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2 호>
19870306-사성제 팔정도 설법-청화대종사
사성제-사종사제-팔정도
불교는 부처님 가르침 따라서 심천(深淺)관계, 깊고 옅은 관계가 있습니다. 맨 처음 초기에서 말씀하신 법문은 일반 중생 근기(根機)에 맞추어서 있다 없다하는 우리 중생의 범부(凡夫)소관에 맞추어서 선(善)도 있고 악(惡)도 있고 또는 천상(天上)도 있고 이와 같이 중생 근기에 맞추어서 하는 유교(有敎), 유교입장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개한 것도 있는 것이고, 허나 나중에는 근기가 익은 다음에는 이러한 것은 모두 몽환포영(夢幻泡影)이다. 여환즉공(如幻卽空)이란 말입니다. 같을 여(如)자, 허깨비 환(幻)자, 곧 즉(卽)자, 빌 공(空)자,
일반 중생이 보는 것은 마치 허깨비 같이 텅 비어있다 하는 그런 말씀으로 해서 참다운 부처님의 실상세계(實相世界)로 인도(引導)했고 말입니다.
허나 부처님의 진의(眞義) 이것은 그냥 다 비어 있다는 것이 주된 목적이 아니라 참다운 진리(眞理) 이것은 중도(中道)란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비어 있다 하더라도 본래 빈자리는 허무(虛無)가 아니란 말입니다. 심심미묘(甚深微妙)한 무량지혜(無量智慧) 무량공덕(無量功德)이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이와 같이 중생이 보는 것은 다 비어 있고 허망하다 하더라도 실상 이것은 무량공덕을 갖추고 있다는 이런 가르침이 중도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 교시(敎示)는 맨 처음 초기에 있다 없다하는 중생 근기에 맞추어서 하는 그런 유교(有敎), 그 다음에 중생이 보는 여러 가지 현상계(現象界)는 허망(虛妄) 무상(無常)하다는 이런 공교(空敎), 허나 다만 공이 아니고서 중도실상(中道實相)이라 하는 중도교(中道敎) 이와 같이 전개가 된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무슨 법문을 생각할 때는 이것이 유교인가? 공교인가? 이것이 중도교인가? 이와 같이 판단할 수 있는 그런 생각이 있어야 오류(誤謬)를 안 범합니다.
어째 그런고 하면 같은 경전 내에도 부처님께서 그때그때 한꺼번에 체계(體系)있게 말씀하신 법문이 아니라, 지금 현대와 같이 과학적인 지식을 일반 대중에게 짐짓코 가르치기 위해서 애써 교안을 짜가지고 하신 것이 아니라, 부처님께서 그때 그때 갑(甲)한테는 갑대로, 을(乙)한테는 을대로, 박가한테는 박가대로, 그와 같이 말씀하신 법문을 나중에 주어모아서 물론 그런 기억들이 잘되고 못되고 했겠지요, 잘 못된 기억도 있는 것이고 한데 그렇게 주어모아서 한 책을 만들어서, 원래 경전에서 하신 말씀이 처음과 끝이 똑 같지가 않습니다.
어떤 경우는 공사상을 말했다가 어떤 대목에서는 유교를 말했다가 어떤 때는 중도를 말했다가 그와 같이 했기 때문에 중생이 아까 말한 것과 같이 3가지 견해, 공이라는 개념, 또는 중생 근기에 맞추어서 있다는 개념, 또는 다만 있는 것도 아닌 것이고 다만 빈 것도 아닌 것이고 실상에는 여러 가지 공덕을 갖추고 있다는 그런 중도의 개념, 이런 3개념을 놓고서 봐야지 그렇지 않으면 오류를 범한단 말입니다.
따라서 불법은 아무리 쉬운 법문이라 하더라도 쉬운 법문 싶어도 역시 항시 부처님의 진리가 거기에 담겨 있어 놔서 함부로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실은 초심문(初心文;初發心自警文) 같은 것도 역시 원래는 깨달은 사람이 해야만 바른 강의를 한단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제법문(四諦法門)이나 삼보(三寶)나 그런 법문은 언제 들어도 새로운 것입니다. 우리가 깨닫기 전에는 다 미혹한 것이니까. 불법승(佛法僧) 삼보라, 안다고 하지만 결국은 알둥말둥하는 것이지 참답게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수십 번 들은 것도 역시 부처님 법문은 누가 말하나 어린애가 말하나 항시 새로운 것입니다.
이런 점이 있기 때문에 그런 점을 염두에 두고서 불경(佛經)을 들을 때는 해태심(懈怠心)이 없이 잘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제까지는 삼보(三寶)를 말씀 했는데 삼보는 아는 봐 같이 불보(佛寶), 법보(法寶), 승보(僧寶) 아닙니까. 하여튼 이 세상에서 가장 보배가 삼보인데 그 가운데서 법보, 법보를 들어내서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법보는 어제도 말씀을 했습니다만 사제(四諦), 팔정도(八正道), 12인연법(十二因緣法), 육바라밀(六波羅蜜), 그러한 법문을 주로해가지고 일체 경전의 법문을 망라해 있단 말입니다. 줄여서 얘기하면 사제, 팔정도, 12인연법, 육바라밀, 이와 같은 법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불교인 들은 비록 어려운 것은 좀 모른다 하더라도 물론 쉬운 것 가운데도 어려운 것이 들어 있지만 우선 사제, 팔정도, 12인연법 이러한 것은 정확히 해야 합니다.
지금 불교 책 나온 것을 좀 보면 가사 팔정도 풀이만 본다 하더라도 무책임한 풀이가 많이 있단 말입니다. 사제법문에서 훌륭한 강사들이 번역한 것도 보고 여러 가지 보았는데, 첫째 사제법문의 고집멸도 가운데 멸이라는 풀이에서 굉장히 큰 오류를 범했단 말입니다. 나중에 해 나가면서 지적을 하겠습니다만 아무튼 사제 이것은 넉 사(四)자, 진실할 체(諦)자인데 음 따라서 ‘체’자 그대로 해서 ‘사체’ 그렇게 발음하기도 합니다만 어느 것이 옳다 그르다할 필요는 없고, 일반적으로 ‘사제’라 하는 것입니다.
사성제(四聖諦)
사제(四諦)를 사성제(四聖諦) 사진제(四眞諦)라고도 운(云)하며, 성자(聖者) 소견(所見)의 진리(眞理)이다.
이것은 ‘사제(四諦)를 사성제(四聖諦) 사진제(四眞諦)라고도 운(云)하며’ 말이 어색한 부분도 있지만 여러분들한테 학인(學人)들한테 한문자를 습득을 시키기 위해서 짐짓코 한문자를 될수록 많이 넣습니다. 이를 운(云)자, ‘무엇 무엇이라 말한다’ ‘사성제 또는 사진제라고도 말하며’, ‘성자(聖者) 소견(所見)의 진리(眞理)이다.’ 성자나 성인(聖人)이나 같은 뜻입니다. ‘성자가 보는 바의’ 바 소(所)자, 성자가 보는 바의 진리(眞理)란 말입니다. 이것이 사제란 말입니다.
일반 범부는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외도(外道)와 정도(正道)를 어떻게 구분하는 것인가? 여러 가지 구분이 많이 있으나 외도는 사진제 풀이를 못하고, 정도만이, 우리 부처님 가르침만이 사성제를 그대로 진리라고 칭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성제를 모르면 불교인이라고 할 수가 없지요.
인생고(人生苦)가 무엇인가? 사회고(社會苦)가 무엇인가? 어느 경제인이 잘못해서 굉장히 사회혼란를 야기 시키고 그러한 여러 가지 사회적 모순을 말할 때, 그 원인을 해부할 때에 함부로 말하나, 자기 개인적인 인생고나 사회고나 또는 세계적인 이 지구상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그런 모순되는 문제 같은 것이 원인이 어디가 있는 것인가?
원인은 역시 무어라 해도 불교에서 말하는 이 사성제 가운데 고(苦)의 원인인 집(集)에가 있단 말입니다.
사성제는 여기 있는 봐 같이 고제(苦諦), 집제(集諦), 멸제(滅諦), 도제(道諦)란 말입니다. 괴로울 고(苦)자, 진실할 제(諦)자, 고제(苦諦), 모을 집(集)자, 진실할 제(諦)자, 집제(集諦), 멸할 멸(滅)자, 진실할 제(諦)자, 멸제(滅諦), 그다음에 길 도(道)자, 진실할 제(諦)자, 도제(道諦)말입니다.
1. 고제(苦諦)
여기 있는 봐 같이
1.고제(苦諦)란 삼계(三界) 육취(六趣)의 고보(苦報)니 미(迷)의 과(果)요.
나아길 취(趣)자, 육취나 육도(六道)나 똑 같은 것입니다. 삼계육도, 삼계육취의 고보(苦報), 고의 과보(果報)를 결과로 해서 받는, 하나의 보답으로서 받는 미혹(迷惑)의 과보란 말입니다. 진리를 모르는 미혹의 결과란 말입니다.
중생고(衆生苦)의 원인은 무엇인가? 이것은 그다음의 집제란 말입니다.
아무튼 우리 중생을 어떻게 볼 것인가? 중생은 안락스러운 것인가? 우리 중생은 역시 무어라 해도 어떻게 해부해 보나 결국은 다 고공(苦空)이라, 고(苦) 뿐이란 말입니다.
중생의 낙(樂)이라는 것은 사실은 흔적도 없는 것입니다. 어째 그러는 것인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생로병사(生老病死)란 말입니다. 날 때 고통, 살려는 고통, 또는 늙어서 고통, 병들어 고통, 결국은 수명이 다 해서 죽는 고통, 그 외에도 헤어지는 고통, 미운사람 만나는 고통, 또는 구해서 얻지 못하는 고통, 이 몸뚱아리 원수가 장기(臟器)가 가득해 있기 때문에 완전히 조화로운 상태는 없는 것입니다.
불교말로하면 사사일협(四蛇一匧)이라, 넉 사(四)자, 뱀 사(蛇)자, 네 마리의 독사(毒蛇)가, 한 일(一)자, 상자 협(匧)자, 네 마리 독사가 한 상자에 모여 있는 것이 우리 몸이나 같다 한단 말입니다. 지(地)와 수(水)와 화(火)와 풍(風)이란 말입니다. 바람기운 물 기운 불기운 또는 땅기운 이런 것들이 한꺼번에 모아서 잠시간 조화를 이루어 놔서 완전무결한 때는 없는 것입니다. 음식을 더 먹으면 더 먹은 대로 덜 먹으면 덜먹은 대로 추우면 추운대로 말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몸이라는 것은 우리 업(業) 따라서 업이 긁어모아서 잠시간 그와 같이 각 원소가 합해있는지라 우리 몸이 완전무결할 때는 없단 말입니다.
따라서 몸 자체로 보아도 이것이 모두가 괴로움뿐이란 말입니다.
생각은 무엇인가? 우리 범부(凡夫)의 생각은 모든 것을 확실히 알 수 없단 말입니다. 바로 보지 못하니까 바로 생각도 못하고 말입니다. 바로 생각도 못하고 바로 보지도 못하는 사람이 마음의 안심입명(安心立命)이라, 마음에 가서 편안할 수가 있습니까.
몸도 편안하지 못하고 맘도 편안하지 못하고 아까 말마따나 끝내는 사실은 한계상황(限界狀況)에서 오는 여러 가지 핍박(逼迫)만 있는 것이고 말입니다.
따라서 생각을 깊이 못한 사람들이 인생은 안락이다. 이와 같이 하다 취생몽사(醉生夢死)해서 가는 것이 - 죽고 마는 것이지 - 바로 보면 인생은 고(苦)뿐이다 말입니다.
따라서 불교란 것은 고를 피하기 위해서 고를 이기기 위해서 불교가 있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 이지만 그러나 다른 종교는 고의 원인을 확실히 모른단 말입니다.
우리는 우선 인생이라는 것이 고다. 일체개고(一切皆苦)다. 인생고해(人生苦海)라, 그러니까 인생은 고생 바다란 말입니다.
성자가 깨달아가지고서 우주(宇宙)를 다 통달해 가지고서 항시 불성(佛性)을 보는 경지 같으면 모르거니와 그렇지 않는 한에는 우리 중생의 견해에서는 아무리 따져 봐도 고뿐인 것입니다. 고를 분명히 느껴야만 그것이 참다운 수행자(修行者)란 말입니다. 고를 느끼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이와 같이 출가 수행자가 된 것입니다.
삼계(三界) 이것은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 아닙니까. 중생이 생사윤회(生死輪廻)해서 왔다 갔다 개미 쳇바퀴 돌듯이 하는 것이 삼계윤회란 말입니다.
욕계라, 욕심을 미쳐 못 떠난 경계, 음욕(淫慾), 식욕(食慾), 잠욕, 또는 가지가지의 욕심(慾心)을 못 떠난 경계가 욕계고, 우리는 지금 욕계에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人間)은 만물의 영장이라, 이와 같이 함부로 탐심을 내고 그런 아만심(我慢心)을 냅니다만 사실 인간이라는 것은 만물의 영장이 못 되는 것입니다.
다만 욕계의 저 밑바닥 남섬부주(南贍部洲)에가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이지 욕계 내에도 사람 보다 더 훌륭한 욕계천(欲界天)이 있는 것이고 말입니다. 올라가면 또 색계가 있고 무색계가 있는 것인데 어떻게 우리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되겠습니까.
따라서 인간은 보다 겸허해야 쓰는 것입니다. 욕계내의, 욕계도 꼭대기가 아니라 욕계내의 저 밑에 가서 인간이 존재한단 말입니다. 물론 보다 저 밑에는 지옥도 있고 하겠지만 인간은 어중쭝한(어정쩡한)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은 만물의 영장은 못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욕계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서, 허나 인간이 윤회하는 곳은 욕계 보다 더 높은 색계도 있고 무색계도 있단 말입니다.
이것이 삼계고 육도(六道) 이것은 욕계내의 여섯 갈래가 육도입니다.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 수라(修羅), 인간(人間), 천상(天上) 말입니다.
삼악도(三惡道), 삼선도(三善道)라, 나쁜 갈래는 지옥, 아귀, 축생인 것이고, 육도 가운데도 좀 좋은 갈래는 아수라, 인간, 천상이란 말입니다. 아무튼 그러나 이것은 욕계에 해당합니다. 이와 같이 삼계육도에서 받는 그런 괴로운 과보가 즉 말하자면 여기 있는 고제란 말입니다. 이것은 어떤 것인고 하면 결국은 내내야 미혹(迷惑)해서 진리를 모르는 결과란 말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알았다면 욕계에 태어날 리가 만무합니다.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결국은 얽혀가지고서 인제 아, 그 업에 칭칭 묶여가지고서 이렇게 욕계에 온단 말입니다.
부모님의 인연(因緣)을 우리가 날 때도 역시 업장(業障)이 가볍고 저 천상이나 극락에 가버리면 사람으로 올 수가 없습니다. 어중쭝하게 헤매다가 부모님 연 만나서 이렇게 욕계로 덜컥 온단 말입니다. 이것이 욕계 중생인 것입니다.
2. 집제(集諦)
그 다음은 집제(集諦)라, 모을 집(集)자, 진실할 체(諦)자,
2. 집제(集諦)란 탐(貪)·진(嗔)·치(痴) 등(等)의 번뇌(煩惱)와 선악(善惡)의 제업(諸業)으로서 차이(此二)가 능(能)히 삼계육취(三界六趣)의 고보(苦報)를 집기(集起)함으로 미(迷)의 인(因)이다.
내내야 번뇌라는 것은 무량무수의 번뇌이지만 간추리면 탐심(貪心), 진심(嗔心), 치심(癡心) 아닙니까. 다 아는 바와 같이 3독심 아닙니까. 이러한 3독심 등의 번뇌와 선악의 제업으로서, 업(業)이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할 때에 악업(惡業)도 있지만 선업(善業)도 있지 않겠습니까. 남한테 보시도 하고 하는 것이 선업 아닙니까. 잘되기 바라고 또 중생을 위해서 애도 쓰고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때에 업의 종류를 잘 구분해서, 업의 종류는 3가지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악업(惡業)이라, 악업 이것은 자기와 남을 해롭게 하는 것이 악업 아닙니까.
선업(善業)은 자기와 남을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나 남을 이익 되게 하는 것이 이것이 선업인 것이고, 허나 이런 업 역시 아직은 상(相)을 못 떠나고 비록 보시(布施)도 하고 여러 가지 베풀기도 하지만 자기라는 상, 남이라는 상, 그런 상을 못 떠나면 그때는 선업에 머무는 것이고 이것이 참다운 성불(成佛)의 도업(道業)은 못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업은 이것은 악업이 있는 것이고, 아까 말과 같이 자기와 남을 이롭게 하는 선업이 있고, 또는 상을 털어버린 나라는 상 너라는 상 그런 상을 떠나서 참다운 해탈에 이르는 업, 이것이 길 도(道)자, 도업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불교인들은 도업을 지어야 하는 것입니다. 선업을 짓는 것은 악업보다는 낫지만 아직은 상에 메여 있으면 그때는 해탈의 원인은 못된단 말입니다.
아무튼 이와 같이 탐심이나 진심이나 치심이나 이런 번뇌나 이런 번뇌가 있으니까 따라서 그때는 마땅히 입으로 행하면 나쁜 말 나오고, 약간 좋은 말 나오겠지요.
몸으로 행하고 살생하고 여러가지 그런 업을 짓는 것입니다.
이런 번뇌가 있으면 자연적으로 그때는 이것이 우리 신구의(身口意)라, 우리 몸이나 입이나 뜻으로 발동(發動)할 때는 그것이 업이 되어 버린단 말입니다.
이런 모든 업으로서 ‘차이(此二)가’ 이와 같이 앞에 있는 그런 번뇌(煩惱)와 제업(諸業) 이것이 둘 아닙니까, 차이(此二)가 이러한 번뇌와 제업이 능히 삼계육취에 아까 말한바와 같이 삼계는 욕계, 색계, 무색계, 육취는 이것은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 천상, 이러한 삼계육취의 고보(苦報)-괴로운 과보를 모아 일으키는 집기(集起)라, 모아서 일으키므로 결국은 집기란 미혹의 인(因)이 된단 말입니다.
우리는 아까도 말했습니다만 인생고의 원인은 역시 집기(集起)입니다.
즉 말하면 탐진치 3독, 삼독심에서 우러나온 여러 가지 선악의 업 이것이 인간의 여러 가지 번뇌나 고생의 원인이단 말입니다. 사회나 가정이나 개인이나 모두가 다 내나 따지고 보면 결국은 이와 같이 3독심이나 거기에서 우러난 선악의 행위의 과보란 말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분명히 느껴야 씁니다. 역시 인간 번뇌 인생고 사회혼란은 그 원인이 무엇인가? 가장 근원은 내내야 결국은 삼독심입니다.
따라서 사회 정화나 자기 개인의 마음의 안정이나 그런 일을 하려면 먼저 3독심을 맑혀야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떠나서 겉만 들어서 사회운동을 할라고 하면 사회도 정화도 못되고 더럽히고 업을 짓고마는 것입니다. 마땅히 우리 불교인들은 이와 같이 근원적인 문제 일체 인간의 여러 가지 모순, 인간의 고생, 이런 것은 모두가 다 원인이 삼독심에서 온단 말입니다.
따라서 삼독심을 제거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내내야 인제 참선염불(參禪念佛) 아닙니까. 어느 산중에서 가만히 있다 하더라도 역시 참선염불을 하고 있으면 그때는 인제 삼독심을 제거하는 것이니까 따라서 그때는 악의 뿌리를 뽑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가 속해있는 좁은 범위 내에서 악의 뿌리를 뽑는 데만 그치지 않고서, 나중에 다시 설명을 하겠습니다만 우리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우주에 상통하는 것입니다. 가사 여기서 얼른 한 생각을 일으키면 생각 그대로 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염파(念波)는 소멸 되지 않고서, 우리 생각의 형상은 없어진다 하더라도 염파는 소멸이 안 되고서 그냥 천지 우주의 불성에 바로 그때는 파동(波動)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도인(道人)들은 여기서 한 생각을 딱 일으키면 저 미국에 가서 그냥 직통으로 느낀단 말입니다. 전파(電波) 이상으로 빠른 것입니다.
한번 생각을 일으키고 한번 행동하고 그런 것이 모두가 다 천지 우주에 영향을 준단 말입니다. 그런 것이기 때문에 아까 말한바와 같이 우리가 이제 이렇게 앉아서 사회참여를 않고서 데모도 않고서 이와 같이 있다 하더라도 역시 공부를 바로하고 마음을 맑히면 그와 동시에 내 스스로의 마음을 맑힘과 동시에 그 주변도 맑히고 말입니다. 또한 동시에 우주의 그런 성력(聖力) 즉 말하자면 우주의 성스러운 힘에다가 보다 더 플러스plus 하는 위대한 힘을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와 같이 우리 생각, 생각 자체가 그대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마음 정화 우리 주변 정화 또한 동시에 우주 정화란 말입니다. 이런 걸 알아야 하기 때문에 마땅히 우리는 함부로 꼭 현상적인 사회참여만을 권고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3. 멸제(集諦)
멸제(集諦)라, 멸할 멸(滅)자, 진실할 제(諦)자, 열반(涅槃)을 말 합니다. 멸제나 열반이나 같은 뜻으로 쓰입니다. 열반 이것은 바로 풀이하면 영생(永生)이라, 영생한다. 멸(滅)을 단순히 번뇌를 멸한다. 이정도로만 생각해서는 너무나 소극적입니다. 따라서 사제(四諦)를 풀이할 때에 앞서 얼핏 지적을 했지만 멸제를 그냥 번뇌만 멸한다. 이런 정도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그 일체공덕(一切功德)을 갖춘 영생, 영생의 지혜(智慧), 영생의 생명, 이것이 열반인 것입니다. 이것이 멸제이고 말입니다.,
아까도 얘기 했습니다만 일반 외도(外道)는 결국 멸을 모릅니다. 멸 이것은 정도(正道) 밖에는 모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가사 산중(山中)에 가서 공부한다 하더라도 멸(滅)을 구해야지 멸을 목적으로 해야지 멸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어중쭝한(어정쩡한) 것을 목적으로 하면 그때는 그냥 상(相)에 걸리고 만단 말입니다. 구경(究竟) 목적, 일체 번뇌를 멸하고서 영생하는 불생불멸(不生不滅)하고 불구부정(不垢不淨)하고 그러한 구경적인 끄트머리 목적인 멸을 구해야만 참다운 공부인 것입니다.
가사 나중에 공부를 하겠지만 사선정(四禪定) 법(法)을 닦는다고 하더라도 역시 멸을 안 구하면 그때는 외도에 그친 것이고 말입니다. 멸을 목적으로 해서 멸을 구하면 그것이 정도인 것입니다.
우리가 똑 같은 보시(布施)를 한다 하더라도 멸(滅)을 구하면 아까 말한바와 같이 그것이 도업(道業)인 것이고, 멸을 아니 구하고 서는 나중에 칭찬의 말이나 듣고 보답이나 받고 하는 것은 선업(善業)에만 그쳐서는 멸과는 관계가 없단 말입니다. 즉 말하면 해탈(解脫)하고는 관계가 없습니다.
같은 행(行)도 멸을 구해서 해탈을 구하는 - 해탈을 구하면 정도인 것이고 해탈을 안 구하면 즉 유위적(有爲的)인 상대유한적(相對有限的)인 어떠한 공리(功利)를 구하면 그때는 그것이 정도가 못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구분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순교(殉敎)를 한다 하더라도, 기독교에서는 순교를 많이 안합니까만 순교를 해도 역시 아까 말마따나 해탈을 구하고 하면 그것이 정도란 말입니다. 해탈을 못 구하고 다만 ‘인류(人類)를 위해서 한다.’ 이것은 하나의 속인들이 하는 범부의 하나의 제한된 것밖에는 못되는 것입니다.
3. 멸제(集諦)란 곧 열반(涅槃)으로서 열반(涅槃)이란 혹업(惑業)을 멸(滅)하고 생사(生死)의 고(苦)를 출리(出離)한 진공적멸(眞空寂滅)의 경계(境界)니 오(悟)의 과(果)다.
이는 - 이것은 - 혹(惑)은 미혹할 혹(惑)자, 혹 이것은 번뇌(煩惱)하고 똑 같은 뜻입니다.
혹업(惑業) 그러면, 미혹할 혹(惑)자, 업 업(業)자,
이는 혹업(惑業)을 멸(滅)하고 - 이것은 혹업(惑業)을 없애고서 - 다시 말하면 아까말한 탐진치(貪嗔痴) 이것이 혹(惑)입니다.
본래 혹이 없는 것을, 번뇌(煩惱)에 따라서 행동(行動)하는 선악(善惡)의 제업(諸業)이 업(業)인 것이고, 따라서 탐진치(貪嗔痴)와 선악(善惡)의 제업(諸業)을 한꺼번에 말할 때 혹업(惑業) 그래요.
번뇌와 여러 가지 업을 멸하고서 생사고(生死苦)를 낳았다 죽었다 하는 삼계윤회(三界輪廻)하는 생사고를 출리(出離)하여 날 출(出)자, 떠날 리(離)자, 여의고서 떠나서 진공적멸(眞空寂滅)의, 우리는 진공(眞空)과 단공(但空)과 구분해서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불교라는 것은 굉장히 심오(深奧)하기 때문에 자칫 개념이나 술어를 잘 못하면 오류를 범합니다. 일반 공(空) - 다 비었다 하는 허무(虛無)의 공 - 이것은 단공(但空) 그러는 것이고, 다만 단(但)자, 빌 공(空)자, 단공(但空)인 것이고, 다만 비지 않고서 공 가운데는 그야말로 신비(神秘) 불가사의(不可思議) 하고 무량무변(無量無邊)의 공덕(功德)이 충만(充滿)해 있다. 이것이 진공(眞空)이란 말입니다.
소승(小乘)은 단공을 말하고 진공은 모릅니다. 진공은 반드시 묘유(妙有)와 같이 있어야 하는 것인데, 일반 소승은 단공만 생각하기 때문에 너무나 허무에 빠져가지고 중생 제도(濟度)는 못하고 자기만 편안하고 만다 말입니다.
진공적멸의, 고요할 적(寂)자, 멸할 멸(滅)자,
적멸(寂滅)도 그냥 가만히 있어서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 번뇌가 발동(發動)하지 않고서 영원히 안락(安樂)스러운 경계(境界), 이것이 적멸인 것입니다. 멸 이것은 아까말한 바와 같이 모두를 멸하는 즉 말하자면 번뇌를 멸해 버려서 영원히 안락스럽고 영원히 안온(安穩)한 경계를 말하기 때문에 바로 영생(永生)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열반(涅槃)이나 적멸(寂滅)이나 그냥 멸(滅)이라고 하나 이것은 똑 같은 뜻인 것입니다. 영생(永生), 열반(涅槃), 적멸(寂滅), 멸(滅), 다 똑 같은 뜻입니다. 다만 표현만 달리 했을 뿐입니다.
멸(滅)이라, 오(悟)의 과(果)이다. 깨달음의 결과란 말입니다. 여기서 보아 온 바와 같이 부처님 가르침은 굉장히 체계적이고 조금도 합리적인 뜻에 어긋남이 없습니다.
먼저 중생경계(衆生境界), 우리가 받는 것은 결국 우선 우리 중생은 고(苦) 아닙니까. 고(苦) 아님이 없단 말입니다.
아까도 말한바와 같이 다른 고(苦)는 그만 두고라도 인간의 한계상황(限界狀況)인 생로병사(生老病死)라, 업이 있으면 결국은 태어나야 하는 것이고, 태어나면 늙어야 하는 것이고, 아파야 하는 것이고, 결국은 죽어야 하는 한계상황이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에는 고가 있는 것인데, 그 고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 이외도 고가 많이 있지만은 하여튼 고의 일체 원인은 아까도 말한바와 같이 번뇌와 번뇌에 따라서 행동하는 행(行)이란 말입니다. 즉 말하면 집(集)이란 말입니다.
우리 인생고가 있고, 인생고의 원인인 집(集)이 있고 말입니다. 허나 우리 인생이라는 것이 인생고만 있고 또 고의 원인이 번뇌만 있다고 하면 그야말로 참 뭐 살 필요가 없지요. 우리 인생이 이런 고와 집밖에 없다면 그때는 자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어디 갈 곳도 없고 우리가 나아갈 필요도 없으니까 말입니다.
지금 노이로제라든가 사회적인 여러 가지 번뇌 때문에 이상스러운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그런 것은 무엇인고 하면, 제법 그래도 판단은 하기 때문에 인생고는 본단 말입니다. 인생고는 보고 또 인생고의 원인인 집도 대강은 봅니다. 대강은 보지만은
인생고의 원인인 집을 우리가 어떻게 떠날 길이 없단 말입니다. 사실은 못 떠나는 것입니다. 불교 아니면 결국은 떠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불교가 되어야 인생고(人生苦)를 떠나서 영생(永生)의 안락세계(安樂世界)로 갈 수 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멸(滅)이 있어야 만이 결국은 비로소 우리 숨통이 트인단 말입니다. 멸이 없으면 숨통이 못 트이는 것입니다. 어디가 트일 수가 있습니까?
내나야 고를 짓고, 고의 원인을 짓고서 우리가 고를 받는 것이고, 이와 같이 즉 말하자면 윤회(輪廻) 가운데서 고를 짓고 받고 또 고를 짓고, 또 윤회하고 그런 가운데서 뱅뱅 개미 쳇바퀴 돌듯이 돌고만 있단 말입니다.
다행히 그야말로 참 석가모니 가르침 또는 성인들의 가르침으로 해서 고를 떠나서 집(集)을 우리가 벗어버리고서 해탈의 멸이 있단 말입니다. 멸이 있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다른 것은 모른다 하더라도 그야말로 우리가 가야할 해탈의 길, 해방되어서 갈 길을 안다는 것만 두고 보더라도 이것이 굉장히 중요하고 우리한테는 큰 도움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고의 원인을 지어서 우리가 고를 받는 것이고, 허나 그 반대의 해탈 즉 말하자면 영생의 멸이 있고, 또 멸에 이르려면 그냥 무조건(無條件) 하고 가는 것이 아니라 또 역시 이런 고집(苦集)을 고와 집을 없애는 도(道)가 있어야 한단 말입니다.
내나야 우리가 집(集)을 지어서 고(苦)를 받으니까 우리가 멸(滅)에 갈라면 마땅히 그때는 순리(順理)로 본다고 할 때 고와 집을 멸해야 쓰겠지요.
고와 집을 멸하는 이것이 여기 있는 도(道)란 말입니다. 도제라, 팔정도란 말입니다. 물론 여러 가지 우리 수행법이 많이 있지만 간추리면 여덟가지 바른 길이란 말입니다.
4. 도제(道諦)
4. 도제(道諦)란 곧 팔정도(八正道)로서 능(能)히 열반(涅槃)에 통(通)하는 도(道)이니 오(悟)의 인(因)니라.
이는 능히 열반에 통하므로 도라 이름하며 바로 오(悟)의 깨달음의 원인이다.
우리 현대인들은 어느 정도 고의 원인은 약간씩은 좀 안다 하더라도 -확실히는 모르지만 - 고의 원인을 제거하는 팔정도를 제대로 지키지를 못한단 말입니다. 그러하니까 팔정도에서 오는 멸(滅)의 그런 해탈(解脫)의 행복(幸福)은 우리가 얻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사제법문(四諦法門)은 그야말로 참 불교의 대(大)·소(小) 또는 현(顯)·밀(密) - 대승(大乘), 소승(小乘), 현교(顯敎), 밀교(密敎) 말입니다. 모든 불교를 결국은 관통(貫通)해 있는 하나의 대 진리(眞理)인 것입니다. 어떤 가르침 이든 간에 불교 가운데 가서 이와 같이 사제법문이 안 들어 있는 데는 없습니다. 조금 더 어디다 역점을 두는가 그런 차이는 좀 있다 하더라도 사성제의 진리로 해서 일괄(一括) 되어 있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따라서 사성제가 들어 있으면 그 때는 불법(佛法)의 참다운 정도 인 것이고, 안 들어 있으면 참다운 불법이 못 된다 말입니다.
초전법륜(初轉法輪)
차(此) 중(中) 초이(初二)는 유전(流轉)의 인과(因果)이니 곧 세간(世間)의 인과(因果)요. 후이(後二)는 환멸(還滅)의 인과(因果)니 곧 출세간(出世間)의 인과(因果)로서 사(四)를 모두 체(諦)라 함은 그 진리(眞理)가 실지(實至) 극(極)함으로써요. 이자(二者) 공(共)히 과위(果位)를 앞세우고 인위(因位)를 뒤에 둠은 과(果)는 보기가 쉽고 인(因)은 알기 어려움으로 고과(苦果)를 먼저 보여 이를 염리(厭離)케 한후 기(其) 인(因)을 단멸(斷滅)케 하며 우(又)는 열반(涅槃)의 묘과(妙果)를 먼저 들어 원락(願樂)케 한 후 기(其) 도(道)를 수행(修行)케 하심이니 불(佛)께서 보리수하(菩提樹下)를 기(起)하사 녹야원(鹿野苑)에 도(到)하시고 오비구(五比丘)를 위(爲)하야 이 법(法)을 여설(如說)하셨음으로 불전법륜(佛轉法輪)의 초(初)라 위(謂)하나니 수자(修者)는 의차수도(依此修道)하야 수의증멸(隨宜證滅)할지니라.
이 가운데 초이(初二;고제와 집제)는 맨 앞에 이(二)는 우리가 인제 탐(貪)·진(嗔)·치(痴)나 또는 선악의 업에 따라서 집제를 범하지요. 그때는 마땅히 그 과보로 해서 삼계육취의 생사고를-고의 보를 받는단 말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유전(流轉)의 - 해탈이 아니라 - 삼계인 욕계나 색계나 무색계나 하여튼 갔다 왔다 그런 중생 경계서 헤맨 단 말입니다. 이런 삼계육도에서 유랑(流浪)하는 즉 말하면 헤매는 인과로서 즉 세간의 인과요. 일반 사람은 세간을 못 떠난 범부의 인과라고도 말하며,
후이(後二;멸제와 도제)는 뒤의 여기 있는 멸제와 도제란 말입니다. 후이는 환멸(還滅)의 돌아올 환(還)자, 멸할 멸(滅)자입니다.
즉 말하면 멸에 돌아오는, 멸은 아까 말씀과 같이 영생이 멸 아닙니까. 영생에 돌아오는 결국 인과(因果)로서, 앞에 말한 것은 우리가 삼계육도에서 헤매는 유전(流轉)의 방황(彷徨)하는 인과(因果)고, 후이(後二) 이것은 그것을 떠나서 멸에 가는, 해탈로 가는, 극락으로 가는, 인과로서 즉 말하면 출세간(出世間)의, 윤회하는 세간을 떠나 출세간의, 세간을 초월한 인과, 따라서 세간을 떠난 출세간의 인과라고 말한단 말입니다.
우리 불교는 제아무리 난해하고 심수오묘(心髓奧妙)한 교리가 있다 하더라도, 유전하는 인과, 삼계육도에서 헤매는 유랑하는 그런 인과, 또는 삼계육도를 떠나서 참다운 해탈로 가는 출세간의 그러한 인과, 이걸로 해서 불교는 다 시작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사제법문은 우리가 개념에 관해서는 명확히 명심을 해야 씁니다.
세존(世尊)께서 보리수하(菩提樹下)를 떠나서, 보리수하에서 부처님께서 무상대각(無上大覺)을 성취하셨지 안 했습니까. 막 떠나서 녹야원(鹿野苑)으로, 녹야원은 그 당시에 부처님과 다섯 비구, 부처님 도반과 다섯 비구가 같이 공부했던 성지(聖地)란 말입니다. 그때 상황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6년 고행(苦行)을 하실 때에 여러분들을 많이 방문도 하고 법을 물었지만 대체로 가장 중요한 분이 세분이란 말입니다.
3분인데 맨 처음 분은 발가바(跋伽婆 ; Bhãrgava) 선인(仙人)이라, 이분은 고행 외도(外道)란 말입니다. 고행을 주로 했단 말입니다. 하루에 한 끼도 먹을둥말둥 하고 며칠 굶기도 하고 또는 자기 몸을 아주 괴롭히고 말입니다. 이와 같이 고행으로 해서 인간의 욕심을 없애야 쓰겠구나,
보통 외도라는 것은 안락한 범천(梵天)에 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범천이라는 것은 청정한 하늘이기 때문에 욕계를 못 떠나면 범천에 못 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 몸뚱아리나 자기 생각에 따르는 욕망을 떠나기 위해서 고행을 한단 말입니다. 욕망을 떼기 위해서 고행을 한단 말입니다.
따라서 발가바 선인은 고행 외도라, 고행으로 해서 욕계를 떠나서 범천의 안락한 곳을 가고자 해서 고행을 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고행이라는 것은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고행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굉장히 지나친 고행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발가바 선인한테 가서 그렇게 고행을 하면서 당신이 고행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러니까 발가바 선인이 욕계를 떠나서 범천에 나기위해서 그런단 말입니다. 그러면 범천 그것은 다시 후퇴(後退)가 없습니까? 이렇게 물으니까. 비록 범천에 나기는 한다 하더라도 범천도 역시 오랜 동안 세월이 흐르면 다시 후퇴한다고 말한단 말입니다.
범천이 비록 안락스럽고 좋다 하더라도 영생(永生)의 처소는 못됩니다. 해탈(解脫)의 경계는 아니다 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내가 바라는 것은 해탈인데 나는 범천에 머물 수가 없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발가바 선인과 같이 고행으로 해서 삼매(三昧)에 들어서 범천에 올라가는 법은 벌써 터득을 다 했단 말입니다. 허나 발가바 선인은 그 이상은 못 가는지라, 즉 말하면 해탈의 법이 아닌지라, 거기서 떠나 버렸단 말입니다.
그래서 아라라가란(阿羅邏迦蘭;Ãlãra-kalãma)이란 성자를 찾아 갔습니다. 아라라가란한테 가서 당신이 공부하는 법은 어떤 것입니까? 하니까 내가 공부하는 법은 무소유처(無所有處)까지 올라가는 법이라 했단 말입니다.
무소유처는 욕계 색계를 떠나서 무색계의 셋째 하늘입니다. 무색계(無色界)는 공무변처(空無邊處), 식무변처(識無邊處), 무소유처(無所有處),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 네 가지 하늘이 있는 것인데 그 가운데서 셋째 하늘이 무소유처인데,
아라라가란이 하는 말이 내가 공부하는 것은 우리 번뇌를 다 없애고서 욕계나 색계를 넘어서 무색계의 무소유처에 올라가는 법이다고 말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무소유처(無所有處)까지 올라가면 다시는 후퇴가 없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이것도 역시 좋은 데는 좋은 곳인데 오랜 세월 동안 장수(長壽)는 하지만 이것도 역시 나중에 복력(福力)이 다하면 즉 말하자면 복분(福分)이, 지은 복이 다하면 다시 추락(墜落)한다고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는 내가 바라는 것은 해탈(解脫)인데 여기서 머물 수가 없다. 그러면서 떠난단 말입니다. 그래가지고서 떠나면서 그러면 어디로 가야만이 당신보다 더 나은 수승한 스승한테로 갈 수 있느냐고 물어 보니까, 아라라가란하는 말이 내 아들이 우다카(Udraka)인데 나보다도 공부가 더 수승하다고 말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다카한테 갔단 말입니다.
가서 당신이 공부하는 것은 어디만치 어떻게 공부하는 것이냐 하니까 우다카가 말하는 것이 내가 공부하는 것은 삼계의 가장 꼭대기 하늘인 비상비비상처 - 무소유처 다음에가 비상비비상처입니다 - 욕계, 색계, 무색계, 우리 중생이 윤회하는 데에서는 제일 꼭대기 하늘 제일 좋은 하늘이 비상비비상처입니다.
내가 공부하는 것은 삼계의 제일 꼭대기 비상비비상처까지 가는 공부라고 말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그러면 그 공부가 이루어지면 인제 다시 후퇴가 없고 다시 생사(生死)가 없느냐고 물어 보니까, 비록 이것이 수승(殊勝)하기는 수승하고 좋은데는 좋은데지만 팔만대겁(八萬大劫)동안 살면 다시 생사(生死)가 있어가지고 후퇴가 있다고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삼매에 들어서 그냥 거기에 우다카가 올라간 정도는 올라갔지만 그렇게 말하니까 또 환멸(幻滅)을 느껴 가지고서 내가 바라는 것은 해탈이기 때문에 여기 머물 수가 없습니다.
세존(世尊)의 성도(成道)
그래서 마지막 가신 곳이 보리수하(菩提樹下)로 가셔가지고 이제는 스승이 필요가 없다. 내가 삼매(三昧) 법(法)은 대략 공부 했으니까, 이제는 내 스스로 해탈(解脫)의 공부를 해야 쓰겠구나, 그렇게 해가지고서 자기가 느끼고서 자기의 맑은 영식(靈識)으로 느껴가지고서 삼세제불(三世諸佛)이, 우주(宇宙)는 본래(本來) 부처님입니다. 우주는 본래 모든 공능(功能)을 갖춘 부처님이기 때문에 우리가 정말로 맑으면 그때는 부처님이 감응(感應)하시는 것입니다. 비록 스승은 그때는 없었지만 그런 삼매기운(三昧氣運)으로 해서 - 부처님의 청정(淸淨)한 마음 - 즉, 영생(永生)을 구하는 그 마음을 - 그 마음이 삼세(三世)부처님 즉 말하면 우주의 본래(本來) 부처님 하고 그때는 감응(感應)이 되어서 말입니다. 삼세(三世)부처님의 가르침을 받고서 보리수하(菩提樹下)에서 무상대각(無上大覺)을 성취(成就)했단 말입니다.
이와 같은 것이 부처님 성도기에 나와 있습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은 이렇게 대도(大道)를 성취했지만은 내가 이런 그야말로 참 무상대도를 먼저 누구한테 말할 것인가? 이렇게 맘먹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가르침을 받은 아까말한 우다카, 아라라가란, 발가바선인 이분들을 찾아 가려고 맘먹었단 말입니다. 이 분들은 무어라 해도 딴 분들 보다 훨썩 높으니까, 그래서 이렇게 천안통(天眼通)으로 보시니까 당신이 대각을 성취한 뒤에는 벌써 아까 떠나온 스승인 발가바선인이나 아라라가란, 우다카는 세상을 떠나고 없단 말입니다. 이 분들이 있다고 하면 그냥 한 마디에 알 것인데 그런데 벌써 세상을 다 떠나 버렸단 말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차선책으로 해서 먼저 같이 공부한 도반인 다섯 비구, 다섯 비구가 녹야원에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녹야원으로 제일 먼저 가셨던 것입니다.
녹야원의 5비구는 같이 공부할 때 부처님께서 나중에 고행을 폐지하시고 어느 정도 자기 몸을 보양하는 것을 보고서 환멸을 느껴버렸단 말입니다. 그래서 저 사람과 우리는 도반(道伴)이 아니다. 따라서 부처님에 대해서 다섯 비구는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녹야원으로 가시지만 별로 마중도 안 하려고 맘먹는단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오시는 것을 보고서 저 사람이 오면 가만히 있어야 쓰겠구나, 마중도 안해야 쓰겠구나, 그렇게 맘먹었단 말입니다.
허나 부처님의 통하신, 통달무애(通達无礙)한 세존(世尊)이 되신, 그 장엄스러운 모습을 정작 뵐 때는 저절로 자기도 모르게 앞에 가서 오체투지(五體投地)를 하고 경배(敬拜)를 안 할 수 없었단 말입니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그대들은 귀가 있으면 들어라, 내가 이제 불사(不死)의 길, 죽지 않는 길을 말하리라. 부처님께서 최초(最初)의 설법(說法)이 그것입니다. 불사의 길을 말하리라. 죽지 않는 길을 말하리라. 불교는 불사의 길입니다. 생사(生死)를 떠나는 길이란 말입니다. 내가 이제 죽지 않는 길을 말하리라. 이것이 부처님의 최초의 설법입니다.
그래가지고 하신 법문이 여기 있는 사제법문(四諦法門)인 것입니다. 불교(佛敎)는 불사(不死)의 길입니다. 아까말한바와 같이 번뇌(煩惱)를 멸(滅)하고서 우리가 삼계윤회(三界輪廻)하는 이러한 여러 가지 인생고(人生苦)를 멸하고서 해탈(解脫)의 길, 영생(永生)의 길, 생사(生死)를 떠나는 길을 가르치는 것이 불교란 말입니다.
녹야원에 이르러 5비구를 위하여 처음으로 사제법문을 설하였으므로 이것을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 맨 처음 진리의 바퀴를 굴렸단 말입니다. 진리를 가리켜서 법이라 합니다. 법륜(法輪) 말입니다. 법륜을 맨 처음에 말씀을 했단 말입니다. 다섯 비구를 위해서 처음으로 법륜을 굴려서 아까말한 그런 불사의 길 불사의 법문을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아함경(阿含經), 아함경은 4가지가 있습니다만 중아함경(中阿含經)의 분별성제품(分別聖諦品)에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나중에 강원(講院)에 가실분도 있을 것이지만 보통은 지금 강원이나 일반 승가(僧家)에서는 부처님 시초 설법인 아함경을 무시합니다. 허나 아함경 이것은 부처님께서 시초로 최초로 설법하신 것을 담은 것이라 놔서 마치 이것은 부처님의 육성(肉聲)과 같은 경인 것입니다. 하기 때문에 간명하고도 간단명료하고 불교의 요체(要諦)를 다 포함시켜 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누구한테 안 배운다 하더라도 아함경은 여러분들이 꼭 섭렵(涉獵)을 해야 쓰는 것입니다. 그래야 부처님의 간명하고도 그 심수오묘(心髓奧妙)한 그런 법문을 알 수가 있단 말입니다.
<나 아(我)자, 옛 석(昔)자, 더불 여(與)자, 너 여(汝), 무리 등(等), 아니 불(不), 볼 견(見), 넉 사(四), 참 진(眞), 진실할 체(諦), 이 시(是), 연고 고(故), 오래 구(久), 흐를 류(流), 구를 전(轉), 날 생(生), 죽을 사(死), 큰 대(大), 괴로울 고(苦), 바다 해(海), 같을 약(若), 능할 능(能), 볼 견(見), 넉 사(四), 참 진(眞), 진실할 체(諦), 곧 즉(則), 얻을 득(得), 끊을 단(斷), 날 생(生), 죽을 사(死),>
이것은
아석여여등(我昔與汝等)
내가 옛적에, 내가 일찍이, 그대들과 더불어, ‘...과’ 할 때에 이 자를 씁니다. 내나야 함께 라는 뜻입니다. ‘내가 일찍이 그대들과 더불어서’
불견사진체(不見四眞諦)라,
네 가지 진체(眞諦), 아까 말한 고집멸도(苦集滅道) 진제를 볼 수 없기 때문에, 불견사진체 하기 때문에,
시고(是故)로,
이와 같이 네 가지 고집멸도를 불 수 없는 이러한 것 때문에, 시고로,
구류전생사대고해(久流轉生死大苦海)라,
오랫동안 그야말로 참 생사대고해(生死大苦海)에 죽고 살고 하는 인생고해(人生苦海)에서 우리가 유전(流轉)해서 방황(彷徨)했단 말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아까말마따나 사진제(四眞諦)를 미처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이와 같이 생사고해에서 방황을 했지만 이제는
약능견사진제(若能見四眞諦)
즉득단생사(則得斷生死)
만약 능히 이렇게 사제법문(四諦法門)을 봄으로 해서 곧 단생사(斷生死)란 말입니다. 생사의 고(苦)를 능히 다 끊어 버렸단 말입니다.
이와 같이 사제법문은 중요한 것입니다.
사실은 다른 것은 우리가 통 모른다 하더라도 이것만 안다 하더라도 신심만 있으면 성불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불교는 이런 몇 마디 깨달아버리면 별로 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방법상의 문제가 여러 가지로 많이 있는 것이지
이것은 열반경15(涅槃經)에 가서 있습니다. 열반경은 부처님께서 열반(涅槃)들 때에 하신 법문입니다.
시간이 촉박해서 말을 빨리 해버렸는데 녹음해 놓으면 이상한 소리가 나오겠습니다.
<녹취자 주: 사실 거의 알아듣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습니다. 잘못 받아쓴 부분은 독자가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열반(涅槃)이라는 글자를 여러분들이 외셔야 할 것입니다. 수백 번 수천 번 나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냥 일반적으로는 앙금흙 날(涅)자, 우리가 흐리를 가만히 두면 앙금이 가라앉고 그러겠지요. 허나 불교에서 통용할 때는 죽을 열(涅), 극락갈 열(涅)자입니다. 뒤에가 있으면 한글 법칙으로 해서 ‘녈’ 그러겠지요. 본음은 이것은 '녈'자입니다. 죽을 녈(涅), 극락갈 녈(涅)자 말입니다. 열반 할 때는 앙금흙 날(涅)자의 뜻이 아니라 극락갈 녈(涅)자로 풀이해야 쓰겠지요.
그 다음에 열반이라는 반(槃)자 이것은 쟁반 반(槃), 소반 반(槃)자, 이것은 일반적인 표현인 것이고, 열반 할 때는 밑에 있는 것으로 즐거울 반(槃)자, 극락 가서 즐거울 것이니까 그때는 영생(永生)이 되겠지요. 열반이라는 것이 영생이 되겠지요.
이것은 열반이란 뜻으로 쓸 때는 밑에 뜻 즉 즐길 반(槃)자로 쓰입니다.
사종사제(四種四諦)
사종사제(四種四諦)라,
그러니까 우리가 불교가 어려운 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냥 단조(單調)하지 않고 자꾸만 여러 가지 중생(衆生) 근기(根機)가 많아 놓으니까 그때그때 근기 따라서 하도 오묘하니까 인제 부처님께서 중생 근기 따라서 낮은 법문 어려운 법문 섞여있기 때문에 어려운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갈래를 좀 알기 위해서 이런 같은 사제법문도 그런 가르침의 깊고 옅은 정도 따라서 4가지로 구분해서 말씀했단 말입니다.
‘사제법(四諦法)은 처음에는’ 성문승, 우리 근기로 해서 성문(聲聞), 연각(緣覺), 보살(菩薩) 이렇게 안 되겠습니까. ‘성문승(聲聞乘) 등(等) 소승천근(小乘淺近)의’ 얕을 천(淺)자, 가까울 근(近)자, 소승의 옅은 그런 ‘기류(機類)에 대(對)한 법문(法門)이나,’ 중생에 대한 법문이나, ‘기(其) 리(理)는 대소승(大小乘) 일체불법(一切佛法)에 통(通)한다.’
아까 말한바와 같이 사제법문은 어느 불법에나 안 통한 곳이 없습니다. 사제법문이 뜻이 안 들어가면 사실은 불법이 아니니까 말입니다.
‘따라서 천태대사(天台大師)는 열반경(涅槃經) 성행품(聖行品)의 소설(所說)에 의(依)하여’ 불교 철학을 가장 체계를 잘 세우신분이 부처님 뒤에 천태스님 아닙니까. 1300년 전 분입니다. 천태대사는 열반경 성행품 가운데서 ‘소설(所說)에’ 설하는 바에 의하여 ‘사종사제(四種四諦)를’ 네 가지 차원의 사제를 ‘안립(安立)하고 차(此)를 장(藏)·통(通)·별(別)·원(圓)의 사교(四敎)에 배당(配當)했다.’ 안립하고, 즉 규정하고, 규정(規定)이나 또는 하나의 체계를 세워서 하나의 논(論)으로 해서 작정(作定)하는 것을 안립(安立)이라 합니다. 안립이란 말은 불교 외에는 잘 안 씁니다. 규정이나 그런 것으로 딱 성립을 시킨단 말입니다.
‘차를 장·통·별·원의 사교에 배당했다.’ 감출 장(藏)자, 통할 통(通)자, 나눌 별(別)자, 둥글 원(圓)자, 장통별원이라,
여러분들 가운데는 앞으로 강원에 안 갈분도 있기 때문에 그런 점을 감안해서 좀 복잡하지만 상식적인 의미에서 필요한 것은 그때그때 말을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아까도 말했지만 심천(深淺) 따라서 깊고 얕음에 따라서 장교(藏敎), 통교(通敎), 별교(別敎), 원교(圓敎), 그와 같이 사교로 구별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이것은 장교 소승교 말입니다. 아까 말한 아함경과 같이 우리 중생경계에서 있다 없다하는 - 중생의 보는 경계에서 있다 없다 하는 - 선(善)도 있고 악(惡)도 있고 시(是)도 있고 비(非)도 있고 그와 같이 선악시비(善惡是非)를 논하는 즉 말하자면 상대유한적(相對有限的)인 중생 차원에 맞추어서 말씀한 가르침 이것이 장교입니다. 삼장교(三藏敎)라고도 합니다. 경(經)과 논(論)과 율(律) 즉 경·율·논, 경장 논장 율장 이렇게 3장이 겸해 있는 일반 중생차원에 맞춘 가르침 이것이 장교란 말입니다.
허나 그다음에 조금 더 중생 그릇이 익은 다음에는 그런 것은 다 허망하다. 다 허망(虛妄)무상(無常)한 것을 말씀한 가르침이 통교입니다. 따라서 반야심경(般若心經)이나 금강경(金剛經)이나 그와 같이 공(空) 사상(思想)을 주로 말씀한 가르침은 통교(通敎)에 해당합니다.
우리가 계행(戒行) 지키고 우리가 무어라고 시비(是非)하고 하는 것은 보통은 장교에 해당합니다.
또는 모든 것이 허망무상하다. 이와 같이 공사상을 주로 한 오온(五蘊)이 다 개공(皆空)이라, 일체만법(一切萬法)은 다 비어있다. 나도 비어 있고 아까말한 사제법문도 비어 있고, 그와 같이 말한 일체 아공(我空) 법공(法空)이란 말입니다. 나도 비어 있고 일체법이 다 비어있다. 이와 같은 가르침에 의지해서 가르친 법문이 통교란 말입니다.
이것이 여기 있는 통교란 말입니다.
그 다음에는 별교(別敎)라,
장교 통교 이것은 삼계 내에서 비록 아까 말한 통교가 이것이 약간 높다 하더라도 이것도 역시 삼계를 벗어난 법문이 아니라 삼계 내에서 한 법문입니다.
허나 별교 이것은 삼계를 초월해서 말입니다. 삼계를 넘어서 일체만법의 본체를 들어서 하신 법문 이것이 여기 있는 별교입니다.
그 다음 원교(圓敎)는 일체만법이, 장교나 별교나 통교나 원래 둘이 아니다. 모두를 합해서 원융무애(圓融無礙)하니 말입니다. 아주 원만무결(圓滿無缺)한 법문 이것이 원교입니다.
따라서 아까 말한 바와 같이 부처님 가르침은 이와 같이 장교, 통교, 별교, 원교 4가지 범주로 해서 구분해서 이야기 할 수 있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풀이할 적에 역시 어떤 범주에서 하는 것인가? 어떤 규범에서 하는 것인가? 규범 따라서 풀이가 달라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의 소중한 사제법문도 장교에서 보는 견해, 또는 통교에서 보는 견해, 이와 같이 각기 교(敎)에서 보는 견해에 따라서 차이(差異)가 있단 말입니다. 같은 법문이지만은 우리는 기왕이면 원교에서 보는 견해를 우리 것으로 삼아야 한단 말입니다.
이것이 생멸사제라, 또 무생사제라, 무량사제라, 무작사제라, 좀 어려우나 이것은 중요한 것이니까 여기다 인용을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나중에 경도 보고 아까말한 바와 같이 판단의 기준을 어디다가 삼아야 할 것인가? 판단의 기준을 정확히 두기 위해서 또는 남이 말한 법문을 정확히 알아먹기 위해서 이것은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어렵지만 이렇게 낸 것이니까
지금 시간이 다 되었으니까 다음 시간에 사제법문을 말씀드리기로 하겠습니다.
1. 생멸사제(生滅四諦)
5비구한테 말씀하신 네 가지 진리 사제가 있는데 여기에 사종의 사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생멸사제(生滅四諦)는 범부지(凡夫智)의 실생실멸(實生實滅)의 위에 입(立)한 사제(四諦)이다. 이것은 소승교(小乘敎) 즉 삼장교(三藏敎)의 소설(所說)이다.’
삼장교는 앞서도 말했지만 경률론, 경과 율과 논이 한꺼번에 모두가 이것이 원융무이(圓融無異)한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이 뿔뿔이 있는 경·율·논을 구분해서 가르친 법문 이것이 삼장교입니다.
다음 이것은 ‘무생사제(無生四諦)라,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인과당체(因果當體)가 즉공(卽空)임을 료해(了解)하여 생멸(生滅)을 불견(不見)하는 사제(四諦)로서 통교(通敎)의 소설(所說)이다.’
그다음은 무량사제(無量四諦)라, 고제(苦諦)에 있어서 무량(無量)의 상(相)이 있고 내지(乃至) 도제(道諦)에 있어서 무진(無盡)의 차별(差別)이 있는, 대보살(大菩薩)이 수(修)하는 바로 별교(別敎)의 설(說)이다.
그다음은 무작사제(無作四諦)라, 번뇌(煩惱) 즉(卽) 보리(菩提)요 생사(生死) 즉(卽) 열반(涅槃)의 도리(道理)에 입각(立脚)하여 단증(斷證)의 조작(造作)을 리(離)한 사제(四諦)이므로 무작사제(無作四諦)라 하며, 이는 원교(圓敎)의 사제(四諦)이다.
우리가 가장 참고할 것은 역시 맨 나중에 있는 무작사제 즉 말하자면 범부의 헤아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작이라, 범부(凡夫)가 범부라 헤아려서 이렇게 범부의 번뇌(煩惱)를 짓지 않는, 부처님 진리(眞理)의 원융무애(圓融無礙)한 도리(道理) 그대로 한 사제가 이것이 무작사제입니다.
따라서 무작사제가 부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신 참다운 사제입니다. 다만 중생이 어두우니까 여기있는 바와같이 생멸(生滅), 무생(無生), 무량(無量) 이렇게 말씀했지 결국 목적은 무량사제를 초월해서 무작사제, 범부의 조작을 떠난 범부의 헤아림을 떠난 이와같이 하나의 상이 없는 사제, 이것이 무작사제인데 이것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신 사제의 근본 목적인 것입니다.
이것에 관해서는 다음 시간< 다음날>에 조금 더 말하겠습니다.
사종사제(四種四諦) 이 법문이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앞으로 여러분들이 두고두고 음미를 해보시면 압니다. 지금은 잘 모르지만 우리가 생각할 때는 보통은 생멸사제(生滅四諦) 어제 배운 생멸사제만 안단 말입니다. 보통은 다,
고(苦)가 있고, 고의 원인으로 해서 집(集)이 있고, 그 반대로 해서 인간의 근본 목적지인 멸(滅)이 있고, 또는 멸에 이르기 위한 방법적인 도(道)가 있고, 보통 이렇게만 아는
어제 말한 바와 같이 삼장교(三藏敎), 삼장교는 소승교(小乘敎)를 말하는 것인데, 소승교의 차원에서만 보통은 사제법문을 해석합니다. 그렇게 되면 사제법문의 보다 심오(深奧)한 뜻을 제대로 알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시각을 보다 더 넓혀서 생멸사제(生滅四諦)도 있고, 또는 제법공(諸法空)이라 하는 입장에서 무생사제(無生四諦)라, 생사를 떠난 무생사제가 있고,
허나 보통 무생사제까지는, 이것은 욕계, 색계, 무색계, 삼계(三界) 내에 해당한단 말입니다.
우리 법문을 보면 보통 계내(界內) 계외(界外)라, 경계 계(界)자, 하고 안 내(內)자, 계내, 계내 이것은 삼계 내에 있는 법문이단 말입니다. 계외는 경계 계(界)자, 밖 외(外)자, 이것은 삼계 밖이란 말입니다.
어제도 말했습니다만 사제법문만 우리가 뚜렷이 안다 하더라도 불교의 한 체계는 세웠다고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무생사제(無生四諦)
무생사제(無生四諦)라, 불생불멸(不生不滅)의 경계에서 말한 사제란 말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불생불멸의 경계에 선다고 생각하면 새삼스럽게 닦네 안닦네 또는 선이네 악이네 그와 같이 구분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일체만법(一切萬法)이 원래(元來) 안 낳아버리는 불생(不生), 생사를 떠나버린 경계에사 그 무슨 닦네 안닦네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제법문은 생멸사제 보통차원에서 할 때에 닦음이 있고 무엇이 있고 하는 것이지 불생불멸의 경계에 선다고 하면 그런 것이 없단 말입니다.
따라서 고집멸도(苦集滅道)라, 고집멸도 이것도 역시 고집(苦集), 고는 내내야 인생고 아닙니까. 집은 인생고의 원인이고, 도는 인생고를 떠나기 위한 한 가지 열반에 이르기 위한 한 방법이고,
헌데 불생불멸의 경계에 서면 고집멸도가 바로 공이란 말입니다. 고집멸도 당체(當體)가 바로 공(空)이란 말입니다. 또한 동시에 멸도 역시, 멸은 본래 공이라 새삼스럽게 공이란 말도 할 필요도 없이 바로 공이란 말입니다. 고집도(苦集道)도 바로 공이요, 멸도 공이니까 그때는 다 공이 되어서 이와 같이 다 공이지만 또 역시 현상적인 의미에서는 당연히 고(苦)가 있고 낙(樂)이 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무생사제(無生四諦)는 우리가 사제법문을 닦는다 하더라도 그냥 빡빡하니 고(苦)가 분명히 다 있고, 고의 원인은 무엇이고, 집(集)이고 한다는 그런 헤아림을 떠나서 우리가 수행을 한다 하더라도 그냥 제법공이다. 당체공이다. 공을 느끼고서 자유스런 마음에서 닦는단 말입니다. 그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공을 알 때와 공을 모를 때와는 우리 수행이 굉장한 차이가 있습니다. 공을 모를 때는 그냥 그 빡빡하고 또 무슨 파계(破戒)라도 좀 해 놓으면 그 때문에 고가 되어서 말입니다. 짐이 되어서 말입니다. 인생 살기가 이따금 싫을 때가 있는 것이고, 자결도 하는 것이고 말입니다. 자살을 하는 사람들은 공을 안다면 절대로 자살을 못하는 것입니다.
당체가 즉공(卽空)이라, 인생고 모두가 바로 공이고, 또 인생고를 일으킨 집(集) 즉 탐진치(貪嗔痴) 3독심이나 삼독심(三毒心)에서 우러나온 선악의 행위가 모두가 다 당체 공인지라, 사실은 우리가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허나 아까 말한 바와 같이 공은 공이로되 현상계에서는 분명히 나가 있고 네가 있으니까. 선악도 현상의 차원에서는 있는 것입니다. 상대유한에서는 선악이 있는 것이니까. 그 때는 닦기는 애쓰고 닦는 단 말입니다. 최선을 다 하고 닦되 아까 말마따나 우리가 그 때는 집착(執着)이 없단 말입니다. 이것이 생멸사제입니다.
3. 무량사제(無量四諦)
무량사제(無量四諦) 이것은 ‘고제(苦諦)에 있어서 무량(無量)의 상(相)이 있고 내지 도제(道諦)에 있어서 무진(無盡)의 차별(差別)이 있는 대보살(大菩薩)이 수(修)하는 바로 별교(別敎)의 설(說)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아까도 대부분 말을 다 했지만 그냥 무생사제(無生四諦)는 공(空)에만 너무 치우쳐서 현상적인 그런 우리 수행 같은 것을 무시한 것이지만은 무량사제(無量四諦)는 이것은 비록 공이라고 할망정 삼계는 분명히 우리 중생 견해에서는 있으니까, 삼계에도 역시 우리가 닦는데 있어서 여러 가지 현상이 많이 있으니까, 우리 닦는 수법(修法)도 역시 무량(無量)의 상(相)이 있단 말입니다.
사성제가 있고, 12인연법이 있고, 육바라밀이 있고, 기타 계행도 오직이 많이 있습니까? 그와 같이 본래 당체는 공이로되 현상적인 상대유한적인 우리 경계에서는 그와 같이 상이 많단 말입니다. 무량의 상이 있단 말입니다.
또한 동시에 무량의 상이 있으니까 닦는 도제(道諦), 즉 말하자면 집제(集諦) 우리 번뇌 이것은 상이 아닙니까. 집제는 고의 원인이니까. 도제(道諦)는 이것은 닦는 우리 수행의 상인 것이고, 우리 번뇌의 집제도 역시 사실 따지고 보면 그와 같이 무량의 상인 것입니다.
탐진치(貪嗔痴), 108번뇌, 팔만사천 번뇌 그래서 번뇌가 오직 많습니까. 그와 같이 번뇌가 많은지라, 따라서 번뇌를 우리가 단진(斷盡)하는 떼어버리는 차별(差別)도 또 역시 많단 말입니다.
내내야 번뇌에 따라서 번뇌를 없애기 위한 수법(修法)이 있어 놔서 수법도 한도 끝도 없이 많다 말입니다. 무진의 차별이 있다 말입니다. 따라서 이런 것은 대보살이 수(修)하는, 대보살은 이와 같은 것을 다 닦는 것입니다.
일반 소원 중생은 그냥 조금 닦고, 공에 착한 사람들은 허무만 있고 계행도 필요 없다. 자칫하면 아까 말한 무생사제의 범주 내에서는 자기 행동을 아무렇게나 ‘아, 무어 당체가 공인데 무엇이 필요가 있으랴’ 이와 같이 하기가 쉽단 말입니다. 허나 공은 공이로되 아까 말마따나 우리 번뇌도 역시 끝도 갓도 없이 무량의 상이 있고, 또한 번뇌를 녹이는 것이 이것이 수행이기 때문에 수행인 도제 역시 무진의 차별이 있단 말입니다.
이런 것을 다 공이지만 닦아야 한단 말입니다. 내내야 못 닦으면 그러면 우리한테 있는 그런 소중한 무량공덕(無量功德)을 갖추고 있는 불성(佛性)을 우리가 계발(啓發)을 못 한께 말입니다. 아무리 많은 금광석(金鑛石)이 있다 하더라도 제련(製鍊)을 못하면 순금(純金)이 못나오듯이 불성이 소중하지만 못 닦으면 우리가 불성을 계발을 못한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마땅히 공은 공이지만은 우리가 아직 공을 본 것도 아닌 것이고 말입니다. 도인이 공이라 하니까 그런가보다 하는 것이지 우리가 공을 지금 느낍니까? 못 느끼기 때문에 역시 참답게 공을 느끼고서 체험(體驗)하려면 그때는 인제 여기 있는 바와 같이 무량의 수행을 필요로 한단 말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분명한 구분이 있어야 합니다.
4. 무작사제(無作四諦)
무작사제(無作四諦)라, 번뇌(煩惱) 즉(卽) 보리(菩提)요 생사(生死) 즉(卽) 열반(涅槃)의 도리(道理)에 입각(立脚)하여 단증(斷證;끊고 증하는)의 조작(造作;마음으로 헤아리는 범부의 짓거리)을 리(離)한 사제(四諦)이므로 무작사제(無作四諦)라 하며, 이는 원교(圓敎)의 사제(四諦)이다.
도인들은 법이자연(法爾自然)이라, 제대로 조금도 그때는 조작이 없이 지음이 없이 바로 행하지만, 일반 범부는 내가 해야 쓰겠구나 하고 억지로 행한단 말입니다.
마음으로 상(相)이 있게 하는 것은 이것은 조작인 것이고 마음으로 상이 없이하는 행동은 그것이 하나의 무상(無相)의 무위법(無爲法)이란 말입니다.
번뇌가 즉 보리라, 이런 것도 우리가 알기가 좀 어렵지요.
우리가 소중한 것은 내내야 결국은 보리인데 - 참다운 진리인데 - 보리라는 것은 참다운 진리 아닙니까. 참다운 진리가 우리가 인제 닦아야 할 것이고, 우리가 성취할 목적인데, 번뇌가 바로 보리다. 그래버리면 결국은 이것이 너무나 허망한 감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때에 해석을 잘해야 씁니다.
현상적 의미에서 본다면 분명히 번뇌와 보리가 이렇게 둘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내내야 번뇌를 버리고 보리를 닦지요. 허나 영원적인 근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상(相)에서 안 보고 체(體)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번뇌나 보리나 선이나 악이나 둘이 아닙니다. 항시 말한 바와 같이 일미평등(一味平等)한 불성(佛性)뿐이란 말입니다.
일체만상(一切萬象)을 근본에서 보는 바로 보는 그런 안목(眼目)에서 본다고 할 때는 일미평등한 불성인지라, 불성 가운데서 무슨 보리가 있고 또는 번뇌가 있고 두 가지 세 가지가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현상적인 상대유한의 중생차원에서 보니까 보리가 있고 도가 있고 그러는 것이지, 모두가 다 부처라는 - 무두가 다 부처로 볼 수 있는 - 그런 청정한 안목에서는 번뇌가 어디 흔적도 없지요.
따라서 이런 무작사제 이런 법문은 이것은 체에서 근본 근원에서 보는 것입니다. 중생 경계에서 안 보고 말입니다.
그와 같이 불타(佛陀)의 청정미묘(淸淨微妙)한 부처의 눈에서 본다고 할 때는 번뇌가 즉 보리요 생사가 즉 열반이란 말입니다.
열반(涅槃)은 영생(永生)을 말하는 것이고 생사(生死)는 죽고 살고 하는 중생경계(衆生境界)를 말한다 말입니다.
헌데 이러한 것들이 아까 말마따나 근원에서 보면 번뇌가 바로 진리의 가장 순수한 진리인 보리요, 또는 죽고 살고 하는 생로병사(生老病死)나 인간세상의 상대유한의 그런 것이 바로 고생 바다가 아니라 바로 그때는 청정미묘한 행복(幸福)을 맛보는 극락세계(極樂世界)란 말입니다. 열반이라는 것은 극락이나 불타나 같은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공부할 때는 있다 없다 좋다 궂다 하는 그런 관념을 항시 두면 아까 말마따나 같은 공부를 해도 마음이 괴롭고 그때는 유위법(有爲法)이라, 자꾸만 걸려버립니다.
우리가 행(行)은 다 하고 하지만 결국은 우리 마음자리는 역시 깨달아 버린 도인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한단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근본 체(體)를 우리가 안 떠난단 말입니다.
우리 불교 수행자는 근본 체를 안 떠나야 쓴단 말입니다. 상에 얽매이지 않고 말입니다. 상에 얽매이면 결국은 마음이 괴롭고 몸도 거북하고 그런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원래 둘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분 이런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몸과 마음은 분명히 둘이 아닙니다. 꼭 지금 사람들은 제아무리 말을 해도 몸과 마음을 둘로만 생각하니까 문제가 큽니다. 몸과 마음은 절대 둘이 아닙니다.
몸과 마음은 둘이 아닌데 마음의 당체는 마음의 본질은 그때는 부처 아닙니까. 부처라는 것은 모든 공덕(功德)이 다 들어 있단 말입니다. 부처 그것은 물질이 아닙니다. 순수(純粹)한 정신(精神)인 것입니다. 순수한 정신이 어떻게 운동하는 것인가? 순수한 정신이 운동하는 그런 법칙이나 운동하는 상황 따라서 물질이 보인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물질이 보이는 것이지 원래 물질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점차로 분자로 분석하고 원자로 분석하고 원자를 다시 소립자로 분석하고 들어가서 가사 중성미자(中性微子)나, 물질의 가장 미세한 것은 이제 중성미자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질량(質量)도 열량(熱量)도 없습니다. 질량 열량이 다 제로zero입니다. 그것은 물질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물질이 아닌 순수한 에너지energy만 우주에 충만한 것입니다. 그런 물질이 아닌 것들이 에너지가 어떻게 모아지는가? 어떻게 운동하는가? 거기에 따라서 원자가 생기고 무엇이 생기고 한다 말입니다.
물리학(物理學)을 공부한 사람들은 물질의 끄트머리가 텅 빈 것을 안단 말입니다. 단지 텅 비었지만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만 모르는 것이지 비었다는 것은 아는 것입니다. 분석하면 내내야 제로가 되니까 말입니다.
순수 에너지 장(場)만, 순수 에너지인 전자기장(電磁氣場)만 우주에 가득차 있는 것입니다. 그 장(場;field) 그것이 즉 말하자면 실체가 그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불성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순수에너지의 장 순수에너지 그 당체 그것이 불성인지라 불성은 우주에 충만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범부라 하더라도 역시 거기에 입각해서 사물을 봐야 한단 말입니다. 가장 근원에서 사물을 본단 말입니다. 그렇게 본다고 할 때는 물질은 없습니다. 내 몸도 역시 내내야 결국은 물질이 아닌 순수한 불성기운이 이렇게 저렇게 뭉쳐서 운동하고 빙빙 돌아서 내 몸이 되었단 말입니다.
따라서 염파(念波)라, 식(識)의 파동(波動) 마음의 파동이 결국은 물질이 되었단 말입니다. 이런 말들은 여러분들이 잘 새기고 나중에 물리학을 다시보고 그래서 음미해 보십시오. 생각의 파동, 마음 파동이 이렇게 저렇게 되어서 무엇되고 무엇되고 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때는 이런 몸이란 당체는 사실은 없단 말입니다. 따라서 병(病)도 없습니다. 병도 분명히 없는 것입니다. 코레라 병균 자체도 역시 내내야 불성입니다. 지금 저 에이즈AIDS라 해서, 후천성면역결핍증해서 그 무서운 병을 말하고 하지만 그것도 내내야 따지고 보면 바이러스virus를 구성한 것은 순수한 불성이란 말입니다.
불성으로 그런 무서운 바이러스가 되었거니 우리 생각만 불성에다 안주시키면 그런 바이러스를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위대한 도인들은 신통(神通)을 다 한단 말입니다. 위대한 도인들은 하늘로 올라가고 별별 신통을 다 하거니 그런 바이러스나 병균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 무엇인고 하면 삿되게 믿습니다. 물질이 있다. 내 몸이 이와 같이 있다하는 그런 고정관념(固定觀念)이 딱 박혀 놓으니까 이제 정신(精神)의 힘을 못 쓴단 말입니다. 정신의 힘은 물질이 어디가 팔이 하나 어긋나고 다리가 어긋나고 한 그런 정도 가지고서는 우리 마음을 움직이지 못 하는 것입니다. 원칙은 말입니다.
저번에 신문을 보니까 어느 목사 한 분이 양팔이 없고 양다리가 없습니다. 양팔이 없고 양다리가 없는데 공부해서 목사가 되었단 말입니다. 물질은 없는 것입니다.
이른 감이 있으나 여러분들 가운데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이나 실상관(實相觀)이나 그런 관법(觀法)은 이와 같이 보리와 번뇌와 둘이 아니고 말입니다.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닌 그 자리 아까 말한 바와 같이 천지우주가 일미평등(一味平等)한 불성자리 그 자리를 안 놓치고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다 마음을 두어서 그 자리를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 것이 공부인 것이지 놓쳐버리고 벌써 둘로 구분하고 셋으로 구분하고 그러면 그것은 체를 떠난 공부입니다. 체를 안 떠나야 참선(參禪)인 동시에 참다운 공부입니다.
참선은 무엇인가? 참선이라는 것은 선시불심(禪是佛心)이요 교시불어(敎是佛語)라, 선시불심이요, 선은 바로 부처의 마음이라 하듯이 우리 마음이 그러한 일미평등(一味平等)한 불심(佛心)에서 안 떠나야 그래야 선(禪)인 것입니다.
‘이뭣고’나 ‘무(無)’자나 제아무리 외운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이 불심에서 떠나 버리면 그것이 선이 못되는 것입니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부르고 무엇을 부른다하더라도 역시 우리 마음이 불심을 떠나버리면 그때는 선도 못되고 참다운 염불(念佛)도 못된다 말입니다.
순간 찰나도 우리가 불심에서 안 떠나야 씁니다.
번뇌가 즉 보리요, 생사 즉 열반이라는 즉 구분이 없는 하나의 진리, 중생의 그릇 따라서 저 지옥중생(地獄衆生)은 하나의 진리를 제일 모르는 중생이고, 차근차근 올라와서 아귀(餓鬼)는 더 알고, 축생(畜生)은 더 알고, 사람은 좀 더 알고, 천상(天上)은 더욱 더 알고, 그때는 극락(極樂) 가버리면 천지우주가 불성임을 확연히 다 알아버린다 말입니다.
그와 같이 일미평등(一味平等)한 우주가 하나의 그야말로 참 청정미묘(淸淨微妙)한 불타(佛陀)뿐인데 그 불타를 어떻게 아느냐에 따라서 그와 같이 구분이 생긴다 말입니다.
다 알아버리면 그때는 천지우주가 내가 되고 내가 천지우주가 되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겠지요.
번뇌가 즉 보리요 생사가 즉 열반이라는 이러한 도리(道理)에 입각(立脚)해서, 이러한 도리에 입각해야 합니다. 그래야 참다운 수법(修法)이란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아까 말한 생멸사제나 무생사제나 그런 사제를 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일차 아는 것이지 우리가 입각할 때는 역시 마지막 판에 있는 무작사제(無作四諦) 즉 말하자면 범부의 헤아림이 없는 사제란 말입니다.
이런 자리에 입각을 다 해버려야 씁니다. 그런데 지금 보통 나와 있는 사제법문 풀이를 보면 제일 밑에 있는 생멸사제(生滅四諦)만 겨우 해가지고서 이런 가장 소중한 끄트머리 부처님의 참 뜻은 무량사제(無量四諦)나 무작사제(無作四諦)를 안 해버리면 그때는 곤란스럽단 말입니다.
그래버리면 근원(根源)을 모르고서 줄거리는 모르고서 이파리만 집착(執着)하는 격이란 말입니다.
입각(立脚)하여 단증(斷證)의 - 끊고(斷) 증(證)하는 - 조작(造作)을 떠나버린단 말입니다. 번뇌가 원래 없거니 어디서 무엇을 끊으며 생사가 본래 없거니 무얼 떠나서 우리가 열반으로 간단 말입니까?
그러나 우리 범부지(凡夫智)에서는 역시 습기(習氣)가 있는지라 나쁜 버릇 때문에 못된 버릇 때문에 있다 없다 나다 너다 하는 버릇 때문에 습기를 안 떼어내면 우리가 여실히 본래 있는 공덕(功德)을 발휘(發揮)를 못하고 본래 있는 공덕을 우리가 수용해 못씁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상(相)을 내면 - 상을 두고 공부를 하면 - 공부가 잘 안 통한단 말입니다. 항시 그때는 상에 머물러버리기 때문에 그러기 때문에 애쓰고 계행 지키고 참선도 한다 하더라도 그때는 ‘내가 범부다’ ‘내가 죄가 있다’ 그런 마음을 아예 말아야 씁니다.
어떤 경우에 참회(懺悔)할 때는 ‘짐짓코 상을 내서 내가 정말로 죄를 많이 지었구나’ 이와 같이 한다 하더라도 역시 우리 공부하는 분상에서는 그때는 아까 말한 바와 같이 탕탕무애(無礙)란 말입니다. ‘다 비어서 천지우주가 오직 불성뿐이다’ 하는 거기다 마음을 딱 두어 버려야 공부가 빠르단 말입니다.
‘내가 죄가 있다’ ‘죄가 있다’ 이래서 참회하고 눈물을 흘리고 하지만, 그것도 필요는 하지만 그것은 일차적으로 아까 말한 바와 같이 생멸사제나 그런 정도에서 하는 것이니까, 그것은 참회해도 상을 두는 참회인 것이고 말입니다.
상을 안 두는 참회는 그때는 그러한 것을 떠나서 여기 있는 바와 같이 번뇌가 즉 보리요, 생사가 열반이라는 그러한 불타의 체에 입각해서 우리가 참회를 해야만 참다운 참회란 말입니다. 그래야만 죄의 근원이 끊어집니다.
고집멸도 사제 가운데서 중요한 것은 무어라 해도 도제(道諦) 즉 말하면 도(道) 이것이 멸(滅)에 이르는 길 아닙니까.
본래 생사가 없다 하더라도 역시 우리는 번뇌의 습기(習氣)가 있는지라 마땅히 우리는 도를 닦아야만 비로소 열반에 이른단 말입니다. 닦되 역시 아까 말한바와 같이 상을 두고 닦을 것이 아니라 상을 안 두고 닦는 소위 말하는 무위법(無爲法)으로 닦는단 말입니다. 우리가 상을 두어 놓으면 무위법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같은 계행(戒行)을 지킨다 하더라도 역시 상을 두면 그것은 유위법(有爲法)인 것이고 말입니다. 상을 안 두면 무위법이란 말입니다. 물론 우리는 저절로 상이 안 나올 수 없습니다만 상이 없다는 확신을 자꾸만 가져야 합니다.
팔정도(八正道)
팔정도(八正道)라, ‘정(正)은 성(聖)이다. 기도편사(其道偏邪)를 리(離)하므로 정도(正道)라 운(云)하고, 또한 성자(聖者)의 도(道)이므로 성도(聖道)라 한다.’
정(正)이나 성(聖)은 같은 뜻입니다. 성스럽다 하는 것도 역시 발라야 성스럽겠지요. 그러니까 정도(正道)나 성도(聖道)는 같은 뜻입니다. ‘기(其) 도(道)’ 그 닦는 길이, 도 이것도 역시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한 가지는 진리 자체를 도라 하기도 하고, 또는 진리에 가는 길, 길을 도라 하기도 합니다. 그와 같이 바로 당체를 도라고 하지만 우리가 생각할 때는 거기에 가는 길도 역시 도라고 말합니다. ‘편사(偏邪)를 리(離)하므로 정도(正道)라 운(云)하고,’ 치우칠 편(偏)자, 삿될 사(邪)자, 치우치고 삿됨을 떠나므로, 떠날 리(離)자, 정도라 말하고, 운(云)하고, 그 길이 치우친다거나 삿되면 정도라 할 수가 없겠지요. ‘또한 성자(聖者)의 도(道)이므로 성도(聖道)라 한다.’
여기에 여덟 가지 법문이 있지 않습니까.
1. 정견(正見)
일(一)에 ‘정견(正見)이라,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제(四諦)의 리(理)를 분명(分明)히 견(見)함을 운(云)하며, 팔정도(八正道)의 주체(主體)이다.’
여러분들이 다 배워서 몇 번씩 보시고 알겠습니다만 부처님법문은 누가 말하나 항시 새로운 것입니다.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제(四諦)의 리(理)를 분명(分明)히 견(見)함을 운(云)하며,’ 고집멸도 사제의 이치(理致)를 분명히 못 보면 정견(正見)이라 할 수 없단 말입니다. 우리는 정견을 꼭 세워야 합니다. 정견을 못 세우니까 함부로 우리가 망동(妄動)을 한단 말입니다. 바른 견해(見解) 바른 인생관(人生觀) 바른 가치관(價値觀) 이것이 정견인데,
그러면 바른 인생관은 무엇인가? 역시 우리 인생은 고(苦)다. 고라고 분명히 느껴야 쓴단 말입니다. 물론 근원적인 의미에서는 아까 말마따나 고(苦)나 집(集)이나 멸(滅)을 다 떠나 버렸지만 그러나 현상적으로 볼 때는 인생은 고(苦)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수행자(修行者)는 항시 현상적(現象的)인 것을 몽환포영(夢幻泡影)으로 보고<苦·空·無常·無我>, 실상적(實相的)인 것 생사(生死)가 없고 번뇌(煩惱)가 없고 이러한 실상<常·樂·我·淨>을 참말로 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항시 대비(對比)해서 봐야 쓰는 것입니다.
고집멸도 사제의 그런 이치를 분명히 봄을 말하며 이것이 ‘팔정도(八正道)의 주체(主體)이다.’
여기 다음에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많이 있지만 내내야 바른 가치관, 바른 가치관 정견이 항시 주체입니다. 생활도 마찬가지로 바른 가치관이 있어야만 바른 생활을 할 수가 있듯이 수행도 역시 바른 정견이 앞섭니다.
즉 인생고는 여러 가지 생로병사나 그런 고에 해당하고, 고의 원인은 저번에 배운 바와 같이 탐진치(貪嗔痴) 삼독심(三毒心)에서 일어나는 선악의 행위를 말하는 것이고 그러나 그런 것을 다 떠나버린 참다운 행복의 경계 이것은 멸인 것이고 멸에 이르기위한 길은 이와 같이 팔정도라 하는 사제법문의 도리를 분명히 아는 이것이 바른 견해란 말입니다.
2. 정사유(正思惟)
이(二)에 ‘정사유(正思惟)라, 이미 사제(四諦)의 리(理)를 견(見)하고 더욱 사유주량(思惟籌量)하여 진지(眞智)를 증장(增長)함을 운(云)함.’
사유(思惟) 이것은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미 사제(四諦)의 리(理)를 견(見)하고’ 먼저 사제의 이치를 분명히 알고, ‘더욱 사유주량(思惟籌量)하여 진지(眞智)를 증장(增長)함을 운(云)함.’ 더욱 사유주량 하여 진지를 참다운 지혜를, 증장(增長) 이것은 폭(幅)으로나 상하(上下)로나 길이나 폭이나 다 늘이는 것이 증장입니다. 즉 말하자면 어떤 것을 보다 더 길이나 폭이나 모두를 늘리는 것이 증장이란 말입니다.
3. 정어(正語)
삼(三)에 ‘정어(正語)라, 진지(眞智)로써 구업(口業)을 수(修)하여 일체(一切) 비리(非理)의 어(語)를 작(作)하지 않음을 운(云)함.’
진지로서 참다운 지혜로서 구업(口業)을 수(修)하여 구업을 닦아서 구업은 내내야 입으로 짓는 업 아닙니까. 일체 비리(非理)에 이치에 어긋나는 이치가 아닌 말을 짓지 않음을 말한다.
이런 때도 앞서 든 그러한 생멸사제나 그런 관념도 필요하지만 역시 근원은 언제든지 아까 말한 무량사제 말입니다. 또는 무작사제 그러한 상이 없는 사제를 근본에다 딱 두고서 우리가 말을 해야 한단 말입니다.
구업은 아시는 바와 같이 나쁜 것은 욕설(辱說), 이간하는 말, 또는 거친 말, 꾸며서 하는 말,
4. 정업(正業)
사(四)에 ‘정업(正業)이라, 진지(眞智)로써 신(身)의 일체(一切) 사업(邪業)을 제(除)하고 청정(淸淨)의 신업(身業)에 주(住)함을 운(云)함.’
진지로써 바른 지혜로써 몸의 일체 사업을 일체 삿된 업을 다 없애고 제하고 청정 신업에 주함을 청정신업에 머무름을 말한단 말입니다.
이런 것은 우리가 다 아는 문제 아닙니까. 하여튼 살생 말고, 또는 훔치지 말고, 모다 그런 등등 술 먹지 말고, 이것이 신업에 이것이 청정 몸의 업 신업입니다. 그런 몸으로 청정 계율을 지키는 것, 몸으로 나쁜 점을 떠나는 것입니다.
5. 정명(正命)
오(五)에 가서는 ‘정명(正命)이라,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을 청정(淸淨)히 하여 정법(正法)에 따라 활명(活命)하며, 오종(五種)의 사(邪)활(活)명(命)을 리(離)함을 운(云)함. (*오사명(五邪命); 천문(天文), 지리(地理), 사주(四柱), 상(相), 점(占) 等)’
신구의(身口意) 몸으로 짓고, 입으로 짓고, 뜻으로 짓는 그러한 삼업(三業)을 청정히 하여, 정법(正法)에 부처님의 참다운 진리에 따라서 활명(活命), 생활 하는 것이 활명입니다. 생활을 하며 활명하며, 오종(五種)의 다섯 종류의 사활명(邪活命)이라, 삿된 생활을 떠남을 말한단 말입니다.
오사(五邪)는 무엇인고 하면 이것은 천문(天文)이나, 천문을 보고서 그 하늘의 별이나 보고서 아는 점만 치고 사는 것이 천문 아니겠습니까. 지리(地理)라, 풍수지리학(風水地理學)을 보고서 도참설(圖讖說)로 해서 이상한 말을 하는 것이고, 사주(四柱)라, 그 사람의 운명을 감정해서, 사주라는 것은 생년(生年)·월(月)·일(日)·시(時)가 사주입니다. 그걸 따져서 그 사람운명을 감정해서 뭐라고 헛된말을 한단 말입니다. 또 상(相)을 보고서 점(占)을 하고 이런 등등의 것이 사명(邪命)입니다. 지금 사람들은 이런 것도 더러 출가(出家)한 분들도 한다 말입니다. 이런 것은 모두가 삿되게 생활 하는 것입니다.
삿된 생활을 떠나서 청정한 신구의(身口意)로 우리가 생활 한단 말입니다.
따라서 직업도 바른 직업을 가져야 한단 말입니다. 바른 생활 바른 직업을 갖는 것 이것이 정명입니다.
6. 정정진(正精進)
육(六)은 ‘정정진(正精進)이라, 진지(眞智)를 발용(發用)하여 강인(强靭)하게 열반(涅槃)의 도(道)를 수(修)함을 운(云)함.’
진지를 - 참다운 지혜를 -일으켜서 강인하게 조금도 어떤 경우든 거기에 꺾이지 않고서 말입니다. 강인하게 열반의 길, 열반은 영생해탈(永生解脫), 열반, 극락, 영생, 다 같은 뜻입니다. 영생의 길을 닦음을 말한단 말입니다.
비록 이런 것을 다 안다 하더라도 게으름 부리면 갈 수가 없습니다. 안 쉬고 애쓰고 해야 쓴단 말입니다.
정정진이라, 참다운 지혜를 일으켜서 강인하게 꿋꿋하게 열반의 영생의 길을 닦는단 말입니다.
7. 정념(正念)
칠(七)에 가서 ‘정념(正念)이라, 진지(眞智)로써 정도(正道)를 억념(憶念)하고 사념(邪念)이 무(無)함을 운(云)함.’
참다운 지혜로써 정도를 억념하여, 억념 이것은 마음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깊이깊이 말입니다.
그냥 정견(正見) 이것은 우리 불교에서 말하는 문사수(聞思修)라, 그냥 귀로 들어서 아, 그렇구나, 이렇게 알 정도는 정견 이지만 정사유(正思惟)는 생각을 더 깊이 하고, 정념(正念)은 더 깊이 해서 그때는 확신을 딱 가져서 말입니다. 마음 깊이 억념(憶念)이라, 억념은 그와 같이 기억해서 잃지 않는단 말입니다.
따라서 정견, 정사유, 정념 이것은 그러한 정도의 차이입니다. 정견을 보다 더 깊이 정사유 하고, 보다 더 깊이 하면 정념이고 말입니다. 마음으로 기억해서 잃지 아니해가지고서 사념(邪念)이 떠나서 그때는 삿된 생각이 없단 말입니다.
8. 정정(正定)
팔(八)에 ‘정정(正定)이라, 진지(眞智)로써 무루청정(無漏淸淨)한 선정(禪定)에 입(入)함을 운(云)함.’
참다운 지혜로써 무루청정한 선정에 들어감을 말한다 말입니다. 무루청정(無漏淸淨)은 무엇인가? 루(漏)자 이것은 ‘샐 루(漏)자’ 번뇌(煩惱)를 루라 합니다. 물이 새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번뇌가 있는 법은 유루법(有漏法)이고, 번뇌가 없는 법은 무루법(無漏法)입니다. 마음이 헛간디로(쓸데없는 곳으로) 새버려서 온전치 못한 것이 루(漏)를 의미한 것이니까, 번뇌가 있으면 마음이 헛간디로 새버리면 유루(有漏)고, 번뇌가 없으면 무루(無漏)란 말입니다.
무루청정(無漏淸淨)한 수행(修行)은 어떤 것인가?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원래 번뇌가 없고 본래 무번뇌(無煩惱)라,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란 말입니다. 본래 하여튼 물질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직 부처님만 계시고, 오직 마음만 있고, 그런 수행이 무루청정한 수행인 것입니다. 우리는 꼭 무루청정한 수행을 해야 씁니다.
기독교와 불교와의 여러 가지 차이점을 많이 거론하지만 기독교는 내내야 결국은 하나님 따로 있고, 나 따로 란 말입니다. 하나님과 나를 하나로 보는 기독교 교리는 별로 없습니다. 물론 마태복음서나 요한복음서의 어느 수승한 대목에 가서 우리가 깊이 생각하면 그렇게 합리화 시킬 수는 있다 하더라도 우선 표현 된 것으로 보면 기독교는 하나님 따로 나 따로 입니다.
어떤 종교나 불교와 같이 ‘부처님과 나와 둘이 아니다’ ‘천지우주는 부처님뿐이다’ 하는 그런 수승한 진리는 없습니다. 그런 진리가 되어야만 참다운 우리 마음의 해방(解放)이 있는 것입니다. 참다운 자유(自由)가 있는 것이고 말입니다.
하나님한테 내가 얽매여 있다. 하나님한테 창조를 당해서 얽매여 있다. 이러면 그때는 우리한테 자유가 없단 말입니다. 따라서 참다운 자유 참다운 인간의 존엄성은 불교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억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어요.
불교는 그야말로 참 가장 수승한 것이 바로 내 마음이니까 말입니다. 또한 일체중생이 그런 마음이 다 들어 있는 것이니까 다 평등한 것이고, 참다운 평등, 참다운 자유, 참다운 존엄은 불교 밖에는 없습니다.
무루청정(無漏淸淨)한, 오직 천지우주가 청정미묘(淸淨微妙)한 불성(佛性)뿐이다 말입니다. 청정 미묘한 불성뿐이라는 그러한 참 지혜에 입각해 가지고서 참선(參禪)도 하고 염불(念佛)도 해야만 참다운 선정이란 말입니다.
억지로 싫은 것을 의심(疑心)하고 따지고 그러는 것은 사실은 무루청정(無漏淸淨)한 참선이 못되는 것입니다. 다 떠나서 세상에 그야말로 더러운 것은 아무것도 없고 의심할 것도 없고 의심할 건덕찌도 없고 말입니다. 의심할 건덕찌도 또는 차별할 만한 그런 어떤 엉터리도 없고 이러한 모두가 아까 말한 바와 같이 청정미묘(淸淨微妙)한, 청정미묘한 불성에 입각한 수행이 되어야만 무루청정(無漏淸淨)한 참선이고 염불인 것입니다.
염불(念佛)도 그래야 되고 우리가 불공(佛供)을 모신다 하더라도 역시 또는 영가(靈駕)를 천도(遷度)한다 하더라도 이와 같이 무루 청정한 마음에 입각(立脚)하면 훨썩 더 천도가 빠른 것입니다.
* 팔정도(八正道) 중(中),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의 삼지(三支)는 계품(戒品), 정념(正念) 정정(正定)의 이지(二支)는 정품(定品),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정진(正精進)의 삼지(三支)는 혜품(慧品).
팔정도중, 팔정도 가운데서, 정어 이것은 참다운 말을 이릅니다. 사제의 진리를 다 알고서 참다운 진지에 입각해서 구업을 구한다 말입니다. 말을 한단 말입니다. 그러한 정어와 정업이라, 이것도 역시 참다운 지혜로 해서 우리 신업(身業) 즉 말하자면 몸으로 하는 행동 하는 이것이 정업 안 되겠습니까. 또는 정명이라, 참다운 진지(眞智)로써, 참다운 진리가 앞서지 않으면 정업도 정명도 못되는 것입니다.
꼭 참다운 진지 참다운 지혜가 앞서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참다운 가치관이 앞서야 만이 바른 말, 바른 업, 바른 생활이란 말입니다.
같은 말도 알뚱말뚱허니 억지로 하면 위선(僞善)에 불과합니다. 역시 도리에 입각해서 말입니다. 도리를 우리가 억념해가지고서 도리에 입각해가지고서 우리가 바른 말하고, 바른 업을 짓고, 바른 생활을 해야만 그것이 무루청정한 삼업(三業)이란 말입니다.
팔정도 가운데서 정어, 정업, 정명, 삼지 세가지 이것은 계품에 즉 계행에 계율에 해당하고, 또 정념, 정정, 이것은 정품, 선정에 해당하고 말입니다. 또 정견, 정사유, 정정진, 삼지 이것은 혜품에 해당 합니다.
즉 말하면 부처님의 여러 가지 수행법(修行法)은 모두가 다 가장 간추리면 계(戒)와 정(定)과 혜(慧) 아닙니까. 즉 삼학도(三學道)라, 석 삼(三)자, 배울 학(學)자, 길 도(道)자, 삼학도 이것이 가장 간추린 수행 방법인데 좀 부연시키면 이와 같이 팔정도(八正道)고 말입니다. 더 부연시키면 무량의 수행법이 있겠지요.
우리는 우선은 이와 같이 팔정도만으로 해서 짐작하고 팔정도를 더욱 줄이면 방금 말한 바와 같이 정어, 정업, 정명, 3지 이것은 계품인 것이고, 정념, 정정, 2지는 정품인 것이고 선정에 해당한 것이고, 정견, 정사유, 정정진, 3지는 혜품에 지혜에 해당합니다. 이와 같이 요는 따지고 보면 계정혜(戒定慧) 삼학도(三學道)를 말한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본사아미타불!
19870306-태안사-청화대선사 설법
19870306-태안사 선방 수좌 녹음
20090131-녹취 워드작업-본정
20090203-교정-주안
20090207-재정리-본정
*본 법문은 큰스님의 깊은 뜻을 그르치지 않도록 구어체 그대로(사투리 포함) 받아쓴 글로 어색한 부분도 있음을 감안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본 법문을 윤문(潤文)하시고 싶으신 분은 꼭 큰스님 원음(原音)을 들으시면서 하실 것을 권합니다. 워드파일과 원음mp3는 누구에게나 제공합니다.*
본정-010-2963-3611*
'3. 청화 큰스님 법문집 > 4. 금강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84호 MBC - TV특강 (0) | 2009.07.12 |
---|---|
제83호 십이인연법-청화대선사설법-태안사 회해당 (0) | 2009.07.11 |
제81호 반야심경 설법-청화(淸華)대종사 (0) | 2009.07.09 |
제78호 BBS 광주불교방송개국 6주년 기념법회 (0) | 2009.07.08 |
제77호 보살계(菩薩戒) 수계(受戒)식 (0) | 2009.07.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