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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4. 금강륜

* 1985년7월31일 태안사 하계용맹정진 입제법문(2)


 

<불성공덕(佛性功德)>

 

우리는 그러면 먼저 부처님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 우리는 부처가 안 되어 봐서 모르겠습니다만, 부처가 안 되어봤다 하더라도 부처님 가르침, 그 뒤로 부처님 가르침을 부언 설명도 하고, 체험도 하신 그런 도인(道人)들의 가르침 따라서 우리가 부처님 마음을 생각해 본다고 합시다.

 

부처님 마음을 구체적으로 한 법문은 140불공법이라, 140종목으로 나누어서 부처님의 무량한 공덕(功德)을 말씀했단 말입니다. 부처님의 공덕은 한도 끝도 없습니다. 불경(佛經)에 보면 도를 성취한 아라한(阿羅漢)이 몇 수십만년을 두고서 부처님 공덕을 헤아린다 하더라도 부처님의 공덕을 다 말할 수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와 같은 것을 우리가 어떻게 몇 마디로 부처님 공덕을 다 말하겠습니까만 그런 공덕을 간추려서 140종으로 구분한 것이 있다 말입니다. 그것도 너무 많지요. 이 시간에 그걸 다 나열 할 수가 없지요. 헌데 더 간추려서 부처님 공덕을 말씀한 법문은, 그때는 18공덕이라,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이라. 일반 중생과 더불어서 할 수 없는 그런 부처님만이 가질 수 있는 그런 무량 공덕을 18종목으로 구분한 것이 있다 말입니다. 그것도 또 많아서 이 시간에 다 말씀을 드릴 수가 없지요.

 

<열반사덕(涅槃四德)>

 

가장 간추린 것이 무엇인가? 부처님의 무량공덕을 가장 간추린 법문이 열반사덕(涅槃四德)입니다. 열반이라는 것은 영생이나, 영생 해탈의 자유 그런 뜻이 열반(涅槃)입니다. 보통 열반에 든다 하면 죽는 다는 걸로 통용합니다만 열반의 본뜻은 영생(永生)한다. 불생불멸(不生不滅)한다는 말입니다.

 

영원히 존재한다. 또는 일체 번뇌를 떠난 경계다. 이것이 열반입니다. 그래서 열반사덕(涅槃四德)이라. 즉 부처님 경계를 다 간추려서 모든 공덕을 다 포함해서 간추리면 네 가지 속성 상락아정(常樂我淨)으로 구분 한단 말입니다.

 

한 가지는 항상상(常)자, 상(常)이라, 항상 부처님 생명은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떠나서 언제나 영원히 상주부동(常住不動)이라, 항시 부처님의 생명이 있단 말입니다. 그 다음은 락(樂)이라, 안락할락(樂)자, 일체 고난을 다 떠나서 그때는 영원히 안락스럽단 말입니다.

 

<환희장마니보적불(歡喜藏摩尼寶積佛)>

부처님 경계 가운데서, 영혼천도 할 때 제일 나중에 가서 환희장마니보적불(歡喜藏摩尼寶積佛)이라, 그런 부처님 명호(名號)를 욉니다. 환희장마니보적불이라 말입니다. 환희(歡喜)라는 것은 기쁘고 날뛰는 것이 환희 아니겠습니까. 환희심(歡喜心)이란 말입니다. 환희장(歡喜藏)이라. 장은 감출장(藏)자, 환희가 충만해 있다는 말입니다.

 

환희를 원만히 갖추고 있다 말입니다. 환희장마니(歡喜藏摩尼)라, 마니(摩尼)는 마니보주(摩尼寶珠), 마니는 무엇인가하면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보배, 즉 말하자면 여의주(如意珠)말입니다. 모든 것을 다 낼 수 있는 보배가 이것이 마니 보주입니다. 환희스러운 행복이 충만 되어 있고, 동시에 모두를 다 할 수 있는 그런 마니보주 같단 말입니다.

 

보적불(寶積佛)이라, 보배보(寶)자, 쌓을 적(積)자, 행복이나 자유스럽게 할 수 있는 능력이나, 이것을 보배같이 한도 없이 쌓여 있는 부처라, 그 뜻이 환희장마니보적불(歡喜藏摩尼寶積佛)입니다. 부처님 공덕은 이와 같이 끝도 갓도 없습니다. 이러한 안락스러운, 보통 우리가 재미지고, 기쁘고 한 정도가아니라, 최상의 행복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이런 중생계에만 기쁨이나 행복이 있지, 공부해서 올라가면 그 때는 무미건조해서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은 우리가 욕계를 떠나면 떠날수록 행복은 거기에 비례해서 행복은 더 가증이 됩니다. 그러한 안락무우(安樂無憂)하고 즉, 불교말로하면 극락(極樂)이라, 다시 위없는 행복만이 있단 말입니다.

 

그 다음은 나 아(我)자, 아덕(我德) 이것은 모두를 다 할 수 있단 말입니다. 모두를 다 할 수 있고, 모두를 다 알 수 있는 것이 불교의 아입니다. 불교말로하면 이것은 자재아(自在我)라, 모든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느끼는 아(我), 이것은 그냥 얽매이는 아(我)입니다만 깨달아서 영원으로 느끼는 그런 아, 즉 말하자면 대아(大我), 우리는 지금 소아(小我)입니다만 대아(大我)가 되면 그때는 자재아(自在我)라, 천지 우주의 모든 것을 마음대로 자재롭게 할 수 있다 말입니다. 신통(神通)도 하고 말입니다.

 

그 다음은 정(淨)이라, 맑을 정(淨)자, 정이란 말입니다. 그때는 조금도 번뇌(煩惱)가 없이, 오염된 더러움이 없이 청정(淸淨)하다 말입니다. 이와 같이 상주부동(常住不動)해서 언제나 영생(永生)하고, 적멸무위(寂滅無爲)해서 안락무우(安樂無憂)하고, 참다운 행복만이 충만하고, 또는 모두를 다 할 수가 있고, 알 수가 있고, 또는 청정(淸淨)해서 조금도 번뇌(煩惱)의 오염(汚染)된 흔적이 없고, 이러한 부처님 공덕을 다 합한 불성공덕(佛性功德)입니다.

 

이와 같은 것이 부처님한테는 곁들어 있습니다. 우주의 본바탕, 내 생명의 본질인 동시에, 우주 모든 존재의 본바탕은 부처님입니다. 부처님 가운데는 그와 같은 속성(屬性)이, 원래 본유(本有)라, 근본 본(本)자, 있을 유(有)자, 본래 갖추고 있습니다.

 

우리 불자는 지금 안 통해서 미처 그걸 모르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정직한 분이 부처님입니다. 제일 정직하고, 제일 성실한 분이 역시 석가모니(釋迦牟尼), 예수님, 공자(孔子)님 그런 성인들입니다. 성인들 말씀은 거짓말이 없습니다. 따라서 그런 분들이 앞서 말씀처럼 중생은 미쳐 못 봐서 모른다 하더라도, 그런 우리 본 성품(性品), 우리 자성(自性) 가운데는 그런 일체공덕이 본래 다 갖추어 있단 말입니다. 그것을 딱 믿어야 됩니다.

 

세상에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맛이 좋고, 또는 자기가 사귀고 싶은 좋은 사람을 사귀면 기분이 좋고, 감투가 올라가면 기분 좋고 하겠지요. 그런데 불성공덕이, 우리 자성 공덕이, 그런 기본 좋은 것들 보다 더 비교할 수 없이 안 좋으면 우리가 성불하기 위해서 갈려고 별 애를 안 씁니다. 비록 내 스스로 본 성품이 부처라 할지라도 그 부처한데 깃들인 그 공덕, 그 공덕이 시원찮으면 누가 거기에 갈려고 하겠습니까?

 

인간이 느끼는 오욕(五欲)에서, 오욕은 아시는 바와 같이 재(財),색(色),명(名),식(食),수(睡)입니다. 재물이라, 먹는 것이라, 또는 이성간의 색이라, 또는 자기 명망이 올라가서 감투를 쓰는 것이나, 또는 수면이나 이런 것들이 오욕입니다. 우리 중생은 오욕 가운데서 헤맵니다.

 

그런 것들이 물론 재미가 지겠지요. 몸뚱아리가 있으니까. 허나 그런 것을 추구하는 한에는 인간의 자유는 갖지는 못합니다. 헌데 우리가 우리의 불성 본성품인 그런 불성, 불성 이것은, 그런 오욕에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까 말씀처럼 환희장마니 보적불이라, 또는 환희광불(歡喜光佛)이란, 그런 말씀이 있단 말입니다. 우리는 따라서 지금 눈에는 안 보이지마는 제일 정직하고, 제일 바로 말씀하고, 바로 본 분이 말씀하신 그 가르침, 내가 지금 안 보이지만은 내 불성 가운데는 그런 무량공덕이 본래 갖추어져있다. 이걸 딱 믿어야 합니다. 그걸 딱 믿고서 그 공덕을 항시 자기가 자기 영상으로, 이미지로 간직한단 말입니다.

 

[이것이 무엇인가]화두를 생각해 봅시다. ‘이것이 무언가’ 화두는 육조단경(六祖壇經)에가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이것이 무엇인가 화두는 아실 것입니다만, 이 화두는 나한테 한 물건이 있는데 밝기는 해와 달 보다 더 밝고, 검기는 칠보다 더 검고, 또 하늘을 괴고 땅을 바쳐있다 말입니다.

 

나한테 무언가는 모르지만 한 물건이 있는데, 그 물건은 무엇인고 하면 밝기는 천지 일월보다 더 밝다 말입니다. 또 검기는 칠보다도 더 검단 말입니다. 또는 하늘을 괴이고 땅을 받쳤단 말입니다. 그러한 것이 나한데 항시 내가 움직이고 말하고 그런 가운데 항시 있지만은 미쳐 거두어 얻지 못하는 그 무엇이 무엇인가? 이것이 ‘이뭣고’ 화두입니다.

 

일체 화두는 조금씩 차이는 있다하더라도 모두가 다 그 무엇을 구하는 것입니다. 중생이 모르는 그 무엇, 그 무엇이 무엇인가? 그 무엇은 내 자성인 동시에 우주의 본성인 불성이란 말입니다. 그 무엇이라고 하든가, 불성이라 하든가 그것은 똑 같습니다. 내가 미처 구하지 못하는 내 생명의 본바탕, 그것을 우리가 구한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와 같이 미쳐 우리가 안 보이지마는 어떤 면으로 보나 완벽한 그 존재, 영생하는 존재, 행복에 충만한 존재, 그것이 소위 우리 본 성품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소중하니까 우리가 순교도하고, 자기 지위도 버리고, 또는 재물도 버리는 것입니다. 또는 우리가 금생에 비록 거기에 못 간다 하더라도 역시 딴 걸로 해서는 우리 마음의 불안을 메우질 못 합니다. 어떠한 것으로도 우리 마음의 불안을 메우지 못합니다. 동으로 가나 서로 가나 어디를 가나 우리 마음의 불안은 못 메웁니다. 오직 우리 마음의 본바탕, 우리 마음의 본 고향에 돌아 가야만이 비로소 우리 마음이 불안을 면합니다.

 

우리 범부는 고향을 읽어버린 사람들입니다. 내 고향은 어디인가? 이것은 우리가 떠나온 가장 시초의 근원적인 우리 고향, 이것은 역시 부처님입니다. 불성입니다. 따라서 불성을 스스로 우리가 체험을 못하면 우리 고향에는 못갑니다. 따라서 우리 불안 의식은 해소를 못 시킵니다.

 

우리는 더 이상 헤매지 말아야합니다. 비록 우리의 선근(善根)이 부족하고, 우리 노력이 게을러서 미처 못 간다 하더라도 방향 설정만은 우리가 옳게 해야 합니다. 우리 갈 고향은 역시 진리(眞理)인 행복(幸福)과 자비(慈悲)와 지혜(智慧)와, 그런 공덕(功德)을 다 갖춘 내 고향(故鄕), 거기를 가야 합니다. 이렇게 방향을 설정해 놓고서 그때그때 자기 힘 따라서 공부를 해야 씁니다.

 

<고향 소식을 환히 보듯이 느껴야 합니다.>

 

그런 방향을 설정한 뒤에, 가고자하는 열도가, 강하면 강할수록 그때는 할 수 없이 옷도 이와 같은 옷을 입어야하겠지요. 이와 같은 옷을 입고도 역시, 공연히 탐심이나 내고, 불룩 성이나 내고, 그러한 마음으로 해서는 고향에 못갑니다.

 

고향 가는 지름길, 이것이 참선입니다. 고향 가는 지름길, 우리는 지금 고향 가는, 불성이라고 하는 내 영원의 님(임), 거기 가는 지름길을 가고자해서 이렇게 더위에도 불구하고 모이신 것입니다. 따라서 그 마음가짐이 고향 소식을 환히 보듯이 느껴야 합니다. 맨 처음에는 빡빡하겠지요. 우리가 안 보이니까 말입니다. 허나 먼저 간 분들의 소식을 듣고서, 이미지로 해서 우리가 부각을 시킨단 말입니다.

 

<진공묘유(眞空妙有)>

 

고향 소식은 모두가 텅 비어서 다 공(空)이다. 헌데 다만 공이 아니라, 그 공 가운데는 또 뭣이 있단 말입니다. 불교말로하면 이것이 진공묘유(眞空妙有)이지요. 따라서 먼저 우리 마음의 고향에 가고자하는 참선(參禪) 수행자(修行者)는 먼저 모두가 다 비었다 하는 제법공(諸法空)을 느껴야 합니다.

 

내가 있고 네가 있고, 나무가 있고 이렇게 집이 있는데 왜 비었다고 할 것인가? 전자(電子)가 있고 양자(陽子)가 있는데 왜 비었느냐? 이렇게 말들을 합니다. 허나 사실은 있지가 않은 것입니다. 물질의 근원은 사실은 물질이 아닌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물리학자(物理學者)가 말했습니다.

 

우선 우리가 하나의 수소(水素)를 두고 봅시다. 수소는 양자하나, 그 주위에 전자 하나가 빙빙 도는 것이 수소 아닙니까. 또 탄소는 무엇인가? 탄소는 원자핵을 중심으로 전자가 6개가 빙빙 돕니다. 그러면 이러한 것을 생각해 본다고 우리가 생각할 때에, 이것이 양자와 전자와 결합된 인연 따라서 임시 간 이루어졌을 뿐입니다. 즉 말하면 인연생(因緣生)이라, 인연 따라서 하나의 일체 물질의 근원인 원자가 이루어 졌습니다.

 

우리 몸뚱아리는 무엇인가? 그런 것으로부터 이루어진 산소나 수소나 탄소 질소, 그런 것이 모여서 우리 몸을 구성 했습니다. 나무나 소<牛>나, 또는 일체 하늘에 있는 별이나, 모두가 다 전자와 양자로 구성된 그런 각 원소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있습니까. 헌데 그런 양자나 전자는 무엇인가? 이런 것을 지금 물리학적인 의미에서 파괴를 한다 해도 그것이 무엇인가 알 수가 없단 말입니다.

 

다만 광명(光明)의 흐름뿐이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말입니다. 지금 과학적 술어로 말하면 단지 장(場)만, 장만 결국 우주에 충만해 있다는 말입니다.

물질을 분석 하고 분석해서 쭉 들어가면, 끝에 가서는 하나의 장만 우주에 변만(遍滿)된 하나의 장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장으로 부터서 장이 어떻게 진동하는가? 어떻게 도는가? 거기 따라서 각 양자가 있고 전자가 있단 말입니다. 즉, 다시 말하면 우주는 텅 비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인간 만치 밖에는 못 봐서 그때는 무엇인가 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마치 누런 안경을 쓰고 보면 누렇게 보이고, 붉은 안경 쓰고 보면 모두가 붉게 보이듯이, 그러나 참말로 보면 그때는 그야말로 텅 빈 것인데, 가령 저 장(場), 우주의 근원적인 순수한 에너지, 그 걸 볼 수 있는 안경을 쓰고 본다면 그때는 우주가 텅 비어 있단 말입니다.

도인(道人)들 안목은 다만 불성만 보는 안목, 허기 때문에 그때는 우주를 다 불성으로 보신단 말입니다. 너요, 나요, 또는 붉다, 누렇다, 이런 것은 우리 인간이 인간의 업장(業障)을 쓰고 보니까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지금 안 보인다 하더라도 도인들의 가르침 따라서 우주가 텅 비어 있다. 일체(一切) 유위법(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뿐이다. 있는 것은 모두가 다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요, 거품이요 이와 같이 먼저 봐야 합니다.

 

나가 있다, 네가 있다. 이런 마음으로 해서는 공부를 못합니다. 차별을 못 넘어섭니다. 분명히 내가 있고 네가 있으면 그때는 미운 사람이 있고 좋은 사람이 있겠지요. 우리가 보는 것은 다만 우리 업장(業障)으로, 업장의 투사(投射)에 불과 합니다. 업장의 반영에 불과 합니다.

 

<부처의 안목을 내 안목으로 해야 참선입니다.>

우리는 실존(實存)을 못 봅니다. 비록 내가 안 보이지만 실존을, 실상(實相)을 본척하고서 보는 마음가짐으로 공부하는 것 이것이 참선입니다. 그냥 무식한 분들은 몽매한 분들은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만 적어도 참선한다. 내가 선(禪)을 한다. 이럴 때는 아까 말씀처럼 부처님의 안목을 내 안목으로 해야 그것이 참선입니다.

 

부처의 안목을 내 안목으로 할 수만 있다면 거기에 따르는 표현 방법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부르건,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부르건, 또는 무(無)자를 부르건, 그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마음이 부처님 불심(佛心)에 딱 안주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중생들은 불심을 못 보니까, 그런 우선 겉에 뜬 방법가지고서 이 방법이 최고다. 이것 아니면 배격을 합니다. 이렇게 되니까 각 종파가 분열 되고, 각 종교의 싸움이 생깁니다. 허나 근본적인 비록 종교의 분파야 기독교건, 또는 무슨 교건, 종교의 근본 진리, 거기다 마음을 두고서 그것만 우리가 딱 파악 한다 그러면 그때는 서로 싸울 리가 만무합니다. 표현이야 그때그때 시대나 개성 따라서 달리 표현 되겠지요.

 

그런데 우리 참선하는 사람들은 이런 말씀이 있어요. 부처를 구하되 부처에 착하지 말고, 법을 구하되 법에도 착하지 말라. 우리가 구하는 것은 부처 아닙니까. 가장 소중한 것이 부처인데 부처라는 그런 말에 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정도로 자유스럽게 공부하는 것이 참선입니다.

 

오직 문제는 내 마음의 본성만 문제로 합니다. 부처 역시 내 마음의 본성을 우선 가고자 해서 임시로 표현한 것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부처라는 말도 거기에 착하지 말고, 법이라는 말도 착하지 말고서 오직 문제는 결국은 인간이나 일체 우주의 본바탕인 ‘그 무엇’ 그 진리 그것만 문제시 한단 말입니다.

 

<영원의 이미지로 현실을 관찰하면 일체가 영원에 참여한다.>

제 말씀이 너무 길지요. 이런 말씀을 해도 한도 끝도 없습니다. 될수록 간추려서 말씀을 올립니다만, 아무튼 이와 같이 영원의 이미지를 탁 심어야 씁니다. 스피노자, 그분은 참 기독교도 신봉했지만, 불교를 독실이 공부한 분입니다. 그분이 이런 말씀을 했단 말입니다. ‘영원의 상, 영원의 이미지로 영원의 이미지에서 현실을 관찰하라’ 영원의 이미지로 현실을 관찰한다고 하면 일체가 영원에 참여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말씀을 했단 말입니다.

 

우리는 개성적인, 박아무개면 박아무개, 자기 주관대로 관찰합니다. 김아무개는 김아무개 자기 주관대로 관찰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서로 십인십색이라, 각기 자기 의견의 차이가 있다 말입니다. 헌데 우리는 비록 우리가 영원성에 미처 못가 있다 하더라도 성자의 가르침에 의해서 말입니다. 영원의 이미지로, 영원의 차원에서 우리가 관조(觀照)한다 말입니다.

 

부처는 아까 말씀처럼 일체를 다 공(空)으로 본다 말입니다. 그러나 다만 공이 아니라, 공 가운데는 심심미묘(甚深微妙)한 묘유(妙有)가 있다. 이렇게 본다 말입니다. 즉 일체만유를 부처님은 진공묘유로 봅니다. 따라서 진공묘유(眞空妙有)로 모두를 본다고 생각할 때에는 그것이 영원의 이미지입니다.

 

내가 있고 남이 있고, 이렇게 무수무량의 차별이 있다 하더라도 그런 것은 다 쓸어버리고서 모두가 다 바로 보면, 부처나 그런 성자가 본다면, 우주는 텅텅 빈 것인데, 그 텅텅 빈 가운데서 광명(光明)만 충만해 있다. 이렇게 보고서 영원의 이미지를 안 놓치는 것 이것이 참선 공부입니다.

 

비록 순간동안 느낀다 하더라도 순간 그것을 안 놓친다 말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우리가 비록 못 통한다 하더라도 영원의 이미지, 바로 보면 모두가 다 부처뿐이구나. 부처의 광명뿐이구나. 중생으로 보는 것은 우리가 잘 못 보는 것이지 모두가 다 부처구나. 우주가 텅텅 비어서 그 가운데는 부처가 충만 되어 있구나. 이와 같이 보는 그 마음을 애쓰고 우리가 지속시켜야 씁니다. 이것이 참선입니다.

순간만 느끼고 말면 그때는 다시 나쁜 버릇대로 나쁜 마음이 소생해 온다 말입니다. 나쁜 버릇이, 우리가 과거 전생에 업을 짓고, 금생에 잘 못 배우고, 잘 못 느끼고 한, 그 마음이 싹을 못 트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애쓰고, 바른 마음, 성자가 느낀 그 마음으로 지속시킨다 말입니다. 천지 우주는 다 부처뿐이구나, 천지 우주는 다 하나님 뿐이구나, 천지 우주는 광명 충만한, 찬란스런 광명 충만한 이것은 부처뿐이구나. 이 마음을 시시각각으로 앞생각 뒷생각 가운데 딴 생각이 끼지 않도록 까지 지속을 시킨다 말입니다. 이것이 참선 공부입니다.

 

부르는 것은 여러분들이 아버지라 부르건, 또는 관세음보살이라 부르건, 또는 무자를 부르건 상관이 없습니다. 부르는 것은 여러분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 다만 마음자세만, 마음 내용만 영원적인 진리, 거기다 마음을 딱 안주를 시킨다 말입니다.

 

이렇게 하셔서 이번에 짤막한 동안입니다만<4박5일> 그 동안에 꼭 자기 본 성품인 부처의 성품을 꼭 체험하셔서 아까 제가 말씀처럼 환희장마니보적불이라, 정말 환희, 행복이 충만 된 그러한 행복을 누리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말씀을 마칩니다.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