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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4. 금강륜

제68호 화순 정광사 중창 대법회

               <제 68 호>

* 1984년 10월27일 화순 정광사 중창 대법회 *


여불유인(與佛有因) 여불유연(與佛有緣)


이 세상에서 가장 찬란스럽고 아름다운 것을 가리켜서 만다라(曼多羅)라고 합니다.  지금은 만다라라는 말을 너무나 속화를 시켜서 야릇하게 해석을 합니다만 원래 만다라(曼多羅)라는 뜻은 모든 진리(眞理)나 장엄(莊嚴)이나 행복(幸福)이나 어떠한 것도 다 갖춘 공덕(功德), 완벽한 공덕, 완벽한 행복 이것이 만다라 뜻입니다. 불교적(佛敎的)인 어려운 말로 하면은 원만구족(圓滿具足)이라. 일체를 원만히 갖추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는 제가 보기에는 마치 만다라 같습니다. 부처님의 장엄형상(莊嚴形象)을 모셔있고, 또한 동시에 부처님의 참다운 정법(正法)이 이 가운데서 꿈틀거리고 숨 쉬고 있고, 또는 부처님 법을 간절히 따르는 우리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이렇게 여법히 모여 있습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삼보(三寶)와 또는 이와 같은 장엄스러운 법회(法會)를 생각해 본다고 할 때에 이것은 과연 만다라입니다. 일체가 다 갖추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름에 더울 때에 수고하다가 가을 되면 생각을 많이 합니다. 지금 제가 바라보는 저 만치 멀리 아늑한 산들이 둘러싸고 있습니다. 꼭 저 산 넘어 무엇이 있을 듯한 그 무엇, 우리가 바라는 행복이 꼭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는 그러한 간절한 사색(思索)의 계절입니다.

우리가 찾는 그 무엇인가? 이것은 표현은 다르다 하더라도 역시 이것은 우리의 완전한 행복입니다. 어떤 누구나가 규모는 작고 크고 그런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모두가 다 완전한 행복을 구합니다.

그러면 또 행복은 무엇인가? 우리가 행복을 풀이하는데 앞서서 우선 흔히 말하는 인연법(因緣法), 인연법을 다시 생각을 해 보십시다.

인연(因緣) 그러면은 이것은 우리가 일상적인 말에서는 참 쉬운 말입니다. 그저 모두가 인연이다. 사는 것도 인연이다. 좋은 것도 인연이다. 마치 운명(運命)이나 신명(神命)같이 인연을 우리가 받아들입니다.

이런 때 운명적인 그런 말은 별로 실체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런 때 인연이란 말은 역시 별로 깊이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상식적인 의미에서 인연법을 생각해 봅니다. 허나 조금 더 들어가서 우리가 모든 것을 인연이라 하는데 그 인(因)과, 그 원인(原因)과 또는 원인을 이끌어서 결과를 맺게 하는 그런 연(緣)은 무엇인가? 생각할 때는 그때는 좀 복잡해집니다.

이것은 과학(科學)이나 철학(哲學)이나 그런 범주(範疇)까지 나가야 쓰겠지요. 따라서 우리가 인연을 소박하게 생각하지 않고서 깊이 알려면 적어도 인과 연의 그 소재, 대체로 인은 무엇이고 연은 무엇인가? 내가 이렇게 불행(不幸)한데 내가 불행한 원인은 무엇이고 또는 연은 무엇인가? 이렇게 생각 안 할 수 없습니다.

사리불 존자는 부처님 제자 가운데서 지혜(智慧)가 제일 수승(殊勝)한 분입니다. 그렇게 많은 대중들이 있지만은 그렇게 불제자가 많이 있지만은 가장 지혜제일(智慧第一)이라, 지혜가 수승한 명실공이 사리불입니다.

사리불(舍利弗)존자가 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님을 만나시기 전에 스승을 찾아 헤맸단 말입니다. 자기 스승이 없는 바가 아니지만은 별로 자기 마음에 합당하지가 않단 말입니다. 무엇인가 그렇게 석연치가 않거든요.

그래서 이래저래 헤매는데 한 번은 시내 나가서 걸어가니까 저 만치 먼발치로 오는 분이 아주 당당한 분이 있단 말입니다. 위의도 그냥 그렇게 위장(威莊)스럽고 조금도 그 태도가 구김살이 없어 보인단 말입니다.

그래서 사리불이 생각하는데 저 분은 틀림없이 어떠한 무상대도(無上大道)를 무상진리(無上眞理)를 아는 분이구나 이렇게 생각이 든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의 곁에 가서 물어봤단 말입니다. ‘대관절 당신은 어떤 법을 가지고 있관데 그와 같이 조금도 흠이 없이 구김 없이 그렇게 의젓합니까?’

이렇게 물어보니까 사리불 존자가, 그때는 사리불 존자가 미처 안 되었고 사리불이 하는 말이 ‘제가 뭘 알아서 위대한 것이 아니라 저를 가르친 스승님이 위대합니다.’ 그렇게 말하니까 사리불이 제차 묻기를 ‘그러면은 당신을 가르치는 스승은 누굽니까?’ 그렇게 물으니까 그의 말씀이 그때는 고타마 석가(Gautama Buddha)라고 하거든요.

고타마(Gautama), 석가모니 부처님의 이름 아닙니까. 그러니까 사리불이 하는 말이 그러면은 고타마가 대관절 어떠한 법문을 당신한테 말씀해서 지금 어떻게 공부를 하건데 그와 같이 당신은  얌전하고 그렇게 당당하니 조금도 그렇게 마음으로 흠이 없어 보이는가 물었단 말입니다.

헌데 그분 말씀이 제법종연생(諸法從緣生)이요. 역종인연멸(亦從因緣滅)이라.- 모든 법은 일체만법(一切萬法)은 이것은 인연 따라서 잠시간 이루어지고 말입니다. 또한 동시에 인연 따라서 멸(滅)한다.-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고 말씀했단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 누구나가 소박한 도리는 다 압니다.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이것은 멸(滅)한단 말입니다. 나쁜 것 좋은 것 모두가 인연 따라서 이루어지고 인연 따라서 없어지고 또는 변화가 됩니다.

헌데 이와 같이 소박한 말, 간단한 말 가운데서 불교의 일체 심수오묘(深邃奧妙)한 진리(眞理)가 다 포함돼 있습니다. 어째서 그런고 하면은 가사 인연이 무엇인가? 인과 연, 연은 비록 우리가 모든 환경이나 조건이 연이라 하더라도 그러면은 그 원인, 인은 무엇인가? 이렇게 생각 할 때는 굉장히 문제가 어렵습니다.

나의 원인은 무엇인가? 나의 원인은 나를 이렇게 키우게 만드는 여러 가지 영양소나 또는 내 부모(父母)도 역시 다 원인이 되겠지요.

그러면은 더 올라가서 소급해 올라가서 부모는 또 그 원인은 무엇인가? 불교 말로 어려운 말로 하면 부모미생전본래면목(父母未生前本來面目)이라. ‘부모가 미처 안 낳은, 낳기 전의 그 본래면목은 무엇인가?’ 내 부모는 또 올라가면 그때는 조부모(祖父母)가 있겠지요. 조부모 올라가면 그때는 증조부모(曾祖父母)가 있겠지요. 이렇게 다 소급해 올라가서 가장 시초(始初), 가장 최초(最初)의 원인은 무엇인가? 이렇게 생각할 때는 우리가  알 수가 없단 말입니다.

이러한 가장 시초의 제일원인(第一原因), 제일 최초원인, 최초원인을 밝혀서 우리 인생(人生)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이 이것이 부처님 인연법(因緣法)입니다.

우리가 운명이다. 또는 그렇고 그런 것이다. 이와 같이 느낄 때는 별로 의미가 없으나 방금 말씀 마따나 우리가 거슬러 올라가서 부모가 미처 낳기 전의 가장 최초의 제일원인, 어려운 말로 하면은 물(物)자체, 여기까지 안다고 생각할 때는 이것은 굉장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이런 문제를 깨달은 분은 역시 성자(聖者)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불교(佛敎)는 이러한 가장 제일원인, 근본적인 시초원인을 밝혀서 우리 인생(人生)을 완벽 된 행복(幸福), 이 길로 인도(引導)하는 것입니다. 헌데 여기서 우리가 우리의 제일 원인, 제일 원인을 설사 안다 하더라도 그 원인이 별 것이 아니고 무슨 흠집이 있다든가 또는 거기에서 포함 돼있는 여러 가지 공덕(功德)이나 능력(能力) 같은 것이 한정(限定) 돼 있다면 그것은 우리한테는 별로 큰 은덕(恩德)이 못 되는 것입니다.

헌데 제일원인은 이것은 일체 가능성(可能性)과 일체 행복(幸福)을 다 갖춘 것입니다. 불교 말로 하면 바로 불성(佛性), 진여(眞如), 또는 도(道)라든가 이것이 제일원인입니다.

나의 제일원인도 역시 부처고 또는 하나의 동물, 사람 외에 동물의 제일원인도 역시 부처입니다. 똑같은 진여입니다. 동물이 아닌 일반 식물도 역시 거슬러 올라가면 제일원인은 역시 이것이 부처입니다.

요새는 유전공학(遺傳工學)이 지금 상당히 아주 훤전 돼 있습니다. 유전공학을 우리가 모르면 그냥 마치 현대인(現代人)이 아닌 것처럼 이와 같이 유전공학을 상당히 지성인(知性人)들은 많이 말하고 있습니다.

어째 그러고 하면은 사람이나 또는 사람 외에 동물이나 식물이나 또는 무생물이나 모두가 다 가장 기본 분자, 가장 기본 분자가 뭣 인고 하면은 이것은 디옥시리보 핵산(DNA)이라. 디옥시리보 핵산이란 그런 유전 분자가 결국은 사람이나 또는 개나 돼지나, 나무나 모두가 다 그런 것을 이룩한 가장 시초의 분자라 합니다. 따라서 바꿔서 말 하면은 일체 모두가 다 그런 핵산이 들어있단 말입니다.

비록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라 하더라도 역시 내내야 분석해 보면 하나의 핵산으로 부터서 이루어졌단 말입니다.

그럼 핵산은 무엇인가? 핵산은 역시 산소나 수소나 탄소나 질소나 인산이나 이런 각 원소를 합해서 핵산이란 분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산소나 또 그런 각 원소는 무엇인가? 이것은 각 원자의 구성체입니다.

그럼 그 원자는 무엇인가? 여러 가지로 소립자(素粒子)론에 관해서 원자(原子)의 기본 원리를 지금 탐구도 하고 있고 발견하려고 애쓰고 있으나 아직 확실한 것을 못 잡고 있습니다.

헌데 그러한 아까 말한 일체 생물(生物)이나 무생물(無生物)이나 만물(萬物)을 이룩한 그런 기본 분자, 기본 분자 역시 거슬러 올라가면 가장 시초 원인은 역시 부처입니다. 이것이 불성(佛性)입니다.

또는 더 미세한 각 원소 역시 따지고 보면 본래는 다 부처입니다. 제일 미세한, 사람이 지금 알똥말똥한 그런 소립자, 그런 것도 역시 근본은 역시 불성입니다.

물론 지금 과학자(科學者)나 그런 분들이 미처 변증(辨證)은 못 해 있고 확인은 못 해 있다 하더라도 부처님께서나 각 도인(道人)들은 다 그걸 소상히 밝히고 계신 것입니다.

인연이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면은 아까 말씀마따나 지금 과학은 미처 모르고 있는 가장 시초원인, 내 생명의 원인, 일체 만유의 원인, 고것을 딱 밝혀서, 밝힌 거기에 우리가 입각해서 깨달아야한단 말입니다. 즉 말하자면, 우리가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고 하면은 내 생명(生命)이나 또는 일체만유(一切萬有)의 생명인 그런 본질(本質), 그런 본질 이것이 불성(佛性)이고 또는 진여(眞如)고 말입니다. 불교 말로 하면 여래장(如來藏), 도(道), 열반(涅槃), 극락(極樂) 그런 이름이 많이 있습니다만 이런 것이 대관절 무엇인가?

이것이 아무런 공능(功能)이나 덕(德)이 없다 그러면 우리한테 별로 그것이 큰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허나 우리 시초인 동시에 일체만유(一切萬有)의 근본(根本), 근본 본질인 제일원인 불성 그것은 모든 공덕(功德)을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이 신앙(信仰)을 가질 때에 신앙을 바로 못 믿으면 즉 다시 말하면 망신(妄信)이나 맹신(盲信)을 하면은 그때는 우리 소중한 생명도 오염(汚染) 시키는 것이고 동시에 우리 주변도 오염을 시킵니다. 따라서 바로 믿어야 씁니다.

바로 믿을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바로 믿을려면 인연법(因緣法)을 즉 말하자면 인(因)과 연(緣)을 확실히 우리가 미처 증명(證明)을 못한다 하더라도 윤곽은 파악해야 한단 말입니다.

앞서도 언급을 했습니다만 인연을 알려면 이것은 차원(次元)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그냥 허두에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보통 상식적(常識的)으로 좋아도 인연이구나, 나빠도 인연이구나, 이와 같이 인연을 그냥 운명(運命)이나 숙명(宿命)으로 우리가 수용하는 태도, 이러한 차원이 있고, 

또 한 가지는 인연을 좀 밝혀서 인과 연을 나누어서 우리가 탐구(探求)를 한단 말입니다. 이와 같은 철학적(哲學的)인 과학적(科學的)인 방법이 있고,

또 한 가지는 우리가 닦아서 실제로 증명(證明)한단 말입니다. 즉 다시 말하면은 가장 최초원인, 가장 시초의 제일원인을 우리가 스스로 닦아서 증명한단 말입니다.

이러한 증명을 하는 이것이 종교(宗敎)입니다.

우리는 우선 우리 목전(目前)의 생활이 바쁩니다. 여러 가지 각박한 점이 많이 있습니다. 허나 우리 불교가 불교인 까닭은 무엇인고 하면은 우선 자기 사업문제, 자기 가정문제, 이러한 세속적(世俗的)인 문제는 이것은 낮은 차원인 것이고 불교인이 불교인인 점, 불교의 가장 소중한 문제는 무엇인고 하면은 아까 말씀마따나 내 생명이나 일체 생명의 근본 본질인 그 원인, 이걸 깨닫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지금 가정에서 더러 외시는 분들은 인제 몽수경(夢授經) 외시겠지요? 몽수경 말입니다. 몽수경은 아주 간단한 경 아닙니까. 어느 분들은 쉬운 경이라 합니다. 과연 참 그 말은 쉽습니다.

허나 몽수경 가운데서 그 조그마한 몇 구절 가운데 들어 있는 뜻이 심심미묘(甚深微妙)합니다. 나무관세음보살(南無觀世音菩薩) 나무불(南無佛) 나무법(南無法) 나무승(南無僧) 여불유인(與佛有因) 여불유연(與佛有緣)이라.

여불유인(與佛有因이라. 부처와 더불어서 원인이 있고 말입니다. 여불유연(與佛有緣)이라. 부처와 더불어서 연이 있단 말입니다.

다시 바꿔서 말하면 부처와 나와는 원인도 같고 말입니다. 여불유연이라. 부처와 나는 또 역시 연도 같이 모다 얽히고설키고 같이 있단 말입니다.

오늘 정광사(淨光寺) 중창 중수 법회입니다. 이와 같이 법회가 이루어지기 까지는 한 사람의 힘만이 아닙니다. 주지 스님이라 하는 보영(甫映) 스님의 힘이 물론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되겠지요. 그러나 그 뒤에 계시는 스님네들, 또는 우리 눈에 안 보이는 부처님이나 보살님들의 그런 가호력(加護力), 회장님 또는 여러 시주하신 신도님들의 노고가 어린 공덕, 이러한 연들이 모이고 합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어느 한 가지도 단 하나도 없으면 이 건물 못 집니다.

헌데 그러한 원인도 역시 아까 말씀 마따나 명명백백한 부처인 것이고, 그 연은 이것은 원인을 이끌어서 정광사가 지금까지 오게시리 만든 오늘 이런 만다라(曼多羅)같은 장엄스런 법회식(法會式)이 있게시리 만든 그 연, 그 연은 어느 한 사람의 힘이 아닙니다.

이것은 저 산 너머에 있는 하나의 풀포기도 정광사가 이루어진 그런 연의 하나가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 하면은 천지우주(天地宇宙)의 모두가 다 어느 것도 하나도 빠짐없이 거기에 연에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천지우주가 모두가 다 인(因)과 연(緣)뿐입니다. 나다 너다 하는 것은 모두가 다 인과 연으로 맺어진 얽힘, 얽힌 가운데 이루어지는 하나의 현상(現象)에 불과합니다.

너무 제 말씀이 딱딱하게 하나의 철학적(哲學的)으로 흘러버려서 조금 안 됐습니다만 그러면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만이 우리의 시초원인(始初原因), 우리 생명(生命)의 근본(根本)뿌리가 되어 있는 또는 일체 만공덕(滿功德)을 다 갖춘 그런 인(因)을, 인인 그런 불성(佛性)을 우리가 탐구할 것인가? 불성을 깨달을 것인가?

역시 말로 해서는 이것은 그림의 떡 모양으로 우리한테는 큰 덕(德)이 없습니다. 모처럼 말로 해서 인연을 좀 안다 하더라도 다소의 힘은 있다 하더라도 참다웁게 복덕(福德)이나 어떠한 것이 우리의 맛이 되고 활용이 될려면 우리가 깨달아야 씁니다. 우리 스스로 인(因)을 증명(證明)해야 쓴단 말입니다.

어떻게 우리 시초원인인 인(因)을 불성을 깨달아야 쓸 것인가? 이루어내는 여러 가지 방법이 많이 있습니다만 나라는 존재, 나라는 존재를 바르게 알지 못하면 그때는 안 됩니다.

제가 이런 말씀하면은 지금 우리 집에는 보다 더 어려운 일들이 많이 있는데 그런 나를 깨닫는다면 그것은 너무나 요원(遙遠)한 거리가 먼 말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근본만 깨달아 놓고 보면 기타 사소한 문제, 내 집안이 잘 되고 사업이 잘 되고 누가 아픈 병이 낫고 이런 문제는 전부가 다 해소가 되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불성(佛性)에 의해서 일체만유(一切萬有)가 다 불성 위에서 이걸로 해서 이루어져 놔서 시초원인인 불성만 깨달으면 그때는 모든 문제는 다 해소(解消)가 되고 맙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냥 지엽적인 문제, 지엽적인 문제는 그만큼 내버려둔다 하더라도 먼저 가장 시초 줄거리를 딱 들어서 고놈을 해결해야 씁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시초 원인인 우리 근본생명의 뿌리인 불성을 깨달아야 씁니다.

마갈타국(摩竭陀Magadha國)과 또는 코살라국(憍薩羅Kosalā國), 코살라국은 상당히 인접은 돼있다 하드라도 그 사이에는 아주 광야와 같은 사막 지대가 있단 말입니다. 불모지인 지대가 있어 가지고서 마갈타국에서 수행자가 코살라국 갈려면 며칠을 두고서 광야와 같은 그런 사막을 지나야 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마갈타국에 있던 두 수행자(修行者)가 아주 간절히 불도(佛道)를 구하는 수행자가 있단 말입니다. 두 수행자가 부처님을 친견(親見)하고서 부처님 말씀을 직접으로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치 흉년(凶年)이 들어버려서 많은 준비가 없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겨우 며칠 먹을 것만 가지고서 마갈타국을 출발했단 말입니다. 그러나 가다가 며칠 못가서 먹을 것이 다 떨어져 버렸지요. 그래서 광야에서 그때는 식량도 없이 지낸단 말입니다. 오랫동안 가뭄이 들어 놔서 물은 다 보타버리고 물을 마실 수 없단 말입니다.

두 수행자는 지금 목전(目前)에가 물이 없으니 금방 갈증 나서 죽을 지경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마치 오아시스가 거기에 있어 가지고서 조그마한 물이 있단 말입니다. 조그만치 물이 있는데 물에는 피라미들이 몇 십 마리가 살거든요. 그 물은 또 피라미들이 먹어야 쓰는 물이란 말입니다. 그 물이 없다 그러면은 피라미들이 금방 거기서 물을 못 먹고서 갈증 나서 죽을 지경이란 말입니다.

그러자 둘이 가던 수행자 가운데 한 분이 우리가 여기서 부처님을 못 만나 뵙고 죽어버린다 그러면은 부처님 나오시기가 그야말로  3000년 만에 한 번씩 나오는 우담발라화(優曇跋羅華) 꽃과 같이 어려운 것인데 차라리 저 피라미들이 불쌍하기는 하지만은 저 물을 마시고서 부처님을 우리가 만나러가자 한단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니까 한 수행자는 부처님 계율(戒律)에 살생(殺生)하지 말라는 것이 가장 중요한 으뜸의 계(戒)인데 우리가 그걸 알면서 그 물을 먹기 위해서 분명히 피라미들이 죽을 것인데 살생계(殺生戒)를 범(犯)할 것인가? 그러니까 나는 차라리 죽어 버린다 하더라도 그 물을 먹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닌게 아니라 안 먹겠다는 그 수행자는 물을 안 먹고서 그냥 갈증(渴症)때문에 거기서 죽어 버렸단 말입니다. 죽어버리고서 물을 마신 그 수행자만 가까스로 하여튼 천신만고(千辛萬苦)해서 그 사막을 헤쳐 가지고서 부처님 계시는 기원정사(祇園精舍)에 가서 부처님 법문(法門)을 들었단 말입니다.

부처님의 무상심심미묘(無上甚深微妙)한 위없는 법문(法門)을 들으면서 수행자가 그때는 눈물을 뚝뚝 흘린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아, 어째서 그대는 그와 같이 고마운 법문이라고 느끼면서 그렇게 눈물을 흘리는가? 그렇게 말하니까 수행자가 하는 말이 실은 다른 것이 아니라 저하고 같이 좋은 도반(道伴)인데 그 도반께서는 계율(戒律)을 잘 지키기 위해서, 계율 때문에 그냥 제가 마신 그런 물도 안 먹고 또는 피라미들을 위해서 물을 안 마셨기 때문에 죽어 버렸고, 그래서 이와 같이 부처님의 소중한 법문을 저만 듣고서 그 귀한 도반, 계율을 잘 지키는 도반이 미처 못 들었기 때문에 저는 하도 마음이 그렇게 슬프기도 하고 안타까워서 눈물을 흘린다고 하거든요.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대 말이 비록 갸륵하기는 하다 하더라도 역시 그대는 아직은 마음이 어두워서 바로 못 보는 소치로다. 지금 그대와 같이 오다가 물을 미처 안 먹고서 갈증(渴症)에 죽은 그 수행자(修行者)는 철저한 계행(戒行) 지키는 그런 공덕(功德)으로 바로 죽은 즉시에 도리천(忉利天)이란 천상에 태어나서 천상에 아주 찬란스러운 심심미묘한 꽃을 가지고서, 지금 가지고 내려와서 이렇게 나한테 뿌리고 있다. 그대는 비록 지금 안 보인다 하더라도 내 뒤에는 지금 그 천인(天人)이 천상(天上)의 미묘(微妙)한 꽃을 가지고 내려와서 나한테 뿌리고 나서 천인이 와서 내 뒤에 앉었노라!


저는 저번에 한 천주교(天主敎) 잡지를 봤어요. 어느 분이 저한테 갖다 주셔서 봤습니다만 거기 보니까 천당(天堂)과 지옥(地獄)이라는 문제에 관해서 같이 논의한 말씀이 거기 나와 있단 말입니다. 그 가운데는 신학대학교(神學大學校) 교수님들도 몇 분이나 계시고 아주 상당히 우수한 그런 신부님들도 계시고 한단 말입니다.

헌데 그 분들이 말씀한 것을 가만 제가 읽어 봤더니 그 분들은 천당도 지옥도 확실히 안 믿습니다. 한 댓분 나와서 말을 했는데도 그 분들이 모두가 천당, 지옥을 확실히 믿지가 않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불교(佛敎)를 믿는 분도 역시 극락(極樂)이나 지옥(地獄) 같은 것은 그냥 방편(方便)이다.  잘 안 믿습니다. 승복을 입은 우리 스님 네도 안 믿는 분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아, 마음만 있으니 마음만 깨달으면 극락이다. 마음이 더러웁고 마음이 괴로우면 그때는 지옥이다. 이렇게만 간단히 취급한단 말입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지옥도 있고 또는 귀신(鬼神)이 사는 아귀(餓鬼)도 있고 말입니다. 또는 무상대도(無上大道)를 깨달은 성자(聖者)가 사는 극락(極樂)도 분명히 있습니다.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것은,

단지 우리 중생(衆生)이 안목(眼目)이 어두워서 업장(業障)에 가리워서 미처 못 볼 뿐입니다. 우리 중생이 보는 시력(視力)은 지극히 협소한 것입니다. 어느 일정 된 파장 밖에는 우리 중생은 못 보는 것입니다. 가사 파장이 마이크로미터 그 이상만 돼도 못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자(原子)를 봅니까. 무엇을 봅니까.

그와 같이 우리 인간이 본다는 것은 너무나 제한 돼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은 천상(天上)도 못 보고 지옥(地獄)도 못 봅니다. 못 보니까 무수한 성자가 다 증명(證明)하고 생명을 다 닦아서 얻은, 닦아서 증명한 그런 걸 다 부인(否認)합니다.

예수님도 분명히 증명하셨건만 예수를 믿는 학자 그 분들은 부인합니다. 또는 회의(懷疑)합니다.

천상(天上)은 우리 인간보다도 더 정화(淨化)된 단계, 더 정화된 의식 상태에 있는 존재입니다. 극락(極樂)은 보다 더 정화된 존재, 천지우주(天地宇宙)의 실상(實相)을, 실상의 본질인 불성을 바로 본 단계의 의식 수준에 있는 그런 분이 존재하는 거기가 극락입니다.

우리 인간보다 저 밑에 있는 단계, 파장도 훨썩 거칠고 말입니다. 오염(汚染)된 중생이 사는 의식 수준, 거기가 아귀(餓鬼)요 또는 축생(畜生)입니다.

우리 중생은 다 그와 같이 눈에 보이는 것 밖에는 우리 중생(衆生)의 업장(業障)에 인간이라 하는 제한된 의식(意識)에서 보는 것이니까 안보이면 없다 합니다. 안보이면, 그러나 우리 믿음이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비록 안 보인다 하더라도 성자란 것은 거짓말을 못하는 것입니다. 비단 석가모니(釋迦牟尼) 한 분뿐만 아니라 예수님이나 또는 공자님이나 그 뒤에 우리 불교(佛敎) 가운데 나와 있는 무수한 도인(道人)들, 그런 성인들은 절대로 거짓말이 없습니다. 그런 분들은 다 시인하고 증명하고 우리한테 역설 강조한 것입니다.

허나 지금 사람들은 아까 말씀마따나 자기 업장 탓, 자기 미처 안 보이는 한계 상황, 그것은 관계하지 않고서 덮어놓고서 부인합니다.

불교라는 것은 그와 같이 아까 말씀마따나 우선 우리가 각박하고 우리 사업도 중요하고 여러 가지 중요한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만은 그러한 것은 지엽적인 문제입니다. 근본 줄기만 북돋으면 다 해결되는 문제입니다.

지금 우리 불교(佛敎)가 약간 좀 혼미(昏迷)를 거듭해 있고 또는 세계종교(世界宗敎)가 여러 가지로 혼란스러운 것은 무엇인고 하면은 아까 말씀마따나 근본(根本)을 미처 믿지를 못하고서 가지나 이파리 가지고 따지고 있기 때문에 그와 같이 혼미를 거듭하는 것입니다.

조금 지리 하십니다만 역시 이런 기회가 이렇게 많지가 않은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조금 지리하시더라도 제가 말씀을 좀 더 하겠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한 수행자(修行者)가 산에 가서 공부를 한단 말입니다. 한 7년 8년 공부를 하지만 공부가 앞으로 진전(進展)이 없단 말입니다.

아, 그런께 진저리가 나겠지요. 몸도 쇠약해지고 또는 여러 가지로 그냥 그때는 인간적(人間的)인 본능(本能)도 발동하고 말입니다. 공부가 잘 되면 별로 딴 욕심이 안 나고 삿된 사욕(邪慾)이 안 납니다. 허나 공부가 안 될 때는 그때는 자꾸만 망상(妄想)이 온단 말입니다.

자기 등골이 시원하고 가슴이 시원하고 머리가 시원하고 눈이 시원할 때는 그때는 망상이 별로 안 납니다. 저 하늘에서 내리는 꽃비도 보이고 말입니다. 찬란스러운 광명(光明)을 우리가 체험(體驗)할 때는 그때는 망상이 안 납니다.

허나 자기 업장(業障) 때문에 공부가 안 될 때는 그때는 자꾸만 망상이 온단 말입니다.

이 수행자도 그와 같이 망상이 오는 것이니까 아, 퇴굴심(退屈心)이 나거든요. 마치 그때 도적 떼들이 훔쳐가지고 잘 가져가다가 산중에서 길을 헤매가지고서 헤매다가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비록 눈에 안 보인다 하더라도 나쁜 귀신도 좋은 귀신도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 행동이 바르면 나쁜 귀신이 그때는 우리를 못 침범합니다. 좋은 귀신이 우리를 지키고 말입니다. 허나 우리 행동이 안 바르면 즉 말하자면은 우리 삼업(三業)이라, 우리 말이나, 생각, 행동이 안 바르면 그때는 나쁜 귀신이 방해합니다.

가사 우리가 불(佛)․ 법(法)․ 승(僧) 삼보(三寶)라. 삼보에만 귀의한다 하더라도 36부 신장(神將)이라, 그 신장이 우리를 딱 지키고 있단 말입니다. 우리가 오계(五戒)를 지키면 그때는 5×5=25라. 25신장이 우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파계무참(破戒無慘)한 짓을 하면 그때는 자꾸만 그냥 나쁜 귀신들이 우리를 방해한단 말입니다.

그런께 아까 말한 도적 떼도 나쁜 사람들이겠지요. 허니까 아, 그냥 귀신이 마귀에 끌려서 말입니다. 자기는 모르겠지요. 모르나 자기 마음으로 자기들도 몰라서 헤매는 가운데서 그냥 그 산중에서 쓰러져서 죽어 버렸단 말입니다. 그 사람들이 다, 그래서 훔쳐온 보물들이 그냥 여기 저기 산적(散積)해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마침 그 옆에서 아까 말씀마따나 7, 8년 동안 수행한 수행자가 봤단 말입니다. 보고서 공부가 잘 되면 이것저것 다 뿌리치고 산에 들어 왔으니 무슨 그런 것에 대해서 욕심이 나리오만은 공부가 안 되는 것이니까 아, 그때는 보화(寶貨)를 보니까 욕심(慾心)이 난단 말입니다.

저걸 내가 갖고 가서 차라리 이럴 바에는 나가서 편히 살아야 쓰겠구나. 이래서 산에서 내려간단 말입니다. 내려가서 보물이 너무 많으니까 내 혼자 안 되고 형제간 데려와서 가져가야 쓰겠구나. 이렇게 산을 내려가서 하산(下山)해 간단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저만치 천안통(天眼通)으로 해서 멀리서 보시다가 딱 보시고서 말입니다. 이 놈이 분명히 그릇은 그릇인데 닦으면은 성불(成佛)할 놈인데 이놈이 위기에 있구나. 이렇게 느끼고서 그냥 가장으로 화장으로 그때는 하나의 여승(女僧)을 만들었습니다. 여승을 말입니다. 오늘 여기는 여승 방이니까 여승 얘기를 제가 좀 합니다만 여승을 만들었단 말입니다. 비구니(比丘尼)스님을 만들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비구니 스님, 여승을 만들어 가지고서 여승이니까 눈썹을 아주 예쁘게 딱 그리고 말입니다. 연지를 빨갛게 칠하고 분을 바르고 그렇게 하도 혼란스럽게 화장을 시켜가지고 딱 그 사람, 즉 말하자면 아까 말마따나 보물을 자기 형제와 더불어서 가지고 가겠다는 그 사람 내려오는 길목으로 이렇게 다시 올라간단 말입니다. 여승이 말입니다.

자기는 비록 지금 마음이 동(動)해서 재물(財物) 때문에 마음이 어두워서 산을 내려가건 만은 역시 부처님 법을 닦는다는 여승이 화장을 한 것이니까 보니까 그때는 비위가 맞지가 않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때에 아, 산을 내려가는 비구수행자(比丘修行者)가 꼬집었단 말입니다. 여보세요 비구니 스님 그게 무슨 짓입니까. 그게, 감히 청정(淸淨)하고 그야말로 참 간소(簡素)하고 수행자(修行者)다워야 쓰는 여스님 네가 입에다 빨갛게 연지를 칠하고 그렇게 눈썹을 그리고 분을 바르고 그게 무슨 짓입니까? 그게,

그때 여스님이 아주 의젓이 말입니다. 엄연히 그때 하는 말이 물론 내 꼴이 우스운 꼴로 보이겠지요. 허나 수행자가 되어서 부모처자를 버리고 다 일체 욕망(慾望)을 버리고서 산에 들어 간 수행자가 되어서 기껏 눈앞에 있는 보물, 네 것도 내 것도 아닌 결국은 사라져갈 그런 보물, 그 때문에 눈이 어두워서 내려가는 당신은 나하고 똑같습니다.

그 말을 듣고서 역시 여태까지 닦아 온 것이니까 그때는 여스님도 모양은 그러나 그렇게 말은 제대로 하니까 얼마나 후회가 돼지요. 그것이, 거기에 마음을 돌이켜서 다시 산으로 올라가서 닦아서 아라한도(阿羅漢道)를 성취했다는 그런 법문이 있습니다.

여러 불자님들 우리는 세간제일락(世間第一樂)이라. 인생(人生)의 행복(幸福) 가운데서 가장 제일 안락(安樂)스러운 길을 압니다. 부처님 말씀대로 열반제일락(涅槃第一樂)이라. 열반락(涅槃樂)은 안락한 행복 가운데서 가장 최상(最上)의 행복(幸福)인 것입니다.

재산(財産)이나 또는 기타 이성(異性)이나 여러 가지가 있다 하더라도 역시 그런 것은 허망(虛妄)한 거품 같은 것에 쾌락(快樂)에 불과합니다. 허나 열반제일락(涅槃第一樂)이라. 우리가 마음 깨달아서 불성(佛性)을 증명(證明)한 그러한 것은 최상의 안락입니다.

우리 불자는 여기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 우리 불자입니다. 우리가 가사 향(香)을 쌌던, 지금 여러 신도님들 덕으로 해서 오늘은 참 그 귀한 향들을 많이 피워서 향훈(香薰)이 풍깁니다만은 향을 쌌던 종이를 만져 보고 우리가 냄새 맡아 보면은 비록 향은 거기에 없다 하더라도 향을 쌌기에 향이 거기에 훈기(薰氣)가 훈습(薰習)이 돼서 향기(香氣)가 풍긴단 말입니다.

그러나 어쩌다가 우리가 어디서 이렇게 쓰레기통을 들고 와 가지고서 그 쓰레기통 안에 생선이나 고기를 쌓았다고 합시다. 그러면 비록 고기는 없다 하더라고 그 쓰레기통 안이 고기를 쌓았다는 하나의 훈습이 되어서 비린내가 풍긴단 말입니다.

그러한 것은 우리의 태도나 우리 마음의 심행(心行)도 똑같습니다. 우리가 부처님을 생각하고 부처님 법을 행한다고 하면은 마치 그것은 향을 싼 종이 모양으로 우리 몸은 분명히 향기가 풍기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마음 청정(淸淨)하고 또는 계행(戒行) 청정한 스님네나 또는 여러 우리 신도분 옆에 가 서 보십시오. 이상하게 향기(香氣)가 풍기는 것입니다.

또는 그 반대로 계행을 무시하고 말입니다. 나쁜 것을 많이 먹고 그런 분들 옆에 가 서 보십시오. 그냥 또 악취(惡臭)가 풍기는 감이 있습니다.

우리 사람도 그렇거늘 하물며 사람보다도 더 많이 볼 수가 있고 후각(嗅覺)도 예민하고 그런 존재가 본다 할 때는 즉 다시 말하면 귀신(鬼神)이나 말입니다. 선신(善神)이나 그런 존재가 본다 할 때는 그때는 훨썩 더 예민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 한 번 먹기에도 아까 말씀마따나 그 마음 따라서 우리 몸이나 전체 분위기가 향(香)도 나고 또는 빛도 나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은 가장 보다 더 광범위하게시리 우리한테서 향내가 풍기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이러한 것은 역시 부처님을 생각하고 부처님 이름을 외이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아주 그냥 보통은 지성사회(知性社會), 지성적인 세계(世界)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때는 불교(佛敎)를 우리가 신앙(信仰)을 한다 하더라도 신앙을 바로 믿어야 씁니다. 이론적(理論的)으로 딱 체계(體系)가 서야만이 우리 신앙이 동요(動搖)가 안 됩니다.

비록 좀 어렵다 하더라도 역시 불교는 불교, 기독교는 기독교의 원리를 딱 드러내야 씁니다. 그렇게 한다고 그러면은 성자(聖者)의 길은 같은지라 그때는 별로 차이가 없단 말입니다.

저는 정평 있는 도인(道人)들의 글을 아주 흥미 있게 봅니다. 본다 그러면은 서산대사(西山大師)나 사명당(四溟堂)이나 또는 보조국사(普照國師)나 원효대사(元曉大師)나 정평 있는 도인, 그런 도인들은 절대로 한 법문에 안 치우칩니다.

허나 미처 정평 있는 도인이 못된 어설픈 사람들, 어설픈 스님들, 그런 분들은 자꾸만 치우칩니다. 자꾸만 하나의 편벽되고 맙니다.

참선(參禪)이 옳다. 염불(念佛)이 옳다. 또는 주문(呪文)이 옳다. 화두(話頭)가 옳다. 뭣이 옳다 말입니다.

부처님 법문은 모두가 다 소중한 것입니다. 부처님 법문은 그때는 높고 낮은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문제는 무엇인가? 우리가 본질(本質)만 깨닫고서 본질만 바로 느끼고서 자기가 닦는 수행(修行) 방법에 따라서 자기 최선을 다하면 쓰는 것입니다.

염불(念佛)한 사람들은 내 본질(本質)이나 천지우주(天地宇宙)의 본바탕인 부처님을 분명히 느끼고서 염불만 하면 쓰는 것이지요. 화두(話頭)한 사람들은 또 마찬가지예요. 역시, 자기 본 생명(生命), 자기 생명의 본질, 우주의 본질인 부처님을 느끼고서 화두만 들면 쓰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마따나 지금 고도(高度)의 지성적인 사회입니다. 조금만 빗나가면 그냥 시야비야 이렇게 혼란스럽습니다. 여러분들 지금 우리 사회 한 번 보십시오.

따라서 우리는 먼저 간단명료하게 내 생명(生命)의 본질(本質), 즉 말하자면 제일원인 말입니다. 원자(原子)나 분자(分子)나 또는 개나 소나 돼지나 모두의 근본 본질, 이것이 바로 불성(佛性)입니다. 요놈, 딱 깨닫고 불성 가운데는 일체공덕(一切功德)이 다 포함 돼 있다. 이 놈 깨닫고 말입니다. 우리가 그걸 깨닫기 위해서 그걸 증명(證明)하기 위해서 닦으면 쓴단 말입니다.

먼저 원인만 깨달으면은 아까 말씀마따나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부르나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부르나 또는 ‘옴마니반메훔’을 부르나 또 하나님을 부르나 그땐 똑같습니다.

하여튼, 화두(話頭) 가운데는 아시는 바와 같이 똥마른 막대기 화두도 있습니다. 헌데 하물며 어떤 것이 공부가 아니겠습니까. 문제는 다만 근본 원리만 딱 잡아 우리가 들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부처님 불심은 심심미묘(甚深微妙)하고 동시에 천지우주(天地宇宙)는 아까 제가 말씀마따나 여불유인(與佛有因)이요, 원인도 우리와 더불어서 똑같고 말입니다. 또한 동시에 인연(因緣)도 역시 우리와 더불어서 똑같습니다.

가사 석가모니가, 석가모니(釋迦牟尼)같은 도인 그런 성자가 나와 남이 있는 것이 아니라, 비록 마호멧, 우리가 이슬람교를 믿으나 또는 하느님 믿으나 말입니다. 석가모니나 똑같은 인연이 있습니다.

어떤 누구도 딴 존재 모두가 같이 인연이 똑같이 있습니다. 다시 바꿔서 말 하면은 천지우주는 모두가 다 부처님과 같은 인연, 부처님과 같은 연이 있습니다. 더 바꿔서 말 하면은 천지우주는 바로 부처님뿐입니다. 단지 중생(衆生)이 어두워서 부처인 것을 못 보는 것뿐입니다. 이렇게 볼 때는 별로 싸울 거리가 없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공부하는 방법 때문에 모다 종파(宗派)가 이렇게 차별이 있습니다만 싸울 필요가 그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부르나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부르나 그때는 별로 하등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다만 근본만 느끼고서 아까 말씀마따나 자기가 하는 것에 자기 최선(最先)만 다하면 쓰는 것입니다.

물론 거기에서 공부를 좀 더 하고 싶은 분은 우리 범부(凡夫)가 성불(成佛)까지 가는 길목을 이렇게 다 한계를 알아야 쓰겠지요. 이런 문제는 전문적(專門的)인 문제니까 다시 공부해야 쓰겠습니다만 우리 불자님들,

오늘 우리 사부대중(四部大衆)의 또는 천지우주(天地宇宙)의 모든 연(緣)들이 다 합해서 장엄(莊嚴)스런 만다라(曼多羅)법회를 이룩했습니다.

특히 우리 여기 주지스님, 또는 특히 이 가운데서라도 특별히 애써주신 여러 가지로 도와주신 사부대중 분들에 대해서 승려의 한 사람으로 해서 심심한 사의를 표합니다.

지금 우리 불교(佛敎)는 앞서 제가 말씀마따나 혼돈(混沌)가운데 혼돈을 거듭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불교를 구제하기 위한 것은 역시 뭐라 해도 우리 스님네가 또는 스님네와 더불어서 우리 불교를 가장 바르게 믿는 지성적인 우리 불자가 앞서야 씁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정사, 이러한 절이 중심이 돼야 합니다. 비록 중심이 된다 하더라도 그렁저렁해서는 안 됩니다.

가장 청정(淸淨)한 절, 어느 누가 와서 보나 사회에서는 볼 수 없는 청정한 절, 그 다음에는 일반 사회인들이 감히 같이 할 수 없는 청정한 계율(戒律), 지금 같이 윤리(倫理)가 문란스러운 때가 있습니까?

따라서 일반 대중들은 미처 못 지킨다 하더라도 우리 스님네와 또는 불교를 선두에서 믿는 이끌어 갈 수 있는 그런 분들은 또 역시 가장 철저하게 윤리를 지켜야 씁니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계율(戒律) 안되겠습니까.

또는 그런 윤리나 수행하는 방법을 용맹정진(勇猛精進)해서 성불(成佛)을 위해서는 자기 신명(身命)을 바쳐야 씁니다. 이렇게 함으로서 만이 우리 불법은 사는 것입니다.

언제나 부처와 마구니, 또는 기독교 말로 하면은 하느님과 사탄 말입니다. 이러한 싸움은 항시 있습니다.

그러면 마구니나 악마나 사탄은 무엇인가? 이것은 인간의 욕망(慾望)입니다. 이것은, 성내는 마음 또는 욕심내는 마음 이것이 악마입니다. 요것이 오염이 돼서 생명이 되어 가지고 악마가 되는 것입니다. 이 싸움은 항시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성불(成佛)하고자 하는 부처가 되고자 하는 간절한 서원(誓願), 그 서원을 이루지 못 하면은 그때는 우리는 몇 만생, 몇 만생 뱅뱅 헤매고 맙니다.

우리는 지금 몇 백 만생을 헤매왔습니다. 지옥(地獄)으로 축생(畜生)으로 아귀(餓鬼)로 또는 사람으로 말입니다. 우리가 금생(今生)에 다행히 부처님 법 만날 때에 아까 말씀마따나 우리가 바로 못 닦으면 또 다시 죽어지면 지옥 아귀 축생 헤매고 마는 것입니다. 윤회(輪廻)하는 것도 한도 끝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살기 좋은 때, 또는 우리한테 정다운 진리(眞理)에 도전해 오는 여러 가지 안일함을 우리가 최파(摧破)하기 위해서라도 아까 말씀마따나 이런 절, 가장 청정한 절, 가장 계율 잘 지키는 절, 부처님 법을 위해 자기 생명을 내거는 그런 절, 이런 절 하나라도 더욱 더 빛내고 많이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아까 말씀마따나 우리 몸이 빛나고 우리 마음이, 우리 마음의 청기(淸氣)가 더욱더 훈향(薰香) 할라면은 부처님 이름, 부처님 공부에 대한 간절한 갈증(渴症), 이것을 순식간도 놓치지 말고 사무치게 공부하셔서 하루 빨리 윤회(輪廻)를 벗어나서 꼭 금생(今生)에 성불(成佛)하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오늘 법문을 마칩니다.



19841027-청화대선사 설법

19841027-? 촬영

20050609-본정 김영동 DVD작업

20080607-주안 한동일 워드작업


* 본 법문은 동영상 자막작업용으로 큰스님 말씀

그대로 정리한 글입니다.*