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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4. 금강륜

금타대화상 탑비봉안회향법회

2000년 10월 15일 金陀 大和尙 塔碑奉安回向法會



벌써 조락의 가을입니다. 햇빛은 이렇게 화창하고 다습게 생각이 드나 가을의 서늘한 기가 몸에 베이는 그런 계절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이렇게 많이 오셔서 대단히 감사하고 반갑습니다. 오늘 탑비(塔碑) 회향불사를 하는,

우리가 모시는 금타(金陀)대화상은 비단 어느 누구의 은사이니까 또 어느 분들의 어느 문중의 스승이니까 위대하다. 그런 차원(次元)을 넘어선 아주 위대한 대성자(大聖者)이십니다.

우리는 부처님 공부를 할 때 여러 가지 갈래가 많지 않습니까. 그 원리원칙대로 정통적인 정통성(正統性)을 그대로 계승해서 공부한 분도 있고 또는 그때그때 방편적인 공부를 하신 분도 있고 합니다.

그러나 금타 대화상께서는 부처님의 정통불법(正統佛法)이, 불법(佛法)도 그때그때 시대적인 상황 따라서 약간 쇠미도 되고 또는 혼란스러운 때도 있고 또는 종파(宗派)가 분열되다보면 그때그때 우열논쟁이 생겨가지고서  그때그때 종파에서 나온 이른바 법집(法執)하는 국집된 그런 수행법도 있게 됩니다.

그런데 금타 대화상께서 가르친 법은 이것은 부처님 당시부터서 내려오는 이른바 근본불교(根本佛敎), 근본불교도 그대로 다 수렴을 하고 또는 달마대사(達磨大師), 달마대사라는 분은 대체로 아시는 바와 같이 부처님 정통조사(正統祖師)의 28대 조사입니다. 28대로 부터서 중국의 6조 혜능대사(慧能大師) 그 대대로 중국에 와서 육조대사까지 나와 있는데 우리 한국불교(韓國佛敎)는 어느 때나 참선(參禪)하는 선종(禪宗)을 위주로 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가르침은 선(禪)과 교(敎)가 원래 따로 없는 것이고 또는 염불(念佛)과 선(禪)과 따로 없는 것입니다. 이러기에 여러분들이 대체로 아시는 바와 같이 원통불교(圓通佛敎), 회통불교(回通佛敎) 이렇게 말씀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달마스님 때부터서 육조혜능대사까지 내려온 참선법을 순수한  참선법이라 이렇게 말들을 합니다. 즉 말하자면은 아까도 말씀드린바 와 같이 어느 종파(宗派)라든가 그런 것에 조금도 걸리지 않고서 부처님께서 전수 하신 정법 그대로 달마스님께서 이쪽 동쪽나라로 와서 그렇게 전수(傳授)를 하셨고 또는 육조혜능스님 때까지는 2조나, 3조나, 4조나, 5조나, 다 똑같은 그야말로 일사불란한 법맥(法脈)으로 해서 육조혜능스님 때 와서 마무리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가르침이 육조단경, 육조스님께서 스스로 저술한 것은 아닙니다. 그 당시 제자 분 들이 육조스님말씀을 그대로 기록해서 남긴 참선의 교과서 같은 훌륭한 귀감이 육조단경(六祖壇經)입니다.

그런데 육조단경 정신이 그 뒤로 마조스님이나 남정보은스님이나 또는 조주종승스님이나 임제스님이나 그런 분들까지는 그대로 다 계승이 됐습니다.

그러나 송나라 때 여러 가지 종파가 생기니까 종파에 따라서 서로 자기 종파가 훨썩 좋고 다른 종파는 별것이 아니다. 이렇게 할 수밖에는 없겠지요. 그래서 그런 때 불교(佛敎)의 순수(純粹)한 참선수행법(參禪修行法)이 더욱 혼란을 거듭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한국 고려(高麗)때도 그런 혼란을 거듭한 상황에서 그대로 한국에 전승이 돼서 우리 한국선도 약간은 혼란을 면치는 못했습니다.

특히 고려말엽 때는 우리 불교가 얼마나 혼란스러웠습니까. 그러다가 이조(李朝)오백년 동안에는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 불교인들은 중국(中國)과 교류를 못 했단 말입니다. 따라서 고려(高麗)말엽 때 혼란스러운 우리불교 상황이 그대로 이조 오백년 때 굳어 버렸단 말입니다. 그런 것이 오늘날 까지도 나쁜 영향이 상당히 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금타 대화상께서는 육조혜능대사의 가르침 그대로 복귀해야 된다. 이렇게 역설(逆說)하시면서 금강심론(金剛心論)이라, 금타 대화상께서 저술(著述)하신 유고를 모은 책이 금강심론 아니겠습니까. 금강심 론에서 재차 역설 하신 것인데 그것도 그냥 말씀으로만 역설 하신 것이 아니라 금타 대화상께서 스스로 실참실구(實參實求)라, 스스로 깊은 삼매(三昧)에 들어서 통달(通達)하셨단 말입니다. 그래 가지고서 통달한 회향으로 해서 저술한 것 이 금강심론에 있는 금타 대화상의 가르침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세상이 얼마나 혼란스럽고 혼란스러우니까 필연적으로 불안스럽지 않겠습니까. 이런 때 있어서는 꼭 무슨 일을 하던지 간에 정통성이 필요합니다.

조그만 사업이나 또는 가정생활을 한다 하더라도 꼭 철학(哲學)이 필요합니다. 철학 그러면 어렵게 생각이 되시지마는 절대로 어려운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원리원칙대로 한다는 말입니다. 원리원칙대로 하는 것이 철학을 떠나지 않는  바른 정당한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뿐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불교계도 마찬가지 입니다마는 상당히 혼란상황을 거듭한단 말입니다. 스님들끼리 싸우기도 하고 종단(宗團)이 너무나 수가 많아서 더러는 종 교무용론(宗敎無用論)이라, 이런 말까지 나올 정도로 혼란스럽단 말입니다.

다른 나라 불교도 마찬가지 입니다. 불교국 뿐만이 아니라 기독교나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것이 그 원인이 어디가 있는가 하면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정통성(正統性)의 결여 정통성의 혼미란 말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세계(世界) 종교일반에 있어서도 가장 시급한 문제가 뭣 인고 하면은 우리가 정통성으로 복귀해야한다는 말입니다.

기독교도 예수님의 사상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마태복음서나 누가복음서에도 있습니다만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뜻을 구하라 그러면은 모든 것은 그대에 게 곁들어지리라’ 먼저 순수(純粹)한 마음으로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나라라 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바로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구하라, 그러면은  모두는 그대 에게 다 곁들어지리라‘

우리 부처님말씀은 보다 명백합니다. 우리 인간성의 본래자리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불심(佛心) 아니겠습니까. 불심이라, 부처불(佛)자 마음심(心)자 불심(佛心)이나, 부처불(佛)자 성품성(性)자 불성(佛性)이나 똑 같습니다.

보통사람들은 일체중생개유불성(一切衆生皆有佛性)이라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면 불성은 인간만, 우리인간만이 마음마다 불성이 있겠지 우리 인간의 본성이 불성이겠지 이렇게 가볍게 생각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물론 우리 마음의 본성이 불성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불성은 우리 마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밖에 나 안이나 또는 언제 어디에나 충만해 있는 우주(宇宙)의 바로 본성(本性)입니다.

이 불성이라 하는 우리 인간성의 본바탕인 동시에 우주성의 근원적인 생명자리 이 자리가 바로 이른바 본체성(本體性)자린데, 이 불성자리를 우리가 놓쳐 버리면은 참다운 불법(佛法)이 되질 못하고 우리 행동도 규범을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오늘날  도처마다 각 종교가 혼란스럽고 또는 인간사회가 여러 가지로 해서  혼미와 불안을 거듭한 것은 뭣 인고 하면은 우리 정신지도를 할 수 있는 정신지도를 담당하는 각 종교 (宗敎)들이 서로 정통성을 찾지를 잘 못해있다는 말입니다.

금타 대화상의 위대한 점은 아까 말씀마따나 바로 그 정통성, 정통성(正統性)을 그냥 철학적(哲學的)으로나 학문적(學問的)으로 말로만 배우신 것이 아니라, 투철한 실참실구(實參實求)라, 투철한 깊은 삼매를 통해서 체험을 하셨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우리는 그렁저렁 공부 할 때는 아닙니다. 그렁저렁 공부해서는 부처님의 가피도 얻지를 못 하고 우리한테 큰 보은을 우리가 가질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어디까지나 철저한 윤리도덕(倫理道德)이 기반이 되어야 됩니다. 이른바 계율(戒律)을 지켜야 한다는 말입니다. 계율을 지키지 않고서 우리가 부처님의 법을 깨달을라고 생각하면 그때는 연목구어(緣木求魚)입니다. 나무위에 가서 물고기를 구한다는 말입니다. 도저히 얻을래야 얻을 수가 없습니다. 철저한 윤리도덕을 지켜야 됩니다. 그래서 지조(志操)가 없는 사람들은 아무리 큰소리해도 깨달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금타 대화상의 위대한 점은 바로 불교의 정통성을 재차 천명(闡明)하신 그런 분이기 때문에 위대하다. 그런 말씀을 제가 드렸습니다.

그러면 어느 대목이 그와 같이 정통성을 천명하고 있는 것인가? 이렇게 궁금들 하시겠지요.

육조 혜능스님께서는 그 분은 학문적으로 많이 닦으신 분은 아닙니다. 오로지 마음 깨달아서 마음의 불성(佛性)자리를 깨달아서 위대한 성자(聖者)가 됐던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자기 생명의 우리생명의 근본바탕인 동시에 우주생명(宇宙生命)의 근본(根本)자리인 불성(佛性) 이것은 학문적(學問的)으로 깨달아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마음의 번뇌(煩惱)를 소멸 시켜서 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주에는 불성 외에 또 무엇이 있는 것인가? 우리는 분명히 아셔야 됩니다. 방금 제가 말씀드리는 원리도 역시 정통성 이른바 정견(正見)이라 바른 견해,  바른 견해에 대해서 말씀하시고자한 것이고 또 어느 도인이나 다 그렇습니다. 저도 그분들 따라서 제가 원만무결하게 깨달은 사람은 아니지만 그분들 따라서 그분들 말씀을 옮겨드리는 것입니다.

불성이라 하는 것은 어디에 있고 없고 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내 마음의 본성인 동시에, 우리 몸도 모두가 다 우리 몸전체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불성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또는 산천초목(山川草木)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한 말로 말 하면은 우주는 바로 불성뿐입니다 우주는 오로지 한결같은 생명(生命)의 실상(實相)인 불성(佛性)뿐입니다.

불성을 깨달으면 성자(聖者)인 것이고 불성을 깨닫지 못 하면은 범부중생(凡夫衆生)인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불성을 얼마만치 깨닫고 있습니까. 우주는 오직 불성뿐입니다.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우주는 하나님뿐입니다.

먼저 불성을 구하라, 먼저 부처를 구하라, 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님도 부처지만은 참다운 부처님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오시고 안 나오시고 상관이 없이 과거, 현재, 미래, 언제나 계시는 영생불멸(永生不滅)한 생명자체 생명의 본당, 본질 자체가 바로 참다운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은 조금도 이우러짐이 없습니다.

설사 불성이 우리한테 있다 하더라도 불성하고  내가 이익을 좀 보는 것하고 내 사업하고 내가 성공하는 것하고 무슨 관계가 있을 것인가? 이렇게 생각하는 분도 계시겠지요.

그러나 어느 면으로 보나 불성은 모든 것을 원만하게 정당한 일이라고 하면은 모든 것을 다 원만하게 성취시킬 수 있는 무한(無限)의 가능성입니다.

자비(慈悲)로운 쪽으로 보나 행복(幸福)스러운 쪽으로 보나 또는 어떠한 능력으로 보나 어떠한 면으로 보나 무한의 가능성 무한의 행복 이러한 것이 불성(佛性)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설사 어떠한 경우에 운수가 불길해서 인연(因緣)이 다 화합이 안돼서 무슨 일에 큰 실패를 했다 합시다. 또는 몸이 아팠다고 합시다. 어떠한 불우한 그런 사태가 우리 주변에 우리를 감싸고 우리를 엄습한다 하더라도 그런 것은 사실은 별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것은 생각해 보면 모두가 다 우리를 시련 시키는 우리를 성불(成佛)로 몰아가는 하나의 초월(超越)의 계기란 말입니다.

또는 어떠한 것도 우리가 무한의 가능성인 무한의 행복자체인 불성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할 때에 어떠한 경우도 참다운 손해는 없습니다.

불성 이 자리는 죽지 않고 낳지 않고 영생불멸 (永生不滅)한 자립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하고 불구부정(不垢不淨)이라, 더하지 않고 덜하지 않고 영생불멸한 것이 이것이 우리생명 자체입니다. 바로 우주생명(宇宙生命) 자체입니다.

어느 종교(宗敎)나 모두가 다 따지고 보면은 영원의 생명자리를 밝히려고 애썼단 말입니다. 세계에는 지금 4000종 이상의 나라말이 있다 합니다. 우리 한국만 해도 마찬가지로 4000종 이상의 말이 있다 합니다. 사람이면은 사람 사는 곳에는 그 사람들 동아리끼리 최고의 전제가 뭣인가? 영원(永遠)의 생명이 무었인가? 이런 것을 구하는 종교가 있단 말입니다. 종교가 좀 미숙하고 더 성숙한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어떠한 민족(民族)이나 다 그 나름대로 종교가 있습니다. 종교는 자기들 딴으로 해서는 가장 좋은 것 가장 높은 것 절대적인 것 이런 하나의 신비로운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본래(本來)로 불성존재(佛性存在)라, 본래로 하나인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어디서 언제 무엇을 하던지 간에 영원을 구하는 조금도 흠절이 없는 행복(幸福)을 구하는 마음은 누구나가 있습니다. 그 사람 정도에 따라 깊고 옅은 차이는 있습니다마는 그런데 그렇게 될라면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가장 정당한 그런 가르침을 우리가 만나야 한단 말입니다. 어느 사람들은 가장 정당한 것이 좋기는 할테지마는 그것은 너무나 어렵지 않은 것인가.

금타(金陀)대화상 법문도 부처님의 정통(正統) 가르침을 펴고 계셨지만은 그 가르침이 너무 어려우니까 조금 쉬운 방편적(方便的)인 가르침이 좋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할란가 모르겠습니다마는 사실은 성자(聖者)의 가르침이 제일 쉬운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부처님 가르침이 어렵다고 절대로 생각을 마십시오. 제일 쉬운 것입니다. 왜 쉬운 것인가? 말을 바르게 하고 생각을 바르게 하고 우리 행동을 바르게 하면 된단 말입니다.

그런데 말이나 행동이나 우리가 쉽게 알아 볼 수가 있지마는 생각을 바르게 한다는 것은 좀 어려운 문제 아닙니까. 우리 생각 가운데 가장 바른 생각이 무슨 생각인가? 이것은 우리 마음의 본래면목(本來面目)자리 마음의 주인공(主人公)자리 우주(宇宙)의 본래자리, 우리마음의 주인공이나 우주의 본래면목은 똑 같습니다.

우리마음이 지금 모양이 있습니까. 모양이 안 보이지 않습니까. 또는 우주생명인 부처, 법신부처님자리는 모양이 있습니까. 그도 모양이 없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주생명자리나 우리마음자리 나 똑 같은 것입니다.

모양이 없으면서 시간(時間) 공간(空間)을 떠나 면서 분명히 존재하는 명명백백(明明白白)히 존재하는 하나의 생명자리란 말입니다.

우리가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다 외이지 않습니까. 또는 ‘옴마니반메훔’ 주문(呪文)도 외이고 참선(參禪)도 하고 또는 화두도 들고 합니다. 뭣 땜에 하는 것인가?

그것도 역시 방금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리의 본래자리 우리의 본래면목인 동시에 우주의 참 생명인 실상(實相)자리를 보고자 해서 그런 것입니다.

금생에 너무나 짧고 할 일도 많은데 어떻게 그런 걸 다 할 것인가? 그러나 금생에 할 일이 많지마는 그런 일 가운데서 가장 급하고 가장 소중한 것이 자기 생명의 본바탕을 아는 일입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가 의식개혁(意識改革)을 해야 된다. 우리 마음을 바꿔야 된다. 참다운 자아를 참나인 진아(眞我)를 또는 대아(大我)를 구해야 된다. 이런 말씀을 흔히 하지 않습니까. 세속인들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참다운 나가 뭣 인가? 참다운 자기 주체의식(主體意識)이 무엇인가? 이렇게 따질 때는  철학(哲學)도 조금하고 뭘 좀 아셔도 대답을 잘 못 한단 말입니다. 철학을 했다 하더라도 철학도 여러 갈래가 있지 않습니까. 참다운 자기, 참다운 자기주체의식, 참다운 자기본래면목은 역시 성자(聖者)의 가르침이 아니면 제대로 밝힐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은 아까도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리마음의 모든 번뇌(煩惱) 때를 다 없애서 우리마음이 본래(本來)의 상태로 되는 분이 성잔데 성자의 가르침이 돼야 비로소 우리마음의 실상 (實相)을 안단 말입니다.

그 일은 제일 급한 일이고 또 우리가 미리 겁내지만 사실은 제일 쉬운 일인 것입니다. 지금도 여러 가지 수행 방법도 많이 있고 또는 가을인지라 우리가 명상(瞑想)을 깊이 해야 할 때 아닙니까.

명상도 여러 가지가 있지 않습니까. 별별 명상이 다 있습니다. LA나 그런데 가 살아보면 정말로 참 잘난 사람도 많고 똑똑한 사람도 많고 또 무슨 법 무슨 법 한도 끝도 없이 여러 가지 명상법도 있고 별법이 다 있습니다. 무슨 기를 어떻게 다스린다는 법도 있고 별것 다 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들어보면 그 사람들이 대체로 참다운 마음을 깨달은 분들이 아니란 말입니다. 제가 다 모르니까 확인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경험한 걸로 해서는 그분들이 마음을 깨닫는 성자(聖者)가 아니란 말입니다.

성자가 아니라고 생각 할 때는 상대적(相對的)인 것밖에는 안됩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님이나 예수나 공자(孔子)나 노자(老子)나 그런 분들은 상대적인 가르침이 아닙니다. 그분들의 가르침은 절대적인 가르침이란 말입니다. 어느 시대에나 조금도 손색이 없는 그런 가르침입니다.

다만 하나의 제도가 생기고 종파(宗派)가 생겨놓으면 그 종파를 지키고 제도를 지키기 위해서 무리가 생기기 때문에 군더더기가 많이 거기에 붙어서 그런 것이지 가르침 자체는 무슨 성자나 적어도 성자라고 하면은 다 똑같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공부 할 때는 꼭 성자의 가르침을 따라야 됩니다.

오늘날 우리가 금타(金陀)대화상을 숭앙하는 것도 금타 대화상은 앞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실참실구(實參實求) 해서 그냥 말씀으로 철학적인 체계를 세워가지고 우리한테 가르친 것이 아니라 난행고행(難行苦行)으로 수십년동안 참선(參禪)을 통하고 또는 교학(敎學)을 공부해서 깨달으신 분입니다.

여러분들한테 배부해 드리는 금타 대화상의 비명(碑銘)에도 있습니다마는 39세 때 활연대오(豁然大悟)를 하신 분입니다. 그냥 가만히 앉아서가 아니라 자기 생명(生命)을 온전히 바치고서 참선(參禪)을 하셨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제가 너무 지리하게 말씀드리면 한(寒)데 앉으셔서 여러모로 불편이 많으시기 때문에 줄여서 말씀을 잘 드리겠습니다마는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성자의 가르침이 가장 원칙적이고 정통이기 때문에 제일 쉽습니다.

어디서 그냥 꾸어온 것도 아닌 것이고 남한테 빌려온 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내 마음 그대로 나한테 갖추고 있는 불성(佛性) 그대로 불성자리가 얼마나 행복스러운 자린가. 이것은 다른 도인(道人)들도 말씀을 많이 했지마는 특히 금타 대화상께서 금강심론(金剛心論)의 오지여래(五智如來)라, 오지여래란 항목이 있습니다. 그 항목 보면 꼭 진리(眞理)의 사진 같단 말입니다.

부처님한테 갖추고 있는 공덕(功德) 그 공덕은 바로 우리마음 공덕입니다. 삼세제불(三世諸佛)이 갖추고 있는 공덕은 바로 우리가 갖추고 있는 마음 공덕입니다. 이 마음자리를 그렇게 상징적으로 여실하게 말씀 했단 말입니다. 꼭 진리사진 같습니다. 그런 법문은 깨닫지 않고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법문입니다.

그리고 육조혜능(六祖慧能)스님께서 육조단경(六祖壇經)에 밝히신 가르침, 그 밝히신 가르침이 뭣인가? 이것은 좀 복잡하셔도 여러분들이 기억을 꼭 해 두십시오.

왜 그런고 하면은 우리 부처님, 부처님 그러면은 너무나 막연하지 않습니까. 부처님은 어떠한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부처님 공덕은 어떠한 것인가? 이것을 간추리면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이라 말입니다. 법신, 보신, 화신은 우리 불교인들은 꼭 기억 해 두셔야 합니다.

기독교인들 치고서 천주와 성령과 성자를 모르는 사람 있습니까. 기독교(基督敎) 삼위일체(三位一體)라 말입니다. 불교인들로 해서 법신, 보신, 화신을 모르면 불교도 인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 공덕은 바로 내 마음 공덕인데 내 마음이 하나의 무한의 가능성이 바로 부처님 공덕이란 말입니다. 한데 그 속성이 거기에 들어있는 공덕상이 즉 말하자면 법신, 보신, 화신입니다.

법신은 뭣인가? 법신은 우주의 생명자체를 법신 그럽니다. 나나 너나 어느 것도 그 속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 또는 10억 우주나 은하계나 뭣이나 모두가 다 법신 가운데 들어갑니다.

그럼 보신은 뭣인가? 보신은 법신 속에 들어있는 한없는 공덕이란 말입니다. 자비, 행복, 지혜, 능력, 어느 것이나 다 보신에 해당합니다.

화신은 뭣인가? 화신은 이것은 우주가 바로 법신 보신인데 그 법신, 보신을 근거로 해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현상계(現象界) 나나 너나 산이나 또는 태양이나 모두가 다 화신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법신, 보신, 화신하면은 나를 비롯해서 천지우주(天地宇宙)가 거기에 다 포함됩니다. 하나의 우주론이란 말입니다.

부처님가르침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우주에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우주에는 오직 모두가 다 부처님뿐이란 말입니다. 우주는 부처님뿐입니다.

우주에는 부처님뿐이라는 것이 부처님의 대승(大乘) 가르침입니다.

그러면은 우리가 어떻게 공부해야 할 것인가? 그것은 벌써 뻔한 일입니다. 우주가 부처님뿐이거니 다른 것 생각할 것 아무것도 없단 말입니다. 오직 부처님만 생각하고 부처님 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제일 쉽고 제일 확실한 법입니다.

불자님들 깊이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우주가 다른 것으로 보이는 것은 우리중생(衆生)이 번뇌(煩惱)에 가리어서 잘 못 봐서 그러는 것입니다. 우주는 오직 하나부터 열까지 또는 과거(過去), 현재(現在), 미래(未來), 영원한 세월동안 부처님뿐입니다. 진여불성(眞如佛性)뿐입니다.

모양 이것은 하나의 진여불성의 상(相)이란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상만 보고서 본바탕은 모릅니다. 우리중생은 마음이 어두워서 본바탕인 진여불성은 모르고서,

우주의 진리(眞理)니까 진여(眞如) 그럽니다. 진여란 말이나 불성(佛性)이란 말이나 똑 같습니다. 진리이므로 진여인 것이고 또 생명이므로 그 자리가 바로 생명으로서 불성 그런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부처님이고 말입니다. 이름으로 말하면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 菩薩) 그렇게 되겠지요.

절대로 나누어 생각을 마십시오. 우주가 바로 하나의 생명이란 말입니다. 하나의 생명이 그때는 바로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제 말이 아니라 불교(佛敎) 대승경전(大乘經典)은 다 그렇게 말씀해 있고 또는 오늘 탑비(塔碑)조성 회향(廻向)불사라하는 우리 금타 대화상님 이 분은 또 역설을 아주 강조했습니다. 특히 육조혜능까지 내려오신 정통법을 그대로 계승해서 말씀했단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러분들이 아까 명상(瞑想)할 때에 참선(參禪) 입정(入定)할 때에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 보리방편문이 바로 육조혜능(六祖慧能)스님이 해 놓으신  어록(語錄)인 육조단경(六祖壇經)에 있는 그대로 말씀입니다.

육조혜능 스님께서는 소주 대범사란 절에 가셔서 맨 첫 번째로 하신 법문이 뭣 인고 하면은 내가 지금 그대들에게 일체삼신자성불(一體三身自性佛)을  훤히 알게 해서 여러분들 스스로 불성(佛性)을 깨닫게 하리라! 이 말씀이 육조단경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항시 공부하기를 삼신일불(三身一佛),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 부처님자리를 떠나지 말고 공부하면은 여러 분들이 나한테 다시 올 필요도 없이 그냥 그 자리만 공부하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했단 말입니다

우리불자님들 그러시면 됩니다. 우리 스스로 법신, 보신, 화신을 다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계발을 미처 못 해 있습니다.

부처님가르침은 어떠한 철학(哲學)보다도, 과학철학(科學哲學) 실존철학 (實存哲學) 무슨철학 어떠한 철학보다도 더 심오(深悟)하니 인간의 현 실존(實存)이 뭣인가 실존을 밝혀있단 말입니다.

금타 대화상은 비단 그러한 종교(宗敎)철학적인 문제뿐만이 아니라 현대가 과학만능시대(科學萬能時代)이기 때문에 과학적으로 우주(宇宙)의 본질(本質)과 형량(形量)이라는 저술을 하셨습니다. 그 저술(著述) 내용도 그냥 자연과학적(自然科學的)으로 기계론적(機械論的)으로 이렇게 말씀해 놓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마음하고 물질(物質) 은 어떠한 차이가 있는 것인가. 물질의 근원(根源)은 무엇인가.

지금 현대의 제아무리 정밀(精密)한 양자역학(量子力學)도 물질이 뭣인가 모릅니다. 다만 하나의 장 에너지라, 하나의 에너지라고는 말하지만 그 에너지의 실체가 뭣인가? 이걸 모른단 말입니다.

금타 대화상께서 우주의 본질과 형량이라는 거기에서 에너지의 실체(實體)는 바로 불심(佛心)이라 말입니다. 구체화 시키면 바로 금진(金塵)이라, 훤히 빛나는 하나의 빛이란 말입니다.

물질이라는 것은 여러분들 대체로 알으시겠지요. 하나의 방사선(放射線), 하나의 방사광을 가지고 있는 광선(光線)이란 말입니다.

양자(量子)나 전자(電子)나 다 그렇습니다. 모두가 미세(微細)한 소립자(素粒子) 단계에서는 하나의 빛이란 말입니다. 빛의 근원적인 더 정밀한 빛이 뭣인가?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금진이라, 금진이란 말은 불교(佛敎)의 원래 구사론(俱舍論)에 있는 것인데 금타 대화상께서 재차 그것을 발견하신 것입니다.

우주는 결국은 금진이라 하는 광명(光明)으로 해서 우주(宇宙)가 충만해 있습니다. 어떠한 에너지고 모두가 다 금진광명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면 금진광명은 뭣인가? 이것은 바로 불심(佛心)이라, 불성(佛性)이라, 부처님의 성품이 바로 금진광명(金塵光明)의 순수한 생명자체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대화상 탑비(塔碑)제막식에 이렇게 참여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우리가 꼭 기억 할 것은 아까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정통성 문제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또는 하나의 종단적으로나 꼭 정통성이 살아 있어야 그래야 빛을 냅니다.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제일 쉽고 가장 확실합니다.

우리 불교인들이 참선(參禪)공부를 하고 염불(念佛)을 한다 하더라도 그냥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그렇게만 해도 큰 공덕(功德)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왕이면은 보다 더 큰 공덕을 입고 싶어 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고 또 그래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할려면 그 불성자리 내 생명의 본질인 동시에 우주만유의 본바탕인 불성이 우주에는 항시 영원히 빛나있다. 무량공덕(無量功德)을 갖춘 불성(佛性)이 우주에는 끊임없이 시간 공간을 초월해서 영원히 빛나있다. 이렇게 생각 하면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하는 것과 이렇게 생각 않고서 그냥 이름만 부르는 것과는 굉장히 차이가 있습니다.

화두를 참구한다 하더라도 마찬 가집니다. 그냥 덮어놓고 ‘이뭣꼬’ 라던가 ‘무(無)’라던가 그냥 화두(話頭)만 의심 한다고 해서 공부가 쭉쭉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화두를 드는 원인도 역시 근원자리를 근본 체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화두를 드는 것이지 그냥 덮어 놓고 의심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어떻게 공부를 하던지 간에 참선(參禪)공부 하나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하나 또는 염불(念佛)을 하나 주문(呪文)을 외이나 항시 우리 마음의 근원자리 불심자리를 놓치지 않아야 그래야 원칙적인 공부란 말입니다.

그래야 체를 안 여윈 자기 주체의식(主體意識)을 안 떠난 공부란 말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것이 제일 쉽습니다. 이렇게 하면은 다른 것 엿볼 필요가 없어요. 부처님 공부만 하기에도 우리는 너무나 바쁘고 자기인생이 너무나 짧습니다.

우리인생(人生)의 의의(意義)가 뭣입니까. 인간존재(人間存在)가 자기한테 갖추고 있는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계발하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그 가정생활 무슨 생활 또 직장생활도 해야 되고 뭣해야 되고 우리는 여러 가지 성불(成佛)의 법(法)외에 걸로 해서 얼마나 시간과 정력을 많이 빼앗깁니까. 그러기 때문에 그때그때, 그때그때 우리 생명의 손해를 안볼 라면은 잠을 아껴서 공부해야 되고 음식을 아껴서 공부해야 되고 또는 필요 없는 잡담을 아껴서 공부해야 되고 최선을 다해서 공부해야 만이 금생(今生)에 인간으로 태어난 보람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셔서 꼭 금생에 성자(聖者)들이 명백히 가르쳐주신 투명한 가르침 한 점의 의심, 우리가 의심 할 것도 없습니다. 본래로 부처인데 본래로 부처가 되는 것이 제일 쉽습니다. 제일 쉽고 제일 확실하고 제일 이익도 많습니다.

일반사람들은 다른 공부가 보다 더 이익이 많고 하지 않겠는가. 그러지만은 그렇지 않고서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원칙대로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대로 하면은 이른바 이행문(易行門)이라, 쉬울이(易)자 행할행(行)자 제일 쉽단 말입니다. 제일 쉽고 제일 이익이 나는 것입니다. 부처님보다 더 현명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부처님과 성자들 가르침 따라서 특히 그러한 가르침을 보다 역설 강조하신 우리 금타 대화상 가르침, 여러분들이 나중에 보시면 알으시지만 오늘 나누어 드리는 금강심론(金剛心論) 비록 어렵기는 어려워도 불교의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核心)이 거기에 대부분이 다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성불하는 데 어떠한 과정을 밟아서 할 것인가? 그런 문제도 중요한 문제 아닙니까. 과정을 모르면 결국은 암중모색(暗中摸索)한다 말입니다. 금강심론에 보면 해탈십육지(解脫十六地)라, 우리 범부중생(凡夫衆生)이 부처가 되는데 16계단으로 차근차근 과정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냥 단박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천재적이고 과거전생(過去前生)에 업장(業障)이 가벼운 분들은 더러 그런 분이 있을란가는 모르겠지마는 보통은 다 어느 수행방법을 거쳐서 간단 말입니다. 또 방법론에 있어서도 가장 세밀한 방법입니다.

어느 다른 종교(宗敎)나 또 불법(佛法)도 역시 다른 데가 있는 불법은 과정론이 우리 범부중생이 성불로 가는 과정론을 밝힌 가르침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생각할 때에 금타 대화상이 비단 불교사(佛敎史)뿐만이 아니라 철학사(哲學史)에 있어서도 굉장히 문화사적(文化史的)으로 아주 공부가 크신 분입니다.

아까 말씀마따나 본체론적인 진여불성을 여실하게 사진같이 꼭 생생한 사진 같이 밝히신 거라든가 또는 우리가 부처가 되는데 있어서 어떻게 어떠한 과정으로 부처가 되는 것인가 그런 문제라든가 또는 과학적(科學的)으로 우리가  물질이라는 것이 얼마나 존중히 생각하고 물질 때문에 욕심을 내고 싸우고 죽이고 전쟁을 하고 하지 않습니까.

그럼 물질(物質)의 본질(本質)이 무엇인가? 물질의 본질 이것이 물질 자체가 아니란 말입니다. 물질은 모두 허망(虛妄)한 것입니다.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 물질이 본래로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다만 우리중생이 지금 허상을 보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存在)는 인연(因緣) 따라서 잠시간 모양을 내는 것이지 실존적(實存的)으로 항시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불교는 무상(無常)이라, 무아(無我)라, 무상무아는 이것은 원래 없는 것을 우리중생들을 공부시키기 위해서 무상무아를 부처님께서 그냥 말씀하셨다. 이런 정도가 아니란 말입니다.

본래로, 본래로 생긴 모습이 무상이란 말입니다. 항상이 없이 변화무상(變化無常)한 것이 무상입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만법유전(萬法流轉)이라 모든 현상은 다 그때그때 변화무상(變化無常)하단 말입니다. 변화무상하기 때문에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존재(存在)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공(空)이라. 또는 무아(無我)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주 생긴 것이 그대로 무상이고 무아고 공입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꼭 금강심론을 잘 보셔서 제 말씀을 참고로 하시고 다른 것은 모르거니와 적어도 삼신일불(三身一佛)이라 부처님이 바로 내 생명인 동시에 우주생명이니까 부처님의 속성 가운데는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 이 다 갖추고 있고 이것은 기독교의 삼위일체(三位一體)하고도 대비가 된나 그것보다 도 훨썩 더 원칙적이고 체계적이지만은 대비 할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기독교(基督敎)와 불교(佛敎)와의 대화(對話)면에서도 불교의 삼신일불 (三身一佛)과 기독교의 삼위일체(三位一體)는 충분히 같이 토론도 하고 같이 음미하고 같이 화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이렇게 하셔서 어떠한 공부를 하시던 간에 순간도 떠남이 없이 일체삼신자성불(一體三身自性佛) 육조단경에서 akfg 고 여러분들이 지금 외이시고 있는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 에서도 재차 말씀해 있는 그 법문이 성불의 지름길입니다.

금타 대화상께서도 성불의 첩경이라 성불의 지름길이라 역설하셨습니다.

우리가 부처가 돼야 되는데 부처가 될라면 내 스스로 부처고 천지우주만유(天地宇宙萬有)가 바로 부처라는 그런 것에 대한 명확(明確)한 관념(觀念)이 먼저 앞서야 됩니다.

그러니까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리가 화두를 참구하나 또는 염불을 하나 주문을 외이나 항시 그 자리 본체의 자리를 여의지 않고서 공부를 하셔야 그래야 공부가 날로날로 진척이 돼서 드디어 우리 본래 갖추고 있는 불성(佛性)과 하나가 딱 돼 버린단 말입니다.

조금 지루하시지마는 제가 말씀을 조금만 더 권해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것인고 하면은 아주 보살행을, 부처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는 그런 분들 몇 분들을 제가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지금 여기에 아주 장황스러운 꽃들을 장식하지 않았습니까. 이것은 우선 이렇게 꽃이 보이니까 제가 가장 먼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마는 그 꽃 보살 이라는 분은 저는 이름도 제가 잘 모릅니다. 한 15년 전에나 그때 만나서 큰 법회 있을 때 마다 꼭 내려와서 꽃을 차에다 하나 싣고 와서 장엄해 주고 하는 그런 보살입니다. 다만 이 분은 꽃꽂이 선생이라는 것은 제가 알고 있지마는 그 외는 제가 통 모릅니다. 이 분이 어제 밤 에도 꽃을 차에다가 몽땅 싣고 오셔 가지고서 이와 같이 장엄을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분의 공로에 대해서 이름은 모르나 꽃 보살이고 또는 마음 도 꽃같이 고와서 꽃 보살이라고 저는 기억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같이 오신 진각심보살은 고등학교 수학 선생님 이었습니다. 수학선생 아주 수재 같은 그런 분인데 어느 법회에 가나 꼭 허드렛일을 자기가 맡아서 합니다. 옷도 항시 수수하고 한 번도 화장기 있는 얼굴을 못 봤습니다. 어느 법회에 가나 꼭 제일 허드렛일만 골라서 이 분은 하시는 분입니다. 제가 선방에 있을 때나 어디에 있을 때나 저는 그런 모습을 꼭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고 또 한 분은 지금 저 자리에도 계십니다마는 백발이 성성해 계시는 우리 영주보살님 이남덕 박사님 말입니다. 80고령이십니다. 여러 가지 공로를 인정받아서 저번에 한글날 서울의 세종회관에서 국민문화훈장을 받으셨어요. 국민문화훈장을 올해 나이가 80세인데 아주 독실 한 불자이십니다. 지금 80고령인데 지금까지도 항시 공부합니다. 지금은 저 대자암에다가 조그만한 방 하나 얻어 놓고서 결제할 때마다 빠짐없이 공부하시는 분입니다. 불광지나 여러 불교 잡지나 다른 잡지에다가도 부처님  찬탄을 수 없이 많이 하신 분입니다.

또 한 분은 보적거사님 이 분은 서울대 법학박사입니다. 그러고 대만 가서도 부전공이 중국어기 때문에 대만 가서도 몇 년 동안 계시면서 중국어에 통달한 분입니다. 한데 근래 중국 선지식들을 그때그때 한국에 소개를 많이 하신 분이어요. ‘화두놓고 염불하세‘ 그 책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좋은 책들을 많이 그렇게 소개하고 특히 불광지나 또는 여러 가지 불교 잡지에다가 아주 훌륭한 논문이나 또는 그때그때 글을 아주 많이 실으셔서 참 정말로 부처님에 대한 충실을 다 하신 그런 분입니다. 그런 분인데 이 분이 조금도 상이 없습니다. 어느 법회에 가서 보나 항시 저 끄트머리에 앉아가지고서 항시 그 해맑은 미소를 띠우고 계셔요. 오늘 아침에도 보니까 일반 우리 스님네와 같이 올라가서  열심히 등을 거니라고 애쓰고 있어요. 어느 때보나 그 맑은 얼굴 어느 때보나 미소를 띄운 얼굴입니다.

그러고 또 한 분은 아까 우리 주지스님도 얘기를 했습니다마는 지금 성륜사 성안거사 보통 우리가 박기사라고 우리가 쉽게 그러지 않습니까. 궂은일은 다 하고 또 잔일은 다 합니다. 지금 전기배선이나 뭣이나 이 양반 없으면 도저히 우리가 할 수가 없어요. 그렇게 하면서도 한 번도 저는 찌푸리는 때를 못 봤습니다. 십년 세월동안 조금도 변함없는 겁니다. 누가 무슨 칭찬 하는 것도 아닌 것이고

또한 분은 여러분들이 지금 보시지 않습니까. 여기 이 조경이 상당히 품위 있게 잘 됐습니다. 다른 큰 스님들 부도탑 조경에 비해서 비용은 아마 십분의 일도 못 들은 것입니다마는 그래도 품위 있고 질서 있게 잘 돼있습니다. 근데 우리 아까 주지스님이 말 한바와 같이 임창욱 거사님이 비용은 시주를 많이 했습니다. 했는데, 그때마침 울산에 계신 어느 처사님이 아래 절로 수양하러 왔어요. 수양하러 온 때 우리가 조경하게 됐는데 마침 그 양반이 아주 일등 조경사란 말입니다. 그래서 그 뙤약볕에서 지금까지 며칠 전까지 사뭇 매일 같이 작업복 입고서 고생고생 굉장히 많이 했습니다. 그래도 한 번도 얼굴빛이 흐릴 때가 없어요. 보수를 받는 것도 아닌 것이고 울산계시는 그런 거사님인데 저는 이름을 제가 잘 모릅니다. 다만 울산서 오신 아주 투철한 조경사인 데 이상하게 인연이 되어 가지고서 와서 봉사를 하신 거사님이십니다.

그리고 또 한분은 제가 소개드리는데 이 분은 우리 최보살님 이라고 태안사에서 제가 만난 지는 한 15년 남어 됩니다. 태안사 있을 때 그 공양주로 해서 말없이 궂은 일 다 하시고 그렇게 계시다가 또 옛정을 못 잊어서 그랬는가는 모르겠지마는 여기까지 따라와서 지금도 계세요. 15년 전에 만날 때나 오늘 지금 만날 때나 얼굴이 지금도 똑 같습니다. 왜 똑 같는가 한 번도 성낼 때가 없어요. 한 번 찌푸리는 때를 못 봤습니다.

이러한 훌륭한 거사님 보살님들은 그야말로 참 아주 그 불법의 교리는 많이 모르신다 하더라도 몸으로 불법을 여실하게 실천하시는 참 그야말로 보살의 화신이라고 생각해서 저도 마음으로 깊이 감탄하고 있습니다.

오늘 금타 대화상 탑비조성 회향불사를 맞이해서 또 우리가 잊지 못 할 분은 여기 제 옆에 계시는 보화지죽큰스님, 보화지죽큰스님은 금타 대화상 생전에 유일하게 금타 대화상을 시봉도 하고 금타 대화상 상좌로 해서  모시던 그러한 큰스님이십니다. 근데 이번에 마치 때 맞게시리 금타 대화상 영정, 영정이라 하는 것은 도인들, 그런 훌륭한 선지식들 초상화가 영정이란 말입니다. 우리 스님도 영정을 전에는 잘 모신 분인데 지금은 노쇠하셔서 본인이 모시기가 곤란스러우니까 제일 잘 아는 분한테 부탁해서 꼭 어제 영정을 모시고 오셨습니다. 나중에 여러분들께서 저쪽 정중당 안을 들어가 보시면 금타 대화상 영정을 보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절에서는 사형님 되십니다. 저도 참 특히 이번에 맞추어서 더구나 영정을 모시고 오시고 또 대화상 이와 같이 탑비(塔碑) 조성 회향 때맞추어 오셔서 더욱 더 반갑고 감사하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불자님들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부처님가르침의 정통이 여러 가지 큰 스님들이 많이 인정을 하셨지만 특히 근래에 와서 금타(金陀) 대화상께서 가장 확실하게 금강심론(金剛心論)에서 부처님 정통을 밝히신 가르침이 역력하십니다. 오늘 책을 가지고 가셔서 좀 어려우시더라도 한문(漢文)을 한글로 토를 다 달고 있으니까 잘 몇 번만 읽으시면 충분히 해결 하실 수가 있습니다.

공부를 하셔서 꼭 금생(今生)에 성취를 해서 금생에 성불(成佛)을 하셔서 다시는 생사윤회(生死輪廻)하는 또 다시 사람 되고 또는 잘못 살아서 개 되고 소가 되고 지옥(地獄) 들어가고 그런 고통이 없이 극락세계(極樂世界), 금생 생을 마치자마자 극락세계로 꼭 향하시기 바랍니다.

극락세계 가시는 것이 제일 쉽습니다. 부처님 말씀대로 살면 제일 쉽고 또 그러시면은 돌아가실 때 그대로 죽엄이 없이, 죽엄이 없이 우리생명 그대로 바로 극락세계에 가서 태어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 말씀이 아닙니다. 꼭 그렇게 하셔서 다시 없이 부처님의 올바른 제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