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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2. 진리의 길

제2편 마음이 바로 부처요, 부처가 곧 마음인 것을(14)


 

조사선(2)

 

* 선은 무엇인가? 선은 (禪那-Dhyana)나 같습니다. 풀이하면 사유수(思惟修)라 합니다. 그냥 보통 생각이 아니라, 정사유(正思惟) 곧 바른 생각입니다. 바른 생각이란, 반야의 도리, 제법공 도리, 오온개공의 도리를 분명히 알고서, 또는 다만 공이 아닌 중도(中道)의 도리, 중도실상의 도리가 이른바 정사유요, 정사유 하면서 닦는 공부가 선이란 뜻입니다.

그 다음에는 적려(寂慮)라는 뜻입니다. 번뇌를 소멸하여 고요하고 밝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본분사에서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그 다음에는 기악(棄惡)의 뜻이 있습니다. 상대유한적인 악만 아니라, 내가 있다 네가 있다, 무엇이 좋다 궂다 하는 분별망상도 버리는 것입니다.

또는 공덕총림(功德叢林)이라 합니다. 공덕이 하나 둘 있는 것이 아니라, 총림같이 무더기로 많이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무한공덕입니다. 한도 끝도 없는 무루지혜를 얻는 것이거니, 무한공덕이 안될 수가 없습니다.

 

* 선정을 현법락주(現法樂住)라고 합니다. 이 현법락주라는 것도, 우리가 크게 관심을 둘 문제입니다. “참선하면 아무런 재미도 없겠지”합니다마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선 처음에 재미는 몸과 마음이 가벼워집니다. 음식도 있으나마나 별 문제가 아니고, 모든 것에 대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상이 잠차로 가시게 됩니다. 이 상에 얽히고 저 상에 얽히면 굉장히 괴롭고 구속되는 옹색한 구속감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인데, 우선 ‘나’라는 생각이 차근차근 줄어지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 가다 죽어도 무방하고, 언제 죽어도 무방하다”이런 생각이 들어갑니다. 이렇게 집착이 스러지다가, 드디어 욕계를 초월한 법락(法樂)을 얻어서, 한량없는 행복에 잠기는 것이 현법락주입니다.

 

* 삼매(三昧)는 삼마지(三摩地)와 같은 의미입니다. 앞에 든 것이 모두 심일경성(心一境性)이라 하여, 우리 마음이 한 경계에 머물러서, 즉 본체에 머물러서 분별망상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또한 선종의 선은 그 이름은 동일하나, 그 체는 바로 열반묘심(涅槃妙心)입니다. 열반묘심은 바로 불심을 말합니다.

 

* 삼명육통(三明六通)등, 제공덕이 선정에 의하여 발득(發得)되므로 최학도(最學道)라, 곧 배우는 길 가운데서 가장 수승한 길이란 말이요, 또는 안락법문(安樂法門)이라 합니다. 참선이란 것은 몸도 마음도 가장 안락스러운 것입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가부좌하고 앉았으니까 어렵다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처음에 습인(習忍)이 발득 될 때까지는 어려울지 몰라도, 나쁜 버릇만 떨어지면 제일 쉬운 것입니다.

 

* 가부좌한 정삼각형 모습은 기하학적인 의미에서 가장 안정된 모습입니다. 둥그런 것은 아예 안정이 될 수도 없겠고, 네모꼴보다도 정삼각형은 아래가 무겁고 넓고 위가 좁아서 제일 안정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정삼각형을 미타(彌陀)의 지인(智印)이라 합니다. 아미타는 제불의 본사(本師)요 제불의 왕인데, 미타의 묘관찰지(妙觀察智)의 상징이 정삼각형입니다. 밀교에서는 부처님의 참다운 지혜의 상징적인 표치가 정삼각입니다. 이 모습이 가부좌하고 똑 같습니다. 따라서 가부좌할 때는 가장 몸이 안정되고 지혜가 제일 발동되기 쉬운 것입니다.

 

* 우리가 성불이라 할 때에, 본래성불(本來成佛)·즉신성불(卽身成佛), 또는 당래성불(當來成佛)의 세 가지로, 성불의 뜻을 구분합니다. 본래성불은 본래 부처가 되어 있다는 말이요, 즉신성불은 이 몸 이대로 금생에 바로 부처를 이룬다는 말입니다.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금생에 충분히 부처를 이룰 수가 있어야 하겠지요. 또는 금생에 그렁저렁 했으면 금생에는 못 이룬다 하더라도, 당래성불이라, 당위적으로 마땅히 미래에는 성불할 수 있습니다.

 

* 참선하는 분들은 본래성불 자리를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일체의 번뇌와 때가 묻지 않은 모든 공덕을 원만히 갖추고 있다.”고 믿을 때에, 이른바 안심법문이 되는 것입니다. 구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내 마음만 믿어버리면, 사실은 구할 것이 없습니다.

 

* 마음이 본래 부처인데, 어째서 부처가 나타나지를 않을까요? 이것은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산란심 때문입니다. 파도가 치며는, 중천에 휘영청 밝은 달그림자가 물위에 제대로 비칠 수 가 없겠지요. 똑같습니다. 우리 마음도 역시 산란스러우면 참다운 지혜가 못 나옵니다. 안정이 되어야 바른 지혜가 나올 수 있는 것이고, 특히 진여불성, 우리 본심자리는 정말로 산란심이 정지가 되어야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호흡도 산란심과 정비례합니다. 마음이 산란스러우면 호흡도 그 마음만큼 산란스럽고, 호흡이 고요해지면 마음도 고요해지고, 또 역으로 마음이 고요해지면 호흡도 고요해집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도 어느 문제에다가 의심을 골똘히 품게 되면, 마음이 모아지고 정화가 됩니다.

 

* 도인들이 깨달은 분상에서, “심월고원(心月孤圓)하니 광탄만상(光呑萬像)이로다. 마음달이 훤히 비추는데, 광명이 우주를 다 삼키고 있구나!” 합니다. 우리가 참으로 깨달을 때에는 그런 경계가 되어야겠지요. 천지우주가 그야말로 송곳 끄트머리나 냄새나는 똥이나, 모두가 다 부처님의 순수한, 심심미묘한 광명으로 빛나는 것입니다.

 

* 불신충만어법계(佛身充滿於法界)라, 천지우주가 바로 부처요, 시방여래시법계신(十方如來是法界身)이라, 부처는 바로 우주를 몸으로 합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근본 뜻을 헤아려야 하는 것입니다.

 

* 원래 극락세계나 나무아미타불이나 정토법문을 말씀하신 경은, 주로 대무량수경·관무량수경·아미타경인데, 그런 경을 착실히 보아도 압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착실히 안보고 말을 합니다. 착실히 본다면, 한 경 내에서도 방편과 진실이 아울러 있습니다. “극락세계가 저 밖에 있다”고 말씀해 놓고도, 같은 경 내에서 “그대 마음이 바로 극락세계다. 닦으면 그대로 극락이다.”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하근 중생은 방편설만 가지고 따지며, 시야비야(是也非也)합니다.

 

* 외도와 정도의 차이는 무엇인가? 외도는 마음 밖에 도를 구합니다. 별스런 재주 있는 짓을 다해도, 마음 밖에 무엇을 생각하면 외도인 것입니다. 행복도 불행도 화합도 모두가 다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행동 바르게 하고 진리를 생각하면서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 것입니다.

 

* 염불은 부처님 당시부터서 염불(念佛)·염법(念法)·염승(念僧)이라고, 무슨 경전에 다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또 부처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염불은 따지고 보면 내가 참 나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본래 부처가 부처를 생각하기 때문에, 역시 선이 됩니다.

 

* 깊은 고려 없이 염불은 하근기 중생이 하는 것이라고 하면 문제가 큽니다. 우리네 할머니나 어머니처럼 천념(千念)을 헤아리면서 애쓰고 몇 십 년 동안 염불한 분도, 어느 스님네가 “염불은 근기가 낮은 사람들이 하는 것이다. 화두를 해야 한다” 그렇게 해 버리면, 염불은 그만두고서 억지로 화두 의심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시간 낭비인 동시에 병통이 생기기 쉽습니다. 근세에 수월(水月)스님은 일자무식인데도 천수다라니로 깨달은 분 아닙니까? 모두가 다 부처라 생각하고서 노력하면 되는 것이지, 섣부른 졸도(拙度)법문은 소경이 길을 인도하는 격입니다.

 

* 정과 혜가 쌍수 곧, 아울러 닦아야만이 정혜균등으로서 가지런히 조화가 되는 것입니다. 본래 우리가 부처거니, 부처 가운데는 정과 혜가 구족원만이거니, 우리 공부도 그렇게 상응 조화해 나가야 계합이 빠른 것입니다. 삼매가 발득이 못 되는 것은 정혜불균등이기 때문입니다. 조화가 된다면, 혼침(昏沈)도 도거(掉擧)도 점차로 끊어지는 것입니다.

 

* 여묘포서(如猫捕鼠)라,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 찰나도 한 눈 팔지 않고 눈도 깜짝 않고서 쥐만 바라보는 것처럼, 화두를 참구할 때나 염불할 때나 눈도 깜짝 않고서 마음을 한 눈 팔지 않고 그 자리만 생각하고 관찰해야 합니다.

 

* 여계포란(如鷄抱卵)이라, 마치 닭이 알을 품듯이 한다는 뜻입니다. 닭이 경망해서, 계란을 품고 있다가 며칠이 안 되어서 풀떡 일어나 버리면 되겠습니까? 따스한 온기로 훈습을 시켜서 적당한 온도가 되면 계란의 생명이 차츰 무르익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른바 줄탁동시(啐啄同時)라, 그 안에서 생명이 발육이 되어 곧 나가야겠다고 미묘한 신호를 내면, 동시에 어미닭이 껍질을 쫍니다. 시기가 딱 맞아서 병아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가 다 어미닭이 쉼 없이 계속 품고 있었기에 되는 것입니다.

 

* 우리 출가 사문은 한사코 정해탈(定解脫), 곧 선정 해탈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선정 해탈은 오랫동안 삼매에 들어앉아야 되는 것입니다. 닭이 계란을 품듯이, 진득하니 오랫동안 앉아야 합니다. 선방에서 공부하다가, 방선 죽비 치면 나와서 잔소리나 하고, 그래서는 공부가 익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방선해서 일어날 때도 안상(安詳)이라, 우리 수좌나 부처님 거동은 안상이라, 조용하고 점잖고 사뿐히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만이, 본체에다 머무르고 있는 그 마음이 흩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른바 보임(保任)입니다.

 

* 삼매란, 심념(心念)이 정지(定止)하므로 정(定)이라 하고, 우리 마음이 흔들려서 분별시비하는 도거(掉擧)를 여의므로 마음이 가지런하게 평등하게 되어서 등(等)이라 하며, 마음이 산란치 않으므로 지(持)라 합니다. 중생 마음은 산란스러운 산심(散心)인 것이고, 수행이 되어서 삼매에 들면 안정된 정심(定心)이라 합니다. 그런데 산심과 정심에 통하고, 다만 유심(有心)으로 평등보지(平等保持)함을 삼마지(三摩持), 곧 등지(等持)라 합니다.

 

* 삼매에도 유심삼매와 무심삼매가 있습니다. 아직 정도가 낮은 때는 분별하는 마음이 남아 있는 유심 삼매고, 정도가 깊어지면 분별심이 스러진 무심 삼매입니다. 그래서 삼마지는 아직은 무심 삼매가 못 되어 유심삼매입니다. 그리고 우리 중생의 산심에도 삼마지 법이 있고, 또 정심에도 있는데, 산심에 있는 삼마지는 그 정도가 낮은 삼매이고, 정심에 있는 삼마지는 고도한 삼매가 됩니다.

 

* 지도론에서는 “선심일체처(善心一切處)에 주(住)하여 부동(不動)함을 삼매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불교에서 선심이란, 유루법(有漏法)이 아닌 무루법(無漏法)에서 말할 때는, 바로 불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삼매라 하면, 진리에 머물러 있는 마음이 삼매가 되는 것입니다.

 

* 삼마발저(Samapatti)가 있습니다. 이것도 역시 삼매의 일종입니다. 정의 뜻으로서 삼매의 일종이라 등지(等至)라고 합니다. 앞에 삼마지도 등지로서 음은 같으나 가질 지(持)자요, 삼마발저는 이를 지(至)자를 씁니다.

 

등(等)은 정력(定力)에 의하여 혼침과 산란의 번뇌를 여의고, 마음이 평정(平靜)하고 평화스러운 경계를 의미하고, 이러한 경지에 이르게 하므로 이를 지(至)자를 쓰는 것입니다. 등지는 유심과 무심에 통하고, 오직 정심에만 있으며 산심에는 없는 것입니다. 삼마지 곧 등지는 산란스러운 산심에도 있는 정도의 것이었지마는, 삼마발저는 삼매가 보다 더 깊이 되어서 산심은 벌써 사라지고 정심만 있으나, 마음까지 무심이 된 것은 아닙니다. 더러는 유심도 되고, 더러는 무심도 된다는 것입니다. 산심이 없을 때 비로소 정심이라 합니다. 산심이 있는 사람들은, 아직은 정에 든다는 말을 못 쓰는 것입니다. 산심이 사라져야 정에 든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삼마희타(Samahita)는 역시 삼매의 다른 이름의 하나로써, 삼마희타를 등인(等引)이라 번역하는데, 등은 혼침과 산란을 여의고 마음을 평등케 함이요, 이 경계에서 모든 공덕을 일으키므로 인(引)이라 합니다. 유심과 무심과 또는 유루와 무루의 오온의 공덕을 그 체로 하며, 산심과는 안 통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다만 앞에의 삼마지나 삼마발저와 다른 것은, 삼매에 깊이 듦으로 해서 삼명육통이라든가, 여러 가지 많은 공덕을 얻는 자리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등인이란 삼매로 해서 공덕을 이끌어 온다는 뜻입니다.

 

* 지도론이나 유식론이나, 유가사지론이나 구사론이나, 이런 데에 이렇게 번쇄하게 나오니까, 마음 닦는 공부하는 분들은 혼동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서 불립문자와 교외별전이나, 조사 스님들의 간결한 법어가 있는 것이니까, 이런 삼매 풀이는 참고로만 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