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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2. 진리의 길

제2편 마음이 바로 부처요, 부처가 곧 마음인 것을(12)


 

돈수와 점수의 유래 (1)

 

* 불교나 동양 철학을 공부한다는 사람들은, 으레 깨달음과 닦음의 문제는 가장 중요한 관심사인데, 그래서 우선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건 왜 그런가 하면, 어떻게 닦아야 할 것인가? 하는 깨달음과 닦음의 문제라는 것은 우리 불자들로서는 일대사인연으로써, 우리가 꼭 해결하고 넘어가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 우리가 잘못 생각하면, 돈오점수는 보조 국사가 처음으로 말씀하였고, 돈오돈수는 성철스님께서 말씀하였다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그 연원부터 밝혀보면, 돈오돈수도 역사적으로 분명히 권위 있는 말씀이고, 돈오점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문제에 있어서 권위 있는 인용을 하기 위해서 조사어록(祖師語錄)에 의거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 습마물 임마래라, 십(什)을 송나라 속음으로 하면 습이라 합니다. 습마물이란 무엇이란 뜻이고, 임마는 어떻게, 어찌해서란 뜻으로, 습마물 임마래란, 곧 “무엇이 이렇게 왔는가”라는 말입니다.

 

* 습마물 임마래의 연원이 어디에 있는가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南岳懷讓 六祖慧能 初相見時, 六祖問 什麽處來 曰嵩山來 祖曰 什麽物恁麽來

 

* 남악회양 선사는 육조혜능 대사로부터 법을 받은 정통조사 중 한 분이십니다. 남악 회양이 육조혜능 스님을 맨 처음에 뵐 때 육조가 묻기를 “그대는 대체 어디서 왔는가?” 그러니까 남악회양 선사가 “숭산에서 왔습니다.” 숭산은 그 당시에 노안[또는 慧安]대사가 중생을 제도하였던 곳입니다. 그러니까 육조혜능 대사가 말씀하기를 “습마물 임마래오?”

 

* ‘이뭣고’ 선의 화두도, 원래는 습마물임마래에 연원이 있습니다. “그 무엇인가? 내가 무엇인가?”에는 나(我) 자체가 천지 우주와 같이 연기법으로 중중무진(重重無盡)으로 관계가 있기 때문에, “그 무엇인가?”의 그 가운데는 일체 존재가 다 들어갑니다.

 

* ‘이뭣고’ 선(禪) 할 때에, 이른바 ‘시삼마’(是甚麽의 속음)할 때에는 ‘이뭣고’ 이것이 바로 내가 무엇인가? 내 본래 면목은 무엇인가? 이렇게 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때문에 금강경오가해서에 육조 스님의 해석이 있지 않습니까? “나한테 한 물건이 있으되, 하늘을 받치고 땅을 괴고, 밝기는 해와 달보다 밝고 검기는 칠보다 검고, 이러한 것이 나와 더불어 있지만 미처 거두어 얻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가?”[有一物 無頭無尾 無名無字 上柱天下柱地 明如日黑似漆 常在勤用中 勤用中 收不得者 是甚麽]

이와 같이, 본래면목이 무엇인가? 해야지, 그냥 상대 유한적인 것 가지고서 이것인가 저것인가 하며는, 그때는 화두가 못되고 참선이 못됩니다. 분명히 습마물 임마래가 되어야 화두가 됩니다.

 

* 남악회양 선사는 팔 년 간이나 육조혜능 대사를 시봉하면서 부단히 수련을 거친 뒤, 자기 본 성품을 깨닫고 나서 혜능대사께 다시 나아가 “이제는 제가 얻은 바가 있습니다.”하고 말씀을 드리니까, “그럼 한번 말해 보지” 그랬어요.

육조 혜능 대사의 말씀 따라서 남악회양 선사가 대답을 한 말씀이 이렇습니다.

 

曰說似一物卽不中 六祖問 還可修證否 讓云 修證不無 染汚卽不得 六祖曰 只是不染汚 諸佛之所護念 汝亦如是 悟亦如是

-傳燈錄南嶽章-

 

* “설사일물즉부중이니다. 설사 하나라고 말씀드리더라도 맞지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어떻게 말로는 능히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의 뜻입니다. 진리란 바로 시공을 초월하는 것이고, 인과를 넘어선 것인데, 어떻게 제한된 인간의 말로써 표현할 수 가 있겠습니까?

 

* 육조혜능 스님께서 다시 묻기를 “환가수증부(還可修證否)아? 그러면 도리어 앞으로 더 닦고[修] 증(證)할 것이 있는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 깨달아 버렸으니까, 다시 닦을 것이 없으면 없다고 해야 하겠지요. 이렇게 육조가 물을 때는 벌써 마음으로 인가(印可)를 한 것입니다.

 

* 회양선사가 대답하기를 “수증불무(修證不無)나” 닦고 증하는 것이, 증명하는 것이 없지는 않습니다마는, “염오즉부득(染汚卽不得)이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 육조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다만 바로 불염오(不染汚) 이것이 제불지소호념(諸佛之所護念)이라” 모든 부처님이 지키고 억념(憶念)하는 것이다 고 하였습니다. 즉 진리에 합당하니까, 모든 부처님이 이것을 옳다고 긍정하고서 지키신다는 말입니다.

 

* “깨달음을 얻은 뒤에 닦음도 있고 증(證)함도 있지마는, 다만 오염을 시키지 않고, 곧 고하 시비 계급을 논하지 않고서 닦는 것이 제불이 호념 하는 바라, 그대도 역시 그렇고 나도 역시 그러하도다.”

 

* 남악회양 선사가 깨닫지 못했으면, 이런 말씀을 할 수 없습니다. 비록 깨달았다 하더라도, 습기까지 몽땅 떼어 버리는 완벽한 깨달음에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때문에 닦음은 또 다시 있어야 하고, 또한 수증(修證)에 심천(深淺)이 있기 때문에 마땅히 닦음이 있긴 있지마는, 그것을 높다 낮다, 또는 보살 몇 지(地)라든가 하는 것을 관념에 두어서는 참다운 무염오 수행이 못됩니다. 우리는 이런 자리를 분명히 느껴야 합니다.

무염오 수행이란 것을 분명히 느끼지 못하면,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돈오돈수라든가 돈오점수에 관해서 판단의 착오를 일으킵니다.

 

* 돈오돈수는 우리가 흔히 상식으로 알듯이 성철 스님이 맨 처음에 말씀한 것이 아니라, 이미 육조단경 제칠남돈북점장(南頓北漸章)에 나와 있습니다.

 

 

壇經 第七 南頓北漸章, 師曰 無非 無痴 無亂 念念般若觀照 常離法相 自由自在 縱橫盡得 有何可立 自性自悟 頓悟頓修 亦無漸次 所以不立一切法 諸法寂滅 有何次第

단경 제칠남돈북점장에, 육조 혜능스님의 말씀이, 무비(無非) 무치(無痴) 무란(無亂)이라, 그릇됨이 없고 어지러움이 없다는 것은, 내나 계(戒) 정(定) 혜(慧) 삼학(三學)을 말한 것입니다. 그릇됨이 없는 것은 바로 계율을 말하고, 어리석음이 없으니까 지혜를 말하고, 어지러움이 없으니까 선정을 말한 것입니다.

 

 

* 계정혜 삼학을 닦아서 염념반야관조(念念般若觀照)라, 생각 생각에 반야의 지혜를 관조한다는 말입니다. 반야의 지혜는 제법공(諸法空)지혜입니다. 무아·무소유의 지혜입니다.

생각 생각에 제법공 지혜를 닦아 나가면서 상리법상(常離法相)이라, 항상 모든 법이 실제로 있다는 상을 여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할 때는 자유자재(自由自在) 종횡진득(縱橫盡得)이라, 아무런 막힘이 없이 자유자재하고 종횡으로 모두를 얻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 우리가 반야로 비추어 보아, 모든 법이 있다는 실아(實我) 실법(實法)을 떠나서, 즉 아공(我空) 법공(法空)이 되어서 볼 때는, 자유자재하고 이것이나 저것이나 모두를 다 얻는 것이기 때문에, 유하가립(有何可立)이리오, 무엇을 새삼스럽게 세울 것입니까?

평등무차별의 자리에서 볼 때는, 무엇을 어떻게 세울 수 가 없다는 말입니다. 일진법계(一眞法界)라, 천지우주가 바로 부처님 몸인데, 어떻게 어디에다가 무엇을 세우겠습니까?

 

* 자성자오(自性自悟)면 돈오돈수(頓悟頓修)라, 본래 내 성품을 내가 스스로 깨달아 버렸다는 말입니다. 나라고 생각할 때, 이 몸뚱이가 참 나가 아니지 않습니까? 스스로 자기 성품을 깨달으면 돈오돈수라, 여기에 돈오돈수의 말씀이 있습니다. 제가 널리 못 봐서 그 이전에는 잘 모르겠으나, 이것이 처음이라 생각합니다. 육조혜능 스님 말씀으로 분명히 돈오돈수가 있습니다.

 

* 돈오돈수하니 역무점차(亦無漸次)라, 돈오돈수가 되었으니 역시 점차가 없다 순서가 없고 높고 낮고 또는 어떠한 계급적인 차별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소이불립일체법(所以不立一切法)이라, 어느 한 가지 법도 세울 필요가 없다 말입니다.

 

* 제법적멸(諸法寂滅)하니, 유하차제(有何次第)리오, 제법이 본래 적멸해서 하나의 번뇌도 없거니, 어떻게 차제를 세울 것인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 돈오점수파라고 비판 받는 보조스님은 어떻게 말씀했는가? 보조어록(普照語錄)에 있는 보조스님의 돈오에 대한 해석입니다.

 

頓悟

凡夫迷時 四大爲身 妄想爲心 不知自己靈知是眞佛也…一念廻光 見自本性 而此性地 元無煩惱 無漏智性 本自具足 卽與諸佛 分毫不殊 故云頓悟也

-普照語錄-

 

“범부가 미혹 할 때는 지수화풍 사대를 몸으로 하고 망상을 마음으로 한다.” 우리 중생이 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대 원소로 합해진 이것을 자기 몸이라고 하고, 자기 망상을 자기 마음이라고 합니다.

“차별을 떠나서 신령스럽게 깨달은 자기 마음이 바로 참다운 부처임을 미처 모르다가, 밖으로 향하는 대상적인 생각을 돌이켜서 자기 본성을 볼 때에, 견성한 자리에서 볼 때는 원래 번뇌가 없고, 번뇌에 때 묻지 않은 지성(智性)이 본래 스스로 원만히 갖추어져 있다. 그리고 이 자리는 바로 부처와 더불어서 눈곱만큼도 차이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아는 것이 바로 돈오라 한다.”고 하였습니다.

 

* 보조 스님이 주장하는 점수는 무엇인가? 돈오를 알았으면, 어째서 또 점수를 말했던가? 보조스님이 점수를 말한 대목입니다.

 

漸修

頓悟本性 與不無殊 無始習氣 難卒敦除 故依悟而修 漸熏功成 長養聖胎 久久成聖 故云漸修也

-普照-

 

돈오본성이면 여불무수나, 문득 자기 본성을 깨달으면 부처와 더불어서 조금도 차이가 없지마는, 무시습기라, 과거 숙세 무시이래로 우리가 익혀 내려온 번뇌의 습기가 있다는 말입니다.

 

* 우리가 풀을 뽑지 못하고서 우듬지만 베어 버리면, 그냥 다시 또 뿌리가 나오듯 하는 것은 구생기(俱生起)번뇌입니다. 우리가 금생에 나와서 보고 듣고 생각하고 배우는 것은 분별기(分別起)번뇌입니다. 분별기 번뇌는 몰록 단박에 끊어졌다 하더라도, 구생기 번뇌는 전생과 더불어 지어온 본능적인 번뇌는 있는 것입니다.

 

* 우리는 해탈에 있어서 꼭 지혜 해탈과 선정 해탈을 분명히 구분하여 생각해야, 앞으로 공부하는 데 방황하지를 않습니다. 지혜 해탈과 선정 해탈을 분명히 모르면 암증선이라 암중모색을 합니다.

 

* 공부하는 우리 출가 사문들은 특히 수증(修證)문제, 어떻게 닦고 증할 것인가에 있어서 문득 부처와 더불어서 둘이 아니 자리를 깨달았다 하더라도, 무시습기라 과거 숙세 무시이래로 무시 무명으로부터 오염된 우리 본능을 꼭 생각해야 합니다.

 

* 저는 이렇게 나이가 벌써 황혼입니다마는, 그 무시(無始) 번뇌가 얼마나 깊은가를 그야말로 참 뼈저리게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무시습기가 난졸돈제(難卒頓除)라, 졸지에 문득 제거하기가 쉽지가 않다는 말입니다.

 

* “견도여파석(見道如破石)이요” 우리가 진리의 이치를 깨닫는 것은 돌을 깨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마치 돌을 깰 때는 순간에 파삭 깨지듯이, 견도 할 때도 문득 활연대오(豁然大悟)해서 훤히 깨달아 버려야 합니다. 하지만 “수도여우사(修道如藕絲)라” 우리가 연 뿌리를 딱 부러뜨리면 연 뿌리라는 것이 실이 있어서 그냥 안 부러뜨려집니다. 끈끈하니 실이 나옵니다. 그와 똑같이, 수도할 때도 쉽지가 않습니다. 수도도 돌 깨듯이 되는 것이 아니라, 습기를 녹일 때는 오랫동안 두고두고 녹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 습기, 이것은 졸지에 바로 제거할 수 없기 때문에 의오이수(依悟而修)라, 깨달음에 의지해서 닦는 다는 말입니다. 깨달은 그 자리에서 분별시비를 떠나서 닦는 무념수(無念修)입니다. 본래는 석가와 내가 각각 둘이 있는 것이 아닌 것이고, 달마와 내가 다른 것도 아닌 것이고, 석가가 높고 내가 낮은 것도 아닌 것입니다. 본래 분상에서는 둘이 없는 자리를 느끼고 닦는 것입니다. 이것을 무염오(無染汚)수행이라 합니다. 무념수와 무염오 수행은 같은 뜻입니다.

 

* 깨달음에 의지해서 닦으면, 점훈공성(漸薰功成)이라, 점치로 훈수(薰修)해서 공덕이 성취가 됩니다.

훈습은 번뇌가 우리 잠재의식에 가라앉는 것이고, 훈수는 우리가 부처님의 지혜로 해서 닦아나가는 것입니다. 그런 구분이 있습니다.

 

* 깨달은 그 자리를 안 놓치고서 닦아 나갈 때는 공덕이 성취가 되어서 장양성태(長養成胎)라, 성자의 태를 오랫동안 길러 나갑니다. 성인 자리에서는 자타·시비·구분이 다 없는 자리라고 우리가 분명히 느껴버리는 그런 성태를 두고두고 오랫동안 닦아 나가는 것입니다. 장양성태는 우리가 공부하는 분상에서 지킬 중요한 성구입니다. 사량 분별로 닦는 것이 아니라, 무염수로 닦는 수행을 성태장양이라 합니다.

이렇게 닦아 나갈 때는 구구성성(久久成聖)이라, 두고두고 일구월심으로 닦아 나가서, 비로소 참다운 구경지인 성인의 지위가 된다는 말입니다.

 

* 우리는 성자와 범부의 한계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문득 깨닫는 그 자리부터서 성자라고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진여불성 자리를 현관(現觀)이라 합니다. 바로 현전에 증명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그때는 벌써 성자입니다. 그러나 불지(佛地)를 성취한 성자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 습기 때문에 두고두고 일구월심으로 닦아야 참다운 구경각을 성취합니다. 그래서 고운점수(故云漸修)라, 고로 점차로 닦는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도리는 화엄경에서 말씀한 도리하고도 똑같고, 또는 달마부터서 육조까지의 말씀하고도 틀림이 없습니다.

다만 돈오돈수란 말도 단경에 있기 때문에, “돈오돈수하고 돈오점수는 근본적인 차이다” 이렇게 생각할는지 모르겠지만, 무염오 수행의 도리를 분명히 느낀다면, 하등의 논쟁거리가 될 만한 차별은 없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