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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4. 금강륜

* 1985년7월31일 태안사 하계용맹정진 입제법문(1)


 

* 본 법문은 청화큰스님이 1985년 태안사에 오셔서 삼년결사를 결행하시기 전에 하안거동안 사부대중들과 함께 4박5일의 용맹정진을 감행하시면서 참선에 대한 주옥같은 법문을 하루 한 시간씩 5번을 하신 것으로 참선에 대한 모든 것이 들어 있습니다. 먼저 첫날 입제법문을 정리하였습니다.

 

큰스님의 뜻을 왜곡 시킬 가 두려워서 문어체로 윤문하지 않고 구어체 그대로 옮겼습니다. 1985년 7월 31일 큰스님 육성법문을 같이 들으시면서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큰스님 계실 적에 몇몇 분들이<해인, 법륜행> 펜글씨로 녹취한 것을 참고 하였습니다

2016년 2월 7일 본정 합장

 

 

참선은 무엇이며 어떻게 합니까?

 

<참다운 해방, 해탈의 자유>

 

오늘 같이 삼복더위에는 더위에서의 해방(解放), 더위에서의 해탈(解脫)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폭서(暴暑)를 떠날 것인가? 그러한 더위의 해방을 갈망(渴望)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추울 때는 추위에서 해방, 또는 무슨 정치나 그런 제도면의 제약에서는 그런 제약의 해방, 이러한 것을 갈구하는 마음이 우리한테는 누구나가 있습니다.

 

이런 것을 통털어서 본다고 생각할 때에 우리 인간의 희구(希求)하는 마음 가운데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무어라고 해도 자유(自由)입니다. 인류역사 이래 자유 같이 매력 있는 말도 없고, 자유를 위해서 무수한 사람들이 노력도 하고, 희생(犧牲)도 당해 왔습니다. 허나 자유를 구하고 추구하는 자세가 진리(眞理)에 별로 맞지가 않았단 말입니다.

 

이러한데서 자유를 구하지만은 참다운 자유를 구하지도 못하고, 인류사회의 해악이나 그런 모순은 더욱더 가중(加重)되는 그런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를 본다하더라도 몹시 자유를 애타게 구합니다. 헌데 그와 같이 구하는 것은 그렇게 열열 하지만 어째서 자유스럽게 못되는 것인가?

이것은 자유를 구하는 방향(方向)이 잘못되어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구하는 자유는 한도 끝도 없는 것인데, 구하는 자유는 한도 끝도 없고,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자유는 상대유한적(相對有限的)인 사회에서 한정(限定) 되어 있단 말입니다. 헌데 사람들은 한정이 있는 그 가운데서 구하려고만 합니다. 그러니까 안 됩니다.

 

한정이 없는 우리 마음에서 구하려고 하면은 그때는 구할 수가 있는 것인데 마음에서 구하는 것은 저만치 밀어두고서 우선 풍요한 물질, 생활의 편리, 우리 몸뚱아리의 안전, 그런 방향에서 구하려고 하니까 자유가 잘 구해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다시 바꿔서 말씀하면 성자(聖者)의 가르침, 성인(聖人)들은 우리 주변에서 자유를 구하지 않고 마음에서 구하는 그런 쪽으로 우리 자유를 추구도 하고 본인들이 다 자유를 완전히 그분들은 터득도하고 우리한테 교시(敎示)를 하신 것입니다.

 

허나 사람들은 그렇지 않고서 그냥 겉으로 구한단 말입니다. 겉으로 구하는 한에는 자기 마음의 평화(平和)도 얻을 수 없고, 따라서 가정(家庭)의 화합(和合)이나 우리 사회(社會)의 복지(福祉)나 그런 것도 우리가 바랄 수가 없습니다. 오늘 같이 더운 날은 앞서 말씀마따나 우선 우리가 더위로 부터서 해방을 바란단 말입니다. 더워서 숨이 컥컥 막힐 정도로 삼복더위는 우리를 괴롭힙니다만 그보다 또 역시 가장 뜨거운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인간의 마음의 열뇌(熱惱)입니다. 인간의 마음의 번뇌(煩惱)입니다. 우리가 더러는 심장병(心臟病)도 생기고, 우리가 그런 몹쓸 병이 생깁니다만, 보통 그런 병은 우리 가슴이 타서 그럽니다. 욕구불만(欲求不滿)이 되어서 그럽니다.

 

청량삼매(淸涼三昧)라!

우리 가슴이 시원하고, 어떤 경우에 처한다고 하더라도 항시 쾌적한 마음이 되면 그때는 그런 몹쓸 병은 생기지가 않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아사세왕(阿闍世王)이 있었습니다. 빈바사라왕(頻婆娑羅王)의 왕자로 태어나서 자기 아버지를 유폐(幽閉:가두고)하고 아버지를 시혐(猜嫌:시기하고 싫어함)도 하고 말입니다. 자기 어머니마저도 유폐한 사람 아닙니까. 그런 참 극악무도(極惡無道)한 사람인데, 아사세왕은 그와 같이 극악무도하기 때문에 그런 과보(果報)로 해서 몸에 가서 인두창(咽頭瘡)이라는 아주 난치의 종기가 생겼단 말입니다.

 

물론 자기 아버지 왕위를 찬탈해서 왕이 되었으니까, 그리고 그 당시에 마가타국(摩伽陀國)은 인도(印度)에서 가장 큰 나라입니다. 따라서 약도 맘대로 구할 수가 있고 또는 명의(名醫)도 많이 구할 수가 있었겠지요. 허나 무슨 약을 쓰나 아무리 훌륭한 명의한테 물어봐서 병을 고치려고해도 어떻게 고칠 수가 없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기바(耆婆)존자는 부처님의 시의(侍醫)입니다. 부처님의 시의이고, 또 아사세왕(阿闍世王)과는 이복형제간입니다. 동시에 그 당시엔 대신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사세왕이 기바한데 상의를 했단 말입니다. 그대는 명의이고, 위대한 인물인데, 과연 난치의 병을 어떻게 나을 것인가? 이렇게 물었단 말입니다. 역시 기바(耆婆)는 신심(信心)도 있고 왕을 숭상(崇尙)한지라.

 

대왕이시여! 대왕의 병을 마음병입니다. 대왕의 병은 업장(業障)의 과보입니다. 업장의 과보로 해서 난 병은 먼저 참회(懺悔)를 해야 합니다.

 

<참회공덕(懺悔功德)>

 

우리는 공부할 때에 참회공덕을 소홀히 합니다만 참회공덕은 굉장히 큰 것입니다. 참회를 하면 그때에는 가사 우리 업장이 무겁다 하더라도 과거 숙세에 우리가 선근(善根)이 부족해서 묵은 업장을 지었다 하더라도 전중경수(轉重輕受)라, 무거운 것을 돌이켜 가볍게 간단 말입니다.

 

또한 동시에 참회가 사무치면 그때는 우리 업장도 소멸시킨단 말입니다. 그와 같이 참회공덕(懺悔功德)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기도(祈禱)를 모시나 또는 참선(參禪)을 하나 먼저 참회를 해야 합니다. 저 같은 사람은 맨 처음에 승려로 해서 입산(入山)했을 때에 백양사(白羊寺) 운문암(雲門庵)으로 한 것인데, 운문암식은 여름이나 겨울이나 이와 같이 3개월 동안 공부할 때는 먼저 일주일 동안 참회를 시킵니다. 일주일 동안 팔뚝에다 불을 놓고서 연비를 해가지고 참회를 시킵니다.

 

그래서 그런 흉터가 지금도 이런데 가서 있습니다만, 일주일 동안 불을 놓고 참회를 시키니까 처음에는 잘 모르지만, 정말로 자기 살이 타들어 가는데 그때 느끼는 기분, 처음에는 뜨겁지만 참회의 눈물이 나올 때는 그때는 뜨겁지가 않습니다. 선(禪)의 법문(法門)에도 심두(心頭)를 멸각(滅却)하면은 불도 오히려 써늘하다.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마음만 깨달으면 불도 오히려 서늘하다는 것입니다. 저 우리 불성(佛性)에는 우리 자성(自性), 불성(佛性)에는 뜨거움도 없고 찬 것도 없습니다.

 

다만 중생의 제한된 업장 따라서 찬 것을 느끼고 뜨거움을 느낍니다. 따라서 심두멸각하면, 우리 마음으로 초월할 수 있는 기운이 있다고 하면은 그때는 불도 오히려 따갑지가 않단 말입니다. 기합을 하는 사람들이 기합을 넣고서 칼로 툭 찔러도 피가 안 나오는 것을 보십시오.

 

기바(耆婆)가 그와 같이 ‘대왕의 병은 참회를 해야 합니다’하니까. 아사세왕도 역시 제바달다(提婆達多) 꼬임에 넘어가서 자기가 나쁜 짓도 많이 하고, 자기 부모님, 아버지를 시해하고 어머니를 유폐를 시켰으니까. 또 세존(世尊)을 배반해서 제바를 따랐으니까 그 죄가 얼마나 막중합니까. 자기도 사람인지라 그때는 느끼겠지요. 자기 몸이 그와 같이 병고 때문에 시달리니까 느낀단 말입니다. 그래서 정말로 참, 진정으로 참회를 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의 이렇게 무거운 죄를, 도저히 저의 무거운 죄가 면(免)할 수 없습니다만, 면할 수 없다 하더라도, 저는 참회를 안 할 수 없습니다’하고서 참회를 했단 말입니다.

 

우리 부처님께서는 시방삼세(十方三世)를 두루 보십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께서는 우주(宇宙)에 충만(充滿) 되어져 있는, 우주 생명(生命)자체인 법신(法身) 부처님과 똑같습니다. 저 하늘 끝에서 누가 생각을 한다고 하면은 그 순간 부처님은 감응을 받는 것입니다. 어디가 있으나 모두가 부처님 손안에 있습니다. 우주는 바로 부처님이십니다. 우주의 참다운 생명을 그대로 깨달은 분이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이십니다. 부처님께서는 아사세왕이 참회하신 것을 알으셨단 말입니다.

 

 

<애월삼매(愛月三昧)>

 

그래서 애월삼매(愛月三昧)라, 사랑애(愛)자 달월(月)자 말입니다. 태양(太陽)이 비록 좋고 관음화신(觀音化身)이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태양이 없이는 못살지만은, 우리가 더울 때는 태양보다도 도리어 달이 더 좋습니다. 달밤이 아무리 덥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이 얼마나 쾌적합니까. 그런데 애월삼매라, 자기 앞에 달을 훤히 관조(觀照)할 수 있는 삼매에 척 든다 말입니다.

 

일반 중생은 들 수가 없습니다만 부처님께서는 그런 애월삼매에 딱 드십니다. 딱 들으시고서 어느 누구한테 애월삼매의 광명을 보내야 하겠다 하시면 그 사람한테 애월삼매의 서늘한 아주 청량(淸涼)한 광명(光明)을 보낸단 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애월삼매에 드셔서 아사세왕한테 애월삼매의 그런 광명을 보냈단 말입니다. 그런 서늘한 광명이 아사세왕의 그런 열뇌(熱惱), 어쩌지 못하는, 그러한 업장 때문에 든 그런 종기 병인지라, 이윽고 얼마 안 가서 그 종기 병이 사르르 가셔간단 말입니다.

 

지금 렌트겐 광선이나 레이저 광선 가지고 사람 병도 낫는 걸 보세요. 지금 신문을 보면 레이저 광선으로 해서 공중에 뜬 위성도 결국은 추락을 시킬 수 있다는 그런 연구를 한다고 합니다. 일반 상대유한적인 물리적 광명도 그와 같이 위대한 힘을 내는 것입니다.

 

헌데 불성광명(佛性光明)은 그러한 물리적 광명보다 훨씬 더 위대하고 근원적인 광명입니다. 불성은 물리적 광명과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유정무정(有情無情) 유상무상(有相無相) 일체존재(一切存在)의 근본적인 근본생명(根本生命) 이것이 부처님 광명입니다.

 

따라서 거기에 안주해 있는, 거기에 머물러 있는 부처님께서 광명을 보내신단 말입니다. 뜨거움도, 또는 추움도, 선도 악도 다 초월(超越)한 영원히 상주하는 그 광명(光明), 일체 행복(幸福)과 일체 자비(慈悲)와 지혜(智慧)를 다 갖춘 광명, 그런 광명을 보낸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순식간에 아사세왕의 그런 몹쓸 병이 그때는 나아버린단 말입니다.

 

 

그래서 아사세왕은 병이 쾌유가 되어서 나중에는 그야말로 호법왕(護法王)이라, 부처님 법을 지키는 호법의 법을 수호하는 왕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더운 때도 역시 어느 누군가가 애월삼매에 턱 들어서 그런 광명을 보낸다고 하면은 이런 선풍기를 부착할 아무런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아무튼 이와 같이 우리 인간은 해방을 구합니다. 뜨거움에서의 해방, 이런 해방을 구해 마지않습니다. 헌데 앞서 제가 말씀마따나 비록 우리가 외형적으로, 물량도 좀 풍부하게 할 수가 있는 것이고, 음식도 좀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것이고, 또는 이성도 어느 정도는 추구할 수 있는 것이고, 또는 자기 지위도 역시 자기 노력 따라서는 어느 정도는 추구할 수는 있습니다만 그런 걸로 해서는 인간의 만족을 못 채웁니다.

 

앞서 말씀처럼 우리 마음의 번뇌를 끊는 것 외에는 참다운 자유는 우리가 못 채웁니다. 학생들이 제아무리 데모를 하고 애쓴다 하더라도, 악을 쓰고 다 부숴버린다 하더라도 역시 한 정부를 전복한다 하더라도 역시 그것으로 해서는 인간의 자유는 얻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에 도사리고 있는 그런 번뇌, 탐욕심(貪欲心) 또는 성내는 진심(瞋心), 어리석은 치심(癡心), 이것을 안 떼어버리는 한에는 인간의 자유는 얻지를 못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 자유라 하는 것이 일류역사 이후에 가장 소중한 말, 가장 매력 있는 말이지만, 그걸 추구하기 위해서는 아까 말씀처럼 우리 마음의 번뇌, 우리 마음의 무지(無智), 무명(無明)을 떼는 방도 외는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방향을 바로 설정해 놓고서 그 다음 문제로 해서, 제도(制度)면이나 무엇이나 생각을 하면 그것이 그르쳐지지가 않는 것인데, 가장 근원적인 줄기는 잊어버리고서 이파리나 가지만 가지고 애쓰니까 그때는 될 리가 만무합니다.

 

어떻게 해서 우리 마음의 번뇌, 우리 마음의 그 뜨거운 열뇌, 사람이 병드는 원인으로 해서 404병의 원인을 말씀한 경도 있습니다만 그런 우리 병의 원인 가운데서 앞서 제가 언급도 했습니다만, 욕구불만(欲求不滿)이라, 욕심이 사무쳐서 그런 뜨거운 욕심 때문에 난 병도 많이 있습니다. 또 성이 사무처서, 저놈 곧 미운 놈이니까 때려버렸으면 쓰겠다. 그런데 못 때리고서, 성내는 마음이 사무치는데 그걸 참는단 말입니다. 그런 것을 못 참아서 나는 병도 있습니다. 또 진리를 바로 못 봐서 이렇게 저렇게 헤매는 분별 시비하는 무지의 병도 있습니다.

 

우리가 동의보감(東醫寶鑑)이라고 하면 이것은 의술의 원전 같은 귀중한 책 아닙니까. 이 책에는 이런 것이 있습니다. 이 책은 주로 인간의 병을 말한 책 아닙니까마는 [심란즉병생(心亂卽病生)]하고, 마음이 산란스러우면 그때는 병이 생기고, [심정즉병자유(心定卽病自癒)]라, 마음이 안정되면 병이 스스로 차차 낫는단 말입니다. 물론 어느 정도 한계는 있다 하더라도 역시 주로 인간에서 발생되는 병들은 대체로는 마음병에서 기인됩니다.

 

<심즉시불(心卽是佛)>

 

지금 여러분들은 마음의 실상(實相)을 아직 파악하지 못한 분들이 많이 계셔놔서 불교에서 말하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이 말을 잘 안 믿습니다. 모두가 다 마음뿐이다. 모두가 다 마음으로 이루어진다. 이 말을 잘 안 믿는단 말입니다. 허나 사실은 모두가 다 마음으로 이루어 졌습니다.

 

태초 개벽 이후로 부터서 마음으로 이루어 졌습니다. 개벽 이전도 역시, 개벽이전에 우주가 생성되기 전에, 텅텅 무애한 그런 공간 속에서도 역시 마음의 본성은 그대로 상주해 있습니다.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고 비록 우주의 변천이 있다하더라도 마음이라는 그런 성품, 우주의 본 순수에너지, 그것은 멸(滅)치가 않습니다. 그것은 불생불멸(不生不滅)입니다.

 

천지(天地)가 몇 번 바꿔져서 성주괴공(成住壞空)이라, 천체가 이루어지고, 우리 생물이 살고, 또 다시 허물어지고, 다시 텅텅 비어지고, 이런 것을 몇 번이고 되풀이 한다 하더라도 마음이라는 성품은 멸치가 않습니다. 마음 성품 이것이 부처입니다. 그러기에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마음이 바로 부처라. 이렇게 말합니다.

 

허나 그 마음은 우리가 남도 미워도 하고, 사랑도 하고, 욕심도 내고, 성도 내고, 그런 마음은 아닙니다. 마음이 부처라는 그 마음과 남을 미워하는 마음과 그 성질은 같습니다만 우리가 남을 미워하고 사랑하고 욕심을 내고 하는 그런 마음은 마음의 초점(焦點), 마음의 겉에 뜬 부동된 덧없는 마음입니다.

 

그런 마음의 근원된 마음, 근본(根本)자성(自性), 근본 청정심(淸淨心), 본래청정심이라, 이 마음이 바로 부처입니다. 이 마음 위에서 잘못쓰기 때문에 우리 마음이 미워지고, 예뻐지고, 또는 시기분별한단 말입니다.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

 

우리 여기 계시는 분들은 다 불교(佛敎)를 신봉(信奉)합니다. 따라서 아까 말씀처럼 우리 인간이 구하는 것 가운데서 가장 귀중한 보배, 우리는 맨 처음에 삼귀의례(三歸儀禮)라, 삼보에 귀의 하였습니다. 비록 여러 가지 세간적인 그런 보배가 많이 있지만은 그런 보배 가운데서 역시 삼보가 제일 귀합니다.

부처라, 불보(佛寶)라,

부처는 무엇인가? 부처는 바로 우주의 진리입니다. 부처를 하나님이라고 해도 그 때는 무방합니다. 다만 그 내용이 우주의 모든 것를 거기에다가 다 포함시켜 있어야 씁니다. 그것이 가장 귀중한 보배, 그것이 불보 입니다.

 

그 다음에는 우주의 모든 진리, 내 생명의 본바탕인 동시에 우주의 본바탕인 진리를 구하는 가르침, 이것이 법보(法寶)란 말입니다. 법법(法)자 법보입니다. 그 다음에는 그런 우주의 진리를 구하는 가르침 따라서 실천하는 사람, 이것이 중승(僧)자 승보(僧寶)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승보입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보배이기 때문에 삼보(三寶)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삼보의 하나인 승보입니다. 승보의 할 일은 무엇인가? 이것은 아까 말씀 처럼 우리 마음의 뜨거운 열뇌, 더울열(熱)자, 괴로울뇌(惱), 번뇌란 뇌자, 열뇌입니다. 번뇌를 못 끊어 놓으면 이런 더위에는 더 뜨거운 것입니다. 그러나 번뇌를 끊어가는 사람은 비록 땀은 뻘뻘 흘린다 하더라도 역시 마음은 서늘한 것입니다.

 

이렇게 가다가 앞서 말씀처럼 애월삼매(愛月三昧)라, 그런 삼매(三昧)에 척 들어가면 자기 몸도 마음도 개운하고, 일체중생에게도 서늘하게 진리의 광명을 보내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승보입니다. 우주의 진리, 내 생명의 진리인 불보를 믿고, 그런 불보를 우리가 증(證)하는 체험하는 가르침 따라서 행동하는 우리는 승보입니다. 우리 승보가 하는 일이 무엇인가? 우리 승보가 할 일은 많지 않습니까. 염불(念佛)도하고, 여러 가지 주문도 외이고, 우리 승보는 다 아시는 봐와 같이 성불(成佛)하는 길을 가는 사람이 승보입니다.

 

우주의 근본 진리인 그러한 불성(佛性), 부처님 성품을 깨닫고자하는 사람이 승보입니다.

 

<참선(參禪)은 무엇인가?>

 

우주의 진리를 깨닫는 가르침 가운데서 제일 으뜸 가르침, 가장 압축된 가르침, 그것이 참선입니다. 오늘 우리가 모인 것은 참선(參禪)을 하고자 해서 모이신 것입니다.

 

인류문화사 가운데서 참선 같이 가장 고도한 가르침은 없습니다. 따라서 현대 지성들이 참선이 무엇인가를 모르면은 참된 의미에서 지성인들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참선은 귀중합니다.

 

우리 이웃나라인 일본에서는 젠(Zen) 그래서 참선을 가장 소중히 하는 풍조가 우리보다도 훨씬 더 미만(彌滿)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일본뿐만 아니라 지금 캐나다나 미국이나 기타 구라파 그쪽이나, 참선에 대한 문제는 상당히 문제로 삼고서 연구를 합니다. 전문적인 학자들로 해서는 참선을 연구하는 열도가 이쪽 동양권 보다 더 강렬히 한다 합니다. 심지어는 기독교(基督敎)를 신봉 하는 기독교인 역시 참선을 합니다.

 

저번에 보신 분은 아시지만, 수녀 역시 여기 와서 같이 참선을 했습니다. 아무렇게나의 수녀가 아니라 그 분은 편집장이라, 책도 내고 하신 수녀님입니다. 이와 같이 불교인이 아닌 분들도 참선문제가 그와 같이 비중이 커 놓아서 연구를 하고 탐구를 합니다.

 

인간정신(人間精神)을 영원의 경계, 생사(生死)를 초월(超越)하고 가장 행복스러운 경계, 그런 경계로 이끄는 방법 가운데서 참선이 제일 으뜸가는 최고도의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현대 지성인들은 비록 불교인이 아니라도 참선이 무엇인가는 아셔야 합니다. 참선이 무엇인가?

 

저는 예언가는 아닙니다만 앞으로 두고두고 해를 거듭할수록 참선 문제는 더욱더 중요한 문제로 우리들에게 부각이 될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지금 번잡하기도 하고, 이와 같이 혼란스러운 산업사회의 그런 위기를 극복하는 문제, 이 문제에 있어서 제일 소중한 그런 해결책, 산업사회의 혼란상, 물질문명사회의 여러 가지 패단, 이것을 구제하는 면에서 참선 같이 양약(良藥)이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참선을 하고자 해서 이 자리에 모이신 것입니다.

 

<참선(參禪)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어떻게 참선을 해야 할 것인가?

염불(念佛)도 하고 주문(呪文)하고, 많은 공부를 합니다만 참선하고 그런 것들하고 어떻게 차이가 있는 것인가? 참선이 대관절 무엇이건데 그와 같이 소중한 것인가 말입니다. 부처님의 팔만사천(八萬四千) 법문(法門)도 역시 참선이라 하는 거기에 다 집중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다 압축이 되어 있습니다. 참선은 무엇인가?

 

참선은 나중에 점차로 더 말씀을 드립니다만 우선 오늘은 지금 명색 법어(法語)라 해서 이렇게 높은 자리에 앉아서 말씀을 드리는 것이니까 사소한 방법론은 생략을 하고서 우선 근원적인 마음의 자세만, 참선의 마음의 자세만 제가 주로 말씀을 하겠습니다.

 

참선 이것은 부처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부처의 자세를 내 자세로 하고, 부처가 숨 쉬는 그런 호흡법(呼吸法)을 내 호흡법으로 하고, 이런 것은 점차 말씀을 드리겠습니다만 우선 참선 이것은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고 하면 부처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해야 씁니다.

 

<[선시불심(禪是佛心)]이요,

[교시불어(敎是佛語)]라, >

 

[선시불심(禪是佛心)]이요, [교시불어(敎是佛語)]라, 참선 이것은 바로 부처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선하는 사람은 부처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하지 않으면, 가사 화두를 들고 ‘이것이 무엇인가’를 몇 십 년 한다고 해도 그것은 별 소득이 없습니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비록 입으로 외인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이 불심(佛心)에 가서 딱 안주(安住) 되어있어야 참선입니다. 참선 공부라 하는 것은 특히 불교공부는 마음공부입니다. 마음을 깨닫는 공부입니다. 따라서 자기 마음 자세가 내 마음이 부처의 마음이 되어야 씁니다.

 

어떻게 이 중생(衆生)이 부처의 마음이 될 것인가? 누구나 부처의 마음이 되고자 해서 애는 많이들 쓰겠습니다만 부처의 마음이 되기가 그리 쉽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공부를 많이 해서 통하면 되겠지만, 미처 못 통한 우리 범부가 어떻게 부처님 마음이 될 것인가?

 

이런 때는 역시 부처님의 영상(映像), 즉 부처님의 이미지를 간직해야 씁니다. 본래 우리 자성(自性), 우리 마음의 근원이 부처인지라 부처님 이미지를, 영상을 딱 간직해서 영상을 안 떠나고 공부해 나가면 그때는 차근차근 부처한테로 가까워진단 말입니다.

 

참선에 관한 책도 굉장히 많이 나왔습니다. 저 선문염송(禪門拈頌)이나 화두를 드는 책만 해도 벌써 몇십 권 나왔단 말입니다. 이렇게 저렇게 서로 논쟁도 심하고, 굉장한 복잡한 교설들이 많이 있습니다. 허나 일언이 패지하면, 한말로 말씀드리면 내내야 결국은 내 마음자세를, 내 마음 가짐을 부처님 같이 간직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요점입니다.

 

우리 범부가 아직은 미혹(迷惑)되고 탐심(貪心)도 많고, 또 진심(嗔心)도 많고, 삼독심(三毒心)에 독스러운 마음에 충만된 우리 범부가 어떻게 부처 마음을 가질 것인가? 가질 수가 없습니다. 가질 수가 없으니까, 그때는 부처님 닮은 마음을 가지려고 우리가 애쓰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