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4 호>
*2000년 5월 24일 MBC - TV특강 *
무지무명(無知無明)을 밝히는
성자(聖者)의 지혜(智慧)
우리 불자님들 대단히 반갑습니다. 그 야단법석(野壇法席), 야단법석은 가장 자연스러운 법회(法會)입니다. 법회인데, 오늘은 그런 자연스러운 법석(法席)보다도 만들어진 법석이기 때문에 조금 부자연스럽기는 합니다만은 그래도 뜻은 똑같습니다.
그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라는 것은 중국(中國)에 국한되는 것이지만은 굉장히 의의(意義)있는 그런 시대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공자(孔子)나 노자(老子)나 맹자(孟子)나 또는 장자(長子)나 그런 여러 성인(聖人)들, 철인(哲人)들이 나와서 서로 자기주장이 옳다고 그렇게 논쟁(論爭)도 하고 또는 자기 제자들도 공자는 3.000명 제자들을 말하니까 아주 어마어마하지 않습니까.
그런 때인데 그때에 나오신 분들이 이른바 제자백가(諸子百家)여요. 그러니까 수가 사실은 189명이나 된다는 것인데, 주로해서 백수로 제자백가라고 그럽니다. 제자백가 그런 분들은 아주 훌륭한 성자(聖者)도 많이 있고 또는 철인(哲人)도 많이 있고 합니다.
그래서 그분들이 그와 같이 가령 공자님은 삼강오륜(三綱五倫)이라든가, 인의예지(仁義禮智)라든가 그런 쪽으로 말씀을 했는가 하면은 노자는 또 연단무위라. 연단무위라, 인간이 조작한 자연스럽지 못한 것은 별로 가치가 없다. 모두가 천연(天然)자연적인 그런 것이 가치가 있는 것이지 인간이 억지로 윤리(倫理)를 정하고 뭣 정하고 해 놓으면은 더러는 형식에 취우치고 부자연스러워서, 또는 부자연스러워서 그것은 가치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한단 말입니다.
이런 투로 그런 분들이 많이 나와서 서로 말씀들 하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혼란스럽겠습니까.
우리 인간성(人間性)은 맹자(孟子)는 착한 것이라고 하면은 또 순자(荀子)는 착하지 못한 악한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말입니다.
이렇게 아주 또 복잡다단한 시기가 이른바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인데 오늘날은 즉 그런 정도가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 이 지구(地球)촌 시대, 정말 정보(情報)의 홍수시대, 이런 시대는 옛날 제자백가 시대보다도 훨썩 더 혼란스럽습니다.
따라서 이런 시대에는 바른 지혜(智慧), 바른 지혜가 없으면은 우리가 살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바른 지혜는 어떠한 지혜인가? 저는 불교인이니까 우선 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님 말씀부터서 제가 먼저 하겠습니다.
그 열반경(涅槃經), 열반경은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돌아가실 때 하신 말씀이 열반경 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이라. 대반열반경이라, 왜 그러는고 하면은 그 대반(大般)이라는 말은 조금도 흠절이 없는 모든 것을 다 포섭했다는 뜻이 대반이라는 뜻이고, 따라서 그 부처님께서 열반(涅槃) 들으실 때니까 마지막으로 모든 법문(法門)을 다 포괄(包括)을 시켜서 우리한테 말씀을 하셨단 말입니다.
그 가운데 가서 이런 법문이 있습니다.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이라. 일체중생실유불성이라, 모든 중생(衆生)은 다 부처님의 성품(性品)이 있단 말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나와 있는 것이 여래상주무유변역(如來常住無有變易)이라, 부처님의 딴 이름이 바로 여래(如來)입니다. 진리(眞理)그대로 조금도 보탬도 없고 조금도 흠이 없는 진리 그대로를 깨달은 성자가 이른바 여래입니다. 같을 여(如)자, 올 래(來)자, 진리에서 그대로 오셨단 말입니다.
여래상주무유변역(如來常住無有變易)이라, 그런 부처님은 항시 계시고 무유변역(無有變易)이라, 조금도 변함이 없이 있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이 현상적(現象的)인 자기 인식(認識) 능력의 한계(限界), 그 밖에는 모르는 것입니다. 내가 있으면 남이 있고 또는 좋은 것이 있으면 나쁜 것도 있고 그러한 현상적(現象的)인 상대적(相對的)인 것밖에는 모른단 말입니다. 이른바 시간(時間), 공간(空間)의 그런 범주(範疇)내에 것만 우리 인간들은 압니다.
그러나 성자들은 근원적(根源的)인 근본적(根本的)인 그런 도리를 훤히 알으신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을 성자(聖者)만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체중생실유불성이라, 모든 중생이 다, 다 성자가 될 수가 있고 또 성자와 똑같은 그러한 지혜(智慧)를 갖추고 있다는 말입니다.
다만 우리 중생들은 깨닫지 못하고 성자는 깨달았다는 그 차이뿐인 것입니다.
그 기독교(基督敎)바이블 마태복음서 보면은 이런 대목이 있어요. 예수님이 자기 제자들한테 하는 말이 ‘그대들은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 같이 온전한 사람이 되어라.’
그리니까 우리 인간이라 하는 것은 지금은 여러 가지 번뇌(煩惱)때문에 온전한 사람이 못 돼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닦기만 닦으면은 하느님같이 온전한 완벽한 사람이 될 수가 있단 말입니다.
아, 기독교인들께서도 신학(神學)을 국한되게 공부하시는 분들은 그런 말씀에 대해서 긍정(肯定)을 하기를 주저합니다.
그러나 초기 아우구스티누스라든가 또는 9세기의 에리우게나 특히 15세기의 리콜라우스쿠자누스 이런 분들은 주로 범신론(汎神論)적인 사상(思想)을 많이 가졌기 때문에 그분들은 추기경(樞機卿) 되고 주교(主敎)가 다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분들 말씀은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모든 사람은 하느님 같이 완벽한 신성(神性)을 다 갖추고 있고 완벽한 사람이 될 수가 있다고 했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부처님 말씀이나 똑같습니다. 지금 우리는 다종교(多宗敎)사회(社會), 또는 다종교 가정(家庭)이 되고 있습니다.
한 집도 불교(佛敎)를 자기 부모님이 믿는다고 해서 아들이나 며느리나 자기 사위까지 불교를 다 믿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런 집도 있겠지만은 즉 한 가정에서 아버지 다르고 어머니 다르고, 지금 우리 대통령(大統領)도 자기는 지금 가톨릭교를 믿고 있고 그 양반 부인께서는 개신교를 믿고 있지 않습니까. 아들이나 딸들은 불교를 믿는가 뭘 믿는가 잘 모르겠습니다만은 하여튼 이와 같이 한 가정에서도 다종교 가정이란 말입니다.
만약 불교(佛敎)와 기독교(基督敎)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생각 할 때는, 종교(宗敎)라는 것은 하나의 신앙(信仰)체계인데 가장 깊은 신념(信念)이 되는 것이 종교인데 따라서 그 가정이 종교가 다르다고 생각 할 때는 화합(化合)이 될 수가 없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아까 말씀마따나 오늘 이 세대적인 상황, 우리 가정의 상황 따라서 정말로 우리가 마음 편하게 살아야 됩니다. 마음 편하게 살다보면은 다른 사람의 것이나 다른 사람의 지혜(智慧)나 다른 성자(聖者)의 지혜를 우리가 이해도 해야 한단 말입니다.
꼭 자기 한 것은 100% 다 옳다고 생각하고 자기의 허물은 못 보면서 다른 것은 그르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의 가르침도 모든 존재(存在), 모든 생명(生命)의 본바탕이 무엇인가? 이 자리를 깨달았고 또는 기독교도 똑같습니다.
하나님이라고 하면은, 부처님은 옳은 것이고 하나님은 옳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생각 할란가 모르겠지만은 절대로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이란 그 표현이 다른 것이지 이른바 개념(槪念)내용, 거기에 들어있는 의미(意味)는 똑같단 말입니다.
언제어디에나 계시고 모든 존재, 인생(人生)과 우주(宇宙)의 모든 존재의 근본(根本) 본바탕자리가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무소부재(無所不在)하고 무소불능(無所不能)이라, 하나님이 안 계신 데가 없고 하나님이 모르는 것이 없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이란 개념에 대해서 절대로 섣불리 생각하고 부처님은 훨썩 높다, 아니면 다른 종교는 저 밑이다. 이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기독교인도 똑같이 하나님 그러면은 더 높고 불교 부처님 그러면은 그냥 외도(外道)다. 이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은 벌써 불교가, 우리 불교인들이 불교만 옳다고 생각하면은 부처님 뜻이 아니고 또한 동시에 기독교인들이 기독교만 옳다고 생각 한 것은 예수님의 뜻이 아닙니다.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표현은 다르다고 하더라도 우리 불가의 부처님이나 기독교의 하나님이나 이슬람교의 알라신이나 똑같단 말입니다. 모두가 인생(人生)과 우주(宇宙)의 근본(根本) 생명(生命)자리를 깨달은 분들인 것이고 따라서 도본무이(道本無二)라. 원래 진리(眞理)란 것은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주를 관통(貫通)한 진리라는 것은 똑 같습니다.
공자님은 우리 인생과 우주라는 것은 어질 인(仁)자, 모두가 다 어질다는 뜻으로 해서 모두가 조금도 거짓이 없는 어질다는 뜻으로 해서 다 일관되어 있단 말입니다.
그런 것이라든가, 또는 도가(道家)의 리(理)와 기(氣)라든가, 그런 것이 표현이 다른 것이지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모두가 우주(宇宙)의 본바탕 생명(生命)의 실상(實相)을 그대로 말씀한 가르침이기 때문에 설사 표현은 다르다 하더라도 우리가 표현 다른 그것가지고서 옥신각신 싸울만한 아무런 꺼리가 없습니다.
우리 불교(佛敎)를 공부할 때 가장 어려운 것이 무엇인가 하면은 제법(諸法)이 공(空)이라. 불교경전(佛敎經典)에서 제법공(諸法空)이라, 제법이라는 것은 모든 존재(存在)를 말합니다. 존재를, 존재하는 것은 다 비었다. 공(空)이단 말입니다.
제법공(諸法空)이란 도리를 모르면은 불교를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가까스로 소승(小乘)만 아는 것이지 대승(大乘)을 이해 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대승이라는 것은 정말로 성불(成佛)하는 가르침인데 또는 만 중생을 포섭해서 만 중생을 다 부처가 되게 하는 그런 가르침인데 대승이 되기 위해서는 방금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일체 눈으로 보이는 것이 허망(虛妄)하다. 모두가 다 공(空)이다. 이런 소식을 알아야 대승이 된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중생들은 모두가 공이라는 소식을 물리학(物理學)도 동원하고 불경(佛經)도 동원하고 여러 성자의 가르침 따라서 정말로 공(空)인 것을 허망무상(虛妄無常)한 것인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된단 말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허망무상하지 않은 참다운 실상(實相)을 구해서 나갈 수가 있는 것이지 허망무상 한 것을 허망하다고 모르면은 이것은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불교인들이 흔히 무아무소유(無我無所有)라, 무아무소유가 무엇인가? 이렇게 의문도 가지고 있고 불교에서 무아무소유를 말하는데 무아무소유가 어째서 무아무소유인가?
무아(無我)라는 것은 내가 없다는 뜻 아닙니까. 무소유(無所有)는 내 소유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분명히 나라는 존재가 이렇게 있고, 내 집도 있고, 내 아내도 남편도 있고, 재산도 있고, 감투도 있는 것인데 왜 그런 소유(所有)가 없다고 하는가? 그런데 사실은 그것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못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쉽게 생각 할 때는, 원래는 나도 있고 내 소유도 있는 것인데 다만 성인(聖人)들의 가르침이 그런 집착(執着)을 좀 털어버리기 위해서 무아무소유를 말씀하시고, 우리가 공부를 많이 해야 무아무소유를 비로소 깨닫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시기가 쉽겠지요.
그러나 본래(本來)로 진리(眞理)가 무아무소유(無我無所有)입니다. 본래로 내가 없고 또는 내 소유가 없는 것입니다.
내 몸 이라는 것은 잘나고 못나고 상관이 없이 다만 각 분자(分子), 각 원소(元素)가 합해서 잠시간 이렇게 진동(振動)해서 이렇게 저렇게 모양을 보일뿐이란 말입니다. 일초동안도 내 몸이 그대로 같을 때가 없습니다.
그 부처님법문에 인연소생법(因緣所生法) 아설즉시공(我說卽是空)이라, 인연(因緣)따라서 이루어진 존재(存在)는 즉시 공(空)이라, 바로 공이란 말입니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이런 모양같이 보이고 있을 뿐인 것이지 어느 순간, 어느 순간도 같은 모양이 없는 것입니다.
어려운 말로 하면은 어느 공간(空間), 어느 시간(時間)내에도 존재(存在)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없는 것을 우리 중생(衆生)들은 그걸 모르니까 그냥 허상(虛像)으로 지금 움직이고 있는 것을 존재(存在)한다고 본단 말입니다.
따라서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중생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한다고 우기고 있고, 그렇게 함으로 해서 모든 인생고(人生苦)가 한량(限量)없이 전개가 된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인생고를 없앨라고 하면은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 명명백백(明明白白)히 있는바와 같이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이라, 오온법(五蘊法)이 다 공(空)했음을 비추어봐서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이라, 모든 인생(人生)의 고액(苦厄)을 이길 수가 있단 말입니다.
원래 ‘나’라는 것이 꿈같이 또는 허깨비 같이 물속에 비친 달그림자같이 허망(虛妄)하다. 이렇게 생각을 분명히 해야 인생고(人生苦)를 없앨 수가 있는 것이지 나는 이대로 건재(健在)하고 어제나나 오늘이나 똑같다. 또는 백년 뒤에도 같을 것이다. 죽은 뒤에도 딴 데가 태어나도 금생(今生)에 받은 이런 몸으로 태어 날것이다. 이렇게 생각한단 말입니다. 이래서는 인생고를 못 넘어 섭니다.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나라는 존재(存在)는 어느 시간(時間), 어느 공간(空間)속에나 그대로 고정적(固定的)으로 존재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 스피노자, 스피노자를 저는 굉장히 좋아합니다. 그분이 분명히 성자(聖者)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철학자(哲學者)로 해서는 굉장히 참 존경스러운 사람이란 말입니다.
그 왕자라든가 부자라든가 지위가 높은 대부들이 여러 가지로 도우려고 해도 그런 도움을 받지 않고서 그 안경알, 안경알을 자기 하숙방에서 갈면서 거기서 나온 수입가지고서 자기의 여러 가지의 하나의 저술(著述)적인 활동을 하면서 비용을 충당을 시켰단 말입니다.
그런데 스피노자는 그 나중에 칸트라든가 니체라든가 쇼펜하우어라든가 그런 훌륭한 철인들의 스승 되는 그런 귀감을 많이 보이고 또 학설도 그랬단 말입니다. 스피노자가 말한 말 가운데서 모든 사람들이 회자하고 옮기고 서로 피차 탐구(探究)하고 그런 구절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 인고 하면은 ‘영원(永遠)의 상(像)에서 현실(現實)을 관찰하라. - 영원의 이미지image에서 현실을 관찰하라. - 그러면은 모두는 영원에 참여한다.’ 성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역시 알기는 분별지혜(分別智慧)는 바로 알았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헌데 이분의 그 말이 그 뒤에도 여러 철인들의 입에 자주 회자가 되었습니다. ‘영원의 이미지에서 영원의 차원(次元)에서 현실(現實)을 관찰하라.’
상대편을 대할 때도 영원의 차원에서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내차원에서 보지 않습니까. 그런데 자기 차원에서 볼 것이 아니라, 영원의 차원 즉 불성(佛性)의 차원 또는 하나님의 차원에서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오 주여! 하나님을 끊임없이 외우라고 하고 또 외이지 않습니까.
우리 불교인들은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염불(念佛)할 때 끊임없이 염념상속(念念相續)이라, 생각 생각에 상속(相續)적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헌데 그런 말씀들이 그냥 하나님이나 부처님이 저 밖에가 있어가지고서 우리가 부르면은 우리한테 덕(德)을 주고 공덕(功德)을 준다. 우리한테 즉 가호(加護)를 준다. 이런 정도의 뜻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 뜻은 무엇인고 하면은 그 실상(實相)자체가 어느 것이나 모두가 부처님 아님이 없고 어느 것이나 모두가 다 하나님 아님이 없단 말입니다.
그렇게 한다고 생각 할 때에 우리가 그 사람한테 대해서 가장 그 사람을 존중 하는 것이고 그 사람을 가장 대접을 잘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을 주고 그런 것보다도 그 사람을 본래(本來)대로, 본래대로 우리가 존중을 해야 그 사람한테 대해서 가장 좋은 대접이란 말입니다.
자기 아내한테나 남편한테나 누구한테나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을 부처님같이 알고 또는 아내를 하나님같이 알고 말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대접이란 말입니다.
이것이 방금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스피노자가 ‘영원의 차원에서 현실을 관찰하라. 그러면은 모두가 다 영원에 참여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살아야 됩니다. 아까도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리는 지금 다종교(多宗敎)사회에 살고 있고 또는 가정(家庭)도 역시 다종교(多宗敎)가정적인, 그런 자칫 하면은 비극(悲劇)으로 치달릴 수가 있는 그런 소지가 다분히 있단 말입니다.
이런 때 있어놔서 우리가 꼭 성자(聖者)의 지혜(智慧), 성자의 지혜로 우리가 판단하고 관찰(觀察)을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은 우리의 불행(不幸)이나 정보(情報)의 홍수(洪水)가운데서 우리가 바로 헤치고 살수가 없단 말입니다.
예수님의 지혜 또는 우리 부처님의 지혜, 공자의 지혜, 노자의 지혜, 이런 지혜들은 모두가 다 올바른 실상에서 실상적인 사실을 사실로 보는 그런 지혜입니다.
이렇게 제가 말씀 드리면은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일반사람들은 그런 지혜까지 도달을 할려면은 굉장히 어렵지 않는 것인가? 그런데 사실은 제일 쉬운 것입니다.
부처님 지혜 쪽으로 가기도 제일 쉽고 또 예수님 지혜 쪽으로 가기도 제일 쉬운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그분들은 모두가 다 우주(宇宙)의 도리에 딱 알맞게 말씀했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衆生)들이야 천차만별(千差萬別)로 말씀하고 생각하고 분별시비(分別是非)해서 그렇게 스스로도 괴롭고 남도 괴롭히지만은 그런 성인(聖人)들 말씀은 우주(宇宙) 생긴 대로 사람 생긴 대로 말씀을 했단 말입니다.
어느 것도 실상(實相)을 떠나서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못난 사람들이든지 간에 못난 것은 허망(虛妄)한 모양이, 실지로 있지 않은 허망한 것이 못나게 우리 중생이 보이는 것이지 아, 예수님이 보고 우리 부처님이 보시고 한다고 생각 할 때는 그렇게 못나게 안보인단 말입니다.
귀머거리나 또는 바보나 어떤 사람이나 또는 지체부자유(肢體不自有)자나 이런 것은 잠시간 금생(今生)에 인연(因緣)따라서 그렇게 지금 보일뿐인 것이지 그 사람의 실상(實相)은 똑같이 부처님이요. 바로 하나님의 딸이요 아들이란 말입니다.
여러분들께서 자기 집안에 자기들이 지금 기독교(基督敎)를 믿는다고 하더라도 부처님 불교(佛敎)를 믿는 며느리나 사위가 들어 올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경우도 절대로 종교적(宗敎的)인 그런 문제가지고서 시비(是非)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건 참 어리석은 일입니다.
아, 네가 기독교 하나님 믿으면 열심히 하나님 뜻으로 해서 바로만 믿어라. 이렇게 할 것이지 믿지 말라고 할 필요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똑같은 것을 새삼스럽게 우리가 서로 피차 그와 같이 갈등(葛藤)지게 할 만한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리가 부처님의 뜻이나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라 제일 쉽다는 말씀을 제가 했는데 역시 가령 우리가 하루를 산다 하더라도 아침부터 밤까지 그 허망(虛妄)한 분별시비(分別是非)를 얼마나 많이 합니까.
그러나 남편을 보나 아내를 보나 또는 자기한테 섭섭하게 대하는 사람을 보나 어느 누구를 보든지 부처님같이 하나님 아들과 딸 같이 생각한다고 할 때는 우리 마음이 얼마나 편하겠습니까. 사실이 그렇단 말입니다. 사실로,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꼭 물속에 비치는 달그림자를 보는 것이나 똑같습니다. 물속의 달에는 사실은 달이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 원리(原理)를 모르고 산다고 생각할 때는 앞서 말씀드린바 우리가 우리 스스로 망동(妄動)도 많이 하고 말도 헛말도 많이 하고 한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사는 보람이라는 것은 어떻게 하면은 자기가 현재 믿고 있는 종교(宗敎)를 통해서 마음을 깨달을 것인가? 영원적(永遠的)인 진리(眞理)를 우리가 깨달을 것인가? 깨닫는 방법적인 문제가 또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불교인(佛敎人)들은 역시 여러 가지 깨닫는 방법이 있습니다. 의심(疑心)하는 방법으로 해서 이른바 화두공안(話頭公案)이라 하는 그런 문제의식(問題意識)을 가지고서 깨닫는 방법을 삼을 수도 있는 것이고,
또는 우주(宇宙)가 바로 어느 것이나 다 부처님 아닌 것이 없어놔서 새삼스럽게 뭘 의심할 필요도 없고 또는 문제를 잡을 필요도 없이 천지우주(天地宇宙)는 모두가 부처님뿐이니까 부처님만 항시 생각하고 가면 되지 않겠는가. 나도 부처님이고 너도 부처님이고 천지우주 모든 자연현상(自然現象)도 부처님이고 하기 때문에 부처님만 생각하고 가면은 본래 부처인지라 부처가 되지 않겠는가. 이런 방법도 있단 말입니다. 이런 방법은 이른바 염불(念佛)하는 방법 아닙니까.
또는 명상(瞑想)이라, 잠자코 명상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건 무엇 인고 하면은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도 없이 우주가 바로 부처님 인지라 가만히 우리 마음을 보고서 마음을 관찰하고 마음을 관조(觀照)해서 마음을 닦아 나가면 본래 부처니까 아, 부처가 되지 않는가? 아, 그런 방법도 있단 말입니다.
우리가 기독교(基督敎)인들을 두고 본다 하더라도 오 주여! 오 주여! 하고 그냥 그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마음이 다른 것에 헷갈리지 않게시리 하는 방법도 있겠지요. 그런 기독교식 방법으로 해서라도 그때는 기독교인들은 무방합니다.
또는 불교인이라 하더라도 꼭 부처님이라야 직성이 풀리고, 하나님이나 다른 이름을 부르면 직성이 안 풀어진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부처님 이름을 부르면 되는 것이고 하나님 부르나 뭣 부르나 팽 그 자리가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고서 더러는 가만히 이름도 안 부르고서 잠자코 마음을 비추어 가는 그런 방법도 있을 것이고,
또는 우리 마음이라는 것이 금생(今生)에 태어나서도 여러 가지 망상(妄想)을 많이 피우고 또는 헛된 행동(行動)을 많이 해서 이른바 업(業)을 많이 지었단 말입니다. 업을 많이 짓고 또는 과거전생(過去前生)도 업을 지어서 내려오는 것이고 말입니다.
우리 생명(生命)이라는 것은 우리 업식(業識)이, 업(業)을 지은 우리 의식(意識)이 소멸(消滅)될 때까지는 항시 윤회(輪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過去)도 몇 생(生)을 두고 지금 우리가 윤회하는지를 모릅니다. 더러는 개가 되었다. 소가 되었다. 또는 부자가 되었다. 또는 그야말로 왕자가 되었다 말입니다.
불교(佛敎)에 십선업(十善業)이라. 열가지 선(善)을 닦으면은 다시 태어나면은 왕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는 지금 현대 평범한 사람이지만은 과거(過去)로 소급(遡及)해 올라가 본다고 생각 할 때는 여러 가지 존재(存在)가 많이 되었단 말입니다. 사람이 되고 개가 되고 소가 되고 또는 왕자가 되고 또는 우리가 죽어서 내생(來生)도, 금생(今生)에 깨달아서 부처가 되어 버리면은 윤회(輪廻)은 끝납니다.
그러나 금생에 깨닫지 못하고 금생에 죽는 다고 생각 할 때는 또 금생에 지은대로 내생으로 흘러간단 말입니다. 잘 못살았으면 지옥(地獄)이나 아귀(餓鬼)나 축생(丑生)이나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지는 것이고 좀 잘 살았으면 인간(人間)이나 천상(天上)이나 또는 아수라(阿修羅)로 간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도리를 분명히 알고서 금생에 우리가 몇 십년 되는 나그네 길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이것은 기독교인나 불교인이나 이슬람인이나 모두가 다 그 교조의 말씀대로 우주(宇宙)의 본(本) 실상(實相), 우주의 생명의 본 실상을 우리가 깨달아야 한단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지상명령(至上命令)입니다.
어떻게 깨달아야 할 것인가? 그 깨닫는 방법은 아까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그 종교의 교조가 말 한대로 우리가 그대로 하면 되는 것입니다.
불교(佛敎)인들은 염불(念佛)이나 또는 주문(呪文)이나 말입니다. 또는 가만히 명상하는 그런 명상(瞑想)이나 이렇게 하면 되는 것이고,
기독교(基督敎)인들은 오 주여! 오 주여! 하나님이시여! 하고 마음이 헷갈리지 않도록 거기다가만 초점을 맞추고서 기도(祈禱)를 모신다고 생각 할 때는 꼭 틀림없이 예수같이 참답게 우주의 본바탕을 깨닫는단 말입니다.
내 자성(自性), 내 참다운 생명(生命)을 구할 때는 꼭 생명(生命)적으로 인격적(人格的)으로 구하는 것이 우리가 성불(成佛)해 가는 하나의 지름길이 됩니다.
질문 : 요즘 현대사회(現代社會)는 과학(科學)이 너무 발달하고 물질적(物質的)으로 풍요(豊饒)를 누리고 있습니다. 먹고, 입고, 쓰고, 자고 이런 것들이 너무나 풍요를 누리는데요. 그런데 반대로 정신적(精神的)으로 도덕적(道德的)으로 황폐(荒廢)해 지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에 어떻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 인생(人生)이 될 건지 새로운 가치관(價値觀)을 간략하게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 : 석가모니(釋迦牟尼)같이 살고, 예수님같이 살면 되는 것인데, 아, 그분들은 정말 어떻게 살았는가 하면은 인생(人生)과 우주(宇宙)의 근본(根本)도리를 깨달은 분들이란 말입니다. 근본을 결국 깨달아 놓고 보면 우주(宇宙)가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生命)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보나 저것을 보나 어느 것을 보나 모두가 다 하나의 우주의 참다운 생명(生命)의 화현(化現)이구나. 다시 바꿔서 말 하면은 부처님의 화신(化身)이구나. 또 기독교(基督敎)식으로 말한다고 하더라도 하나의 하나님의 형상화(形象化)구나. 이렇게 생각하면서 어느 순간이나 불교(佛敎)인들은 부처님을 안 떠나고 기독교(基督敎)인들은 어느 순간이나 하나님을 안 떠나고 그렇게 사는 생활이 가장 바람직한 좋은 생활입니다.
질문 : 현대(現代)생활이 워낙 바쁘다 보니까 진정한 자아(自我)를 찾는다는 것, 진아(眞我)를 깨닫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더라구요. 왜 사람들이 진아(眞我)를 찾아야지 되고 또 평소 생활 속에서 어떻게 추구(追求)해야 되는지 그것 좀 말씀해 주면 고맙겠습니다.
답 : 참 아주 좋은 질문이십니다. 역시 참다운 진아(眞我), 참다운 나, 참다운 나를 모르면은 우리 생활이 부자연스럽고 불행(不幸)합니다. 모두가 다, 가령 우리가 지나치게 물질(物質)을 탐한다거나 또는 감투를 탐한다거나 또는 무슨 종파(宗派)를 탐한다거나 이런 것도 모두가 다 참다운 진아(眞我)를 몰라서 그럽니다.
그러기 때문에 참다운 진아(眞我)를 모르는 생활은 허깨비 보고 즉 말하자면 꿈보고 쫓아가고 허깨비가 참말로 있다고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것이 있고 하기 때문에 마땅히 그런 허망(虛妄)한 것 보고서 우리 마음을 거기다가 팔게 되면은 그때는 필연적(必然的)으로 우리가 불행(不幸)하게 됩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개가 못에 비친 지 그림자를 하나의 지 그림자인데 사실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 못에 있는 개하고 싸우기 위해서 들어가서 빠져 죽어버리듯이 우리 사람도 허망(虛妄)한 것을 쫓다 보면은 그와 같이 필연적으로 우리가 불행하게 되기 때문에 마땅히 진아(眞我),
참 나라는 것은 인생(人生)과 우주(宇宙)의 참 면목인데, 참 나를 깨닫는 것은 이른바 우주의 실상(實相), 실존(實存)을 아는 것이고 또 아까도 말씀드린바와 같이 키에르케고르나 또는 니체나 그런 훌륭한 철인(哲人)도 역시 모두가 다 실상(實相)을 실존(實存)을 깨달을라고 애썼단 말입니다. 실존철학(實存哲學)은 모두가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들은 성자(聖者)가 아니기 때문에 실존을 깨닫지는 못했겠지요. 실존을 깨달은 분들은 역시 석가(釋迦), 공자(孔子), 예수 그분들이란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실존(實存)을 깨달아야 참다운 진아(眞我)를 깨달은 것이 되기 때문에, 그런 깨달은 것이 쉽지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깨달은 분들을 우리 지표나 귀감으로 삼고서 우리도 깨닫기 위해서 애를 쓴단 말입니다.
그렇게 애쓰다 보면은 다행히 금생(今生)에 우리 정진력이 결집(結集)이 되고 우리 업장(業障)이 녹아지면 깨달을 것이고, 금생(今生)에 못 깨달으면 또 내생(來生)에 깨달을 것이고, 우리가 한번 금생에 깨닫는 다는 서원(誓願)을 가지고 나갈 때는 금생에 틀림없이 우리가 바로만 살면은 깨달을 것인데 혹시 우리가 바로 살기가 어렵고 그때그때 물질(物質)생활에서 오는 마음이 산란하게 되면 또 내생(來生)가서 깨닫는 것이고 한번 우리가 서원(誓願)세우면 그때는 서원은 영원히 변치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금생(今生)과 내생(來生)에 틀림없이 깨닫는, 이른바 진아(眞我)를 참다웁게 구현하고서 또 만 중생(衆生)을 구제(救濟)하는 그런 생활을 하게 되겠지요.
나무아미타불!
20000524-성륜사 종무소앞 연못가-청화큰스님 설법
20000524-대구 MBC 촬영
20000???-대구 MBC TV특강 방영
20050702-DVD영상작업-본정 김영동
20081105-워드작업-주안 한동일
20090312-정리-본정 김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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