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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4. 금강륜

제73호 순선안심법문(純禪安心法門)-03

                  <제 73 호>

*19981115-성륜사 대웅전 순선안심법회-03*


순선안심법문(純禪安心法門)-03


 

*소실육문(少室六門)


달마(達磨)스님은 불립문자 교외별전(不立文字 敎外別傳)이라. 문자를 전혀 하시지 않고서 교외별전이라, 오직 교(敎)밖에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법(法)만 말씀하셨다. 그렇게 우리가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이른바 9년 면벽(面壁)이라, 9년 동안 소림사 석굴에서 벽만 바라보고서 묵언(黙言)공부만 하셨다. 그렇게만 우리가 보통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달마스님도 철저하니 교학(敎學)을 닦으셔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증거로 지금 기록에 남아있는 것을 보면은 능가경(楞伽經) 4권을 2조 혜가스님한테 전수(傳授)했다는 그런 기록이 여기 저기 나와 있습니다.

그것만 보더라도 그렇고 달마스님께서 하신 법문 내용도 역시 그와 같이 교학적인 것을 절대로 무시를 안했습니다.

그래서 소실육문(少室六門)이라, 소실육문(少室六門)이란 것은 달마스님께서 하셨다고 지금 정평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佛敎)학자 가운데는 지금 고증을 밟아보고 고증이 확실치 않다고 해서 이의(異議)를 제기한 분도 없잖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문맥으로 봐서는 틀림없이 달마스님께서 하셨으리라고 우리가 느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소실육문(少室六門)은 무엇인고 하면은 심경송(心經頌). 제1문에 가서 심경송(心經頌)이라, 심경송(心經頌) 이것은 반야심경(般若心經)의 아주 간략한 핵심의 해설입니다. 심경송(心經頌)인데, 그 달마스님께서 공(空)도리, 공(空)도리를 얼마나 중요시 했으면은 그렇게 반야심경을 해설을 하셨을까하는 것을 우리가 유추해서 미루어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1. 이입사행(二入四行)


그리고 제3문에는 이입사행(二入四行)이라. 이입사행(二入四行)이라, 이런 것이 굉장히 참 중요합니다. 이입사행(二入四行)은 무엇 인고 하면은 이것은 두이(二)자, 들입(入)자 말입니다. 그래서 이입(二入)인데,

그 1에 관해서는 그때는 다스릴리(理)자, 들입(入)자 말입니다. 이치로 해서 먼저 들어가라는 뜻이 다스릴리(理)자, 들입(入)자, 리입(理入)입니다.

이입은 두이(二)자, 들입(入)자 해서 이입(二入)인데, 이입(二入) 가운데 하나가 다스릴리(理)자, 들입(入)자, 리입(理入)이란 말입니다.

이입(二入) 가운데 첫 번째가 리입(理入)입니다. 리입(理入)인데, 그 리입(理入)은 무엇인고 하면은 일체중생(一切衆生) 동일진성(同一眞性)이라. 모든 중생, 불교에서 대승 불법에서 중생을 말 할 때는 모두다 모든 자연계나 다 들어갑니다. 우리가 소승 불법에서 중생 말 할 때는 인간 중생만을 의미합니다만은 적어도 대승불법은 만유(萬有)를 하나로 보는 그런 차원이기 때문에 대승불법에서 중생을 말 할 때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다른 동물이나 식물이나 무생물이나 두두물물(頭頭物物), 사바세계 모두가 다 중생 가운데 다 들어갑니다.

그래서 리입(理入)은 일체중생 동일진성이라, 모든 중생이 모두가 다 하나의 참다운 성품이란 것입니다. 바꿔서 말씀드리면은 모두가 다 불법뿐이다. 이런 도리입니다.

그래서 참선을 먼저 하기 전에 공부하는 순서로 해서 리입(理入)이라. 이치로 해서 우주의 원리로 해서 모두가 다, 다 똑같은 일미평등(一味平等)한 진여불성(眞如佛性)이다. 이렇게 먼저 알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다스릴리(理)자, 들입(入)자, 리입(理入)이란 말입니다.

그 다음에는 행입(行入)인데 행할행(行)자, 들입(入)자, 행입(行入)인데 행입(行入)은 보원행(報寃行)이라, 보원행은 갚을보(報)자, 원통할원(寃)자 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금생에 지내고 보면은 여러 가지 고통이라든가 또는 애매하니 내가 고생 받는다하는 원통한 생각도 들 때가 많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금생만 생각하면은 우리가 받는 고통을 제대로 다 이해를 못합니다.

그러나 과거 숙세까지 우리가 소급해 올라간다고 생각할 때는 어느 것 하나도 애매하니 자기 목을 우리가 목에다가 칼을 겨누는 그런 것마저도 모두가 다 과거 전생에 우리가 꼭 지어서 받는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과거 숙세에 지어서 금생에 받는다고 생각할 때는 어느 누구도 원망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자업자득(自業自得)이니까 말씀입니다.

따라서 어떤 고난도 인생이라는 것이 사바세계는 고통 바다인데, 고통은 누구나 다 받게 마련인데 고통을 받을 때에 절대로 원망 말고서 아주 달관해서 말입니다. 자기가 지어서 받는 것이니까 이것은 받아 버려야 업장(業障)이 소멸(消滅)이 됩니다.

우리가 고통을 받을 때는 고통은 아무 필요가 없는 것인데 본래가 청정하고 본래가 불성뿐인데 무슨 필요로 고통이 있을 것인가? 그러나 다 필요가 있어서 고통이 있습니다. 물론 본래는 고통 자체도 성품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고통이 아니란 말입니다.

가령 우리가 경험해 본 바로도 무슨 사업에 실패한단 말입니다. 사업에 실패한 사람들은 사업에 실패한 그것만 가지고도 굉장히 고통을 느낍니다. 그러나 우리가 더듬어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 사람이 사업에 실패 안 했으면은 보다 더 죽을병을 온다든가 말입니다. 그런 고통을 받을 것인데 용케도 그래도 부처님을 믿는다든가 다른 공덕을 좀 지었기에 꼭 죽어야 할 그런 병인데 거길 모면해서 사업이 실패한 쪽으로 받곤 한단 말입니다. 그런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아무튼 어떻게 받든지 간에 고통이 모두가 다 의의가 있단 말입니다. 남한테 우리가 애매하니 따귀 한대를 얻어맞는다. 이것도 우리가 생각할 때는 까닭 없이 얻어맞는 것 같지만은 그렇게 함으로 해서 우리가 그마만치 지금 고통을 또 소멸을 시킨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 보원행(報怨行)은 그와 같이 고통을 우리가 원수로 받지 말고서 그냥 흔연스럽게 받아서 우리 업장을 녹이고 또 상(相)을 없애야 상을 느끼지 않아야 그래야 빨리 소멸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수연행(隨緣行)이라. 따를수(隨)자, 인연연(緣)자, 모두 어느 것도 보원행이나 비슷합니다. 어느 것도 인연 따라서 받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에 받는 것이나 짓는 것이나 인연 따라서 가는 것이기 때문에 일체를 인연으로 알고서 달관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무소구행(無所求行)이라. 우리가 구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안 구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정당한 성불을 구한다든가 우리가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보시(布施) 한다든가 그렇게 해서 구하는 것은 정당한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당한 구하는 것이 많단 말입니다. 부당한 감투를 구한다든가 또는 자기가 복을 못 지었으면서 명예를 구한다든가 자기가 복도 못 짓고 남한테 대접을 바란다든가 이런 것은 모두가 다 부당한 것입니다.

따라서 마땅히 정당한 성불이라 하는 그러한 모든 사람과 더불어서 부처가 된다는 가장 소중한 것은 모든 사람과 더불어서 부처가 되는 것이 가장 소중합니다.

키에르케고르나 하이데거나 또 야스퍼스 같은 사람들도 실존적인 행동은 무엇 인고 하면은 나와 남이 더불어서 영생의 행복으로 나아가는 길이란 말입니다. 이것이 실존적인 행동입니다. 다른 것은 모두가 하나의 가짜란 말입니다.

따라서 그 무소구행(無所求行)이라. 우리가 부질없는 것을 구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 다음은 칭법행(稱法行)이라. 칭법(稱法)은 이것은 일컬을칭(稱)자, 일컬을칭(稱)자를 무엇에 맞는다는 그런 뜻으로도 풀이가 됩니다. 법에 맞는다. 법에 맞는 행동을 우리가 하라는 것인데 이것은 여러분들이 아시는 바와 같이 육바라밀(六波羅蜜)이 가장 법에 맞는 행동입니다. 육바라밀행(六波羅蜜)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달마스님께서 하신 법문도 일반 화엄경이나 능엄경이나 법화경이나 그런데서 하는 법문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다르지 않는 것인데 잘 모른 사람들은 달마스님은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 교 밖에서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그런 말씀만 하신 것이지 교는 무시했다. 오직 선(禪)만 그리 하라했다. 이렇게 생각한단 말입니다.

허나 그 달마스님도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여기 능가경 4권이란 말입니다. 아무튼 그 능가경 이것이 달마 스님께서 의중한 위대한 경전입니다. 경전이고 또 그래서 달마스님께서도 아까도 얘기한 바와 같이 그냥 마음만 닦아서 벽만 바라보고서 6년간이나 몇년간이나 공부 하라는 그런 식이 아닙니다.

따라서 선(禪)만 중요하지 교(敎)는 소홀히 해도 무방하다. 교(敎)는 안 배워도 무방하다. 그런 것이 아니라 꼭 먼저 교를 배워서 이론적으로, 어려운 말로 하면은 체용성상(體用性相)의 도리, 절대와 상대의 도리 말입니다. 그런 도리를 명확히 알고서 체계 있게 공부하라는 것입니다. 더 간단히 말 하면은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먼저 익혀서 반야바라밀에서 말씀한 대로 공부하라는 것입니다.


복사가 잘못 됐습니다. 제가 아침에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바쁜 가운데 제대로 정리를 잘 못했습니다. 잘 못해서 그때 다시 한 번 할 라는 것이 도저히 그런 기회를, 틈을 갖지 못해서 그대로 드렸습니다만은 글자가 잘 못된 것은 아닙니다. 허나 순서가 뒤바뀌고 또 페이지 수를 적어 논 것도 그냥 위에가 짤라져 버려서 말입니다. 페이지 수가 안 나오고 다 그랬습니다. 이제 한장, 두장을 넘기고 세장을 먼저 말씀을 하겠습니다.



* 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


이것은 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 능가사자기 도신장 제오(楞伽師資記 道信章 第五)에 나와 있는 법문입니다.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순선(純禪), 순수한 선인데 왜 순선이라고 했는가?

그것은 제가 말씀드렸습니다만은 선(禪) 이것이 중국 송나라 때 이후에는 오가칠종(五家七宗)이라. 그런 오가칠종(五家七宗) 그래서 이른바 임제종(臨濟宗), 조동종(曹洞宗) 또는 운문종(雲門宗), 법안종(法眼宗),  또 위앙종(潙仰宗) 그래서 선(禪)이 다섯 종파로 분립이 되었단 말입니다.

그러고 임제종 가운데서도 또 역시 양기파(楊岐派), 황룡파(黃龍派) 그래서 2파가 다시 나와서 오가칠종으로 분열 되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서로 옥신각신 하고 서로 자기들만 옳다는 그런 주장을 많이 내세워서 분열 된 때가 아닌 달마 때부터 육조 혜능스님 때까지는 분열이 안 된 그런 선이기 때문에 순수 선(禪)라고 하고, 그런 선은 교를 무시한 선이 아니라 선교일치(禪敎一致)를 말했단 말입니다. 순수한 선(禪)은 선교일치를 말했습니다.

초조 달마스님도 그랬고, 2조 혜가스님, 3조 승찬스님, 4조 도신스님, 5조 홍인스님, 6조 혜능스님 모두가 다 선교일치(禪敎一致)를 말씀했습니다.

그 증거로 그 분들이 인용한 경전, 가령 금강경(金剛經), 법화경(法華經), 화엄경(華嚴經), 능엄경(楞嚴經), 또는 유마경(維摩經) 그런 경전을 인용할 때에 아주 정중히 말입니다. 공경스럽게 인용을 다 했습니다. 교(敎)를 무시했으면 인용할 필요도 없는 것이고 그렇게 공경스럽게 인용을 하겠습니까?

그래서 그 순수한 선(禪)에 있어서는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조금도 교와 선을 가리지 않고서 선교일치 도리에서 말씀을 하셨고 또 선과 염불 말입니다. 선과 염불 관계도 굉장히 중요한 관계입니다.

여러분들이 지지리 아, 참선 선방에 가서 화두를 참구하는 분도 해제되면 또 기도 모시고 그런 분도 많이 계시지 않습니까.

이번에 진안서 공부하신 어느 스님 한 분이 오셨는데 원래 그 분도 선방에서 10년 동안 화두를 참구하신 분입니다. 헌데 그 분이 그 현행경(現行經)을 보고서 경도가 돼서 말입니다. 거기에 그냥 빠져서 자기가 아는 신도님들 하고 같이 더불어서 염불수행(念佛修行)을 한다 그래요.

그런데 염불수행 할 때는 염불수행을 하고 또 시간이 있으면은 화두를 참구해서 참선한다고 가부좌 틀고 앉었고 말입니다. 그런께 그 분 생각으로 해서는 화두 드는 것은 참선이고 말입니다. 염불하는 것은 참선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하겠지요.

그러나 화두 드는 것이나 안 드는 것이나 상관없이 사실은 참선이나 염불은 본래로 둘이 아닙니다.

가령 우리가 아미타불(阿彌陀佛) 부르면 아미타불은 하근중생이 염불하는 것이고 참선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분이 있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다만 염불한 자세에 메여 있습니다. 자세가 본래의 자리, 본래 실상자리, 가상이 아닌 본래의 실상 이른바 진여불성자리, 거기다가 우리 마음을 두고 염불을 한다고 생각할 때는 그것은 바로 선(禪)입니다.

가령 화두를 우리가 참구한다 하드라도 마음은 어먼데 가 있고(엉뚱한데 가 있고) 이것이 무엇인가? 저것이 무엇인가? 상대적인 문제를 의심한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선(禪)이 아니란 말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선(禪)의 정의란 것은 본체(本體), 본체를 떠나지 않으면 그때는 선(禪)인 것이고 본체를 떠나면 그때는 모두가 다 선(禪)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염불을 하건 주문을 외이건 또는 화두를 참구하건 그런 방법적인 문제는 별 문제가 아닌 것이고 다만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이 우리 자성, 불심에 가 있는가 없는가 그것이 문제입니다.

불심(佛心)에 가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이것은 모든 것을 구분하지 않고서 천지(天地)만유(萬有)가, 천지만유 모두가 다 상대나 절대나 두루뭉실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 자체다. 하나의 불성 자체다. 하나의 하나님 자체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우리가 염불하면 염불선(念佛禪)이고 화두하면 그때는 화두선(話頭禪)이고 우리가 주문(呪文)을 외우면 주문선(呪文禪)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은 간단명료합니다. 순수선(純粹禪) 도리도 그렇게 돼 있고 또 부처님 때부터서 사실은 육조혜능 스님 때 까지는 화두란 말이 없어요. 말이 있을 필요도 없는 것이고 말입니다.

다만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분열 된 때, 북송(北宋) 때 이후에 특히 대혜종고(大慧宗杲) 스님, 서장(書狀)이란 것이 여러분들이 강원에서 배우는 서장이 있습니다만은 그 가운데 보면 압니다만은 대혜종고 스님은 임제종(臨濟宗) 분입니다. 임제종 분인데 사실 임제스님도 화두(話頭) 말도 않고 또 화두를 들도 안했단 말입니다.

도시 송나라 때에만 그런 것이지 달마스님 때부터서 당나라 때까지는 화두 말은 그때는 없습니다. 또는 조사선(祖師禪) 말도 그때는 없습니다. 송나라 때 비로소 분열된 가운데서 꼭 우리 종파만 옳고 그대들 종파는 다 방편이다. 이렇게 자시비타(自是非他) 하는 가운데서 그런 것이 나왔단 말입니다.

그런 것이 우리 한국에 들어와서 이조 500년 동안에 중국하고 교류가 못돼 버린 것이니까 그때는 별로 좋지 않은 것이 한국서 그냥 딱 굳어져 버렸단 말입니다. 그래서 참선 그러면 참선은 바로 화두고 말입니다. 이렇게만 그냥 아주 독선적으로 그렇게 됐습니다.

됐는데,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제가 순선이라고 하는 것은 이것은 제가 지은 이름도 아닙니다. 이것은 달마 때부터 육조혜능스님 때까지는 이건 순수한 선이란 말입니다. 분열이 안됐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 가운데도 특히 이 능가사자기(楞伽師資紀), 능가사자기는 달마 때부터서 육조혜능스님 때까지 그때의 기록을 소상히 한 기록입니다.

그래 달마스님 기록이나 또는 앞선 그야말로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 기록이라든가, 능가경 기록이라든가 그런 것이 여기에 다 들어있는 것인데 그래서 달마스님을 위시해서 2조 혜가스님, 3조 승찬스님, 4조 도신스님, 4조 도신스님 때까지는 결국은 능가경으로 해서 주로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그러고 5조 홍인스님 때부터서 비로소 거기다가 금강경(金剛經)이 들어왔단 말입니다.

능가사자기(楞伽師資紀)는 정각(淨覺)스님이란 그 당시에 분이 즉 말하자면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달마 때부터 육조 혜능스님 때까지 기록을 소상히 기록한 것인데 이것이 1907년 이전에는 이런 책이 안 나왔었습니다. 1907년 돈황석굴(燉煌石窟) 막고굴(莫高窟)에서 즉 말하자면 비로소 돈황문서(燉煌文書)가 많이 나왔습니다. 많이 나와서 능가사자기(楞伽師資紀)도 그 가운데서 나왔단 말입니다.

1907년이기 때문에 1907년 그 이전에 태어난 분들이라든가 그 이전에 공부한 분들은 능가사자기를 알 수가 없단 말입니다. 하니까 도신스님 법문도 그때는 전혀 모른단 말입니다. 전등록(傳燈錄) 이나 그런데에 아주 간략하게 기록만 있을 뿐인 것이지 소상한 기록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1907년 이후에 돈황석굴에서 능가사자기가 나올 때부터서 비로소 4조 도신스님 행적을 알게 되었단 말입니다.

달마 때부터 육조혜능스님 때까지도 4조 도신스님, 도신스님 기록이 굉장히 많습니다. 많고, 내용도 아주 소상하고 충실합니다. 그리고 4조 도신스님은 그 어록을 보더라도 알 수가 있습니다만은 이 분은, 이 분 때 비로소 500대중, 600대중을 한 군데 이렇게 모아놓고서 집단적으로 공부를 했단 말입니다.

3조 때까지는 이리 숨고 저리 숨고 그래가지고서 아주 그야말로 참 소소한 분들이 같이 인연 따라서 모여서 공부했습니다만은 4조 도신스님 때부터서 비로소 대중적인 선원(禪院)이 되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 내용도 충실하고 또는 비로소 체계가 있게 이루어지고 했습니다. 헌데 이 도신스님께서는 책을 두 가지 것을 냈습니다. 한가지는 보살계본(菩薩戒本)이라, 보살계본 한권을 내고 또 한권은 입도안심요방편법문(入道安心要方便法門)이라는 책을 냈습니다. 두 가지 것을 냈는데 그 도신스님 뿐 아니라 달마 때부터서 육조까지 모두가 다 보살계(菩薩戒)를 꼭 그때그때 설했단 말입니다.

기록은 없는 때도 있지만 특히 4조 때부터는 기록이 아주 분명히 남아 있습니다. 5조 때도 마찬가지고, 육조혜능스님도, 육조단경도 역시 보살계를 설하는, 보살계는 바로 무상계(無相戒)입니다. 보살계를 왜 무상계(無相戒)라고 하는고 하면은 상(相)을 여윈 계(戒)란 말입니다. 보살계는 바로 불성계(佛性戒), 무상계(無相戒)라 그러는 것입니다.

부처님 그 불성, 우리 인간과 우주 만유의 본성품에서 부터서 나와 있는 결국은 우리 인간 존재의 도덕률이기 때문에 보살계라고 하는 것인데 보살계는 바로 상을 여의어 놔서 무상계(無相戒), 불성계(佛性戒) 그렇게도 말합니다.

그래서 얼마만치 우리 조사 스님들이 계율을 중시 했던가 말입니다. 제가 읽으면서 간단히 설명을 드립니다.



당조(唐朝), 그런께 능가사자기(楞伽師資紀) 도신장(道信章) 제오(第五), 이 셋째 장입니다. 일단 당조(唐朝) 이건 당나라 때란 뜻입니다. 기주(蘄州) 쌍봉산(雙峰山), 기주는 쌍봉산이 있는 처소의 지방 이름입니다.

도신선사 승찬선사후(道信禪師 承璨禪師後) 찬(璨)에가 ②자가 붙어 있지요. 뒤에 가서 찬선사(璨禪師)는 승찬(僧璨)스님인데 뒤에 가서 주석을 달아 있습니다. 승찬스님한테 승(承)이라, 법을 받은 뒤에 기신선사(其信禪師)-그 도신선사가 재창선문 우내유포(再敞禪門 宇內流布)라. 재차 선문을 참선법문을 재차 밝혀서 말입니다. 우내유포라. 우주 내에, 이 세상에다가 유포를 시켰도다. 이런 뜻입니다.

그리고 또 도신스님한테는 유보살계법일본(有菩薩戒法一本)이라-살계법 1본이 있고, 급제입도안심요방편법문(及制入道安心要方便法門)이라-다시 입도안심요방편법문(入道安心要方便法門)이란 책을 냈습니다.

이 책은 굉장히 소중한 책입니다. 참선을 어떻게 할 것인가? 참선을 이끄는 요령이 거기에 들어있단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도 그냥 당신 마음을 내킨 대로 말씀한 것이 아니라 꼭 부처님 경전을 의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이런 것이 그 조사스님들이 얼마만치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중요시 했든가, 교와 선이 하나란 것을 역설했든가? 이런 것을 우리가 소상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도신스님께서 보살계일본(菩薩戒一本)과 또는 입도안심요방편법문(入道安心要方便法門)이란 책을 지어서 위유연근숙자설(爲有緣根熟者說)이라-인연이 있고 또는 근기가 수승한 사람한테 근기가 낮으면은 알아먹을 수가 없겠지요. 수승한 사람들을 위해서 말씀을 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이 무엇인고 하면은 아차법요(我此法要)라-내가 말한 법의 요체가 무엇 인고 하면은, 여기를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말씀한 그 법의 요체가 무엇 인고 하면은, 의능가경 제불심제일(依楞伽經 諸佛心第一)이라. 내가 말한 요체는 그냥 내가 좀 법을 깨달아 가지고서 내 생각대로 말한 것이 아니라 능가경에 가서 제불심제일-모든 존재가 다 불심제일이란 말입니다. 어느 것도 불심(佛心)이 아님이 없다. 일체가 모두가 다 불성(佛性)이다, 불심(佛心)이다. 이런 말이란 말입니다.

이런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능가경에서 말씀했는데 내가 지금 4조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지금 말한 법의 요체는 능가경을 의지한 제불심제일(諸佛心第一) 이것하고, 또 의지하기를 우의문수설반야경(又依文殊說般若經)이라. 문수설반야경 일행삼매(一行三昧)라.

문수보살이 부처님 세존한테 부처님한테 법문을 요청해 가지고 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설(說)하신 법문 이것이 문수설반야경입니다. 문수보살의 문의에 따라서 부처님께서 말씀한 법문인데 그 가운데가 일행삼매(一行三昧)가 있는데 내가 지금 법을 설하는 요체는 능가경에서 있는 제불심제일 거기하고 또 문수설반야경의 일행삼매하고 이것이 내가 지금 법문하는 가장 요긴한 뜻이다. 이렇게 말씀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문수설반야경에서 의지하면은 즉염불심시불(卽念佛心是佛)이라. 문수설반야경에 있는 그 법문이 또 염불심시불(念佛心是佛)이라-이것은 부처를 생각하는 마음이 바로 부처란 말입니다.

우리가 염불이라는 것은 그 하근 중생이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지금 근래에 와서 어느 스님들이 염불은 하근 중생이 하고 또는 화두는 상당히 근기가 수승한 분이 한다. 이런 말들은 부처님을 비방한 말입니다.

왜 그러는 것인가? 아, 생각해 보십시오. 염불이란 것은 부처를 생각한단 말입니다. 부처는 무엇인가? 우리 신앙 대상인 우주와 인생의 근본적인 생명자체 또는 내 마음의 본질이란 말입니다. 부처를 생각한 것 같이 가장 고귀한 것이 없습니다. 그것이 염불이란 말입니다.

그런 것이 어떻게 해서 방편법문이 될 수가 있습니까? 부처님 경전에 염불이 방편법문이란 그런 대문은 한군데도 없습니다.

제가 앞서도 제가 말씀드렸지만은 부처란 것도 역시 그냥 소승불법에서는 석가모니만 부처다 하고 그리고 대승적인 의미에서 석가모니가 나오고 안 나오고 상관없이 언제나 계시는 우주 생명이 부처다 이런 대목은 별로 없단 말입니다. 불심이라든가 불성이라든가 법성이라든가 그런 말은 소승불법에서는 없습니다. 근본불교에서는,

따라서 염불심시불(念佛心是佛)이라-우리가 본래 부처거니 부처를 생각하는 그 마음, 염불심(念佛心) 부처를 생각하는 그 마음이 그때는 바로 부처란 말입니다.

그 반대로 망념시범부(妄念是凡夫)라. 망념은 무엇이 망념인가? 모두가 부처인데 어느 것 보나, 미운 사람 보나, 고운사람 보나, 다 부처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돼야 바른 것인데 부처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마음은 바로 망념입니다. 부처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마음은 모두 망념입니다. 그래서 이 망념, 부처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그 마음이 바로 그것이 우리 범부란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겉만 보니까 속을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다 부처뿐인 것인데, 법성뿐인 것인데 겉만 보니까 아, 미운 사람 있고 나쁜 사람 있고 우리 범부 보고는 범부중생 그런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결국은 망념이란 말입니다. 망념으로 보면은 결국은 범부란 말입니다.

문수설반야경(文殊說般若經)에서 문수사리(文殊師利)가 말하기를 세존(世尊)이시여, 운하명일행삼매(云何名一行三昧)꼬, 무엇이 어째서 운하(云何)라, 어째서 일행삼매(一行三昧)라고 말을 합니까? 이렇게 문수보살이 부처님께 물으셨단 말입니다.

물으니까 불언(佛言)-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법계일상(法界一相)이라, 법계란 것은 진여불성(眞如佛性)으로 이루어진 전부 세계가 법계입니다. 법계 이것은 다른 것이 없이 오직 일상(一相), 오직 하나의 실상(實相) 뿐이란 말입니다. 법계일상이란 말은 하나의 실상이란 뜻입니다. 우주란 것은,

 법계가 일상이거니, 법계가 오직 하나의 진여불성의 실상이거니 거기에다가 계연법계(繫緣法界)라-그 법계에다가 우리 인연을 딱 메인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을 거기다 둔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은,

하나도 다른 것이 없는 일진법계(一眞法界)의 법계에다 우리 마음을 딱 두고서 공부하는 그것이 시명일행삼매(是名一行三昧)라. 참말로 있는 것은 진여법성(眞如法性)이라는 우주의 실상 뿐이거니 거기다가 우리 마음을 두고서 우리 마음을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게 하는 것이 이른바 일행삼매(一行三昧)입니다.

천지우주가 모두가 다 진여실상뿐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나중에 나옵니다만은 일상삼매(一相三昧)라 하는 것이고, 그 자리에다가 우리 마음을 두고서 앞생각 뒷생각에 다른 생각이 없이 오직 하나의 진여불성이라는 생각만 가지고 쭉 우리가 계속해서 나간다고 생각할 때는-수행해 나간다고 생각할 때는 그것이 일행삼매(一行三昧)입니다.

일행삼매(一行三昧)란 말은 앞 시간에도 말씀했습니다만은 육조단경(六祖壇經)에도 여섯군데나 있습니다. 여섯군데나, 육조스님께서 말입니다.

이것이 일행삼매(一行三昧)다. 선남자 선여인(善男子 善女人)이 그러니까 수행하는 우리 불자들이 욕입일행삼매(欲入一行三昧)인데는-만약 일행삼매에 들어가고자 할진데는 당선문반야바라밀(當先聞般若波羅蜜)이라.

이런 것을 잘 주의해서 들으십시오.

마땅히 먼저 당선문반야바라밀(當先聞般若波羅蜜)이라-마땅히 먼저 반야바라밀을 듣고서 말입니다.

이것을 보더라도 얼마만치 부처님께서 ‘먼저 이론적으로 체계를 세우라’ 이렇게 말씀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더 쉬운 말로 하면 선오후수(先悟後修)라. 먼저 이치로 깨닫고서 나중에 닦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길을 갈 때는 순로(順路)를 모르고 목표(目標)을 갈 수가 있습니까? 마땅히 목표를 알고 어떻게 가야 할 것인가? 우리 순로를 알아야 합니다.

그와 똑같이 부처님 법은 바로 우주의 법 그대로입니다. 닦는다고 생각할 때는 아, 부처란 대체로 무엇인가? 또는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 수단이 있는 것인가? 이걸 알아야 한단 말입니다.

어느 철학이나 과학이나 무슨 목적 설정이 있다고 생각할 때는 꼭 방법론(方法論)이 뒤따라야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목표를 달성을 못한단 말입니다. 없다고 생각할 때는,

당(當) 마땅히 먼저 반야바라밀을 듣고서 여설수학(如說修學)이라. 반야바라밀에서 말씀한 것과 같이 그대로 반야바라밀의 말씀대로 우리가 닦아서, 그 연후능입일행삼매(然後能入一行三昧)다. 그 연후에야 비로소 능입일행삼매에 들 수 있느니라. 그런 뜻이란 말입니다.

여법계연(如法界緣)이라. 법계란 것은 일미평등(一味平等)하기 때문에 법계가 모두가 다 다른 것이 없이 모두가 다 일미평등한 진여불성이 된 것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공부한다고 생각할 때는 불퇴불괴(不退不壞)라-후퇴도 없는 것이고 또는 불괴라, 파괴할 것도 없는 것이고 그래서 불가사의(不可思議)한단 말입니다. 진여불성 자체가 부사의한 만공덕(萬功德)을 갖춘 자리기 때문에 그때는 부사의하단 말입니다.

그래서 무애무상(無礙無相)이라-거리낌도 없고 또는 상(相)도 안 낸단 말입니다. 오직 하나의 불성뿐인데 어디가 상이 날 수가 있겠습니까?

선남자선여인(善男子善女人)들이 욕입일행삼매(欲入一行三昧)인데는, 재차 더 구체적으로 또 말씀을 했습니다. 그대들 불자들이 마땅히 일행삼매에 들어갈려고 할 진대는 뻑뻑히, 마땅히 응처공한(應處空閑)이라. 조용하고 잡스러운 데가 없는데입니다.

우리가 시끄러운 데나 언제나 불법은 우리가 처소를 가리지 않고서 행주좌와(行住坐臥)에 다 공부를 할 수가 있는 것이 불법(佛法)입니다. 우리가 회사에 있으나, 한 사람의 교육자로 해서 교단에 서나 말입니다. 어느 때 어느 처소에나 다 부처님 공부는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시끄럽고 잡연이 많은 데는 좀 장애가 되겠지요.

그러기 때문에 초보인들은 우리들 선방에서 공부하듯이 말입니다. 한적한 데에 처해서 하라는 그런 의미입니다. 응처공한(應處空閑)이라-잡연이 없고서 한가로운 그런 데에 처해서,

사제란의(捨除亂意)라-흐트러진 산란스러운 마음을 다 버리고 제거한단 말입니다.

그리고 불취상모(不取相貌)라-상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금강경(金剛經)에도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그런 것이 모두가 상(相) 아닙니까. 상대유한적(相對有限的)인 우리 보는 것은 모두가 상(相)입니다. 그래서 그런 상(相)을 두지 말고서,

계심일불(繫心一佛)이라-우리 마음으로 생각하는 하나의 부처한테 대해서 우리 마음을 딱 거기에 메인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을 거기에 머물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칭명자(專稱名字)라-오로지 부처님 이름을 외인다는 것입니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지장보살(地藏菩薩) 외이면 잘 모른 사람들은 그런 것은 방편법문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한단 말입니다. 부처님 이름을 외인다는 것은 그것은 절대로 방편법문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부처님을 마음 밖에다 두고, 극락세계에 부처님이 계시고, 나는 여기가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방편이 되겠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고서 일체존재가 모두가 다 부처님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가장 절실한 공부란 말입니다. 성불의 지름길이라고 여기나 저기나 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화엄경(華嚴經)은 일대시교(一代時敎)의 모두를 다 통틀어서 거기에 집합시켜 놨단 말입니다. 화엄경(華嚴經)은 다, 화엄경(華嚴經)도 마지막에 가서는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염(念)하면서 입법계(入法界)라. 법계에 들어가 성불(成佛)하라는 극락세계(極樂世界)에 왕생(往生)하라는 그런 법문(法門)이 있단 말입니다.

용수(龍樹)보살(菩薩)은 제2의 석가(釋迦) 아닙니까. 용수보살같이 위대한 분이 부처님 다음에서는 용수보살 외에는 특별히 그만한 분이 없다고 해서 제2의 석가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 분도 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 이행품(易行品)이라. 거기 가서 염불(念佛)을 역설(力說)을 했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우리 마음이 그리워하고, 흠모하고, 존경하고, 그 마음같이 우리 마음을 순화시키는 그런 공부는 없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그리워해 보십시오. 얼마나 우리 마음이 정화(淨化)가 됩니까? 그 사람 위해서는 자기 몸뚱이 바쳐도 아깝지가 않단 말입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향수(鄕愁)라든가 그런 것도 얼마나 순수(純粹)합니까. 그런데 하물며 우리 생명의 고향인, 우리 마음의 고향인 그 자리, 부처님을 그리워하는 그 마음은 정말로 생각하면 생각 할수록 가장 절실한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을 그리워하는 그 마음, 그 마음으로 해서 염불이 나온단 말입니다. 내가 떠나온 고향이고, 다시 돌아가야 할 고향이고, 내 생명의 바로 그 자리고 말입니다.

너나 나나 어느 누구의 모든 생명의 근본자리 아닙니까. 그 자리보다도 더 소중한 자리는 없습니다.

사실 우주는 모두가 그 자리뿐인데, 그 자리의 이름, 그 자리의 대명사, 이름을 외이는 것 같이 우리 마음을 정화시키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염념칭명상참회(念念稱名常懺悔)라. - 생각 생각에 부처님의 이름을 외이는 그것이 바로 참다운 참회가 된단 그 말입니다.

그러면은 중생염불불환억(衆生念佛佛環憶)이라. 이것은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에가 있는 법문인데 중생이 부처를 생각하면은 불환억이라. 부처는 도리어 우리를 생각한단 말입니다. 부처와 나와 둘이 아닌 거지요.

금생에 나와서 염불 법문을 모르고 죽으면은 정말 참 불쌍한 일입니다. 자기 고향이 바로 부처고 다시 돌아가야 할 고향도 부처고 말입니다. 내 생명의 이름도 부처고 우주의 이름도 바로 부처란 말입니다.

그 4조 도신스님, 선종의 넷째 번째 조사입니다. 4번째 조사로 6조까지 가장 두드러지게 중생제도를 하신 분이란 말입니다. 이 분이 이것은 하신 말씀입니다. 말씀인데, 이 분도 내가 내 말이 아니라, 문수설반야경(文殊設般若經) 또는 입능가경(入楞伽經)에 가서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아까 제가 오종선(五種禪) 갈래를 말했으나, 능가경에 있어서는 사종(四種) 갈래가 있습니다. 거기에 있는 이른바 여래선(如來禪)하고 최상승선(最上承禪)하고 똑같습니다.

부처가 부처를 생각한단 말입니다. 부처가 부처를 생각하는 것 같이 자연스럽고 위대한 것이 없습니다.

계심일불(繫心一佛)이라, 오직 부처님한테, 어느 부처님한테 마음을 내어서 무슨 부처, 무슨 부처 그렇게 이름은 다르지만은 이것은 모두가 하나의 부처입니다.

부처님 이름이 하도 많으니까 보살 이름이 하도 많으니까 우리가 혼돈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별 문제가 아닙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부처님의 공덕이 무량무변하기 때문에 하나의 개념으로 해서는 표현을 못한단 말입니다.

달에 가 있는 부처님 기운은 월광보살(月光菩薩)이라. 해에 가 있는 부처님 기운은 일광보살(日光菩薩)이란 말입니다. 이 땅에 가 있는, 이 지구덩어리에 있는 부처님 기운은 지장보살(地藏菩薩)이란 말입니다. 물에 가 있는 부처님 기운은 용왕보살(龍王菩薩)이고 산에 가 있는 부처님 기운은 바로 산왕(山王)입니다.

따라서 무슨 보살, 무슨 보살 그렇게 부처님 이름도 많고 보살님도 많지만은 모두가 다 하나의 부처님뿐입니다. 다만 그 공덕 따라서 부처님을 자비로운 쪽으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지혜로운 쪽으론 문수보살(文殊菩薩), 원력 따라서 보현보살(普賢菩薩) 말입니다. 그러는 것이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의 부처님한테 관음보살 부르고 싶으면은 관음보살 불러도 좋은데, 다만 관음보살 가운데는 모든 부처님을 다 포괄해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하셔야 됩니다.

그리고 기왕이면은 부처님의 본사아미타불(本師阿彌陀佛), 총대명사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부르면 더욱 좋지 않겠습니까.

기독교가 지금 많은 수가 된 것이 무엇인고 하면 그 교리가 단순 소박합니다. 불교는 너무나 복잡해서 오랫동안 공부해도 뭣이 뭣인지 우린 갈피를 못잡는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다보면 오로지 오, 주여!, 오, 주여! 하고 부르는 그런 쪽으로 마음이 끌려간단 말입니다.

우리는 부처님의 별공덕(別功德)으로 해서 자비공덕(慈悲功德) · 지혜공덕(智慧功德) · 원력공덕(願力功德), 별공덕으로 해서 관음보살(觀音菩薩),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무슨 보살 모다 다 있지만은 이 총대명사, 부처님의 총대명사가 아미타불(阿彌陀佛),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아닙니까. 그렇게 해서 우리 마음을 아주 간소하게 정리하는 것은 참 좋습니다.


그래서 부처님한테 이렇게 해서 마음을 딱 메어서 전칭명자(專稱名字)라. 오로지 부처님의 이름만 외인단 말입니다.

그래서 수불방소(隨佛方所)라. 동(東)을 향하나 서(西)를 향하나 우리가 서방 극락세계라고 서쪽을 향해서 말하나 이것은 동쪽에서 해가 뜨고 서쪽에 해가 지니까 우리가 돌아가는 극락세계를 서쪽이라고 상징적으로 말한 것이지 부처님이 꼭 서쪽만 계신다는 그런 뜻은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가 상징적인 뜻을 생각해야 됩니다.

그래서 단신정향(端身正向)라. 기왕이면은 가부좌(跏趺坐)하듯이 그와 같이 단정히 바르게 앉는 것이 좋습니다. 바르게 앉는 것이 우리 마음도 몸도 더 빨리 맑아지고 통일이 더 빨리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능어일불(能於一佛)에 능히 한 부처님을 염념상속(念念相續)이라. 생각 생각에 다른 생각이 끼지 않도록까지 상속한다고 생각할 때는 즉시 염중(念中)에-즉시 곧 우리 생각 중에 능견과거미래현재제불(能見過去未來現在諸佛)을 볼 수가 있단 말입니다.

부처님을 어떻게 볼 것인가? 사람 모양 같은 부처님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까? 부처님은 사람 모양 같은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우주에 존재하는 생명의 실상이란 말입니다. 생명(生命)의 광명(光明)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공덕(功德)은 무량무변(無量無邊)한지라, 우리가 정말로 진실하게 부처님의 모양을 꼭보고 싶다. 이런 때는 우리 원(願) 따라서 부처님이 광명의 사람 몸으로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원 따라서 저 지구덩어리 만치 넓은 부처님을 보고 싶다. 이렇게 간절히 우리 마음이 모아진다고 생각할 때는 그런 원 따라서 그렇게 부처님이 보이는 것입니다.

이 허공중(虛空中)에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 수만, 수억으로 내가 봤으면 되겠다. 이렇게 간절히 원 세울 때는 그와 같이 관세음보살이 수억, 수만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부처님 공덕은 그와 같이 신비부사의한 것입니다. 모두를 다 할 수 있고 모두를 다 알 수가 있단 말입니다. 그런 것이 부처님 힘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마음의 힘입니다.

능어일불(能於一佛)에 능히 한 분의 부처님한테 대해서 염념상속(念念相續)이라. 생각 생각에 상속을 한다고 생각할 때에는 즉시 그 생각 중에 능히 과거 미래 현재 제불을 다 본단 말입니다. 이것은 다시 바꿔서 말하면은 모든 존재가 다 부처임을 본다는 것이나 같은 뜻입니다.

하이고(何以故)오, 왜 그런고 하면은 염일불공덕(念一佛功德) 무량무변(無量無邊) 역여무량(亦與無量) 제불공덕(諸佛功德) 무이부사의(無二不思議)라-한 부처님의 공덕이 무량무변한데 그와 똑같이 무량제불의 공덕과 한 부처님 공덕과 원래가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둘이 아니기 때문에 한 부처님을 본다고 생각할 때는 일체존재 과거불 현재불 미래불 모두가 다, 이 성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다 모두가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다 부처란 말입니다.

우리 스님들은 장엄염불 다 하시지요. 삼백육십만억(三百六十萬億) 일십일만(一十一萬) 구천오백(九千五百) 동명동호(同名同號) 아미타불(阿彌陀佛)이라. 부처란 것이 어디 가서 부분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일십일만(一十一萬) 구천오백(九千五百), 이 수치 이것도 역시 하나의 상징적입니다. 하도 수가 많으니까 그와 같이 일십일만(一十一萬) 구천오백(九千五百) 동명동호(同名同號) 아미타불(阿彌陀佛)이라. 동명의 같은 이름이고, 동호(同號)라 같은 호란 말입니다.

김 가도 아미타불, 박 가도 아미타불, 나무도 아미타불, 또는 물도 아미타불, 다 아미타불이란 말입니다.

이런 법문들은 주로 나옹대사(懶翁大師), 태고보우(太古普愚)선사 이런 분들이 주로 했단 말입니다. 장엄염불(莊嚴念佛) 법문들은 주로 나옹스님이 많이 했습니다. 나옹스님은 중국 들어가서 임제선(臨濟禪)의 조사(祖師)들한테 선풍(禪風)을, 선의 대의(大義)를 받아 왔단 말입니다. 순수한 선객(禪客)입니다.

이런 분들이 다 그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서 우리 후대인들은 ‘아, 염불은 방편인 것이고 화두 들면은 그것이 바로 참선이다.’ 이런단 말입니다.

우리는 무비판적(無批判的)으로 옛날 중국에 들어온 것은, 지금 미국 사람들 것을 무비판적으로 다 수용하듯이, 옛날에는 더욱 그랬습니다. 중국을 대국이라고 섬기고 우리 한국은 속국이라고 스스로 그렇게 자인 했단 말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중국 한번 들어갔다 나와서 뭐라고 하면 그것이 다 옳다고 생각했단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무비판적으로 믿을 때가 아닙니다. 부처님 정통이 무엇인가? 우리 조상들이 어떻게 잘못 전해 가지고서 지금까지 왜곡되게 지내 왔던가? 이것도 한 번 우리가 비판해 볼 때란 말입니다.

여기 뒤에는 좀 해석하기도 여러분들이 어려울 것이고 그래서 시간도 너무나 길어지면 멀리 가실 분들이 어려우시기 때문에 이 장은 넘깁니다.



그래서 첫째 줄에 가서 그 가운데 즉시여래진실법성지신(卽是如來眞實法性之身)이라. 즉 이러한 것이 모두가 다 부처님의 진실한 법성의 몸이며, 역명정법(亦名正法)이라. 이렇게 진여불성 자리를 여의지 않는 것이 바로 정법이라고 이름하며, 역명불성(亦名佛性)이며 이것이 바로 불성이라고 이름하며 말입니다. 역명제법실상(亦名諸法實相)이며 이것이 모두가 다 실상 아님이 없다는 그런 도리이며, 이것이 바로 실제(實際)이며 참말이란 말입니다. 역명정토(亦名淨土)라. 이 자리가 바로 극락세계, 정토(淨土)란 것은 바로 극락세계입니다.

이것이 바로 극락세계이며 이것이 바로 보리(菩提), 참다운 지혜(智慧)이며 이 자리가 바로 금강삼매(金剛三昧)며 이것이 바로 본 깨달음, 근본 깨달음이란 말입니다.

본각등(本覺等) 역명열반계(亦名涅槃界) 이것이 바로 열반계이며, 이것이 바로 반야(般若)이며 명수무량(名雖無量)이라. 이름은 비록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하더라도 개동일체(皆同一體)라. 모두가 다 하나의 몸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알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문수설반야경(文殊設般若經)에 가 있는 법문입니다. 4조 도신스님이 문수설반야경을 이와 같이 인용을 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기에 별표 이것은 주석한 것입니다. 능가사자기(楞伽師資紀)가 보시면 능가사자기는 돈황에서 발견, 초기(初期) 선종사상(禪宗思想) 서기 719년부터서 720년까지 이루어졌단 말입니다. 정각(淨覺)이라는 그 스님이 지었단 말입니다. 본서가 발견된 후 초기선종사(初期禪宗史) 특히 북종선(北宗禪)의 연구가 급격히 진전된 내용은 안심법문(安心法門), 달마 이입사행(二入四行), 또는 일행삼매(一行三昧), 수일불이(守一不移) 등이 설하여 있음. 저자는 정각, 이것은 모다 제가 주석을 붙였습니다. 나중에 보시면 되겠습니다.



*귀의일체삼신자성불(歸依一體三身自性佛)


그리고 맨 처음 첫 페이지로 돌아가서 이것은 육조 혜능스님 법문입니다. 앞에는 4조 도신스님 법문이기 때문에 먼저 4조스님 것을 했습니다.

이것은 귀의일체삼신자성불(歸依一體三身自性佛)이라.

육조혜능스님 법문은 아시는 바와 같이 육조단경(六祖壇經)인데, 단경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돈황본(燉煌本)도 있고, 돈황에서 맨 처음에 발견된 그것도 있고, 또는 한 10세기 때 종보(宗寶)스님께서 한 종보본(宗寶本)도 있고, 덕이(徳異)스님이 한 덕이본(徳異本)도 있고, 또는 대승본(大乘本)도 있고, 흥성사본(興聖寺本) 이와 같이 대체로  5가지 종류의 단경이 있습니다.

그런데 돈황본은 가장 오래됐다고 그러지요. 그러나 돈황본도 보면은 굉장히 아주 그것은 하나의 필사본(筆寫本)인데 인쇄본이 아니라 붓으로 친히 후대인이 베낀 것인데 아주 오자(誤字)가 많습니다. 오자가 많고 또 게송(偈頌)도 아주 그냥 질서가 없어가지고서 우리 후학들이 본다고 생각할 때에 아주 요령(要領)을 잡기가 어렵게 돼 있습니다.

그리고 아까 말씀드린 종보본이나 또는 덕이본이나 그런 본의 단경도 보면은 마치 북종하고 남종하고 말입니다. 양종이 서로 시비하고 다투게 됐다는 그런 기록이 거기에 많이 수록돼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 대문은 육조스님께서 했을리는 만무할 것이고 도인들이라는 것은 시비를 가리지를 않습니다. 도인들은 진리만 그대로 밝히는 것이지 누가 옳다, 누가 그르다. 그런 말을 도인들은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래도 그런 시비한 것은 후대인들이 자기 종파들, 자기들 동아리들이 옳다는 자시비타(自是非他)하는데서 그렇게 나온 것이지 원래 단경의 글은 아니라고 생각이 됩니다.

따라서 그러한 가운데서도 무슨 본(本)이나 또는 갖가지 다른 본(本)따라 더하고 깎고 그러한 부분은 다 빼버리고 가장 중요한 핵심은 무엇인고 하면 앞서 제가 서두에서 말씀드렸듯이 그것은 단경에 있는 삼신일불(三身一佛)에 귀의(歸依)하고, 삼보(三寶)에 귀의(歸依)하고, 사홍서원(四弘誓願)에 귀의하고, 또는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말씀하신 내용이며 그 대목은 어느 단경이나 똑 같습니다.

따라서 핵심이라고 안 볼 수가 없고 또한 그 법문은 사실은 4조스님이나 5조스님이 하신 법문과도 다 상통(相通)이 됩니다.

그러기에 그와 같이 상통되는 그런 것만 제가 추려서 여기다가 옮겼습니다.

삼신일불을 아까도 말씀했습니다만은 이것은 육조스님께서 스스로 단경에다 삼신일불 말씀을 합니다. 이것도 앞에나 뒤에나 붙은 것인데 핵심만 골라서 간략히 여기에 인용한 것입니다.

 

선지식(善知識)들아 총수자체이수무상계(總須自體以受無相戒) 하였으니, 이것은 모두 모름지기 무상계를-자체에 있는 그런 무상계를 받았으니,

무상계란 것은 보살계입니다. 보살계는 상을 떠난 불성의 도리를 그대로 말한 경계이기 때문에 보살계를 무상계라고 합니다.

그래서 단경이것은 육조스님께서 소주땅 대범사(大梵寺) 법단(法壇)에 올라가서 거기서 무상계를 설했단 말입니다. 그때 많은 대중들한테 하신 법문이 기초가 되어서 육조단경(六祖壇經)이 되었습니다.


모두 한꺼번에 축혜능구도(逐慧能口道)라-이 혜능의 말을 따라서, 혜능의 입을 따라서 그대들도 같이 말하라는 뜻입니다.

도인들은 대중들에게 절대로 함부로 말하지 않습니다. 꼭 선지식(善知識)들이여! 그렇게 말을 합니다. 모두가 다 부처로 보이므로 청중에 대해서 함부로 호령이나 하고 그렇게 할 수는 없겠지요.

선지식(善知識)들이여! 그대들은 모두 무상계(無相戒)를 받았으니 이제는 모두 한꺼번에 이 혜능의 입을 따라서 말하시오.

그래서 영선지식(令善知識)이라-선직들로 하여금, 즉 여러분들로 하여금 견자삼신불(見自三身佛) 어자색신(於自色身)이라, 자기 몸에 있는 삼신불, 삼신불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몸이나 자기 마음이나 또는 어디에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몸에 있다는 것은 자기 마음에 있다는 것과 같습니다. 몸과 마음은 둘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 마음과 몸에 있는 삼신불에 귀의케 할지니,

귀의청정법신불(歸依淸淨法身佛)이라-청정 법신불에 귀의하고, 또  어자색신(於自色身) 귀의천백억화신불(歸依千百億化身佛)이라-색신 가운데 있는 천백억화신불에 귀의 하라.

여기서는 화신(化身)을 보신(報身)보다도 먼저 앞에 내세웠습니다. 앞에 내세우나 뒤에 내세우나 원래 삼신일불(三身一佛)이기 때문에 똑같습니다.

그러나 삼신불 사상이 보다 더 발전됨에 따라서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 쪽으로 그렇게 정리가 됐기 때문에 제가 앞서 낸 것은 보신을 먼저 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더러 가지고 계시는지 모릅니다만은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 보리방편문은 육조스님께서 하신 이 법문을 보다 더 문장을 다듬어서 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자색신(於自色身), 그 색신 가운데 있는 천백억화신불(千百億化身佛)에 귀의(歸依)하고, 또는 우리 몸 가운데 마음 가운데 있는 당래 원만보신불(當來圓滿報身佛)에 귀의하고 이렇게 해서 이상삼창(已上三唱)이라. 이렇게 삼신불(三身佛)에 귀의하라는 말씀을 삼신불에 귀의하라는 것을 세번이나 되풀이해서 나를 따라서 하라고 말씀했단 말입니다.

육조스님께서 오직 삼신불에 대해서 그 분이 깊이 느끼고 또 일반 중생들한테 꼭 알으켜 줘야 되겠다는 간절한 마음에서 세 번 씩이나 이 혜능을 따라서 말하라고 했단 말입니다. 그런 것을 여러분들이 깊이 새기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해서 단오자성삼신불(但悟自性三身佛)하면은 다만 우리 자성, 우리 불성, 우리 본래면목의 삼신불을 깨달으면은 즉식자성불(卽識自性佛)이라-곧 바로 우리의 부처님을 다 깨닫는 것이다. 바로 성불하는 것이다. 이런 뜻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육조단경(六祖壇經)의 가장 핵심(核心)은 삼신불(三身佛)에 귀의(歸依)하고, 삼보(三寶)에 귀의(歸依)하고, 또는 사홍서원(四弘誓願)하고 말입니다. 또는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하고 그것입니다.

그것이니까 다르게 모다 북종이 옳니, 또는 남종이 옳니, 돈오가 옳니 점수가 옳니 그런 것은 후인들이 보탰단 말입니다.



* 불리자성불(不離自性佛)


불리자성불(不離自性佛)이라. 오소설법(吾所說法)-내가 말하는 법은 내가 말한바 법은 이것은 불리자성(不離自性)이라. 그 자성(自性) 이것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바로 진여불성(眞如佛性)을 말합니다. 진여불성을 떠나지 않는단 말입니다.

육조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말한 법은 모두가 다 불성을 떠나지 않는단 말입니다. 불성을 떠나면 그때는 하나의 상(相)에 지나지 않는단 말입니다.

불성을 떠나지 않는 것이니 이체설법(離體說法)은-이 부처라 하는 자성을 떠나서 설법하는 것은 명위상설(名爲相說)이라-이것은 상에 떨어지는 그런 말이란 말입니다.

자성상미(自性相迷)하면은-자성이 스스로 미혹돼서, 우리가 상(相)에 떨어지는 것은 결국은 자성이 스스로 미혹된단 말입니다.

수지(須知)-모름지기, 일체만법(一切萬法)이 개종자성기용(皆從自性起用)이요-일체만법이 모두가 다 자성, 불성에서 일어나는 것이란 말입니다.

금강경(金剛經)에서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이란 말씀이 여러분들은 다 대체로 금강경을 많이 보셨으니까 아시겠지요.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도 무소주(無所住)의 자리-머무름이 없는 자리, 집착이 없는 자리에서 마음을 내라는 것입니다. 생각을 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말이나 또는 개종자성기용(皆從自性起用)이라-자성에, 불성에 좇아서 용(用)을 내라는 말이나 뜻은 똑같습니다.

우리가 언제나 누구한테 얘기할 때나 자기가 뭔 생각할 때나 ‘아, 내 본래 성품은 모두다 불성인데 불성에서 보면 이것이 어떨 것인가? 모두를 다 불성에 비추어서 생각하고 불성에 비춰서 생각한다는 것은 자타를 구분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불성에 비추어서 행동한다는 것은 자기와 남을 둘로 안보기 때문에 자기가 편하기 위해서 남을 함부로 부린다거나, 자기가 어른만 될라하고 남은 자기 꼭 밑에 사람으로 해서 쓸라한다거나 이런 것은 모두가 다 부처님의 체(體)에서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시 이것은 평등무차별(平等無差別)의 성품(性稟)에다가 우리 마음을 딱 두고서 용(用)을 행동을 일으켜야 한단 말입니다.

시(是) 이렇게 하는 것이 결국은 참다운 진(眞), 참다운 진계정혜법(眞戒定慧法)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계율(戒律)을 지키고 선정(禪定)을 닦고 또는 지혜(智慧)를 닦고 하는 것도 모두가 다 그 본체(本體)에다가 우리 마음을 두고 해야 참다운 계율이 되는 것이고 본체에다가 마음을 두고 우리 마음을 고요히 해야 참다운 참선(參禪)이 되는 것이고 본체에다가 우리 마음을 두고 우리가 말을 하고 또는 무슨 말을 하고 해야 그래야 참다운 지혜가 된다는 것입니다.

청오게왈(聽吾偈曰)-내가 지금 그 게송을 읊으니 여러분들은 들으시오.

심지무비자성계(心地無非自性戒)라-마음 바닥, 마음 바탕, 불성에는 원래 그릇됨이 없으니 이것이 자성의 계요.

심지무치자성혜(心地無痴自性慧)라-우리 마음 바탕, 마음의 불성에는 원래 어리석음이 없으니 이것이 바로 자성의 지혜요.

심지무란자성정(心地無亂自性定)이라-마음 바탕에는 산란 스러운 것이 없으니 이것이 바로 자성의 선정이라.

부증불감 신금강(不增不減 身金剛)이래서-더함도 없고 덜함도 없고 그렇게 하는 것이 이것이 이렇게 해서 우주에 언제나 과거 미래 현재에 있어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변함이 없는 이것이 바로 금강(金剛)이고, 

또는 신거신래본삼매(身去身來本三昧)라-이렇게 공부한다고 생각할 때는 몸이 가나오나 모두가 다 참다운 삼매(三昧)를 떠나지 않는다.

이것은 단경의 참회품(懺悔品)에 가 있습니다.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


그 다음입니다. 이것은 육조단경 제10 부촉품(付囑品)에 가 있습니다. 단경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돈황본, 종보본, 덕이본, 또는 대승본 모다 그렇게 있으나 여기는 종보본, 덕이본에 있는 것을 옮겼습니다.

대체로 지금 일반적으로 유포가 된 것은 정리가 잘 돼 있어서 종보본, 덕이본을 많이 합니다. 돈황본은 내용은 제일 오래 됐다고 말은 하지만은 잘 정리가 안 돼 있어 가지고서 질서가 별로 없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적어도 정리가 된 것은 가사 몇 절, 몇 절해서 정리가 되고 한 것은 종보본, 덕이본 이것이 후대에 전부 나왔기 때문에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10세기경에 나왔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정리가 잘 돼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경이나 부촉품은 그 경의 결론(結論)과 같은 이것은 하나의 품장 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가장 핵심적은 것을 즉 말하자면 아주 간략하게 내놓은 것이 부촉품이 되겠지요. 후인들한테 꼭 이것만은 여러분들이 명심해야 된다고 그런 것이 즉 말하자면 부촉품입니다.

 여등 약욕성취종지(汝等 若欲成就種智 )인데-그대들이 만약 부처님의 일체종지(一切種智), 부처님의 그냥 뭣을 좀 알듯 말듯한 그런 것이 아니라 체용성상(體用性相)이라. 모든 것을 본체나 또는 현상이나 일체 모두를 다 알 수 있는 지혜가 일체종지입니다.

그대들이 만약 부처님의 일체종지를 성취할려고 하면은 수달 일상삼매와 일행삼매(須達一相三昧 一行三昧)라-모름지기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를 닥을 지니라.

여기 외에도 먼저 정혜품(定慧品)이나 좌선품(坐禪品)에서 보면은 앞서 제가 말씀드린바 일행삼매(一行三昧)란 말씀이 다섯 군데나 있단 말입니다. 여기 저기 합해서 여섯 군데나 있습니다. 그와 같이 일행삼매(一行三昧)를 얼마만치 역설(力說)했는가 알 수가 있습니다.

아까 도신스님 때 법문에도 일행삼매(一行三昧)를 말씀을 드렸지요. 일행삼매(一行三昧)는 무엇인가? 이것은 우리 본체(本體), 우리 본래 생명자리에다가 마음을 딱 두고서 그 자리를 행주좌와(行住坐臥)에 놓치지 않고서 공부하는 것이 일행삼매(一行三昧)란 말입니다. 따라서 그대들이 만약 부처님의 일체종지를 알려고 하면은 모름지기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를 닥을 지니라.

약어일체처 행주좌와(若於一切處 行住坐臥)에 만약 모든 일체처(一切處)에 있어서 부주상(不住相)하고-상에 머물지 않고, 어피상중(於彼相中)-비록 상중에 있다하더라도 현상적인 문제에 관해서 분별한다 하더라도 불생증애(不生憎愛)라-미워하거나 사랑하는 마음을 내지 않고 불취상모(不取相貌)라. 역무취사(亦無取捨)라-취하고 버리지도 않고, 사실은 따지고 보면은 모두가 다 진여불성(眞如佛性)인지라 버릴 것도 취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품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에는,

불념이익 성괴등사(不念利益 成壞等事)라-무엇이 이익 되고, 무엇이 성취가 되고 또는 이루어지고 파괴가 되고 이런 세간적인 분별망상은 하지 말고, 안한염정(安閑恬靜)이라-마음이 편안하니 항시 고요하단 말입니다.

마음이 편안하니 고요할라면은 우리 마음을 불심(佛心)에다가 안주를 해야 거기에 머물게 해야 그래야 마음도 편안하고 동요가 없습니다.

그래 허융담박(虛融澹泊)이라-마음이 아주 허공같이 맑아가지고서 조금도 어떤 어그러짐이 없고 말입니다. 어그러짐이 없고 다른 어떤 복잡한 자질구레한 생각이 조금도 없단 말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일상삼매(一相三昧)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상을 내지 말고 그래야 되겠지만 어느 가운데 서운할 때는 또 너요 나요 상을 낼 수가 있겠지요. 상을 낸다 하드라도 밉고 사랑하는 마음을 내질 말라. 또는 취하고 걸리지도 말고 또는 뭣이 이익 된다. 또는 뭣이 파괴된다. 나한테 손해가 있다하는 그 공리적(公利的)인 생각, 그런 공리적(公利的)인 생각을 내지 말고서 말입니다. 다 그래가지고서 마음을 편안하니 그야말로 허공같이 담박이 돼야 이른바 일상삼매(一相三昧)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은 우주가 모두가 다 하나의 불성이다. 이렇게 돼야 일상삼매(一相三昧)가 됩니다.

약어일체처 행주좌와(若於一切處 行住坐臥)에-만약 모든 일체처(一切處)에 어느 곳에나 행하고 또는 우리가 머물고 앉고 눕고 그렇게 하는데 있어서라도 순일직심(純一直心)이라-부처님을 지향하는 그 순수한 곧은 마음이 부동도량(不動道場)이라-우리 마음을,

이 도장(道場) 이것은 도량(道場), 도장(道場) 이러는 것인데 이것은 공부하는 장소란 말도 있고 우리 마음의 본체(本體)란 말도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순일한 그 마음이 우리 마음의 본체를 떠나지 않으면 우리 마음의 곳집을 떠나지 않으면은 우리 심장을 떠나지 않으면은 즉성정토라. 바로 극락세계를 이룩한단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때는 차명일행삼매(此名一行三昧)라. 이렇게 돼야 이른바 일행삼매(一行三昧)란 말입니다.

아까도 말씀마따나 우리가 어느 것이나 모두가 다 하나의 진여불성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미웁고 사랑하고 또는 취(取)하지도 버리지도 않고 이렇게 해서 우리 마음이 허공같이 고요하고 담박하게 되는 것이 일상삼매(一相三昧)고, 이것은 모두가 다 진여불성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고 우리가 행주좌와에 앉으고 서고 또는 눕고 하는 이런데 있어서라도 순일한 순수한 마음이, 곧은 마음이 우리 마음을 떠나지 않으면 바로 극락세계 정토를 이룬단 말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일행삼매란 말입니다.

약인구이삼매(若人具二三昧)라-만일 사람이 이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갖춘다고 생각할 때에는 여지유종(如地有種)이라-마치 땅에다가 종자를 뿌려서 오랜동안 그 종자를 머금고서 이것이 성숙기실(成熟其實)이라-그래서 나중에는 드디어 열매를 맺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상일행(一相一行)도 역부여시(亦復如是)라.

이와 같이 우리 마음에다가 부처님을 두고 오로지 생각하고 우리 마음을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로 해서 우리가 수행한다고 생각할 때는 마치 땅에다가 종자를 묻음과 같이 오래오래 이렇게 공부를 한다고 생각할 때는 마치 그런 열매를 맺어서 그야말로 훌륭한 성취를 할 수 있다는 그런 뜻입니다.

아금설법(我今說法)은 유여시우(猶如時雨)라-내가 지금 하는 설법은 마치 비가 내려서 모든 대지를 다 촉촉하니 적신단 말입니다.

그래서 여등(汝等), 그대들이 불성은 마치 종자에 비길 수가 있는 것인데 마치 종자가 비를 만나서 촉촉하니 거기에 적셔가지고 수분을 흡수해 가지고서 그래가지고서 싹이 터 나오듯이,

승오지자(承吾旨者)는-내 뜻을, 내 뜻을 받든 자는 결획보리(決獲菩提)라-결정코 보리, 참다운 반야의 지혜를 얻을 수가 있고,

의오행자(依吾行者)는-내 뜻에 따라서 나의 뜻에 따라서 수행하는 자는 결정코 정증묘과(定證妙果)라-결정코 묘과라, 성불이라 하는 대각을 성취할 수가 있도다. 하는 뜻입니다.

이것으로 해서 대체로 여기에 복사본에 적혀 있는 것은 말씀을 다 마쳤습니다.


<결어>

제가 허두에서도 말씀을 하고 중간에서도 누누이 말씀을 했습니다만은 우리는 지금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얽히고설킨 정보 가운데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이것은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종교만 가지고도 얼마나 종교 수가 많습니까? 기독교가 20억, 이슬람이 13억, 또는 힌두교가 한 7억쯤 된다고 합니다. 불교는 한 3억쯤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른 가르침으로 해서는 이 정보의, 혼란한 정보를 가닥을 취해서 맑힐 수가 없단 말입니다. 어째서 그런고 하면은 철학적으로 본다 하드라도 적어도 우리 본체론적(本體論的)인 존재론적(存在論的)인 문제를 다른 종교는 제대로 밝히지를 못해 있습니다. 상징적으로 종교적인 신학적으로는 말했다 하드라도 적어도 철학적인 체계로 본체론적인 문제를 다른 것은 밝히지를 못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 그래서 본체론이 다른 종교에 안 들어있다는 말은 절대로 아닙니다. 다만 그런 것이 그 당시 필요가 없기 때문에 밝히지를 못하고 체계를 안 세웠다는 그 뿐입니다.

허나 부처님께서는 왕자로 태어나셔서 49년 설법이라. 왕자한테나 그 당시 학자한테나 누구한테나 말씀한 그런 법문이기 때문에 그러기 때문에 갖추갖추 체계가 돼 있고 그 뒤에도 용수보살(龍樹菩薩), 제바보살(提婆菩薩), 또는 바수반두세친보살(婆藪槃豆世親菩薩) 달마대사(達磨大師) 5조 홍인대사(弘忍大師) 4조 도신대사(道信大師), 육조 혜능대사(慧能大師) 그 뒤에도 많은 도인들로 해서 더 체계가 더욱더 부연설명이 됐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본체론(本體論)과 또 방법론(方法論)이 그야말로 아주 굉장히 체계가 상밀(詳密)합니다. 어느 철학도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과학적인 문제, 철학적인 문제, 또는 신학적인 문제 거기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도 특히 달마 때부터 육조혜능 때까지 한 법문은 바로 핵심가운데 핵심이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순선(純禪)이란 말입니다. 순선(純禪)은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분열이 안 된, 불조(佛祖)가, 부처님과 조사가 정다웁게 하신 법문 그대로란 말입니다. 저도 그대로 제가 옮겼습니다.

이 법문은 20세기에 있어서 문화의 혼란을 충분히 맑히고 우리 인간의 참다운 행복인 성불을 충분히 성취할 수가 있는 것이고 동시에 세계의 진정한 화해와 평화를 성취해 주는 가장 수승한 법문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순선법회(純禪法會)를 우리가 마련했습니다.

우리 불자님들께서는 참고로 하시고서 어느 때 공부하시던지 간에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냥 도인이 긴가 아닌가 말입니다. 적어도 몇천년 동안, 또는 몇백년 동안 무수한 성자가 다 그대로 검증을 해야 되는 것인데 검증을 않고 이 시대에 와서 훌륭한 스님이다. 어느 문중에서 도인으로 내세우면 도인이 된다. 그런 정도로 해서는 우리가 훤히 믿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어떻든 간에 우리 한국만 두고 본다하더라도 원효(元曉), 의상(義湘) 또는 대각국사(大覺國師), 보조국사(普照國師), 태고보우(太古普愚)선사, 나옹혜근(懶翁惠勤)선사, 또는 이조(李朝) 초기에는 기화득통(己和得通)선사, 서산대사(西山大師), 사명대사(四溟大師), 또는 편양언기(鞭羊彦機)선사 말입니다. 또는 설파대사(雪波大師), 초의선사(草衣禪師) 이 분들 말씀은 모두가 다 맥락이 보면은 거의 똑같습니다.

어떤 맥락이 같다는 말인가? 이것은 선(禪)과 교(敎)가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염불(念佛)과 참선(參禪)도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한국만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중국도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달마 때부터 육조 때까지는 제가 법문으로 해서 소개를 해드렸으니까 즉 말할 것도 없고 그 뒤에도 화두선법(話頭禪法)이 선문에서 참선이 임제종 일파가 될 때도 역시 그 때에도 원(元)나라 때 중봉명본(中峰明本) 스님, 원나라 중봉명본 스님은 화두를 참구하는 임제파(臨濟派)입니다. 임제파인데 중봉명본 스님은 원나라 때 원나라 불교를 주름잡은 분이란 말입니다. 중봉명본이라, 이 분도 역시 염불(念佛)과 선(禪)이 둘이 아니고 교(敎)와 선(禪)이 둘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또는 원(元)나라 다음에는 중국의 명(明)나라 아닙니까. 명나라 때는 4대 고승이라, 4대 고승(高僧)이 선관책진(禪關策進)을 저술한 운주서굉(雲棲袾宏;1532~1612)이란 말입니다. 또는 자백진가(紫栢眞可;1534~1603)라, 지욱우익(智旭藕益;1506~1655)이라. 또는 감산덕청(憨山德淸;1546~1623)이라. 이 분이 명나라 때 4대 고승입니다. 명나라 불교를 이룬 분들이 대표하는 분들입니다. 이 분들이 모두가 다 선(禪)과 교(敎)가 둘이 아니고 선(禪)과 염불(念佛)과 둘이 아니라고 했단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역사적으로 꼭 고찰을 해서 우리의 인생을 낭비를 안해야 됩니다. 부처님 가르침 정통(正統)만 믿고도 우리 인생은 너무나 짧습니다. 너무 시간이 없습니다.

자기 평생 동안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만 외도 우리 인생은 너무나 짧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우리 소중한 생명을 낭비를 말으시고 불법을 만났을 때에 불법의 정법을 우리가 만났을 때에 꼭 금생에 위없는 도를 성취 하셔서 무량한 중생을 제도하시기를 간절히 빌어 마지않습니다.


나무석가모니불(南無釋迦牟尼佛)

나무석가모니불(南無釋迦牟尼佛)

나무시아본사석가모니불(南無是我本師釋迦牟尼佛)



19981115-성륜사 대웅전-순선안심법회-청화큰스님 설법

19981115-촬영자 미확인

19990729-‘순선인심법문’ 소책자로 출간-성륜사

20050911-DVD 작업-본정 김영동

20080715-재정리-주안 한동일



* 본 법문은 동영상 자막용으로 큰스님 말씀 그대로 받아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