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4. 청화 큰스님 법문집/12. 진리의 길

제2편 마음이 바로 부처요, 부처가 곧 마음인 것을(13)


 

 

일상삼매와 일행삼매

 

*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주는 삼매의 이름입니다.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는 간단하게 말하면 정혜쌍수(定慧雙修)와 똑같은 뜻입니다. 일상삼매는 혜에 해당하고, 일행삼매는 정에 해당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육조스님의 단경법문을 보겠습니다.

 

一相三昧와 一行三昧

師復曰 汝等 若欲成就種智 須達一相三昧一行三昧 若於一切處而不住相 於彼相中 不生憎愛 亦無取捨 不念利益成壤等事 安閑恬靜 處融澹泊 此名一相三昧 若於一切處 行住坐臥 純一直心 不動道場 眞成淨土 此名一行三昧 若人具二三昧 如地有種 含藏長養 成熟其實 一相一行 亦復如是 我今說法 猶如時雨 普潤大地 汝等佛性 譬諸種子 遇玆霑洽 承吾旨者 決獲菩提 依吾行者 定證妙果 聽吾偈曰 心地含諸種 普雨悉皆萌 頓悟花情已 菩提果自性

-壇經 第十咐囑流通-

 

육조단경의 제 십부촉품인 부촉유통분에, 육조께서 다시 또 말씀하시기를 “그대들이 만약 종지(種智)를 성취하려고 하면 마땅히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달할지니라”하였습니다. 종지란 일체종지를 말합니다. 부처님 지혜는 근본지(根本智)와 후득지(後得智)가 있는데, 근본지는 견성할 때에 일체 존재의 진여불성 자리를 깨닫는 것이고, 후득지란 근본지를 성취한 뒤에 종종 차별의 이른바 체용성상(體用性相) 모든 것을 빠짐없이 다 알 수 있는 지혜입니다.

 

* “만약 일체 처에 처하더라도 상에 머물지 않고, 현상적인 여러 가지 상황 상중(相中)에 있다 하더라도, 미워하고 좋아하는 마음을 내지 말아야 한다.”

원래 법이란 평등하고 조금도 어려운 것이 없는 것인데, 괜히 우리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 때문에 번뇌가 생기고 오염이 생기는 것입니다.

 

* “또한 취하고 버리지 말 것이며, 이익이 있다든가 이익이 없다든가 또는 성취가 된다단가 허물어진다든가 하는 것도 생각할 필요가 없고, 그저 편안하고 고요하고 안온한 것과, 허융담박(虛融澹泊)이라, 조금도 마음에 아무 거리낌이 없이 아주 깨끗하게 밝아지는 경계가 일상삼매”라고 합니다.

 

* 천지우주가 오직 조금도 차이 없는 하나의 진리 자리가 이른바 일상삼매입니다.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천차만별로 있다고 생각할 때는, 일상삼매가 못 됩니다. 모든 존재를 진여불성 하나의 자리로, 만법을 귀일을 시켜 버려야 이른바 일상삼매가 됩니다.

 

* “또한 만약 일체 처에 다니나 머무르나 또는 앉으나 누우나 간에, 순일직심(純一直心)이 부동도량(不動道場)이면, 진실로 정토를 이루니라 이것을 일행삼매라고 말한다.”

순일직심은 일상삼매를 확신하는 순수한 하나의 곧은 마음이요, 도량이라 할 때는 근본적인 본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순일한 직심이 근본적인 체를, 도량을 여의지 않으면 진실로 정토를 이루니, 이것을 일행삼매라고 합니다. 일상삼매를 닦아서 행주좌와에서 본체를 안 여윌 때는 현실 그대로 정토를 성취한다는 말이요, 이것이 바로 일행삼매라는 말입니다.

 

* “만약 사람이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갖추는 것은, 마치 땅에다 종자를 뿌리면 대지가 종자를 머금어서 오랫동안 잘 기르고 익혀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처럼, 일상삼매나 일행삼매도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불종자(佛種子)를 마음 밭에다 심어 놓고 오랫동안 가꾸고 거두어서, 상도 안 내고 모두가 다 하나의 진리인 일상삼매의 자리를 안 여읜다면, 종자가 땅에 떨어져서 잘 관리하면 열매를 맺듯이, 우리 마음도 역시 우리 마음자리에다가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두고서 오랫동안 닦아 나갈 때는, 일체종지를 성취한다는 뜻입니다.

 

* “내가 지금 설법하는 것은, 마치 때에 알맞게 비가 내려 대지를 적시는 것과 같다. 그대들의 불성도 비유하면, 종자가 비를 만나 충분히 습기나 윤택을 받고 모두 싹이 나오듯이, 내가 말한 일상삼매 일행삼매의 뜻을 받드는 자는 결정코 진여보리(眞如菩提)를 성취하고 나의 가르침대로 수행하는 자는 진실로 부처님의 묘한 과보를 성취한다.” 그리고, “나의 게송을 들으라. 심지함제종(心地含諸種)하니 마음 밭에 모든 종자를 머금어서, 보우실개맹(普雨悉皆萌)이라 두루 비에 적셔 빠짐없이 싹을 낸다. 돈오화정이(頓悟花情已)하니 문득 이런 뜻을 깨달아서 들뜬 범부의 망정이 이미 다하면, 보리과자성(菩提果自性)이라 보리 열매가 저절로 성취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 법에는 본래 돈점이 없습니다. 다만 근기가 날카롭고 둔함으로 돈점이 생기는 것이며, 또한 닦고 증하는 수증에도 깊고 옅음이 있는 것이니, 돈오점수라 하여 그릇됨이 될 수가 없고, 점차나 차서나 고하를 논하지 않는 무염오 수행을 역설하는 의미에서의 돈수이니 돈오돈수가 그릇됨이 아니며 ,다만 선오후수의 수기설법일 뿐입니다. 역시 먼저 깨닫고 뒤에 닦는 것은 불조(佛祖)의 통설입니다.

 

* 선오후수(先悟後修)란, 먼저 견성오도를 다 해가지고 닦는 다는 의미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간혜지(乾慧智)로 깨닫는 해오를 먼저 해 놓고서 닦아야 흐트러짐이 없이 바로 갈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삼세제불의 정설입니다.

 

* 석존께서 유성출가(踰城出家)하여 설산에서 닦을 때는 선오후수가 못 되었겠지요. 그때는 육사외도(六師外道)를 방문해서 별별 고생을 많이 하였습니다. 더러는 발가바 외도한테 가서 고행법도 배웠고, 또는 아라라 카라마한테 가서 무소유처까지 올라가는 선정도 배웠고, 또는 우다카 라마푸타한테 가서 비상비비상처, 삼계의 꼭대기에 올라가는 선법도 배웠으나, 모두가 참다운 깨달음에 이르는 법이 아니었기에 그들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 석가모니 전에 정말로 명안종사(明眼宗師)가 있어서, “그대는 어떻게 공부해야 한다.”고 했을 때는 육년 고행이 다 걸릴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석존께서는 선수후오라, 먼저 닦고 나중에 깨닫는 공부 방식인 것이고, 석존 뒤에는 모든 방법을 다 분명히 밝혀 놓으신지라 그 말씀 따라가면 되는 것입니다. 이른바 선오후수가 됩니다.

 

* 선오후수는 각 경론의 정설이기 때문에, 돈오돈수나 돈오점수 모두가 다 선오후수라는 자리에서, 즉 말하자면 그때그때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법문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것입니다.

 

* 돈오돈수설이나 돈오점수설이나 표현의 차이는 있으나 그 취지는 동일하고, 중생교화의 배경이나 시절 인연에 따라서 말씀하신 수기설법으로, 어떠한 것도 그르다고 비판할 것이 아닙니다. 다만 선오후수가 되어야, 닦음도 올바른 닦음이 되고, 성불에 이르는 첩경이 되는 것입니다.

 

* 바야흐로 인류는 참다운 진리로 돌아가는 전환기에 있습니다. 오직 문제는 우리 인간 자체 문제인 것입니다. 내가 무엇인가? 하는, 자기 생명과 우주의 본체, 인생과 우주의 실상만 바로 알 때는 모든 문제는 홍로일점설(紅爐一點雪)이라, 뜨거운 화로에다 한 점의 눈을 넣는 것과 마찬가지로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 모든 문화 현상이 분열에서 통합과 화해로 나아가는 것이 현대 사회의 추세입니다. 따라서 우리 불법의 해석도 마땅히 회통 적이어야 하고, 딴은 불법 본래 자체가 “비법도 불법이라” 불법 아닌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이기에, 응당 부처님께서 주로 말씀하신 여래선이나 또는 달마 스님 이후에 발달된 조사선이나, 내용이 둘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분별을 우리 고인들은 한갈등(閒葛藤)이라, 필요 없이 괜히 갈등한다고 하였습니다.

 

* 당대를 주름잡은 선지식들은 한결같이 불필요한 갈등에 반대했습니다. 원효스님이나 또는 대각 국사나 보조 국사나 또는 나옹 스님이나, 태고 스님이나 또는 서산대사나 그런 분들은 모두가 다 통합적인 원통무애(圓通無碍)한 법을 지향했습니다. 불법 자체가 본래로 일미평등 하여 둘이 아닙니다.

 

* 如來禪…云何如來禪 謂人如來地 得自覺聖智 三種樂住 成辨衆生 不思義 是名如來禪

-楞伽經二-

 

여래선에 대하여 능가경에 있는 말씀을 보겠습니다.

“무엇을 여래선이라고 하는가? 여래지(如來地)에 들어가서, 성자의 무루지(無漏智)를 깨달아서 삼종법락(三種法樂)에 머물고, 또한 동시에 중생의 부사의한 일을 다 성취하는 것을 여래선이라고 이름 한다.”하였습니다. 스스로 마음 깨달아 우주의 본 실상을, 성지(聖智)를 자각해서 여래지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또한 깨달으면 분명히 현법락주(現法樂住)라 하는 데가 있습니다. 현법락주란 우리가 온갖 법락에 머문다는 뜻입니다. 우리 공부하는 분들은 공부하기가 어렵다 하더라도, 한 고비만 넘어서면 틀림없이 법락이 옵니다.

 

* 능가경 주해(註解)에 나오는 여래선에 대한 주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註曰 如來所得의 禪 卽 首楞嚴定이다. 此禪定에 依하여 法身·般若·解脫의 三德秘藏의 大涅槃을 究竟하고 無作의 妙用을 일으킨다. 外道 二乘 菩薩所得의 涅槃과 簡別하여 如來禪이라 云함

-楞伽經註解-

 

“주에서 이르기를, 여래 소득의 선을 곧 수능엄정이라”고 합니다. 여래선이나 수능엄정이나 같은 뜻입니다. 역시 모든 삼매 가운데서 가장 으뜸 되는 선, 일체 종지를 다 깨닫는 선이 이른바 수능엄삼매, 수능엄정입니다. 여래선은 그와 똑같습니다.

 

* “이 선정에 의하여, 법신·반야·해탈의 삼덕비장(三德秘藏)의 대열반을 궁경(窮竟)하고”, 깨달은 단계가 열반인데 열반이란 것은 어떤 공덕이 있는가 하면, 우주의 참다운 생명의 실상을 그대로 깨닫는 법신, 또는 모든 참다운 지혜를 깨닫는 반야, 또는 우리 인생의 모든 고액인 삼계(三界)를 초월할 수 있는 법을 깨닫는 해탈인, 이른바 열반 삼덕(涅槃三德)입니다. 이런 "삼덕비장의 대열반을 다 마쳐 버리고서, 무작의 묘용을 무루법으로써 조금도 조작이 없는 묘용을 일으키는 것으로, 오도나 또는 성문·연각인 이승(二乘)이나 보살이 얻는 바의 열반과 간별하여 여래선이라 한다”는 것입니다.

 

* 선원도서에 나오는 여래선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若頓悟自性 自心本來淸淨 元無煩惱 無漏智性 本來具足 此心卽佛 畢竟無異 依此而修者 最上乘禪 亦名如來淸淨禪 亦名一行三昧 亦名眞如三昧 此是一切三昧根本 若能念念修習 自然漸得 百千三昧 達摩門下 展轉上傳者 是此禪也

-禪源都序上-

 

여래선에 대한 설명으로써, “우리가 자성을 문득 깨닫는다는 것은 자기 마음이 범부의 번뇌에 덮여 있는 마음 이대로 본래 청정하고, 본래 청정하니까 원래 번뇌가 있지 않고, 조금도 때 묻지 않은 참다운 지혜의 성품이 본래 다 구족하고 있는 것이니, 이 마음이 바로 부처로서 필경 부처와 더불어 다를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 “이러한 돈오에 의지해서 닦는 수행을 최상승선이요, 또한 여래 청정선(如來淸淨禪)이요, 역명 일행삼매라, 다시 이름하기를 진여삼매라 하며, 일체삼매의 근본이니, 만약 능히 생각 생각에 다른 생각을 끼지 않게 지속적으로 닦고 익힐 때에, 자연히 점차로 백 천 삼매를 얻는다. 달마문하에 구르고 굴러서 서로 서로 전하는 선은 바로 이 선이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 돈오는 인(因)과 과(果)가 있어서, 안으로는 우선 해오로, “내 마음이 본래 청정하니까 본래 번뇌가 없고, 때 묻지 않은 지성이 본래 갖추어 있어서 이 마음이 바로 부처고, 필경 부처와 더불어서 다르지 않다” 이렇게 알고 닦아 나가면 이것이 바로 최상승선이요, 최상승선은 도인한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범부도 그렇게 닦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도인한테만 있으면 새삼스럽게 이런 말을 낼 필요도 없겠지요. 그래서 과(果)로는 증오가 되는 것입니다.

 

* 영가현각대사의 증도가에, “돈각요여래선(頓覺了如來禪)하면, 육도만행체중원(六度萬行體中圓)이라” 문득 여래선을 깨달아 마치면, 육도만행을 본체를 여의지 않고 원만히 갖춘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따라서 여래선이 아직 덜된 것이 아니고, 여래선 자체가 원만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증도가도 육조 대사로부터 정법을 그대로 인가받은 영가현각 대사의 증도가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