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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마음의 고향

마음이 고향 29집(2)


마음의 고향29집(2).zip

 



2. 우주宇宙의 본성本性은 진여불성眞如佛性

 

<19980412-미주 3년결사 회향법문>

승한 인연因緣이 도래해서 우리 대덕大德스님들을 위시하여 사부대중四部大衆 여러 불자님들께 대해서 진심으로 감사의 합장을 드립니다. 저희들 고국인 대한민국은 진정으로 아름답습니다. 바야흐로 진달래꽃 개나리꽃이 만발하고 만물이 생동하고 있습니다. 저도 미국에 있으면서 제일 먼저 무궁화 꽃을 심고 또 진달래 개나리를 많이 심어서 조금씩 싹이 트고 있습니다.

 

저는 숙세에 닦은바 복이 부족해서 고향을 많이 떠나 있었습니다. 20대에는 일본 들어가서 한 6년 동안 공부를 한다고 고향을 떠나 몹시 고향을 그리워했고, 또 나이 70이 넘어서 생각지도 않게 미국에 들어가서 다시금 고향을 그리워하는 그런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는 바와 같이 현대는 대단히 복잡다단한 그런 시대입니다. 경제, 종교 어떠한 문화 현상이든지 모두가 복잡해서 어떻게 갈피를 잡아야 할 것인가.

 

이러한 것들을 제대로 확립을 한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문제입니다. 이른바 정보의 홍수 시대 아니겠습니까? 이런 때는 마치 목자牧者가 양떼를 잃어 버렸는데 그 갈림길이 많아서 어디로 가야 길 잃은 양을 잡을 것인가. 이른바 하나의 숙어로 다기망양多岐亡羊이라, 길이 많으면 잃어버린 양을 잡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와 같이 종교현상이나 모든 분야에서 하도 길이 많으므로, 특히 불교는 그런 가운데서도 아주 복잡한 종교형태의 와중에 들어 있습니다. 가령 한국만 두고 본다 하더라도 50종파 이상이 넘는 다고 하지 않습니까. 미국은 종교 박람회 같이 세계종교가 모두가 다 밀집되어 있어 백가쟁명百家爭鳴이라 하듯이 자기 종교가 제일 수승한 종교다. 자기 종교에만 참다운 구제가 있다. 이런 걸로 해서 피차 각축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드릴 말씀도 그러한 것을 어떠한 슬기로 다 회통回通을 시키고 정말로 신앙에서 우리 소중한 생명의 손해가 없이 바른 지름길로 성불成佛할 것인가. 그런 말씀을 주로 드리겠습니다.

 

<단견斷見, 상견常見>

 

부처님 법문 가운데 사견邪見이란 것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이 있습니다. 그 해석이 구구해서 재차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단견斷見은 끊을 단, 볼 견, 이것은 우리 인간 존재가 금생今生뿐인 것이지 과거에도 없었고 또 금생에 인연因緣 따라서 얻어진 이 몸이 끝나면 내생來生에도 없는 것이다. 이런 견해가 단견입니다.

 

그리고 항상 상, 볼 견자 상견常見 이것은 그 정반대로 내 생명은 과거에도 지금 생각 같이 똑같이 존재했고 몸도 지금과 같이 있었고, 죽은 뒤에도 내 마음 그대로 가지고 태어나고 내 몸 그대로 받는다. 이런 것이 이른바 상견입니다. 그래서 이 단견과 상견을 못 끊으면 이른바 사견邪見이라, 불법佛法이 못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불법은 어떻게 해석하는 것인가?

 

요즈음 교학적敎學的으로 불교를 많이 하신 분들은 대체로 윤회전생輪回轉生을 잘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 눈에 안 보이는 세계이므로 믿기가 어려운 것이 되겠지요. 또 인과응보因果應報도 역시, 가시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은 그렇거니 하지만 눈에 안 보이는 문제에 관해서는 인정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른바 매사가 실증주의實證主義, 경험주의經驗主義, 그런 범주 내에서만 긍정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는 분명히 형이形而 상하上下를 총 망라해서 변증법辨證法적으로 통합한 그런 가르침입니다. 정말로 우리 생명은 금생에만 존재하고 전생과 내생은 없을 것인가. 또는 그 반대로 이와 똑같은 몸과 마음이 과거 전생이나 미래 내생에도 그대로 연장이 될 것인가. 이것은 그렇지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단견과 상견을 다 떠나서 중도실상中道實相의 견해에서 그런 문제를 해결하여야 합니다.

 

<진여연기眞如緣起>

 

불교에서 생사生死 문제問題는 매우 중대한 문제인데 그런 문제를 명확히 해결 못하면 자기 신심信心에 금이 가는 것입니다. 거기에 곁들여서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누구든지 불법佛法은 인과법因果法이다. 연기법緣起法이다. 이런 말씀을 합니다. 불교인 치고서 다 아시는 문제 아닙니까.

 

이것저것 조건부로 해서 잠시간 존재 하는 것이지 실존적인 고유한 것은 없다. 이것이 일반 상식적인 연기법의 해석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그걸로만 해서는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이런 식으로만 해서는 불법의 대승적大乘的 확립이 못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읽으신 분들은 보셨겠지만 마명대사馬鳴大師의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기신론에서 보면 진여연기眞如緣起, 우주는 우리 중생衆生이 느끼고 안 느끼고 상관이 없이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는 순수생명純粹生命이 상주불멸常住不滅이라, 상주불멸의 진여불성은 대승에서만 말을 합니다. 소승小乘에서는 그런 말이 없습니다.

 

따라서 제 말씀도 대승과 소승과 그 한계에 관해서도 앞서 말씀과 같이 단견 상견을 구분하도록 하겠습니다. 대승기신론은 연기법의 마지막 근본 본체적인 해석입니다. 일반 사람들은 앞서도 말씀 드린바와 같이 모두가 다 조건부이기 때문에 개시인연법皆是因緣法이기 때문에 고, 이요, 무상無常이요, 무아無我라고 보통은 이렇게 말들을 합니다. 그러나 그런 범주만으로 해서는 소승법小乘法에 해당합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이 나오시고 안 나오시고 상관없이 영생불멸永生不滅한 진여불성은 항시 존재한단 말입니다. 화엄華嚴, 법화法華, 열반경涅槃經이나 능엄楞嚴, 유마경維摩經이나 그런 대승大乘경전經典들은 다 이런 사상思想을 말씀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그런 사상을 긍정하지 않으면 대승이 못됩니다. 대승이 못되면 어떠한 손해가 있는가. 우리가 소승적인 한계로만 불법을 이해한다고 할 때는, 우리가 팔정도八正道를 닦아서 번뇌가 멸하면 공이 아닌가. 종당에는 공으로 귀결된단 말입니다. 우리 몸뚱이도 금생에 이대로 있다가 인연이 다하여 소멸되면 그뿐이 아닌가. 따라서 소승적인 그런 견해에서는 이것은 자칫하면 인과적인 우리 업 사상으로 해서 과거 전생, 금생, 내생에 삼세윤회三世輪廻하는 그런 사상마저를 긍정하기가 곤란스럽습니다.

 

그리고 중생을 사랑해라. 중생에 대해서 대자비大慈悲를 베풀어라. 또는 자타가 없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니다. 이런 것도 역시 소승적인 사상으로 해서는 제대로 논리체계를 세울 수가 없습니다.

 

<우주만유의 본성本性은 진여불성眞如佛性이다.>

대승이 돼야 진여불성이라 하는, 우리 인생과 더불어서 우주만유의 본체가 우리 사람의 본성일 뿐만 아니라 우주만유 두두물물의 본성을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되어 버려야 우주는 오직 하나의 도리로 귀일歸一이 된단 말입니다. 이른바 일원적一元的인 형이상하를 통달한 통투한 그런 행이 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 중생이 금생에 업을 많이 짓고, 전생부터 내려오는 숙업宿業으로 해서, 숙업에다 금생의 업을 보태서, 우리 행동이 규정 당하는 것이니까, 금생에도 더욱더 죽을 때까지 업을 많이 짓지 않겠습니까. 그런 쪽으로만 본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인생은 참 답답합니다. 인생은 고해苦海 뿐입니다.

 

<번뇌煩惱 즉 보리菩提 : 본성품 자리에서는 본래 번뇌가 없다.>

 

그러나 그런 번뇌煩惱의 본체는 무엇인가. 생명의 본체는 무엇인가.

이렇게 들어 갈 때는 번뇌, 비록 우리 인간의 가시적인 현상만 보는 상만 보는 중생으로 해서는 번뇌이지만 본 성품을 보는 성자聖者의 맑은 안목에서는 번뇌 그대로 바로 보리菩提입니다. 따라서 본 성품에서는 번뇌가 본래 없습니다. 현상적인 중생의 견해에서만 번뇌가 있고 보리가 있고 그런 구분이 있는 것이지 성자의 모두를 다 평등하니 모든 존재의 근본 성품을 뚜렷이 보는 성자의 분상에서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그렇게 봐져야 그대 맘과 내 맘이 한맘이 아닌가. 따라서 마음에서 일어난 그런 몸뚱이도, 그대 몸뚱이 내 몸뚱이 현상적인 상으로 서로 차이가 있는 것이지, 본래는 수파水波의 비유라, 물에서 일어나는 천파만파 파도가 모두가 다 똑같이 물이듯이, 비록 두두물물이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근본적인 성품자리는 모두가 일여一如하게 진여불성眞如佛性인 것입니다. 진여불성으로 돌아가야 이른바 성불이 된단 말입니다.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소승에서는 진여불성이라는 말이 한마디도 없습니다. 사람이 업을 지으면 업을 지은 만큼 고가 가중 됩니다. 과거 전생부터서, 지금은 과거 전생 문제는 저명한 의사도 물리학자도 증명을 합니다. 심령 과학적으로 증명하고, 또는 최면술로 우리 의식을 퇴행시켜서 증명을 합니다.

 

우리가 쓰는 의식意識은 기껏해야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식六識의 범위 내에서만 사용합니다. 그 육식의 뿌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제7 말나식末那識에서 옵니다. 그러면 말나식은 또 어데서 오는가. 말나식은 제8 아뢰야식阿賴耶織에서 옵니다. 아뢰야식은 또 어데서 오는가. 아뢰야식은 제9 암마라식菴摩羅識이라, 암마라식은 청정식淸淨識 무구식無垢識 진여식眞如識이라, 9 암마라식은 바로 불식佛識입니다. 불심佛心이란 말입니다. 사람의 마음의 본심本心이기 때문에 불심佛心인 것이고 우주 만유의 본성本性이기 때문에 불성佛性입니다.

 

<순수직관적純粹直觀的 공부>

 

따라서 심리학적心理學的으로 본다 하더라도, 지금 현대심리학 보다도 불교 심리학은 프로이드Sigmund Freud:1856-1939, 또는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이나 그런 분들의 심리학보다도 훨씬 더 심수오묘深邃奧妙한 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종당終當에는 심리학자가 틀림없이 불교심리학까지 들어와야 됩니다. 들어오기 위해서는 개념적인 그런 범주로 해서는 못 들어옵니다. 개념을 놓고 순수직관적純粹直觀的인 그러한 공부를 해야 이른바 부처님 사상인 아뢰야식이나 암마라식인 그런 경계에 들어 올 수가 있습니다.

 

진정으로 부처님 가르침은 가장 투철한 과학인 동시에 형이상하形而上下를 다 망라한 가장 철두철미한 철학입니다. 동시에 영생해탈永生解脫의 무량복락無量福樂을 누리는 그러한 종교는 불교밖에는 없습니다.

 

우리 인간성人間性의 존엄은 무엇인가. 인간성이 존엄하려면 인간성보다 높은 것은 없어야 한단 말입니다. 다른 종교는 바라문신婆羅門神이나 또는 이른바 야훼(여호와) 신이나 그런 신을 설정합니다. 그런 걸로 해서는 인간성의 존엄을 확립을 시킬 수가 없습니다. 모두가 다 신의 밑이고 야훼의 밑이고 또 알라의 밑이란 말입니다.

 

우리의 죽고 살고 하는 생사문제生死問題에 있어서도 허두에 말씀 드린 단견 상견의 정확한 해설은 꼭 필요합니다. 우리 생명이라 하는 것이 어떻게 삼세를 윤회하는 것 인가. 금생에 우리가 지은 업장業障, 업장이 가중되면 된 만치 우리 의식은 변화가 되어 갑니다. 설사 나쁜 사람으로 태어났다 하더라도 좋은 교육을 받고 좋은 훈도를 받으면 좋은 쪽으로, 우리 마음이 진여불성 쪽으로 그만큼 접근 되는 것입니다.

 

또 금생 내내 박복해서 나쁜 짓만 하고, 나쁜 생각만 하고 그렇게 업을 많이 지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마지막 임종臨終 때 좋은 도반道伴 만나서, 좋은 스승 만나서 한 생각 돌이키면 극락에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진여불성眞如佛性은 오염汚染이 되지 않는다.>

 

우리 마음의 본성이 불성이므로 원래 부처이므로 또 부처는 물질이 아닌 순수생명이므로, 물질 같으면 오염이 되었으면 닦아야 되고 또는 개혁이 필요하지만, 우리 마음은 설사 잘못 살아서 마음에 때가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본래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때가 묻지를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본래 자성은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라,

 

<환희로운 불성광명佛性光明은 우리 몸에도

가득 차있고 우주에도 충만해 있습니다.>

 

지옥에 가서 있어도 우리 불성 자성은 조금도 때묻지 않고, 아귀에 나고, 개가 되고, 소가 된다 하더라도 우리 청정자성은 조금도 오염이 안 됩니다. 우리 중생의 견해에서 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분명히 오염이 돼서 잘 못 생각하고 잘 못 행동하고 나쁜 짓을 많이 하겠지만 마치 구름이 끼어서 지금 해가 가려져 있지만 해 자체의 광명은 조금도 훼손이 없고 이그러짐이 없듯이 우리 불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경우나 몇 천번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우리 불성 자체는 오염이 없습니다.

 

진여불성 이것은 하나의 생명 자체이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그 가운데는 자비慈悲 지혜智慧 행복幸福 능력能力 모두를 원만히 다 갖추고 있습니다. 불교를 믿는 분이 특히 대승법을 믿는 분이 불성공덕佛性功德을 분명히 확신을 안 하면 참다운 신앙인信仰人이 못 됩니다.

 

여러분 법화경法華經을 보셔서 짐작이 되시겠습니다만 부처님의 생명이, 부처님의 생명이 내내야 우리 마음 생명입니다. 모든 존재는 마음이라 하는 우주의 순수 에너지 그 위에서 이루어져 있단 말입니다. 부처님의 생명에 얼마만큼 공덕이 들어 있는가. 열반경에서는 그런 쪽에다 역점을 두고서 그런 것을 아주 정확히 간추려서 구체적으로 말씀을 많이 했습니다.

 

<상락아정常樂我淨 4바라밀四波羅蜜>

 

간추려서 열반경 식으로 말씀드리면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 상바라밀, 낙바라밀, 아바라밀, 정바라밀이란 말입니다.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라는 것은 제법·이 다 공이다. 공을 우리가 느끼고 상이 없으면 피안彼岸에 가지 않는가. 해탈解脫이 되지 않겠는가. 이렇게만 간단히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무한의 공덕장功德藏이라. 곳집 장자 말입니다. 무한의 공덕이 들어있는 곳집 이것이 결국 우리 마음의 본성입니다. 설사 우리가 금생에 못산다 하더라도 그 만덕장萬德藏, 영생불멸하는 생명 자체, 이것이 이른바 항상 상, 상바라밀이고, 또 낙바라밀은 안락무구安樂無垢해서 조금도 괴로움이 없단 말입니다. 즉 영원의 행복입니다. 영원의 행복이 원만히 갖춰진 그 자리가 이른바 즐거울 낙자 낙바라밀입니다.

그 다음은 나 아, 아바라밀이라, 이것은 우리 중생의 작은 소아小我가 아니라 무량의 덕성과 무량의 지혜와 자비를 갖춘 그런 자리입니다. 신통자재神通自在하는 그런 것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마음은 존엄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석가모니와 더불어서 우리가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달마의 마음, 석가의 마음, 우리마음 똑 같은 마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들은 전제적專制的으로 위대한 우리 마음을 스스로 딱 제한을 시켜버린단 말입니다.

 

공부할 때는 화두話頭를 참구하든, 염불念佛을 하든, 주문呪文을 외이든 간에 마음을 열고 해야 됩니다. 이른바 반야바라밀을 분명히 느끼고 거기에 입각해서 공부를 해야 공부가 속 빠른 것이고 또 공부에 재미가 나는 것이지 껌껌해도 오직 화두만 들면 된다. 염불만 하면 된다. 이런 식으로 해서는 대승적인 공부가 못 됩니다. 환희심도 안 날 뿐만 아니라 또 다른 교리에 부딪히면 금방 마음이 퇴행이 됩니다.

 

아바라밀은 삼명육통을 위시해서 만공덕을 갖춘 자리입니다. 열반경을 보면 팔대자재아八大自在我. 본래 자기 진아眞我에 있어서 대아大我가 가지고 있는 공덕을 여덟 가지로 구분한 것이 있습니다. 자기 한 몸을 여러 몸으로 보이고, 마음대로 공중에도 날 수가 있고, 미진微塵 속에 자기 몸을 다 넣을 수도 있단 말입니다.

 

유마경에 이런 법문이 있습니다. 삼천대천세계를 겨자씨 한 알에 다 넣을 수가 있다. 왜 넣을 수가 있는 것인가. 본래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공간성空間性이 있고 시간성時間性이 있다고 했을 때는 큰 것은 작은 것 속에 못 들어가겠지요. 그러나 부처님 법은 대소장단大小長短을 다 떠나 있습니다.

 

우리가 보는 물질이라는 것도 중생의 눈으로 보아서 물질인 것이지 성자가 물질의 근본성품을 본다고 생각 할 때는 모두가 다 만법유식萬法唯織이라. 또 만법유심萬法唯心이라. 일체유심一切唯心이라. 모두가 다 마음 식 뿐입니다. 조금 이해를 못 하신다 하더라도 부처님 말씀이니까 믿으셔야 됩니다.

 

형이하학적形而下學的인 문제는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니까 믿고 아니 믿고 하겠지만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문제는 눈에 아니 보이므로 보통은 부정을 합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세계만 가지고 따지는 사람들은 경험론이나 실증론 그것만이 진리인 것이지 관념론觀念論은 진리가 아니다고 합니다. 그러면 불교의 형이상학이 성립이 못되겠지요. 불교에는 경험론 실증론 관념론 다 들어 있습니다.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이 다 들어 있습니다.

 

<불교佛敎는 투철한 과학科學>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불교는 가장 투철한 과학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현대 물리학은 눈에 보이는 세계 미시적인 범주만 압니다. 물질의 저 끄트머리는 전자, 양자, 중성자라는 소립자, 더 분석하면 쿼크라는 초소립자들 이라고 그렇게 생각을 하겠지요. 그러면 그 초소립자들은 어떻게 해서 태어나는 것 일까.

 

사실 소립자부터는 파동이다 입자다 하지 않습니까. 초소립자 저편은 사실은 물질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의 광명체光明體입니다. 그러한 물질이 아닌 에너지 체가 어떻게 진동振動 하는가. 진동여하에 따라서 전자가 되고 양성자가 되고 중성자가 되는 것입니다.

 

물질이 아닌 상태, 생명의 순수한 상태, 순수 에너지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업의 동력 탐 삼독심三毒心의 진동振動 여하에 따라서 물질의 근원인 이른바 초소립자인 쿼크quark 들이 그리고 이들이 다시 한 차원 낮은 업 따라서 소립자인 전자, 양자, 중성자로 나온단 말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또 더 두터운 업식에 따라서 모인 것들이 산소, 수소, 탄소, 그러한 108 원소들이 되지 않겠습니까. 또 그것들이 적당히 인연 따라 모이면 성분이 되어서 이제 물질이 나온 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불자님들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 말씀한 색즉공色卽空이라.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 이것은 과학자 같이 분석한 뒤에 저 끄트머리 가서 공이 되는 그런 공이 아닙니다. 색은 물질을 가리키는 말인데, 색즉공이라, 물질 그대로 공이란 말입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부정하면 대승大乘이 못된다.>

우리 범부가 보면 물질밖에는 못 보는 것이고, 성자가 본다고 생각할 때는 물질 그대로 공입니다. 본래 물질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만법유식이요. 만법이 식뿐이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란 말입니다. 불교인으로 해서 일체유심조를 부인하면 그때는 대승이 못됩니다.

 

4바라밀 가운데서 정바라밀이라. 청정할 정자 혹은 맑을 정, 정바라밀입니다. 조금도 번뇌의 혼적이 없습니다. 육조단경六祖壇經을 보면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하니 하처야진애何處惹塵埃리요라는 법문이 있지 않습니까. 본래무일물이라는 것은 물질은 하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오염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본래가 청정하단 말입니다. 그것은 중생심으로 보아서 청정한 것이 아니라, 본 성품자리를 볼 수 있는 성자의 안목으로 보아서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개가 보면 모두 개로만 보이고, 부처가 보면 다 부처같이 보인다는 말도 역시 그런데서 연유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죽을 때까지 나쁜 생각을 하고 나쁜 행동을 하고 나쁜 말만 해서 그 업으로 그야말로 구속 된 그런 영혼이라 하더라도 그 마지막 임종 때 한 생각 바꾸므로 해서 극락세계도 왕생하는 것입니다. 불자님들 이렇게 말씀 드리면 미심쩍게 생각하시겠지요.

 

<본래本來 무아無我>

 

그러나 우리 인간존재 이것도 역시 참 무상無常한 것입니다. 참말로 바로 본다면 원래 무아無我 입니다. 원래 모든 상은 개시허망皆是虛妄이라.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도 역시 허망虛妄한 것입니다. 그런 허망한 의미에서 지옥地獄도 있고 아귀餓鬼세계도 분명히 있습니다. 실존적인 그런것이 아니라 우리 중생세계가 허망 하듯이, , , 무상, 무아 이듯이, 개의 세계도 그렇게 있는 것이요, 아귀의 세계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기에 불교의 육도윤회는 절대로 거짓말이 아닙니다. 다만 중생이 보고 아니 보고 할 뿐입니다. 그러면 극락세계極樂世界는 무엇인가. 마음이 편하면 극락인 것이고, 마음이 찌뿌드드하고 마음이 어딘가 메인 데가 있고 또 남 미워도 하고 그러면 지옥이 아닌가. 물론 그것도 그렇습니다. 일체가 유심조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 안락하면 극락이지만 그러나 그런류의 극락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맙니다.

 

우리가 또 영가靈駕가 안 보이므로 없다고 생각하면 절에서 애쓰고 영가천도를 할 필요가 없겠지요. 그러나 영가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이른바 불교적인 술어로 하면 업식業識이란 말입니다. 분명히 업식이 존재합니다. 우리 청정한 진여불성에다가 우리 업을 지어서 업식이 거기 가려 있단 말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허망한 모양을 가리켜서 나요 너요 내것이요 네것이요 합니다.

 

우리 불자님들 금생에 사업도 하고 돈도 벌어야 되고 지위도 높아야 되고 꼭 해야 되겠지요. 그러나 그렇더라도 철학적으로 자기 인생관을 확립해야 그래야 너무 지나친 욕심을 낼 수도 없고 지나친 욕망을 가질 수도 없습니다. 본래 나라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대 무아는 불교에서 중생들이 욕심을 내지 말라고 방편으로 무아라고 하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하신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본래가 참말로 무아입니다.

 

어째서 무아인가. 모든 법이 인연 따라서 잠시간 화합되어서 순간 찰나도 머무름이 없이 변동 무상하단 말입니다. 어느 한 순간도 어느 한 찰나도 똑 같은 우리 존재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현상적인 문제는 절대로 실존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본 성품자리 들어가야 실존이고 실상이 있는 것이지 현상적인 문제는 모두가 다 무아無我고 무소유無所有입니다. 본래무일물이고 물질은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1879-1955의 상대성원리相對性原理로 따져도 시간과 공간이 없습니다. 과학자가 증명한 것도 시간도 공간도 없다는 것입니다. 시간도 공간도 없다고 생각할 때는 시간과 공간 속에 담겨있는 물질도 없습니다. 우리 중생이 착각錯覺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림자 같이 그림자가 분명히 있는 것 같지만 없지 않습니까. 수중월水中月이라, 호수 속에 비친 훤한 달, 분명히 달은 보이는데 사실 호수 속에는 달이 있지 않듯이 말입니다.

 

<자기 번뇌煩惱가지고 스스로 성내고 스스로 사랑하고>

 

그와 똑같이 나요 너요 내것이요 하는것이 사실로 봐서는 없는 것입니다. 김 아무개 박 아무개 모두가 다 가상假相 가명假名인 것입니다. 모양이 없거니 이름도 역시 가짜에 불과 합니다. 우리 중생은 마치 개란 놈이 못가운데 비친 자기 그림자보고 짖어대고 앞발을 들어 발악을 하듯이 우리 중생들은 자기 번뇌煩惱 가지고 스스로 성내고 스스로 사랑하고 하는 것입니다.

 

본래 내가 없거니 내가 없는 그 사실의 자리에서는 사랑도 미움도 없습니다. 내 것도 내 몸뚱이도 없습니다. 이렇게 알고 사업도 하시고 공부도 하시고, 이렇게 알고 도도 닦고 그래야 부처님 공부가 빠르단 말입니다. 이렇게 아는 것이 이른바 반야바라밀입니다.

 

그러나 모두 허망하다고만 생각하면 그때는 참다운 반야가 못됩니다. 그러면 공도리만 아는 것이지 공이 아닌 진여불성은 모른단 말입니다. 공 밖에 모르면 내내야 그때는 허무주의적인 것밖에는 느끼지를 못합니다.

그러면 중생衆生 제도濟度를 참다웁게 못합니다. 대비심大悲心이 못나옵니다.

 

마음자리에서는 절대로 나와 남이 둘이 아닙니다. 우리 중생의 흐리멍덩한 눈으로 봐서 현상적인 상으로 봐서 물적인 한계에 그런 자타가 있는 것이지 물질을 떠나버린 근본 성품자리 진여불성 자리에서는 그러한 상은 절대로 없는 것입니다

<죽음은 본래 없다.>

 

그래서 금강경金剛經에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나라는상 너라는상 또 중생이라는상 목숨이 길다 짧다 하는 상, 개나 소나 돼지도 역시 본래에서는 사람과 똑 같은 진여불성입니다. 우리 목숨도 8070년 그런 장단이 없습니다.

 

원래 생명은 영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부활復活해서 영생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어떤 누구나 다 본래로 영생합니다. 죽음은 본래가 없습니다. 다만 그 업식이 삼계육도에서 윤회할 뿐이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업식이 윤회 하니까 앞서 말씀드린 단견이라, 이생만으로 그만이다. 이런 생각은 그때는 거기서 해결되겠지요.

 

또는 업식이 있으니까 업을 짓는 대로, 금생에 나쁜 짓을 많이 했다 하더라도 마지막 판에 바른 마음먹고 바로 행동하면 그냥 극락도 갈 수 있기 때문에 그때는 이른바 상견이 아니란 말입니다. 업장대로 내생을 받으니까 상견이 아닙니다.

 

우리 중생은 부처가 될 때까지 몇 생도 헤맵니다.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우리 본 고향은 부처이기 때문에 부처가 되기 전까지는 몇 생도 헤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영구윤회라고 하지 않습니까.

 

<인생길은 성불의 외길뿐이다.>

 

금생에 잘 못 살면 잘 못 산만큼 고를 받고, 금생에 잘 살면 잘 산 만큼 천상에 태어나기도 하고, 금생에 잘 닦아서 육도윤회를 면하면 영생의 영역에 들어가기도 하겠지요. 영생의 영역은 삼명육통三明六通을 다 하고 만덕을 원만히 갖추어 놓아서, 그 자리에서는 우리 중생들의 삶이 불쌍하게 보이므로 그때는 수원수생隨願受生이라, 대비심으로 원력願力을 세워서 중생계로 다시 태어나고 지옥에도 태어나서 중생을 제도하는 것입니다.

 

6조스님께서는 80생의 선지식善知識이라. 6조혜능六祖慧能스님께서는 80생 동안 태어나고 다시 태어나서 중생을 제도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 모이신 사부대중 우리 불자님들은 모두가 다 금생에만 태어난 불자님들이 아닙니다. 과거 전생에 무수생 동안에 닦아오신 분들입니다. 금생에 꼭 성불하실 분들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성불成佛의 길이 탄탄 대도大道로 지금 놓여 있습니다. 우리 인간사회는 그 길 이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오직 외길 성불의길 하나의 길 뿐입니다. 다만 중생이 나쁜 습관성에 젖어 빨리 못 가고 더디 갈 뿐입니다. 빨리 가면 가장 행복스러운 사람인 것이고, 우주의 궤도 우주의 정리에 따르는 것이 빨리 가는 길입니다. 우주의 도리에 따르는 것입니다.

 

빨리 못 가는 것은 우주의 궤도에서 이탈된 것입니다. 그래서 궤도에 따르면 힘 안 들이고 갈 수가 있습니다. 불교 술어로 임운등등任運騰騰이라. 저절로 그 궤도에서 성불로 지향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궤도에서 이탈해 놓으면 이제 애쓰고 다시 궤도에 진입해야 쓰겠지요.

 

부처님께서 계행을 지켜라. 참선 염불을 해라. 반야의 지혜를 가져라. 반야의 지혜는 무엇인고 하면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보는 제법은 모두가 몽환포영夢幻泡影이라. 꿈이요 허깨비요 거품이요 그림자란 말입니다. 꿈이요 허깨비요 거품이요 그림자 같은 것이 아니라 사실 꿈이요 허깨비요 거품이요 그림자인 것입니다.

 

중생의 흐리멍덩한 눈으로 보니까 그림자가 있는것 같이 보이는 것이지 성자가 본다고 생각할 때는 실체가 있지 않습니다. 허수아비를 쫓아서 우리가 갈 필요가 있겠습니까. 따라서 우선은 바른 이해를 갖추어야 바른 신앙이 나옵니다. 모든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 따라서 반야심경 금강경 따라서 모두는 제법은 허망 무상하단 말입니다.

 

부처님이 되는 길이 절대로 어렵다고 생각을 마르십시오. 저 같은 사람도 칠순이 넘었지만 지금도 행자처럼 지냅니다. 제가 공부를 상당히 많이 했다고 한 번도 생각 못해 봤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 부처님의 공덕 부처님의 그 무량 공덕을 제가 어떻게 얼마나 하는가. 정말로 참 제로입니다. 부처님 경전 따라서 참선 좀 했다고 그래서 조금 아는 소리 할 뿐인 것입니다.

 

부처님의 그런 아를 떠나서, 자기라는 모두를 다 떠나서 무량의 공덕을 갖추고 있는 공덕에 비춰보면 그야말로 태양과 반딧불의 비유입니다. 그런 처지에서 어떻게 공부를 좀 했다고 하겠습니까. 저는 그래도 다행히 부처님 덕으로 출가한지 올해로 꼭 50년입니다. 무던히 공밥 참 많이 먹었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만나면 저는 항시 마음이 부끄럽습니다.

부처님 길이 절대로 먼 길이 아닌 것이고, 도인들마다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 풀쩍 비약적으로 뛰어서 여래지에 갈 수가 있는 것이라고 말씀을 했고, 조금 더디게는 7일 동안만 불면불와不眠不臥를 해서 닦으면 꼭 견성오도見性悟道한다. 더 멀리는 90일 이라. 좀 더 멀리는 100일 이라. 3년이라. 몇 사람들은 변칙變則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절대로 저와 같이 게으름 피우지 않으실 것을 확신을 합니다. 여러분들께서 저한테 이렇게 풍기는 분위기나 기가 그렇게 느껴집니다. 제가 겸허 하는 그런 의미에서는 절대로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꼭 부처님의 정법을 그대로 공부만 한다고 생각할 때는 참말로 별로 먼 길이 아닙니다.

 

저는 굉장히 헤맸습니다. 근본불교根本佛敎, 무슨 불교라 갔다 왔다, 또 무슨 철학哲學이라, 하여튼 나름대로 피상적이나마 동서철학東西哲學은 다 섭렵 했습니다. 신학神學도 중요한 것은 대체로 떠들어 봤습니다. 무엇 때문에 기독교를 저와 같이 19억이나 믿는가. 진리가 아니면 그렇게 믿을 것인가. 그러한 의심 밑에서 또 역시 신학을 또 봐진단 말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 석가모니 가르침하고 똑같습니다. 다만 깊이에 차이가 있습니다. 석가모니께서는 구경지究竟地 보살 10지를 성취하시고, 불지佛地까지 온전히 묘각妙覺을 다 성취하신 분이고, 조금도 흠절이 없이 깨달은 분입니다.

 

그런 것이지 예수께서도 우주의 본성을 꼭 봤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공자, 노자, 마호메트도 다 그렇습니다. 마호메트도 히라산에서 3년 동안이나 명상을 닦았습니다. 명상을 닦아서 우주의 기 불성의 기운을 맛보았기 때문에 그런 공적을 내세웠단 말입니다. 예수도 역시 십자가에서 오히려 자기 이웃을 위해서 기도를 모시고 원수를 위해서 기도를 할 수 있는 그런 정도 같으면 원수가 원수로 보일 수가 없습니다.

 

무아를 성취한 사람들은 원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 불자뿐인데 말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예수 같이 원수를 사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전에는 중생들은 항시 원수는 원수로 보이고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스러워 보이니까 차별 시비를 하고 행동이 다른 쪽으로 벗어나 우주의 참다운 궤도로 진입할 수가 없는 것이 되겠지요.

 

<부처님 진리의 가르침이 최상의 정보>

 

정보화시대는 참 무서운 시대입니다. 여러분들이 충분히 지금 절감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별별스러운 정보, 정말로 정신이 어지러운 시대입니다. 요새 젊은이들 음악을 들어 보십시오. 음악적인 세련미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악쓰고 관능적인 몸부림만 칩니다. 그런 걸로는 우리 인간성人間性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가령 정치를 한다 하더라도 본래는 정적과 내가 둘이 아니다. 어떤 때는 견제 할 때는 한다 하더라도 같은 불자로서 사랑이 간단 말입니다. 철학적으로 종교적으로 바로 모르면 그 하찮은 이념 때문에 소중한 인간성을 자기도 훼손시키고 남도 훼손시킵니다. 자손손타自損損他, 자기 생명에도 손해보고 남도 손해를 끼칩니다.

 

지금은 대승적으로 나서야 정보화시대의 혼란의 물결을 다스릴 수가 있습니다. 모든 정보 가운데서 부처님 정보, 부처님 가르침이 가장 수승殊勝한 정보입니다. 부처님 정보는 모든 정보를 맑히고 통일시킬 수 있는 정보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이 아니고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형이하학적인 눈에 보이는 과학적인 세계나, 정치 경제 문화 기타 여러 가지 인류문제는 그 근본을 불교의 가르침에다 연원을 두어야 됩니다. 부처님 가르침이 우주의 근본이니까 말입니다.

 

우주의 대본이 서야 우주의 근본 뿌리가 서야 이제 법학도 바른 법학이 되는 것이고 정치학도 바른 정치학이 됩니다. 우리가 사회주의를 한다하더라도 역시 참다운 불성을 계발하는 사회주의 말입니다. 불성만 계발하면 그때는 남을 사랑하지 말라 해도 저절로 사랑하게 됩니다.

 

<우주에는 청정적광淸淨寂光 불성佛性만이 충만하다.>

부처님은 지금 어디가 계시는 것인가. 불자님들 부처님은 정말로 바이블(성경)에도 있습니다. 부처님은 우주의 길, 우주의 정의입니다. 부처님은 우주의 참다운 청정적광淸淨寂光, 광명인 것입니다. 태양광선과 같은 그런 오염된 광명이 아니라. 청정적광 비물질적인 참다운 광명이 부처님의 광명입니다.

 

그런 광명은 우리 몸에도 가득 차있고 우주에도 충만해 있습니다. 물질이라 하는 것은 청정적광 위에서 그때그때 업 따라서 결합되고 또는 움직이고 하는 진동하는 그런 것이 우리 눈에 물질로 보이는 것입니다.

 

*** 실상관 ***

'나라는 이 몸뚱이나 너라는 몸뚱이나 천지우주(天地宇宙)에 있는 모든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다 비어 있다'는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자리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다만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本來) 비어있는 무량무변(無量無邊)한 자리에 무량공덕(無量功德)을 갖춘 청정적광(淸淨寂光)이 충만(充滿)해 있구나' 이렇게 생각해서 마음을 매는 것이 실상관(實相觀)입니다. <청화(淸華)큰스님 법어 중에서>

 

그러면 우리 공부를 어떻게 할 것인가. 아무리 고도한 이론 체계가 있다 하더라도 내 스스로 어떻게 공부를 할 것인가. 이 문제는 가장 절실한 문제입니다. 그 문제가 해결이 안 되면 모두가 그야말로 하나의 이론에 그쳐버리는 공론空論이 되기가 쉽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당장에 지금부터서 해야 할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이것은 부처가 되는 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부처가 되는 길 가운데 가장 합리적이고 가장 지름길인 것인가.

 

<선의 핵심은 일상삼매와 일행삼매>

 

저는 그런 문제에 관해서 근본불교도 저 나름대로 토굴에서 몇 년 동안이나 머리도 썩혀보고, 또 달마부터서 6조까지도 그 문헌을 다 탐구해 봤습니다. 달마부터 6조까지 그분들 끼리 내려오는 그 이른바 Identity , 요지要旨가 무엇인가 말입니다. 이런 문제를 가지고서 이제 마음으로 굉장히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인제 제가 미국들어가서 3년결사를 하기 전에는 그런 문제에 관해서 제대로 해답을 못내렸습니다만은 그래도 3년이 지난 다음에는 제 공부를 인제 잘은 못했으나 참 저는 투미하고 정진력이 부족해서 마치 회양목선茴楊木禪이라. 참선에도 회양목선이란 것이 있습니다. 회양목은 아주 더디게 크는 나무입니다. 3년 크다가 공달이 드는 해는 축소가 됩니다. 그러다 다시 자라므로 얼마나 모질게 큽니까. 그와 똑같이 참선에 별로 진전이 없는 참선보고서 이제 회양목 참선이라 합니다.

 

저는 그런저런 근기라고 스스로를 느끼고 있는데 그래도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참선 공부하는 문제, 어떻게 하는 것이 달마 때부터서 6조혜능까지, 그것이 바로 부처님 때부터서 삽삼조사卅三祖師가 공부 해 놓은 핵심이 되겠지요.

 

역시 달마 이전까지는 교학적으로 너무나 번쇄하게 중국에 유포가 됐기 때문에 그렇게 번쇄한, 가령 구사론俱舍論, 유식론唯識論, 그 오직 번쇄합니까.

마치 기독교의 중세 스콜라철학Scholasticism 모양으로 말입니다. 그런 번쇄철학 그렇게 되면 정다운길 마음 깨닫는 것은 뒤로 미루고 교리를 배우다가 판나 버린단 말입니다.

 

그래도 다행이 달마스님 때부터서 6조스님까지는 그런 찌꺼기를 다 걸려버리고서 오직 마음 닦는 순수한 쪽에다 역점을 두고서 체계를 세웠단 말입니다. 달마스님의 안심법문安心法門, 심경송心經頌, 파상론破相論,觀心論, 혈맥론血脈論 , 또는 승찬僧燦스님의 이른바 신심명信心銘, 그리고 4조도신道信스님의 어록이 제일 많습니다. 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는 아주 귀중한 법문입니다. 그 법문은 돈황敦煌에서 비로소 발견 됐기 때문에 20세기 초두에는 없었습니다. 20세기 중엽부터서 비로소 유포가 되었습니다.

 

내용은 주로 달마대사의 주요한 줄거리를 그대로 계승했지만 문수설반야경文殊說般若經과 입능가경入楞伽經을 주로 참고 했단 말입니다. 그리고 5조홍인弘忍스님도 역시 그런 투로 계승했습니다.

그리고 육조단경 역시 부촉품咐囑品에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를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단경은 사실은 문제가 많습니다. 후래인後來人들이 깍고 보태고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6조스님께서 그 대범사大梵寺 법단에 올라가셔서 보살계菩薩戒를 설하신 법문은 6조스님이 직접했다고 지금 불교학자들이 다 정평을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핵심이 삼보三寶에 귀의歸依하고 또는 보살계菩薩戒를 지키고,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원만보신圓滿報身 노사나불盧舍那佛,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이 삼신일불三身一佛에 귀의歸依란 말입니다.

 

이렇게 6조스님께서 그대들이 나를 따라서 이렇게 세번씩 외이라. 이렇게 말씀 했단 말입니다. 그런 대문은 그야말로 금구직설金口直說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금구는 쇠 금, 입 구, 성자의 청정한 입에서 나온 말씀을 금구라 합니다.

 

<대승경전 그대로 닦는 것이 선이다.>

 

금구직설로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대로 믿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또 그렇게 해보면 사실 제일 쉬운 것이고 말입니다. 또 한편 중국 불교사를 보아도 6조혜능까지는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 그대로 닦는 법이었습니다. 화엄경이면 화엄 그대로 닦는 것 말입니다. 화엄, 법화, 열반 사상 그대로 닦으면 바로 선이 됩니다.

 

지금도 중국의 송나라 때 이루어진 화두話頭 일변도의 선법 때문에 화두 아니면 선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는 안 되어 있습니다. 달마스님 때부터서 6조 혜능스님까지는 그런 말씀은 조금도 없습니다. 또 당나라 때도 없습니다.

 

송나라 대혜大慧스님 대에 와서 비로소 화두 아니면 선이 아니다. 그런 것이 임제臨濟 일파一派에서 있었든 것이지, 그 당시 조동종曹洞宗에서도 없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정보화 시대에서는 역사적으로 공부를 해야 오류를 안 범합니다. 그래야 법집法執을 않습니다.

 

역사적인 그런 전개과정을 잘 모르면 꼭 자기 식 또는 자기 할애비가 하는 식, 자기 은사가 하는 식, 그것만이 옳다고 고집 한단 말입니다. 이조 5백년동안에 우리가 얼마나 많이 법집을 했습니까. 그때는 엘리트elite가 스님네가 안되었습니다. 지금도 소중한 엘리트를 기독교한테 많이 빼앗기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 스님네들은 항의할 것이 못됩니다. 우리가 그만치 공부를 안 했고 인재를 안 길렀습니다. 다소곳이 자기반성을 하고 자기스스로 인재가 되어야 할 것이고, 인재를 길러야 할 것이지, 그 속인들 모양으로 항의 할 것이 못됩니다.

 

정부 요로에 기독교인들이 많이 갔던들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고, 기독교인들은 앞으로 틀림없이 종당에는 불교 쪽으로 자기들이 안 들어 올라야 아니 들어올 수 가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예수사상이 부처님 사상 같이, 야훼Yahweh가 우리마음 밖에 어디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 가운데나 언제 어디에나 야훼는 계신다. 불신충만어법계佛身充滿於法界라 부처님의 몸이 언제 어디에나 계시듯이, 예수님 말씀도 다 그런 말씀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Augustinus,354~430, 토마스아퀴나스Thomas Aquinas:1225-1274, 안셀무스Anselmus, 1033~1109 같은 중세 기독교 유수 신학자들도 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다만 현대에 와서, 인도 칸디kandi의 말마따나 나는 예수Jesus를 좋아한다. 그러나 나는 크리스찬Christian은 싫어한다.’ 왜냐하면 크리스찬들이 예수를 닮지 아니하므로 싫어한단 말입니다.

 

<계행청정戒行淸淨해야 삼매三昧에 들고, 삼매가 발득 되어야 도를 통한다.>

우리 불자님들도 부처님을 얼마나 지금 닮고 있습니까. 젊은 불자님들도 꽤 많이 여기 모여 계십니다. 정말로 계행 청정하십시오. 계행이 청정해야 그래야 삼매가 되어 갑니다. 삼매에 못 들면 연목구어緣木求魚. 고기를 구하는데 산중에 들어가서 구하는 것이나 똑 같습니다.

 

삼매가 발득發得이 아니 됩니다. 삼매가 발득이 안되면 우리 마음도 몸도 바꿔지지 않습니다. 우리 생리生理가 바꿔지고 우리 마음이 바꿔져야 그래야 도를 통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본래 부처라 하더라도, 삼매에 들어야 됩니다. 삼매라는 것은 다시 일반적인 술어로 하면 명상冥想 아닙니까.

 

석가모니釋迦牟尼(ākyamuni BC563?~BC483?) 6년 고행,

달마達磨, Bodhidharma, ?~528? 9년 면벽,

예수Jesus Christ, BC 4?~AD 30 같은 천재도 요단강 강하에서 40일 금식기도禁食祈禱를 했단 말입니다. 그렇게 선근이 좋은 사람인지라 금식기도 할 때에 마음을 통했겠지요. 마호메트Muhammad/Mahomet,570?~632도 히라산 동굴에서 3년 동안 명상에 들어 그때 역시 영원적인 영원상을 음미를 했겠지요.

 

<정말로 가장 행복스러운 길,

끝내 우리가 돌아가야 할 마음의 고향>

 

이 정보화시대는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절대로 다른 종교를 적으로 몰아서는 아니 됩니다. 저네들이 우리 불교인보고 마귀라 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네들의 무지를 구하기 위해서 애써야지 상대해서 대응할 필요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이 원래 부처인 것이고, 우리 마음 가운데는 행복幸福도 자비慈悲도 지혜智慧도 능력能力도 다 갖추고 있습니다. 무량공덕심無量功德心입니다.

 

석가모니만 삼명육통을 다 하신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 당시의 다라표 수좌는 16세에 아라한阿羅漢Arhan과를 성취해서 삼명육통을 다하신 분입니다. 우리는 지금 자기 스스로 안 통하려고 애쓴단 말입니다. 우리가 본래 통해있는 부처인데도 우리 스스로 막고 있습니다. 우리한테는 지금 석가모니 같은 그러한 슬기와 자비가 똑 같이 원만구족 다 갖추고 있습니다. 내 스스로 그걸 지금 막고 있습니다.

 

행복 되기 참 쉬운 것입니다. 절로 행복의 길은 틔어있는 데도 우리 중생들이 그 길을 딱 틀어막고 있습니다. 둔주역풍遁走逆風이라, 마치 미련한 중이 바람 거슬러서 길을 가듯이 우리는 지금 바람을 거슬러서 가는 범선帆船이나 새나 마찬가지입니다. 계행戒行 지키는 것은 그렇게 거슬러가는 것을 바른 쪽으로 회향回向을 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처거니 어떻게 하는 것이 제일 간단한 법인가? 앞서 말씀드린 4조도신스님께서 문수반야경, 입능가경을 인용해서 법계일상法界一相이라. 법계는 오직 부처님 하나의 실상實相 뿐 이단 말입니다. 법계에는 딴것이 없습니다. 법계라는 것은 오직 하나의 실상 뿐인지라, 이것이 이른바 일상삼매一相三味. 염념상속念念相續 법계일상法界一相 부처님 생각을 놓치지 아니하면 바로 일행삼매一行三昧가 되는 것입니다.

 

육조단경六祖壇經에 일행삼매一行三昧가 다섯 군데나 있습니다. 저는 아함경阿含經도 다 떠들어 봐서 짐작을 합니다만 그 아함경에도 역시 41군데나 우리를 그렇게 편달하고 우리를 영원 쪽으로 다스리는 그런 법문으로 일관되어 있단 말입니다. 이른바 명상하는 법이 말입니다.

 

<사선정 멸진정을 거처야 아가 떨어진다.>

우리가 통하려면 틀림없이 아무리 재주가 좋다 하더라도 사선정四禪定 멸진정滅盡定을 거처야 됩니다. 우리 몸뚱이나 마음을, 범부신凡夫身을 성자의 청정신淸淨身으로 이른바 육근을 청정하게 하는 삼매가 사선정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외도들도 사선정은 합니다. 멸진정은 사선정을 통과해서 우리 아상我相을 온전히 없애는 것이기 때문에 성자만이 합니다.

 

멸진정을 성취해서 우리 선정이 제대로 되어야 아가 떨어집니다. 그러면 그때는 우주宇宙가 무아無我요 대아大我요 진아眞我, 우주가 나가 되고 그야말로 내가 우주란 말입니다. 이와 같이 우주를 하나의 생명 자체로 보는 이것이 일상삼매입니다.

 

단경의 부촉품에 가서, 부촉품은 경론의 결론 같은 품입니다. 6조스님께서 하신 말씀이 그대들이 만약 여래如來의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얻으려면그냥 좀 이론적으로 안다는 것이 아니라 실지로 우리 생리生理와 심리心理가 바꿔져서 증명證明한다는 말입니다. 불성을 증명하는 그 자리를 얻으려고 한다면 어떻게 하는고 하면은 그대들이 먼저 마땅히 빽빽히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증할 지니라

 

일상삼매 이것은 모두가 진여불성 일원뿐이란 말입니다. 일행삼매는 한 일, 행할 행, 일상삼매라는 그 경계를 일체 모두가 진여불성 뿐이라는 그 자리를 놓치지 않고 생각 생각에 상속相續을 시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행삼매입니다.

 

일행삼매란 말이 앞서 말씀드린 대로 단경에 다섯 군데나 있습니다. 그래서 단경 부촉품에서 그대들이 만약 여래의(부처의) 일체종지(모든 공덕을 갖춘 지혜)를 얻으려고 하면 마땅히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증할 지니라

 

그러면 마치 종자가 대지에 묻혀서 적당한 온도와 습기가 갖추어 지면 차근차근 싹이 터서 나무가 무성하고 꽃이 피고 또 열매를 맺듯이 우리 공부도 역시 원래 부처인지라, 그와 같이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하고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차근차근 업장이 녹아서 그때는 우리의 진성眞性, 맑은 반야의 지혜는 점점 증장 되어가서 종당에는 해탈을 한다. 이런 법문이란 말입니다. 이걸로 해서 단경이 끝을 맺었습니다.

 

화두話頭나 염불念佛이나 주문呪文이나 절대로 둘로 생각을 마르십시오. 부처님 법문은 아무리 쉬운 법문을 하더라도 꼭 대승법문이 끝에 가서 딱 맺듯이 되어 있습니다. 다만 후래인 들이 정리할 때에, 4번이나 수정이 된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글이 없어서 말로만 전수하기 때문에 제자 분들이 알아듣는 것은 그대로 전수가 되나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은 그때는 수록에 빠뜨리고 그러겠지요. 그래서 그런 것이지 부처님 법문은 소승법에도 대승이 다 들어 있고 대승법에도 소승의 점차로 올라가는 것이 다 들어 있습니다.

 

<돈오돈수頓悟頓修와 돈오점수頓悟漸修>

돈오돈수頓悟頓修 가운데 돈오점수頓悟漸修가 있고, 돈오점수 가운데도 돈오돈수가 있습니다. 원래 둘이 아니다 말입니다. 돈수만 있고 점수는 없다고 생각할 때는 돈수라는 말도 나올 수가 없지요.

 

이 있으면 악이 있듯이 우리 상대법相對法에서는 돈오돈수頓悟頓修가 있으면 돈오점수頓悟漸修가 있고 돈오점수가 있으면 돈오돈수가 있단 말입니다.

 

부처님은 하나의 논리에 지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하나의 이론에 그치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내가 생명이듯이 나를 위시한 모든 생명의 근본 순수생명 자리인지라 부처님은 바로 생명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격입니다.

 

우주가 하나의 인격이기 때문에 비로자나 부처님입니다. 청정광불淸淨光佛이라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 무량수불無量壽佛이라. 부처라는 것은 각이라, 이른바 생명生命이 있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불이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바로 우주에 충만한 생명입니다. 그런 생명 가운데 내가있고 네가 있는 것입니다. 생명 그것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나한테 있는 생명 남한테 있는 생명 똑 같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를 잘 모르니까 무자無字 화두話頭가 생기고, ‘개도 불성이 있다개도 불성이 있다 하니까 잘 모르는 사람들은 개의 머리나 심장 어디에 불성이 있다고 생각했겠지요. 또 개가 불성이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우리 눈으로 봐도 불성이 안보 이니까 말입니다. 없다고도 할 수가 있겠지요. 부처님 법은 그런 식이 아닙니다.

 

불성이 있다고 할 때는 어디 몸 한쪽 귀퉁이 뇌에 가서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온몸 그대로 혼신 그대로 바로 불성이란 말입니다. 무량무변의 우주 가운데는 불성이라 하는 순수생명, 순수 생명에너지로 빈틈도 없이 가득 차 있습니다.

 

소크라테스Socrates, BC 469~BC 399, 또는 플라톤Platon, BC 429?~BC 347이나, 그런 분들도 역시 훌륭한 철인들이기 때문에 그런 자리에다 자기 마음의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위대한 철인들은 다 그럽니다. 다만 그분들이 부처님 같이 온전하게 다 깨달은 분은 아니기 때문에 그 체계가 좀 모호模糊하겠지요.

 

조금 모호하다고 그래서 상대적으로 몰아서 우리가 대립적으로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모두가 끝끝내는 결국 우리 불교로 다 들어온단 말입니다. 싸우고 다투고, 이슬람Islam도 저네들끼리 순니파와 시아파가 그렇게 싸우는 것을 보십시오. 또 앞으로도 많이 싸우겠지요.

 

여러분 십자군十字軍 원정 기억하시지요. 십자군 원정은 11세기부터 13세기말까지 200년 동안에 기독교인과 이슬람과의 싸움입니다. 4백만이 죽었다고 합니다. 십자군이 원정을 일곱 번이나 했단 말입니다. 그 목적이 무엇인가. 예수의 무덤이 있는 예루살렘 성지를 이슬람으로부터 빼앗아서 기독교의 영토로 하고자 해서 그와 같이 싸운 것입니다.

 

목적도 못 이루고 200년 동안이나 싸우고 지치고 4백만이 죽었습니다. 그 얼마나 큰 비극입니까. 종교의 이름 밑에서 말입니다. 종교라는 것이 법집法執을 하면 차라리 없는 것만도 못합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꼭 법집을 말으십시오.

 

기독교인구가 지금 19억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 많은 인구와 우리가 갈등을 한다고 생각하여 보십시오. 불성자리에서는 다 똑 같습니다. 자기들도 역시 불성이 되고자 해서 자기들 마음 안에서는 몸부림칩니다. 다만 그 법집 때문에, 하나님은 저 하늘 위에 있다. 우리가 기도를 모시면 은총을 베풀어준다. 이런 식으로 믿으니까 그때는 안 되지요.

 

중생을 제도 할 때는 절대로 병도사病導師. 병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정말로 회통한 부처님의 그 원융무애圓融無碍한 법을 우리가 모르는 때는 공부를 부지런히 해야 됩니다. 그래서 참선을 우리가 하다보면 공부가 익어지면 몸도 자기 몸 같이 안 느껴지고 우주가 하나로 두루 통한단 말입니다.

그러면 아! 이렇구나 이러니까 모두가 다 원융무애라 하는구나. 이렇게 느껴진단 말입니다.

 

명상暝想을 떠나서, 참선參禪을 떠나서 마음 깨닫는 것이 연목구어緣木求魚 입니다. 절대로 안 됩니다. 염불을 해서 염불삼매에 들든 그건 상관이 없습니다. 염불念佛해서 삼매三昧에 들면 염불삼매念佛三昧. 주문呪文해서 삼매에 들면 주문삼매呪文三昧가 되겠지요. 또 화두話頭를 들어 화두삼매에 들 수 있는 것이고 말입니다. 다만 우리 마음이 상을 떠나서 오로지 청정무비한 영생불멸한 그 자리에다가 우리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그 자리가 바로 자성自性입니다. 자성이고 불성입니다.

 

진여청정성眞如淸淨性이라, 자성이라 불성이라 모두가 다 같은 뜻입니다. 여래장如來藏, 법성法性, , 열반涅槃, 극락極樂 모두가 같은 뜻입니다. 다 동일이명同一異名 입니다. 이름만 다른 것이지 뜻은 똑 같습니다.

 

여러분들은 절대로 길 잃어버린 양을 찾는데 이길 저길 갈림길에서 헤매는 그런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기 위해서 앞서 말씀드린 바 달마스님이나 또는 6조스님 같이 그런 모든 번쇄한 교법敎法을 헤치고 말입니다. 오직 순수하니 마음 깨달아서 가는 직지인심直指人心이라, 바로 마음이 산 생명이거니 그 마음자리를 바로 딱 집어서, 그 자리를 가리켜서 해탈解脫의 법문을 주었단 말입니다.

 

다만 우리가 마음 이외는 다른 것은 없다. 우주에는 진여불성 뿐이다. 이렇게 확실히 믿고, 그 마음을 앞생각 뒷생각에 딴 생각이 끼지 아니하도록 까지 지속을 시킨단 말입니다. 그러면 하루 앉으면 앉은 만큼은 일좌자일좌불一坐者一坐佛이요, 일일좌일일불一日坐一日佛이라. 하루 앉으면 앉은 만치 부처가 되어가고 또 이틀 앉으면 이틀 앉은 만큼 부처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대단히 감사 합니다. 점심 공양시간이 너무 지연되고, 그렇지 않더라도 빚진 죄인 같은 신세인데, 더욱더 여러분들이 공복을 느끼시면 죄송한 마음 가중됩니다. 다만 제 말씀 이대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마음이 근본자성根本自性 진여불성眞如佛性을 여의지 않으면 다 선입니다. 묵조하시면 묵조선黙照禪이고, 화두하시면 화두선話頭禪이고, 염불하시면 염불선念佛禪입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우리 마음이 화두를 애쓰고 그 머리 아프게 의심을 한다 하더라도 자성을 떠나버리면 그때는 그런 것은 선이 못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떻게 무엇을 염불을 하는 것인가. 화두를 외는 것인가. 화두를 들지 않는 것인가.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마음의 본체인 진여불성자리 자성자리를 떠나있는가 안 떠나있는가.

 

육조단경에도 분명히 명문으로 내 법은 본체를 여의지 않는다.’ 단경을 한번 다시 보십시오. 내 법은 본체를 여의지 않는다. 진여불성을 여의지 않아야 비로소 참선이란 말입니다.

 

<일체존재 우주가 바로 청정무구한 한 생명 부처님이다.>

여러분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외이시든, 부처님 명호 역시 그때그때 공덕 따라서 붙여진 공덕명입니다. 청정무비한 우주에 충만한 생명자체인 부처님을, 부처님의 공덕은 무한하기 때문에, 하나의 공덕뿐만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의 이름으로는 표현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비로운 쪽으로는 관세음보살, 지혜로운 쪽으로는 문수보살文殊菩薩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우리 지구에 들어있는 부처님의 공덕 에너지로 해서는 지장보살地藏菩薩 말입니다. 또는 태양에 들어있는 에너지로 해서는 일광보살日光菩薩이라, 전부 다 통 털어서 합해서 총대명사가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입니다.

그러기에 중국 원, , 청나라 때, 그런 때는 그 당시를 주름잡은 분들,

이른바 운서주굉雲棲袾宏:1536~1615, 중봉명본中峰明本:1263~1323, 지욱우익智旭藕益:15961~ 1655이라, 그 당시에 불교를 주름잡은 분들이 다 그런 방법으로 공부를 했단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정말로 가장 행복스러운 길, 끝내 우리가 돌아가야 할 마음의 고향 말입니다. 여기에 가는 길은 절대로 험난한 길이 아닙니다. 제일 쉬운 길입니다. 우주의 본연의 길, 순풍에 돛단배나 똑같습니다. 그런 길로 해서 꼭 금생에 성불하십시오. 내생까지 절대로 미루지 마시고 꼭 위없는 대도를 성취하셔서 영생의 행복을 누리시기를 간절히 빌어마지 않습니다.

 

나무석가모니불 !

나무석가모니불 !

나무시아본사석가모니불 !

 

<부처님 명호名號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은 우주법계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총대명사總代名詞입니다. 이 법문은 청화淸華 큰스님께서 미국 LA 팜스프링 금강선원에서 3년 결사를 마치시고 1998412일 귀국 회향법회를 곡성 성륜사에서 베푸시면서 설하신 귀중한 법문입니다.>

 

*19980412-청화대선사 설법

*19980412-불교TV 촬영방영

*19980412-성륜사 방송실 녹음

*19980525-녹취정리-본정 김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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