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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마음의 고향

마음의 고향 28집(2)


 

19850803-태안사 하계용맹정진 4일째법문

 

2. 선오후수(先悟後修), 결정신심(決定信心),

정혜쌍수(定慧雙修), 염불선(念佛禪),

 

참으로 무상(無常)하기 그지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만난 것은 금생의 인연(因緣)만으로 만난 것은 아닙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오시기 전부터 또는 우리 천체(天體)가 텅 빈 공(空)으로 부터서 성겁(成劫)이라, 하나의 천체가 이루어지기 이전부터서 우리는 만났던 것입니다.

 

불교에서 겁(劫)이란 말씀이 있습니다만, 겁 이것은 무량한 세월입니다. 우리 중생(衆生)이 수치로 해서 헤아릴 수 없는 무량한 세월 이것이 겁입니다. 겁 겁(劫)자, 이것이 겁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무량한 겁 전에 이미 만난 것입니다.

 

그렇게 만났기 때문에 석가모니 부처님 회상(會上)에서 같이 공부했고, 또한 그 뒤에도 중국(中國)에서 또는 한국(韓國)의 신라(新羅) 때 원효(元曉), 의상(義湘) 그 당시도 같이 모두 공부를 했습니다. 임란(壬亂) 때는 같이 공부도하고 왜군의 침입으로 해서 모두 의병(義兵)을 우리가 편성해서 같이 싸우고 했습니다. 그런 인연(因緣)이 우리는 분명히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만난 것은 지금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또 우리가 후생(後生)에 두고두고 같이 만나야합니다. 물론 업(業)의 경중(輕重) 따라서 업의 가볍고 무거움 따라서 그때그때 태어나는 처소(處所)는 차이가 있겠지만 다시 꼭 만나게 될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결정신심(決定信心)>

우리는 지금 참선(參禪)을 배우고 있습니다. 한데 참선법이 어렵고 구구해서 잘못 들으면 도리어 마음의 혼란을 일으키기 쉽습니다. 몇 시간 안 남은 동안에 여기에 오신 분들은 참선에 대한 꼭 결정적인 결정신심(決定信心)이 서야합니다.

 

참선 이것이 몇 번 말씀한 것처럼 우리 불교에서의 제일 수승(殊勝)한, 제일 압축된 법문(法門)일 뿐만 아니라, 인류 문화의 모든 문화유산의 총 결론가운데서 제일 수승한 제일 최고도의 수행법(修行法)입니다.

 

따라서 현대 지성인(知性人)들은 참선(參禪)이 무엇인가? 선(禪)이 무엇인가? 이러한 것을 모르면 인류문화의 골수(骨髓)는 모른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만큼 참선의 문제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 가운데는 각기 자기 인연 따라서 화두(話頭)를 의심해서 참구(參究)하시는 분도 계시고, 또는 염불(念佛)을 하시는 분도 계시고, 주문(呪文)을 하시는 분도 계시고, 또는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그냥 망연히 지내는 분들도 계십니다.

 

이런 분들이 앞서 말씀한 것처럼 참선법(參禪法)을 잘못 들으면 혼란을 마음에 야기 시킵니다. 따라서 제 말씀을 잘 들으시고서 꼭 참선은 이렇게 해야 쓴다는 결정신심(決定信心)을 가지셔야 합니다. 그래야 여기오신 보람이 있습니다.

 

지금은 명상법(瞑想法)도 따지고 보면 선법(禪法)의 하나의 갈래입니다만 불교의 참선은 모든 명상법 가운데서 제일 수준이 높은 명상법입니다. mind-control 이것도 역시 하나의 명상법이고, 요가법도 역시 명상법입니다. 또는 노(老)․장(莊)의 도교법도 역시 명상법입니다. 이러한 명상법이 많은 것 가운데서 불교 선법 이것은 모양은 같다하더라도 앉은 모양이나 호흡모양은 같다하더라도 마음자세에 차이가 있습니다.

 

도교(道敎)의 정좌법(靜坐法)이나, 요가법의 그런 모양이나, 그런 것은 마음모양이나 호흡 다스리는 법은 거의 같습니다. 다시 어려운 말로 하면은 조신법(調身法)이라. 몸을 조화시키는 법, 또는 조식법(調息法)이라, 호흡을 조화하는 법. 그런 법은 요가법이나 mind-control이나 우리 참선(參禪)하는 분이나 똑같습니다. 다만 다른 것은 마음 다스리는 조심법(調心法). 거기에 차이가 있습니다.

 

여러분들 가운데는 저한테 와서 ‘저는 지금 관음보살(觀音菩薩)을 합니다.’ ‘저는 지금 [옴마니반메훔]을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더러는 ‘저는 화두가 잘 의심이 안갑니다’ 이런 분도 계십니다.

 

공부는 일조일석(一朝一夕)에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누구든지 간에 역시 오르막길이 있습니다. 올라가는 가파른 길이 있습니다. 올라서서 고비를 넘어서면 그때는 내리막길입니다만, 올라 갈 때는 갑갑합니다.

 

아무리 총명하고 공부가 잘 된 분도 역시 어떤 때는 가슴이 딱딱 막힙니다. 이러다가 내가 병신 되려나 이런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몸이 떨어서 참 거북할 때가 있습니다.

 

허나 우리는 이런 때일수록 우리 자성(自性)에 대한 우리 불성(佛性)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비록 내가 지금 아직은 미혹되어서 이렇다 하더라도 내 불성 이것은 만능(萬能)하다. 만능한지라 해가면 갈수록 차근차근 불성과 접근되어 갑니다. 접근되어 가면은 그때는 갑갑한 기도 떨어지고 차근차근 거북한 그러한 불탁이 없어집니다. 헌데 그러려면 역시 방법을 잘 알아야 합니다.

 

<선오후수(先悟後修) 정혜쌍수(定慧雙修)>

보조국사(普照國師) 어록에도 있고, 각 도인(道人)들이 다 일구여출(一口如出)로 말씀합니다만은 “선오후수(先悟後修) 정혜쌍수(定慧雙修)”라, 참선하신 분들은 꼭 이 두 가지 문구를 외워야 합니다. (선오후수(先悟後修)라, 먼저 선(先)자, 깨달을 오(悟)자, 뒤 후(後)자, 닦을 수(修)자. 정혜쌍수(定慧雙修)라, 정할 정(定)자, 지혜 혜(慧)자, 아울 쌍(雙)자, 닦을 수(修)자)

 

마음을 하나로 딱 통일시키는 그런 고요한 정(定)과 또는 영원적인 불성을 비추어 보는 혜(慧)와 아울러 가야합니다. 아울러 못 가면은 우리 마음이나 우리 몸이 조화(調和)를 못 시키기 때문에 우리가 몸에 병나는 것도 음양(陰陽)의 조화가 안 되어서 그럽니다.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조화가 안 되기 때문에 몸이 거북한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라는 것은 원래 지금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지(知)와 정(情)과 의(意)와 이러한 요소가 있지 않습니까? 이런 요소가 있는데 지혜(智慧)로만 치우치고 또는 고요한데로만 치우고 그러면은 참선이 못됩니다. 우리 심리(心理)에 맞추어서 우리 공부하는 방법도 조화(調和)를 취해야 합니다.

 

그것이 소위 도인(道人)들이 말씀하신 정혜쌍수(定慧雙修)입니다. 정혜균등(定慧均等)이라, (고를 균(均)자, 무리 등(等)자) 가지런히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선이 턱턱 안 막히면서 우리 몸도 거북하지 않습니다. 헌데 우리 사람 가운데는 십인십색이라, 각기 개성 따라서 차이가 있습니다. 지혜(智慧)가 수승한 분도 있고, 감성(感性)이 수승한 분도 있고, 또는 의욕적으로 의지(意志)가 강한 분도 있습니다.

 

그런데서 부처님의 또는 도인들이 참선하는 법도 그때그때 사람 따라서 말씀을 달리 했습니다. 한국(韓國)에서나 일본(日本)에서나 대만(臺灣)에서는 선(禪)이 대체로 3갈래가 있습니다. 선의 방법이 3갈래가 있습니다.

 

<화두(話頭)하는 선법>

한 가지는 어느 문제를 턱 주면은 그 문제를 우리가 의심(疑心)합니다. 본래 부처거니 의심에 마음을 두고서 마음만 모아지면 그때는 부처가 되어갑니다.

 

화두(話頭)하는 선법 가운데는 ‘이것이 무엇인가? 이뭣고?’ 한문투로 말하면 “시심마(是甚麽)” 중국 송나라 속어로 말하면 ‘시삼마’, ‘이것이 무엇인가?’ 이것은 ‘무엇이 무엇인가?’ 하면은, 이뭣고 선은 부처님의 정통법을 계계승승(繼繼承承)으로 쭉 이어 내려온 육조혜능(六祖慧能)스님. 육조혜능스님은 33번째 조사(祖師)입니다.

 

이분이 일반 대중에게 말씀했습니다. 나한테 한 물건이 있는데, 그 물건은 밝기는 해와 달보다 더 밝고, 검기는 칠흑보다 더 검고, 하늘과 땅을 딱 받치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이 내가 말하나 내가 움직이나 항시 나한테 있습니다. 나한테 항시 있는데 미처 내가 안 보입니다. 미처 거두어 얻지 못하는 그것이 무엇인가?<有一物 上拄天下拄地 明如日黑似漆 長雎用中 動用中收不得 且道過在甚麼處>

 

나한테 한 물건이 있는데 그것은 행주좌와(行住坐臥)에 언제나 나한테 안 떨어지고 있는 것인데, 그것이 밝기는 해와 달보다 밝고, 검기는 칠흑보다 검고, 하니까 이것은 모든 광명과 어둠을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또는 천지를 다 받치고 있으니까 천지에 충만해 있습니다. 밝기도 끝도 갓도 없고 어둡기도 끝도 갓도 없고 천지에 충만한 그것이 무엇인가?

 

지금 사람들은 영리해서 내내야 그것은 불성(佛性) 아닙니까. 불성 외에는 천지에 충만하고, 밝기가 한도 끝도 없이 밝고, 또는 모든 것의 기능이 완비한 것은 없습니다. 이것은 분명 불성입니다. 따라서 내내야 불성이 무엇인가? 즉 그런 뜻입니다. 어떤 화두이든 간에 화두 본뜻을 보면 다 ‘불성이 무엇인가?’ 그것을 의심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묵조선(黙照禪)>

또 한 가지는 부처님 말씀이나 조사스님들 말씀을 들어보면 모두가 부처라 했거니 바로 보면, 이렇게 번뇌가 얽힌 나도 역시 부처고, 개미나 독사나 모두가 부처거니, 천지우주는 바로 부처 덩어리거니 새삼스럽게 의심할 필요가 무엇이 있느냐? 가만있으면 절로 그때는 부처가 되겠지. 흐린 탁수(濁水)를 가만두면 앙금 가라앉고서 바닥이 보이듯이 우리도 역시 원래 부처거니 산란스러운 그 마음만 쉬면 이것은 부처가 되지 않겠는가? 이렇게 화두가 없이 묵묵부답(黙黙不答)으로 그냥 가만히 무념무상(無念無想)으로 앉아있습니다. 그런 참선법이 묵조선(黙照禪)입니다. (잠잘 묵(黙)자, 배출 조(照)자)

 

묵조선(黙照禪)과 화두선(話頭禪). 이 두 가지 선의 갈래, 이것은 중국 당나라 때부터서 굉장히 논쟁을 많이 해왔습니다. 거의 백중이라, 어디가 우세하고 어디가 힘이 부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경향 따라서 지혜(智慧)로 따지기 좋아한 분들은 화두(話頭)로 의심하는 쪽이 좋았겠지요. 허나 꼭 따지면 뭣해 잘못 따지면 괜히 마음으로 분열만 생기고 안 되겠다 이래서 적멸(寂滅)을 좋아하는 고요를 좋아하는 그런 분들은 화두를 배제를 하고 무념무상으로 하는 묵조선법을 취했다 말입니다.

 

우리 한국(韓國)도 우리 조계종(曹溪宗)은 화두를 취하는 선법을 주로 많이 합니다만은 원불교(圓佛敎)는 화두선을 그것을 배격합니다. 그것은 안 된다. 묵조를 해야 한다. 그 사람들은 잠자코 그냥 무념무상으로 묵조를 합니다. 아래 단전(丹田)에다가 힘을 두고서 말입니다.

대만(臺灣)이나 일본(日本) 역시 두 파의 선이 갈려가지고 똑같이 있습니다.

 

<염불선(念佛禪)>

헌데 이런 가운데서 또 한파가 있습니다. 또 한파 이것은 묵조하는 분이나 화두를 드는 분이나 같이 하는 선법입니다. 이것은 무엇인고하면 염불선(念佛禪)이라. 염불선입니다. 우리가 내가 생명(生命)인데 내 생명의 근원은 분명히 나보다 더 훌륭한 생명이겠구나, 천지우주(天地宇宙)가 모두 생명체인데 천지우주의 근본자리, 근본 순수한 그것, 그것은 아주 정말로 완전무결(完全無缺)한 생명(生命)이겠구나, 이와 같이해서 하나의 바싹 마른 이론이나 또는 무념무상의 멍하니 그런 것 보다는 차라리 우리가 하나의 생명으로 인격(人格)으로 구해야 되겠다. 내가 인격인데 내 근본 자성(自性)도 인격이겠지요.

 

천지우주를 본다 할 때 모두가 다 생동(生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천지우주의 근본체. 근본 순수한 하나의 기운 에너지는 역시 우리 생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생명체이니까 인격화시켜서, 인격화 시킬 때는 불처 불(佛)자를 붙입니다. 부처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나, 약사여래(藥師如來)나, 무량광불(無量光佛)이나 그와 같이 그런 모두가 다 인격화 시킬 때는 그러한 부처불자를 붙입니다. 생명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 신앙(信仰), 우리가 성취하는 목표. 우리 근본 생명을 인격화시켜서 그때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이나 관음보살(觀音菩薩)이란 말입니다. 이와 같이 인격화시켜서 우리가 참구(參究)한다 말입니다. 우리가 구한다말입니다.

 

<염불(念佛)과 염불선(念佛禪)>

헌데 이런데 있어서 중요한 점은 보통 염불(念佛)과 염불선(念佛禪)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이것을 또 알아야합니다. 관음보살(觀音菩薩)이나 아미타불(阿彌陀佛)이 저만큼 내밖에 계신다. 우리가 구하고 기도(祈禱) 모시면 그분들 기운이 우리를 돕는다. 이런 정도는 염불선이 못됩니다.

 

법당(法堂)에 들어가서 여러분들이 기도모실 때에 그냥 자기 운수라든가 자기 행복을 구하는 것 그런 정도로 부처님의 이름을 외어서는 염불선이 못됩니다. 그것은 방편염불(方便念佛)에 불과합니다. 염불이 염불선이 되는 까닭은 부처를 자기 마음 밖에서 구하지 않고서, 내 마음의 실체(實體) 내 마음의 실상(實相)이 바로 부처다. 이와 같이 분명히 느껴야 합니다. 또는 천지우주의 실상이 바로 부처다. 이와 같이 느낌으로 해서 비로소 염불이 염불선이 됩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선(禪)을 하고 있습니다. 성불(成佛)의 가장 지름길. 성불의 불도(佛道)의 정문(頂門). 성불의 첩경(捷徑). 참선이라는 것은 인간이 가야할 길 가운데서 가장 탄탄대로(坦坦大路)를 가는 것입니다. 헌데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화두를 의심하는 그런 선법은 이것은 역시 거기에서도 훌륭한 도인이 많이 나왔습니다. 또는 묵조 하는 잠자코 비추어 보는 거기에서도 훌륭한 도인이 많이 나왔습니다. 따라서 어디가 그르다 옳다 우리가 할 수가 없습니다. 근기에 맞으면 좋고 안 맞으면 그때는 조금 더딜 뿐입니다. 억지로 가면은 성불의 법인지라 안 갈수가 없습니다.

 

<문문가입(門門可入)>

조주(趙州)스님한테 와서, 조주스님은 그때 도인인지라, 어느 스님이 와서 ‘조주한테 갈려면 어떻게 가야 합니까?’그러니까 내내야 성불하는 길은 무엇입니까? 그 문제와 같겠지요. 비유담이나 역설이나 그런 말들을 많이 해서 질문들을 참선하는 분들은 많이 합니다만 조주한테 갈려면 어떻게 가야 하겠습니까? 이 말은 성불하는 길은 무엇입니까? 와 똑같은 질문입니다.

그러니까 조주스님께서 하신 말씀이 동문(東門)서문(西門)남문(南門)북문(北門)이라, 조주한테 가는 길. 성불로 가는 길은 북문(北門)만도 아니고 남문(南門)만도 아니고 동서남북(東西南北)이 다 조주한테로 가는 성불의 길입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도인들이 말씀하신 그런 법문은 다 문문가입(門門可入)이라, 법문마다 다 성불하는 길입니다. 우리 범부지(凡夫智)로해서 뭐가 옳다 그르다. 무엇이 수승하다. 이렇게 함부로 말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근기에 맞는가 안 맞는가, 그것만 우리가 따질 것입니다.

 

<근기(根機)에 알맞은 수행법>

목건련(目健蓮)존자하고 사리불(舍利弗)은 아주 절친한 친구이고, 위대한 도인 아닙니까? 부처님의 상족(上足). 가장 윗자리의 도인이 그때는 목건련과 사리불이란 말입니다. 목건련과 사리불이 먼저 가셨기 때문에 나중에 마하가섭(摩訶迦葉) 그분이 법을 정통으로 받았습니다만, 맨 처음에 상족제자는 역시 사리불과 목건련입니다.

 

이런 가운데도 사리불은 재주가 수승하고, 목건련은 신통이 제일이다 말입니다. 한번은 사리불이 목건련한테 놀러갔다 말입니다. 근데 그때 목건련한테 공부하러 들어온 제자가 있었습니다. 제자가 들어와서 계행(戒行)도 바르고 열심히 계속 공부도 했지만은 공부가 잘 안 된다 말입니다.

 

그래서 사리불이 하도 재주가 있다고 하니까 목건련이란 자기 스승을 제처 두고 제자가 물어보았다 말입니다. ‘사리불 존자(尊者)시여, 우리는 지금 입산(入山)한지 오랜데 공부가 잘 안됩니다.’ 이렇게 호소를 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리불께서 ‘그러면 그대들은 어떻게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게 물으니까

 

한 사람은 ‘저는 부정관(不淨觀)을 공부 합니다’ 부정관이란 것은 (아니 불(不)자 맑을 정(淨)자) 자기 몸이 부정하고 더럽고, 인간 차원에서 본다할 때 우리 몸은 더럽기 짝이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누누이 다 말한 것이고 부처님 경전에도 이것은 그때그때 고구정녕으로 말씀한 것 입니다. 우리 몸은 내외(內外)가 다 부정(不淨)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낳을 때부터 부정한 것입니다.

 

<부정관(不淨觀)>

우리가 무지(無智)라하는 무명(無明), 진리(眞理)에 밝지 못하는 무명. 무명이 없으면 인간으로 태어날 리가 만무합니다. 물론 보살(菩薩)로 해서 금생에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오신분도 있습니다만, 지금 여기에 계신 분들은 제가 생각할 때는 상당히 많은 분들이 일부러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이생에 오신 걸로 생각이 됩니다.

 

아무튼 인간으로 왔다는 것은 보통은 다, 무명이 없으면 인간으로 안 옵니다. 영혼이 중음(中陰)계에서, 중음 이것은 저승이 아닙니까? 저승에서 무명 때문에 헤매다 말입니다. 무명 때문에 헤매다가 거기에 알맞은 자기 부모를 만납니다. 부모를 만나면 그 정충에 뛰어 들어서 어머니의 태(胎)에가 태어납니다.

 

따라서 무명(無明)때부터서 벌써 더러운 것이고, 또는 아버지의 정충에 같이 묻어서 태로 들어가는 그것부터 더러운 것입니다. 어머님의 태안이 얼마나 더럽습니까? 낳기 전부터 어머니의 뱃속부터서 또는 낳은 뒤에도 모두가 다 부정이 충만한 것이 우리 몸뚱이인 것입니다.

 

헌데 인간 사회의 여러 가지 죄악(罪惡)은 내 몸이 소중하다. 내 몸이 귀하다. 이런데서 죄악이 싹터옵니다. 내 몸이 아무것도 아니다. 내 몸이 더럽다. 이와 같이 내가 못 생겼다 이럴 때는 아만심(我慢心)도 안 나고 합니다만은 내 몸뚱이가 귀하다.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 그런 존귀(尊貴)하게 아는 그런 마음 그런 마음 때문에 사회적인 해악(害惡)이 많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공부를 부지런히 못 한 것도, 음식에 착심을 갖는 것도, 이성간에 우리가 욕심을 갖는 것도, 모두가 다 자기 몸에 대한 애착 때문에 그럽니다. 자기 몸에 대한 애착이 떠나보십시오. 무슨 음욕이 생기고 무슨 식욕이 더 증량이 되겠습니까? 따라서 욕심이 많은 사람들. 탐욕이 많은 사람들은 부정관(不淨觀)을 시킵니다. 그대 몸이 더럽구나 이와 같이 한 제자는 ‘부정관을 공부합니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수식관(數息觀)>

또 한사람에게 ‘그대는 무슨 법을 공부하는가?’ ‘저는 수식관(數息觀)이라는 호흡법(呼吸法)을 합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니까. 사리불이 부정관을 하는 사람을 보고 ‘그대는 그럼 과거에 무엇을 했는가? 그대가 입산하기 전에 과거에 무슨 직업을 했는가?’ 이렇게 물어보니까 저는 풀무질 대장간에서 이렇게 쇠를 녹이는 풀무질을 했다고 한다 말입니다. 그리고 한사람. 수식관 한 사람에게 물어보니까 그 사람은 세탁하는 일을 했다고 한다 말입니다.

 

풀무질을 한 그 사람은 부정관을 공부했고, 세탁일을 하는 사람은 수식관을 했습니다. 사리불께서 그때 말씀한 것이 “이것은 그대가 과거에 익힌 그런 버릇과는 정반대의 공부를 했구나! 세탁하는 사람은 도리어 부정관으로 인해서 때를 씻어버리는 공부를 했으면 더 쉬울 것인데 그 반대로 했고, 또 풀무질하는 사람은 호흡을 헤아리고 호흡법을 했으면 쉬웠을 텐데 그 반대로 했구나”

이렇게 해서 세탁을 한 사람은 부정관을 시키고, 풀무질하는 사람은 수식관 호흡법을 시켰다 말입니다. 이렇게 하니까 이윽고 얼마 안가서 그냥 도를 통해서 아라한(阿羅漢)이 되었습니다.

 

이걸 본다하더라도 지금 우리 가운데는 위대한 도인이 없습니다. 위대한 도인이 없다함은 경솔한 말씀이고 별로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근기(根機)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참 드물다 말입니다. 소위 말하는 깊은 삼매(三昧)에 들어서 타심통(他心通) 되어야 만이 우리 근기를 볼 것인데 그런 분들이 우리 주변에 별로 없습니다. 따라서 화두를 준다하더라도 우리한테 딱 알맞은 화두를 못 줍니다. 또한 그대는 무슨 주문을 해라. 주문을 준다 해도 역시 우리에게 알맞은 주문을 못 줍니다. 주문도 가지가지 많이 있지 않습니까?

 

 

따라서 아까 목건련 같은 그런 신통제일(神通第一) 밑에 제자가 되었다하더라도 그와 같이 과오를 범합니다. 헌데 하물며 지금 웬만한 분들이 우리한테 어떻게 딱 알맞은 공부 방식을 주겠습니까? 이런 때는 가장 보편적(普遍的)인 방법이 무엇인고 하면은 조금 전에 말씀한 것처럼 염불선(念佛禪)입니다.

 

어떤 경전(經典)이나 보면은 염불(念佛),염법(念法),염승(念僧)이라. 부처를 염하고 법을 염하고 승을 염해라.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또는 내 자성이, 내 본 생명이 원래부처거니, 내가 부처를 생각하는 것은 조금도 누가 되지 않고 허물이 없습니다. 화두를 들건 묵조를 하건 어떤 방법을 취했든 간에 내가 부처임을 내가 느끼는 것은 조금도 허물이 없습니다.

 

따라서 화두(話頭)를 드는 분이나 묵조(黙照)를 하는 분이나 똑같이 염불선(念佛禪)을 아울러서 같이 했습니다. 이 때문에 여러분 가운데서 묵조를 하셔서 잘되신 분들은 그대로 밀고 나가십시오. 화두로 해서 잘 되신 분들은 그대로 밀고 나가십시오. 조금도 그때는 허물이 없습니다.

 

허나 잘 안되시는 분들은 조금 더 애를 써 보시고서, 물론 여러분에게 화두를 주신 분은 다 훌륭한 스님입니다. 여러분의 근기를 대강 대강 보시고서 주신 것이니까 지금 안 된다 하더라도 힘을 더 애쓰고 해보십시오. 그러나 상기(上氣)가 되어서 곤란스럽거나 정 안되는 경우는 누구나 다 보편적으로 할 수 있는 선법(禪法), 그런 염불선(念佛禪)을 하시기 바랍니다.

 

 

<염불선은 부처님의 근본서원을 믿고 한다.>

이것은 어째서 우리가 하기가 쉽고, 공덕(功德)이 많은고 하면은, 어제도 제가 말씀드렸습니다만은 천지우주는 근본(根本) 서원(誓願)이 있습니다. 우주로서의 근본(根本) 목적의식(目的意識)이 있습니다. 마치 인력(引力)이 있고 척력(斥力)이 있듯이 우주의 인력 이것은 모든 중생을 가운데 중심으로 이끌어옵니다. 이것을 우리 종교적으로 표현하면은 모든 중생을 다 해탈(解脫)로 이끌어오는 힘이 우주에는 본래 있습니다. 모든 중생을 다 성불(成佛)시켜야 되겠다.

 

또는 모든 중생한테 무량한 법문(法門)을 다 알게 해야겠다. 이런 우주의 의지(意志)가 원래 있습니다. 따라서 그런 의지로 딱 믿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근본서원(根本誓願:本願)을 딱 믿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다에 가서 배를 탈 때에 풍선(風船)을 타면은 풍향(風向)이 좋아야만이 잘 갑니다. 그래야만이 바람 쪽으로 돛대를 세우면 잘 가겠지요.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역시 부처님의 본원(本願). 부처님의 근본서원에 우리가 편승(便乘)하면 됩니다. 천지우주 인력은 이쪽방향인데 우리가 인력을 반대해서 저쪽으로 갈려고 해보십시오. 그때는 굉장한 무리가 생기지요.

따라서 부처님의 힘은 우리들 모두를 다 해탈(解脫)시키려는 애쓰는 힘이 원래 있습니다. 우리 본 성품은 부처인데 따라서 부처의 힘을 딱 믿어버리면 그때는 우리가 이미 편승한다 말입니다.

 

순풍(順風)에 돛단배 같이 부처님의 원력(願力) 거기에 편승하면 쉽습니다. 헌데 편승하려면은 부처님을 생각을 또 많이 해야 합니다. 중생염불불환억(衆生念佛佛還憶)이라, 중생이 부처를 염하면 부처는 도리어 우리를 굽어봅니다. 중생염불불환억이라, (부처 불(佛)자. 돌아올 환(還)자. 기어할 억(億)자) 중생이 부처를 생각하면은 부처는 또한 우리를 굽어봅니다.

<念念稱名常懺悔 人能念佛佛還憶 凡聖相知境相照 即是眾生增上緣[般舟三昧行道往生讚]>

 

부처가 아닌 우리 사람끼리도 역시 여느 사람을 우리가 애쓰고 생각하면, 집중하는 그런 염파(念波) 때문에 그 사람은 나를 굽어보는 것입니다. 헌데 하물며 부처는 만능(萬能)하신 분입니다. 부처는 생명이기 때문에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은 우리가 절하면 다 보시는 것이고, 우리가 부르면 들으시고, 우리가 생각하면 다 아십니다. 우리가 구하려하면 부처님은 분명히 우리 앞에 나오실 겁니다. 부처님은 능소능대(能小能大)입니다. 더러는 작은 모습으로, 우리가 크게 구하면 우주에 가득찬 모습으로, 부처란 것은 본래 상(相)이 없습니다만은 이것은 무한히 가능한지라 우리가 구하는 대로 옵니다.

 

[능엄경(楞嚴經)]에 가서 “약중생심(若衆生心)” 만약 중생의 마음이 “억불염불(憶佛念佛)”이라, 부처를 기억하고 부처를 생각하면은 “금생당래(今生當來) 필정견불(必定見佛)”이라, 금생과 내세에 반드시 부처를 뵈온다는 말입니다. <若眾生心,憶佛念佛,現前當來,必定見佛![首楞嚴經卷第五]>

 

우리는 부처를 생명으로 알아야합니다. 만약 우리 중생이 부처를 생각하고 부처를 외운다하면은 현생이나 아니면 내생에 분명히 부처를 봅니다. 부처 그것은 일정한 모습이 아닙니다. 능소능대(能小能大)라 작을 때는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이고, 클 때는 천지우주를 다 감싸는 것입니다. 천지우주가 바로 부처거니 보아서<견불(見佛)> 부처하고 일치가 된다는 말입니다.

 

또 한 가지는 본래 부처이니 의심을 뭐해? 가만히 있으면 되겠지. 우리가 산란심(散亂心)만 안내면 우리가 부처가 되어가겠지. 이와 같은 것은 묵조선(黙照禪)이라.

 

또 한 가지는 화두(話頭)하는 분이나 염불(念佛)하는 분이나 묵조(黙照)하는 분이나 다 같이 공동(共同)으로 할 수 있는 염불선(念佛禪). 내 자성(自性)이 원래 부처이니 내 자성 이름이 아미타불(阿彌陀佛)이고 관음보살(觀音菩薩)이니까 내가 내 이름을 부르면서 하겠다. 이와 같이 생명(生命)으로 구하는 분들은 부처님의 이름을 구해서 하시면 좋습니다. 이렇게 해도 무방합니다.

 

헌데 이러한데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앞서 말한 것처럼 선오후수(先悟後修)라. 선오후수가 안 되면은 참선이 못됩니다.

 

<구해탈(俱解脫) : 혜해탈(慧解脫)정해탈(定解脫)>

우리 깨달음이 해탈(解脫). 우리 목적이 해탈 아닙니까? 우리 번뇌(煩惱)에서 해탈 또는 인생고(人生苦)에서 해탈이 우리 공부하는 목적입니다. 헌데 인생고에서 참다운 해탈은 불법의 성불(成佛)이외에는 없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불교의 목적은 해탈인데, 해탈을 구분해서 혜해탈(慧解脫)이라, 정해탈(定解脫)이라, 이와 같이 구분해 있습니다. 혜해탈 이것은 지혜 혜(慧)자, 풀 해(解)자 혜해탈입니다. 우리가 지혜로 해탈합니다.

 

그 다음은 선정해탈(禪定解脫)이라.

지혜로는 다 알았다하더라도 우리가 깊은 삼매에 못 들면은 그때는 우리 생리(生理)에 배어 있는 그런 습기(習氣) 버릇을 못 버립니다.

마음으로는 다 알지만은 오랫동안 참선(參禪)하지 않고 염불(念佛)하지 않으면 그때는 우리 몸에 배어있는 습기(習氣). 번뇌(煩惱)의 종자(種子)는 못 떼어냅니다. 마치 잡초를 베면은 우둠지는 베어 버려도 잡초 뿌리가 남아 있어 다시 솟아오르듯이,

 

우리는 혜해탈(慧解脫)을 해서 지혜(智慧)가 밝은 분들이 그냥 내가 부처다. 천지우주는 바로 부처거니. 이와 같이 느낀다하더라도 오랫동안 삼매(三昧)에 잠겨서 종자 번뇌의 씨앗을 못 빼어 버리면 신통(神通)도 그때는 못합니다. 따라서 과거에도 막히고 현재에도 막힙니다.

 

참다운 해탈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超越)해야 합니다. 과거에도 통달무애(通達無礙)하고, 미래에도 통달무애하고, 또는 인과(因果)에도 안 걸리고, 그래야만이 참다운 해탈인 것입니다. 이런 해탈은 깊은 삼매에 들어서 우리번뇌의 종자를 다 몽땅 뽑아야합니다.

 

이런데서 달마(達磨)스님 같은 대천재(大天才)도 9년 면벽(面壁)이라. 9년 동안 앉아서 공부했고, 석가모니(釋迦牟尼) 같은 분도 역시 6년 동안 고행(苦行)을 했습니다. 서산(西山), 사명당(四溟堂), 원효대사(元曉大師) 어떤 분이든 간에 아까 제가 말씀드린 선정해탈(禪定解脫).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사람들은 머리가 영리해서 단박에 이치(理致)를 알면 다 되어버렸다 말입니다. 그래가지고서 도인행세(道人行世)한 분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공부한 과거를 보면 빤한 것입니다. 헌둥만둥 이렇게 해서는 아까 말씀한 것처럼 정해탈(定解脫), 선정해탈을 못합니다.

 

따라서 그때는 구두선(口頭禪)이라, 말로만 지껄이지 참다운 힘은 없습니다.

 

참다운 해탈은 조금 전에 말씀한 것처럼 과거에 통달. 미래에 통달. 또는 인과(因果)에 안 걸려야 합니다. 이래야만이 참다운 그때는 삼계(三界) 해탈이고 성불(成佛)입니다. 이렇게 하려면 법성(法性)을 능히 우리가 체험(體驗)을 해야 합니다. 법성을 체험하면 그때는 인과(因果)에 안 걸리고 과거, 미래에 통달무애라, 통달해서 걸림이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참선한다는 것은 아까 말씀한 것처럼 먼저는 혜해탈(慧解脫)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보통 자기를 너무나 겸허(謙虛)해서 나는 번뇌(煩惱)가 많다. 내가 범부(凡夫)다. 이렇게 자기를 겸손(謙遜)한 분이 있습니다만 참선(參禪)을 할 때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우리 범부가 봐서 범부인거지 비록 내가 지금 욕심도 많고 진심도 많다하더라도 부처가 보면 똑 같은 부처입니다.

 

천지우주를 바로 산이요, 냇이요, 강이요, 물이요, 모두를 다 같이 똑 같은 평등(平等) 무차별(無差別)의 부처로 봐야합니다. 이래야만이 혜해탈(慧解脫)입니다. 이런 자세로 공부해야 이것이 참선(參禪)입니다.

 

<범부인체 바로 부처이다.>

경(經)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약기어중생상(若起於衆生相)”이라, 만약 내가 중생이라 하는 상을 낸다하면 “동비방삼세제불(同謗三世諸佛)”이라, 삼세 부처님을 비방하는 죄입니다.

<或起於一念 言我是凡夫 同謗三世佛 法中結重罪 [五字陀羅尼頌>

 

삼세 부처님의 법이라 하는 것은 다 우리 중생한테 청정(淸淨) 불안(佛眼)을, 부처의 안목(眼目)을 우리한테 줄려고 하신 법문(法門)입니다. 즉, 부처의 견해, 부처만이 바로 봅니다. 부처만이 보는 바른 정견(正見) 이것을 우리한테 줄려고 가르친 가르침이 불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만일 ‘내가 범부다’ 이렇게 생각을 내면은 이것이 벌써 삼세제불(三世諸佛)을 비방(誹謗)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상대 현실적인 존재에서는 분명히 우리는 범부(凡夫)입니다. 범부이나 바로 보면 범부인체로 바로 부처입니다. 일반 공부는 내가 범부다. 내가 못났다. 나는 참회해야 한다. 이와 같이 자기를 비하(卑下)해서 하는 공부가 일반 공부입니다. 허나 참선은 그렇지 않습니다. 참선은 내가 부처가 되어야합니다. 그래서 참선하는 분들은 남이 보면 아만심(我慢心)도 있는 것 같이 보입니다.

 

본인(本人)이 어떤 경우에는 참회(懺悔)할 때는 현실적으로 자기 범부성(凡夫性)을 반성(反省)하고서 공부를 해야 하나, 참선(參禪)을 할 때에는 우리가 본래로 돌아가서 역시 앞서 말한 것처럼 부처가보면 바로 내가 부처거니 내 몸 바로 부처의 청정법신(淸淨法身)이요, 내 마음은 바로 청정심(淸淨心)이요.

<三身元我體 四智本心明 身智融無礙 應物任隨形, [法寶壇經], [正法眼藏]>

 

천지우주 이것은 바로 일진법계(一眞法界)라, 천지우주가 바로 극락세계(極樂世界)다 말입니다.

 

<선오후수(先悟後修)>

이와 같이 느껴가지고서 화두(話頭)를 들고, 묵조(黙照)를 하든, 염불(念佛)도 그렇게 해야만이 비로서 염불선(念佛禪)입니다. 이것이 선오후수(先悟後修)입니다. 먼저 알고 닦는다 말입니다.

 

우리가 참선(參禪)하면 이것은 별로 공덕(功德)은 없고, 내 마음만 좀 맑아진다. 공덕을 느끼려면 법당(法堂)에 가서 부처님한테 굽신굽신 절하고 기도(祈禱)를 모셔야만이 공덕을 받는다. 이렇게 느끼는 분이 있습니다. 허나 이것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달마스님 말씀도 “약능료심(若能了心)”하면은 “만행구비(萬行具備)”라. 만약 우리 마음을 깨달으면 만 가지가 거기에 다 붙어온단 말입니다. 마음을 깨달으면 만공덕(萬功德)이 거기에 다 붙어옵니다. <心者萬法之根本 一切諸法唯心所生 若能了心 則萬法俱備. [達磨大師破相論],[少室六門]>

 

따라서 실은 참선공덕(參禪功德)이 자기 집안 운수나 누구한테나 이것이 제일 좋은 일입니다. 여러분들이 ‘내가 부처다’ ‘내 본래 마음이 부처다’ ‘천지우주가 바로 부처다’ 이와 같이 부처라는 생각을 딱 간직하고서 공부한다면 공부하는 그 광명(光明)이 여러분의 집안을 비추는 것입니다. 집안을 지키는 것입니다.

 

참선(參禪)은 어느 면으로 보나 최상법(最上法)입니다. 공덕면으로 보나 우리 마음 밝게 해주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것은 최상법입니다. 여기계시는 분들은 집안의 일을 주저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들께서 집안에 나이 많은 노부모가 계신다 하더라도, 노부모 단둘이만 계신다하더라도, 여러분은 지금 불효하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부모님한테 대한 가장 최상(最上)의 효도(孝道)는 부모님을 영생(永生)의 해탈(解脫)로 인도하는 법(法)입니다.

 

자식한테나 동생한테나 자기 애인한테나 누구한테나 그 사람한테 가장 거룩한 보시는 무엇인가? 그분을 영생의 해탈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까 제가 말씀한 것처럼 여러분과 같이 말씀드릴 기회가 별로 없습니다. 또한 이번에 헤어지면 영원히 이런 기회가 없을는지도 그것은 모릅니다. 인간(人間) 자체가 무상(無常)하지 않습니까? 꼭 여러분들 틀림없이 아까 말씀한 것처럼 참선의 결정신심(決定信心) 말입니다. 참선은 꼭 선오후수(先悟後修)라. 먼저 천지우주의 모두가 부처 아님이 없다는 생각. 내가 바로 부처라는 생각 말입니다.

 

내가봐서, 못난 내가봐서 범부(凡夫)로 보는 것이지, 부처가 보면 내가 똑 같이 석가모니(釋迦牟尼)나 같은 부처인 것입니다. 어떤 누구나가 다 부처인 것입니다. 한용운(韓龍雲)의 ‘님의 침묵’에 있는 시(詩)에도 임만이 임이 아니라 바로 보면은 산도, 내도, 풀도, 다 임입니다. 바로 보면 다 부처님입니다. 이와 같이 딱 느끼고 천지우주를 하나의 부처덩어리로 봐버려야 참선이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못 보면 참선이라는 말을 못 붙입니다.

<정혜쌍수(定慧雙修)>

이렇게 보고서 그다음 문제는 정혜쌍수(定慧雙修)라. 정(定)과 혜(慧)가 같이 아울러 가야만이 그때는 마치 수레바퀴가 둘이 되어야만이 갈수가 있고, 나는 새는 날갯죽지가 둘이 되어야만이 높은 하늘로 고상(高翔)하듯이 우리는 꼭 정(定)과 혜(慧)가 아울러 가야합니다. 그래야 조화롭게 공부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이 빠릅니다.

 

묵조(黙照)만 주로해서 가만히 있는 선, 이런 선은 고요한 정(定)은 좋아도 혜(慧)가 부족하니까 빨리 못갑니다. 따지기만 좋아하는 그런 선(禪)은 따지면 혜(慧)는 밝아지겠지요, 허나 그런 선법은 고요한 일심(一心)이 못 되니까 역시 정(定)이 부족합니다. 우리는 비추어 보는 혜(慧)와, 오로지 마음을 모우는 정(定)과, 이것이 아울러야 합니다. 비추어보는 혜와, 관조(觀照)하는 혜와 또는 마음을 하나로 모이는 고요한 그 마음이 딱 하나로 합해져야 만이 정혜쌍수(定慧雙修)입니다. 그래야만이 빨리 갑니다. 그래야 몸도 마음도 가볍습니다.

 

몸이 거북하다, 몸이 무겁다, 가슴이 답답하다, 이런 것은 우리 마음이 정혜쌍수가 못되어서 그렇습니다. 정혜균등(定慧均等)이라. 정과 혜가 균등 되면 몸도 가볍고 마음도 가벼운 것입니다. 그래야 분분단단히 올라가서 성불(成佛)의 길로 우리가 나아간다 말입니다.

 

<서산대사(西山大師) 염불법문(念佛法門)>

그럴려면 마음으로 부처의 경계(境界). 서산대사(西山大師) 선가귀감(禪家龜鑑) 법문(法門) 가운데 이런 법문이 있습니다. “심즉연불경계(心卽緣佛境界)”라, 마음은 부처의 경계를 연(緣)해서, 떠나지 않게 해서, “억지불망(憶持不忘)”이라, 생각하고 생각해서 그 마음을 잊지 않는다 말입니다. 마음심(心)자, 곧 즉(卽)자, 이연 연(緣)자, 부처 불(佛)자, 경계 경(境)자 경계 계(界)자. ‘심즉연불경계’마음은 부처의 경계를 연해서, ‘억지불망’이라.

 

생각할 억(億)자, 가질 지(持)자, 아닐 불(不)자, 잊을 망(忘)자. 이를 잊지 않는다 말입니다. “구즉칭명불호(口則稱名佛號)”이라, 입 구(口)자, 곧 즉(則)자. 입은 곧 부처이름을 불러서 “분명불란(分明不亂)”이라, 분명히 불러서 산란스럽게 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부처의 경계를 잊지 않는 그 마음과 부처의 이름을 계속해서 외우는 그 마음이 하나가 딱 되어서 해야만이 우리 8만4천 번뇌를 몰록 순간 녹인다는 것입니다.

 

<心則緣佛境界。憶持不忘。口則稱佛名號。分明不亂。如是心口內外相應。若念一句阿彌陀佛。能滅八十億劫生死之罪。成就八十億劫殊勝功德. [禮念彌陀道場懺法]卷第二 >

<阿彌陀佛六字法門。定出輪迴之捷徑也。心則緣佛境界憶持不忘。口則稱佛名號分明不亂。如是心口相應名曰念佛。[禪家龜鑑]>

 

<육조혜능대사 : 자성(自性)을 비춰보면서 ‘이뭣고’를 하라>

우리가 ‘이뭣고’ 선(禪)을 한다하더라도 천지(天地)에 빛나는 천지를 훤히 비추는 우리 자성(自性)을 딱 비추어 봐야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이것이 무엇일고’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지 그냥 의심만해서는 그때는 마음이 지혜(智慧)도 정(定)도 맑아지지 않습니다. 이뭣고를 한다하더라도 ‘이뭣고’선을 제시한 육조혜능(六祖慧能)스님의 뜻을 따라서 우리 마음이 천지를 훤히비추는 광대무변(廣大無邊)한 우리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가운데서 ‘이것이 무엇인가?’를 해야 합니다. 부처의 경계 이것을 비추어보는 이것이 혜(慧)입니다.

 

허나 우리는 부처의 경계(境界)를 우리 범부(凡夫)는 못 봅니다. 다만 부처님이나 도인(道人)들 말씀따라서 방불(彷佛)에 우리는 느낄 뿐입니다. 색즉공(色卽空)이라. 이것도 역시 부처의 경계를 방불하게 말씀한 말씀입니다. 천지우주는 텅 비어있고, 텅 비어 있는 가운데는 알 수 없는 묘유(妙有)가 있다. 이것도 역시 부처의 경계를 방불하게 말씀한 말씀입니다.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진공묘유(眞空妙有)>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 천지우주는 부처님의 광명뿐이다. 이것도 역시 부처님의 경계를 방불하게 말씀한 말씀입니다. 청정광불(淸淨光佛)이라, 우주는 청정한 광명뿐이다. 이것도 역시 부처님의 경계를 방불하게 말씀한 말씀입니다.

 

<無量壽佛號 : 無量光佛、無邊光佛、無礙光佛、無對光佛、炎王光佛、清淨光佛、歡喜光佛、智慧光佛、不斷光佛、難思光佛、無稱光佛、超日月光佛。[佛說無量壽經卷上]>

 

우리는 이런 가운데서 우리 마음에 맞는 그런 것을 골라서 우리가 부처의 경계를 안 떠나야 합니다. 이렇게 하다보면 우리는 원래 부처인지라,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차근차근 부처하고 간격이 좁아진다 말입니다. 이렇게 부처의 경계를 생각하는 이것은 혜(慧)가되고, 이렇게 생각하는 그 마음을 쭉 안 쉬고 이어가는 이것은 정(定)이 됩니다.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

다른 말씀으로 바꾸어서 말하면 천지우주를 하나의 광명(光明)이다. 하나의 부처다. 생각하는 이 마음. 이것은 일상삼매(一相三昧)가 되는 것이고, 이것을 안 쉬고 쭉 이어나가는 것은 일행삼매(一行三昧)입니다. 천지우주가 부처님의 무량광명(無量光明)이 아님이 없음을 비추어보는 이것은 혜(慧)가되고, 이런 마음을 안 쉬고 생각생각 이어가는 계속하는 마음은 정(定)이 됩니다.

 

이것이 아울러져야 만이 우리 공부는 조화(調和)가 되서 마음도 가볍고 몸도 가볍고 성불이 빠릅니다. 이것이 정혜쌍수(定慧雙修)입니다. 정혜균등(定慧均等)입니다. 말씀 드리려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참선(參禪) 이것이 굉장히 어려운 것이고 최상(最上)의 문화형태인지라, 우리가 이것을 체계(體系)를 세우려고 하면은 몇 권의 책도 부족한 것입니다. 따라서 화두(話頭)를 드는 법문(法門)만 한다 하더라도 선문념송(禪門拈頌)이라, 30권 책에다 이렇게 수록했습니다.

 

그렇게 해도 다한 것은 못됩니다. 이와 같이 어렵습니다만은 다 일언이폐지(一言以蔽之) 하고 한말로 두루뭉술하면 선오후수(先悟後修)라. 먼저 내가 부처임을 딱 느끼면서 닦아야합니다. 그래야 참선이지 그렇게 못 느끼면은 그 떄는 선이 못되는 것입니다.

 

염불(念佛)을 하건, 하나님을 부르건, 주문을 하건 그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모두가 실은 선뿐인 것입니다. 모두가 선(禪)뿐인데 따지고 보면, 주문을 한다하더라도 천지우주가 부처임을 딱 느끼고 주문하면 그건 선입니다. 하나님을 불러도 하나님이란 그것이 천지우주를 다 감싼 우리 부처님과 같으면 그때는 그것이 선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말이나 문자나 그런 것에 걸리지 말고서 오직 마음자세. 우리 마음이 부처와 나와 더불어서 하나, 천지우주가 하나의 부처 덩어리 이렇게 느끼고 닦는 이것이 선오후수(先悟後修)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그러한 천지우주를 하나의 부처로 느끼는 그 느낌. 그 느낌을 계속해서 이어간단 말입니다. 이것이 정(定)입니다.

 

이와 같이 정혜쌍수(定慧雙修)와 선오후수(先悟後修), 선오후수(先悟後修)와 정혜쌍수(定慧雙修)이 말씀을 명심(銘心)하시고서 이번 기회에 꼭 ‘참선(參禪)이 무엇인가?’ 하는 참선에 대한 결정신심(決定信心)을 가지고서 앞으로 부지런히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 19850803-태안사 하계용맹정진 4일째법문 : 청화대종사 설법

* 태안사 방송실 카셋 녹음

* 정훈스님 카셋 테이프 보급

* 해인, 법륜행, 외 펜글씨 녹취

* 태호스님 녹취 취합

* 20160221-워드작업 : 고은, 창해

* 20160301-워드교정 : 본정

* 20161016-재교정: 이지현 외

 

<큰스님 구어체 그대로 정리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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