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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2. 진리의 길

제2편 마음이 바로 부처요, 부처가 곧 마음인 것을(12)


 

돈수와 점수의 유래(2)

 

* 頓漸

師謂衆曰 法本一宗 人有南北 法卽一種 見有遲疾 何名頓漸 法無頓漸 人有利鈍 故名頓漸

-壇經-

 

단경에는 점수라는 말이 없는 것인가? 단경에도 있습니다. 육조 대사가 대중을 위해서 말씀하시기를, “법은 본래 하나의 종지이지만, 다만 사람의 근기 따라서 남북이 있을 뿐이다.”고 하였습니다.

 

“법은 본래 하나의 성품이지만, 그 법[性品]을 보는[見性]것은 사람에 따라서 더딤과 빠름이 있다. 그러면 무엇이 돈(頓)이고 무엇이 점(漸)인가?” 무엇이 문득 아는 것이고 또는 점차 아는 것인가? “원래 법에 있어서는 돈법과 점법이 없으나, 사람의 근기에는 날카로움과 둔함이 있다. 고로 돈과 점이라는 말을 할 수 있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것을 볼 때에 육조혜능 스님 말씀이나, 말 표현에 지나치게 걸릴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대의를 알면 되는 것입니다.

 

* 그 다음은 돈점에 대해서 능엄경에 있는 말씀입니다.

 

頓漸

理卽頓悟 事非頓除 乘悟倂消 因次第而盡 -楞嚴經-

 

능엄경은 선수(禪髓)라고도 합니다. 이른바 선법의 골수란 뜻이지요. 능엄경에 있기를, “이즉돈오(理卽頓悟)라” 우주의 본체적인 원리는 문득 깨닫는다 하더라도, 우리가 불교를 교리적으로 공부할 때는, 이와 사를 구분하여 생각해야 하겠지요. 이사(理事)가 무애(無碍)라, 원래 둘이 아니겠지만, 중생차원에서 볼 때는 본질적인 이와 현상적인 사인데, “사비돈제(事非頓除)라, 현상적인 상대 유한적인 그런 문제는 문득 제거 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승오병소(乘悟倂消)”라, 깨달음에 편승해서 마치 바다를 건널 때 배를 타고 가야 건널 수가 있듯이, 깨달음에 편승해서 닦아 나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인차제이진(因次第而盡)이라” 차제에 따라서 다 끊어진다는 말입니다.

 

* 우리는 조사 어록이나 또는 선지식들 말씀을 들을 때는, 그 말씀을 경직된 마음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어째 그런가 하면, 조사 스님들 말씀은 으레 노파심정에서 우리 중생들이 그때그때 어떤 문제에 막혀 있는가? 무슨 문제에 고민하는가? 에 따라서 간절히 주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점수에 치우쳐서 자꾸만 계급을 따지고 고하 심천을 가리는 사람들한테는, 마땅히 돈오돈수로써 분별을 쳐부수어야 하겠지요. 그러나 “본래가 부처인데 닦을 것이 무엇이 있는가?” 하는 분들한테는 점차로 닦아 나가는 점수를 역설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도리를 느끼고서 법문을 이해해야 합니다.

 

* 견성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견성을 단경에서는 어떻게 말했는가?

 

見性

若悟自性 亦不立菩提涅槃 亦不立解脫知見 無一法可得 方能建立萬法 若解此意 亦名佛身

亦名菩提涅槃 亦名解脫知見 見性之立亦得 不立亦得 無滯無得 應用隨作 應語隨答 普見化身 不離自性 卽得自在 神通遊戱三昧 是名見性

-壇經-

“만일 자성을 깨달으면, 보리 열반이란 것도 세울 수가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의 평등무차별의 진여불성 세계인데, 보리고 열반이고 할 것이 있겠습니까? “또한 해탈지견(解脫知見)이라고도 할 필요도 없고, 어느 법이라고 특별히 내세울 필요도 없고, 진실로 일체 만법을 세울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이렇게 해석할 때에는, 바로 그것이 부처의 몸인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 또한 이것이 바로 보리고 열반이고 해탈지견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견성한 자리에는 어느 것도 가히 세울 것이 없기 때문에, 조금도 막힘이 없고 거리낌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는 짓 모두가 다 걸림이 없이 여법히 행동하고 또한 누가 물으면 조금도 걸림 없이 척척 진리에 맞게 대답하고, 또한 두루 화신을 나투어 상대적인 몸을 나타낸다 하더라도 자성을 떠나지 않고, 즉득자재 신통유희삼매(卽得自在神通遊戱三昧)라 모두가 다 조금도 조작이 없는 이른바 음운등등(任運騰騰), 등등임운(騰騰任運)이라는 말입니다.

 

* 우리 중생이 애쓰고 하는 것을 조작이라 하고, 깨달은 분들이 자기 마음대로 행해도 법도에 걸림이 없는 자리를 임운이라 합니다.

깨달은 분상에서는 임운등등 등등임운이라, 당당하지마는 조급도 막힘이 없고 누구한테 꿀릴 필요도 없다는 말입니다. 달마한테 꿀릴 필요도 없고, 석가한테 꿀릴 필요도 없다는 말입니다.

 

* 그러나 증오(證俉)를 했다 하더라도 불성(佛性)만 깨달았을 뿐인 것이지, 때 묻어 있는 다생겁래(多生劫來)의 습기까지는 다 못 녹였다는 그런 점은, 또 우리가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하겠지요.

시명견성(是名見性)이라, 이것이 바로 견성이라는 말입니다. 아무 것도 세울 것도 없고, 고하시비도 없는 임운등등, 등등임운으로 신통유희 삼매라, 이것이 참다운 견성이라는 말입니다. 같은 견성에도 견성한 그 자리, 근기 따라서 천차만별입니다. 그러기에 또 문제가 복잡합니다. 생각을 깊이 하시기 바랍니다.

 

* 견도에 대해서는 해심밀경 또는 지도론·유식론·구사론 등에 나와 있는 말씀입니다. 근본 불교에서는 사선근(四善根)의 최상위를 세제일법(世第一法)이라고 합니다. 사선근은 우리 범부가 견도 할 때까지 가는 과정을 구분해서, 사가행(四加行) 또는 사선근이라 합니다.

 

세제일법의 무간(無間)에, 세제일법과 견도자리 곧 깨달은 자리하고 사이가 없는 그런 순간 찰나의 자리에 무루(無漏)의 혜(慧)를 득하여, 때 묻지 않은 지혜를 얻어서 성체(聖諦)를 현관(現觀)함을 말합니다. 성체는 진여불성 자리입니다. 성체는 바로 여래·도 또는 열반, 다 같은 뜻이 됩니다. 현관이란 그냥 이치로 “아! 그렇구나!” 하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실지로 진여불성 곧 생명의 실상을 현전에서 보고 깨닫는다는 말입니다.

 

* 그냥 이치로 느껴서, 물리(物理)를 알아서 “아 그렇구나”하고 의심 없이 아는 것은 해오(解悟)라고 하는 것이고, 성체를 현전에서 분명히 깨닫는 것은 현관(現觀)이라 합니다.

곧 사선근의 가장 윗자리인 세제일법에서, 그 찰나에 때 묻지 않은 지혜를 얻어서 성체를 현전에 깨닫는 것이 견도라고 근본불교에서는 말하는 것입니다.

 

見道…大乘에서는 見道를 菩薩初地로 하고, 此地를 得함을 菩薩이 正性離生에 入한다고 한다. 能히 無漏智를 得하여, 法界에 達하고, 如來家에 生하며, 一切萬法이 一味平等한 心性임을 得함. 密敎에서는 三妄執을 여의고, 無漏의 正菩提心이 生하여, 出世의 功德을 成就함을 말한다.

-大乘義章-

 

대승에서는 견도를 화엄경의 십지에서 나온 보살 초지로 하고, 이 초지를 얻음을 보살이 정성리생(正性離生)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정성은 곧 우주의 본성으로, 정성이나 성성이나 같이 쓰입니다. 이생(離生)이란 이생인 범부를 떠난다는 말입니다. 우리 범부를 가리켜서 이생이라 합니다. 범부는 바로 못 보기 때문에 달리 봅니다.

 

* 견성하는 것은 바로 정성, 곧 성인 성품을 얻음과 동시에, 우리 범부의 이생을 떠난다는 말입니다. 범부성이 남아 있으면, 참다운 견성이 못되겠지요.

이 자리는 능히 무루지(無漏智)를, 번뇌에 때 묻지 않은 지혜를 얻어서 법계에 달합니다. 법계라 하면 한계 있는 것이 아니라, 온 천지 우주가 조금도 무차별인 세계입니다. 이런 법계에 달하고 여래가(如來家)에 생하며, 삼세제불의 경계에 난다는 말입니다.

여래가에 생하여 일체 만법이 일미평등한, 오직 한 맛의 평등한 심성임을 득함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견도(見道)입니다.

 

* 밀교(密敎)에서는 견도를 어떻게 말했는가 하면, “삼망집(三妄執)을 여의고, 무루의 정보리심(正菩提心)이 생하여, 출세의 공덕을 성취함”이라고 했습니다. 내나 탐진치 삼독심에 따르는 집착을 여의고, 때 묻지 않은 청정한 보리심을 생하여 출세의 공덕 즉 욕계·색계·무색계 삼계를 떠난 공덕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아무리 훑어본다 하더라도, 견성하고 견도하고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는 단경에 있는 견성자리와 해심밀경·지도론 또는 유식론·구사론에 나와 있는 견도라는 자리에서 얻는 성공덕이 차이가 있다고 볼 수가 없습니다.

 

* 깨달음도 그냥 한 깨달음으로 일률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심천(深淺)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悟)문제, 깨닫는 문제를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오는 심천으로 보아, 해오와 증오로 말합니다. 해오(解悟)는 사선근위(四善根位)에서 여실지해(如實知解)를 돈오함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지해는 반야지혜가 아니고, 그냥 범부지견(凡夫知見)이라는 말인 셈입니다. 범부의 지견으로 해서 돈오함이라, 여기에서는 사오(似悟)입니다. 즉 참다운 깨달음은 못 되는 상사각(相似覺)이라, 각에 닮은 각인 것이지, 본각(本覺)자리를 여실히 본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아직은 범부위(凡夫位)입니다. 성자 지위가 못 된다는 말입니다.

 

* 해오는 참다운 깨달음은 못 되겠지만, 물리를 알아서 불변수연(不變隨緣)이라, 원래 변치 않는 본체의 자리, 인연 따라서 변하는 수연 자리 또는 성상(性相)이라, 성품자리와 현상자리, 또는 체용(體用)이라, 본체자리와 활용자리 이런 것에 대해서 막힘이 없다는 말입니다. 상대나 절대나 그런 것에 관해서 막힘이 없는 것입니다. 이사무애도 알고 사사무애도 알고, 법의 해석은 별로 막힘이 없는 것입니다.

 

* 증오(證俉)는 체험적으로 진여불성 자리를 현관(現觀)해서 깨닫는 자리입니다.

견성하고 구경 성취한 묘각(妙覺)자리는 다시 더 배울 것이 없으니까 무학도(無學道)라 합니다. 이렇게 같은 깨달음도 해오와 증오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해오는 참다운 깨달음은 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 우리가 해오로 다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해오를 하고 다 됐다고 할 때는 대망어(大妄語)죄에 해당합니다. 비증(非證)을 증(證)으로 하고, 못 깨달음을 깨달았다 할 때는 사바라이죄(四波羅夷罪)라, 마땅히 자기나 남이나 암중모색하는 것을 깊이깊이 경계해야 합니다.

 

* 해오한 다음에는 증오를 위한 점수가 분명히 따라야 합니다. 또한 보살 초지에서 견도하고 견성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구경각이 아니기 때문에, 성불을 위해서 또 점수가 필요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해오한 뒤에는 필연적으로 증오를 위해서 점수를 해야 하고, 또한 증오한 뒤에도 증오 자체가 세존 같이 정각(正覺)자리를 다 원만하게 성취했다고 생각할 때는 모르거니와, 마땅히 성불을 위해서 점수를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증오한 다음에 점수가 없다고 하는 것은, 특수한 사람에 한하는 문제가 되겠지요.

 

* 今頓見者 已是多生漸熏而發現也 壇經云 法無頓漸 頓漸在機者 誠哉此理

-都序-

 

도서에 있는 말씀인데, “이제 문득 깨달은 자는, 이미 다생겁래에 점차로 닦아 옴이 있어서 금생에 발현하는 것이라.” 지금 돈오를 했다 하더라도, 금방 된 것이 아니라 과거에 점차로 닦아 온 공덕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단경에서 말하기를, 법은 본래 돈과 점이 없으나, 돈점은 그 근기에 있다는 이 이치가 진실로 귀중하고 소중하다”고 했습니다. 마땅히 이와 같이 돈오점수에 대해서 바로 해석을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