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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마음의 고향

마음의 고향 27집(1)





머리말

 

 

* 이 법문은 참선(參禪)의 대종장(大宗匠)이신 청화대선사(淸華大禪師)가 40년간의 일일일식(一日一食) 장좌불와(長坐不臥)의 처절한 토굴수행을 마치고 1985년 태안사(泰安寺)에서 한국근세 처음으로 삼년결사(三年結社)를 결행하시기 위해서 6.25이후 폐허가 된 도량(道場)을 정화하고 그 기운을 회복하기 위하여 사부대중들과 함께 4박5일의 하계용맹정진(夏季勇猛精進)을 감행하시면서 참선(參禪)에 대한 주옥(珠玉)같은 법문(法門)을 하루 한 시간씩 5번을 설법하신 것으로 참선의 실참실수(實參實修)의 모든 것이 압축되어 들어 있습니다.

 

청화 대선사의 ‘참선이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올바른 참선인가?’ 이 법문으로 여러분의 귀중한 수행의 지표로 삼으시길 간절히 기원 드립니다.

 

 

<청화불교대학 본정 합장>

 

<19850731-하계용맹정진 입제법문>

‘참선(參禪)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올바른 참선인가?’

 

<해탈의 자유는 먼저 자기 마음에서 구하라>

 

오늘 같이 삼복더위에는 더위에서의 해방(解放), 더위에서의 해탈(解脫)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폭서(暴暑)를 떠날 것인가? 그러한 더위의 해방을 갈망(渴望)합니다.

또 우리가 추울 때는 추위에서 해방, 또는 무슨 정치나 그런 제도면의 제약(制約)에서는 그런 제약의 해방, 이러한 것을 갈구하는 마음이 우리한테는 누구나가 있습니다.

 

이런 것을 통틀어서 본다고 생각할 때에 우리 인간의 희구(希求)하는 마음 가운데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무어라고 해도 자유(自由)입니다.

인류역사 이래 자유 같이 매력 있는 말도 없고, 자유를 위해서 무수한 사람들이 노력도 하고, 희생(犧牲)도 당해 왔습니다.

 

허나 자유를 구하고 추구하는 자세가 진리(眞理)에 별로 맞지가 않았단 말입니다.

이러하니 자유는 구하지만 참다운 자유를 구하지도 못하고, 인류사회의 해악이나 그런 모순은 더욱더 가중(加重)되는 그런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를 본다하더라도 몹시 자유를 애타게 구합니다. 헌데 그와 같이 구하는 것은 그렇게 열열 하지만 어째서 자유스럽게 못되는 것인가?

이것은 자유를 구하는 방향(方向)이 잘못되어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구하는 자유는 한도 끝도 없는 것인데,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자유는 상대유한적(相對有限的)인 사회에서 한정(限定) 되어 있단 말입니다. 헌데 사람들은 한정이 있는 그 가운데서 구하려고만 합니다. 그러니까 안 됩니다.

 

한정이 없는 우리 마음에서 구하려고 하면 그때는 구할 수가 있는 것인데 마음에서 구하는 것은 저만치 밀어두고서 우선 풍요한 물질, 생활의 편리, 우리 몸뚱아리의 안전, 그런 방향에서 구하려고 하니까 자유가 잘 구해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다시 바꿔서 말씀하면 성자(聖者)의 가르침, 성인(聖人)들은 우리 주변에서 자유를 구하지 않고 마음에서 구하는 그런 쪽으로 자유를 추구도 하고 자유를 완전히 터득도하고 우리한테 교시(敎示)를 하신 것입니다.

허나 사람들은 그렇지 않고서 그냥 겉으로 구한단 말입니다.

겉으로 구하는 한에는 자기 마음의 평화(平和)도 얻을 수 없고, 따라서 가정(家庭)의 화합(和合)이나 우리 사회(社會)의 복지(福祉)나 그런 것도 우리가 바랄 수가 없습니다.

 

오늘 같이 더운 날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우선 우리가 더위로 부터서 해방을 바란단 말입니다. 더워서 숨이 컥컥 막힐 정도로 삼복더위는 우리를 괴롭힙니다만 그보다 또 역시 가장 뜨거운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인간의 마음의 열뇌(熱惱)입니다. 인간의 마음의 번뇌(煩惱)입니다. 우리가 더러는 심장병(心臟病)도 생기고, 우리가 그런 몹쓸 병이 생깁니다만, 보통 그런 병은 우리 가슴이 타서 그럽니다. 욕구불만(欲求不滿)이 되어서 그럽니다.

 

청량삼매(淸涼三昧)라!

우리 가슴이 시원하고, 어떤 경우에 처한다고 하더라도 항시 쾌적한 마음이 되면 그때는 그런 몹쓸 병은 생기지가 않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아사세왕(阿闍世王)이 있었습니다. 빈바사라왕(頻婆娑羅王)의 왕자로 태어나서 자기 아버지를 유폐(幽閉:가두고)하고 아버지를 시혐(猜嫌:시기하고 싫어함)도 하고 말입니다. 자기 어머니마저도 유폐한 사람 아닙니까. 그런 참 극악무도(極惡無道)한 사람인데, 아사세왕은 그와 같이 극악무도하기 때문에 그런 과보(果報)로 해서 몸에 인두창(咽頭瘡)이라는 아주 난치의 종기가 생겼단 말입니다.

물론 자기 아버지 왕위를 찬탈해서 왕이 되었으니까, 그리고 그 당시에 마가타국(摩伽陀國)은 인도(印度)에서 가장 큰 나라입니다. 따라서 약도 맘대로 구할 수가 있고 또는 명의(名醫)도 많이 구할 수가 있었겠지요.

허나 무슨 약을 쓰거나 아무리 훌륭한 명의한테 물어봐서 병을 고치려고해도 어떻게 고칠 수가 없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기바(耆婆)존자는 부처님의 시의(侍醫)입니다. 부처님의 시의입니다. 또 아사세왕(阿闍世王)과는 이복형제간입니다. 동시에 그 당시엔 대신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사세왕이 기바한데 상의를 했단 말입니다.

그대는 명의이고, 위대한 인물인데, 과연 난치의 병을 어떻게 나을 것인가? 이렇게 물었단 말입니다. 역시 기바(耆婆)는 신심(信心)도 있고 왕을 숭상(崇尙)한지라.

대왕이시여! 대왕의 병은 마음병입니다. 대왕의 병은 업장(業障)의 과보입니다. 업장의 과보로 해서 난 병은 먼저 참회(懺悔)를 해야 합니다.

 

<참회공덕(懺悔功德)>

 

우리는 공부할 때에 참회공덕을 소홀히 합니다만 참회공덕은 굉장히 큰 것입니다.

참회를 하면 그때는 가령 우리 업장이 무겁다 하더라도 과거 숙세에 우리가 선근(善根)이 부족해서 묵은 업장을 지었다 하더라도 전중경수(轉重輕受)라, 무거운 것을 돌이켜 가볍게 간단 말입니다.

또한 동시에 참회가 사무치면 그때는 우리 업장도 소멸시킨단 말입니다. 그와 같이 참회공덕(懺悔功德)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기도(祈禱)를 모시나 또는 참선(參禪)을 하나 먼저 참회를 해야 합니다.

 

저 같은 사람은 맨 처음에 승려로 해서 입산(入山)했을 때에 백양사(白羊寺) 운문암(雲門庵)으로 했는데, 운문암식은 여름이나 겨울이나 이와 같이 3개월 동안 공부할 때는 먼저 일주일 동안 참회를 시킵니다. 일주일 동안 팔뚝에다 불을 놓고서 연비를 해가지고 참회를 시킵니다.

그래서 그런 흉터가 지금도 이런데 가서 있습니다만, 일주일 동안 불을 놓고 참회를 시키니까 처음에는 잘 모르지만, 정말로 자기 살이 타들어 가는데 그때 느끼는 기분, 처음에는 뜨겁지만 참회의 눈물이 나올 때는 그때는 뜨겁지가 않습니다.

 

선(禪)의 법문(法門)에도 심두(心頭)를 멸각(滅却)하면은 불도 오히려 써늘하다.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마음만 깨달으면 불도 오히려 서늘하다는 것입니다.

저 우리 불성(佛性)에는 뜨거움도 없고 찬 것도 없습니다.

다만 중생의 제한된 업장 따라서 찬 것을 느끼고 뜨거움을 느낍니다.

따라서 심두멸각하면, 우리 마음으로 초월할 수 있는 기운이 있다고 하면은 그때는 불도 오히려 뜨겁지가 않단 말입니다. 기합을 하는 사람들이 기합을 넣고서 칼로 툭 찔러도 피가 안 나오는 것을 보십시오.

 

기바(耆婆)가 그와 같이 ‘대왕의 병은 참회를 해야 합니다’하니까. 아사세왕도 역시 제바달다(提婆達多) 꼬임에 넘어가서 자기가 나쁜 짓도 많이 하고, 자기 부모님, 아버지를 시협하고 어머니를 유폐를 시켰으니까. 또 세존(世尊)을 배반해서 제바를 따랐으니까 그 죄가 얼마나 막중합니까. 자기도 사람인지라 그때는 느끼겠지요. 자기 몸이 그와 같이 병고 때문에 시달리니까 느낀단 말입니다. 그래서 정말로 참, 진정으로 참회를 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의 이렇게 무거운 죄를, 도저히 저의 무거운 죄가 면(免)할 수 없습니다만, 면할 수 없다 하더라도, 저는 참회를 안 할 수 없습니다.’하고서 참회를 했단 말입니다.

우리 부처님께서는 시방삼세(十方三世)를 두루 보십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께서는 우주(宇宙)에 충만(充滿) 되어져 있는, 우주 생명(生命)자체인 법신(法身) 부처님과 똑같습니다. 저 하늘 끝에서 누가 생각을 한다고 하면은 그 순간 부처님은 감응을 받는 것입니다. 어디 있으나 모두가 부처님 손안에 있습니다.

 

우주는 바로 부처님이십니다. 우주의 참다운 생명을 그대로 깨달은 분이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이십니다. 부처님께서는 아사세왕이 참회하신 것을 아셨단 말입니다.

 

 

<애월삼매(愛月三昧)>

 

그래서 애월삼매(愛月三昧)라, (사랑애(愛)자 달월(月)자) 태양(太陽)이 비록 좋고 관음화신(觀音化身)이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태양이 없이는 못살지만은, 우리가 더울 때는 태양보다도 도리어 달이 더 좋습니다. 달밤이 아무리 덥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이 얼마나 쾌적합니까.

그런데 애월삼매라, 자기 앞에 달을 훤히 관조(觀照)할 수 있는 삼매에 척 든다 말입니다.

 

일반 중생은 들 수가 없습니다만 부처님께서는 그런 애월삼매에 딱 드십니다. 딱 드시고서 어느 누구한테 애월삼매의 광명을 보내야 하겠다 하시면 그 사람한테 애월삼매의 서늘한 아주 청량(淸涼)한 광명(光明)을 보낸단 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애월삼매에 드셔서 아사세왕한테 애월삼매의 그런 광명을 보냈단 말입니다. 그런 서늘한 광명이 아사세왕의 그런 열뇌(熱惱), 어쩌지 못하는, 그러한 업장 때문에 든 그런 종기 병인지라, 이윽고 얼마 안 가서 그 종기 병이 사르르 가셔간단 말입니다.

 

지금 렌트겐 광선이나 레이저 광선 가지고 사람 병도 낫는 걸 보세요. 지금 신문을 보면 레이저 광선으로 공중에 뜬 위성도 결국은 추락을 시킬 수 있다는 그런 연구를 한다고 합니다.

일반 상대유한적인 물리적 광명도 그와 같이 위대한 힘을 내는 것입니다.

헌데 불성광명(佛性光明)은 그러한 물리적 광명보다 훨씬 더 위대하고 근원적인 광명입니다. 불성은 물리적 광명과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유정무정(有情無情) 유상무상(有相無相) 일체존재(一切存在)의 근본적인 근본생명(根本生命) 이것이 부처님 광명입니다.

 

따라서 거기에 안주해 있는, 거기에 머물러 있는 부처님께서 광명을 보내신단 말입니다. 뜨거움도, 또는 추움도, 선도 악도 다 초월(超越)한 영원히 상주하는 그 광명(光明), 일체 행복(幸福)과 일체 자비(慈悲)와 지혜(智慧)를 다 갖춘 광명, 그런 광명을 보낸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순식간에 아사세왕의 그런 몹쓸 병이 그때는 나아버린단 말입니다.

 

그래서 아사세왕은 병이 쾌유가 되어서 나중에는 그야말로 부처님 법을 지키는 호법의 왕(王)이라, 법을 수호하는 왕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더운 때도 역시 어느 누군가가 애월삼매에 턱 들어서 그런 광명을 보낸다고 하면은 이런 선풍기를 부착할 아무런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아무튼 이와 같이 우리 인간은 해방을 구합니다.

 

뜨거움에서의 해방, 이런 해방을 구해 마지않습니다. 헌데 앞서 제가 말씀드린 대로 비록 우리가 외형적으로, 물량도 좀 풍부하게 할 수가 있는 것이고, 음식도 좀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것이고, 또는 이성도 어느 정도는 추구할 수 있는 것이고, 또는 자기 지위도 역시 자기 노력 따라서는 어느 정도는 추구할 수는 있습니다만 그런 걸로 해서는 인간의 만족을 못 채웁니다.

 

앞서 말씀처럼 우리 마음의 번뇌를 끊는 것 외에는 참다운 자유는 우리가 못 채웁니다.

학생들이 제아무리 데모를 하고 애쓴다 하더라도, 악을 쓰고 다 부숴버린다 하더라도 역시 한 정부를 전복한다 하더라도 역시 그것으로 해서는 인간의 자유는 얻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에 도사리고 있는 그런 번뇌, 탐욕심(貪欲心) 또는 성내는 진심(瞋心), 어리석은 치심(癡心), 이것을 안 떼어버리는 한에는 인간의 자유는 얻지를 못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 자유라 하는 것이 인류역사 이후에 가장 소중한 말, 가장 매력 있는 말이지만, 그걸 추구하기 위해서는 아까 말씀처럼 우리 마음의 번뇌, 우리 마음의 무지(無智), 무명(無明)을 떼는 방도 외는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방향을 바로 설정해 놓고서 그 다음 문제로 해서, 제도(制度)면이나 무엇이나 생각을 하면 그것이 그르쳐지지가 않는 것인데, 가장 근원적인 줄기는 잊어버리고서 이파리나 가지만 가지고 애쓰니까 그때는 될 리가 만무합니다.

 

어떻게 해서 우리 마음의 번뇌, 우리 마음의 그 뜨거운 열뇌, 사람이 병드는 원인으로 해서 만병의 원인을 말씀한 경도 있습니다만 그런 우리 병의 원인 가운데서 앞서 제가 언급도 했습니다만, 욕구불만(欲求不滿)이라,

욕심이 사무쳐서 그런 뜨거운 욕심 때문에 난 병도 많이 있습니다. 또 성이 사무쳐서, 저놈 곧 미운 놈이니까 때려버렸으면 좋겠다. 그런데 못 때리고서, 성내는 마음이 사무치는데 그걸 참는단 말입니다. 그런 것을 못 참아서 나는 병도 있습니다. 또 진리를 바로 못 봐서 이렇게 저렇게 헤매는 분별 시비하는 무지(無智)의 병도 있습니다.

 

우리가 동의보감(東醫寶鑑)이라고 하면 의술의 원전 같은 귀중한 책 아닙니까. 이 책에는 이런 것이 있습니다. 이 책은 주로 인간의 병을 말한 책 아닙니까만 [심란즉병생(心亂卽病生)]하고, 마음이 산란스러우면 그때는 병이 생기고, [심정즉병자유(心定卽病自癒)]라, 마음이 안정되면 병이 스스로 차차 낫는단 말입니다. 물론 어느 정도 한계는 있다 하더라도 역시 주로 인간에서 발생되는 병들은 대체로는 마음병에서 기인됩니다.

 

<심즉시불(心卽是佛)>

 

지금 여러분들은 마음의 실상(實相)을 아직 파악하지 못한 분들이 많이 계셔서 불교에서 말하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이 말을 잘 안 믿습니다. 모두가 다 마음뿐이다. 모두가 다 마음으로 이루어진다. 이 말을 잘 안 믿는단 말입니다. 허나 사실은 모두가 다 마음으로 이루어 졌습니다.

태초 개벽 이후로 부터 마음으로 이루어 졌습니다. 개벽 이전도 역시, 개벽이전에 우주가 생성되기 전에, 텅텅 무애한 그런 공간 속에서도 역시 마음의 본성은 그대로 상주(常主)해 있습니다.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고 비록 우주의 변천이 있다하더라도 마음이라는 그런 성품, 우주의 본 순수에너지, 그것은 멸(滅)치가 않습니다. 그것은 불생불멸(不生不滅)입니다.

천지(天地)가 몇 번 바꿔져서 성주괴공(成住壞空)이라, 천체가 이루어지고, 우리 생물이 살고, 또 다시 허물어지고, 다시 텅텅 비어지고, 이런 것을 몇 번이고 되풀이 한다 하더라도 마음이라는 성품은 멸치가 않습니다. 마음 성품 이것이 부처입니다. 그러기에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마음이 바로 부처라. 이렇게 말합니다.

 

허나 그 마음은 우리가 남도 미워도 하고, 사랑도 하고, 욕심도 내고, 성도 내고, 그런 마음은 아닙니다. 마음이 부처라는 그 마음과 남을 미워하는 마음과 그 성질은 같습니다만 우리가 남을 미워하고 사랑하고 욕심을 내고 하는 그런 마음은 마음의 초점(焦點), 마음의 겉에 뜬 부동된 덧없는 마음입니다.

그런 마음의 근원된 마음, 근본(根本)자성(自性), 근본 청정심(淸淨心), 본래청정심이라, 이 마음이 바로 부처입니다. 이 마음 위에서 잘못쓰기 때문에 우리 마음이 미워지고, 예뻐지고, 또는 시기분별한단 말입니다.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

 

여기 계시는 분들은 다 불교(佛敎)를 신봉(信奉)합니다. 따라서 아까 말씀처럼 우리 인간이 구하는 것 가운데서 가장 귀중한 보배, 우리는 맨 처음에 삼귀의례(三歸儀禮)라, 삼보에 귀의 하였습니다. 비록 여러 가지 세간적인 그런 보배가 많이 있지만 그런 보배 가운데서 역시 삼보가 제일 귀합니다.

 

 

<부처라, 불보(佛寶)라,>

 

부처는 무엇인가? 부처는 바로 우주의 진리입니다. 부처를 하나님이라고 해도 그 때는 무방합니다. 다만 그 내용이 우주의 모든 것을 거기에다가 다 포함시켜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귀중한 보배, 그것이 불보 입니다.

그 다음에는 우주의 모든 진리, 내 생명의 본바탕인 동시에 우주의 본바탕인 진리를 구하는 가르침, 이것이 법보(法寶)란 말입니다. 법법(法)자 법보입니다.

 

그 다음에는 그런 우주의 진리를 구하는 가르침에 따라서 실천하는 사람, 이것이 중승(僧)자 승보(僧寶)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승보입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보배이기 때문에 삼보(三寶)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삼보의 하나인 승보입니다. 승보의 할 일은 무엇인가? 이것은 아까 말씀처럼 우리 마음의 뜨거운 열뇌, 더울열(熱)자, 괴로울뇌(惱), 번뇌란 뇌자, 열뇌입니다

 

번뇌를 못 끊어 놓으면 이런 더위에는 더 뜨거운 것입니다. 그러나 번뇌를 끊어가는 사람은 비록 땀은 뻘뻘 흘린다 하더라도 역시 마음은 서늘한 것입니다.

이렇게 가다가 앞서 말씀처럼 애월삼매(愛月三昧)라, 그런 삼매(三昧)에 척 들어가면 자기 몸도 마음도 개운하고, 일체중생에게도 서늘하게 진리의 광명을 보내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승보입니다. 우주의 진리, 내 생명의 진리인 불보를 믿고, 그런 불보를 우리가 증(證)하는 체험하는 가르침 따라서 행동하는 우리는 승보입니다. 우리 승보가 하는 일이 무엇인가? 우리 승보가 할 일은 많지 않습니까. 염불(念佛)도하고, 여러 가지 주문도 외우고, 우리 승보는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성불(成佛)하는 길을 가는 사람이 승보입니다.

우주의 근본 진리인 그러한 불성(佛性), 부처님 성품을 깨닫고자하는 사람이 승보입니다.

 

<참선(參禪)은 무엇인가?>

 

우주의 진리를 깨닫는 가르침 가운데서 제일 으뜸 가르침, 가장 압축된 가르침, 그것이 참선입니다. 오늘 우리가 모인 것은 참선(參禪)을 하고자 해서 모이신 것입니다.

 

인류문화사 가운데서 참선 같이 가장 고도한 가르침은 없습니다. 따라서 현대 지성들이 참선이 무엇인가를 모르면 참된 의미에서 지성인(知性人)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참선은 귀중합니다.

우리 이웃나라인 일본에서는 젠(Zen) 그래서 참선을 가장 소중히 하는 풍조가 우리보다도 훨씬 더 미만(彌滿)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일본뿐만 아니라 지금 캐나다나 미국이나 기타 유럽 그쪽이나, 참선에 대한 문제를 상당히 문제로 삼고서 연구를 합니다.

 

전문적인 학자들도 참선을 연구하는 열도가 이쪽 동양권 보다 더 강렬하다 합니다. 심지어는 기독교(基督敎)를 신봉 하는 기독교인 역시 참선을 합니다.

저번에 보신 분은 아시지만, 수녀 역시 여기 와서 같이 참선을 했습니다. 그 분은 편집장이라, 책도 내고 하신 수녀님입니다.

 

이와 같이 불교인이 아닌 분들도 참선문제가 비중이 커서 연구를 하고 탐구를 합니다.

인간정신(人間精神)을 영원의 경계, 생사(生死)를 초월(超越)하고 가장 행복스러운 경계, 그런 경계로 이끄는 방법 가운데서 참선이 제일 으뜸가는 최고도의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현대 지성인들은 비록 불교인이 아니라도 참선이 무엇인가는 아셔야 합니다. 참선이 무엇인가?

 

저는 예언가는 아닙니다만 앞으로 두고두고 해를 거듭할수록 참선 문제는 더욱더 중요한 문제로 우리들에게 부각이 될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지금 번잡하기도 하고, 이와 같이 혼란스러운 산업사회의 그런 위기를 극복하는 문제, 이 문제에 있어서 제일 소중한 그런 해결책, 산업사회의 혼란상, 물질문명사회의 여러 가지 패단, 이것을 구제하는 면에서 참선 같이 양약(良藥)이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참선을 하고자 해서 이 자리에 모인 것입니다.

 

 

<참선(參禪)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어떻게 참선을 해야 할 것인가?

염불(念佛)도 하고 주문(呪文)하고, 많은 공부를 합니다만 참선하고 그런 것들하고 어떻게 차이가 있는 것인가? 참선이 대관절 무엇인데 그와 같이 소중한 것인가 말입니다.

부처님의 팔만사천(八萬四千) 법문(法門)도 역시 참선이라 하는 거기에 다 집중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다 압축이 되어 있습니다. 참선은 무엇인가?

참선은 나중에 점차로 더 말씀을 드립니다만 우선 오늘은 지금 명색 법어(法語)라 해서 이렇게 높은 자리에 앉아서 말씀을 드리는 것이니까 사소한 방법론은 생략을 하고서 우선 근원적인 마음의 자세만, 참선의 마음의 자세만 제가 주로 말씀을 하겠습니다.

 

참선 이것은 부처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부처의 자세를 내 자세로 하고, 부처가 숨 쉬는 그런 호흡법(呼吸法)을 내 호흡법으로 하고, 이런 것은 점차 말씀을 드리겠습니다만 우선 참선 이것은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고 하면 부처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선시불심(禪是佛心)]이요, [교시불어(敎是佛語)]라, >

 

[선시불심(禪是佛心)]이요, [교시불어(敎是佛語)]라,

참선 이것은 바로 부처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선하는 사람은 부처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하지 않으면, 가사 화두를 들고 ‘이것이 무엇인가’를 몇 십 년 한다고 해도 그것은 별 소득이 없습니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비록 입으로 외운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이 불심(佛心)에 가서 딱 안주(安住) 되어있어야 참선입니다. 참선 공부라 하는 것은 특히 불교공부는 마음공부입니다. 마음을 깨닫는 공부입니다. 따라서 자기 마음 자세, 내 마음이 부처의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이 중생(衆生)이 부처의 마음이 될 것인가?

누구나 부처의 마음이 되고자 해서 애는 많이들 쓰겠습니다만 부처의 마음이 되기가 그리 쉽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공부를 많이 해서 통하면 되겠지만, 미처 못 통한 우리 범부가 어떻게 부처님 마음이 될 것인가?

 

이런 때는 역시 부처님의 영상(映像), 즉 부처님의 이미지를 간직해야 합니다. 본래 우리 자성(自性), 우리 마음의 근원이 부처인지라 부처님 이미지를, 영상을 딱 간직해서 영상을 안 떠나고 공부해 나가면 그때는 차근차근 부처한테로 가까워진단 말입니다.

 

참선에 관한 책도 굉장히 많이 나왔습니다.

저 선문염송(禪門拈頌)이나 화두를 드는 책만 해도 벌써 몇 십 권 나왔단 말입니다. 이렇게 저렇게 서로 논쟁도 심하고, 굉장히 복잡한 교설들이 많이 있습니다. 허나 일언이폐지(一言以蔽之)하면,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결국은 내 마음자세를, 내 마음 가짐을 부처님 같이 간직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요점입니다.

 

우리 범부가 아직은 미혹(迷惑)되고 탐심(貪心)도 많고, 또 진심(嗔心)도 많고, 삼독심(三毒心)에 독스러운 마음에 충만된 우리 범부가 어떻게 부처 마음을 가질 것인가?

가질 수가 없습니다. 가질 수가 없으니까, 그때는 부처님 닮은 마음을 가지려고 우리가 애쓰는 것입니다.

 

 

<불성공덕(佛性功德)>

 

그러면 먼저 부처님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

우리는 부처가 안 되어 봐서 모르겠습니다만, 부처가 안 되어봤다 하더라도 부처님 가르침, 그 뒤로 부처님 가르침을 부연 설명도 하고, 체험도 하신 그런 도인(道人)들의 가르침 따라서 우리가 부처님 마음을 생각해 본다고 합시다.

 

부처님 마음을 구체적으로 한 법문은 140불공법이라, 140종목으로 나누어서 부처님의 무량한 공덕(功德)을 말씀했단 말입니다.

부처님의 공덕은 한도 끝도 없습니다. 불경(佛經)에 보면 도를 성취한 아라한(阿羅漢)이 몇 수십만 년을 두고서 부처님 공덕을 헤아린다 하더라도 부처님의 공덕을 다 말할 수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와 같은 것을 우리가 어떻게 몇 마디로 부처님 공덕을 다 말하겠습니까만 그런 공덕을 간추려서 140종으로 구분한 것이 있다 말입니다.

그것도 너무 많지요. 이 시간에 그걸 다 나열 할 수가 없지요. 헌데 더 간추려서 부처님 공덕을 말씀한 법문은, 그때는 18공덕이라,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이라. 일반 중생과 더불어서 할 수 없는 그런 부처님만이 가질 수 있는 그런 무량 공덕을 18종목으로 구분한 것이 있다 말입니다. 그것도 또 많아서 이 시간에 다 말씀을 드릴 수가 없지요.

 

 

<열반사덕(涅槃四德)>

 

가장 간추린 것이 무엇인가? 부처님의 무량공덕을 가장 간추린 법문이 열반사덕(涅槃四德)입니다.

열반이라는 것은 영생이나, 영생 해탈의 자유 그런 뜻이 열반(涅槃)입니다.

보통 열반에 든다 하면 죽는 다는 걸로 통용합니다만 열반의 본뜻은 영생(永生)한다. 불생불멸(不生不滅)한다는 말입니다.

영원히 존재한다. 또는 일체 번뇌를 떠난 경계다. 이것이 열반입니다.

그래서 열반사덕(涅槃四德)이라. 즉 부처님 경계를 다 간추려서 모든 공덕을 다 포함해서 간추리면 네 가지 덕성(德性) 상락아정(常樂我淨)으로 구분 한단 말입니다.

 

<상덕(常德)>

 

한 가지는 항상상(常)자, 상(常)이라, 항상 부처님 생명은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떠나서 언제나 영원히 상주부동(常住不動)이라, 항시 부처님의 생명이 있단 말입니다.

 

<낙덕(樂德): 환희장마니보적불(歡喜藏摩尼寶積佛)>

 

 

그 다음은 락(樂)이라, 안락할 락(樂)자, 일체 고난을 다 떠나서 그때는 영원히 안락스럽단 말입니다.

부처님 경계 가운데서, 영혼천도 할 때 제일 나중에 가서 환희장마니보적불(歡喜藏摩尼寶積佛)이라, 그런 부처님 명호(名號)를 욉니다. 환희장마니보적불이라 말입니다. 환희(歡喜)라는 것은 기쁘고 날뛰는 것이 환희 아니겠습니까. 환희심(歡喜心)이란 말입니다. 환희장(歡喜藏)이라. 장은 감출장(藏)자, 환희가 충만해 있다는 말입니다. 환희를 원만히 갖추고 있다 말입니다.

 

환희장마니(歡喜藏摩尼)라, 마니(摩尼)는 마니보주(摩尼寶珠), 마니는 무엇인가하면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보배, 즉 말하자면 여의주(如意珠)말입니다. 모든 것을 다 낼 수 있는 보배가 이것이 마니 보주입니다.

환희스러운 행복이 충만 되어 있고, 동시에 모두를 다 할 수 있는 그런 마니보주 같단 말입니다.

보적불(寶積佛)이라, 보배 보(寶)자, 쌓을 적(積)자, 행복이나 자유스럽게 할 수 있는 능력이나, 이것을 보배같이 한도 없이 쌓여 있는 부처라, 그 뜻이 환희장마니보적불(歡喜藏摩尼寶積佛)입니다. 부처님 공덕은 이와 같이 한도 끝도 없습니다.

 

이러한 안락스러운, 보통 우리가 재미있고, 기쁘고 한 정도가아니라, 최상의 행복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이런 중생계에만 기쁨이나 행복이 있지, 공부해서 올라가면 그 때는 무미건조해서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은 우리가 욕계를 떠나면 떠날수록 행복은 거기에 비례해서 행복은 더 가증이 됩니다.

그러한 안락무우(安樂無憂)하고 즉, 불교말로하면 극락(極樂)이라, 다시 위없는 행복만이 있단 말입니다.

 

<아덕(我德)>

 

그 다음은 나 아(我)자, 아덕(我德) 이것은 모두를 다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모두를 다 할 수 있고, 모두를 다 알 수 있는 것이 불교의 아입니다. 불교말로하면 이것은 자재아(自在我)라, 모든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느끼는 아(我), 이것은 그냥 얽매이는 아(我)입니다만 깨달아서 영원으로 느끼는 그런 아, 즉 말하자면 대아(大我), 우리는 지금 소아(小我)입니다만 대아(大我)가 되면 그때는 자재아(自在我)라, 천지 우주의 모든 것을 마음대로 자재롭게 할 수 있다 말입니다. 신통(神通)도 하고 말입니다.

 

<정덕(淨德)>

 

그 다음은 정(淨)이라, 맑을 정(淨)자, 정이란 말입니다. 그때는 조금도 번뇌(煩惱)가 없이, 오염된 더러움이 없이 청정(淸淨)하단 말입니다.

이와 같이 상주부동(常住不動)해서 언제나 영생(永生)하고, 적멸무위(寂滅無爲)해서 안락무우(安樂無憂)하고, 참다운 행복만이 충만하고,

또는 모두를 다 할 수가 있고, 알 수가 있고, 또는 청정(淸淨)해서 조금도 번뇌(煩惱)의 오염(汚染)된 흔적이 없고,

 

이러한 부처님 공덕을 다 합한 불성공덕(佛性功德)입니다. 이와 같은 것이 부처님한테는 깃들어 있습니다. 우주의 본바탕, 내 생명의 본질인 동시에, 우주 모든 존재의 본바탕은 부처님입니다. 부처님 가운데는 그와 같은 속성(屬性)이, 원래 본유(本有)라, 근본 본(本)자, 있을 유(有)자, 본래 갖추고 있습니다.

 

우리 불자는 지금 안 통해서 미처 그걸 모르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정직한 분이 부처님입니다. 제일 정직하고, 제일 성실한 분이 역시 석가모니(釋迦牟尼), 예수님, 공자(孔子)님 그런 성인들입니다. 성인들 말씀은 거짓말이 없습니다.

 

따라서 그런 분들이 앞서 말씀처럼 중생은 미쳐 못 봐서 모른다 하더라도, 그런 우리 본 성품(性品), 우리 자성(自性) 가운데는 그런 일체공덕이 본래 다 갖추어 있단 말입니다. 그것을 딱 믿어야 됩니다.

세상에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맛이 좋고, 또는 자기가 사귀고 싶은 좋은 사람을 사귀면 기분이 좋고, 감투가 올라가면 기분 좋고 하겠지요.

 

그런데 불성공덕이, 우리 자성 공덕이, 그런 기본 좋은 것들 보다 더 비교할 수 없이 안 좋으면 우리가 성불하기 위해서 갈려고 별 애를 안 씁니다. 비록 내 스스로 본 성품이 부처라 할지라도 그 부처한데 깃들인 그 공덕, 그 공덕이 시원찮으면 누가 거기에 갈려고 하겠습니까?

 

인간이 느끼는 오욕(五欲)에서, 오욕은 아시는 바와 같이 재(財),색(色),명(名),식(食),수(睡)입니다. 재물이나, 먹는 것이나, 또는 이성간의 색이나, 또는 자기 명망이 올라가서 감투를 쓰는 것이나, 또는 수면이나 이런 것들이 오욕입니다. 우리 중생은 오욕 가운데서 헤맵니다.

그런 것들이 물론 재미가 있겠지요. 몸뚱이가 있으니까. 허나 그런 것을 추구하는 한에는 인간의 자유는 갖지는 못합니다.

 

헌데 우리가 우리의 불성, 본성품인 그런 불성, 불성 이것은, 그런 오욕에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까 말씀처럼 ‘환희장마니보적불’이라, 또는 환희광불(歡喜光佛)이란, 그런 말씀이 있단 말입니다.

 

우리는 따라서 지금 눈에는 안 보이지만 제일 정직하고, 제일 바로 말씀하고, 바로 본 분이 말씀하신 그 가르침, 내가 지금 안 보이지만 내 불성 가운데는 그런 무량공덕이 본래 갖추어져있다. 이걸 딱 믿어야 합니다.

그걸 딱 믿고서 그 공덕을 항시 자기가 자기 영상으로, 이미지로 간직한단 말입니다.

 

‘이것이 무엇인가?’ 화두를 생각해 봅시다. ‘이것이 무언가?’ 화두는 육조단경(六祖壇經)에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이것이 무엇인가 화두는 아실 것입니다만,

나한테 무언가는 모르지만 한 물건이 있는데, 그 물건은 무엇인가 하면 밝기는 천지 일월보다 더 밝다 말입니다. 또 검기는 칠보다 더 검단 말입니다. 또는 하늘을 괴이고 땅을 받쳤단 말입니다. 그러한 것이 나한데 항시 내가 움직이고 말하고 그런 가운데 항시 있지만은 미쳐 거두어 얻지 못하는 그 무엇이 무엇인가? 이것이 ‘이뭣고’ 화두입니다. <有一物 上拄天下拄地 明如日黑以漆 長在動用中 動用中收不得 且道過在甚麽處>

 

일체 화두는 조금씩 차이는 있다하더라도 모두가 다 ‘그 무엇’을 구하는 것입니다.

중생이 모르는 그 무엇, 그 무엇이 무엇인가? 그 무엇은 내 자성인 동시에 우주의 본성인 불성이란 말입니다.

그 무엇이라고 하든가, 불성이라 하든가 그것은 똑 같습니다. 내가 미처 구하지 못하는 내 생명의 본바탕, 그것을 우리가 구한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와 같이 미쳐 우리가 안 보이지만 어떤 면으로 보나 완벽한 그 존재, 영생하는 존재, 행복에 충만한 존재, 그것이 소위 우리 본 성품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소중하니까 우리가 순교도하고, 자기 지위도 버리고, 또는 재물도 버리는 것입니다. 또는 우리가 금생에 비록 거기에 못 간다 하더라도 역시 딴 걸로 해서는 우리 마음의 불안을 메우질 못 합니다. 어떠한 것으로도 우리 마음의 불안을 메우지 못합니다. 동으로 가나 서로 가나 어디를 가나 우리 마음의 불안은 못 메웁니다.

오직 우리 마음의 본바탕, 우리 마음의 본 고향에 돌아 가야만이 비로소 우리 마음이 불안을 면합니다.

 

우리 범부는 고향을 읽어버린 사람들입니다. 내 고향은 어디인가? 이것은 우리가 떠나온 가장 시초의 근원적인 우리 고향, 이것은 역시 부처님입니다. 불성입니다. 따라서 불성을 스스로 우리가 체험을 못하면 우리 고향에는 못갑니다. 따라서 우리 불안의식은 해소를 못 시킵니다.

 

우리는 더 이상 헤매지 말아야합니다. 비록 우리의 선근(善根)이 부족하고, 우리 노력이 게을러서 미처 못 간다 하더라도 방향 설정만은 우리가 옳게 해야 합니다. 우리 갈 고향은 역시 진리(眞理)인 행복(幸福)과 자비(慈悲)와 지혜(智慧)와, 그런 공덕(功德)을 다 갖춘 내 마음의 고향(故鄕), 거기에 가야 합니다. 이렇게 방향을 설정해 놓고서 그때그때 자기 힘 따라서 공부를 해야 합니다.

 

 

<고향 소식을 환히 보듯이 느껴야 합니다.>

 

그런 방향을 설정한 뒤에, 가고자하는 열도가, 강하면 강할수록 그때는 할 수 없이 옷도 이와 같은 옷을 입어야하겠지요. 이와 같은 옷을 입고도 역시, 공연히 탐심이나 내고, 불룩 성이나 내고, 그러한 마음으로 해서는 고향에 못갑니다.

고향 가는 지름길, 이것이 참선입니다. 고향 가는 지름길, 우리는 지금 고향 가는, 불성이라고 하는 내 영원의 님(임), 거기 가는 지름길을 가고자해서 이렇게 더위에도 불구하고 모이신 것입니다.

따라서 그 마음가짐이 고향 소식을 환히 보듯이 느껴야 합니다. 맨 처음에는 빡빡하겠지요. 우리가 안 보이니까 말입니다. 허나 먼저 간 분들의 소식을 듣고서, 이미지로 해서 우리가 부각을 시킨단 말입니다.

 

<진공묘유(眞空妙有)>

 

고향 소식은 모두가 텅 비어서 다 공(空)이다. 헌데 다만 공이 아니라, 그 공 가운데는 또 뭣이 있단 말입니다. 불교말로하면 이것이 진공묘유(眞空妙有)이지요.

따라서 먼저 우리 마음의 고향에 가고자하는 참선(參禪) 수행자(修行者)는 먼저 모두가 다 비었다 하는 제법공(諸法空)을 느껴야 합니다.

내가 있고 네가 있고, 나무가 있고 이렇게 집이 있는데 왜 비었다고 할 것인가?

 

전자(電子)가 있고 양자(陽子)가 있는데 왜 비었느냐? 이렇게 말들을 합니다.

허나 사실은 있지가 않은 것입니다. 물질의 근원은 사실은 물질이 아닌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물리학자(物理學者)가 말했습니다.

우선 우리가 하나의 수소(水素)를 두고 봅시다. 수소는 양자하나, 그 주위에 전자 하나가 빙빙 도는 것이 수소 아닙니까.

 

또 탄소는 무엇인가? 탄소는 원자핵을 중심으로 전자가 6개가 빙빙 돕니다. 그러면 이러한 것을 생각해 본다고 우리가 생각할 때에, 이것이 양자와 전자와 결합된 인연 따라서 임시 간 이루어졌을 뿐입니다. 즉 말하면 인연생(因緣生)이라, 인연 따라서 하나의 일체 물질의 근원인 원자가 이루어 졌습니다.

우리 몸뚱아리는 무엇인가?

그런 것으로부터 이루어진 산소나 수소나 탄소 질소, 그런 것이 모여서 우리 몸을 구성 했습니다.

 

나무나 소<牛>나, 또는 일체 하늘에 있는 별이나, 모두가 다 전자와 양자로 구성된 그런 각 원소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있습니까.

헌데 그런 양자나 전자는 무엇인가? 이런 것을 지금 물리학적인 의미에서 파괴를 한다 해도 그것이 무엇인가 알 수가 없단 말입니다.

 

다만 광명(光明)의 흐름뿐이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말입니다. 지금 과학적 술어로 말하면 단지 장(場)만, 장만 결국 우주에 충만해 있다는 말입니다.

물질을 분석 하고 분석해서 쭉 들어가면, 끝에 가서는 하나의 장만 우주에 변만(遍滿)된 하나의 장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장으로 부터서 장이 어떻게 진동하는가? 어떻게 도는가? 거기 따라서 각 양자가 있고 전자가 있단 말입니다.

 

즉, 다시 말하면 우주는 텅 비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인간만큼 밖에는 못 봐서 그때는 무엇인가 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마치 누런 안경을 쓰고 보면 누렇게 보이고, 붉은 안경 쓰고 보면 모두가 붉게 보이듯이,

그러나 참말로 보면 그때는 그야말로 텅 빈 것인데, 가령 저 장(場), 우주의 근원적인 순수한 에너지, 그 걸 볼 수 있는 안경을 쓰고 본다면 그때는 우주가 텅 비어 있단 말입니다.

도인(道人)들 안목은 다만 불성만 보는 안목, 하기 때문에 그때는 우주를 다 불성으로 보신단 말입니다.

너요, 나요, 또는 붉다, 누렇다, 이런 것은 우리 인간이 인간의 업장(業障)을 쓰고 보니까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지금 안 보인다 하더라도 도인들의 가르침 따라서 우주가 텅 비어 있다. 일체(一切) 유위법(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뿐이다. 있는 것은 모두가 다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요, 거품이요 이와 같이 먼저 봐야 합니다.

 

나가 있다, 네가 있다. 이런 마음으로 해서는 공부를 못합니다. 차별을 못 넘어섭니다. 분명히 내가 있고 네가 있으면 그때는 미운 사람이 있고 좋은 사람이 있겠지요.

우리가 보는 것은 다만 우리 업장(業障)으로, 업장의 투사(投射)에 불과 합니다. 업장의 반영에 불과 합니다.

 

<부처의 안목을 내 안목으로 해야 참선입니다.>

 

 

우리는 실존(實存)을 못 봅니다. 비록 내가 안 보이지만 실존을, 실상(實相)을 본척하고서 보는 마음가짐으로 공부하는 것 이것이 참선입니다.

그냥 무식한 분들은 몽매한 분들은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만 적어도 참선한다. 내가 선(禪)을 한다. 이럴 때는 아까 말씀처럼 부처님의 안목을 내 안목으로 해야 그것이 참선입니다.

부처의 안목을 내 안목으로 할 수만 있다면 거기에 따르는 표현 방법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부르건,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부르건, 또는 무(無)자를 부르건, 그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마음이 부처님 불심(佛心)에 딱 안주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중생들은 불심을 못 보니까, 그런 우선 겉에 뜬 방법가지고서 이 방법이 최고다. 이것 아니면 배격을 합니다. 이렇게 되니까 각 종파가 분열 되고, 각 종교의 싸움이 생깁니다. 허나 근본적인 비록 종교의 분파야 기독교건, 또는 무슨 교건, 종교의 근본 진리, 거기다 마음을 두고서 그것만 우리가 딱 파악 한다 그러면 그때는 서로 싸울 리가 만무합니다. 표현이야 그때그때 시대나 개성 따라서 달리 표현 되겠지요.

 

그런데 우리 참선하는 사람들은 이런 말씀이 있어요.

부처를 구하되 부처에 착하지 말고, 법을 구하되 법에도 착하지 말라.

우리가 구하는 것은 부처 아닙니까. 가장 소중한 것이 부처인데 부처라는 그런 말에 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정도로 자유스럽게 공부하는 것이 참선입니다.

오직 문제는 내 마음의 본성만 문제로 합니다.

 

부처 역시 내 마음의 본성을 우선 가고자 해서 임시로 표현한 것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부처라는 말도 거기에 착하지 말고, 법이라는 말도 착하지 말고서 오직 문제는 결국은 인간이나 일체 우주의 본바탕인 ‘그 무엇’ 그 진리 그것만 문제시 한단 말입니다.

 

<영원의 이미지로 현실을 관찰하면 일체가 영원에 참여한다.>

 

 

제 말씀이 너무 길지요. 이런 말씀을 해도 한도 끝도 없습니다. 될수록 간추려서 말씀을 올립니다만, 아무튼 이와 같이 영원의 이미지를 탁 심어야 합니다.

「스피노자」그분은 참 기독교도 신봉했지만, 불교를 독실하게 공부한 분입니다. 그분이 이런 말씀을 했단 말입니다. ‘영원의 상, 영원의 이미지로 영원의 이미지에서 현실을 관찰하라’ 영원의 이미지로 현실을 관찰한다고 하면 일체가 영원에 참여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말씀을 했단 말입니다

 

우리는 개성적인, 박아무개면 박아무개, 자기 주관대로 관찰합니다. 김아무개는 김아무개 자기 주관대로 관찰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서로 십인십색이라, 각기 자기 의견의 차이가 있습니다.

헌데 우리는 비록 우리가 영원성에 미처 못가 있다 하더라도 성자의 가르침에 의해서 말입니다. 영원의 이미지로, 영원의 차원에서 우리가 관조(觀照)한다 말입니다.

 

부처는 아까 말씀처럼 일체를 다 공(空)으로 본다 말입니다.

그러나 다만 공이 아니라, 공 가운데는 심심미묘(甚深微妙)한 묘유(妙有)가 있다. 이렇게 본다 말입니다. 즉 일체만유를 부처님은 진공묘유로 봅니다. 따라서 진공묘유(眞空妙有)로 모두를 본다고 생각할 때에는 그것이 영원의 이미지입니다.

 

내가 있고 남이 있고, 이렇게 무수무량의 차별이 있다 하더라도 그런 것은 다 쓸어버리고서 모두가 다 바로 보면, 부처나 그런 성자가 본다면, 우주는 텅텅 빈 것인데, 그 텅텅 빈 가운데서 광명(光明)만 충만해 있다. 이렇게 보고서 영원의 이미지를 안 놓치는 것 이것이 참선 공부입니다.

비록 순간동안 느낀다 하더라도 순간 그것을 안 놓친다 말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우리가 비록 못 통한다 하더라도 영원의 이미지, 바로 보면 모두가 다 부처뿐이구나. 부처의 광명뿐이구나.

중생으로 보는 것은 우리가 잘 못 보는 것이지 모두가 다 부처구나.

우주가 텅텅 비어서 그 가운데는 부처가 충만 되어 있구나. 이와 같이 보는 그 마음을 애쓰고 우리가 지속시켜야 씁니다. 이것이 참선입니다.

 

순간만 느끼고 말면 그때는 다시 나쁜 버릇대로 나쁜 마음이 소생해 온다 말입니다. 나쁜 버릇이, 우리가 과거 전생에 업을 짓고, 금생에 잘 못 배우고, 잘 못 느끼고 한, 그 마음이 싹을 못 트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애쓰고, 바른 마음, 성자가 느낀 그 마음으로 지속시킨다 말입니다.

 

천지 우주는 다 부처뿐이구나, 천지 우주는 다 하나님 뿐이구나, 천지 우주는 광명 충만한, 찬란스런 광명 충만한 이것은 부처뿐이구나. 이 마음을 시시각각으로 앞생각 뒷생각 가운데 딴 생각이 끼지 않도록 까지 지속을 시킨다 말입니다.

이것이 참선 공부입니다.

부르는 것은 여러분들이 아버지라 부르건, 또는 관세음보살이라 부르건, 또는 무자를 부르건 상관이 없습니다. 부르는 것은 여러분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 다만 마음자세만, 마음 내용만 영원적인 진리, 거기다 마음을 딱 안주를 시킨다 말입니다.

 

이렇게 하셔서 이번에 짤막한 동안<4박5일>입니다만 그 동안에 꼭 자기 본 성품인 부처의 성품을 꼭 체험하셔서 아까 제가 말씀처럼 환희장마니보적불이라, 정말 환희, 행복이 충만 된 그러한 행복을 누리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말씀을 마칩니다.

 

 

나무아미타불!

 

 

 

* 19850731-태안사 하계용맹정진중 첫 번째 법문

<설법 무주당청화(淸華)대종사>

* 19850731-카셋녹음 태안사 방송실 스님

* 카셋 테이프 보급: 정훈 스님

* 펜글씨 녹취: 법륜행(法輪行), 해인(海印)

* 펜글씨 녹취 취합: 태호스님

* 20160211- 워드작업 정리: 본정(本淨)

* 20161016- 재교정: 이지현 외

* 큰스님의 뜻을 왜곡 시킬까 두려워서 문어체로 윤문하지 않고 구어체 그대로 옮겼습니다.

<실상관>

 

‘나라는 이 몸뚱이나 너라는 몸뚱이나 천지우주(天地宇宙)에 있는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다 비어 있다’는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자리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다만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本來) 비어있는 무량무변(無量無邊)한 자리에 무량공덕(無量功德)을 갖춘 청정적광(淸淨寂光)이 충만(充滿)해 있구나’ 이렇게 생각해서 마음을 매는 것이 실상관(實相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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