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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2. 진리의 길

제2편 마음이 바로 부처요, 부처가 곧 마음인 것을(14)


 

조사선(1)

 

 

* 祖師禪…不立文字 敎外別傳 直旨人心 見性成佛의 格外道理에 立脚한 祖師本傳의 禪을 말한다. 楞伽經所說의 如來禪의 名에 대하여 此稱을 세웠다. 따라서 如來禪을 敎內未了의 禪이라 하고 祖師禪을 敎外別傳의 至極한 禪으로 한다.(祖師禪이 如來禪보다 우월하다는 主張)

 

* 조사선이란 무엇인가?

“조사선은 불립문자, 교외별전이라, 참다운 진리는 원래 문자를 세울 수가 없다. 다만 우리 중생들에게 표현하기 위해서 문자를 빌린 것이지, 참다운 진리 자체는 말도 떠나고 문자도 떠나고 생각을 떠나 있다. 따라서 참다운 도는 교 밖에서 전한다.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라, 그러니까 교를 하나도 안 배운다 하더라도, 사람 마음을 바로 가리켜서, 그대 마음이 바로 부처니까 바로 마음 깨달으면 된다. 바로 본래 성품을 보고 성불하는 이른바 격외(格外)도리에 입각하여 조사와 조사가 본래 전하는 선을 말한다.”고 합니다. 능가경에서 말하는 여래선의 이름에 대하여 조사선이란 명칭을 세웠고, “여래선은 교 안의 미처 덜 된 선이라고 하고, 조사선을 교 밖에 달리 전하는 지극한 선이라”고 하는 것이, 조사선이라는 이름을 지어서 조사선이 여래선보다 우월하다는 주장을 하는 분들의 말씀입니다.

 

* 祖師禪의 始初…傳燈錄十一仰山章, 師問曰 香嚴師弟 近日見處如何 嚴曰 某甲 卒說不得 乃有偈曰 去年貧未是貧 今年貧始是貧 去年貧無卓錐之地 今年貧錐也無 師曰 師弟只得如來禪 未得祖師禪

 

양산 대사께서 묻기를, “향엄 사제, 근자에 그대가 깨달은 바가 어떠한가?” 그러니까 향엄대사가, “모갑졸설부득(某甲卒說不得)이니다.” 하였습니다. 자기를 겸사할 때에 모갑이라 합니다. “제가 졸지에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고는 게송으로. “작년에 가난한 것은 아직 가난하다고 할 것이 없으나, 금년에 가난한 것은 비로소 참으로 가난한 것이고, 작년에 가난한 것은 송곳을 세울 만한 땅이 없었으나, 금년에 가난한 것은 송곳마저도 없습니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주관도 객관도 아무 것도 없다는 뜻으로 해석을 할 수가 있습니다. 향엄 스님의 이런 대답에, 앙산 스님이 “사제는 다만 여래선만 얻고, 아직 조사선은 얻지를 못했네 그려”하고 말씀을 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조사선과 여래선을 비교하여 헤아린 최초의 근거가 있습니다.

 

* 그런데 위의 사연은 다시 이어져서 위산 대사의 어록에 보면, 앙산 스님의 평을 들은 향엄 스님은, “나에게도 대기(大機)가 있어 눈을 껌벅이고 그를 보았는데, 알아차리지 못할까 하여 달리 사미를 부른 셈(我有一機 瞬目觀伊 若人不會 別喚沙彌)”이라 하니, 이에 앙산 스님이 스승인 위산 스님에게 말씀드리기를, “이렇듯 향엄지한 사제도 조사선을 깨달았습니다.(且喜閑師弟 會祖師禪也)”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여래선과 조사선의 우열을 상량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부처님 당시부터서 조사선이란 말이 있었다고 생각하지마는 그렇지 않고 조사선의 명의는 이때부터 있어 왔다고 합니다.

 

우리 선가(禪家)에서도 어록을 보면, 여래선보다 조사선을 위라고 하는 망발도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부처가 깨달은 여래선이 아래라고 하면, 말씀이 될 수가 없겠지요. 여래선이란 바로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만덕을 원만히 갖춘 무루(無漏)청정선(淸淨禪)인 것입니다.

 

* 일본의 선종사에 가장 위대한 분이 도원(道元)선사라고 합니다. 중국 송나라 천동여정(天童如淨)스님에게 사법(嗣法)하고 일본 조동종의 개조(開祖)인 도원선사는, 여래선 조사선의 우열론에 대하여, “여래선이다. 조사선이다 하는 이름이 일직이 옛날에는 전하지 않았는데, 오늘날 비로소 망령되게 전해져 부질없이 헛된 이름에 미혹하여 집착하기 몇 백 년이니, 참으로 가련한 일이 아닌가? 말세에 용렬한 인연 때문이니, 다 이익이 없는 한갈등(閒葛藤)이다.”(如來禪祖師禪 往古不傳 今妄傳 迷執虛名 何百歲可怜 末世劣因緣 皆是無益之閒葛藤也)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우리 후학들이 참고할 만한 경책이 아닐 수 없습니다.

 

* 조사선은 여래선의 교선일치설에 반대하여 여래언구(如來言句)에 집착함을 경책하는 의미에서 여래선과 간별(簡別)하여 조사선을 창도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여래선이나 조사선이나 대기(對機)에 따른 수시(隨時)의 소설(所說)로서, 여래선외(如來禪外) 조사선이 없고 또한 조사선외(祖師禪外)에 여래선이 따로 있지 않으며, 그 내용에 있어서는 일호의 상위도 없고 천심(淺深)우열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 조사선이란 여래선의 선교일치설에 반대하여 제언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조사선은 여래의 언구(言句)에 집착함을 경책하는 의미에서, 여래선과 간별하여 조사선을 창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래선이나 조사선이나 근기에 따른 수시의 말로서, 여래선외에 조사선이 없고 또한 조사선외에 여래선이 따로 있지 않으며, 그 내용에 있어서는 일호의 상위도 없고 심천우열이 있을 수 가 없는 것입니다. 어디가 깊고 어디가 더 옅고 또는 어디가 더 수승하고 또는 용렬한 차이가 있을 수 없습니다.

마땅히 이런 도리를 깊이 생각하셔서, 앞으로 부질없는 갈등을 일으키지 않아야 합니다. 진지한 수행자는 꼭 이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공부하는 데는 장애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수행자자 부질없이 무익한 한갈등(閒葛藤)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마음 닦는 것에 도움 되는 말 외에는, 말도 함부로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인생이 그야말로 찰나 무상 아닙니까? 숨 한번 들이쉬지 못하면, 우리 생명은 다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 인생에 있어서 성불하는 직통길만 가는 데도 우리 인생이 너무나 짧습니다.

 

* 우리 번뇌는 얼마나 깊습니까? 닦으려고 생각하지 않고 그렁저렁 지내는 사람들, 속물이 되어 세속에 휩싸인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정작 그런 속물이 되지 않아야겠고, 한사코 해탈의 길에 나가야겠다.”고 할 때는 가지가지의 마장(魔障)이 굉장히 많습니다. 욕계에 있는 것은 모두가 다 총동원해서 우리한테 대항하는 것입니다. 좋은 맛이나 좋은 경치나 아름다운 것이나, 또는 이성이나 모든 것이 다 우리의 해탈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방해가 많은 원수의 밀림 가운데서, 이른바 번뇌조림(煩惱稠林)이라 번뇌나 마군(魔軍)이 빽빽한 가운데서 헤쳐 나가기는 굉장히 어려운 것입니다.

 

* 우리가 팔만장경을 금생에 다 볼 수가 없습니다마는, 어느 경을 보아도 다 소중합니다. 또한 논장도 다 볼 수 없습니다마는, 지금 우리에게 이미 알려져서 강원에서 배우는 것은 다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대교까지 안 배운다 하더라도, 정말로 숙세에 선근이 깊다면 초심에서도 깨닫는 것입니다. 불보고 깨닫고, 물 보고 깨닫고, 달보고 깨닫고 별보고 깨닫고, 우리가 깨닫는 인연은 한이 없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 자성의 문제입니다. 오로지 자기 문제라는 말입니다.

 

* 여래선 조사선도 고하가 있는 것도 아니요, 우열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이 화두는 근기가 수승한 사람들이 하는 것이고, 주문이나 염불은 근기가 하열한 사람들이 한다고 합니다. 부처님 경전에 그런 말씀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다만, 어떻게 하는가? 그 자세에 달린 것입니다. 우리가 본래적인 자세만 여의지 않고 본체를 여의지 않을 때는, 다 그대로 수승한 대승법이요 참선이 되는 것입니다.

 

* 묵조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냥 묵묵하니 바보같이 앉아 있기만 할 때는 선이 못 됩니다. 분명히 중도실상의 도리를 관조해야, 참다운 묵조선인 것입니다.

 

* 화두를 참구한다하더라도, ‘이뭣고’나 ‘간시궐(乾屎橛)’이나 또는 ‘판치생모(板齒生毛)’나 무슨 화두를 들 때는, 원래는 본분사,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 본래면목 자리를 들었습니다.

어록을 보신 분은 다 아는 바와 같이, 본래면목이 무엇인가?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인가? 이런데서 화두가 나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연 따라서 무슨 화두를 들든지 간에, 제일의제(第一義諦)자리를 분명히 들어야 참다운 화두가 되는 것이지, 본체 자리를 여의고 그냥 의심한다고 해서 참다운 공부가 되고 참선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 훤히 틔어 버린 본래면목 자리를 안 놓치고 화두를 들어야 상기(上氣)도 안 됩니다. 그냥 애쓰고 의심만 할 때는, 상기되게 마련입니다. 마땅히 마음을 열고 닦아야 참다운 공부가 됩니다. 마음을 연다는 뜻은 무엇인가? 일체 존재가 모두가 다 하나의 도리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일체 존재 모두가 진여불성 뿐이란 뜻입니다.

 

* 닦아 나가는 데는 꼭 철저하게 계행을 지켜야 합니다. 철저히 계행을 지키지 않으면 삼매에 못 들어갑니다. “시라불청정(尸羅不淸淨)이면 삼매불현전(三昧不現前)이라”, 시라는 계율입니다. 계율이 청정하지 않으면, 삼매가 못 나온다는 말입니다. 삼매에 들지 못하면, 참다운 견성이 못 되는 것입니다.

 

* 저도 지금 산길을 허우적허우적하며 올라가는, 허위단심 올라가는 향상수자(向上修者)에 불과합니다. 같이 부지런히 공부를 하십시다.

 

* 벽암록에 휴거헐거(休去歇去)라는 말이 있습니다. 쉬고 또 쉬어라, 상대유한적인 분별시비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진여법성이 발현되지 못하는 것은, 마음을 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휴거헐거면 철수개화(鐵樹開花)라, 마음을 쉬면 쇠로 된 나무에서 꽃이 핀다는 말입니다. 마음 쉬는 지름길이 참선입니다. 우리가 제 아무리 이것저것 많이 하더라도, 결국은 마음을 쉬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