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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2. 진리의 길

제2편 마음이 바로 부처요, 부처가 곧 마음인 것을(15)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해설

 

 

* 용수보살께서 저술한 책 가운데서 보리심론(菩提心論)이라 하는 논장에, 공부하는 요체가 많이 설명되어 있습니다마는, 이 보리 방편문은 그 논장 가운데서 공부하는 요령을 금타 스님께서 간추린 것입니다.

 

* 다음의 내용도 금타 스님께서 쓰신 문장 그대로입니다.

“이의 보리란 각(覺)의 의(義)로써 보리방편문은 견성오도의 방편이라 정혜균지(定慧均持)의 심(心)을 일경(一境)에 주(住)하는 묘결이니 숙독요의(熟讀了義)한 후 적정에 처하고, 제일절만 사(寫)하야 단좌정시(端坐正視)의 벽면에 부(付)하야써 관이(觀而)염지(念之)하되 관(觀)의 일상삼매로 견성하고 염(念)의 일행삼매로 오도함.”

 

* 심(心)은 허공과 등(等)할새 편운척영(片雲隻影)이 무(無)한 광대무변의 허공적 심계(心界)를 관(觀)하면서 청정법신 인달하야 비로자나불을 염하고 차(此) 허공적 심계에 초일월(超日月)의 금색광명을 대(帶)한 무구(無垢)의 정수(淨水)가 충만(充滿)한 해상적(海象的)성해(性海)를 관(觀)하면서 원만보신 인달하야 노사나불을 염하고 내(內)로 염기염멸(念起念滅)의 무색중생과 외(外)로 일월성수(日月星宿) 산하대지 삼라만상의 무정중생과 인축(人畜)내지(乃至) 준동함령(蠢動含靈)의 유정중생과의 일체중생을 성해무풍(性海無風) 금파자용(金波自湧)인 해중구(海中漚)로 관하면서 천백억화신 인달하야 석가모니불을 염하고 다시 피(彼) 무량무변의 청공심계(淸空心界)와 정만성해(淨滿性海)와 구상중생(漚相衆生)을 공(空)·성(性)·상(相) 일여(一如)의 일합상(一合相)으로 통관(通觀)하면서 삼신일불(三身一佛) 인달하야 아(阿)[화化]·미(彌)[보報]·타(陀)[법法]불(佛)을 상념(常念)하고 내외생멸상(內外生滅相)인 무수중생(無數衆生)의 무상제행(無常諸行)을 심수만경전(心隨萬境轉)인달하야 미타(彌陀)의 일대행상(一大行相)으로 사유 관찰할지니라.

 

* “보리란 깨달음의 뜻으로서, 보리방편문은 견성오도의 하나의 방편입니다. 정과 혜를 가지런히 지니는 마음을 한 가지 경계에 머물게 하는 묘한 비결이니, 잘 읽어서 뜻을 깨달은 후, 고요한 곳에 처하고 제 일절만 써서 단정히 앉아 바로 보는 벽면에 붙여서 관하고 생각하되, 관의 일상삼매로 견성하고, 염(念)의 일행삼매로 오도함이라”는 뜻입니다.

 

* ‘심은 허공과 등할새 편운척영(片雲隻影)이’, 조그마한 그림자나 흔적이나 흐림이 없는 광대무변의 허공적 마음세계를 관찰하면서, 청정법신 인달하야, ‘인달하야’ 이 말은 ‘무엇무엇인’ 하는 접속사로 고어입니다. 곧 청정 법신인 비로자나불을 생각하고, 이와 같은 광대무변한 허공적 심계에 일월보다도 초월한 금색광명을 띤 무구의 정수가, 눈부신 세간적인 금색광명이 아닌, 순수한 금색광명을 띠고 있는 티끌이 없는 청정한 물의 성품이 충만한 해상적(海象的) 마치 바다와 같은 불성바다를 관찰하면서, 이 자리가 바로 원만보신인 노사나불임을 염하고, 자기 마음으로 생각이 일어나고 생각이 멸해지는 무색중생과 불교에서 중생이라 하면 자기 생각 즉 관념도 중생이라 합니다. 다만 모양이 없으니까 무색중생인 것입니다.

 

밖으로 눈으로 보이는 일월성수나 산하대지 삼라만상의 무정중생과, 의식이 없이 보이는 중생은 우리 중생차원에서 무정중생인 것이지, 본질적으로 본다면 일체존재가 다 진여불성의 화신인지라, 모두가 다 마음이요, 모두가 다 식(識)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람이나 축생이나 내지 꾸물거리면서 식이 있는, 인간 같은 육식이 아니라 오식을 말하겠지요. 준동함령의 유정중생등의 일체 중생을 광대무변한 불성 바다에 갖추어 있는 공덕으로 바람도 없이 금색 파도가 스스로 뛰는, 마치 바다에서 일어나는 물거품으로 관찰한다는 것입니다.

 

* 우리 관념상의 무색중생이나, 또는 우리가 밖으로 보이는 해나 달이나 또는 각 별들이나 산하대지나 삼라만상의 무정중생이나, 우리 사람이나 축생이나 내지 준동함령의 유정중생이나 이런 것 모두를 어떻게 관찰하는가 하면, 광대무변한 불성바다에 바람도 없이 거기에 갖추어 있는 불성 공덕으로 스스로 뛰노는 불성의 물거품으로 관찰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천백억화신인 석가모니불이구나 하고 염(念)하고, 석가모니불의 명의를 좁게 본다면 역사적인 석가모니 부처님만 화신이겠지마는, 광범위하게 본질적으로 본다면 두두물물(頭頭物物) 모든 중생이 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되는 화신입니다. 따라서 무색중생이나 또는 무정 중생이나 유정 중생이 모두가 다 천백억화신이라는 말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과 우리 중생은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상에서 볼 때에, 석가모니 부처는 깨달은 부처이고, 중생은 깨닫지 못한 부처일 뿐입니다.

 

* 저 무량무변의 청공심계(淸空心界)와,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인 청정하고 끝도 가도 없이 광대무변하게 비어 있는 마음 세계와, 정만성해(淨滿性海)와, 그 가운데 진여불성의 무량공덕의 성품이 가득 차 있는 생명의 바다인 원만보신과, 또는 구상중생(漚相衆生)을 불성바다에서 인연 따라서 물거품같이 일어나는 것 같은 천백억 화신인 구상중생을, 청공심계의 공(空), 정만성해인 성품의 바다인 성(性), 거기에서 일어나는 일체 중생의 상(相)이 원래 셋이 아니라 하나인, 합해서 하나의 실상으로 통해서 관찰하면서, 이것이 삼신일불(三身一佛)인, 청정법신이나 원만보신이나 또는 천백억화신이나 이 삼신이 원래 하나의 부처인 아미타불이라고 회통(會通)해서 항상 끊임없이 관찰하고 생각[念]하라는 것입니다.

 

* 부처님 명호는 그때그때 쓰임새의 차이가 있어서, 학문적으로 공부할 때는 여러 가지로 갈등을 느낍니다. 아미타불이라 할 때는 우리가 쉽게 생각할 때는 극락세계 교주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마는, 그것은 상징적으로 하신 말씀인 것이고, 가사 관무량수경 등에 나와 있는 아미타불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바로 우주 자체를 말합니다. 따라서 대일여래(大日如來) 또는 비로자나불이나 같은 뜻입니다.

 

* 아미타불을 극락세계의 교주라 할 때도, 뜻을 깊이 새겨 보면 극락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요, 천지우주가 바로 극락세계인 것입니다.

다만 중생이 번뇌에 가리어, 극락세계의 무량공덕을 수용 못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정수(正受)와 같이 정다웁게 여법히 받아들이지 못하니까, 더러운 땅인 예토(穢土)요, 사바세계가 되는 것이지, 우리가 정말로 삼독오욕(三毒五慾)을 다 떼어 버리고서 청정한 마음이 된다고 할 때는, 정수가 되어 이대로 사바세계가 극락세계인 것입니다.

따라서 극락세계 교주의 아미타불이란 뜻이나, 천지우주가 바로 아미타불이란 뜻이나, 결국은 같은 뜻인 것입니다.

 

* 아미타불의 아(阿)자는 화신을 의미하고, 미(彌)자는 보신을 의미하고, 타(陀)자는 법신을 의미하나니, 아미타불 곧 참 나[眞我]를 생각하고, 마음으로나 밖으로 보이는 모든 현상이나 생하고 멸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의 덧없는 모든 행위를, 심수만경전(心隨萬境轉)이라, 이것도 대승경전에서 자주 나옵니다. 우리 마음이 만 가지 경계에 따라 구른다. 곧 바꿔진다는 말입니다.

 

마음이라 하는 우주의 실존 생명이 만 가지 인연 따라서 만 가지 경계로 전변한다, 인연 따라 변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실제 실상인 마음, 곧 불성은 변하지 않겠지요. 다만 상만 나툴 뿐인데, 우리 중생은 상만 보고 본 성품을 못 보는 것이니까 다르다 변한다 하는 것이지, 본체에서 본다면 변동이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만 가지 경계에 따라 전변하는 미타(彌陀)의 일대행상(一大行相)으로 생각하고 관찰해야 한다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