대로 말씀하신 그것이, 우리 중생이 나라고 집착한 것은 사실이 아니란 말입니다. 또는 우리가 대상적(對象的)으로 저 산이 있다. 또는 저 하나의 자연계(自然界) 두두물물(頭頭物物)의 자연현상이 있다. 또는 하늘에는 태양계가 있고 은하계가 있다. 이러한 객관적으로 대상화 시킬 수 있는 그런 것도 사실은 사실이 아니란 말입니다. 실존(實存)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참자기, 그 우주(宇宙)의 하늘이나 땅이나 우주에 통틀어서 모든 존재 가운데서 나라는 것이 제일 존엄스럽다. 이 말은 무엇인가 하면은 아까도 얼핏 말씀드린바와 같이 참다운 자기, 참다운 자기는 바로 우주의 실존이나 똑 같습니다. 참다운 자기라는 그런 뜻이나 우주의 실상(實相)이다. 이런 뜻이나 똑 같습니다. 


참다운 자기는 이른바 전문적인 불교말로 하면은 큰대(大)자 나아(我)자 대아(大我)라. 또는 참진(眞)자 나아(我)자 진아(眞我)라. 이런 것이 이른바 참다운 자기란 말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참다운 자기를 아는 것은 어떠한 것보다도 중요합니다. 참다운 자기를 모른다는 것은 이와 같이 비참하고, 이와 같이 불행한 일이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단순히 논리적(論理的)으로 진리(眞理)에 이끌어 가는 가르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한테 행복을 보장하는 가장 위대한 그러한 행복과 기쁨이 무엇인가, 이런 것으로 우리 인생을 인도한단 말입니다. 진리라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진리가 아닌 것은 처음에는 행복같이 보일는지 모르지만은 그것은 순간적인 쾌락(快樂)에 불과한 것이고 참다운 인생의 행복으로 우리를 이끌어가지를 못합니다.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이 기술시대, 또는 물질만능시대, 이런 것만이 사실로 생각한 것이 이른바 흔히 사회에서 아무렇게나 문란스럽게 행동하는 젊은 세대 아니겠습니까. 젊은 세대를 비판해서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젊은 세대는 우리 기성세대한테 배우고 산단 말입니다. 우리 기성세대가 바로 살면 젊은 세대도 그때는 바로 설수 밖에 없겠지요. 그러나 우리 기성세대가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라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어느 종교(宗敎)나 진리적인 의미에서는 다 똑같습니다. 다만 그런 가운데서도 부처님 가르침이 가장 철저하게 인생은 대체로 무엇인 것인가? 우리 사람은 어떻게 태어나서 또는 갈 때는 어디로 갈 것인가? 우리 인간은 과거전생(過去前生)에 지은바 업(業)으로 태어납니다.


업 가운데는 악업(惡業)도 있고 선업(善業)도 있지 않습니까. 악업은 자기나 남을 위해서 해로운 우리 행위가 업이란 말입니다. 업이란 행동(行動)이란 말이나 똑같습니다. 선업은 자기와 남을 위해서 좋은 쪽으로 안락(安樂)한 쪽으로 인도(引導)하는 그러한 것이 착할 선(善)자 업 업(業)자 이것이 선업(善業)입니다. 그러나 그 악업은 다시 말할 것도 없고, 선업이라 하더라도 업을 지어놓으면 우리 인간은 윤회(輪廻)를 합니다. 과거 전생에 지은대로 금생(今生)에 그대로 받는 것이고 또는 금생에 지은대로 앞으로 장차 또 받습니다.


우리 생명은, 생명 자체는 이것은 본래 죽음이 없습니다. 허망무상(虛妄無常)한 우리 몸뚱이는 그때그때 우리 업 따라서 여기가 태어나고 저기가 태어나고 한다 하더라도, 또는 모양이 있다가 없고 없다가 생기고 한다 하더라도 우리 생명자체는 과거(過去), 현재(現在), 미래(未來)를 통해서 절대로 죽음이 없습니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은 우리 생명자체는, 생명자체는 바로 불생불멸(不生不滅)하고 불구부정(不垢不淨)한 낳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또는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는 이것은 우주의 참다운 성품인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불성(佛性)입니다.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불성(佛性)이란 말이나 또는 스스로자(自)자 성품 성(性)자 자성(自性)이란 말이나 또는 법 법(法)자 성품 성(性)자 법성(法性)이란 말이나 또는 참다운 열매 실(實)자 성품 성(性)자 실성(實性)이란 말이나 이런 것은 다 똑 같은 뜻입니다.

불경(佛經)에 여러 가지 법문이 하도 많아서 똑 같은 뜻을 이렇게 표현도 하고 저렇게 표현도 했지만은 그 궁극적인 본 의미는 똑같습니다.


아까 말씀마따나 참나는 이른바 참진(眞)자 나아(我)자 진아(眞我)란 뜻이나, 또는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불성(佛性)이란 뜻이나, 또는 자성(自性)이란 뜻이나 법계(法界)란 뜻이나 법성(法性)이란 뜻이나 똑 같은 뜻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참자기를 아는 사람은 동시에 이 법계, 법계(法界)란 것은 천지우주(天地宇宙)의 모든 세계(世界) 객관 주관 모든 세계가 법계입니다. 법계의 뜻도 훤히 아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성(人間性)은 꼭 금생에 나와서 배운 대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금생에 나와서 배운 것은 이것은 하나의 분별지혜(分別智慧), 분별지혜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우리 잠재의식(潛在意識)에는, 우리 잠재의식 이것은 바로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불성(佛性)이기 때문에 이것은 만능(萬能)의 자리입니다.


우리는 자기 인생, 자기 가능성을 제한(制限)해서는 안 됩니다. 부처님 가르침이나 위대한 철학(哲學)이나 모두가 다 자기 인간성에 갖추어 있는 공덕(功德)을 제한하지 않습니다.

저 옛날 그리스의 한 500년 전에 태어난 파르메르데스나, 또는 헤라클레이토스나, 그 뒤에 나온 소크라테스나, 또는 플라톤이나 이런 분들도 모두가 다 위대한 분들입니다.

성인(聖人)이 긴가아닌가 우리는 확실히는 모른다 하더라도 성인이 아니면 그분들의 가르침이 오늘날까지 이 철학 계나 여러 가지 그런 우리 인간세계에 있어서 지금도 존중하고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또는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 입니다 진리가 아니면 오랜 동안, 오랜 동안 비판(批判)을 겪고 여러 가지 수난 가운데서 살아남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꼭 부처님 가르침만이 진리고 다른 것은 진리가 아니다. 이렇게 우리가 좁은 마음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진리라는 것은 바른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에 즉 부처님같이 모든 것을 깨달으신 성자의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이 천지우주가 모두가 다 부처님 세계란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보리수하(菩提樹下)에서 성도(成道) 하실 때에 성불(成佛)하실 때에 그때에 부처님만 성도하신 것이 아니라, 부처님께서 성불을 못하신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산은 그대로 산같이 보이고 너는 너로 보이고 나는 나로 보이고 했지만은 부처님께서 참다운 진리를 깨달은 청정한 부처님 눈, 청정한 불안(佛眼)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천지가 다 부처님뿐이란 말입니다.


오늘 부처님오신 날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비록 지금 내가 아는 것은, 자기가 아는 것은 금생에 나와서 배운 그 정도밖에는 아니다. 이렇게 생각을 절대로 말으시고 그 부처님 지혜, 모양은 다르고 시대는 다르다 하더라도 부처님께서 간직하고 계시는 불심(佛心) 부처님 마음,


부처님의 공덕과 우리 마음은 똑 같습니다. 마음이란 것은 본래 모양이 없지 않습니까. 여기 계시는 여러분들 마음이나 제 마음이나 마음자리에서는 다를 수가 없습니다. 또는 과거 사람들 마음이나 지금 사람 마음이나 마음자리에서는 다를 수가 없습니다. 모양이 있고 그러면은 다를란가 모르겠지만 이 사람 마음, 저 사람마음, 마음은 원래 모양이 없단 말입니다.


부처님도 참다운 부처님은 이른바 법신(法身)부처님입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님이 나오시고 안 나오시고 상관이 없이 우주(宇宙)에 영원히 계시는 참다운 부처님은 이른바 법신부처님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그 부처님 마음, 부처님 마음은 바로 법신부처님을 말하는 것인데, 그 법신부처님 마음과 우리 마음과도 똑 같습니다.

아무리 세월이 오래 흘러간다 하더라도 시간적인 공간적인 그런 제한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자리에서는 똑같단 말입니다.

모양이 없는 것은 시간(時間) 공간(空間)을 초월(超越)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우리 마음의 참모습 이것이 참다운 진리(眞理)란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의 참모습을 모르는데서 우리 인간의 불행이 있습니다.


따라서 아까 말씀마따나 우리 인간은 나라는 고집을 하고 또는 모든 존재가 사실로 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이것은 아까도 얘기한 바와 같이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모두가 다 이것은 무상한 것이다. 그때그때 변화무상한 것이다. 또는 제법무아(諸法無我)라, 모두가 독립적으로, 실존적으로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그러면 있는 것은 무엇인가? 참말로 있는 것은 열반적정(涅槃寂靜)이라, 그 영생해탈(永生解脫)의 자리, 영원히 죽지 않는 자리, 이것이 참다운 우리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인 생명(生命)이란 말입니다.


우리 인간이 본래면목(本來面目)자리, 참다운 자리를 모를 때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때는 어느 때나 변함없이 윤회(輪廻)를 합니다. 과거(過去)에 태어나고 또는 금생(今生)에 태어나고 내생(來生)에 태어나고 비단 그뿐만 아니라 몇 생을 몇 만생을 우리가 더 경과한다 하더라도 참다운 자기를 알고서 해탈(解脫)해버리면 모르거니와 참다운 자기를 모를 때는 어느 때까지나 윤회하면서 사람으로 갔다가, 더 잘못 살면 아귀(餓鬼)가 됐다가, 더 잘못 살면 지옥(地獄)도 갔다가, 꼭 그러는 것입니다.


지옥이나 그런 것은 비유해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꼭 사실로 있는 거란 말입니다. 천상(天上)도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어떻든 간에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진리를 모르면 우리는 어느 때까지나 윤회하면서 뱅뱅 그 업(業)따라서 우리가 태어나면서 인생고(人生苦)를 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중생이 사는 것은 업을 잘 지어서 업도 같은 업, 선업이나 악업이나 거기에 그치지 않고 도업이라 길 도(道)자 업 업(業)자 도업(道業)이라, 도업은 이것은 해탈의 업이란 말입니다. 해탈의 업을 우리가 지어야 합니다.

해탈의 업을 지을라면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천지우주의 본래는 모두가 다 부처뿐이다. 어느 것도 부처 아닌 것이 없다. 그 부처에는 만능의 만 공덕이 다 원만히 갖추고 있다. 이렇게 확실히 믿고서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인 삼학도(三學道)라, 철저한 계행(戒行)을 지키고 또는 우리 마음을 항시 부처님 경계(境界)에다 머물게 하는 그런 정신통일(精神統一),

불교(佛敎)에서 말하는 정신통일은 그냥 명상(瞑想)적인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을 그 불성자리,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불성이란 것은 참다운 진리이기 때문에 참진(眞)자 같을 여(如)자 진여(眞如)라고 합니다.


진여불성을 알아야 그래야 불교의 참다운 면목을 안단 말입니다. 진여불성을 모르면 불교를 모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깨달은 분들은 우주가 바로 진여불성 뿐인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공부하는 것도 항시 진여불성을 목표로 해야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명상한다 하더라도 진여불성 자리에다가 우리 마음을 두고 그 자리를 구해야 참다운 명상이 되고 참선(參禪)이 되고 한단 말입니다.

우리가 염불(念佛)을 한다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외인다 하더라도 그 불성(佛性)자리에다 우리 마음을 두고 불성을 구해야 한단 말입니다.

불성과 하나가 되면 하나가 될수록 불성에 가까워질수록 우리는 더욱더, 우리 마음은 넓어지고 또는 깊어지고 차근차근 우리가 부처님과 가까워지다가 드디어는 우리 마음의 번뇌(煩惱)만 떠나버리면 나라는 고집, 너라는 고집, 그런 집착(執着)만 떠나버리면 그때는 우리가 바로 부처가 된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철저한 계행(戒行)을 지켜야 합니다. 계행을 지키는 것은 그렁저렁 사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 법대로 산단 말입니다. 부처님 법대로 살기 위해서는 우리 먹는 것도 함부로 먹어서는 안 됩니다.

대체로 보면은 함부로 먹어서 병이 납니다. 저 같은 사람은 올해 80이나 먹어서 별로 함부로 먹지 않았지만은 죽을 때가 가까워지니까 이따금 허리도 아프고 하기도 합니다만 아무튼 우리들은 너무 함부로 먹습니다.


고기를 먹는 것도 우리 건강에 좋지 않고 많이 먹는 것도 절대로 좋지 않습니다. 우리 몸이 비대한 것도 좋지 않습니다. 우리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분들은 대체로 함부로 먹는데 그 원인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선 음식에 주의해서 정말로 적게 먹고 가급적이면은 채식주의(菜食主義)를 하시고 그렇게 하시면서 도덕적(道德的)으로 흠이 없어야 합니다. 흠이 없기 위해서는 부처님 가르침을 항시 우리 표준(標準)으로 해야 한단 말입니다.


이렇게 하시면서 우리 마음을 아까도 말씀드린바와 같이 부처님 자리에다 항시 두고 부처님 자리 이것은 모든 생명(生命)의 근본(根本)자리고 동시에 그 자리는 광명(光明)의 자리입니다. 한도 끝도 없는 광명의 자리입니다.

진여불성 이란 것은 그냥 무미한 것이 아니라 모든 행복과 모든 가능을 갖춘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알 수 있는 그런 자리입니다. 그런 자리가 바로 진여불성의 자리입니다.

따라서 거기다가 우리 마음을 두고 염불(念佛)을 하고 우리가 명상한다고 생각할 때에 우리 마음은 차근차근 광명스럽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며칠만  우주의 가득 찬 부처님의 광명(光明)을 생각하면서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나 또는 기타 다른 공부도 좋습니다. 어떤 방법으로 하든지 간에 그 불성자리, 천지우주(天地宇宙)가 모두가 다 진여불성(眞如佛性)인 광명(光明)으로 충만(充滿)한 자리, 거기다가 마음을 두고 공부를 하시면 여러분 얼굴도 차근차근 빛날 것이고 또는 웬만한 잔병도 다 떨어지고 하는 것입니다.


행복(幸福)은 자기가 창조(創造)하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마따나 우리한테 제일 소중한 것은 부처님께서, 그 부처님오신 날에 맨 처음 선언하신 참자기, 천상천하에 유아독존이라, 다시 둘도 없는 참자기, 우리의 참 본래면목 자리, 이런 자리를 우리가 한시도 놓치지 말고 오늘 관등(觀燈)을 연등(然燈)을 하실 때도, 그 연등이란 것은 그냥 덮어놓고서 복(福)을 비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 스스로가 끝도 갓도 없는 우주의 광명을 우리가 관상(觀想)하고 또는 우리 마음이 우리 생명의 본래에 있는 광명자리로 가까워지기 위해서 우리 마음의 어두운 우리 마음을 훤히 부처님의 성품(性品)으로 비추고 확장(擴張)시키고 영원히 해탈(解脫)을 시키는 그런 연등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하셔서 한없는 정말로 윤회(輪廻)를 빨리 떠나서, 나쁜 업을 짓고 여러 가지 업 때문에 우리가 이곳으로 저곳으로 윤회하는 뱅뱅 도는 우리 불행을 떠나서 정말로 영생해탈(永生解脫)이라, 참다운 진리(眞理)의 세계로 나아가시기를 간절히 빌면서 오늘 봉축(奉祝)의 날, 부처님오신 날 법어(法語)로 갈음 합니다.


우리 불자님들 이렇게 좋은날 이런 쾌청한 날 이렇게 같이 모이셔서 대단히 반갑고 대단히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시아본사석가모니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