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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4. 금강륜

부산신도 친견법문

                 

    20011202-부산신도 친견법문


기까지 오시느라고 수고하셨습니다. 다.

 우리는 반야심경에 전도몽상顚倒夢想이라는 그 말씀을 누구든지 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어떤 것이 전도몽상인가? 전도라는 것은 우리가 바로 보지를 못하고 뒤바꿔본단 말입니다. 거꾸로 본단 말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나만은 전도몽상이 아니고 정견正見을 한다고, 이성적으로 판단한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범부중생凡夫衆生은 범부성을 못 떠난 한限에서는 모두가 다 전도몽상을 하고 있으며 존재의 실상을 참으로 보지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가상假相만 보고 허망한 현상만 보고 있는 것입니다. 곧 일체 존재의 실존實存을 보지 못합니다.

 여기 꽃이 있습니다마는 인간들은 감각적으로 드러난 모양만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꽃은 실상이 아닙니다. 인간의 업에 가려서 바르게 보지 못한 채 꽃의 실상을 못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실상은 어떠한 것인가. 물론 똑같은 것도 과학적(현대물리학)으로 보는가, 또는 상식적으로 보는가, 또는 깊은 종교철학적으로 보는가에 따라서 견해의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 눈에 꽃으로 보이는 것은 상식적인 중생의 눈으로 본 것입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꽃으로 보이는 것이지 이 꽃은 이 꽃의 실상이 아닙니다.

 과학자가 본다면 원소라든가 원자 등의 물질의 근원적인 알맹이가 인연 따라 잠시간 모여서 꽃으로 보이고 인연이 흩어지면 꽃으로 안보이게 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면 실존 철학적으로 본다면 어떻게 볼 것인가.

 아무리 철학을 깊이 연구해도 이론적이고 사변적인 범위 내에서는 실상을 보지 못합니다. 참으로 존재하는 모든 존재의 실상은 보지 못합니다.

 그러면 실상으로 보는 이는 누구일 것인가. 이는 부처님이나 부처님 가르침을 깨달은 우리 마음을 깨달은 성자聖者만이 바르게 봅니다.

 우리는 굉장히 불안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사회도 불안하고 우리 마음도 불안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면 불안스러운 원인이 어디 있는가, 그것은 인간과 모든 존재의 실재·실상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중생은 현상적인 상만 보고 느끼고 좋아하고 싫어하며 삽니다.

 그러나 옛말처럼 연기가 나오면 그 밑에는 반드시 불이 있겠지요. 불이 없으면 또한 연기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현상이 있다면 현상의 근원은 무엇인가. 근원을 알아야 우리가 행복하고 안락스런 삶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존재를 물리적으로 본다면 원소나 소립자들이 인연 따라 결합해서 존재가 있게 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물리학자가 보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 실재의 바탕인 "그 원자가 무엇인가", "전자가 무엇인가" 또는 "양성자는 무엇인가", 추구追求해 들어가면 물리학으로는 결국 물질의 바탕과 근원을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어째서 모를 수밖에 없는가, 그것은 시간성이나 공간성 등의 제한을 가할 수 있어야 실험·실측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야 물질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시간성도 공간성도 없어져 버립니다.

 물질은 쪼개고 분석해 들어가면 나중에는 시간성과 공간성도 없어져버립니다. 그래서 실측 분석을 못하기 때문에 물리학으로는 모든 존재의 근원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의 원리와 마찬가지로 무엇인가 확정적으로 확실한 것이 없어서 현대 과학으로는 존재의 실상을 확실히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현대 과학의 혜택으로 편리한 시대에 살고 있으나 무엇인가 확정적으로 확실한 것이 없습니다. 과학 자체가 근원적인 실상론·실재론에 있어서는 결국은 실상이나 실재를 규명할 수가 없습니다.

 다행히도 부처님 제자인 우리 불교와 또 차이는 있지만 기독교도 그 성자들은 실상을 훤히 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하신 지 2500년이 경과했지만 진리니까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습니다.

 부처님 가신 뒤에도 무수한 성자가 나왔습니다. 그분들도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믿고 증명을 했습니다.

 성자의 가르침은 이론적으로 알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스스로 닦아서 자기도 성자가 되는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믿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중생은 겉만 보고 성자들은 근본성품根本性品을 보는 것입니다. 근본 본체를 봅니다.

 일반 중생은 근본자리를 보지 못하고 살기 때문에 좋은 일에는 기뻐하지만 자기에게  불여의不如意한 일에는 불행과 불안을 느낍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는 무서운 시대입니다. 정보화시대라서 정보의 홍수 속에서 정보를 많이 아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정보를 정확히 판단하고 좋은 정보만 가지고 살아야 할텐데 정보가 과잉이 되어서 사람 마음이 항시 혼란스럽고 불안스럽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현상적인 문제와 상대적 시비를 떠나서 근원적인 문제인 생명 자체가 무엇인가, 다른 말로 우리 마음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불안하지가 않습니다.

 여러분께서 여기 오신 것도 그 마음을 깨달아서 모든 것의 본래면목本來面目 자리, 우리 마음의 고향자리가 무엇인가를 아시기 위해 여기 오셨습니다.

 그런데 제 말의 결론부터 먼저 말씀드리면 마음이 더 놓이시겠지요. 우리가 근원을 모르면 마음이 불안한 것입니다.

 그 마음의 근원은 체험을 당장 못한다 하더라도 탐진치 삼독심貪瞋痴三毒心을 없애서 우선 이론적으로라도 내 본래면목은 어떤 것인가, 우주의 현상은 본래 어떤 것인가 등을 우선 알아야 마음이 놓입니다.

 따라서 먼저 우리 마음이 무엇인가를 아셔야 합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가르치시는 부처님 말씀에 의하면 우리 마음이 나와 우주의 주인공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모든 존재는 하나의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처님은 여실하게 말씀하는 분(如語者)이며 중생을 속이지 않는 말씀만 하시는 분(不騰語者)입니다.

 부처님 말씀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오시고 안 오신 것에 관계없이 영원히 존재하는 우주의 법 그대로의 가르침입니다.

 그러한 부처님 가르침을 중생들은 전도몽상으로 거꾸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주인공인 것을 모르고 허망한 환상에 불과한 것을 있다고 생각합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사실로 있지가 않다는 말입니다.

 불교를 믿는다고 하는 분들도 부처님 가르침을 그대로 신봉하는 것이 아니라 상은 상相대로 있다고 보고 몸은 몸대로 있다고 보는 유물론적 사고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를 믿는 불자가 일체존재의 근본이 내 마음의 유심소현唯心所現인 줄을 모르고 일체존재의 근본을 물질로 본단 말입니다. 우리의 불행은 여기에 있습니다.

 불자님들이 생각해보면 짐작이 가시지요. 자기 기분을 좋게도 하고 상하게도 하는 모든 것이 모두 물질이 지배한다고 아직도 생각하고 계시는 분이 있지요? 그렇지가 않단 말입니다.

 우리가 좋다고 생각하고 궂다고 생각하고 나라고 생각하고, 너라고 하는 모두가 다 지금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으며 전도 몽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전도몽상을 없애주는 가르침입니다. 다시 한번 반야심경의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을 생각해 보십시다. 이 말씀은 멀 원遠자, 떠날 리離자, 거꾸로 보고 잘못 보는 생각을 멀리 여읜단 말입니다.

 그래야 불법이 되고 불안스럽지가 않습니다.

 잘못 보는 그것을 못 떠나면 어느 때나 불안스러운 마음을 짊어지고 삽니다. 내생까지도 짊어지고 갑니다.

 과거전생에도 우리 생명은 틀림없이 존재했고 미래에도 존재할 것입니다. 그러면 과거 전생에 우리는 어떻게 살았던가,

 틀림없이 바로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바로 살았으면 우리가 해탈하여 인간존재로 다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과거 전생에 업장을 다 못 떼어서 탐욕심도 진심瞋心도 떼지 못하고 바로 보는 정견도 없이 그렁저렁 살았기 때문에 금생에 인간으로 와서 이와같이 고생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루어야 할 최상의 과제가 무엇인가, 그것은 잘못 보고 있는 전도몽상을 없애는 일입니다. 없애기 위해서 먼저 바른 인생관, 바른 가치관이 확립되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 중생은 바른 가치관을 못 갖습니다.

 왜냐하면 중생 안목으로는 바른 실상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없는 것이 있는 듯이 보입니다.

 그러면 실상을 보면 어떠할 것인가. 실상을 본다는 것을 말로 하기는 쉽습니다. 천지우주와 내 마음이 바로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이나 성인들은 허투로 말씀하지 않습니다. 사실대로 말씀하십니다. 꼭, 우리 마음이 지금 이대로 부처님입니다.

 내 마음이 본래 부처님이라고 하면, 그러면 왜 내가 별로 금생에 재주도 없고 흐리멍텅하게 사는가?

 그 이유는 우리 스스로 우리 마음을 국한시켜 버리기 때문입니다. 나는 배운 것도 없고 공부도 안했고, 박아무개, 김아무개일 뿐이라고 제한을 시켜 버립니다. 자기를 업신여기는 중생심이 자기를 묶어버려서 주어진 능력을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한을 시키지 않고 곧이곧대로 우리 생명의 모습 그대로 내 마음이 바로 부처다는 이 마음만 확실히 가져버리면 부처님 경전에는 이런 확신의 순간에 바로 마음의 고뇌가 다 풀린다는 것입니다. 다 풀어지고 동시에 우리 발이 하늘로 올라갈듯이 가벼워진단 말입니다.

 우리 생각의 부당한 제한이 그렇게 무시무시하게 우리인간을 꽁꽁 묶어 버립니다. 지금도 내 생각이 이대로 나를 묶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술어로'농두각태籠頭角莢합니다. 농두는 말(馬)이 사람을 태우고 가면서 풀을 뜯어먹으면 엉뚱한 데로 가버리니까 풀이 무성할 때는 풀을 뜯어먹지 못하게 머리에다 그물을 씌운단 말입니다. 각태는 무엇인가. 말이나 소나 사슴에다 짐을 실을 때는 등골에다 짐을 실을 것인데 뿔에다 짐을 실으면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그와 똑같이 우리 중생들의 나쁜 견해는 마치 입에다 씌우는 그물이나 등에다(머리에다) 짐을 지운 것처럼 부자유스럽습니다. 짐을 지었다는 것은 바른 견해를 갖지 못하고 엉뚱한 견해를 갖고 있다는 것을 비유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란 것은 가짜에 불과하고 참다운 자기는 바로 부처란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팔만사천법문이 모두가 다 본래 부처라는 말씀을 고구정녕苦口蝸腑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참선을 하고 염불을 하고, 공부를 하는 것은 부처가 되기 위해 근원적인 업장을 녹이기 위한 가르침입니다. 그러면 우리 중생은 어떻게 해서 가르침을 빨리 깨달을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어느 분들은 불경을 많이 읽으면 그걸로 해서 빨리 깨달을 것 아닌가 또는 법화경만 읽어도 성불한다는 종파도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이 그렇게 소중해도 이 종파에 가면 이렇게 말하고 저 종파에 가면 저렇게 말합니다. 또 스님들도 각각이 자기가 공부한 방식대로 지도하면 불자님들은 어떻게 어디에다 마음을 붙여야 할 것인가 주저하게 됩니다.

 


 또 제 말씀의 내용의 골자와 관계가 됩니다마는 한 가지 부탁할 말씀이 있습니다.

 다행히 여러분은 전생의 복이 많으시고 훌륭한 지도법사를 만나시고 부처님을 잘 믿으셔서 여기까지 왔습니다마는 여러분의 자녀간들을 신앙면에서 방치해 두고 소홀하게 그냥 믿게 놔둘 문제가 아닐 듯 싶습니다.

 타종교는 신도도 훨씬 많고 일반 중생교화면에서도 시설이 크고 화려합니다. 그래서 자녀들이 그냥 불교쪽으로 오리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가족끼리도 종교가 제 각각인 것이 우리 가정의 현실입니다. 지금 이런 때입니다.

 우리는 부모로서 자기 자녀에게 어떤 종교는 어떤 종교다고 설명할 수 있어야 됩니다. 지금 내가 믿고 있는 불교는 어떠한 종교냐고 물을 때 대답을 못하면 참 딱한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부모님들은 이런 물음에 대답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자녀 사랑의 큰 과제가운데 하나가 바른 종교를 선택하도록 가르쳐주는 일입니다.

 적어도 세밀한 비교종교학 공부는 못한다 하더라도 지금 유포되어 있는 기독교, 이슬람교는 어떠한 것인가 등 세계적인 몇 가지 종교만이라도 체계를 세워 두어야 소중한 자녀들에게 대답해 줄 수가 있습니다. 동시에 소중한 자녀가 전도몽상을 않도록 지도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은 다른 종교와 비교해서 다른 찌꺼기가 하나 없이 일체 만유가 다 부처님 아님이 없다는 위대한 가르침임을 배워 알게 해야 참다운 부모가 됩니다.

 우리 불교의 가르침 중에서 일체중생개유불성一切衆生皆有佛性이라,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가르침에 대해서도 잘못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야 바르게 가르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불성·불심이 내 마음의 어디에 있을 것인가를 잘못 알고 잘못 가늠할 수 있습니다.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불성佛性이나 불심은 어느 고유固有한 데나 특정한 곳에 있지 않습니다.

 일체 존재가 모두 불성뿐입니다. 일체 존재가 지금 이대로 불성이란 뜻입니다. 부처님 아닌 것은 하나도 없이 모두가 부처님만 있다는 뜻입니다. 내 몸, 이대로 부처님 덩어리라는 말씀입니다.

 현대 물리학에서도 "모든 물질의 궁극적인 끄트머리가 원자原子다, 소립자素粒子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불성이라고 하면 산소는 무엇이고 수소는 무엇이고 전자는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나옵니다.

 그러나 사실은 각 원소라든가 원자라든가 하는 모든 존재의 끄트머리는 현대과학이 알지 못합니다. 모르면서도 알고 있는 것은 전자나 양성자 가운데는 아주 엄청난 에너지를 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현대과학은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원자폭탄, 수소폭탄 등이 곧 원자력이니까 눈꼽만한 원자력, 모든 물질의 근원적인 원자력 가운데는 엄청난 힘이 있다는 것은 압니다. 원자나 소립자 안에는 한도 끝도 없는 엄청난 힘이 있습니다.

 "우주의 끄트머리에 있는 에너지는 한도 끝도 없구나"하고 과학자도 감탄한다고 합니다. 이 불가사의한 힘이 바로 불성의 힘입니다.

 어느 것도 불성을 떠나서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온 천지 우주가 불성이며 부처님 아닌 것이 없이 나와 더불어서 한 몸 하나의 부처님인 것입니다.

 불성 곧 부처님 성품이라는 우주의 정기精氣가 어떻게 진동하고 운동하고 결합해서 전자가 되고, 중성자가 되고 양성자가 되었는지는 앞으로 과학자가 밝힐 문제겠지요.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일체중생개유불성이 사람의 마음만 일체중생 아닌가 하여 국한시켜서는 안됩니다.

 일체중생은 사람이나 동물이나 식물이나 어느 것이나 분석해서 들어간 미세한 알갱이는 전자나 양성자나 모두가 중생입니다. 중생이기 때문에 그러한 중생 모두가 다 불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화엄경에서는 "두두물물 화화초초頭頭物物 花花草草가 비로자나진법신毘盧遮那眞法身"이라 했습니다. 꽃 하나 풀 한 포기 하나 부처님 아닌 것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부처님 가르침은 만유가 다 불성뿐이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불성, 그것은 그저 존재의 근원에 그치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눈에도 안보이는 원자의 힘이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듯이, 그보다 더 미세하고 보다 더 근원적인 불성의 힘은 한도 끝도 없는 무한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불성은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 일체의 공덕과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따라서 불성 차원에서는 영원히 죽지 않고 영원히 소멸되지 않습니다.

 또한 불성은 생사를 초월한 영원한 생명 자체입니다. 불성은 곧 생명이기 때문에 불성 속에는 우리 인간이 알 수 없는 모든 행복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또한 불성은 불교 말로'대아大我'또는'진아眞我'여서 쉽게는 대아, 진아가 들어 있어서 중생이 말하는'나'라고 하는 것은 소아小我나 망아妄我입니다.

 대신에 참답게 깨달아서 아는 바른 나, 이른바 참 진眞자, 나 아我자 진아와 대아, 그 안에 들어 있는 힘은 또 역시 한도 끝도 없습니다.

 즉 불성과 똑같은 힘이 내 안에 들어있습니다. 왜냐하면 진아, 대아가 바로 불성이요 불성은 내 본성, 자성, 본래면목이나 같은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존재가 소중한 불성이고 부처님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처를 깨달아서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이 삼명육통三明六通입니다. 삼명육통이란 말씀이 불경에 수백군데 다 있습니다.

 삼명은 먼저 숙명통宿命通이라, 과거를 훤히 아는 지혜를 들 수 있습니다. 텔레파시나 현대적인 시설이 없이도 밝은 마음만으로 과거 전생뿐만 아니라 무수생까지 소급해 올라가서 다 아는 능력입니다.

 다음은 천안통天眼通입니다. 천안통은 우주를 다 내다볼 수 있고 미래를 다 내다볼 수 있는 안목을 말합니다.

 또 누진통漏盡通이 있습니다. 누진통은 번뇌의 근원을 알고서 번뇌를 다 없애고 마음을 깨닫게 하는 지혜입니다.

 이와 같은 숙명통·천안통·누진통인데 성자가 온전히 되면 그 삼통三通을 다 안다는 것입니다.

 출가해서 공부한다 하더라도 저나 어느 누구나 삼명통을 못하면 공부가 아직 덜된 셈입니다.

 따라서 부처님 공부는 평생 동안 참선해도 공부가 다 된 것이 아닙니다. 다된 증거가 있어야 한단 말입니다.

 또 육통六通은 삼명통도 들어갑니다마는 천이통天耳通은 모든 음성을 다 알아 듣는다는 말입니다. 가령 영어를 안배워도 다 알아듣는 것입니다.

 불성 가운데 들어 있는 힘은 이렇게 엄청난 것입니다. 누구나 우리에게 이런 힘이 들어 있는데 생각을 잘못해서 "나는 나 일뿐이다, 내가 아는 것은 금생에 나와서 배운 것뿐이다."이렇게 자기능력을 국한시켜버리는 나쁜 생각 때문에 내 가진 능력을 확대를 못합니다.

 불교는 마음을 한도 끝도 없이 키우는 공부입니다. 제한된 우리 마음을 키워서 영원불멸하고 광대무변한 본래 마음자리, 본래 마음으로 마음을 돌이키는 것이 부처님 공부입니다.

 따라서 삼명육통을 다 할 수 있는 것이 부처님 지혜이기 때문에 우리도 온전히 공부한다면 그런 신통神通이 꼭 나오는 것입니다.

 신통이 안되면 죽어서 금생에 중생생활을 하다가 내생 가서도 또 중생으로 태어납니다. 여러분도 윤회전생을 아시듯이 뱅뱅 돌아서 이리저리 윤회를 해서 개나 소나 축생도 됩니다.

 지금 애완용 동물도 그 개가 전생에는 형제간이나 친구이거나 부모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어느 것도 생명의 뿌리에서 보면, 불성차원에서 본다면 다 똑같습니다. 똑같은데 어리석은 무명심 때문에 내 마음을 제한시켜 버리고 구속시켜버려서 능력을 쓸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 마음을 훤히 열린 광대무변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부처님 공부입니다.

 참선·염불·묵조선 등 이런 여러 방법 중에서 어떤 방법이 제일 쉬울 것인가,

 용수龍樹보살같은 조사는 부처님 정통 조사 가운데서 열 네번째 분입니다. 또 마명馬鳴스님은 12대 조사입니다. 또 대승불교의 아버지라 하는 분입니다.

 이 두 분은 높은 조사들인데 용수보살은 우리 불교를 쉬운 문과 어려운 문으로 즉 이행문易行門과 난행문難行門으로 구분해서 말씀하셨는데 재가 불자님같이 바쁘고 공부할 여건이 어려운 분들은 당연히 쉬운 문으로 공부를 하셔야 되겠지요. 불교적 표현으로는 이행문을 택하셔야 될 것입니다.

 이행문에 대해서 제가 말씀을 좀 드리겠습니다. 자상한 말씀은 못드려도 어느 정도는 말씀드려야 여기까지 오신 보람이 있으시겠습니다.

 이행문은 부처님을 흠모 추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부처님은 내 생명이면서 우주의 생명입니다. 내 생명의 고향이며 내 본래면목입니다. 바로 우주자체이시고 영원한 내 행복의 자리입니다. 그리워하고 그리워하면 찬탄하고 찬탄해도 부족한 우리의'님'입니다.   이 자리를 바로 파고들어서 놓치지 않는 것이 염불이고 갈앙심과 그리움으로 부르고 사모하는 것이 또한 염불선이기도 합니다.

 서기 400년전 나오신 분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제자인 플라톤이 있습니다. 그분의 중요한 말씀 중에'동굴의 비유'가 있습니다. 그 요지를 말씀드리면 중생들은 동굴안에 갇혀 있어서 어두워 판단을 잘못하고 동굴 안에서 흐리멍텅하게 감각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철인이나 성인은 동굴 밖에서 태양을 중심으로 광명세계에서 바르게 판단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즉 철인이나 성자는 태양의 밝은 빛으로 보니까 사실을 바르게 본다는 비유의 말씀입니다. 플라톤이 위대한 것은 80세가 되도록 결혼도 않고 독신으로 살면서 오직 진리만을 위해 봉사하다가 청정하게 살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의 말씀처럼 우리 중생은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좋다 궂다" 하는 중생 차원의 감각적 견해를 가지고 옳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바른 판단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바른 견해가 아니라 전도몽상입니다. 성자의 청정한 눈으로 봐야지, 번뇌가 없는 눈으로 봐야지 바로 볼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전도몽상을 떠나버린 성자의 마음과 중생의 잘못 보는 견해를 대비해서 말씀했습니다.

 이와같이 중생이 바로 보지 못하는 핵심적인 이유는 눈에 보이는 물질을 사실로, 그대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은 바로 알지를 못합니다. 불교의 본래적인 말씀으로 하면 사실은 물질은 없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거부반응을 느끼시겠지요.

 "아, 내 몸도 있고 타고 온 차도 있고, 물질인데 물질이 왜 없다고 하는가" 하시겠지요. 없다는 말씀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면 자동차, 몸뚱이면 몸뚱이, 세포면 세포, 금패물이면 금패물이 우리가 생각한 대로 있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과학적으로 보면 금패물이나 몸뚱이나 세포가 모두 원소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또 원소차원으로 본다면 우리가 보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성자가 본다면 원소 차원을 훨씬 넘어서 원소의 근본바탕이며 모든 존재의 근본 바탕이 바로 불성이기 때문에 불성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즉 물질은 물질이 아니고 불성입니다.

 따라서 일체 존재가 불성으로 되어 있다고 느껴야 모든 성인들이 우리한테 말씀하신 실상을 우리가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뭘 부르고 참구하든지 간에 우리가 감각적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는 '물질 뿐'이라는 생각을 떠나서 찾아야 모든 존재의 실상을 파악하는 바른 수행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수행의 길들 중에서 제일 쉬운 것이 이행문입니다.

 그래서 그 쉬운 이행문은 어떻게 들어가는가 하면 인간의 마음에 대한, 부처님에 대한, 우리의 근본생명에 대한 그리움이 있어야 합니다.

 참선을 하고 염불을 하고, 기도를 하더라도 깨달음의 본고향에 대한, 부처님에 대한 그리움이 간절해야 합니다. 부처님을 향한 하염없는 흠모심欽慕心이 없으면 우리 마음이 비약이 안됩니다.

 마음이 빨리 정화되지 못합니다. 부처님께 다가갈 수가 없습니다.

 그렁저렁 공부해서는 전생에 잘못 살고 잘못 배운 습習이 빨리 녹지를 않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사무치게 본래의 자리, 우리 생명의 근원자리인 실상 즉 불성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이 없으면 가고 싶은 고향에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플라톤도 역시 에로스, 즉 간절한 그리움이 있어야 현상적인 것을 떠나서 참다운 실상으로 우리 마음을 돌이킬 수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기독교에서의 "오, 주여"하고 하느님을 흠모 추구하는 것도 그런 태도에서는 우리와 같은 것입니다.

다만 기독교도 하느님이라는 개념 자체가 부처님 가르침 같이 하느님이 모든 것을 다 포섭하고 "모든 것이 본래로 하느님 아닌 것이 없다"고 생각하면 그때는 불교와 같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그렇지 않지 않습니까. 창조한 하느님은 따로 있고 자연계나 인간은 별도로 있고, 그렇게 보는 것이 기독교에서 보는 하느님의 개념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지금 모든 것을 포섭하고 화해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같이 화합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위대한 성인으로 봐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불자님들은 일신교一神敎를 믿는 그 사람들 같이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불교나 힌두교는 범신론汎神論입니다. 범신교는 넓을 범汎자, 귀신 신神자 인데 모두가 신이 아님이 없다고 보는 종교입니다.

 자연이 곧 신이고 신이 곧 자연입니다.

 어느 것이든 다 이른바 생명 자체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또 이론적으로 따져보면 기독교나 이슬람이나 유태교도 범신론이 안될 수가 없습니다. 이론적으로 정당하게 추구하면 모두가 다 범신론이 됩니다. 일체 존재가 다 신이 아님이 없다, 일체존재가 부처 아님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면 서로 다툴 것이 없습니다.

 아무튼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서 제일 쉬운 문은 부처님을 생명으로, 부처님을 하나의 우주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우주생명으로 받아들일 때는 내 마음이 어떤 형태가 되든 우리 마음의 본체도 똑같이 바로 우주생명입니다.

 천지우주가 다 진여불성이거니 어떤 사람의 마음속에도 부처님은 균등하게 들어 있습니다. 불교의 표현으로 일미평등一味平等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마음이나, 어떤 누구 마음이나, 우리한테 잠재해 있는 본래성품은 다 일미 평등한 불성입니다.

 따라서 그 자리를 믿는 것이 또한 대승적大乘的인 신앙입니다. 모든 존재의 근본을 믿는 것이 대승적인 신앙이고 대승적인 신앙을 가져야 비로소 참선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냥 선방에 들어가서 화두 의심하고 명상하고 염불해야 참선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자리가 근본자리, 본래면목자리에 놓여 있어야 비로소 참선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공부하시든지 간에, 화두를 하시든 묵조를 하시든, 관세음보살이나 나무아미타불을 외우시든지 간에 여러분 마음이 본래 생명의 본체자리인 진여불성에 입각하면 모두 다 참선인 것입니다. 우리는 조금도 어떤 제한이나 위축된 마음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리 선방에 앉아 애쓰고 가부좌를 틀고 공부한다 하더라도 근본적인 견해인 "일체 존재가 부처 아님이 없다" 또 "내 마음이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하고 똑같은 마음이다"라고 확신을 못하면 참선이 아닙니다.

 또 같은 염불도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하면 부처님이 우리를 도와주시고 호법선신도 보호하겠지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본래면목자리에 입각하지 않고 명호만 부르는 것은 염불참선이 못됩니다. "내 마음이 바로 부처고 천지우주가 다 부처님 덩어리다" 이렇게 확신하고 명호를 불러야 염불선이 되고 참된 염불이 되는 것입니다.

 법문을 듣는다거나 불경을 보면서 공부를 선택할 때 지도하는 스님 또는 선사가 근원적인 문제에다 즉 우주만유의 실상에다가 마음을 두고, 본체를 여의지 않는 공부를 이끌었다면 남을 그릇되게 지도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름이 높고 사회적으로 신뢰받는 분이라고 하더라도 만일 근원적인 문제, 생명의 실상 자리를 중요시하지 않는 분이라면 자기 공부가 미숙할 뿐만 아니라 남을 잘못 인도하는 이른바'한 소경이 많은 소경'을 이끄는 것 같아서 굉장히 큰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공부하시는 분들은 그 점을 잘 감별을 하셔야 됩니다.

 또한 우리들은 참선을 좀 하신 분들 중에 어떤 분들은"윤회는 일반사람들이나 생각할 일이지 참선하는 사람은 윤회를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치로는 부처님 가르침의 윤곽을 알고 진여불성에 대한 체계를 세웠다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우리 존재는 과거의 업에 얽매어 있습니다. 알기는 알아도 아직 미운 놈은 밉고 자기에게 좋게 해준 사람은 좋고 합니다. 이것이 과거 생의 업입니다. 금생에 죽을 때 지어놓은 업을 다 없애지 못하면 중생계를 떠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나라는 존재가 어떠한 존재인가, 나라는 존재의 업장이 얼마나 무거운가에 대해서 깊이 자기반성을 해야 합니다. 부처님은 삼십이상三十二相 팔십수형호八十隨形好라, 얼굴은 모든 자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우리는 부처님을 닮아야 합니다. 그런데 잘못 살아서 부처님을 닮지 못하고 있습니다. 백겁장엄百劫莊嚴이라, 무량세월동안 남에게 베풀고 남을 위해 자기를 희생해서 얻으신 모습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누구를 보든, 어떠한 경우든 부처님을 여의지 않고 부처님 사상대로 부처님 본체를 떠나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어느 것을 보나 다 부처님 화신으로 보아야 합니다. 

 예컨대 집에서 자기가 사랑하는 아들이나 딸도 미울 때는 그냥 미워집니다. 진심도 내고 때리기도 하는 등 부처님 가르침을 제대로 받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실상에서 보면 좋은 일을 하나 나쁜 일을 하나 다 부처님 화신입니다. 조금도 부처님 자리에서 떠나지 않았단 말입니다.

 애완용 개를 기른다 하더라도 근원자리에서 보면 역시 부처님 화신으로 봐야 본연대로 본 것이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 가르침은 선방이나 절 같은 특정장소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어느 곳에서나 최선의 생활방법이 됩니다.

 그래야 나쁜 업을 짓지 않고 선업을 쌓을 수 있습니다. 직장이나 자기 동료, 부하직원도 부처님 화신으로 봐야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상만 보고 성품은 못 봅니다. 본체를 못 봅니다. 본체를 봐야 성불할 것인데 현상만 가지고 좋다 궂다 따지고 시비분별하면 공부를 성취할 가망이 없습니다. 여러 보살님들께서는 깊이 새겨들으십시오.

 지금 우리 중생은 모든 전도몽상을 여의고, 시비분별을 여의셔야 됩니다.

 모든 것이 고향을 못 보게 가로막는 장벽이 되고 우리로 하여금 전도몽상 속을 헤매이게 만드는 동굴이 됩니다. 우리는 전도몽상이라는 동굴 속에 우리를 가둬 두는 무명에 싸여 있습니다.

 무명을 떠나 참다운 생명의 고향자리를 향하셔야 합니다. 우리 생명의 고향자리가 바로 부처님 자리입니다.

 또한 그 고향자리의 이름이, 생명 자체의 이름이 아미타불입니다.

 거꾸로 보고 바로 보지 못하는 전도몽상을 여의고 우리의 고향, 성불의 고향자리에 빠르게 가는 길이 "아미타불" 염불수행으로'나무(南無)'를 넣어서 부르시면"나무아미타불"입니다.

 여러 불자님들께서는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우리 생명의 고향에 모두를 바칩시다.

 관세음보살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장보살도 또한 같습니다. 부처님의 공덕이 한도 끝도 없기 때문에"나무아미타불 이름 하나"만으론 표현을 못합니다. 하나의 부처님, 곧 아미타불 부처님뿐인데 아미타불의 공덕에다 또 각각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이름은 수없이 많아도 부처님은 오직 하나의 부처인 아미타불뿐입니다. 아미타불 이외의 부처님은 아미타불의 별명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공덕 기운이 지구덩어리에 있으면 지장보살입니다. 산에 있으면 산신山神, 물에 있으면 용왕龍王이란 말입니다.

 또 부처님을 자비로운 쪽으로 표현하면 관세음보살, 지혜로운 쪽으로 부처님을 부를 때는 문수보살, 부처님을 원력願力으로 표현하면 보현普賢보살이라 부르는 것이지 이름(명호)에 따라서 각각 뿔뿔이 따로따로 하나씩 다른 부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온 우주에 하나인데 이름(명호)만 역할 따라서 여러 부처님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부르든지 모두 다 하나의 우주 생명입니다. 이렇게 아시고 부르면 그만큼 우리마음도 빨리 넓어지고 동시에 부처님이 우리한테 베풀어지는 공덕도 훨씬 큽니다.

 부처님의 공덕이 우주에 충만해 있어서 명호를 한번 부르면 부른 만큼 부처님의 가피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을 지독히 미워하면 그 미운 기운이 미워하는 그 사람한테 가는 것입니다.

 남을 미워하고 남을 저주하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우리 염파念波의 파동이 간단 말입니다.

 또 그 사람을 생각하고 공경하면 그 사람을 위해 기도를 모시면 그 사람한테 그러한 기운이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저 일본에서 유학하고 있는 아들, 딸들에게 기도를 모시면 일본에 있는 자기 아들한테 그 기운이 가는 것입니다. 기도해 준 대상에게 가는 것입니다.

 아픈 사람을 위해 기도를 한다면 그런 정성스런 그 기운이 그 사람에게 갑니다. 정성들인 만큼 갑니다.

 우주는 부처님 기운으로 공간도 없이 충만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부처님을 생각하고 부처님을 흠모하고 부처님 이름을 외울 때에는, 중단 없이 염불을 하면 부처님을 생각하는 공덕이 성장해 옵니다.

 차츰 우리 마음에 부처님 기운으로 꽉 차 버리면 성불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 머리카락부터 발끝까지 부처님기운이 꽉 차게 하기 위해서는 부처님을 생각하는 염불공부를 끊임없이 해야 됩니다.

 가거나 오거나 자거나 누울 때나"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하고 주무시면 자기는 잠자버려서 모르지만 옆 사람이 들으면 잘 때도 나무아미타불을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공부를 하셔야 잠재의식에 때묻어있는 몹쓸 생각이나 업장을 녹일 수가 있습니다.

 우리 업장이 무겁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난 것 자체가 벌써 허물이 있다는 것입니다. 중생노릇 하는 것 자체가 허물입니다.

 허물을 벗기는 가장 쉬운 문이 이행문 곧 부처님 명호를 외우는 일입니다. 끊임없이 염불하는 것을 염염상속念念相續이라 합니다.

 이렇게 하셔서 마음이 통일되고 사무쳐야 업장이 녹습니다. 이렇게 하셔서 금생에 꼭 윤회를 벗어나 내생까지 안가고 금생에 전도몽상을 벗어나 성불하시기를 간절히 빌어마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