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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4. 금강륜

청화큰스님 친필노트(2)


* 무아(無我)는 존재(存在)하는 자아(自我)를 부정(否定)하는 말임과 동시(同時)에 행위(行爲)하는 자아(自我)를 긍정(肯定)하는 말이다.


* 가치(價値)는 존재(存在)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行爲)를 통(通)해서 창조( 創造)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自身)의 노력(努力)에 따라 얼마든지 많은 가치(價値)를 창조(創造)할 수 있으며 많은 가치(價値)를 창조(創造)할수록 나와 남이 모두 행복(幸福)해진다.

 공(空)의 세계(世界)에서는 이렇게 자리(自利)와 타리(他利)가 대립(對立)하지 않고 자신(自身)의 이익(利益)이 곧 남의 이익(利益)이 된다. 이것이 보살행(菩薩行)이며 바로 육바라밀(六波羅蜜)이 된다.   

                                                      


* 실(實)로 세계(世界)의 모든 것은 공(空)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自由)롭게 가치(價値)를 창조(創造)할 수가 있다.


* 불교(佛敎)의 무아(無我) 설(說)이 단순(單純)히 자아(自我)의 부정(否定)을 의미(意味)한다면 불교(佛敎)는 단견(斷見)이 되고 한편 불교(佛敎)의 업설(業設)이 상주불멸(常住不滅)하는 자아(自我)를 중심(中心)으로 이루어진 이론(理論)이라면 불교(佛敎)는 상견(常見)이 된다.

 그러나 불교(佛敎)는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을 다 같이 부정(否定)하는 중도(中道)이다. 불교(佛敎)의 근본(根本)입장(立場)이 중도(中道)요 작자(作者)는 부정(否定)하나 업보(業報)는 긍정(肯定)하는 연기법(緣起法)에 바탕을 두고 있다.


* 단견(斷見)이나 상견(常見)은 시공(時空)속에 존재(存在)하는 자아(自我)를 전제(前提)로 하기 때문에 나타난 견해(見解)이다. 모든 존재(存在)는 무명(無明)에서 비롯한 허위(虛僞)이다.


* 존재(存在)는 연기(緣起)하는 법(法)을 욕탐(欲貪)으로 구성(構成)한 허구(虛構)임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단견(斷見) 상견(常見)에 떨어져서 무아사상(無我思想) 업보사상(業報思想)을 모순(矛盾)된 사상(思想)이라고 생각한다.

불교(佛敎)에서 말하는 무아(無我)와 업보(業報)는 모순(矛盾)된 개념(槪念)이 아니라 무아(無我)가 곧 업보(業報)이다. 그리고 무아(無我)의 실천이 바로 육바라밀(六波羅密)이다.


* 대승불교(大乘佛敎)에서는 선업(善業)과 수행(修行)을 동일시(同一視)하고 있다. 선업(善業)이 자기존재(自己存在)를 위(爲)한 것이라면 천상(天上)에 가는 업(業)이 되나 일체중생(一切衆生)을 위한 것이 될 경우에는 그대로 성불(成佛)을 위한 수행(修行)이 된다.

 보시(布施)가 무아(無我)의 자각(自覺)에서 실천(實踐)될 때는 보살(菩薩)의 수행(修行)이 된다.                                  


* 존재(存在)의 세계(世界)에서 살아가는 중생(衆生)들에게는 삶은 필연적(必然的)으로 모순(矛盾)과 갈등(葛藤)을 일으키게 된다.


* 우리는 독자적(獨自的)으로 존재(存在)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인연(因緣)에 의하여 살고 있다. 우리가 개체적(個體的)인 자아(自我)에 의한 집착(執着)만 버리면 우리의 세계(世界)는 인연(因緣)으로 연결(連結)된 하나의 생명(生命)으로 다가오며 개별적(個別的) 존재(存在)로 인식(認識)될 때 생기는 모든 모순(矛盾)과 갈등(葛藤)은 헛된 망상(妄想)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 주는 자(者)도 없고 받는 자(者)도 없으며 주고 받는 물건(物件)도 없어야 진정(眞正)한 보시(布施)이다. 하나의 생명(生命)속에는 나와 남이 없기 때문이다. 보시(布施)를 통(通)해서 하나의 생명(生命)으로 돌아가게 되며 하나의 생명(生命)으로 돌아 갈 때 우리는 너와 나가 함께 생존(生存)의 괴로움과 생존(生存)의 투쟁(鬪爭)에서 벗어나 해탈(解脫)과 열반(涅槃)을 성취(成就)할 수가 있다.

 대승불교(大乘佛敎)는 삶의 본질(本質)을 회복(回復)하여 자타(自他)가 일시(一時)에 성불(成佛)하는 삶을 바라밀(波羅密)이라 한다.


* 우리는 모두 인연(因緣)의 끈으로 연결(連結)되어 함께 연기(緣起)하고 있는 한 몸이라는 사실(事實)을 알아야 한다.


* 연기법(緣起法)의 진리(眞理)에서 본다면 살생(殺生)은 스스로를 죽이는 것이 되고 거짓말은 자기(自己)를 속이는 것이 된다.


* 계율(戒律)은 한 생명(生命) 한 존재(存在)로 살아가는 삶의 방식(方式)이다. 계율(戒律)은 모든 생명(生命)이 화합(和合)하여 공존(共存)하는 원리(原理)이다.                                          


* 모든 생명(生命)을 한 생명(生命)으로 보고 살아간다면 죽이는 자(者)도 죽는 자(者)도 없게 된다. 보살행(菩薩行)은 모든 생명(生命)을 나의 생명(生命)과 한 생명(生命)으로 보고 살아가는 삶을 의미한다. 나와 남을 분별(分別)하여 살아가는 사람은 어떠한 계율(戒律)도 지킬 수 없다. 나와 남을 분별(分別)하지 않고 한 몸 한 생명(生命)으로 알고 살아가는 사람의 삶은 모든 삶이 곧 지계(持戒)의 삶이 된다.


* 지계(持戒)의 바라밀(波羅密)은 자타(自他)를 분별(分別)하지 않는 무아(無我)의 삶을 의미(意味)하며 모두가 함께 평화(平和)롭게 공존(共存)하는 평화(平和)의 원리(原理)이다.


* 불교(佛敎)의 업설(業設)은 물질적(物質的)인 인과구조(因果構造)가 아니라 생명의 인과구조(因果構造)이다. 인과(因果)는 우리의 의도(意圖)에 의해 다양(多樣)한 가능성(可能性)을 갖는다. 사람을 만드는 것은 환경(環境)이 아니라 업(業)이다. 사람은 자신(自身)의 생각과 행위(行爲)에 의(依)해서 곧 자신(自身)이 짓는 업(業)에 의해서 자신(自身)의 모습을 결정한다.


* 인욕(忍辱)은 우리에게 어떤 환경(環境)이 주어질 지라도 악업(惡業)을 짓지 않고 선업(善業)을 짓는 행위(行爲)를 의미(意味)한다. 화가 나면 바른 선택(選擇)을 할 수 없다.


* 업(業)은 원한과 미움 속에서는 무서운 과보(果報)로 자라고 인욕(忍辱)과 자비(慈悲)속에서는 아름다운 과보(果報)로 자란다.


* 인욕(忍辱)은 업보(業報)의 법칙(法則) 아래서 악연(惡緣)을 좋은 선연(善緣)으로 전환(轉換)하는 계기(契機)가 된다. 인욕바라밀(忍辱波羅密)은 무아(無我)와 업보(業報)의 사상(思想)을 토대(土臺)로 하는 자비(慈悲)의 구체적(具體的)실천(實踐)이다.                           


* 부처님은 진리(眞理)를 찾기 위해서 수행(修行)했으나 우리는 드러난 진리(眞理)를 체험(體驗)하기 위해서 수행(修行)한다.


* 업보(業報)는 있으나 작자(作者)가 없다는 공(空)한 입장(立場)에서 보면 우리의 모든 행위(行爲)는 그 목적(目的)이 자기(自己)자신(自身)의 존재(存在)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위(行爲) 그 자체(自體)와 그것이 가져다줄 결과(結果)에 있다.


* 진정(眞正)한 보살(菩薩)은 거짓된 자아(自我)의 부정(否定)을 통(通)해서 허무(虛無)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진정(眞正)한 자아(自我)인 무아(無我)를 실현(實現)한다.


* 반야바라밀(般若波羅密)이나 공(空)이 추상화(抽象化)되고 신비화(神秘化)되지 않고 우리의 일상적(日常的) 삶이나 수행(修行)의 영역(領域)으로 이해(理解)되지 않으면 안 된다.


* 오온(五蘊)은 무상(無常)하고 무아(無我)임을 깨달아 오온(五蘊)에 대하여 욕탐(欲貪)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오온(五蘊)에 머물지 않는 것이다.


* 원리(原理)의 입장(立場)에서 보면 제법(諸法)은 무아(無我)이나 실천(實踐)의 입장(立場)에서 보면 모든 것은 업(業)의 결과(結果)로 나타난다.


* 반야바라밀(般若波羅密)은 인식(認識)의 대상(對象)이 아니라 실천(實踐)의 이념(理念)이다.


* 연기법(緣起法)의 진리(眞理)에서 보면 인(因)과 과(果)가 분리(分離)되어 있지 않다.                                 

                                                   


* 성불(成佛)은 수행(修行)의 종점(終點)이 아니라 수행의 완성(完成)이며 이것이 무소득(無所得)이다.


* 본래(本來) 무아(無我)인 것을 알지 못하고 자기존재(自己存在)라는 허망(虛妄)한 생각에 집착(執着)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곧 생사(生死)이다. 오온(五蘊)이 무상(無常)임을 알아 무아(無我)로 살아간다면 그대로 열반(涅槃)을 얻을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