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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2. 진리의 길

제2편 마음이 바로 부처요, 부처가 곧 마음인 것을(11)


 

 

 

범부를 넘어서 성자가 되는 길

 

 

* 부처님 법문의 대요(大要)는 안심법문입니다.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법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안락법문이 되겠습니다.

불법은 안심법문이라 공부를 편안하게 해야 할 것인데, 더러는 공부를 옹색하게 합니다. 그러한 것은 자기 존재에 대한 확실한 정견이 부족하고, 또는 존재의 실상을 파악하는 지혜가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반야바라밀을 이해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 우리 공부인에게 있어서, 특히 불법의 대요인 참선에 있어서 여러 가지 병폐가 많이 있지마는, 중요한 병폐를 들면 암증선(暗證禪)입니다. 공부 경계에 대한 불조의 가르침을 모르고, 어두운 가운데서 암중모색하는 참선을 말합니다.

 

* 진리라는 것은 과거 현재 미래를 떠나 있습니다. 내가 없다고 생각할 때는, 이것인가 저것인가 하는, 법이라는 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른바 실아실법(實我實法)이라 하여, 내가 있고 법이 있다는 것은 범부 소견입니다. ‘나’라는 실다운 것도 없고, 이것이다 저것이다, 좋다 궂다하는 시비분별의 법도 원래는 없습니다. 성자와 범부의 차이는 무엇인가 하면, 성자는 무아 무법입니다. 곧 아공(我空) 법공(法空)이 아니겠습니까?

 

* 불법은 소소한 인정으로는 얻을 수 없는 가르침입니다. 약득획보(若得獲寶)인댄, 방하피낭(放下皮囊)이라, 만약 마니보주 같은 보배를 얻으려고 할진댄, 가죽 주머니 같은 이 몸뚱이를 버리라는 말입니다.

 

* 전식득지(轉識得智)라, 우리 분별식(分別識)을 굴려 뒤집어 버려야 참다운 지혜, 본래면목 자리를 얻습니다. 이렇듯 그냥 상대적인 여느 생각으로 해서 얻을 수가 없습니다. 먹을 것 다 먹고 할 짓 다 하고, 세속적인 이른바 속제(俗諦)의 범주 내에서 속물근성으로 생활하다가는, 무상대도를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 저도, “제 평생 어떻게 살아왔는가?” 생각할 때는 참괴무참(慙愧無慙)합니다. 무던히 애는 쓴다고 했지마는, 그래도 역시 부끄러운 마음, 한탄하는 마음뿐입니다. 초범증성(超凡證聖)이 목격비요(目擊非遙)라, 범부를 넘어서 성자가 되는 그 길이 눈 깜짝할 동안에 있는 것이고, 절대로 멀지가 않습니다. 따라서 오재수유(悟在須臾)어니, 하번호수(何煩晧首)리오, 잠깐 동안에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니, 어찌 센 머리 날 때까지 수고롭게 할 것인가?

 

* 혜가 스님이 달마스님한테 “제 마음이 괴롭습니다. 제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십시오” 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안심법문의 기연(機緣) 아니겠습니까? 선의 기본 문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따라서 안심법문이 확실히 자기 것이 못되면, 참선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 우리는 근본불교 또는 대승불교 또는 조사선 도리, 이런 말 때문에 구속 받을 필요가 절대로 없습니다. 그런 말들은 과거 선지식들께서 그때그때 중생의 근기 따라서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어느 경우에는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가장 버리지 못한 곳이 지금 우리 한국의 불교 현실입니다.

 

* 우리 인간의 능력이 한계가 있다고 하면 불법이 아닙니다. 모두를 다 알 수 가 있고, 모두를 다 할 수 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본래면목은 그런 무한의 공덕장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성은 존엄스러운 것입니다. 본래면목 자리가 무엇을 알다 말고, 몸으로 하는 짓이 한계가 있다면, 불법의 일체종지(一切種智)라는 부사의한 공덕은 여법한 말씀이 못 될 수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