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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마음의 고향

마음의 고향28집(3)


마음의 고향27집,28집.zip



19850804-태안사 하계용맹정진 해제법문

<참선(參禪)은 안락법문(安樂法門)>

 

<본래 우주는 영원한 행복이 충만한 불성광명체이다.>

다시 새삼스럽게 말씀드릴 필요도 없이 이번 우리 용맹정진(勇猛精進)의 대명제는 참선(參禪)입니다. 즉 선(禪)입니다. 어떻게 선을 해야 할 것인가? 이 문제는 저나 또는 저의 말씀을 보다 더 부연 설명도 하시고 보충도 하시고 여러 가지로 체계를 세워서 말씀해 주신 거사님들 말씀이나 다 선을 중심으로 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선(禪) 이것은 다시 말할 것도 없이 불도(佛道)의 대결론입니다. 우리가 공부를 어떻게 하든지 간에 불교를 할 때에는 꼭 선을 통과해야 합니다.


불도가 아니라도 공부가 성취되는 마당에서는 무슨 공부나, 기독교의 성자(聖者)나 또는 유교의 성자나, 성자라고 할 수 있을 바에는 마땅히 선 같은 그런 마음자세를 통과해야 합니다. 선은 우리가 얼핏 생각할 때는 굉장히 어렵게 생각합니다마는 제가 몇 번 말씀 하였습니다만 인류문화사의 가장 끄트머리, 인류문화의 정화(精華), 이것이 선이기 때문에, 아주 고도의 수행법(修行法)이기 때문에 이것이 참 어렵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또는 선에 관한 여러 가지 문헌(文獻)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선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말씀을 많이 해 놔서, 또는 그 문헌들이 하도 복잡해 놔서, 요령 있게 알기가 참 어렵습니다. 허나 선 이것은 『안락법문(安樂法門)』이라, 실은 쉽다고 하면 제일 쉽습니다. 어째서 쉬운가 하면은 우주(宇宙)의 대법칙(大法則)에 따르는 몸가짐, 우주의 질서에 따르는 말, 바로 우주의지를 내 의지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쉬운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가장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천지우주(天地宇宙)의 규범(規範)을 바로 내 모양으로 하고, 천지우주의 질서에 따르는 말을 내 말로 하고, 천지 우주의 의지(意志)를 내 의지로 하는 이것이 참선(參禪)입니다. 우리가 그런 천지(天地) 자연 질서에 어긋나기 때문에 복잡한 것입니다. 성자라는 것은 조금도 무리가 없습니다. 공자(孔子)님 말씀에도 내가 15세 정도로나 나이가 되어서 비로소 학문(學文)에 뜻을 두고,<십오이지학(十五而志學)>

30세에 입지(立志)하고, 삼십에 그때는 결정적으로 내가 이렇게 해야 하겠구나 하고 각오를 세웁니다. <삼십이립(三十而立)>

 

40세에 불혹(不惑)하고,(아니 불(不)자, 미혹할 혹(惑)자). 사십에는 미혹되지 않는다 말입니다. 결정신심(決定信心)이 생겨서 그때는 그냥 무슨 유혹이나 그런 것에 유혹되지 않고, 마음이 환경에 휘둘리지 않는다 말입니다. 사십에 불혹이라, 40세에는 자기 인생관(人生觀)을 완전히 확립을 시켰습니다. <사십이불혹(四十而不惑)>

 

오십(五十)에 지천명(知天命)이라,(알 지(知)자, 하늘 천(天)자, 목숨 명(命)자). 오십(五十)에 그때는 하늘의 명령 하늘의 질서를 안다 말입니다.

불교로 말한다며는 초견성(初見性)이나 그렇게 했겠지요. 하늘의 질서를 안다 말입니다.<오십이지천명(五十而知天命)>

 

육십(六十)에 이순이라,(귀 이(耳)자, 순할 순(順)자). 자기에게 들어오는 것에 대해 조금도 막힘이 없단 말입니다. 무애(無礙) 지혜(智慧)라 거리낌 없는 지혜를 알 때가 그때가 육십이다 말입니다. <육십이이순(六十而耳順)>

 

칠십(七十)에는 종심소욕(從心所欲)하여 내 마음대로 행(行)하여도 그때는 불유거(不踰矩)라, 조금도 법도(法道)를 넘지 않는다 말입니다. 그렇게 행해도 그때는 우주질서를 넘지 않는다 말입니다.<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성자들은 천지우주의 질서를 따른다.>

이와 같이 성자(聖者)란 비록 자기 사는 역사적 환경은 다르다 하더라도 마음 자세는 그와 같이 우주 천지에 그런 질서를 따르는 것입니다. 또는 원래 업장(業障)이 가벼운 사람들은 비록 그 사람이 어느 지위에 있다하더라도 천지 우주 질서를 따르기 위해서 애쓰는 것입니다. 여기 스님네가 지금 계시지만 누가 억지로 중 되라고 해서 되겠습니까? 자기 마음속으로 업장이 가볍기 때문에 과거 전생부터서 천지우주 질서를 따르는 그런 행습 때문에 그때는 누가 말려도 할 수 없이 중이 되는 것입니다.

 

천군만마(千軍萬馬)가 가로 막아도 그렇게 안 될 수가 없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백만장애(百萬障碍)를 물리치고 출가입산(出家入山)했습니다. 왕자(王子)의 지위를 그만 두고, 또는 그런 자기 부왕인 정반왕(淨飯王)이 그렇게 말렸어도 그때는 중이 된다 말입니다. 이와 같이 천지우주의 질서를 따르는 즉 말하면 구도심(求道心)이 불타있는 그때는 막을래야 막을 수가 없습니다.


헌데 이러한 천지우주의 질서를 가장 따르기 쉬운 방법, 바로 따르는 그 방법 그것이 바로 참선입니다. 그래서 참선을 안락법문(安樂法門)이라. 요즘 어떤 분분들은 계행(戒行)지키기가 굉장히 어렵다. 계행 지키면 갑갑하다 이런 말을 합니다. 허나 업장이 가벼운 분들은 계율(戒律) 지키기가 가장 쉬운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술 먹기보다 안 먹기가 더 쉽습니다. 싸움하기보다 안하기가 더 쉽습니다. 음탕한 짓 안하기가 하기보다 더 쉽습니다. 가장 편하고 쉬운 행동 이것이 계율입니다.


그런데 나쁜 버릇을 잘 못 붙인 사람들은 그것이 쉽지 않다 말입니다. 고기 먹지 말라. 평소 고기를 먹어서 맛을 들인 사람들은 그것을 참으려면 어렵겠지요. 허나 맑은 사람들은 먹을래야 먹을 수가 없습니다. 고기 한 점 들어가도 그냥 비위가 상합니다.

 

우리들은 태초(太初)에 인간이 어떻게 나왔는가? 그것을 생각하면은 그런 음식에 대해서도 그냥 알 수 있습니다. 태초에 인간이 우주가 텅 빈 허공 가운데서 형체가 생겨서, 불교말로 하며는 공겁(空劫) 가운데서 성겁(成劫)이라, 우주가 이루어진다 말입니다. 우리 앞서 거사님들이 과학적으로 또는 철학적으로 불교를 증명도 하시고 모두 하셨습니다마는 불교는 과학적인 동시에 철학이오, 철학인 동시에 종교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과학은 비록 세밀한 변증(辨證)은 미처 안 되어있다 하더라도 원리는 굉장히 심수오묘(深邃奧妙)한 원리를 밝히고 있습니다. 천지 우주의 시초도 역시 다시 말하자면 천지개벽(天地開闢)론, 천지창조(天地創造)론 이것도 역시 불교와 같이 심수오묘한 가르침이 없습니다.

 

 

<중생의 공업력(共業力)으로 우주가 이루어진다.>

텅 빈 허공 가운데 우주가 이루어질 때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것은 우주가 텅 비어 버려도 파괴 안 될 정도의, 영향을 받지 않을 정도의 맑은 의식수준(意識水準)의 존재가 많이 있습니다. 즉 말하자면 저 무색계(無色界)에 있는 중생, 색계(色界)에 있는 중생도 광명(光明)만을 몸으로 하는 중생, 그런 중생들은 우주가 파괴되어버려도 파괴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중생은 존재합니다.


욕계(欲界)에 있는 이와 같은 거치러운 질료(質料), 거치러운 물질로 몸을 한 그런 중생들은 다 파괴되고 맙니다마는 업장(業障)이 가벼워서 광명(光明)을 몸으로 한 중생들은 천지우주가 파괴되어도 그때에는 파괴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그런 중생들이 생각을 하면은 생각하는 그것이 쌓이고 쌓여서 우주를 구성합니다. 어제 우리 거사님도 말씀하셨습니다마는 우리 말 한 마디, 우리 생각 하나 하나가 창조하는 힘이 있습니다. 생각 한 번 딱하면 생각하는 그것이 이제 전자(電子)로 움직이고 양자(陽子)로 움직입니다.

 

<맑은 한 생각이 우주를 정화시킨다.>

 

우리는 흔히 진묵대사(震黙大師)와 서산대사(西山大師)를 비교해서, 서산대사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나와서 의병을 모집해가지고서는 국가를 위해서 싸웠으니까 이 분은 훌륭하고, 진묵스님은 한 번도 안 나와서 이 임란을 보고서 그냥 산중에가 있었으니까 이 분은 별로 국가에 대한 애국심이 없다. 이와 같이 흔히들 말합니다마는 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비록 세속(世俗)에서는 한 번도 안 나왔다하더라도 도인(道人)들이 산중에서 이렇게 가만히 참선하고 있는 그것, 그 맑은 마음, 그 맑은 염력(念力), 그것이 우리 주변을 정화(淨化)시키고 우주를 정화시키는 것입니다. 적군(敵軍)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은 마가타(摩伽陀)국으로 이렇게 오시면 마가타국으로 많은 선신(善神)들이 이렇게 몰려옵니다. 그리고 마가타국에 붙어있는 악신(惡神)들은 무서워서 다 도망가 버립니다. 다른 나라에 가면 다른 나라 역시 그런 호법선신들 그런 좋은 신장(神將)들은 따라서 줄줄이 갑니다. 그와 동시에 그 나라에 병고(病苦)도 일으키게 만들고 하는 그런 나쁜 신들은 다른 데로 도망가고 맙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한 번 생각하면 그 한번 생각하는 힘이 즉시에 바로 자기 마음뿐만 아니라 우주를 정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또 나쁜 생각을 하면 즉시에 자기를 오염(汚染)시키고 우주를 오염시킵니다.

 

무색계나 색계의 좋은 데에 있는 중생들이 생각하는 그 생각 생각들이 쌓이고 쌓여서 전자를 만들고 또는 양자를 만들고 각 원자를 만들어서 천지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 어떻게 불경(佛經)에는 표현 되어 있는가 하면은 중생의 공업력(共業力)으로 우주를 만들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한 가지 공(共)자, 업 업(業)자, 한 두 사람이 생각하는 힘만 가지고는 우주를 구성 할 수가 없습니다.

 

천지가 파괴가 되어서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보아서는 텅텅 비어 버렸지만은 순수한 에너지는 그대로 있습니다. 불성(佛性)은 그 대로 충만해 있습니다.

그런 불성(佛性) 기운(氣運)이, 아직 몸이 파괴 안 된 중생들이 생각하는 생각, 그 생각들이 모여서 우주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주: 중생들의 생각의 집합체가 바로 우주이다. 우주는 중생들의 생각하는 힘 에너지 덩어리이다. 중생들의 생각하는 힘은 본래 불생불멸의 불성기운이다. 따라서 우주는 불성뿐이다. 중생도 역시 불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스의 위대한 철학자 가운데서 한 분인 엠페도클레스(Empedocles) 서기 한 500년 전에 나오신 분입니다. 이분도 역시 우리 불교와 마찬가지로 우주를 구성한 요소가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라고 말씀 했습니다. 땅기운, 물기운, 불기운, 바람기운 말입니다. 헌데 그러면 어떤 것이 시초의 동력이 되어서 바람기운 만들고, 땅기운 만들고, 불기운 만들었는가? 어떻게 설명되었는가 하면은 ‘사랑과 미움’이 땅기운, 바람기운 등을 만들고 해서 우주를 구성 했다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가 욕구하면은 욕구하는 그 마음이 천지우주의 순수에너지인 불성을 좌(左)로 선회(旋回)를 시킵니다. 좌로 진동(振動)을 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싫어하는 그 마음은 척력(斥力)이 되어서 순수한 에너지를 그때에는 우(右)로 진동시키는 것입니다. 순수한 에너지 우리 불성을 좌(左)로 선회(旋回)시키는 것은 인력(引力)이 되어서 자기화(磁氣化)됩니다. 자력(磁力:자계(磁界))이 되고, 또 싫어하는 마음 그것은 순수한 에너지를 우(右)로 진동(振動)시켜가지고 그때에 전기(電氣:전계(電界))가 됩니다. 이러한 것이 이렇게 모이고 저렇게 모여서 그래가지고 차근차근 우주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불경의 표현으로 하며는 앞서 말씀마따나 중생의 공업력(共業力)으로, 많은 중생의 공동(共同)의 업력(業力)으로 그때는 우주가 구성되어 있다 말입니다. 우주도 구성하는 것인데 우리의 몸 하나, 우리 주변 하나 정화(淨化)시키고, 또는 나쁜 방향으로 오염(汚染)시킬 수 없겠습니까? 우리가 철갑으로 몇 겁으로 둘러싸인 그런 밀실에서 혼자 나쁜 생각하면, 아무도 못 보죠, 허나 천안통(天眼通)을 통한 사람들은 다 보는 것입니다. 또한 동시에 나쁜 생각이 또 역시 우주를 바로 오염시킵니다. 자기 몸도 자기 마음도 오염시키고 말입니다.

 

우리 심화(心火)가 끓으면 그냥 병(病)이 되는 것 보십시오. 남을 굉장히 미워하면 진심(瞋心) 때문에 병 되는 것 보십시오. 욕심(慾心)이 많으면 욕심 때문에 병이 됩니다. 사람들은 우리 병이 꼭 생리적인 외형적으로 바깥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허나 대부분의 병은 마음에서 옵니다.


<자기 운명(運命)은 자기가 만듭니다. >

 

분명히 자기 운명(運命)은 자기가 만듭니다. 인과(因果)는 자기가 지어서 자기가 분명히 받습니다. 지금은 현대과학은 이러한 것은 차근차근 다 증명해 나갑니다. 인간이 미처 몰라서 증명 못하는 것이지, 원래는 모두가 다 합리적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참선하는 법을 말하는 가운데 너무나 말이 빗나갔습니다만 우리들은 이번 여기서 공부하고 가시면은 참선이 얼만치 진전되었는가? 거기 까지는 못 이른다 할지라도 어디 가서든지 혼자 참선할 수가 있다. 참선하는 방법만은 요령만은 아셔야 여기 오신 보람이 있습니다. 일반 공부는 여러 가지 그런 방법도 많고 그것이 번쇄(煩瑣)합니다. 부처님 당시에 수행하는 공부를 본다고 한다면 우리 중생을 좋은 방향으로 즉 말하자면 성불로 인도 할 때 말입니다.

 

<오정심관(五停心觀) >

 

보통은 『오정심관(五停心觀)』이라, 5정심관이란 그런 관법(觀法)으로, 관조(觀照)하는 법으로 인도(引導)했다 말입니다. 그것은 어떤 것인가 하면 부정관(不淨觀)이라, 욕심이 많은 사람은 우선 욕심을 털어야 하는 것이니까, 욕심이 많아서 욕심에 마음이 가려지면 마음이 덮여진 사람들은 무슨 말을 못 알아듣습니다.

 

같은 법문도 우리가 한 철 공부할 때와 두 철 공부할 때는 우리 스스로가 납득하는 정도가 차이가 있습니다. 업장이 가벼운 사람들은 같은 법문도 척척 그냥 잘 알아듣습니다. 무거운 사람은 잘 못 알아듣습니다. 따라서 탐심으로 마음이 옹졸하게 된 사람들은 어려운 법문으로 해서는 잘 안 됩니다.

 

따라서 탐심 그것을 줄이기 위해서 부정관(不淨觀)이라, 그대 몸은 다 더러운 것이다. 그대 몸 안에 있는 모두는 다 악취를 풍기는 것이다. 우리 몸은 36물이라, 36물의 더러움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와 같이 우리 몸뚱이를 더럽게끔 생각하는 관법으로 관조하는 방법으로 욕심을 줄게 한다 말입니다.

 

또 진심(瞋心)이 많은 사람 불뚝불뚝 성내기 쉬운 사람은 그때는 자비관(慈悲觀)이라, 자비관은 우선 자기 가까운 사람들 아내를 사랑하고 자기 어버이를 사랑하고 하는 것이니 그의 가까운 사람들에 대해서 연민(憐愍)의 정, 불쌍한 정을 일으키게 만드는 그런 관조의 법이 있습니다. 우리가 갑자기 미운 사람 사랑할 수 없죠. 그러니까 인연 가까운 사람들부터 차근차근 불쌍히 생각하는 법으로 이것이 자비관입니다.

 

미련한 사람은 한계를 잘 모릅니다. 가사 자기 몸뚱이에 대해서 애착(愛着)을 붙이지 말라, 그렇게 말을 많이 듣지만 그래도 역시 자기 몸의 구성을 잘 모르면 애착이 붙습니다. 허나 이 몸 이것은 각 원소가 이렇게 임시적으로 모여 있다. 불교 말로 하면 인연생(因緣生)이라, 인(因)과 연(緣) 따라 우리 몸이 잠시간 모여 있다. 내가 쓰는 마음도 역시 그때그때 우리가 감수(感受)하는 것, 또는 상상(想像)하는 것, 또는 분별(分別)하는 것, 의욕(意慾)하는 것, 이것이 모여서 우리 마음이 되었다.


[원각경(圓覺經)]에 보면 범부미도(凡夫迷倒)라, 우리 범부라 하는 것은 거꾸로 봐서, 바로 못 보기 때문에 사대위신(四大爲身)이요, 하위(爲)자, 몸신(身)자, 4대 위신(爲身)이요. 지수화풍(地水火風) 4대의 구성요소를 내 몸이라 하고, 『망상위심(妄想爲心)』이라, 결국은 이렇게 잘 못 배우고, 잘 못 듣고, 잘 못 생각하고, 이런 것이 모인 것을 내 마음이라 합니다.

 

우리 범부는 누구나 그렇습니다. 조금 더 많이 알고 또는 적게 알고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우리 범부가 생각하는 생각은 바로 못 보고 합니다. <一切眾生從無始來種種顛倒,猶如迷人四方易處,妄認四大為自身相,六塵緣影為自心相;譬彼病目見空中花及第二月>

 

따라서 우리 중생들은 그저 임시간 업(業)을 중심으로 해서 각 원소가 모여 있는 하나의 업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우리 몸은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우리 업이 주위에서 세포가 빙빙 돌고 있습니다. 그것뿐입니다. 따지고 보면 그것뿐입니다. 이와 같은 것은 생각하고 생각하다 보면 우리 몸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때든지 인연만 분산하면 우리 몸은 소멸되고 만단 말입니다.

 

저 넓은 들에다 우리가 나무를 베어서 집을 짓습니다. 집을 지으면 없는 집이 생겨납니다. 그러나 연(緣)이 다해서 집을 해체해 버리면 아무것도 없죠.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인연이 닿아서 각 원소를 모아서 이와 같이 이런 집을 이런 껍데기를 지었을 뿐입니다. 아까 말씀마따나 우리의 업력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이런 것을 가르치는 것이 계분별관(界分別觀)이라, (경계로울 계(界)자, 나눌 분(分)자, 다를 별(別)자) 한계를 가려서 이것은 이렇고, 우리 몸은 지수화풍(地水火風) 4대가 모여 있다. 이와 같이 각각 분석과 종합과 이와 같이 가려서 가르침 이것이 계분별관입니다.

 

이와 같이 관조하는 법, 관찰하는 법으로 해서 우리의 여러 가지 어리석은 무지(無智)를 없앤다 말입니다. 무지한 사람을 즉 치심(癡心)이 많은 사람들 무명(無明)으로 덥힌 사람들은 그와 같이 분석과 종합으로 마음을 틔게 만듭니다. 또는 산란심(散亂心)이 많은 사람들, 분별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그때는 수식관(數息觀)이라, 호흡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요새말로 하면 호흡법이죠. 호흡법으로 다스리는 그런 법이 있고, 업장(業障) 많은 사람은 그 때는 관불관(觀佛觀)이라 부처님의 잘 생기고 원만한 상호를 관찰한다 말입니다.

 

임신부(姙娠婦)의 방에다 부처님의 상호(相好)를 동(東)이나 서(西)나 붙여 놓으면 거기서 태어나는 아기는 아주 얼굴이 부처님 닮아서 나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물론 정도의 문제이겠습니다만 아무튼 우리는 부처님을 보려고 애쓰고 부처님의 원만 상호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우리 마음도 몸도 부처님을 닮아져 갑니다. 그런데서 업장중생 관불관이라.

 

업장 많은 중생은 그 때 부처님을 관조 합니다. 우리가 법당에서 불상에 대해 참배하는 것도 역시 여러 가지 심심미묘한 뜻이 있습니다만, 저번에 거사님들께서 말씀하신 심심미묘한 뜻이 있습니다만 우선 가깝게 쉽게 알 수 있는 뜻만 본다 하더라도 가깝게 부처님을 뵈면 그때는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업장이 녹아지고 우리도 닮아져 갑니다.

 

이러한 다섯 가지 법(法)이 오정심관(五停心觀)이라, 다섯 오(五)자, 머무를 정(停)자, 마음심(心)자, 볼 관(觀)자 말입니다. 탐심 탐욕이 많은 마음, 성내는 마음 또는 어리석은 마음, 업장이 무거운 마음, 산란스런 마음, 그런 마음을 그때는 딱 정지를 시킨다 말입니다. 이렇게 부처님께서는 그 사람한테 맞는 행법(行法)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당시나 그 뒤에는 이런 오정심관 행법으로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그렇게 해가지고 업장 많은 사람은 업장을 조금 누그러뜨리고, 탐심 많은 사람은 탐심도 조금 누그러뜨리고, 진심 많은 사람은 진심도 좀 누그러뜨리고서,

 

<사념처관(四念處觀)>

 

그 다음에야 고·공·무상·무아(苦·空·無常·無我)라, 『사념처관(四念處觀)』을 딱 주셨습니다. 일체(一切) 법(法)은 결국은 고(苦)요, 인생은 다 고생뿐이요. 무상(無常)하고 말입니다. 모든 법은 인연 따라서 잠시간 머물러 있을 뿐이니 무상하고, 또 허무하고 말입니다. 또 원래 나라고 할 것이 없는 무아고 말입니다. 이와 같이 그런 어려운 법문(法門)을 주십니다.

 

보통 업장(業障)이 많은 사람은 인생(人生)은 다 고(苦)라, 인생은 무상(無常)하다, 인생은 허무(虛無)하다, 원래 내가 없다 이렇게 말을 해도 못 알아듣습니다. 허나 탐심이 좀 줄어지고 또 진심이 줄어지고 또는 종합과 분석과 모든 법의 분석적인 지식을 아는 사람은 그 때는 참으로 무상 하구나, 인연 따라서 잠시간 잠시간 합한 몸, 무량 세월 비추면 우리가 사는 60년 70년 얼마나 순간입니까?

 

그 동안에도 어느 날 어느 시기에 우리 죽음이 올는지 모릅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우리는 무상하기 그지없습니다. 따라서 업장이 가벼운 사람들은 그냥 그런 깊은 것을 아는 것인데, 업장이 무거우면 눈앞에 보이는 물질로만 만족한다 말입니다. 그러기에 깊은 법문을 이해를 못합니다.

 

허나 다행히도 현대는 굉장히 참 총명한 시대입니다. 과학의 발달로 해서 아주 분석적인 것을 알아서 이놈의 몸뚱이 결국은 내내야 끄트머리는 원자로 되고 더 끄트머리는 결국은 비어 버린다. 여기까지는 알았다 말입니다. 이런 때는 부처님 때 같이 오정심관(五停心觀) 그런 하급적(下級的)인 법문(法門)은 별로 할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맨 처음부터 그냥 가장 고급적인 중도실상(中道實相)이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최상법문(最上法門)을 딱 집어넣는다 말입니다. 참선(參禪) 이것은 최상법문입니다. 돌아서 안 가고 어느 한계를 안 거치고 그냥 직지인심(直指人心)이라, 바로 사람 마음 딱 짚어서 ‘그대 맘이 부처다’ 깨달아라! 이렇게 해서 막 나가는 것입니다. 참선은 별로 순서를 거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비록 자리가 조잡하지만 부처님의 법문 가운데 최상 법문을 공부하신 것입니다.

 

<직지인심(直指人心)견성성불(見性成佛)>

 

직지인심(直指人心)이라,(곧 직(直)자 가리킬 지(指)자 사람 인(人)자 마음 심(心)자) 사람 마음 딱 짚어서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 그 마음 그 본성(本性)을 딱 끄집어내어 부처를 만든다 말입니다. 이렇게 하려니까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 이런 것은 불경에도 없다.

 

사람 마음을 해설하는 불경이 있다 하더라도 사람 마음 그대로를 불경에서 우수한 도인(道人)도 바로는 못 보입니다. 따라서 교외별전이라, 결국은 8만4천의 교외(敎外)에가 있는 것이다. 불립문자(不立文字)라, 8만 법문이나 제아무리 많은 법문 가지고도 이것은 문자로도 표현 못하고 말로도 표현 못합니다. 어떻게 우리 마음을 말로 표현할 것입니까. 다만 이런 것이다. 이와 같이 방불하게만 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참선 이것은 문자도 배제하고 마음 그놈 딱 집어 깨닫게 합니다. 따라서 선방에서는 실은 부처님 경전(經典)도 못 보게 합니다. 그런 소중한 경도 선방에서는 못 보게 합니다. 따라서 우리 불자님께서는 참선할 때는 이것저것 보실 필요가 없습니다.

 

내 마음이 바로 부처임을 지금 이 마음 밖에 부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마음의 본성 비록 제 아무리 못났다 하더라도 마음 겉에는 못 났다하더라도 마음의 저변, 마음의 실상(實相) 마음의 근원 이것은 부처님입니다. 부처 가운데는 무한한 가능(可能)과 공덕(功德)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박사만이 성불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불의 길은 학문은 별로 필요가 없습니다. 도리어 많이 배우면 자꾸만 따지고만 있습니다. 우리는 참선 이 길은 오직 이 마음이 부처님을 딱 느끼고서 그 마음 가운데 무한의 공덕(功德) 무한의 행복(幸福)이 있음을 느껴야 합니다.

 

앞에 말씀하신 거사님들도 말씀하셨습니다마는 우리는 자기 불성에 대해 간절히 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간절히 구하는 마음을 서산대사(西山大師) 게송(偈頌)에도 말씀하셨습니다. 병자구의(病者求醫)지요, 병자가 의사를 구하는 것 같이 간절한 마음, 영아앙모심(嬰兒仰母心)이라, 어린애가 어머니를 구하는 마음같이 간절한 마음이라, 이런 마음이 있어야 성불을 하려고 애쓰기도 하고 또는 수행을 하기도 합니다.

 

갑자기 여기 오셔서 몇 시간 동안이나 앉아 있으면 굉장히 괴로우시죠. 나쁜 버릇을 교정하려면 고생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선(禪)을 풀이하는 말 가운데서 어떤 말이 있는가 하면 조직정(調直定)이라, 고를 조(調)자, 바를 직(直)자, 바를 정(定)자 말입니다. 우리 마음을 조화(調和)키고 비뚤어진 우리 마음을 이렇게 딱 바르게 하는 것이 참선(參禪)입니다.

또는 현법락주(現法樂住)라. 우리의 안락(安樂)에는 속락(俗樂)과 법락(法樂)이 있습니다. 속락 이것은 세속(世俗)에서의 재산, 명예, 이성, 식욕, 잠, 이런 것의 안락은 속락입니다. 세속이란 속(俗)자 말입니다. 이런 것에 얽매인 한에 있어서는 우리는 참다운 영생(永生)의 법락(法樂)을 맛볼 수 없습니다. 이런 속락을, 속가적인 오욕락 이런 것에서 멀어져 가면 갈수록 영원적인 행복은 비례해서 옵니다.

 

오욕이 줄어갈수록 반비례해서 영원적인 행복은 우리한테 더욱더 가증되어 옵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영원적인 행복의 맛을 못 보니까 안 믿습니다. 안 믿으니까 세상이 혼란스럽고 생활이 각박합니다. 공부를 나중에 하셔서 자기 마음속에 있는 무한의 기운을 다소나마 맛보면 한없이 환희심(歡喜心)에 날뜁니다.

 

척 들어앉아서 자기 망상(妄想)이 끊어지고 자기 호흡(呼吸)이 정지되는 정도가 되면 난데없는 심심미묘(甚深微妙)한 음향(音響)이 들려옵니다. 그런 묘음(妙音)이 들려오면 딴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자기 몸이나 자기 마음이나 아무런 부담이 없는 것입니다. 나라는 관념도 없는 것입니다. 다시 표현하면 저 영원에서 오는 맑은 물결이 자기를 꽉 감싸는 기분이란 말입니다.

 

이런 기분이 되어서 그림도 그리고 시도 쓰고 음악도 해야만 ‘참다운 입신(入神)의 묘(妙)라’ 참다운 걸작이 나온다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훌륭한 문학 걸작을 낸 훌륭한 문호들은 대체로 이런 것을 조금씩은 다 음미(吟味)를 했다고 봅니다. 여러분들이 [헤르만 헷세]나 [톨스토이]나, 그런 작품을 보세요. 맑은 시냇물이 흘러가듯이 맑은 표현들을 보세요.

 

너무 말이 빗나갑니다만 참선은 이것을 쉽다하면 제일로 쉽습니다. 복잡한 학문도 거치지 않고 과학적인 변증(辨證)도 필요 없습니다. 다만 내 마음이 부처임을 딱 믿어버린다 말입니다. 그러기에 주리반특가(周利槃特迦), 그는 일자무식 아닙니까? 굉장히 미련한 사람이어서 무슨 법문도 못 욉니다. 한 마디 부처님한테 말씀을 듣고서 ‘빗자루로 쓸어라’ 뭘 쓸 것인가? 빗자루로 쓸어라. 그 말도 앞 말을 외면 뒷말을 잊어버립니다. 그 정도로 미련한 사람인데도 역시 ‘쓸어라, 쓸어라’ 결국 쓴다는 것이 정말 내 번뇌(煩惱)를 쓸어야 쓰겠구나.

 

이와 같이 차근차근 마음이 모아지니까, 마음이 모아지면 우리 불심(佛心)으로 마음이 가까워집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잘 명심(銘心)해야 합니다. 비록 미련하다 할지라도 마음만 모아지면 모아지는 힘으로 해서 불성(佛性)에 가까워집니다.

 

어째서 판데기이빨(판치생모(板齒生毛)이라 했는고? 이와 같이 하다 보면, 하다 보면 마음이 모아지면 그 때는 저절로 부처한테로 접근합니다. 어떤 공부나 간에 내가 본래 부처임을 믿고서 그리고 부처 가운데는 무한의 공덕이 있다 이렇게 믿고 나간다고 한다면 ‘똥마른 막대기<간시궐(乾屎橛)>’라 하나 ‘하느님’이라 하나 그 때는 별 상관이 없습니다.

 

마음만 모아지면 아까 말씀마따나 불성에 가까워집니다. 그때는 절로 통하는 것입니다. 통달보리심(通達菩提心)이라, 모르는 법문도 안다 말입니다. 부처 가운데는 일체가 다 있으니까. 영혼 천도할 때 우리는 한문(漢文), 어려운 한문구로 말을 합니다. ‘불심충만어법계(佛身充滿於法界:부처님 몸이 법계에 충만하다.)’라 그런 말을 안 들은 귀신한테도 합니다. 귀신이 어떻게 들을 것이며 어떻게 귀신이 한문도 안 배운 귀신이 어떻게 법문 어렵게 하면 어떻게 들을 것인가? 이렇게 의심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이놈의 몸뚱이! 몸뚱이를 성인(聖人)들은 원적(怨賊)이라(원수 원(怨)자, 도적 적(賊)자), 이 몸뚱이를, 이놈의 몸뚱이라는 껍질에 가려서 못 알아먹습니다. 요즘 컴퓨터를 보면 대강 짐작할 수 있죠. 원래 우리 정식(淨識)은 맑은 식은 말입니다. 다 알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서양말, 무슨 말, 다 안 배웠다 하더라도 다 아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는 것인데 이놈의 몸뚱이 껍데기 때문에 딱 가려버리면 애쓰고 배운 것 밖에 모릅니다.

 

귀신은 비록 업장이 별로 가벼운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몸뚱이가 미세하니까, 아주 순수한 영체(靈體)가 아니라 하더라도 영체는 영체니까 말입니다. 한문을 안 배웠어도 아는 것입니다.

 

<마음의 신비로운 것을 느끼셔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의 신비로운 것을 느끼셔야 합니다. 우리 마음은 다 알 수가 있고 분명이 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부처님 법문 따라서 직접 말로 해도 잘 믿습니다. 허나 진정으로 우리 마음은 모두를 알 수가 있고 다 할 수가 있습니다.

다만 어제도 우리 거사님께서 말씀을 하셨지만 그놈의 노망된 망령된 의식활동(意識活動) 때문에 고정관념 때문에 발랄하고 모두를 다 알 수 있는 힘이 발동을 못한다 말입니다. 우리의 그런 그릇된 생각을 놓기 위해서 ‘도방하(都放下)라’ 모두 도(都)자, 놓을 방(放)자, 아래 하(下)자 모든 것을 다 놓아 버려라. 이것저것 분별하면 분별한 만치 우리 의식은 거기에서 활동합니다. 의식이 활동하는 한에는 우리 의식이 저 밑에 깔려있는 참다운 불성, 영원적인 행복과 자비와 지혜와 공덕을 갖춘 그 마음이 발휘를 못합니다.


말씀은 저번에도 많이 해놔서 참선에 관해서 여러 말씀은 안 드리겠습니다. 역시 뭐라 해도 영원의 이미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가장 요긴한 뜻 그 뜻을 우리가 간직하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즉 말하자면 불심(佛心)을 간직해야 만이 불심이라 하는 요긴한 뜻을 간직해야 만이 비로소 참선이 되는 것인데 말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오정심관(五停心觀)이나 그런 것은 참선이 못됩니다. 또는 여러분이 ‘부처님은 저만치 멀리 계신다’ ‘나는 여기 있다’ 이와 같이 마음에서 안구하고서 저만치서 구하는 그런 방식도 역시 염불을 많이 해도 참선은 미쳐 못됩니다. 물론 많이 하다 보면 삼매(三昧)가 되어서 참선이 되겠지요. 종국에 마음이 딱 모아서 일심지(一心支)라, 하나만 되면 참선이 되겠지만 처음에는 참선이 못됩니다.

허나 처음부터 참선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때는 우리 마음이 불심에서 안 떠나야 합니다. 불심에서 안 떠나기만 하면 다 참선입니다. 염불, 참선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비록 우리가 관세음보살을 소리 내어서 왼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 자세가 우리 마음의 현 위치가 불심을 딱 간직하면 그때는 그것이 참선입니다.

 

<부처님의 진여법(眞如法)>

 

그러면 어떻게 간직할 것인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부처가 보이면 좋은데 우리가 어떻게 부처가 보입니까? 업장(業障)에 가린 우리는 부처님의 경계. 불심을 상상하기가 참 곤란합니다. 따라서 이런 때는 부처님의 진여법(眞如法)을, 진여라는 것은 참진(眞)자, 같을 여(如)자, 진리(眞理)가 진여(眞如) 아닙니까.

 

부처님의 진리를 진여라고 하는데 진여 가운데는 『리언진여(離言眞如)』라, 떠날리(離)자, 말씀언(言)자, 말을 떠난 그런 진리가 있고 말입니다. 또는『의언진여(依言眞如)』라, 의지할 의(依)자, 말씀언(言)자, 말씀에 의지한 진여가 있습니다.

 

부처님 법문도 방편(方便)과 진실(眞實)이 있습니다. 비록 그런 진실한 부처님 법문 이것이, 문자를 떠난 참다운 진리의 생명은 아닙니다만은 사람의 지혜에 의지한 그런 사람의 방편에 의지한 그런 문자에 의지한 말에 의지해 있다 말입니다. 말에 의지해 있는 정도로는 그때는 방편이 아니라 부처님의 진리를 그대로 방불하게 말로 표현해 있다 말입니다. 그런 것에 우리가 의지해서 불심을 심어야 하겠습니다.

 

<주 : 참다운 진여는 말을 떠나고 문자를 떠나 실지로 직접 닦아서 체험해야 되지만, 아직 체험하지 못한 우리들이 닦고자 할 때는 의언진여(依言眞如)에 의지해야한다는 것이다. 성자나 부처님이 말씀하신 의언진여는 아무리 방편이라 하더라도 부처님의 진리를 그대로 방불하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에 의지해서 불심을 심어야한다고 강조하시고 계십니다. 금구성언(金口聖言)의 의언진여(依言眞如)로 선오후수(先悟後修)로 닦는 것이 정수법문(正修法門)임을 강조하시고 계십니다.>

 

[반야심경(般若心經)]에 조견(照見)오온개공(五蘊皆空)하여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이라, 오온이 다 비어 있음을 비추어 봐 가지고서 일체고액을 제도한다 이런 말씀이 있지요. [반야심경]을 외이면 외인만큼 공덕(功德)은 있습니다만 그 뜻을 새기면 훨씬 공덕이 더 많습니다. 그 뜻을 잘 못 새깁니다. 오온이 다 비어 있음을 비추어 봐야 만이 인생고(人生苦)를 제도합니다.

 

부처님 8만4천 경전 가운데서 어떤 법문이 가장 많은가 하면은 모두가 다 공(空)이다 모두가 다 허무다 공을 말씀하신 법문이 제일 많습니다.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이라 이 경은 600부라 600부입니다. 권수야 몇 천권이죠. 공을 주로 말씀하신 경전이 [금강반야바라밀경]인데 이 경은 600부인데 그것은 모두가 공을 주로 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제법(諸法)이 공이라. 모든 법이 다 공이라. 부처님께서 제법하신 것은 우주(宇宙) 만유(萬有)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제법은 우주 만유를 다 지칭(指稱)한 것입니다. 우주 만유가 다 공이다 말입니다.

<석공(析空)과 체공(體空)>

 

이것은 납득하기가 일반 사람들은 어렵습니다. 그러기에 같은 공(空)도 『석공(析空)』과 『체공(體空)』으로 구분합니다. 우리 불자님은 어렵지만 이것은 우리가 불교를 공부하는 한은 꼭 알아두셔야 합니다. 천지 우주가 다 비었다. 텅텅 비었다. 이렇게 말을 많이 듣지만 정말 그런가? 우리가 납득할 수 없다 말입니다. 납득하게 시리 석공과 체공으로 구분합니다. 석공은 분석할 석(析)자, 빌 공(空)자, 석공입니다.

분자로 분석하고 원자로 분석하고 이렇게 분석하다 보면 마치 양파껍질 같이 하나 벗기고 둘 벗기고 하다보면 나중에는 텅 비어 버리죠. 그와 마찬가지로 분석을 하다보면 결국은 나중에는 다 비어 버린다 말입니다. 전자(電子) 역시 순수한 하나의 텅 빈 에너지가 움직이는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양자(陽子) 역시 하나의 텅 빈 순수한 에너지가 움직이는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남는 것은 결국 에너지만 남습니다. 질료 아닌 에너지만 남습니다.

 

이와 같이 분석하고 분석해서 종국에 가면 텅 비어 버린다. 이렇게 아는 것은 겨우 분석을 통해 아는 사람들의 지혜란 말입니다. 즉 다시 말하면 현대 과학도라 하는 분은 이렇게 알겠죠. 또는 형체만 많이 배우고 형체 있는 유한 상대적인 지식만 배운 사람들은 주로 이와 같이 분석하는 석공, 분석하는 공을 이해 할 수밖에 없습니다.

 

체공(體空)이라. 체공은 무엇인가? 몸체(體)자, 빌 공(空)자 말입니다. 당체(當體)가 즉공(卽空)이라. 나무가 있으면 바로 나무가 공이다. 사람이 있으면 사람 당체가 그대로 바로 공이다. 이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이해를 잘 못합니다. 이렇게 소중한 내가 어째서 공이야 말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남을 죽여야 하는 소중한 내가 어째서 공이야? 이렇게 우리는 항변 합니다마는 실은 내 몸 이대로 공인 것입니다.

 

훌륭한 수행자(修行者)와 업장이 가볍고 공부를 많이 한 성문(聲聞)이나 보살(菩薩)이나 성자(聖者)들은 모두가 다 이대로 공인 줄을 느낍니다. 불안(佛眼) 청정(淸淨)한 부처님의 안목으로 보면 다 텅 비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안 보이는 것입니다. 어느 사람이 밉다 하면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는 밉게 안 볼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주관(主觀) 따라서 중생의 업력 따라서 업력에 가린 안경으로 보니까 이렇게 저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원자나 원소나 그것도 역시 사람의 경계로 봐서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상주 부동한 언제나 그대로 있는 원자가 따로 있고 원소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 사람의 지혜로 해서 그와 같은 규정을 내 세웠을 뿐입니다. 하나의 순환하는 하나의 진동하는 무엇인가에 대해 우리가 규정을 세워서 거기에 이름을 붙였을 뿐입니다. 일체 만유를 구성한 원자가 벌써 비어 있고 말입니다. 그 원자를 구성한 양성자와 그 주위를 돌고 있는 전자가 분명히 비어있는데 우리는 그렇게 안 보인다 말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불을 붙인 횃불을 빙빙 돌리면 불 바퀴로 보입니다. 사실은 이것을 돌려도 불 바퀴는 아닌데 돌리면 불 바퀴로 보인단 말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중생의 시력(視力)은 파장이 어느 정도까지 밖에는 보지 못합니다. 지금 물리학에서는 400~700nm 까지 밖에는 사람의 시력은 못 보는 것입니다. 파장이 너무 길어도 못 보고 너무 짧아도 못 보는 것입니다.

라디오 파장이 분명히 있으나 우리가 보입니까? x-레이 파장이 우리가 보입니까? 우리 중생의 시계(視界)는 한정되어 있습니다. 중생의 의식 역시 모두를 아는데 한정되어 있습니다. 한정된 것으로 보니까 내 몸이 이렇게 내 코가 이쁘고 내 입이 이쁘다 그럽니다. 전자현미경 쓰고 보면 제아무리 미인(美人)도 숭숭 뚫려 보이는 것입니다. 더 미세한 중성미자(中性微子)나 또는 질량도 전하도 없는 것으로 본다고 그러면 우주는 텅 비어 보이는 것입니다.

 

<불성광명이 충만한 우주는 행복만이 가득합니다.>

부처님의 청정(淸淨) 안목(眼目)으로 바로 보면 천지 우주는 불성(佛性)의 광명(光明)뿐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의 눈으로 보면 이와 같이 보이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보이는 것은 다 비어 버리고서 있는 것은 다만 찬란스러운 광명만 보이는 것입니다. 다만 공이 아니라 부처님의 무량광명(無量光明), 무량광명만 우주에 충만해서 찬란스러운 광명만 행복에 충만 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미타불(阿彌陀佛)이 무엇인가? 아미타불을 풀이하면 우리말로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 또는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 무엇인가? 풀이하면 광명변조(光明遍照)라, 광명이 우주에 두루해 있다. 이것이 비로자나불입니다. 또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 무엇인가? 이것은 광세음보살(光世音菩薩)이라, 우주에 충만된 광명을 활용할 때에 모든 중생을 다 가운데로 이끌어 올 때에 그러한 이끄는 자비(慈悲), 이것이 관세음보살입니다.

 

우리는 비록 지금 안 보인다 하더라도 부처님의 이미지, 부처님의 영상(映像)을 딱 두어야만이 참선입니다. 그러지 않고서 그냥 건성으로 이것 의심하고 저것 의심하면, 그런 식은 참선이 못됩니다.

 

비록 내가 범부(凡夫)라 하더라도 천지 우주가 분명히 바로 모두가 다 평등무차별(平等無差別)의 차별 없는 부처구나, 영생(永生)하고 또 안락(安樂)하고, 또는 행복(幸福)이 충만하고, 또는 모두를 할 수 있고, 알 수 있고, 이러한 부처구나! 이와 같이 딱 느껴야 이것이 부처의 이미지요 영상입니다. 이렇게 부처의 영상을 지녀야 참선입니다.

 

비록 관음보살(觀音菩薩)을 부르나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부르나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부르든지 간에 그런 불성 이미지, 그 이미지를 딱 심고서 그 이미지를 안 떠나야 합니다. 허나 중생(衆生)은 업장(業障)이 무거워서 그냥 이미지를 심으려 해도 순간은 모르거니와 그냥 사라지고 맙니다.

 

여러분들이 앉아 보시면 생각이 되겠지요. 그냥 딴 생각 때문에 그 소중한 부처의 영상은 그냥 없어지고 맙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거지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잘 안 되면 부처님 이름을 천만번 외는 것입니다. 하루에 만 번 관음보살해라. 하루에 십만 번 해라.

 

<명호부사의(名號不思議)>

 

부처님의 그런 이름은 다만 이름이 아니라, 명호부사의(名號不思議)라, 명호 자체에 부사의한 힘이 묻어 있습니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은 그 음성, 이름 가운데 가서 부처님의 공덕이 묻어 있습니다. 관음보살(觀音菩薩)은 관음보살 이름에 가서 영원한 부처님의 자비가 묻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름을 부르면 부른 만치 그때는 우리 생명이 정화되어 갑니다. 우리 주변이 정화되어 갑니다. 또한 동시에 나쁜 삿된 기운이 우리한테 침범을 못합니다. 무량 선신(善神)은 부르면 부른 만치 우리를 옹호(擁護)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중생은 안 보입니다. 한 번 척 부르면 부른 만치 선신들은 우루루 따라 오지만 우리 중생은 안보입니다.

 

우리가 부처님의 그런 이미지, 영생의 불심의 이미지, 그것을 딱 심어지면은 그때는 아무 것도 필요 없습니다만 우리가 그렇게 안 되니까 우리가 부처님의 이름을 더욱더 외운다 말입니다. 다 되어 버리면 우리가 부처와 하나가 되어 버리는데 무슨 염불이 필요합니까?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

역시 일상삼매(一相三昧)로 해서 항상 보는, 모두 천지 우주가 일상(一相)이라, 천지 우주가 부처라는 하나의 상(相), 이 상을 심는 것이 필요하고,

그 다음은 그 상을 유지해가는 일행삼매(一行三昧)라, 생각 생각에 앞생각 뒷생각, 오직 부처만을 생각하는 생각, 그 생각을 하기 위해서 부처라는 이름을 염력(念力)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제 거사님들께서 말씀하셨습니다만, 우리가 흠모(欽慕)하고 그리워하는 그 마음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사람 사람끼리 그리워해 보십시오. 그 마음도 우리를 얼마나 정화를 시킵니까. 우리가 고향을 떠나서 고향에 대한 향수를 느껴 보십시오. 그 마음이 얼마나 순수합니까? 비록 그리워서 눈물을 흘린다 하더라도 그 눈물은 맑은 눈물입니다. 굉장히 맑습니다.

 

헌데 그런 가운데서 내 생명의 가장 근본자리, 필경 돌아가야 할 고향인 그런 극락세계(極樂世界)의 자리, 그것을 흠모할 때는 그것이 얼마나 순수하고 얼마나 우리 마음을 정화시키겠습니까.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 보면, 비단 부처님 이름을 외라는 그런 법문뿐만 아니라, 극락세계의 땅을 관찰하라 하는 법문이 있습니다.

이놈의 땅을 관찰해서 무엇하랴? 해도 이것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보통의 땅 같으면 우리한테 관심이나 공덕이 없습니다만 극락세계의 땅은 그런 땅이 아닙니다. 영롱한 찬란스러운 금색(金色)광명을 발휘한 영롱한 땅입니다. 영롱한 땅을 보려고 애쓰는 그런 관법을 하다보면 사실로 실지로 광명이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광명과 하나가 되어 버립니다. 극락세계 땅이 참다운 땅입니다. 극락세계 시냇물이 참다운 시냇물입니다.

 

우리가 보는 시냇물, 우리가 보는 숲 이것은 바로 못 보는 것입니다. 참다운 시냇물, 참다운 숲은 모두가 다 광명으로 이루어진 찬란스런운 존재입니다. 극락세계의 나무를 보라! 일상 우리가 보는 이런 나무를 제아무리 봐본댓자 그때는 우리 마음은 정화가 안 됩니다. 극락세계 나무는 찬란스러운 광명으로 이루어진 나무를 보라는 것입니다. 보다 보면 원래 그것이 실상(實相)인지라,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실상과 하나가 되어 집니다.

 

부처님 법문은 방편 같지만은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실상으로 유도하는 무서운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우리는 꼭 결정신심(決定信心)이라, 움직일 수 없는, 어떤 유혹이 와도 동요하지 않는 그런 신심(信心)을 가지셔야 합니다. 그와 동시에 어디 가셔도 척 들어않으면 참선이 딱 되는 자세를 가지셔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나는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할 것인가? 개별적인 방식을 이번 기회에 딱 정하십시오.

화두(話頭)를 의심(疑心)하는 분도 역시 아까 말씀처럼 부처님의 영상을 지니셔야 합니다. 염불(念佛)하는 분도 역시 부처님의 영상, 천지 우주가 나까지도 포함해서, 보통은 자기는 빼놓고서 광명을 관합니다만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나까지도 포함해서 천지 우주가 바로 광명뿐이라는 생각, 그 가운데는 일체의 것이 다 포함되어 있다. 일체가 완벽하게 포함되어 있다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염불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성격상 분별을 좋아하고 지적(知的)으로 수승한 분들은 지혜가 수승한 분들은 따지는 의심하는 법문이 좋습니다. 감성적(感性的)으로 천지가 부처거니, 부처가 내 님이거니, 이렇게 부처님을 자기 님 같이 보는 그런 분들, 내 고향 같이 부처님을 구하는 분들, 그런 감성적인 정서가 풍부한 분들은 역시 부처님의 이름을 외우는 것이 좋습니다.

 

<염불왕생원(念佛往生願)>

 

정토경(淨土經)에 가서 염불왕생원(念佛往生願)이라. 부처님께서 아미타불(阿彌陀佛)이 되시기 전(前) 법장비구 때 세운 48원 가운데서 18번째 원(願) 이것이 염불왕생원입니다. 염불(念佛)하는 사람은 이 원(願)을 제일 중요시 합니다. 이것은 염불하면 바로 왕생(往生)한다. 극락세계(極樂世界)에 간다. 이런 법문입니다만, 우리는 염불하면 어떻게 갈 것인가? 이렇게 의심도 하고, 여러 가지 회의도 많이 합니다만, 실은 바른 생각, 바른 신앙, 바른 흠모하는 마음, 그리운 마음이 사무치면 우리 마음은 비상(飛翔)을 비약(飛躍)을 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느 사람과 사람끼리도 그리워한다 하면 자기 몸도 바치기도 하고, 자기 생명도 아깝지가 않죠. 따라서 우리가 마음이 순수해서 정말로 사모(思慕)하면, 부처님을 흠모(欽慕)할 때에 흠모하는 그 생각이 사무치면, 사무친 만큼 굉장히 우리 마음을 비약을 시킵니다.

 

내가 부처다 하는 그런 마음에서 자력적(自力的)으로 참구(參究)하는 것도 좋습니다만은 그런 마음만 가지고서는 우리 마음이 잘 비약을 못합니다. 따라서 원래 부처님 법문이라는 것이 자력(自力)과 타력(他力)이 겸비되어 있습니다.

 

원래 천지 우주가 바로 원력(願力)의 투성이거니, 타력이 원래 이미 갖춰있고, 내가 원래 부처거니 내 스스로 개발하는 자력이 또 원래 갖추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만 치우치면 결국 공부가 더디어 갑니다. 허나 이와 같이 불안(不安)한 때는 역시 우리가 의지(依持)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배경은 내내야 부처님 아닙니까? 부처님한테는 무한한 힘이 나옵니다. 가까이 가다 보면은 결국 부처가 내가 되어 버리는 셈 아닙니까.

 

<심회연모(心懷戀慕) 갈앙어불(渴仰於佛)』>

그러기에 [법화경(法華經)] 방편품(方便品)에도 『심회연모(心懷戀慕) 갈앙어불(渴仰於佛)』이라, (마음심(心), 품을 회(懷), 그리울 연(戀), 생각할 모(慕), 목마를 갈(渴), 우러를 앙(仰), 어조사어(於), 부처 불(佛)자) 부처를 향해서 마음으로 연모하고 간절히 갈앙한다. 그러면은 『즉종선근(卽種善根)』이라, (곧 즉(卽), 심을 종(種), 착할 선(善), 뿌리 근(根)자) 바로 우리 마음에 선근(善根)을 심습니다. 그리운 마음은 이와 같이 위대한 것입니다.<心懷戀慕 渴仰於佛 便種善根>

 

우리가 자기 마음으로 예술품(藝術品)을 작품하면 순간 우리 마음이 정화되는 것입니다. 예술이라 하는 것은 모두가 다 우리 본래 고향을 그리워하는데서 나옵니다. 내내야 근본뿌리는 부처이기 때문에 부처가 부처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이렇게 변형되어서 나옵니다. 사람 사람끼리 서로 그리워하는 마음도 내내야 부처를 그리워하는 마음, 그 마음이 변형되어서 사람을 그리워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부처님한테 대해서 갈앙심(渴仰心), 간절히 그리운 마음을 품으려면 역시 무슨 문제보다는 차라리 부처님을 인격(人格)으로, 생명(生命)으로 우리가 구해야 합니다. 부처님은 분명히 생명이니까요. 부처님은 분명히 내 생명의 뿌리니까, 일체 만 생명의 근본 생명이니까, 생명으로 구하는 쪽으로 부처님의 이름을 인격화시켜서 구하는 쪽이 우리 마음을 순화(純化)를 잘 시킵니다.

그러나 따지기 좋아하는 분들은, 즉 철학적(哲學的)이고, 과학적(科學的)인 분들은 역시 분석적(分析的)이거나 의심(疑心)하는 쪽이 더 낫겠지요. 아무튼 우리 마음 자세가 영생의 이미지, 불심만 되면 무엇이나 무방합니다. 그러기에 화두 가운데 『똥마른 막대기<간시궐(乾屎橛)>』란 화두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간에 근본 바탕은 하나이니까요. 그 하나인 것을 딱 인식한 다음에는 무엇이나 무방합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이 정서적으로, 정서가 풍부한 분들은 어쩐지 내 고향! 내 님! 그렇지 않으면 마음이 허전합니다. 그런 분들은 부처님의 이름을 외는 쪽으로, 부처님의 이미지를 심도록 하십시오.

 

<삼종사선(三種邪禪) : 암증선, 문자선, 야호선>

 

참선할 때에 나쁜 선(禪), 피해야 할 선 말씀을 몇 말씀을 하고서 마치겠습니다. 이것은 어떤 것이 나쁜 선인고 하면은 『암증선(暗證禪)』(어두울 암(暗)자, 증할 증(證)자, 고요할선(禪)자)이라. 그냥 참선의 한계나 방법도 모르고 이것저것 모색만 합니다. <암중모색(暗中摸索)>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범부(凡夫)가 부처까지 이르는 과정(過程), 물론 우리가 비약적으로 막 가야 하지만, 그냥 길목을 알아두면 편리합니다. 그런 과정을 말할 기회를 갖겠습니다만 오늘은 그런 기회를 갖질 못합니다. 헌데 암증선이라. 어두운 가운데 우리가 모색한다 말입니다. 그래서는 우리가 바른 선을 못합니다.

 

우리 범부가 성불(成佛)까지 가는 길이 하도 멀어놔서 어떤 때는 광명이 나오기도 하고, 어떤 때는 가슴이 턱턱 막히기도 하고, 어떤 때는 부처님이 나오기도 하고, 가지가지 모양이 많이 보이는 것입니다. 또는 우리가 거쳐야 할 그런 과정이 무수한 천상(天上)을 지나가야 합니다. 도리천(忉利天), 야마천(夜摩天), 도솔천(兜率天), 또는 색계(色界)의 초선천(初禪天), 그와 같이 우리는 무수한 천상을 거쳐야 합니다.

허기 때문에 그때그때 거쳐 간 동안에는 그때그때 우리한테 기묘(奇妙)한 것이 자꾸만 보입니다. 보이는 것을 납득을 못하면 어중간이 가서 기분 좋으면 ‘다 되어 버렸다’하고 아만심(我慢心)을 냅니다. 한계도 모르고서, 선의 방법도 모르고, 또는 좌선하는 방법도 모르고, 이와 같이 방법도 자세히 모르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하지도 않고, 이렇게 하는 선이 암증선(暗證禪), 어두운 가운데서 헤매는 선입니다.

 

또 한 가지는 『문자선(文字禪)』이라. 알기는 많이 알지마는 실제로는 앉지를 않습니다. 소리를 내건, 앉던 상관이 없습니다만 실제로 해봐야 합니다. 즉 아까 말씀처럼 『일행삼매(一行三昧)』라. 부처님의 영상을 안 놓치고서 계속해서 이어간다 말입니다. 그 공부를 염불(念佛)로 소리를 내서 하든, 좌선으로 하든 무방하지만 아무튼 그런 공부를 많이 해야 합니다.

 

『반주삼매(般舟三昧)』란 책을 보면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나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우리가 외우면서 하루에 공양(供養)을 한 끼 먹고, 또는 일주일 동안 안 자고, 또는 하루에 목욕도 세 번 정도하고, 하루에 매일매일 옷도 새로 갈아입고, 또 남과 얘기도 않고, 그렇게 일주일 동안 오로지 관음보살이나 아미타불을 이름을 외운다고 하면 일주일 안에, 업장이 설사 무겁다 하더라도 부처님을 꼭 본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계속적인 공부가 필요합니다. 하다말다 하다말다 공부하다 남과 얘기한다. 이래버리면 소중한 부처의 이미지가 중단되어 버립니다. 우리는 만사(萬事)를 부처님의 차원에서 재조명(再照明)이라, 이와 같이 해서 모두를 부처라고 보는 그 관념을 항시 외워야 합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이런 좌선(坐禪)이나 기도(祈禱) 모시는 것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이 가령 집안의 복을 위해서 기도 모시는 경우도 우리가 애쓰고 누구 잘 되라, 누구 병 나아라, 하지 않더라도 우리 마음이 최상의 지혜, 최상의 불심의 상태에 여기에 마음을 딱 두면 무두가 절로 다 이루어집니다. 자기 아들의 행복을 제아무리 빌어 본댓자, 그 보다는 차라리 비교할 수 없는 수승한 그런 공덕의 부처님의 이미지, 부처님의 영상을 딱 두고 기도 모시는 그것이 훨씬 더 공덕이 큽니다.

 

이러한 문자는 많이 알고, 경을 많이 봐서 한계는 잘 알지마는 실제로 우리가 안합니다. 안하면 우리 마음이 정화도 안 되고, 공덕이 즉 부처님한테 있는 무량의 힘이 우리한테 안 옵니다. 우리는 본래 부처지만 아직은 부처의 힘을 우리는 못 자아냅니다. 실지로 닦아야 합니다. 우리는 부처라는 관념을 놓지 않고 쭉 이어가야합니다. 그래야만이 소위 문자선(文字禪)이라, 문자만 알고 뇌까리는 그런 그릇된 선법을 지양시킬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야호선(野狐禪)』이라. 야호는 여우입니다. 아주 망난이 같은 여우, 변덕 많이 부리고, 사기 많이 하는 것이 여우 아닙니까? 그런 여우같은 선이 야호선입니다. 이것은 미처 모르고서 알았다고 하는 선입니다. 우리는 우리 사부대중(四部大衆) 가운데 야호선하는 사람도 상당히 있다는 것을 압니다. 자기가 어느 경계에 못 갔으면서 자기 위신을 내서 갔다고 한단 말입니다.

 

<아쉽게도 녹음이 여기서 끝납니다.>

 

나무아미타불!

 

 

*19850804-태안사 하계용맹정진<4박5일> 해제법문-

무주당 청화(淸華)대종사 설법

*태안사 방송실 녹음

*녹음테이프 보급 : 정훈스님

*펜글씨 녹취 : 해인, 법륜행, 외

* 펜글씨 녹취 취합 : 태호스님

*워드작업 : 김충원 교수

*20160303-워드정리 : 김영동 교수

<구어체 그대로 정리 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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