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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4. 금강륜

제77호 보살계(菩薩戒) 수계(受戒)식

                                <제 77 호>

2001년 8월 5일 보살계(菩薩戒) 수계(受戒)식

 

   

     금강보계(金剛寶戒)


우리 중생(衆生)들이 상(相)으로 관찰하면은 천지우주(天地宇宙)가 천차만별(千差萬別)로 구분이 있습니다. 나 따로 있고 너 따로 있고 그와 같이 구별이 됩니다만은 우리가 본래적(本來的)인 근본(根本)자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에, 근본에서 관조(觀照)할 때는 모두가 다 하나의 자리로 귀일(歸一)이 되는 것입니다.

성인(聖人)들은 그와 같이 천지우주(天地宇宙)를 하나로 보기 때문에 나와 남의 구분도 없는 것이고 또는 근원적인 의미에서는 내 것과 남의 것의 구별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衆生)차원에서 그렇게 보는데 있어서 가지가지의 갈등(葛藤)이 생기고 부조리가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 불자님들이 보살계(菩薩戒)를 받습니다. 보살계는 이것은 다른 계율(戒律)과 다릅니다. 가령 무슨 계율을 지킨다. 살생을 말라, 거짓말을 말라, 이와 같이 금계(禁戒)적으로 단순한 금욕적(禁慾的)으로만 하는 그런 계율은 일반 보통 계율입니다.

그러나 보살계라는 것은 마치 공자님이 내가 지금 70에서 종심소유(從心所有)하야, 내 마음대로 행해도 법도(法道)에 어긋남이 없다고 하듯이, 공자가 어째서 70에 내 마음대로 행해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다고 하겠습니까. 그것은 공자님은 70이 되어서 우주의 본바탕을 훤히 깨달았단 말입니다.

우주(宇宙)의 진리(眞理)의 당체(當體)를 본바탕을 깨닫고 보니까 나도 없고 너도 없고 또는 우주는 하나의 몸이기 때문에 자기개인의 애고를 위해서 자기개인의 욕망(慾望)을 위해서 남을 피해를 주고 남한테 신세를 끼칠 필요가 없단 말입니다.

우리가 인식론적(認識論的)으로 모두를 대상(對象)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분명히 구분이 있습니다. 구별이 있고, 허나 우리가 존재론적(存在論的)으로, 존재란 것은 무엇 인고 하면은 우주가 지금 현재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 존재론적으로 우리가 실상(實相)에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구별이 없단 말입니다.

요새 철학도 실존철학(實存哲學)이 있고 또는 분석철학(分析哲學)이 있고 철학의 주류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실존철학 이라는 것은 우주의 실상(實相)을 밝힌 철학이란 말입니다. 우주의 실상은 어떠한 것인가?

아까도 말씀드린바와 같이 겉에서 보면은 천차만별(千差萬別)로 이것저것 차이가 있지만은 그 바탕에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하나란 말입니다.

지금 지구상에서 큰 바다에 가서 보나 다도해(多島海)에 가서 보나 그 무수한 섬들이 있지 않습니까. 섬을 바다위에서 보면은 그건 섬이겠지요. 그러나 바다의 바탕에서 바닥에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섬이 아니라 하나의 지구(地球) 덩어리 육지란 말입니다.

그와 똑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이번에도 우리 불자님들께서 존경하신 여러분들께서 정말로 4박5일 동안 열심히 공부 하셨습니다. 50이 넘으신 노숙한 교수님들도 계시고 그런데 참 고생도 많이 하시고 보람 있는 정진(精進) 기회였습니다.

그동안에 자기 업장(業障)따라서 얼마만치 공부가 되었는가 하는 것은 차이가 있겠습니다만은, 그것이 소중한 공부인 것이 무엇 인고 하면은 다만 고생만 했다 하더라도 고생그것이 절대로 헛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 할 때는 인생(人生)이라는 것이 고해(苦海)이니까, 사바세계가 바로 고생바다인 고해이니까, 그 고해에서는 어느 누구나가 다 고생스럽습니다. 아무리 행복스러운 분도 생노병사(生老病死)라 하는 한계 상황을 넘을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외에도 얼마나 모순(矛盾)이나 부조리가 많습니까. 이런 가운데서 고생뿐이란 말입니다. 고생뿐인데, 그 고생이 아무런 필요가 없는 것인가?

고생이 절대로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고생으로 해서 우리의 다생겁래(多生劫來)로 지은 업장을 녹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못살아서 지옥(地獄)에 떨어질 수도 있지 않습니까. 지옥(地獄) ․ 아귀(餓鬼) ․ 축생(畜生) ․  수라(修羅) ․ 인간(人間) ․ 천상(天上) ․ 성문(聲聞) ․ 연각(緣覺) ․ 보살(菩薩) ․ 부처 이것이 이른바 우리 중생이 생사내왕(生死來往)하는 그러한 세계인데, 이런 세계가 모두가 다 우리의 업(業) 따라서 우리가 어떻게 살았던가?

우리 생명(生命)이라는 것은 금생(今生)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다생겁래라, 한도 끝도 없이 우리 생명은 연속이 됩니다.

그러기에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 불생불멸이라, 우리 생명자체는 절대로 죽엄이 없습니다. 업(業)따라서 모양만 바꿀 뿐이란 말입니다.

금생에 죽는다 하더라도 우리가 아쉬웁게 생각하고 서운하게 생각할 것이 없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우리는 죽자마자, 죽자마자 1초의 시차도 없이 그냥 또 생(生)을 받는단 말입니다.

보통은 다 우리 생명은 아까도 말씀드린바와 같이 본래가 하나의 실상(實相)이란 말입니다. 본래가 실상이란 그 말은 무슨 뜻 인고 하면은 본래가 부처라는 뜻입니다. 부처만이 참다운 실존(實存)이고 참다운 실상입니다.

우리가 인식적으로 말하면 바로 그 자리가 우주(宇宙)의 본 성품(性品)자리란 말입니다. 그러나 그 자리는 우주에너지의 우주의 생명자리이기 때문에 그냥 보통 무생명인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이란 말입니다.

우주생명자리는 그냥 보통 제한되고 또는 능력(能力)도 한계가 있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한도 끝도 없는 능력(能力), 한도 끝도 없는 자비(慈悲), 행복(幸福) 이런 것이 다 갖춰 있는 자리란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자리가 인격적으로 생명적으로 표현하면은 바로 부처님 아닙니까? 부처님이나 우주에너지라는 말이나 똑같은 뜻입니다. 그것과 내생명이 차이가 없단 말입니다. 다른 사람 생명도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가 남한테 베푸는 보시(布施) 행동을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보통 겉으로만 저 사람은 나보다 못하니까 내가 좀 도와 줘야 쓰겠구나. 이런 것은 불교적인 의미에서는 애견대비(愛見大悲)라. 애견대비라, 중생적인 애착(愛着)을 미처 못 뗀 그런 자비심(慈悲心)이란 말입니다.

참다운 베풀음은 무었인것인가? 저 사람과 나의 생명이 본래로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의 생명으로 보아져야 실상자리입니다. 실존자리입니다.

원래가 하나의 생명인데 실상은 바로 하나의 생명인데 우리 중생이 그렇게 보지를 못하니까 너 따로 나 따로 란 말입니다.

그래서 보살계는 바로 불성계(佛性戒)라,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불성계라, 상대유한적(相對有限的)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계(戒)가 아니라 바로 우주의 본성(本性), 우리 인간의 본성자리에서 본성을 밝히는 계란말입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공자님이 70이 되어서 내 마음대로 행해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다. 그런 자리가 바로 불성에 비추어서 우리 마음이 불성에 안주한다고 생각 할 때는 우리 주체성(主體性)은 바로 불성(佛性)입니다. 우리 실존은 바로 불성입니다.

불성에다가 우리 마음을 두고서 행동한다고 생각 할 때는 나와 남이 둘이 아닌 것이고 다른 동물과 나도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의 풀포기, 하나의 돌멩이도 사실은 다 살아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철학적(哲學的)으로 물활론(物活論)이라, 물활론이란 것은 물질이란 만물 물(物)자, 살 활(活)자 어느 것이나 유정무정(有情無情), 유상무상(有相無想) 모양이 있는 것이나 모양이 없는 것이나 존재하는 것은 모두가 다 생명이 있단 말입니다. 이것이 물활론입니다.

여러분들 아시는 바와 같이 지식정보화(知識情報化)시대 아닙니까? 지식정보화 시대라는 것은 정보의 홍수, 너무나 많은 정보들, 이런 정보들을 우리가 어떻게 소화를 시켜야 할 것인가? 소화를 못 시키면 항시 마음이 불안스럽습니다.

그래서 이 지식정보화 시대에 있어서는 우리 만 중생이 모두가 다 철인(哲人)이 되어야 한단 말입니다. 철학자(哲學者)가 되어야 됩니다. 이 철학 저 철학 교리적으로 많이 안다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本質的)으로 진리(眞理)의 당체를 파악해야 된단 말입니다. 그래야 자기 주체(主體)가 섭니다.

주체가 서야 비로소 불안의식(不安意識)을 해소할 수가 있단 말입니다. 불안한 마음에서 우리가 행복할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이 보살계는 아까도 말씀마따나 불성계라,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바로 불성(佛性), 우주만유(宇宙萬有)의 근본자리 우리 인간성의 근본(根本)실상자리 그 자리에서 우러난 하나의 법도가 보살계입니다.

따라서 다른 말로 해서는 무상청정계(無相淸淨戒)라, 그 상(想)이 없는 계율이란 말입니다. 현상(現想)에서 보고 있는 차별적인 구차한 계(戒)가 아니라 우리 불성(佛性)의 법도(法道) 우주의 법도 그대로 우리인간이 준수해야 될 규범(規範)이 보살계란 말입니다.

조금 더 부연해서 말씀을 드립니다만은 아까도 말씀드린바와 같이 모든 지식정보가 아주 혼란스럽게 서로 얽히고설키고 착종하고 있어놔서 우리가 기본적인 인생(人生)의 이론적(理論的)인 체계(體系)는 갖추어야 됩니다.

그건 우선 어떤 것 인고 하면은 여러분들이 아시는 바와 같이 이른바 유물론(唯物論)과, 모든 존재는 다 물질이라는 유물론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가 하면은 거기에 대립해서 관념론(觀念論)이라, 관념론은 유심론(唯心論)이란 말하고 의미는 똑같습니다.

우주를 하나의 생명으로 보는 그런 자리가 이른바 유심론, 오직 유(唯)자, 마음 심(心)자, 유심론 또는 관념론이라 이렇게 말한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관념론에 설 것인가? 유물론에 설 것인가? 이것은 우리 불자님들 자유로운 의사(意思)에 맡기는 것이지만은 적어도 종교(宗敎)를 믿는다고 생각 할 때는 철학(哲學)상의 유심론 또는 관념론의 그쪽에다가 우리 이상을 두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유물론이라고 생각 할 때는 오직 물질적(物質的)인 기회균등(機會均等)이라든가 물질적인 평등(平等)이라든가 이런데다가 중점을 두기 때문에 우리 인간성은 다분히 건조해 지지 않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 소비에트 사회에서 그렇게 유물변증법(唯物辨證法)을 가지고서 공산주의(共産主義)사회를 건립했지만은 70여년동안에 이렇게 꿰메고 저렇게 얽히고 해서 했지만은 결국은 아, 한번에 다 무너지는 것 보십시오.

그것은 그네들의 철학적 견지가 입각지가 유물론이란 말입니다. 모두를 물질로 본단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천지우주(天地宇宙)를 하나의 마음으로 보는 하나의 불성(佛性)으로 보는 그런 주의입니다.

이른바 다시 말씀 드리면은 범신론(汎神論)이라. 같은 유심론 같은 관념론 가운데도 범신론과 일신론(一神論)이 있지 않습니까. 이런 개념도 여러분들께서 간단한 것이니까 기억해 두셔야 됩니다.

일신론은 모든 존재를 하나님이 창조(創造)했단 말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했으니까 응당 하나님이 섭리를 해야 되겠지요. 하나님이 창조(創造)했는데 창조도 그냥 공평무사(公平無私) 한 것이 아니라, 우리 사람하고 다른 동물하고 또 다른 식물하고 차이가 있단 말입니다.

사람도 예수하고 다른 사람하고 차이가 있다고 하듯이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계율(戒律)을 지킨다 하더라도 우리 사람 사람끼리는 이른바 일신론적인 관점에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사람 사람끼리는 서로 죽이지 않고 서로 사랑하고 그렇게 하라고 돼있지 만은 다른 동물과 사람관계는 어떠는 것인가?

다른 동물이나 다른 식물이나 모든 것은 우리 사람을 위한 방법이 되기 때문에 사람을 위해서 희생(犧牲)을 당해도 무방하다고 본단 말입니다.

이 자연(自然)에 있는 모든 것도 역시 우리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는 무자비(無慈悲)하게 개발(開發)도 하고 훼손(毁損)을 시켜도 무방하다고 본단 말입니다. 이것이 일신론(一神論)적인 사상입니다.

그러나 범신론(汎神論)이라, 넓을 범(汎)자, 귀신 신(神)자, 범신론 말입니다. 우리 불교는 부처님 가르침은 범신론이란 범주(範疇)에다가 다 집어넣을 필요는 없습니다. 없으나 구태여 철학적으로 말 하면은 우리 불교나 또는 힌두교나 말입니다. 또는 유교나 그런 종교는 모두가 범신론에 해당하다고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 범신론은 무엇인가. 범신론(汎神論)은 우주(宇宙)모두가 바로 신(神)이라고 본단 말입니다.

자연이나 다른 동물이나 인간이나 모두가 다 신이 아님이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즉 자연(自然)즉 신(神)이요, 신(神)이 곧 자연(自然)이라고 본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어느 것도 다른 것을 위해서 그 다른 것을 희생 시킬 수가 없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보살계란 것은 그러한 범신론적 견지에서 우주가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 덩어리인 것이니까 근본바탕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우열과 더 높고 낯은 것이 있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 차원에서 보면은 천차만별로 구분이 되겠습니다만은 그래서 우선 철학적(哲學的)으로 범신론(汎神論)적인 견지에 서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 보살계(菩薩戒)는 아까도 말씀마따나 불성계(佛性戒)라, 천지우주(天地宇宙)의 근본적인 성품(性品)을 기조로 해서 이루어지는 법도(法道)가 보살계란 말입니다.

따라서 이 보살계는 아까도 말씀마따나 우리 인간이 우주 내에서 지켜야 될 가장 근원적인 윤리도덕(倫理道德)입니다. 참다운 철학이 있으면은 반드시 거기에 따르는 윤리적인 실천이 따라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우주란 것이 그냥 만연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법도(法道)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생명(生命)의 당체(當體)이기 때문에 마땅히 거기에는 필연적(必然的)으로 윤리도덕이 따르는 것입니다. 

우주의 법도, 그런 가운데서 우리 인간이 닦아야 될 법규(法規)가 보살계란 말입니다.


보살계(菩薩戒)는 열 가지 무거운 계(戒)와 마흔여덟 가지 가벼운 계(戒)가 있습니다.

그러나 마흔여덟 가지 가벼운 계도 열 가지 가운데 다 포함된 진리기 때문에 상당히 장황한 시간동안에 말씀을 드려야 48계를 다 말씀을 드릴 것인데 그래서 열 가지 무거운 계율만 말씀을 드립니다. 그 가운데 가서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다른 마흔여덟 가지는 다 포함된 계율입니다.

우리가 계율(戒律)을 받을 때는 먼저 참회(懺悔)를 해야 됩니다. 잘못해서 과거(過去)에 지은 죄가 없어져버려야 이런 낡은 푸대에 든것을 다 비워버려야 새로운 것을 거기에 넣을 수가 있지 않습니까?

새로운 것을 담기 위해서는 마땅히 낡은 것은 없애야 하듯이 과거(過去)에 지은 죄를 모두가 참회를 해야 됩니다. 참회하는 그런 걸로 해서 연비를 하시기 바랍니다.

  <참회진언과 연비진행>

우리가 세속(世俗)생활에서 무슨 큰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도덕적(道德的)으로 하자가 많이 있다거나 그런 때는 절대로 성취(成就)를 못 합니다.

우리 출가(出家)스님 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절에 가서 상주(常主)할 때도 적어도 큰 불사(佛事)를 한다고 생각 할 때는 그 산의 산신(山神)이 감동할 정도로 청정(淸淨)해야 그래야 불사가 이루어집니다.

우리 불자님들 아까도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리 인간(人間)존재의 생명(生命)이라 하는 것은 천지(天地)와 더불어서 둘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생명을 함부로 소홀히 한다든가 그런 사람들이 절대로 성공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보살계(菩薩戒)는 바로 천지우주(天地宇宙)의 근본성품(根本性品)인 우주에너지의 법도(法道)인 동시에 우리 인간성의 본래 생명인 진여불성(眞如佛性)의, 진여불성에 알 맞는 인간의 윤리(倫理)행위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보살계를 가리켜서 무상심지계(無相心地戒)라. 무상심지계라, 그런 상(相)이 없는 상을 여윈 마음의 심지인 하나의 법규(法規)란 말입니다.

동시에 금강보계(金剛寶戒)라, 우리가 보살계를 지킨다고 생각 할 때는 금강보계라, 다시 흐트러지거나 파괴가 안 되는 견고 부동한 윤리도덕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적어도 우리가 금생(今生)에 나와서 인간된 보람을 이룩할라고 생각할 때는 보살계를 꼭 지켜야 됩니다.

그래야 인계생정(因戒生定)하고 인정생혜(因定生慧)라,

우리가 계율이 완벽해야 만이 그래야 만이 참다운 깊은 삼매(三昧)에 들어가 집니다. 우리가 삼매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면은 우리마음이 오로지 참다운 본체(本體)를 여의지 않고서 우리 마음이 심일경성(心一境性)이라, 하나의 본체자리에 머물러있어서 동요가 없는 그런 자리가 이른바 삼매란 말입니다.

그런 오로지 참다운 정신통일 이것이 삼매인데 삼매가 되어야 그래야 깨달음이 옵니다.

보통 이론적으로 우리가 해오(解悟)라, 해석해서 아는 정도의 지혜(知慧)가 아니라 참다운 증오(證俉)라, 우주의 실상자리인 불성(佛性)을 증명해서 알기위해서는 꼭 깊은 삼매, 깊은 정신통일이 전제가 되어야 된단 말입니다.

따라서 무슨 명상(瞑想)을 하던지 간에 보다 깊은 명상, 깊은 명상이 될라면은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심일경성이라, 마음이 하나로 통일이 되어야 된단 말입니다.

그래야 거기에서 이른바 법희선열(法喜禪悅)이라, 그 불성에 깃들어 있는 한도 끝도 없는 환희심(歡喜心)이라든가 성품의 공덕(功德)이 발휘가 된단 말입니다.

우리가 계율(戒律)이 없이 참선(參禪)한다고 해서 그냥 법희선열이나 행복감이라든가 충족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계율을 지켜가면서 철저한 도덕률에 벗어나지 않으면서 우리 마음의 통일을 도모해야 깊은 삼매(三昧)에 들어간단 말입니다. 삼매가 없으면은 깊은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지금 연비를 하심으로 해서 과거 누겁 동안에 지어내려온 업장(業障)을 소멸(消滅)을 하셨습니다. 따라서 청신한 그런 마음에서 부처님의 청정계율(淸淨戒律)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제1 불살생(不殺生)이라, 죽이지 말라. 생명(生命)이 있는 것을 죽여서는 안 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너희 불자들이여 스스로 죽이거나 남을 시켜 죽이거나 방편(方便)을 써서 죽이거나 찬탄(讚嘆)하여 죽이거나 또는 죽이는 것을 보고 기뻐하거나 주문(呪文)으로 죽이는 그런 모든 짓을 하지 말지니 죽이는 인(因)이나 죽이는 연(緣)이나 또는 죽이는 방편이나 죽이는 업(業)을 지어서 일체생명(一切生命)이 있는 것을 짐짓 죽이지 말아야 하느니라. 보살(菩薩)은 응당히 상주하는 항시 변치 않는 그러한 자비심(慈悲心)과 효순심, 마치 효도를 하는 사람이 부모님의 뜻을 따르듯이 그런 진리(眞理)에 효순 하는 진리에 따르는 효순심을 내어 방편으로 일체중생(一切衆生)을 구원해야 할 것이어늘 도리어 방자한 마음으로 통쾌한 생각으로 살생(殺生)하는 자는 보살(菩薩)의 무거운 죄이니라. 바라이 죄이니라.’

바라이 죄라는 것은 무거운 죄를 말합니다. 지금 우리가 시중에 나가서 보면은 낚시질 하는 분들도 많이 계시지 않습니까. 우리 불자님들은 안하시리라고 생각이 됩니다만은 혹시 하시고 계시다면은 그냥 중지를 하셔야 됩니다. 낚시대를 팔고 낚시용품을 파는 그런 장사를 하시는 분들한테는 대단히 미안합니다.

그러나 기왕이면은 좀 덜 쓰고 절제하고 산다 하더라도 생명을 죽이는 생명을 해치는 그런 직업은 갖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 인간이라는 것은 그렁저렁 살아 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의 수련(修練)도장이란 말입니다. 우리 인간이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 하면은 우리 인간세상에서 그때그때 마음한번 잘못 먹는다고 생각 할 때는 그냥 지옥(地獄)으로도 전락이 됩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마음 잘 쓰면은 우리 생각 한번 고치면은 그냥 해탈(解脫)로 우리 마음을 비약(飛躍)을 시킨단 말입니다. 초월(超越)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인간의 가치가 중요한 것입니다. 천상(天上)보다도 우리 인간을 더 소중히 아는 것은 무엇 인고 하면은 천상은 너무나 편해서, 너무나 편하기 때문에 별로 수행(修行)할라고 마음먹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다행히도 사실은 고생이 있고 여러 가지 장애(障碍)가 있어놔서 인생의 고생 인간고를 없애자 하는 노력 때문에 우리가 거기에 곁들여서 초월하는 해탈로 인도하는 해탈로 비약하는 그러한 특전이 있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인간을 천상보다도 더 돋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다른 생명을 해치는 직업(職業)을 설사 못해서 승려(僧侶)가 되어서 또는 어떤 그야말로 다른 직장으로 해서 조금 더 고통을 받는다 하더라도 다른 생명을 해치는 그런 직업을 안 하셔야 됩니다. 어느 누구한테나 이것은 도움이 안 됩니다.

아까도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리생명은 자기생명 홀로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같이 더불어 있습니다.

지금 오늘 여러분들이 이렇게 많이 계시지만은 여러분들 스스로가 뿔뿔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가끔 말씀드린바와 같이 산소나 수소나 탄소나 원소차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지금 다 붙어있단 말입니다.

사실은 다 붙어있는 것인데 아까 제가 허두(虛頭)에도 말씀드린바와 같이 붙어있는 것인데 우리중생이 겉만 보니까 뿔뿔이라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우리가 실존적(實存的)으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다 붙어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와 남이 원래는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닌 것은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동물(動物)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人生)이라는 것은 엄숙한 것입니다. 꼭 그 성인(聖人)들 가르침, 인생을 바로 산분들이 내내야 성자(聖者)아닙니까. 성자 그분들 말씀을 우리가 환희심(歡喜心)으로 정성을 다해서 수용(受用)해야 한단 말입니다. 그렇게 살아야 우리가 인생에 있어서 사는 보람이 있습니다.

따라서 다른 생명(生命)을 해치는 것은 사람은 다시 말할 것도 없고 다른 동물(動物)이라 하더라도 또는 하나의 식물(植物)이라 하더라도 필요 없이 생명을 해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다른 생명을 해치면은 생명이 다 하나기 때문에 비단 금생(今生)에 그냥 보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또는 다생겁래(多生劫來)로 낳고 죽고 낳고 죽고 하는 가운데서 또 역시 꼭 그에 상응되는 보복을 다 받습니다.

금생에 수명(壽命)이 짧은 분이나 또는 금생에 병(病)치레를 많이 하신 분이나 그런 분들은 틀림없이 과거전생(過去前生)에 다른 동물들이나 또는 다른 사람들을 핍박을 했다든가 다른 생명을 가볍게 함부로 했을 그러한 즉 말하자면 보복으로 받는단 말입니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보나 마땅히 살생(殺生)을 말아야 합니다.


제 2 불투도(不偸盜)라! 주지 않는 것을 갖지 말지니라.

‘너희 불자들이여 일체의 재물(財物)에 바늘하나 또는 풀 한포기라도 짐짓 훔치지 말지어다. 보살(菩薩)은 마땅히 불성(佛性)에 효순(孝順)하는 불성에 따르는 그런 마음과 자비심(慈悲心)을 내여 항상 모든 사람들을 도와 복(福)이 되고 즐거움이 되게 해야 할 것이어늘 도리어 남의 재물(財物)을 훔치는 자는 보살의 바라이 죄 이니라.’

 훔치는 것도 역시 우리가 사기를 일부러 한다거나 소매치를 한다거나 그런 것만 훔치는 것은 아닙니다. 정당한 수입 아닌 것을 갖는 가령 우리가 무슨 사업(事業)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 사업에서 나오는 이윤(利潤)을 자기 혼자만 독점(獨占)한단 말입니다. 이것도 훔치는 것이나 똑 같습니다.

마땅히 자기 신성한 노동(勞動)의 댓가만을 취한단 말입니다.

 따라서 부처님주의는 사실은 물질적(物質的)인 경제적인 면에서 본다 할지라도 철저한 진정한 사회주의(社會主義)입니다. 그 유물(唯物)적인 사회주의가 아니라 철저한 우리 정신적(精神的)인 내면적(內面的)인 사회주의란 말입니다.

따라서 정당한 수입 아닌 것을 우리가 함부로 한다고 생각 할 때는 우리의 복덕(福德)의 종자(種子)를 없애는 것입니다.

우리가 금생에 복(福)을 지어야 공부하기도 쉽고 또 좋은 인연(因緣)을 만나서 공부가 잘될 것인데 우리가 복덕을 훼손을 시키면은 그만치 인연도 잘 못 만나고 또는 그때그때 여러 가지 장애(障碍)가 많단 말입니다.

따라서 마땅히 이러한 우리 복덕의 원인을 없애는 투도(偸盜)죄, 정당한 재물이 아닌 것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제 3 불음계(不淫戒)라! 음행(淫行)하지 말라.

우리 재가불자(在家佛子)들은 당연히 결혼을 해서 식구 가족이 다 있는 것이고 한데 음행(淫行)하지 말라고 하면은 이것은 어긋난 말씀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재가불자라 하더라도 음행을 않는 것을 전제로 하셔야 됩니다. 원칙으로 하셔야 됩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우리 인간이 지금 중생(衆生)들이 사는 세계가 여러분들이 대체로 아시는 바와 같이 욕계(欲界) ․ 색계(色界) ․ 무색계(無色界) 아닙니까. 욕계 ․ 색계 ․ 무색계 인데 우리가 윤회(輪廻)한다는 것은 뱅뱅 돌아서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이렇게 여가 태어나고 저가 태어나고 한다는 것은 윤회 아닙니까. 그런데 윤회로 해서는 윤회를 한다고 생각 할 때는 해탈(解脫)의 가망이 없습니다.

우리 인간(人間)존재의 구경(究竟)목적이 무엇인가? 이것은 해탈에 있단 말입니다. 그 윤회를 떠나서 우리가 영생하는 영생불멸(永生不滅)하는 참다운 마음의 고향(故鄕), 우리 생명의 고향에 가는 것이 우리 인간의 목적입니다.

부처님 가르침도 역시 생노병사(生老病死)를 떠나서 열반락(涅槃樂)이라. 해탈의 그러한 영생의 구경지에 도달 하는 것이 부처님가르침의 목적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 삼계윤회(三界輪廻)라, 욕계나 색계나 무색계를 사실은 떠나야 되는 것인데 욕계 ․ 색계 ․ 무색계 가운데서 욕계가 가장 낮은 세계입니다. 욕심(慾心)을 미처 못 떠난 세계(世界)란 말입니다.

욕심이란 것은 어떠한 것인가? 모든 욕망(慾望)이 욕심이 되겠지만은 가장 중요한 욕심은 이것은 식욕(食慾)이라. 먹는 욕심이라. 또 그다음 욕심이 남녀이성간의 이성욕(異性慾)이란 말입니다. 그다음 욕심이 잠욕입니다.

따라서 욕계의 상징은 바로 욕심을 의미 하는 것인데 욕심가운데도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식욕이나 남녀이성 욕이나 또는 잠욕이나 그런 욕인데 음행이것은 남녀이성간에 욕심 아닙니까.

그렇게 부처님법문은 심심미묘(深深微妙)해서 우리 재가불자님들은 제대로 잘 못 지키니까 육재일날, 육재일은 8일 14일 15일 23일 29일 30일 육재일만이라도 식욕을 좀 참아서 식욕을 절제해서 한 끼만 먹어라. 또는 그날은 고기도 먹지 말라. 그다음 내외간도 같은 방을 쓰지 말라 이런단 말입니다.

부처님 당시부터서 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님 뿐만이 아니라 삼세제불(三世諸佛)이 다 그렇습니다. 육재일을 정해서 우리 재가 불자님들은 의지가 약하니까 평생 동안 절제하고 살수는 없으니까 육재일만이라도 출가한 셈치고 출가(出家)한 수행자(修行者)인 셈 치고서 그와 같이 욕심을 절제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재가불자님이라 하더라도 아까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음욕(淫慾)을 절제 하는 것을 음욕을 가급적이면은 끊는 것을 원칙으로 하셔야 됩니다.

우리가 서구 서기전400년 전에 나온 플라톤, 플라톤이 있지 않습니까. 위대한 철인(哲人)아닙니까. 플라톤, 플라톤의 이데아론 이라는 것은 무엇 인고 하면은 그 이데아라는 것이 실상(實相)인 것이지 다른 현상적(現象的)인 것은 모두가 다 허망(虛妄)하단 말입니다.

우리 금강경(金剛經)에도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 그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가 다 꿈이요, 허깨비요, 거품이요, 그림자 같단 말입니다.

그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꿈이요, 허깨비요, 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또는 풀끝에 이슬 같고 번갯불 같고 항시 이렇게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응당여시관(應當如是觀)이라.

금강경에 있는 응당여시관이라, 항시 그와 같이 응당히 봐야 우리가 오류(誤謬)를 안 범한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우리 눈에 지금 보이는 것이 사실로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현상적인 것은 사실은 사실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철학적(哲學的)으로도 소박실제론(素朴實際論)이라, 어려운 말씀을 써서 대단히 죄송합니다만은 소박실제론은 무엇 인고 하면은 우리 중생들은 소박하게 나는 나요 이것은 이것이요. 금은 금이요. 은은 은이요. 우리 중생들이 감각으로 보는 그것을 사실로 본단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들이 보는 것은 사실은 우리 감각(感覺)의 속임수입니다. 실지로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우리 부처님 가르침은 제가 항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상식(常識)이 아닙니다. 상식이 아니라 실상(實相)적인 지혜(智慧)란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겉으로 봐서 우리 중생이 보이듯이 검다 희다 또는 좋다 궃다 그러는 것이지 본래로 본바탕으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그런 것이 없단 말입니다.

인연소생법(因緣所生法) 아설즉시공(我說卽時空)이라.  우리가 보는 것은 모두가 다 내 몸이요, 그대 몸이요, 이것이고 저것이고 인연 따라서 잠시간 있는 것 같이 보이지 않습니까. 있는 것 같이 보이나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그것은 순간순간 찰나찰나 변화해서 마지않습니다.

순간 찰나찰나 변화무상(變化無常)한 것은 사실은 어느 공간(空間) 어느 시간대(時間帶)에도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불교는 상식론이 아닙니다. 하나의 실상을 그대로 말씀 한 거란 말입니다. 우주 생긴대로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비단 플라톤이나 그런 분들 뿐만이 아니라 위대한 철인자는, 위대한 철학자들은 다 한가지로 말씀했단 말입니다.

이 현상계(現象界) 이것은 꿈같은 것이지 실지로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플로티누스란 철인도 일자(一者)라. 우주(宇宙)는 하나의 실상(實相)뿐인 것이지 가상(假想)이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가상은 그때그때 변화무상한 것이기 때문에 변화무상한 것은 일초전과 일초후가 똑같지가 않단 말입니다.

2500년 전에 우리 부처님은 어떻게 그렇게 업(業)이 가볍고 깨달아서 우주의 실상을 보셨던가? 그 뒤에도 무수한 도인(道人)들이 다 그와 같이 그런 말씀을 우리한테 역설(逆說)하고 강조하고 그렇게 하셨건만은 우리 중생(衆生)들은 잘 못 알아먹는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의 흐리멍덩한 눈으로 봐서 있다고 생각 한 것이 사실로 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 가상(假想)인 것입니다. 몽환포영(夢幻泡影)이라, 몽환포영이라, 몽환포영인 것이니까 응당여시관(應當如是觀)이라,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 같은 것을 그대로 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실상을 증명할 수가 있단 말입니다.

금생(今生)내내 애쓰고 산다고 하더라도 가상(假想)만 가지고서 가상가운데서 그때그때 시비(是非)를 하고 죽는단 말입니다. 가상이 뭣이 많이 있으면 좋다 그러고 가상이 자기한테 자기 몸뚱이 이로우면 좋다고 그러고 말입니다.

다 그래서 이 음욕(淫慾)문제, 음욕문제 굉장히 여러분들께서 깊이 생각하셔야 됩니다. 우리 인간이라는 것이 음욕을 끊지 못하면 결국은 자멸(自滅)하게 됩니다.

지금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시중에 나가서 차가 얼마나 번잡합니까. 앞으로 10년 후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또 20년 후에는 인구(人口)팽창을 이대로 두면 막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의술(醫術)은 더 발달되어서 노인들은 더 불어나고 말입니다.

사람이 많아지면 그만치 차요 뭣이요 모두가 다 공해(公害)때문에 우리가 숨 쉴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비록 가정(家庭)생활을 하는 내외(內外)라 하더라도 꼭 음욕(淫慾)에 대해서 남녀 이성간의 욕망(慾望)은 우리가 절제해야 됩니다. 다만 부부(夫婦)간의 동기(同期)로 해서 같이 서로 격려하고 같이 동기가 돼서 진리(眞理)를 닦으면 되는 것입니다. 부부간의 관계를 맺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부부간의 관계를 맺되 정말로 성자(聖者)들이 우리한테 당부하는바와 같이 청정(淸淨)하게 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육재일도 육재일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기왕이면 30일 내내 육재일 비슷하게 우리가 살면 된단 말입니다. 그러면 복(福)을 더 받고 몸도 더 건강하고 말입니다. 그런 것도 우주(宇宙)에 대해서 그때는 우리가 공헌(貢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결혼해서 가정을 가지신분들은 동기가 되어서 그와 같이 아주 훌륭한 동기로 해서 같이 공부를 하시고 아직 결혼을 안 하신 분들은 가급적이면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제 4 불망어(不妄語)라.  망어(妄語)를 망령된 말을 하지 말라.

‘너희 불자들이여 보지 못 한 것을 보았다 말하거나 본 것을 보지 못했다 말하여 몸이나 마음으로 거짓말을 하지 말지어다. 보살은 항상 바른말을 하고 바른 소견(所見)을 가져야 하며 또한 일체중생(一切衆生)들에게도 바른말과 바른 소견을 갖게 하여야 할 것이어늘 도리어 일체중생에게 삿된 말과 삿된 소견(所見) 삿된 업(業)을 내게 하는 자는 보살(菩薩)의 바라이 죄니라. 보살의 무거운 죄이니라.’

마땅히 우리가 진리(眞理)에 걸 맞는 말씀을 하셔야 됩니다. 우리가 인생(人生)이 너무나 참 짧지 않습니까. 이래저래 다 제해 버리면은 정말로 수행(修行)할 동안은 참 지극히 짧은 동안 밖에는 안 됩니다.

우리 불자님들 가운데서 이번에 4박5일 동안 공부 하시는 것도 정말로 대 용단을 내셨습니다. 그렇게 하기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동안을 가급적이면 많이 가지셔야 됩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우리가 과거전생(過去前生)에 습관성(習慣性), 과거전생에 심은 습관성도 많지만은 금생(今生)에 나와서도 잘못 생각하고 잘못 배우고 잘못 행동한 그런 습관성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것을 녹이기 위해서는 쉽사리 좀처럼 녹일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래 가급적이면 우리가 오로지 공부할 수 있는 이른바 불교말로 하면 별시수행(別時修行)이라. 사흘이고 나흘이고 한 달이고 몇 년이고 이렇게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시셔야 됩니다.

그래야 업(業)이 녹아진단 말입니다. 업이 녹아져야 우리 본래적(本來的)인 성품(性品)인 불성(佛性)이 그때는 바로 빛나온단 말입니다.

우리가 흐린 물도 자꾸만 휘저어 버리면은 맑을 그럴 겨를이 없지 않습니까. 가만 두면은 그때는 앙금이 가라 않고서 훤히 그때는 바닥이 보인단 말입니다.

그와 똑같이 우리 마음이라는 것은 본래로 무량(無量)의 자비(慈悲)와 지혜(智慧)와 행복(幸福)과 그런 능력을 갖춘 그런 것이 우리 불성(佛性)인데, 우리 불성을 자꾸만 중생(衆生)이 잘못생각하고 분별시비(分別是非)하고 그런 것 때문에 흐려 논단 말입니다.

그래 그런 마음을 안정을 시켜야 됩니다. 안정을 시킬려면은 사흘이고 나흘이고 닷새고 한 달이고 몇 년이고 우리 마음을 고요하니 명상(瞑想)생활로 해서 수련(修練)을 시켜야 된단 말입니다.

따라서 평생 내 마음 수련하는 것이 내가 금생에 태어난 하나의 보람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하셔야 그래야 기회를 낼 수가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 만연히 살면은 그런 기회가 오지를 않는단 말입니다.

정말로 이번 4박5일 동안 50넘으신 원로 교수님들도 계시고 아주 참 여러분들이 굉장히 훌륭한 경험을 하셨습니다.  


제 5 술을 먹거나 술을 팔지 말라.  

우리 중생(衆生)들은 너무나 버릇 때문에 필요 없는 짓을 많이 합니다. 술이 그것이 우리 건강에 대해서 좋은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술 때문에 이루어진 해악(害惡)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마음이라는 것은 철두철미 영롱(玲瓏)하게 맑혀야 할 것인데 그렇지 않더라도 버릇이 있어가지고서 잘못배우고 잘못 생각하고 잘못 견해(見解)를 갖는 그것 때문에 우리 마음이 항시 혼탁(混濁)하단 말입니다. 혼탁한 마음에다가 더구나 술이나 먹고 어영부영하면 그것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소중한 자기 생명(生命)을 우리가 그만치 훼손(毁損)을 시키고 그만치 자기 스스로 파멸(破滅)을 시킨단 말입니다. 또 그것이 비단 우리 마음에만 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몸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 항시 말씀 드립니다만은 건강이라는 것이 우리 음식과도 굉장히 관계가 있습니다. 음식을 바로 먹고 절제해서 먹는다고 생각 할 때에는 웬만한 병(病)은 걸리지 않습니다.

우리 재가불자님들 너무 많이 자십니다. 너무 많이 자시고 거기다가 고기고 뭣이고 굉장히 많이 먹지 않습니까. 참 주의 하셔야 됩니다.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몸만 무겁고 비대만 하고 또 그만치 여러 가지 병을 거기에다 묻어오고 말입니다.

부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제일 좋고 제일 가볍고 제일 쉽습니다. 마음도 몸도 제일 건강한 법입니다.

부처님 평생 동안 80세에 가셨는데 80세까지 사뭇 다 탁발 안했습니까. 그 따가운 인도(印度)에서 머리에다 아무것도 쓰지도 않고 맨발로 다니면서 탁발했습니다.

부처님이나 예수님이나 공자님이나 다 우리 표본적인 그런 분입니다. 그런 분들 사는 데로 우리가 살아야 됩니다. 우리가 표본이 없으면은 그렇게 살기가 어렵겠지요. 허나 그런 표본이 있어놔서 우리가 본을 따르면 된단 말입니다.

술장수 하는 불자님들이 계시면은 대단히 미안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어느 땐가는 없어져야 됩니다.

할 수 없이 하시게 되시면은 내가 파는 술을 자시고서 정말 불심(佛心)을 보다 돈독히 내 가지 고서 깊은 수행(修行)을 하여 지이다. 이렇게 기원 드리면서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그렇게 하고 하십시오.


제 6 사중(寺中)의 허물을 말하지 말라.

‘너희 불자들이여 출가(出家)한 보살이나 재가(在家)한 보살이나 비구(比丘)나 비구니(比丘尼)의 허물을 자기 입으로 말하거나 남을 시켜 말하지 말지니라. 보살은 외도(外道)학인과 이승학인 이승은 성문연각승입니다. 성문연각승이 불법(佛法)에 대하여 비법비유를 말하더라도 항상 자비심(慈悲心)으로 이들을 교화(敎化)하여 대승(大乘)에 대한 신심(信心)을 내도록 해야 할 것이어늘 보살이 도리어 불법 중에 허물을 말하는 자는 보살의 무거운 죄니라. ’

사부대중(四部大衆)은 내내야 재가 불자님들, 이른바 우바새 우바이 선남자 선여인 그 이중과 또 출가한 불자들 비구 비구니 합해서 사부대중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가 사부대중가운데도 역시 그때그때 비판적(批判的)인 안목(眼目)을 가지고서 험담(險談)들을 많이 합니다. 그나 이런 것은 주의 하셔야 됩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어떻든 간에 불법(佛法)을 믿는다는 것은 이 세계(世界)에 있어서 굉장히 귀중한 의미가 있습니다. 불법은 이것은 부처님 법은 우주(宇宙)의 진리(眞理)이기 때문에 우주의 진리가 보다 융성하고 보다 더 빛나고 그래야 할 것인데 조금 허물이 있다고 해서 우리 사부대중끼리 서로 비판(批判)하고 또는 비방(誹謗)을 한다고 생각할 때는 부처님 법을 그마만치 약하게 만든단 말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부처님 법에 대치가 되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진리(眞理)를 지키기 위한 것이 우리 사명이니까 마땅히 허물이 있으면은 직접만나서 은근하게 우리 정성을 다해서 충고를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사뭇 비방한다고 생각 할 때는 필요 없이 오해를 사는 것이고 또는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소중한 부처님의 부처님 가르침을 그만치 약화를 시킨단 말입니다.


제 7 불자탄 훼탁이라. 자신을 칭찬하고 남을 비방(誹謗)하지 말라.

‘너희불자들이여 자기를 칭찬하고 타인(他人)을 비방(誹謗)하거나 또한 남을 시켜 자기를 찬탄(讚嘆)하고 다른 이를 비방하게 하지 말지니라. 보살(菩薩)은 응당 일체중생(一切衆生)을 대신하여 남의 훼방을 받아서 나쁜 일은 자기에게 돌리고 좋은 일은 다른 이에게 양보해야 할 것이어늘 도리어 자기의 공덕(功德)을 드러내고 남의 칭찬할 일을 숨겨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훼방(毁謗)을 받게 하는 자는 보살의 무거운 죄니라. ’

우리 불자님들은 관포의 지극히 훌륭한 우정(友情)을 들으신 적이 계실 것입니다. 관포란 것은 관중과 포숙인데 서기 600년 전 분이어요. 공자보다도 한 100년 더 이상 오래된 그런 때 태어나신 분인데 관중과 포숙이란 분이 아주 친한 친구란 말입니다.

그런데 맨 처음에는 포숙이란 친구가 먼저 사회적으로 출세를 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이른바 참 제환공이라, 제환공을 섬겨서 상당한 지위에 올라갔었는데 그 포숙이가 보니까 자기 친구인 관중이 자기보다도 훨썩 사람이 총명해 보인단 말입니다.

총명해 보이는데 사람이 갖다가 관중이란 분이 너무나 비판적(批判的)이기 때문에 나라의 허물을 비판하다가 불경죄에 걸려가지고서 죄를 받게 되었단 말입니다.

그래 가만 두면은 관중이 죄를 받아서 귀양 가가지고서 죽게 보인단 말입니다.

그래서 포숙이 제환공 한테, 제환공은 나라를 다스리는 제후의 우두머리인데 제환공 한테 말씀하기를 저 관중이 나보다도 훨썩 사람이 총명(聰明)합니다. 그래서 내가 제환공 당신을 모시는 것보다도 지금 죄를 받아서 귀향 가게 된 관중을 기용을 하시면은 훨썩 더 나라에도 도움이 되고 제환공 당신한테도 훨썩 큰 공덕(功德)이 될 것이라고 그렇게 건의(建議)했단 말입니다.

그런게 제환공이란 제후(諸侯)의 우두머리도 총명한 사람이 되기 때문에 그 말을 들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 당장에 직위(職位)를 만들어가지고 할 수 없어놔서 그래서 관중이 자기 직책(職責)을 양보를 했습니다. 제가 있는 것보다는 저 관중이라는 친구를 기용을 해서 쓰는 것이 훨썩 여러 가지 국민 대중을 위해서나 나라를 위해서 유용 할 테니까 꼭 그렇게 해달라고 자기 직책을 다 내놓으면서 그렇게 간청(懇請)을 드리니까 제환공도 거기에 감동(感動)을 받고서 관중을 기용(起用)해서 포숙의 자리보다도 더 높은 자리를 줬단 말입니다.

관중은 아주 그 훌륭한 분이기 때문에 제환공을 섬겨가지고 정말로 참 하나의 제나라를 중국에서 그 당시에 가장 위대한 가장 세력이 강한 패자를 만들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 주나라의 튼튼한 주석을 놓은 것이 관중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100년 후에 나온 공자(孔子)도 관중을 찬탄해서 말하기를 우리가 관중이 없었더라면은 북쪽 오랑캐한테 우리 문화민족(文化民族)인 한족이 핍박을 당하고 할 것인데 다행이 관중덕택으로 오랑캐한테 유린당하지 않고서 이와 같이 문화를 유지하게 되었다는 그런 찬탄(讚嘆)을 했다고 그래요.

그래 그 위대한 사람들은 절대로 남을 함부로 비방을 않습니다. 정말로 신의(信義)있게 친구를 위해서나 나라를 위해서나 그와 같이 공평무사(公平無私)하단 말입니다.

오늘날 정치인(政治人)들 보면은 참 딱하지 않습니까. 자기가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서, 높은자리 좀 올라 갈라면은 높은자리가 많이 있으면 좋겠지만은 다 올라 갈수가 없으니까 서로 피차 올라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다른 사람을 끌어내려야 되겠지요. 그 선거운동(選擧運動)할 때 보면은 참 딱하지 않습니까. 배울 대로 많이 배운 사람들이 왜 그러는가 말입니다.

역시 참 그와 같은 분들도 부처님 보살계(菩薩戒), 남을 비방(誹謗)하지 말라는 그런 계율(戒律)을 꼭 한번 씩이라도, 자기 스스로 지키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그래도 이론적(理論的)으로 알면 좋을 것인데 모르기 때문에 그와 같이 너무 지나친 행동을 취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마땅히 우리는 어떠한 경우라던가 꼭 남을 찬탄을 해서 보다 더 높은 쪽으로 우리 인간 이라는 것이 정말로 우리스스로 정성만 드리면은 꼭 훨썩 더 선량(善良)하고 드디어는 결국은 성자(聖者)가 되고 만단 말입니다.

우리가 윤회(輪廻)해서 그때그때 지옥(地獄)이나 아귀(餓鬼)나 축생(畜生)이나 그런 여러 가지 나쁜 갈래로 갈수도 있지만은 또는 우리 인간의 본래면목(本來面目)자리가 우리인간의 본래성품(本來性品)자리가 바로 불성(佛性)이기 때문에 어느 중생(衆生)이나 다 누구나 똑같이 종당에는 다 부처가 됩니다. 부처가 늦게 되고 빨리되고 그 차이 뿐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급적이면은 부처가 될 수 있는 인연(因緣)을 만들어 줘야 한단 말입니다. 그 야스퍼스란 철인도 말하기를 참다운 실존적(實存的)인 우정(友情)이 무엇인가? 실존적인 우정은 무엇 인고 하면은 그 사람을 참다운 실상인 영원적(永遠的)인 해탈(解脫)로 인도하는 그것이 그 사람한테 대한 참다운 우정(友情)이라고 말씀했단 말입니다. 참다운 우정은 역시 성자(聖者)의 가르침 따라서 성자의 길로 편달을 시켜주고 그 길을 더불어서 가는 것이 참다운 우정입니다.

내외간(內外間)의 정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간이 되었으면은 부부간에 서로 격려해서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애정만 그냥 쏟을라고 말고서 정말로 참다운 우정 서로 피차 성불(成佛)로 가는 도반(道伴)이 되어서 서로 책선도 하고 서로 충고도 하고 그렇게 꼭 하셔야 될 것입니다.


제 8 자기 것을 아끼고 남을 욕하지 말라.

‘너희 불자들이여 너희는 인색(吝嗇)하지 말며 남을 인색하도록 가르치지도 말지니라. 보살은 일체 가난한 사람이 와서 구걸하거든 그가 요구하는 모든 것을 주어야 할 것이어늘 보살이 나쁜 마음과 미워하는 마음으로 돈 한푼 바늘하나 풀 한포기라도 보시(布施)해 주지 아니하고 법(法)을 구하는 이에게 한구절의 법문(法門)도 말 한마디 게송(偈頌)도 일러주지 아니하고 도리어 나쁜 말로 욕설을 하는 자는 보살(菩薩)의 무거운 죄니라. ’

여기에 있는바와 같이 보살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남이 달라고 생각 할 때는 사실은 모든 것을 줘야한다는 것입니다. 이렇다고 생각할 때 그것이 어려운 문제 아닙니까.

그런께 모든 것을 줘야 한다는 말은 무엇 인고 하면은 자기와 남을 절대로 둘로 생각을 말고서 자기스스로 하고자 하는 자기가 욕구 하는 것을 남한테도 똑같이 베풀어라는 그런 뜻입니다.

일반보살과 일반보살이 아닌 사람의 행동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고 하면은 아까도 제가 허두에서 말씀 일러 드린바와 같이 우리가 철학적(哲學的)으로 종교적(宗敎的)인 깊은 뜻으로 해서 모두가 다 하나의 존재(存在)다 하나의 실상(實相)이다. 저 사람과 나와는 원래 한 몸이다.

원래 한 몸으로 생각하고 베푸는 것은 참다운 보살입니다. 허나 한 몸으로 알지 못하고서 구분해서 저 사람은 저 사람이고 나는 나고 이렇다. 이렇게 일반적인 상식적(常識的)으로 우리가 생각하고 자기가 우월감(優越感)에서 저 사람은 나보다 못사니까 내가 좀 베풀어야 되겠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남한테 베푼다고 생각 할 때는 결국은 하나의 위선(僞善)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위선이 안될라면은 우선 진리(眞理)적으로 철학적(哲學的)으로 우리가 기본(基本)을 알아야 한단 말입니다.

천지(天地)가 나와 더불어서 둘이 아니거든 하물며 모든 것은 결국은 나와 더불어서 꼭 하나란 말입니다.

이와 같이 일원적(一元的)으로 따지는 이것이 굉장히 참 중요합니다. 진리와 진리 아닌 차별이 어디가 있는 것인가. 가장 중요한 것은 진리(眞理)란 것은 천지우주(天地宇宙)를 모두가 다 하나의 존재(存在)로 본단 말입니다. 하나의 생명(生命)으로 봅니다. 하나의 진리로 봅니다.

그러나 진리가 아닌 것은 둘로 보고 셋으로 보고 나누어서 본단 말입니다.  


제 9 화내지 말고 참회(懺悔)하면은 잘 받아주라.

‘너희 불자들이여 보살(菩薩)은 마땅히 일체중생(一切衆生)에게 착하게 대하여 다투는 일이 없게 하며 항상 자비심(慈悲心)과 효순심(孝順心)을 내야 할 것이어늘 도리어 일체중생이나 중생 아닌 물질에 대해서라도 나쁜 말로 욕설을 하고 폭행과 구타를 하고 좋은 말로 참회하고 사과하여도 성내는 마음을 풀지 않는 자는 보살의 바라이 죄니라.’

우리가 자칫 하면은 자기가 좀 계행(戒行)을 잘 지키는 사람은 계행을 못 지키는 사람을 굉장히 멸시(蔑視)합니다. 이래서는 안 됩니다.

이것도 역시 참다운 진리(眞理)에 대한 수양(修養)이 없어서 그럽니다. 참다운 진리에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뭘 잘 모르고 잘 몰라서 계행(戒行)을 파괴한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도 내내야 겉에 뜬 행동만 파괴가 되는 것이지 근본적인 그 사람 생명은 똑같이 다 진여불성(眞如佛性)이란 말입니다.

바탕에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그때는 오염(汚染) 될 것이 없습니다. 겉으로 봐야 선이 있고 악이 있고 내가 있고 남이 있는 것이지 바탕에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다 모두가 한결같이 하나의 생명(生命)이기 때문에 그런 자리에서 봐서 저 사람이 하루빨리 한시 빨리 참다운 계행을 지키도록 까지 우리가 그와 같이 도와줄망정 덮어놓고서 자기가 조금 지키는둥 마는둥 하면서 다른 사람 하는 것은 멸시하고 함부로 비방(誹謗)한단 말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마땅히 이렇게 말아야 합니다.


제 10 삼보(三寶)를 비방(誹謗)하지 말라.

‘너희 불자들이여 자신이 삼보(三寶)를 비방하거나 남을 시켜 비방하게 하지 말지어다. 보살(菩薩)은 한마디라도 부처님 비방(誹謗)하는 소리를 듣거든 마치 천백자루 창검으로 자기 심장을 찌르는 것처럼 여겨야 할 것이어늘 하물며 자기 입으로 비방하리요. 신심(信心)과 효순심(孝順心)을 내지 아니하고 도리어 악인(惡人)과 또는 사견인, 삿된 견해를 가진 사람을 도와서 삼보를 비방한자는 보살의 무거운 죄니라.’

이 우주(宇宙)에 가장 큰 보배가 삼보입니다. 석 삼(三)자 보배 보(寶)자 삼보입니다.

이른바 부처와 부처님법과 부처님 법을 지키는 불자님들과 이것이 삼보 아닙니까.

그래서 독경삼보라. 항시 삼보를 공경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가 할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부처님 법은 바로 아까 누누이 말씀드린바와 같이 일체중생(一切衆生)이 다 공경(恭敬)하고 받들어야 될 우주(宇宙)의 법(法)이란 말입니다. 또는 그 자리는 바로 생명(生命)자리입니다.

 부처님이란 것은 어떻게 우리가 표현을 하던지 간에 법성(法性)이라, 진여(眞如)라, 법계(法界)라, 여러 가지 진리(眞理)에 대한 표현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자리란 말입니다.

현대말로 하면은 우주에너지의 자리란 말입니다. 이런 자리 이것은 변동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때그때 사회변천 따라서 이렇게 표현하고 저렇게 표현하고 했지만은 위대한 철인(哲人)들이 말한 것은 다 똑같이 말씀을 다 했습니다.

그 스피노자 같은 분도 내내야 근세철학(近世哲學)의 아버지라고 하는 스피노자 같은 분도 그분도 참 천재 같은 분인데 그분이 가까스로 마흔세살엔가 네 살에 그분이 작고했습니다.

그 천재(天才)들은 과거전생(過去前生)에 많이 닦아 놔서 금생(今生)에 말 한 것 들이 그렇게 모두가 다 진리(眞理)에 수순(隨順)해서 진리에 벗어나는 말은 하지를 않는단 말입니다.

이 사람도 독신(獨身)생활로 해서 마흔네살까지 살다가 다른 자기 친구들이나 또는 나라에서 위대한 천재 같은 분이니까 도와줄라고 했단 말입니다. 도움도 받지를 않았습니다. 도움 받으면은 결국은 구속되고 만다고 그래서, 구속받고 만다고 그래서 도움도 받지 않고서 하숙방에서 안경알을 갈아서 말입니다. 안경알을 간 노동(勞動)으로 해서 그걸로 해서 자기 생계를 이었단 말입니다.

그렇게 자기 하숙방에서 안경알을 갈고 있으니 위생적으로 좋을 수가 있습니까. 그렇게 아주 먼지구덩이에서 안경알을 갈다가 폐병(肺病)에 걸려 죽었단 말입니다.

그러나 마흔네살에 간 분이 위대한 철학을 낸 것이 무엇 인고 하면은 ‘우리 중생(衆生)들은 우리 인간들은 하나하나의 것을 영원(永遠)의 차원(次元)에서 관찰하라.’ 다시 바꾸어서 말 하면은 본체(本體)에서 보라는 것입니다. 본래 실상(實相)에서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하나하나의 것을 현상적(現象的)인 데서 그냥 보지 않습니까. 영원적인 차원, 그 본래면목(本來面目)에서 보면은 다 그때는 하나가 될 것인데, 그래서 스피노자의 말도 ‘하나하나의 존재(存在)를 모두가 다 영원의 차원에서 관찰하라. 그러면은 이것이나 저것이나 모두가 다 영원에 참여한다.’ 나쁜 사람, 좋은 사람, 이사람, 저사람 모두를 우리가 영원의 차원, 본질(本質)에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모두가 다 부처 아님이 없단 말입니다.

이와 같이 위대한 사람들은 틀림없이 과거전생(過去前生)에서부터서 많이 닦아온 사람들 아닙니까. 이분들 말씀은 똑 같습니다. 약간의 표현만 있을 뿐인 것이지 따라서 우리는 지금 그것만 본다 하더라도 인류사(人類史)에 있어서 위대한 분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리스의 소크라테스 이전에도 훌륭한 철학자가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헤라크레이토스, 엠페도클레스라든가 또는 여러 가지 참 그 당시에 있어서 모든 것을 모든 존재를 존재자체에서 본단 말입니다. 모든 존재(存在)를 실상(實相)에서 본단 말입니다. 

우리는 다행히도 부처님 가르침을 지금 우리가 받들고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어느 철인의 가르침보다도 보다 확실하고 보다 간단하고 보다 철저합니다.

이른바 진여연기(眞如緣起)라, 진여연기란 말은 천지우주(天地宇宙)의 모든 본래(本來)자리가 진여불성인데, 진여불성이기 때문에 일체존재는 진여불성에서 나왔단 말입니다. 모두가 다.

산이요, 냇이요, 물이요, 또는 그야말로 흙이요, 아주 공해가 짙은 오물이요. 모두가 다 본래면목(本來面目)에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다 진여불성뿐이란 말입니다. 진여불성은 오염(汚染)이 안 됩니다.

우리가 현상적(現象的)인 자리에서는 오염(汚染)이 되고 청정(淸淨)이 되고 그런 구분이 있을란가 모르겠지만은 그 본래의 자리 바탕에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우선 가장 바탕이 못되고 원자에서 본다고 생각 할 때도 오염되고 안 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원자보다도 훨썩 더 미세한 그 물(物)자체, 존재(存在)자체에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그것이 바로 불성(佛性)이고 진여(眞如)고 또는 허공(虛空)이기 때문에 그런 자리는 오염이 될 턱이 없단 말입니다.

따라서 그런 자리에서 우리가 봐야 됩니다. 그런 자리에서 보는 것이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입니다. 그런 자리의 인격화(人格化)된 상징적인 말이 즉 말해서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 보면은 염불행자(念佛行者), 염불행자 인중분다리화(人中芬陀利華)라, 이 말은 무슨 말인고 하면은 염불한 사람들은,

염불이라는 것은 여러분 쉽게 생각을 말으십시오. 내 생명(生命)의 근본(根本)이 부처 아닙니까. 또는 우주(宇宙)생명의 근본자리가 바로 부처입니다. 따라서 염불(念佛)이라는 것은 우리가 우선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인데 염불이라는 것은 바로 자기생명의 근원(根源)자리를 환기시키는 것이고 동시에 우주(宇宙)의 본래(本來)자리를 우리가 그마만치 현실적으로 상징화시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이고 바로 우주의 본래생명을 부르는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염불하는, 그와 같이 우주의 본래자리에다가 마음을 두는 염불수행자는 인중분다리화라, 사람가운데 가장 향기로운 연꽃이나 같단 말입니다.

즉 따라서 관음세지(觀音勢(至) 위기승우(爲其勝友)라.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나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나 그런 대 보살들이 염불(念佛)하는 사람, 우주(宇宙)의 본체(本體),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부르는 그런 사람을 위기승우라, 가장 훌륭한 벗으로 안단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하신다고 생각 할 때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나 또는 문수보살(文殊菩薩)이나, 보현보살(普賢菩薩)이나 다 우리를 참다운 벗으로 안다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제1 불살생(不殺生) 이라, 죽이지 말라.

제2 불투도(不偸盜)라, 훔치지 말라. 정당한 수입 아닌 것은 갖지 말라.

제3 불음(不淫)이라, 음탕한 행위를 하지 말라.

꼭 내외간 그렇게 가족구성이 되었다 하더라도 참다운 동지로 절조를 지키고 순결(純潔)하게 살으셔야 됩니다.

제 4 불망어(不妄語)라. 망령된 말을 하지 말라.

제 5 불음주(不飮酒)라, 술을 먹지 말고 술을 팔지도 말라.

제 6 사부대중(四部大衆)의 허물을 말하지 말라.

제 7 자기를 찬탄(讚嘆)하고 남을 비방(誹謗)하지 말라.

제 8 인색(吝嗇)한 마음으로 남한테 베풀지 않는 그런 각박한 행동을 취하지 말라.

제 9 남들이 잘못했다 하더라도 참회(懺悔)하면은 그냥 용서 할 것이지 진심(嗔心)을 풀지 않고서 용서를 하지 않는 그러한 옹졸한 마음을 갖지 말라.

제 10 삼보(三寶)를 비방(誹謗)하지 말라.

이러한 열 가지 부처님의 삼세제불(三世諸佛)이 정하신 또는 우주(宇宙)자체의 법도(法道)인

10가지 계율(戒律)을

능히 지킬 수가 있습니까? <예>

능히 지킬 수가 있습니까? <예>

능히 지킬 수가 있습니까? <예>


이상으로 보살계(菩薩戒), 무상심지계(無常心地戒), 금강보계(金剛寶戒), 불성계(佛性戒), 보살계(菩薩戒)의 수계식을 마칩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금생에 성불(成佛)하시길 기원 드립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본사아미타불!


20010805-성륜사 우람분절 보살계수계식-청화대종사

20010805-삼영불교음반-학무 유락재-촬영

20060331-DVD작업-본정 김영동

20080722-녹취 워드작업-주안 한동일


*본 법문은 동영상 자막작업용으로 큰스님 말씀 그대로 정리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