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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4. 금강륜

* 1985년7월31일 태안사 하계용맹정진 입제법문(3)


* 1985년8월1일 태안사 하계용맹정진 2일째

 

좌선(坐禪)과 삼매(三昧)

 

우리는 좌선(坐禪)하고 또는 삼매(三昧)라든가 그런 용어 때문에 다소 혼동을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선 용어상 문제를 대강 말씀을 드립니다. 과연 삼매(三昧)는 무엇이고, 또는 선(禪)은 무엇인가?

 

그런 것에 관해서 여기 보면 저렇게 말하고, 저기 보면 이렇게 말하는 것이니까 더러 혼동을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다. 헌데 우리가 대국적으로 생각할 때에 삼매(三昧)나 선정(禪定)은 똑같은 의미로 풀이가 됩니다. 물론 분석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때그때 복잡하니 풀이를 합니다만 우리는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선정이나 삼매나 똑같은 의미가 됩니다.

 

즉, 삼마발제(三摩跋提)라는 것이 인도말로 하면 삼마지(三摩地)인데, 우리는 중국으로 건너오면서 부터 삼매(三昧)라 합니다. 삼매가 무엇인가? 우리가 어떤 것이나 하나의 것에 몰두하는 것을 보고 삼매라고 말씀을 합니다. 가사 책에 몰두하면 독서삼매(讀書三昧)라 하듯이 어떤 것에 몰두하는 것을 가리켜서 삼매라 합니다.

 

따라서 비단 우리 불교뿐만 아니라 어떤 것이나 간에 자기 하고 싶은 것에다 자기 전 심력(心力)을 다 경주해서 몰두하는 그것보고 삼매라 합니다. 헌데 그러한 마음을 하나로 통일 시키는 삼매, 이러한 가운데서 우리 불교의 삼매가 가장 통일 되고, 가장 고차원의 정신을 집중하는 법입니다.

 

우리는 아는 바와 같이, 도교 계통의 그러한 정신을 통일하는 삼매법도 있습니다. 또는 기독교의 기도 모시는 그러한 걸로 해서 마음을 하나로 통일 시키는 법도 있습니다. 또는 요새 마인드콘트롤(Mind-Control)이나 그런 것도 역시 마음을 통일하는 삼매법의 하나입니다. 아무튼 하나의 경지(境地)에다 마음을 머물게 해서 집주하는 그것을 보고, 삼매라 하는 것입니다.

 

헌데 저번 시간에도 말씀을 했습니다만 불교의 참선은 그런 보통 삼매와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하면은, 불교의 수행법은 선오후수(先悟後修)라 하는, 먼저 우리가 비록 체험은 못했다 하더라도 부처의 경계, 우리의 목적경계, 소위 말하는 목적의식을 확립시킵니다. 이런데 가서 불교 참선과 다른 것과 차이가 있습니다.

비록 내가 아직 성불을 못했다 할지라도 부처가 된 셈 치고서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 자세가 부처가 된 셈 치고 하는, 그런데 불심을 떠나 버리면 그때 참다운 참선은 못 됩니다. 비록 지금 자기가 제아무리 미혹(迷惑) 되어 있다 하더라도, 자기 심리 상태는 ‘내 본 성품(性品)이 부처구나’ ‘나한테는 무량(無量)의 공덕(功德)이 있구나’ 그것을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다른 것도 그렇지만, 우리 참선은 특히 아주 고행적(苦行的)인 그런 우리 행동을 요하기 때문에, 생각해 보십시요만 몇 일이나, 몇 달이나, 몇 년이나 앉아서 우리가 배길 수가 있습니까? 강열한 희망이 없으면 그땐 못 배깁니다. 따라서 그렇게 할려면 먼저 자기한테 갖추고 있는 무량한 공덕(功德), 자기 본성이 갖추고 있는 그런 행복스러운 그런 여러 가지 가능성(可能性), 그것을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신(信)이 앞서야만이 우리가 참선(參禪)을 배겨낼 수가 있습니다. 자기 청춘도, 자기 가정도, 모두 뿌리 치고서 결연(結緣)해야 하고, 어떤 경우에는 대사일번(大死一番)이라, 자기 생명(生命)도 버려야 한다 말입니다.

우리는 듣건데 달마대사(達磨大師)의 9년 면벽(面壁)이라, 9년 동안도 소림사(少林寺) 석굴(石窟)에서 벽을 바라보고서 지냈다 말입니다.

남전보원(南泉普願) 스님은 30년 동안도 한 처소에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남양혜충(南陽慧忠)국사 역시 40년 동안 남양 백애산에서 움직이지 않고서 산에서 지냈다 말입니다. 이와 같은 이런 기운이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역시 자기 자성(自性). 내가 비록 못 깨달아서 모른다 하더라도 나한테는 무량(無量)의 공덕(功德)이 있다. 무량의 행복스런 그런 내 본 성품(性品)이 있다.

 

내가 깨달으면 영생(永生)한다. 하는 그런 불같은 신조(信條)가 먼저 앞서야 쓴 것 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그런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재주도 없고 또는 못 생기고 했다 하더라도 내 자성, 내 본 성품에 대한 믿음을 갖어야 합니다. 이것은 어거지입니다. 이것은 억지로 갖어야 합니다. 억지로 갖는다 하더라도 역시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그것이 억지로 안들어 갑니다.

 

지관타좌(只管打坐)하면, 심신탈락(心身脫落)이라!


옛 선(禪)의 말씀에 [지관타좌(只管打坐) 심신탈락(心身脫落)]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지관은 다만지(只)자, 대롱관(管)자, 이것이 지관인데 이것은 한문인데, 우리말로 풀이하면, 오로지란 뜻입니다. 타좌(打坐)라 때릴타(打)자, 앉을좌(坐)자, 앉아라! 오로지 앉아라!

 

영리한 사람은 편한 것을 좋아해서 오로지 않기를 싫어합니다. 그냥 머리로만 생각해서 머리로만 다 해버릴려고 합니다. 그래서는 참선은 못 합니다.바보같이 앉는 끈기가 필요합니다. 오로지 앉아라 . 지관타좌(只管打坐) 하면 심신탈락(心身脫落)이라, 몸신(身)자, 마음심(心)자, 벗을탈(脫)자, 떨어질락(落)자, 그렇게 해야만이 우리 몸에 배여 있는 번뇌(煩惱)의 습기(習氣). 우리 마음에 훈습(熏習) 돼 있는 마음의 훈기(薰氣)로 해서 차곡차곡 거기 흔적(痕迹)을 두는 그런 번뇌(煩惱) 이것이 떨어집니다.

앉다 보면 차근차근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자기 번뇌가 떨어집니다. 오로지 앉아라. 그러면 그대 몸에 있는 그런 습기. 그대 마음에 있는 번뇌가 떨어집니다. 따라서 좌선(坐禪)하는 분들은 먼저 무서운 신심(信心), 그 다음에는 오로지 앉아야 한다는 끈기가 필요합니다. 끈기 없이는 좌선을 못 합니다.

 

앞서 말씀처럼 달마대사(達磨大師)의 9년 면벽(面壁). 비록 우리가 9년 동안 석굴(石窟)에서 배길 정도로 못 지낸다 할지라도 적어도 역시 우리가 몇 년 간은 배긴다는 그런 기백(氣魄)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만이 좌선해서 명색이 육근청정(六根淸淨)이라, 우리 육근은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 즉, 우리 눈, 귀, 코, 입, 촉감 모두가 다 오염돼 있지 않습니까? 오염된 것이 우리의 눈,코,귀,입,촉감 이런 것인데, 이런 것이 청정하게 되어서 깨달음에 이르려면 그때는 오로지 앉아야 합니다.


자정작용(自淨作用)

 

자기도 모르게 차근차근 앙금이 가라앉습니다. 흐린 탁수(濁水)를 가만 두면 그때는 이제 시간이 경과 하면 앙금이 가라앉고 바닥이 훤히 보이죠. 부처님 당시에 어느 왕의 공주(公主)가 못가에서 놀다가 금패물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따라 온 종들이 그것을 건져내려고 못을 아무리 휘저어 봐도 그것이 안 나온다 말입니다. 그러니 이제 어디로 가버렸구나 하고, 이렇게 생각하고 그만두고서 모두가 들어와 버렸습니다.

 

 

나중에 종 하나가 어슬렁어슬렁 못 가에 가서 보니까 그때는 흐림이 앙금이 가라앉고서 맑은 바닥에 패물이 보인다 말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은 가만두면 가라 앉습니다 분별시비가. 내내야 우리 마음의 바닥은 부처입니다. 바닥이 나와야 쓸 것인데, 바닥이 안 나오는 것은 자꾸 분별시비하고, 나다 너다 하는 이런 여러 가지 차별 때문에 안 나옵니다.

 

그런데서 아까 말 한 바와 같이 지관타좌(只管打坐) 오로지 앉아라! 그러면은 심신탈락(心身脫落)이라, 그대 몸과 마음이 오염된 것이 가라앉고서, 그때는 참다운 우리 마음 저 변에 있는 불성(佛性)이 보입니다.

 

불교의 유심론(唯心論)

 

우리가 불교(佛敎) 심리학(心理學)에서 본다하더라도 우리 마음의 의식의 뿌리에는 말나식(末那識)이라.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 6의식(六意識), 우리 중생은 보통 6의식으로 쓰지 않습니까. 그 밑에 가서는 제7말나식(第七末那識)이 있습니다. 내내야 지금 심리학이 말하는 잠재의식(潛在意識)이 되겠지요. 불교에서 말할 때 말나식(末那識)까지는 오염이 되어 있습니다.

 

그다음 제8아뢰야식(第八阿賴耶識)이라, 아뢰야식은 불교 심리학에서는 정분(淨分), 염분(染分)이라, 청정한 부분, 또는 염분이라, 물들어서 오염된 부분, 이와 같이 나누어 보는 것인데, 제9암마라식(第九唵摩羅識)>이라, 제9암마라식은 청정(淸淨)해서 조금도 오염(汚染)되지 않았다 말입니다. 그러한 청정(淸淨)한 의식(意識), 그 진성(眞性)이 진여식(眞如識)이라, 부처란 말입니다.

 

따라서 어떤 누구나 간에 우리 마음 저변에는 부처가 있습니다. 그것이 여러가지 인과(因果)에 따라서 차근차근 오염(汚染)되어서 사람만치, 제9암마라식도 못 쓰고, 제8아뢰야식도 못 쓰고, 제 7말나식도 못 쓰고, 6식만 쓰는 사람의 존재인 것입니다.

천상(天上)이나, 지옥(地獄)이나, 아귀(餓鬼)나, 그런 모든 것이 다 의식(意識)의 수준(水準)입니다. 마음이라는 의식이 5식도 미처 못 쓰면 저런 식물(植物)이 되겠지요.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라, 5식만 쓰면 사람 아닌 동물(動物)이 되겠지요.

 

사람은 더욱 진화(進化) 되어 6의식 까지 씁니다. 신중(神衆)들은, 사람과 같은 그런 오염(汚染)된 몸을 갖지 않은, 조금 나은 몸을 갖은 신중들은 더욱 깊은 식을 씁니다. 부처는 다 써서 그때는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말나식(末那識), 또는 아뢰야식(阿賴耶識), 암마라식(唵摩羅識), 불식(佛識)까지 다 씁니다.

 

따라서 일체존재(一切存在)는 모두가 의식(意識)의 차원(次元)의 차이(差異)입니다. 의식을 보다 더 잘 쓰면, 원래 가지고 있는 의식을 깊이까지 다 쓰면 그때는 부처고, 조금 덜 쓰면 보살(菩薩), 연각(緣覺), 성문(聲聞) 그런다 말입니다. 이런 것은 불교(佛敎)에서는 명료(明了)하니, 불교의 유식론(唯識論)에서, 불교심리학은 유식론이라. 오직유(唯)자. 알식(識)자. 유식론인데, 유식론에서 말씀해 있습니다만, 현대 심리학에서도 역시 심층(深層) 심리학(心理學)에서는, [프로이드]는 조금만 말 했으나, [융] 같은 분은 상당히 깊이 말했습니다. 그 분은 불교를 공부 했으니까 말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좌선(坐禪) 이것이 심전(心田) 개발(開發)이라. 우리 마음 밭을 개발하고 개발해서 우리 마음의 저 밑창을 캐내는 작업입니다. 이런 가운데서 선(禪)이 최상(最上)의 길인데, 선(禪) 이라는 것은 아까도 말씀한 봐 우리 마음이 부처님의 영상(映像)을 떠나지 않아야 쓴다 말입니다. 따라서 부처님의 영상만 안 떠나면 불심(佛心)만 여이지 않으면 그때는 앉으나 서서나 누워서나 다 선(禪) 입니다. 다 참선(參禪)입니다. 앉아서나 누워서나 또는 길을 가며서나 다 참선입니다.

 

상행삼매(常行三昧)

 

따라서 상행삼매(常行三昧)라, 항상 걸으면서 하는 그런 삼매도 있습니다. 또는 상좌삼매(常坐三昧)라, 또는 항시 앉아서만 하는 좌선(坐禪)도 있습니다. 또는 반좌반행삼매(半坐半行三昧)라, 앉아서 반, 서서 반, 그렇게 하는 참선도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좌선(坐禪)하는 법이 제일 좋습니다. 좌선하는 법이 일체행법 가운데서 가장 안정(安定)된 법입니다. 따라서 불교 뿐 아니라 앞서 말한바와 같이 딴 종교 역시 안정된 모습을 취할 때는 이렇게 앉아서 하는 식으로 합니다.

 

가부좌(跏趺坐)는 일체여래지인(一切如來智印)

 

가부좌(跏趺坐)해서, 바로 앉는 이것이 가부좌 아닙니까. 불교에서 하는 좌선법이 가부좌인데, 가부좌해서 앉으면 그 모양이 정삼각형 모양이라, 물론 삼각형(三角形)의 각 변은 같지 않지만 하여간 이변(二邊)은 같습니다. 저변(低邊)만 다르고서, 하여간 정삼각형 비슷한 것인데, 이것보고 불교에서 일체여래지인(一切如來智印)이라 합니다.

 

불교는 상징(象徵)을 중요시 합니다. 정사각형(正四角形)을 그려놓고 그것을 지(地)라 합니다. 원형(圓形)을 동그랗게 그려놓고 수(水)라 합니다. 삼각형(三角形)을 화(火)라 합니다. 반원(半圓)을 보고는 풍(風)이라 합니다. 불교는 상징을 중요시 합니다. 굉장히 상징적인 것이 뜻이 깊습니다.

 

헌데 이와 같이 삼각형 이것은 불교에서 일체여래지인(一切如來智印)이라. 일체여래의 지혜(智慧)의 인(印)이라 말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정삼각형 모양 취하는 것이 우리한테 갖고 있는 불성(佛性)이 개발(開發)하기 가장 쉬운 법(法)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좌선하는 법이 일체 수행법(修行法) 가운데서 가장 안정되고 불성이 개발하기 쉬운 법이니까 이제 좌선(坐禪)을 주로 합니다.

 

그래서 용수보살(龍樹菩薩) 같은 제2의 석가(釋迦)라 할 정도로 위대한 분도 차가부좌자(此跏趺坐者:是跏趺坐者)라, 가부좌 이것은 무엇인가 하면은 최안온불피극(最安穩不疲極), 가장 안온스럽고 피로(疲勞)를 모른다 말입니다.

 

처음에 앉아 보면 그때는 조금 거북하지만 익숙해지면 가부좌법 같이 좋은 법이 없습니다. 이렇게 다 누워서는 하루 동안 못 베깁니다. 허나 가부좌 행습(行習)을 하면 앉아서는 하루나 이틀이나 베기는 것입니다. 훈련을 하면 모르겠습니다만 방금 말씀처럼 어떤 것도, 가사 우리가 걸어서 왔다 갔다 하는 법도 역시 그도 그걸로 만은 못 베깁니다. 그러나 이렇게 앉아서 하는 가부좌는 베길 수가 있습니다.

 

‘최안온불피극(最安穩不疲極)’이라, 가장 안온스럽고 피로를 모른다 말입니다. 따라서 ‘마왕견지(魔王見之) 기심수포(其心愁怖)’라, 마왕(魔王)이라는 것은 악마(惡魔)의 왕(王) 아닙니까.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는 분별시비(分別是非)나, 여러가지 망상(妄想)도 이것이 마왕입니다. ‘마왕견지’마왕이 있어서 우리를 본다 할 때에 가부좌하는 모습을 보면 ‘기심수포’라. 그 마음이 두렵다 말입니다.

 

우리는 과거세(過去世)에 좌선(坐禪)을 많이 안 해 온 분들이 있습니다. 과거세에 공부를 많이 한 분들은 금생에 척 들어앉으면 그냥 쭉 펴서 공부가 잘 돼지만, 과거에 참선을 익히지 않은 분은 앉으려면 굉장히 고역을 치룹니다. 허나 어거지로 꼭 해야 합니다. 어째 그런고 하면 아까 말씀마따나 ‘최안온불피극’인 동시에 몇 일이고, 몇 년이고 앉을 수 있는 방법은 이 법뿐이니까 말입니다. 이렇게 해야 만이 우리가 오랫동안, 달마스님같이 오랫동안 공부를 할 수가 있다 말입니다.

 

구생기번뇌(俱生起煩惱)

 

물론 오랫동안 하지 않고서 잠시간만 한다하더라도 그 효험(效驗)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역시 오래동안 해야만이 우리의 과거번뇌 금생번뇌가 녹아나 집니다. 우리는 ‘구생기번뇌(俱生起煩惱)’라, 함께구(俱), 날생(生)자, 일어날기(起)자, 우리 생과 더불어서 과거로부터 지어온 번뇌가 있다 말입니다.

 

우리의 몸으로 행동하고, 우리 입으로 말로하고. 우리 뜻으로 분별하고. 이런 것은 그때하면 그것이 순간 사라지지만은 흔적(痕迹)은 사라지지가 않습니다. 우리 마음 식(識)에다가 인상(印像)을 둔다 말입니다.

 

담배 피우는 사람은 자기 몸에다가 담배를 부벼서 피는 것은 아니지만은 자기 몸에서 담배냄새가 나는 것을 보십시요. 자기 호주머니에다 향(香)을 담은 사람은 자기 몸에 향을 바르지 않지만은 향기(香氣)가 풍깁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느 한마디의 말. 또는 행동 하나. 생각 하나를 한다 하면은 그냥 그런 것은 사라진다 하더라도 흔적(痕迹)은 안 사라집니다. 흔적 그것은 종자(種子)가 되어서 우리 의식에다가 흔적을 인상을 둔단 말입니다.

 

그것이 쌓이고 쌓여서 그때는 그것이 우리의 업장(業障)이 된다 말씀입니다. 우리 의식(意識)에는 어느 누구나가 다 같이 몇 만생 동안 쌓이고 쌓인 그런 훈습(熏習)된 업장이 있습니다. 인상을 둔 우리의 흔적이 있습니다.

 

따라서 금생(今生)에 태어난다 하더라도 그런 업장 때문에 금생에 우리 행동이 제한을 받습니다. 우리 타고나온 본 소질(素質)이나 그런 것은 모두가 다 훈습된 업장 때문에 그럽니다.

 

분별기번뇌(分別起煩惱)

 

금생에도 나와서 잘 못 배우고, 잘 못 듣고, 잘 못 생각하고, 이것이 또 흔적을 둔다 말입니다. 과거세(過去世)에 이러한 흔적(痕迹)을 둔 이것이 구생기번뇌(俱生起煩惱)라, 그 위에다가 금생(今生)에 이루어진 번뇌, 이것이 분별기번뇌(分別起煩惱)라.

 

우리는 이와 같이 과거세에 우리가 생과 더불어서 가지고 온 번뇌, 금생에 새삼스럽게 새로 지은 번뇌, 이런 번뇌를 다 떼야 만이 우리 마음의 본 바닥을 보는 것입니다. 헌데 우리가 금생에 지은 번뇌는 그냥 떼기가 쉬워도, 마치 하나의 억센 잡초가 있으면 잡초 우듬지는 베기가 쉽지만, 뿌리는 좀처럼 뽑기가 어렵듯이, 우리 번뇌 역시 금생에 배운 것은 조금만, 가사 나쁜 책을 많이 보았으면 딴 책을 보면 되겠지요. 소설을 많이 봐서 그에 따르는 번뇌가 많으면 철학서나 종교서적을 많이 읽으면 되겠지요.

 

이와 같이 금생에 지은 번뇌는 딴 행동이나 딴 것을 취하면 달리 바꿀 수가 있지만, 전생(前生)의 번뇌(煩惱), 우리 의식(意識)의 저 밑에 까지 깔려있는 구생기번뇌(俱生起煩惱) 깊은 번뇌는 좀처럼 안 됩니다. 견성(見性) 오도(悟道)한 도인(道人)도 차근차근 점차로 떼는 것이지 갑자기는 못 뗀다고 합니다.

 

마치 불교에서 표현할 때 ‘견도여파석(見道如破石)’이요, 금생에 지은 번뇌는 최파(摧破)할 때에, 끊어 버릴 때에 마치 돌을 탁치면 순간에 금이 가듯이, 금생에 지은 번뇌는 우리가 법성(法性)을 보면 즉시에 끊어지지만, 구생기번뇌(俱生起煩惱)라, 생과 더불어서 온 번뇌는 그냥 두고두고 마치 ‘수도여우사(修道如藕絲)’라, 마치 연뿌리를 떼려면 잘 안 떼어지지요 질겨서 말입니다. 연뿌리를 떼는 것과 마찬가지로 전생에 지은 번뇌는 떼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불성(佛性)에 사무칠 라면 정작 우리가 앞서 말한 참다운 자유인(自由人)이 되고, 참다운 해탈(解脫)의 성자(聖者)가 되기 위해서는 싫으나 좋으나 간에 아무 때고 그런 번뇌는 떼야 합니다. 못 떼면 우리가 윤회(輪廻) 바퀴에 짓눌려 고통을 받는다 말입니다.

 

우리가 일상적(日常的)으로 공부를 해야 합니다. 우리 스님들만 공부할 것이 아니라 재가(在家) 불자(佛子)들도 마땅히 공부를 해야 합니다. 허나 아무리 선량한 불자라 할지라도 집안에서 일상적인 생활을 못 벗어나면 윤회를 벗어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몇 십만 생을 지나도 윤회를 벗어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여러분이 공부하시면 직감(直感)하실 것입니다. 윤회 벗어나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싫으나 좋으나 간에 우리는 꼭 아까 말한바와 같이 금생에 지은 분별기번뇌, 과거 무량생에 지어온 구생기번뇌. 이 번뇌를 우리가 끊어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큰일이고 대사(大事)입니다. 중생(衆生)들은 이러한 것을 너무나 소홀히 하고 외면합니다.

 

좌체우용(左體右用)의 조신법(調身法)

너무 또 그냥 관념적인 말에 치우쳐 갑니다만, 그러면 이러한 제일 소중한 공부하기에 피로(疲勞)도 모르고 또는 하기 쉬운 좌선(坐禪)은 어떻게 할 것인가 말입니다. 먼저 앉는 것이죠. 다리 모양은 좌체우용(左體右用)이라. 좌측은 근본 체에 해당하고, 오른 편은 쓸용(用)자, 우용(右用)이라, 우측은 용에 해당한다 말입니다. 즉, 좌측은 가만있고 오른 편은 활동한단 말입니다.

 

따라서 좌선(坐禪)은 가만히 있어야 하기 때문에, 활동(活動)을 금지(禁止)하고 조용히 있어야 하기 때문에, 먼저 움직이지 않는 왼쪽으로, 움직이고자 하는 오른쪽을 딱 누른다 말입니다. 이것이 쉽습니다. 이것이 불교말로 길상좌(吉祥坐)라. 상서롭고 좋다는 것이 길상 아닙니까? 이렇게 하는 것은 보통 쉽습니다.

 

또한 항마좌(降魔坐)라, 마치 마구니를 최파(摧破)한 자세란 말입니다. 항마좌라, 왼발로 오른발을 딱 누르는 것은 고요한 정(靜)을 가지고 동(動)을 누르는 것이니 항마좌라. 우리 참선(參禪)할 때는 활동(活動)을 하는 것을 보고 마(魔)라 합니다. 활동해서는 그때는 안 되니까 말입니다.

 

금생에 너무 분별(分別)시비(是非)하고 활동(活動)을 너무 많이 해서 우리 번뇌(煩惱)가 많은 것인데, 우리는 근본으로 회귀(回歸)하는 내내야 근본(根本) 고향(故鄕)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에 동하지 않은 정(靜)으로, 고요한 것으로 해서 동(動)을 딱 누른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항마좌라.

 

이것은 쉽습니다만 원래의 근본적인 가부좌(跏趺坐)는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결가부좌(結跏趺坐)는

 

좀 복잡합니다만 오른발을 왼쪽 허벅지에 딱 누릅니다. 그리고 반대로 왼발을 오른쪽에 딱 누릅니다. 항시 이렇게 하면 굉장히 좋은 것입니다. 이렇게만 앉으면 척추(脊椎)가 절로 펴지고 참 좋은 것이지만, 대체로 한국인(韓國人)들은 다리가 짧아서 이렇게 하기가 어렵습니다. 너무 아프면 싫증나서 안 되니까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억지로 할 필요는 없고, 아까 제가 말한 쉬운 방법으로 마군(魔軍)을 조복(調伏)시키는 ‘항마좌(降魔坐)’항복할항(降)자, 마구니마(魔)자, 앉을좌(坐)자, 이렇게 해서 고요한 체(體)로 해서 움직이는 마(魔), 즉 동(動)을 딱 누른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주: 큰스님이 직접 시범을 보이시면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글만 가지고는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

 

이것도 역시 너무 고집 피울 것 없이 다리가 아프면 바꾸어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는 오른편의 다리를 왼쪽 고요한 것으로 해서 딱 눌러 버립니다. 활동(活動)을 못하게 말입니다.

 

손도 역시 왼손을 오른쪽 위에 놓습니다. 엄지손가락은 가만히 타원형(橢圓形)으로 합니다. 너무 꽉 하면 긴장 되서 안 됩니다. 이렇게 하는 동정(動靜)이 하나로 합쳐져서 음양(陰陽)이 조화(調和)가 됩니다. 그러나 너무 더운 때는 답답하니까 이렇게 해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원칙만은 우리가 알아두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