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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4. 금강륜

제70호 태안사 정기법회

                 <제 70 호>

19920705-태안사 정기법회


   여실지견(如實知見)


다시 표현할 필요가 없이 부처님 가르침이나 또는 공자님 가르침이나 예수님 가르침이나 기타 모든 철학(哲學)들은 인생고(人生苦)를  어떻게 떠날 것인가?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은 위없는 행복(幸福)을 맛 볼 것인가? 하는데 집약이 됩니다.

우리 인간존재(人間存在)는 우리가 각기 반성하면은 알 수가 있듯이 절대로 완벽한 존재(存在)는 못 됩니다. 지혜(智慧)로 보나 능력(能力)으로 보나 또는 인정도 많고 사랑 충만한 그런 쪽으로 보든지 어느 면으로 보나 우리는 결손 된 존재인 것이지 절대로 완벽한 존재는 못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하는 것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제 아무리 못 났다 하더라도 가장 위없는 아름다움, 가장 더없는 행복, 또는 다시없는 우주(宇宙)를 모두를 다 알아야 쓰겠다는 일체만유(一切萬有)를 다 알아야 만이 만족할 수 있는 그러한 지혜 그런 것을 추구해서 마지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느끼는바와 같이 어떤 누구나가 생로병사(生老病死)라 하는 한계상황을 넘을 수가 없는 것이 인간존재(人間存在)가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우리가 이와 같이 상대적(相對的)인 존재인데도 완벽하지 못한 존재인데도 완벽한 행복(幸福)을 구하고 능력(能力)을 구하고 지혜(智慧)를 구하는 것은 이것은 우리가 본래적으로 우리 인간의 본래면목(本來面目)자리, 본래생명자리는 완벽한 자리이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개한 때는 인간의 본 성품이 완벽한 자리다. 이런 것을 모르고 공부를 한단 말입니다. 덮어놓고서 공부하면은 그냥 타력(他力)적으로 바깥에 있는 힘으로 해서 우리가 행복하게 되겠지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이 미개한때 공부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즉 다시 말씀드리면 내 본래면목이 무엇인가? 또는 우주의 본체(本體)가 무엇인가? 이런 거창한 철학적인 문제 이런 것을 모르고 공부하는 그런 공부는 구분해서 말하면 아직은 소승(小乘)공부입니다. 소승공부,


대승(大乘)과 소승과 여러 가지 구분법이 많이 있습니다마는 우리는 이러한 공부 면에서 이렇게 엄격히 구분이 됩니다.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그러한 모든 존재의 본질적인 근본성품(根本性品)을 모르고 하는 공부는 이것은 소승공부인 것이고 본질적(本質的)으로 우리가 체험(體驗)은 미처 못 했다 하더라도 우선 지혜(智慧)로 이치(理致)로만은 분명히 느끼고 나는 뭣인가? 나와 우주(宇宙)와의 관계는 뭣인가? 이런 것을 분명히 알고 하는 공부는 대승공부라고 합니다.

그래서 불교(佛敎)의 근본 요체는 여실지견(如實知見)이라. 오늘 오신 분들은 여실지견이란 말씀을 외워두시기 바랍니다. 여실지견이라, 같을 여(如) , 열매 실(實) 즉 실다울 실(實)자, 알 지(知)자, 볼 견(見)자 말입니다. 여실지견이라, 이 말은 무슨 뜻 인고 하면은 우리가 그냥 기억력이 좋고 학식이 많아서 여러 가지 복잡한 학문을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이 여실지견은 사태 그대로 자기 같으면은 자기 그대로 말입니다. 사람 같으면은 사람존재는 대체로 어떠한 것인가? 존재 그대로, 나무 같으면은 나무의 존재는 무엇인가? 나무의 근본본질은 무엇인가? 이러한 모든 것의 현상(現象)과 실제(實際)를, 현상(現象)과 그 본질(本質)을 아는 지혜(智慧) 이것이 여실지견입니다. 여실지견이라,

우리 인간이 지금 느끼고 있는 상대적인 지혜라 하는 것은 여실지견이 못 됩니다. 그냥 겉만 보고 겉만 다 들떠 있단 말입니다. 겉만 보고서, 겉만 보니까 분명히 겉에는 내가 따로 있고 남이 따로 있지 않습니까. 겉만 보니까 우주만유(宇宙萬有)는 천차만별(千差萬別)로 구분 되어있습니다. 천차만별로 구분 되어있다, 이것만 아는 것은 방금 제가 말씀드린 여실지견, 사실대로 보고 있지 않습니다.

종교(宗敎)나 철학(哲學)이 어렵다. 여느 사람들은 접근하기가 어렵다. 속물(俗物)은 속물대로 아무 때나 휩쓸려 살면 쉬운 것인데, 철학이나 종교는 어려운 것이 아닌가? 그러면은 그 어려움이 어디가 있는가? 우리는 종교나 철학을 공부할 때에 어려움이 어디가 있는가를 분명히 느껴야 씁니다.

종교나 철학이 아니고서는 아까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여실지견이라. 문제를 문제그대로 사실대로 알 수가 없단 말입니다. 알려고 생각할 때는 싫든 좋든 간에 종교철학의 문을 뚫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쉽게 종교나 철학의 문에 쑥쑥 들어 갈 수가 없단 말입니다.

왜 못 들어가는 것인가?  우리 중생들은 상대적인 병에 모두 걸려있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있다 없다하는 상대적인 유병(有病), 유루병(有漏病)에 걸려 있단 말입니다. 병에 걸려 있으면서, 더 심각한 문제는 뭣 인고 하면은 자기가 스스로 그런 병에 걸려 있다고 모른단 말입니다.

분명히 아프기는 아픈데 인생(人生)은 괴로운 것이 아닙니까. 인생은 분명히 괴로운 것입니다. 구해도 얻지 못하고 이별을 하기 싫어도 이별을 할 만한 요인을 심어 놓으면 꼭 이별 되고말고  아무리 늙지 않겠다고 발버둥 쳐도 세월이 흐르면은 늙고 말지 않습니까.

이러한 상대적인, 인간들이 그것 밖에는 못 봅니다. 그것 밖에는, 그것 밖에는 못 보는 사람들은 그것마저도 자기가 보지를 못합니다. 아프지 않겠다고 그래서 아프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이고 말입니다. 안 죽을 수 없고 안 늙을 수 없고, 겪지 않을 수가 없고, 겉만 보고 사는 인간들은 그런 것을 모두가 다 우리가 받아야 씁니다. 받아야 쓰기 때문에 고생은 끝도 갓도 없이 연속된단 말입니다.

사업도 실패 안해야 쓰겠다. 내가 뭘 구해야 쓰겠다. 그런 것을 제대로 얻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분명히 우리 범부(凡夫) 중생들은 유(有)․무식(無識) 간에 총명하든 미련하든 그런 차이를 불문(不問)하고서 모두가 다 지금 병에 걸려있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어떠한 성자(聖者)나 나오면은 첫소리로 하는 것이 뭣 인고 하면은 먼저 회개(悔改)하라. 먼저 참회(懺悔)하라 말입니다. 회개하고 참회하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면은 잘못 본, 잘못 본 그것을 우리가 바로 봐야 쓴단 말입니다.

지금 보면은 앞서도 말씀드린바 같이 누구나가 다 완벽한 행복을 구합니다. 행복을 구하면서도 자기는 조금도 바꾸어지지 않는단 말입니다.

자기가 지금 받고 있는 불행(不幸)이라 하는 것은 모두가 다 분명히 자기가 지어서 받습니다. 자기가 지어서 받는 것인데 그 원인마저도 모르는 것이니까 자기 불행을 다른 사람들이 제공해 주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금생(今生)에 아니면 과거(過去) 전생(前生)까지 더듬어 올라 갈 때는 꼭 자기가 지어서 받습니다. 금생에는 애매하다고 느낄란가는 모르겠지마는 더듬어 올라가면 꼭 그렇습니다.

따라서 자기 지금 불행은 현재 자기 정도가 지어서 받었으니까 앞으로 불행을 내가 면해야 쓰겠다. 이럴 때는 현재 자기 정도보다도 바꾸어져야 쓴단 말입니다. 생각도 바꾸어져야 쓰고 우리 행동도 바뀌어야 쓴단 말입니다.

그런데 말도 그전대로 하고 인생관(人生觀)도 그전대로 가지고 말입니다. 욕심(慾心)도 그전대로 부리고 이렇게 있으면서 복(福)은 받을 라고 한단 말입니다. 참 이것은 딱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앞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리는 근본성품(根本性品)을 못 봅니다. 성품을,

그런데 그 성품 우주(宇宙)의 근본고향(根本故鄕)자리는 뭣인가? 생명(生命)의 본체(本體)는 뭣인가? 모든 존재의 근본성품(根本性品)은 뭣인가? 이렇게 성품이 뭣인가 까지는 보통은 압니다.

보통 알지마는 아, 성품은 하나의 이치(理致)인가? 또는 성품은 하나의 인격(人格)인가? 말입니다. 이런데 있어서는 우리가 안 보이는 것이니까 보통은 의심(疑心)을 품는단 말입니다.

일반 철학도(哲學道)는 그냥 이치(理致)로만 구한단 말입니다. 이치로만, 땀 찍찍 흐르고 구합니다. 이치로만, 또는 과학도(科學道)는 실험으로만 분석(分析)과 실험(實驗)으로만 구한단 말입니다.

인간의 제한된 마음이 바뀌어 지지 않고 이치로만 구한다고 그래서, 성품 자리는 이것은 물질(物質)이 아닌데 말입니다. 인생과 우주의 근본성품 이것은 공간성(空間性)과 시간성(時間性)이 있는 물질이 아니란 말입니다.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이치로만 구하는, 이치 이것은 상대법이기 때문에 상대적인 개념으로 이치로만 구한다고 생각할 때에 그 자리가 얻어질 수가 없습니다. 결국은 딱 막히고 만단 말입니다.

철학도, 내내야 철학이라는 것은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인생과 우주의 본바탕을 보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이것도 이치로만 구한다고 생각할 때는 딱 막히고 맙니다.

역시 신비적(神秘的)인 초월(超越), 판단중지라. 판단 딱 그만 두고서 우리 마음을 영원(永遠)의 경계에다가 딱 해방을 시켜버리는 깊은 명상(瞑想)에 들어 있어야 참다운 물질이 아닌 불성(佛性)을 우리가 성큼 얻을 수가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 이치로만 얻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런데 이 부처님 가르침은 이것은 삼보(三寶)아니겠습니까. 부처님 가르침이나 또는 예수님 가르침이나 공자님 가르침이나 본질적으로는 절대로 둘이 아니고 셋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현대적인 상황, 우리는 지금 무서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공산주의(共産主義)도 붕괴가 돼있고 또는 모든 것이 하나의 진리(眞理)로 통합(統合)되어야 한다는 그런 과도기(過渡期)에 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선구적(先驅的)인 사람들은 현대(現代)생활을 바로 한다고 생각할 사람들은 꼭 모두를 통합 할 수 있는 하나의 진리(眞理)를 하나의 원리(原理)를 알아야 쓴단 말입니다. 그걸 모른다고 생각할 때는 현대를 바르게 살 수가 없습니다. 적어도 미래적인 비전을 내세울 수가 없단 말입니다.

나는 나고 너는 너고 내 종교(宗敎)는 제일 좋고 그대 믿는 종교는 이것은 별것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는 현대를 현명하게 살아갈 수가 없단 말입니다. 이른바 다종교(多宗敎) 사회라, 싫든 좋든 간에 자기 아들도 기독교를 믿을 수가 있고 자기 아내도 불교를 믿을 수가 있고 말입니다. 한 가족 가운데도 그와 같이 믿는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관계성을 화해(和解)를 시켜야 쓸 것인데 화해를 못 시키면 결국은 싸울 수밖에 없단 말입니다.

그러면은 공자님가르침이나 또는 예수님가르침이나 석가님가르침은 이것은 화해 할 수가 없는 것인가? 본질적(本質的)으로 화해(和解)를 할 수가 없다고 그러면 할 수가 없겠지요. 할 수가, 그러나 그런 성자(聖者)의 가르침은 모두가 하나입니다. 모두가 다,

다만 문자(文字)로 표현하고 말로 표현하고 말입니다. 그런 표현하는 것이 그때그때 시대상황(時代狀況)과 그때그때 교조(敎祖)의 성격적인 차이 이른바 이념(理念)의 차이 때문에 표현을 달리 했기 때문에 우리 중생(衆生)이 잘 못 알아먹는 것이지 본질(本質)은 하나란 말입니다.

불교(佛敎)만 좋다하고 다른 종교(宗敎)는 별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면은 굉장히 기분이 사나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기독교(基督敎)를 비방(誹謗)하고 또는 공자(孔子)의 논어(論語)를 비방(誹謗)하고 그런 사람들이 논어 한번을 제대로 봤던가. 요한복음서나 마태복음서나 유가복음서나 그런 복음서를 제대로 정말로 허심탄회(虛心坦懷)한 마음으로 봤던가. 이렇게 반문(反問)하고 싶거든요.

저는 항시 말씀드립니다마는 기독교가 1900년 세월동안 무수한 순교자(殉敎者)를 냈습니다. 기독교 가르침을 위해서 자기 생명(生命)을 바쳤단 말입니다. 또는 무수한 사람들이 신부가 되고 수녀가 되고 했습니다. 지금도 수백만의 신부 수녀가 있습니다.

만약 진리(眞理)가 아니라고 그러면은 천구백년 동안이나 그와 같이 무수한 비판(批判)을 견디고 지금까지 나왔을 것인가 말입니다. 우리는 합리적(合理的)으로 문제를 풀어나가야 합니다.

또는 우리 불경(佛經)가운데는 요한복음서나 마태복음서나 그런데 들어있는 진리가 안 들어 있는가. 불경가운데는 기독교 바이블 내용도 몽땅 다 들어있습니다. 유교(儒敎)의 논어 내용도 몽땅 다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앞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무서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화해를 안 하면은 결국은 다 같이 공멸(共滅)이라. 다 같이 허물어지고 만단 말입니다. 화해를 안 하면은 한편만 허물어지고 한편만 사는 것이 아니라 같이 죽고 맙니다. 기독교인구도 지금 17억이란 말입니다. 이슬람도 지금 10억 인구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꼭 하나의 통일원리(統一原理), 과학과 종교도 역시 절대로 다른 것인가? 과학(科學)과 종교(宗敎)도 절대로 다르지 않단 말입니다. 과학도 역시 현상적(現象的)인 문제, 현상적인 문제는 굉장히 정밀(精密)하고 성실하게 풀어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종교를 믿는다 하더라도 현상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응당 과학자의 의견을 우리가 경청해야 쓴단 말입니다.

그런데 앞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과학적으로는 하나의 분석(分析)과 실험실측(實驗實測)이기 때문에 이런 걸로 해서는, 인간(人間)의 개념(槪念)으로 해가지고서 분석하고 실험하고 실측하고 이런 걸로 해서는 역시 공간성(空間性)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또는 이치(理致)로 구하는 칸트철학이고 니체철학이고 말입니다. 또는 쇼펜하우어고 그런 철학도(哲學道)가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어려운 철학을 많이 냈단 말입니다. 헤겔철학 같은 것도 굉장히 위대한 철학입니다. 철학을 냈지마는 그래도 그것이 이치(理致)로만 상대적(相對的)인 개념(槪念)이론, 이성으로 해서는 그때는 한계(限界)가 있단 말입니다. 해결을 못 시킵니다.

따라서 정말로 정작 인생(人生)과 우주(宇宙)의 본성품(本性品)은 뭣 인가? 그 자리를 볼 라고 생각 할 때는 그놈의 이론을 딱 정지를 시켜야 된단 말입니다. 정지를 시키고서 우리의 생명(生命)자체를 관조(觀照)해야 쓴단 말입니다. 관조(觀照), 왜 그런고 하면은 생명자체를 관조한 사람들인 예수나 석가나 공자나 그런 성인(聖人)들, 성인들은 그리스 성인들이나 모두가 다 생명자체를 관조해서 생명자체하고 하나가 딱 됐으니까 성자(聖者)입니다.

성자라는 것은 인생(人生)과 우주(宇宙)의 본바탕 본질(本質)인 그 자리를 우주의 본 진리하고 하나가 딱 되고, 말이나 행동이나 생각이나 모두가 다 여법이 진리(眞理)에 다 맞게 시리, 진리의 법도(法道)에 맞게 시리 행동하는 분이 성자란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역시 생명의 내 본바탕이 뭣인가? 천지우주(天地宇宙)를 다 준다 하더라도 내 생명(生命)이 뭣인가? 자기생명을 모르면은 가치가 없습니다. 하늘을 주고 땅을 준다 하더라도 내가 뭣인지 모르고 말입니다. 나라는 것이 어떻게 살아야 의미 있는 삶인가? 이것도 모르면은 외형적(外形的)인 문제는 아무런 가치(價値)가 없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불교(佛敎) 가르침은 이른바 삼보(三寶)라 하지 않습니까. 삼보(三寶)라, 세 가지 보배란 말입니다. 세 가지 보배라, 여기 계시는 분들은 대체로 삼보를 믿고 계시는 분들입니다. 삼보는 우리 불자가 삼보 모르시는 분은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삼보, 삼보 해서 이치로는 다 알지마는 심정적으로 감명 깊게 시리 잘 못 깨친단 말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법문 할 때는 과거(過去)에 한 말 또 하고 또 하고 하는 것은 뭣 인고 하면은 과거에 몇 번 할 때는 잘 못 알아먹었다 하더라도 어느 계기에 자꾸만 되풀이 하면 그때는 그 순간 아, 그렇구나. 우리 법문이라는 것은 시절인연(時節因緣)이 도래하면은 그때그때 과거에는 몇 번 들어도 모르던 것이 나중에는 순간 찰나에 깨달아버린단 말입니다.

중국 당(唐)나라 때 그 영운(靈雲)대사 신령 영(靈)자, 구름 운(雲)자, 영운대사 말입니다. 위산(潙山)대사란 스님의 제자입니다. 굉장히 위대한 분이란 말입니다. 위산대사라 하는 도인(道人)의 제자니까. 도인한테 공부하면은 아, 그냥 순식간에 깨달아 버리지 않는가. 그렁저렁 공부하면 모르거니와 도인이 지도하면 그냥 몇 년 동안에 도인이 되어서 다 공부가 끝날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마음 깨닫는 공부는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위산대사는 유명한 백장(百丈)대사, 저 남원에 가면 백장암이 있지 않습니까. 백장대사의 정통(正統)법이 한국으로 흘러 왔다고 그래서 백장암이란 이름이 붙여졌겠지요. 그런데 백장대사의 제자가 위산대사여서 한 3000명 제자를 거느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양반한테서 공부해서 도인이 된 분이 영운대사, 신령 영(靈)자, 구름 운(雲)자, 영운대사인데 자기 스님이 도인이니까 그냥 도인이 빨리 되면은 좋을 것인데 그렇게 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어느 누구나 다 그렇습니다.

자기가 닦아야지 참구자득(參究自得)이라, 참구자득이란 말입니다.

학문으로 공부하는 것도 상당히 오랫동안 있어야 대학과정까지 할 수가 있지 않습니까. 하물며 마음 닦아서 업장(業障)이 녹아져야 할 것인데 지지리 많이 했다고 그래서 업장이 가볍다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따라서 업장을 녹이는 것은 자기 스스로 애를 쓸 수밖에는 없습니다.

자기스스로 애를 써서 닦고 닦아서 자기라는 관념(觀念)이 떠나버려야 쓴단 말입니다. 자기라는 관념이 떠나버려야 불성(佛性)이라 하는 생명(生命)의 본질(本質)을 증명(證明)하는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 하는 것은 이것은 나한테 있고 너한테 없다던가 말입니다. 또는 내 불성 남의 불성 따로 있다든가 이런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주(宇宙)가 모두가 다 하나의 불성위에서 되었단 말입니다.

불성은 물질(物質)이 아니기 때문에, 불성은 공간성(空間性)과 시간성(時間性)이 있는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여가 있고 저가 있고 그런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주(宇宙)는 바로 불성(佛性)덩어리입니다. 우주는, 우주는 바로 불성덩어리고 불성 그 자리는 조금도 여가 있고 저가 있고 또 여가 더 많고 저가 더 적게 있고 않는 것이기 때문에 물량적(物量的)으로 구분 할 수가 없고 모양도 없어 놔서 어떻게 표현을 못한단 말입니다.

따라서 그 자리를 증명(證明)해야 참 자기생명(生命)을 우리가 얻는 것입니다. 헌데 그 자리는 나라는 관념(觀念)이 눈꼽만큼만 있다 해도 얻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따라서 그런 자리는 우리 스스로 닦아서 얻을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영운대사도 제법 재주가 있고 학문은 많이 했단 말입니다. 학문은, 학문은 많이 했지만은 학문으로 따지고 있으면 공부를 할 수 없단 말입니다.

여름에 이렇게 더운데 우리 스님 네가 선방에서 그 2시간 3시간 하루 10시간 남어 공부 할 수 있는 것은 뭣 인고 하면은 학문적으로 안다 그러면 참 쉬운 문제 아닙니까. 학문 그걸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마음 닦아서 자기 마음에가 분별시비(分別是非) 하는 마음 또는 자타(自他)를 구분하는 마음 그런 마음이 가셔야 쓴단 말입니다.

그 영운대사는 스승을 찾아서 여기저기 만행(萬行)도 많이 했습니다. 어느 스님이 위대하다 하면 거기 가서 물어보고 저기 가서도 물어보고, 물어봐도 팽 말로 대답하는 그것은 자기한테는 이익이 못 된단 말입니다. 따라서 30년 동안이나 봄이 가고 여름 가고 해가 가고 또 해가 가고 말입니다. 자기 청춘 다 가고 말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30년 지난 어느 날 봄에 복숭아꽃, 복숭아꽃이 그렇게 천연스럽게 피어나는 그것 보고서 문득 깨달아버렸단 말입니다.

영운대사가 복숭아꽃, 꽃 피어나는 것을 한번 두번 봤겠습니까. 가지가 나오고 또 잎이 트고 말입니다. 꽃이 맺고 열매가 맺고 30번이나 봤단 말입니다. 봤어도 그때까지는 그냥 지나쳐버렸는데 30년 만에 어느 날 문득 깨달아버렸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어떤 누구나가 다 자기 본래생명인 불성(佛性)자리를 증명(證明)하실려고 애를 쓰십니다. 그러나 그렇게 쉽지가 않단 말입니다.

앞서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자기 불행(不幸)을 떠날라고 다 애씁니다. 인생(人生)은 본래가 고해(苦海)인데 어떤 누구나가 다 시련이 있지 않습니까. 시련을 빨리 떠나야 쓰겠다.

그런데 그런 시련(試鍊)이나 고난(苦難) 이것이 절대로 무의미한 고난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잘 몰라 그런 것이지 안다고 생각 할 때는 어떤 고생도 자기가 아픈 것도 또는 이별 하는 것도 말입니다. 이별 하는 것도, 심지어는 죽어서 가는 것도 다 의미가 있단 말입니다. 죽어서 가면은 그냥 그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는가. 내 생명 끝이 아닌가. 끝이 아니란 말입니다. 끝이 아니라 죽어지면은 그때는 다시 새로운 단란한 생명을 또 받는단 말입니다. 따라서 죽음 자체만 해도 그때는 손해가 없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성품을 미처 못 보고 겉만 보기 때문에 겉에서 중생(衆生) 속물 차원(次元)에서 분별하기 때문에 손해다 이익이다 하는 것이지 본바탕에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어떤 고난도 절대로 손해가 아닌 것입니다. 지금 고난에 처해있는 우리 불자님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제가 말씀 드리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저 같은 사람은 위선(僞善)은 지극히 싫어합니다. 다 부처님 말씀을 저는 옮길 뿐입니다. 제가 지어서 하는 말씀도 절대로 아닙니다.

예수의 바이블도 어떠한 고난이나 시련이나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은총이란 말입니다. 정말 은총인 것입니다. 맹자(孟子)도 말하기를 하늘이 우리한테 큰 행복(幸福)이나 큰 소임(所任)을 큰 복(福)이나 줄라고 할 때는 경륜이나 시련이 없이는 받을 수가 없습니다.

누구한테나, 저마다 어느 누구한테나 대통령 맡기면 할 수가 있겠습니까. 역시 뭐라 해도 우리가 경험(經驗)도 많이 하고 또는 죽을 고비도 몇 번 넘고 말입니다. 어려운 고난, 어려운 노력 다 해가지고서 그래가지고서 우리가 무거운 소임을 맡아서 능히 감당(堪當)한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맹자님 말씀도 하늘이 인간에게 무거운 소임이나 또는 막중한 행복을 줄라고 생각할 때는 고난을 먼저 주고서 그 마음을 공고히 다진다. 이런 말씀했단 말입니다. 꼭 그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중생들은 고난이 오면 우선 싫어한단 말입니다. 고난으로 해서 우리가 얼마나 인생을 많이 배우는지 모릅니다. 고난으로 해서 우리 인생이 얼마만치 무상(無常)을 느끼고 행복스러운 사람들은 절대로 무상을 못 느낍니다. 헤어져봐야 쓰고 실패도 해봐야 쓰고 아파 봐야 쓰고 그래야 무상을 느낀단 말입니다. 허무(虛無)와 무상을 느끼는 것이 얼마만치 우리 생명(生命)의 양식(良識)인지 잘 모른단 말입니다.

그 영운스님이 아까도 말씀드린바와 같이 30년 만에 가까스로 갓 핀 복숭아꽃 핀 것을 보고서 깨달았단 말입니다. 그러면은 그전에 어떻게 했던가? 그 전에 도인의 제자인지라 더구나 빈틈없이 공부를 했겠지요. 그러나 정작 자기생명(生命)의 본 고향(故鄕)에 간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은 그런 분도 못 했거니 우리는 그렁저렁 살면 그만이 아닌가? 이렇게 자포자기를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래서 우리가 가는 길은 성불(成佛)의 길을 피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우리가 게으름 부려서, 나는 안 해도 제법 그렁저렁 그래도 무던히 행복한데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겠지마는 그 행복이 오래 갈 수도 없습니다. 오래 갈 수도 없고 또는 그 행복이 완벽할 수도 없고 말입니다. 그렁저렁 살았다가는 금생(今生)에는 그렁저렁 넘길 란가는 모르겠지마는 죽을 때에, 죽을 임시에는 그렁저렁 산 그런 업장(業障)가지고 내생(來生)에 가서 다시 또 우리가 생(生)을 받는단 말입니다.

몇 생을 되풀이해서 고생고생 하다가 종당에는 또 성불도 안 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몇 만생 헤매도 역시 성불(成佛)되는 것입니다. 본래가 부처기 때문에 꼭 성불 되는 것인데 금생에 안 하면은 그와 같이 다시 헤맨단 말입니다.

그래 기왕에 성불 할 바에는 금생에 해치워버린다. 금생에 해치우기 위해서는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리가 바꾸어져야 씁니다. 바꾸어져야, 우선 마음을 바꾸어서 우리 의식(意識)을 바꾸어서 말입니다. 의식을 바꾸어서 제가 허두(虛頭)에 말씀드린바와 같이 여실지견(如實知見)이라. 실다운 지혜(智慧)를 우리 지혜로 한단 말입니다.

과거(過去)종교와 현(現)종교와 차이가 뭣인가? 이것도 역시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과거 종교 믿는 태도는 그냥 덮어놓고 화두(話頭)한다, 덮어놓고 염불(念佛)한다, 이런 식이고 말입니다. 부처님의 참다운 대승법문(大乘法門)은 먼저 마음 열어 놓고서, 먼저 마음을 연 다음에 공부한다. 마음을 열려고 생각할 때는 우리 마음에 부질없는 의심(疑心)덩어리가 없어야 씁니다.

하늘은 뭣이고 나는 뭣이고 너는 뭣인가 말입니다. 또는 자연(自然)은 뭣인가? 이런 것에 대해서 쓸데없는 의심을 할 필요가 없단 말입니다.

그러나 진여불성(眞如佛性)은 아직 안 봤으니까 아, 진여불성이 뭣인가? 그것은 의심해도 무방하겠지요.

그러나 부질없이 아, 내가 뭣인가, 네가 뭣인가, 자연과 인간은 뭣인가 말입니다. 또는 물질(物質)은 뭣인가, 또는 전자(電子)는 뭣인가, 원자(原子)는 뭣인가, 이런 등속의 의심은 할 필요가 없단 말입니다. 이렇게 의심하다가는 한도 끝도 없이 의심이 됩니다.

그러기에 부처님당시에는 그따위 것을 물으면은 천지(天地)가 어떻게 구성되었습니까? 또는 뭣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렇게 분석적(分析的)인 것을 물으면은 부처님께서는 아예 대답을 안 해버렸습니다. 그것보고 사치(捨置)라. 버릴 사(捨)자, 둘 치(置)자 말입니다. 그냥 대답 안 해버린단 말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그런 등속의 대답을 하려고 생각할 때는 시간이 한도 끝도 없는 것이고 또는 옛날 무식한 시대 사람들이 알아먹을 수 없단 말입니다.

허나 다행히 지금은 물리학(物理學)도 생기고 뭣도 생기고 해서 웬만한 문제는 척척 다 안단 말입니다. 중학교만 나와도 다 원자구조(原子構造)론을 배우지 않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지금은 부처님법문으로도 내 본질(本質)은 뭣이고 우주의 본질은 뭣이다. 이런 것을 말씀을 그대로 한다 하더라도 누구나가 다 그렇거니, 증명(證明)을 내가 미처 못 했어도 납득은 가구나. 또는 물리학적으로도 분석하고  들어가면 나중에는 텅텅 비어버린다. 공(空)이 된다. 이러한다고 생각할 때에 이것은 부처님께서 말씀한신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 말씀하신 제법공(諸法空) 도리와 하나가 아닌가. 이렇게 생각한단 말입니다.

따라서 현대인들은 의심도 많고 또는 배우는 것도 많단 말입니다. 자기는 예술을 공부하는데 지금 미학적(美學的)으로 아름다움의 근본은 무엇인가? 이런 것도 의심이 생기겠지요. 또는 윤리도덕(倫理道德)의 근본은 뭣인가 말입니다.

옛날 2000년전에사 무슨 뭣을 배웠겠습니까. 무식한 사람들은 무슨 미학을 알것입니까. 뭘 알것입니까. 그러나 현대(現代)는 과학(科學)도 알고 또는 미술(美術)도 알고 음악(音樂)도 다 안단 말입니다. 다 알긴 알지마는 겉만 알지 근본본질(根本本質)은 모른단 말입니다. 그러나 본질에 대해서 의심(疑心)은 다 갖습니다. 의심을 다,

그런 의심을 못 풀어 버리면 참선(參禪)방에 앉아서라도 불현듯이 문득 의심이 나온단 말입니다. 그럼 잘 못하면 고놈 푸니라고 몇일 동안 가버립니다. 저 같은 사람도 참선(參禪)하는 중으로 해서 한 50년 거의 참선을 했으니까 경험을 무던히 했지 않았습니까. 몇시간 동안 망상(妄想)도 해보고 말입니다. 몇시간 동안도,

따라서 이렇게 저와 같이 시행착오(施行錯誤)를 않기 위해서 대승적(大乘的)으로 공부를 해야 쓴단 말입니다. 또는 참선은 그렇게 우선 여실지견(如實知見)이라. 바른 지견을 갖고 참선을 해야 그래야 참선이 되는 것입니다. 참선이라고 말도 붙인단 말입니다.

우리는 그런 도리를 꼭 느껴야 씁니다.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딱 풀어버려야 쓴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선(禪)도 사교입선(捨敎入禪)이라. 먼저 교(敎)를 닦아서 적어도 체용성상(體用性相)이라. 우주(宇宙)의 현상(現象)과 본체(本體)는 무엇인가? 또는 절대(絶對)와 상대(相對)관계는 무엇인가? 이런 관계를 납득하고 앉아야 참선(參禪)이란 말입니다. 그래야 마음이 열립니다. 그래야,

그런 작업은 철학을 오랫동안 공부 안 하면은 안 되지 않겠는가. 이렇게 반문할 분도 계십니다만 어려운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어려운 것이,

무수한 성자(聖者)가 이미 증명을 다 했고 또 지금도 역시 개인적인 문제가 근본 본바탕을 모르면 풀 수가 없단 말입니다. 미개한 원시시대(原始時代) 같으면 의식주(衣食住)만 있으면 다 되겠지요. 다른게 필요가 없단 말입니다.

그러나 현대(現代)는 의식주로 해서 이 문화생활(文化生活)을 풀 수 있는 문제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지금 전기(電氣)를 쓰고 있는데 전기의 원인은 무엇인가? 전자(電子)란 대체로 어디서 나온 것인가 말입니다. 이런 의문을 안품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또는 이런 의문을 해결하지 못하면은 이 컴퓨터라든가 여러 가지 현대의 원자문명(原子文明), 원자문명에 대해서 우리가 바르게 사용도 못 한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막혀있는 불안한 생활을 풀어 버려야 우선 마음이 가볍습니다. 이렇게 더운 때 불안스러우면 더욱 덥지 않습니까. 내가 불행(不幸)하다. 그것도 역시 불안스럽지 않습니까.

그런데 불행도 불행의 씨앗이 무엇인가? 불행 이것이 나한테 필요 없는 불행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별로 불행이 불행으로 안 되어 버린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생활의 그런 모순(矛盾)상황, 현대 막혀있는 생활을 좀 숨통을 트이기 위해서는 꼭 아까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주(宇宙)와 인생(人生)의 근본도리(根本道理), 생명(生命)의 본체(本體)인 불성(佛性)자리, 하나님 자리 또는 저쪽 하늘자리 말입니다. 이런 자리를 풀어야 쓴단 말입니다. 풀어 버려야 숨통이 트입니다. 예술(藝術)을 창작(創作)하거나 어떤 면에서나 과학도나 그런 자리까지 가버려야 쓴단 말입니다.

저는 요즘도 가끔 이따금은 하도 마음이 내켜서 헬렌 켈러(Helen Keller,1880-1968) 저서를 가끔 봅니다. 헬렌 켈러는 다 아시지 않습니까. 세계(世界)3대 귀재 가운데 하나란 말입니다. 귀머거리인 동시에 소경이고 또는 벙어리란 말입니다. 벙어리, 우리는 하나만 되어도 그냥 숨 가빠서 죽을 지경 아닙니까.

이렇게 이 자리 앞에서 큰소리치는 저라도 지금 당장에 눈이 딱 멀어 버린다고 생각할 때는 상당히 고민을 느끼겠지요. 하물며 소경이 되고 또는 벙어리 되고 귀머거리고 말입니다. 이 세 가지 장애인이라고 생각할 때에 살맛이 정말 조금도 없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어떡해서 그와 같이 위대한 사람이 됐는가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데에 인생(人生)의 기적을 느끼는 것입니다. 인생은, 그런 사람들도 위대한 창작(創作)을 할 수 있는 인물이 된단 말입니다. 여기에 인간성(人間性)의 존엄(尊嚴)이 있습니다. 그러면은 이 헬렌 켈러는 어느 누구한테 영향을 제일 받았는가?

이것은 스웨덴보리(Swedenborg,1688-1772), 스웨덴보리라는 분은 대체로 아시는 분은 아십니다만 스웨덴 사람인데 200년 전에 나오신 분입니다. 이 분은 원래는 자연과학도(自然科學道)인데 이 분은 나중에 자연과학(自然科學)을 연구하다 보니까 자연의 본바탕은 뭣인가 말입니다. 꽃이 피고 잎이 지고 그 원인은 뭣 인가? 조그마한 눈곱만한 씨앗 가운데서 큰 나무가 되어나오는 그 원인은 뭣인가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 그 자연과학을 연구하다 보니까 우주(宇宙)의 신비(神秘)에 대해서 감탄을 아니 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종당에는 그냥 과학 내던져 버리고서 기독교(基督敎)신앙과 또는 불교(佛敎)신앙과 말입니다. 또 그리스 종교와 모든 종교(宗敎)에다가 눈을 떠 가지고서 공부 했단 말입니다. 그래가지고서 천계(天界), 우리 인간이 볼 수 없는 하늘나라 소식을 다 본단 말입니다. 천사하고 같이 대화도 하고 이따금 귀신과도 말하고 말입니다.

이런 말씀을 제가 드리면 지금 20세기인데 21세기 넘어가는 문턱인데 저 사람은 승려니까 그런 케케묵은 소릴 한다. 이렇게 생각 하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천사가 있고 귀신이 있습니다. 다만 억울하게도 우리 인간이 못 본단 말입니다. 스웨덴보리나 헬렌 켈러는 다 본단 말입니다. 헬렌 켈러 역시 스웨덴보리한테 그 영향을 받아 가지고서 영원(永遠)의 세계 천상세계(天上世界)를 훤히 본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소경이 되고 귀머거리가 되고 또는 벙어리가 됐지마는 일반 여느 정당한 사람보다도 훨썩 더 총명하단 말입니다. 정당한 사람이 모르는것을 많이 안단 말입니다.

그러고 헬렌 켈러가 한 말이 이러한 능력은 스웨덴보리한테 영향을 받은 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사람한테도 다 있습니다. 다 있는데 다만 저는 개발을 하고 여느 사람들은 그놈의 탐욕심(貪慾心), 또는 분노하는 마음, 탐욕심과 분노하는 마음 또는 영원성(永遠性)을 인정하지 않는 마음 말입니다.

우리 인간의 병 가운데 가장 무거운 병이 무슨 병인가? 이것은 우리가 보는 것이 전부고 우리가 안 보이는 세계는 인정 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께서 정말로 그런 무거운 병은 고치셔야 씁니다. 무거운 병을 못 고치면은 그때는 불자도 못 되고 기독교인도 못 되는 것입니다. 영원성(永遠性)을 하나님이라고 말하나 어떻게 말하나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 생명은 바로 영원성에다 뿌릴 두고 있단 말입니다. 또는 우리마음 자체가 바로 영원불멸(永遠不滅)의 존재입니다.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우리마음 그대로 영원적인 낳지 않고 죽지 않고 더하지 않고 덜하지 않고 바로 불심(佛心)이란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 마음이란 말입니다.

우리 몸뚱이는 뭣인가? 이런 몸뚱이는 이것도 역시 영원불멸(永遠不滅)한 마음위에 이루어지는 하나의 형상(形象)이란 말입니다.

풀 위에 맺힌 이슬같이 또는 아침에 낀 안개 같이 말입니다. 또는 봄날에 저 멀리 끼어있는 아지랑이 같이 이렇게 끼어 있는 것이 이것이 우리 몸이란 말입니다. 산골짜기에서 메아리가 울리지마는 메아리가 실체(實體)가 아니듯이 우리 몸은 이것은 실체가 아닌 것입니다. 실체가,

우리가 병 때문에, 병에 앓고 있는 잘 못 본 우리의 눈으로 보기 때문에 나와 같이 내 몸은 이것이다. 그대 몸은 이것이다. 저 사람 미운사람이다. 이렇게 보는 것이지 이런 것은 아지랑이나 또는 산골에서 메아리치는 메아리나 똑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메아리를 실체(實體)로 본단 말입니다. 허상을 사실로 봅니다.

대단히 더우신데 제 말씀이 장황해서 죄망스럽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말씀 더 드리고 끝을 맺겠습니다.

우리 불행은 딴 데가 있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바른 철학(哲學)을 갖지 못하고 바른 가치관(價値觀)을 갖지 못해서 말입니다. 허상을 사실로 본단 말입니다. 우리가 사랑한다고 그래서 사랑스러운 것이 특별히 어디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밉다고 그래서 미운 실체가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중생들이 그런 허상을 자꾸 부풀려서 미운사람은 더욱 더 밉게 보이고 말입니다. 좋은 사람은 더욱 좋게 보인단 말입니다. 이런데 가서 우리 불행(不幸)이 있습니다.

감투가 좋은 것도 아닌데 감투 이것도 역시 허상인데 말입니다. 감투 때문에 공연히 성불(成佛)해야 할 우리 생명을 낭비한단 말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우리가 본래가 부처기 때문에 꼭 부처가 되어야 쓰는 것입니다. 부처의 길로 일로매진(一路邁進)해야 쓰는 것인데 그러지 않고서 사실 있지도 않은 행복(幸福) 되지도 않는 감투 말입니다.

물질(物質)이 절대로 우리한테 행복 주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때 우리 행복을 최소한도, 충분 한도도 못되고, 최소한도의 것을 보장하는 것이지 물질은 이것은 본래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있지가 않은 것이니까 우리 행복을 보장을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물질이 없다 하더라도, 사실은 물질은 없는 것입니다.

산도 냇도 또는 황금도 물질이 아니란 말입니다. 다만 황금 같은 모양을 지금 냅니다. 돌 같은 모양을 냅니다. 그런 것이지 그것이 실지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모두가 다 영원성(永遠性)의 우리 불생불멸(不生不滅)하고 낳지 않고 죽지 않고 늙지 않고 젊지 않고 말입니다. 영원히 그대로 있는 불성이 그때그때 전자(電子)가 되고 그때그때 진동해서 전자같이 보이고 양자(陽子)같이 보이고 말입니다. 그때그때 진동해서 산소같이 보이고 그런 것들이 모여서, 금의 원소가 모이면 금같이 보이는 것이고 또는 탄소가 모이면 탄소가 결정되면 다이아몬드 같이 보이는 것이지 실지로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衆生)은 산소나 수소나 그런 자리는 현미경(顯微鏡)으로 보기 전에는 못 보는 것이고 우리 육안(肉眼)으로 봐서 빛나면은 금이다 뭣이다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허상(虛像) 때문에 우리가 공연스레 고통한단 말입니다. 금배지가 없어도 우리가 절대로 불행하지가 않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본질적(本質的)으로 살 시대(時代)입니다. 그렁저렁 허상 가지고 살 시대가 아니란 말입니다. 허상 때문에 자기도 괴로워하고 사람 사람끼리 싸운단 말입니다. 인류(人類)는 지금은, 지금 현대문명(現代文明)은 정말로 예수가 간 길 석가가 간 길 말입니다. 공자가 간 길 그런 간 길 쪽으로 우리 궤도(軌道)를 수정(修正)해야지 그러지 않고서는 우리 불행(不幸)은 절대로 면치 못 합니다.

우리는 지금 선택할 때입니다. 우리가 불행하다가 같이 멸망(滅亡) 당해야 쓸 것인가 말입니다. 지금 대한민국(大韓民國) 보십시오. 대권(大權)은 하나인데 대권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생명의 낭비를 합니까. 대권 그것은 뭣인가? 그것은 하나의 허상이란 말입니다.

꼭 예수나 석가나 공자나 그분들만이 인생을 바로보고 아까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여실지견(如實知見)이라, 진리(眞理) 고대로 사실대로 본분이란 말입니다. 지금은 사실대로 보고 사실대로 생활해야 될 시기란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은 정도의 차이 뿐인 것이지 다 누구나 불행합니다. 항시 불안스럽고 불행하고 남한테 숭배(崇拜)도 못 받습니다. 숭배도,

옛날엔 수승한 것도 잘 모르고, 보면 행동도 자기들이 비판도 잘 못했지마는 이 정보화시대(情報化時代)란 것이 그냥 다 알아버린단 말입니다. 어디가 지금 숨을래야 숨을 수가 없습니다. 혼자 가만히 비밀스럽게 뭐 할 수도 없단 말입니다.

따라서 이런 때는 성자(聖者)같이 행동해야 남한테 숭배를 받는 것이지 그렇지 못 하면은 누구한테나 숭배를 못 받습니다.

부처님은 이치(理致)가 아니라 하나의 생명(生命)입니다. 생명이란 말입니다. 생명이니까 생명은 생명으로 구해야 쓴단 말입니다. 생명으로, 부처님을 생명으로 구해야지 그냥 하나의 이치로 구해서 끙끙 앓을 필요가 없단 말입니다.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 보면 염불왕생원(念佛往生願)이라. 염불(念佛)이란 뜻은 뭣인가? 그 분별시비(分別是非) 좋아하는 사람들, 중국(中國)에서 들어온 문자(文字)만 가지고 따지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염불(念佛) 공부는 저 밑에 하근중생(下根衆生)이나 할 것이지 똑똑한 사람들이나 상근기(上根機)는 할 필요가 없다.

염불하면 생각 염(念)자, 부처 불(佛)자 염불입니다. 부처는 무엇인가? 부처는 내 생명(生命)의 본질(本質)인 동시에 우주(宇宙)의 본질(本質)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다시 바꿔서 말씀드리면 천지우주(天地宇宙)가 바로 부처란 말입니다. 천지우주가 바로 부처입니다. 그 부처를 생각하는 것이 염불이란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그 자리를 잘 납득을 못 하니까 우리가 이렇게 저렇게 방편(方便)으로 부처는 하느님이 저 하늘에가 어디가 있다고 하듯이 저 하늘에 있다가 우리가 애쓰고 부르고 외이고 생각하면은 우리를 돕는다. 이러는 것이지, 염불의 본뜻은 바로 내 생명을 내가 생각하는 것이고 내가 바로 우주의 본질을 생각한단 말입니다. 부처와 나와 둘이 아닌 것을 생각하는 그것이 염불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어떤 것이나 주문(呪文)이나 경(經)을 읽는 것이나 또는 화두(話頭)나 어떤 것이나 따지고 보면 다 염불입니다. 다, 또는 동시에 화두를 참구(參究)하는 것이나 주문을 외이는 것이나 경이나 모두가 다 염불의 뜻으로 돼있단 말입니다.

어떤 화두나 부처가 뭣인가?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뭣인가? 그렇게 아니 된 화두가 있습니까. 달마(達磨)스님이 서쪽에서 온 뜻은 뭣입니까. 이것도 역시 내내야 부처를 우리가 얻기 위해서 한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공부가 마음을 열어 버리면 결국은 하나란 말입니다. 하나, 그런데 부질없이 자꾸만 필요 없는 소모를 한단 말입니다. 필요 없는, 그러기 때문에 선방(禪房)에서도 부질없는 망상(妄想)을 굉장히 많이 합니다. 부처라고 하나 이뭣고 라고 하나 또는 무(無)자라고 하나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부르나 결국은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게 부질없는 소모를 않기 위해서 아까 제가 허두에 말씀드린 여실지견(如實知見)이라. 여실하게 모든 것은 우리 현상(現象)은 이것은 모두가 다 허망(虛妄)한 것이고 말입니다.

우리 중생(衆生)이 봐서 나요 너요 또는 금이요 은이요 하는 것이지 성자(聖者)가 본다고 생각할 때는 현상 이대로 바로 불성(佛性)이란 말입니다. 어떠한 것이나 부처님의 장엄(莊嚴)스런 모양입니다. 지금 강도나 그 징그러운 독사나 말입니다. 독사나, 이것도 역시 상(相)만 그러는 것이지 본바탕은 호리도 차이가 없는 진여불성(眞如佛性)의 하나의 장엄스런 모습이란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화엄경(華嚴經)에서 화장세계(華藏世界)라, 천지우주가 우리가 다시 만들어서가 아니라 생긴 이대로 벌써 장엄스러운 찬란스러운 부처님세계란 말입니다. 공부를 이렇게 알아버리고 마음으로 안심(安心)을 딱 해버려야 쓴단 말입니다.

내가 지금 당장에 죽어도 그림자 같은 본래 없었던 메아리 같은 그것만 지금 바꿔지는 것이지 죽음은 없다. 죽을 때에 아프기도 하고 하겠지요. 중생(衆生)이사, 그러나 이치(理致)는 그런 겁니다. 이치는, 도리(道理)는 그런 것이니까 도리가 사실이란 말입니다. 사실이라, 우리는 사실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 도리(道理)를 저 같은 시원찮은 사람이 말한 것이 아니라 석가모니(釋迦牟尼)나 달마(達磨)스님이나 가장 거짓말 않는 공자나 또는 예수나 그분들이 말했단 말입니다. 그분들은 무슨 억하심정으로 거짓말 하겠습니까.

따라서 그분들 말씀을 믿는 것이 우리 신앙(信仰)입니다. 그분들 말씀을 딱 믿어버린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가 불안의식 때문에, 불안 때문에 이 더위에 더욱 더워지고 말입니다. 그렇지 안 해도 인생고해(人生苦海)인데 그렇지 안 해도 실패도 많이 있고 불여의(不如意)가 많이 있는 것인데 더욱더 고생을 심각하니 더 고생스럽게 할 필요가 없단 말입니다.

정말로 100% 믿는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한테는 불행(不幸)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행복(幸福)스러웁게 되는 것은 가장 쉬운 길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우주(宇宙)의 도리(道理)에 따른단 말입니다. 우주의 도리에, 우주의 도리라는 것은 뭣인가? 이것은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이 우리가 보고 안 보고 상관없이 천지(天地)는 오직 영원적인 부처님의 불성(佛性), 자비(慈悲)나 지혜(智慧)나 행복(幸福)이나 능력(能力)이나 다 갖추고 있는 모든 면에서 완벽한 생명(生命)으로 되어 있단 말입니다. 그런 생명은 온전히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나무도 풀도 다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깨달은 사람들은 그 순간 책상머리에서도 금색광명(金色光明)이 빛나고 말입니다. 또는 간시궐(幹屎厥)이라. 똥 마른, 똥 묻은 막대기에서도 금색광명이 빛난단 말입니다.

부처님은 그와 같이 완벽한 생명인지라 귀머거리도 아니고 또는 소경도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가 행동을 바르게 하면은 생명자체인 부처님은 우리를 훤히 보신단 말입니다. 우리 행동을 잘 못하는 것도 훤히 보십니다. 우리가 부처님 하고 부르면은 오, 주여! 하고 부르거나 또는 알라를 부르거나 말입니다. 또는 관음보살(觀音菩薩)을 부르거나 이 뭣고 화두(話頭)를 하나 우주의 생명, 우주의생명인 동시에 내 생명은 다 아신단 말입니다.

또한 그 부처님은 무량의 신비로운, 신비부사의(神秘不思議)하고 절대적으로 가능한 그런 자리기 때문에 모든 능력을 다 갖춘 자리기 때문에 우리가 진정으로 부처님을 꼭 내가 봐야 쓰겠다. 내가 안 보이면 어떻게 될 것인가? 부처님이시여 저한테 신심(信心)을 좀 돋우기 위해서 꼭 모양 좀 보여주십시오. 이렇게 빈다고 생각할 때는 어느 날 그때는 불현듯이 부처님 광명(光明)이라든가 훤히 빛이 분명히 오는 것입니다. 분명히,

부처님이 소경이 아니고 바보가 아니거니 우리 정성에 안 통할 수가 있겠습니까. 안 통하면 그때는 바보겠지요. 꼭 우리가 정말로 구한 만치, 구한 만치 거기에 응답이 있습니다.

바이블도 보십시오. 바이블도 그야말로 참 두드리면 문이 열리고 말입니다. 그마만치 구하면은 꼭 응답이 꼭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 마태복음서 제가 좋아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마태복음서 62절인가 63절인가 합니다마는 그대의 손과 그대의 발이 죄를 범하면은 바로 찍어 내려라. 찍어 내려란 말입니다. 도끼나 칼이나 톱이나 그런 걸로 해서 바로 찍어 내리란 말입니다. 그대의 눈이 죄를 범하면은 그대의 눈을 떼내버려란 말입니다. 그대가 병신인 채로 천국(天國)에 가는 것보다도 그대가 죄를 범한채로 불구덩이에 던지는 것이 훨썩 더 불행하니라.

종교(宗敎)나 또는 철학(哲學)이나 무슨 신앙(信仰)이나 모두가 다 무서운 결단(決斷)이 필요합니다. 우리 습관(習慣)이 너무나 나쁜 습관이 많이 붙어 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같이 우리 중생(衆生)은 없는 것보고 분명히 있다 한단 말입니다. 없는 것보고, 미운 것도 없는 것이니까 하고 말입니다. 너무 좋다고 그래서 좋아 하는 것도 그것도 없는 것인데 우리가 그런단 말입니다. 자기 권속(眷屬)만 좋은 것도 아닌데 우리가 좋다 한단 말입니다. 이런 것은 모두가 본래로 없는 것입니다.

본래로 없는 것 보고 있다고 하는 것은 사실은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우리 눈이 잘 못보고 우리 손이 지금 잘못 행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 그 잘못 본 자기눈깔을 그냥 떼내버린단 말입니다. 그런 결단, 그런 정도의 결단이 있어야 씁니다.

아무튼 자기라는 관념(觀念)이 가시지 않고서는 도(道)를 얻지를 못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귀머거리가 아니고 소경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하면 구한 만치 얻어집니다. 행복되기는 참 쉽습니다. 천지우주(天地宇宙)의 도리에 따르면 되는 것입니다. 사실대로 보고 사실대로 우리가 느끼면 쓰는 것입니다.

사실은 무엇인가? 사실은 부처님 아닌 것이 아무것도 없단 말입니다. 참선(參禪)도 염불(念佛)도 그렇게 해야지 화두(話頭)를 애쓰고 의심(疑心)한다고 하면서 옆에 사람이 부시럭거려도 기분 나빠 가지고서 시비(是非)하고 그러면 그거 참선태도 아니란 말입니다.

뭐 다소곳이 자기라는 교만심(驕慢心)이라든가 분별시비(分別是非)를 버려야쓴단 말입니다. 모순(矛盾)을 버려버려야 공부가 되는 것입니다. 또는 애쓰고 공부하면은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차근차근 모서리가 떨어진단 말입니다.

아까 영운스님, 영운스님도 30년 동안이나 분별시비(分別是非)도 많이 하고 미웁기도 하고 사랑도하고 모다 했겠지요. 그러나 공덕(功德)이 쌓이고 쌓여서 말입니다. 공덕이 쌓이고 쌓여서 그것이 성숙(成熟)되니까 어느 날 30번이나 남어 보고 느끼고 모다 한 그런 복숭아꽃 봄으로 해서 퍼뜩 깨달아버렸단 말입니다.

우리가 공덕만 세워두면은 나와 남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만 배불리 먹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자기만 배불리 먹고 자기 이웃사람이 굶는 것을 보는 것은 이것도 역시 잘 못 보는 것이고 잘 못 행동하는 것입니다.

천지우주(天地宇宙)의 도리(道理)라는 것은 이것은 조금도 사(私)가 없습니다. 사(私)가, 자기만 옷을 잘 입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바르게 산다고 생각할 때는 아까 스웨덴보리나 또는 헬렌 켈러가 다 본 바와 같이 우리도 사(私)만 떠나면은 천사가 보이는 것입니다. 호법선신(護法善神)도 보이고 귀신(鬼神)도 우리한테 와서 꾸벅꾸벅 절하고 우릴 돕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천지신명(天地神明)의 가장 기본적인 생명(生命)의 부처님께서는 오죽 하겠습니까. 중생(衆生)이 부처를 생각하면 부처는 바로 우리를 굽어보고 우리를 돕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셔서 우선 꼭 여실지견(如實知見), 바른 견해(見解), 바른 철학(哲學) 지금 바른 철학을 꼭 요청 될 때입니다. 바른 철학이 없으면은 어느 분야에서나 바르게 못 합니다. 공장도 바르게 못 하고 기업도 바르게 못 하고 말입니다. 다 바르게 못 합니다.

바른 스승, 바른 부모, 바른 친구, 바른 아내, 바른 어버이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꼭 여실지견, 진리(眞理)에 맞게시리 도리(道理)에 맞게시리 바른 지혜(智慧)를 가지셔야 씁니다.

이렇게 하셔서 금생(今生)에 올 여름에 꼭 본래(本來) 갖추고 있는 그 자리 꾸어온 것도 아닌 것이고 값 주고 사온 것도 아닌 것이고 말입니다. 본래 그 자리를 성취(成就)하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오늘 말씀을 마칩니다.


19920705-태안사 정기법회-청화대선사 설법

19920705-정안 이철건 촬영

20050903-본정 김영동 DVD작업

20080610-주안 한동일 워드작업


* 본 법문은 동영상 자막작업용으로 큰스님 말씀

그대로 정리한 글입니다.*




<본문과 관련된 큰스님 친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