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5 호 >
* 1999년 10월18일 불교TV 법문 *
‘부처님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
우리가 생각할 때에 우리 인생(人生)의 길이 우리가 사는 길이 단순하니 한 갈래나 두 갈래나 그렇게만 되면은 참 살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길이 너무나 갈래가 많습니다. 모두가 다 다양하고 또는 일체 여러 가지 체계들이 다원적(多元的)이기 때문에 우리가 과연 어느 길로 가야할 것인가?
그런 것에 대해서 어느 누구나가 다 의문을 안품을 수가 없는 것이고 따라서 살기가 험난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다행히 부처님 법(法)은 모든 일체 복잡한 현상적(現象的)인 문제를 하나의 진리(眞理)로 통일을 시키셨습니다. 따라서 부처님 법을 우리가 안다고 생각할 때는 설사 길이 제아무리 복잡하고 험준하다 하더라도 모든 것을 간결하게 간단명료하게 다 풀어주고 아주 합리적으로 회통(會通)을 시키는 것이 부처님 법입니다.
여러분도 대체로 아시는 바와 같이 중국(中國)의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이때는 벌써 2000년 이상 되는 시대 아니겠습니까? 그 춘추전국시대 이때는 똑똑한 사람들이 많이 나왔단 말입니다. 잘난 사람들이 많이 나와서 여러 가지로 개별적으로 자기 목소리를 많이 냈습니다. 그런 것이 후대(後代)에 까지 좋은 영향도 있지만은 또는 부정적(否定的)인 영향이 더 많았습니다.
가령 맹자(孟子)는 성선설(性善說)이라, ‘인간의 본 성품이 착하다’ 하는 성선설을 주도했는가 하면은 또는 순자(荀子)는 성악설(性惡說)이라, 순전히 그 반대로 ‘인간의 원래 성품이라는 것은 모질고 악한 것이다.’ 이런 쪽으로 또 학설(學說)을 세웠단 말입니다.
지금도 여러분들이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 불교(佛敎)뿐만이 아니라 세계적인 종교(宗敎)가 기독교나 또는 힌두교나 이슬람교나 유교나 도교나 그런 종교가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종교는 사실은 그때그때 시대의 상황 따라서 또는 종교지도자(宗敎指導者)의 개성 따라서 약간씩 모두가 색깔이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중생(衆生)들은 그러한 것을 저마다 판별하기가 참 곤란스럽습니다.
수가 많은 종교는 훨썩 더 좋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고, 또는 건물이 좋으면, 종교를 포교(布敎)하고 수도(修道)하는 건물이 좋으면 저 쪽이 더 훨썩 좋은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 일반적인 차원(次元)의 중생들은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어느 것이 좋은가? 어느 종교의 길이 좋은가? 우리가 주저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가 말씀드릴 것은 주저 없이 가기 위해서는 어떠한 방법을 취해야 할 것인가? 그런 쪽에다가 역점을 두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 부처님 법문 가운데서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이라, 대총상법문이란 말씀이 있어요. 대 자는 큰대(大)자, 모두총(總)자 말입니다. 또는 서로상(相)자, 법법(法)자, 문문(門)자 말입니다.
대총상법문이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면은 모든 법문(法門)의 가장 기본적(基本的)인 바탕, 기본적인 본질(本質) 법문이란 뜻입니다. 대총상법문이라. 잘 기억을 해 두십시오. 가장 기본적인 뿌리, 가장 근원적인 법문이기 때문에 대총상법문 가운데서 모든 다른 법이 다 포함돼 있단 말입니다.
그러면 대총상법문을 또 다른 말로는 어떻게 하는가? 대총상법문을 다른 말로는 아주 쉽습니다. 여러분들이 아실 분은 아시겠지 만은 진여(眞如)라, 참진(眞)자, 같을여(如)자, 진여 말입니다.
진여란 불교 술어(述語)를 모르면은 불교를 공부한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생소 하니 처음 듣는 분도 참진(眞)자, 같을여(如)자 진여라는 불교 술어는 꼭 외 두셔야 됩니다.
그 모두를 다 합한 현상적(現象的)인 여러 가지 교리(敎理), 복잡하고 하늘에 있는 별이요 태양이요 또는 우리 인간이요 산이요 물이요 그런 이 현상계란 것이 아주 갈래가 많아서 말입니다. 한도 끝도 없이 많단 말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 안 되겠습니까. 우리 한국인만 보더라도 너무 많다 그래서 여러 가지로 해서 갈등도 심하고 그러지 않습니까. 헌데 하물며 세계 인구(人口)를 다 털어놓고 본다고 생각할 때는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 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 존재 만이 이 지구(地球)상에는 존재하는 동물(動物)이 아니라 다른 동물도 많이 있고 또는 인간보다도 훨썩 더 정도가 높은 천상(天上)도 분명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런 존재를 총 망라한다고 생각할 때는 굉장히 복잡합니다.
따라서 그 눈에 보이는 세계, 즉 현상적인 차원에서는 모든 존재끼리 서로 개성이 다르기 때문에 개성이 같지 않다는 것은 업장(業障)이 다르단 말입니다.
김 가란 사람이나, 박 가란 사람이나 지은 바 교육도 똑 같고 업장도 같다 하면 모르거니와 백 사람, 천사람, 만사람 모두가 다 업장이 같지 않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도 각각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생활 선상에서 같이 부딪치고 분열(分列)되고 싸우고 모다 그런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렇다 하더라도 그 근본적인 뿌리는 똑같이 모두가 다 대총상법문인 이른바 진여란 말입니다. 진여라, 참진(眞)자, 같을여(如)자, 진여란 것이 모든 존재의 근본 된 대총상법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대총상법문이란 말이나 또는 참진(眞)자, 같을여(如)자 진여라는 말이나 똑같은 뜻입니다.
그리고 또 주의할 것은 무엇인고 하면은 진여 그것은 모든 존재, 모든 존재의 근본 원리가 될 뿐만 아니라 그 자리는 바로 우리 사람의 생명(生命)같이 생명입니다. 목숨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진여를 말 할 때는 부처불(佛)자, 마음심(心)자를 넣어서 또는 마음심(心)자 대신에 성품성(性)자를 넣어서 진여불성(眞如佛性)이다. 이렇게 이름을 합니다. 불자님들 진여불성, 진여불성을 꼭 외 두셔야 우리 근본(根本)뿌리를 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진여불성,
김 가나 박 가나 또는 다른 동물이나 다른 식물이나 일체존재(一切存在)의 근본 뿌리가 바로 진여불성입니다. 그러기에 그 자리를 가리켜서 대총상법문이라고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여불성 자리를 모르면은 그때는 천 갈래, 만 갈래로 이렇게 헤어진 것을 우리가 통일을 시킬 수가 없습니다. 또는 항시 마음이 산란스럽단 말입니다.
나라는 존재(存在)가 있으면 또 너라는 존재가 있고 나와 너는 완전히 분리된 존재가 아닌가. 또는 흑인이 있으면 백인도 있지 않습니까. 그럼 백인과 흑인은 뿌리가 다르지 않겠는가. 뿌리가 같지 않다고 생각할 때는 그만치 마음으로 거리가 생기지 않습니까.
우리가 뿌리가 같다고 생각하는 그것과 근본적인 본질적인 뿌리가 다르다고 생각하는 그것과는 천양의 차이가 있습니다. 굉장히 차이가 있단 말입니다.
앞에 가서 혹시 자기 기분에 안 맞는 미운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 미운 사람이 아, 저 놈은 나하고는 뿌리가 다른 완전 별종(別種)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동체대비(同體大悲)라는 말씀은 잘 알으시지요. 하도 많이 하니까 말입니다. 한가지동(同)자, 몸체(體)자, 큰대(大)자, 자비로울 사랑비(悲)자 말입니다.
우리가 남한테 베푸는 것도 나와 남이 본래로 둘이다. 이런 견지에서 베푸는 것과 나와 남이 본래 생명이 하나의 뿌리다. 하나의 몸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베푸는 것과는 이것도 역시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나와 남이 둘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베풀 때는 이른바 상(相)이 있는 나라는 상, 너라는 상, 상이 있는 유주상보시(有住相布施)란 말입니다. 상이 있는 보시(布施)인 것 이고,
겉에 보이는 것은 허망(虛妄)한 다 무상(無常)한 하나의 그림자와 같은 것이고 근본본체(根本本體), 근본 본체가 참다운 실상(實相)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실지로는 한 몸이기 때문에 남한테 베푼다 하더라도 나와 남이라는 상을 떠나서 나하고 뿌리가 같으니까 당연히 베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모님이 자식들한테 뭘 베풀 때는 근본 뿌리가 같다는 것을 확실히 모른다 하더라도 관념(觀念)상 그냥 ‘내 것은 내 것이고 니 것은 니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고서 베풀지 않습니까?
그런데 뿌리가 같다고 생각할 때는 부모가 자식한테 베푼 것보다도 훨썩 더 절실하게 본래 한 몸이기 때문에 남한테 베푸는 것도 바로 내 스스로한테 베푸는 것이나 똑같다. 이렇게 생각하고 베푸는 것은 이것은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 상이 없는 보시란 말입니다. 이른바 대상(對象)적으로 구분하지 않는 보시란 말입니다.
우리 중생(衆生)과 성자(聖者)의 차이는 무엇 인고 하면은 우리 중생들은 겉만 봅니다. 겉만 보나 성자는 근본 본성품(本性品)을 본단 말입니다. 간단명료합니다. 어느 분들은 부처님 법이 굉장히 어렵다고 생각합니다만은 저는 어디 가서나 얘기를 합니다.
그렇다고 그래서 제가 공부를 많이 했다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 법은 사실은 제일 쉬운 법이란 말입니다. 제일 쉽고 성불(成佛)하기가 부처가 되는 법이 제일 쉽다고 저는 역설(力說)하고 제 스스로 느끼고 있습니다. 그렇다 그래서 제가 지금 부처가 다 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 불자님들, 부처님 법이 절대로 어렵다고 생각을 말으십시오. 제가 그 증거를 또 하나 하나를 대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왜 쉬운 것인가? 없는 것을 돈을 많이 주고 사가지고 온다든가 또는 꿔가지고 온다든가 그런 것은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 부처님 법은 없는 것을 새삼스럽게 우리가 구해가지고 오지를 않는단 말입니다.
아, 그럼 부처란 것은 어디가 있는 것인가? 불교(佛敎)란 것은 부처가 되기 위한 공부입니다. 부처가 안 되면은 자기 존재가 무엇인가를 모른단 말입니다. 동시에 우주(宇宙)가 무엇인가를 모릅니다.
지금 세상은 모두가 다 연관 돼 있어놔서 기업(企業)도 국제적(國際的)인 기업 아닙니까? 한 나라의 평화(平和)를 위해서도 한 나라만 가지고 안 됩니다. 국제적인 합의(合議)라든가 국제적인 협조가 서로 있어야 한 나라도 역시 안정(安定)적으로 질서(秩序)를 도모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거창한 문제가 아니더라도 우리 개인(個人)문제도 그래요. 개인 문제도, 우리 개인이 무엇인가 안다고 생각할 때는 우주의 문제와 같이 연관 돼서 알지 않고서는 근본 뿌리를 모릅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아까도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우리 인간(人間)존재의 근본(根本) 뿌리나 우주(宇宙)의 근본(根本) 뿌리나 같은 뿌리란 말입니다.
이것을 확실히 알면 저것도 확실히 알아지고 저것을 또 확실히 알면 이것도 알아진단 말입니다. 근데 그것이 같은 뿌리기 때문에 내 생명(生命)이 무엇인가? 내가 무엇인가? 이걸 안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천지우주(天地宇宙)의 본질(本質)을 알아진단 말입니다. 또 모르고서는 내 존재(存在)를 모른단 말입니다.
그러는데 다행히도 쉬운 것이 무엇 인고 하면은 내 생명의 뿌리나 우주 생명의 뿌리나 아까 제가 몇 번 되풀이해서 말씀을 드린 바와 같이 진여불성(眞如佛性), 진여불성 이것이 내 생명의 뿌리인 동시에 우주 모든 존재의 뿌리 입니다.
그러기에 그 뿌리를 알아버리면은 그때는 일반적인 흔히 우리가 말 하는 홍로일점설(紅爐一點雪)이라, 뜨거운 화로에다가 눈을 한 주먹 넣으면은 그냥 금새 녹아 버리지요. 그것이 이른바 홍로일점설이라, 숯불이 번져서 이글이글하게 타고 있는데다가 눈 넣어 보면 금방 녹지 않습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나와 남의 모든 존재의 근본 뿌리인 진여불성(眞如佛性)을 우리가 분명히 안다고 생각할 때는 다른 사소한 문제는 다 그 속에 포함시켜서 저절로 알아진단 말입니다.
그러나 진여불성은 알기는 어렵지 않겠는가? 이렇게 생각도 하십니다만 이것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진여불성이 밖에 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자리, 우리 마음이 바로 진여불성 입니다.
불성을 안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마음의 본심이 바로 부처불(佛)자, 마음심(心)자 불심(佛心)이고, 부처불(佛)자, 성품성(性)자 바로 불성(佛性)이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그 마음, 그 마음을 안 가진 사람이 없는데 그렇더라도 마음을 깨달아야 불심으로 온전히 되지 않겠는가? 이렇게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깨닫지 않더라도 불심은 조금도 훼손도 안 되고 석가모니(釋迦牟尼)마음 불심이나 우리마음 불심이나 예수님 불심이나 공자님 불심이나 다 똑같단 말입니다.
우리는 그 신앙(信仰)이라 하는 믿음에 대해서 소홀히 생각합니다. 뭐 학문(學文)을 많이 배우고 무슨 체계를 세우고 이렇게 해야 훌륭하다고 보고 말입니다. 그냥 우리 마음으로 단박에 학문이나 문자를 조금도 거기에 개입을 시키지 않더라도 우리 마음으로 간절히 믿는 갈앙심(渴仰心), 간절히 그리워하는 흠모심(欽慕心)으로 해서 단박에 우리 마음을 깨달아 버리는 그런 공부를 보통은 또 소홀히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마음이 보통 부사의(不思議)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 마음 이것이 바로 불심이기 때문에 불심이란 것은 그냥 보통 그렁저렁한 이것 생각하고 저것 생각하고 뭘 좀 기억하다 말고 그런 정도가 아니란 말입니다.
불심(佛心)이란 것은 석가모니 마음 같은 그런 마음 또는 예수님 마음 같은 그런 마음 또는 공자님 마음 같은 그런 마음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천재적(天才的)인 그런 재주도 우리 불심에는 다 포함 돼 있습니다.
또는 우리가 보살행(菩薩行), 보살행 하지 않습니까. 허나 어느 때나 어느 순간도 주저 없이 모든 중생을 위해서 내 몸뚱이 온전히 바치겠다 하는 그런 자비심(慈悲心)도 불심 가운데는 다 충만(充滿)해 있습니다. 그 외에 만능(萬能)의 자리란 말입니다. 만능의 자리, 어느 것도 불심 가운데는 다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는 조금도 변동이 없습니다. 변동이 있다는 것은 다시 태어나고 또는 다시 변화가 되고 없어지고 그래야 변동이 있는 것 아닙니까? 허나 불심 이것은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 낳지 않고 죽지 않고 생멸(生滅)이 없단 말입니다. 죽고 살고 없어지고 하는 법이 아닙니다. 과거(過去)나 현재(現在)나 미래(未來)나 불심(佛心)은 똑같습니다. 과거에 우리가 잘못 살아서 금생(今生)에 지옥(地獄) 들어가서 지옥고(地獄苦)를 받는다 하더라도 불심은 조금도 오염(汚染)도 안 되고 또는 덜도 안 되고 더도 안 된단 말입니다.
아, 분명히 있다는 불심이 어째서 덜도 안 되고 더도 안 될 것인가? 있기는 있지만은 그것은 물질(物質)이 아니란 말입니다.
명부득상부득(名不得相不得)이라, 이름도 없고 또는 상도 없단 말입니다. 이름도 없고 상도 없는 것이 불심 입니다. 또 그것이 모든 존재의 근본 뿌리 입니다. 어떠한 것도 불심으로 안 된 것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앞서 제가 허두(虛頭)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이란 말입니다.
그러고 그 자리를 얻기가 왜 쉬운고 하면은 금생에 잘못 살면은 그때는 버릇이 많이 붙지 않습니까? 버릇이, 나쁜 버릇 때문에 그 자리를 다 인증(認證)을 안할라 합니다. 인증을,
나 같은 사람이 어떡해서 불심을 그냥 얻을 것인가? 오랜 동안 난행고행(難行苦行)하고 달마(達磨)스님같이 9년 동안이나 토굴에서 그렇게 벽만 바라보고 참선(參禪)도 하고 그래야 되지 않겠는가? 도저히 우리 더구나 재가(在家)불자님들은 아, 불심이 있다는 것만 거의가 아는 것이지 불심을 깨닫는 것은 도저히 가망도 없다. 이렇게 보통 생각되시겠지요.
그러나 그렇지가 않단 말입니다. 불심 이것은 시간(時間)을 초월(超越)해 있습니다. 시간을 초월해 있고 공간(空間)을 초월해 있단 말입니다. 불심은 저 미국 가 어디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닌 것이고 또 여기만 따로 있는 것도 아닌 것이고 불심은 모양이 없는, 모양이 없으면서 있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우주에 가득 차 있습니다. 불심은,
불자님들 불심은 어느 처소에 가 부분적으로 국부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어느 때 언제나 우주(宇宙)에 끝도 갓도 없이 충만(充滿)해 있는 무량무변(無量無邊)한 우주의 생명(生命)이란 말입니다.
또는 그것도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해서 언제나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낳지 않고 죽지 않고 어느 때나 존재하는 영생(永生)의 생명입니다.
조금도 오염(汚染)이 안 된, 물질(物質)이 아니니까 오염을 시킬래야 시킬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가령 잘못 살아 가지고서 자기 부모를 살해한다. 아, 그런 사람도 더러 있지 않습니까? 자기 부모를 살해하는 오역죄(五逆罪)라, 이 죄는 굉장히 무서운 죄입니다. 이 죄를 금생에 범 하면은 금생에 죽자마자 무간지옥(無間地獄) 들어갑니다. 그러나 금생에 죄를 많이 지어서 죽자마자 틀림없이 무간지옥에 들어갈 사람도 그 사람 마음, 그 사람 불심은 조금도 오염이 안 됩니다. 물질이 아니니까 말입니다.
무엇이 형체가 있어야 검정물 들이면은 검게 되고 붉은 물 들이면은 붉게 되고 그렇게 되겠지요. 그러나 모양도 없고 그림자도 없고 이름도 없고 그런 것인지라 도저히 우리가 설혹 나쁜 짓을 많이 했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자리는 오염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그런 마음입니다.
지금 김 씨 마음이나 또는 박 씨 마음이나 다 그런 마음이란 말입니다. 오염(汚染)도 안 된 석가모니(釋迦牟尼)같은 마음, 그 마음이 우리 마음의 본심(本心)입니다. 본 불심(佛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불교를 어렵게 생각을 말으십시오.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어디서 사와서 내 것 만드는 것도 아닌 것이고 말입니다. 우리가 애쓰고 절을 무릎이 닳도록 까지 3천 배, 만 배 그렇게 꼭 많이 해야만 되는 것도 아닌 것이고 부처님은 고행(苦行)을 금했습니다. 고행을, 아, 마음도 편하고 몸도 편하게 공부하면 된단 말입니다.
그러나 중생(衆生)의 욕심(慾心)으로 너무 많이 먹으면 또 안 되겠지요. 부처님께서 하지 말라는 고기를 먹으면 안 되겠지요. 그건 또 안 됩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고기 먹기보다 안 먹기가 더 쉽지 않습니까? 돈도 적게 들고 소화도 잘 되고 말입니다. 부처님 법문은 다 하기가 쉽습니다. 모두가 다,
지금 사람들은 불교를 믿어도 어렵게 하면은 훨썩 차원(次元)이 높은 것 같고 말입니다. 또 쉬운 쪽으로 말하면 차원이 낮은 것 같이 생각한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법은 그야말로 간이평명(簡易平明)이라, 간단하고 아주 평이(平易)합니다. 왜 그러고 하면은 우주 생긴대로 말 해 있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가짜만 봅니다. 중생은 진짜를 못 봅니다. 중생은, 가령 나는 나고 너는 너다. 이것도 나라는 관념(觀念)도 우리가 인과법(因果法)을 안다고 생각할 때는 나는 꼭 나다. 너는 꼭 너다. 이와 같이 구분해서 볼 수가 없단 말입니다.
인과법을 모르는 것이니까 이렇게 생긴 것은 꼭 나고 저렇게 생긴 것은 꼭 너다. 이렇게 자타(自他)를 구분하지 만은 인과의 법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인연(因緣)따라서 잠시간 나와 같은, 지금 그림자 같은 모양을 했을 뿐입니다.
그런 것이고 그것은 또 찰나찰나 순간순간에 변화가 됩니다. 변화가, 어느 한 동안도 나 같은 이 모습이 그대로 머물러 있지가 않습니다. 나를 구성한 세포(細胞)란 것은 어느 찰나, 찰나란 것은 얼마나 짧은고 하면은 1초의 70분지 1입니다.
세포가 1초의 70분지 1동안도 우리 세포는 머물러 있지가 않아요. 신진대사(新陳代謝)해서 그때그때 묵은 세포가 사라지고 다시 새로운 세포가 생겨나고 이것이 연속이 되니까 나 같은 모습이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것이지 우리가 현미경(顯微鏡)놓고서 정밀(精密)하게 본다고 생각할 때는 세포가 순간순간 그때그때 변화무쌍(變化無雙)하단 말입니다.
어느 한동안도 어느 순간도 같은 자리에 같은 공간(空間)에 머물러 있지 않은 것이 우리 몸뚱이를 위시해서 모든 눈앞에 보이는 대상(對象) 경계(境界)가 다 그렇습니다. 산도 찰나찰나 변화하는 것이고 물도 마찬가지고 흘러가는 물은 더욱 그러겠지요. 어느 것도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부처님 법은 이 자리를 바로 여실하게 말씀했습니다. 부처님 법은 사실 그대로 말한 것입니다. 다만 우리 중생들이 사실 그대로 보지를 못합니다.
우리 망상(妄想)으로 보기 때문에 나는 나고 너는 너다. 산도 꼭 저렇게 생긴대로 산이고 물도 꼭 저렇게 생긴대로 물이다. 이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같은 물도 제가 가끔 말씀 드린바 같은 물도 사람이 보면 물로 보나 또 귀신(鬼神)이 본다고 생각할 때는 물로 안보는 것입니다. 천상(天上)사람들이 본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사람이 물로 보는 것을 천상 사람들은 영롱한 유리로 본단 말입니다.
그럼 부처님이 보시면 어떻게 볼 것인가? 부처님이 보시면은 그때는 같은 물도 부처불(佛)자, 성품성(性)자 불성(佛性)으로 본단 말입니다. 부처님이 보실 때는 모두가 다 우주만유(宇宙萬有)의 근본실상(根本實相), 근본실상인 다 불성(佛性)으로 봅니다. 불성으로 보기 때문에 부처님이 보실 때는 잘나나 못나나 다 부처님으로 보신단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는 바와 같이 소크라테란 분은 그리스 분 아닙니까. 그분도 2500년 됐습니다. 철학(哲學)의 아버지란 분입니다. 그 분의 제일명제(第一命題), 그 분이 가장 중요한 근본적인 문제를 제시한 것이 무엇인고 하면은 아실 분들은 대체로 아시지 않습니까. ‘그대 스스로를 알아라.’ ‘자기 무지(無知)를 알아라.’ 그대 스스로를 안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인간은 자기 무지를 알게 됩니다. 왜그런고 하면은 우리가 아는 것이 그것이 실답지가 않단 말입니다.
우리는 보통 약간 교육을 좀 받고 또는 재주가 있는 사람들은 굉장히 자부심(自負心)이 강해서 내가 아는 것이 제법 그래도 모두를 바르게 안다. 자기 목소리를 낼라고 애쓴 사람들은 자기가 아는 것이 신통(神通)하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감투가 좀 높아지면 별것도 아닌데 자기 아는 것을 고집해 가지고서 독선(獨善)을 부릴라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성자(聖者)가 못 된 한에는 우리가 안다는 것이 모다 시원찬합니다. 바르게 알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우리가 무지(無知)란 말입니다. 무지무명(無知無明)에 가려서 바로 보지를 못합니다. 우리 중생은 그걸 먼저 알아야 됩니다.
박사가 되고 뭣되고 했다 하더라도 세속적(世俗的)인 분별지혜(分別智慧)를 좀 외워가지고 되는 것이지 사실은 근본적인 아까 제가 말씀드린 진여불성을 깨달은 것이 아닌 것입니다.
진여불성을 깨달아 놓고 보면 그때는 천지우주(天地宇宙)가 모두가 다 진여불성(眞如佛性)으로 보인단 말입니다. 우주란 것은 진여불성 뿐인 것인데 진여불성이 어떻게 조합(組合)이 됐는가? 어떻게 화합(和合)이 됐는가? 산도 물도 또는 하나의 원자(原子)란 조그만 알갱이도 모두가 다 진여불성이 적당히 합해서 됐단 말입니다.
인연 따라서 적당히 인연이 가짜로 순간동안 모이고 화합이 돼서 이렇게 저렇게 이 만유현상(萬有現象)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눈에 보이는 현상계(現象界)란 것은 실상(實相)이 없단 말입니다. 이른바 가상(假想)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들이 배우시는 색즉공(色卽空)이라.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 또는 제법(諸法)이 공(空)이라. 이런 것은 모두가 그런 도리 입니다. 공(空)이란 것은 무엇인고 하면은 실제로 존재하지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명명백백(明明白白)히 존재한 것도 근본 본바탕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존재하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모두가 다 하나의 거품이요, 거울에 비추어지는 그림자요, 또는 물속에 비치는 달그림자요 그런 것이나 똑같습니다.
따라서 우리 불자님들은 이 눈에 보이는 우리 범부(凡夫)의 때 묻은 눈에는 보이는 것이 사실이 아니고 이것이 가짜다. 이렇게 생각을 하셔야 그래야 소크라테스가 말 한 제일명제(第一命題)인 자기 무지(無知)를 아는 것이 됩니다.
자기 무지를 알아야 참다운 지혜(智慧)를 구할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무던히 안다. 그래버리면 교만심(驕慢心)이 생깁니다. 교만심이 생겨 놓으면 그때는 참다운 진리(眞理)를 모르고 죽습니다. 모르고 죽으면 어디로 갈 것인가? 다시 또 지옥(地獄)같은 업(業)을 지으면 지옥 들어가는 것이고, 욕심 많으면 아귀(餓鬼)가 되는 것이고 말입니다. 어리석으면 축생(丑生)이 되는 것이고 그 육도(六道)에 뱅뱅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삼계육도(三界六道)에 윤회(輪廻)한단 말입니다. 방편이 아닙니다. 사실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지은 대로 받습니다.
오늘 우리가 영가(靈駕)도 천도(天道)합니다 만은 그 영가가 다 극락세계(極樂世界)로 가 버렸으면 천도할 아무런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삼계육도에서 헤맨단 말입니다. 헤맵니다. 헤맬 수 밖에는 없는 것이 금생(今生)에 상(相)을 두고 살았단 말입니다.
여러분들께서도 금생에 자기 몸뚱이라는 상 또는 다른 자기 집은 꼭 내 것이라는 상, 이런 상을 못 떠나면은 역시 여러분도 돌아가신 뒤에 저승에 들어가서 또 헤맵니다. 깊이 생각하셔야 됩니다.
불교는 무엇인가? 불교(佛敎)는 헤매지 않고서 본래 고향(故鄕)으로 가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진여불성자리, 진여불성자리 이것은 모든 생명의 근본자리인데 진여불성자리는 생명이기 때문에 부처님 이름을 거기다가 보탭니다. 그래서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모두가 다 진여불성에다가 붙인 이름이란 말입니다.
그러면 어떤 공부가 제일 쉬울 것인가?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어느 사람들은 어렵게시리 어려운 것을 우리가 공부하면은 훨썩 더 차원이 높고 또 간단하고 누구나가 다 쉽게 할 수 있는 것을 공부하면은 차원이 낮다. 이렇게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지도 않습니다.
우주 생긴대로, 사실 생긴대로 우리가 공부하면 된단 말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내 마음이나 우주의 본질인 진여불성이라고 하면은 바로 부처님의 성품이라고 하면은 그 부처님의 성품 이름이 바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란 말입니다. 그러면 내 생명의 그대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한 것이 사실은 제일 쉽고 사실 그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 보다 더 쉬운 것이 없습니다.
쉬운 것은 이것은 공부가 깊이 들어가기가 어렵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쉬우면서 닦기가 쉽고 또 극락세계에 가기도 쉽단 말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 법은 엄격(嚴格)하고 준엄(峻嚴)합니다. 우리가 지은대로 받기 때문에 준엄합니다. 그러나 부처님 법은 본래가 어느 것도 진여불성이 아님이 없기 때문에 종당에는 다 모두가 부처가 돼 갑니다. 그런 차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가장 자비(慈悲)스럽고 한도 끝도 없는 사랑에 충만한 그런 법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우리가 알아야 참다운 지혜(智慧)인 것인데 그렇게 알지 못하고 이 겉만 보고서 근본 뿌리를 보지 못하면 그때는 참다운 지혜가 못됩니다.
참다운 지혜란 것은 여러분들이 아시지 않습니까? 반야(般若)의 지혜라. 반야의 지혜는 참다운 지혜란 뜻입니다. 다시 바꿔서 말하면 상이 없는 지혜란 말입니다. 상이 없는 우주의 본바탕을 그대로 보는 지혜가 반야의 지혜입니다. 이른바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란 말입니다.
반야바라밀이 돼야 이것이 참다운 지혜인데 참다운 지혜는 방금도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여러분들 깊이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이 둘이나 셋이나 그렇게 분열되지 않은 지혜란 말입니다. 하나의 지혜입니다. 하나의 생명이란 말입니다. 하나의 자리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진여불성의 도리입니다.
영가(靈駕)들도 하나의 도리를 안다고 생각할 때는 저승에서 헤매지 않고서 극락세계(極樂世界)에 바로 가십니다. 극락세계에 갈 수 있는 그런 여러 가지 공덕이 우리 마음에는 본래로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자리를 의심(疑心)없이 믿으면 설사 금생에 잘못 살았다 하더라도 의심 없이 믿는다고 생각할 때는 의심 없이 믿는 그 순수(純粹)한 마음 때문에 극락세계에 초승해서 비약적(飛躍的)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부처님 경전(經典)에 보면은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 있는 법문입니다 만은 금생에 나쁜 짓을 많이 해서 꼭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질 그런 사람이라 하더라도, 삼악도에 떨어질 만한 사람들이 죽을 때는 임종(臨終)때 굉장히 고통(苦痛)을 받는 것입니다.
임종때 여러분들, 돌아가실 분들 보신 적이 있으시지요? 어느 분들은 고요히 가십니다. 어느 분들은 그냥 뭐 손을 내젓고서 아주 몸부림 치고 말입니다. 그 고통하면서 소리도 고래고래 지르고 가신단 말입니다. 그런 분들은 틀림없이 자기가 들어갈 세계, 자기가 들어갈 그 어두운 세계, 고통 세계의 여러 가지 상황을 벌써 상징적으로 그대로 보인단 말입니다.
그래서 삼악도에 틀림없이 떨어질 만한 죄를 범한 사람도 아까 제가 말씀 드린바 임종때 부처님의 법문을 들어서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느끼고 반야의 지혜란 것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주(宇宙)가 모두가 다 하나의 지혜(智慧)란 것입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나 나나 또는 어느 존재(存在)나 우주란 것은 모두가 다 진여불성이란 하나의 만능(萬能)을 갖춘 것이 내 생명(生命)이다. 그 자리가 진짜 나다. 그 자리를 깨달아야 그래야 참다운 인간입니다.
여러분들 참진(眞)자, 사람인(人)자 진인(眞人)이란 말씀을 들으셨지요. 진인이라, 참다운 사람. 또는 대아(大我). 큰대(大)자, 나아(我)자, 또는 참진(眞)자, 나아(我)자 진아(眞我)라. 다 같은 뜻인 것인데 그렇게 참다운 사람은 무슨 사람인고 하면은 그 진여불성을 자기로 한단 말입니다. 진여불성(眞如佛性)을 깨달은 분입니다.
한데 그 진여불성, 진여불성이 참다운 나다. 이렇게 느끼면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죄를 많이 지어서 꼭 지옥에 떨어질 사람도 순간적으로 죽는 순간적으로 그냥 정화(淨化)가 돼서 말입니다. 극락세계(極樂世界)에 직행(直行)한단 말입니다. 직행도 그냥 직행한 것이 아니라 성중래영(聖衆來迎)이라, 아미타 부처님이 25보살을 거느리고서 마중온단 말입니다.
죽어서 자기 영혼(靈魂)이 홀로 외롭게 가는데 마중 올 사람이 없으면은 얼마나 쓸쓸하겠습니까? 헌데 그냥 보통 사람이 마중 온 것이 아니라 아, 부처님께서 우리를 마중 온단 말입니다. 그런 것은 제가 지어서 한 말은 절대로 아닙니다. 경(經)에 그대로 있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오늘 천도를 받는 영가들이시여! 깊이 명심을 하시기 바랍니다. 진리(眞理)라는 것은 우주에 공변된 진리입니다. 사사로운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지어서 지은 대로 받습니다. 우리가 짓는 일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가? 우리 생명의 본래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그 길보다도 더 중요한 길이 없습니다.
무수한 성자(聖者)가 무수한 철학자(哲學者)들이 모두가 다 그 자리를 탐구(探究)하고 그 자리 때문에 생명도 바치고 다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그 자리를 마다고 할 이유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 자리만이 참다운 행복의 자리입니다. 극락세계에 들어가야 만이 영원히 죽음이 없습니다. 이별도 없습니다. 고통도 없습니다.
따라서 참다운 행복(幸福)은 극락세계(極樂世界)에 들어가는 행복만이 참다운 행복입니다. 그러면 극락세계는 어디가 있는 것인가? 극락세계는 도처에가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깨달아 지면은 우리 마음이 진여불성이라 하는 참다운 나가 되면은 그때는 이 사바세계에 있다 하더라도 극락을 느낀단 말입니다.
또는 저 맑은 공간에도 극락세계가 없는 것은 아니지 만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마음 깨달으면은 그때는 어디 먼 데 갈 것도 없이 이 자리 자기가 선 채로 이 자리에서 극락세계를 우리가 수용(受用)을 합니다.
왜 그러는가? 아까 제가 말씀은 드렸지요. 부처님의 청정(淸淨)한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다 부처같이 보인단 말입니다. 다 부처같이 보이니 무슨 갈등(葛藤)이나 반목(反目)이나 또는 여러 가지 투쟁(鬪爭)이나 그런 싸움이 있을 까닭이 있습니까. 다 부처같이 보이니 부처란 것은 훤히 다 광명(光明)으로 빛나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이니 우리한테 불행(不幸)이나 또는 여러 가지 우리 마음의 그런 어두운 마음이 생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마음 깨달으면 그때는 도처가 다 극락이란 말입니다.
오늘 불자님들이시여! 천도를 받는 영가(靈駕)들이시여! 극락세계는 절대로 먼 데가 있지가 않습니다. 또 우리가 극락세계에 가는 방법도 어렵지가 않습니다. 나한테 원래, 내 생명의 본바탕이 바로 부처인데 그 부처자리, 부처님의 그 자리, 그 자리에 가기는 우리가 버릇이 들어서 쉽게는 갈 수가 없겠지요. 그러나 가장 쉬운 법은 부처님 이름을 외이는 것입니다. 부처님 이름을 외이면은 그 때는 이름을 외이는 즉시에 우주(宇宙)의 본바탕인 불성(佛性)하고 같이 상통(相通)이 됩니다.
중생(衆生)이 부처님 생각하면은 천지우주(天地宇宙)가 부처님으로 충만(充滿)해 있어놔서 부처님은 또 우리를 그대로 굽어본단 말입니다. 우리가 절을 하면은 부처님은 우리가 절하는 것을 보는 것이고 우리가 생각하면 또 부처님도 공명(共鳴)을 다 하시고 말입니다.
그렇게 하셔서 주저 없이 우리 몸 이대로 갖고 가지고 있는 대로 참다운 실상(實相)적인, 가상적(假想的)인 그런 사람이 아니라 참다운 본래 우주(宇宙)생명 그대로인 참다운 진인(眞人)이라. 참다운 ‘나’라. 진아(眞我)라. 이렇게 되셔서 위없는 행복을 영원히 누리시기를 간절히 빌어마지 않습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나무극락도사아미타불!
*본 법문은 동영상 자막작업용으로 큰스님 육성 그대로 정리한 글입니다.*
19991000-가평 반야사-청화대선사 설법
19991000-불교TV 촬영
19991018-불교TV 방영
20060204-DV작업-본정 김영동
20080713-녹취워드작업-주안 한동일
'3. 청화 큰스님 법문집 > 4. 금강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77호 보살계(菩薩戒) 수계(受戒)식 (0) | 2009.07.07 |
---|---|
제76호 성륜사 하안거 결제법문 (0) | 2009.07.06 |
제74호 성륜사 정기법회 (0) | 2009.07.04 |
제73호 순선안심법문(純禪安心法門)-03 (0) | 2009.07.03 |
제72호 순선안심법문(純禪安心法門)-02 (0) | 2009.07.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