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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4. 금강륜

제71호 순선안심법문(純禪安心法門)-01

                             <제 71 호>

*19981115-성륜사대웅전-순선안심법회-01*


순선안심법문(純禪安心法門)-01


우리 불자님들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바야흐로 고도 정보화시대(情報化時代)입니다. 정보화 시대는 바로 문화시대(文化時代)입니다. 문화시대란 것은 모두가 다양화(多樣化) 되고 복잡다기(複雜多岐)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다양화를 종합시킬 수 있는 통합(統合)시킬 수 있는 그러한 지혜(智慧)가 꼭 필요합니다. 이런 지혜는 부처님의 반야지혜(般若智慧), 부처님의 반야지혜를 떠나서는 모든 다양화를 통일(統一)시키고 또는 통합 지향(指向) 시킬 수 있는 그런 지혜는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이 자리에는 여러 대덕 스님들 그리고 철학(哲學)이나 종교(宗敎)나 그런 분야에서 훌륭한 견해(見解)를 가지고 계시는 석학(碩學)들도 많이 계십니다. 대단히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우리가 불교(佛敎)를 믿는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굉장히 아주 지극한 긍지(肯志)를 느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이 오랜 동안 역사적(歷史的)인 시련(試鍊)을 거쳐 오면서 왜곡(歪曲)이 많이 돼있고 특히 우리 한국(韓國)사회에서는 여러분들께서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고려(高麗)때에 한동안 중국(中國)과 문화교류(文化交流)가 돼서 그래서 그 당시에 임제종(臨濟宗)계통에서 비록 불법(佛法)이 들어오고 그 뒤에는 이조(李朝)때 가서는 불법 교류가 안됐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고려 때 임제종 계통에서 들어온 법으로 해서 이조 5백년 동안 굳어 버렸단 말입니다.

참신한 발전을 못 봤습니다. 그렇다고 생각될 때에 지금 현행된 우리 한국불교(韓國佛敎)는 상당히 문제점을 많이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을 감안해 볼 때도 그렇고 또 세계종교(世界宗敎)가 여러분들도 아시는 바와 같이 지금 어떻든 간에 일본불교(日本佛敎)가 교학(敎學)적으로는 굉장히 발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불교 서적(書籍)도 대체로 귀중한 문헌(文獻)들이 일본 사람들 것을 우리가 번역(飜譯)도 하고 또는 재편집도 하고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남방불교(南方佛敎)는 다 아시는 바와 같이 근본불교(根本佛敎), 이른바 소승불교(小乘佛敎)권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근본불교는 부처님의 금구직설(金口直說)로 해서 불설(佛說)로는 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 당시에 근기가 낮은 중생(衆生)들한테 하는 법문(法門)이기 때문에 현대(現代)와 같이 복잡한 현대문화(現代文化)를 수용(受用)할 수 있는 그런 힘은 조금 미흡합니다.

따라서 그 뒤에 발전된 대승불교(大乘佛敎), 물론 근본불교 속에서 대승불교가 다 사실은 잠재적(潛在的)으로는 포함되어 있습니다만은 아무튼 소승(小乘), 대승(大乘)을 다 망라한 불교가 아니고서는 현대의 정보화 시대에 적응하기가 곤란스럽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 오늘 이 순선법회(純禪法會), 순선법회에서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지도 부처님의 순수(純粹)한 뜻이 나변(那邊)이 무엇인가(어디에 있는가)? 특히 순선(純禪)이니까 순수한 선이란 뜻이겠지요?

순수한 선이란 뜻은 이것은 달마(達磨) 때부터 육조혜능(六祖慧能)스님까지, 사실은 달마 이전이라든가 또는 이후라든가 선종(禪宗)이라 하는 그런 종파(宗派)는 그 당시는 없었습니다. 선종이라는 종파로 해서 분립된 것은 북송 때 이후 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순선(純禪) 이것은 주로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달마 때부터 육조혜능스님까지 보통 다 달마스님을 가리켜서 선종의 할애비라고 하지 않습니까? 한데 달마 때부터 육조혜능스님까지는 어떻게 참선(參禪)을 했든가? 이런 것을 우리가 회고해 보는 것이 굉장히 필요하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정법(正法)이 나변(那邊) 어디에 있는 것인가? 이런 문제를 우리가 참구(參究)하는 것은 우리 불자들에서 꼭 놓쳐서는 안 되리라고 생각이 되기 때문에 순선법회(純禪法會)라고 명명을 했습니다.


빨리 진행을 한다 하드라도 거의 한 두 시간쯤이 걸립니다. 그래서 제가 법문 말씀은 나중에 시간이 더 있으면은 하기로 하고 그냥 진행하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렇게 순선법회, 횡선(橫線)으로 이것을 먼저 보십시오. 제가 시간이 부족해서 검토를 잘 못하고 아주  충분한 계획도 못 세워서 그때그때 그냥 난필(亂筆)로 써놔서 대단히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은 보더라도 중요한 부분을 이렇게 해서 하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삼신일불(三身一佛)

 

 


일 페이지를 먼저 열어 주십시오. 일 페이지에 삼신일불(三身一佛)이란 제목이 있습니다. 대승불법(大乘佛法)이 아니면은 삼신일불(三身一佛)이란 그러한 말은 없습니다. 사실은 부처님의 정통조사(正統祖師), 정통조사 가운데도 제12대 조사, 제12대 조사가 마명대사(馬鳴大師)인데, 마명대사는 굉장히 위대한 분입니다.

대체로 정통조사는 육조혜능스님 때까지 33조사인데 이 분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온전히 깨닫고 온전히 다 일반 중생들한테 가르친 그런 어른들입니다.

그런데 특히 12대조사 마명대사(馬鳴大師), 마명대사는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이라, 대승기신론이란 책을 저술을 했습니다. 그 책은 그 책 제목 그대로 대승의 신앙심(信仰心)을 일으키는 하나의 가르침이란 말입니다. 굉장히 중요합니다.

가령 부처님의 일대시교(一代時敎), 일대시교라든가 부처님의 전기(傳記)라든가 이것도 역시 마명대사께서 하신 것을 지금 다 표준으로 하고 있습니다.

마명대사는 굶주린 말들한테 말이 제일 좋아하는 먹이를 주고 동시에 마명대사가 부처님 법문(法門)을 설(說)하고 그렇게 할 때에 그 말이 자기 먹이를 먹지 않고서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그 법문을 들었다는 그런 걸로 해서 마명대사라고 하는 것이고, 또는 그 당시에 나라 안에 있는 여러 가지 작은 나라들 그런 나라들의 왕자가 마명대사의 설법(說法)을 듣고서 500왕자가 한꺼번에 출가(出家)를 했다는 그런 일화도 있고 합니다. 그렇게 위대한 분입니다.

아무튼 대승불교(大乘佛敎)의 시초(始初)체계가 마명(馬鳴)대사로 부터서 비롯됐습니다. 그 뒤에 14대 조사가 용수(龍樹)보살, 15대가 제바(提婆)보살, 또는 21대 조사가 바수반두(婆修盤頭) 세친(世親)보살, 이런 분들로 해서 대승불교가 굳건히 체계를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삼신일불(三身一佛) 사상은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대승불법에만 있는 불교의 가장 근원적인 신조(信條)입니다. 삼신일불(三身一佛) 일체삼신자성불(一體三身自性佛)이라. 삼신일불이라는 말 그대로 이것은 원래 세 몸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한 분이 부처님인데 부처님한테 갖추고 있는 공덕(功德)상이 무량무변(無量無邊)하기 때문에 그래서 삼차원(三次元)으로 구분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일체삼신자성불(一體三身自性佛), 자성불이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면은 그 부처가 우리 마음 밖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성(自性), 우리 인간성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불교를 공부할 적에 꼭 인간성의 본래면목과 또는 부처님과 둘이 아니라는 이른바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이런 도리를 항시 명념(銘念)을 하시고서 부처님 공부를 하셔야 됩니다.

가령 부처님 몸의 삼신(三身)은 논장(論藏)에 다 비유가 있는 것입니다만은 비유를 이렇게 합니다. 가령 달이 있다고 생각할 때는 달의 전체, 달의 전체는 법신(法身)에 해당하고, 삼신이라는 것은 법신(法身) ․ 보신(報身) ․ 화신(化身)인데, 법신 ․ 보신 ․ 화신은 어떠한 것인가?

이런 것을 여러 가지로 역대 훌륭한 분들이 논쟁도 많이 했어요. 해서 구구(區區)합니다만은 가장 쉽고도 적합한 그런 비유가 무엇인고 하면은 이 삼신에 대해서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법신은 하나의 달로 비기면은 달 전체에 해당하고 보신은 달빛에 해당하고 화신은 달그림자에 해당합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서 말씀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마음, 마음 심(心)자가 삼신 앞에 있습니다. 그래 마음 심(心)자가 있고, 또 삼신불 저 옆에 쪽에 가서 부처란 불(佛)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마음이나 부처나 온전히 둘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보통은 이런 관계에 대해서 사람들이 상당히 의단(疑端)도 일으킬 수가 있는 것이고 또 스스로 납득을 잘 못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 더 제가 설명을 드립니다만은 우리 마음은 분명히 있기는 있지 않습니까?

데카르트가 말한 바와 같이 ‘나는 생각하니까 나는 존재(存在)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지금 사유(思惟)하고 생각하니까 분명히 마음은 있단 말입니다. 그러나 마음은 아무리 찾을래도 모양은 자취가 없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의 8만4천 법문(法門) 모두가 다 마음을 밝히는 가르침입니다. 마음을 어떻게 밝힐 것인가? 그래서 온전히 우리가 본래 마음자리로 돌아가는 그런 가르침입니다.

헌데 마음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있기는 분명히 있지만은 마음이 자취가 없어서 이른바 불교(佛敎)말로 하면 상(相)이 없어서 우리가 어떻게 잡을 수도 없단 말입니다. 또 느낄 수도 없습니다.

모양도 없고 모양이 없기 때문에 이름도 없습니다. 그 부처가 무엇인가?

우리가 소승불교(小乘佛敎)에서는 근본불교(根本佛敎)나 소승불교는 부처 그러면은 아, 석가모니 부처님이 부처가 아닌가? 이렇게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대승불법(大乘佛法)은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이 나오시고 안 나오시고 상관없이 과거(過去)나 현재(現在)나 미래(未來)나 영원히 존재하는 생명(生命)자체, 인생(人生)과 우주(宇宙)의 모든 존재(存在)의 본질적(本質的)인 생명자체,

불교는 생명이 따로 있고 또는 어떠한 자연(自然)이 따로 있고 이렇게 안봅니다. 자연자체가 바로 하나의 생명(生命)이란 말입니다. 어느 것도 다 생명으로 봅니다.

따라서 부처 이것은 석가모니 부처님 같은 부처님은 역사적인 부처님인지라 그 당시 계신 분들은 분명히 다 기억하시겠지요? 그 기억이 있으니까 우리가 그대로 시인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오시고 안나오시고 상관없이 불교(佛敎)말로 무시이래(無始以來)라, 끝도 갓도 없는 과거로부터서 무시무종(無始無終)이라, 끝도 갓도 없는 미래에도 한도 끝도 없는 그런 때에 이르기까지 존재하는 부처님이니까 우리가 알 까닭이 없단 말입니다. 그러한 부처님이 이른바 법신(法身)부처님입니다. 따라서 바꿔서 말씀 드리면은 참 부처님입니다.

석가모니께서도 그러한 영생(永生)부처님을 깨달아서 화신(化身)부처님으로 부처가 되셨습니다. 우리 중생(衆生)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달마(達磨)스님을 거쳐서 육조혜능(六祖慧能)스님까지 삽삼조사(卅三祖師)도 모두가 다 법신(法身)부처님을 깨달으신 분들입니다.

그 외에 다른 도인(道人)들도 마찬가지지만은 부처님 가르침은 심수오묘(深邃奧妙)해서 도인이 되면은 그냥 바로 성불(成佛)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견성오도(見性悟道)해서 법성(法性), 불성(佛性)을 봤다 하드라도 보임수행(保任修行)이라, 오랫동안 습관성(習慣性)을 없애야 한단 말입니다. 우리가 삼매(三昧)에 들어서 견성을 해서 불성을 본 뒤에도 그 자리, 불성에 입각해서 또 닦아야 한단 말입니다. 그래야 무시습기(無始習氣)라. 과거(過去) 무량(無量)세월동안 우리 잠재의식(潛在意識)에다 익혀 내려온 습관성을 고쳐야 한단 말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참다운 부처님 공덕(功德)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견성(見性)만 하신 분들은 분명히 불성은 봤지만은, 불성을 보면 그때는 불성을 봤으니까 견성오도라, 성자(聖者)라고는 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정도로 해서는 부처님한테 우리 불성에 갖추고 있는 무량공덕(無量功德)을 발휘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원래 불성공덕(佛性功德)은 한도 끝도 없는 것인데 간추리면 삼명육통(三明六通)아닙니까? 지금 어느 분들은 삼명육통 하면 ‘아, 그런 것은 말 변사(變詐, 辯士)라, 그런 것은 외도(外道)나 하는 것이다’ 이렇게 간단하게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러면 방불(謗佛)이라, 부처님 법을 비방(誹謗)하는 그런 허물을 범한단 말입니다.

삼명육통 말이 아함경(阿含經)만 보더라도 수십 군데가 있는 것인데 그런 말이 다 거짓말이 되겠지요? 그러니까 이제 그런 말을 들으면 그때는 부처님을 비방한단 말입니다.

그 부처님의 법신불(法身佛)도 역시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분명히 위대한 성인(聖人)들이 말씀을 다 했으니까 분명히 존재한단 말입니다.

우리 믿음이란 것은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누구나가 경험을 하는 것이지만은 눈에 안 보이는 세계, 이른바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세계(世界)란 말입니다.

불교(佛敎)를 경험적(經驗的)인 차원(次元)에서만 생각하면 불법(佛法)이 못됩니다. 영생불멸(永生不滅)한 형이상학적인 문제가 거기에 들어가야 참다운 불법이 된단 말입니다. 근원적(根源的)인 문제는 다 그렇습니다. 현상적(現象的)인 상(相)은 이것은 상대유한적(相對有限的)인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경험적(經驗的)이지만은 이 절대적(絶對的)인 문제, 경험적인 것의 본질적(本質的)인 문제, 이런 문제는 물질(物質)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중생이 알 수가 없단 말입니다. 이른바 성품(性品)이라는 것은 알 수가 없습니다.

종밀선사(宗密禪師)라든가 또는 보조국사(普照國師)라든가 그런 분들께서 아, 대승신앙(大乘信仰)은 체용성상(體用性相)이라, 체용성상을 제대로 알아야 대승신앙이 된다. 이런 말씀을 했고, 화엄경(華嚴經)이나 또는 법화경(法華經)이나 그런데도 그런 원리로 해서 말씀을 많이 했습니다.

체용성상은 무엇인가? 이런 문제가 중요한 문제기 때문에 제가 조금 더 부연(敷衍)설명을 해드립니다만은 그 우주(宇宙)의 본체(本體), 본체가 이른바 몸 체(體)자, 체(體)란 말입니다. 형이상학적인 생명의 본바탕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현상적인 상(相)적 세계, 상대유한세계(相對有限世界)가 체(體)에 대립한, 체에 대비(對比)하는 이것이 하나의 상(相)입니다. 그래서 우리 불법 공부는 상을 떠나서 본체로 돌아가는 공부란 말입니다.

그리고 성상(性相)이라. 그 본체 체가 바로 모든 존재의 성품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이른바 생명적으로 생각할 때는 성품이라고 본체를 그렇게 말하지요. 체용성상이라, 상은 또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체와 용 할 때에 체를 말할 때는 체와 용을 그렇게 말하는 것이고 성품을 본질로 말할 때는 상으로 해서 성상 그럽니다.

그래서 현대 철학적(哲學的)인 술어(述語)로 말하면은 절대(絶對)와 상대(相對), 절대와 상대 말입니다. 또는 이(理)와 기(氣), 이(理)와 기(氣) 이런 것이 즉 말하자면 불교말로해서 체(體)와, 용(用)과, 성(性)과, 상(相)과 이렇게 대비해서 얘기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법신불(法身佛)이라는 것은 하나의 본체(本體), 본체나 우주의 성품이기 때문에 우리가 경험 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다만 깨달은 우리가 선(禪)닦는 걸로 해서 선승(禪僧)들로 해서 그분들 가르침을 우리가 믿고 따른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떠한 것이나 불교 신앙은 모두가 다 우리가 느끼지 않은 분야, 생명의 본바탕을 우리가 먼저 믿어야 한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신시보장제일법(信是寶藏第一法)이라, 믿음이라는 것은 보배 가운데 제일법이란 말입니다. 믿음이 없으면은 그때는 신앙(信仰)이 못됩니다. 우리 경험하지 않는 세계를 우리가 우선 믿어야 쓰니까 말입니다.

그 믿음 가운데도 부처님을 우리 마음 밖에다 설정할 때는 이것은 방편적인 믿음이란 말입니다. 참다운 믿음이 못됩니다. 내 마음의 본성이 바로 부처고 우주 만유의 모든 존재의 근본적인 본 생명의 바탕, 그 자리가 바로 부처다. 이렇게 믿어야 그래야 대승적(大乘的)인 믿음이 됩니다.

그래서 법신(法身)은 더 구체화 시키면은 청정법신비로자나불(淸淨法身毘盧遮那佛)이라. 청정법신비로자나불이라, 조금도 번뇌(煩惱)의 때가 없는 청정(淸淨)한 하나의 진리(眞理)의 몸, 법신이라는 것은 법(法)은 이것은 진리라는 뜻입니다. 청정한 진리의 몸이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라.

비로자나불이란 이것은 인도의 범음(梵音)인데 어떠한 뜻 인고 하면은 광명변조(光明遍照)라. 광명변조(光明遍照)라, 광명이 우주에 끝도 갓도 없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다시 더 쉽게 풀이하면은 청정하고 조금도 번뇌의 때가 없는 진리의 몸이 우주에 끝도 갓도 없이 무량무변(無量無邊)하게 광명으로 충만 돼 있는 부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달로 비유하면 달 전체에 해당하고 말입니다. 해당하고, 그 다음에 보신(報身)은 뭣인고 하면은 법신(法身)속에 들어있는 모든 성품(性品)의 공덕(功德)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원만보신노사나불(圓滿報身盧舍那佛)이라, 지혜(智慧)나 자비(慈悲)나 능력(能力)이나 행복(幸福)이나 어떠한 것이나 원만구족해서 이것도 역시 끝도 갓도 없이 충만해 있는 조금도 흠절(欠節)이 없는 부처님, 그런 부처님이란 뜻이 원만보신노사나불(圓滿報身盧舍那佛)입니다.

그 다음은 화신(化身)이라, 화신은 법신(法身)과 보신(報身)을 근거로 해서 이루어지는 모양을 현상계(現象界)에 나투는 그런 몸이 이것이 화신인데 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님을 위시해서, 소승불교(小乘佛敎)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만 화신이다. 이렇습니다. 그러나 대승불법(大乘佛法)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석가모니 부처님도 화신이지만은 우리 인간(人間)존재 모두가 다 화신이란 말입니다. 인간존재뿐만 아니라 이 자연계(自然界) 모두가 다 화신입니다. 은하계나 태양계나 이 하늘에 있는 무수한 그런 별들이나 모두가 다 화신이고 이 자연 그대로 모두가 다 화신이란 말입니다. 하도 수가 많으니까 우선 수치로 해서 천백억으로 상징적으로 말해서 석가모니불이라, 화신은 이와 같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불교로 생각 할 때는 언제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대승법(大乘法)으로 생각해야 됩니다. 따라서 법신(法身)이나 보신(報身)이나 화신(化身) 모두가 다 마음이란 말입니다. 마음이라는 순수생명(純粹生命)입니다.

법신이나 보신이나 화신이 따로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다 물질(物質)이 아닌 마음이기 때문에 한계(限界)를 우리가 지어서 얘기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물질이 아니란 말입니다. 물질이 아닌 것은 시간성(時間性)도 공간성(空間性)도 없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법신이나 보신이나 화신도 그 공덕, 공덕(功德)의 성품(性品)에 대해서 잠시간 우리 중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구분한 것이지 본래 세 몸이 뿔뿔이 따로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삼신일불(三身一佛)인 것입니다.

마음과 부처님은 온전히 하나입니다. 다만 우리 개인적인 마음은 이것은 우리 중생심(衆生心)이라, 중생심 이것은 본래의 마음이 아닙니다. 우주가 모두가 다 진여실상(眞如實相)뿐인데 진여실상을 우리가 제대로 보지 못함으로 해서 나라는 아(我)를 느끼고 너라는 하나의 상(相)을 느끼고 말입니다. 일체존재(一切存在)에 관해서 상대유한적(相對有限的)인 현상적(現象的)인 분별시비(分別是非)를 느낀단 말입니다. 이해(理解)하고 분별(分別)하고 그런 것이 우리가 쓰는 마음이라, 이른바 중생심(衆生心)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은 이것은 본래의 마음이 아닙니다. 비록 중생심이라 하더라도 우리 본래 마음은 조금도 더럽혀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아, 과거전생(過去前生)도 내가 나쁜 짓도 분명히 많이 했을 것이고 금생(今生)에 나와서 나라는 존재(存在), 나라는 그런 관념(觀念) 때문에 나한테 좋게 하면은 탐심(貪心), 나한테 싫은 것은 진심(嗔心), 속인(俗人)들은 누구나가 다 그렇습니다. 자기 기분이 나쁘면은 그냥 벌컥 하니 또 화를 내고 말입니다. 금방 자기마음 내키는 얘기하면 그때는 또 그냥 풀리고 합니다.

이런 것은 이런 마음은 자기 참 마음이 아니고 또 이렇게 설사 살았다 하더라도 그런 것은 사실은 우리 본래 마음자리를 우리 불심(佛心)을 오염(汚染)을 못시킵니다.

살인죄를 범했다 하드라도 그런 사람도 역시 그 사람 마음은 석가모니(釋迦牟尼)마음이나 달마(達磨)스님 마음이나 똑같은 마음입니다. 우리는 이런 한계를 분명히 알으셔야 됩니다. 잘 모르는 분들은 아, 내가 금생에 나와서 별로 배운 것도 없고 잘못 살았으니 내 불심(佛心)까지도 오염(汚染)이 안됐겠는가? 이렇게 비관적(悲觀的)으로 생각하십니다만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불법에서는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간에 진정으로 참회(懺悔)하면은 그냥 아, 순식간에도 소멸(消滅)할 수가 있단 말입니다. 그와 같이 대자유로운, 어느 때나 우리가 성불(成佛)로 비약할 수 있는 그런 것이 부처님의 그야말로 은혜로운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마음과 부처님 이것은 똑같은 우주의 생명인데 불경(佛經)에서 다르게 표현한 것을 보면은 여래(如來)라. 여래라, 진리(眞理)에서 바로 왔다고 여래라. 또는 진여(眞如)라, 영원히 변치 않는 참다운 진리라 그래서 진여라. 법성(法性)이라, 우주의 모든 법도(法道)나 모든 이치(理致)나 그런 것이 본 성품(性品)이란 말입니다. 또는 실상(實相), 우주의 참다운 모습입니다.

우리 중생(衆生)차원에서는 실상을 보지를 못합니다. 성자(聖者)의 밝은 눈, 견성오도(見性悟道)해서 모든 것의 실상을 본, 불성을 본, 불성이나 또는 실상이나 같은 뜻입니다. 불성을 본 그런 눈이라야 비로소 실상을 압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다 가상(假相)이고 망상(妄想)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가상이나 망상을 보고서 허망상 보고서 괜시리 탐심(貪心)을 내고 진심(嗔心)을 낸단 말입니다. 업장(業障)이 무거우면은 그런 정도가 더욱더 심각하겠지요?

그 다음 보리(菩提)라, 참다운 지혜(智慧)란 말입니다. 보리는 참다운 참 지혜 입니다. 참 지혜는 실상의 지혜입니다. 형이상하를, 형이하와 형이상을 모두를 다 통달한 그런 지혜가 보리인 것이지 그냥 이치로 불경을 좀 많이 안다고 그래서 보리는 못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진아(眞我)라, 참다운 나 이것도 역시 불성을 깨달은 나입니다. 대아(大我)라, 진아나 똑같은 뜻입니다. 우주내의 어느 것도 진아나 대아 가운데 안 들어 있는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은 내 마음은 지금 내 두뇌에나 내 심장에가 있을 것인데 어떻게 그럴 것인가? 우리 마음은 모양이 없어놔서 우리 심장에나 우리 뇌세포에 국한돼 있지가 않습니다. 모양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김가 마음이나 박가 마음이나 누구 마음이나 허공(虛空)과 같이 무량무변(無量無邊)해서 우주(宇宙)를 다 감싸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들은 모두가 다 무한히 동심원(同心圓)입니다. 원의 중심과 똑같단 말입니다. 다만 얼마만치 마음이 넓으면 그때는 성자의 마음인지라 끝도 갓도 없이 우주를 다 무변무량히 감싸있는 것이고 말입니다. 조금 더 마음이 덜 넓은 사람들은 그만치 같은 원 가운데도 조금 협소(狹小)하겠지요? 개나 소나 그런 존재의 마음은 그때는 우리 인간보다도 훨썩 더 원의 반경이 더 좁을 거란 말입니다. 일체존재(一切存在)가 모두가 다 동심원입니다.

열반(涅槃)이라, 열반 이것은 모든 번뇌(煩惱)가 다 소멸(消滅)되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번뇌가 소멸됐으니까 그때는 무상(無上)의 위없는 영생의 행복이 돼야 되겠지요? 극락(極樂)이라, 다시 위없는 행복이라 말입니다. 중도(中道)라, 어디에도 안치우친 유(有)나 공(空)을 다 초월한 참다운 진리가 중도입니다. 대각(大覺)이라, 큰 깨달음 또는 묘각(妙覺)이라. 심심미묘(甚深微妙)한 깨달음 또는 일물(一物)이라. 오직 하나의 진리란 말입니다.

불교를 말 할 때는 꼭 오직 하나의 진리. 그 자리를 명심하셔야 됩니다. 이것이 있고 저것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중생(衆生)의 차원에서 상대유한적(相對有限的)인 상(相)으로 보는 것이니까 만물(萬物)이 있는 것이고 무수한 존재의 차이가 있는 것이지 본래성품(本來性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에 본체(本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오직 하나의 진리(眞理)란 말입니다. 일물(一物)이라, 따라서 하나님이라 해도 그때는 무방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독교에서 원래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네들이 총명해서 하나님을 자기들 걸로 지금 만들어 버려서 우리가 혼돈(混沌)을 일으킵니다만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의 진리라는 뜻으로 하나님을 해석하면 좋은데 지금 기독교 일반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거가 문제가 생기는데 기독교 예수님은 불교와 같이 바르게 해석했다고 저는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바이블을 공부를 좀 해 보고 또 기독교 신학(神學)을 공부한 사람들이 부지기 수가 있습니다.

십마물(什魔物)이라. 십마란 것은 이것은 ‘무엇’이란 뜻이어요. 중국(中國)의 하나의 의미인데 ‘무엇’. 우리가 아직 잘 모르는 것이니까 아, ‘그 무엇’ 부처님의 ‘그 무엇’이라고 해도 그때는 우리가 표현을 그렇게도 표현을 할수가 있겠지요. 주인공(主人公)이라, 우리 참다운 생명(生命)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느끼는 김 아무개, 박 아무개 그런 것은 자기 참다운 생명이 못됩니다. 이것은 하나의 가짜란 말입니다.

소크라테스 말마따나 ‘먼저 그대 자신을 알아라’ 우리 중생은 지금 자신을 모르는 것입니다. 금생에 나와서 학교도 다니고 그때그때 자기 경우에 따라 조금 알아서 이것저것 우리 경험을 축적하고 이른바 이론이성(理論理性)의 범주(範疇)내에서 조금 알았다고 해서 우리가 많이 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이런 것은 참다웁게 아는 것도 아닌 것이고 또 이런 걸로 해서는 주인공이 못됩니다. 아까 말씀마따나 우리의 참다운 생명 자체, 이른바 견성(見性)해서 불성을 진여불성(眞如佛性)을 우리가 그대로 체험(體驗)해야 그래야 참자기가 된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자(聖者)가 아닌 사람들은 모두가 참자기가 지금 못 돼 있습니다. 가짜 가지고 나라고 생각하고 좋다고 생각하고 슬퍼하고 남 미워하고 사랑한단 말입니다.

삼신일불(三身一佛) 이것은 육조단경(六祖壇經)에도 육조단경은 참선(參禪)의 교과서 같은 것입니다. 물론 육조단경 가운데 문제가 된 대목도 많이 있습니다. 후래인들이 보태고 깎고 했습니다만은 그래도 핵심(核心)은 깎고 보태고를 안했습니다. 가장 핵심이 무엇인고 하면은 삼보(三寶)에 귀의하고 또는 삼신일불에 귀의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사홍서원(四弘誓願)에 귀의하고 반야바라밀(般若波羅密)을 말씀 하시고 말입니다. 그런 대목은 이것은 조금도 가감(加減)이 안됩니다. 이런 대목은 육조단경의 핵심입니다.

그 핵심 가운데 핵심이 삼신일불이란 말입니다. 우리 불교인들의 불타관(佛陀觀), 불타가 무엇인가? 부처가 무엇인가? 부처가 무엇인가를 모르고서 불교를 믿는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조금도 어렵게 생각을 말으십시오. 이것은 우리 불교인들이 꼭 알으셔야 됩니다. 그래야 자기와 부처, 또는 일체만유(一切萬有)와 부처. 그런 것에 대한 관계를 우리가 확실히 확연히 그렇게 해득(解得) 하셔야 참다운 대승적(大乘的)인 신앙(信仰)이 나옵니다.


*삼위일체(三位一體)


그 다음에는 기독교 삼위일체(三位一體)라, 이것도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서기 325년에 니케아공의회 때 비로소 각 주교들이나 콘스탄티노불, 콘스탄티누스 대제, 그 대제가 즉 말하자면 각 주교들을 모여가지고서 하나의 기독교 공의회를 했단 말입니다. 그때에 기독교의 기본적인 신조로 확정한 것이 삼위일체란 말입니다.

3(三)이란 수치란 것이 굉장히 종교(宗敎)나 철학적(哲學的)으로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변증법(辨證法)을 얘기 할 때도 정반합(正反合)이라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헌데 기독교의 정통(正統)신조인데 여기에 구태여 제가 내놓은 것이 무엇인고 하면은 기독교 가르침의 핵심(核心)과 불교(佛敎)가르침의 핵심이 물론 체계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그때는 아, 부처님 가르침에 어림도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기본정신만은 저는 같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중세기(中世紀)의 아우구스티누스라든가, 또는 니콜라우스 쿠잔스라든가 말입니다. 또는 아리우게나, 그런 분들, 그런 분들은 아주 중세 신학자(神學者)로 해서 위대한 분들인데 그런 분들은 대체로 범신론(汎神論)적인 사상을 지녔단 말입니다.

따라서 지금 현행된 기독교 하고 조금 다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분들이 주교가 되고 추기경이 됐으니까 자기들 생전에서는 비판을 못했지만은 죽은 뒤에는 이단(異端)으로 몰렸단 말입니다.

위대한 기독교 신학자는 모두가 다 따지고 보면 결국은 불교하고 비슷한 사상을 가졌단 말입니다. 불교는 철학적으로 말하면 범신론(汎神論)이 됩니다. 일체존재(一切存在)가 바로 신(神)이란 말입니다. 일체가 바로 부처란 말입니다.

그래서 성부(聖父) ․ 성신(聖神) ․ 성자(聖子), 이것이 불교의 법신(法身) ․ 보신(報身) ․ 화신(化身)하고 대비해서 얘기 할 수가 있습니다.

성부 이것은 바로 하느님 아닙니까? 성부(聖父)는 법신불(法身佛)에 비교해서 얘기 할 수가 있고, 성신(聖神)은 바로 성령(聖靈)인데 그 성신에 깃들여 있는 우주에 깃들여 있는 신성한 하나의 영적존재란 말입니다. 따라서 보신(報身)에 대비 할 수가 있고, 또 성자(聖子)는 예수를 성자라고 하는데 이 분들은, 따라서 우리 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님이 화신(化身)이니까 말입니다. 이것도 역시 성자가 부처님의 불교의 화신하고 대비 할 수가 있습니다.

다만 차이가 무엇인고 하면은 소승불교(小乘佛敎)는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화신은 석가모니 부처님뿐이다. 이렇게 생각한단 말입니다. 대승불교(大乘佛敎)에 있어서 비로소 화신은 누구나가 다 본래로 화신이고 일체존재가 다 화신이 아님이 없다. 이러는 것이지, 소승불교는 석가모니 부처님만 화신이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基督敎)의 삼위일체(三位一體)도 역시 성자는 예수뿐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마치 우리 소승불교에서 부처님은 화신은 석가모니 부처님뿐이다 이렇게 하는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가히 우리가 나무랄 것은 없는데 바이블, 허심탄회하게 ‘요한복음서’나 ‘마태복음서’나 그런 것을 본다고 생각 할 때는 그대들은 하늘에 계신 그대들의 아버지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라. 그런 대목이 있고 말입니다. 즉 다시 말씀 드리면은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만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모두가 다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런 대목이 한군데 두군데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다고 생각할 때는 예수 가르침 가운데는 소승적인 분야도 있지만은 또 대승적인 그런 국면도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관용적으로 포섭하는 의미에서 생각할 때는 역시 예수의 본뜻은 예수 자신만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란 말입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이요. 또는 하나님이 자연계(自然界)도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이요. 그렇게 했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생각 할 때는 불교(佛敎)의 삼신일불(三身一佛)하고 기독교(基督敎)의 삼위일체(三位一體)하고 별로 다를 것이 없단 말입니다.

제가 구태여 불교의 삼신일불과 기독교의 삼위일체를 이렇게 내 논 것은 무엇인고 하면은 꼭 이 기독교와 불교가 본래로 같은 것이다. 그런 것을 저는 의미부여를 하기 위해서 내 논 것만은 아닙니다. 제 뜻은 지금 무서운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다양화(多樣化)시대란 말입니다.

기독교 인구가 지금 20억이나 됩니다. 이런 인구를 우리가 우리의 적으로 저건 이단이다. 사탄이다. 이렇게 몰아 붙이면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루어지는 것은 종교전쟁(宗敎戰爭)뿐이란 말입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지금 한국에서만 보더라도 얼마나 대립이 심합니까. 그런데 그런 것이 우리 불교인들이 기독교를 적어도 신약 정도는 보고 4대공관 복음서 정도는 그래도 몇 번이나 보고서 기독교를 비판하면 좋은데 한 번도 안본 사람들이 함부로 비판한단 말입니다. 그건 망언(妄言)입니다.

기독교인들도 반야심경(般若心經) 한편이나 제대로 이해한 사람들이 불교를 비판하면 모르겠지만은 저는 미국가서 제가 봤습니다만은 여호와의 증인, 여호와의 증인 그 사람들이 우리 절까지 들어왔단 말입니다.

아주 원숙한 한 50대 된 보살 미국 사람인 보살하고 아주 어여쁜 아가씨, 자기 딸인가는 모르겠지만은 그 사람하고 또 남자하고 셋이 들어왔단 말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다른 말 전혀 없어요. 그냥 순탄하니 대화(對話)로만 이렇게 나눕니다. 그러다 차근차근 자기들 본색(本色)을 드러낸단 말입니다. 나중에는 여호와의 증인에서 불교를 비판하는 아, 그것도 영어로 한 것이 아니라 한글로 된 불교를 비판한 것을 책을 갖고 왔어요. 그걸보니까 웬만한 불교인들 보다도 불교(佛敎)연구를 좀 더 했단 말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그 중요한 데서는 오류를 범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그네들도 반야심경(般若心經) 한편을 제대로 봤다고 생각할 때는 불교 비판 할 까닭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못하고서 다만 자기들 교리(敎理)하고 어긋나는 대목만 추려가지고서 하니까 그것이 문제가 되지요.

꼭 우리가 남을 비판할 때는 다른 것을 알고 비판해야 비판이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비판도 뭣도 아니라 그때는 단순히 하나의 논쟁거리 밖에는 안 되는 것이고 비방(誹謗)이 됩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제가 이와 같이 삼위일체를 구태여 여기에 내 놓은 것은 예수의 본뜻은 부처님 뜻과 별로 다름이 없다고 제가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고 사실도 그렇게 느꼈습니다.

가령 여기 철학(哲學)을 공부하신 분들은 아시겠습니다만은 에크하르트(Eokhart 1260~1327), 에크하르트는 중세기(中世紀) 독일(獨逸)사회에서 말입니다. 가장 위대한 신비적(神秘的)인 철학자(哲學者)라고 그렇게 말합니다.

사실은 기독교나 불교나 간에 신비적직관(神秘的直觀), 신비적 직관을 무시하면 그때는 우리가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문제는 무시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신비적인 직관은 우리가 꼭 들어가야 됩니다. 불교로 말 하면은 그때는 깊은 삼매(三昧)에 들어가야 한단 말입니다. 깊은 선정(禪定)에 들어가야 됩니다. 그래야 우리의 근본번뇌(根本煩惱)가 녹아진단 말입니다.

가령 우리가 염불(念佛)을 한다 하더라도 염불을 오래도록 하다 보면 그때는 무념(無念)이 됩니다. 주문(呪文)도 마찬가집니다. 화두(話頭)도 오래도록 하다 보면은 나중에는 무념이라, 무념 상태가 돼야 됩니다. 무념이라는 것은 오직 마음이 하나로 통일 돼서 다른 생각이 거기에 끼지를 않는단 말입니다. 무념 상태가 되어야 우리 마음이 온전히 맑습니다. 그래야 자기라 하는 아(我)를 떠난단 말입니다.

무념 상태가 되어서 깊은 삼매에 들어야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나’라 하는 아(我)를 떠나고 또 무슨 법(法)만이 옳다는 꼭 자기 법만 옳다는 도그마(dogma), 이른바 교조주의(敎條主義) 이걸 떠난단 말입니다.

천박한 사람일수록 자기란 아집(我執)이라든가 또는 자기 것만 옳다라든가 그렇게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것은 법(法)의 당체를 못 봐서 그럽니다. 법의 당체란 것은 시비(是非)가 별로 없단 말입니다.

자타시비(自他是非)가 없는 자리기 때문에 법의 당체를 봤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자기라는 아상(我想)도 낼 수도 없고 내 것이라고 집착 할 수도 없는 것이고 또는 다른 것이라고 비방(誹謗) 할 수가 없습니다. 왜그런고 하면은 어떠한 것이나 본 성품(性品)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다 불법(佛法)이란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이런 도리가 굉장히 어려운 도리가 됩니다. 우리 경험적(經驗的)인 세계(世界)가 다르기 때문에, 그러나 현대(現代)란 사회는 제가 말씀드린 그런 도리를 모르고서는 바로 살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 아들이라든가 딸이라든가 그런 사람 가운데도 기독교를 믿고 또는 이슬람교를 믿고 그럴 수가 있겠지요? 중동 가서 오래 있다고 생각할 때는 틀림없이 그때는 이슬람교를 안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네들이 하도 그것을 믿으니까 말입니다. 그렇다고 생각할 때는 그네들이, 우리 아들이나 딸이나 또는 며느리나 사위가 다른 종교(宗敎)를 믿는다고 생각할 때에 그런 종교를 지금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될 때란 말입니다. 저는 미국서 그런 사람들을 여러 번씩 봤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적어도 성자(聖者)라고 하면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불교(佛敎)의 가르침 같이 그런 방법으로 깨닫진 안했다 하드라도 우주(宇宙)의 근본생명(根本生明)자리인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이 자리를 깨달아야 성자입니다.

공자(孔子)를 우리가 성자라고 한다고 생각 할 때는 어떻게 깨달았든지 간에 그러한 우주의 당체, 우리 생명(生命)의 본래면목(本來面目)자리인 불성(佛性)을 깨달은 분입니다.

소크라테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소크라테스의 대화법(對話法)편 이라든가 또는 플라톤의 저술(著述)을 우리가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불경(佛經)에서 말씀한 법문(法門)이나 별로 큰 차이가 없단 말입니다.

이른바 무위법(無爲法)이라, 우리 출세간법(出世間法)이라, 그런 걸로 해서는 확실히 그네들은 아직은 부족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우주의 근본적인 본 성품을 본 분이라고 생각이 된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런 성자(聖者)들 가르침이라든가 또 철인(哲人)들도 역시 키에르케고르나 또는 칸트나 그런 위대한 분들은 하나의 위대한 우리의 선조(先祖)로 생각을 하셔야 됩니다. 부처님 가르침만큼 완벽하진 못한다 하드라도 참고로 할 점이 굉장히 많습니다. 지향점(指向點)이 다 같다고 생각하고 또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현상적(現象的)인 상대유한적(相對有限的)인 차원에서는 자기가 있다 하드라도 근본성품(根本性品)에서는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이란 말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문제기 때문에 너무 오랜 시간을 할애 했습니다.


*연기법(緣起法)


연기법(緣起法)이라. 연기법은 바로 부처님 법(法)의 핵심(核心)입니다.


1.업감연기(業感緣起)


업감연기(業感緣起)라. 이것은 소승불교(小乘佛敎)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혹(惑)이라, 혹 이것은 번뇌(煩惱)를 말하는 것이고, 업(業)은 번뇌 따라서 짓는 우리 마음이나 우리 행동을 말하는 것이고, 고(苦)는 우리가 번뇌 따라서 지은 업(業)때문에 받는 인생고를 고(苦)라고 합니다.

삼도전전 인과동시(三道展轉 因果同時)라. 혹(惑)과 또는 번뇌(煩惱)와 업(業)과 고(苦)를, 우리가 지금 고를 받으면은 또 고를 받는 그 자리에서 번뇌를 낸단 말입니다. 우리가 범부(凡夫)인 한에서는 무명심(無明心)에서 다시 또 고 가운데서 업을, 우리가 번뇌 때문에 또 다시 업을 짓고 한단 말입니다.

항시 번뇌와 업과 고 이것은 세 가지 길이 서로 피차 아울러져 가지고서 하나의 인생고(人生苦)를 이룩하게 됩니다. 모두가 다 이와 같이 인과적(因果的)으로 우리가 무명(無明) 때문에 업을 짓고 고를 받고 이것이 업감연기(業感緣起)입니다. 따라서 연기법으로 해서는 하나의 차원이 낮은 세간적인 연기라고 볼 수가 있지요.



2.아뢰야연기(阿賴耶緣起) 


아뢰야연기(阿賴耶緣起)라, 업감연기 이것은 우리 의식(意識)차원에서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 의식(意識)차원에서 이루어진 연기법(緣起法)인 것이고 그러면 우리 의식의 근본은 무엇인가? 우리 의식의 근본은 말나식(末那識)이나 아뢰야식(阿賴耶識) 이것이 우리 의식의 근본입니다. 이른바 잠재의식(潛在意識)이란 말입니다.

이런 잠재의식도 역시 일반 심리학(心理學)에서 말하는 잠재의식보다는 아뢰야식은 훨썩 더 깊은 것입니다. 따라서 아뢰야식이라는 것이 우리 사람의 나라는 마음이나 너라는 마음이나 개라는 마음이나 소라는 마음이나 그런 모든 동물의 마음이 모두가 다 아뢰야식 차원에서는 다 하나의 존재입니다. 하나의 자리란 말입니다.

가령 우리가 바다로 비길 때는 바닷물이 있는데 그 바닷물 위에서 거품이 큰 거품 작은 거품 나오고 큰 파도 작은 파도 일어나듯이 소나 돼지나 개나 또는 다른 곤충이나 우리 사람이나 다른 동물이나 모두가 다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는 식(識)위에서 인연(因緣)따라서 이루어진단 말입니다.

또는 비단 동물(動物)뿐만이 아니라 다른 식물(植物)이나 무생물(無生物)이나 우주(宇宙)의 모든 존재(存在)가 다 아뢰야식이라는 식이니까 그럴 때는 마음이 되겠지요. 식이니까 말입니다. 아뢰야식이라는 식(識) 위에서 아뢰야식에 갖추어져 있는 모든 번뇌(煩惱)의 종자(種子)에 따라서 그때는 이루어진단 말입니다.

따라서 아뢰야식 차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우주는 바로 하나입니다.


3.여래장연기(如來藏緣起)


그러면 아뢰야식의 근본은 무엇인가? 이것은 여래장연기(如來藏緣起)라, 아뢰야식의 근본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부처란 말입니다. 바로 불성(佛性)이란 뜻인데, 여래란 바로 불성이란 뜻입니다.

따라서 우주란 것은 따지고 들어가면은 우리 마음의 근본 자리는 욕심이 있고 남 미워하고 또는 분별하는 그런 것은 제7 말나식(末那識)인 것이고 그 뿌리는 제8 아뢰야식이고 말입니다. 아뢰야식이고, 아뢰야식의 뿌리가 무엇인가? 뿌리는 바로 여래장(如來藏)입니다. 바로 부처란 말입니다. 따라서 어느 것이나 파고 들어가면 끝에는 다 부처가 됩니다. 부처가,

그래서 여래장 연기는 진여연기(眞如緣起)라. 진여연기라, 이것은 바로 대승(大乘)에서 말하는 연기법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 비로소 진여연기(眞如緣起)라는 말씀을 했습니다.

다시 제가 부연해서 말씀드리면은 어느 것이나 모두가 다 진여불성(眞如佛性)으로 부터서 되었단 말입니다. 나나 너나 이것이나 저것이나 하늘에 있는 모든 천체나 모두가 다 진여불성으로 돼 있다는 그런 인연법이 진여연기법입니다.

따라서 진여연기법을 우리가 안다고 생각할 때는 천지우주(天地宇宙)가 모두가 다 진여불성 아님이 없단 말입니다. 그렇게 해야 대승(大乘)이 됩니다.


4.법계연기(法界緣起)


그것이 바로 제4 법계연기(法界緣起)라. 바로 우주란 것은 하나의 부처님의 법으로 해서 충만해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무진연기(無盡緣起)라, 우주가 모두가 다 진여불성이기 때문에 산이나 냇이나 또는 나나 너나 너 가운데 내가 들어가고 나 가운데 네가 들어오고 말입니다. 불교 말로 하면은 상입아입(相入我入)이라, 모든 존재 가운데가 서로 다 들어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또 조금은 의단(疑端)을 품으시겠지요? 왜 나 가운데 네가 들어오고 또는 너 가운데 내가 다 들어가는가? 이것은 물질이 아니니까 그러는 것입니다. 몸뚱이 이것은 가짜에 불과합니다. 하나의 거품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우리 업식(業識) 따라서 이와 같은 몸을 받는 것이지 몸이 이것이 실존적인 진리가 아니란 말입니다.

유마경(維摩經)이나 능엄경(楞嚴經) 보면은 모탄거해(毛呑巨海)라. 모탄거해(毛呑巨海)라, 터럭 모(毛)자, 삼킬 탄(呑)자, 클 거(巨)자, 바다 해(海)자, 조그만한 터럭 끝에 태평양 같은 바다가 쑥 들어간단 말입니다. 이해가 되겠습니까?

개납수미(芥納須彌)라. 개납수미라, 겨자씨 개(芥)자, 들일 납(納)자, 또는 수미산은 세계에서 가장 큰 산이 수미산(須彌山) 인데 겨자 씨 가운데 수미산이 쑥 들어간단 말입니다. 쑥 들어가서도 조금도 줄어들었다는 관념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도리가 유마경이나 또 능엄경에 가 있습니다. 조그만한 터럭 끝에 가서 태평양 같은 큰 바다가 다 들어가고 또 겨자씨 가운데 가서 아, 우주를 우주에 비길 수 있는 큰 산이 들어간단 말입니다. 이런 도리를 어떻게 이해를 하시겠습니까? 부처님의 신통지혜(神通智慧)니까 그렇게 되겠지 이렇게 생각 할 수가 있겠지요?

그러나 신통지혜도, 부처님의 신통지혜는 우연이나 기적이 아닙니다. 사실로 할 수 있으니까 부처님께서 신통을 하신 것입니다. 물질이 아니란 말입니다. 물질이,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들어가고 나갈 것이 없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우선 나라는 존재, 나라는 존재를 파괴를 하셔야 됩니다. 파괴를, 나라는 존재를 파괴를 해야 그래야 다시 바꿔서 말하면 내 마음을 하늘과 같이 연다는, 넓힌다는 그런 말이 되겠지요?

내 세포(細胞)란 것도 역시 하나의 흘러가는 물과 같이, 아까 흘러간 물과 지금 흘러간 물과 똑같지가 않듯이 우리 세포도 아까 세포와 지금 세포가 같지가 않단 말입니다. 찰나생멸이라, 어느 찰나 순간도 일 초의 몇 천분지 일 동안도 같은 나가 없습니다. 결국 세포가 움직이고 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하나의 가상(假想)에 불과한 것인데 우리가 그런 도리를 잘 못 보니까 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색(色)도 공(空)인 것이고 우리가 느낌도 공인 것이고 우리의 기쁨도 다 공이란 말입니다. 이른바 오온(五蘊)이 개공(皆空)이란 말입니다. 오온이 개공이란 뜻은 오온은 다 쪼개고 쪼개서 끄트머리가서 공이란 뜻이 아닙니다. 색즉공(色卽空)이라, 오온 즉 바로 공이라, 바로 그대로 공(空)이란 말입니다. 성자(聖者)가 보면은 있는 것 그대로 공입니다. 우리 범부(凡夫)가 보면은 그때는 그렇지가 않단 말입니다. 있는 것은 그대로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같은 공도 소승(小乘) 공은 다 분석(分析)하고 들어가서 지금 현대물리학(現代物理學) 모양으로 성분에서 분자로 분자에서 원소로 원소에서 원자로 이렇게 분석하고 들어간단 말입니다. 들어가서 종당에는 다 공인 제로가 된다. 이것은 현대물리학적인 분석법인데 소승분석(小乘分析)은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대승분석은 색즉공(色卽空)이란 말입니다.


5.육대연기(六大緣起)


5에 가서는 육대연기(六大緣起)라, 이것은 밀교(密敎)법에서 연기법을 말합니다. 밀교법은 무엇인고 하면은 원래 우주만유 불성 가운데 지(地)란, 땅이라는 질료의 성품, 또는 수분적인 성품, 화(火)라는 온도, 바람이라는 동력 움직이는 성품, 또는 공이라는 그러한 공간성, 식이라는 하나의 분별성, 이런 것이 지(地)·수(水)·화(火)·풍(風) 사대, 지(地)·수(水)·화(火)·풍(風)·공(空)·식(識), 이 육대(六大)가 우주에는 원래 갖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품으로 해서는, 이것은 이치로 봐서는 다 같아요. 모두가 다, 우주에는 그냥 텅텅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그 이른바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불성이고 마음이고 한다고 제가 말씀드렸지요.

그런 가운데는 그냥 마음이고 그냥 불성이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 질료가 물질이라는 하나의 상이 될 수 있는 지적(地的) 성품과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지구(地球)도 있고 뭣도 있고 있겠지요.

그러고 수분이라 하는 습기(濕氣)라는 그런 성품도 있고, 또 온도도 있는 것이고 말입니다. 또는 풍(風)이라 하는 그런 동력(動力)도 있단 말입니다. 또는 공(空)이라는 공간성(空間性)도 있고, 식(識)이라는 분별하는 성품(性品)도 있단 말입니다. 이런 것이 성품으로 해서 우주에는 가득 차 있는 것이 법계(法界)에 두루 해서 만유(萬有)제법(諸法)을 연기(緣起)한단 말입니다.


*만법유식(萬法唯識)


그 다음에 만법유식(萬法唯識)이라. 만법유식이라,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나 만법유식(萬法唯識)이나 같은 뜻입니다. 분별 할 수 있고 판단 할 수 있고 비판도 할 수가 있고 우리가 그런 쪽으로 생각할 때는 그때는 식이란 유식(唯識)이란 말을 쓰는 것이고, 또는 모두가 다 물질(物質)이 아닌 순수(純粹)한 생명이다. 이렇게 표현할 때는 그때는 ‘유심(唯心)이다’ 이렇게 쓰는 것입니다.


1.육식(六識)


그래서 육식(六識)은 우리가 다 알지 않습니까? 우리 눈으로 보고, 귀로 느끼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을 알고, 몸으로 촉각을 느끼고, 의식으로 분별 판단하고 이것이 육식(六識) 아닙니까?


2.말나식(末那識)


그런데 육식의 근본은 말나식(末那識)이라, 제7 말나식이란 말입니다. 말나식은 아직은 순수한 식이 못됩니다.

 아치(我痴)라. 자기라는 관념을 미처 못 떠났단 말입니다. 나라는 어리석음, 또는 내 견해, 또는 자기가 뭐 좀 잘하면 우쭐해서 말입니다. 자기가 남보다 낫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衆生)마음은 누구나 다 그렇습니다. 학벌(學閥)이 좀 좋다든가 뭐 자기가 기능이 있다든가 이래 놓으면 꼭 아만심(我慢心)을 품는단 말입니다.

그리고 아애(我愛)라, 자기를 금쪽 같이 사랑하니까 자기한테 누가 티끌 하나만 건드려도 우리가 그냥 반발심을 느끼고 하겠지요? 옛날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묵자(墨子)라는 그 당시 상당히 위대한 분인데 그 분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자기 터럭 하나도 빼주기를 싫어하단 말입니다. 그런 참 고약한 참 나쁜 사람도 있었습니다.


3.아뢰야식(阿賴耶識


제8식은 제7식의 근본의 뿌리가 이것이 8식인데, 아뢰야식(阿賴耶識) 정도가 되는데 장식(藏識)이라. 모든 종자, 모든 존재가 일어나는 하나의 존재에 이르는 아주 그 뿌리를 이룩하는 그런 것을 다 거기에 감추고 있으니까 그때는 장식(藏識) 그러지요. 아뢰야식이라. 그러면 아뢰야식의 뿌리가 무엇인가?


4.암마라식(庵摩羅識)


제9 암마라식(庵摩羅識)이라, 암마라식은 바로 청정(淸淨)하다는 뜻입니다. 청정하다는 뜻, 따라서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는 그 뿌리는 바로 청정한 부처의 식이란 말입니다. 그래 백정식(白淨識)이라,


5.불(佛)


제10식은 부처인 것이고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개의 마음도 파고 들어가서 보면은 다 부처한테 이르고 우리 사람 마음은 말할 것도 없고 말입니다. 천상 마음도 마찬가지고 또는 다른 식물도 마찬가지고 돌멩이나 다이아몬드나 또는 쇳덩이나 모두가 다 파고 들어가서 근본 끄트머리에 들어가면 그 저변은 모두가 다 부처란 말입니다. 부처입니다.

그러기에 일체(一切)가 유심조(唯心造)라, 일체가 바로 부처뿐이다.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오로지 일미평등(一味平等)한 진여불성(眞如佛性)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부처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일미평등(一味平等)하단 말입니다. 대승불교(大乘佛敎)는 다 그렇습니다. 그러기에 화장세계(華藏世界)라, 이 세계 이대로 바로 부처님 세계란 말입니다. 모두가 불성(佛性)으로 됐으니까 말입니다.

이렇게 알고 남한테 보시(布施)도 해야 그래야 참다운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가 됩니다. 나 따로 너 따로 있고 이렇게 해서 ‘아, 저 사람은 나보다도 더 구차하니까 내가 뭘 준다.’ 이런 것은 상(相)이 있는 보시(布施)란 말입니다. 중생보시(衆生布施)입니다.

자타시비(自他是非)를 떠나 버린 그런 보시가 돼야 참다운 보시가 되고 그렇게 마음을 먹어야 우리 성불의 법이 빨라진단 말입니다. 어느 때나 내가 따로 있고 네 따로 있고 이렇게 생각할 때는 항시 상(相)에 걸립니다.


19981115-성륜사 대웅전-순선안심법회-청화큰스님 설법

19981115-촬영자 미확인

19990729-‘순선인심법문’ 소책자로 출간-성륜사

20050911-DVD 작업-본정 김영동

20080705-재정리-주안 한동일


* 본 법문은 동영상 자막용으로 큰스님 말씀 그대로 받아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